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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낭기의 관점] 온갖 비리 의혹에도 지지세 굳건한 '이재명 정치'의 비법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17일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대장동 배임·성남FC 뇌물' 관련 1심 2회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차기 민주당 대선후보가 될 가능성은 거의 100%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당 내외 지지세가 굳건하다. 그는 자기에게 닥친 어려운 상황을 지금까지는 용케도 잘 극복하고 있다. 국회에서 체포 동의안이 가결돼 구속될 위기에 처했지만 영장 심사 결과 기각돼 구치소 행을 피했다. 영장이 기각돼 오히려 정치적 입지가 강해졌다. 민주당 내에서도 그렇고 고정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그렇다. 지난 11일 실시된 서울 강서구청장 보선에서는 민주당 후보가 56%대 39%라는 큰 득표율 차이로 승리했다. 이 역시 이 대표가 유지하고 있는 굳건한 지지세의 반영이자 결과로 볼 수 있다. 이 대표는 현재까지 6개 사건 10개 혐의로 기소됐다. 앞으로 더 늘어날 수 있다. 수사와 재판을 받느라 검찰청과 법원을 쉴 새 없이 드나들고 있다. 우리 정치사에서 제1야당 대선 후보를 지냈고 현직 당 대표인 사람이 이런 상황에 처했던 적은 없다. 그럼에도 이 대표는 강고한 지지세를 유지하고 있다. 미스터리에 가까운 일이다. 그 이유가 뭘까? '정치와 도덕은 별개' <군주론> 그대로 윤석열 정부의 국정 운영 방향이나 방식에 대한 반감이 민주당과 이 대표 지지의 주요 원인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 민주당 지지세가 높아지는 현상은 자연스럽지만 반드시 이 대표 지지도도 높아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민주당 지지세가 강하더라도 이 대표 아닌 다른 사람이 당 대표를 맡고 있고 온갖 비리 의혹에 휘말려 있다면 그 사람이 그 의혹에도 불구하고 이 대표처럼 강한 지지세를 유지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결국 이 대표에 대한 강고한 지지세는 민주당 지지세와는 별개로 이 대표 개인의 요인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으로 봐야 한다. 어떤 요인이 작용했을까? 이 대표가 여러 비리 의혹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남다른 국정 운영 철학이나 리더십을 가졌기 때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그가 국민의 폭넓은 지지와 공감을 얻을 만큼 원대하고 체계적인 국정 철학을 제시했다고 보기 어렵다. 국민 마음을 한곳으로 모아 분열을 극복하고 국가를 다시 한번 부흥시킬 뛰어난 정치 지도력을 가졌다고 평가하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국정 철학이나 리더십 외에 다른 요인이 비리 의혹에도 불구하고 강한 지지세를 유지하게 하는 이유가 됐을 것이다. 그 요인으로 그의 독특한 정치 방식과 행태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이 대표는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정치를 하고 있다. 그런 정치 방식이 지지층과 일부 중도층에 먹혀들어 강력한 지지세를 형성하게 된 게 아닐까 한다. ‘현실주의적’이라고 한 것은 그의 정치 행태가 도덕이나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이익이 된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대표는 전형적인 마키아벨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스트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 행태를 가리킨다. 500년 전 <군주론>이라는 책을 쓴 이탈리아 정치가 마키아벨리에서 따온 말이다. 마키아벨리는 이 책에서 ‘정치인에게 필요한 최고 자질은 역경을 헤쳐나가는 능력’이라며 ‘그 능력을 발휘하려면 자비심, 신의, 인간성, 정직성, 양심 같은 도덕에 얽매여선 안 된다’고 했다. 이런 도덕을 좇다가는 험난한 세상을 돌파해 나갈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가능하면 그런 도덕을 갖춘 듯 보이게 하라’고 했다. ‘교활함과 속임수로 사람들의 환심을 사야 한다’고 했다. 그는 ‘그러나 필요할 때는 그 도덕과 정반대로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보통 때는 도덕적인 듯 행동하되 필요한 상황에서는 두 눈 딱 감고 도덕을 무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대장동 몸통은 윤석열' 역공 물론 여기에는 전제가 있다. 국가를 존망의 위기에서 구해내기 위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인 개인의 사리사익을 위해서 도덕을 경시해도 좋다는 게 결코 아니다. 그런데 이 말이 잘못 전해져 마치 자기 욕심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도 좋다는 말로 변질됐다. 마키아벨리는 교활함과 속임수의 사례로 몇 가지를 들었다. 그중 대표적인 게 ‘위대한 거짓말쟁이가 되라’와 ‘약속은 불리하면 지키지 말라’이다. 그는 거짓말을 하되 남이 거짓말이라고 여기지 않도록 교묘하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을 ‘위대한 거짓말쟁이라고 했다. 마키아벨리는 약속에 대해서도 자기에게 불리하거나 약속할 당시와 상황이 바뀌었다면 지킬 필요가 없다고 했다. 약속 위반을 그럴듯하게 정당화시킬 핑곗거리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고, 사람들은 이런 속임수에 넘어가기 쉽다고 했다. 이재명 대표는 대장동 사건이 터지자 ‘윤석열이 대장동 몸통’이라고 역공세를 폈다. 2011년 부산저축은행 불법대출 수사 당시 검사이던 윤 대통령이 대장동 자금책이자 대출 브로커인 조모씨의 부탁으로 대장동 대출 비리를 유야무야해 ‘결과적으로 대장동 사업의 종잣돈을 지켜줬으니’ 윤 대통령이 대장동 몸통이라는 주장이다. 윤 대통령이 조씨에게 커피를 타줬다는 점을 주요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당시 조씨를 수사한 검사는 윤 대통령이 아닌 다른 검사였고, 커피를 타준 사람도 검찰 직원임이 최근 드러났다. 설사 윤 대통령이 커피를 타 주고 불법 대출 수사를 유야무야한 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걸 갖고 ‘윤석열이 대장동 몸통’이라고 할 일은 결코 아니다. 흉악범이 날뛰게 된 것을 그 흉악범을 낳은 어머니 탓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도 이 대표는 아직도 그 주장을 펴고 있다. 그 결과 이 대표 지지자들에게 ‘대장동 몸통은 이재명이 아니라 윤석열’이라는 믿음을 심어줬다. 중도층 사람들에게는 ‘이재명이 대장동 몸통’이라는 인식을 흐리게 만들었다. 아무리 거짓말이라도 자꾸 들으면 솔깃해지는 게 사람들 마음이다. 법정서 측근 끌어안는 모습 연출 이 대표는 지난 6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불체포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지난 8월 대장동 사건 등으로 검찰 수사를 받으러 가면서는 ‘“영장을 청구한다면 제 발로 (걸어가) 영장 심사를 받겠다”고 또다시 불체포 특권 포기를 천명했다. 그러나 막상 영장이 청구돼 국회에서 체포 동의 여부를 투표하게 되자 민주당 의원들에게 부결시키라고 했다. ’윤석열 검찰의 정치공작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불리하면 약속은 안 지켜도 되고 그 핑곗거리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마키아벨리스트 방식 그대로이다. 이 대표는 인간적 면모를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지난 6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대장동 사건 등을 다룬 공판에서였다. 이 대표는 재판이 끝날 무렵 피고인석에 나란히 앉은 정진상씨(전 민주당 대표실 정무조정실장)에 대한 ‘신체 접촉 허가’를 재판부에 요청했다. “(정진상씨의) 보석 조건 때문에 제가 전혀 접촉할 수 없다”며 “재판이 종료되면 대화하지 않을 테니 신체접촉을 할 수 있도록 부탁드린다. 한번 안아주고 싶다”고 했다. 재판부가 “그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고 했고, 이 대표는 재판이 끝나자 정씨의 등을 두드려주고 끌어안은 뒤 악수했다. 재판부가 이 대표 요청을 들어준 것은 부적절하다. 사사로움에 이끌리는 듯 보여 재판의 공정성을 의심받을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이 대표도 이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대표는 정씨를 안아줬다. 왜 그랬을까? 측근인 정씨에게 인간적인 미안함을 정말로 갖고 있어서일 수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대표의 속마음이 어떻든 이 대표가 자비롭거나 인간적인 모습을 정씨와 지지자들에게 보였다는 점이다. 