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며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글로벌피스재단에서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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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의 절차탁마] 노동과 음악의 단절
입춘이 지났다. 입춘이라고 해서 바로 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계절의 변환점인 지금이 가장 겨울다운 날씨일지 모른다. 오늘도 이곳 광주 일곡 현장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 공사현장에서 방진막 너머로 바라다보는 눈 오는 풍경이 진경산수화처럼 보인다. 하늘에서 눈은 소리 없이 소복하게 내리건만, 땅에서 눈을 밟는 소리는 소란스럽기만 하네. 雪は音無しで爽やかに降るが、雪を踏む世の音は騒々しい。-平作人 계엄과 탄핵정국으로 나라는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엄동설한임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도시 거리마다 증오의 구호와 함성으로 가득하다. 다들 구국의 심정으로 뛰쳐나왔겠지만 하루속히 진정되길 바랄 뿐이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빠짐없이 나타나는 것이 음악이다. 노래 자체가 감성에 호소하는 면이 강하기 때문에 모인 사람들이 함께 노래를 부르거나 들으면 공감과 결속력이 강해진다. 아마 이런 현상은 예술 가운데 특히 음악이 집단의 행위, 즉 함께 노동하는 가운데서 자연발생한 긴 역사적 유전자를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류 초기의 예술은 주술적인 또는 의식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 그 내용은 대개가 풍요와 다산을 염원하고 있다. 그러한 간절한 주술적 염원들을 영상화 한 것이 예술의 시작이다. 예를 들어, 고대 동굴 벽화나 조각품은 풍요와 다산, 그리고 자연의 힘에 대한 경의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 주술적 염원을 시각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사람들은 자신들의 소망과 염원을 보다 구체화하고, 그 힘을 빌려 현실에서 성취하고자 했을 것이다. 지금도 많은 예술 작품들이 인간의 내면 깊숙한 염원과 소망을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예술은 단순한 미적 경험을 넘어, 인간의 감정, 신념, 그리고 염원을 전달하는 강력한 매체라고 생각한다. 예술은 역사적으로 노동과 깊은 관계를 맺어 왔다. 노동의 고통과 피로를 해소하고,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노래와 춤이 활용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노동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음악이 존재해 왔다. 농경사회에서는 농사의 리듬에 맞춰 노동요를 부르며 일했고, 산업혁명기에는 공장 노동자들이 기계 소음 속에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음악과 문학을 만들었다. 산업혁명기 이전, 담배나 목화 특히 설탕을 만들기 위한 사탕수수 농장에서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의 노동요가 리듬, 블루스, 재즈 등으로 발전한 것처럼 노동 속에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장르의 음악이 태어났다. 예전에 마틴 루서 킹 목사의 행적을 따라가다가 미국 남부 멤피스에 간 적이 있다. 로큰롤(Rock and Roll)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적 고향이다. 당시 멤피스는 다양한 음악 장르가 공존하는 곳으로, 블루스, 로큰롤, 소울 음악과 더불어 컨트리 음악에도 기여한 바가 큰 곳이었다. 이곳에서 리듬앤블루스를 처음 들었다. 리듬 앤 블루스(Rhythm and Blues, R&B)는 20세기 초 미국 남부에서 시작된 블루스와 가스펠을 기반으로 발전한 음악 장르다. 리듬앤블루스(R&B)는 미국 남부 흑인 노예들이 그들의 고된 노동 속에서 불렀던 노래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들의 노래는 단순한 노동의 리듬을 넘어서 그들의 고통, 희망, 그리고 자유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노래는 나중에 블루스, 재즈, 소울 등의 다양한 음악 장르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처럼 예술(여기선 음악)은 노동의 과정에서 탄생하고 발전해왔다. 노동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과정은 인간의 창조성과 강인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이러한 예술의 힘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이런 노동과 예술의 관계가 단절된 것처럼 보인다. 특히 건설 노동 현장 같은 곳에서는 새로운 음악이 탄생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음악이나 미술 같은 예술적 표현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왜 그럴까? 예전에는 노동이 공동체적인 성격을 띠었지만, 지금은 개별적이고 기계적인 노동이 많아졌고, 지금은 노동이 생존권이 달린 절박한 상황도 아니고, 그래서 노동자들도 직접 예술을 생산하기보다는 소비하는 방향으로 바뀐 것일까. 아니면 예술이 밥 먹여주냐? 하는 본초적인 질문에 ‘아니다’라는 집단적인 깨달음이 있었던 것일까. 언젠가 60이 넘으면 남미 아르헨티나에 탱고(땅고)를 배우러 유학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생각은 아직도 유효하다. 탱고의 리드미컬한 음률과 여기 맞춰 춤을 추는 남녀의 춤은 너무 매혹적이다. 내 인생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에 적당할 거 같다.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서 노동자들 사이에서 시작된 탱고는, 초기에는 사교적인 춤이 아니라 노동자의 고단함과 외로움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탱고는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예술 형식이 되었다.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유럽,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에서 온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탱고는 그들의 문화가 혼합되며 탄생한 독특한 춤과 음악이다. 특히 이탈리아, 스페인 이민자들의 전통 음악과 아프리카 리듬이 결합되었고, 거기에 아르헨티나의 전통 음악인 밀롱가(milonga)와 하바네라(habanera)의 영향이 더해진 것이다. '사랑은 길들지 않은 새'라는 유명한 가사로 시작하는 하바네라는 조르주 비제가 작곡한 오페라 '카르멘'의 중요한 아리아 중 하나로 부르는 곡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많은 현대 음악 장르 특히 블루스, 재즈, 리듬 앤 블루스(R&B), 가스펠 그리고 탱고 등은 고된 노동에서 비롯된 감정의 표현물들이다. 당시 노동자들이 겪었던 고통, 저항, 생명력, 희망이 음악을 통해 표출되었고 이 음악들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렇다면 현대에는 왜 이런 종류 아니 변화된 노동현실에 맞는 새로운 장르의 음악이 등장하지 않는 걸까. 어느 날 104동에서 땜빵을 하며 세대를 돌다가 아주 감미로운 음악을 들었다. 기계음이나 파열음 같은 거친 소리만 가득한 건설현장에는 안 어울릴 거 같은 감미로운 클래식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현장에 카페가 생겼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찬 바람을 막기 위해 출입구에 설치해 놓은 비닐막을 제치자 거기엔 조적공이 우아한 음악을 들으며 벽돌을 쌓고 있었다. 물론 작업을 위해 설치한 라이트이긴 하지만 조명 빛이 빛나고 커피포트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의 작업 공간은 아늑했고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일하면 작업 능률도 좋아지고 무엇보다 피로감이 덜하다고 한다. 그는 내게 커피 한잔을 권했다. 따뜻했고 맛도 좋았다. 현재 건설 현장에서 새로운 음악 장르나 창의적 표현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만이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환경과 경제적 요인, 그리고 현대 노동의 특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흑인 노예들이 음악적 저항을 통해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낸 것처럼, 현재의 노동자들도 자기 표현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지만, 그들이 처한 환경에서는 그 표현이 나타날 수 있는 여건이나 장소가 부족한 경우도 많을 것이다. 제한된 범위에서라도 자기 표현의 자유로운 공간을 제공하면 건설 현장과 같은 힘든 노동 환경에서도 음악이나 문화적 창작이 나타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고, 또한 그들의 경험이 보다 문화적으로 존중받을 수 있을 것이다. 건설 노동자들이 문화 예술의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가 되기 위해서는 나는 무엇보다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적 교양은 단순히 학문적인 지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중요한 도구이기 때문에, 건설 현장과 같은 고된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인문학적 소양이 중요한 이유는 첫째, 자기 표현의 능력이 향상된다. 다양한 인문학적 분야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이나 감정을 더 깊이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이렇게 자기 표현을 통해 노동자들은 문화적 생산자로서 새로운 음악, 예술, 혹은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 둘째 사회적, 문화적 이해를 증진시킨다. 건설 노동자들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일하고 있다. 최근엔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늘었다. 인문학을 배우면 서로 다른 문화와 가치관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능력이 길러져, 협업의 질이 높아질 수 있다. 또한, 노동자들이 사회적 문제나 문화적 현상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할 수 있게 되면, 그들이 만들어내는 문화적인 생산물도 더 풍부하고 다층적이 될 수 있다. 셋째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의 정신적, 정서적 해소를 가져올 수 있다. 힘든 노동 환경에서 정신적 해소는 매우 중요하다.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면 문학이나 철학을 통해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거나, 미술이나 음악을 통해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이런 면에서 인문학 교육은 노동자들이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일할 수 있도록 돕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안전 교육과 인문학 교육의 결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현재 건설 현장에서의 안전 교육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안전 교육이 신체적 안전뿐만 아니라 정신적, 정서적 안전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면, 그 효과는 더욱 커질 것이다. 인문학적 교육을 안전 교육과 결합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첫째, 안전 교육 중에 감정 관리나 정신적 웰빙을 다루는 시간을 마련하면, 노동자들이 일상적인 스트레스나 고된 노동 속에서도 정신적으로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문학이나 철학을 통해 힘든 상황에서 어떻게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는지 배울 수 있다. 둘째, 건설 현장에서 팀워크가 중요한데, 안전 교육 시간에 소통의 중요성과 협력을 다루는 인문학적 접근을 도입한다면, 노동자들이 더 효과적으로 팀워크를 형성하고 갈등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안전 교육 시간을 통해 예술적 창작이나 자기 표현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좋겠다. 문학, 그림, 음악 등을 다루는 미니 워크숍을 열어, 노동자들이 창의적인 활동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나아가 그들이 새로운 문화적 생산자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건설 노동자들이 단순히 예술과 문화를 소비하는 존재가 아니라,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교육은 필수적이다. 국민 한사람 한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재능을 최대로 발휘토록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어쩌면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건설현장에서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면 이것이 우리 사회의 희망 아닐까.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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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의 절차탁마] 새해 벽두에 정리정돈의 의미를 찾아보다 .
