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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27 THR
브랜드칼럼
이두수 작가
이두수 작가 dslee@globalpeace.org
  •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며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글로벌피스재단에서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 진행하고 있다.
  • [이두수의 절차탁마] 우리들의 영웅 '아버지'

    지난 16일 용산아트홀에서 서울그랜드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한국 영화음악 콘서트에 참석했다. 영화음악은 영화의 명장면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는 힘이 있는데, 때로는 영화의 한 장면보다 더 오래 가슴에 남는 그런 힘도 가지고 있다. 영화 '미션'에서 ‘가브리엘의 오보에’(넬라 판타지아)는 언제 들어도 가슴이 저며온다. 영화 '기생충'에서 헨델의 음악이 느껴지는 ‘믿음의 벨트’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빈부격차와 계층 간 갈등을 극적으로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 내 가슴에 남는 것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엔딩 장면에 나오는 이동준 감독의 ‘에필로그’다. 이 음악은 들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며 영화 전체를 감싸 안아주는 느낌이다. 한국 영화음악 콘서트에서 이 음악을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들으며 전쟁과 아버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현충(顯忠), 국가를 위해 충과 의를 떨치며 다한 삶을 기린다는 뜻이다. 우리의 많은 아버지들의 삶이 그랬고 이 분들의 노고에 의해 현재의 우리가 있음을 감사하며 우리의 아버지들의 삶이 어땠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의미 깊은 일이다. 힘없이 구부정한 노인들의 모습이 구질구질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우리의 영웅들인 것이다. 나도 그랬지만 우리 6형제는 아버지에게 모두 각을 세웠고 심지어는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시대에 뒤진 것 같은 아버지의 삶의 태도와 완고함은 자식들에게 반발을 샀다. 지금 생각하면 부모님께 너무 심한 말을 했다고 생각하며 미안하고 죄송하고 부끄럽고 후회스럽지만 그땐 그랬다. 나도 자식을 키우지만 자식은 내 맘처럼 커주질 않는다. 자식이 나의 바람과 기대에 어긋나도 할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내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한두 번 들 때가 아니다. 나도 훌륭한 부모라는 소리까지 듣는 것을 바라지는 않지만 아이들에게 자상한 아버지가 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하지만 아이들과 대화가 잘 안 되고 때로는 한동안 대화조차 없는 때가 있기도 하다. 자식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의 나도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고루하고 고집만 센 그런 아버지로 보일 것이다. 뒤돌아보면 나도 아버지와 자잘한 대화를 나눈 적이 별로 없다. 벌초를 하면서 듣은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 농사 일손을 거들며 듣은 전쟁 때 겪은 얘기 등 대부분 서사적인 이야기들이다. 어쩌다 전화를 걸면 전화비 많이 나온다고 “건강 잘 챙기고 열심히 살아” 한마디 하시고는 전화를 끊으셨다. 나도 그런 아버지를 닮은 것 같다. 아이들에게 해 주는 얘기의 대부분은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인 이야기, 한·일 관계에 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나 세계와 인류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등 교훈적인 이야기뿐이다. 