그런 미덕을 과시하는 것만으로도 이 대표는 정씨와 지지자들의 환심을 살 수 있다. 정씨에게는 끝까지 이 대표에 대한 의리를 지키겠다는 마음을 갖게 하고, 지지자들에게는 ‘인간적인 이재명’이라는 인상을 심어 줄 수 있다. 다음 대선 전 혐의 하나라도 유죄 확정되면 '끝' 이 대표의 정치 방식은 최소한 현재까지는 통하고 있다. 그를 둘러싼 여러가지 비리 의혹에 대해 지지층에게는 검찰 수사가 조작이고 억지라는 믿음을 심어주고 있다. 이는 지지층의 지지를 더욱 강화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중도층에는 검찰 수사의 정당성에 대한 의심을 키우게 했다. 이는 이 대표에 대한 반감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낼 수 있다. 이 대표는 마키아벨리스트식 정치로 비리 의혹을 돌파해 나가며 지지층의 지지는 더욱 굳게 하고 중도층은 한발짝 더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그 결과 나타난 게 강고한 지지세이다. 문제는 이 대표 방식이 재판에서도 통할 것이냐이다. 이 대표는 10개 혐의 중 어느 하나에서라도 유죄 판결이 확정되면 대선 출마가 불가능해진다. 피선거권이 박탈되기 때문이다. 대선 출마가 불가한 유죄 확정 시한은 차기 대선일인 2027년 3월 3일이다. 이 대표가 대선 후보로 선출되더라도 선거일 이전에 유죄가 확정되면 그 순간부터 피선거권이 박탈된다. 윤석열 대통령 임기 동안 대법원장과 대법관 13명 등 전체 14명 중에 1명을 뺀 전원이 교체된다. 교체되는 13명 중 10명은 2024년 12월까지, 3명은 2026~2027년에 바뀐다. 2024년 12월이면 차기 대선으로부터 대략 2년 3개월 전이다. 최소한 대선 전 2년 3개월은 윤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이 과반수를 이루게 된다. 과반수이면 기존 판례도, 하급심 판결도 바꿀 수 있다. 1, 2심에서 이 대표에게 무죄가 선고되더라도 대법원에서 뒤집힐 수 있다. 이 대표가 마키아벨리스트식 정치로 굳은 지지세를 유지하는 데는 성공하고 있지만, 앞으로의 운명은 판사 손에 달려 있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본부장 ▶원주 한라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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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낭기의 관점] 무당층 투표 심리로 내년 4월 총선을 전망해 보면
단식 중단 촉구하는 민주당 의원들 (서울=연합뉴스) 한상균 기자 = 15일 국회 더불어민주당 대표실에서 의원들이 이재명 대표에게 단식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내년 4월 10일 실시되는 국회의원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벌써부터 총선 결과에 대한 관심이 크다. 윤석열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번에는 국민의힘이 더불어민주당을 이겨 국회 권력을 뺏어 올 수 있을지를 주시한다. 윤석열 정부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번에도 더불어민주당이 국민의힘을 이겨 윤석열 정부를 비판하고 견제해 줄 수 있을지를 주시한다. 윤 대통령은 2022년 5월 취임 이후 국회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의 벽에 걸려서였다. 국민의힘이 대통령 선거에서는 승리했지만, 국회 권력은 더불어민주당에 뺏긴 상황이다. 진정한 정권 교체는 내년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과반수를 차지하거나 최소한 제1당이 돼 국회 권력을 쥐어야 이뤄진다고 할 수 있다.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더불어민주당에 이기면 윤 대통령은 국정 운영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 국민의 재신임을 받은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패배하면 국정 운영의 동력을 잃게 된다. 곧바로 레임덕에 빠질 수도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더욱 기세등등해질 것이다. 내년 총선은 윤 대통령이 진정한 정권 교체를 이루느냐, 아니면 레임덕에 빠지냐를 결정하게 된다. 그러니 벌써부터 총선에 관심이 클 만도 하다. 총선 결과를 예상하기는 어렵다. 다만 선거를 좌우할 중요 요인을 토대로 현재의 여야 상황을 살펴보면 선거 결과를 가늠할 수는 있다. 선거를 좌우할 중요 요인의 하나로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은 유권자들의 ‘정당 충성도’이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중 유권자들의 충성도가 더 높은 정당이 어디냐 하는 문제다. 특정 정당에 충성도가 높은 유권자는 그 정당에 ‘묻지 마’ 투표를 하게 된다. 그 정당에서 무슨 문젯거리가 발생하든, 그 정당의 후보가 어떤 인물이든 관계 없이 그 정당을 지지한다. 민주당 지지자는 ‘이재명 사법 리스크’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국민의힘 지지자는 ‘윤석열 역술인 논란’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정당 충성도는 과거 선거에서도 영향을 미쳤지만 이번에는 더욱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정치적 양극화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심하기 때문이다. 국민의힘·더불어민주당, '정당 충성도'는 비슷 그럼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충성도는 어떤가?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나타난다. 여론조사기관의 정당 지지도 조사 결과가 이를 보여준다. 한국갤럽이 지난 12일부터 14일까지 전국 만 18세 이상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정당 지지도는 국민의힘 33%, 더불어민주당 32%, 정의당 5%로 나타났다. 지지하는 정당이 없는 무당층은 29%였다. 다른 여론조사기관 조사에서도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각각 30% 안팎의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고, 무당층이 30% 내외를 차지하고 있다. 정당 충성도만으로는 승패를 가리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다만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의 결집도에서 차이가 날 수는 있다. 결집도가 더 강한 정당이 선거에 유리할 것임은 물론이다. 결집도에 영향을 미칠 요인은 여럿이겠지만,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흡인력이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다. 흡인력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다. 두 사람 중 누가 더 흡인력이 클까? 충성파들을 결집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있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충성파가 아닌 무당파의 움직임이다. 이들이 어느 쪽으로 쏠리느냐에 따라 선거 결과는 결정적으로 달라진다. 역대 선거에서도 무당파의 표심이 선거 결과를 좌우했다. 이번에는 무당파가 어떤 선택을 할까? 그들의 투표 심리를 결정하는 요인에 현재의 여야 상황을 비추어 보면 가늠할 수 있다. 무당층은 특정 정당에 대한 충성도가 거의 없는 사람들이다. 선거 때마다 지지하는 정당이 다르다. ‘묻지 마’ 투표를 하는 게 아니라 나름대로 ‘계산해서’ 투표를 하기 때문이다. 그 계산하는 방식은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전망적’ 방식과 ‘회고적’ 방식이다. 전망적 방식이란 특정 정당의 공약과 정책을 꼼꼼히 살펴 어느 당이 국정을 주도하는 게 더 좋을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회고적 방식이란 지금까지 어느 당이 더 잘했거나 못했는지를 따져 잘못한 쪽에 책임을 묻는 것이다. 전망적 투표가 미래의 가능성을 중시한다면 회고적 투표는 과거의 성과를 중시하는 셈이다. 무당층, 전망적 투표와 회고적 투표 전망적 투표는 당별 주요 정책과 후보의 자질 등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갖고 있어야 할 수 있다. 그래서 전망적 투표는 평소 정치에 관심이 많고 정치 현장의 흐름에 밝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회고적 투표는 별다른 정치 지식과 정보 없이도 가능하다. 누가 더 잘했거나 못했는지만을 따지면 돼 단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에 큰 관심이 없는 일반 대중 사이에서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현 정부가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탈원전 정책 폐기, 4대강 보 보존, 사드(SAAD, 고고도미사일) 배치 정상화, 한미 동맹 복원과 한일 관계 정상화, 대화보다는 힘에 의한 평화 같은 사안은 회고적 투표보다는 전망적 투표에 영향을 미칠 요인들이다. 