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수 작가
dslee@globalpeace.org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며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글로벌피스재단에서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 진행하고 있다.
- [이두수의 절차탁마] 우리들의 영웅 '아버지' 지난 16일 용산아트홀에서 서울그랜드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한국 영화음악 콘서트에 참석했다. 영화음악은 영화의 명장면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는 힘이 있는데, 때로는 영화의 한 장면보다 더 오래 가슴에 남는 그런 힘도 가지고 있다. 영화 '미션'에서 ‘가브리엘의 오보에’(넬라 판타지아)는 언제 들어도 가슴이 저며온다. 영화 '기생충'에서 헨델의 음악이 느껴지는 ‘믿음의 벨트’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빈부격차와 계층 간 갈등을 극적으로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 내 가슴에 남는 것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엔딩 장면에 나오는 이동준 감독의 ‘에필로그’다. 이 음악은 들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며 영화 전체를 감싸 안아주는 느낌이다. 한국 영화음악 콘서트에서 이 음악을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들으며 전쟁과 아버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현충(顯忠), 국가를 위해 충과 의를 떨치며 다한 삶을 기린다는 뜻이다. 우리의 많은 아버지들의 삶이 그랬고 이 분들의 노고에 의해 현재의 우리가 있음을 감사하며 우리의 아버지들의 삶이 어땠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의미 깊은 일이다. 힘없이 구부정한 노인들의 모습이 구질구질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우리의 영웅들인 것이다. 나도 그랬지만 우리 6형제는 아버지에게 모두 각을 세웠고 심지어는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시대에 뒤진 것 같은 아버지의 삶의 태도와 완고함은 자식들에게 반발을 샀다. 지금 생각하면 부모님께 너무 심한 말을 했다고 생각하며 미안하고 죄송하고 부끄럽고 후회스럽지만 그땐 그랬다. 나도 자식을 키우지만 자식은 내 맘처럼 커주질 않는다. 자식이 나의 바람과 기대에 어긋나도 할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내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한두 번 들 때가 아니다. 나도 훌륭한 부모라는 소리까지 듣는 것을 바라지는 않지만 아이들에게 자상한 아버지가 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하지만 아이들과 대화가 잘 안 되고 때로는 한동안 대화조차 없는 때가 있기도 하다. 자식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의 나도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고루하고 고집만 센 그런 아버지로 보일 것이다. 뒤돌아보면 나도 아버지와 자잘한 대화를 나눈 적이 별로 없다. 벌초를 하면서 듣은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 농사 일손을 거들며 듣은 전쟁 때 겪은 얘기 등 대부분 서사적인 이야기들이다. 어쩌다 전화를 걸면 전화비 많이 나온다고 “건강 잘 챙기고 열심히 살아” 한마디 하시고는 전화를 끊으셨다. 나도 그런 아버지를 닮은 것 같다. 아이들에게 해 주는 얘기의 대부분은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인 이야기, 한·일 관계에 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나 세계와 인류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등 교훈적인 이야기뿐이다. 아버지는 자식 앞에서 원칙주의자가 되어야 하고 삶의 원칙 앞에서는 단호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자녀가 독립적으로 크지 못하고 우리 사회의 민주적 일원이 되지 못한다. '애들을 응석받이로 키우니까 사회가 이 모양이다'라는 뭐 이런 꼰대 같은 관념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이상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가는 것이다. 어릴 때는 이상을 좇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것이 현실화하기에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적정한 선에서 이상과 현실이 타협하거나 이상을 포기하고 과도하게 현실에 집착하기도 한다. 성숙해진다고 하는 것은 이 둘의 관계를 적정하게 맞추어 가는 과정일 것이다. 아버지. 1930년 6월생인 아버지는 어릴 때 총명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나 보다. 특히 글씨를 잘 써 큰집 할아버지에게 자식 제대로 교육시켜 보라고 논과 밭을 받았다. 당시 아버지는 일본 사람으로서 기본교육에 해당하는 소학교를 다녔다. 중학교를 갈 형편은 못 되어 농사를 거들었고 훈장이었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한학을 잠시 배우다가 광복을 맞았다. 광복되던 그해 15살에 큰집 할아버지 주선으로 양평에 사는 20살 난 서씨 여인과 결혼했다. 광복과 더불어 그의 국적만 바뀐 것이 아니라 아직 어리지만 한 집안에 가장이 되는 엄청난 변화를 맞은 것이다. 광복 후 나라의 혼란만큼이나 본인도 힘들었을 것이다. 일본에 갔던 삼촌은 돌아오지 못하고 숙모가 두 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본인에겐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동생들이 4명이나 더 있었고 1년 후엔 첫딸을 얻어 책임감이 강한 아버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큰집의 맏이로서 일가와 가족이 굶지 않으려면 열심히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20살이 되던 해에는 전쟁이 났다. 38선 부근이라 바로 북한 인민군에 점령당했지만 한동안은 잠잠하다가 추석 무렵 인민군에게 징집명령을 받았다. 추석을 쇠고 다시 모이라는 명령이 있었다. 그런데 추석날부터 연합군의 공습이 시작되자 인민군들은 서둘러 퇴각했다. 국군이 고향을 수복하고 나서는 군인으로 징집된 것은 아니지만 자경단원으로 차출되어 지역 치안 유지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1·4 후퇴를 하면서 자경단도 군인들과 섞여 대전까지 후퇴했다. 추운 겨울 정식 군인이 아니라서 보급품도 없이 각자도생하는 상황이라 생각없이 인민군 옷을 속에 껴입었다가 적의 첩자로 몰려 사형 직전까지 갔다. 그때 마침 헌병대장이 자경단을 조직했던 사람이라 아버지를 알아보고 보증을 서 주어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오니 첫아들이 태어나 있었다. 가족과 다시 만난 기쁨도 잠시, 이번엔 국군 영장이 나왔다. 제주에서 6개월 훈련을 받고 바로 전선으로 투입되었다. 백마고지가 있는 철원지구 부대로 배속되었다. 휴전을 앞둔 당시는 고지전을 벌이며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려고 쌍방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사상자가 엄청 많이 나던 때였다. 매일 같이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그런 죽음의 전장에 배속되었지만 그는 글씨를 잘 쓴다는 이유로 행정병으로 뽑혀 다행히 고진전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고지전에 투입된 전우들은 대부분 전사했다고 한다.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폭격 후유증으로 안면근육마비증이 생겨 평생 찡그린 얼굴 모습을 하셨다. 전쟁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지만 해마다 찾아오는 보릿고개를 어찌 어찌해서 겨우 넘기고 있었다. 마른 땅에도 잡초가 나듯이 자녀는 2년에 한 명씩 태어났다. 그런 와중에도 동생들을 다 출가시켰고 자신의 맏아들은 제대로 교육을 시켜야 한다며 고등학교는 서울로 유학을 보냈다. 농사만으로는 집안을 이끌 수 없어 목상(나무 장사)을 시작했다. 때를 잘 만났는지 제법 돈도 벌었고 서울을 들락거리다 마누라보다 훨씬 젊은 여자도 만나 한때 딴살림도 차렸다. 사고가 생겨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사업이 쫄딱 망해서야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 동네의 새마을 지도자가 되었다. 동네 진입로가 소달구지 한 대 겨우 지나갈 돌투성이 길이라 대부분 지게로 짐을 나르던 시절에 마을 길을 넓히고 다리를 놓고 초가지붕을 슬레이트나 함석으로 바꾸었다. 이에 대한 공로로 대통령 하사품인 자전거 한 대를 받았다. 자전거를 받던 날 동네잔치가 벌어졌다. 나는 지금도 그날을 기억한다. 내 키보다 훨씬 큰 삼천리 자전거에는 금빛 메달이 걸려 있었고 동네 사람들은 자신의 일만큼 자랑스러워했다. 돼지를 잡아 동네 잔치를 벌였는데 그때 숯불에 구운 돼지고기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동네가 매일 바뀌기 시작했다. 소로 밭을 갈던 것에서 경운기로 바뀌어 가는 외형적인 변화 이외에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 태도도 바뀌었다. 그동안 겨울 농한기 때에는 매일 같이 술과 노름판이 벌어졌지만 이제는 누가 더 새끼를 잘 꼬고 가마니를 많이 짜는지 내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침에는 식사 전에 퇴비를 한 짐 베고 논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서야 아침밥을 먹었다.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무렵 우리 동네에 전기가 들어왔다. 전깃불이 켜지던 날 어두컴컴했던 부엌이 대낮 같이 밝던 날 우리 가족은, 아니 우리 동네 사람들은 환호성을 울렸다. 눈이 부셔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다. 텔레비전은 그보다 좀 더 일찍 들어왔다. 뒷집 기춘이네 집에는 서울에 간 기현이 형이 사서 보낸 텔레비전이 있어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보는 동네 극장이 되었다. 안테나는 뒷산 꼭대기에 설치해 마을까지 연결했고 전원은 배터리로 해결했다. 