아버지는 자식 앞에서 원칙주의자가 되어야 하고 삶의 원칙 앞에서는 단호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자녀가 독립적으로 크지 못하고 우리 사회의 민주적 일원이 되지 못한다. '애들을 응석받이로 키우니까 사회가 이 모양이다'라는 뭐 이런 꼰대 같은 관념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이상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가는 것이다. 어릴 때는 이상을 좇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것이 현실화하기에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적정한 선에서 이상과 현실이 타협하거나 이상을 포기하고 과도하게 현실에 집착하기도 한다. 성숙해진다고 하는 것은 이 둘의 관계를 적정하게 맞추어 가는 과정일 것이다. 아버지. 1930년 6월생인 아버지는 어릴 때 총명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나 보다. 특히 글씨를 잘 써 큰집 할아버지에게 자식 제대로 교육시켜 보라고 논과 밭을 받았다. 당시 아버지는 일본 사람으로서 기본교육에 해당하는 소학교를 다녔다. 중학교를 갈 형편은 못 되어 농사를 거들었고 훈장이었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한학을 잠시 배우다가 광복을 맞았다. 광복되던 그해 15살에 큰집 할아버지 주선으로 양평에 사는 20살 난 서씨 여인과 결혼했다. 광복과 더불어 그의 국적만 바뀐 것이 아니라 아직 어리지만 한 집안에 가장이 되는 엄청난 변화를 맞은 것이다. 광복 후 나라의 혼란만큼이나 본인도 힘들었을 것이다. 일본에 갔던 삼촌은 돌아오지 못하고 숙모가 두 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본인에겐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동생들이 4명이나 더 있었고 1년 후엔 첫딸을 얻어 책임감이 강한 아버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큰집의 맏이로서 일가와 가족이 굶지 않으려면 열심히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20살이 되던 해에는 전쟁이 났다. 38선 부근이라 바로 북한 인민군에 점령당했지만 한동안은 잠잠하다가 추석 무렵 인민군에게 징집명령을 받았다. 추석을 쇠고 다시 모이라는 명령이 있었다. 그런데 추석날부터 연합군의 공습이 시작되자 인민군들은 서둘러 퇴각했다. 국군이 고향을 수복하고 나서는 군인으로 징집된 것은 아니지만 자경단원으로 차출되어 지역 치안 유지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1·4 후퇴를 하면서 자경단도 군인들과 섞여 대전까지 후퇴했다. 추운 겨울 정식 군인이 아니라서 보급품도 없이 각자도생하는 상황이라 생각없이 인민군 옷을 속에 껴입었다가 적의 첩자로 몰려 사형 직전까지 갔다. 그때 마침 헌병대장이 자경단을 조직했던 사람이라 아버지를 알아보고 보증을 서 주어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오니 첫아들이 태어나 있었다. 가족과 다시 만난 기쁨도 잠시, 이번엔 국군 영장이 나왔다. 제주에서 6개월 훈련을 받고 바로 전선으로 투입되었다. 백마고지가 있는 철원지구 부대로 배속되었다. 휴전을 앞둔 당시는 고지전을 벌이며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려고 쌍방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사상자가 엄청 많이 나던 때였다. 매일 같이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그런 죽음의 전장에 배속되었지만 그는 글씨를 잘 쓴다는 이유로 행정병으로 뽑혀 다행히 고진전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고지전에 투입된 전우들은 대부분 전사했다고 한다.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폭격 후유증으로 안면근육마비증이 생겨 평생 찡그린 얼굴 모습을 하셨다. 전쟁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지만 해마다 찾아오는 보릿고개를 어찌 어찌해서 겨우 넘기고 있었다. 마른 땅에도 잡초가 나듯이 자녀는 2년에 한 명씩 태어났다. 그런 와중에도 동생들을 다 출가시켰고 자신의 맏아들은 제대로 교육을 시켜야 한다며 고등학교는 서울로 유학을 보냈다. 농사만으로는 집안을 이끌 수 없어 목상(나무 장사)을 시작했다. 때를 잘 만났는지 제법 돈도 벌었고 서울을 들락거리다 마누라보다 훨씬 젊은 여자도 만나 한때 딴살림도 차렸다. 사고가 생겨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사업이 쫄딱 망해서야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 동네의 새마을 지도자가 되었다. 동네 진입로가 소달구지 한 대 겨우 지나갈 돌투성이 길이라 대부분 지게로 짐을 나르던 시절에 마을 길을 넓히고 다리를 놓고 초가지붕을 슬레이트나 함석으로 바꾸었다. 