이 정책들은 과거 문재인 정부가 폈던 정책을 뒤집는 것들이다. 현 정부·여당은 자기들 정책이 옳다고 주장하고 더불어민주당은 현 정부·여당 정책이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무당층이나 중도파 유권자들은 현 정부·여당 주장과 더불어민주당 주장 중 어느 쪽이 더 자기 입장에 맞고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될지를 판단하고 그 결과에 따라 투표할 것이다. 이들이 판단하는 근거는 양측이 서로 주장하고 반박하는 내용들이다. 정부·여당과 민주당 중 누가 더 정책의 타당성을 잘 설명해 무당층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을 것이냐가 관건이다. 누가 더 잘했거나 못했는지를 평가하는 회고적 투표에서는 표심을 가르는 중요 요소로 흔히 경제적 성과가 꼽힌다. 경제가 좋으면 현 정부에 유리하고, 나쁘면 불리하다고 한다. 미국 선거에서도 ‘바보야, 중요한 건 경제야!’가 핵심 정치 구호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경제 상황이 표심에 영향을 미칠 것임은 물론이다. 특히 경제 상황이 나쁠 때는 그 영향이 커질 것이다. 그러나 평소 수준이라면 경제 상황이 미치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을 수도 있다. 나아가 경제 상황이 투표 심리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은 유권자들의 의사 결정 심리를 너무 단순화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경제적 성과를 따진다는 말은 유권자들이 객관적 자료에 근거해 합리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유권자들이 선거에서 꼭 그렇게만 판단하는 것은 아니라는 미국 정치학계 연구 결과도 많다. 오히려 ‘감정적’ 또는 ‘정서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더 크다고 한다. 이성적으로 따져서 평가하기보다 마음이 가는 대로 평가한다는 말이다. 정책 타당성과 정서적 호소력이 관건 마음을 움직이는 데 영향을 미칠 만한 사안들은 무엇일까? 이재명 대표의 경우 검찰 수사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이 대표 수사를 잘했다고 평가할 것인가 잘못했다고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 대표 수사를 민주당은 ‘정적 제거’라고 주장한다. 국민의힘은 ‘도적 제거’라고 주장한다. 정적과 도적 중 어느 쪽이 무당파 유권자들의 느낌이나 감정에 더 들어맞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정적 제거라고 느낀다면 이 대표 수사를 잘못한 일이라고 평가할 것이고, 도적 제거라고 느낀다면 잘한 일이라고 평가할 것이다. 이 대표의 단식도 무당파 유권자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칠 요인이다. 이 대표 단식을 ‘처절한 몸부림’이라고 긍정적으로 느낄 수도 있고, ‘뜬금없다’고 부정적으로 느낄 수도 있다. 전자라면 이 대표가 단식하길 잘했다고 평가하고 후자라면 잘못했다고 평가하게 된다. 이 대표가 단식에 나서면서 내세운 명분 같은 객관적 사실보다 단식 그 자체를 어떻게 느끼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윤 대통령의 경우 틈날 때마다 ‘자유’ 를 강조하는 것이 유권자들 마음에 영향을 미칠 만한 요소다. 자유의 강조를 개인이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한다고 긍정적으로 느끼면 좋게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경쟁 만능주의나 성과 지상주의를 강요하는 주장이라고 부정적으로 느끼면 좋지 않게 평가할 것이다. 윤 대통령의 언어 표현도 유권자들 마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를 들면 ‘카르텔’ 같은 말이다. 윤 대통령은 비리로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그 이익을 지키기 위해 자기들끼리 똘똥 뭉치는 행태를 카르텔이라고 한다. 유권자들은 이 말을 논리적이고 사태의 핵심을 짚은 말이라고 느낄 수 있다. 반대로 ‘카르텔’이 뭔가 하고 생소하게 느낄 수도 있다. 전자냐 후자냐에 따라 윤 대통령이 ‘카르텔을 척결해야 한다’고 한 것을 잘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고 잘못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앞으로 여야는 서로 무당파를 잡으려고 총력전을 펼칠 것이다. 무당파를 잡으려면 전망적 투표나 회고적 투표를 하는 그들의 투표 심리를 파고들어야 한다. 정책 측면에서는 누가 더 그 당위성을 국민에게 잘 설명해 동의를 얻을지, 말과 행동에서는 누가 더 국민의 느낌이나 감정을 자극해 마음을 움직일지가 핵심이다. 내년 총선 결과는 이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본부장 ▶원주 한라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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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낭기의 관점] (건국의 재조명) ③대한민국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 ?
1948년 8월15일 중앙청 앞에서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이 열리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 대한민국을 이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진보·좌파 진영 일부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한민국은 친일·분단 세력이 세운 반쪽짜리 국가라며 정통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올해 8월 15일로 대한민국 수립 75년을 맞지만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로 여기는 일부의 역사 인식은 여전하다. 그 인식은 정치·외교·안보·경제·교육 등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갈등과 분열과 대립의 씨앗이 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유엔이 인정한 한반도 유일 합법 정부이다. 유엔은 1948년 12월 12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총회에서 대한민국을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라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그 해 5월 10일 북한을 제외한 38도선 이남 지역에서 유엔 감시 아래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다. 당시 38도선 이북 지역인 북한은 소련의 거부로 유엔이 감시하는 국회의원 총선거 실시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하고 여기에서 선출된 국회의원들이 헌법을 제정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을 세웠다. 유엔은 이렇게 출범한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선언한 것이다. '친일파가 세운 남한 단독 정부'로 깎아내려 그러나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유엔 결의문 내용을 자의석으로 해석한다. 이명박 정부 때 중학교 역사 교과서 집필기준을 놓고 일부 국사학자들이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으로부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받았다’는 구절 가운데 ‘한반도의 유일한’이라는 부분을 빼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엔 감시 아래 선거가 실시된 지역은 38도선 이남뿐이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한반도 전체를 대표하는 유일 합법 정부가 아니라 38도선 이남인 남쪽 지역만을 대표하는 합법 정부라는 주장이다. 이들 주장대로 하면 38도선 이북의 북한 지역을 대표하는 합법 정부는 김일성이 세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북한도 남한과 대등한 합법 정부가 되는 것이다. 사실 북한 공산주의 세력은 남한에 앞서 1945~1947년에 소련 주도 아래 단독 정권 수립 준비를 단계적으로 해왔다. 1945년 10월 28일 북한 정권의 ‘태아’라고 할 수 있는 5도행정국을 창설했다. 1946년 2월 8일에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실질적인 공산 단독정부를 출범시키고 정규군인 ‘인민군’을 창설했다. 