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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8 T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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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준 교수
안상준 교수 ph410@anu.ac.kr
  • -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 한국서양중세사학회 회장
    - 교수신문 논설위원
  • [안상준의 함께꿈] '서울대 10개' 말고 …서울대부터 변해야

    “5극3특체제는 지방균형발전의 핵심정책으로, 앞으로 정책이든 재정이든 집중하려고 한다. 그중 하나가 ‘서울대 10개 만들기’로 지역거점대학을 육성하는 것이다.” 지난 6월 30일 이재명 대통령의 기자회견 내용 중 일부이다. 이로써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주장이나 제안을 넘어 국가 핵심 정책으로 부상했다. 대통령의 관심과 의지만큼이나 교육계 안팎의 반응도 뜨겁다. 대선 이후 약 두 달 동안 거의 모든 언론사가 ‘서울대 10개 만들기’에 관한 논평과 칼럼을 실을 정도이다. 전반적으로 입시지옥 해소와 지역균형발전이라는 정책의 목적에 동조하고 성공을 희망하는 우호적인 여론이 형성되는 가운데, 일부 논객은 포퓰리즘에 기초한 해당 정책의 실패를 단정적으로 전망한다. ‘서울대 10개 만들기’ 정책은 두 개의 전제 위에 성립한다. 첫째 대학생에게 투입되는 교육비는 대학의 수준 향상과 정비례한다. 둘째 부산대, 경북대, 전남대 등 소위 9개의 거점국립대는 서울대로 거듭날 수 있다. 즉 거점국립대 학생 1인당 교육비(평균 약 2300만원)를 서울대 학생 1인당 교육비 수준(약 6700만원)으로 끌어올리면 거점국립대가 서울대로 변신하여, 세계 유일의 입시지옥도 해소하고 청년의 수도권 진입을 원천 차단하여 지역균형발전도 달성한다는 논리이다. 이에 대해서 논객들은 적잖은 우려를 쏟아낸다. 무엇보다 정책 구현에 필요한 막대한 예산의 확보가 가능한지 묻는다. 국민의 고통 분담이 따르는 증세 없이 실행 하려면 교육 예산의 조정을 통해 관련 예산을 확보해야 하는데 실현가능할지 의문이 앞선다.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의 고등교육 전용이나 고등교육재정교부금법에 관한 법률 제정이 언급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대통령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말이 나온다. 예산 확보보다 더 큰 우려는 예산 지원과 대학 수준 향상의 정비례에 대한 신뢰의 문제이다. 지금의 서울대는 과연 본받을 만한 대상인가? 부산대만의 장점을 살려 특성화하는 과정 없이 예산을 쏟아붓는다고 서울대가 되겠는가? 교수나 대학 당국의 철저한 혁신 없이 돈을 준다고 서울대가 되겠는가? 우려 섞인 반문이 쏟아진다. 실제로 지난 20여 년간 16조 이상의 정부 재정을 지방대 살리기에 쏟아부었지만, 여전히 지방대가 소멸의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에 대한 원인 분석은 다양하겠지만, 국립대가 지금의 모습과 관행을 유지한다면 ‘서울대 10개 만들기’ 프로젝트는 현실적으로 성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한다. 이러한 우려와 지적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성공할까? 필자는 비관적으로 전망한다. 이 정책은 독창적인 발상이라기보다 지난 20년 동안 제기된 여러 버전의 지방대 살리기 정책, 특히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의 표지갈이에 지나지 않는다. 나아가 ‘서울대 10개 만들기’의 원저자는 현재 이 땅의 대학들이 처한 문제를 분석하여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역사와 문화가 전혀 다른 나라의 사례를 벤치마킹하는 차원에서 해결책을 제시하기 때문에 정책의 실효성에 강한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한국의 고등교육 정책은 어떤 비전 위에서 어떤 정책을 수립해야 하는가? 오늘의 서울대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특이한 발전 과정의 결과물이다. 극단적인 대학의 서열화와 최우수 학생 3천여 명의 독점, 이것이 서울대의 위상이자 상징권력이다. 후진국 대한민국이 재벌 육성을 통해 세계 10위 경제대국을 달성했듯이, 서울대를 정점으로 인재 육성을 실천한 결과가 오늘날 한국 대학체제의 근간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제 이 시스템은 이제 더 이상 우리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지 못하고, 이를 개혁하지 않으면 결단코 우리의 미래는 없다. ‘서울대 10개 만들기’의 실질적인 내용은 국립대 육성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지난 반세기 동안 정부(교육부)는 왜 스스로 설치하고 운영에 책임을 지는 국립대를 서울대 못지않은 세계적인 대학으로 육성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정책을 펴지 않았는가? 아마도 수도권 일극체제로 변하는 발전의 흐름에 내맡겨 지방대로 전락하는 과정을 보고도 못 본 체한 결과일 수도 있고, 1995년 5·31교육개혁의 기치대로 교육 분야에 도입된 경쟁체제의 결과로서 지방대의 추락을 해석할 수도 있다. 어쨌든 국립대가 지방대로 전락한 오늘의 상황에 대한 책임은 교육부의 부실한 관리와 통제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사립대 비중이 지나치게 높은 우리의 현실에서 국립대에만 엄청난 지원을 약속할 때 사립대의 반발도 예상된다. 이에 더해 사립대에 대한 교육부의 합리적인 관리와 통제 정책 또한 부재라는 근원적인 문제가 깔려 있다. 흔히들 사립대의 공공성을 외치지만, 한국에서 사립대는 학교법인의 사유재산으로 취급된다. 사립대 법인은 개인의 등록금으로 조성된 재정에 의존하여 대학을 자율적으로 운영하면서 정부의 통제와 감사가 따르는 공적 재원의 지원을 경계한다. 따라서 구조적으로 사립대는 공적 재원의 투입을 통한 공공성 강화에 한계를 긋는다. 이러한 법률적·제도적 한계가 굳어지는 사이에 일부 사립대는 ‘부실과 비리’의 꼬리표를 달아 사립대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부추기는 항수가 되었다. 15년 동안 등록금 동결을 버티면서 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지자마자 등록금을 전격 인상하는 모습은 그들의 정체를 잘 보여준다. 이런 구조적인 한계를 무시하고 OECD 공적 투자와 비교하여 한국 대학의 낮은 공적 재원 투자 비율을 언급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진단이다. 차제에 정부는 사립대를 관리·통제할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건실한 사립대의 선별과 지원책이 절실하다. 그것은 사립대에 대한 여론의 반전을 꾀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것이다.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책은 사실상 유명무실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립대 법인에 대한 평가는 사립대의 재정과 운영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하나의 기준점이 될 것이다. 이를 통해 법인의 부당한 학사 개입을 원천 차단하고, 교수와 학생이 중심이 되는 사립대의 명실상부한 자율적 운영 구조를 수립할 수 있다. 여기에는 민주적인 거버넌스의 구축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교수회의 법적 지위 확보와 학생회의 제도적 지원이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한국 대학체제의 구조와 한계를 고려할 때, 이제 교육부는 국립대와 사립대의 관리체계를 개혁하는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 즉 교육부 직할의 국립대와 개인사업자로서 사립대의 관리를 이원화해야 한다. 먼저 정부(교육부와 과기부) 직할의 고등교육기관으로서 국립대를 세계적인 대학으로 육성할 의지가 있는지 확인하고, 이를 향후 제정될 ‘국립대학법’에 명시하여 국가의 책무 및 대학의 합리적 경영을 법제화해야 한다. 국립대에 재직하는 현직 교수로서 필자는 국립대에 재정을 투여하면 서울대가 되리라는 기대는 현실적으로 무망하다고 본다. 반드시 시스템 개혁이 따라야 한다. 먼저 ‘거점국립대’나 ‘국가중심대’ 같은 임의적인 용어를 폐기하고 나아가 ‘지방대’ 등의 멸칭 사용을 금지하는 한편, 대도시 소재의 대형 국립대와 중소도시 소재의 중소형 국립대의 기능과 역할을 재조정해야 한다. 대형 국립대의 재학생 수는 4~5천 명대를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보편교육의 중심으로서 지방 거주민의 고등교육 수요를 충당하고 있다는 의미와 다를 바 없다. 이런 대형 국립대를 일본의 제국대학처럼 세계적인 수준의 고등교육기관으로 끌어올려 지역민의 자긍심을 높이고 지역 발전에 핵심 역할을 하게 만드는 방안이 시급히 요청된다. 그에 비해서, 중소도시 소재의 중소형 국립대는 해당 지역의 산업과 긴밀하게 연계하는 특화 교육기관으로 거듭나고, 이를 토대로 실현 가능한 규모의 대학도시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이들 국립대의 입학정원을 대폭 줄이고 대학의 특성화를 확실하게 지향해야 한다. 특성화 분야 집중 육성을 내걸고 입학정원을 현재보다 절반가량 줄이면서, 관련 국공립연구소와 기업을 유치하여 함께 공생하는 복합특성화캠퍼스를 조성하고 지자체의 적극적인 협조로 도시의 이미지를 ‘대학도시’로 전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항구·산업도시 군산의 이미지에 군산의 역사와 문화를 융합한 ‘산업·인문 복합도시 군산’을 지향하는 군산대, 생태도시 이미지를 확보한 ‘지능형 생태 대학도시 순천’을 지향하는 순천대, 전통문화의 이미지와 생명과학 분야의 경쟁력을 융합한 ‘문화·생명 대학도시 안동’을 지향하는 안동대(현 경국대) 등 다양한 전략이 가능할 것이다. 또한 이들 중소형 국립대는 국가 지원 아래 유사한 수준을 유지함으로써 명실상부한 국립대 네트워크를 실현하는 단위로 기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전 국민의 고민거리이자 고통의 주요 원인으로서 입시지옥의 해소를 위해 서울대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즉 서울대가 엘리트 학생을 독점하는 특혜와 지위를 포기해야 한다. 대학서열화와 독점체제는 선진국 대한민국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다. 우리는 저출산에 따른 축소지향의 미래를 무시할 수 없고, 더욱이 AI시대가 도래하면서 대학은 정체성을 재정립해야 하는 대전환의 시기를 맞고 있다. 서울대가 새로운 시대의 대학상을 제시하고 새로운 교육 목표를 내세우고 새로운 교육과정을 편성할 때, 입시지옥은 해소될 것이다. 안상준 필자 이력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현 한국 서양사학회 회장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교수신문 논설위원

