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울대 인류학과 학사·석사
- 호주국립대학 박사
-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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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의 Indonesia Story] 일대일로發 인도네시아 고속철…'부채의 덫'에 갇히나
캄보디아에서 한국인 대학생이 살해된 사건을 계기로 온라인 스캠에 대한 우려와 비판이 쏟아졌다. 중국계 범죄조직은 고액 연봉과 좋은 근무 조건을 미끼로 한국인을 유인한 뒤 감금과 폭행, 고문 등을 통해 로맨스 스캠, 보이스피싱, 투자 사기 등 각종 범죄 행위를 강요했다. 이들의 활동은 수도 프놈펜에서도 이루어졌지만, 대규모 범죄 단지는 시아누크빌(Sihanoukville)에 자리했다. 이 도시가 범죄조직의 핵심 거점이 된 배경에는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캄보디아 제1의 수출입항인 시아누크빌에는 중국과 합작해 건설된 경제특구가 조성되어 있었다. 2013년 일대일로 사업이 본격화하자, 이 지역은 중국 자본의 핵심 투자처로 부상했다. 백개가 넘는 제조업체가 유입했고, 마카오를 대체할 관광지로 주목받으면서 카지노, 호텔, 콘도미니엄 등이 속속 들어섰다. 이어 온라인 카지노 업체도 대거 진입했다. 온라인 카지노는 관광객 유치에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이를 발판으로 범죄조직의 활동이 활성화되었다. 결국 2019년, 캄보디아 정부는 온라인 카지노를 전면 금지하는 강경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정책 시행 직후 코로나19 팬데믹이 확산하면서 카지노 산업의 기반 자체가 붕괴했고, 텅 빈 건물은 온라인 스캠 조직의 손에 넘어갔다. 코로나 이후에도 이들은 요새화된 단지를 중심으로 범죄를 이어갔다. 시아누크빌은 일대일로가 남긴 어두운 유산을 여실히 보여준다. 중국 자본에 기대어 관광 산업의 도약을 꿈꿨던 캄보디아에 남은 것은 완공되지 못한 건물, 통제 불가능한 범죄조직, 만연한 부정부패, 내국인 역차별, 그리고 추락한 국제적 위상뿐이다. 일대일로 사업이 처음 시작될 당시 이러한 부정적 결과를 예견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중국 자본의 급격한 유입이 가져올 부작용에 대한 경고는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그리고 그 경고 중 하나가 최근 인도네시아에서 현실로 드러났다. 인도네시아는 일대일로 사업 후 중국 자본이 대거 유입된 국가 중 하나이다. 고속철도, 고속도로, 항만, 공항 등 인프라 건설은 물론, 자원 개발과 1차 가공을 위한 경제특구 조성에도 막대한 중국 자본이 투입됐다. 일대일로 사업의 문제점이 가장 먼저 가시화된 지역은 술라웨시(Sulawesi)섬 중부의 산업단지였다. 이곳에는 채굴된 니켈을 정제·가공하는 인도네시아–중국 합작 기업이 설립됐다. 2020년, 소셜 미디어를 통해 이곳에 4만명의 중국인 노동자가 일하고 있다는 주장이 퍼지며 논란이 불거졌다. 이는 허위 사실로 밝혀졌지만, 새로 생긴 일자리 대부분이 중국인에게 돌아가고 현지인에게 실질적 이익이 없다는 인식이 확산하는 계기가 됐다. 그 결과, 일대일로 사업에 대한 불신과 중국인 노동자에 대한 반감이 고조됐다. 이 같은 인식 때문이었는지, 2023년 이곳에서는 현지 노동자와 중국인 노동자 간의 갈등이 폭동으로 번지며 사상자가 발생했다. 2025년에도 유사한 사태가 재발해 중국인 노동자에 대한 폭행과 시설 파괴로 이어졌다. 공권력이 개입함으로써 폭동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정부가 중국 편을 든다는 비판 여론을 의식해 경찰은 현지 노동자에 대한 강경 대응을 자제했다. 이처럼 반중 정서가 팽배해지자, 중국 기업과 노동자는 조심스러운 자세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시아누크빌과 달리 인도네시아에서는 중국인 중심의 게토가 형성되거나, 이들이 지역 엘리트와 유착하는 상황이 결과하지 않았다. 중국 자본 유입이 중국인의 영향력 확대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인도네시아는 캄보디아와는 다른 방식으로 일대일로의 문제점에 직면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자카르타와 반둥(Bandung)을 잇는 동남아 최초의 고속철도 건설 사업이다. 인도네시아에서 고속철 논의는 2010년대 초반부터 시작했으며, 2014년 조코위 대통령의 취임 후 본격화됐다. 초기에는 일본국제협력기구(JICA)가 사업 타당성 조사에 수백만 달러를 투자하며 주도권을 쥐었다. 그러나 2015년 고속철 입찰이 시작되자 상황이 급변했다. 중국이 다크호스로 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대다수 전문가와 언론이 일본의 낙찰을 예상했지만, 결과는 중국의 승리였다. 중국은 일본보다 약 7억 달러 낮은 55억 달러의 건설비를 제시했다. 반면, 대출 금리는 2%로, 일본이 약속한 0.1%에 비해 훨씬 높았다. 기술력에서는 일본이 우위였지만, 중국은 기술 이전을 보장하며 약점을 보완하려 했다. 또한 일본이 정부 간 거래(G2G)를 요구한 반면, 중국은 기업 간 거래(B2B)를 제안하면서 정부의 지급보증 부담을 덜어주었다. 입찰 내용에 차이는 있었지만, 중국 선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요인은 정치적 고려였다. 인프라 확충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운 조코위에게 있어 일대일로 자금은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중국과의 협력 의지를 드러냄으로써, 고속철 사업은 향후 추가 자본 유입을 보장하는 신뢰의 증표로 작동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전폭적 지원 속에 시작된 고속철 공사는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토지 수용 문제로 인해 공사는 완공 예정 시점인 2019년을 훌쩍 넘어섰다. 코로나 팬데믹에 따라 공사가 지연되자 중국계 은행으로부터의 대출 자금이 소진되었고, 사업은 중단 위기에 처했다. 이때 구원 투수로 나선 이는 또다시 조코위였다. 그는 애초에 내세운 기업 간 거래 원칙을 철회하고, 부족한 투자금과 추가 경비에 대해 정부가 지급보증 할 것을 결정했다. 수십억 달러의 자금이 추가로 투입되면서 공사는 다시 속도를 냈고, 2023년 마침내 완공됐다. 조코위 임기 내에 마무리된 자카르타–반둥 고속철도는 최고 시속 350㎞로 143㎞ 구간을 연결하며 개통 후 2년여의 기간 동안 큰 문제 없이 운행되었다. 한동안 대중의 관심 밖에 머물던 고속철은 최근 전개된 몇몇 상황으로 인해 사회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첫째, 정부가 자카르타–수라바야(Surabaya) 고속철 건설 계획을 추진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둘째, 고속철의 인도네시아 측 대주주인 철도공사가 국부펀드의 관리 하에 있기에 그 부채 역시 국부펀드 자금으로 상환해야 한다는 지침을 프라보워 대통령이 내놓았다. 셋째, 고속철 건설비용이 중국 본토의 건설비보다 세 배 이상 높았음을 지적하면서, 전직 장관이 부정부패의 개입 가능성을 제기했다. 고속철에 관한 관심이 증폭되자, 그 운영사의 재정 상황이 미디어를 통해 보도되었다. 정확한 회계 자료에 기반한 수치는 아니지만, 제시된 손실 규모는 충격적이었다. 2024년 고속철 운영사의 적자액은 4조1900억 루피아(약 3600억원), 2025년 상반기 적자액은 1조6200억 루피아(약 1400억원)에 달했다. 매년 갚아야 하는 이자는 2조 루피아(약 1700억원)로 추정된 반면, 2024년 연간 승객 600만명 기준의 수입은 1조5000억 루피아(약 1300억원)에 불과했다. 운행 수익으로 이자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구조적 적자 상황이 밝혀진 것이다.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논의는 다시 10년 전, 입찰 당시로 되돌아갔다. 0.1%의 초저금리를 제시한 일본 대신 중국을 선택한 것이 문제의 시발점이라고 지적됐는데, 이는 비난의 화살을 조코위 전 대통령에게 돌리는 것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조코위 역시 입을 열었다. 그는 고속철을 단순히 경제적 관점으로만 평가해서는 안 되며, 깨끗한 공기, 온실가스 감축, 지역 균형 발전 등 사회적 투자의 일환으로 보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는 기업 간 거래 원칙을 고수하며 경제적 효율성을 중시했던 과거의 태도와는 상반된 주장이었다. 프라보워 정부는 책임 공방보다 문제 해결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여러 해결 방안이 정부 인사에 의해 제기되었지만, 뚜렷한 방향성이 드러나고 있지는 않다. 정부는 때로 중국과의 부채 구조조정을 국부펀드에 전적으로 위임하는 자세를 취하기도 했고, 인도네시아 경제의 상환 여력을 강조하며 고속철 채무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임을 부각하기도 했으며, 부채 문제 해결에 정부가 뒷짐지고 서있지 않을 것임을 공언하기도 했다. 이제 여론의 초점은 중국과의 부채 조정으로 옮겨가고 있다. 그 결과가 국민이 납득하기 힘든 방향에서 결정된다면, 정국은 다시 요동치게 될 것이다. 조코위 전 대통령을 포함한 이전 정부 인사를 대상으로 전면적인 부패 조사가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고속철을 둘러싼 최근 논란은 일대일로 참여의 위험 중 하나로 지적되어 온 ‘부채의 덫’(debt trap)에서 인도네시아가 자유롭지 않음을 보여준다. 물론 다른 국가와 비교할 때, 인도네시아의 상황이 그렇게까지 나쁜 것은 아니다. 정부가 일정 정도 부채 상환 능력을 갖추고 있기에 채무 불이행 상태에 빠지거나 고속철 운영권을 넘겨야 할 처지에 놓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현재의 적자 구조가 장기화할 경우 인도네시아 철도공사가 부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개연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런 상황이 전개된다면, 자카르타–반둥 고속철은 정치 논리가 경제 논리를 압도하고 투명성이 담보되지 못할 때 외자에 기반한 대규모 인프라 건설이 어떤 파국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을지 보여줄 전형적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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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의 Indonesia Story] 결혼은 신의 뜻, 이혼은 나의 뜻
인도네시아 농촌에서 연구를 진행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마을 주민의 친족 관계를 알아보는 작업이었다. 도시화의 영향이 크지 않은 곳이었기에 대다수 주민은 친·인척 관계로 얽혀 있었고, 결혼하여 이주한 주민 역시 대부분 인근 지역 출신이었다. 일부다처제를 행하는 무슬림 가족은 없었고 이혼 사례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주민의 결혼생활이 상당히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조사지 주민과 가까워지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장년층 주민의 이혼 경험이었다. 성별과 무관하게 상당수 주민이 이혼을 경험했으며 결혼과 이혼을 반복한 사례도 드물지 않았다. 안정적인 혼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장년층 부부가 청년기에는 훨씬 역동적인 결혼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장년층 주민의 높은 이혼 빈도는 조사한 마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50~196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인도네시아인에게 이혼은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처럼 여겨진 듯했다. 공식 기록 역시 이를 확인해 준다. 당시 15세 이상 성인 1000명당 이혼 건수는 15건 정도로 서양 국가의 3~4건과 비교하여 월등히 높은 수준이었다. 최근과 비교해도 같은 평가가 가능하다. 2024년 세계에서 이혼율이 가장 높은 국가의 이혼 건수는 1000명당 5건 정도이며, OECD 국가 평균은 2건 안팎, 우리는 1.8건에 불과하다. 1950~1960년대 높은 이혼율에 영향을 미친 요인 중 하나는 중매결혼이었다. 부모가 자녀의 결혼 상대를 결정하는 방식이 보편적으로 이용되면서 결혼, 특히 초혼의 불안정성이 높았다. 그러나 이런 설명만으로는 불충분한데, 한국을 비롯해 중매결혼이 주도적이던 지역에서 이혼이 빈번하게 일어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높은 이혼율을 설명해 줄 더욱 중요한 요인은 이혼에 대해 관대한 사회 분위기였다. 서로 맞지 않는 부부가 억지로 결혼생활을 지속하기보다는 이혼 후 마음에 맞는 배우자를 찾는 편이 낫다고 여겨졌다. 첫 결혼과 달리 재혼 상대는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기에 그만큼 결혼의 안정성이 높아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러한 관용적 태도는 여성의 경제활동이 비교적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여성의 가족이 육아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상황과도 연결되었다. 이혼에 대한 개방적 태도는 인도네시아 인구의 절대다수가 무슬림임을 고려하면 의외의 상황으로 비칠 수 있다. 교리상 허용되지만 알라가 가장 혐오하는 행위로 이혼이 거론될 만큼 부정적 평가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이슬람에서는 혼인 관계 유지를 여성의 책무로 규정하는 경향이 강하며, 이는 이혼 절차에서 드러난다. 