소련은 1947년 말에는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까지 정해 줬고, 1948년 2월에는 김일성 정권 수립에 사용할 헌법안까지 작성했다. 마침내 1948년 9월 9일 북한 최고인민회의에서 북한 헌법을 통과시켜 김일성 독재정권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웠다. 그럼에도 좌파 진영 측 인사들은 남한이 대한민국이라는 단독 정부를 세우는 바람에 ‘통일민족국가’ 수립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 단독 정부가 수립되지 않았으면 남북 통일 국가가 수립될 수 있었을 텐데 대한민국이 태어나는 바람에 남북이 분단됐다는 식이다.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로 보는 인식은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문재인 대통령은 2020년 4월 4·3 사건 72주년 추념식에서 "누구보다 먼저 꿈을 꾸었다는 이유로 제주는 처참한 죽음과 마주했고, 통일 정부 수립이라는 간절한 요구는 이념의 덫으로 돌아와 우리를 분열시켰다"고 했다. 그는 "교과서에 4·3이 '국가 공권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임을 명시하고, 진압 과정에서 국가의 폭력적 수단이 동원됐음을 기술하고 있다"며 "뜻깊다"고도 했다. 4·3 사건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반대해서 일으킨 무장 폭동을 군경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희생자가 다수 발생한 사건이다. 문 대통령이 ‘누구보다 먼저 꿈을 꾸었다’고 한 건 대한민국 정부가 아닌 남북 통일정부 수립을 꿈꿨다는 말일 것이다. 4·3 사건에서 민간인 희생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반대한 남로당 행위는 비판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은 남로당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이승만 정권의 '국가 폭력'은 강조하면서 정작 남로당의 책임은 거론하지 않았다. 일부 좌파 인사들이 유엔 결의문까지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폄하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친일파가 ‘미국 점령군’의 지원 아래 대한민국을 세워 일제시대 이래 계속 지배체제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인민’이 주인인 나라가 아니라 지주와 고위 관료 등 친일파가 주인인 나라라는 주장이다. 대한민국을 반쪽짜리 분단 국가이자 친일파가 지배하는 국가로 보니 대한민국을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 빼라는 사람들도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했던 시대"라며 "분열의 역사" "패배의 역사" "굴욕의 역사" 라고 주장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경기도지사 시절인 2021년 7월 1일 대선 출마를 선언한 뒤 고향인 경북 안동의 이육사문학관을 찾아가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의 정부 수립 단계와는 달라 친일 청산을 못하고 친일 세력들이 미(美) 점령군과 합작해서 다시 그 지배 체제를 그대로 유지했지 않으냐"라면서 "깨끗하게 나라가 출발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노무현 대통령이나 이 대표의 말에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다. 그러나 그런 인식의 연장 내지 반영이 아니라고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고 부정적으로 보는 인식은 우리 사회 여러 부문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남북 분단의 책임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게 지우며 이승만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게 그 대표적 사례의 하나다.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추앙하기는커녕 분단의 원흉으로 몰아간다. 따지자면 김일성에게 분단 책임이 더 크다. 그런데도 김일성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자유민주주의’ 논란도 반(反)대한민국 역사 인식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2007년 노무현 정부 때 마련된 교과서 집필 기준에는 대한민국 체제를 ‘민주주의’로 기술했다. 이를 이명박 정부 들어서 ‘자유민주주의’로 바꾸었다. 이 과정에서 좌파 성향 학자들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에는 자유민주주의도 있고 인민민주주의나 사회민주주의도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합쳐진 말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기본권을 중시한다. 사적 소유권이나 시장 경쟁 역시 자유주의 정신의 한 반영이다. 자유민주주의는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점과 함께 아무리 민주적으로 선출된 권력이라도 국민 자유와 기본권을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정신을 담고 있다. 반면에 사회민주주의는 사적 소유권과 자유 경쟁을 제한하는 사회주의 실현을 이상으로 하되 공산당식 혁명적 방법이 아니라 민주적 선거를 통해 추구한다는 게 핵심이다. 유럽 사회주의 정당들이 추구하는 이념이다. 인민민주주의는 북한이나 중국이 주장하는 체제로서, 노동자와 농민 등 소위 ‘무산 계급’의 독재를 말한다.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헌법 전문에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라고 해서 대한민국의 정치 이념이 자유민주주의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럼에도 좌파 진영에서 ‘자유’를 빼고 민주주의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뭐겠는가? 자유민주주의는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건국하면서 미국식 이념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승만과 대한민국을 부정적으로 보니 자유민주주의도 부정적으로 보면서 민주주의로 하자는 건 아닐까? 더욱이 북한은 인민민주주의를 지향한다. 자유민주주의를 재산 많은 일부 계층이 노동자와 농민 등 다수의 무산 계층을 착취하는 체제라고 주장한다. ‘민주주의’라고 하면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도 포괄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더욱더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닌가. 반(反)대한민국 인식은 외교, 안보, 대북 관계에서도 갈등의 요인이 되고 있다. 남한 단독 정부 수립으로 통일이 무산됐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이제라도 통일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주장은 대북 정책에서 압박과 제재보다 대화와 지원을 우선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한미동맹보다 ‘우리민족끼리’를 앞세운다. 문재인 정부는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임기 내내 지상 과제처럼 추구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6·25 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인 지난 7월 27일 국회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정전 70주년을 맞아 한반도의 불안정한 정세를 끝내고 항구적 평화 체제 구축을 위한 노력을 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오히려 '태어나길 정말 잘 한 나라' 반면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0일 유엔사 주요 간부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유엔사는 대한민국을 방어하는 강력한 힘”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북한은 지금도 유엔사를 한반도 적화 통일의 최대 걸림돌로 여기고 있다”며 “한반도 유사시 유엔사는 별도의 안보리 결의 없이도 회원국의 전력을 즉각적이며 자동적으로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고, 이것이 북한과 그들을 추종하는 반국가 세력들이 종전선언과 연계하여 유엔사 해체를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는 이유”라고 했다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이 이뤄지면 북한은 한미동맹 해체와 주한미군 철수, 유엔사 해체를 들고나올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북한은 1980년 이후 ‘고려연방제’를 주장하면서 ‘선결 조건’으로 △국가보안법 철폐 △공산주의 활동 보장 △미국·북한 평화협정 체결 협조 △평화협정 체결 후 주한미군 철수 △미국의 내정간섭 포기 등을 내걸었다. 