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 소장
carmine.draco@gmail.com
-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 ESG연구소 소장 겸 (사)ESG코리아 철학대표
- 前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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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비욘드 ESG] 못생기면 더 맛있다! 주목받는 '푸드 리퍼브' 시장 [안치용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사람은 호흡을 통해 산소를 받아들여 살아가는 동물이기에 체내에 산소의 균형을 유지하는 체계가 있다. 활성산소가 과도하면 항산화물질이 작용해 넘치는 양을 제거한다. 우리 몸에서 항산화물질은 유지보수 체계를 가동하는 스위치 같은 기능을 한다. 항산화물질이 Nrf2로 알려진 세포를 자극하면 Nrf2는 대부분 세포 보호 기능을 수행하는 500개 이상의 유전자를 작동한다. 사람에게만 Nrf2 같은 방어기제의 일종인 방아쇠가 있을 리는 없다. 식물에도 비슷한 메커니즘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는 게 합리적이다. 실제로 식물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폴리페놀 같은 물질을 증가시켜 대응하는데, 이러한 물질은 식물뿐 아니라 섭취한 인간 건강에도 유익하다. ■고통은 더 성숙한 열매를 준다지만=수백 건의 유기농 연구에서 ‘고통의 효과’가 확인된다. 생산량 극대화에 초점을 맞춘 기존 방식과 다른 유기농 과일과 채소에서 살충제 잔유물이 적은 건 당연하겠지만 흥미롭게도 항산화물질을 20~40% 더 많이 함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맛도 더 좋았다. 미국 버지니아주 해밀턴에서 사과 농사를 하는 그린먼이란 농부가 2014년에 행한 비공식적 실험에서는, 같은 나무에서도 상처가 있는 사과가 상처가 없는 사과에 비해 당도가 2~5% 높았다. 이러한 사실은 나무가 해충 자외선 등 외부 환경에 맞서 싸워 자신을 지켜낸 성공의 징표로 보인다. 과거 누군가 제주도에서 재배한 감귤을 가져다주었는데 작고 못생겼던 기억이 난다. 부모님이 가족 먹으려고 농약 안 치고 저절로 자라게 내버려 둔 것이라고 했다. 확실히 달았다. 꽃길만 걸은 사람에 비해 온갖 어려움을 겪고 성공한 사람에게서 더 인간다운 향기가 나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유기농이 아닌 일반 농법에서 생산된 못난이 과일과 채소는 어떨까. 판매 및 유통용 과일과 채소는 철저하게 외모지상주의의 지배를 받는다. 영양과 당도가 아니라 모양이 우선이다. 물류 효율을 높이고 유통 비용을 줄이고자 하는 물류 표준화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여름 오이의 일종인 ‘가시계 오이’는 구부러진 정도가 2㎝ 이내면 특, 4㎝ 이내면 상, 특과 상에 미달하면 보통 등급을 받는다. 농산물 표준규격에 따라 적잖은 농산물이 ‘등급 외’ 판정을 받게 되고 ‘등급 외’ 농산물은 정상적인 유통경로에서 배제되어 폐기되거나 헐값에 팔린다. 못생겼다고 맛에 차이가 있는 건 아닌데도 말이다. 2020년 8월 24일 서울신문 보도에 따르면 총 27개 농산물생산량에서 ‘등급 외’ 발생 비중은 평균 11.8%였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전국 128개 산지 농협에 설문조사한 결과로, 정부가 등급 외 발생 현황을 조사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품목별로는 당근 19.6%, 무 19%, 배추 17%, 깻잎 16%, 양파 12.6%, 대파 11.8%, 마늘 10.4%, 풋고추 10.2% 등에서 ‘등급 외’가 높았다. 과일류에서는 배 27%, 복숭아 26%, 포도 21.8%, 사과 14.1%로 과일류의 평균이 22.2%로 채소류보다 높았다. 실제 ‘등급 외’ 발생률은 더 높을 것으로 보인다. 양파를 예로 들면 농협 농산물산지유통센터(APC)의 선별 과정에서 ‘등급 외’가 20%가량인데, 농민이 아예 APC에 넘기지 않는 ‘등급 외’가 수확량의 20% 정도는 되기 때문이다. 산지에서 농민이 스스로 판정한 ‘등급 외’는 판매경로를 찾지 못하거나 유통비용 등의 이유로 그대로 밭에 버려질 때가 많다. 세계 전체 상황이 비슷했다. 2019년 유엔환경계획(UNEP)의 ‘식량 위기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식량의 약 14%가 수확 후 판매되지 못하고 낭비된다. 2021년 UNEP의 ‘식품 폐기물 지수 보고서’에서는 소비되지 못하는 식량이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의 8~10%를 차지하여 기후와 가뭄, 홍수와 같은 극단적인 기상 현상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 2021년 미국 환경보호청(EPA)의 음식물 쓰레기 환경영향에 관한 보고서는 매년 미국 식량의 손실과 폐기물이 1억7000만t(톤)에 해당하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고 추산했다. 유엔은 식품 폐기물이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생태계를 악화하는 부정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고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중 하나로 책임 있는 소비와 생산을 포함했다. 세계 한쪽에서는 굶주리지만, 다른 쪽에서는 많게는 생산된 농산물의 절반가량이 판매 전후에, 팔리지 않아서 혹은 음식쓰레기로 버려지고 낭비된다. 효율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생산 및 유통 체계의 극명한 비효율인 셈이다. ■과일과 채소의 외모지상주의 극복=식량 손실과 폐기물의 감소는 여러모로 긍정적이며 특히 지구에 미치는 부하를 줄이는 데에 기여한다. 이러한 목표 아래 자본주의 농산물 유통방식의 개선을 지향하며 등장한 것이 ‘푸드 리퍼브(Food Refurb)’이다. ‘푸드 리퍼브’는 음식을 뜻하는 푸드(Food)와 재공급품을 뜻하는 리퍼브(Refurb)의 합성어. 리퍼브(Refurb)는 ‘새로 꾸민다’는 의미의 ‘리퍼비시(Refurbish)’의 준말로 공장에서 출고될 때 흠이 있거나 반품된 제품, 전시상품 등을 다시 손질해 싼값에 되파는 제품을 뜻하는 유통업계 용어. 대체로 가전제품 가운데 신품과 중고의 중간 제품 정도로 인식된다. ‘푸드 리퍼브’는 겉모습 때문에 소비자에게 닿지 못하고 버려지는 농산물을 주로 유통업체에서 구매해 상품으로 재탄생시킨 것을 말한다. 리퍼브와 마찬가지로 가격이 낮게 책정된다. ‘푸드 리퍼브’는 ‘푸드 뱅크’ 등과 달리 시장 내의 새로운 시도이다. ‘푸드 리퍼브’는 해외에서 시작됐다. 프랑스 슈퍼마켓 엥테르마르셰(Intermarche)에서 2014년 ‘부끄러운 과일과 채소’ 캠페인을 통해 “못생긴 당근, 수프에 들어가면 상관없잖아?”라는 슬로건으로 못난이 당근을 판매한 것이 ‘푸드 리퍼브’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가격은 시세보다 30~50% 낮게 결정됐다. 이후로 ‘푸드 리퍼브’ 시장은 다양한 채소와 과일, 더 많은 나라로 확대되었고, 화장품 업계와 같은 비식품 시장에서도 활용되고 있다. 네덜란드 크롬코마(Kromkommer, ‘휘어진 오이’라는 뜻)는 낭비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못난이 농산물을 활용한 다양한 활동을 펼친다. 2014년에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못난이 농산물로 수프를 만들었고, 2020년엔 못난이 농산물 인식 개선을 위하여 이상한 형태의 과일과 채소 모양의 장난감을 개발했다. 미국에서 월마트, 크로커 등 대형 유통업체가 적극적으로 ‘푸드 리퍼드’에 뛰어들어 못난이 농산물을 30~50% 저렴하게 팔아 소비자의 호응을 얻었다. 영국에서는 못난이 농산물로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 소비자가 느낀 만큼의 가치를 음식값을 내게 하는 ‘더 리얼 정크 푸드 프로젝트(The Real Junk Food Project)’ 식당이 등장했다. 덴마크 시민단체 ‘단처지에이드’가 직접 운영하는 슈퍼마켓 ‘위푸드’에서는 못난이 식품을 30~50% 저렴하게 판매하고 수익을 저소득층 지원에 사용해 주목받았다. 시장방식과 비시장방식의 창의적 혼용인 셈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풀 하비스트(Full Harvest)’는 음식물 쓰레기 제로를 표방하며 못생긴 농산물을 식료품 제조업자에게 연결해주는 B2B 사업을 진행한다. 농가는 못난이 농산물을 판매하여 수입을 올리고 식료품 제조업자는 온라인에서 싼 가격에 원료를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다. 앞서 서울신문 보도 사례에서 본 것과 같은, 수확 후 그대로 밭에다 갈아버리는 사태를 막을 수 있는 수단이다. ■국내의 ‘푸드 리퍼브’=국내에서는 더본코리아 백종원 대표와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이 협업한 2019년 ‘못난이 감자’ 프로젝트가 대표적인 ‘푸드 리퍼브’ 사례로 기억된다. 마땅한 판로를 찾지 못한 못난이 감자 30t을 기존 감자보다 싸게 900g당 780원으로 팔았다. ‘풀 하비스트’와 비슷한 개념으로, 못난이 농산물을 생산한 농가와 식품 가공업체를 연결해주는 ‘파머스페이스’와 같은 사업이 등장했다. 못난이 농산물 정기 구독 서비스 ‘어글리어스’는 성공적인 비즈니스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2021년 서비스를 시작한 후 3년 만에 누적 가입자 23만명, 누적 매출액 100억원을 달성했고, 재구매율이 88%에 달한다. 화장품업계가 ‘푸드 리퍼브’에 관심이 많다. 농산물을 직접 보여주는 게 아니라 원료를 사용하는 것인 만큼 사실 외모가 중요하지 않다. LG생활건강은 지난해 11월 ‘어글리 러블리’ 브랜드를 시작했다. 농가에서 버려질 뻔한 못난이 농산물에서 원료를 추출해 화장품을 만들었다. 현재 올리브영 온라인몰, 더현대 오프라인 매장 등에서 팔고 있고, 동아시아 7개국에도 진출했다. LG생활건강에 앞서 어글리시크는 전북 무주의 유기농 못난이 사과를 활용하여 만든 저자극 여성 청결제와 제주도의 유기농 브로콜리를 활용한 자외선 차단제를 선보였다. TV홈쇼핑에 자주 등장한다. 흠이 있는 사과를 일컫는 ‘보조개 사과’가 제일 유명하고, ‘못난이 참외’ 외에 배, 명란, 굴비 등 모양 빠지는 농산물과 수산물이 성황리에 판매됐다. 2007년 8월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대통령 후보가 서울의 한 중국음식점에서 주요 일간지 편집국장 10여 명과 저녁을 하며 “‘특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여성을 고를 때 덜 예쁜 여자를 골라야 한다”고 말해 논란을 빚은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인생의 지혜”라며 “덜 예쁜 여자” 운운했는데, 만일 그때 ‘푸드 리퍼브’를 논했으면 자신이나 국민이나 더 행복해지는 진짜 지혜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2014년에 ‘푸드 리퍼브’란 말이 돌기 시작했으니 우리나라 지도자에게 세계보다 7년쯤 앞서가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푸드 리퍼브’의 정착과 확산을 기대한다. 안치용 필자 주요 이력 △ESG연구소 소장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전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 2024-07-11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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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비욘드 ESG] 유럽발 '공급망 실사' 눈앞의 현실로 …한국 기업도 '발등의 불' [안치용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2022년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지침 초안을 발표한 지 2년 만인 지난달 24일 ‘공급망 실사법’이 장관급 이사회 승인을 받아 채택됨에 따라 유럽발 ‘공급망 실사’가 본격화했다. 후속 조치가 남아 있어 당장 바뀌는 건 아니더라도 기업 경영 환경에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특히 EU 수출기업은 실사 의무 최초 적용까지 시간이 3년가량 남아 있어 지금부터 준비해도 이르다고 할 수는 없어 보인다. 우리나라 전체 수출에서 EU 비중은 지난해 기준으로 10.8%를 차지하며 수출이 증가세를 보인다. EU 수출기업은 약 1만8000개로 전체 수출기업 중 20%에 육박한다. ■눈앞의 현실이 된 ‘공급망 실사’ EU 역내·외 기업에 공급망 내 인권 환경 실사를 의무화하는 것을 골자로 한 ‘공급망 실사법’ 정식 명칭은 ‘기업 지속 가능성 실사 지침(Corporate Sustainability Due Diligence Directive)’이다. 줄여서 흔히 ‘CSDDD’라고 부른다. EU 법령안은 구속력 수준에 따라 규정(regulation), 지침(directive), 결정(decision), 권고(recommendation) 등으로 구분한다. 규정은 각국의 변형을 허용하지 않으며, 유럽의회·이사회가 제정 즉시 별도 국내 입법 없이 각국에서 효력을 가진다. 지침은 EU의 목표치로서 유럽의회·이사회가 정한 최소한의 외연에 해당하며, 각국은 국내법화 절차를 거쳐 법률로서 효력을 보유하게 된다. [CSDDD 적용 시기] CSDDD가 지침이기 때문에 EU 27개 회원국은 2년 이내에 이 지침을 근거로 국내법을 제정해야 한다. 이에 따라 CSDDD가 2027년부터 기업 규모에 따라 순차적으로 시행된다. <표> ‘공급망 실사’의 ‘실사(Due Diligence)’는 기업이 부정적 영향을 방지하도록 스스로 점검하는 제도이다. 실사의 출발점은 인권 실사이다. 유엔의 ‘세계인권선언’(1948년)은 국가가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일차적인 책무를 지지만 기업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인권을 보호·존중·증진해야 한다고 적시했다. 