가끔 배터리가 나가 연속극을 볼 수 없는 날도 있었지만 연속극에 푹 빠진 동네 어른들이 돈을 갹출해 배터리를 장만하면서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 전원이 나가는 일은 없었다. 우리 집안의 형제들은 서울 간 큰형 이외는 모두 중학교만 졸업하면 모두 생활 전선으로 내보냈다. 막내였던 나는 시대적인 혜택으로 도회지에 가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서울에 가서 대학까지 다녔다. 당시 대학은 공산주의의 해방구나 다름없었다. 누구나 대학생이면 반정부 데모하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했다. 학과 공부보다는 이념 서클 활동이 의식 있는 학생처럼 보였다. 우리 동네에도 이런 이념적 갈등은 비켜가지 못했다. 당시 아버지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나는 너를 믿는다. 네가 선택한 것에 대해 반성은 하되 후회는 하지 마라. 그리고 무엇을 하든 열심을 다해라.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대단한 삶을 사셨다. 식민지 광복과 새로운 나라 건설기에 가장이 되었고, 전쟁과 국가 건설 기간에는 자신의 청춘과 생명을 바쳐 싸웠다. 그리고 농촌 계몽과 근대화의 시기에는 마을 리더로서 주민들의 의식 혁명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힘썼다. 세계 최빈국에서 이제는 살 만한 세상의 토대를 만든 것이다.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말로는 영화 ‘국제시장’에서 덕수가 아버지에게 하는 말이 떠오른다. “아버지 내 약속 잘 지켰지예.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 언젠가 나도 아들의 손을 잡고 아버지의 무덤가에 가서 아버지를 붙들고 나도 열심히 살았다고, 나도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은 정의가 무엇인지, 공정이 어떠한 것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불확실성의 시대가 되었다. 부끄러운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때 최선을 써본다. 한자로 써보면 最善, 즉 최고의 선은 열심을 다하는 것이다. 자기 책임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 가족을 지키고 나라를 지키며 사회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온 우리들의 아버지, 꼭 안아드리고 싶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에필로그를 들으며 6월의 하늘을 본다. 필자 소개 -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글로벌피스재단에서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진행하고 있다. 2023-06-20 06:00:00
- [이두수의 절차탁마] 5월, 푸른 기상이 만드는 삶의 궤적 5월, 나무에서 배우는 푸른 마음 5월이 되면 가슴이 뿌듯해진다. 여기저기 피어나는 풀꽃들의 잔치로 아침에 산보하기에도 기분이 좋다. 가정의 달이라고 해서 가족을 생각하면 왠지 가슴이 푸근해진다. 햇살은 더욱 따뜻해져 나무들은 연녹색에서 진한 초록으로 변해가며 나무 그늘도 점점 진해지고 있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빠르게 변신하는 자연의 힘을 느끼기도 한다. 이렇게 주변 환경의 변화에 대응해 나가는 것을 인간계에선 혁신이라고 하는데 우리 자신은 주변이 변화해도 우리 스스로나 조직을 변화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도 5월에는 어린이날이 있어 어린이의 소중함과 어버이날을 맞아 부모님께 사랑과 감사를 표하고, 스승의날에는 자신에게 가르침을 준 어른들을 찾아 감사와 우애를 나누는 것은 더 없이 아름다운 모습이다. 12년 전 딱 이맘때다. 2011년 일본 동북 지역에 진도 M9.1이라는 전무후무한 지진에 거대한 쓰나미가 몰아닥쳤고 아오모리에서 도쿄에 이르는 해안가 지역은 초토화되었고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나는 그때 공연 관련으로 홋카이도에 있었고 5월에는 ‘동경전설’이라는 초대형 한류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서울의 방송사, 각 기획사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분주할 있을 때인데 갑자기 삿포로 사무실이 지진의 영향으로 기우뚱하더니 바로 이어 TV에서는 긴급속보를 내고 있었다. 이번 지진은 통상 있는 그런 지진이 아니라 초대형 지진이며 거대한 쓰나미가 올 것이라며 주민들에게 긴급히 대피할 것을 전했다. 시시각각 전해지는 TV 영상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도쿄 신주쿠의 고층 빌딩이 이리저리 휘면서 건물끼리 부딪칠 만큼 아슬아슬해 보였다. 센다이 공항의 비행기들은 장난감처럼 물에 떠다녔고 해안가 마을들이 시커먼 물에 잠기는 모습은 공포영화 그 자체였다. 동북 대지진 재해로 일본은 엄청난 인명 피해와 재산상 피해를 입었다. 해외에서 많은 나라들이 구호품과 구조대를 파견했다. 당시 서울시는 그 어느 곳보다 빠르게 구조대를 파견해 주었다. 당분간 나라 안은 침울했지만 현지에 가서 직접 봉사하겠다는 자원봉사자들이 줄을 이었다. 전국에서 몰려드는 자원봉사자들이 너무 많아 자원봉사를 자제해 달라는 뉴스를 내보낼 정도였다. 구호품이 산처럼 쌓였지만 도로가 뚫리지 않아 현지에선 배분에 어려움을 겪었다. 며칠씩 굶는 사람들이 속출했지만 불평하거나 시위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가까스로 식료품이 전달되어도 사람들은 길게 줄을 서서 받아갔고 보급품이 부족하면 더 힘든 사람부터 나눠주라며 양보하는 모습은 고결한 인간의 품위를 보여주는 듯했다. 이런 상황에 대형 공연장이나 체육관은 피난민들 수용소로 사용했기 때문에 공연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4월이 되자 사회도 침울했던 분위기에서 점차 일상으로 회복되어가고 있었지만 아직 희생자에 대한 애도기간이어서 모든 공연은 자숙하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신문 칼럼에 ‘쓰나미로 쓰러진 벚나무도 때가 되니 꽃을 피우고 있다. 언제까지 우리는 침울한 분위기에 젖어 있어야 하는가. 오늘 이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인생 마지막일 수도 있다. 일상의 회복이야말로 희생자에 대한 가장 큰 애도’라는 글이 올라왔다. 희생자를 추념하는 것이 함께 슬퍼하며 애도하기보다는 일상으로 돌아와 웃고 떠들고 사는 것이 가장 큰 위로라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 변화로 당초 계획했던 초대형 한류공연 ‘동경전설’은 일본 최초의 재난 위로공연이 되면서 말 그대로 전설적인 공연이 되었다. 한 곳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나무 나는 요즘 매일 아침마다 여의도 공원을 산보하고 있다. 샛강을 걸으면 마치 정글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도심에 이런 친자연적 공원이 있다는 것에 감탄하고 있다. 이곳에는 다양한 나무들이 서식하고 있다. 며칠 전에는 버드나무가 내뿜는 화분이 흰 눈처럼 휘날렸지만 요즘은 아카시 향기가 공원에 가득하고 이팝나무, 벚나무도 제법 많다. 계절에 따라 꽃으로 또는 화분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주는 이들 나무를 보며 비록 나무들은 이동할 자유가 없이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평생을 살지만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것을 한자로 '一所懸命(일소현명)'이라고 한다. 자기가 받은 직분에 혹은 받은 땅에서 일생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다. 직업이라는 말도 이런 개념에서 나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직업을 흔히 3가지로 구분하는데 생업(Job), 직업(Career), 천직(Calling)으로 나눈다. 생업은 말 그대로 생계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일이다. 직업(커리어)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존재감을 확대해 가는 과정으로서의 일이다. 천직은 하나의 소명의식으로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이며 자신의 행하는 일로 인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사명감이다. 내가 보기에 나무들은 모두 자신이 뿌리내린 곳을 하늘이 내려 준 봉토라 여기며 평생 그곳을 지키며 다른 생명을 키우고 있다. 우리 어머니들이 위대하지만 이 나무들 또한 자연에게는 위대한 어머니다. 이 한 그루 나무로 인해 땅이 보전되고, 온갖 생물들이 번식하고, 새와 동물의 안식처가 되고, 청명한 공기도 제공하고, 시원한 물도 제공한다. 가지가 부러지고 줄기가 꺾여도 나무는 살아 있는 한 때가 되면 자신의 꽃을 피운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환경을 불평하지 않고 비탈진 곳이라면 비탈진 대로, 바위 위라면 작은 틈새라도 붙들고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서 있는 모습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에게 뒤질 것이 없다. 아마 나무가 인간에게 부러운 것이 하나 있다면 그건 자유일 것이다. 자유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 의미 자유(自由) 라는 말은 예전부터 한자문화권에서는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근대적 의미의 새로운 용어인 'Freedom, Liberty'의 의미를 수용하는 데에는 기존의 자유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자주, 자립'이라는 말로 돌려 쓰다가 일본의 나카무라(中村正直)씨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On Liberity)을 번역하면서 자유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유의 의미는 과거에 쓰던 의미보다는 인간의 고유한 권리로서 법률이 정하는 그 범위 안에서의 자율성, 즉 책임이 뒤따르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밀은 자유의 한계를 규정하기 위해 말과 행동을 구분하며 '말'은 그 어떤 것도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하고, '행동'은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에서 사적인 행동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생각을 마음대로 말할 '표현의 자유’와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에서 자신의 개인적이고 사적 행동을 간섭받지 않을 '사생활의 자유’가 인류의 공익과 개인의 행복에 있어서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자신의 주장을 피는 것, 이것이 바로 자유에 따르는 책임이다. 