    [안상준의 함께꿈] 서울대 10개 말고 …서울대부터 변해야
  • [안상준의 함께꿈] 학생을 살리고 교사를 지키는 교육정책을 기대하며

    고교학점제가 흔들린다. 교사 다수가 반대하고 전교조와 교사노조 등 교원단체마저 폐지를 촉구하고 나섰다. 고교학점제는 학생에게 수강 선택권을 주어 입시 위주의 교육을 탈피하려는 문재인 정부의 의욕적이고 파격적인 정책이었다. 2022년부터 특성화고등학교에서 시범 사업이 운영되었고, 올해부터 전국 인문계 고등학교로 확대하여 전면 실시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도입부터 시행까지 전후 사정을 들여다보면 이재명 정부가 지향해야 할 교육정책 방향이 엿보인다. 고교학점제는 실제로 선진적이다. 학생이 자신의 예상 진로에 맞춰 수강 과목을 선택하여 이수하고 일정한 학점을 채우면 졸업하는 제도로, 자신의 수학 계획에 맞게 학점을 취득하는 대학의 학사제도와 유사하다. 다양한 교육과정 개설, 입시 위주의 교육 극복, 자기 주도형 학습 능력 제공 등 고교 교육의 정상화를 추구하고, 나아가 특목고의 일반고 전환을 통해 고교 서열화 해소에도 도움을 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이런 취지와 장점에도 불구하고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특성화고의 시범 사업을 넘어 일반고로 전면 확대되자 곧바로 입시와 연계된 제도 미비와 불안한 미래에 대한 불만이 쏟아졌다. 첫째는 교육의 형평성 논란이다. 지역 간, 학교 간 교육 자원의 격차로 학교마다 선택과목의 개설에서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오히려 교육격차를 심화시킨다는 반발도 나왔다. 둘째로 다양한 과목을 개설하기 위한 전문 교사와 교육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현실적 비판이다. 입시 성과를 외면할 수 없는 현실적 고충에다 학생의 다양성을 키워주려면 특단의 인적·물적 투자가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교육당국의 의지는 박약했다. 그보다 더 심각한 불만은 학교마다 개설 과목과 평가 기준이 달라 대입용 내신의 공정성에 대한 우려이다. 역시 내 자식의 대입 앞에서 평가의 공정성은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막상 폐지를 선언하기에도 만만치 않은 부작용이 따른다. 고교학점제 도입을 믿고 자신의 진로를 설계한 학생들은 인생의 목표와 입시 전략을 재설정해야 할 형국이다. 일선 학교도 교육과정을 급선회하여 재편성해야 하니, 학교 행정은 그야말로 혼돈에 빠지고 학생과 학부모의 불안감은 극에 달할 지경이다. 돌이켜보면 고교학점제의 도입은 성급했다. 고교 교육의 대전환을 구현하는 정책인 만큼 입시제도와 연계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점이 매우 안타깝다. 대한민국의 아킬레스건인 입시제도의 체계적인 보완이나 치밀한 계획 없는 교육과정의 전환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백번 양보해서 충분한 기간에 걸쳐 시범 사업을 진행하면서 확대하는 전략을 구사했어야 했다. 그러면서 다양한 교육과정을 담당할 교사 양성 방안, 교육환경 확충에 쓰일 예산 확보 및 효율적인 집행과 평가 방안이 선행되어야 했다. 좋은 취지라도 성급하게 도입된 교육정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새삼 절감한다. 유사한 분위기는 AI 교육에서도 감지된다. 새 정부는 AI 3대 강국을 천명하고 국가 경쟁력 향상을 위해 거대한 투자를 약속했다. 대통령실에 AI 수석을 신설하고 민간 AI 전문가를 기용하여 화제를 모으더니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후보도 대기업 AI 전문가를 지명했다. 챗GPT와 딥마인드로 상징되는 AI 전쟁에 뛰어들어 한국의 길을 제시하겠다는 결기가 엿보인다. 그런 맥락에서 국정기획위원회가 디지털 문해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AI 교과 설치를 검토한다는 기사가 도드라져 보였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에서 개발한 AI 교과서가 좌초될 위기에 처한 사정을 살펴보면 AI 교과 설치도 녹록지 않을 전망이다. 2023년 6월 교육부는 2025년부터 AI 디지털교과서를 전면 도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즉각 교육계의 우려가 쏟아졌다. ‘교사가 AI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데 어떻게 AI 교과서로 가르칠 수 있느냐’는 비판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우려 반, 기대 반 기다리던 AI 교과서는 공청회 날에도 공개되지 않았다. 졸속 도입의 결정적인 증거였다. 마침내 올해 3월 전국 초등학교 3~4학년과 중학교 1학년, 고등학교 1학년 영어, 수학, 정보 과목에 AI 교과서가 도입되었다. 하지만 전국 1만1932개 초·중·고교 중 적어도 1종 이상 AI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는 3870곳으로 평균 채택률은 32%에 불과했다. 무리하게 도입된 AI 교과서는 기존 교과서의 내용에 간단한 대화형 기능을 추가한 것에 불과하다는 혹평을 들어야 했다. 입시용 참고서 정도로 적당하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나아가 학교가 충분한 디지털 환경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개별 가정의 디지털 환경 격차는 학생의 학습량 격차를 유발하고 교육의 형평성을 위협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AI 교과서는 교육에 대한 기본적 인식의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 교육은 단순한 지식 습득만이 목적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 간 그리고 학생과 학생 간 소통과 협동을 통해 배움을 넘어 전인적인 인격을 형성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런 논란을 의식한 듯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잘못된 AI 디지털교과서 정책을 바로잡겠다. AI 교과서의 법적 지위를 교과서가 아닌 교육 자료로 규정하고 학교의 자율 선택권을 보장하겠다”고 밝혔다. 그의 당선 이후 AI 교과서는 거의 퇴출될 전망이다. AI 교과서 소동 역시 성급하고 무리하게 강행된 교육정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입증한다. 대한민국 학교의 오늘은 우울하고 미래는 암울하다. 자살하는 초·중·고 학생이 계속 늘어 2024년에는 221명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2025년 6월 25일). 교단을 떠나는 교사도 계속 늘고 있다. 2020~2024년 사이 정년 전 퇴직 교원 총 3만6748명 가운데 초등교사는 1만5543명, 중등교사는 1만2352명, 고등교사는 8853명이었다. 2020년 6512명에서 2024년 9194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다(2025년 5월 15일). 그러나 생을 마감할 만큼 절박한 아이들의 외침과 신음소리에도 극심한 경쟁은 줄지 않고, 민원 때문에 가르치는 꿈을 접고 이직하는 선생님들의 항의에도 교육당국의 행보는 더디기만 하다. 교육은 껍데기를 바꾼다고 바뀌지 않는다. 사람이 바뀌어야 교육이 바뀐다. 교육의 수준이 교사의 수준에 달려 있듯이, 교육 현장의 문제 해결은 교원의 신분 보장과 지위 향상에 달려 있다. 교사들에게 아이들을 품을 수 있도록 여유와 사명감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사교육 시장에 빼앗긴 교육권을 공교육이 되찾아와야 한다. 교육권이 충분히 보장되지 않은 교원에게 학생의 인격을 이끌고 생활을 지도할 권위 또한 취약할 수밖에 없다. 학업 성취를 사교육에 맡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학교는 그저 의무교육의 법적 테두리 속에서나 존재 이유를 찾아볼 지경이다. 수업 시간 내내 담요를 뒤집어쓰고 자는 학생에게도 생활지도를 하지 못하는 교사가 어떤 수단으로 학생을 올바로 이끌고 지도하고 관리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관계 역학 속에서 학부모는 교사의 학생 지도에 대해 다양한 방법으로 간섭할 기회와 빌미를 찾는다. 자식의 교육은 어차피 사교육에 맡겼으니, 교사는 학생이 원하는 대로 그저 안전하게 졸업할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는 주문이나 다를 바 없다. 이 지점에서 공교육에도 문제가 있지 않았나 되돌아보게 된다. 교사들은 세태의 변화와 환경 탓을 하며 사교육 학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맞추는 안이한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는지, 공교육의 교육권을 지키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혜안을 발휘하려 충분히 노력했는지 돌아볼 일이다. 교사의 교육권을 회복하고 극단적인 경쟁체제와 왜곡된 교육과정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기필코 가까운 장래에 우리는 수능을 대체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다른 나라의 사례로서 논술형 수능인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를 들 수 있다. 올해의 논제는 '우리의 미래는 기술에 달려 있는가?' '진실은 언제나 설득력이 있는가?'였다. 자신의 생각을 주관적으로 서술하는 평가를 통해 우리의 극단적인 줄세우기 객관식 수능을 대체해도 좋을지 검토가 필요하다. 또 다른 사례는 국가 주도의 수능을 치르지 않는 독일의 방식이다. 고교 졸업시험인 아비투어 성적으로 대학에 입학한다. 아비투어는 주정부 교육부가 엄격하게 관리한다. 독일에는 ‘1도시 1대학’ 원칙 아래 전국에 대학이 고루 분포해 있고 대학의 수준이 비교적 균등하다. 독일 대학은 의학 계열과 정원 관리가 필요한 일부 전공을 제외하고 정원 제한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학생의 자율적 선택에 따른 운용이 가능하다. 대학 평준화를 통한 고교 정상화는 우리 현실에 맞을지 따져봐야 한다. 한편 미국 대학은 자격고사로서 미국식 수능(SAT)과 입시사정관제를 활용하여 신입생을 선발한다. 학생 개개인의 다양한 요소를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미국 대학은 좋은 교육에는 많은 투자가 따라야 한다는 원칙에 기초하여 운영되기에 평판이 좋은 학교일수록 학비가 비싸다. 자신의 개성과 능력, 재력에 따라 대학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현행 우리의 수시 입학제도의 보완이 강력하게 요청되는 대목이다. 물론 상기 해외 사례들은 참고자료일 뿐, 미래지향적 한국형 선발 방식은 우리의 상황에 맞는 고유한 특성을 고려하여 결정되어야 한다. 국운을 걸고 새 정부가 밑자락을 깔고 다음 정부가 이어받아 실행하는 장기 프로젝트 구상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하여 국가교육위원회의 역할과 위상이 각별히 주목된다. AI 시대에 부디 학생을 살리고 교사를 지켜내는 이재명 정부의 교육정책이 실현되길 기원한다! 안상준 필자 이력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한국 서양사학회 회장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교수신문 논설위원