이에 대한 공로로 대통령 하사품인 자전거 한 대를 받았다. 자전거를 받던 날 동네잔치가 벌어졌다. 나는 지금도 그날을 기억한다. 내 키보다 훨씬 큰 삼천리 자전거에는 금빛 메달이 걸려 있었고 동네 사람들은 자신의 일만큼 자랑스러워했다. 돼지를 잡아 동네 잔치를 벌였는데 그때 숯불에 구운 돼지고기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동네가 매일 바뀌기 시작했다. 소로 밭을 갈던 것에서 경운기로 바뀌어 가는 외형적인 변화 이외에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 태도도 바뀌었다. 그동안 겨울 농한기 때에는 매일 같이 술과 노름판이 벌어졌지만 이제는 누가 더 새끼를 잘 꼬고 가마니를 많이 짜는지 내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침에는 식사 전에 퇴비를 한 짐 베고 논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서야 아침밥을 먹었다.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무렵 우리 동네에 전기가 들어왔다. 전깃불이 켜지던 날 어두컴컴했던 부엌이 대낮 같이 밝던 날 우리 가족은, 아니 우리 동네 사람들은 환호성을 울렸다. 눈이 부셔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다. 텔레비전은 그보다 좀 더 일찍 들어왔다. 뒷집 기춘이네 집에는 서울에 간 기현이 형이 사서 보낸 텔레비전이 있어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보는 동네 극장이 되었다. 안테나는 뒷산 꼭대기에 설치해 마을까지 연결했고 전원은 배터리로 해결했다. 가끔 배터리가 나가 연속극을 볼 수 없는 날도 있었지만 연속극에 푹 빠진 동네 어른들이 돈을 갹출해 배터리를 장만하면서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 전원이 나가는 일은 없었다. 우리 집안의 형제들은 서울 간 큰형 이외는 모두 중학교만 졸업하면 모두 생활 전선으로 내보냈다. 막내였던 나는 시대적인 혜택으로 도회지에 가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서울에 가서 대학까지 다녔다. 당시 대학은 공산주의의 해방구나 다름없었다. 누구나 대학생이면 반정부 데모하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했다. 학과 공부보다는 이념 서클 활동이 의식 있는 학생처럼 보였다. 우리 동네에도 이런 이념적 갈등은 비켜가지 못했다. 당시 아버지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나는 너를 믿는다. 네가 선택한 것에 대해 반성은 하되 후회는 하지 마라. 그리고 무엇을 하든 열심을 다해라.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대단한 삶을 사셨다. 식민지 광복과 새로운 나라 건설기에 가장이 되었고, 전쟁과 국가 건설 기간에는 자신의 청춘과 생명을 바쳐 싸웠다. 그리고 농촌 계몽과 근대화의 시기에는 마을 리더로서 주민들의 의식 혁명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힘썼다. 세계 최빈국에서 이제는 살 만한 세상의 토대를 만든 것이다.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말로는 영화 ‘국제시장’에서 덕수가 아버지에게 하는 말이 떠오른다. “아버지 내 약속 잘 지켰지예.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 언젠가 나도 아들의 손을 잡고 아버지의 무덤가에 가서 아버지를 붙들고 나도 열심히 살았다고, 나도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은 정의가 무엇인지, 공정이 어떠한 것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불확실성의 시대가 되었다. 부끄러운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때 최선을 써본다. 한자로 써보면 最善, 즉 최고의 선은 열심을 다하는 것이다. 자기 책임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 가족을 지키고 나라를 지키며 사회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온 우리들의 아버지, 꼭 안아드리고 싶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에필로그를 들으며 6월의 하늘을 본다. 필자 소개 -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글로벌피스재단에서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진행하고 있다.