즉 자기 책임하에 운용되는 이 자유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만물의 영장임을 증명할 수 있는 힘이다. 나는 사랑도 이 자유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자유에 대한 깊은 생각이 없는 행동은 그것이 비록 선의의 행동이라도 사랑은 없고 행위만 남는다. 책임은 없고 방종만 흐른다. 말 그대로 생각이 없는 ‘내 맘대로 느끼는 대로’ 행동일 뿐이다. 이런 자유는 잠깐의 쾌락이 있을지 모르지만 가슴을 울리는 감동은 없고 결과가 없다. 이런 사랑은 행위로 끝날 뿐 생명으로 연결되지 못하며 지속적일 수 없다. 우리 사회에 저출산은 이와 같은 요즘 우리 문화와 다르지 않다. 생각해 보자. 요즘 우리 사회는 그 어느 시대에도 누려보지 못한 제일 좋은 출산, 육아, 교육 그리고 최고의 주거 환경에서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군 이래 제일 저조한 저출산의 현실에서 살고 있다. 한류의 힘 요즘 한류가 세계 문화를 리드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한 상황이다. 국내 영화계를 봐도 극장에서 관람객의 톱을 차지하는 것은 외국 영화다. 최근 야권에서 불을 지핀 ‘토착왜구’ ‘친일분자 척결’이라는 분노에 가득 찬 구호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일본으로 향하는 한국 관광객이 가장 많고 국내에선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가 가장 인기가 있다. 독립운동가 김구는 평생을 일본과 싸웠지만 그가 주장하는 문화강국론에는 타국을 증오하거나 멸시하는 것이 없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 ‘나의 소원’에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고 말하면서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길 원한다"고 했다. 이웃 나라를 폄하하고 조롱한다고 해서 자국을 사랑하는 맘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기미독립선언서에는 일본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른 길로 가도록 타이르며 인류 공영과 평화를 위한 대의에 우리 민족의 독립과 각성을 주장했지, 일본 타도라는 적국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부추기지 않았다. 그래서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3·1운동에 참여했고 이 높은 도덕적 고결성의 비폭력저항운동은 이후 모든 식민국가 독립운동의 표본이 되었으며 인류사를 바꾼 위대한 운동이 되었다. 한류가 세계인들에게 높이 평가받는 것은 한국인들의 가족을 향한 한없는 정성과 한의 정서, 원수를 원수로 갚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로 품어가는 웅혼한 정신에 새로운 카타르시스를 느낀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깊이를 현대 음악과 영화로 새롭게 해석해내는 한국인들의 표현 능력에 세계인들은 기꺼이 환호한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우리는 영화, 드라마, 팝, 클래식 연주, 그리고 게임에서까지 톱을 달리며 여러 국제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 등 우리가 세계 문화계를 선도하는 듯했다. 하지만 요즘 우리 사회는 너무 가벼워졌다.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에 무게감이 사라졌다. 새로운 문명을 이끌고 갈 문화의 힘을 제공하기에는 모든 부문에서 문화적 깊이를 잃어가고 있다. 특히 최근 K-팝을 선도하는 우리 아이돌의 가사나 안무 그리고 패션은 섹시와 폭력이라는 원초적 욕망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솔직히 음악을 팔고 있기보다는 성을 팔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런 것이 단기적으로 시청률을 높이고 마케팅에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팬들에게 외면을 당할 것이다. 인류 보편적이며 문명을 새롭게 구축할 깊이가 없으면 오래갈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문화시장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치 현실은 더 자극적이고 선동적이다. 개인의 각성 근대의 출발은 개인의 발견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역사는 한때 신권자만이 생각할 힘을 가졌고 누군가 중간 매개자를 세워 그의 눈과 입을 통해 신을 바라보았다면, 이젠 내가 당당히 혹은 홀로 외롭게 신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주교와 사제의 사도권에 의한 성사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루터가 발견한 신 앞의 단독자인 개인의 신앙으로 구원받는다는 개념은 근대성의 단초를 놓는 혁명이었다. 이렇게 개인의 발견이 기독교에 종교개혁을 가져왔고 계몽주의라는 인문학적 혁명을 가져왔다. 이러한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그 흐름은 미국이라는 ‘새로운 나라’ 근대국가 건설로 결실되었다. 이제 또다시 문명의 나침반은 아메리카 대륙을 지나 다시 아시아 대륙으로 돌아오고 있다. 문명의 전환, 새로운 문명의 해석이 필요하다. 어쩌면 아시아 대륙에서 새로운 차원의 치우(蚩尤)와 황제의 신화적 싸움이 재연될지 모르겠다. 정의, 공정, 민주, 평화··· 이런 말은 단지 권력의 액세서리가 아니라 오랜 역사를 거치며 인류가 공들여 만들어 온 가치체계다. 이 말을 쓴다고 자신이 공정해지고 민주스러워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말은 깎고 다듬고, 갈고닦으며, 지키고, 쌓아가는 것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 평생을 애쓰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 과정을 보고 정의롭다 혹은 공정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꽃을 피워야 할 때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할 때는 열매를 맺도록 노력하는 나무의 의지를 다시 본다. 한 그루의 나무도 비록 한 뼘의 장소에서 평생을 살아가며 주변을 위해 도와주고 경쟁하며, 불순물을 정화하며 자신의 삶의 궤적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 푸른 기상이 아름답다. 필자 소개 -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글로벌피스재단에서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 진행하고 있다. 2023-05-16 06:00:00
- [이두수의 절차탁마] 내가 주인이다 ..'가장 아름다운 한국의 싸움' 3월 초는 겨울이 끝나고 봄이라고 하지만 따뜻함을 느끼기에는 좀 음습한 시기다. 그래서 겨울 옷을 입어야 할지 봄 옷을 입어야 할지 망설여진다. 이것을 의사결정장애라고 핀잔을 줄 수 있겠지만 자칫 가볍게 옷을 입었다가는 꽃샘추위로 감기에 들기 십상이다. 그래서 이 시기를 春來不似春이라고 하는 거 같다. 자기독립성을 갖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 3월은 3·1절로 시작한다. 104년 전 우리 선조들은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즉, 자기의 처소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대한독립만세! 여기서 독립은 망한 대한제국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나라, 민주공화국을 만들겠다는 선언이었다. 이 만세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3·1 운동에 참여한 시위 인원은 약 200만명이며 7509명이 사망, 1만5850명이 부상, 4만5306명이 체포되었으며, 헐리고 불탄 민가가 715호, 교회가 47곳, 학교가 2곳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106만명이 참가하여 진압 과정에서 553명이 사망, 1만2000명이 체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식기록으로만 봐도 당시 만세 운동 참가자는 당시 조선 인구의 6.31%에 달하는 것으로, 이것은 국내만이 아니라 해외에도 영향을 끼친 인류사에 남을 문명사적 운동이었다. 참여 인원이 많아서가 아니라 이 운동의 성격이 비폭력저항운동이라는 이제까지 인류사에 없던 새로운 저항운동이기 때문이다. 3·1운동이 지속적인 독립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도 비폭력저항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계몽주의의 중심 이론인 사회진화론은 적자생존이라는 이론으로, 인종차별주의적 정치 또는 행동의 근거가 되어 제국주의에 이용되었다. 이러한 냉혹하고 엄중한 시대에 자본과 군대라는 무자비한 권력 앞에 비폭력적 저항은 존엄한 가치를 위해서는 자기의 목숨도 내놓을 수 있다는 용기있는 모습을 보여준 최초의 사건이다. 그것이 위대한 한 인간이 아니라 민족적으로 들고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당시 세계에도 엄청난 자극을 주었다. 이 운동을 계기로 국내외에 망명정부가 여기저기서 세워졌고 중국과 인도 등 세계에는 이와 유사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대한민국의 민국은 민주공화국을 의미한다. 당시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한 일본도 공화제가 아닌데 왕정이라는 체제에서 수천년을 살아온 조선의 백성들이 시민이 주인이 되는 공화국을 만들겠다니, 당시 시민의식이 어떻게 그리 빨리 진척이 되었을까. 기독교와 민족교육 아무리 조선이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민본주의를 표방하는 나라라고 하더라도 왕정임에는 틀림없고 조선 후기로 오면 왕권은 무너지고 3정의 문란은 극에 달해 나라를 운영할 힘조차 없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 당시 국민을 계몽하고 시민의식을 갖게 하는 데 기독교의 영향은 대단히 컸다고 생각한다. 한국기독교의 선교사는 기독교 선교사의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자주적이었다. 선교사가 파송되어 기독교를 전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지식인들이 해외에 나가 책을 먼저 연구하면서 자발적 신자가 생겨나고 자발적인 예배가 시작되어 선교사를 초빙하면서 선교된 나라다. 