    [안상준의 함께꿈] 학생을 살리고 교사를 지키는 교육정책을 기대하며
  • [안상준의 함께꿈] 포퓰리즘이 점령한 공약의 빈자리 …'동아시아 평화경제공동체' 구상으로 채우자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이 판결 주문으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절망의 늪에서 겨우 빠져나왔다. 이제 국민은 새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 누가 될까? 누가 되어야 하나? 어떤 기준으로 뽑아야 하나? 내란세력이 내세운 후보가 설마 당선되진 않겠지만, 여론의 추이를 들여다보면 유권자의 마음은 복잡다단하고 착잡하게 읽힌다. 그래서 유권자로서 주요 후보의 10대 정책 공약을 읽고 평가해 보았다. 더불어민주당 10대 정책공약 국민의 힘 10대 정책공약 ① 세계를 선도하는 경제강국 건설 ① 기업하기 좋은 나라, 일자리 창출 ② 내란극복과 K-민주주의 위상 회복으로 민주주의 강국 건설 ② AI·에너지 3대 강국 ③ 가계·소상공인의 활력 증진, 공정경제 실현 ③ 청년이 크는 나라, 미래가 열리는 대한민국 ④ 실용적인 외교안보 강국 건설 ④ GTX로 연결되는 나라, 함께 크는 대한민국 구현 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나라 건설 ⑤ 중산층 자산증식, 기회의 나라 ⑥ 세종 행정수도와 ‘5극 3특’ 추진으로 국토 균형발전 완성 ⑥ 아이 낳고 기르기 좋은 나라, 안심되는 평생복지 ⑦ 모두의 권리가 존중받는 사회 건설 ⑦ 소상공인, 민생이 살아나는 서민경제 ⑧ 모두가 잘사는 나라 건설 ⑧ 재난에 강한 나라, 국민을 지키는 대한민국 ⑨ 저출생·고령화 위기 극복,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함께 돌보는 국가 건설 ⑨ 특권을 끊는 정부, 신뢰를 세우는 나라 ⑩ 미래세대를 위해 기후위기에 적극 대응 ⑩ 북핵을 이기는 힘, 튼튼한 국가안보 두 후보는 공통적으로 경제 분야 공약에 집중하면서 제1공약으로 경제성장을 내세웠다. 더불어 소상공인과 민생을 챙기는 공약과 함께 잘사는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경제성장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이번 대선이 민주적 거버넌스의 위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경제공약의 절대적 우위는 여전히 경제적 포퓰리즘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위력을 새삼 절감하게 한다. 물론 경제공약을 실현할 구체적인 로드맵의 제시나 예산 책정은 별개로 검증할 문제이다. 국민의힘의 공약은 요컨대 한편으로는 파렴치하고, 한편으로는 정체성과 어울리지 않는 측면이 강하다. 무엇보다 조기 대선 유발의 책임을 진 정당으로서 당연히 국민에게 비상계엄과 내란에 대하여 정중하게 사과하고, 향후 민주주의를 굳건하게 세우겠다는 의지를 결연하게 보여줘야 했다. 그러나 김문수 후보는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지 않았고, 공약 어디에도 민주주의 강화나 훼손 방지를 위한 내용을 제시하지 않았다. 정당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공당의 의지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나아가 국민의힘의 공약⑧과 공약⑨를 보면서 여전히 유권자를 존중하기보다는 임기응변으로 현혹하려는 태도가 강하게 느껴진다. 그들은 국방의 의무 이행 중 대민봉사에 동원됐다가 참변을 당한 해병대 채00 병사의 사망 원인을 밝히지 않았고, 대명천지에 축제를 즐기다가 이태원 거리에서 비명횡사한 159명의 젊은 영령을 위한 정치적 책무를 다하지도 않았고 책임자를 처벌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사회적 재난이 국민의 기억 속에 잊히기만 기다릴 뿐 공허한 공약으로 국민의 심기를 다시 거스르고 있다. 또한 우리는 조희대 대법원장이 보여준 기상천외한 선택적 공익 실천 앞에 혼돈의 시간을 거쳐야 했다. 이재명 후보에게 적용된 신속하게 재판받을 국민의 권리가 수년에 걸쳐 지난한 법정 다툼으로 고통을 겪는 일제 강제노동 피해자나 해고 노동자에게도 적용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검찰의 이율배반적 행태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선택적 공익 실천을 묵인하고 방조한 채 특권을 끊겠다는 공약은 지지자들 외의 유권자는 안중에 없는 공당의 무책임하고 뻔뻔한 태도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그들의 민주주의는 따로 존재하고 작동하는지 묻고 싶다. 공약 검토와 평가에서 참으로 의아하고 실망스러운 점은 한국 사회의 주요 의제들이 사라지고 거시적인 비전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지금까지 공표된 여론조사로 볼 때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공약에서 주요 의제를 삭제했다. 심지어 그의 분신 같은 기본사회 개념도 사라졌다. 공약 어디에도 국민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대한민국을 한 단계 격상시킬 새로운 비전은 보이지 않는다. 부자 몸조심하는 중일 수도 있고 중도 외연 확장을 위한 전략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필자에게는 실망스러운 부분이다. 심화하는 경제적 불평등을 바로잡고 자본시장 선진화를 도모할 필수적인 선결과제로서 재벌 개혁도, 민주주의의 굳건한 재정립을 위해 중요하고 결정적인 의제인 언론 개혁도 사라졌다. 나아가 미래세대 양성에 관한 교육 의제도 눈에 띄지 않는다. 여전히 다수의 학생을 짓누르고 선생님을 학교에서 떠나게 하고 대학은 속수무책으로 망가지는 교육 현장을 바로잡겠다는 교육 개혁 기치의 실종에 필자는 어안이 벙벙하다. 그나마 갈수록 위태로워지는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보듬어주고 그들의 권리를 지켜주겠다는 공약이 목록에 들어 있지만, 강단의 철학적인 논제로 보일 정도로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선언에 그치고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이재명은 왜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가? 민주당이 배출한 대통령으로서 그는 무엇을 이루고 싶은가? 여기서 민주당 정부의 탄생에 대한 역사적 성찰이 필요해 보인다. 민주당 정부는 오직 특별한 정치적 상황에서만 탄생할 수 있었다. IMF 외환위기에서 나온 김대중 ‘국민의 정부’, 예측 불가한 단일화의 바람 덕에 탄생한 노무현 ‘참여정부’ 그리고 박근혜의 국정농단과 국민의 촛불항쟁에 힘입은 문재인 정부. 그러나 그런 유리한 정치적 지형에서도 늘 아슬아슬한 표차로 버겁게 승리했다. 나아가 민주당 정부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매번 무능력의 프레임에 시달렸고, 집요하고 거센 보수의 저항에 굳건하게 버티지 못했다. 물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위력을 발휘하는 국가보안법이 민주당 정부의 에너지를 분산시켜 민주주의 신장에 제동을 걸었다. 그런 와중에 민주당의 내분이 가시화되면 여지없이 보수세력에게 정권이 넘어갔다. 심지어 문재인 정부는 거대 여당의 유리한 정치적 조건 아래서도 보수세력이 내세운 꼭두각시 정치 신인 윤석열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민주당 정부는 대한민국의 정치 지형이 태생적으로 보수 성향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임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이런 조건과 환경 속에서 민주당이 정권을 획득하고 성공적인 정부를 역사에 남기려면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먼저, 대한민국을 선진국에 맞는 기준과 가치로 이끌어가야 한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국민의 행복을 지탱하는 두 개의 날개이다. 모두가 자유와 평등을 누리면서 경제적 안정을 취하려면 두 날개는 동시에 작동해야 한다. 분배 없는 성장은 양극화를 초래하고 중산층을 약화하여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성장 없는 분배는 사회의 하향 평준화를 이끌고 자본주의적 기반을 잠식한다. 일명 ‘황금의 30년’(1945~1975)은 서구 사회에서 분배와 균형 정책을 통해 성장의 과실이 국민에게 나누어지고 중산층이 두껍게 형성되어 복지국가 패러다임을 실현했던 시기였다. 다시 말해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구호가 상징하듯이, 서구 선진국 국민은 역사상 가장 행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누렸다. 그후 세계를 휩쓴 성장 위주의 신자유주의는 경제의 규모는 키웠지만 분배의 왜곡으로 양극화를 심화시켰고, 2008년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불황의 늪에 빠지자 쉽게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경제불황과 세계적 불평등의 심화는 세계를 극단적 대립과 파국으로 이끌고, 민주주의의 토대는 극우 포퓰리즘의 지속적인 공격에 조금씩 잠식되는 중이다. 제2의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출현이 눈앞에 다가왔고, 대규모 전쟁의 그림자가 지구를 뒤덮고 있다. 우리의 분단이 극단적인 불평등의 산물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지금 세계는 조만간 다시 거대한 분단의 시기를 맞을지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한반도 분단의 극복은 대한민국이 다른 차원으로 발전할 수 있는 절대적 과제이다. 이명박 정부 이래 냉탕과 온탕을 널뛴 통일 정책은 이제 중단되어야 한다. 필자의 지정학적 판단에 따르면, 차기 정부는 남북대화와 북미대화 채널을 가동하여 한반도 전쟁 억지력을 극대화하고 동아시아 평화체제를 수립하여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평화경제공동체’ 건설에 나서야 한다. 이는 새로운 차원에서 세계 평화를 달성하는 한국 정부의 역사적 과업일 뿐만 아니라 침체의 늪에 빠진 세계 경제를 견인하는 돌파구가 될 것이다. 한·중·일·러가 협력하는 거대한 ‘동아시아 평화경제공동체’는 결코 유럽연합의 그것에 뒤지지 않을 것이며, 이들 국가의 수준 높은 노동력은 서구 중심의 자본주의 시장 질서를 동아시아로 이동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다고 본다. 한반도에서 출발하여 중국과 러시아로 뻗어가는 경제적·문화적 활력의 서진은 세계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할 수 있다. 이런 거시적인 비전 없이 민생 해결에 몰두하고 사회적 갈등에 에너지를 소진하는 한, 차기 정부의 정치적 성공의 한계는 자명하다. 역사의 진화는 현실에서 미래를 꿰뚫는 자들의 통찰력으로 이루어져 왔다. 차기 정부는 경제성장과 국민통합을 넘어 거시적인 관점에서 민족사의 숙원을 풀어내는 위대한 도전에 나서야 한다. 필자는 그것이 차기 정부 대통령이 놓아야 할 ‘신의 한 수’라고 감히 예단한다. 안상준 필자 이력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한국 서양사학회 회장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교수신문 논설위원

    [안상준의 함께꿈] 포퓰리즘이 점령한 공약의 빈자리 …동아시아 평화경제공동체 구상으로 채우자
  • [안상준의 함께꿈] 정치는 없고 권력만 탐한 '떴다방' 보수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헌법재판관의 주문을 듣는 순간 가슴을 쓸어내렸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여전히 불안하다. 윤석열은 판결 승복 의사를 표현하지 않고 있고, 그의 지지자들은 ‘윤어게인’을 외치며 언제라도 모종의 음모를 획책할 태세이고, 집권 여당은 대통령 파면의 책임을 지고 국민 앞에 정중히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민주주의의 의미를 되새기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를 곱씹고, 민주주의의 실천을 위한 의지와 과제 그리고 이 땅의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그 지난한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맞았다. 왜 대통령 파면의 불행한 역사는 반복되는가? 왜 우리는 파면당할 수준의 대통령을 선출했는가? 왜 파면당한 대통령이 모두 보수 여당의 후보였는가? 대통령의 전횡과 파면을 막기 위한 근원적인 대책은 무엇인가? 보수 여당의 근원적인 문제를 진단하면서, 필자는 세 각도에서 대한민국 정치의 한계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대한민국 정치의 근본적인 문제는 정당정치의 실종 혹은 부실이다. 윤석열은 정치인이 아니었다. 한 번도 정치인이 되고자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대통령이 되었고, 대통령의 권한을 한없이 누렸다. 대통령이 되는 과정도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파멸하는 과정은 대한민국 정치사에 또 하나의 비극을 낳았다. 박정희 군부 독재 시기에 태어나고 자란 필자의 기억에 학교는 언제나 병영과 같았고, 사회는 근대화(경제성장)와 민주화의 갈등 속에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국민의 기본권은 압살되었고, 정부 여당은 대통령의 시녀로서 민주주의를 시늉하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야당은 민주화 투사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됐고, 그들의 독재 타도 투쟁은 87 민주화 투쟁으로 결실을 보았다. 정치적 민주화는 지역주의에 기초한 총재 정치를 낳았다. 여당은 여전히 독재적 정치문화의 그늘 속에서 음산한 반민주적 행태를 유지했고, 야당은 호남의 김대중, 영남의 김영삼, 충청권의 김종필이 지역의 맹주로 군림하며 정치적 지분을 행사했다. 이 과정에서 정당은 총재의 권력놀음을 위한 액세서리에 불과했다. 민주주의가 직선으로 발전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시작은 1997년 김대중 정부의 출현이었다. 평화적 정권 교체의 시작이었고,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 듯이 정치란 진보와 보수의 정치적 갈등 속에 경쟁과 협력을 통해 사회가 상승 발전하는 과정임을 국민은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진보와 보수 양측 모두에서 라이징 스타들이 총재들을 대체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일종의 ‘떴다방 정치’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보수의 이회창이 그랬고, 진보의 노무현이 그랬다. ‘떴다방 정치’는 정당정치의 실종을 증명하는 한국판 포퓰리즘의 전형이었다. 윤석열은 ‘떴다방 정치’의 극치였던 셈이다. 이런 역사는 지금도 재현되는 중이다. 국민의힘의 경선은 이미 한덕수와 단일화를 전제로 한 예선전 수준으로 격하되었다. 부끄러울 정도의 치졸한 권력 추구의 행태를 보이며 자기 당의 대통령 후보를 당당하게 본선에 내보내지 못하는 정당을 어찌 공당이라 할 수 있을까? 둘째, 윤석열 파면의 정치적 기원은 ‘정치의 사법화’에 있다. 그 중심에는 검찰 권력의 정치화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남이가!” 1992년 대선을 앞두고 검찰 출신 법무부 장관 김기춘이 남긴 희대의 어록이다. 지역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동시에 검찰 권력이 정치를 넘보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과거 독재 정부의 권력자들은 정보기관(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과 경찰(치안본부)을 동원해 국민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그러나 민주화의 실현으로 정보기관과 경찰의 힘이 빠진 틈을 타서 권력기관으로 올라선 기관이 바로 검찰이었다. ‘범죄와의 전쟁’은 검찰이 사회적 공익을 실현하는 기획 이벤트로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스타 검사들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렸고, 그들의 경력은 정치권으로 진출하는 스펙이 되었다. 홍준표는 대표적인 검사 출신 정치인의 모델이 되었다. 검찰은 스스럼없이 정치적 행위에 대한 사법적 판단으로 특정 정치인을 옭아매려 했다. 판사 출신 여당 대통령 후보 이회창 역시 상대 후보의 정치적 행위에 대한 사법적 공격으로 정치적 금도를 넘었다. 그는 당시까지 불문에 부쳤던 정치 자금에 대한 수사로 김대중 정부를 궁지에 몰아넣으려 했다. 이후 검찰은 대통령의 임기 말에 이르면 으레 정치권 수사에 나서 총선이든 대선이든 당락의 향방을 가르는 기준을 제시하려 하는 한편 재계의 비리 수사에 착수하여 선거판의 유불리를 재단하는 무리수를 기꺼이 자처했다. 정치적 금도를 무시하는 정치 검찰의 행태는 끝을 모른다. 그러나 무리하면 탈이 나는 게 세상 이치이다. 대선에서 패배한 야당 후보 이재명을 정치적 사망 선고에 이르게 하려는 검찰의 시도는 급기야 윤석열의 파멸을 자초했고, 이재명에게는 정치적 부활의 기회를 제공하는 역설적인 효과를 내고 말았다. 윤석열 파면에 관한 헌법재판소 결정문의 포괄적 취지는 ‘정치는 정치의 영역’에서 해결하라는 주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고 스스로 정치를 부정하며 권력을 휘두른 검찰주의자 윤석열의 파멸은 애초부터 정해진 수순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여당 정치인의 무책임을 들 수 있다. 윤석열은 왜 대통령이 되려고 했을까? 지금도 이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대통령 윤석열에게는 철학도 비전도 없다는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적인 행위에 대한 이해가 없었고, 그래서 정치를 거부했다. 그에게 조금이나마 정치적 감각이 있었다면, 여소야대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의 권력으로 의회를 누를 수 있다고 착각했다. 계엄이 초래한 경제적 부작용으로 여전히 수많은 국민들이 경제적 고통 속에 신음하지만 그는 한 번도 사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홍준표의 사례를 보자. 그는 대구시장직을 버리고 다시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다. 검사 출신 정치인으로서 홍준표의 이력은 화려하다. 다선 의원과 여당 대표를 거친 대선 후보, 이에 더해서 경남도지사와 대구시장을 역임했다. 혹자는 그를 성공한 정치인으로 평가할지 모르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는 어리석은 유권자들을 찾아다니면서 권력 놀이에 빠진 정치인의 한 명에 불과할 뿐이다. 필자가 그렇게 야박하게 평가하는 이유는 정치인의 책무를 가볍게 여기는 그의 태도에 있다. 그는 경남도지사 시절 진주의료원의 문을 강제로 닫아버렸다. 적자 운영이 명분이었다. 그러나 공공병원은 지역의 경제적 약자를 위한 의료시설로서 어느 정도의 적자 운영이 불가피하다. 이는 지역 의료원들이 코로나19 사태 당시에 맡았던 역할을 떠올려봐도 자명하다. 그 진주의료원은 2028년 재개원을 목표로 건설에 착수했다. 이는 그가 지자체장으로서 지역민의 삶을 돌보지 않고 무책임한 결정을 내린 하나의 사례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홍준표는 대구시장으로서 최근까지 대구시와 경상북도의 통합을 밀어붙였다. 백번 양보해서 지자체장으로서 지방 살리기라는 정치적 명분을 내밀어 시도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불순한 의도는 여지없이 드러났다. 애당초 그는 대구시장에 당선되자마자 통합을 추진하는 부서를 폐지할 정도로 통합반대론자였다. 하지만 2년 만에 변변한 이유도 없이 통합찬성론자로 돌변하여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다. 그 과정에서 여론 수렴을 생략하는 반민주적인 행태도 드러냈다. 그런데 대선 정국이 열리자마자 대구시장직을 팽개치고 통합 추진은 슬그머니 사라졌고, 그에 대해서 한마디 변명도 사과도 없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려는 자의 품격에 심히 의심이 간다. 한동훈, 한덕수, 김문수 등 여권의 대선 주자들은 한결같이 정치적 무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계엄과 내란의 부당함을 인정하면서도 내란 세력과 결별하지 못하는 한동훈, 평생 양지만 좇으면서 관료적 권위를 쌓은 한덕수가 내란 공범의 혐의자로서 국민에게 보여주는 야비한 행보, 노조운동가로 입신해 극우 보수 정치인으로 변신한 김문수가 보여주는 정치적 가벼움과 무모함은 보수 정당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든다.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국가에서 정당은 정치권력을 품는 산실이다. 정당이 기획하고 생성하는 정책은 국민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런 정당이 불나방이 모여드는 ‘떴다방’처럼 운영되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입증하는 증거인 동시에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절실한 과제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왜 믿음직한 100년 정당이 없을까? 국민의 신뢰를 받는 지속 가능한 정치적 플랫폼으로서 정당이 확립되고, 그 속에서 정치인이 성장하는 문화가 정립될 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오늘의 질곡에서 벗어나리라. 안상준 필자 이력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한국 서양사학회 회장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교수신문 논설위원