유엔의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1966년, 자유권 규약)과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1966년, 사회권 규약), 국제노동기구(ILO) 헌장과 8대 핵심 협약 등 정신을 이어받아 1970년대 들어 기업의 인권존중 의무가 본격적으로 거론됐다. 대표적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다국적 기업 가이드라인’(1976년)과 ‘ILO 다국적 기업과 사회정책 원칙의 3자 선언’(1977년)이 있고, 2000년엔 ‘유엔 글로벌 콤팩트(UNGC)’가 출범했다. 인권 실사의 직접적 뿌리는 유엔이 승인한 ‘유엔 기업과 인권에 관한 보호·존중·구제’ 프레임워크(2008년)와 ‘유엔 기업과 인권 이행원칙(UNGPs·UN Human Rights Guiding Principles on Business and Human Rights, 2011년)’이다. UNGPs는 기업에 △인권정책 수립과 서약 △인권 실사 시행 △구제 절차 제공을 요구한다. 이 중 인권 실사는 기업 활동이 인권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식별·방지·완화하고 인권 영향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즉 이 정도 주의의무를 기울여야 한다는 프로세스이다. 조직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국제표준화기구(ISO)의 사실상 표준인 ISO 26000에 인권 실사 프레임워크가 반영되었고, 실사를 포함한 UNGPs 조문들이 ‘OECD 다국적 기업 가이드라인’에도 그대로 적용되면서 공급망 실사 제도가 태동하게 된다. ■‘공급망 실사’의 내용 CSDDD에 따르면 원청 기업은 협력업체를 포함한 공급망 전체에 걸쳐 기업 활동이 인권과 환경 등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평가하고 관리할 의무를 진다. 기존의 인권 실사를 환경 실사로 확대한 것이다. 실사 의무는 (1)실사 의무의 내재화(실사정책 수립 및 관리 시스템에 통합) (2)인권 및 환경에 대한 부정적 영향을 식별하기 위해 매핑(mapping)과 진단(assessment) 실시, 우선순위 지정 (3)잠재하는 부정적 영향의 예방·완화 및 실재하는 부정적 영향의 제거·최소화 (4)실제 부정적 영향에 대한 구제책 제공 (5)(기업 활동 전반에 걸쳐) 이해관계자의 의미 있는 참여 (6)불만 처리 절차 수립 및 유지 (7)실사 정책 및 조치 효과성 모니터링 (8)공중과 소통(실사 결과 공시) 등이다. <표> 8단계로 구성된 실사 의무는 ‘OECD의 책임 있는 사업 행위에 관한 실사 가이드라인(OECD Due Diligence Guidance for Responsible Business Conduct)’의 6단계를 발전시킨 것이다. 실사 범위는 국내에서 ‘공급망 실사법’이란 말을 쓰고 있는 것과 달리 기업의 공급사슬(혹은 공급망·supply chain)이 아니라 ‘활동 사슬(chain of activity)’이다. 활동 사슬은 업스트림 비즈니스 파트너의 생산, 서비스, 설계, 채굴, 조달, 운송, 보관, 원자재·상품·부품 공급, 상품 개발과 다운스트림 비즈니스 파트너의 유통, 운송, 보관 등을 모두 포괄한다. 공급 대신 활동이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기업시민성을 더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폐기(분해, 재활용, 매립 등) 부문은 실사 범위에서 최종적으로 빠졌다. 금융산업에 대해서는 격론 끝에 실사를 우선 업스트림에만 적용하고 발효 후 2년 내에 다운스트림으로 확대할지 재논의하기로 했다. 최종안이 금융업의 실사 대상에서 다운스트림 활동 사슬을 제외함에 따라 핵심 사업인 투자 및 대출 활동이 실사를 받지 않게 됐다. 금융산업에서 자금을 제공받는 기관의 인권·환경 침해 여부가 실사에서 빠졌다는 의미여서 결국 금융기관이 인권 침해 사업에 자금을 공급해도 책임을 지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여전히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실사 항목은 크게 △인권 △환경 △기후변화 대응 목표 달성을 위한 전환계획 채택 및 실행 등 3개다. 실제 실사는 인권과 환경 두 부문에 집중된다고 보면 된다. 두 부문에 각각 16개 항목이 담겨 있다. 인권 실사 항목은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 아동권리협약, ILO의 핵심·기본 협약 등 인권 관련 국제협약을 바탕으로 한 생명권, 자유권, 노동권, 아동노동 금지, 노예제 및 강제노동 금지 등이다. 16개 항목 중 토지, 식수 등 기본권에 해당하는 환경적 권리 실사 항목은 2개로, 환경이 아닌 인권 부문에 포함되었다. 환경 부문에는 생물다양성, 폐기물, 오염물질, 오존층,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 습지, 해양 등이 포함됐다. CSDDD는 EU ‘기업 지속가능성보고 지침(CSRD·Cororate Sustainability Reporting Directive)’에 따라 기후변화 완화를 위한 전환계획을 보고한 기업은 기후변화 대응 계획을 채택한 것으로, 또한 모기업의 기후변화를 위한 전환계획에 포함된 회사는 채택 의무를 준수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CSDDD 적용 기업의 주요 의무사항] 지침 적용 대상은 (1)직원이 1000명을 초과하고 전 세계 순매출액(전년 기준)이 4억5000만 유로를 초과하는 EU 기업 및 그 모기업 (2)근로자 수와 순매출 기준을 충족하지 않더라도 역내 프랜차이즈 또는 라이선스 계약으로 창출된 로열티 수익이 2250만 유로를 초과하는 기업 (3)EU 역내 순매출액(전전 연도 기준)이 4억5000만 유로를 초과하는 역외 기업 및 그 모기업 (4)3번의 순매출 기준을 충족하지 않더라도 역내 프랜차이즈 또는 라이선스 계약으로 창출된 로열티 수익이 2250만 유로를 초과하는 역외 기업이다. 시행은 지침 발효 후 기업 규모에 따라 2027~2029년부터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 로열티 수익 기준 지침 적용 기업은 2029년부터 일괄 실사 적용 기업이 된다. <표> 지침을 위반하면 회사의 전 회계연도 전 세계 순매출액의 최대 5%를 벌금으로 물릴 수 있다. 후속 조치로 2027년 3월 31일까지 공시항목 관련 위임법을, 지침 발효 후 최대 36개월 이내에 기업의 실질적 실사 의무 준수 방법과 관련하여 일반·섹터별·특수 부정적 영향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예정이다. CSDDD는 관보 게재 후 20일이 지나면 발효된다. 앞서 지난해 1월 CSRD가 발효돼 있어 유럽은 ‘기업지속가능성(CS)’ 제고를 보고(CSRD)와 실사(CSDDD) 양축 제도로 강하게 드라이브를 거는 셈이다. 안치용 필자 주요 이력 △ESG연구소 소장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전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 2024-06-13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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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비욘드 ESG] 북극 항로가 열린다 …지구 종말 '카운트다운' [안치용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지구는 대기권, 수권, 빙권, 생물권, 지권의 5개 요소로 구성돼 요소 간의 상호작용으로 기후와 기상이 결정된다. 이 다섯 요소가 상호 작용하면서 어떠한 현상을 증폭하거나 감소하는 것을 ‘되먹임 효과’라고 한다. ‘양의 되먹임(Positive feedback)’은 처음 주어진 변화를 증폭하고, ‘음의 되먹임(Negative feedback)’은 작용을 받아 변화를 억제한다. ‘되먹임 효과’는 지구의 다른 지역보다 북극권에서 더 강하게 나타난다. ‘알베도 현상’은 대표적인 ‘양의 되먹임’으로, 북극에 넓게 자리한 얼음이 녹으면서 태양열을 덜 반사하고 동시에 얼음이 사라진 곳의 바다가 태양열을 더 흡수하여, 계속해서 기온이 오르고 더 빠르게 빙하가 녹게 한다. ‘알베도’는 표면이나 물체가 반사하는 태양복사의 비율을 말한다. 눈처럼 흰 물질은 알베도가 높아 태양복사에너지를 더 많이 지구 밖으로 튕겨낸다. 반대로 초목으로 덮인 표면이나 해양은 알베도가 낮아 에너지를 더 많이 받아들인다. 여름에 흰옷을 입고 겨울에 검은옷을 입는 습관은 생활 속에 자리잡은 ‘알베도’이다. ■지구온난화의 카나리아=알베도와 되먹임은 다른 지역보다 북극에서 얼음이 더 빨리 녹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얼음이 녹아 흰색 면적이 줄어드는 데 그치지 않고 해양의 짙은 색깔 면적이 늘어나 변화를 가속한다. 반사만 주는 게 아니라 줄어든 반사만큼 흡수가 늘어나는 구조다. 극지방에서 한번 온도가 높아지거나 낮아지면 계속해서 그 정도가 심해지는 양의 되먹임이 나타나는 이유다. 이 때문에 중위도나 고위도 지역에서, 적도 지방을 비롯해 얼음이 없는 지역보다 더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북극권에만 머물지 않는 데에 있다. 다른 지역보다 빠른 북극의 온난화는 다시 여타 지역의 온난화에 나쁜 영향을 미치고, 여타 지역의 나쁜 영향은 북극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악순환 구조로 인해 북극은 ‘지구온난화의 카나리아’로 불린다. 세계 주요 6개 기관 자료를 근거로 매년 지구 평균기온 상승폭을 분석해 도출하는 유엔 세계기상기구(WMO)에 따르면 2023년 지구 평균기온은 산업화 이전 대비(1850~1900년) 1.45℃ 올랐다. 표본오차(±0.12)를 고려하면 1.57℃까지 상승했다고 볼 수 있다. 파리기후협약에서 인류가 합의한 2100년까지의 지구 평균기온 상승폭 제한 목표 1.5℃를 사실상 넘어섰다고 봐도 무방하다. 2023년의 지구 평균기온은 174년째인 지구 기온 측정역사에서 가장 높은 기록이기도 했다. WMO에 따르면 2023년 이전에 가장 따듯한 해는 2016년으로 산업화 이전 대비 1.17~1.41℃ 높았다. 지금 추세로는 2024년, 2025년에 계속해서 신기록을 갈아치울 가능성이 농후하다. 북극에서도 상황이 비슷했다. 2022년 10월~2023년 9월까지 북극 표면의 평균 기온은 1900년 이후 6번째로 따뜻했고, 2023년 여름(7~9월)은 기록상 가장 따뜻했다. <그림 북극의 기온변화-자료 NOAA> 미국 국립해양대기청(NOAA)이 발표한 북극 기온자료(그림 북극의 기온변화)를 보면 왼쪽 그림에서 2023년 여름(7~9월) 기온은 1991~2000년 여름의 평균 기온보다 북극 전역에서 높았다. 붉을수록 평균보다 2023년 여름 기온이 더 높다는 뜻으로 가장 붉은 색깔은 평균보다 4℃ 높다. 푸른색은 평균보다 낮다는 의미이다. 전체적으로 붉은색이고 푸른색을 찾기 어려웠다. 1940년부터 2023년까지 북극 전체의 여름 평균기온을 1991~2000년 평균과 비교한 그래프(그림 오른쪽)상에서도 북극 지역의 기온상승이 확연히 확인된다. 21세기 들어 상승세가 더 완연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북극증폭=NOAA가 2006년 이래 매년 발표하는 ‘북극 성적표(Arctic Report Card)’에서도 알베도-되먹임이 확인되며, 이 현상을 특별히 북극증폭이라고 부른다. ‘북극 성적표’는 북극이 다른 지역보다 2배 이상 빠르게 온난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북극의 기온상승은 북극 생태계의 핵심인 해빙(海氷)에 영향을 미친다. 북극 해빙은 북극을 둘러싼 대륙 안쪽 바다의 대기 접면이 얼어붙은 것으로 북극해와 북극권뿐 아니라 지구 전체 기후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해빙 면적은 얼음 농도가 15% 이상인 바다의 범위로 정의되며 1979년부터 마이크로파 위성 원격탐사를 통해 북극 해빙 면적을 조사하고 있다. 북극의 계절적 순환은 3월에 해빙이 최대 면적을 기록하며 봄과 여름을 거쳐 얼음이 녹으면서 9월에 최소 면적을 기록한다. 미 국립빙설자료센터(NSIDC)에 따르면 1979년 9월 북극 해빙의 면적은 약 645만km²였지만 2023년 9월엔 423만km²로 줄었다. 한반도 면적의 10배 이상의 얼음이 그 사이에 사라졌다. <그림 2023년 북극 해빙 면적과 평균 대비 면적 변화 추이-자료 NSIDC> NSIDC가 2023년 9월 해빙 면적을 그림으로 표현한 자료를 보면 1981~2010년의 중앙값과 1991~2020년의 중앙값에 비해 확연하게 줄어든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연히 1991~2020년의 중앙값 면적이 1981~2010년의 중앙값 면적보다 작다. 1991~2020년의 평균값과 비교한 연도별 면적 추이를 보면 그 차이가 약 70%p에 달한다. 9월의 최소 면적 변화에 비해 3월의 최대 면적 변화는 훨씬 덜하지만, 감소추세는 분명히 눈에 띈다. 해빙은 태양의 에너지를 반사하여 온난화를 늦출 뿐 아니라 해양 포유류에게 서식지를 제공하는 등 북극 생태계 전반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해빙 감소, 나아가 소멸은 북극에 변고가 일어나고 있다는 의미이다. ■얼음 없는 북극 현실로=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 등의 예측에 따르면 인류가 아무리 잘해도 북극 얼음을 지켜내기 어려워 보인다. 현재로선 산업화 이전 대비 2100년까지 지구표면 평균온도가 약 1.8~4.4°C 상승할 것으로 예측되는데, 국립기상과학원은 북극의 연평균 얼음량이 이에 따라 21세기 말에 현재 대비 최소 19%에서 최대 76%까지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기온이 높아지는 여름철에 북극 해빙은 모든 시나리오에서 21세기 중반 이후 거의 사라지는 것으로 분석됐다. 결국 멀지 않아 얼음 없는(ice-free) 북극이 현실화하며 IPCC는 2050년 이전 최소 한번은 북극에서 여름에 얼음이 완전히 사라질 것으로 예상했다. 북극 항로가 열린다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을 법하지만, 얼음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북극곰을 떠올리면 이만저만한 곤경이 아니다. 지구 전체 기후와 해양에 미칠 효과가 상상을 뛰어넘을 것이기에 북극곰의 곤경은 북극곰에 그치지 않는 확실히 상징적인 장면이다. ■해수면 상승 위험=지구온난화의 피해 중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해수면 상승이다. 