이렇게 가톨릭이 먼저 들어와 국민 의식의 변화를 이끌다가 엄청난 핍박으로 잠잠하던 시기, 개신교가 들어와 학교와 병원 등 신학문 운동을 일으키며 빠르게 선교의 영역을 넓혔다. 한국의 민족 운동이나 독립운동은 교회의 움직임과 불가분리의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발전했다. 그것은 기독교의 교리는 인간은 창조주로부터 자유롭고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그로부터 존엄이 부여되었다고 하는 사상을 기본으로 한 것이므로 기독교인들은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다른 민족의 부당한 구속과 압박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의식이 싹텄다. 이들이 하는 강연 및 설교의 내용은 주로 이스라엘 민족의 수난과 구원의 역사 그리고 인간의 인권과 자유 그리고 인간의 존엄에 대한 정신을 은연중에 강조하였다. 그리고 한글성경이 나오면서 국민적 교육은 더 널리 깊게 진행되었다. 한글 성경이 나오기 전 해인 1910년은 국가적으로 한민족이 일본에게 합방 당한 너무나 슬픔에 가득 찬 해였다. 그러기에 당시의 수백만 한국인들은 한글로 된 성경을 보자 열렬히 애독하였다. 나라 잃고 멸시당하는 힘겨운 처지에 빠질수록 더욱 우리말과 우리 글의 귀중함을 뼈아프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은 교인들뿐 아니라 일반 민중 사이에도 널리 보급되어 한국 국문학사에도 불멸의 공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이 성경의 내용이 진리로서 무지와 몽매를 깨우치면서 겨레 사랑하는 마음을 함양하여 애국 애족심을 크게 일깨웠음은 두말할 것이 없다. 일례로, 1907년 1월 2일,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방위량(邦緯良)’이란 우리 이름을 가진 미국의 블레어(Blair) 선교사의 주관으로 성경 강의를 하는 사경회를 열었는데 매일 저녁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약 1천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집회에 참석하려면 짧게는 16㎞, 길면 160㎞에 이르는 아주 먼 거리를 걸어야 했기에 2주간 사경회에 참석한다는 것은 아주 고된 일이었지만 미국의 선교사가 전하는 새로운 성경 이야기와 서양 문물에 대한 정보를 듣기 위해 주민들은 그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찾아온 것이라고 한다. 기독교 부흥으로 당시 백성들은 평양을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평양 일대의 학교는 단순히 목회 및 전도자의 양성에 국한되지 않았고, 민족과 국가의 앞날을 짊어지고 나갈 지도자의 양성을 목표로 삼았다. 조만식, 안창호 등은 바로 이러한 교육을 받은 뒤 기독교를 기반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했고, 민족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한국의 싸움’, 3·1운동 당시 한국에 있다가 미국에 돌아간 선교사는 100여년 전 우리의 독립만세운동을 이렇게 칭했다. 1919년 미국에서 한 해 등장한 한국관련 기사를 월별로 살펴보면 1~2월 3건에 불과했다가 3월에만 112건이 나온다. 4월 97건을 포함하면 두 달간 209건. 이해 나온 402건 중 절반 넘는 기사가 3월과 4월에 집중적으로 보도된 것이다. 미국 신문 속에 한국의 독립을 전하는 소식이 3·1운동을 계기로 급증한 셈이다. '역사상 가장 평화적인 저항운동'이라고 불렀던 3·1운동은 인터넷도 휴대전화도 없던 100년 전 태평양을 건너 미국 땅에 닿았다. 워싱턴뿐 아니라 노스캐롤라이나, 텍사스, 버지니아, 애리조나, 몬태나 등 미국 방방곡곡에서 발행되는 신문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비로소 미국에서도 한국(KOREA)이라는 나라의 사람들이 독립을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3·1운동의 의미는 전국이 들고 일어나 태극기를 흔들며 일본에 독립을 선언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다지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한국이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반만년 역사를 가진 독립국이었고,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 국민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는 사실, 한국의 상황과 한국인들의 의지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린 계기가 된 것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레닌의 제국주의론 3·1운동이 일어나게 된 계기는 동경에서 학생들이 일으킨 2·8독립선언이었고, 2·8 독립선언은 당시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웅으로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 피식민지인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윌슨 대통령에게 자결 원리는 바로 민주적인 국가 성립의 필수 조건이었으며, 이는 더 나아가 세계평화를 위한 초석이었다. 즉 모든 국가가 피치자의 동의에 의해 성립될 때만 이러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또한 자결의 기본적인 내용으로 평등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민족의 자결을 직접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명문화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이 ‘자결’을 민족의 자결로 해석하고 전유했다. 전시에 그가 한 연설과 주장, 즉 승리 없는 평화와 민족자결주의 그리고 항구적인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국제연맹 창설의 제안은 패전국으로 하여금 공정한 평화 협상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하였으며 억압받는 전 세계 피식민지인들에게는 식민지 통치로부터 해방이라는 새로운 희망에 부풀게 하였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10월 혁명 직후 발표된 레닌의 선언들에 대항하려는 측면이 강했다. 레닌은 “혁명에 의한 제국주의 국가 타도만이 식민지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며, 세계 사회주의혁명을 완수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하였다. 이에 반하여 윌슨은 “제국주의 국가 간의 타협과 양보에 의해 식민지 문제를 점진적, 평화적 해결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윌슨은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의 영향이 식민지 약소민족들에게 미치는 것을 차단시키려고 한 측면도 있다. 레닌은 자신의 제국주의 이론을 통하여 제국주의는 소수의 선진국들이 엄청난 다수의 주민들에게 식민지적 억압과 금융적 교살을 자행하는 세계적 체제가 되었다는 점. 그리고 자본 수출은 후진국과 식민지에서 자본주의의 발전과 격렬한 민중적 저항을 초래함으로써 세계혁명의 가능성을 증대시키고 있다는 점 등을 입증하고자 했다. 이런 제국주의 이론에 근거하여 레닌의 민족자결권 옹호로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유럽의 정세는 레닌의 예측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아시아지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아시아 지역의 민족운동이 급속히 확산되자 레닌은 아시아 민족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에게도 강한 영향을 미치게 되어 독립운동은 두 개의 방향으로 나뉘게 되었고 결국에는 해방이 되어서도 두 개의 정부를 갖게 되었다. 당시 독립지사들의 독립운동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어 자기 정부를 갖는 것이 소원이었기에 일본으로부터 독립이 된다면 그 과정이 사회주의든 기독교이든 상관이 없었다. 독립 후에 어떤 나라를 만들겠다는 비전이 없었기에 이것이 분단의 원인이 되었다. 오늘날은 어떤가. 공산주의는 망했고 미국식 자본주의는 부패했다. 지금도 패권적인 경쟁구도는 과거와 다르지 않다. 이러한 때에 독립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나의 독립선언 독립의 의미는 무엇인가. 해방과 광복의 의미와는 어떻게 다른가. 명지대 진태하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독립이란 용어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과 같이 신생국이 다른 나라로부터 처음으로 자립하게 되는 경우에 사용하는 말이며, 광복이란 용어는 종전에 독립국이었던 나라가 일시 주권을 강탈당하였다가 끈질긴 항거로 되찾은 경우에 사용하는 말이라고 한다. 따라서 유구한 독립국이던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35년간 주권을 일시 강탈당했다가 다시 찾은 것은 광복이라고 해야지 독립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북한의 조국해방기념일과 같이 해방이라고 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해방은 타동사로서 해방되다 또는 해방된 날 하면 능동의 의미보다 피동의 의미가 강조되어 우리 선조들이 적극적인 항거와 투쟁의 결과 광복이 된 의미를 왜곡한다고 주장한다. 용어는 매우 중요하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이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아 용어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이 시대 더 중요한 것은 관심의 초점을 나에게 돌려보는 것이다. 민주 공화국의 시민인 나는 어떠한 존재이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무엇으로부터 독립이어야 하는가. 나라를 다시 찾았으니 광복이고 식민통치에서 벗어났으니 해방이다. 그 주어가 무엇인가에 따라 그 술어 바뀌듯이 나는 무엇으로부터 해방되고, 광복이 되어야 하는가. 나는 나의 삶의 주인(아주, 我主)이라고 만세를 불러보는 것이다. '내가 주인이다'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내가 탁월해지는 것이다. 나의 함량을 높이는 것이다. 나의 함량을 높인다는 것은 사람의 격을 높이는 것이다. 