    [이두수의 절차탁마] 우리들의 영웅 아버지
  • [이두수의 절차탁마] ​5월, 푸른 기상이 만드는 삶의 궤적

    5월, 나무에서 배우는 푸른 마음 5월이 되면 가슴이 뿌듯해진다. 여기저기 피어나는 풀꽃들의 잔치로 아침에 산보하기에도 기분이 좋다. 가정의 달이라고 해서 가족을 생각하면 왠지 가슴이 푸근해진다. 햇살은 더욱 따뜻해져 나무들은 연녹색에서 진한 초록으로 변해가며 나무 그늘도 점점 진해지고 있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빠르게 변신하는 자연의 힘을 느끼기도 한다. 이렇게 주변 환경의 변화에 대응해 나가는 것을 인간계에선 혁신이라고 하는데 우리 자신은 주변이 변화해도 우리 스스로나 조직을 변화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도 5월에는 어린이날이 있어 어린이의 소중함과 어버이날을 맞아 부모님께 사랑과 감사를 표하고, 스승의날에는 자신에게 가르침을 준 어른들을 찾아 감사와 우애를 나누는 것은 더 없이 아름다운 모습이다. 12년 전 딱 이맘때다. 2011년 일본 동북 지역에 진도 M9.1이라는 전무후무한 지진에 거대한 쓰나미가 몰아닥쳤고 아오모리에서 도쿄에 이르는 해안가 지역은 초토화되었고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나는 그때 공연 관련으로 홋카이도에 있었고 5월에는 ‘동경전설’이라는 초대형 한류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서울의 방송사, 각 기획사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분주할 있을 때인데 갑자기 삿포로 사무실이 지진의 영향으로 기우뚱하더니 바로 이어 TV에서는 긴급속보를 내고 있었다. 이번 지진은 통상 있는 그런 지진이 아니라 초대형 지진이며 거대한 쓰나미가 올 것이라며 주민들에게 긴급히 대피할 것을 전했다. 시시각각 전해지는 TV 영상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도쿄 신주쿠의 고층 빌딩이 이리저리 휘면서 건물끼리 부딪칠 만큼 아슬아슬해 보였다. 센다이 공항의 비행기들은 장난감처럼 물에 떠다녔고 해안가 마을들이 시커먼 물에 잠기는 모습은 공포영화 그 자체였다. 동북 대지진 재해로 일본은 엄청난 인명 피해와 재산상 피해를 입었다. 해외에서 많은 나라들이 구호품과 구조대를 파견했다. 당시 서울시는 그 어느 곳보다 빠르게 구조대를 파견해 주었다. 당분간 나라 안은 침울했지만 현지에 가서 직접 봉사하겠다는 자원봉사자들이 줄을 이었다. 전국에서 몰려드는 자원봉사자들이 너무 많아 자원봉사를 자제해 달라는 뉴스를 내보낼 정도였다. 구호품이 산처럼 쌓였지만 도로가 뚫리지 않아 현지에선 배분에 어려움을 겪었다. 며칠씩 굶는 사람들이 속출했지만 불평하거나 시위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가까스로 식료품이 전달되어도 사람들은 길게 줄을 서서 받아갔고 보급품이 부족하면 더 힘든 사람부터 나눠주라며 양보하는 모습은 고결한 인간의 품위를 보여주는 듯했다. 이런 상황에 대형 공연장이나 체육관은 피난민들 수용소로 사용했기 때문에 공연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4월이 되자 사회도 침울했던 분위기에서 점차 일상으로 회복되어가고 있었지만 아직 희생자에 대한 애도기간이어서 모든 공연은 자숙하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신문 칼럼에 ‘쓰나미로 쓰러진 벚나무도 때가 되니 꽃을 피우고 있다. 언제까지 우리는 침울한 분위기에 젖어 있어야 하는가. 오늘 이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인생 마지막일 수도 있다. 일상의 회복이야말로 희생자에 대한 가장 큰 애도’라는 글이 올라왔다. 희생자를 추념하는 것이 함께 슬퍼하며 애도하기보다는 일상으로 돌아와 웃고 떠들고 사는 것이 가장 큰 위로라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 변화로 당초 계획했던 초대형 한류공연 ‘동경전설’은 일본 최초의 재난 위로공연이 되면서 말 그대로 전설적인 공연이 되었다. 한 곳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나무 나는 요즘 매일 아침마다 여의도 공원을 산보하고 있다. 샛강을 걸으면 마치 정글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도심에 이런 친자연적 공원이 있다는 것에 감탄하고 있다. 이곳에는 다양한 나무들이 서식하고 있다. 며칠 전에는 버드나무가 내뿜는 화분이 흰 눈처럼 휘날렸지만 요즘은 아카시 향기가 공원에 가득하고 이팝나무, 벚나무도 제법 많다. 계절에 따라 꽃으로 또는 화분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주는 이들 나무를 보며 비록 나무들은 이동할 자유가 없이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평생을 살지만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것을 한자로 '一所懸命(일소현명)'이라고 한다. 자기가 받은 직분에 혹은 받은 땅에서 일생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다. 직업이라는 말도 이런 개념에서 나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직업을 흔히 3가지로 구분하는데 생업(Job), 직업(Career), 천직(Calling)으로 나눈다. 