다행히 북극의 얼음이 녹는다고 해수면 상승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다른 걱정거리는 많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얼음이 녹는 것은 이론상 해수면을 끌어올리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스커피 속의 얼음이 녹아도 잔이 안 넘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은 그린란드와 남극 등 육지에 있는 빙하가 녹아서 바다로 유입하며 발생한다. 그린란드 빙하의 용융은 잊을 만하면 뉴스를 통해 전해지고, 남극의 얼음이 녹는다는 얘기도 자주 들리고 있다. 빙하(glacier)는 육지 위로 천천히 흐르는 얼음과 눈의 축적물이다. 이 빙하가 육지에 자리를 잡고 5만㎢ 이상 확장되면 빙상(ice sheet)이라 불린다. 현재 지구에는 그린란드와 남극 대륙에 하나씩 모두 두 개의 빙상이 존재한다. 두 곳에 얼어 있는 담수는 지구 담수 총량의 68% 이상으로 추정된다. 남극은 대륙이기 때문에 북극처럼 얼음이 녹는다고 즉시 바다가 드러나 태양에너지를 더 흡수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다. 남극에 분포하는 빙상 면적은 대략 한반도의 약 60배에 해당하는 1390만㎢이고 빙상의 평균 두께가 1937m나 되기에 다 녹기도 힘들다. 만약 남극 빙상이 모조리 녹는다면 전 세계 해수면이 약 60m 올라갈 것이기에 사실상 인류 문명의 종말을 초래한다. 그렇다고 남극이 안전한 것은 아니다. 해수면 상승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남극 얼음의 용융은 2006~2015년에 매년 해수면이 0.43(±0.05)mm 상승하는 데 기여했다. 과거에 비해 녹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IPCC는 온실가스 발생이 현재 수준으로 유지된다면(RCP 8.5) 2100년까지 지구의 해수면이 평균 0.84m 올라갈 것으로 예상했다. 이때 남극 빙상 용융의 상승 기여분은 0.12m로 추산됐다. 빙붕은 빙상의 연장으로 해안에서 바다 위로 뻗어 있는 두꺼운 얼음판이다. 남극대륙에는 총 15개의 주요 빙붕이 있다. 두께가 약 50~600m인 빙붕이 해안에서 수십~수백 km까지 펼쳐진다. 현재 가장 빠른 속도로 질량을 잃고 있는 빙붕은 남극대륙 서남극의 ‘스웨이츠 빙하’이다. 매년 500억 톤의 얼음이 녹아 전 세계 해수면 상승의 약 4%를 담당하기에 ‘스웨이츠 빙하’를 ‘종말의 날 빙하(doomsday-glacier)’라고 부른다. 최근 극지연구소(책임연구원 박태욱)와 일본 홋카이도대, 서울대 국제 공동 연구팀이 ‘종말의 날 빙하’의 붕괴 기작을 규명하는 등 ‘스웨이츠 빙하’를 살리려는 국제적인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종말의 날 빙하’가 하루아침에 녹아 없어지지는 않을 테지만, 북극과 남극에서 종말을 향한 움직임이 본격화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적어도 북극곰과 황제펭귄 등 일부 펭귄 종에게는 그렇다. ‘종말의 날’이 사람은 피해서 갈까. 이미 인류에게 종말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을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너무 태평한 건 아닌지 걱정이다. 안치용 필자 주요 이력 △ESG연구소 소장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전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 2024-05-08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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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비욘드 ESG] 자산불평등이 부른 탄소불평등 [안치용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세계적인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가 최근 구설에 오른 건 기후정의의 상징적 장면이다. 스위프트는 2월 11일 오후 3시 30분(현지시간)이 조금 넘어서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했다. 이날 오후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얼리전트 스타디움에서 열린 미국프로풋볼(NFL) 결승전, 즉 ‘슈퍼볼’을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슈퍼볼 우승 트로피는 스위프트의 연인 트래비스 켈시가 소속된 캔자스시티에 돌아갔다. 캔자스시티가 승리한 뒤 시상식장에 내려와 그가 켈시와 포옹하고 입을 맞추는 장면이 전 세계 매체에 보도됐다. 스위프트의 ‘사랑꾼’ 행각은 켈시에게는 더없이 사랑스러운 것이었겠지만 대중의 눈엔 논란이 됐다. 스위프트는 10일 오후 6시(현지시간) 도쿄돔에서 시작한 콘서트를 3시간 30분가량 진행하고 한 시간 만에 하네다 공항에 도착해 자신의 전용기 다소 브레게 미스테르 팰콘 900을 타고 곧 바로 연인의 슈퍼볼을 보기 위해 라스베이거스로 향했다. 4000만 달러짜리 전용기로 이동한 거리는 약 8900㎞로 며칠 뒤인 16일 호주 공연을 위해 움직인 것까지 합치면 연료로 약 3만3000ℓ를 썼다. 이에 따른 탄소 배출량은 약 90톤. 워싱턴포스트(WP)는 “(스위프트의 전용기 이동에 따른 탄소 배출이) 올해 내내 평균적인 미국인 6명이 배출한 탄소를 합친 것보다 많은 양”이라고 했다. 스위프트는 2022년에 ‘탄소 배출이 가장 많은 유명인 1위’로 선정됐다. 스위프트는 전용기 사용 등으로 그해 상반기에만 세계인의 평균을 1500배 상회하는 8293톤을 배출했다. 영국의 지속가능성 마케팅 업체 ‘야드’는 이 같은 내용을 공개하며 유명인들이 전용기를 과도하게 띄우며 탄소를 배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스위프트 측은 전용기 사용으로 배출한 탄소를 상쇄하기 위해 배출권 구매 등으로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고 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고 WP는 전했다. ■새로운 불평등 지표, 탄소=이날 슈퍼볼을 보기 위해 전용기를 띄운 사람이 스위프트만은 아니었다. WP는 비즈니스 항공편 추적업체 WingX 통계를 인용해 “스위프트를 태운 전용기는 지난 주말 라스베이거스로 향한 전용기 882대 중 하나”라며 올해 슈퍼볼 관람을 위해 이용한 전용기는 역대 두 번째로 많았다고 보도했다. 슈퍼볼에 가장 많은 전용기가 집결한 때는 지난해로 애리조나 글렌데일에서 열린 슈퍼볼 경기에 931대가 날아들었다.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리려는 부유층의 무절제한 낭비나 과시형 소비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과소비에 따른 탄소 과다 배출은 다른 차원의 문제를 야기한다. 부유층의 과거 과소비는 자신의 재산을 탕진하고 주변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현재의 과소비에 따른 탄소 과다 배출은 타인에게 실질적인 손해를 끼친다는 데서 새로운 차원의 사회적 문제가 된다. 출처: 옥스팜 2020년 옥스팜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90~2015년 기준 전 세계 상위 1% 부유층(6300만명)이 소비활동으로 배출한 이산화탄소는 전 세계 배출량에서 15%를 차지했다. 범위를 상위 10%(6억3000만명)로 넓히면 비중이 52%였다. 소득 하위 50%(31억명)가 배출한 탄소는 전체 중 7%에 불과했다. 소득 상위 1%가 소득 하위 50%에 비해 두 배 넘는 탄소를 뿜어내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새로운 글로벌 의제를 제시한다. 기후정의다. 탄소불평등은 부동산이나 소득·자산 불평등과 완전히 다르고 더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불평등이 편익의 편중에 머물지 않고 보편적 비용으로 직결하고, 게다가 비용을 치를 능력이 부족할수록 더 큰 비용을 치르게 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비용을 지불하는 사람이나 집단, 국가는 편익을 누리지도 못한다. 윤리적 관점을 논외로 하면,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지 않았지만 스위프트가 전용기 사용에 따른 탄소 배출을 배출권 구입으로 상쇄했다는 측면에서 최소한의 양식은 지킨 셈이다. 반면 전용기 900대가량을 몰고 온 부자들이 대중의 감시에 노출된 스위프트처럼 상쇄의 길을 택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전용기 사용이 슈퍼볼에만 국한한 사안이 아니고 탄소불평등이 전용기 사용에만 국한하지도 않을 것이다. <불편한 진실>이라는 기념비적 저서로 기후변화 담론을 세계에 공론화하는 데 크게 기여한 앨 고어가 탄소불평등과 관련한 ‘불편한 진실’로 10여년 전 여론의 질타를 받은 적이 있다. 미국 명문가 출신인 고어는 테네시주 내슈빌에 거실 20개와 욕실 8개가 있는 대저택을 소유하고 있으며 다른 곳에도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다. 논란이 된 건 고어 부부가 사는 내슈빌 대저택의 전기요금이었다. 미국인 가정의 평균 전기 사용량에 비해 약 20배 많은 전력을 썼다는 사실이 폭로돼 한동안 이중성이 도마에 올랐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며 진보적인 시각을 취하고 있는 스위프트 또한 탄소 과다 배출과 관련한 공격을 종종 받는다. 미국 보수 정치평론가 앤 콜터가 “그렇다. 우리는 석유가 필요해서 이라크를 침공한다. 그래야만 너희들이 자가용 비행기와 리무진을 타고 다닐 것이 아니냐”고 한때 할리우드를 겨냥해 일갈한 적이 있다. 콜터의 경구가 당시 민주당 진영을 공격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부유층의 탄소 과다 배출을 꼬집었다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라크 침공을 그렇게 쉽게 정당화하거나 희화화해서는 안 됐다. 출처: CDG(국제개발센터) ■세계적 규모의 탄소불평등 탄소불평등에 기반한 기후정의 문제는 국민국가의 국경을 넘어선다. 주지하듯 주로 선진국에서 발생한 온실가스가 국경 안에 머물지 않고 북극·아프리카 등 전 세계를 무대로 들쑤시고 다니기 때문이다. 국제개발센터(CDG)의 기후위기 취약국가 종합순위는 중국, 인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적도기니, 브룬디, 수단, 방글라데시, 르완다, 세네갈, 나미비아 순으로 1~10위였다. 10위권에 OECD 국가는 한 나라도 포함되지 않았다. 중국과 인도를 빼고 온실가스 배출량도 하위권에 속한다. 온실가스는 적게 배출하고 피해는 많이 보는 국가들에서 목격되는 불평등과 부정의가 기후정의의 핵심 쟁점이다. 대표적으로 탄소 저배출 국가인 파키스탄에서 2022년 여름 지구온난화로 인해 대규모 홍수가 일어나 국토가 3분의 1이나 잠기는 재앙을 당했다. 이에 따라 그해 11월 이집트에서 열린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7)에서 기후변화 피해를 당한 중저소득 국가에 선진국이 보상하는 ‘손실과 피해’ 보상 기금 마련에 합의했다.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고 국가별 분담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에 관한 구체적 합의가 쉽지 않겠지만 지구촌 차원에서 탄소불평등을 인정하며 기후정의를 위한 국제적인 행동계획을 수립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적용하기 쉽지 않은 CBDR 원칙 1992년 ‘환경과 개발에 관한 리우 선언’에 명시된 CBDR(Common But Differentiated Responsibilities) 원칙은 공동의 책임을 인정하지만 국가 간에는 차별적 책임이 있다는 논리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 역사적 책임의 차이와 환경문제를 다룰 수 있는 경제적·기술적 능력의 차이를 인정하여 국제의무를 차별화하는 내용이다. 현실에서 CBDR 원칙을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예컨대 파키스탄에 기후위기에 따른 피해를 보상한다고 할 때 국가별로 어떻게 차별적 책임을 부과할 것인지 합의를 끌어낼 수 있을까. 지금 전 세계에 기후위기를 일으키는 온실가스 중 인간이 인위적으로 배출한 것은 산업화 이후 수백 년에 걸쳐 쌓인 것으로, 누적 배출량은 미국이 1위지만 현재 배출량은 중국이 1위다. ‘차별적 책임’을 산정할 때 현재의 책임과 현재완료의 책임 사이에서 어느 쪽이 더 큰 책임을 져야 하는지 국가 간에 합의가 도출될 수 있을까. 더구나 첨예하게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두 나라가 다름 아닌 중국과 미국이다. 기후정의는 이처럼 국내보다는 국제적으로 더 문제가 되기에 해법이 잘 찾아지지 않는다. 위기는 글로벌하지만 의사 결정이 국민국가 수준에 맡겨져 있다는 근본적인 거버넌스의 한계 때문이다. 기후정의는 20세기 말에 들어 인류가 처음으로 자각한 전혀 새로운 문제지만 이 문제는 인류가 시급히 풀어야 할 문제 목록 최상단에 위치한다. 그전까지 지구촌은 개별 국가 차원에서 작동하는 환경정의를 어떻게 실현할지를 고민했다. 환경정의도 레이철 카슨 등이 활약한 20세기 중반에 등장했으니 비교적 새로운 의제였다. 산업화에 따른 환경오염 문제가 심각했지만, 국가가 개입하여 우선순위를 조정하며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더라도 환경정의에 관해선 나름 해법을 찾아갈 수 있었다. 기후정의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의사 결정을 위한 글로벌 거버넌스를 마련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환경정의와 달리 해법 마련 가능성을 어둡게 한다. 그나마 글로벌 거버넌스라고 존재하는 유엔이라는 것이 세계정부와는 한참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결합한 국민국가 체제는 결국 기후위기라는 글로벌 의제를 해결하는 데 바람직한 시스템이 아닌 것이 밝혀질 테고, 기후정의는 기후위기의 심화 속에서 표류하다가 과거 유행한 세계시민이란 말처럼 폐허 속에서 실현해야 했지만 하지 못한 통한의 개념으로 후세가 곱씹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면 너무 비관적인가. 