사람의 격을 높인다는 것은 지적인 수준을 높이는 것이며, 타인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이며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지적인 수준을 높인다는 것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차원을 높이는 것이다. 차원 높은 시선을 갖는 것이다. 내가 탁월해지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열심히 공부해야 하고, 많은 책을 읽어야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해서 자기 건강도 지켜야 한다. 자기관리를 할 줄 아는 것이다. 먹고 싶은 거 다 먹으면서 다이어트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며, 운동도 하지 않으면서 멋진 몸매를 갖겠다는 욕심이 아니라, 열심히 운동하고 자기 단련을 하는 것이다. 내가 주인이 되는 것은 나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아니라 '나'를 중시하는 것이다. 나의 고유함, 개성진리체라고 하는, 이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나의 고유함을 사랑하는 것이다. 모두가 같이하는 유행을 따르지 않으며, 전체 습관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해서 왕따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괴짜라거나 황당하다라는 소릴 들어도 자기의 고유한 특질을 사랑하며 크게 키워나가는 것이다. 내가 주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나 자신을 아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슈가 되는 것이고, 임제선사가 말하는 수처작주 하는 것이다. 내가 메시아가 되는 것이고, 내가 부처가 되는 것이며 내가 군자가 되는 것이다. 대붕의 꿈을 꾸는 것이다. 필자 소개 - 이두수 작가는 수년 전부터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자신이 직접 체험한 노동 현장의 삶과 애환을 그림과 글씨로 표현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건설 노동자로 일하기 전 시민단체인 아프리카아시아난민교육후원회(ADRF)에서 8년간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2023-03-17 06:00:00
- [이두수의 절차탁마] 고통마저 즐기는 사람 '위버멘슈' 2월 들어 우리 사회에 던져진 큰 뉴스는 한 청년이 ‘나는 이제부터 조국의 딸이 아니라 조민으로 살겠다”는 선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의 가족 이야기나 진영에 얽혀 있는 이야기는 내버려두더라도 요즘 시대에 한 청년이 아버지한테서 독립해서 스스로 살겠다고 하는 이 선언에서 나는 2·8 독립선언서 같은 비장함을 느꼈다. 독립은 국가나 사회에서만 쓰는 말이 아니라 한 인간이 인격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성숙하여 사회 구성원으로서 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매우 중요한 매듭이 되기 때문이다. 공자도 나이 30이면 이립(而立)이라고 해서 '마음이 확고하게 도덕 위에 서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 홀로서기는 나이에 관계없이 평생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 2월 들어 내 몸에 이상이 왔다. 지난달 <일상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이란 전시회를 끝내고 바로 교수협회 워크숍을 진행하고 바로 이어서 부산과 광주 그리고 천안에서 대규모 시민대회를 치렀다. 늘 자랑처럼 여기던 나의 강철체력도 녹슨 철골처럼 여기저기 삐걱거리더니 지난주에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코로나 시대에 감기란 예사롭지 않다. 감기에 걸리니 우선 몸이 약해지고 정신이 혼미해지더니 의욕이 상실된다. 내 딴에는 정신이 육체를 주관한다는 강한 신념으로 더 많은 일을 하겠다고 몸을 다그치지만 몸은 스스로를 약화시키며 정신에 저항하더니 이젠 몸과 마음이 완전 무장해제된 격이다. 찬찬히 돌아보니 다 내 과욕의 산물이다. 누군가 옆에서 ‘무리하게 일하지 마세요’라고 말할 때 깊이 새겨듣지 않았다. '무리(無理)하다'는 말은 ‘이치에 닿지 않아 억지스럽거나 정도가 지나치다’는 말이다. ‘무리했다’는 것은 일도 이치에 닿게 한 것도 아니며 단지 뭔가 열심히 하려 하지만 그것은 억지스러웠고 정도가 지나쳤다는 것이다. 과욕, 과식 등 과(過)자가 붙어서 좋은 말이 없다. 그것이 무리(無理)였다면 아니함만 못하다. 통렬히 반성하며 가족에게 이러한 사정을 얘기했더니 아들에게서 이런 말이 왔다. “자애(自愛)하세요.” 아들에게서 이런 말이나 듣고, 참 면목이 없다고 여기면서도 자애란 무슨 의미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자중자애,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자신을 아끼는 사람이라야 타인도 존중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나는 나 스스로를 사랑한 적이 있을까,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무엇일까, 나를 사랑한다는 말이 이기주의와는 어떻게 다른가 등 끊임없이 생각에 생각이 떠오르며 자애와 자립은 아주 관계가 깊다는 것을 알았다. 자애에 대하여 초인이라는 말이 있다. 위버멘슈(독일어 Übermensch, 영어 Overman)는 프리드리히 니체가 삶의 목표로 제시한 인간상이다. 위버멘슈가 어떤 초월적이고 모델적인 슈퍼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니체도 삶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지 그 자신도 실제로 인간이 위버멘슈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위버멘슈가 되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건 이상이기 때문에 그러지 못해서 좌절을 하고, 그 좌절마저도 긍정할 줄 알자는 얘기다. 그는 세 가지 유형의 인간을 예로 들었다. 나는 이 위버멘슈가 되는 길이 바로 자애라고 생각한다. 첫째가 낙타형 인간이다. 니체는 사람들 중에도 낙타와 같은 정신을 가진 자들, 즉 자기 삶을 스스로 고통스럽게 만들면서 그 고통을 그저 받아들이고 ‘견뎌 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노예정신을 지닌 자들이 바로 그들이라고 말한다. 낙타는 아무리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쫴도, 아무리 무거운 짐을 싣더라도 꿋꿋이 참고 견뎌 내는 특질이 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낙타는 주인에게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낙타의 성실함과 헌신에 감탄하지만, 사실 낙타는 스스로 자기 삶에 가혹한 고문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에게 가스라이팅 당하는 낙타의 삶을 의외로 우리는 선호한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주인의식을 갖자’고 말하면서 더 열심히 주체적으로 일해 주길 바라지만 주인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묵묵하게 성실하게 나에게 맡겨진 일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라 여긴다. 솔직히 말하면 나에게도 이런 면이 있다. 나는 정신이 육체를 주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육체는 언제든지 정신이 이끄는 대로 따라주어야 한다. 육체가 잘 따라주지 않는 것은 정신의 리더십이 약하기 때문이라 여기며 정신무장을 강조했고, 이에 따라 몸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몸과 마음의 관계는 주체와 대상의 입장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는 관계라고 생각은 하지만 실제는 복종하고 따라야 하는 주종관계로 여겨온 것이다. 이것이 내 몸과 마음에만 적용했을까. 부부 관계나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도 이런 식의 생각이 지배하지 않았을까. 둘째가 사자형 인간이다. 사자는 자유를 향한 열망을 가진 동물을 상징한다. 사자형 인간은 낙타형 인간과는 달리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사자는 신의 명령이나 권위, 도덕에도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으르렁거리며 “나는 하고 싶다”고 말하는 자다. 니체는 자유를 이루고자 한다면 낙타의 정신에서 사자의 정신으로 옮겨가는 변신을 겪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사자의 정신을 지니려면 우리는 수많은 위협과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스스로 자신만의 욕망에 따른 가치를 창조하고 그것을 세상에 당당히 내세운다는 것은 분명 어렵고 힘든 일이다. 하지만 사자의 정신은 기존의 신이나 권위, 전통과 함께하며 안정하기보다는 기꺼이 고독과 굶주림을 선택해야 한다. 사자는 낙타처럼 비굴한 노예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의 삶이 유쾌하고 즐거워 보이지는 않는다. 그가 싫어하는 것을 ‘아니오’라고 부정하는 법만을 알고 있을 뿐 삶을 긍정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발전 원동력이 ‘대립물의 투쟁’이라는 철학을 가지고는 상대를 긍정하거나 인정할 수가 없다. 자기 힘이 약할 때는 오직 상대를 증오하거나 약점을 이용한 퇴진을 요구하고, 상대의 힘이 약해지면 주저 없이 상대를 적폐로 몰아대며 숙청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의구현이고 공정사회를 이루는 것이라 여긴다. 본인들의 이런 노력이나 투쟁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성사되지 않을 때는 정신 승리만이라도 만들어 내 구성원을 자위한다. 요즘 확증편향이란 말이 유행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자기 견해 또는 주장에 도움이 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취하고, 자신이 믿고 싶지 않은 정보는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성향을 말한다. 쉽게 말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보편적 현상이다. 과학기술과 사회 환경 발전에 따라 매스미디어 시대에서 개인미디어 시대로 옮겨가며 나타나는 현상일 수도 있지만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사회적 병폐로 나타나고 있다. 