이슬람법에 따르면 남성은 단순히 그 의사를 부인에게 밝히는 것만으로도 이혼이 성립되지만 여성의 이혼 제기는 여러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이슬람 교리를 고려하면 인도네시아에서 여성의 이혼에 부정적 낙인이 찍히지 않았던 데는 토착 전통의 영향이 컸다. 초혼 후 여성의 배우자 선택권이 인정되고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허용되는 환경으로 인해 힘든 결혼생활을 참아가며 살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태도가 형성될 수 있었다. 1990년대에 조사하면서 이혼 사례를 목격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1970~1980년대를 거치며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이를 촉발한 요인 중 하나는 연애결혼의 확산이었다. 개인이 스스로 배우자를 선택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중매결혼의 불안정성이 일정 부분 완화되었다. 동시에 이혼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에서도 변화가 나타나며 부정적 인식이 강화되었다. 1970~1980년대는 수하르토 대통령의 독재 체제가 심화하던 시기였다. 독재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그는 가부장적 가족 개념을 적극 활용했다. 자신을 국민의 아버지로, 영부인을 어머니로, 국민을 자녀로 규정함으로써 자식이 부모에게 순종하듯 국민 역시 통치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런 구도에서 가족의 해체를 의미하는 이혼은 회피되어야 할 행위였다. 정부는 이혼 억제를 위해 여러 정책을 시행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이혼하려는 공무원에게 상사의 허락을 받도록 한 지침이었다. 이 같은 정책이 수십 년간 지속되면서 이혼에 대한 분위기는 점차 보수적으로 변했다. 이 시기를 거치며 나타났던 이슬람의 영향력 확대 역시 비슷한 효과를 지녔다. 더 많은 무슬림이 종교적 교리를 실천하려고 노력하자 이혼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가부장적 시각이 확산했다. 서로 맞지 않더라도 섣불리 이혼하기보다는 서로에게 맞추어 가며 혼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특히 여성에게 강하게 요구되었다. 가족의 화합을 중시하는 정부 정책과 종교 교리가 연애결혼의 확산과 결합하여 만든 결과는 이혼율의 급격한 감소였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 1000명당 이혼 건수가 1건 이내로 줄어들었고 연간 이혼 건수 역시 10만건을 밑돌았다. 이와 같이 변화한 환경에서 조사했던 나로서는 낮은 이혼율이 당연한 모습이었고 이런 흐름이 지속되리라 전망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이 예상은 2010년대 이후 인도네시아의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1000명당 이혼 건수는 최근 1.6건 내외로 세계적으로 상위권에 속하지 않지만 2000년대 초반과 비교하면 두 배 정도 상승했다. 이혼 건수를 보면 변화의 추세가 더욱 뚜렷하다. 2000년대 초반 10만건을 조금 웃돌던 연간 이혼 건수는 2023년 50만건에 이르렀다. 이혼율이 꾸준히 증가하자 이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혼과 관련된 언론 보도가 이어졌고 정부와 종교계를 중심으로 이혼 증가에 대처할 여러 대책을 모색하였다.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 정부는 청년층과 신혼부부를 대상으로 결혼의 안정성을 높일 워크숍을 개최했다. 이슬람계에서는 이혼을 최종 결정하는 이슬람 법원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혼을 제기한 부부를 더욱 적극적으로 중재하고 이혼 절차를 더욱 엄격하게 적용함으로써 이혼율을 낮춰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응책이 효과를 가져왔는지는 불명확한데, 무엇보다 이혼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적절하게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 이혼에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여성의 이혼 제기 사례가 훨씬 많다는 점이다. 남성보다 여성의 이혼 제기에 훨씬 복잡한 절차가 요구됨을 고려해 보면 이혼에 대한 여성의 태도가 매우 적극적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혼 사유로 가장 많이 지적된 요인은 부부간 차이와 갈등이며, 경제적 문제가 그 뒤를 이었다. 이러한 사유는 인도네시아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학계와 언론에서는 부부간 차이와 갈등이 무엇인지를 여러 각도에서 조망했다. 그중 자주 언급된 측면은 미디어와 소셜미디어의 영향력 확대였다. 각종 매체를 통해 부부 관계의 이상적 모델이 확산하면서 현실과 괴리를 크게 만들고 이혼율 상승을 견인한다는 것이다. 특히 부부 사이의 로맨틱한 사랑과 감정적 유대에 대한 여성의 기대를 남성이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갈등이 유발된다는 설명이 자주 거론되었다. 유명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의 이혼 사례가 널리 유포되면서 결혼의 불안정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해석 역시 제시되었다. 이혼 문제가 자주 논의되자 우리에게 친숙한 상황 역시 회자했다. 그중 하나는 우리의 명절과 비슷한 성격을 지닌 금식월과 연관된다. 금식월 동안 급격히 감소한 이혼 건수가 이 기간이 지난 후 폭증하는 양상을 보인다고 한다. 고향 방문 중 오래된 지인을 만나 결혼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이혼 결행 건수가 증가한다는 것이다. 미디어와 소셜미디어에서는 결혼생활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방안이 제시되었다. 그중 일부는 종교적 색채를 띠어서 이혼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슬람 교리나 부부의 신앙심 강화를 부각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종교 외적인 설명이 압도적 비중을 차지했다. 부부간 소통, 공감과 배려, 솔직함과 정직함, 부모에게서 독립, 공통의 관심사 형성 등과 같은 심리·정서적 요인이 그 중심에 놓여 있다. 이혼 관련 논의를 접하다 보면 인도네시아의 현실이 한국이나 서양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개성과 감성을 중시하고, 전통적 규범이나 공동체의 압력보다 개인의 선택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이혼에 대한 담론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최근의 이혼율 증가를 1950~1960년대로 단순 회귀하는 것으로 바라보기는 쉽지 않다. 겉으로는 유사한 점도 나타나지만 그 이면에는 개인화와 다원화라는 흐름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여성의 목소리이다. 이들의 기대와 욕망, 행복 추구, 불안과 좌절이 이혼율 증가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다. 이는 이슬람의 영향력이 강하게 유지되는 인도네시아 사회에서도 전 지구적 가치의 확산에 따라 여성의 자율성과 자기 결정권이 사회 변화의 주요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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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의 Indonesia Story] 자카르타 거리로 쏟아진 '분노의 계산서'
지난 8월 25일 자카르타 국회의사당 앞에 수천 명의 군중이 모였다. 평화적으로 시작된 집회는 경찰과 충돌하면서 폭력적인 양상을 띠었고, 늦은 밤까지 이어지며 도심 기능을 마비시켰다. 이후 다른 주요 도시로 확대된 시위는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어서 몇몇 사망자가 발생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폭동으로 전환되기까지 했다. 시위를 촉발한 요인은 국회의원에게 지급되는 주거 수당이었다. 8월 중순 매월 5000만 루피아(약 430만원)의 주거 수당이 국회의원에게 제공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일반 노동자의 최저임금 중간값이 350만 루피아(약 30만원)밖에 안 되는 상황에서 이보다 15배나 많은 금액이 주거 보조비로 지급된다는 사실에 대중은 분노했고 이를 시위로 표출했다. 주거 수당 논란은 국회의원의 발언에서 비롯되었다. 의정 활동 수행에 있어 세비가 충분하지 않다는 의견을 어떤 의원이 개진하자 다른 당 소속 의원이 자신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주거 보조비가 최근 추가되어 매월 1억 루피아 이상을 수령하고 있다고 말했다. 4선 의원이라는 경력을 가진 인물이 이같이 언급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자신의 청렴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고, 정치적 인지도를 높이려는 전략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 의도와 무관하게 이 발언은 사회적 관심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특히 그가 자신의 세비를 일급으로 환산해 매일 300만 루피아를 받는다고 말함으로써 국회의원 일당이 일반 노동자 월급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환기시켰다. ‘일당 300만 루피아’ ‘주거 수당 5000만 루피아’ ‘월급 1억 루피아’라는 표현은 곧바로 언론 기사의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국회의원 세비의 과도함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직관적 숫자가 가진 힘으로 인해 이 문제는 곧바로 소셜 미디어의 핵심 이슈로 부상했다. 여론이 들끓기 시작할 때 국회의원들이 침묵하거나 자숙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회의장을 비롯한 일부 의원이 주거 수당의 정당성을 항변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사태가 악화했다. 국회의장은 주거 수당이 국회의원 관사 제도 폐지에 따른 보상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제공되던 관사가 사라졌으니 이에 상응하는 수당 지급이 합리적이라는 논리였다. 나아가 그녀는 관사 관리 비용과 비교할 때 주거 수당이 예산상 더 효율적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주거 수당이 과거 관사 관리 명목으로 지급되던 수당보다 약 20배 높은 수준임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한 국회의원은 5000만 루피아의 정당성을 옹호하려 했다. 의사당 인근 지역에서는 300만~400만 루피아의 임대료로 원룸 정도만을 구할 수 있기에 아파트 임대를 위해서는 이 정도 수당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의사당에서 멀리 떨어진 도심 외곽에서 저렴한 숙소를 구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 다른 의원은 자카르타의 교통 상황을 언급했다, 한두 시간이나 걸리는 출퇴근 시간으로 인해 의정 활동에 심각한 지장이 초래되므로 국회 근처 숙소 확보가 불가피하다고 한 것이다. 이런 해명은 대중의 반감을 높였다. 생계를 위해 교통지옥을 뚫고 자카르타로 출근해야 하고, 협소한 공간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하는 일반인의 사정을 국회의원이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국회의원의 발언은 자신들을 일반 시민과 다른 특별한 집단으로 규정하는 특권 의식의 발현으로 받아들여졌다. 비판의 초점은 곧 세비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애초 1억 루피아 수준이라 알려진 세비가 실제로는 2억 루피아에 달한다는 지적이 제기되었고, 세비를 구성하는 수당의 필요성과 정당성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졌다. 세비 중 흥미로운 항목은 기본급이었다. 그 규모는 420만 루피아(약 36만원)에 불과하며 지난 20여 년간 변동이 없었다. 이는 국회의원이 봉사직 자리임을 강조할 때 활용하는 논거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본급을 훨씬 뛰어넘는 여러 수당이 존재했고, 그중 상당수는 목적이 분명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월 1500만 루피아(약 130만원) 규모의 ‘커뮤니케이션 수당’은 용도가 불확실했다. 국회 관계자는 이를 국회의원이 각계 인사와 소통하는 데 필요한 비용이라고 해명했으나 그리 설득력 있지 않았다. 이 밖에도 ‘명예 수당’ ‘감독 기능 제고 수당’ 등 목적이 모호한 항목이 다수 존재했고 ‘전기료 수당’처럼 필요성이 없는 항목도 있었다. ‘소득세 보전 수당’은 국회의원이 실질적으로 세비에 대한 소득세를 납부하지 않고 있음을 드러냈다. 세부 항목이 공개될수록 비판은 거세졌다. 소셜 미디어 게시물과 유튜브 영상이 유포되었고 여기에 수백에서 수천 건의 댓글이 달리며 비판적 여론을 형성했다. 네티즌들은 각종 수당의 불합리성을 분석하거나 풍자와 빈정거림을 통해 문제를 희화화했다. 이러한 흐름이 가속화되자 시위를 통해 정치권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받았다. 주거 수당 반대 집회는 강력한 조직 기반이나 동원 능력을 갖춘 단체에 의해 주도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민중 혁명’이라는 실체가 불분명한 집단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참여를 독려하면서 구체화되었으며, 조직화 수준이 높은 단체의 참여는 제한적이었다. 