대북 압박과 대화,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보는 눈이 좌파와 우파 진영 간에 이렇게 다르다. 그뿐이 아니다. 한·미·일 공조 강화냐 북·중·러 관계 개선이냐를 놓고도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외교 안보 문제를 둘러싼 이런 논란들도 그 연원을 거슬러올라가면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수립이 우리에게 얼마나 다행이었고 축복에 가까웠는지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세계적 위상이 보여준다. 경제는 세계 10위권에 올랐고, k-팝은 전 세계 젊은이를 사로잡는다. 신생 독립국에서는 보기 드물게 주기적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뤄지고, 모든 시민이 맘껏 자유를 누린다. 이 모든 것은 ‘자유’와 ‘민주’를 동시에 추구한 자유민주의 대한민국을 건국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회민주주의나 인민민주주의를 택했더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가 아니라 태어나길 정말로 잘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본부장 ▶원주 한라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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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낭기의 관점] 정치를 '죽이는' 윤석열·이재명의 말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사진=연합뉴스) 정치는 말(言語)로 한다고 했다. 말로 따지고 협의하고 토론해 갈등을 해결하고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을 정한다는 뜻이다. 정치에서는 그만큼 말이 중요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나 윤석열 대통령의 말은 소통과 토론의 정치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어렵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최근의 대표적인 사례가 이 대표의 ‘핵 폐수’와 윤 대통령의 ‘킬러 문항 배제’ 발언이다. ‘핵 폐수’는 상황을 극단으로 몰고가는 말이다. ‘킬러 문항 배제’는 핵심이 정확히 드러나지 않는 모호한 말이다. 지금 한국에서 정치다운 정치가 행해지지 않거나 국정에서 혼란이 벌어지는 데는 이 대표나 윤 대통령의 적합하지 못한 말들에도 그 큰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 대표는 지난 6월 17일 인천 부평역 인근에서 열린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투기 반대 규탄대회’에서 “사실 오염수도 순화된 표현”이라며 “(국민의힘이) ‘핵 오염수’라고 (말한 민주당 인사를) 고발한다니 앞으로는 아예 ‘핵 폐수’라 불러야겠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이날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 회의에서는 "원전 오염수 투기는 최악의 방사능 투기 테러라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고 했다. 이재명 '핵 폐수', 오염수 문제 정치 논의 여지 차단 ‘핵 폐수’는 어떤 경우에도 사람 몸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 ‘방사능 테러’도 사람에게 절대로 행해져선 안 된다. 둘 다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핵 폐수나 방사능 테러라고 하는 순간 오염수 처리 문제는 더 이상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사람 목숨을 앗아갈 문제인데 오염수를 어떻게 처리하고 어떻게 방류하느냐를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무조건 방류를 못하게 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다. 논의 자체가 무의미하다면 오염수 처리 문제는 정치적 토론 테이블 위에 올려질 수가 없다. 정치에서 배제하고 차단할 수밖에 없다. 정치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다. 오염수 방류가 우리 해양과 수산물에 미칠 영향을 최대한 막으려면 어떤 조치를 해야 하는지, 일본은 물론이고 국제사회에는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를 두고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게 정치다. 그러자면 오염수 처리 문제가 협상과 타협,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대표 말대로 ‘핵 폐수’이고 ‘방사능 테러’라면 협상과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정치의 주제가 될 수 없다. 이 대표는 오염수 처리 문제에 관한 한 정치의 문을 굳게 닫아 잠근 셈이다. 실제로 민주당은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오염수 방류 계획이 국제 안전기준에 부합한다는 보고서를 발표하자 그 신뢰성을 부정하고 나섰다. ‘일본 맞춤형 보고서’ ‘일본 용역 보고서’라고 깎아내렸다. 국회의사당 본관에서 ‘오염수 방류 반대’를 주장하는 1박2일 농성도 벌였다. 우리 정부에도 비난을 퍼부었다. 이재명 대표는 IAEA 보고서를 ‘겸허히 수용한다’는 대통령실 발표를 두고 “혹세무민”이라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위협을 방치하는 정권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오염수 투기 방조하는 윤석열 정부 규탄한다” “윤석열 정부는 일본 대변인 그만하고 당당하게 반대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오염수 처리 문제에 관한 한 ‘윤석열 정권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하는 판이니 민주당이 정부 여당과 머리를 맞대고 오염수 처리 문제를 논의할 여지는 없다. 정치로 풀 가능성은 없다. 이런 정치 배제 또는 차단 상황은 이 대표가 ‘핵 폐수’ ‘방사능 테러’라고 하는 순간 이미 굳어진 것이다. 정부는 이 대표의 ‘핵 폐수’ 발언에 대해 “이러한 단어 선택은 우리 국민들께 과도하고 불필요한 걱정과 우려를 불러일으킨다”고 지적했다. 걱정과 우려를 불러일으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여야 간 또는 오염수 처리 문제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는 모든 사람이나 단체들 사이에 문제 해결을 위한 협의와 토론이라는 정치의 문을 잠가 버린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윤석열 '킬러 문장 배제', 핵심 빗나가 혼란 초래 윤 대통령의 ‘킬러 문항 배제’ 발언은 국정 혼란을 부른 대표적 사례다. 윤 대통령은 지난 6월 15일 이주호 사회부총리겸 교육부장관에게 “공교육 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분야의 문제는 대입 수능 출제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윤 대통령은 “과도한 배경 지식을 요구하거나 대학 전공 수준의 문항 등 공교육에서 다루지 않는 부분의 문제를 수능에서 출제하면 이런 것은 무조건 사교육에 의존하라는 것 아닌가”라고 했다고 대통령실이 말했다. 이주호 장관도 윤 대통령이 “공교육 교과 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문제는 수능 출제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했다”고 전했다. 윤 대통령 발언은 국어·수학·과학 등 여러 과목을 망라한 통합형 문제나 지나치게 어려운 ‘킬러 문항’을 내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됐다. 올해 수능은 ‘쉬운’ 수능이 될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쉬운 물수능’ ‘어려운 불수능’ 논란으로 이어졌다. 그러자 다음날인 16일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서면 브리핑에서 “윤 대통령은 어제 이주호 교육부 장관에게 ‘쉬운 수능’ ‘어려운 수능’을 얘기한 것이 아니다”라고 다시 설명했다. “공정한 변별력은 모든 시험의 본질이므로 변별력은 갖추되 공교육 교과 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분야는 수능에서 배제하라”고 지시했다고 했다. ‘쉬운’ 수능이 아니라 공교육 과정 내에서 출제하는 ‘공정한’ 수능을 강조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쉬운’ 수능이 아니라 ‘공정한’ 수능을 말한 것이라고 명확하게 설명해야 했다. 