2025년의 새해가 밝았다. 숫자 2025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자연수 0부터 9까지를 모두 더하면 45가 되며 이 45를 거듭 곱하면 2025라는 숫자가 나온다. 45의 4와 5를 더하면 9가 된다. 2025의 숫자를 다 더해도 9가 된다. 9라는 숫자를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 경지의 완벽수로 본다면 2025년은 새로운 세계를 맞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다하는 그런 해가 아닐까 생각한다. 새해 들어 고작 3일이 지났지만 지난 2024년은 너무 다사다난했다. 세계도 우리나라도 좋지 않은 일이 많아 혼란스러웠고 불안했다. 2025년 새해는 뭔가 새롭고 신선하고 청명한 한 해가 되길 바라본다. 이런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하며 아침 출근 때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은 청소부였다. 그는 남들이 출근하기 전 이른 시간에 길거리를 깨끗하게 청소해 놓는다. 청소는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다. 얼마나 신성한 일인가. 그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때를 씻겨준다는 사제보다 더 현실적인 우리 사회의 필수 공익요원이다. 개인적으로 2025년의 연두 표어를 ‘정리정돈整理整頓’으로 정했다. 이제까지 뭔가 많은 것을 한 것 같은데 결실은 미미하고 남는 게 없고 보람도 적다. 생각해 보면 필요 없는 것, 쓸데없는 것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았다. 보다 더 나은 앞으로의 삶을 위해서라도 정리와 정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정리’의 뜻은 일반적으로 버릴 것은 버리고 질서 있게 분류하여 필요한 것만 남기는 것을 말한다. 버린다는 것은 유형적인 물건의 폐기나 제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형적인 인간관계에서의 정리, 즉 헤어짐도 포함한다. ‘정돈’은 정리한 것들을 깔끔하고 조화롭게 재배치하거나 조직화하는 것이다. 즉 목적과 종류에 따라 위치를 변경하여 쓰기 편하도록 적재적소에 재 배치하는 행위를 말한다. 건설현장에서도 사고예방을 위해서는 정리정돈이 매우 중요하다. 자재가 널브러져 있고 전선이 꼬여 있는 곳에서 작업하면 주의력이 떨어지고 산만해져 사고 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정리정돈은 내 개인사만이 아니라 현장작업에도 꼭 필요한 덕목이 된다. 요즘 이런 덕목을 잘 지켜 자기 분야에서 어느정도 전문적 지식이나 기술을 보유한 사람을 덕후라고 한다. 덕후라는 말은 일본어 오타쿠(お宅)에서 유래된 단어로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나 활동을 깊이 탐구하는 사람을 칭하는 말로도 사용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오타쿠라는 일본 발음을 한국에선 德厚라는 한자로 음차해 ‘덕이 깊은 사람’이라는 의미로 치환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덕을 동아시아에선 이상적 인간상에 이르게 하기 위한 금욕적 노력의 성과를 떠올리는 ‘옳은 삶’을 향한 자기극복의 노력으로 보는 반면 서구에선 덕을 인간을 행복에 이르게 하는 ‘좋은 삶’을 향한 자기실현의 노력으로 본다는 것이다. 문제는 ‘옳은 삶’이라는 삶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덕을 쌓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다. 옳은 삶, 정의를 소리 높이 외치는 사람들일수록 일이 잘못되었을 때 죄책감 보다는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이다. 즉 절대자나 자기 양심에 비추어 죄책감을 느끼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하며 치부를 덮으려 든다는 것이다. 시골 건설현장에서 할석미장공으로 일하는 한 노동자가 국가와 세계를 걱정한다고 해서 얼마나 영향을 주겠으며, 사상과 철학을 논한다고 해서 그것이 얼마나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겠나 생각하면 나도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다. 인간은 사회구조와 환경의 영향을 받지만, 그 속에서 자아를 찾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 자신을 혁신하는 것이 사회 혁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가치와 목표를 명확히 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번잡하게 늘어놓는 나의 생활스타일과 인간관계를 포함한 생활환경부터 정리해야겠다 마음먹었다. 마감공정으로 전환되는 현장의 일을 위해서도 이제는 꼼꼼하게 일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整理整頓이라고 한자로 써보면 이 네 개의 한자어에는 엄청난 의미가 들어있다. 리理와 돈頓을 정整한다는 것이다. 유학의 이황과 이이의 이기논쟁과 불교의 지눌과 보우의 돈점논쟁을 정리하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것이다. 조선 유학은 사실 이기논쟁이다. 주리론을 주장하는 이황은 리를 만물의 본질로 보고 리가 기를 통제한다고 주장하며 도덕교육과 사회윤리의 틀을 제공했다면, 주기론을 편 이이는 기를 만물의 작동원리로 보고 기가 발하고 이가 따른다고 주장하며 현실문제해결과 실천적이며 개혁적 정책제시를 우선했다. 리를 사단으로 보고 기를 칠정으로 보는 사단칠정론의 논쟁은 조선의 성리학을 교조주의에 빠뜨려 새로운 사상유입을 차단했다. 한편 돈점논쟁이란 돈오와 점수의 논쟁이다. 불교에선 돈오頓悟라는 부처가 되기 위해 진심(眞心)의 이치를 깨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데, 다만 수행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가, 마음의 이치를 먼저 밝혀야 하는가에 관한 논의가 오랫동안 있어왔다. 보조국사 지눌은 깨달음 뒤에도 계속 수행이 필요하다고 설했고, 태고 보우는 한번 깨우치면 더 이상 닦을 게 없다고 했다. 깨우침이라는 것이 더 이상의 수행이 없는 상태를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엄청난 불교와 유학의 중심적 내용이 정리정돈이라는 말에 융화되어 있는 이 정리정돈을 신년도 내 덕목으로 삼겠다고 하니 나도 보통 노동자는 아닌 것이 틀림없다.^^ 각설하고 새해용 노트를 하나 준비했다. SNS를 통한 기록보다는 역시 종이에 직접 기록하는 것이 솔직하고 마음의 정리도 더 잘되겠다는 생각에서다. 매일 일기를 쓰는 것이다. 일일 계획- 실천- 결과- 반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일 활동 내용은 현장업무가 중심이 되지만 그 외에 독서와 글쓰기 그리고 운동이 포함되어 있다. 이를 통해 내 생활습관을 고치기로 했다. 일어나서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를 생각한다. 그것을 어떤 마음 가짐으로 보낼지도 생각한다. 화장실 사용부터 바꾸었다. 여러 명이 사용하니 금새 더러워진다. 더럽다고 불평하지 말고 내가 솔선해서 화장실 청소를 하기로 했다. 소변도 이제는 변기에 앉아서 하기로 했다. 앉아서 일을 보면 변기를 훨씬 깨끗하게 사용하게 된다. 출근은 차를 타지 않고 뛰어서 한다. 출퇴근을 뛰어서 하면 달리기를 따로 하지 않아도 된다. 그 시간에 독서 시간을 더 늘릴 수 있다. 식사전엔 감사기도를 하기로 했다. 감사히 먹으니 음식을 남기지 않게 되었다. 일을 끝내고 주변을 정리정돈을 하게 되니 일한 뿌듯함이 샘솟는다. 내 기술과 기능이 더 향상되는 거 같다. 짐에 돌아와서는 독서를 한다. 올해는 학위논문에 도전하는 만큼 노동환경과 안전에 관한 책을 더 읽게 된다. 주말에는 한 주를 돌아보며 반성의 시간을 가져본다. 그리고 개인적 성과를 체크해 본다. 앞으로 노동현장도 기술적 상상력을 갖춘 미학적 신체를 요구할 것이다. 인부들의 노령화 고령화는 노동의 정신화를 더 촉진할 것이다. 공부하지 않고 상상하지 않으면 뒤쳐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1위가 되겠다는 서열화는 사라질 것이다. 노동의 유희화가 실현되는 것이다. 상상력은 생산력이 되고 기술은 예술이 되며 꿈이 현실이 되는 것이다. 기술과 예술 그리고 인문학이 자유자재로 소통하고 융합되는 것이다. 그런 2025년이 되길 희망하며 나부터 정리정돈을 해보도자 한다.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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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의 절차탁마] 나만의 건설노동자 브랜드가 되기로 했다
날이 갑자기 추워졌다. 12월이 되었으니, 아니 겨울이 되었으니 날이 추워지는 건 당연한데도 추위에는 익숙하지 않다. 건설 현장에서 미장 일이란 것이 레미탈을 물에 개서 발라야 하기 때문에 아침나절에 일할 때는 손가락이 시려 몇 번이고 장갑을 벗어 손을 덥혀야 한다. 춥다고 몸을 움츠리기보다는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 몸에 좋다고 생각해 일하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요즘 연말이 다가오니 송년모임이나 동창회 관련 연락이 자주 온다. 나도 올해 고등학교 졸업 40주년 기념파티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언제나 청춘인 줄 알았는데 내 나이도 어느덧 60줄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내 의식과 행동은 아직도 미숙하고 의욕만은 청년 같지만 생물학적 나이는 곧 노인임을 알려주고 있다. 한국에서는 법적으로 65세부터 노인으로 대우한다. 이 법적 기준이 마련되던 1981년 당시 평균 기대수명은 67세였다고 하는데, 이런 기준에서 보면 현재 평균기대수명이 84.4세이니 노인 기준은 최소 80세는 되어야 하지 않겠나 생각한다. 어쨌거나 이번 기회에 내가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보고 앞으로 맞이할 40년은 어떻게 살 것인지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나는 이 세상에 무엇을 하려고 나왔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제법 일찍부터 인생 목표에 대해 생각해 봤지만 결론을 내지 못하고 그때그때에 맞추어 살아온 거 같다. 우선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삶의 궤적을 그려본다. 나는 아버지 덕분에 실제 나이보다 세 살이나 줄어 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아버지는 출생신고를 늦게 했다. 그래서 국민학교에 들어갈 때 학교에서 너무 어려 입학 불가라고 했지만 아버지의 간곡한 사정과 설명으로 겨우 입학했다. 두촌에서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는 집을 떠나 춘천에서 다녔는데 대학에 한 번 미끄러져 1년 재수를 하게 되어 실제로는 4년 다닌 셈이다. 대학에 들어가서 도중에 군대 갔다오고 해서 졸업하는 데 7년 걸렸다. 결혼하고 일본에 건너가 7년, 그리고 한국에 왔다가 다시 미국으로 왔다 갔다 하며 7년을 보내니 마흔 살이 되었다. 그동안에 아이를 3명이나 얻었다. 그후 북해도에서 평화네트워크 4년, 일한문화교류회에서 4년, 아프리카아시아난민교육후원회(ADRF)에서 4년, 글로벌피스재단에서 2년 그리고 현재 건설 현장에서 6년을 보내고 있다. 앞으로 삶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햇수를 보면 미등록기 3년- 초등 유년기 12년- 고등과정 4년- 한국, 일본, 미국에서 생활 21년, 그 후 4년 주기로 평화, 문화, 국제개발협력, 노동에 관여한 삶을 살고 있다. 