공동의, 그리고 차별적 재앙이 본격화하고 있어서 낙관론을 살리려면 서둘러 움직여야 한다. 자료 도움: 박예린(경기연구원 연구원) 안치용 필자 주요 이력 △ESG연구소 소장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전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 2024-04-02 16: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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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비욘드 ESG] 미국 역차별 반발에 뒷걸음질? 시험대 오른 소수자 포용 정책 [안치용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미국에서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정책이 뒷걸음하고 있다. 소수자 우대 정책에 백인 역차별 논란이 제기되면서 DEI 정책에 대한 미국 보수층의 반발이 실제 법제화로 이어지는 분위기다. 뉴욕타임스(NYT)는 스펜서 콕스 미국 유타주(州) 주지사가 지난 2월 1일 주의회가 송부한 DEI 정책 금지법에 서명했다고 이날 보도했다. 콕스 주지사가 서명한 법안은 공립 교육기관과 주 공공기관에서 DEI 정책을 없애는 것을 골자로 한다. 당장 공공기관의 각종 프로그램에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능력 중심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을 인종차별이나 성차별로 매도하는 것도 금지된다. 교육기관이 일부 소수인종 학생을 선별적으로 지원하는 대신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관련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이러한 반(反)DEI 움직임이 유타주에서만 있는 건 아니다. NYT는 지난해부터 미국 내에서 DEI 정책을 금지하려는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다고 전했다. 유타를 포함해 텍사스, 노스다코타, 노스캐롤라이나 등 8개 주에서 DEI 금지법이 제정됐다. 텍사스주에서는 올해 들어 DEI 금지법이 발효됐다. 이에 따라 텍사스 내 공공기관은 소수인종을 우대하거나 다양성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인력을 채용하거나 특혜를 줄 수 없게 됐다. 텍사스주립대는 교내에 설치된 ‘다문화촉진센터’를 폐쇄하고, 졸업식 행사에서 흑인·히스패닉·아시아계 학생을 위한 별도의 이벤트에 자금을 대는 것도 중단했다. 테네시주의 DEI 금지법에는 공립대학이 교직원에게 편견 해소를 위한 의무교육을 실시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이 담겼다. 미국 보수층이 DEI를 백인에 대한 역차별로 판단해 대놓고 조직적인 반대 운동을 벌이면서 보수색이 짙은 지역을 중심으로 DEI를 폐기하는 법제화가 실제로 이뤄지고 있다고 NYT는 분석했다. 미국에서 8번째로 DEI 금지법이 발효된 유타주는 대표적인 보수 우세 지역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DEI란?=DEI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다양성(Diversity), 형평성(Equity), 포용성(Inclusion)이란 세 가치를 한꺼번에 부르는 말이다. 다양성은 인구학적 다양성을 포함해 다양한 배경을 가진 구성원이 공존하게 하는 것이다. 다양한 배경이란 인종, 성, 종교, 성적 취향, 사회경제적 지위, 언어, 장애, 종교적 신념, 정치적 관점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구성원 사이의 관계와 상호작용에 영향을 미치는 실재하거나 인식된 차이이다. AT&T, 구글, 3M, 러쉬 등 주요 글로벌 기업이 매년 다양성 보고서를 발표하여 조직원 다양성 비율을 공개한다. 미국에서는 인종이 상대적으로 중요한 다양한 가치로 받아들여진다. 그만큼 인종차별이 여전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공정성으로도 번역하는 형평성은 제도나 시스템을 통한 절차나 분배가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으로 존 롤즈의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연상시킨다. 평등(Equality)이 구성원에게 자원을 균등하게 배분하자는 이념인 반면 공정은 구성원 사이에 격차가 있음을 인정하고 장애인, 고졸채용자, 비정규직노동자 등 비주류 구성원도 균등한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적절한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불가피하게 불평등을 용인해야 한다면 어떤 기준을 따라야 하는지에 관한 원칙으로, 가장 불우한 사람의 편익을 최대화해야 한다는 롤즈의 ‘최소극대화(maximin) 원칙’에 맞닿아 있다. 포용성은 다양한 특성을 가진 개인이 조직에서 ‘다름’을 존중받고, ‘심리적 안전감’을 느끼며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용어 자체로는 배제(exclusion)의 반대말로, ‘조직 내에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해도 피해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느끼는’ 심리적 안전감을 토대로 구성원이 가진 ‘다름’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하고,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여, 예컨대 기업이라면 생산성을 높이는 게 포용성의 핵심이 된다. 소극적 의미로는 일상생활에서 흑인, 동양인, 동성애자 등 소수자를 차별하는 마이크로어그레션(microaggression)이 원천 배제된 상황이 출발점일 수 있다. 마이크로어그레션은 ‘아주 작은’이라는 뜻의 마이크로(micro)와 ‘공격’이라는 뜻의 어그레션(aggression)의 합성어로, 예를 들어 식당에서 같이 앉는 것을 피하는 행동과 같은 일상 속의 차별을 통해 상대에게 모욕감이나 적대감을 표현하는 것이 마이크로어그레션에 해당한다. ▲정의 혹은 생산성=이 세 가지 가치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따로 떼어서 설명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다양성이 형평성과 포용성이란 가치가 만들어낸 결과일 수 있지만, 다양성 없이 형평성과 포용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양성과 형평성이 개념상 구분이 있지만 현실에서 겹치는 측면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어서, DEI를 I&D(포용성과 다양성, Inclusion & Diversity)로 줄여 쓰기도 한다. 반대로 세부적으로 더 구분해 소속감(belonging)의 B를 추가한 DEIB, DEIB에 접근성(accessibility)의 A를 더하여 DEIAB라는 용어를 개발해 쓰기도 하나 결국 DEI를 더 잘 설명하기 위한 방법론이다. 경영학에서는 DEI와 기업 생산성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져 DEI가 기업 생산성 향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가 많이 보고돼 있다. 생산성을 논외로 하고, 공정으로서 정의처럼 DEI를 그 자체로 보편적 가치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기업에서 대체로 정의를 다루지는 않을 것이니 말이다. 정의 대신 수익성에 신경을 쓰는 기업에서 지속가능경영과 ESG경영 흐름에 따라 지속가능성 임원 등 과거에 없던 직제가 생겨나는 가운데 SAP에서는 ‘Global Head of People Sustainability & Chief Diversity and Inclusion Officer’란 직함이 목격된다. I&D를 D&I로 바꿔서 다양성과 형평성을 다루는 임원인 CD&IO를 CEO나 CFO처럼 만든 것인데, 글로벌 기업인 만큼 여기에 ‘People Sustainability’를 추가해 포괄적으로 이 부문을 책임지게 했다. 글로벌 기업에는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유사한 직제가 많이 생겼다. 미국과 유럽에서 DEI가 조금 더 복잡하고 섬세하다면 한국에서 DEI는 주로 여성에 초점이 맞춰진다. 인종 문제가 상대적으로 덜하다고 판단하거나 이 문제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일 수 있으며, 동성애나 다른 소수자 문제는 아직 대면할 여건이 안 됐다고 외면하는 상황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사회에서 젠더 의제는 비교적 공론화한 상태이고 성차별 해소에 관한 압력이나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된 상태여서 일종의 여성할당제가 여러 분야에서 확산하고 있다. ESG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으로 알려진 국내 유수 대기업에 근무하는 30대 중반의 여성 중간간부 박 아무개 과장은 “확실히 사내 분위기가 여성을 우대하는 쪽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맞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경영전문대학원에서는 ‘여성 사외이사 전문과정’을 만들어 지금 7기를 모집 중이다. 홍보문안에 “개정된 자본시장법에 따라 자산 총액 2조원 이상의 상장사는 여성 이사를 1명 이상 선임해야 한다”고 적시하며 “각계의 경륜 있는 여성리더를 위한 전문 교육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라고 밝혔다. 이화여대의 ‘여성 사외이사 전문과정’이 성공적으로 운영되는 모습을 두고 여성인 어느 교수는 양가적인 감정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는 식의 대응이 오랫동안 사회적 약자로 차별받은 여성에게 나쁜 전략일 수는 없지만, 실력이 아니라 배려로 어떤 지위에 오르려는 여성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또 실제로 실력 있는 여성까지 도매금으로 묻어가기도 해 씁쓸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박 과장도 “사내에서 남성 입사 동기들이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불이익을 당한다고 인식하는 듯하며, 여성으로 어느 정도 두각을 나타내면 비슷한 역량의 남성에 비해 유리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DEI가 자리잡은 지 오래인 미국에서는 인종·여성할당제에 대해 능력주의를 도태시켜 미국 사회를 자기해체의 길을 걷게 한다는 반발이 백인 보수층을 중심으로 터져 나온다. 특히 소수자 우대 정책을 펴는 미국 일부 명문대학을 두고는 학문적 자살을 감행한다는 비난 공세를 퍼붓는다. 유타주를 포함하여 8개주에서 DEI 금지법이 제정된 것은 이런 분위기에 힘입었다.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둔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는 지난 1월 미국 내 사무소들의 인턴십·장학금 관련 흑인 우대 정책을 폐기하고, 미국의 가난한 백인 학생들에게도 인턴십과 장학금 기회를 열어주었다. PwC 외에 화이자 등 일부 미국 기업들이 회사의 흑인 우대 제도를 손본 것으로 전해진다. ▲정의는 생산적이다=PwC의 정책변화는 유타주의 사례와는 결을 달리한다. DEI를 폐기한 것이 아니라 조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성과 포용의 기준으로 인종 대신 가난을 택한 것이므로 어느 정도 논리적 타당성을 갖고 공정으로서 정의에도 부합한다. 핵심은 DEI가 공시적 관점의 정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능력주의를 획일적 평등의 관점에서 적용하면 소수자는 주류사회에 진입할 기회를 잡지 못한다. 주류사회에 진입하여 성장하는 과정과 재생산을 통해 역량을 키울 수 있기에 역량을 키울 기회 자체가 없는 모습의 진입장벽 존재는, 능력주의를 인정하더라도 능력주의의 올바른 바탕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DEI를 통시적 관점에서 파악하여 능력을 키울 여건이 평등하게 제공되었나를 보면서 능력주의를 적용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PwC처럼 DEI 정책 내에서 수혜 대상을 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과도적으로 한때 역차별이 일어나고 반대로 과도한 특혜를 받는 계층이나 집단, 계급이 있을 수는 있다. 과거에 받은 차별이 현재에 해소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현상으로, 어느 정도 강압적 조정 없이 새로운 노멀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최소극대화(maximin) 원칙’은 인간 사회를 문명사회로 지탱하는 근간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 공시적 비효율을 감내하는 그런 통시적 조정 과정을 거쳐 사회는 전체의 역량과 생산성을 키운다. 정의는 장기적으로 생산적이다. 안치용 필자 주요 이력 △ESG연구소 소장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전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 2024-02-23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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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비욘드 ESG] 원자력 발전 확대 …CF100이 RE100의 대안인가? [안치용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경기 남부에 조성하는 반도체 클러스터에 원자력으로 전력을 공급하는 방안을 두고 논란이 거세다. 