윤 대통령이 ‘과도한 배경 지식을 요구하거나 대학 전공 수준의 문항 등 공교육에서 다루지 않는 부분의 문제’를 지적한 것은 지나치게 어려운 수능이 아닌 ‘쉬운’ 수능이 돼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봐도 무리가 없다. ‘쉬운’ 수능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래 놓고는 쉬운 수능을 말한 게 아니라고 한다. 처음부터 명확하게 핵심을 말하지 않고 나중에 문제가 되면 ‘그게 아니라 이런 뜻’이라고 하는 게 문제다.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지난 6월 19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윤 대통령은 공정 수능을 강조한 것인데 민주당이 발언의 본질은 보지 않고 ‘물수능, 불수능’ 운운하며 국민 갈라치기와 불안감 조장에 나서고 있다”고 비판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사안의 핵심을 외면한 채 지엽말단을 갖고 정쟁을 벌이는 것은 국정을 논하는 합리적 자세가 아니다. 그러나 불명확한 발언으로 정쟁 빌미를 준 것도 잘못이다. 수능 개선을 통한 교육 개혁이라는 본질은 흐려지게 하고 엉뚱한 논란만 일으키지 않았는가.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공정한 수능에 대한 의지를 담은 지극히 타당한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을 교육부가 국민들에게 잘못 전달하면서 혼란을 자초한 것에 대해 엄중히 경고한다”고 말했다. 김 대표 말대로 교육부가 국민들에게 잘못 전달했다면 애초 교육부에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한 대통령실에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말은 정치의 기본' 아리스토텔레스 지적 새겨야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이라는 저서에서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은 인간만이 ‘언어’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른 짐승들은 고통이나 쾌락을 나타내는 ‘소리’만 낼 수 있지 언어 능력은 없다고 했다. 언어 능력이 없으니 소통과 토론이 불가능하고 힘과 힘으로 싸우는 약육강식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은 언어 능력이 있기에 무엇이 이롭고 해로운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표현하고 토론하고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짐승에게는 정치가 불가능하지만 인간에게는 정치가 가능하다고 했다. 말을 통해 무엇이 이롭고 해로운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논의하고 토론하고 판단하는 것이 정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어를 통해 소통하고 협의하는 능력을 정치의 기본이라고 한 것이다. 언어를 통한 소통과 협의의 정치가 가능하려면 언어가 그 본래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말을 신중하고 명확히 하는 것도 그 하나다. 쟁점 사안을 정치적 논의의 테이블에서 원천적으로 배제한다든지, 핵심을 빗겨나가 혼란만 불러일으킨다든지 하면 정치다운 정치가 이뤄질 수 없다. 이 대표에게는 ‘신중함’, 윤 대통령에게는 ‘명확함’이 요구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본부장 ▶원주 한라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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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낭기의 관점] 민주당, 조선시대 사림파를 반면교사 삼아라
요즘 더불어민주당 사람들이 정부 여당을 공격하는 모습을 보면 꼭 조선시대 유학자 정치세력인 사림파(士林派)가 당쟁을 할 때의 행태와 비슷하다. 나라 일을 당파적 입장에서만 보고, 본질을 따지기보다 지엽말단을 갖고 나라가 망하기라도 하듯 공세를 편다. 정책 논쟁을 벌이기보다 인신공격에 치중하고, 현실을 고려하기보다 명분을 앞세워 상대를 공격한다. 사림파는 민생과는 거리가 먼 당쟁으로 지고 샜다. 조선 사회를 속으로부터 멍들게 했다. 민주당이 그런 사림파를 따라 하고 있다. 일본 해상자위대 호위함이 한국 주최 다국적 훈련에 참가하려고 지난달 29일 부산에 입항했다. 그러자 민주당은 그 배에 욱일기(旭日旗)가 내걸려 있다며 “윤석열 정부가 국민의 자존심을 짓밟았다”고 했다. 군함이 외국에 입항할 때 자국 국기와 군기를 다는 것은 국제사회 관례다. 과거 일본과 싸운 미국이나 일본에 침략당한 중국은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국제 사회의 관례를 인정하고 존중했기 때문이다. 일본 함정이 욱일기를 달고 한국에 입항한 게 처음도 아니다. 1998년 김대중 정부 때와 2008년 이명박 정부 때도 해상자위대 함정이 한국 해군이 주최한 국제관함식에 욱일기를 달고 참여했다. 국제법적으로도 해군 함정은 치외법권 지역으로 인정된다. 해군 함정이 외국 영해에 들어가면 그 나라 국내법을 적용받는 게 아니라 함정이 소속된 나라의 법을 적용받는다. 일본 국내법은 자위함기 게양을 의무화하고 있다. 이처럼 욱일기를 단 일본 함정이 부산항에 입항한 것은 국제관례로나 국제법으로나 문제 삼을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국민 자존심’ 운운하며 윤석열 정부를 공격했다. 반일 감정 자극으로 지지층을 결속해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는 당파적 계산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국가 안보조차 당파적 이익 따져 민주당은 지난해 10월 실시된 한·미·일 대잠수함 훈련에 대해서도 “우리 군의 무엇이 모자라서 일본군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말이냐”고 공세를 폈다. “윤석열 정부가 굴욕 외교도 부족해 독도 근해에 자위대를 불러들였다”고 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극단적 친일 행위로 대일 굴욕 외교에 이은 극단적 친일 국방이 아니냐”고 주장했다. 한·미·일 대잠수함 훈련의 본질은 북한의 잠수함 공격으로부터 우리 안보를 지키기 위해 한국과 미국은 물론이고 일본까지 참여하는 3국 군사 훈련이 필요하냐 아니냐이다. 민주당은 이 훈련이 필요하지 않다고 본다면 3국 훈련 자체를 중단하라고 주장해야 한다. 아니면 당당하게 일본은 참여시키지 말라고 해야 한다. 대신 합리적 근거와 논리를 대야 한다. 그게 본질에 충실한 주장이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이 같은 본질 문제는 외면한 채 ‘독도 근해에 자위대’ ‘극단적 친일 국방’이라는 감정적 비난만 하고 있다. ‘독도 근해에 자위대’라고 했지만 실제 한·미·일 대잠 훈련은 독도보다 일본에 더 가까운 공해상에서 실시됐다. 본질을 외면한 것도 모자라 사실과 다른 주장까지 하고 있다. 반일 감정에 기대 당파적 이익을 얻으려는 속셈 외에 설명할 길이 없다. 국가 안보조차 당파적 이익에서 보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4월 미국을 방문해 의회에서 영어로 연설한 것을 두고 민주당 어떤 의원은 "한국 대통령이 우리말로 연설을 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대주의자"라고 비난했다. 미국에서 영어로 연설한 한국 대통령이 윤 대통령만이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그랬다. 다른 나라 정상도 미국 의회에서 자기 나라 말이 아닌 영어로 연설한 사례가 많다. 한국 대통령이니 우리말로 연설해야 한다는 주장은 시대착오적 명분론이자 우물 안 개구리식 주장일 뿐이다. 민주당은 윤 대통령이 작년 9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대통령 참모들에게 ‘ 바이든 쪽팔려’라고 했다는 말을 두고 ‘외교 참사’ 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바이든 쪽팔려’라고 한 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설사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공식 석상에서 한 게 아니고 자기 참모들에게 사적으로 한 발언이다. 그게 ‘외교 참사’라고 할 만큼 그리 중대한 문제인가. 기껏해야 가볍게 한번 짚고 넘어갈 지엽말단의 가십성 소재에 불과하다. 본질 외면하고 지엽말단 침소봉대해 공격 그런데도 민주당은 무슨 난리가 난 듯 침소봉대해서 공격했다. 오히려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측이 한국 측 설명을 듣고는 ‘잘 알겠으며 문제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당사자인 미국이 아무런 문제를 삼지 않는데 한국의 제1야당이 지엽말단 가십거리를 갖고 윤 대통령을 코너에 몰아넣으려고 문제 삼은 것이다.