    [안상준의 함께꿈] 정치는 없고 권력만 탐한 떴다방 보수
  • [안상준의 함께꿈] '타오르는 대한민국' …4월 4일, 이 불길 끌 마지막 기회

    잔인한 3월이었다. 부주의가 빚은 산불의 참극은 수많은 사람의 일상을 순식간에 삭제해 버렸다. 날아다니는 불덩어리를 미처 피하지 못해 생명을 잃은 분도 적지 않았고, 몸을 보전하기도 다급했던 분들은 집과 전 재산을 잃고 막막한 상태로 내몰렸다. 그중에는 오랜 교직 생활을 마치고 시 외곽의 마을에 소박한 집을 짓고 평화로운 여생을 보내려는 필자의 지인들도 있었다. 평생 연구에 힘쓰던 분의 소중한 서재가 잿더미로 변했고, 평생 작업에 몰두하던 조각가의 귀중한 작업실이 시커먼 재로 날아갔다. ‘마당이 있는 삶’을 애써 고집하며 조용한 마을에서 사는 필자의 집에도 화마가 휩쓸고 지나가 마당이 완전히 소실되었다. 마당이 사라진 집을 바라보며 앞날의 삶이 착잡하게 다가온다. 이 자리를 빌려 대피 명령에도 불구하고 일찍 마을로 돌아와 주택의 소실을 막아준 이웃 주민들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매캐한 연기 속에 며칠간 잔불을 경계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동안 인간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시간을 보냈다. 무엇이 생사를 갈라놓는지, 누가 이 모든 참사의 원인인지, 이토록 참담한 재난 앞에서 과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건지···. 매스컴의 전문가들은 인재를 막지 못한 시스템을 탓하고, 사소한 부주의를 경계하지 않는 개인의 실수를 지적한다. 물론 이번 산불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바람이었다. 문제의 3월 25일 오후 돌풍을 타고 산불은 하루 만에 80㎞를 날아 영덕의 바닷가 마을까지 덮쳤다. 만약 그날 필자의 집 마당을 태운 불꽃의 방향이 마을로 향했다면 우리 마을은 예외 없이 잿더미로 변했을 것이다. 참으로 섬뜩한 상상이고, 산쪽으로 방향을 바꾼 바람의 신에게 깊이 감사할 따름이다. 이번 산불 재난은 필자에게 적잖은 물질적 손실과 함께 인간의 초라함을 일깨워준 비극이었다. 재난 앞에서 적절한 상황 판단을 하기 어려웠고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해마다 반복되지만 신입생은 3월의 캠퍼스에 희망을 실어 오고, 새해의 농사를 준비하는 농부의 마음이 분주하듯 3월의 강의실은 필자에게도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날 오후 2시부터 5시 사이에 산불이 돌풍을 타고 그야말로 순식간에 의성을 넘어 안동 남부와 동부 지역으로 번져 필자의 마을까지 화마가 덮쳤을 때 필자는 교양강의에 집중하고 있었다. 강의 중에 긴급재난문자가 쉴 새 없이 울리긴 했지만 대학본부의 수업 중단 요청이 없었던 터라 예정대로 수업을 진행했다. 오후 5시에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서자 하늘이 온통 주홍색을 띠었다. 다급히 확인해본 휴대전화에는 시 당국이 발송한 시민 대피를 명령하는 문자가 찍혀 있었다. 이웃분들께 전화를 드려보니 이미 대부분 마을을 떠나 긴급하게 대피 중이었고, 필자는 마을로 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밤 9시쯤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돌아가보니 다행히 집은 건졌지만 마당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러고도 3일간 주변 산은 타고 매캐한 연기가 하늘을 뒤덮은 마을에서 필자는 잔불을 경계하느라 때때로 양동이로 물을 퍼나르며 보냈다. 바로 옆마을의 뒷산 능선이 밤새도록 시뻘건 불꽃을 뿜어내며 타는 모습은 작렬히 뇌리에 새겨졌다. 섬칫한 광경의 목도는 정신적 충격과 우울증을 동반했다. 생각하기도 싫고 아무 말도 하기 싫고 아무도 만나기 싫은 마음에 사로잡혔다. 심각한 재난을 당한 분들의 심경을 몸소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재난 앞에 인간은 초라한 존재일 뿐이었다. 사상 최악의 인명 피해와 재산 손실을 입힌 산불은 일주일 만에 잡혔다. 온갖 암울한 미래의 전망이 쏟아지고 걱정이 태산 같지만 우리의 일상은 회복될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전 국민의 가슴에 꺼지지 않는 불이 있다. 윤석열이 지른 내란의 불이다. 헌법 재판소는 윤대통령 탄핵사건에 대한 선고 기일을 오는 4일로 정했다. 헌재가 탄핵소추를 인용하면 윤 대통령은 파면된다. 기각이나 각하할 경우 즉시 업무에 복귀한다. 탄핵심판 선고는 작년 12월 14일 윤대통령이 탄핵 소추된 때로부터 111일 만이다. 거의 4개월이 지났지만 헌법재판소의 최후 심판이 나오지 않으면서 국민의 삶 전체에 심대한 영향을 미쳐 왔다. 국민들의 심신은 지치고, 대한민국의 침몰은 조금씩 진행되고,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의 삶은 하루가 다르게 피폐해졌다. 그렇다면 헌법재판관들은 왜 윤석열이 지른 내란의 불을 신속하게 끄지 않았을까? 최후 변론이 끝난 지도 까마득하고, 윤석열이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 시간이 상당히 지났다. 도대체 왜? 항간의 낭설처럼 윤석열이 지명한 헌법재판관이기 때문에? 심정적으로 여당을 지지하고 대통령을 지지하는 헌법재판관이기 때문에? 결코 그런 이유가 아니길 바란다. 그런 분이 헌법재판관이라면 너무도 실망스럽고,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반세기 전 대한민국의 모습에 머무를 수는 없다. 당신들은 늘 기억하며 살 것이다. 왼손에는 저울을 오른손에는 칼을 든 정의의 여신상이 왜 두 눈을 가리고 있는지! 이 땅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정립되었던가? 식민지를 벗어나고도 국제적인 승인을 얻지 못해 신탁통치를 받는 와중에 우리는 최초의 민주주의 선거(1948. 5. 10)를 치렀다. 제헌의회를 구성하고 의회가 헌법을 공포(1948. 7. 17)하고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1948. 8. 15)했다. 4월 민주혁명, 5월 민주항쟁, 6월 민중혁명을 거쳐 우리는 독재를 극복했고 헌법재판소를 탄생시켰다. 대한민국은 이제 자타가 공인하는 선진국이 되었다. 선진국의 요건은 두 가지다. 경제적 풍요로움과 정치적 민주주의. 그런데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이다. 풍요로움이 없는 민주주의는 없고, 민주주의가 없는 풍요로움은 없다. 만약 있다면, 그건 국민 전체의 풍요로움이 아닌 소수의 풍요로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나라는 민주국가도 선진국도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진단이 심상치 않게 제기된다. 경제적 침체, 국지적 전쟁, 민주주의 체제의 동요 등 일련의 세계정세를 통해 또다시 파국을 향해 치닫는 건 아닌지 역사학자로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파국의 아이콘들은 어김없이 이런 정국을 틈타 떠올랐다. 전쟁광 히틀러는 독일 국민이 선출한 지도자였고,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은 소련 국민이 선출한 지도자이다. 그뿐이 아니다. 민주 투사의 경력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권력을 잡은 뒤에 독재자의 길을 걷는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이나 이스탄불 시장의 경력으로 터키의 권력자에 올라 21세기 술탄이 되려는 에르도안 같은 인물은 민주주의의 적이라 할 만하다. 2022년 3월 9일 우리 국민이 선출한 윤 대통령은 2024년 12월 3일 왜 민주주의를 압살하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국회를 장악하고 선거관리위원회를 점령하려고 했을까? 그는 민주주의의 빈틈을 보았다고 내심 확신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를 혐오하는 일단의 세력을 등에 업고 법비의 알량한 법기술로 국민을 통치하는 길이 보였다고 착각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예상 밖에 전 세계가 놀랄 정도로 우리 국민은 신속하고도 강력하게 저항했다. 어떤 계엄군이 오더라도 대한민국의 민주적인 질서는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국민적 자긍심이 발현된 순간이었다. 그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량은 입증되었다. 그 역량이 헌법재판소를 낳은 힘이고, 헌법재판소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왜 헌법재판소는 결론이 당연한 심판의 날을 미루어 왔을까? 그래도 되는 걸까? 대한민국이 침몰해도 괜찮은가? 아니 필자의 전망이 비관적인가? 경북 지역의 산불이 초래할 최악의 결과는 마을의 소멸이다. 항간에 유행하는 지방의 소멸은 지금 마을의 소멸이 산불로 확인됨으로써 국민적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제 수십 년간 진행된 소멸의 과정에 마침표를 찍을지 모르겠다. 여기에 더해서 이미 도시의 소멸도 진행 중이다. 경제적 침체는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져들었고, 자영업자들의 도산은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할 지경에 이르렀다. 마을과 도시의 동시 소멸을 고려하면, 대한민국은 지금 소멸 중이다.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헌재가 이번에 내란의 불을 끄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의 소멸 또한 머지않았을지도 모른다. 헌법재판소의 현명한 재판관들이여, 제발 하루빨리 내란의 불을 꺼서 온 국민이 편안하게 잠들게 하길! 안상준 필자 이력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한국 서양사학회 회장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교수신문 논설위원