소규모 자생 집단이 ‘국회 해산’ ‘수당 철폐’와 같은 해시태그를 활용하여 참여를 촉구하는 방식으로 대중 동원이 이루어졌다. 조직적 기반 없이 시작했음에도 청소년과 청년층을 중심으로 수많은 군중이 집결했다. 시위 이튿날에는 집회 참가자 수가 축소되면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는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며칠 뒤 진압 경찰의 차에 치여 배달 기사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사그라져가던 불씨가 재점화되었다. 대규모 시위가 다른 도시로 확산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관공서와 도심지 건물을 방화하고 약탈하는 폭동으로 전화되기도 했다. 시위가 확대되자 정부는 몇몇 대책을 서둘러 내놓았는데 여기에는 주거 수당 철폐도 포함되었다. 하지만 유화책과 함께 프라보워 대통령이 시위대에 대한 강경 대응을 요구함으로써 공권력을 통한 질서 회복을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조치를 통해 혼란 상황이 신속히 정리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이와 달리 상대적으로 명확해 보이는 측면은 시위를 통한 대중의 불만 표출이 정치 변혁을 밀어붙일 만한 구조적 힘으로 발전하기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이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국회의원 세비가 이번에 처음 폭로된 문제인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국회의원의 고액 세비는 선거철마다 반복적으로 보도되는 소재였다. 세비의 세부 항목 또한 인터넷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공개 정보였다. 따라서 주거 수당과 결부되면서 폭발성 높은 이슈로 전환되었을 뿐이며 고액 세비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사실이 아니었다. 이처럼 이 문제가 대중의 무관심 속에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데에는 인도네시아의 정치 환경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난 20여 년간 제도적 차원에서 민주화가 지속되었음에도 인도네시아 정치는 사실상 집권당 주도로 움직였으며 야당 세력의 견제 기능은 미약했다. 이러한 조건에서 국회의원들이 세비와 같이 자신의 이익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안을 비판적으로 논의하고 개선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정치권 내부의 자정 능력이 미약한 상황에서 잠재적 견제 세력으로 기대할 수 있는 주체는 시민사회이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시민사회는 정치 담론이나 제도 개혁에 실질적인 압력을 행사할 만큼 조직화되어 있지 않다. 이때 대안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세력은 이슬람 조직인데, 특히 이슬람 단체 두 곳은 각기 수천만 명의 지지자를 기반으로 강력한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그럼에도 이들 단체는 정치권과 협력적인 자세를 유지하면서 정치 개혁 문제를 회피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 정치권에 대한 불만을 표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는 즉흥적이고 비조직적으로 진행되는 대중 집회였다. 광범위한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음에도 이런 움직임이 의미 있는 변화를 창출하기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게다가 시위나 폭동이 응축된 분노를 순간적으로 분출하는 일회성 해소의 장으로 기능함으로써 그 종료와 함께 이슈를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는 역효과를 낳게 된다. 5000만 루피아가 일반 대중에게 갖는 의미를 고려하지 못한 채 주거 수당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국회의원의 모습은 정치 엘리트의 특권 의식이 여전히 뿌리 깊게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 반전시킬 만한 시민사회의 역량이 쉽게 성장할 수 없고, 분노의 일회적 표출이 제도적 변혁으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현실은 인도네시아의 정치 변화를 어디에서부터 모색해야 할지 풀기 어려운 숙제를 남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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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의 Indonesia Story] 9000억달러 국부펀드, 성장률 8% 꿈 인도네시아 경제 구할까
지난 7월 16일 인도네시아는 미국과 관세 협상을 마무리 지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협상 결과에 대해 자신이 프라보워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직접 소통해 성사시킨 중요한 합의라고 자평했다. 트럼프와 통화하며 박장대소하는 장면을 인스타그램에 올린 프라보워 역시 매우 유쾌한 대화였다고 밝히며 협상 타결 소식을 전했다. 양국 정상 모두 협상 결과에 만족을 표했지만 이를 전달하는 방식에서는 미묘한 온도 차가 드러났다. 트럼프는 이번 협상이 미국을 위한 최상의 결과이며, 2억8000만명에 달하는 인도네시아 시장에 대한 완전하고 전면적인 접근이 보장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반면 프라보워에게서는 다소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태도가 나타났다. 이러한 차이는 협상 결과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은 지난 4월 인도네시아에 처음 부과한 32% 관세율을 19%로 인하했다. 반면 인도네시아는 미국산 상품에 대해 무관세 수입을 허용했다. 이뿐만 아니라 미국 경제계의 숙원이던 비관세 장벽 다수가 철폐되었고, 인도네시아는 200억 달러에 달하는 미국산 물품 구매를 약속했다. 19% 대 0%라는 뚜렷한 불균형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성공적인 협상이라 주장하는 근거를 의문시하도록 했다. 정부에 대한 비판이 거의 제기되지 않는 정치권에서도 이번 협정에 대한 적절성을 두고 회의론이 제기되었으며, 언론 보도 또한 기업인이 체감하는 측면이 32%에서 19%로 인하한 것보다 0%에서 19%로 인상한 것이라는 점을 부각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미국의 ‘상호관세’ 부과 방침이 발표된 직후부터 빠르게 협상에 착수했고, 관세율 인하를 위한 방안을 선제적으로 내놓았다. 당시 제안되었던 내용에 더해 관세 철폐와 항공기 구매 등 추가 양보안이 최종 협상안에 포함되었으나 인도네시아가 실질적으로 얻은 성과는 관세율 13% 인하에 그쳤다. 프라보워 정부는 인도네시아보다 먼저 협상을 마무리한 베트남의 최종 관세율이 20%라는 점을 들어 위안을 삼았지만 베트남에 부과된 최초 관세율이 46%였기에 인하 폭은 인도네시아보다 훨씬 컸다. 인도네시아에 그리 유리해 보이지 않는 협상안을 프라보워가 서둘러 수용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그가 강조한 측면 중 하나는 노동집약적 산업의 수출 감소 방지였는데, 이 발언에는 경제성장에 대한 절박함이 일정 부분 드러난다. 2024년 10월 프라보워 임기 시작 후 인도네시아 경제는 안정적인 성장세를 이어갔다. 2025년 1분기 성장률은 4.87%로 2024년 연간 성장률 5.03%보다 소폭 낮은 수준이다. 최근 세계은행은 세계 경제 둔화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 경제가 강한 회복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며 2025년부터 2027년까지 연평균 4.8%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인도네시아 경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낙관론과 달리 미국과의 다소 성급해 보이는 관세 협정 체결이 보여주듯 경제성장에 대한 프라보워의 태도에서는 일정한 조급함이 감지된다. 이는 그가 대선 당시부터 줄곧 강조해 온 8% 성장 목표와 연관된다. 프라보워는 이 목표를 5년 내에 달성하리라 공언해 왔는데 이를 위해서는 집권 첫해부터 가시적인 성과가 요구된다. 따라서 경제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외부 요인에 대해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불균형한 대미 협정 체결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으리라 추정할 수 있도록 한다. 8% 성장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성장 엔진이 필요하다. 이를 위한 방안으로 인프라 건설과 자원 개발이 거론되었다. 이 정책은 지난 정권에서도 추진되어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지난 10년간 인도네시아 평균 성장률이 5% 내외에 머물렀음을 고려할 때 이를 뛰어넘는 특단의 조치가 요구된다. 프라보워 정부가 내놓은 또 다른 성장 전략은 무상급식 정책이다. 약 8000만명에 달하는 학생과 임신부를 대상으로 한 이 정책은 저소득층 복지 실현을 넘어 내수 진작과 중소기업 활성화를 목표로 설정했다. 그러나 무상급식이 실제 성장률 제고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며, 대규모 재정 투입이 필요한 만큼 재정 건전성 문제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라보워 정부는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국부펀드 설립을 선택했다. ‘다난타라(Danantara)’로 명명된 이 펀드는 7개 국영기업의 배당금, 국가 효율성 예산, 기존 국부펀드 자산 등을 기반으로 200억 달러 규모로 출범했으며 장기적으로 운용 자산을 9000억 달러(약 1260조원)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국부펀드의 초기 투자 대상으로는 광물 개발 및 정·제련 산업, 인공지능, 정유, 재생에너지, 식품 등 20여 개 분야가 선정되었다. 단순한 투자 기금 역할을 넘어 다난타라는 국영기업의 관리 체계를 개편하고, 외국 자본 유입을 촉진할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기능도 함께 수행하게 된다. 8% 경제성장률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국부펀드를 활용하려는 전략은 기존 정책의 틀을 뛰어넘는 과감한 시도로 평가된다. 계획대로 국부펀드가 운영되면 전략 산업에 대한 투자 확대를 통해 성장 잠재력을 키우고, 국영기업의 생산성과 수익성을 향상해 추가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 이러한 수익이 국부펀드를 통해 다시 생산적 분야에 재투자되는 선순환 구조가 실현된다면 중장기적으로 안정적인 고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밋빛 전망과 달리 그 실현 가능성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가장 먼저 지적되는 점은 다난타라의 자본조달 구조이다. 노르웨이, 중동 국가, 중국 등 국부펀드가 원자재 수출 이익이나 외환보유액 초과분 등 안정적인 자산을 기반으로 한 데 반해 다난타라의 주요 재원은 국영기업의 자산과 그 배당금이다. 기존에 이 배당금은 정부 예산에 편입되어 사용되었으며, 2024년 기준으로 전체 예산에서 약 3%를 차지했다. 따라서 이 재원을 국부펀드로 전환하면 만성적 적자에 시달리는 정부 재정에 상당한 부담이 될 수 있다. 또한 국영기업의 배당금만으로는 대규모 투자를 감당하기 어려운 만큼 정부는 외자 유치나 자산 유동화를 통해 부족분을 조달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자산 유동화가 사실상 은행 대출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방식이 국부펀드의 안정성과 지속 가능성에 부합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다음으로 문제시되는 측면은 국부펀드의 지배구조이다. 펀드 운용의 최고 정점에는 대통령이 있으며, 장관급 관료들이 이사회를 구성하고, 실질적인 자산 운용은 대통령이 임명한 민간인에게 맡겨진다. 이러한 체계는 의사 결정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훼손할 수 있으며,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펀드 운용이 좌우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이러한 부정적 시각으로 인해 다난타라가 공식 출범한 직후 펀드에 포함된 국영기업의 주가가 급락하면서 자카르타 주식시장이 7% 이상 하락한 바 있다. 최근 국부펀드의 투자 대상으로 국영 항공사 ‘가루다 인도네시아’가 선정된 점 역시 이러한 우려를 증폭시켰다. 이 항공사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법정 관리에 들어갔으며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려 왔다. 