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작년 11월 캄보디아 방문 때 정상 배우자들의 앙코르와트 방문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고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 환자의 집을 방문해 어린이들과 사진을 찍었다. 민주당은 이를 두고 ‘외교 결례’라고 주장했다. 한 의원은 ‘빈곤 포르노 화보 촬영’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이 의원은 ‘김 여사가 사진 촬영 당시 2~3개 조명까지 설치했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그러자 주한 캄보디아 대사가 직접 나서서 반박했다. 그는 “지나치게 정치화하고 있다”며 “우리는 몸이 불편한 어린이들에 대한 김 여사의 지원에 매우 감사하고 있다. 김 여사의 친절함을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캄보디아 문화 경험 기회를 제공하는 ‘정상 배우자 프로그램’에 참석하는 게 의무는 아니다”라고 했다. 실제로 조현동 외교부차관은 국회에서 “당시 각국 정상과 국제기구 수장 배우자 11명 중 프로그램에 참여한 배우자는 다섯 분이고, 여섯 분은 각자 별도 일정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김 여사가 정상 배우자들의 공식 프로그램에 참석하지 않은 게 외교 결례도 아니고 외교 참사는 더욱 아니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정확한 사실도 파악하지 않은 채 무슨 큰 외교 실수라도 저지른 듯 공세를 폈다. 상대방을 공격할 수 있는 소재라면 사실 여부는 따지지도 않는다. ‘빈곤 포르노 화보 촬영’이라는 인신 공격성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조명 시설 설치’ 는 설사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문제 삼을 거리가 되지 않는 지엽말단적 일이다. 민주당의 이 같은 당파적 이익을 위한 헐뜯기식 공세는 조선시대 사림파가 즐겨 하던 행동이다. 사림파는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려고 이리저리 갈려 싸우는 사색당쟁을 벌였다. 동인이니 서인이니, 남인이니 북인이니,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는 당파로 갈려 권력투쟁을 벌였다. 나라가 나아갈 방향이나 민생을 구제할 정책을 놓고 논쟁한 게 아니다. 그저 경쟁 세력을 누르고 권력을 쥐기 위해 싸웠을 뿐이다. 당쟁 앞에서는 국익에 대한 고려도 없었다. 임진왜란을 앞두고 일본 정세를 염탐하러 함께 일본에 갔다 온 서인 황윤길과 동인 김성일이 선조에게 정반대 보고를 한 게 대표적 사례다. 서인 황윤길은 일본이 곧 침략할 것 같다고 보고했다. 반면에 동인 김성일은 그런 낌새가 없다고 보고했다. 그런데 서인 황윤길 보고대로 일본은 그 1년 뒤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왜 상반된 보고를 했을까? 지금으로 치면 당시는 동인이 집권세력이고 서인은 야당 세력이었다. 동인 김성일이 침략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한 이유는 침략 가능성에 대비해 국방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대부분 야당 세력인 서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인의 정신적 지도자인 율곡 이이는 진작부터 십만양병설을 주장하고 있었다. 200년 당쟁···조선 망하는 데 '일조' 이런 상황에서 동인 김성일이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면 이는 서인들의 정국 진단이 맞았음을 뜻하고 집권 세력인 동인이 국정을 잘못했음을 시인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 동인 김성일은 이런 결과를 막기 위해 침략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했다. 나라의 안위는 관계 없이 그저 경쟁 세력에게 권력을 뺏기지 않으려는 당파적 입장에서 국사를 바라본 것이다.(이덕일 저,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임진왜란 때 한양이 일본군에 점령되자 선조가 의주로 피난 갔다. 피난 길에 경기도 파주를 지나게 됐다. 파주에는 율곡 이이와 함께 서인의 정신적 지도자인 성혼이 살고 있었다. 선조는 “성혼의 집이 이 근처일 텐데 어디쯤일꼬”라고 물었다. 선조를 수행하던 동인 측 관리가 “저기 보이는 저 집”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근처에 살면서도 일부러 나와보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성혼은 뒤늦게 선조가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으나 왜군이 막아 선조를 보지 못했다. 동인은 거짓으로 꾸며진 이 일을 성혼이 죽고 100년이 지나서도 그를 공격하는 소재로 삼았다. (이덕일 저,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경쟁 세력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라면 거짓말까지도 공격 소재로 삼는 이 행태는 민주당의 ‘청담동 술자리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윤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장관이 서울 청담동에서 변호사들과 한밤중에 술 파티를 열었다는 사건이다. 이는 경찰 조사 결과 사실 무근으로 밝혀졌다. 당시 술자리에 있었고 사건을 제보했다는 첼리스트도 자기가 거짓말을 했다고 시인했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공식 사과 하지 않았다. 일부 친민주당 유튜브에서는 아직도 사실인 양 떠든다. 사림파는 조선 중기 이후 내내 당쟁으로 지고 샜다. 민생 개혁과는 무관한 싸움이었다. 사림파가 200년 이상 조정의 권력을 장악했지만 서양 식의 기술 발전은커녕 도로 하나, 다리 하나 놓은 게 없다. 그저 허황된 명분론과 공리공담에 기대 헐뜯기식 싸움만 했다. 실사구시와는 거리가 먼 싸움이었다. 그러는 사이 조선은 안으로부터 썩어들어갔다. 민생은 지칠 대로 지치고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졌다. 결국 조선이 망하는 큰 원인의 하나가 됐다. 더불어민주당이 할 일은 사림파를 따라 하는 게 아니라 반면교사로 삼는 것이다. 당파 이익 아닌 국가 이익 관점에서 지엽말단이 아닌 본질을 직시하고 명분보다 현실을 우선하는 실사구시의 자세로 정부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게 그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본부장 ▶원주 한라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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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낭기의 관점] 尹정부 1년 ② 국민 눈높이와 정서에 맞춘 소통 절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1주년을 맞아 한국갤럽이 지난 9∼11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윤 대통령 직무수행 긍정 평가는 35%, 부정 평가는 59%로 나타났다. 한국갤럽이 조사한 역대 대통령의 취임 이후 1년 동안 분기별 국정 지지율을 보면 윤 대통령은 29~54%다. 취임 직후 한때 54%로 반짝했을 뿐 줄곧 20%대 후반~30%대 초중반에 머물러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 68~81%, 박근혜 전 대통령 42~60%에 비하면 한참 낮은 편이다. 취임 직후 52%를 기록했다가 이후 21~32%에 머문 이명박 전 대통령과 비슷한 수준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왜 그렇게 국정 지지도가 낮을까? 이번 취임 1주년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그 이유를 추정할 수 있다. 부정 평가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요인은 외교였다. 32%나 됐다. 그러나 외교에 대해서는 긍정 평가도 35%나 됐다. 최근 한·일, 한·미 외교를 놓고 더불어민주당은 ‘호갱 외교’, 국민의힘은 ‘국익 외교’라고 서로 격렬한 공방을 벌였다. 외교가 긍정이나 부정 평가의 가장 큰 요인이 된 것은 이런 일시적인 상황 탓으로 보인다. 일시적으로 쟁점이 된 외교를 윤 대통령 부정 평가 이유를 분석할 수 있는 주요 요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낮은 국정 지지도···'독단적·소통 미흡'이 큰 요인 그렇다면 무엇이 주요 요인일까? 이번 조사에 따르면 ‘독단적·일방적’과 ‘소통 미흡’이 각각 6%로 합치면 12%가 된다. ‘경제/민생/물가’ 12%와 함께 가장 높다. 윤 대통령 부정 평가의 가장 큰 요인은 일시적 현상인 ‘외교’를 빼고는 ‘독단적·일방적’과 ‘소통 미흡’, 그리고 ‘경제/물가/민생’인 셈이다. ‘경제/물가/민생은’ 어느 정부에서나 긍정 또는 부정 평가 요인으로 존재한다. 반면에 ‘독단적·일방적’과 ‘소통 미흡’은 대통령에 따라 다르다. 