    [안상준의 함께꿈] 타오르는 대한민국 …4월 4일, 이 불길 끌 마지막 기회
  • [안상준의 함께꿈] '극과 극의 시대' 민주주의 수명은 아직 남아있다

    “이곳은 모든 게 엉망이 되고 있다. 조만간 다시 선거가 있다. 경기는 침체를 벗지 못하고 부동산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고, 고물가는 우리의 삶을 짓누르고 있다.” 필자와 친분이 있는 독일인(K)의 가감 없는 솔직한 고백에 깜짝 놀랐다. K는 중소기업에 다니는 견실한 직장인이고 중산층의 가장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나 독일 기업의 수출 경쟁력 약화 등 정치·경제적 요인으로 독일의 상황이 예전 같지 않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독일 중산층 시민의 편지에 담긴 비관적인 고백은 1990년대 독일 통일 이후 저성장과 높은 실업률, 사회적 불안에 시달리던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당연히 독일의 조기 총선(한국 시간 2월 24일 실시)이 필자의 관심을 끌었고, 선거 결과는 중도가 사라지는 역대급의 양극화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단연 극우파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대안당·AfD)'의 약진이 눈에 띈다. 지지율 20.8%로 제2당의 지위를 획득한, 그야말로 기록적인 승리이다. 직전 총선에 비해 정확히 2배 상승한 지지율은 가장 높은 지지율을 획득하며 재집권에 성공한 중도보수 정당 ‘기독교민주연합(기민련·CDU)'의 22.6%와 불과 1.8%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극우파의 집권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근소한 격차이다. 아직은 극우파의 지지세가 압도적으로 동부 독일에 몰려 있다는 한계가 분명하지만, 범세계적인 극우 세력의 성장과 득세를 고려하면 지극히 우려스럽다. 그들은 반이민, 인종주의 및 반세계화로 연대하며 반자본주의적 경향까지도 보여준다. 이번 선거에서 세계적인 기업가 일론 머스크가 노골적으로 대안당 지지를 선언하고 지지율 상승에 영향을 미친 사실은 매우 상징적인 장면으로 남는다. 그에 비해서 중도좌파의 극적인 후퇴는 선명하게 대비된다. 집권 ‘사회민주당(사민당·SPD)'은 직전 총선(2021년)에 비해서 무려 10% 가까운 지지율 폭락을 겪으며 제3당으로 전락했고, 이른바 신호등 연정의 파트너였던 ‘녹색당(GRÜNE)'은 제4당의 지위를 겨우 지켰지만 3% 이상의 지지율을 상실하며 체면이 크게 깎였다. 사회경제적 위기를 실감하는 독일 국민은 중도좌파의 진보적 가치와 미래 세대를 위한 기후정의와 환경개선을 위한 투자를 뒷전으로 밀어냈다고 볼 수 있다. 극우파의 약진, 중도좌파의 후퇴에 비해 상대적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필자에게 눈에 띄는 선거 결과가 있었다. ‘자유민주연합(자민련·FDP)'의 퇴출과 ‘좌파당(LINKE)'의 의회 입성이 그것이다. 독일 내에서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가장 선명하게 내세우는 전통적인 우파 정당 자민련은 극우파의 득세에 밀려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되었고, 반면에 독일 내에서 가장 사회주의적인 색채가 선명한 전통적인 좌파 정당은 중도좌파의 어정쩡한 입장보다 훨씬 더 선명한 좌파적 가치를 내세우며 의회 재입성에 성공했다. 폴란드 출신의 전설적인 여성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를 새겨넣은 팔뚝을 휘두르며 막판에 극적으로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좌파당의 젊은 여성 원내대표의 활약은 무척 인상적이다. 요컨대 독일 조기 총선은 중도좌파 정부의 파산을 선고하는 한편으로 보다 선명한 좌파의 의회 입성을 허락했다. 또한 전통 우파 정당을 퇴출하는가 하면 훨씬 극단적인 우파의 대약진을 보여주었다. 물론 아직은 전통 중도우파에 대한 믿음이 남아 있지만 양극화하는 정치가 언제 파산을 맞을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경향이 독일만의 문제는 아니다. 바야흐로 세계는 반민주주의적인 흐름에 휩쓸려 가는 중이다. 옆 나라 프랑스 정국도 극우와 극좌의 양극단 사이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잡고 있을 뿐이다. 그 위태로운 균형의 중심은 마크롱 대통령이다. 그의 대통령 당선은 극우의 극적인 약진에 대한 프랑스 국민의 반사적인 지지에 기인한다. 어쨌든 극우파 정권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프랑스 국민의 정치의식은 돋보이지만, 그런 국민의 정치의식을 담아내는 중도정당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이 오늘날 프랑스 정국의 혼란으로 이어진다. 2022년 5월 2기 집권에 겨우 성공한 마크롱 대통령은 곧 이은 총선(6월)에서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마크롱의 연금 개혁은 엄청난 저항에 부딪혔고, 정치적 사안마다 엄청난 홍역을 치러야 했다. 급기야 2024년 6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마크롱이 이끄는 집권 르네상스당은 제3당으로 밀려나는 수모를 겪었다. 마크롱은 즉각 조기 총선 카드로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다. 이번에는 중도좌파와 극좌 정당들이 연합한 ‘신민중연합’이 제1당을 차지하는 이변을 일으켰다. 관례상 대통령은 제1당의 지도자를 총리로 임명하지만 마크롱은 극좌 정당의 지도자에게 총리직을 맡기기를 거부했다. 마침내 프랑스에서도 대통령 탄핵안이 발의되는 정치적 내홍이 벌어졌다. 프랑스 국민이 그동안 인기 없던 좌파연합을 제1당으로 밀어준 이유는 무엇일까? 극우도 싫지만 반극우 정서에 기대어 연금 개혁 등 중산층의 입지를 약화하는 우파 성향의 마크롱에게 실망했기 때문이다. 그럼 앞으로 프랑스에서 극좌 정부가 탄생할 수 있을까? 그건 쉽지 않을 전망이다. 전통적인 중도우파 공화당과 중도좌파 사회당의 몰락이 그 중심에 있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종식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과 보편적인 복지국가 개념을 두 축으로 삼아 프랑스의 번영과 국민의 행복을 견인했던 정당들이다. 그러나 1980년 이래 신자유주의 이념의 물결이 휩쓰는 동안 공화당과 사회당은 변절하거나 이른바 ‘제3의 길’을 표방하며 신자유주의 이념의 확산에 오히려 편승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부유한 좌파’나 ‘부패한 우파’ 같은 반민중적인 이미지들이 확대되며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래 양대 정당은 민심과 유리된 채 표류하는 중이다. 독일과 프랑스보다 더욱 심각한 양상은 미국에서 나타난다. 지금 트럼프 2기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하여 만든 세계 질서 자체를 뒤흔들고 있다. 경제적인 차원에서 트럼프 정부의 관세전쟁은 글로벌 자유무역 체계를 위협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을 종식하는 과정은 세계 평화를 유지하려는 미국의 종전 태도와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 표면적으로 트럼프 정부의 목표는 미국의 국익 지키기로 보이지만 실제로 관세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미국의 저소득층 국민임은 경제전문가가 아니라도 예측 가능하다. 또한 트럼프와 푸틴의 거래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종식된다면 전쟁 당사국 우크라이나는 국제적으로 고립될 여지가 높고, 그 많은 전쟁 비용과 높은 에너지 가격 상승을 감수하고 미국과 함께 우크라이나를 지원했던 유럽연합 국가들은 미국의 대러시아 외교 전략에 순순히 보조를 맞추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한다. 세계 평화는 과연 유지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트럼프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으며 재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기필코 민주당의 노선 변경이다. 민주당은 전통적인 지지층인 중산층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고 중산층의 약화와 분열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전쟁 억지력을 유지하면서 세계 평화를 수호하려는 대외정책의 기조를 포기한 듯 우크라이나 전쟁의 조기 종식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이스라엘의 비인동적 가자지구 침략을 강 건너 불 구경하듯 했다. 어쩌면 월가의 자본가들을 대변하는 대통령으로서 군산복합체의 적극적인 활성화를 통해 미국의 국익을 달성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트럼프 정부가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관세를 통한 경제전쟁을 도발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가자지구 전쟁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세계 평화와 안보를 위한 미국의 지출을 최소화하겠다는 방침은 앞으로 한반도를 비롯한 전 세계에 엄청난 파장을 미칠 것이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각국의 중산층 해체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리라 예측되고, 중산층의 해체는 민주주의 체제의 위협으로 다가온다. 2025년 3월 6일, 대한민국은 다음 주로 예고된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심판의 선고를 앞두고 있다. 물론 필자는 재판관 전원 일치로 탄핵되리라 예측하고, 그래야 대한민국의 미래가 있다고 확신한다. 문제는 탄핵 자체에 있지 않다. 12월 3일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내란의 밤을 전개했을 때 온 국민이 대통령의 반민주주의적이고 무도한 권력 행사에 분노하고 저항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석 달이 지난 오늘, 대한민국은 탄핵 찬성과 반대로 양분되는 양상을 보인다. 어처구니없는 현상이다. 거짓말을 일삼고 국민의 의지를 왜곡하는 대통령의 언행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지만, 그런 대통령을 지켜야만 알량한 권력이라도 거머쥘 수 있다고 계산하면서 극우 세력에 기대는 파렴치한 집권 여당의 행태는 반드시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지금 거리를 가득 메운 극우 집회의 참가자들은 누구일까?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무엇일까? 왜 그들은 극우적 가치를 추종하는가? 비상계엄과 내란이 반헌법적 행위임을 그들도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왜 그럴까? 필자는 궁극적인 원인이 한국 사회의 심각한 양극화에 있다고 본다. 신속한 중산층의 분화와 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자영업자,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청년층 등 경제적 양극화에 기인한 사회적 불만이 너무 크다. 그 불만을 가장 극적으로 표출하는 집단이 2030세대의 청년들이라는 사실이 무척 서글프다. 현 집권 여당은 탄핵 정국을 거치며 빠르게 극우 정당으로 변모하는 중이다. 8년 전 국정농단으로 탄핵 심판정에 오른 박근혜 대통령 당시와 달리 훨씬 단순하고 선명한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을 적극 방어하고 극우적 가치를 추종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극우 정당으로 변신할 때 오히려 더 많은 의석수를 차지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더욱 위험한 길로 들어서 암울한 미래를 향해 가는 듯하다. 불과 4년 전인 2021년, 유엔은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선진국의 지위를 부여한 경제적 선진화와 정치적 민주화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소멸하는 중이다. 경제성장의 전망은 날마다 낮아지고, 벌써 자유민주주의 지표는 ‘결함 있는 민주주의’로 떨어졌다. 앞으로 전개될 비극의 양상은 예측 불가다. 차기 정부는 대통령 탄핵의 역사 위에서 어떻게 국민 통합을 이룰 것인가? 독일인 K에게 감상적인 희망의 메시지를 보낼 날을 기다린다. “우리는 다시 한번 대통령을 탄핵했다. 그럼에도 우리의 민주주의는 굳건하다. 경기도 좀 회복되고 부동산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내려갔고, 고물가는 옛말이 되었다.” 안상준 필자 이력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한국 서양사학회 회장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교수신문 논설위원