지난 15일 반도체 민생토론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탈원전을 하게 되면 반도체뿐만 아니라 첨단산업이라는 건 포기해야 한다”고 말해 사실상 원자력 발전 확대를 선언했다. 이날 윤 대통령의 발언 이후 우리나라의 전력공급 방안을 두고 격론이 벌어지고 있는데, 요약하면 ‘RE100 대 CF100’의 대결이다. 사용전력의 100%를 태양광 풍력 등과 같은 재생에너지로 조달하자는 ‘RE100’ 관점에서는 윤 정부의 원전 확대 방침이 세계적 재생에너지 전환 추세에 역행한다고 비판한다. 재생에너지 가격이 높아 현실적으로 RE100을 고수하는 건 산업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결과적으로 국가경쟁력을 갉아먹게 된다는 반론이 있고, 윤 정부는 이 주장에 힘을 싣는다. ▲“니가 가라 하와이”=21세기 인류의 최대 현안인 기후위기의 원인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국민국가 체제의 한계에서 비롯했다고 볼 수 있다. 국민국가들이 ‘국부’의 관점에서 자국 발전(發展) 우선 정책을 펴다 보니 지구에 생태계가 감당 못할 온실가스가 빠른 속도로 쌓이며 현재의 기후변화를 불렀다. 문제는 기본적으로는 여전히 중상주의 체질을 벗어나지 못한 세계 각국의 이해를 조정해 실제로 글로벌한 차원에서 온실가스를 감축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데에 있다. 파리기후협약이 생각만큼 순항하지 못하는 배경이다. 각국은 지구를 구해야 한다는 대의에 공감하면서도 각론에서는 자국의 산업 키우고 국부를 증진하는 데에 양보할 마음이 없다. ‘아메리카 퍼스트’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파리협약에서 탈퇴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한마디로 영화 <친구>의 대사처럼 “니가 가라 하와이”인 셈이다. 어느 나라도 국부를 희생하고 국민생활 수준을 떨어뜨리는 방향의 기후정책을 수용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국민국가의 정치체제가 정치지도자의 그런 선택을 용납하지 않는다. 반도체 클러스터에 어떤 전기를 공급할 것이냐는 논란의 본질이다. 말하자면 이 문제에 관한 한 윤석열은 트럼프의 길을 가고 있다. 이 논의가 간단하지 않은 게 한국 정부가 주장한, 재생에너지보다 원자력 사용을 늘려서 탄소중립을 달성하자는 CF100(carbon free 100%)이 국민국가 차원에서 더 좋은 해법이냐는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다. 당연히 단기적으로는 유리하고 현실적이다. 현재로선 RE100이 기업에 더 큰 비용을 물게 한다. RE100을 달성하는 방법으론 크게 신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REC) 구매, PPA(Power Purchase Agreement), 녹색프리미엄요금제가 있는데 모두 RE100을 신경 쓰지 않고 전기를 사용하는 것과 비교해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예컨대 가장 많이 활용되는 REC 구매는 같은 전기를 대략 150% 가격에 구매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REC 구매 가격은 월평균 현물가격으로 2021년 12월에 1REC당 3만8779원에서 지난해 12월 7만5624원으로 오르는 등 상승추세이다. RE100이 확산하면 더 오를 수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17일 설명자료를 내어 반도체 클러스터에 원전 전력을 공급하겠다는 윤 대통령의 언급을 보충했다. 설명자료에서 “일부 글로벌 기업들은 제품 생산 과정에서 재생에너지 사용 비율을 늘릴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RE100 달성을 선언한 기업들은 녹색프리미엄, REC 구매 등의 방법으로 재생에너지 사용 비중을 늘려가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상당한 추가 비용이 발생해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지난해 9월 유엔 총회에서 윤 대통령은 국가별로 다른 에너지 공급 여건을 고려하고 RE100 이행에 따른 기업들의 과도한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원전을 포함한 모든 무탄소에너지를 적극 활용하자는 무탄소에너지(CFE) 이니셔티브를 제안한 바 있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이 말한 CFE는 원전 전력이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현실을 따르겠다는 발상이다. 전력 수요 폭증을 감안할 때 신규 전력원을 발굴해야 하는데, 윤 정부가 이처럼 원전에서 조달하는 쪽으로 방향을 설정하면서 원전 발전량 비중 목표가 올라갈 전망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0년 12월에 나온 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2030년 원전 발전 비중 목표가 25%였지만 지난해 1월 현 정부는 신규 원전 건설 없이 32.4%로 목표를 상향했다. 현 정부가 발표할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는 신규 원전 건설을 포함하여 2030년 원전 발전 비중 목표가 더 올라갈 전망이다. 실제로 국내 발전량 중 원전 비중은 다시 올라가 대략 30%에 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외에도 중국 영국 프랑스 등이 새로이 원전 건설 계획을 발표하는 등 세계적으로도 원전 대체가 생각만큼 순조롭지 못한 상황이다. 온실가스 저감이 핵심 현안으로 떠오르며 재생에너지의 간헐성 문제를 해결하면서 탄소를 적게 배출하는 원전이 다시 주목받고 있고, 빌 게이츠가 온실가스 문제 해법으로 원전을 지지한다는 이야기 또한 회자되고 있다. 한국으로서는 원전 생태계 유지가 원전 수출국으로서 지위를 지키고 원자력 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데 긍정적이다. 원전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이처럼 현실론에 막혀 원전 발전은 다시 살아나고 있다. ▲24/7 CFE=그러나 한국 정부의 CF100이 국가경쟁력을 유지하고 키우는 데 좋은 착수인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세계경제포럼(WEF)에 참석 중인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지난 18일 원전 논쟁에 뛰어들어 “반도체라인 증설을 하면서 원전 충당하겠다고 이야기하는 건 세계적 트렌드나 산업에 대해 모르는 무식한 이야기”라며 “앞으로 몇 년 안에 RE100을 달성하지 못하면 반도체를 포함한 우리 수출 품목들의 수출길이 막힐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BMW, 볼보 등 유럽 완성차 업체들이 국내 부품 수출 기업에 2025년까지 ‘재생에너지 100%를 사용해 제품을 생산하는 RE100 목표 이행계획서’ 제출을 요구해 국내 기업들을 당혹게 하는 등 관련 사례가 늘어나고 있기에 “무식한 이야기”란 과격한 표현을 쓴 김 지사의 주장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국제적으론 RE100을 요구하지, CF100을 요구하지 않는다. CF100의 선두주자는 구글이다. 2017년에 처음으로 연간 에너지 소비량을 100% 재생에너지로 충당한 구글은 2018년 ‘연중무휴 무탄소 에너지(24/7 Carbon-Free Energy)’ 사용을 세계 최초로 선언했다. 구글의 ‘24/7 CFE’ 100% 달성 목표 연도는 2030년. 2021년엔 사용한 에너지의 67%를 무탄소로 조달했다. 2017년에 RE100을 달성한 구글이 아직 CF100에 이르지 못한 이유는 사용 에너지 전체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하지 못하고 일부를 REC 구매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구글은 2017년 RE100을 처음 달성한 이후 2022년까지 6년 연속 RE100을 달성했다. 사실 내용상으론 CF100을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다. ‘24/7 CFE’는 시간·위치 기반 청정에너지 조달에 중점을 둔다. 필요한 전력을 언제 어디서나 무탄소로 충당해야 하므로 ‘시간 일치’와 ‘현지 조달’이 필수적이다. ‘간헐성’으로 표현되는 재생에너지 공급의 불안정성을 극복하기 위해 전력소요시설과 가까운 곳에서 청정에너지를 끌어오거나 시설 자체 혹은 인근에 배터리를 갖춘 태양광·풍력발전소나 하이브리드 발전소를 건설할 필요가 있다. 핵심은 간헐성 극복을 위한 기술들이 태양광·풍력발전을 더 잘 적용하기 위한 보조수단이고, 여전히 ‘24/7 CFE’의 중심은 재생에너지라는 사실이다. 구글의 사례에서 보았듯 ‘24/7 CFE’는 RE100을 우선한다. 재생에너지 사용 100% 이후에 추가적으로 전력의 완전한 탈탄소화를 위해 CFE를 다음 단계로 선택하기에 한국 정부의 CF100과는 결이 아주 다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1년 12월 미국의 모든 연방 기관에 ‘24/7 CFE’ 조건의 전력 구매를 요구하는 행정명령 14057호에 서명한 것에서도 이 기조가 유지된다. 2030년까지 100%의 CFE를 달성하되, 이 중 50% 이상을 연중무휴 대응할 수 있는 현지의 재생에너지로 제공한다는 게 목표다. 따라서 탄소중립만을 내세우며 기후대응 정책인 RE100을 건너뛰고 CF100으로 직행하는 것은 자칫 위험한 정책이 될 수 있다. 산업부는 “무탄소에너지 논의를 시작한 것은 RE100을 부정하거나 CF100만을 추진하겠다는 취지가 아니라 RE100을 보완 병행 추진하면서 국내 기업의 RE100 이행에 따른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현실적 방안을 모색해보고 국제적 확산을 시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분명한 것은 구글 등이 말하는 ‘24/7 CFE’와 CF100은 완전히 다른 정책이다. 국제재생에너지기구(IRENA)에 따르면 2022년 전 세계 재생에너지 용량은 3372GW로 전년(3077GW) 대비 8.9% 증가했다. 한국의 재생에너지 발전량은 거의 늘지 않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2003년 처음으로 비중이 1%대에 진입했고 2018년 8.44%를 최고점으로 2020년 6.41%까지 떨어졌다가 2021년 7.15%로 회복됐다. 재생에너지 정책에서 한국의 특이점은 신재생에너지란 용어를 쓴다는 것으로 연료전지·IGCC(석탄가스화 복합화력발전)를 신에너지로 분류해 재생에너지와 묶어서 통계를 내고 있다. 통계의 착시가 일어날 수 있다. 김 지사는 “이번 정부 들어서 재생에너지에 대한 수요를 억누르는 방향으로 가는 정책을 많이 쓰고 있다”며 “수요가 늘어나서 공급이 많이 늘어야 가격이 저렴해진다”고 진단했다. “재생에너지 수요를 늘리면 공급이 늘고 가격도 덩달아 하락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공급이 늘고 가격이 하락하는 시기까지 기다릴 체력이 충분해야 하며 동시에 정부 입장에서는 그 기간에 정책적으로 응급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무엇보다 RE100이든 CF100이든 재생에너지 확대라는 대세를 거스를 순 없다. 참고로 게이츠가 지지하고 후원하는 원전은 우리나라에서 가동되는 것과 같은 대형 원전이 아니라 출력이 300MW보다 작은 소형모듈원자로(SMR, small modular reactor)이다. 안치용 필자 주요 이력 △ESG연구소 소장 겸 (사)ESG코리아 철학대표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전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 2024-01-24 09: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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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비욘드 ESG] 지구 지킴이의 작은 실천 …다회용기 다회사용 [안치용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정부의 일회용품 사용 규제 철회로 환경단체와 친환경제품 생산업체들이 반발하는 등 혼선이 이어지고 있다. 11월 29일 국회 앞에서는 종이빨대를 바닥에 버리는 퍼포먼스가 열렸다.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와 종이빨대생존대책협의회, 전국카페사장협동조합 등이 환경부의 일회용품 사용 규제 철회에 따른 친환경제품 생산 피해 대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벌인 행사였다. 앞서 11월 7일 환경부는 계도 기간 1년을 두고 시행키로 한 일회용품 사용 규제를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한다는 이유로 사실상 철회했다. 이날 임상준 환경부 차관은 브리핑에서 “원가 상승과 고물가, 고금리, 어려운 경제 상황에 고통을 겪는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에게 규제로 또 하나 짐을 지우는 것은 정부의 도리가 아니다”고 말했다. 환경부는 규제 대신 자발적 참여와 시민들의 인식 개선을 위한 각종 지원과 다양한 캠페인 등을 벌여 일회용품을 줄이는 생활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유도할 계획이다. 환경부의 지원 방안 중에는 다회용기 지원 사업이 들어 있고 관련 예상 68억원을 마련하기 위해 국회와 협의 중이다. ▲온라인 음식서비스 시장의 폭발적 성장 사회 전반의 디지털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가운데 코로나19로 비대면 소비가 급증하고 음식 배달앱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음식의 온라인 구매가 일상적인 풍경으로 자리를 잡았다. 