생업은 말 그대로 생계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일이다. 직업(커리어)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존재감을 확대해 가는 과정으로서의 일이다. 천직은 하나의 소명의식으로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이며 자신의 행하는 일로 인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사명감이다. 내가 보기에 나무들은 모두 자신이 뿌리내린 곳을 하늘이 내려 준 봉토라 여기며 평생 그곳을 지키며 다른 생명을 키우고 있다. 우리 어머니들이 위대하지만 이 나무들 또한 자연에게는 위대한 어머니다. 이 한 그루 나무로 인해 땅이 보전되고, 온갖 생물들이 번식하고, 새와 동물의 안식처가 되고, 청명한 공기도 제공하고, 시원한 물도 제공한다. 가지가 부러지고 줄기가 꺾여도 나무는 살아 있는 한 때가 되면 자신의 꽃을 피운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환경을 불평하지 않고 비탈진 곳이라면 비탈진 대로, 바위 위라면 작은 틈새라도 붙들고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서 있는 모습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에게 뒤질 것이 없다. 아마 나무가 인간에게 부러운 것이 하나 있다면 그건 자유일 것이다. 자유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 의미 자유(自由) 라는 말은 예전부터 한자문화권에서는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근대적 의미의 새로운 용어인 'Freedom, Liberty'의 의미를 수용하는 데에는 기존의 자유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자주, 자립'이라는 말로 돌려 쓰다가 일본의 나카무라(中村正直)씨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On Liberity)을 번역하면서 자유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유의 의미는 과거에 쓰던 의미보다는 인간의 고유한 권리로서 법률이 정하는 그 범위 안에서의 자율성, 즉 책임이 뒤따르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밀은 자유의 한계를 규정하기 위해 말과 행동을 구분하며 '말'은 그 어떤 것도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하고, '행동'은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에서 사적인 행동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생각을 마음대로 말할 '표현의 자유’와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에서 자신의 개인적이고 사적 행동을 간섭받지 않을 '사생활의 자유’가 인류의 공익과 개인의 행복에 있어서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자신의 주장을 피는 것, 이것이 바로 자유에 따르는 책임이다. 즉 자기 책임하에 운용되는 이 자유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만물의 영장임을 증명할 수 있는 힘이다. 나는 사랑도 이 자유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자유에 대한 깊은 생각이 없는 행동은 그것이 비록 선의의 행동이라도 사랑은 없고 행위만 남는다. 책임은 없고 방종만 흐른다. 말 그대로 생각이 없는 ‘내 맘대로 느끼는 대로’ 행동일 뿐이다. 이런 자유는 잠깐의 쾌락이 있을지 모르지만 가슴을 울리는 감동은 없고 결과가 없다. 이런 사랑은 행위로 끝날 뿐 생명으로 연결되지 못하며 지속적일 수 없다. 우리 사회에 저출산은 이와 같은 요즘 우리 문화와 다르지 않다. 생각해 보자. 요즘 우리 사회는 그 어느 시대에도 누려보지 못한 제일 좋은 출산, 육아, 교육 그리고 최고의 주거 환경에서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군 이래 제일 저조한 저출산의 현실에서 살고 있다. 한류의 힘 요즘 한류가 세계 문화를 리드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한 상황이다. 국내 영화계를 봐도 극장에서 관람객의 톱을 차지하는 것은 외국 영화다. 최근 야권에서 불을 지핀 ‘토착왜구’ ‘친일분자 척결’이라는 분노에 가득 찬 구호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일본으로 향하는 한국 관광객이 가장 많고 국내에선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가 가장 인기가 있다. 독립운동가 김구는 평생을 일본과 싸웠지만 그가 주장하는 문화강국론에는 타국을 증오하거나 멸시하는 것이 없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 ‘나의 소원’에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고 말하면서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길 원한다"고 했다. 