아마 차원은 다르겠지만 후반기 삶도 이런 패턴으로 다시 살아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삶은 일직선으로 진행되어 온 거 같지만 생각해 보면 반복되는 측면도 있다. 나는 대학생활 내내 야학활동을 운영했다. 졸업 후에는 청소년 문화교실과 주부학교까지 운영하며 사회 변화에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여기서 교육은 피교육생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교사의 활동 자체가 매우 교육적이라는 것이다. ADRF 활동은 이 야학활동의 글로벌 버전으로 아프리카·아시아 저개발 국가 아이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지금은 잠시 교육 현장을 떠나 있지만 언젠가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 이번에 돌아가면 100만 교육봉사자 양성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싶다. 전 세계 누구나 이 프로젝트에 동참할 수 있다. 자기가 가진 재능과 지식을 어려운 사람,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가르치는 봉사를 하는 것이다. 장소, 시간, 교육 내용은 모두 봉사자가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다. 이 프로젝트 이름도 정했다. 에드볼룬(Edu-Volun)이라 이름 지었다. 이런 교육봉사자들이 전 세계에 100만명이나 움직이고 있다면 세계는 크게 변화하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이다. 나는 한류가 이런 면에서 큰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라 생각한다. 한류는 한국만의 문화콘텐츠가 아니라 하나의 인류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흐름이라 생각한다. K-팝 가수들의 볼룬티어 활동은 그 어느 때보다 영향력이 크다. 이들이 전 세계를 돌면서 교육 기회 확산을 위한 채리티 공연을 이어간다면 엄청난 호응이 일어날 것이다. 이와 연계해서 100만 엽서그림전시회도 생각하고 있다. 한 주제를 놓고 전 세계 100만명, 특히 어린이들이 참여하여 엽서에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여는 것이다. 이것은 평화와 인권과 자유를 위한 한목소리의 기도가 될 수 있고 외침이 될 수 있다. 이보다 더 큰 호소력이 큰 행사가 있을까. 모두 디지털문화에 익숙해 연필로 그리는 것이 익숙하지 않을 수 있지만 인간으로서 최소한 자기 생각을 이미지화해서 자기 손으로 직접 표현하는 데에는 엽서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할석 미장공으로 일하는 건설 노동자로서 이런 일을 어떻게 이루어갈 것인가는 향후 나의 과제지만 꿈꾸는 노동자로서 이것이 나의 삶의 목표다. 이 일을 위해 나는 일상에서 이런 준비운동을 하고 있다. 첫째는 할석 미장공으로서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내가 일한 곳에서는 절대 하자가 나오지 않을 것이며 누가 보더라도 깔끔하게 일을 잘했다는 평가가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일을 대충하면 계속해서 다시 손을 봐야 한다. 그것은 나 스스로도 일에 대한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한번 손을 대면 그것이 마감이라는 마음가짐으로 꼼꼼하게 일하는 것이다. 나는 독서하는 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일주일에 책 2권을 읽는다. 1년이 52주니까 1년이면 100권을 읽게 된다. 이 일을 10년 계속해야 겨우 1000권 읽는 것이다. 이번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씨와 더불어 올해의 작가상을 받은 사람이 개그맨 고명환씨다. 그는 독서를 통해 자신을 바꾸었다고 말했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을 현실로 증명해 낸 분이다. 우리 사회를 더 나은 사회로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물론 정치인들의 노력이 중요하겠지만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 스스로가 자신을 혁신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자기 혁신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역시 독서만 한 것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독서는 책을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글쓰기로 이어질 것이다. 언젠가 나에 대한 호칭이 작가로 바뀌었다. 몇 군데 칼럼을 쓰긴 하지만 그것으로 작가 타이틀이 붙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작가 타이틀이 맘에 든다. 그래서 일주일에 칼럼 1개씩 쓰기로 맘먹었다. 1년이면 52개 칼럼이 된다. 이 정도면 책 1권을 낼 수 있다. 그래서 매년 출판 기념회를 여는 것이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지금도 매일 일기 쓰듯이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기분에 따라 들쑥날쑥 이다. 자신을 너무 압박하는 것 같아 일주일에 2점 그리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취미가 부담이 되어서는 지속적으로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기 위해 약간의 여유가 필요함을 느꼈다. 이 그림으로 매년 전시회를 4회 연다. 최근엔 어찌된 영문인지 매년 해외에서 한 번씩 전시회를 열고 있다. 작년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었고, 올해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에 참가했다. 내년부터는 아프리카, 아시아 쪽에서 현지 아동들과 함께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나는 운동하는 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건설 노동 자체가 몸으로 하는 일이니 그 자체가 운동이라 할 수 있지만 튼튼한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운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지금도 출퇴근을 뛰어서 하고 있긴 하지만 좀 더 체계적인 운동이 필요하다. 매주 주말이면 10㎞ 달리기를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하프마라톤에 출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1년에 한 번은 풀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다. 이렇게 다져진 체격을 보디프로필 사진으로 남길 것이다. 소방공무원이나 경찰공무원들이 매년 보디프로필 사진을 찍어 달력을 만들어 배포하는데 나도 건설노동자를 대표해서 보디프로필 사진을 찍어 달력을 만들어 판매하는 것이 나의 목표이기도 하다. 건설 현장에 젊은 인력이 더 많이 유입되게 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좀 더 깨끗한 화장실과 샤워실을 갖추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현장에 체력단련실을 만드는 것이다. 안전한 환경은 튼튼한 체력을 만드는 것이 최상이다. 세 번째는 군대에 진중문고가 있듯이 건설 현장에도 현장문고가 있어야 한다. 노동자들이 쉬는 시간에 다들 잠자는 것만 원하는 것은 아니다. 휴게실에 인문서적과 안전, 자기계발을 위한 책이 있다면 안전교육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는 건설노동자도 각 개인이 탁월함을 보여줘야 할 때가 되었다. 건설 현장에서도 대중스타가 나와야 한다. 몸 좋고 얼굴 잘생긴 젊은이가 땀 흘리며 내 나라 건설에 혼신을 다하는 모습, 능숙한 외국어로 외국인 노동자들과 어울리며 함께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얼마나 보기 좋은가. 모험과 스릴을 느끼면서 고층에서 일하는 현장 모습은 어드벤처 장소가 되어 얼마든지 젊은이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 건설노동자들도 자기 명함을 가지고 퍼스널 브랜드 관리를 해야 한다. 자기 실력과 경험을 널리 알려야 자기 몫의 역할과 보수를 받을 수 있다. 이것은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한 동기부여가 될 것이다. 자신의 전문성을 높이는 이런 노력은 건설업의 장인이나 명장,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얻게 될 것이다. 퍼스널 브랜드 관리는 이렇게 자신감과 자존감을 높여줄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관리하는 힘을 준다. 그리고 더 많은 네트워킹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와 경력 발전에 도움을 줄 것이다. 노동 해방은 일하지 않고 편히 노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노동 해방은 노동을 고통이나 고역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노동을 즐기는 것이다. 일하는 즐거움, 일하며 느끼는 보람, 성취감, 만족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의 생산성 향상과 나의 기술과 기능의 혁신 그리고 나의 지식능력과 재능을 무한히 확장시키는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40년이 그런 날이 될 것이라 생각하니 기분 품품이다.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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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의 절차탁마] 일하는 사람이 아름답다