    [안상준의 함께꿈] 극과 극의 시대 민주주의 수명은 아직 남아있다
  • [안상준의 함께꿈] 이재명의 실용주의 …대선 승리 열쇠될까

    설 연휴가 끝났다. 한국인의 정서상 진정한 의미의 새해가 시작된 느낌이다. 자연스레 뉴스를 접하는 시간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내란죄 혐의로 구속수감된 윤석열 대통령의 비열한 행태와 집권 여당의 구질구질한 여론전에 분노 수치가 오르긴 하지만, 그들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헌법재판소의 차분하고 단호한 대처에 커다란 위안을 얻는다. 탄핵은 당연한 수순이고, 내란죄에 대한 형법상 처벌 수위가 양형대로 집행되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을 위한 정의이자 사필귀정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믿음과 기대를 토대로 조용히 조기 대선으로 돌입하는 분위기 전환이 역력하다. 대선 출마를 노골적으로 선언하는 정치인, 은근슬쩍 대선 출마를 내비치는 정치인과 광역자치단체장, 정권교체를 위하여 야당의 연대를 강조하는 정당 등 움직임은 다양하게 드러난다. 이 와중에 언론은 단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노선 전환에 주목한다. 그의 노선 전환은 대통령 권력을 쥐기 위한 구체적이고 결정적인 정치적 행보인 동시에 명분과 현실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정치인의 고뇌를 한껏 보여준다. 물론 이재명 대표의 노선 전환을 조기 대선 국면에서 드러난 뜬금없는 변화라고 할 수는 없다. 그는 이미 지난해 당론으로 추진하던 금융투자소득세의 도입을 포기했고 가상자산 과세의 유예를 결정했다. 유럽 국가들처럼 횡재세를 도입하지는 못할망정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을 부과하는 근대국가의 재정원칙마저 저버리는 결정이라 실망스러운 면도 없지 않다. 집권 여당의 강력한 반대를 방패로 삼았지만 지금 돌아보면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 아닌지 의심이 든다. 여기서 핵심적인 문제는 과세 포기와 유예의 명분이다. 이재명 대표는 금융투자소득세 도입을 포기하면서 "현재 대한민국 주식시장이 너무 어렵고, 시장에 기대는 1500만 투자자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불가피한 사정을 강조했다. 나아가 금융투자소득세 도입으로 현재 대한민국 증시의 구조적 위험성과 취약성을 해결할 수 없고, "증시가 정상을 회복하고 기업의 자금 조달, 국민의 투자 수단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상법 개정을 포함한 입법과 증시 선진화 정책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그의 해명은 금융투자소득세의 도입 취지를 왜곡하고 증시 비정상에 대한 정확한 진단 없이 증시 정상화나 상법 개정에 대한 기대만 막연히 부추기는 모양새다. 철학도 보이지 않고 비전도 다가오지 않는 공허한 해명으로 들린다. 이재명 대표의 변신은 윤석열의 구속과 조기 대선 분위기의 조성을 계기로 더욱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설 연휴 직전에 열린 비공개 최고위원 회의에서 이재명 대표는 기본사회위원장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이 자리에서 "불법 계엄과 탄핵 국면으로 민생 경제 펀더멘털이 다 무너진 상황에서 기본사회 패러다임을 유지하는 것이 맞느냐"는 고민을 토로하며 성장 우선 경제정책의 필요성을 강하게 피력했다고 알려졌다. 같은 맥락에서 이재명 대표는 반도체특별법의 '산업 연구·개발(R&D) 인력의 주 52시간 예외' 조항을 승인할 개연성이 높다. 물론 민주당의 공개 토론회 형식을 취해 산업계와 노동계의 의견을 들을 예정이지만, 금융투자소득세나 가상자산 과세를 처리한 전례에서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이미 신년 기자회견에서 이 대표는 반도체특별법과 관련해 "필요한 조치를 과감하고 전향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고, 더욱이 최근 중국 오픈소스 AI 딥시크가 던진 엄청난 충격파 속에 이재명 대표가 곧바로 AI 개발을 위한 전폭적인 국가 지원을 약속했다. 일련의 개별적인 발언들은 즉흥적인 대응이라기보다는 성장주의 경제정책의 기조를 일관성 있게 강조하는 효과를 낸다. 필자가 보기에 이재명 대표의 본격적인 노선 전환은 그에게 정치적 도박과 같다. 실용주의를 표방한 성장 우선 경제정책은 그의 정치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는 기본소득 정책과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을 넘어 기본금융·기본주택·기본교육을 포괄하는 기본사회 패러다임은 정치인 이재명의 정치적 트레이드 마크이고 강력한 팬덤을 보유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물론 이재명 대표가 기본사회 패러다임을 완전히 포기하기는 어렵다고 보지만, 중도층과 보수층 일부를 확보하기 위해 일정 부분은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확실한 판단이 선 것으로 추정된다. 이재명 대표의 실용주의적 전환에는 지난 대선 패배에 대한 뼈아픈 성찰이 느껴진다. 돌이켜보면 거대 여당의 대선 후보로서 근소한 격차로 패배한 사실 자체가 그에게 치욕적인데, 지난 3년 동안 대통령의 실정과 내란 사태에 따른 국력의 낭비, 국가적 위기 상황의 초래를 고려하면 자신의 석패에 대한 부채의식을 떨쳐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로 인해 경제적 위기 상황에 내몰리는 중도층을 끌어안기 위하여 이재명 대표는 가장 호소력 있는 경제 분야 공약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는데, 궁극적으로 유권자들은 재산 증식의 기회를 제공하는 후보에게 가장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명박 후보에게 대승을 안겨준 뉴타운공약을 여전히 기억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재명 대표는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서 일반적인 환경에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승리할 수 없음을 체득하였을 것이다. 이는 세 번의 민주당 집권 역사를 되돌아보면 명백하게 드러난다. 국가적 외환위기 상황에서 정치적 숙적 김종필과 연합하지 않았어도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까? 결코 아니라고 본다. 노무현의 승리는 어쩌면 기적이라고 말해야 적절하고, 정몽준의 단일화 파기라는 돌발 변수가 없었다면 무난하게 질 뻔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박근혜의 국정농단과 범국민적인 촛불항쟁이라는 이례적인 환경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탄생할 수 있었다. 세 번 모두 극적인 상황에서 겨우겨우 얻어낸 신승이었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우익 보수세력 이외의 정치세력이 집권을 하기가 어렵다는 역사적 방증이다. 이번에도 유사한 상황이 펼쳐졌다. 윤석열의 파직과 처벌 이후 조기 대선은 거대 야당 더불어민주당에게 절호의 기회임이 분명하다. 현재의 정치적 구도를 고려할 때 이재명 대표가 대선 후보로 추대될 가능성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재명에 대한 비호감과 거부감은 결코 간과할 수준이 아니다. 이미 0.73%의 차이에서 드러났기에 일부 논자들은 이재명 대 이재명 구도를 설정한다. 그것은 변해야 성공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방정식과도 같다. 이재명은 그 지점을 적확히 꿰뚫고 있다. 문제는 정체성과 대중성의 조화에 달려 있다. 어쩌면 이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실현되는 정치의 본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이재명 앞에 놓인 숙제는 기본사회와 성장주의를 어떻게 절묘하게 배합하여 그에 대한 비호감과 거부감을 최대한 완화하는가이다. 이재명의 정체성과 변신을 보면서, 최근에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에서 시청한 덴마크 정치드라마 <비르기트>가 여러 면에서 오버랩되었다. 비르기트는 기후정의를 표방하는 ‘신민주당’의 대표이다. 그는 연정에 참여해 외교부장관직을 수행한다. 그런데 그린랜드에서 거대한 유전이 발견되면서 덴마크 정부와 그린랜드 자치정부 사이에 갈등이 벌어진다. 비르기트는 덴마크의 막대한 국익 앞에서 신민주당의 기후정의를 저버린다. 비르기트의 정치적 배신은 엄청난 비난을 유발하고 실망한 당원들은 신민주당을 떠난다. 더욱이 유전 개발을 둘러싼 국내적 갈등과 함께 미국과 중국, 러시아의 갈등이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발전하면서 비르기트의 정치적 입지는 극도로 좁아진다. 결국 당대표직에서 물러나 제2의 정치인생을 찾아 떠나는 비르기트를 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정을 담당하는 정치가는 정치적 신념과 경제적 국익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당하는 숙명을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이 다시금 와닿았다.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매달리면 “자기들 가치관만 옳다고 주장하는 일부 좌파”로 매도되기 때문이다. 이재명의 정치적 신념인 기본사회는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든 경제성장과 상당 부분 배치된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는 분배를 통한 불평등의 완화를 통해 지속가능하고, 분배를 통한 중산층의 형성 없이 민주주의의 만개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21세기 자본>의 저자 토마 피케티가 불평등 심화 과정을 역사적으로 규명하고 글로벌 자본세를 부과하자는 제안에 견주면 이재명 대표의 기본사회는 대한민국의 패러다임을 교체하는 참신한 실험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상은 멀고 현실은 가까운 법. 이재명 대표는 권력을 잡아야 자신의 신념을 구현하고 공동체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결정할 권한’을 누린다는 현실적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정치적 정체성과 자산을 과감히 포기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안상준 필자 이력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한국 서양사학회 회장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교수신문 논설위원