정부는 이번 투자의 목표가 보유 항공기 확대를 통한 경쟁력 제고라고 밝혔지만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 항공기 구매가 주요 협상 카드로 활용된 상황을 고려하면 정치적 이해가 이번 투자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다난타라가 향후 인도네시아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예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이웃 국가인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국부펀드 사례는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싱가포르 ‘테마섹(Temasek)’은 1974년 국영기업 지분을 기반으로 설립된 후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국부펀드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지난 10년간 테마섹은 연평균 6% 수익률을 기록했으며, 운용 자산 규모도 약 2.5배 증가해 400억 달러에 달한다. 수익률 자체가 극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테마섹은 높은 투명성, 지속 가능성, 운영 효율성 등으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 실제로 글로벌 연기금 및 국부펀드 분석기관인 ‘글로벌 SWF’의 2024년 연례 평가에서 테마섹은 뉴질랜드, 아일랜드 국부펀드와 함께 최우수 펀드로 선정되었다. 말레이시아는 정반대 사례를 보여준다. 2009년 집권한 나집 라작 총리는 경제 개발 가속화를 명분으로 130억 달러 규모의 국부펀드를 출범시켰다. 총리가 펀드의 최고 관리자로 나서면서 투명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으나 한동안 외자 유입과 투자가 이어졌다. 그러나 2015년 지급보증 의무 불이행을 계기로 자금 유용 의혹이 불거졌다. 2018년 정권 교체 후 나집 총리 자택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명품 가방 수백 개와 보석류 수천 점이 발견되어 큰 충격을 안겼다. 조사 결과 유용된 자금 규모는 무려 45억 달러에 달했으며 국부펀드는 100억 달러 이상 손실을 기록한 끝에 파산하고 말았다. 다난타라가 테마섹처럼 안정적인 성장의 발판이 될지, 아니면 말레이시아 사례처럼 부패의 도구로 전락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인도네시아 정치에 만연한 부정부패, 프라보워 정권을 견제할 정치 세력의 부재, 그리고 국부펀드 운영에 대한 대통령의 절대적 권한 등은 우려의 시선을 쉽게 거둘 수 없도록 한다. 국부펀드 운영 규정에는 선의로 행동했다면 손실에 대한 법적 책임을 경영진에게 묻지 않을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면책조항이 도전적이고 전략적인 투자를 가능케 할 제도적 안전장치로 작동할지, 개인의 이익 추구를 정당화할 책임 회피 수단으로 악용될지는 향후 8% 성장 목표의 실현 가능성을 좌우할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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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의 Indonesia Story] 크레텍 불피운 K-커머스
흡연과 관련하여 인도네시아는 종종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국가로 지목된다. 15세 이상 남성 중 약 70%, 대략 7000만명이 흡연자라는 자료를 접하면 그 심각성에 쉽게 공감하게 된다. 우리 언론을 통해 간간이 보도되는 초등학생이나 유아의 흡연 기사는 인도네시아 사회가 흡연 문제에 대해 전근대적이고 무책임한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세계 최고의 흡연 천국이라는 명성에 대해 인도네시아의 흡연자는 다소 상이한 견해를 제시할 것이다. 관련 통계에 따르면 성인 흡연율이 약 28%이고 남성 흡연율이 50%를 약간 웃도는 수준으로 세계 최상위권이라 보기는 어렵다. 일부 지역에서 청소년이나 아동의 흡연에 대해 관대한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일반적인 관행은 아니다. 또한 청소년 대상 담배 판매를 금지하는 법규가 강화되면서 10대 흡연율은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흡연과 관련된 국가 이미지가 일정 정도 왜곡되었다는 주장과 함께 인도네시아 흡연자라면 담배를 둘러싼 긍정적인 면을 강조할 듯하다. 담배가 인도네시아 전통문화의 일부이자 국가적 유산이며 국가 경제에도 이바지한다는 것이다. 담배를 전통 유산으로 바라보는 주장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 담배 원산지가 아메리카 대륙이며, 유럽 열강에 의해 인도네시아로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인도네시아어로 담배를 뜻하는 ‘텀바카우(tembakau)'는 ‘토바코(tobacco)'에서 유래했다. 그럼에도 인도네시아 담배의 특성을 고려하면 전통이라는 표현이 설득력을 지닐 수 있는 지점이 존재한다.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널리 소비되는 담배는 우리가 아는 보통 담배가 아니라 담뱃잎에 20~40% 정향을 혼합해 만든 제품이다. ‘크레텍(kretek)'이라 불리는 이 담배는 인도네시아에서 개발된 고유의 것이며, 소비 또한 인도네시아에 한정된다. 크레텍 담배의 기원은 18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만성적인 가슴 통증에 시달리던 한 남성이 민간요법에 따라 정향 기름을 가슴에 발라 증상을 완화하려 했다. 정향의 효과를 더욱 직접적으로 느끼고자 그는 담뱃잎과 정향을 혼합해 옥수수 껍질에 말아 피우기 시작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방식을 통해 그는 천식과 가슴 통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기적 같은 이야기는 빠르게 입소문을 탔고, 짧은 시간 안에 정향 담배를 인도네시아 전역으로 확산시켰다. 크레텍이라는 명칭은 담배가 탈 때 나는 특유의 소리를 표현한 의성어로, 이후 정향이 섞인 담배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크레텍이 널리 애용되자 그것은 곧 일상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었다. 한 문헌에 따르면 인도네시아에서 친구를 사귀는 가장 좋은 방법은 크레텍을 권하는 것이라 한다. 이는 크레텍의 흡연 방식과 관련이 있다. 일반 담배는 보통 5분 내외로 피울 수 있지만 크레텍 한 개비를 태우는 데 15~20분가량 소요된다. 게다가 시가와 마찬가지로 피우던 담배를 잠시 놔두면 그 불씨가 꺼진다. 꺼진 담배를 다시 태우는 게 일반적이기에 크레텍 한 개비를 피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크레텍을 함께 피우는 행위는 단순한 흡연을 넘어서 수십 분간 시간을 공유하며 사회적 관계를 맺을 기회를 제공한다. 크레텍은 전통 의례에도 스며들어 조상이나 지역 신에게 바치는 제물의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았다. 초월적 존재에게 기도하며 크레텍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일상의 일부가 되었고, 크레텍 한 보루는 종교의식에 참여할 때 가져가는 선물 중 하나가 되었다. 크레텍을 태울 때 퍼지는 짙은 정향의 향은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향기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러한 이유로 외국을 방문한 후 귀국한 인도네시아인이 크레텍 냄새를 맡고서야 비로소 고향에 돌아왔음을 실감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크레텍의 친숙함 덕분인지 넷플릭스가 지원한 인도네시아 최초의 드라마 제목은 ‘크레텍 소녀’였다. 2024년 서울드라마어워즈 미니시리즈 부문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이 드라마는 50여 년에 걸친 러브스토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사랑했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연인, 그들 사이의 오해와 갈등, 이들이 각자 결혼하여 낳은 자녀들의 만남, 그리고 죽은 연인과 살아남은 연인의 재회 등 모든 핵심 서사는 크레텍을 매개로 얽혀 있다. 크레텍은 인도네시아 경제에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전체 흡연 인구는 감소 추세지만 담뱃세는 꾸준히 증가하여 2024년 기준 그 규모가 약 20조원에 달하며 전체 세입에서 10% 정도를 차지했다. 담배 산업 종사자는 6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기계화된 생산뿐 아니라 손으로 담배를 직접 말아 만드는 노동집약적 방식이 활용되어서 크레텍 제조는 많은 고용 기회를 창출하고 있다. 경제사적 관점에서 볼 때 담배 산업은 인도네시아 경제 발전 과정과 특성을 보여준다. 크레텍이 처음 도입된 시기 토착 자바인이 제조를 주도했으나 1930년대를 전후하여 중국계 이주민과의 경쟁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후 크레텍 산업은 중국계 이주민을 중심으로 성장했고, 토착민은 지역 기반 소규모 업체로 명맥을 이어갔다. 이러한 양상은 인도네시아 경제 전반에서 나타나는 패턴과 유사하다. 1960~1970년대를 거치며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이 운영하는 네 개 기업이 담배 업계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했다. 이 구도는 현재까지 이어지지만 2000년대 들어 중요한 변화가 발생했다. 이들 네 업체 중 두 곳이 다국적 담배 회사에 인수된 것이다. 다국적 기업은 인도네시아 시장에서 일반 담배를 판매해 왔다. 크레텍과 대비되어 ‘흰색 담배’라 불리는 이 제품은 크레텍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이들은 점유율 확대를 위해 크레텍 제조업체를 인수하는 전략을 택했다. 말보로로 유명한 필립 모리스 인터내셔널은 현지 업체 인수 후 시장점유율을 30%까지 끌어올리며 인도네시아 최대 담배회사로 부상했다. 던힐 브랜드를 보유한 브리티시 아메리칸 타바코는 인수 후 상당 기간 적자를 기록했으나 현재까지도 두 자릿수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안정적 매출과 충성도 높은 소비자층을 보유했던 토착 회사가 다국적 기업의 인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회사를 운영하던 창업자의 후손에게 있어 각각 50억 달러와 6억 달러에 이르는 인수 대금은 매력적인 제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담배 산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는 점도 일부 영향을 미쳤다. 2000년대 들어 정부는 흡연 규제를 강화하기 시작했고, 담뱃세 인상 정책은 담배 산업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상황은 매각을 결정한 이들의 선택이 적절한 것이었는지 의문을 갖도록 한다. 담뱃세 인상과 규제 정책에도 불구하고 담배 판매량은 소폭이지만 꾸준히 증가했고, 담배 산업은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했다. 이는 다국적 기업에 인수되지 않은 두 개 토착 기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2024년 ‘포천(Fortune)'이 발표한 매출액 기준 인도네시아 10대 기업 가운데 6곳은 국영기업, 4곳은 민간기업이었는데 민간기업 중 두 곳이 크레텍 제조사였다. 담배는 여전히 높은 수익을 보장하는 소비재인 셈이다. 다국적 기업의 사례에서 보듯 외국 회사가 인도네시아 담배 시장에 진입하는 하나의 방법은 토착 기업 인수이다. 한국 KT&G 역시 이런 전략을 택해서 2011년 토착 크레텍 회사를 1억3000만 달러에 인수하며 본격적으로 시장에 진입했다. 인수 초기 이 선택이 성공적인 전략이었는지 불분명했다. 인수 후 5년 동안 회사 매출과 수익이 뚜렷하게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인수의 타당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2010년대 후반까지도 관련 논란이 한국에서 이어졌다. 최적의 회사를 적절한 가격에 인수했는지는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인도네시아 시장 진출 이후 KT&G 행보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점은 현지화를 위한 적극적인 도전이었다. 다른 다국적 기업이 인수 업체 제품을 그대로 유지한 데 반해 KT&G는 신제품을 과감하게 개발하여 출시했다. 정향을 혼합해 크레텍이 만들어졌다는 점에 착안하여 KT&G는 담배 필터에 다양한 향의 캡슐을 삽입하거나 이색적인 맛과 향을 첨가한 새로운 제품을 선보였다. 이러한 시도가 계속됨에 따라 그 수가 얼마인지 쉽게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제품이 잇따라 시장에 나왔다. 애플민트 맛, 캐러멜민트 맛, 베리민트 맛, 오렌지민트 맛, 망고민트 맛, 잠부(jambu) 맛, 포도 맛, 꿀 맛, 망고스틴 맛, 홍차 맛, 커피 맛 등 다채로운 크레텍 제품이 만들어졌다. KT&G의 현지화 노력은 의미 있는 성과로 이어졌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2023년 기준 KT&G는 인도네시아 담배 시장에서 4.4% 점유율을 기록했으며, 10여 년 사이 판매량은 150배 가까이 증가했다. KT&G 제품을 인도네시아 내 거의 모든 편의점에서 접할 수 있고, 일부 제품을 한국 가격에 근접한 높은 가격으로 판매한다는 사실, 그리고 대규모 투자를 통해 생산량을 두 배로 늘릴 공장을 현재 건설하고 있다는 사실 등은 KT&G의 성공적인 시장 안착을 예시한다. 담배는 흔히 ‘죄악 산업’으로 분류되어 긍정적 논의 대상이 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크레텍이 주도하는 인도네시아 담배 시장에서 KT&G가 보여준 성공적인 사업 운영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KT&G의 현지화 전략이 어떻게 전개되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수반되었는지에 대한 심층적 분석은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 전략 수립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를 추가해 줄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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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의 Indonesia Story] 印尼 프라보워의 油~턴 외교 …관세정책 예고에 미국산 석유로 핸들 돌려 '선제 대응'