영주에 내려와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일한 지 4개월이 지나간다. 그간 아파트도 많이 올라가 기본 골조공사는 이제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할석미장공으로 일하며 주로 땜빵 일을 하고 있다. 땜빵이라고 하면 하찮은 일, 혹은 다른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는 것으로 쉽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 남이 해놓은 것을 다시 수정해야 하는 것은 정밀하고 세밀하게 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나 정성이 곱절이나 든다. 그렇다고 일하고 나서 좋은 소리를 듣기보다는 핀잔을 듣기 일쑤다. 일한 결과가 좋으면 아무 말이 없지만 잘못되었을 경우엔 한 소리 듣는 공정이 바로 땜빵이다.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라고 알려져 있다. 신분제에 의해 사회가 유지되던 조선시대도 아닌 민주공화정의 이 시대에 선비가 어떤 의미를 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시대를 이끌었던 지식인의 이미지를 계승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있지 않나 생각한다. 주소 이전으로 영주시민이 되었으니 어찌 보면 나도 그 선비의 일원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영주에는 소수서원이라는 유명한 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1542년,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고려말 송나라 주자의 성리학을 들여온 유학자인 안향을 기려 그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세우고 유생들을 교육시킬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이 서원은 후에 퇴계 이황이 명종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왕의 친필을 받은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사액서원이란 임금이 서원의 이름을 지은 편액을 하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왕립학교가 되었다는 것이며 서원운영을 위한 여러 혜택을 받는다는 의미다. 사액서원이 되면 왕의 친필 현판뿐 아니라 서원 운영에 필요한 서적, 노비, 토지는 물론이고 면세, 면역 등의 혜택이 따른다. 때문에 소수서원 이후 세워진 전국의 서원들은 경쟁적으로 사액을 받기 위해 노력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영주지역에만 30여 개의 서원이 운영되었다. 이러한 학풍이 이 지역에 있어서였는지, 조선을 백성이 기본이 되는 나라, 민본을 국가이념과 비전으로 정립한 정도전이 영주 출신이다. 영주 시내를 관통하는 서천의 강변에는 지금도 삼판서고택이라는 집이 있는데 이 집이 바로 정도전이 나고 자란 곳이다. 이 집은 처음 정도전의 부친 정운경이 지은 집으로 그의 사위 황유정에게 물려주었고, 황유정은 또 그의 사위 김소량에게 물려주었는데 그의 아들 김담이 모두 판서를 역임했다는 데서 판서 3명이 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집 이름이다. 이렇게 걸출한 인물과 지식인들이 많았던 고장이라 그런지 세조 때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단종폐위를 반대하던 금성대군(세조의 동생)이 세조에 의해 순흥으로 유배를 오자 이 지역 선비들은 금성대군을 중심으로 단종복위운동을 펼쳤다. 안타깝게도 내부 고변으로 발각되어 역사는 이 일을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고 기록하는데 이 일로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당하며 영월로 유배를 가고 금성대군은 사약을 받는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순흥도호부는 폐부당해 현으로 강등되었으며, 여기에 가담한 순흥의 선비들은 모두 처형당하고 순흥 주민 및 인근 30리 지역 주민들에게도 혐의점을 뒤집어 씌워 많은 사람을 처형했다고 한다. 수많은 백성들을 학살하여 순흥부를 가로지르던 죽계천은 온통 피로 물들어 오랫동안 핏물이 10여 리를 흘러들어갔다고 하는데 당시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던지 지금도 영주시 안정면 동촌리는 피끝마을이라고 불린다. 이런 역사적 유래와 아픔을 머금은 이 지역 사람들은 남다른 교육열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 수를 기록한 ‘국조방목’에 의하면 이 지역 문과 급제자 수가 153명으로 전국 4위에 이른다고 한다. 당시 평안도의 평양이나 큰 도회지보다도 더 많은 지식인들을 배출했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소수서원이 처음부터 과거준비와 국가의 관리를 길러내기 위한 인재양성소 같은 관학적 기능이 강했을 것이다. 당시에도 ‘이 서원에서 공부하면 5년도 안되어 모두 과거에 급제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과거의 명소로 급부상했다고 한다. 현대판 스카이캐슬의 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는 역사적 아픔을 ‘입신양명’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지역민들의 욕구가 강했는지도 모른다. 선비란 도대체 무슨 말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사전적인 정의에 의하면 ‘학식 있고 행동과 예절이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관직과 재물을 탐내지 않으며 고결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선비란 인격과 지성을 갖춘 도덕적인 사람을 말한다. 조선의 선비들이 추구하는 길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한다. 입신양명(立身揚名)과 거경궁리(居敬窮理)다. 현재 입신양명(立身揚名)은 세상에 나아가 이름을 세상에 알린다는 뜻으로 약간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명성을 얻어 이름을 드높인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직장이나 사업, 예술과 창작, 사회적인 활동과 봉사, 개인의 성장과 자기계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용될 수 있는 말로 열심이 노력하여 얻어지는 명예로운 결과다. 셀럽이 되는 것이다. 입신양명의 과정이 바로 거경궁리다. 거경(居敬) 은 항상 몸과 마음을 삼가고 바르게 가지는 내적 수양이라 할 수 있다. 궁리(窮理)는 사물의 이치를 널리 파악하여 정확한 지식을 얻는 것으로 외적 수양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조화롭게 이루어 나가는 것이 진정한 자기계발이 되는 것이니 예나 지금이나 선비가 갖추어야 할 이 덕목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선비들이 추구하는 인재상이랄까 모델이 군자다. 선비는 군자가 되는 것이 목표다. 군자는 도덕적이고 품위있는 사람을 말하는데 올바른 가치와 도덕을 추구하며 타인과의 관계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는 사람쯤으로 보면 될 거 같다. 이 군자는 세 가지 즐거움을 즐긴다고 한다. 첫째가 부모님 모두 건강하게 살아계시고 형제와 갈등 없이 잘 지낸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늘과 인간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양심적이며 맑은 삶을 사는 것이고, 셋째는 천하의 영재를 발굴하여 교육하는 것이다. 이것이 군자의 이상적 가치이며 지향점이며 군자의 삶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고결하고 도덕군자인 양하는 선비도 실제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아 때로는 추악한 인물상으로 비치기도 한다. 박지원의 양반전을 보면 양반(선비)이 지켜야 할 덕목 몇 가지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절기비사(絶棄鄙事) 양반은 농업 사업 공업 등 천한 일을 하면 절대 안된다. 자기 밭에 난 잡초 한 포기도 자신이 뽑으면 안되고 꼭 사람을 불러 뽑아야 한다. 수무집전(手毋執錢) 불문곡가(不問穀價)양반 손으로 돈을 만지거나 세면 안되고, 쌀값이 얼마인지 물어서도 안된다. 소설의 형태로 선비의 위선적인 모습을 꼬집은 내용이긴 하지만 대부분 현실적인 지적이었다. 강상(綱常)은 군신(君臣)· 부자(父子)· 부부(夫婦) 등의 관계를 의리·자애·우애·공경·효도 등을 매개로 파악하는 매우 아름다운 용어로 포장되어 있지만 이 유교 윤리가 사회적 통치의 근간 이념인 조선시대에 있어서 강상을 무너뜨리는 행위는 무엇보다도 위중한 범죄 행위였고 이에 대해서 국가는 범죄의 범위와 내용, 그리고 그에 적용되는 형률을 규정하여 엄벌에 처하였다. 사농공상의 차별적 신분제가 매우 엄격하게 적용된 사회였던 것이다. 구한말 의병들이 각지에서 들고 일어난 명분이 겉으로는 왜양 척결이었지만 실상은 바로 이 강상의 도리였다. 개화사상가들이 내놓은 개혁안에서 남녀차별과 신분차별을 금지하자는 내용을 가장 반대하고 급기야는 거병을 하여 조정을 탄핵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들은 지방에서 거병할 때 가마를 타고 다녔으며 종들이 그 가마를 날랐다. 며칠 전 영주에서 의미있는 일을 해보자고 몇 명의 지인들이 모였다. 선비의 고장 영주의 역사에 대해 나눈 이야기들이 대개 이런 이야기들이다. 이 시대 선비의 고장 영주 시민으로서 시민인 선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대안을 모색해보자는 의견이 있었다. 모임의 이름도 지어보았다. 큰일을 일으킬 숨어있는 선비라는 의미로 도모거사. 난 며칠 전에 읽은 이시다 바이간의 <도비문답>이란 책을 소개했다. 도비문답에 나오는 비(鄙)와 양반전에 나오는 절기비사의 비는 같은 한자다. 비루(鄙陋)하다의 그 비자다. 비루하다는 말은 행동이나 성질이 너절하고 더럽다, 허름하고 지저분하다, 하찮고 시시하다 그런 의미다. 그러니까 도비문답은 도회지의 세련되고 아름답고 우아함과 시골스런 허름하고 지저분한 것과의 대화라는 의미다. 아름답고 추함의 대화라고 해도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한쪽은 유학을 이런 식으로 비루한 것을 다루려고 했고 또 한쪽의 유학은 비루한 것을 아예 자르고 버리라고 하는 이런 노력의 차이가 훗날 두 국가의 운명을 갈랐다고 나는 생각한다. 역사적인 한일관계상 우리가 일본의 중요성과 장점을 거론하는 것은 스스로 토착왜구라는 오명을 뒤집어 쓸 각오를 해야 한다. 일본에 관한 한 학문적인 영역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으며 오직 감정적인 분노로 대해야 한다. 우리는 일본을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알려주려고도 하지 않으며 몇몇의 편견과 무시로 일관된 폄하의 태도를 자랑스럽게 견지해 왔다. 영주에 역사적으로 많은 선비들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영주를 선비의 고장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영주의 선비들이 일반인들이 읽을 수 있는 많은 저작을 남겼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지식인으로 일반 백성을 훈화하고 이끌어주려는 역할을 게을리 한 것이다. 이제 한국의 위상은 세계적인 리더국가의 반열에 서려고 한다. 일본을 넘어서려 하고 있고 무시해도 괜찮을 그런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세계에서 유일하게 일본을 함부로 무시하고 있는 우리는 격동의 근현대사에서 일본이 어떻게 일류국가로 거듭날 수 있었고 조선은 그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일본도 성리학을 받아들였고 주자학이 독존적인 지위로 보장되던 시기가 있었지만 그들이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과는 다른 면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도 사농공상의 신분제가 통용되던 시기가 있었고 상인은 최하위 신분이었다. 이럴 때 이시다 바이간은 상업에서 이윤을 얻는 것은 결코 부끄럽지도 비천하지도 않는 것이라고, 상행위가 경멸의 대상이 아니라고 선언하였다. 여기에 바이간은 중요한 전제를 단다. 아무 이윤이 아니라 정당한 이윤이라는 것이다. 이 정당함을 담보해 주는 것이 도리이고 마음이다. 사무라이에게 무사도가 있듯이 상인에게 상인의 도가 있다고 말한다. 무사가 충성의 도리를 다하고 당당히 봉록을 받듯이 상인들도 손님에 대하여 도리를 다하고 이윤이라는 봉록을 당당히 받으라고 말한다. 그는 상인들에게 의무와 책임, 그리고 긍지를 심어 주었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빗대어 보면 이런 상도가 일본 자본주의 정신의 기틀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인의 이미지가 된 친절, 검소, 근면, 장인정신 등의 가치들은 상당부분 이시다 바이간의 사상에 기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건설노동자를 천하게 보는 것은 먼지 구덩이에서 일하는 그 모습이 비루하게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 가장 비싼 명품은 아파트다. 그 명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건설노동자들이다. 이시다 바이간은 사농공상이라는 귀천의 구별이 형태의 차이, 즉 발현된 것의 차이일 뿐 그 근본의 도는 모두 같다고 했다. 무엇이 귀하고 천한지는 상대적인 관계로서 정해지는 것일 뿐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귀는 천의 희생을 통해 자신이 길러지고 있음을 강조하며 그 희생을 언제나 의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말없이 묵묵히 수고하는 많은 근로자들, 군인들, 공공요원들, 그리고 지식인들 덕분에 세상은 밝게 빛나는 것이다. 요즘 APT. 라는 노래가 세계적으로 유행한다고 한다. 나도 거기서 일한다.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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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의 절차탁마] 어느 건설노동자의 퍼펙트 데이