    [안상준의 함께꿈] 이재명의 실용주의 …대선 승리 열쇠될까
  • [안상준의 함께꿈] 윤석열을 버려야 보수가 산다

    2024년 12월 3일 10시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 2024년 12월 4일 1시 국회의원 190명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 가결 - 2024년 12월 4일 4시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해체 선언 - 2024년 12월 7일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안 부결 - 2024년 12월 14일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안 가결. 마침내 대통령이 헌정 파괴를 통한 권력 독점을 시도했다. 후진국 지도자의 폭력적인 통치권 행사였다. 그에 맞서 선진 국민은 결연하게 그리고 용감하게 민주주의의 파국을 막아냈다. 그 과정은 2시간 37분짜리 숨 막히는 다큐멘타리 영화와도 같았고, 한편으로는 11일에 걸쳐 우리의 생명과 질서는 우리 손으로 지켜내려는 시민의 결연한 항쟁의 서사이기도 했다. 계엄과 내란을 겪으면서 혹자는 선진국 대한민국의 후진적 거버넌스의 속살이 드러났다고 우려하고, 혹자는 헌정 질서가 파괴되는 순간에도 목숨 걸고 막아내는 대한민국 국민의 놀라운 민주주의 회복력을 칭송한다. 그 어떤 경우에도 내란 시도는 미화될 수 없고, 내란의 원인은 철저하게 규명하여 역사 속에 길이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윤석열의 파국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는 대선 승리의 0.73% 매직 비율에 담긴 정치적 함의를 읽으려 하지 않았고, 애초부터 정치적 타협을 거부했다. 그의 정치적 행보에 대한 우려는 대통령에 취임하는 순간부터 한반도를 넘어 전 세계를 뒤덮었고, 우리 국민과 전 세계 시민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무엇보다 그는 정치인으로서 말의 무게를 우습게 여겼다. 언행은 거칠었고 식언을 일삼았다.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를 수락하면서 “국민의 말씀을 경청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그의 공언은 불행한 미래를 예견케 하는 대표적인 식언이었다. 취임 100일 기자회견 후 “대통령으로서 최소한의 정치적 스킬도 갖추지 못한 아마추어 같다. 기본부터 배우라”는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일갈은 참으로 신랄했다. 임기 중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과 사고에 대한 그의 행보와 대응 방식은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로서 품위는 고사하고 인간에 대한 예의도 찾기 어려운 몰상식과 불공정의 극치를 보여준다. 생떼 같은 청년들의 목숨을 앗아간 이태원 참사, 몰염치의 궁극을 과시한 해병대 채 상병의 익사 사고와 조사단 외압 의혹 그리고 국제적 망신으로 자초한 세계 잼버리 대회의 파행 운영과 부산 엑스포 유치 경쟁 등 어느 것 하나 국민의 눈높이에서 해결하려는 의지도 없고 적절한 대책도 강구하지 않은 채 묵살과 강압으로 일관한다. 그의 정치 스타일은 격노로 표현된다. 그 앞에서 토론은 없고 비판적 의견은 그의 격노를 감수해야 한다. “언론의 자유와 언론기관의 책임을 철저하게 존중하는 것이 우리 정부의 국정철학이다.” 억지와 궤변의 전형이다. 노조의 파업은 최악의 업무개시명령으로 진압하고 고등학생의 풍자만화는 표현의 자유 제약으로 내리누른다. 그 결과는 민주주의 지수의 추락으로 드러난다. 스웨덴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2024. 3. 7 보고서 발표)는 “한국은 민주화에서 독재화로 전환하는 국가다”로 규정했다. 내란 사태에 비춰보면 놀라운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22대 총선에서 여당이 역대급 참패를 기록한 이후 국민은 대통령과 집권 여당의 변화를 기대했다. 집권 여당 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여권이 방향을 제대로 못 잡으면 예정된 코스는 탄핵이다.”(김해을 낙선자 조해진) “보수 정치인이 오히려 걱정을 더 끼치고 민폐를 끼치는 집단이 되고 있다.”(창원마산합포구 당선자 최형두) 그러나 대통령은 역시 타협을 거부했고, 여당은 민심을 따르기보다 오히려 대통령의 심기를 살피기에 급급했다. 설령 대통령의 오기와 집착을 인정하더라도 비상계엄과 내란은 국민의 상상 밖에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국민은 분노에 차서 그의 파면과 탄핵을 요구한다. 물론 대통령과 국민의 대결은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달려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상식적인 판단과 국민의 분노 지수를 고려하면 당연히 탄핵이 예상된다. 문제는 여당의 행보다. 그들은 현재 대다수 국민의 분노와 여망을 외면하고 비상계엄과 내란을 옹호하며 주도 세력을 감싸면서 정치적 계산에 빠져 있다. 보수 정치세력의 궤멸까지 염두에 두고 옥새투쟁이라도 벌이는 형국처럼 보인다. 8년 전 탄핵의 트라우마를 언급하지만, 사실상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과 다를 바 없다. 이 대목은 21세기 전 세계를 휘감는 민주주의 시스템의 위기, 즉 포퓰리즘의 득세, 정치적 혐오 정세의 확산, 중산층의 보수화, 민주적 가치의 약화 등 세계적인 현상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어떻게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우회적으로 지적하면서도 정치 지형의 현실적 변화를 담고 있다. 저소득 노동자의 지지를 받는 억만장자 정치가의 출현은 21세기형 희대의 포퓰리즘이다. 그것의 뿌리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기능 부전에 있다. 글로벌 경제위기가 증명하듯이 세계 경제는 더 이상 성장곡선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신자유주의는 극단적 불평등을 야기했고, 이를 대체하는 국제정치적 이념과 제도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트럼프의 자국우선주의를 내건 일자리 창출이 인기를 얻는 이유이다. 그에 반해서 불평등의 심화를 도외시하고 오히려 월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면서도 정치적 올바름과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민주당은 유권자에게 외면당했다. 유럽에서도 포퓰리즘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극우파의 집권을 극도로 경계하는 프랑스 국민의 공포심은 마크롱이 중도로 포장하여 대통령이 되는 결정적인 밑거름이었다. 그러나 그의 친기업적이고 반중도적 행보는 시민의 노후를 위협하는 연금 개혁으로 표출되었다. 시장지향적 국정운영은 마침내 내각의 불신임으로 이어지고, 프랑스의 정국은 한 치 앞을 가늠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한편 전통적으로 중산층과 노조의 지지를 받아 집권한 독일 사민당은 16년 만에 집권했지만 조기 총선의 압박에 시달리는 중이다. 메르켈 정부와 대연정을 하면서 전통적인 지지층을 잃은 집권 사민당의 인기는 3당으로 하락한 반면에 중산층 시민의 불안을 자극하고 반시장주의와 외국인 포용을 거부하는 극우 극단주의 세력의 팽창은 우려스러울 정도에 이르렀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훼손과 민주주의 원리의 후퇴는 동전의 양면이고, 이는 극단적 포퓰리스트들이 등장하는 역사적 배경이다. 필자가 보기에 오늘날 진정으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위에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실현하는 국가는 사실상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0.01%의 초부자들의 자본 집중은 날로 심화하고, 99%의 서민은 쳇바퀴 속의 쫓기는 다람쥐처럼 과도한 노동의 세계에서 신음하는 중이다. 그 중간에 놓인 0.99%의 전문직 종사자(또는 노동귀족)들이 파국과 긴장 사이에서 겨우 균형을 잡고 있는 형국처럼 보인다. 물론 그들의 균형추도 조금씩 파국 쪽으로 기우는 중이다. 파국적인 전쟁의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느껴진다. 근대적 민주정치는 정치세력 간의 균형, 즉 상호 견제를 통한 균형 위에 실현되었다. 일방적이고 과격한 폭주는 필시 그만큼의 반동을 낳았다. 역사의 교훈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지난 총선을 통해 정부에 강력히 경고했다. 그것은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독재화 국가’ 저지, 둘째는 경제적 양극화 저지, 셋째는 차별적인 사회의 저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격 추락의 저지가 그것이다. 보수 정치세력의 퇴출 혹은 궤멸은 정치 생태계의 위기를 초래한다. 불통과 독단에 기초한 윤석열의 리더십을 보수 세력의 이해관계와 일치시키면서 정치적 생존을 도모하는 치졸한 방식으로는 민주적 가치를 실현하고 사회를 통합하는 진정한 보수 세력의 리더십으로 거듭날 수 없다. 결단코 과감히 윤석열을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한민국이 극단적 갈등은 깊은 수렁에 빠질 수 있고, 새로운 통합의 사회를 회복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AI시대이다.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이 미래로 도약하기 위하여 우리가 던져야 하는 ‘최초의 질문’은 무엇일까? 우리의 민주주의 수호를 고려할 때 필자에게는 '민주주의 리더십을 위한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궁극적으로 윤석열의 실패는 독단과 오기에 있었다. 타협과 협치는 그의 사전에 없었다. 어쩌면 윤석열은 우리의 학교 교육과 상명하복의 검찰 문화에서 배태된 ‘순종하는 노예’가 권력을 잡았을 때 탄생한 괴물일지도 모른다. 그의 파트너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 역시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고, 이번 내란 사태를 겪는 와중에 우유부단한 판단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 그는 철저히 국민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행동했어야 했지만 때로는 정치적 이해타산에 빠지곤 했다. 민주적 거버넌스에 대한 이해가 투철하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근대 과학의 출발점은 '합리적 이성(의심)'이었고, ‘나는 생각하기에 존재한다(Cogito ergo sum)'로 표현되었다. 주체의 합리적 의심은 지적 호기심의 다른 표현이다. 나아가 비판적 이성은 우리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삶까지도 돌아보는 여유를 제공한다. 우리는 너무도 오랜 세월 동안 호기심 대신 수동적으로 지식을 습득하여 우열을 가리는 승자독식의 체계 속에서 교육을 받아왔다. 수능은 그것의 결정판이다. 이제 교육의 플랫폼을 민주시민 양성으로 바꾸고 고등교육의 선진화를 꿈꾸며 민주적 리더십을 키우는 교육으로 성숙한 민주사회를 지향할 때이다. 안상준 필자 이력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한국 서양사학회 회장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교수신문 논설위원

    [안상준의 함께꿈] 윤석열을 버려야 보수가 산다
  • [안상준의 함께꿈] '비지니스맨' 트럼프가 뒤흔들 세계 안보와 경제 질서

    철저하게 속은 느낌이다. 트럼프의 악마 이미지에 속았고, 언론의 여론조사에 속았고, ‘샤이 트럼프’ 표심에 다시 한번 속았다.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경합 7개 주를 모두 휩쓴 트럼프의 압승에 놀랐고, 상원과 하원을 모두 잃은 민주당의 완패에 놀랐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떨고 있다. 트럼프는 완벽한 권력자로 돌아왔고, 세계는 예측불허의 반지성적인 정치인 도널드 트럼프가 제47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사실에. 트럼프의 재등장에 무수히 많은 질문이 쏟아진다. 어떻게 트럼프가 백악관으로 귀환할 수 있나? 반민주적 인물을 다시 선택한 미국민을 원망이라도 하듯이, 민주주의 제도가 정말 인류의 삶과 가치 실현에 적절한지 묻는다. 근본적인 질문과 함께 현실적인 질문이 터져 나온다. 미·중 대결이 심화하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아니면 김정은과 관계 복원으로 한반도 평화체제로 가는 길이 열릴까? 우려와 기대가 교차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주머니를 털어갈 트럼프를 심히 경계한다.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통상 압력이 우리 경제에 어떤 파장을 낳을까? 312명 vs 226명.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트럼프의 압승이다. 그런데 이런 격차가 여론조사에서 드러나지 않자 또다시 여론조사에 대한 비판과 무용론이 제기된다. 여기서 언론의 태도와 역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등 우리에게 익숙한 주요 매체들이 트럼프 지지 여론을 정확하게 전달했는지 묻고 싶다. 그들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뉴스를 전달했다기보다 자신들의 관점에서 여론의 흐름을 주도하는 오랜 관행에 젖어 있었다. 그 속에는 계급적 이해관계가 반영되어 있었다. 이제 그 계급이 적어도 서민 대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보다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이런 맥락을 간파한 트럼프는 비판적인 주요 매체들과 싸우기보다 우회하는 전략을 택했다. 그는 이슈 토론을 통해 도덕성과 전문성을 검증받는 대선 후보 토론회를 거부했다. 단 한 차례 출연한 ABC 주관 대선 후보자 토론회에서 그는 여전히 비호감 후보임을 여실히 드러낼 뿐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후보자 토론회를 대신할 코미디·토크 팟캐스트가 있었다. 자신의 견해에 공감하는 진행자와 몇 시간 동안 대화하는 방식은 평소 정치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방법으로 판명되었다. 뉴미디어의 발달로 점점 더 확산하는 뉴스 소비자의 확증편향 현상은 이제 포퓰리스트 정치인의 출현에 더없이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결국 트럼프는 뉴미디어로 대중과 소통하는 승자가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8년 전 힐러리 클린턴을 누르고 트럼프가 당선되었을 때 ‘샤이 트럼프’ 층이 주목을 받았다. 각종 추문과 비리, 심지어 범죄와 연루된 의혹이 제기된 트럼프를 지지할 수 있냐는 힐난이 담긴 질문이었다. 하지만 농부가 밭을 탓할 수 없듯이, 정치인이 유권자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들은 적응할 뿐이다. 그래서 정치의 수준은 유권자의 민도와 비례한다는 경구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다면 민주당의 후보는 어떻게 저렇게 정직하지도 깨끗하지 않은 후보에게 질 수 있는가? “10월에 필자는 우연히 워싱턴D.C.에서 로비스트로 활동하는 지인과 월가에서 대규모 자산을 관리하는 지인을 각각 만났는데, 두 사람 모두 트럼프의 승리를 기정사실로 보고 있었다.” 어느 신문의 한 대목에서 잘 드러나듯 선거는 치러지기도 전에 이미 끝나 있었다. 러스트 벨트(미국 중서부의 낙후된 공업 지대)의 백인 하층 노동자들과 선 벨트(미국 남부의 뜨거운 지대)의 보수적인 주민들로 구성된 트럼프 핵심 지지층의 지지가 얼마나 단단한지 실감나는 대목이다. 노동자 유권자의 관점에서 선거는 그들의 삶에 어떤 의미일까? 기후 위기의 해결? 낙태권 보장 논쟁? 북핵 문제의 해결? 아니다. 그들은 늘어나지 않는 일자리를 두고 외국인과 경쟁해야 하는 환경에 짜증나고, 임금은 오르지 않는데 물가는 한정 없이 올라 생활 수준이 하락할까 공포심에 짓눌려 있다. 그들은 거대하고 숭고한 과제의 해결보다 당장 내 삶의 개선을 기대하는 평범한 시민이다. 내일의 가치 실현보다 오늘의 생존이 시급한 이들에게 민생고를 해결할 구세주가 누구일까? 그는 당연히 현실주의적 정치가일 것이다. 이 점에서 월가의 인사들마저도 트럼프의 승산을 예견했을 것이다. “내가 집권하면 24시간 내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겠다.” 실현 여부와 무관하게 정치적 수사로서 트럼프는 지지자들에게 평화를 염원하는 이미지를 강하게 심어주었다. 반면에 민주당의 해리스 후보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든 이스라엘-가자 전쟁이든 적극적으로 해결할 의지를 밝히지 않음으로써 세계 평화의 주도자라는 이미지를 빼앗겨 버렸다. 그건 외교적 이미지의 문제뿐만 아니라 전쟁과 연결된 민생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결함을 보여주었다. 필자가 보기에 이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명분은 사라졌다. 우크라이나의 독립? 나토의 동진? 유럽의 안보위기 해결? 러시아의 고립? 그 어느 것도 현재의 지정학적 판도에 맞지 않는 질문들이다. 미궁에 빠진 전쟁에 미국 정부가 수백조원을 쏟아부어야 할 명분은 분명치 않다. 반면에 전쟁은 식량과 에너지 가격의 인상 등 세계적인 물가인상의 진앙지로서 지목될 뿐이다. 바이든의 외교정책이 노동자에게는 물가 인상의 고통을, 부자들에게는 엄청난 투자 이익을 안겨주는 상황에서 민주당의 진보적 정체성은 심하게 훼손되고 말았다. 해리스는 이스라엘-가자 전쟁의 종식에 관한 해법과 일정을 적극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바이든 정부는 이스라엘 네타냐후 정권의 반인도적이고 폭력적인 가자 지구 점령과 민간인 학살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다. 반네타냐후 시위로 몸살을 앓았던 미시간 대학에서 해리스나 민주당에 대한 지지 표지판이나 적극적인 활동을 거의 보지 못했다는 외국발 리포트는 민심과 유리된 채 가치와 평화를 떠드는 민주당을 보는 듯하다. 과연 ‘진보적’ 민주당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유권자는 묻고 있다. 부동산 사업가 출신의 포퓰리스트 정치가 트럼프의 재등장은 세계 정치와 경제의 판도를 심하게 흔들 개연성이 짙다. 그의 선거 구호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와 ‘미국 우선주의’에 걸맞게 고립주의를 채택하며 경제적 민족주의가 강화될 전망이다. 자유무역의 기조 아래 다자간 무역협정으로 글로벌 경제 환경을 만들려는 신자유주의의 기치는 이제 마침내 종말을 고할 수도 있다. 그것은 영국 국민이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통하여 신자유주의를 포기하고, 최근에 사회민주주의적 노선의 노동당 정부에게 힘을 실어준 사건과 맥락이 통한다. 이런 경향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 뚜렷이 감지되는 극우 정치 세력의 약진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헝가리의 장기집권자 오르반 총리가 유럽연합과 각을 세우면서 러시아와 연대를 통해 자국의 경제구조를 재건하는 한편, 이탈리아의 극우 총리 멜로니가 정치적 인기를 누리며 경제 상황을 안정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향후 대서양 양안의 경제적 이해관계는 고립주의적 기조를 공유하면서 축소 지향의 새로운 질서를 수립할 여지가 보인다. 여기에는 당연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이 전제된다. 문제는 미·중 무역 갈등의 해법에 달려 있다. 대중 매파 인사들을 전면에 배치하는 행보로 봐서 미국과 중국의 헤게모니 갈등은 격렬한 파열음을 낼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을 지렛대로 삼아 트럼프는 동북아의 정치적 긴장관계를 거래의 대상으로 삼을 개연성도 높다. 그는 어찌 됐든 비즈니스맨으로서 미국을 위한 재원 확보에 사활을 걸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비즈니스, 트럼프와 푸틴의 비즈니스, 트럼프와 시진핑의 비즈니스 등 다차원의 경제적·외교적 비즈니스가 전개되리라 본다. 이때 한국 정부의 유연한 대처가 매우 중요하다. 기존의 가치외교에 매달려 군사적 대치 상태를 조장하고 그로부터 이득을 얻어내려면 외교적인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다. 동북아에서 전쟁을 바라는 국가는 결코 없다. 북한의 약한 고리를 둘러싸고 외교전을 펼치면서 경제적 실리에 전력을 추구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균형을 잃지 않으면서 평화를 보장받고, 그에 기반하여 경제적 실리를 얻어내는 외교 전략을 구사해야 마땅하다. 어쩌면 트럼프의 비즈니스적 유연함이 한반도 평화정착에 의외로 크게 기여할 수도 있다. 국제사회의 인도적 차원에서 트럼프의 당선은 재앙적 수준이다. 당장 인류에게 닥친 시급한 문제의 해결은 더욱 요원해졌다. 예를 들어 ‘파리의정서’를 파기한 트럼프 앞에서 기후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국제적 공조는 파산 위기에 놓였다고 보는 게 현실적인 판단이리라. 역사는 다시 한번 반보 전진, 일보 후퇴의 교훈을 되새겨준다. 안상준 필자 이력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한국 서양사학회 회장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교수신문 논설위원