싱가포르 ISEAS–Yusof Ishak 연구소에서는 매년 ‘동남아시아의 상황(The State of Southeast Asia)'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한다. 2019년 처음 출간된 이 보고서는 대학과 싱크탱크 소속 학자, 기업인, 비정부기구 활동가, 언론인, 정부 관료, 국제기구 관계자 등 동남아 각국의 여론 주도층을 대상으로 설문을 시행하고 그 결과를 분석한다. 이 보고서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주제 중 하나는 외교 문제로, 동남아 여론 주도층이 외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이를 위해 동남아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 세력이 누구인지 규정하게 되는데, 지난 7차례 설문 조사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가 나타났다. 동남아가 고려해야 할 대상에 미국, 중국, 일본, EU, 영국, 인도, 호주 등과 함께 한국이 포함되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한국을 응답 대상으로 선택한 비율은 높지 않다. 예를 들어 미국과 중국 간 대립 국면에서 신뢰할 수 있는 제3의 전략적 파트너를 묻는 질문에 대해 한국을 지목한 비율은 2025년 4.7%에 그쳤다. 이는 EU에 대한 응답률 36.3%, 일본에 대한 응답률 29.6%보다 현저히 낮은 수치이다. 그러나 이러한 낮은 응답률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동남아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외부 세력 중 하나로 선정된 사실은 우리의 높아진 국제적 위상을 반영한다. 이는 문재인 정부의 신남방정책이 가져온 성과로 평가될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은 동남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외부 세력으로 간주된다. 보고서에서는 이 두 나라 중 어느 쪽을 전략적 파트너로 삼아야 할지를 묻고 있는데, 2025년 설문 결과에서는 미국과 중국이 각각 52.3%, 47.7%를 기록해 의견이 대략 반반으로 나뉘었다. 그러나 국가별 응답 결과를 보면 뚜렷한 차이가 나타났다. 필리핀과 베트남에서는 미국을 선택한 비율이 70%를 넘을 정도로 높았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중국 선택 비율이 70%를 넘었고, 인도네시아에서도 응답자의 72.2%가 중국을 지목했다. 중국에 대한 선호도가 인도네시아에서 항상 높게 나타난 것은 아니다. 양자택일식 질문에서 중국을 선택한 비율은 2023년 이후 급증했다. 2021년에는 응답자의 64.3%가 미국을 선택했고, 2022년에도 55.7%로 미국이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2023년에 미국 46.3%, 중국 53.7%로 그 비율이 역전되었고 2024년과 2025년에는 격차가 더 벌어졌다. 이러한 변화의 요인 중 하나는 미국의 친이스라엘적 중동 정책이다. 인도네시아에 강하게 자리 잡은 친팔레스타인 정서와 충돌하면서 미국의 행보는 전략적 파트너 위상을 약화시켰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중국의 적극적인 외교 행보와 양국 간 긴밀해지는 경제 관계가 우호적 인식 강화에 일조했다. 이에 비해 미국은 외교적으로 인도네시아를 우선순위에 두고 있지 않으며, 양국 간 경제 관계 역시 최근 뚜렷한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중국에 대한 우호적 인식이 강화되는 흐름 속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4월 초 인도네시아산 제품에 대해 32% 추가 관세를 부과했다. 이는 동남아 국가 중 중간 수준에 해당하는 수준이며 캄보디아·라오스·베트남·미얀마는 40%대, 필리핀·싱가포르·동티모르는 10%대 관세율을 적용받았다. 태국은 36%, 말레이시아는 24%였다. 관세 정책이 발표된 초기에 인도네시아에서는 다양한 입장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다. 일부는 트럼프의 일방적 정책 추진을 비판하면서 관세 산정 방식과 부과 근거의 불명확함을 지적했다. 특히 미국 무역대표부(USTR)의 국가별 무역장벽보고서에 언급된 인도네시아의 불공정 무역 관행이 도마에 올랐다. 보고서에서 거론한 자카르타 한 쇼핑 구역의 지식재산권 침해 사례에 대응하여 실제로는 해적판 소프트웨어나 불법 전자제품을 더 이상 찾기 어렵다는 르포 기사가 이어졌다. 이슬람 단체는 할랄 인증제를 비관세 무역장벽으로 분류한 데 대해 강력히 반발하며 인도네시아가 종교 정책을 시행할 주권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관세 조치를 세계무역기구에 제소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도 나왔으며, 대미 교역 비중이 인도네시아 GDP의 2%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근거로 정부의 강경 대응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등장했다. 동남아 국가들과 공동 대응해 미국의 관세 정책에 적극적으로 맞서야 한다는 견해 역시 제기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보다 신중하고 타협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여론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각은 추가 관세가 인도네시아 경제에 미칠 부정적 영향에 근거를 두었다. 전자제품, 신발, 섬유 등 대미 수출의 주요 품목이 대부분 노동집약적 산업이라는 점에서 수출 감소가 곧바로 고용 축소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특히 지난 2~3년간 섬유업계에서 대규모 해고가 이어진 상황에서 수출 위축은 심각한 사회경제적 타격을 초래할 것으로 우려되었다. 올해 1분기 경제성장률이 목표치를 밑도는 4.8%에 머물렀고, 루피아화 가치 급락으로 인해 자본 유출 등 거시경제적 불안이 야기될 수 있다는 점 역시 타협론에 힘을 실어주었다. 유화적 입장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대미 무역에서 꾸준히 이어진 흑자 기조를 논거로 들기도 했다. 2024년 기준 미국은 인도네시아 전체 수출의 9.7%를 차지했는데 이는 대중 수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치였다. 그러나 같은 해 인도네시아의 무역수지 흑자 310억 달러 중 절반가량이 대미 교역에서 발생했으며, 대중국 교역에서는 오히려 100억 달러의 적자가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은 2000년대 이후 지속되어서 인도네시아는 대중 무역에서 대부분 적자를 기록한 반면 대미 무역에서는 단 한 차례도 적자를 기록하지 않았다. 이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무역 불균형을 시정하려는 미국의 입장을 일정 부분 이해할 수 있다는 견해가 대두했다. 추가 관세에 대한 수용적이고 타협적인 태도는 인도네시아 정부의 대응 과정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프라보워 대통령은 트럼프가 얼마의 관세율을 부과하든지 이를 존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취임 후 첫 해외 순방지로 중국을 택하고 올해 초 브릭스(BRICS)에 가입하는 등 친중 행보를 이어가던 그가 미국의 추가 관세를 커다란 비판 없이 수용한 모습은 의외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그 배경이 무엇이든 간에 프라보워의 유화적 자세는 인도네시아의 대응 방향을 보여주는 신호였다. 4월 중순 경제조정부 장관과 재무부 장관을 포함한 정부 대표단이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미국 재무부 장관, 상무부 장관, 무역대표부 대표 등과 협상에 나섰다. 이들은 미국의 주요 경제단체 및 기업인들과도 면담을 진행했다. 이후 협상 결과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경제조정부 장관은 인도네시아가 제안한 대책에 대해 미국 측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밝혔다. 그는 무역 불균형 해소 방안으로 미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 인하, 비관세 장벽 완화 등을 포함한 여러 방안을 전달했으며 20억 달러 규모의 인도네시아 기업의 미국 직접 투자 계획도 제시했다고 언급했다. 양국 간 협상 결과는 비공개 조건에 따라 아직 공식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협상 이후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협상 카드로 활용했을 방안을 국내에서 선제적으로 공론화했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는 무역 불균형 해소를 위한 직접적인 조치였다. 정부는 석유와 가스의 수입처를 미국으로 전환해 대미 무역수지 흑자 규모를 대폭 축소하겠다고 발표했다. 최근 수년간 인도네시아는 석유 수입의 절반가량을 싱가포르에서, 나머지를 말레이시아·중국·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조달해 왔다. 정부는 이러한 수입 물량의 상당 부분을 미국산으로 전환해 대미 수입을 190억 달러 증가시키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이는 기존의 대미 무역흑자를 상쇄하고도 남을 규모였다. 곧이어 국영 석유공사가 미국산 석유 수입 확대를 위한 대형 선박 도입과 항만 시설 개선 계획을 발표함으로써 수입국 전환이 단순한 구상에 그치지 않고 즉각 현실화할 수 있는 방안임을 뒷받침했다. 두 번째는 미국의 주요 수출품인 휴대전화, 노트북 등 전자제품과 철강·광산업 제품, 의료기기 등에 대한 관세를 선제적으로 인하하는 조치였다. 전자제품은 관세율이 기존 2.5%에서 0.5%로 조정되었다. 세 번째는 ‘국산 부품 사용 요건’ 완화였다. 이는 수입 제품에 대해 인도네시아 현지 기자재나 서비스를 일정 비율 이상 사용하도록 의무화한 제도로, 미국 무역대표부가 오랫동안 비관세 장벽으로 지적한 문제였다. 실제로 인도네시아 정부는 이 규정을 근거로 2024년 말 애플의 신제품 출시를 저지한 바 있다.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하던 이 조항을 조정하여 정부는 미국산 제품의 국산 부품 사용 기준을 기존 40%에서 25%로 낮추었고, 일부 품목에 대해서는 상황에 따라 더 낮은 비율을 적용하리라는 전향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대미 협상이 여전히 진행 중인 상황에서 인도네시아 정부가 협상안을 먼저 구체화하여 공개한 것은 이례적이다. 통상적인 협상 관례에서 벗어난 이러한 선제적 행보는 협상안이 단순한 립서비스 수준이 아닌 즉각적으로 실행 가능한 방안임을 강조하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추가 관세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프라보워는 그에게 자주 따라붙던 국수적 민족주의자라는 이미지와는 다른 유연함을 갖춘 실용주의자 면모를 드러냈다. 이러한 유화적 행보가 어떤 결과로 이어지고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는 향후 미·중 외교에서 그가 어떤 균형점을 찾으려 할지를 가늠할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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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의 Indonesia Story] 찬조금 없인 못 버틴다…인도네시아 진출업체의 숨은 비용