얼마 전 조국씨의 판결이 나던 날 그의 딸 조민씨가 한 유튜브 방송에 나와서 한 말과 이 말에 대한 지지자들의 두둔은 바로 이런 현상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한 예가 될 것이다. 조국씨 가정은 단지 한 가족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그 가정의 행동은 국가의 운명마저 바꾸어 버렸다. 이것은 한 가정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가 대표하는 한 세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자녀를 키우고 있지만 한 아이를 대학에 보내는 데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몰랐다. 한 청년이 대학과 의료전문대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이렇게 많은 서류가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모두가 놀랐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서류가 필요하다는 것이 오히려 부정과 탈법을 부채질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제출한 서류는 대학에서 받은 표창장이나 대학에서 활동했다는 인턴활동, 봉사활동, 권위 있는 논문에 제1저자로서 등록 등 제출된 자료가 모두 허위이거나 조작된 것으로 나타났다. 직접 서류를 조작한 어머니는 이미 실형을 받아 복역 중이고 아버지는 이번에 실형을 받은 것이다. 조사 과정에서도 그녀는 "봉사와 인턴을 한 뒤 받은 것을 학교에 제출했고 위조를 한 적도 없다" "주변에서는 어머니가 저를 보호하려고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들을 했다고 할 수도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번에 조국씨는 서울중앙지법에서 공·사문서 위조·행사, 업무방해, 뇌물수수, 청탁금지법·공직자윤리법 위반, 증거위조·은닉교사,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를 받아 징역 2년 실형을 선고받았다. 실형을 받던 그날 그녀는 유튜브 방송에 나와 “이제 조국의 딸이 아니라 조민으로 당당하게 숨지 않고 살고 싶다”고 말하며 “지난 4년간 조국 전 장관의 딸로서 살아왔는데 아버지가 실형을 받으시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떳떳하지 못한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본인은 떳떳하고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발언에 대해 한 진보 인사는 “의사가 되는 것은 특권을 누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기여의 한 수단일 뿐이라는 한 젊은이의 맑고 단단한 목소리와 투명한 표정은 누가 승리했는지를 보여준다. 부당한 고난이 청년을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조민이 그 증거”라고 말했다. 정의와 공정이 과장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위버멘슈가 되는 세 번째 유형은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이고,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을 상징한다. 어린아이는 사자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욕망에 충실하지만 도덕과 법에 관심도 없고 그저 심지어 양심의 가책이란 것도 없다. 그저 재미와 놀이가 중요할 뿐이다. 니체가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본 것은 이처럼 욕망에 충실하고 도덕적 선과 악을 넘어선 긍정의 특성일 것이다. 직원들과 지방 순회를 다니면 아침식사를 같이 하게 되는데 호텔에서 조식 뷔페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나이 든 사람들과 젊은이들의 식습관 차이를 보게 된다. 연장자들은 보통 밥과 된장국 그리고 김치를 당연 메뉴로 선택한다. 이미 몸에 맞는 최적화된 식단이기에 다양하게 차려진 식단이 오히려 불편하고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에 비해 젊은 층은 역시 음식도 다양하게 즐길 줄 안다. 동서양을 넘나들며 요것조것 조금씩 맛보며 평소에는 먹어보지 못한 것을 먹어보는 도전 정신도 투철하다. 우리는 이제 익숙함이나 전통을 누구나 지켜야 하는 보편적 가치라고 강요할 수 없다. 다양함은 혼돈으로 보이고 선택에 불안할 수 있다. 그러나 다양함이나 낯섦도 즐기려 한다면 놀이가 된다. 거기에 도전 정신이 있다면 더 익사이팅하다. 이제 우리는 과거나 미래에 얽매이지 말고 현재에 머물며 모든 대상을 놀이의 대상으로 삼는 어린아이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 위기(危機)라는 말이 있다. 위기가 불안하다는 말이 아니라 위험과 기회가 공존하는 말이라고 여긴다면 입장에 따라 위험이 기회가 될 수 있다. 사회를 보는 시각도 그렇다. 사회 구성을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보고 이 둘의 관계를 모순이라고 보면서 모순의 극복을 투쟁에서 찾는다면 우리는 상대를 적으로 간주하고 호의도 의심해야 하며 매사 음모론에 시달려야 한다. 반면에 사회 구성을 주체와 대상이라고 하는 상대가 없이는 나 또한 존재할 수 없다고 여기는 관이라면 상대가 누가 되든 하물며 상대가 사람이 아니라 자연물이라 하더라도 나와 동등한 파트너로 대할 수 있게 된다. 한 인간으로서 자기만의 특성을 가진 독립된 자아로 위버맨슈가 되는 길은 삶을 놀이로 생각하는 것이다. 기존의 것을 부정하고 해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파생되는 고통마저 즐기려 하는 사람이 위버맨슈형 인간이다. 바로 절차탁마형 인간이다. 필자 소개 - 이두수(54)는 수년 전부터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자신이 직접 체험한 노동 현장의 삶과 애환을 그림과 글씨로 표현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건설 노동자로 일하기 전 시민단체인 아프리카아시아난민교육후원회(ADRF)에서 8년간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2023-02-14 06:00:00
- [이두수의 절차탁마] 1월, 새 희망 새 출발 …'당신이 하늘이오' 1월은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달이다. 새해 첫 달이라 시작과 출발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지만 사실 그보다는 내 생일이 들어 있는 달이기 때문이다. 정월(설날)에 대한 기억이 그리 좋지는 않다. 내 생일은 정월 초엿새인데 6일 후면 내 생일이 특별한 날이 되지 못하고 정월 제사상에 오르고 남은 음식을 상하기 전에 한데 모아 죽 끓여 먹는 날이 바로 내 생일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릴 적 교회에 다니면서 창세기를 읽으며 새 하늘 새 땅이 시작하는 날 이후 6일째 되는 날 인류 최초의 인간, 아담이 창조된 날에 나도 태어난 그 날이라니 내 생일날이 꽤 의미 있는 날이라 여겨지기는 했다. 그런 새해 정월의 의미를 생각하며 2023년 한 해를 어떻게 맞이하고 보내야 할지를 생각해 본다. 정월의 의미 왜 1월을 正月이라고 했을까. 중국에선 진시황의 이름이 政인데 황제의 이름을 쓸 수 없어 발음이 같은 正을 사용케 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일본에선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의미로 正月(しょうがつ)라고 한다. 어쨌거나 새해 1월을 정월(正月)이라 하는 이유는 첫 달을 올바르게 지내야 일년을 무사하게 지낼 수 있다는 생각에서가 아닐까라고 여긴다. 묵은 해를 보내고 다시 시작되는 해의 첫 달부터 올바르게 보내고 싶은 그 마음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건 사람들 마음속에는 양심이 있어 바르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이 바르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바름, 한자로는 왜 正이라고 썼을까. 퇴근하다가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한 여인의 뒷모습을 보았다. 검은 코트에 흰 백을 어깨에 메고 있었는데 그녀의 어떤 매력이 나를 멈추게 했는지는 모른다. 그녀는 분명 길을 건너려고 했다. 그녀는 일단 가던 길을 멈추고 좌우를 둘러 보았다. 길을 건너면서도 여러 번 좌우를 돌아보았다. 길을 건너간 그녀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내게서 멀리 사라졌지만 여운은 길게 남았다. 건너기를 위해선 우선 가만히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좌우를 둘러보아야 한다. 좌우를 살핀 후에 건너기를 하는 것이다. 찰기시(察其始)라는 말이 있다. 장자에 나오는 말인데 ‘그 본바탕을 잘 살핀다’는 의미다. 장자 철학에서 이 ‘살핌’이라는 말은 매우 중요하다고 철학자 최진석 교수는 말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처음 대하거나 낯선 경우를 만났을 때 우선 살펴야 한다. 살피다는 의미는 ‘어떤 현상을 주의하여 관찰하거나 미루어 헤아리다’라는 의미다. 관찰하고 미루어 생각하는 이 행위가 생략된 채 판단이나 결론을 내리면 그 행위는 과정이 생략된 것이며 대략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먼저 이 살핌이 중요한 것인데 ‘바름’이라는 이 한자 正은 바로 그 의미를 품고 있다. 즉, 바름이라고 하는 것은 일(一)자에 이르기 전에 멈추는(止) 것이다. 정월을 맞는 우리는 사실 한 해를 어떻게 보낼까하는 연간 계획을 세우며 지낼 것이다. 어떤 이는 금연을, 어떤 이는 다이어트를 또 어떤 이는 대박을 바라며 여러 계획들을 세울 것이다. 그런 계획들이 중도에 포기함 없이 잘 진행되길 바란다. 작심삼일이 되어도 실망하지 말기 바란다. 삶이 다 그런 것이니까. 포기하지 말고 다시 세우면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먼저 ‘찰기시’하라는 것이다. 일단 멈추고 살피라는 것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 아름다움도 사랑도 멈추어 살펴야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될 수 있으면 오랫동안 찬찬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애틋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느껴야 행동할 수 있다. 즉, 판단은 살피고 난 후의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찬찬히 살피고 생각하는 과정을 생략하여 성급한 판단을 내리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아마 우리말 중에 가장 글로벌화 한 말이 있다면 그것은 ‘빨리빨리’가 아닐까. 