나의 매일매일이 퍼펙트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실수도 많고 괜히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료하기도 한 날이 있다. 무의미하게 하루를 보냈다고 자책하고 반성하며 온전하게 하루를 충만하게 보낸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퍼펙트(perfect) 라는 말은 ‘완벽하다’라는 말이다. 완벽(完璧)이란 흠이 없는 온전한 구슬을 말한다. 사실 절차탁마(切磋琢磨)라는 말은 이 옥구슬을 만드는 과정을 말한다. 즉 완벽을 만들기 위해 돌을 자르고, 깨고, 쪼고 가는 것이다. 완벽이라는 이 원형 구형체는 완전함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그래서 학문이나 인격에도 완성이나 완벽의 의미로 원숙이나 원만이란 말을 사용한다. 결국 우리의 매일매일의 일과 삶은 이 완벽(완전한 구형)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오늘 하루의 일과가 어떠했는가를 뒤돌아보며 일상의 완벽함 혹은 원만함과 원숙함을 추구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생각했고 일에는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성찰해 본다. 나의 하루는 5:30에 시작한다. 알람소리가 없어도 이 시간에 일어나긴 하지만 알람을 해 놓는 것이 편하다. 간단히 씻고 출근 준비를 한다. 작업복으로 갈아입는 데 고민할 것이 없지만 될 수 있으면 멋지게 입으려고 노력한다. 건설노동자라도 폼을 낼 수 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늘 한다. 복장은 안전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후즐근한 냉장고 바지를 입고 다니면서 안전을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6:00면 집을 나선다. 작업 현장까지는 뛰어 간다. 현장에서 일하는 것도 몸을 쓰며 하는 일이기 때문에 운동이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일이 곧 운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좀 더 건강해지려면 운동을 해야 한다. 운동할 시간을 따로 낼 수 없으니 출퇴근을 달리기로 하면 시간도 절약되고 일하기 전에 몸도 풀어주어 일석이조다. 작업현장으로 가는 도중에 인력센터가 있는데 이른 시간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린다. 저기에 모인 사람들이 다 일자리를 찾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미안한 마음으로 인력센터 앞을 지나간다. 이들을 보면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영주역 역사를 최근 새로 지어 며칠 전 축하행사가 있었다. 이 역사의 8개의 기둥은 부석사 무량수전의 기둥처럼 배흘림기둥 양식으로 만들어 독특해 보인다. 솔직이 그리스의 도리아 양식이니 코린트 양식이니 하는 기둥과 비교하면 너무 밋밋하다고 생각되지만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양식을 따른 것이니 역사적 의미가 깊은 기둥이다. 기차 굴다리를 지나 골목으로 들어서면 서예교실을 지난다. 간판은 크고 창문에는 붓글씨로 잘 쓴 한시 한 장이 붙어있는데 한 쪽 테이프가 떨어져 비스듬히 걸려있다. 아마 주인장도 지금은 건설현장에 나가나 보다. 홀 안에는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듯한 장비들이 널브러져 있다. 길가에는 많은 가게들이 이렇게 비어 있거나 창고로 쓰는 곳이 많다. 왼쪽으로 돌아가기 전에 ‘발근해마실’이라고 크게 써 놓은 빌라가 있다. ‘밝은 해마실’ 이겠지만 ‘밝은’을 소리나는대로 ‘발근’이라고 쓴 것이 무슨 의도인지 건물주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었다. 좀 더 가다 보면 언덕 밑에 500년된 영주시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있다. 나무도 오래 묵으면 영묘한 기운이 도는지 근처에 가면 뭔가 신비감이 느껴지는 그런 나무다. 이 보호수 건너편에 남간서당이 있는데 집 앞에 커다란 중수비가 세워져 있다. 서당 자체는 규모가 작지만 건물에 비해 중수비는 제법 크고 비에 새긴 글자도 많이 적혀 있는데 글자의 대부분은 서당을 중수하는데 참여한 사람들 이름이 대부분이다. 건설 현장은 이 서당 뒤편에 있다. 야트막한 산이라고 해야 할까 비탈을 깎아 여기에 건물 6개동을 짓고 있다. 아직 건물이 올라가고 있는 중이지만 여기서 내려다보면 영주시내가 한 눈에 다 들어온다. 현장엔 출입구 안쪽에 건설근로자공제회에서 만든 출퇴근용 단말기가 설치되어 있어 모든 근로자는 우선 여기부터 체크한다. 여기에 체크를 해야 현장에서 일한 날 만큼 하루 6200원의 퇴직공제금을 받을 수 있다. 이어서 골조회사의 출퇴근용 안면인식기에 얼굴을 디밀어 출근확인을 한다. 오전엔 아침 7시 이전에 오후엔 4:40 이후에 찍어야 하루 공수가 인정된다. 아침식사는 현장식당(함바)에서 먹는다. 되도록이면 음식을 남기지 않도록 적게 뜬다. 함바식당의 음식맛은 전국이 비슷하지만 아무래도 전라도 쪽 현장의 음식 맛이 좀 낫다. 물론 감사한 마음으로 먹으면 음식은 다 맛있다. 식사 후 물통에 물을 채운다. 여기에 믹스커피를 두 봉지 넣으면 마시기 편하다. 6:50이면 아침 티비엠(조회)을 실시한다. 국민체조와 더불어 전날 현장 상황과 오늘 작업 안전에 대한 주의사항을 전파하는 시간이다. 원래는 공종별 현장소장들이 나와 오늘 작업내용과 주의사항등을 이야기하지만 작업자들은 매일 듣는 내용이 같아 따분하게 여긴다. 오늘도 “안전주의, 좋아!”를 세번 외치고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7:00 작업 시작. 나의 작업은 보통은 매일 건물 최상층의 갱폼에 올라가 건물 외벽을 땜방하는 것이다. 외벽 땜방을 위해선 일반미장용 몰탈이 아니라 견출용 몰탈을 사용한다. 타설 후 거푸집(알루미늄폼)을 떼어 낸 후 가장 먼저 손을 보는 사람이 바로 할석 미장공이다. 대부분 면이 깨끗하게 나오지만 건물이 올라갈수록 면이 거칠어지고 어떤 때는 곰보현상이 많아져 발라주어야 할 곳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특히 이음부분 모서리는 파이기도 하고 살짝 층이 지기 때문에 매끄럽게 이어주어야 한다. 땜방을 하다보면 목수나 철근공들의 작업태도나 성격이 보이기도 한다. 벽면에 담배꽁초나 철사등이 삐져 나와있는 경우가 있고, 심한 경우에는 음료수 병이나 장갑 같은 것이 면에 묻혀 있는 때도 있다. 이럴 때는 이물질을 다 파내고 다시 발라줘야 한다. 더 심한 경우는 알루미늄 폼을 고정시키는 핀이 누락되어 면이 불룩하게 나오는 경우가 있다. 이 때는 드릴로 벽면을 까내고 다시 발라줘야 한다. 일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일상의 생활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적당히 음식을 먹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 일하기도 수월하지만 과음을 하거나 수면이 부족하면 일하는데 의욕이나 집중도 떨어지고 무엇보다 안전에 이상이 생길 수 있다. 이런 하루가 모여 일년이 되고 일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일하는 과정이 목표나 결과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결과나 목표 달성을 위해 과정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 자체를 즐기거나 일하는 과정이 자신을 수양하는 도라 여기며 수행하는 자세로 일하는 것이 필요하다. 원래 직업이란 말 Vocation은 칼뱅의 종교개혁 이후 생겨난 개념으로, 신에게서 특별한 사명을 부여 받았다는 소명의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직업의식은 단순히 대가를 바라며 시간당 노동력을 제공하며 일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천직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도들을 프랑스에서는 위그노라고 불렀는데 이들이 스위스를 중심한 서유럽의 제조업을 이끌었으며 이러한 전통이 유럽의 산엽혁명으로 이어졌다. 프랑스는 이 위그노들을 추방하여 한 때 산업이 형편없이 추락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국부론>과 <도덕철학>을 쓴 스코틀랜드의 아담 스미스는 칼벵과 함께 활동했던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가 존 녹스의 영향을 받았다. 서양의 아담 스미스와 비교되는 현대 일본의 노동관을 확립시킨 사람은 에도시대 포목점 점원출신의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岩을 거론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가 주장하는 석문심학(石門心學)의 개념은 '제업즉수행(諸業卽修行), 다시 말해서 '모든 노동(일) 자체가 곧 정신수양이며 자기의 완성이므로 일하는 자체가 곧 도를 닦는 것과 같다. 돈보다 귀중한 것은 자신의 인격 완성이니, 일생동안 열심히, 이익이 없더라도 대가를 바라지 말고 정진하라.'는 것이다. 즉, 노동이라는 것은 생산활동이기 이전에 인격의 수양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우선 근면하지 않으면 훌륭한 인격을 연마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가르침은 지금도 이나모리 회장이나 손 마사요시 회장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얼마 전 일본 고시엔 고교야구에서 한국계고등학교인 쿄토국제고가 전체 학생 160명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고교야구를 제패했다. 한국에선 한국계 고등학교가 고시엔에서 우승했다고해서 대서특필하고 많은 사람들이 가슴 뭉클해 했는지 모르지만 실제 이 학교 힉생들 중 한국계는 별로 없다. 고교생들이 야구에 미쳐 청춘을 불태운 한편의 드라마였다. 젊은 날 이렇게 동료들과 뜨겁게 여름을 보낸 친구들은 평생 이 추억을 잊지 못할 것이다. 선수뿐만 아니라 응원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공동체의식은 이렇게 형성되는 것이다. 목표나 결과중심의 대학입시로 삶의 질이 결정되는 한국 사회에서 이런 점에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거 같다. 오후 4:40,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한다. 출근할 때와 마찬가지로 뛰어서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올 때 코스는 서천을 따라 둑방길을 뛰면 제법 거리가 멀다. 숙소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같이 합숙하는 동료들과 맥주 한 잔을 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딱 한 잔으로 그칠 수 있는 용기다. 오늘 일과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상기해 보며 그림을 한 장 그린다. 이것은 나의 그림일기며 노동일지다. 오늘 현장에 물통을 안 가져가 한참 일하다가 목마를 때 내게 물 한모금을 권해주던 그 노동자를 떠올려 본다. 그의 넉넉한 웃음이 기억에 남는다. 잠들기 전 이시다 바이간의 <도비문답>(都鄙問答)을 몇 페이지를 읽으며 하루를 정리한다. 일개 포목점 점원도 성리학을 이해하고 국민적 계몽서인 상도에 관한 책을 썼는데, 가방 끈이 제법 긴 건설노동자인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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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의 절차탁마] 미장공이 '프린지'를 노래하다