이웃 나라를 폄하하고 조롱한다고 해서 자국을 사랑하는 맘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기미독립선언서에는 일본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른 길로 가도록 타이르며 인류 공영과 평화를 위한 대의에 우리 민족의 독립과 각성을 주장했지, 일본 타도라는 적국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부추기지 않았다. 그래서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3·1운동에 참여했고 이 높은 도덕적 고결성의 비폭력저항운동은 이후 모든 식민국가 독립운동의 표본이 되었으며 인류사를 바꾼 위대한 운동이 되었다. 한류가 세계인들에게 높이 평가받는 것은 한국인들의 가족을 향한 한없는 정성과 한의 정서, 원수를 원수로 갚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로 품어가는 웅혼한 정신에 새로운 카타르시스를 느낀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깊이를 현대 음악과 영화로 새롭게 해석해내는 한국인들의 표현 능력에 세계인들은 기꺼이 환호한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우리는 영화, 드라마, 팝, 클래식 연주, 그리고 게임에서까지 톱을 달리며 여러 국제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 등 우리가 세계 문화계를 선도하는 듯했다. 하지만 요즘 우리 사회는 너무 가벼워졌다.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에 무게감이 사라졌다. 새로운 문명을 이끌고 갈 문화의 힘을 제공하기에는 모든 부문에서 문화적 깊이를 잃어가고 있다. 특히 최근 K-팝을 선도하는 우리 아이돌의 가사나 안무 그리고 패션은 섹시와 폭력이라는 원초적 욕망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솔직히 음악을 팔고 있기보다는 성을 팔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런 것이 단기적으로 시청률을 높이고 마케팅에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팬들에게 외면을 당할 것이다. 인류 보편적이며 문명을 새롭게 구축할 깊이가 없으면 오래갈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문화시장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치 현실은 더 자극적이고 선동적이다. 개인의 각성 근대의 출발은 개인의 발견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역사는 한때 신권자만이 생각할 힘을 가졌고 누군가 중간 매개자를 세워 그의 눈과 입을 통해 신을 바라보았다면, 이젠 내가 당당히 혹은 홀로 외롭게 신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주교와 사제의 사도권에 의한 성사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루터가 발견한 신 앞의 단독자인 개인의 신앙으로 구원받는다는 개념은 근대성의 단초를 놓는 혁명이었다. 이렇게 개인의 발견이 기독교에 종교개혁을 가져왔고 계몽주의라는 인문학적 혁명을 가져왔다. 이러한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그 흐름은 미국이라는 ‘새로운 나라’ 근대국가 건설로 결실되었다. 이제 또다시 문명의 나침반은 아메리카 대륙을 지나 다시 아시아 대륙으로 돌아오고 있다. 문명의 전환, 새로운 문명의 해석이 필요하다. 어쩌면 아시아 대륙에서 새로운 차원의 치우(蚩尤)와 황제의 신화적 싸움이 재연될지 모르겠다. 정의, 공정, 민주, 평화··· 이런 말은 단지 권력의 액세서리가 아니라 오랜 역사를 거치며 인류가 공들여 만들어 온 가치체계다. 이 말을 쓴다고 자신이 공정해지고 민주스러워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말은 깎고 다듬고, 갈고닦으며, 지키고, 쌓아가는 것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 평생을 애쓰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 과정을 보고 정의롭다 혹은 공정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꽃을 피워야 할 때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할 때는 열매를 맺도록 노력하는 나무의 의지를 다시 본다. 한 그루의 나무도 비록 한 뼘의 장소에서 평생을 살아가며 주변을 위해 도와주고 경쟁하며, 불순물을 정화하며 자신의 삶의 궤적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 푸른 기상이 아름답다. 필자 소개 -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글로벌피스재단에서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 진행하고 있다.

    [이두수의 절차탁마] ​5월, 푸른 기상이 만드는 삶의 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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