찬조금 관행과 기업 운영의 어려움 이슬람권 국가에서는 보통 금식월이 끝난 후 가장 큰 명절이 시작된다. 무슬림 인구가 다수인 인도네시아에서 금식월이 끝난 첫날은 ‘르바란’(Lebaran)이라 불리며, 약 일주일간의 연휴가 이어진다. 많은 사람이 이 기간 동안 고향을 찾기 때문에, 새벽에 출발해 다음날이 돼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언론 보도를 가득 채운다. 르바란 휴일에는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진다. 새 옷을 차려입고 부모님께 명절 인사를 드리며, 선물을 주고받고, 명절 음식을 나누고, 조상의 묘소를 찾거나 관광지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이 가운데 특히 농촌 지역에서 자주 행해지는 활동은 이웃과 친지를 방문해 인사를 나누는 일이다. 내가 조사했던 농촌 마을에서 젊은이들은 단체로 이웃집을 방문했다. 하루에도 여러 집을 들르다 보니, 이들과 함께 다니다 보면 열 잔이 넘는 커피나 차를 마셔야 했다. 게다가 대다수 가정에서 비슷한 음식을 대접했기에 늦은 오후가 되면 과자 한 조각조차 부담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쉽지 않은 일도 있었지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처럼 르바란은 풍요와 여유를 누리는 시기라 여겨졌다. 풍성한 명절을 보내기 위해 각 가정에서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지출을 해야 한다. 이를 감당하려면 더 많은 수입이 필요한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착한 전통이 바로 명절 보너스이다. 공식 부문이든 비공식 부문이든, 정규직이든 임시직이든 임금을 받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르바란 보너스를 기대한다. 따라서 보너스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사업장은 악덕 업체로 낙인 찍혀 이후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명절 보너스는 법적으로도 인정된다. 노동부 규정에 따르면, 고용주는 1년 이상 근무한 노동자에게 한 달치 기본급에 고정 수당을 더한 금액을 명절 1주일 전까지 지급해야 한다. 근무 기간이 짧거나 고정적이지 않을 때 그에 비례해 그 규모가 결정되지만, 핵심은 고용주가 보너스 지급에 인색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번 르바란을 앞두고 프라보워 대통령이 직접 나서 승차공유 서비스 종사자를 챙기는 모습이 연출되었다. 이들이 법적으로 노동자는 아니지만, 명절을 함께 누려야 할 대상임을 강조한 프라보워는 플랫폼 기업에 보너스 지급을 요청했다. 곧이어 이를 뒷받침할 훈령이 발표되었고, 여러 기업이 보너스 지급을 확약했다. 명절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르바란 보너스는 큰 무리 없는 관행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에는 이와 유사한 논리를 갖지만, 다른 성격을 가진 관행도 존재한다. 명절을 맞아 개인이 아닌 집단이 금품을 요구하는 행위가 그것인데, 보너스보다는 ‘찬조금’이라는 표현이 이를 지시하기에 더 적절해 보인다. 찬조금이 보너스와 유사한 논리를 지닌 이유는 명절 기간이나 직후에 많은 집단이 르바란 행사를 개최하기 때문이다. 이를 준비하기 위한 비용을 이들은 찬조금을 통해 충당하려 한다. 찬조금을 요구하는 집단에는 종교, 봉사, 직능, 스포츠, 취미 등 거의 모든 조직이 포함되며, 통·반, 리, 면과 같은 하위 행정기관 역시 이에 해당한다. 찬조금을 요청받는 대상은 전통적으로 지역 유지나 정치 지도자, 단체의 유력 인사였으나, 최근에는 지역 내 사업체까지 그 범위가 확장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지역에 기반을 둔 사업체라면, 사업주가 보통 지역 유지에 속하기에 찬조금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반면, 외부 자본이나 외지인이 운영하는 경우, 찬조금의 규모나 방식을 두고 잡음이 발생하기도 한다. 올해에도 이와 관련된 논란이 일어났다. 강압적인 찬조금 요구에 난색을 표한 사업체의 이야기가 소셜 미디어를 통해 확산했고, 곧이어 언론이 이를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명절 찬조금 문제가 공론화되면, 찬조금을 요구한 집단에 비난이 쏟아지고, 정부가 단호한 대응을 약속하는 식으로 상황이 전개된다. 그러나 올해에는 이와 다른 모습이 추가되었다. 종교부 차관이 민간의 찬조금 요구를 명절 문화의 일부라 규정하면서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빠르게 확산하면서 비판 여론이 일자, 종교부 차관은 자신의 발언을 철회하며 진화에 나섰다. 이러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그가 처음 제기한 입장은 찬조금에 대한 관습적 시각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집단 명의로 이루어지는 찬조금 요구는 인도네시아에서 낯설지 않은 관행이다. 마을 길 보수, 모스크 시설 개선, 지역 행사 지원, 교육 기관 후원 등 다양한 명목으로 누군가가 집에 찾아와 찬조금을 요청할 수 있다. 그 취지에 공감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대다수 현지인은 이러한 요구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를 통해서만 자신이 그 집단의 일원임을 확인받게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만약 이를 거절하면 공동체적 책임을 외면한 사람으로 간주되며, 그 같은 상황이 반복되면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람으로 낙인 찍혀 사회적으로 고립될 수 있다. 이처럼 찬조금 관행은 집단이 가진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다른 사회에서도 개인이 할 수 없는 일을 집단이 요구하는 경우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 집단의 힘은 훨씬 강력하게 작동하며, 이를 행사하는 집단 역시 다양하다. 최근에는 이러한 집단을 가리키기 위해 ‘주민 조직’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주민’이라는 용어의 모호함이 지시하듯, 이 범주에는 그 규모나 성격에 상관없이 복수의 개인으로 구성된 집단 모두가 포함될 수 있다. 집단의 힘이 발휘되는 전형적인 상황은 지역 주민이 행하는 집단적 제재이다. 도둑질이나 불륜과 같은 행위가 발각되거나 외부인과의 충돌이나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할 때, 마을 주민들이 범죄자나 외부인에게 물리력을 행사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이러한 집단행동은 관습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대부분 법적 처벌로 이어지지 않는다. 집단의 힘은 최근 들어 선거 상황에도 나타났다. 주민 조직의 대표가 특정 후보와 접촉해 찬조금을 요구하는 사례가 일상화된 것이다. 개인 유권자를 대상으로 한 금품 공여는 법적으로 문제시되지만, 집단을 대상으로 금품과 편의를 제공하거나 이를 약속하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용인된다. 르바란 찬조금 역시 이러한 집단적 힘에 기반한다. 올해 보도된 사건을 보면, 자카르타 인근 지역의 주민 조직이 지역 내 사업체에 찬조금을 요구했다. 이들은 사업체를 오가는 화물차 통행으로 피해를 보았지만 이를 감수해 왔다고 주장하며,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명절 보너스를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를 사업체가 받아들이지 않은 데에는 여러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어떻든 정부 기관의 약속처럼 보너스를 요구한 주민 조직이 처벌받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반면, 이 사업체가 향후 지속적 압박에 시달릴 가능성은 매우 크다. 소음, 먼지, 보행자 위협 등을 둘러싼 민원이 계속 제기될 것이며, 경찰 신고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집단이 가진 힘, 그리고 그 자의적 행사 방식을 고려할 때,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가 절대 쉽지 않은 일임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사업체가 한국 기업이라면, 그 어려움은 배가될 것이다. 그럼에도 주민 조직과의 우호적 관계는 반드시 유지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사업 운영에 심각한 차질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장 앞 도로가 개통되었음에도 이를 이용하지 못한 채 먼 길을 우회해야 하는 고초를 우리 기업이 겪은 적이 있었다. 주민 조직이 도로를 막고 통행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기업에서 일해 본 경험이 없는 내가 집단의 힘에 대처할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원론적인 차원에서 강조할 점은 다양한 집단이 찬조금을 요구할 수 있고, 그것이 관습적으로 용인됨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식의 요구가 우리 기업만을 향한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업체가 겪는 일반적인 현실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현지 기업 역시 같은 어려움에 처해 있음을 인지하게 되면, 외국 기업이기에 차별 대우를 받고 있다는 식의 피해의식을 완화할 수 있다. 다음으로 강조할 점은 집단의 요구 역시 협상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집단의 요구를 무조건 거절하거나 수용하기보다는 그들의 주장을 주의 깊게 듣고 기업의 입장을 충분히 설명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이 축적될 때, 장기적으로 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균형점을 도출할 수 있게 된다. 말하기는 쉽지만, 이를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집단의 요구가 한두 번에 그치지 않고 계속되며, 그 내용 역시 매번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대화를 통해 타협점을 모색하려는 노력이 성공적인 현지화를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점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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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의 Indonesia Story] 印尼의 '뇌물이 지배하는 사회'
불가사의한 '바다 울타리' 인도네시아를 오랫동안 연구해 왔지만 현지 뉴스를 접하다 보면 놀라운 내용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신임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 발표를 불과 세 시간 앞두고 신태용 감독에게 경질 사실을 통보했다는 뉴스는 황당함을 느끼게 한다. 우리의 설과 같은 명절에 해당하는 금식월이 끝난 후 이루어지는 대규모 귀향을 앞두고 양방향 고속도로를 일방통행으로 전환하겠다는 경찰청의 발표는 ‘신박'하다. 25만명에 달하는 신규 공무원 임용일을 갑작스레 반년 이상 미루면서 그 이유로 신정부 출범 이전에 임용일이 정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 외부인의 눈에 특이하게 비친다고 해서 현지인에게도 그러한 것은 아니다. 이전의 사례와 다소 차이를 보일 뿐이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도네시아 사람에게도 낯설고 황당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올해 초 여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은 사건이 그 예이다. 기존의 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인해 이 사건을 설명하면서 ‘기묘한’이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었다. 이 불가사의한 사건은 올해 초 자카르타와 인접한 탕그랑(Tangerang)에서 벌어졌다. 이 지역 해안가에서 수백 m 떨어진 바다에 대나무를 엮어 만든 말뚝 형태의 구조물이 세워진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일부 말뚝 위에는 나무판이 깔려 있어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있기까지 했다. 이후 ‘바다 울타리’로 불리게 된 이 구조물은 길이가 무려 30㎞에 달할 정도로 거대했지만 누가 어떤 목적으로 설치했는지 불분명했다. 장기간에 걸쳐 울타리가 건설되었고 누구나 쉽게 식별할 수 있었지만 그 존재가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기묘함을 배가했다. 바다 울타리의 존재가 공개되고 미디어의 관심이 집중되자 그 정체가 조금씩 밝혀지기 시작했다. 2024년 중반 작업이 시작된 후 그 규모가 꾸준히 확장했으며, 인근 해안가 주민이 건설 작업을 맡아 수행했다. 그들에게 임금을 지급하고 건설비를 제공한 인물은 지역의 면장이었다. 면장을 포함한 관계자들은 이 구조물이 해안 침식을 막기 위한 것이며 설치 비용은 자발적 모금으로 충당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약 150억 루피아(약 13억원)에 달하는 건설비를 주민이 모았다는 주장이나 대나무 울타리로 침식을 막으려 했다는 설명 모두 설득력이 떨어졌다. 이후 해양수산부와 경찰의 조사, 그리고 언론 보도를 통해 사건의 실체가 드러났다.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해안에서 울타리가 설치된 바다까지 공간을 대상으로 건축권이 발급되었다는 점이다. 국유지인 바다에 건축권을 허가한 것은 명백한 불법이었다. 해당 허가를 발급한 주체는 면사무소였는데, 면장이 허위로 서류를 발급했음이 밝혀졌다. 또한 건축권을 받은 대상에는 인도네시아 최대의 부동산 개발업체 중 하나인 아궁 스다유(Agung Sedayu) 그룹의 출자 회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바다에 건축권이 허가된 배경을 두고 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 지역이 2024년 국가전략사업으로 지정되어 대규모 개발이 확정된 해안과 인접해 있으며, 해당 사업을 맡은 기업 역시 아궁 스다유 그룹이라는 사실이 주목받게 되었다. 이러한 정황을 종합하면, 개발 예정지 인근 지역을 선점하기 위해 아궁 스다유 그룹이 면장을 회유하여 허위 건축권을 발급받고, 바다에 울타리를 만들어 그 구역에 대한 권리를 확보하려 했다는 시나리오가 가능해진다. 확정된 개발 사업이 완료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므로 장기간 설치되어 있게 될 이 구조물을 그 구역에 대한 관습권의 근거로 활용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깔려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이런 해석이 설득력이 있었기에 이 사건은 초대형 부패 스캔들로 규정될 수 있었다. 비판 여론이 거세짐에 따라 정부가 개입했다. 해양수산부와 국토부는 허위 건축권 발급을 확인한 후 이를 곧바로 취소했으며, 경찰은 면장을 비롯한 관련 인물을 체포했다. 구조물 해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프라보워 대통령이 직접 나서 군을 동원해 울타리를 철거하도록 명령했다. 이런 식으로 상황이 전개되자 관심은 자연스레 배후 세력으로 옮겨갔다. 