우리 사회에서 골프가 아직은 사치스런 고급진 스포츠로 여겨지고 있지만 영국에서 페이스북으로 만난 지인에 의하면 원래 골프가 스코틀랜드에서 출발했는데 처음엔 노동자들의 놀이였다는 것이다. 양치는 목동이나 나무꾼, 돌 깨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어깨에 막대기를 여러 개 지고 다니면서 이 언덕 저 언덕으로 공을 치며 놀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잉글랜드로 건너오면서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골프장을 만들면서 자동차가 있는 부유층들의 사교거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영국에 도착 후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프로이드 박물관이다. 일부러 찾은 것은 아니지만 런던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햄스테드 언덕을 가면서 방문하게 되었는데 주변엔 유명인사들이 살았다고 하는 안내판이 붙어있는 집들이 꽤 있었다. ‘공산당선언’과 ‘자본론’을 쓴 마르크스가 묻힌 하이게이트 공원묘지도 가까이에 있었고, 공산사회의 실상을 비판하는 소설 <동물농장>을 쓴 조지오웰이 살았던 집도 근처에 있었다. 프로이드 박물관에서 흥미있게 본 것은 프로이드가 소장하고 있던 여러 나라의 전통 공예품들이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이 말을 타는 조작품이었다. 프로이드는 정신분석에 있어 정신의 근간을 이드-에고-초자아로 구분했는데 이것을 말과 기수로 설명했다. 본능적인 충동과 넘치는 힘을 지니고 있는 말(이드)과 방향과 속도를 조종하는 기수(자아)의 비유를 들어 자아와 이드의 관계를 “말은 운동에너지를 공급하는 반면, 기수는 목표와 방향을 설정하고 말을 이끌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아와 이드 간에는 기수가 어쩔 수 없이 말이 가자고 하는 길로 이끌려갈 수밖에 없는 이성적이지 못한 상황이 너무나 자주 출몰한다”고 설명했다. 아마 이 목각인형을 보고 그런 아이디어를 착상했는지 모른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영국 투어에서 가장 가보고 싶어하는 곳은 대영박물관일 것이다. 영국박물관에 영국 것은 없고 해외에서 수탈해 온 유물들로 가득하다고 말들 하지만 세계의 문물을 수집해 놓은 제국의 수집관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동서양 세계의 모든 문화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지적인 수준을 깊게 할 수 있는 기회가 큰 것이다. 마르크스도 이곳 ‘리딩룸’을 자주 드나들며 ‘자본론’을 썼다고 하는데 그 자리까지는 가보지 못했다. 나는 박물관은 건성으로 보거나 지나쳤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미술관 투어였다. 이번 여행에서 4개 도시를 다니며 미술관은 모두 방문해 보았다. 에든버러에선 내 부스가 스코틀랜드 내셔날 뮤지엄 바로 옆에 있어 수시로 들락거렸다. 신기한 것은 모두 인상파 그림이 주로 전시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인상파가 유럽 사회에 끼친 영향이 그만큼 컸다는 얘기일 것이다. 나는 8월 15일 광복절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맞았다. 축제 기간중이라 내 숙소에서 전시부스까지 걸어 가는 동안 백파이프연주는 내내 듣게 된다. 아니 하루 종일 듣는다. 이날 아침 나는 과거 우리나라 애국가의 곡으로 차용한 올랭자인(old lang syne)을 백파이프 연주로 들었다. 가슴이 울컥했고 눈물이 핑 돌았다. 나라를 잃은 슬픔을 달랠 길 없어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스코틀랜드 민요에 곡을 얹어 국가를 불러야 했던 선인들의 고달픈 심정이 느껴졌다. 스코틀랜드와 한국과의 관계를 찾아보니 기독교가 처음 한국에 선교될 때 한국어 학습서(Corean Primer)를 간행했고 최초의 한국어 성경을 번역한 사람이 바로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 로스(John Ross) 선교사였다. 그는 한글의 띄어쓰기를 최초로 적용한 분이기도 하다. 스코틀랜드는 물론 영국이긴 하지만 자치권을 가지고 있고 자국 화폐도 가지고 있다. 유럽연합(EU) 속에 자주적인 각 나라가 연합되어 있듯이 영국(UK) 속에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가 연합되어 있다. 영국국기 유니온잭은 이 나라들의 깃발을 합쳐 놓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스코틀랜드는 로마화되지 않은 지역이기도 하다. 로마가 브리튼 지역을 정복하면서 북부지역 사람들의 강력한 저항과 춥고 음습한 기후로 더 이상 사람이 살지 못할 곳으로 여겨 선을 그은 것이 하드리아누스 방벽이다. 로마도 포기한 지역, 지금은 주로 하이랜드라고 불리는 이곳은 기후가 음습한 곳으로 한여름 아침 기온이 12도였다(당일 서울은 35도였다). 춥기 때문에 알코올 도수가 높은 위스키를 만들어냈는지도 모른다. 이런 날씨에 비가 내리면 정말 겨울 잠바를 꺼내 입어야 한다. 축제 기간 내내 우산과 잠바를 가지고 다녀야 했다. 이런 춥고 음습한 환경 때문인지 사람이 자꾸 생각을 하게 된다. 에든버러 대학 기숙사 뒤에는 아서왕이 앉았다는 바위산이 있다. 아침마다 이 산에 오르면서 생각나는 것이 춥고 돌이 많은 지역과 덥고 나무가 많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 어떤 사유를 하게 될까 하는 것이었다. 돌로 집을 지으니 몇 백년을 유지한다. 여러 집을 지어야 되다보니 도시계획을 세워야 하고 거기서 디자인 개념이 생겨나고 도시에 시장이 생기니 질서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런 사유 때문인지 스코틀랜드엔 유명한 과학, 철학, 경제학 등 분야의 학자가 많다. <국부론>을 집필한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 인식론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흄, 힉스입자를 제안한 피터 힉스, 증기기관을 개량한 제임스 와트, 페니실린을 만든 알렉산더 플레밍 등이 모두 스코틀랜드 출신이다. 유명한 작가도 많다. 역사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연 월터 스콧, <셜록 홈즈>를 집필한 아서 코난 도일, <해리포터>의 저자 조앤 롤링이 해리포터 1권과 2권을 쓴 곳이 에든버러다. 정말 에든버러에 와 보면 해리포터의 세트장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고색창연한 분위기다. 위와 같은 학자들을 배출하는 데 스코틀랜드의 개혁성향을 만든 사람은 역시 존 녹스(John Knox)일 것이다. 시내에는 그를 기리는 동상이나 교회가 많이 있었다. 존 녹스는 종교개혁자로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권위는 군주보다 앞선다’는 그의 가르침은 신앙을 위협하는 군주에 대항할 권리와 의무에 확신을 주었으며, 가톨릭의 권위에 대항한 그의 개혁 신앙은 스코틀랜드인들 특유의 진보적 사고를 가져왔다. 미술에 있어 인상파의 그림이 그러한 것이다. 전통적인 즉 왕과 교회 그리고 귀족을 위한 그림과 기법에서 자기의 시각과 생각을 가지고 색채와 색조 구도 자체를 자유롭게 표현해 보려는 시도는 이러한 개혁성향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여기에 당시 일본 우키요에의 색채와 구도도 인상파 그림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당시 우키요에는 유럽의 화가들이 생각하지 못한 구도로 그림을 그렸다. 인상파의 효시라고 할 모네의 작품이나 고흐의 작품에는 일본풍이 많이 묻어난다. 지금도 유럽에는 일본문화를 좋아하는 마니아들이 많다. 파리시내에 일본영화 ‘멜랑꼴리’ 포스터가 거리마다 붙어 있었다. 한류도 만만치 않았다. 이번 에든버러축제에 가장 인기있는 공연은 정선군에서 제공한 아리랑 뮤지컬 ‘아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내 부스에 찾아오는 손님들마다 한국 공연이 너무 재미있었고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내가 보러 갔을 때에도 만석이었는데 매번 만석이었다고 한다. 하긴 에든버러 대학 구내편의점 한 코너는 한국 라면으로 가득했다. 런던에서 파리로 올 때 유로스타를 이용했다. 국가간의 이동이라 간단한 출국심사를 거치지만 전철 타듯이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현재 영국과 프랑스는 관계가 좋아 보이지만 사실 두 나라는 100년간의 전쟁을 한 나라다. 100년간 잉글랜드가 프랑스를 유린했다. 잉글랜드군은 대부분 용병으로 기사도나 명예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고 약탈을 일삼았다. 프랑스 북부는 아예 잉글랜드가 오랫동안 점령하고 있었고 남부 프랑스마저 무너질 절체절명의 순간 프랑스를 구한 것은 오를레앙의 잔 다르크라는 일개 소녀였다. 오늘날의 영국이 섬나라로 국경이 확정된 것이 이 100년 전쟁의 결과다. 그렇지만 두 나라는 역사문제로 감정소비를 하지 않는다. 종교개혁과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이념과 명분이 아니라 현실을 중시하게 된 것이다. 한·일관계도 이젠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 언제까지 역사적 울분으로 증오만 키울 것인지 답답하기만 하다. 한·일 두 나라가 영국과 프랑스처럼 협력관계가 되고 철도로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면 세계 최고의 관광지가 될 것이다. 25일간의 긴 여행으로부터 돌아오면서 ‘노동해방’이란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적어도 난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소외에서 제외된 자 같다. 어쩌면 노동에서 해방된 자인지도 모른다. 일당으로 사는 일용직 노동자가 거의 한 달간 일을 안 하고 사치나 공상하고 여행이나 즐기는 덜 떨어진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나는 노동이야말로 창조 행위이며 예술적 행위라고 생각한다. ‘생산수단’을 공동 소유한다고 노동자가 노동에서 해방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세밀하게 바라보고, 섬세하게 느끼며 정성을 다해 일하는 노동은 그 자리가 어디든 빛나는 자리가 될 것이다. 창조는 그런 반복적인 작업을 감사하게 여기며 오늘 더 새로운 생각을 표현해 보는 것이다. 나만의 시각으로. 이번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의 캐치프레이즈는 “unleash the Fringe 프린지를 자유롭게 누벼라!” 인데, 프린지(Fringe)의 의미가 ‘자유로운 상상력’, ‘실험정신’ 이런 뜻이란다.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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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의 절차탁마] '북송'의 상징 日 니가타 중심에서 '인권'을 외치다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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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의 절차탁마] '나의 아저씨' 카즈오…80년만의 북해도 '귀향'