음식서비스 온라인쇼핑 거래액은 통계청이 공식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2017년 2조7326억원에서 2018년 5조2628억원, 2019년 9조7353억원, 2020년 17조3370억원, 2021년 26조1597억원, 2022년 26조5940억원으로 최근 성장세가 둔화하였지만 짧은 기간에 시장이 말 그대로 폭발했다. 5년 사이에 약 10배로 시장 규모가 커졌다. 이러한 폭발적 성장은 배달앱 빅3인 배달의민족, 요기요, 쿠팡이츠가 주도했다. 배달의민족이 시장점유율 과반을 기록하고 있고 빅3가 사실상 시장 전체를 과점한 상태다. 온라인 음식배달 시장의 성장은 언론에 오르내리기로는 배달 용기 쓰레기가 매일 830만개 발생한다는 새로운 사회문제를 낳았다. 배달앱이 보편화하기 전에는 없던 새로운 종류의 쓰레기다. 물론 기존 방문 식당에서도 일부 일회용 용기를 사용하기는 하였지만 전면적인 온라인 음식배달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 숫자는 일회용 배달에 들어가는 용기를 3개로 계산하였기에 실제 배출되는 배달 용기 쓰레기는 상식적으로 하루 1000만개를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간으로는 36억개 넘는 배달 용기 쓰레기가 코로나19 이후 사회 곳곳에서 배출되고 있는 셈이다. 녹색연합이 2021년 4월 시행한 ’배달쓰레기에 관한 시민 인식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42%가 ’마음이 불편하거나 걱정이 된다‘, 34%가 ’죄책감이 든다‘고 답했다. 배달쓰레기 처리대책 중 가장 시급한 것으로는 40%가 다회용기 사용 확대, 33%가 일회용기 감소를 위한 규제를 들었다. 일회용기 규제가 미뤄지고 있어서 현실적인 배달쓰레기 저감 대책은 다회용기 사용 확대밖에는 없다. 그러나 갈 길이 너무 멀다. 아주경제 2023년 3월 23일자 《배달앱 '다회용기' 써보니···서비스 업체 적고 이용 불가 메뉴도》 기사를 보면 이용자가 다회용기에 담은 음식을 배달시켜 먹는 게 꽤 어렵고 불편한 일임을 알 수 있다. 녹색연합은 2022년 11월 17일 보도자료에서 배달음식 다회용기 서비스가 하루 60건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일회용품이 음식배달에서만 발생하는 건 아니다. 최근 환경부가 규제를 완화한 고객 방문 매장에서도 일회용품은 넘쳐난다. 골목마다 볼 수 있는 커피전문점에서 매장 내 취식보다는 테이크아웃 비율이 더 높아 일회용품 쓰레기가 줄어들 수 없는 상황이다. 결국 매장 내 일회용품 사용을 최소화하면서 배달이나 테이크아웃에서 다회용기를 사용하게 하는 것만이 이 문제에서는 사실상 유일한 해답이다. ▲독일의 판트(Pfand) 제도 ’판트 제도‘는 독일의 공병 보증금 제도다. 판트는 보증금 혹은 예치금을 뜻하는 독일어다. 유리병, 페트병, 캔과 같은 빈 병을 무인회수기에 반납하면 개수에 따라 돈을 환급해 준다. 독일은 2022년 1월 1일 포장재법을 개정하여 같은 해 7월 3일 전면 시행에 들어가 모든 음료 포장재가 판트 적용 대상이 됐다. 우유와 유제품 포장에 대해서는 유예기간을 더 두어서 2024년 판트 제도를 적용할 예정이다. 판트제도가 시행되면서 소비자는 생수나 탄산수 같은 음료를 사면서 제품 가격 외에 최소 제품당 0.25유로의 보증금(판트)을 같이 결제한다. 상품 가격과 판트가 계산서에 따로 표시된다. 소비자가 나중에 판트기계에 빈병 혹은 용기를 반납하면 미리 낸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 독일 포장재법 주요 개정 사항엔 판트 제도 외에 케이터링, 배달서비스, 카페와 레스토랑 등이 테이크아웃 시 재사용 가능한 포장재 사용을 의무화한 것이 포함된다. 즉 우리나라처럼 일회용기에 담아서 음식을 배달하거나 가져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2023년 1월 1일 시행에 들어간 개정안은 노동자 5명 이하 소기업과 사업면적 80㎡ 이하 영업장에 대해 예외로 두었지만 이러한 소규모 상점에서도 소비자가 다회용기에 포장해 달라고 요청하면 응해야 한다. 판트 제도, 테이크아웃이나 배달 시 다회용기 의무화 등 선도적인 친환경 정책으로 독일은 재활용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에 이름을 올렸다. 플라스틱 재활용률이 약 46%에 달하고 병 하나당 재사용 횟수가 40회 이상이며 재사용률은 95%다. ▲라라워시 등 한국 다회용기 사업 한국은 최근 환경부 조치에서 보듯 세계적 흐름에 역행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 방침과 무관하게 다회용기 사업은 국내에서도 조금씩 싹을 틔우고 있다. 경기도지역자활센터에서 운영하는 라라워시를 비롯하여 7개 업체가 사업을 하고 있다. 공공 영역에 속한 라라워시와 사회적 기업인 레빗 외에 나머지 5곳은 영리기업으로 신진마스타와 프라임 두 곳의 연간 매출이 100억원을 훌쩍 넘는다. 다회용기 사업은 다회용기 공급과 수거·세척, 세척 후 재공급 구조로 이루어진다. 내용상 세척이 사업의 핵심을 이룬다.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등 교육기관에서 단체급식 시설로 시장이 커지고 있다. 최근 삼성증권이 발표한 ‘기업의 다회용기 세척서비스 지불의사가격(WTP, Willingness To Pay)’ 분석보고서에 따르면 식기 1개당 WTP는 2018년 약 70원 수준에서 2020년 약 200원까지 올랐다. 잠재 고객의 WTP는 상승하고, 서비스 원가는 떨어지는 추세여서 다회용기 세척서비스 시장은 지속해서 확대될 것으로 삼성증권은 전망했다. 다회용기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이는 데 그치지 않고 온실가스를 감축에 기여한다. 말 그대로 다회 사용했을 때 환경적으로 다회용기가 우위에 선다. 아주대 ESG센터의 전과정평가(LCA) 결과 일회용컵의 탄소발자국은 100gCO₂e로 다회용컵을 1회만 사용했을 때 248gCO₂e에 비해 탄소발자국이 낮았다. 텀블러와 비교하면 마찬가지로 일회용컵이 더 환경적으로 우수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회용컵을 3회 이상만 사용하면 다회용컵이 일회용컵보다 환경적으로 우수했고 사용 횟수가 많아질수록 당연히 환경성의 격차가 더 벌어졌다. 10회 사용 시 다회용컵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일회용컵의 40%였다. 국내에서 일회용컵이 연간 53억개 사용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다회용기 보급 확대는 불가피해 보인다. 라라워시는 2018년 11월 성남점을 시작으로 현재 경기도 내에 17개 사업단을 운영하고 있다. 다회용기 보급과 자활을 결합한 일종의 공공사업이어서 도비 지원을 받는다. 현재 일자리 219개를 창출했고, 올해 3분기까지 매출을 약 13억원 올렸다. 최선린 경기광역자활센터 부장은 “경기도 내 모든 기초지자체로 사업단을 확대하여 일자리 창출과 온실가스 감축, 플라스틱 쓰레기 저감을 동시에 꾀하는 바람직한 공공사업 모델로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다회용기 확산을 위해서는 공공 영역의 우선 사용을 비롯해 제도와 관행 개선이 동시에 진행돼야 한다. 더불어 다회용기 자체를 재활용플라스틱으로 만들 수 있도록 법률 개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는 음식물을 담는 용기여서 재활용플라스틱 사용을 기계적으로 금지한 상태다. 플라스틱을 줄이겠다며 새로운 플라스틱으로 다회용기를 만드는 건 지양하면 좋겠다. 안치용 필자 주요 이력 △ESG연구소 소장 겸 (사)ESG코리아 철학대표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전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 2023-11-30 15:5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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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비욘드 ESG] 아이 모습을 한 AI로봇이 '인간'에게 희망인 세상 [안치용 교수] 영화 <크리에이터>의 ‘알피’가 ‘인간’에게 희망인 세상 10월 3일 개봉한 <크리에이터>는 인류의 존망이 달린 AI와 전쟁을 그린 영화다. 포스터나 홍보물만 봐서는 이러한 소재를 다룬 다른 영화와 외관상 설정이 흡사해 스토리가 익숙한 SF영화 같다. AI가 LA에 핵폭탄을 터뜨린 후 인류와 AI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고, 인간이 승리하는 쪽으로 종전의 기대가 높아가는 시점이 영화의 무대다. 주인공인 전 특수부대 요원 조슈아(존 데이비드 워싱턴)는 흔쾌하지 않았지만 실종된 아내 마야(젬마 찬)의 행방을 찾았다는 소식에 특별작전에 합류한다. 이 작전의 목표는 AI 진영에서 개발한 것으로 알려진 인류를 위협할 강력한 무기와 이 무기를 만든 ‘크리에이터’를 찾아서 무기와 창조자를 모두 없애는 것이다. 이 무기와 창조자를 제거하면 AI 진영이 패배하고, 제거에 실패하면 AI 진영이 승리한다. 그 무기는 아이 모습을 한 AI 로봇 ‘알피’였다. 알피의 ‘크리에이터’인 조슈아의 아내 마야는 둘 사이에 생긴 복중 태아를 복제하여 알피를 만들었고 알피는 인간처럼 성장한다. 알피는 마야를 엄마로 생각하고 자신을 인간으로 인식한다. 사실 극중에서 인간과 다른 점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크리에이터’의 ‘human’과 ‘person’=마야가 알피의 엄마라면 조슈아는 논리상 아빠가 된다. AI를 “프로그래밍이지 인간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조슈아에게 이런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 초반부와 달리 시간이 흐르며 조슈아는 알피가 인간임을 혹은 인간과 동일한 존재임을 받아들인다. 알피에게도 정체성 혼란이 있다. 알피가 조슈아와 대화하며 자신과 조슈아가 ‘천국’에 못 가는 이유로 조슈아는 착하지 못해서,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서라고 말한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알피가 인간을 ‘person’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이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human’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다. 시나리오에서 왜 ‘human’ 대신 ‘person’을 채택했을까. 아마 동물권 논의에 주요한 기여를 한 철학자 토머스 화이트의 ‘비인간 인격체(非人間 人格體·non-human person)’란 용어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이 용어에는 ‘person’과 ‘human’이 모두 들어간다. ‘human’을 법률 용어로 풀면 ‘자연인’ 정도로 번역되는 ‘natural person’이다. 회사와 같은 법인(法人)은 ‘juridical person’ 또는 ‘legal person’이다. AI 로봇 알피가 되고자 하는 존재는 ‘human’이 아니라 ‘person’이다. 어느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모습이라고 상상하면 알피가 실제로는 ‘person’이 아닌 ‘human’을 썼을 것 같다. 영화에서는 공들여 ‘person’이란 단어를 등장시켰다. 영화 ‘크리에이터’는 AI 묵시록을 그리지 않았다. AI와 인간(human)이 동등한 인격체(person)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을 소재로 삼았다. ▲새로운 인격체의 기준=동물권 담론은 생태주의와 맞물려 새롭게 주목받는 윤리적 영역이자 일종의 존재론이다. 동물권을 옹호하며 화이트가 제시한 ‘비인간 인격체’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Alive(살아 있음) Aware(자아 인식) Feels pleasure and pain(기쁨과 고통을 느낌) Has emotions(감정을 가지고 있음) Possesses self-consciousness, personality(자의식과 개성을 가지고 있음) Exhibits self-controlled behaviour(통제된 행동을 할 수 있음) Able to recognise and treat other persons appropriately(타인을 적절히 인식하고 대우할 수 있음) Exhibits higher order intellectual abilities(고등의 지적 능력을 행사할 수 있음) 비인간 인격체는 학문적으로는 물론 동물권 운동에서 (일부) 동물의 대안적 명칭으로 활용된다. 미국 동물보호단체 ‘비인간 인격체 권리 프로젝트(NhRP·Nonhuman Rights Project)’에서 이 용어를 아예 단체명에 넣었다. 유인원, 코끼리, 돌고래 등이 비인간 인격체로 자주 거론되는 동물에 해당한다. 동물권 옹호 단체들은 동물 전시·공연 금지와 동물실험 철폐를 주장한다. 2021년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동물을 ‘법인’으로 인정했다. 미국 법원은 콜롬비아 마그달레나강 유역에 거주하는 하마가 소송의 원고로서 요청한 사안을 받아들였다. 동물의 소송 당사자성이 인정된 특별한 사례다. 이에 앞서 2013년 5월 인도 정부는 돌고래 수족관을 금지하며 돌고래를 권리를 가진 비인간 인격체로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동물의 권리가 헌법에 명시됐다. 2002년 독일 헌법 20a 조항이 “국가는 미래 세대를 위한 책임으로서 헌법 질서 범위 내에서 입법을 통하여 그리고 법률과 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행정과 사법을 통하여 자연적 생활 기반과 동물(Lebensgrundlagen und die Tiere)을 보호한다”로 바뀌었다. ‘Lebensgrundlagen’ 다음에 ‘동물(und die Tiere)’을 삽입한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에 분명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비판 또한 존재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개념은 인간 중심주의에 입각하고 있다. 인간이 판단한 인격을 중심으로 고등동물을 정의했으며, 더불어 고등동물만이 보호 대상이 아니라는 반론이 가능하다. 근본적으로 회사와 같은 다른 법인과 달리 동물은 법인으로 인정되더라도 수동적 존재에 머물며 결코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한계를 보인다. 