여러 정황을 고려하면 아궁 스다유 그룹이 사건의 중심에 있음이 분명했다. 배후를 밝혀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지던 중 사건의 향방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사건이 발생했다. 대통령이 주재한 경제인 간담회에 아궁 스다유 그룹의 총수가 초대되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의 등장은 대통령이 더 이상의 논란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이후 사건 처리 과정도 이러한 흐름에 맞추어 진행되었다. 해양수산부는 면장의 배후를 밝힐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조사를 종결했고, 경찰 역시 면장과 면사무소 직원 몇 명을 기소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했다. 언론 또한 이러한 기류에 맞추어 관련 보도를 점차 줄여나가서 3월이 되자 바다 울타리에 관한 기사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초대형 스캔들은 점차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바다 울타리 사건의 전개 과정은 인도네시아 사회의 부패 양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바다를 대상으로 허위 건축권을 획득하여 30㎞에 달하는 구조물을 설치하고도 그 책임을 말단 공무원의 일탈로 축소할 수 있음은 정치권력과의 유착이 지닌 엄청난 위력을 실감하게 했다. 부패는 인도네시아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고질적인 문제이다. 독일의 민간단체인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부패인식지수(CPI)를 통해서도 이러한 현실이 드러난다. 전 세계 180여 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인도네시아는 높은 청렴도 순으로 100위권에 머물러 매우 부패한 국가로 분류되었다. 부패에서 벗어났다고 보기 어려운 우리나라조차 30위권에 자리 잡고 있음을 감안하면 인도네시아의 부패 수준이 얼마나 심각한지 가늠할 수 있다. 일상에서 부정부패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상황은 그것이 사회에 만연했음을 실감하도록 한다. 관공서에서 서류를 발급받거나 민원을 신청할 때, 거리에서 경찰을 마주칠 때 많은 인도네시아 사람은 자연스럽게 ‘급행료’를 떠올릴 것이다. 취업 과정 역시 예외가 아니다. 공무원이나 경찰, 민간업체를 불문하고 취업을 위해서는 추가적 비용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많은 현지인이 공감할 것이다. 2020년 국제부패척도(GCB) 조사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응답자의 30%가 지난 1년간 공무원에게 뇌물을 건넨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는 부패가 권력층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전반에서 ‘윤활유’처럼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도네시아의 부패를 논할 때 주목해야 할 측면은 민주화가 본격화된 2000년대 초 부패방지위원회(KPK)가 설립되어 다수의 정치인과 고위공직자를 처벌했다는 점이다. 위원회의 활동이 활성화될수록 권력자들의 위기감은 커졌고 이들은 위원회를 약화시키기 위한 시도를 지속했다. 결국 2019년에는 위원회의 지위가 독립기관에서 정부 산하기관으로 전환되었고, 위원회를 감시할 외부 감독기구가 설치되었으며, 위원회 활동을 제한하는 규정이 추가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압력에 굴하지 않은 위원회는 조코위 정부에서만 7명의 장관을 부패 혐의로 처벌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위원회 활동이 사회 전반의 부패 수준을 낮추는 데 기여했는지는 의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위원회의 성공적 활동이 오히려 긍정적이지 못한 결과를 초래한 측면이 있다. 부패 척결에 있어 위원회가 중심 기관으로 자리 잡게 되자 다른 사법 기관이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게 되었고, 위원회가 감당할 범위를 넘어선 부패 사건이 방치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위원회의 수사 대상이 고위공직자와 정치인에게 집중되면서 중하위 공직자 사이에서는 운이 매우 나쁘지 않는 한 적발되지 않으리라는 인식이 유지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위원회의 활약은 부패에 대한 경각심을 공직사회 전반에 확산시키는 데 한계를 지녔다. 부패가 사라지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뇌물이 가져오는 효과 때문이다. 뇌물을 통해 민원을 더 빠르고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음을 일반인이 인지함으로써 부패의 일상화에 일조하게 된다. 나 역시 그런 경우가 있었다. 비자 연장을 위해 필요한 서류를 모두 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소정의 비용을 추가하자 열 개가 넘는 서류가 두 개로 줄어드는 신비로운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한 번의 사례이지만 이러한 편리함을 경험한 내가 뇌물을 효과적 일처리를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여기고 있음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다. 대다수의 부패 공직자가 처벌받지 않는 현실, 그리고 비공식적 루트를 통해 신속한 일처리가 가능하다는 인식은 뇌물이 문제 해결을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수용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다 울타리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사건이 공론화되었다는 점에서 기존 관행과 차별적인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해결 과정에서는 다시 익숙한 패턴이 반복되었다. 면장이 뚜렷한 이유 없이 서류를 위조하고 거액을 들여 울타리를 설치했다는 식으로 사건이 축소되었으며 추가 폭로가 없다면 면장이 모든 책임을 지는 선에서 마무리될 개연성이 크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궁 스다유 그룹은 예정된 개발 사업을 그대로 진행하게 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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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의 Indonesia Story] 프라보워 대통령의 강제적 예산 삭감 후폭풍
인도네시아 자바의 농촌 마을에는 공동체적 관행이 뚜렷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는 주민들이 순번을 정해 참여하는 야간 순찰로, 마을 구성원 모두가 치안 유지에 공동 책임이 있다는 인식에 기초한다. 늦은 밤 한 무리의 주민이 마을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 활동은 일정한 범죄 예방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물론 이들이 밤새 순찰을 이어가지 않고 동네 한 바퀴 도는 정도로 마무리하기에 철저한 방범 활동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내가 조사했던 마을에서는 짧은 순찰을 마친 주민이 야식을 먹으며 수다를 떨었고, 일부는 카드 게임을 하며 밤을 보내기도 했다. 순찰 임무를 맡은 주민들은 마을 내 대다수의 집을 방문해야 한다. 이는 또 다른 공동체적 관행 때문인데, 이들은 각 가정에서 정해진 장소에 놓아둔 쌀을 수거해야 한다. 최근에는 쌀 대신 소액의 현금으로 바뀌기도 했지만, 어떤 형태이든 마을에서는 이를 모아 빈곤한 이웃을 돕거나 공동 행사를 보조하는 데 활용한다. 이 관행은 ‘한 줌의 쌀’이라고도 불리는데, 매일 자신이 소비하는 쌀의 일부를 나누어 기부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십시일반처럼 이 관행은 개인의 작은 희생을 통해 공동체 구성원 간 상호부조를 실천하는 행동으로 여겨진다. 야간 순찰과 ‘한 줌의 쌀’을 언급한 이유는 최근 대통령궁 대변인이 이를 이용하여 정부 정책을 설명했기 때문이다. 그가 거론한 정책은 프라보워 대통령이 2025년 첫 대통령령으로 발표한 정부 부처 예산 절감이었다. 프라보워가 제시한 절약 방식은 총 15가지 항목으로, 문구류나 기념품 구입 예산, 기념행사나 출장 예산 등이 포함되었다. 이를 놓고만 보면 이 정책은 ‘한 줌의 쌀’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또 새 정부 출범 100여 일이 지난 시점에 발표되었음을 고려하면 공직사회의 기강 확립과 민생 예산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시도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그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면 이 정책이 ‘한 줌의 쌀’이 아닌 ‘곳간’ 자체를 대상으로 한 조치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2025년 인도네시아 정부의 총예산은 3621조 루피아로, 이를 원화로 환산하면 약 320조원에 달한다. 이 가운데 프라보워가 명령한 예산 절감 규모는 306조 루피아로, 전체 예산 중 8.5%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게다가 감축 비율은 모든 부처에 균등하게 적용되지 않았다. 가장 많은 예산을 배정받은 국방부(166조 루피아)와 두 번째로 많은 경찰청(126조 루피아)은 삭감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반면 국토건설부, 보건부, 사회부, 종교부, 고등교육 및 과학기술부, 재무부와 같이 50조 루피아 이상의 예산을 배정받은 부처는 수십조 루피아에 이르는 삭감을 감수해야 했다. 이는 문구류나 기념품 비용 절감만으로 충당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 예산 삭감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부처는 국토건설부였다. 애초 110조 루피아이던 예산 중 74%에 해당하는 81조 루피아가 감액되었다. 예산 규모 자체는 크지 않지만 신수도청은 예산의 75%를 줄여야 했으며, 주택부와 청소년·체육부 또한 60%대 감액을 통보받았다. 예산 배정 규모가 큰 부처에 속하는 교통부는 31조 루피아 중 17조 루피아(55%), 고등교육 및 과학기술부는 57조 루피아 중 22조 루피아(39%)를 삭감당했고 보건부, 종교부, 재무부 역시 20% 내외의 예산 감축이 요구되었다. ‘한 줌의 쌀’이라는 비유와 달리 이번 예산 절감 조치는 대통령의 일방적인 폭거라 평가될 수 있다. 먼저, 절차적 측면에서 문제가 제기된다. 예산 심의와 확정이 국회의 권한임에도 프라보워는 이미 확정된 예산을 자의적으로 수정했다. 이러한 논란을 의식한 듯 그는 감축된 새 예산안에 대해 국회의 동의를 받도록 요청했지만 실질적 심의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또 다른 문제는 예산 감축이 각 부처와 사전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강제되었다는 점이다. 행정부 부처를 기존 34개에서 48개로 대폭 확대한 프라보워의 이전 정책과도 모순되었다. 그는 행정부의 역량 강화를 주장하며 비대해진 조직을 옹호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규모 예산 감축을 단행함으로써 오히려 그 운영 능력을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각 정부 부처는 예상치 못한 예산 절감 명령에 순응하는 태도를 취했다. 장관 중 누구도 감축안의 정당성이나 근거를 문제 삼지 않았으며, 이들의 관심은 대통령령을 어떻게 이행할지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의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산권이 침해되었음에도 정치인 중 누구도 이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미디어 보도 또한 감축안에 대한 사실 전달에 집중되었고, 그로 인한 영향에 대한 논의는 제한적이었다. 일부 보도를 통해 각 부처의 본래 기능이 제대로 수행될 수 있을지, 경제성장 동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단편적으로 다루어지는 데 그쳤다. 대통령령을 절대적으로 수용하려는 초기 분위기는 한 달여가 지난 2월 중순에 접어들며 다소 변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다만, 이러한 변화는 정책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각 부처의 예산 감축안이 구체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촉발된 것이다. 예산 감축 규모가 가장 큰 국토건설부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국토건설부 장관은 대통령령에 대해 순응하는 태도를 보이며 부처 본연의 업무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예산을 절감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예산의 74%가 삭감된 상황에서 이 주장은 공허한 말잔치에 불과했다. 예를 들어 애초 예산안에는 총 4만7763㎞의 도로와 563㎞의 교량을 보수하는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논의 중인 감축안에 따르면 도로와 교량 보수 계획은 0㎞로 설정되었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향후 1년 동안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도로와 교량 보수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국토건설부만큼 심각하지는 않지만 다른 부처의 감축안이 공개되면서 대통령령이 미칠 광범위한 영향이 뚜렷해졌다. 