'보이즈 비 앰비셔스'의 고장 최근 며칠간 가족 친지들과 함께 북해도 여행을 했다. 한국 사람들에게 북해도 여행은 부모님을 모시는 최고의 효행상품이라는 말도 있지만 실은 우리 가족 중에 북해도와 얽힌 이야기가 있어 언젠가 꼭 가봐야 한다는 말도 있고 해서 3대가 함께하는 14명의 가족을 이끌고 다녀왔다. 북해도의 면적은 남한 면적의 80%에 해당할 만큼 넓다. 그리고 일본의 영토가 된 것이 명치유신 이후라서 어찌보면 신생 개척지 같은 곳이다. 물론 아이누 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민족이 말살되는 비운의 역사가 깃든 땅이기도 하다. 초기 북해도 개척에는 미국의 영향이 크다. 개척 시기 삿포로 도시계획이나 농업기술을 가르친 것이 미국인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이 삿포로 농학교 (현 홋카이도 대학) 초대 교감이었던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 박사다. 그가 북해도에 머문 기간은 단 6개월이 채 안 되었지만 그의 가르침은 아주 영향력이 컸다. 그에게 직접 지도를 받지 않았지만 그의 제자가 된 우치무라 간조도 클라크가 세운 삿포로 농학교 출신이다. 클라크 박사가 학교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배웅을 나온 학생들에게 마지막 남긴 말이 그 유명한 'Boys be ambitious!'다. 과거 북해도는 일본의 식량기지로서 그리고 자원 채굴의 기지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지금은 탄광이 모두 폐쇄되었지만 한때는 북해도 탄전이 꽤 유명했다. 2차 대전 말기 미국의 남양군도 봉쇄로 석유 수급이 원할하지 못하자 일본은 석유 대체품으로 석탄 생산에 열을 올렸다. 이 석탄 채굴에 수많은 조선인들이 동원되었다. 그 가운데에도 북해도와 규슈 탄전이 유명했다. 일제의 징용이 본격화된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징용된 조선인 72만여 명 중 14만5000여 명이 홋카이도로 끌려와 유바리를 비롯한 탄광, 항만, 비행장, 댐 건설 노역에 동원되었다고 한다. 이 중 상당수가 사망해 광복된 뒤에도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 채 이국 땅에서 이름 없는 혼으로 떠돌고 있는 이가 많이 있는데 그중에 한 명이 우리 할아버지다. 사실 우리 할아버지는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간 것은 아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자진해서 일본행을 택했지만 당시에 조선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결국 광부나 벌목공, 철도 건설 등 험한 일뿐이었다. 지금부터 말하려는 것은 그의 아들 가즈오(一男)에 대한 이야기다. 가즈오는 나의 아저씨 이름이다. 가즈오는 일남의 일본식 표기다. 아니, 일남은 일본 이름 가즈오의 한국식 표현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북해도로 추정하고 있다. 북해도가 아니라 가라후토(사할린)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83세인 가즈오씨는 본인도 확실하게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알지 못해 곤혹스러워 한다. 어쨌거나 가즈오씨 가족은 그가 북해도나 가라후토 어딘가에서 살았고, 거기서 태어나 세 살 때 엄마와 6개월 된 동생과 함께 광복되던 해, 정확히는 1945년 광복되기 2개월 전에 한국으로 왔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은 전쟁 막바지에 총동원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젊은 남성들은 전선에 마구 투입되던 시기였고 그 가족은 전선에서 좀 더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키던 때였다. 가즈오씨는 나의 5촌 당숙으로 아저씨라 부르지만 여기선 가즈오라 칭한다. 우리 할아버지는 두 형제로 가즈오씨의 아버지는 내게 둘째 할아버지다. 두 형제는 부모님을 일찍 여의는 바람에 친척집에 얹혀 살았다. 형은 큰집에 양자로 들어가는 조건으로 땅을 받아 고향에서 농사를 짓게 되었고 둘째는 시골에서 살 수가 없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할아버지 형제를 키워주시던 친척도 당시 생활이 어려워 몇 년 후 만주로 이주했다. 일본에 간 작은 할아버지는 식민지 조선에서 온 청년으로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이것저것 일을 찾아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다가 북해도까지 갔다. 북해도 탄광에서 일을 하다가 돈을 더 받을 수 있다는 가라후토(사할린) 벌목공으로 가게 되었다. 혼자보다는 가족을 더 우대해준다는 말을 듣고 일시 귀국해 시골에서 급하게 결혼을 했다.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짓겠다고 땅도 조금 사 놓았다. 그리고 바로 이 신혼부부는 일본 북해도를 거쳐 가라후토에 가서 신접을 차렸고 거기서 두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남자가 되라는 의미로 일남(一男)이라 했고 3년 후 난 둘째는 언젠가 올 광복의 날을 그리며 광남(光男)이라 붙였다. 가라후토가 일본 땅이 된 것은 최근이었다. 1905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승리한 일본은 러시아에 전비청구를 하지 않는 대신 사할린을 할양받았다. 그렇게 해서 사할린 남부가 일본 땅이 되었고 탄광과 벌목이 주요 산업이 되었다. 북해도 북부에 펼쳐진 대지, 사할린. 일본명으론 가라후토(樺太)로 불렸다. 1945년 당시 40만명 넘게 살고 있었다고 한다. 둘째가 태어나고 전황은 일본에 매우 불리하게 돌아갔다. 하와이를 기습공격하여 일본이 연전연승한다고 뉴스에선 말하지만 현실은 식량도 배급으로 바뀌고 생활용품도 공출이라고 해서 구입하는 것보다 오히려 빼앗기는 것이 더 많았다. 들려오는 소문에는 소련이 참전하여 어느 날인가 가라후토로 들이닥친다는 소식까지 전해져 흉흉한 분위기였다. 1945년 6월이 되자 모든 남자는 남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보다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킨다고 했다. 일본 내지로 갈 것인지, 조선으로 돌아갈 것인지 선택하라고 해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어떻게 왔는지는 모르지만 세 살 난 아들과 6개월 된 간난아기를 업고 부산항에 내렸다. 부산에서 두촌까지는 몇 달을 걸어 빌어먹으면서 고향에 돌아왔다. 가라후토에선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종전 선언이 있고 나서도 10일간이나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고 그래서 주민들의 희생이 컸다. 지금도 정확한 숫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5000~6000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최전선에 투입된 소년병들, 지옥의 피란 행렬에서 죽어간 아이들과 어머니들. 소련군들이 상륙하자 많은 가족과 여성들은 자결을 택했다고 한다. 가즈오의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넋두리 같이 말씀하신 내용은 “그때 007가방을 내가 가져왔어야 했어. 일본 가서 번 돈을 거기에 넣어 놨는데, 그 난리통에 가져올 수 없어 그 양반이 가져오기로 했는데 못 왔잖아···. 그 돈이 있었으면···” 어머니는 모든 불행과 가난의 원인을 그 가방에 묻었다. 남편 없이 농사일 하며 애들을 키워내느라 한 평생 고생만 하다 돌아가셨다. 고단한 삶을 산 어머니에게 남은 것은 그 007가방으로 상징되는 그 회한뿐이었다. 가즈오가 부르는 노래, 내 나라 내 고향 인천을 떠나 2시간 30분이면 닿는 북해도는 아카시아 향기가 가득한 늦봄, 어디 가나 꽃으로 가득했다. 기대 반 설렘 반 그리고 미안함도 함께 가지고 왔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날까 해서 북해도로 날아왔다. 북해도 대지와 넓은 하늘 그리고 북양의 바다를 바라보면 혹시 바람이 전해주는 음성이 있지 않을까 해서 귀를 기울여 본다. 희미하지만 북해도 넘어 가라후토에서 일하셨다고 들었지만 기억에도 없는 곳이라 가라후토 가까운 북해도 어딘가에 아버지의 흔적을 느낄까 해서 찾아왔다. 아버지라 불러 본 기억이 없지만 분명 내 아버지는 이 땅 어딘가에 몸을 눕히셨을 거라 생각하면서 80년이 지났지만 용기 내어 이제 찾아왔다. 처음 밟아보는 땅이지만, 처음 만나보는 사람들이지만 내가 세 살까지 이곳에 살았다고 하니 낯설지는 않다. 처음 먹어보는 음식도 그런대로 괜찮다. 소주만 있으면 뭐든 괜찮지만···.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버지 돌아가신 이 땅에 마침내 내가 왔구나. 아니, 내 태어나 자란 곳에 이제야 돌아왔구나. 드넓은 대지를 바라보며 긴 호흡을 해본다. 먼 산에는 아직 눈이 남아 있네. 80년 만에 귀향, 고향에 대한 아무 기억도 생각도 추억도 없지만 내가 태어나고 잠시나마 이곳에서 자랐다고 생각하니 왠지 고향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버지도 저 하늘 아래 이 공기를 마셨을 거라 생각하니 여기는 낯선 이역 땅이 아니라 아버지와 내가 연결된 곳이다. 일본에선 남자라면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야망을 가져야 한다는데, 내 이름 가즈오(一男) 가 바로 그런 뜻이란 걸 여기 와서 알았다. 아버지는 그런 야망을 가진 분이었을 것이다. 유바리 석탄기념관으로 가는 길은 내 시골길과 비슷했다. 석탄박물관에 검은 얼굴로 웃고 있는 사진을 보니 내 아버지인 줄 착각했다. 석탄갱도를 재현해 놓은 지하에 들어가보니 내 아버지 석탄 캐며 저렇게 고생하셨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탄광을 나와 일본 최고라는 유바리 멜론을 먹어보았다. 달콤하면서 부드럽게 살살 녹는 이 맛을 우리 아버지는 맛보았을까 생각하니 약간 짭짤한 맛이 느껴졌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슬픈 시대가 있었음을 나는 잊지 않고 있지만, 어머니와 어린 시절의 가난을 생각하면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 하지만 외면하기보다는 역사를 직시하며 극복하는 것이 나의 후손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북해도 여행 끝에 내 집에 와서 우리 가족을 다시 보니 우리 가족이 내 나라며 우리 세계였구나. 며느리 중에는 일본인, 중국인, 미국인도 있고 미국인 사위도 있네. 한 세대 더 지나면 완전 글로벌 패밀리가 되어 한~가족으로 살겠지. 이것이 우리 조상들이 꿈꾸던 세상 아닌가? 예전엔 시골에서 농사 짓는 것만이 천직이라 생각했지만 내 아버지는 고향을 떠나 북해도 탄광부로, 사할린 벌목공으로 일하면서도 내 후손은 나보다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으리라. 내 나라, 내 고향이 어디 따로 정해져 있는 곳이 아니라 마음 가는 곳, 살고 싶은 곳이 내 고향이 아닌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내가 아끼고 지켜야 하는 것이 있는 그곳이 바로 내 나라 아니겠나.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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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의 절차탁마] '잡화'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세상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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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의 절차탁마] 민주주의라는 나무