인간이 파악한 동물의 권리를 인간이 대리할 따름이다. 화이트의 비인간 인격체 논의를 보며 동물보호단체에서 말하는 고등동물보다 오히려 영화 <크리에이터>의 AI로봇이 그 조건에 더 부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인 알피뿐 아니라 등장한 거의 모든 AI가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심지어 AI 승려까지 나온다. AI가 영혼과 영성까지 추구하는 풍경이 흥미롭게 그려졌다. 다만 동물과 달리 <크리에이터> 속 AI는 현실이 아니다. 하지만 언제일지 모르지만 다가올 미래라고 할 때, 더구나 동물과 달리 AI는 권리를 ‘주체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할 때 동물권 담론에 도입된 비인간 인격체 개념이 AI로봇에 적용되는 건 불가피해 보인다.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화이트의 조건 중 ‘Alive’가 무엇보다 쟁점이 될 것 같다. 마찬가지로 인간 중심주의 발상이지만 <크리에이터>처럼 AI가 인간(person)으로 인정받으려면 ‘불쾌한 골짜기’의 문턱을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불쾌한 골짜기’는 인간이 로봇 등 인간이 아닌 존재를 볼 때 그것과 인간 사이의 유사성이 높을수록 더 많은 호감을 느끼게 되지만 유사성이 어느 수준에 다다르면 오히려 호감도가 하락한다는, 즉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는 이론이다. 1970년 일본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森政弘)가 소개한 개념이다. 여기서 ‘불쾌(Uncanny)’는 독일 정신과 의사 에른스트 옌치가 1906년에 제시한 ‘Das Unheimliche’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불쾌’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가 정말로 살아 있는 게 맞는지 아니면 살아 있지 않아 보이는 존재가 사실은 살아 있는 것은 아닌지’를 의심하는 데에서 비롯한 감정이다. 가장 비근한 예로 좀비를 떠올리면 되겠다. ‘골짜기(Valley)’는 호감도와 닮은 정도를 변수로 한 그래프 모양 때문에 생겼다. 모리의 설명에 따르면 이 그래프상 곡선은 크게 3개 국면으로 구성된다. 인간은 로봇이 인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을수록 호감을 느낀다. 하지만 비슷한 정도가 특정 수준으로 치솟으면 인간의 감정에 거부감이 생기면서 호감도가 하락해 곡선 또한 상승에서 하강으로 돌아선다. ‘Uncanny’ 혹은 ‘Das Unheimliche’가 개입하기 시작한다. 하강 곡선은 ‘비슷한 정도’가 훨씬 더 강해진 또 다른 특정 수준에 이르면 하강을 멈추고 다시 상승한다. 이렇게 급하강한 후 급상승한 호감도 구간은 그래프상 곡선에서 깊은 V자 모양을 하게 돼 ‘골짜기’를 형성한다. ‘불쾌’와 ‘골짜기’를 결합한 ‘불쾌한 골짜기’의 성립이다. 2019년 영국 케임브리지대는 국제학술지 <신경과학>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 독일 아헨공대 휴먼테크놀로지센터와 공동연구에서 “뇌 전두엽에 위치한 시각피질의 활성화 정도를 통해 ‘불쾌한 골짜기’를 규명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요약하면 실험 참가자 21명을 대상으로 실제 사람, 마네킹, 안드로이드(사람과 구분하기 어려운 인조인간),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 산업용 기계 로봇 등 이미지를 보여주며 질문을 던졌고 그 반응을 자기공명영상(MRI)으로 촬영해 뇌의 어떤 영역이 활성화하는지 확인한 결과 실험 참가자에게서 공통으로 전형적인 ‘불쾌한 골짜기’ 현상이 나타났다. <크리에이터>는 영화 <서기 2019 블레이드 러너>(1982년)와 노벨상 수상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클라라와 태양>(2021년) 등에 등장한 ‘불쾌한 골짜기’ 문제를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해결한다. 극중 대사 “person”과 같은 맥락에서 알피를 포함해 <크리에이터>의 AI는 모두 머리 아래쪽에 구멍이 뚫려 있다. 사람인지 로봇인지 의심을 일으켜 불쾌를 자아낼 수 있는 ‘불쾌한 골짜기’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을 사전에 막았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건 다르게 만들어 ‘person’과 ‘human’에 대한 혼동을 차단했다. 그러나 턱이 시작하는 지점에 구멍이 휑하게 뚫린 AI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고 더 평화를 사랑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기후위기가 본격화하면 인간으로서는 동물 보호보다 동물자원 보호가 더 사활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그즈음 AI와 관련하여 비인간 인격체 논의가 본격화하지 싶다. 묵시록과 연결돼 기후위기와 쌍으로 내우외환이 될지, 영화 <크리에이터>처럼 공존 가능성이 열릴지 두고 볼 일이지만, 준비는 지금부터 해도 빠르지 않다. 성공적으로 기후위기를 극복한 22세기 지구의 주인이 인간(human)이 아닌 건 마음이 아프다. 하긴, 꼭 그렇게 생각할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 안치용 필자 주요 이력 △ESG연구소 소장 겸 (사)ESG코리아 철학대표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전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 2023-10-16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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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비욘드 ESG] 화석연료와 더 독하게 '헤어질 결심' [안치용 교수] 독일 에너지업계에서 쓰는 용어 중에 'Dunkelflauten'이라는 게 있다. ‘Dunkel’은 어둡다는 뜻으로 이 뜻에서 파생하여 흑맥주를 지칭하기도 한다. ‘Flauten’은 ‘Flaute’의 복수로 무풍 상태를 의미한다. /둥켈플라우텐(Dunkelflauten)'은 태양이나 바람이 충분하지 못하여 태양광이나 풍력발전이 미미한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필요 에너지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쓰겠다는 국제적 흐름인 RE100과 관련하여 둥켈플라우텐이란 용어가 자주 사용된다. ▲'Dunkelflauten'=예컨대 다음 그래프에서는 전력 수요량에 비해 풍력 에너지 공급량이 넘치거나 모자라는 모습이 보이는데, 그래프상 모자라는 부분이 둥켈플라우텐에 해당한다. 공장이나 설비에서 필요로 하는 전력이 대체로 일정한 반면 태양광이나 풍력 발전을 통해 생산되는 전기는 들쑥날쑥하다. 유럽 어느 지역 공장의 실제 풍력전기 수급 2주치 상황을 기록한 그래프에서 첫째 주 말고 둘째 주가 둥켈플라우텐에 해당한다. 이 공장은 100% 재생에너지 사용을 약속한, 즉 RE100을 약속한 곳이지만, 재생에너지 공급이 안 되는 둥켈플라우텐엔 화석연료로 만든 전기를 쓸 수밖에 없다. 화석연료로 만든 전기를 이용함으로써 재생에너지 100% 사용 약속을 저버린 이 공장이 RE100을 달성할 기회는 영영 사라진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공장의 해태가 아니라 풍력발전소가 제때 전기를 공급하지 못해서 빚어진 사태인 만큼 화석연료를 쓴 만큼 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REC·Renewable Energy Certificate)를 구매하면 RE100에 머문 것으로 인정된다. 실제로 RE100 기업 가운데 소요 에너지 전량을 재생에너지로 쓰는 곳은 드물다. 대부분 화석연료 기반 에너지를 부분적으로 사용하면서 화석연료 사용량만큼을 REC로 상쇄하여 RE100을 달성한다. REC 활용 비율이 국제적으로는 사용 에너지의 40%를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뱅크오브아메리카처럼 거의 REC 구매만으로 RE100 달성 기업에 이름을 올리는 곳도 있다. ▲RE100=RE100(Renewable Energy 100%)은 국제적으로 추진되는 민간 차원의 자발적 이니셔티브다. 국가 단위에서 수립되는 재생에너지 확산 정책과 별개로 기업 등 개별 조직 차원에서 진행한다. 비영리 단체인 ‘더 클라이밋 그룹’과 CDP(Carbon Disclose Project)의 파트너십으로 2014년 9월 유엔 기후정상회의에서 출범했다. 재생에너지(Renewable Energy)는 주지하듯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연속적인 공급(생산)이 가능하고 사용 과정에서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적은 에너지원을 뜻한다. RE100에서 용인하는 친환경 발전원으로는 바이오매스(바이오가스 포함), 지열, 태양광, 태양열, 수력, 풍력 에너지 등이 있으며 태양광과 풍력이 경쟁력 우위를 확보하면서 두 곳에 투자가 집중되고 있다. 동시에 역으로 태양광과 풍력을 중심으로 투자가 확대하고 발전원가가 하락하며 태양광과 풍력발전의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있다. 양의 피드백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의 ‘2021 세계 에너지 투자 현황’에 따르면 2020년 재생에너지 발전 투자 금액은 전년 대비 6.9% 늘어난 3588억 달러로, 세계 전력부문 투자의 46.1%를 기록했다. 2020년 신규 풍력설비는 2019년의 두 배인 114GW였으며, 같은 해 신규 태양광설비 또한 전년보다 25% 늘어난 135GW였다. 에너지 연구기관인 BNEF는 2040년까지 전 세계 신규 발전설비 투자액(10조2000억 달러)의 72%인 7조4000억 달러가 재생에너지에 몰릴 것으로 예측했다. 전 세계에서 RE100에 참여한 기업은 400곳을 넘어섰다. RE100 2021 연례 보고에 따르면 2021년 연간 보고에 참여한 315개 RE100 회원사는 2020년 전력 소비량(340TWh)의 평균 45%를 재생에너지로 조달했다. 앞서 살펴본 둥켈플라우텐이 RE100 천명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재생에너지 조달비율을 사용 에너지의 절반 미만에 머물게 한다. ▲24/7 CFE=국제재생에너지기구(IRENA)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재생에너지 공급량은 3372GW로 전년(3077GW) 대비 8.9% 증가했다. IRENA는 21세기 말까지 지구표면 평균온도 상승 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로 막으려면 연간 재생에너지 공급량을 2030년까지 현재 수준의 3배로 확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전략은 타당한 것이지만 다른 보완책이 병행되어야 한다. 살펴본 대로 둥켈플라우텐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RE100은 완벽한 온실가스 저감 대책이 될 수 없다. 대중은 흔히 RE100을 선언한 기업이 연중무휴 24시간(24/7/365) 재생에너지를 쓴다고 착각하지만 RE100 2021 연례 보고에서 나타났듯 재생에너지 조달 비율이 45%에 그쳤다. 핵심 재생에너지인 풍력과 태양광 전력 공급에 변동성이 존재하기에, 둥켈플라우텐에 발생한 수급 불일치를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해소하는 것이 관건이다.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해법은 저장장치다. 인용한 그래프에서 재생에너지 공급량이 소요량을 상회하는 첫째 주에 잉여 전력을 저장했다가 다음 주 둥켈플라우텐에 사용하면 깔끔해 보인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재 저장장치의 한계는 몇 시간에 불과하다. 며칠이나 몇 주가 되어야 둥켈플라우텐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데 저장 기간이 턱없이 짧다. 시급히 기술혁신이 이루어져야 할 부문이고 이제 막 가능성을 타진하는 중이다. 이에 따라 100% 재생에너지에 이어 100% 무탄소 에너지 사용이 에너지 분야의 핵심적 관심사로 떠오르게 된다. 100% 무탄소 에너지 사용을 세계적 의제로 제안한 곳은 구글이다. 구글은 2018년 ‘24/7 CFE(Carbon-Free Energy·연중무휴 무탄소 에너지)’ 정책을 발표했다. 이에 앞서 2017년에 구글은 처음으로 자사 연간 에너지 소비량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했다. 구글이 RE100을 달성하자마자 24/7CFE란 의제를 제기한 까닭은 재생에너지 수급불일치에 따라 RE100 달성에도 불구하고 화석연료와 완벽하게 결별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7년 이후 매해 RE100을 달성하고 있지만, 2021년을 예로 들면 그해 사용한 에너지의 67%만 무탄소로 조달했다. 명목상 RE100 달성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3분의 1은 여전히 탄소를 배출하는 화석연료를 쓰고 있다는 뜻이다. 구글은 2030년 ‘24/7 CFE’ 달성을 목표로 둥켈플라우텐 문제 해결에 노력하고 있다. ‘24/7 CFE’는 재생에너지 공급 효율을 높이면서 저장장치의 성능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것과 결부된다. 100% 재생에너지 충당이 어려울 때 그만큼 REC 구입을 인정한 RE100보다 ‘24/7 CFE’는 훨씬 까다롭고 근본적인 개념이다. ‘24/7 CFE’와 RE100은 시간 기준이 다르다. 연간 기준인 RE100과 달리 ‘24/7 CFE’는 시간(hour) 단위로 재생에너지 공급 계획을 수립한다. 필요 전력을 상시적으로 무탄소로 공급하는 데 중요한 원칙은 ‘시간 일치’와 ‘현지 조달’이다. 무탄소전력 수급을 시간별로 계획해 구매한 재생에너지가 전력소비로 연결하도록 하고, 소비 지역에서 청정 전력을 구매해 전력 소비자가 자기 책임하에 온실가스 배출량을 ‘0’으로 만들 수 있다. 