    [안상준의 함께꿈] 비지니스맨 트럼프가 뒤흔들 세계 안보와 경제 질서
  • [안상준의 함께꿈] 거짓과 혐오의 정치 …지구촌에 퍼지는 '전쟁 바이러스'

    미국 대선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판세는 오리무중이다. 거짓과 혐오에 기초한 트럼프의 재선 성공 여부에 관심이 쏠린다. 그것은 미국을 넘어 전 세계 민주주의의 종언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지금 세계는 거짓과 혐오가 정치를 장악하고 적대를 넘어 전쟁을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의지가 강력하게 작동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표면적으로는 새로운 러시아 차르 푸틴의 침공으로 보이지만, 양국 간 극단적인 갈등과 우크라이나 내부의 극단적인 갈등의 산물이다. 소련 해체 이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국민은 극심한 경제적 고통을 체험했고, 결과는 유럽연합과 러시아 사이에서 표류하는 국론의 분열로 드러났다. 그 후 우크라이나는 집권 세력의 성향에 따라 냉탕과 온탕을 오갔고, 세계인의 관심을 끄는 지정학적 분쟁 지역으로 떠올랐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우크라이나의 분열을 나토 동맹을 확장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고, 러시아는 오랜 세월 역사와 문화를 공유한 우크라이나의 이탈을 방치할 수 없었다.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은 친서방계 주민의 우세를 보여주었으나 러시아의 군사적 개입으로 좌절되었고 친러시아계 주민의 부분적인 독립으로 귀결되었다. 이런 과정을 고려할 때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정부의 나토 가입 시도는 우크라이나 국민의 총의를 무시한 정치적 결단이었다. 그 대가는 무수한 인명의 희생이고, 식량과 에너지 가격의 치명적인 인상으로 전 세계인이 겪는 일상의 고통이다. 1년 전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세력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했다. 수천 발의 미사일을 쏘았고, 다수의 이스라엘인을 인질로 잡아갔다. 실로 충격적인 방식으로 전쟁을 유발했다. 세계는 경악했고 이스라엘 정부는 하마스의 궤멸을 선언했다. 이스라엘의 보복 전쟁은 철저하고 가혹하다. 하마스의 본거지 가자지구가 초토화되었고, 전쟁의 희생자는 상상을 초월한다. 전쟁 발발 한 달 만에 사망자가 1만명을 넘었고, 1년을 맞은 지금 사망자는 4만명을 넘어섰다. 희생자의 절대 다수는 민간인이고 그중 아동의 비중이 특히 높다. 나아가 전 세계에서 몰려온 기자와 국제 구호단체의 활동가들도 적잖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스라엘 군대의 비인도적인 작전 수행은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갈수록 확대되는 분위기다. 가히 5차 중동전쟁으로 가는 지옥의 문을 열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이스라엘 정부의 극단적인 보복의 이면에는 초강경 극우파 정권이 도사리고 있다. 그 중심에는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있다. 1996년 역대 최연소(47세) 총리에 오른 네타냐후는 3년의 임기를 마친 후 2009년 재집권하여 12년간 권좌를 유지했다. 기본적으로 그는 팔레스타인과 평화협정에 반대하고 군사력에 기반한 안보적 해결책으로 평화를 유지하려는 우파 정치인으로서 외무장관 시절(2000~2005년)에 가자지구 철군과 요르단강 서안 유대인 정착촌 철수 계획 등 라빈 총리의 온건 정책을 비난하며 장관직을 사퇴한 바 있다. 12년 집권의 종말은 네타냐후의 부패 스캔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2016년 처음으로 뇌물, 사기 등 혐의로 기소되었고, 2020년 5월 금품 수수 혐의로 이스라엘 역사상 처음으로 총리 신분으로 재판정에 섰다. 이듬해 6월 마침내 비교적 온건한 우파 성향의 야당들까지 힘을 합세하여 퇴진을 촉구하면서 네타냐후의 장기 집권의 막을 내렸다. 그러나 2022년 11월 그는 부활했다. 이스라엘 국민은 네타냐후에게 세 번째 집권을 허락했다. 결과적으로 위험한 선택으로 판명되었다. 그의 연정 파트너가 ‘독실한 시오니즘’, 초정통파 유대교 정당인 샤스, 보수 유대 정치연합 토라유대주의연합을 아우르는 극우 정당 연합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분쟁의 격화, 팔레스타인 주민의 유대인 정착촌 침투와 총기 난사는 극우파 정당들이 약진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이 선거 과정에서도 이스라엘군은 테러범 색출을 명분으로 요르단강 서안 수색을 강화했고, 이 과정에서 양측의 충돌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제 이스라엘군은 레바논 국경을 넘어 지상전을 전개하는 중이다.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다. 반이스라엘 세력의 축으로 불리는 이란을 향해서는 핵시설이든 정유시설이든 가리지 않고 폭격을 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이에 대한 서방 국가의 반응은 싸늘하다. 유럽 각국에서는 반이스라엘 시위가 점점 더 폭력적인 양상을 띠고,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은 급기야 공개적으로 이스라엘을 위한 무기 공급 중단을 국제사회에 천명했다. 그러나 공허하게 들린다. 이스라엘 극우 집권 세력의 극단적인 방위권 앞에 전 세계 시민의 안전과 평화는 풍전등화의 위험에 내몰리는 형국이다. 두 개의 전쟁을 언급하면서, 문제는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80년간 국제 정치의 근간은 전쟁 재발 방지와 평화의 추구였다. 냉전은 적어도 절대로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철칙을 지켜내는 데 기여했고, 그 불안한 평화 속에서 인류는 성장과 풍요의 시기를 누렸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전쟁이 문제 해결의 수단이 될 수 있거나 나아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늘어나는 추세가 느껴진다. 두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유럽 국가들이 평화 체제에서 안보 강화로 전환하는 경향을 예의 주시할 만하다. 독일 연방 하원은 1000억 유로(약 150조원) 규모의 특별방위기금 조성안을 승인하며 "믿을 수 있는 강력하고 최첨단의 혁신 군대를 만들겠다"는 사민당의 올라프 숄츠 총리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나아가 독일은 현재 18만2000명인 정규군 병력을 2030년까지 20만3000명까지 늘리기로 했다. 이런 추세는 지난 5월 발표된 영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의 보고서에서 확인된다. 2023년 전 세계 국방비 지출은 2조2000억 달러(약 2948조원)로 전년보다 약 9% 증가하여 사상 최대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스웨덴의 스톡홀름 국제평화문제연구소(SIPRI)도 “지난해(2023년) 세계 149국 중 3분의 2가 넘는 69%가 전년 대비 국방비 지출을 늘리며 전체 국방비 지출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발표했다. 나토 회원국들의 국방비 확대도 의미심장하다. 작년과 올해 나토 정상회의를 계기로 회원국들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방비 비율을 2% 이상으로 늘리기로 했고, 영국과 폴란드 등은 이미 2.5% 수준으로 국방비를 급격히 끌어올렸다. 스웨덴·핀란드·독일 및 발트 3국(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 등은 일제히 징병제 부활에 나서거나 검토하면서 병력 확보에도 나섰다. 언론 기사는 마치 유럽에 전면전의 위기가 다가오는 듯 보인다. 언제 전쟁이 나도 이상할 게 없다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50년 이상의 번영과 평화가 있었다. 전쟁이 4년간 지속되고 1000만명의 희생자를 내며 유럽을 파국으로 몰아넣으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린 청년들은 전쟁을 병정놀이처럼 여겼고, 기성세대는 전쟁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전쟁은 단기간에 끝나고 예전의 평화와 번영이 다시 돌아오리라 믿었지만 커다란 착각이었다. 풍요로운 성장과 위협적인 혁명 기운이 공존하던 벨 에포크 시절에 유럽인은 전쟁의 위험에 대한 경각심을 잃고 전쟁의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있었던 셈이다. 당시 주전론자들은 ‘전쟁은 정치적 최종 수단’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비웃으며 ‘정치는 일상적인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정치를 전쟁의 일부로 대하는 인식이 바로 파시스트적 정치의 핵심이다. 이탈리아 국민이 무솔리니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정치인을 총리로 선출했고, 가장 자유로운 나라로 알려진 네덜란드에서 극우파 정부가 들어섰다. 나아가 영세 중립국을 표방한 오스트리아 국민이 나치 잔당이 조직한 정당을 제1당으로 선택했다. 아직 프랑스와 독일이 각기 중도우파 마크롱과 중도좌파 사민당의 집권으로 극우 세력의 집권을 저지하고 있지만 프랑스의 극우파 대통령 당선이나 독일의 극우파 정당 탄생은 시간문제로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먼 나라만의 얘기도 아니다. 극우 파시스트적 정치 인식이 우리 곁에서도 부활하고 있다. 대화를 통한 평화보다 힘에 의한 평화를 강조하며 광화문 거리에서 군사 퍼레이드를 벌이는 광경은 공포감을 자아낸다. 무력에 의한 평화는 필연적으로 파국을 동반한다. 과연 누구를 위한 평화인지 묻고 싶다. 전쟁을 불사하는 평화는 반국가적이고 반인륜적인 무책임한 정치 행위임을 명심하자. 안상준 필자 이력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한국 서양사학회 회장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교수신문 논설위원

    [안상준의 함께꿈] 거짓과 혐오의 정치 …지구촌에 퍼지는 전쟁 바이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