4월에 맡는 라일락 향기는 언제나 신선하다. 어찌 4월에 라일락 향기만이 있겠냐마는 어릴 적 추억은 그만큼 강렬하다. 꽃 향기가 주는 따뜻함, 신선함 그리고 편안함은 봄을 맞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것 같다. 4월을 맞아 국립 4.19 민주묘지를 찾아 참배를 하고 주변 둘레길을 걸었다. 북한산을 걸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산에서 바라보는 서울은 참으로 아름답다. 산은 적당히 높아 나무가 우거지고 계곡엔 물이 흘러 물고기들이 어른거린다. 후덥지근해진 날씨지만 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꽃 향기와 더불어 4월의 봄을 더 아름답게 만든다. 이런 자유와 여유로움이 민주묘지에 묻힌 선배들의 희생 덕분임을 온몸으로 느낀다. 함께 걷던 배문태 선생은 당시를 회상하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나는 여기 올 때마다 여기 누워 있는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기분이 착잡해지네. 당시 나도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대학에 들어갈 그때였거든. 우리나라가 이만큼 민주화되어 사는 것은 이들의 희생이 크지. 나는 여기 있는 이들을 보며 아직도 살아 있는 게 미안한 거야. 이들에게 더 이상 미안하지 않기 위해 살아 있는 동안 나는 통일된 조국을 만들겠다고 다짐을 하곤 하지.” 나무를 보면 신기하지 않은가.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서 있는 나무를 보며 나도 인생의 꿈을 향해 수직으로 서는 힘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그 환경을 사랑하며 자기 것화하는 바위 위에 굽은 소나무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못생긴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다. 쓸모없어 보이는 것이 결국 제구실을 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대부분은 산에 잘 생기고 곧은 나무는 먼저 잘려서 요긴하게 쓰이고 결국에는 제일 못생긴 나무만 남아서 중요한 선산을 지킨다는 이야기로, 평소에 보잘것없어 보이더라도 언젠가 결국에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니 무시하면 안 된다는 뜻의 속담이다. 과거엔 나라를 생각하며 나무를 심었다면 이제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나무를 심으면 좋겠다. 사무실이나 노동 현장에서 일하다가 이렇게 자연으로 나오면 몸과 마음이 리프레시되는 것은 물과 나무를 벗하기 때문이다. RE100이니 지구온난화 방지라는 거대 담론을 떠나서 나를 위해 나무를 심으면 좋겠다. 정원이 없으면 집 안에 화분에라도 심어 내 나무를 한 그루 가꿔보자. 그래도 공간이 없으면 내 마음속에라도 나무를 심고 가꾸면 좋겠다. 그 나무가 민주주의 나무라면 더 좋겠다. 아파트 건설에 있어서도 골조공사는 사실 모든 아파트가 브랜드만 다를 뿐 기본 골조는 거의 비슷하다. 외장이나 페인트 색깔만 다르다. 그래서 요즘 브랜드 아파트는 조경에 신경을 쓴다. 어떤 나무를 심는냐에 따라 아파트 차별화를 가져온다. 건물을 지을 때 수직과 수평이 매우 중요하다. 기둥이 수직으로 서야 보를 수평으로 이을 수 있다. 기둥과 보가 수평, 수직을 이루어야 벽이라는 평면을 만들 수 있다. 수직이란 지구 중력의 중심과 직선을 이루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수평은 이러한 수직과 90도 각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둥과 보가 수직과 수평관계를 이루어 큐브 형태를 이루었을 때가 가장 안정적이다. 수평, 수직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굴곡이나 기울기를 달리해 미적 변화를 줄 수도 있다. 지구는 구형이기 때문에 어디에 있든 중력의 중심과는 수직으로 설 수 있다. 바른 자세는 이렇게 중심과 가장 가깝게 서 있는 자세다. 이러한 원리는 자연과학만이 아니라 인문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본다. 우리가 말하는 원칙과 상식이란 이런 기준에서 나온다. 물론 인간은 상상력과 정이라고 하는 초월적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초월적 힘도 가치라고 하는 인문적 측정 기준을 넘어서거나 남용하면 무리가 생기고 관계는 헝클어지기 시작한다. 우리 사회의 학연, 지연, 혈연의 폐해는 이런 정적인 힘이 과도하게 작용해서 생기는 문제다. 2024년 4월에는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었다. 인구가 많아진 것도 있지만 전문화된 현대사회에선 자신을 대신해서 공동체를 이끌어갈 대표자를 뽑고, 그렇게 뽑은 대표자가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면 해임할 수 있는 것이 선거다. 흔히 선거를 ‘뽑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떨어뜨리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대표자가 임기 중에 비리와 부정을 저지르거나 대표자로서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시민들은 다음 선거에서 다른 후보자에게 투표함으로써 대표자를 교체한다. 이 때문에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부른다.(나무라고 부르면 더 좋겠다) 이번 선거 결과를 보면, 전국 254개 선거구의 총 투표수는 2923만4129표로, 이 중 더불어민주당의 득표수는 1475만8083표(50.5%), 국민의힘은 1317만9769표(45.1%)로, 양당의 득표율 격차는 5.4%포인트에 불과했다. 하지만 의석수에는 엄청난 차이가 났다. 지역구에서만 민주당은 161석을 얻어 단독 과반을 훌쩍 넘겼고 국민의힘 당선자는 90명에 불과했다. 두 정당 간 지역구 의석수 차이는 약 1.8배에 달했다. 특히 이번 총선의 최대 승부처였던 서울과 충청권에선 득표율과 의석수의 괴리감이 더 컸다. 서울에서 양당의 득표율 격차는 5.9%포인트였지만 전체 48석 중 37석을 민주당이 독식했다. 대전·세종·충남·충북 등 충청권에선 민주당이 단 4.3%포인트를 앞서 전체 28석 중 21석을 휩쓸었다. 반대로 국민의힘은 충청권에서 45.8%의 표를 얻고도 7석밖에 얻지 못했다. 이러한 격차가 나타나는 이유는 득표율 1위만 당선되고 나머지는 사표(死票)가 되는 현행 소선구제의 특징 때문이다. 승자독식에 따른 단순다수대표제가 민의를 대표했다고 볼 수 있을까? 전체 의석이 아닌 비례대표 의석에 대해서만 정당 득표율을 기준으로 배분하는 기존 병립형으로는 민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문제의식 아래 우리나라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했다. 하지만 위성정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의 출현은 비례대표제에 대한 문제점을 다시 부각시키고 있다. 원래 준연동형 비례제하에서 하나의 정당으로 총선을 치르면 양당의 경우 지역구 당선자로 인해 비례대표 의석 수가 병립형 비례제 시기보다 줄어들게 되고, 소수 정당이 비례대표 득표율에 가까운 원내 의석 수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원래 취지였지만 위성정당을 만들게 되면 명목상으로는 위성정당에서는 지역구 당선자가 없기 때문에 비례 득표율을 손해 없이 고스란히 비례대표 의석수로 전환할 수 있으며 추후 합당으로 비례대표 의석수를 당으로 가져올 수 있으며, 심지어는 선거 전 일부 의원을 위성정당에 꿔주는 사례도 있다. 창당 과정에 드는 비용이나 기존 정당과의 유사성으로 유권자에게 혼란을 준다. 유권자를 단지 정치 소비자로 취급하는 것이다. 하이예크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를 매우 강조했다. 인류 역사의 전 기간에 걸쳐 사회 발전의 일반적 방향은 각 개인의 자유로운 일상적 활동을 보장할 때이며 관습이나 정해진 방식을 따르게 한 속박에서 그들을 해방시키는 것이라고도 했다. 혹여나 이번 선거가 개인의 의지나 민의가 잘못 왜곡되어 집단화·진영화의 도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민주주의는 원래 정해진 룰이 없다. 끊임없이 현실과 타협하며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해 가고 진화해 가는 제도다. 며칠 전 우희종 교수는 강연에서 우리 사회의 다양한 시각을 같은 피사체를 보고 피카소와 달리의 표현이 다름과 같은 것이 아니겠냐고 말했다. 폭력이란 공동체의 관계를 단절시키거나 왜곡시키는 것을 말하며, 이런 왜곡에 대한 잘못된 개인적인 신념(어리석음)도 폭력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진보 진영에서 진화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원래 이 진화(Evolution)의 개념은 어떤 특수한 종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 상황, 위치에서 가장 안정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시민운동 차원에서 말하면 옳고 그름이라는 관념의 선택이 아니라 현장에 맞느냐 적합하냐 하는 선택과 이에 따른 실천이며 행동이라는 것이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다. 즉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겸손과 부드러움을 간직하지만 홍수와 같은 대재앙을 일으키는 무서운 힘으로 나타난다는 물의 속성을 도가에선 최고의 선(上善)으로까지 표현하고 있다. 대개는 힘이 있는 권력자들, 특히 정치인들에게 요구되는 품성이라고 말하지만 이런 인품은 70% 이상 물로 이루어진 인체를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은 물만이 아니라 모든 액체, 공기도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흐른다.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은 물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성격이라기보다는 중력이 있기 때문이다. 질량을 가진 모든 물질은 서로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구라고 하는 행성의 중심에서 잡아당기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타난 표상을 우상화하거나 신격화하는 데 집중할 것이 아니라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게 작용케 하는 과학적 힘에 집중하면 좋겠다. 청명한 날 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시작한 꽃 향기 충만한 4월도 이제 지나간다. 각자가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쓰러지지 않는 든든한 나무가 되어보자.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