생각의 과정이 생략된 오로지 행동만을 요구하는 결과지상주의 같은 말. ‘정의’ ‘공정’이란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투쟁의 칼날로 사용하며 세상의 온갖 부조리를 다 청소하겠다는 그 투쟁의 보검이 광란의 춤을 추게 한 것도 결국은 살피는 과정이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존재를 대하는 생각의 차이 이러한 생각을 갖게 한 것은 존재를 보는 시각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두개의 존재로 구성된다. 동양도 서양도 마찬가지다. 물리학이든 인문학이든 동일하게 존재하는 모든 것은 두 존재로 구성된다. 이와 기, 음과 양, 형상과 질료, 전자와 핵 등이 있는데 문제는 이 두 존재의 관계다. 대립물의 투쟁으로 존재한다는 유물변증법이 한 세기를 풍미하며 모든 인문학을 점령하는 듯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물리학은 두 존재가 상호 보완적 관계라고 증명해주었다. 유일하게 한반도의 식자층만이 이 두 존재가 대립 투쟁한다고 믿고 투쟁을 일상화하며 발전의 동력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자식만큼은 사랑 속에서 살기 바라며 반미를 외치면서도 자녀만큼은 미국에서 공부하길 바라는 모순을 저지르고 있다. 공정과 정의를 내세우면서도 뒤로는 검은돈을 착복하며 권력의 중심부까지 들어갔다. 남녀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급진 페미니즘, 인내천 사상으로 상생의 도를 펴온 동학인들을 투쟁의 전사로 만들어 온 투쟁사관, 기업이 망할 때까지 투쟁을 부추기는 노사분쟁 등등.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존재를 이렇게 설명한다. 자연이나 사물현상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서로 대립되는 측면들, 대립되는 힘들, 대립되는 경향들이 있다. 예컨대 전기에는 양전기와 음전기가 있고, 자석에는 북극과 남극이 있다. 계급사회에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있다. 이것은 모든 사물은 대립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립물들은 이와 같이 서로 연관되고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투쟁하며 배척한다. 긍정과 부정이 서로 배척하면서 선과 악도 서로 배척한다. 서로 연관 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배척하고 서로 투쟁하는 두 대립물들 간의 관계를 모순이라고 한다. 이 모순은 사물발전의 원천이다(뉴스프리존). 이런 시각을 우리 사회에선 진보적 시각이라 하고 이런 사고구조를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진보라고 부른다. 그러나 과연 이런 시각이 역사의 진보를 이루고 사회를 발전시켰을까. 산업계에서는 노동자와 사용자로 구분하여 노동자가 진짜 주인이라며 사용자를 몰아내자고 한다. 이러한 시각은 노동계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다. 학교는 물론이고 공무원 사회, 병원, 심지어 급진 페미니즘은 전통적인 가족관계를 해체 시키려 하고 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사회나 가정을 근본적으로 남자가 여자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가부장제로 바라본다. 이들은 단지 남성의 특권을 폐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적 구분 그 자체를 종식시키는 것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시각에 머무는 한 우리는 일상을 증오와 투쟁으로 살아야 한다. 다시 생각해 보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대립적으로 존재하는가. 이와 기가 형상과 질료가 대립하며 투쟁하는 관계인가.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 내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의 사이에서 양성과 음성이라는 두 성질이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한다. 이에 대한 예를 들어 보면, 모든 물질의 궁극적 구성요소인 소립자들은 모두 양성 음성 또는 양성과 음성의 중화에 의한 중성 등을 띠고 있는데, 이것들이 상대적 관계를 맺어 원자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원자들도 양성 또는 음성을 띠게 되는데, 이것들의 두 성이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물질의 분자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형성된 물질들이 식물 또는 동물에 흡수됨으로써 그것들의 영양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식물은 각각 수술과 암술에 의하여 존속하고, 또 모든 동물은 각각 수컷과 암컷에 의하여 번식 생존한다. 인간을 보더라도 남성과 여성이 이런 상대적 관계로 존재한다. 또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외형과 내성을 갖추고 있다(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 질료로 설명한다). 그리고 그 보이는 외형은 보이지 않는 그 내성을 닮아 난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는 존재는 두 측면이 대립물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이며 상대를 필요로 한다. 즉, 상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그 관계가 서로의 필요에 따라 잘 주고 잘 받음으로 발전할 수 있고 또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는 의미다. 헤어질 결심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기를 할 때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이 세상을 볼 것인가는 매우 중요하다. 사회현상을 볼 때, 역사를 해석할 때, 국제정세를 파악할 때 이런 철학의 차이가 국가정책을 만들고, 시스템을 만들고, 내 가정과 개인의 인격을 만든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상호모순에 의한 대립물의 투쟁관계로 역사를 보니까 사회는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누게 되고 그들은 모순 관계이니 필연적으로 싸워야 한다. 그래서 재벌, 고위공직자, 엘리트들을 모두 처단해야 할 적폐로 모는 것이다. 이렇게 적폐를 처단하고 나면 정상적인 사회가 될까. 아니다. 다시 이 안에서 모순관계는 나타나며 계급투쟁은 끝없이 계속된다. 원래 존재물의 속성이 그렇다 라는 가설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이런 철학과 헤어질 결심을 해야 한다. 냉전의 종식은 이런 유물변증법적 세계관의 종식이었고 파멸이었다. 하지만 이 땅에서만은 유일하게 살아남았고 변이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북한이라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반인권적이며 봉건독재사회를 유지시켜 주었다. 우리는 이제 상대를 소유하는 존재가 아니라 상대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존재 본래의 특성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란 말이 있다. 인생의 바닥에서 바닥을 치고 올라올 수 있는 힘, 밑바닥까지 떨어져도 꿋꿋하게 되튀어오르는 마음의 근력을 의미한다. 유전자는 이중 즉 쌍으로 되어 있고 나선구조를 이루고 있다. 쌍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대립물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 관계라는 것이다. 우리의 먼 조상들이 꿈꿔왔던 홍익인간, 접화군생, 재세이화 등의 이상이 우리의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다면 이제 우리는 증오와 분열적 가치관에서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하나되는 ‘당신이 하늘이오’라는 한류 본연의 정신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이런 만남의 결심이라면 얼어붙은 샛강 바닥에서 열심히 숨쉬기 하고 있을 송사리 그리고 언 땅 밑에서 찰기시하고 있을 버드나무 뿌리들을 생각하면 정월을 맞는 새 희망 새 출발의 각오로 충분하다. 필자 소개 - 이두수(54)는 수년 전부터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자신이 직접 체험한 노동 현장의 삶과 애환을 그림과 글씨로 표현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건설 노동자로 일하기 전 시민단체인 아프리카아시아난민교육후원회(ADRF)에서 8년간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2023-01-12 01:01:05
- [이두수의 절차탁마] 우리 안의 '홍익인간'을 깨우자 우리는 꿈을 가진 민족이다. 홍익인간(弘益人間) 이라는 이 꿈은 어쩌면 한번도 이루지 못한 꿈이지만 오랜 역사를 거쳐오면서 국난을 당할 때마다 우리 선조들이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은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 위대한 이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자기 나라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면서 그 나라 사람들은 인류가 평화롭게 살아갈 세상을 위해 ‘사람이 곧 하늘’이라며 세계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는 게 얼마나 허황되고 엉뚱한가.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며 한민족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DNA 같은 이상이다. 이 꿈은 민족의 첫 나라 건국이념이며 삼국시대, 고려, 조선을 거쳐 일본에 의해 나라가 합병되는 치욕의 순간에도 이 꿈은 잃지 않았으며 그래서 독립운동의 중심 사상이 되었고 해방이 되어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건립될 때에도 홍익인간 사상은 건국과 교육이념이 되었다. 이제 이 꿈이 실현될 때가 다가온 듯하다. 