풍력과 태양광 전력을 주요하게 활용하되 지열이나 수력과 같은 대체 재생 에너지원을 함께 활용하여 둥켈플라우텐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에너지 저장 솔루션과 혼합 재생에너지원 개발이 중요해진다. 에너지를 소비하는 기업이 중심인 RE100과 달리 ‘24/7 CFE’가 에너지 구매자, 공급업체, 정부, 비정부기구, 학술기관 등 에너지 생태계 전반의 이해관계자를 포괄하는 이유가 이러한 배경에서 해명된다. 2021년 9월 미국 뉴욕시에서 주요 에너지 구매자, 공급업체, 솔루션 제공업체, 정부 등은 ‘모두를 위한 지속 가능한 에너지(SEforALL)’ 및 유엔에너지(UN-Energy)와 협력하여 ‘연중무휴 무탄소 에너지 협약(24/7 Carbon-Free Energy Compact)’을 출범했다. 여기서 핵심은 ‘24/7 CFE’에 동원된 많은 에너지 기술이 태양광과 풍력발전을 더 잘 이용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24/7 CFE’은 재생에너지에 초점을 맞춘 에너지 활용 지침이라는 사실이 잊혀서는 곤란하다. 베를린공과대학이 최근 시뮬레이션한 바에 따르면 아일랜드에서 2025년 ‘24/7 CFE’을 적용한 결과 RE100에 비해 이 나라 발전 분야에서 탄소를 약 15% 줄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대학 연구팀은 ‘24/7 CFE’의 90~95%를 달성하는 데 추가로 아주 많은 비용이 소요되지 않았으나 마지막 5%p에서 탄소를 없애는 데는 약 3배의 비용이 들었다고 분석했다. RE100에 이어 등장한 24/7 CFE’는 미래 에너지 분야의 확고한 흐름이 될 공산이 크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021년 12월 미국의 모든 연방 기관에 ‘24/7 CFE’ 조건의 전력 구매를 요구하는 행정명령 14057호에 서명했다. 2030년까지 100%의 CFE를 달성하고 이 중 50% 이상을 연중무휴 대응할 수 있는 현지의 재생에너지로 제공한다는 게 목표다. 한국 정부는 제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초안에서 2030년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 목표(21.6%)를 2021년 전 정부에서 확정한 2030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상 비중(30.2%)보다 크게 줄였다. <성장의 한계> 50주년을 기념하여 로마클럽에서 ‘인류 생존을 위한 가이드’ 성격으로 발간하여 최근 국내에 번역된 <모두를 위한 지구>는 총 에너지 비용과 관련하여 당분한 급격한 상승을 감수해야만 지속 가능한 미래를 담보하는, 이 책에서 ‘거대한 도약’이라 명명한 전환을 이룰 수 있다고 밝혔다. 고통과 비용을 얼마나 감수할 수 있느냐가 지구와 국가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뜻이다. 8월 22일은 20회 에너지의 날이었다. 우리나라 에너지 정책에 관해 고민이 더 깊어진 기념일이었다. 안치용 필자 주요 이력 △ESG연구소 소장 겸 (사)ESG코리아 철학대표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전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 2023-08-31 23:4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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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비욘드 ESG] 우리가 맹그로브 숲을 보존해야 하는 이유 [안치용 교수] 7월 26일은 ‘국제 맹그로브 생태계 보존의 날’이다. 2015년 11월 6일 유네스코 총회에서 맹그로브 숲 보존을 위해 매년 7월 26일을 맹그로브 생태계 보존의 날로 지정하였다. 유엔에서 기념일을 지정한 까닭은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은 맹그로브가 지구온난화 속도를 늦추고 생태계를 보호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는 뜻이겠다. 맹그로브 숲 ◆새로이 각광받는 맹그로브=맹그로브 숲은 조간대에 있다. 조간대는 만조 때 해안선과 간조 때 해안선 사이의 땅으로 대체로 염습지다. 육지와 바다 각각에 인간의 피부에 해당한다. 맹그로브는 다른 대부분 나무와 달리 바닷물에서 생장할 수 있다. 맹그로브 뿌리는 음전하(-)를 띠고 있어서 염화 이온(Cl-)은 밀어내고 나트륨 이온(Na+)은 끌어당겨 뿌리 표면에 달라붙게 만든다. 이런 연유로 바닷물 속에 있어도 염분(NaCl)이 뿌리 안쪽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물만 빨아들일 수 있다. 이렇게 염분이 90% 이상 뿌리에서 걸러지고 나머지는 잎에서 소금 덩어리로 배출된다. 맹그로브가 바닷물에서 소금을 걸러내는 방식은 담수화 기술을 개발하는 데 아이디어를 제공했다고 한다. 조간대의 맹그로브 숲은 해안에서 완충림 역할을 한다. 즉 태풍, 해일, 쓰나미 등 자연재해를 최일선에서 막아 해안가 피해를 줄이고, 맹그로브의 수많은 뿌리가 토양을 고정하여 해변 침식을 억제한다. 어떤 맹그로브 종은 받침뿌리가 땅속으로 10m가량 파고들어 갈 정도로 탄탄하게 땅과 연결된다. 지구상에 100종 가까운 맹그로브가 존재하며 사람 키 정도에서 물 위로 40m나 자라는 것까지 다양하다. 모든 맹그로브는 물이 천천히 흘러 세립질 저질(底質)이 쌓일 수 있는 저산소 토양에서 서식한다. 산호와 마찬가지로 낮은 온도를 싫어해 열대 및 아열대 지역에서 자란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전 세계 맹그로브 숲의 면적은 1480만헥타르(㏊)다. 아시아가 555만㏊로 가장 넓고, 아프리카(324만㏊), 북아메리카 및 중앙아메리카(255만㏊), 남아메리카(212만㏊), 오세아니아(126만㏊) 순으로 분포한다. 기온이 낮은 유럽과 남극대륙에는 맹그로브 숲이 없다. 세계 맹그로브 숲의 40% 이상이 인도네시아(19%), 브라질(9%), 나이지리아(7%), 멕시코(6%)에 있다. 맹그로브 숲은 두꺼운 뿌리가 땅속 깊이 자리할 뿐 아니라 서로 빽빽하게 엉켜 있어 매우 안정적이다. 숲이 해안선의 변화에 조응해 아주 느린 속도지만 같이 이동하기에 지구온난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 시대에 천연 제방으로 거론된다. 복잡하게 뒤엉킨 맹그로브 숲의 뿌리 체계는 수중에서 질산염·인산염 등 많은 오염 물질을 걸러낸다. 강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수질을 개선하는 천연 필터인 셈이다. 많은 물고기와 생명종이 음식과 피난처를 찾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맹그로브 숲이 조성된 바닷가는 그렇지 않은 바닷가에 비해 어획량이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맹그로브의 뿌리와 물고기들 ◆사라진 맹그로브 숲, 가라앉는 도시=그러나 그동안 맹그로브 숲의 가치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맹그로브 숲을 보유한 인도네시아는 인구 대국이기도 하다. 경제 개발에 따라 무분별하게 맹그로브 숲이 파괴되거나 개간되었다. 2015년 기준으로 인도네시아 맹그로브 숲의 약 40%가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맹그로브 숲이 있던 자리에 주거지나 물새우와 밀크피시 양식장이 들어섰다. 방파제 및 천연 제방 역할을 하던 맹그로브 숲이 사라지고 해수면 상승과 대규모 지하수 개발이 겹치면서 인도네시아가 가라앉고 있다. 특히 수도인 자바섬 자카르타는 세계에서 가장 빨리 가라앉는 도시가 됐다. 고층 건물이 즐비한 인구 과밀인 자카르타는 매년 지반이 내려앉아 현재 도시의 40%가 해수면보다 낮은 상태로 전해진다. 이에 따라 2019년 8월 보르네오섬 동칼리만탄으로 수도를 옮기기로 하고 2년 반이 지난 지난해 1월 새 수도 명칭을 누산타라(Nusantara)로 발표했다. 서둘러 수도를 옮겨야 할 정도로 자카르타 상황이 심각하다. 강우나 홍수와 무관한 자카르타의 침수 모습은 종종 언론 보도로 전해진다. 당연히 맹그로브 숲이 사라진 이유만으로 자카르타가 가라앉고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지반 침하 이유에서 맹그로브 숲의 파괴를 빼놓을 수는 없다. 태국에서도 맹그로브 숲의 손실이 심각하다. 3100㎞에 이르는 긴 해안을 보유한 태국은 전체 해안 중 약 4분의 1인 700㎞가량이 심각한 침식으로 고통받고 있다. 태국 해안에 광범위하게 서식하던 맹그로브 숲이 줄어들면서 해안 침식이 더 가속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엔과 태국 정부가 조사한 결과 1961~2000년 사이 태국 해안의 맹그로브 숲 3분의 1이 증발했다. 맹그로브 숲이 동남아를 비롯해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계기는 2004년 12월 26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서부 해안의 40㎞ 지점에서 발생한 매그니튜드 9.1~9.3의 초대형 해저 지진. 이 지짐으로 30만명 이상이 숨지고 5만명이 실종됐으며 170만명가량 난민이 생겼다. 사망·실종 피해 대부분은 쓰나미 때문이었다. 재앙이 지나간 후 맹그로브 숲이 온전한 지역이 그렇지 않은 지역에 비해 피해가 눈에 띌 정도로 작은 것이 확인되며 맹그로브 복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된다. 맹그로브의 천연 제방 효과는 미국에서도 확인됐다. 2017년 허리케인 어마가 미국 플로리다를 강타했을 때 그곳의 맹그로브 숲이 50만명 이상을 보호했고 15억 달러의 직접적인 홍수 피해를 방지한 것으로 추산됐다. ◆지구온난화 시대의 총아=맹그로브 숲은 자신의 몸(바이오매스)과 뿌리내린 해양 진흙에 이산화탄소를 저장한다. 유엔 ‘적도 이니셔티브’의 2020년 연구에 따르면 맹그로브 숲 1㏊당 1500톤 이상의 탄소가 그 아래에 저장되어 있다. 육지 숲보다 8배 많은 양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맹그로브 숲과 연안습지는 열대림보다 10배 빠른 속도로 탄소를 격리한다. 더 빠르게 더 많은 탄소를 제거하는 맹그로브의 효과가 알려지면서 맹그로브 숲은 지구온난화 시대에 매우 중요한 탄소 저장고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유엔은 맹그로브가 격리한 탄소를 ‘블루카본’으로 정의했다. 2009년 유엔 보고서 <블루카본-건강한 해양의 탄소 포집 역할>에서 처음 언급된 블루카본은 어패류, 잘피, 염생식물 등 바닷가에 서식하는 생물과 맹그로브 숲, 염습지 등 해양 생태계가 흡수한 탄소를 뜻한다. 탄소 흡수 속도가 육상 생태계보다 최대 50배 이상 빠르고 탄소를 수천 년간 격리·저장할 수 있다. 지구의 탄소는 블루카본, 블랙카본, 그린카본 등 3가지로 구분하는데 블랙카본은 석탄·석유 등 화석연료나 나무 등이 불완전 연소하면서 발생하는 탄소를 가리키며, 그린카본은 열대우림과 침엽수림 등 육상 생태계가 흡수한 탄소다. 연안의 맹그로브 숲이 파괴되면 탄소 격리 능력이 사라지는 데 그치지 않고 맹그로브가 이미 격리해 몸에 저장한 탄소를 방출하는 이중의 피해를 유발한다. 이에 따라 맹그로브 숲 보존이 국제적 관심사로 급부상하게 된다. 맹그로브 파괴로 위기에 직면한 베트남,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10개국은 ‘미래를 위한 맹그로브’ 프로젝트를 통해 숲 복원에 나섰다. 특히 수도의 지반 침하 문제를 겪고 있는 인도네시아 국가개발계획청은 2045년까지 시행할 맹그로브 보존 장기 로드맵을 만들어 맹그로브 복원에 열의를 보이고 있다. 방글라데시(60%)와 인도(40%)에 걸친 세계적으로 큰 맹그로브 숲 중 하나인 순다르반 지역(140만㏊)의 맹그로브 숲 복원사업은 ‘아시아의 허파 재생’ 사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맹그로브 액션 프로젝트’는 전 세계 맹그로브 숲을 보존하고 복원하기 위해 설립된 미국의 비영리 단체다. 이 단체는 건강한 맹그로브 숲이 특히 가난한 해안 지역사회에 지속 가능한 삶을 제공하고 자연재해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보고 지역민이 복구 사업에 참여하는 ‘지역사회 기반 맹그로브 복원(CBEMR)’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기업도 맹글로브 숲 복원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애플은 콜롬비아 카리브해 연안에 맹그로브 군락지 조성 사업을 벌여 1만1000㏊를 복원 중이다. 이 사업으로 1만7000톤의 탄소를 흡수해 자사의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할 계획이다. 케냐 해양수산연구소는 가지만 일대에서 지역민과 협력하여 맹그로브 숲을 복원하고 여기서 생긴 탄소배출권 수익으로 지역사회 발전에 투자하고 있다. 한국 기업 중에서는 SK이노베이션과 SK어스온이 2018년부터 베트남 미얀마 해변 136SK어스온에 맹그로브 묘목 53만그루를 심었다. 포스코인터내셔널과 KB국민카드는 인도네시아 해안에 맹그로브 묘목을 식재했다. 일각에서는 한국에서 맹그로브 숲을 조성할 준비를 하고 있다. 맹그로브 서식 북방한계선이 계속 올라가면서 조만간 우리나라 남쪽에 맹그로브를 심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이다. 지구온난화의 역설적 풍경이다. 현재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에 26종, 일본에 6종의 맹그로브가 서식하고 있다. 한국에 맹그로브가 살고 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온난화 추세가 계속되면 맹그로브 중에서 추위에 강한 종이 우리나라에 자리 잡을 확률이 점점 더 높아지게 되고, 더불어 한국으로서는 지구온난화 대응의 선택지가 늘어나게 된다. 좋을 일일까. 우리나라 남쪽 갯벌에 맹그로브 숲이 조성된 이색 풍경을 만일 보게 된다면 어떤 마음이 들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다. 안치용 필자 주요 이력 △ESG연구소 소장 겸 (사)ESG코리아 철학대표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전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 2023-07-26 06: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