윤 대통령 부정 평가 요인으로 ‘독단적·일방적’과 ‘소통 미흡’이 최상위권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여러 면에서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번 조사에서 뿐만 아니라 평소 조사에서도 이 항목이 부정 평가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독단적·일방적’이나 ‘소통 미흡’은 국민에게는 거의 같은 개념으로 다가올 것이다. 야당 등 반대 세력과 협의하거나 국민 정서에 공감하거나 국민을 설득하거나 하는 게 부족하다는 뜻으로 여겨질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통합과 협치를 위한 공감과 설득의 부족이다. 통합과 협치의 최우선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다. 윤 대통령이 민주당 지도부나 민주당 소속 국회 상임위원장단과 만나 국정을 논의하고 협상과 타협을 한다면 그게 바로 통합과 협치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그런 일이 한번도 없었다. 그러니 국민 눈에는 ‘독단적·일방적’에 ‘소통 미흡’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을 윤 대통령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 처지가 큰 원인이 됐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지난 1년간 대장동 사건 등 여러 의혹으로 수사를 받아 왔다. 법적으로 말하면 형사 피의자 신분이다. 이 대표는 몇 차례나 윤 대통령과의 회담을 공개 요청했으나 윤 대통령은 응답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으로서는 아무리 제1야당 대표라고 하더라도 형사 피의자 신분인 이 대표를 만나는 게 껄끄러울 수 있다. 이 대표로부터 국정 협조를 받는 대신 그의 검찰 수사를 적당한 선에서 끝내기로 타협했다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다. 타협까지는 아니더라도 검찰에 ‘알아서 적당히 수사하라’는 신호를 주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재명 '형사 피의자 신분'이 협치 걸림돌이지만 대통령 입장에서 야당과 국정을 논의하고 협조를 받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불법과 타협하고 수사의 공정을 해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제1야당 대표가 형사 피의자 신분이라는 사실은 민주당에 뿐만 아니라 윤석열 정부에도 부담이자 협치와 통합의 걸림돌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 2일 정무수석비서관을 통해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에게 ‘대통령과 여야 원내대표 간 회동’ 의사를 전했다. 그러나 박 원내대표는 “대통령이 이재명 대표를 만나는 것이 먼저”라며 거절했다. 이 일은 이 대표가 윤 대통령의 통합과 협치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대표가 있는 한 이런 일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 대표가 걸림돌이라고 해서 윤 대통령의 ‘독단적·일방적’ ‘소통 미흡’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제1야당 대표와 만나 국정을 논의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국민과 직접 소통하고 국민을 설득하는 게 그것이다.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게 기자회견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지금까지 딱 한 번 기자회견을 했다. 취임 100일을 맞아 작년 8월 17일 한 게 전부다. 올해 신년 기자회견도 안 했고 지난 10일 취임 1주년 기자회견도 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지난 2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대통령실 스태프한테 취임 1주년을 맞아서 뭐를 했고 하는 그런 자화자찬의 취임 1주년은 절대 안 된다고 해놨다”며 “무슨 성과나 자료를 주고 잘난 척하는 그런 행사는 국민들 앞에 예의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기자회견이 자화자찬이나 하는 자리는 아니다. 국민이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하는 것, 대통령이 국민에게 설명하고 싶은 것을 알리는 자리다. 기자회견은 대통령이 국민과 공감하고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최상의 기회다. 기자들은 대통령이 듣기 거북한 질문도 한다. 국민 중에는 그런 질문을 바라는 사람도 있다. 대통령에겐 그런 질문일수록 자신의 입장을 알리고 설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런 질문에 진솔하게 대답하고 설명하면 대통령의 긍정적 이미지를 강화하고 부정적 이미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 최고의 소통 수단 기자회견도 하지 않아 윤 대통령이 최소한 한 달에 한 번 기자회견을 한다면 ‘독단적·일방적’ ‘소통 미흡’이라는 이미지를 씻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대통령이 얼마나 국민 정서와 공감하면서 설득력 있게 말하느냐가 중요하다. 국민과 정서적 공감을 못하거나 자기 주장을 강요하는 것으로 비치면 오히려 역효과만 낼 것은 물론이다. 실제 윤 대통령에게는 그런 측면이 있다. 한·일 관계 개선과 관련해 한 말이 대표적 사례다. 윤 대통령은 “100년 전의 일을 가지고 (일본에) '무조건 무릎 꿇어라'라고 하는 것은 저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이 말은 논리적으론 옳을 수 있다. 그러나 국민 공감을 받기는 어렵다. ‘일본에 사과와 반성을 요구하는 국민 마음은 이해하고 공감한다. 그러나 사과와 반성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일본과 관계를 끊으면 우리 국익에 더 해롭다는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었다. 그게 국민 정서를 헤아리며 할 말을 하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자유’를 강조했다. 많은 국민들은 자유의 소중함이나 가치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왜 지금 자유를 강조해야 하는지 얼른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자유가 소중하지만 지금이 자유 수호가 절실한 문제가 되는 상황이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유를 강조하는 시장 경쟁이 강자에게만 유리할 뿐 약자에게는 불평등과 양극화만 가져온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윤 대통령은 자유라는 추상적 가치만 강조했다. 자유가 무시되고 지켜지지 않아 국민이 실제로 어떤 고통을 당하고 불이익을 입고 있는지를 피부에 와닿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했다고 하더라도 부족했다. 그러니 국민이 공감하기 쉽지 않다. 지도자가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문제가 아무리 절실하고 중대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대중이 그것을 그런 문제로 느끼지 못한다면 정치적으로 효과적인 과제가 될 수 없다. 중도파·무당층 지지 확보가 최대 과제 이번 취임 1주년 여론조사에서 자신을 중도 성향이라고 응답한 사람 중 윤 대통령 국정 수행을 긍정 평가한 사람은 30%에 불과했다. 65%가 부정 평가를 했다. 지지 정당 별로 볼 때도 무당층에서 긍정 평가 20%, 부정평가 65%로 부정 평가가 압도적이었다. 보수라고 응답한 사람 중에는 긍정 평가 58%, 부정 평가 39%로 나왔다. 윤 대통령 지지 기반인 보수층에서도 부정 평가가 그렇게 높았다. 중도와 무당층에서 불신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보수층에서조차 압도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결과는 앞으로 윤 대통령이 풀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기존 지지자는 더욱 강력한 지지자로 만들고 무당층과 중도파는 지지자로 이끌어 내는 게 그것이다. 민주당 지지자나 진보층은 어차피 윤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다. 전통적 지지층의 지지를 강화하고 무당층과 중도파를 지지로 끌어들이는 데 필요한 게 국민 눈높이와 정서에 맞춰 소통하는 노력이다. 감성적 공감은 없이 논리에만 치우친 주장과 설득, 구체성을 곁들이지 않은 추상적 가치의 제시만으론 국민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국민 마음을 움직여야 국정 수행에도 성공할 수 있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본부장 ▶원주 한라대 특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