아직도 국내에는 진영간의 치졸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어 우리 안에 거인이 살아있음을 알아채지 못하고, 원대한 꿈과 끼를 발휘하지 못하게 옥죄고 있는 환경이지만 해외에서 뛰고 있는 우리 젊은이들의 성과와 우리를 바라보는 해외반응을 보면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대안으로서 홍익인간 정신이 새로운 국제질서의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자유, 책임, 경쟁, 기회균등, 노력에 따르는 보상 등으로 이해하고 있는 아메리칸 드림의 내용이 1990년대부터 신자유주의의 광풍으로 인한 민주주의의 후퇴 때문에 미국적 꿈의 핵심이었던 계층이동이 유럽보다 더 힘들어졌다는 평가로 신자유주의 경제를 이끌었던 워싱턴 컨센서스의 실패와, 과거 ‘실크로드’를 따라 ‘일대일로(一帶一路)’를 만들겠다는 원대한 구상을 하고 있는 중국이 국가의 강력한 통제로 경제성장을 주도하는 베이징 컨센서스도 오히려 저개발국가에겐 독재 강화와 부채만 떠안기며 그 효력을 다함으로써 세계는 이제 패권다툼이 아닌 공생 공영의 새로운 이념을 간절히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에서 벗어나 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이 가는 길이 성장국에게는 모델이 될 서울 컨센서스가 나타나길 꿈꿔본다. 지난주 나는 글로벌 평화축제를 위해 필리핀에 다녀왔다. 필리핀은 한국전쟁 참전국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파병했고 그 규모도 참전국 중 셋째로 많은 인원을 파병해 우리나라를 도와준 고마운 나라다. 장충제육관을 필리핀이 지어주었다는 소문이 들 정도로 한때는 우리나라가 본받고 싶은 아시아의 선진국이었다. 필리핀은 인도태평양을 잇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400년간의 스페인 식민지배와 100여년간 미국의 식민통치를 받은 쓰린 역사가 있지만 이 유산은 아시아와 유럽문화를 함께 가진 문화다양성의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피플파워로 21년간의 철권통치를 종식시킨 민주화의 전통을 가진 것도 우리와 유사하다. 이러한 역사 문화적 동질성 때문일까 필리핀에서 통일한국을 지지하고 평화세계를 함께 이루어 가자고 하는 코리안 드림에 필리핀 젊은이들은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화답했다. K-드라마나 K-팝(POP)에만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 평화구축을 위한 대안으로서 코리안 드림이라는 또 하나의 한류 콘텐츠를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꿈을 가진 사람, 꿈을 꾸는 사람,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청춘이다. 청춘은 나이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꿈을 가진 사람은 불안하고 절망적일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며 고난의 현장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2022년을 보내며 나는 다시 꿈을 꾸기 시작한다. 홍익인간의 꿈을 나의 꿈으로 삼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친구들에게 이 꿈을 나누어 함께 꿈을 꾸는 것이다. 내가 꾸는 이 꿈이 엉뚱한 꿈, 실현 불가능한 꿈, 또는 이상주의자의 꿈일 수 있다. 이런 꿈은 이단이나 꾸는 꿈이라고 비하해도 괜찮다. 꿈꾸는 자만이 새로운 길을 열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기 때문이다. 원래 꿈이라는 한자 夢이나 영어의 Dream은 헛것, 이룰 수 없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꿈을 꿈으로 간직하는 데는 의미가 없으며 꿈을 현실로 이루려고 노력할 때 가치가 있기에 이러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나는 몇 가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보았다. 먼저 나는 호기심을 증대시키기 위해 여행과 탐구자로서의 자세를 가질 것이다. 뜻을 가진 학자들과 함께 대화하고 연구하며 탐구된 것들은 세계 젊은 청년들과 공유하며 그들을 차세대 리더로 키우며 코리안 드리머로 육성해 나갈 것이다. 드리머들은 한국을 넘어 코리안 드림 실현을 위한 한반도 주변국과 얼라이언스 체계를 만들어 코리안 드림 글로벌 교류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할 것이다. 이들은 각 지역에서 지속가능개발(SDG)을 하고 기업가정신을 배양해 창업붐을 일으키며 더 많은 청년들이 꿈을 실현해 가도록 UN과 국제기구와 더불어 국제개발협력 리더를 양성해 내는 것이다. 나의 꿈을 찾는 학문적 여행은 두 갈래다. 북쪽으로는 고조선의 연맹체였던 유라시아 국가들을 여행하며 홍익인간 정신을 확인하려 한다. 마자르족(헝가리), 카자크족이 말갈이나 고죽국의 전통을 가지고 있고, 각 나라 옛 조상들이 입었던 전통의상이 고구려 벽화 속에 나오는 인물들의 복장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며 기마민족의 전통을 확인하듯, 그 나라 전통의상을 입고 말을 타고 우리가 한 형제였음을 확인하는 마상 퍼레이드를 벌이는 것이다. 헝가리에서 아제르바이잔, 튀르키예, 우즈벡, 타지키스탄, 몽골, 연해주, 그리고 북한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오는 코리안 드림 환고향 루트를 달려보는 것이다. 남쪽으로는 인도, 인도네시아, 필리핀, 대만, 일본, 미국을 한국으로 연결하는 해양벨트를 구축하는 것이다. 한반도 통일은 주변국가의 호응과 지지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한반도 주변의 이런 나라들의 학자들과 오피니언 리더들이 한반도의 통일을 우선으로 하는 평화와 안보 체인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나는 나의 꿈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내 속에 숨어있는 능력과 자질을 계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우선 나는 독서에 힘쓰려 한다. 한우충동(汗牛充棟)이란 말이 있다. “책을 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리고 집에 쌓으면 대들보까지 닿는다'는 뜻이다. 장자가 친구에게 말했다는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라는 말도 있다. ‘지식인을 자처하려는 사람은 모름지기 다섯 수레 분량의 책을 읽어야 한다’라는 말처럼, 나는 학문적 능력배양과 발전을 위해 1주일에 책 2권을 독서할 것이다. 이렇게 30년을 독서하다 보면 내가 읽은 책은 황소가 끌기에도 힘이 들 정도의 양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독서와 지적인 대화를 바탕으로 글쓰기에도 힘을 기울여 매주 칼럼을 하나씩 쓸 것이다. 여기서 괜찮게 쓴 것은 중앙일간지에 기고도 하겠다. 이렇게 쓰여진 글들은 연말이 되면 책 1권으로 나타날 것이다. 글이나 말로 이치를 알아가는 것을 지식이라 한다면 몸으로 알아가는 것을 체험이라고 한다. 지식은 머리로 쌓아가는 것이라면 체험은 몸으로 익히는 것이다. 지식과 체험은 둘 다 중요하다. 체력은 나를 지탱하는 힘의 원천이다. 게으름, 나태, 권태, 짜증, 우울, 분노 등 이러한 정신적 심리적 허약함은 체력이 버티지 못하고 정신이 몸의 지배를 받아 나타나는 병적 현상이다. 나는 체력단련을 위해 매일 아침 5킬로미터를 달릴 것이다. 이를 토대로 연 2번의 하프마라톤과 한 번의 풀마라톤을 뛰겠다. ‘코리안 드림 마라톤 대회’를 열어 더 많은 사람들과 체력이 행복이며 국력이며 평화세계를 만든다는 것을 공유하겠다. 또한 걷는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 ‘코리안 드림 워킹투게더 대회’를 열어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걷겠다. 걷는 것은 힘이 있다. 간디가 영국 식민지 하에서 소금세의 폐지를 요구하며 비폭력적 시민 불복종행진으로 벌였던 소금 사티야그라하 행진이나 민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가 흑인 참정권을 요구하며 민권 운동의 일환으로 걸었던 셀마 행진처럼 함께 걷는 것은 자유를 추구하는 인권운동이기도 하다. 이처럼 인류의 진보는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라는 말이 틀리지 않음을 보여주겠다. 나는 예술적 소양계발을 위해 매일 그림을 1점 그리겠다. 나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림은 더 많은 상상력을 표현할 좋은 수단이다. 아직 문자가 발명되기 전 원시사회에서 의사소통 수단이 그림이었듯이 그림은 많은 내면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 코리안 드림 실현을 위한 나의 꿈 이야기는 더 많은 그림으로 표현되어야 하고 전시회를 열어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게 될 것이다. 나는 악기 연주에도 도전할 것이다. 마음 다스리기에 악기 연주만 한 것이 없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과 공감을 이루는 데에 음악만 한 것이 없다. 어쭙잖은 실력이지만 나는 연주회를 열어 사람들을 기쁘게 만들고 싶다. 길거리에 나가 버스킹 연주도 하고 싶다. 나는 영어공부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자 한다. 우선 우리 전래동화를 영어로 번역해 아프리카 아시아 빈곤 아이들이게 선물하는 일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그동안은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부탁해 번역 동아리를 만들어 진행해 왔지만, 남에게만 시킬 일이 아니라 나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번역활동으로 나의 영어실력은 더 고급지고 유창해질 것이다. 국제적인 활동을 하는 데 영어는 필수다. 이것이 나를 국제적인 스타로 만들어 줄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꿈은 꿈에 불과하지만 모두가 함께 꿀 때 그것은 현실이 된다’ 이 말은 몽골 초원을 달리던, 나중에 ‘칭기즈 칸’이 된 테무진의 말이다. 당시 부족간의 씨움이 끊이지 않던 시절 부족간의 충돌을 피하고 통합으로 이끈 힘은 다름 아닌 그의 꿈 이야기였다. 새해를 맞이하며 묵은 해를 넘기는 연말 모임에는 각자의 꿈이야기가 풍성해지기를 바란다. 너와 내가 꾸는 꿈이 우리 안에 숨어있는 거인을 꺼내는 그런 꿈이 되길 소원해 본다. 필자 소개 - 이두수(54)는 5년 전부터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자신이 직접 체험한 노동 현장의 삶과 애환을 그림과 글씨로 표현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건설 노동자로 일하기 전 시민단체인 아프리카아시아난민교육후원회(ADRF)에서 8년간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2022-12-14 06: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