미디어가 주목한 주요 문제는 계약직 직원 해고, 월급 지급 유예, 신규 채용 중단, 기존 사업 철회, 장비 활용 비율 축소 등이었다. 기상청을 예로 들면 장비 활용 예산 삭감으로 인해 기상 예측 정확도가 기존 90%에서 60%로 감소하고, 재해 정보 전달 시간이 3분에서 5분 이상으로 지연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처럼 감축안 내용을 보도하는 것만으로도 예산 삭감이 단순히 효율성 제고 차원이 아니며 필수 행정 서비스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조치임을 인지할 수 있게 했다. 예산 감축에 대한 부정적 반응이 나타나자 프라보워는 자신의 정책이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바의 전통 개념인 ‘작은 왕’을 언급했다. 이는 사익을 위해 주어진 권력을 남용하는 관료를 일컫는 표현이었다. 프라보워는 예산 감축에 대항하는 관료의 존재를 지적하며 이들이 자신을 ‘작은 왕’이라 여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를 통해 그는 예산 감축 반대가 사익을 위한 것임을 강조했고 이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천명했다. 프라보워의 비타협적 태도가 확고해지자 이는 곧 정치권의 지지로 이어졌다. 프라보워와 연합한 원내 제2당 당수는 대통령의 결정에 대해 비판하는 행위를 금지한다는 명령을 모든 당원에게 내렸다. 프라보워 소속 정당은 갓 임기를 시작한 그를 2029년 대선 후보로 추대하며 절대적 충성을 맹세했다. 프라보워가 차기 대통령으로 확정되었을 때 외국 학자와 미디어가 우려한 부분은 그의 독재자적 성향이었다. 군인 출신이라는 경력, 과거의 반인권적·억압적 행보, 그리고 독재자 수하르토와의 긴밀한 관계 등이 이러한 부정적 시각의 근거였다. 프라보워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비판이 억울할 수도 있다. 이는 수십 년 전 경력과 관련된 것이며, 그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든 이후의 행보를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예산 삭감 조치는 프라보워에 대한 우려가 결코 근거 없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는 뚜렷한 이유나 사전 논의 없이 정책을 강행했으며 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조금도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행보는 상명하복 문화를 체화한 그가 이런 태도를 바꿀 의사가 없음을 시사했다. 예산 삭감과 관련해 주목할 또 다른 측면은 신수도청과 국토건설부가 가장 높은 감축 비율을 요구받았다는 사실이다. 두 부처의 핵심 사업인 신수도 건설과 인프라 개발은 전임 대통령 조코위가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정책이자 그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따라서 두 부처의 예산 삭감은 조코위의 정치적 유산을 지우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조코위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지만 프라보워가 언젠가는 조코위를 뛰어넘으려 하리라는 점은 충분히 추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집권 후 불과 3개월 만에 조코위의 핵심 정책을 부정하는 조처를 감행하리라 예상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번 예산 삭감 정책을 통해 프라보워는 자신에게 필적할 만한 인물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는 그가 원하는 방식대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자 앞으로의 정책 또한 오로지 자기 의지에 따라 추진할 것이라는 선언으로 이해될 수 있다. 지난 20여 년 상황만으로 인도네시아의 경제성장과 정치적 안정 사이의 관계를 단정 짓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볼 때 이 기간에 이루어진 꾸준한 경제성장이 민주적 정치 체제와 병행했음은 부정될 수 없다. 따라서 프라보워식 행보가 지속될 때 이전 정부에서 성취한 안정적 경제성장이 지속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 버리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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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의 Indonesia Story] 대항해시대 유럽 열강이 인도네시아 이 곳으로 몰려온 이유는
2019년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며 조코위 전 대통령은 인도네시아의 황금기가 2045년 도래할 것이라고 선언했으며, 이 비전은 현 프라보워 정부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조코위는 황금기로 진입하는 기준 중 하나로 세계 4대 경제 강국을 거론했다. 1945년 독립 후 100년이 되는 2045년에 인도네시아가 미국, 중국, 인도의 뒤를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부강한 국가로 자리 잡으리라는 주장이었다. 인구와 자원이 풍부하지만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 국가로 인도네시아를 바라보는 인식이 지배적인 우리에게 4대 경제 대국이라는 목표는 정치적 수사처럼 비칠 수 있다. 나 역시 이러한 전망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2010년대 초반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경제 규모가 10여 년 내에 역전될 것이라는 예상이 제기되었지만 현재까지도 비슷한 순위가 유지되는 상황을 기억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저개발 상태인 인도네시아를 오랫동안 지켜본 경험이 내 회의적 시각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회의론만으로 황금기 주장을 예단할 수는 없다. 2020년대 초반 자료에 따르면 한국 GDP는 세계 11위 내외, 인도네시아는 16위 내외였다. 몇몇 연구기관은 2030년 이후 양국의 순위가 역전되며, 2050년에는 인도네시아가 세계 4위 경제 대국으로 부상하는 반면 한국은 15위권 밖으로 밀려나리라 예측했다. 이러한 자료 때문인지 인도네시아 사람들, 특히 지식인과 관료들은 경제 대국으로서 미래를 호의적으로 바라보았다. 이들은 국가에 대한 자긍심을 강하게 표현하며 경제성장 가능성을 낙관적으로 평가했다. 미래의 인도네시아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불명확하지만 과거의 인도네시아, 더 정확히 말하면 인도네시아 영토 내 한 지역이 세계사의 중심에 있었던 점은 분명하다. 대항해 시대라 불리던 15~17세기에 세계 열강 자리를 놓고 다투던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와 영국, 그리고 인도와 중국 모두가 간절히 원하던 물품의 생산지가 현재 말루쿠(Maluku)라 불리는 군도였기 때문이다. 말루쿠와의 교역 욕구는 유럽 열강이 지리적으로 떨어진 동양으로 항해하려 한 핵심 원인이었다. 교역을 통해 얻은 부는 이후 유럽 식민제국의 탄생을 뒷받침했다. 말루쿠를 제외하고 그 어떤 곳에도 존재하지 않던, 인도네시아를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 만들었던 바로 그 물품은 정향과 육두구라는 향신료였다. 정향은 못과 모양이 비슷하다고 해서 한자 ‘못 정(丁)’과 ‘향기 향(香)’을 결합해 만든 말이다. 육두구는 중국에서 사향 냄새가 나는 호두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독특한 향을 가진 향신료다. 두 향신료 모두 우리 일상에서 활용되기보다는 귀한 한약재로 사용되었다. 한의학 대사전에 따르면 육두구는 맛이 맵고 쓰며 성질이 따뜻해 설사와 구토를 멈추게 하고 식욕을 돋우며 음식 소화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정향도 맛이 맵고 성질이 따뜻하며, 배가 차고 아프거나 설사하고 식욕이 없을 때와 소화 장애, 무릎·허리 통증, 음부가 차고 아플 때 쓰였다. 맵고 쓴 특징을 어림잡기 위해서는 정향과 육두구가 은단과 활명수의 재료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된다. 정향과 육두구는 고대부터 중요한 국제 무역 물품이었다. 두 향신료가 인도로 유입된 후 서쪽으로 계속 전파되어 로마에 이르렀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삶에 스며들었다. 음식의 맛과 향을 더하거나 저장에 활용하기 위해, 종교적 의례에서 향을 피우기 위해, 강한 체취나 입 냄새를 없애고, 병마를 퇴치하거나 흑사병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중세에 접어들어 중동 이슬람 왕국의 영향력이 커지자 향신료 무역은 아랍 상인에 의해 독점되었다. 이에 따라 말루쿠의 향신료가 유럽 소비자에게 전달되기까지 중간 단계가 늘어났고, 원산지보다 수백 배 더 비싼 값에 거래되기도 했다. 이러한 가격 상승은 생산지를 찾아 직거래하려는 욕망을 자극했다. 16세기 말루쿠 군도는 술탄에 의해 통치되는 몇 개의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새로 유입된 유럽인은 내부 경쟁에 이용될 새로운 자원으로 여겨졌으며, 향신료를 중심으로 한 이합집산의 관계가 형성되었다. 하나의 술탄국이 포르투갈과 교역 연맹을 맺으면, 다른 술탄국은 스페인을 조력 대상으로 삼았으며, 네덜란드와 영국 역시 토착 세력과 연합하거나 대립 관계에 놓였다. 유럽과 접촉하던 초기에 형성된 대등한 관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럽에 유리한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강력한 화력을 지닌 유럽인은 군사적·경제적으로 점점 더 우위를 점했고, 그에 비례해 토착 왕국의 영향력은 축소됐다. 17세기 중반을 거치며 네덜란드가 유럽 세력 중 우위를 점하며 향신료 거래에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자 토착 왕국은 실권 없는 이름뿐인 정치체계로 전락했다. 다음 세기에 접어들어 토착 왕국은 식민 통치에 편입되었다. 막대한 부의 창출과 기술 발전을 가능하게 했던 향신료 무역은 유럽 제국의 패권 강화를 가져왔지만 현지인에게 있어 이는 주권 상실을 의미했을 뿐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말루쿠는 세계사의 중심에서 멀어져 갔고, 19세기 향신료 재배가 다른 지역에서 가능해지고 그 가격이 폭락함에 따라 주변부로 밀려났다. 이번 겨울에 말루쿠 군도를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한국에서 7시간을 비행해 자카르타에 도착한 후 다시 비행기를 두 번 갈아타고 4시간여 만에 도착한 말루쿠 군도의 터르나테(Ternate) 섬은 처음에는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아 보였다. 오토바이와 자동차로 북적이는 도심의 좁은 거리와 도로 옆으로 늘어선 나지막한 건물은 자바에서 보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현지 주민과 대화하면서 이러한 평범한 모습이 사실은 평범하지 않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자바의 거리와 유사한 풍경을 만드는 데 필요한 건축 자재 대부분이 자바에서 수입되었다는 것이다. 공산품뿐만 아니라 농산물조차 대부분 수입품이었다. 벼를 경작할 토지가 없기에 사고(sago) 가루를 대신해 새롭게 주식으로 자리 잡은 쌀마저 외부에서 들여와야 했다. 향신료가 주요 수입원인 터르나테의 경제는 인도네시아 중심부에 철저히 종속된 듯 보였다. 그 결과 터르나테는 자바보다 훨씬 높은 물가를 감내해야 했고, 같은 수입으로 더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터르나테 섬의 중심부에는 화산이 솟아 있었다. 주기적인 화산 폭발 과정에서 분출된 화산재와 연중 지속되는 강우는 향신료 성장을 위한 최적의 조건을 제공했다. 섬의 규모는 과거 이곳이 세계사의 중심지였음을 의심하게 할 만큼 작았다. 해안가를 따라 이어진 도로를 일주하는 데 한 시간 반 정도면 충분했다. 해안 도로를 따라 돌아다니며 이 섬이 과거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가 건설한 요새가 연이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적지 역시 이곳의 현재 상황을 반영하고 있었다. 방문객은 거의 없었으며,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이는 세계사의 중심에서 주변부로, 나아가 인도네시아의 변방으로 밀려난 역사적 현실을 드러내는 듯했다. 그러나 여행 과정에서 반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역 사학자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향신료 루트’라는 표현을 거론했다. 말루쿠에서 시작해 말레이반도를 거쳐 중국과 인도, 나아가 중동과 유럽으로 이어진 향신료 루트와 관련된 역사를 중앙정부가 유네스코 세계 무형유산에 등재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이다. 이 루트로 인해 토착 왕국이 사라지고 역사의 변방으로 밀려나게 되었음을 떠올리던 내게 학자들은 전혀 다른 시각을 제시했다. 향신료 교역 덕분에 세계의 여러 문명이 말루쿠에 모일 수 있었고, 다양한 문화의 교류와 혼합을 통해 문화적 풍요로움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들은 토착 언어에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네덜란드어, 나아가 중국어 어휘까지 유입되었음을 언급하며 국제 교류에서 말루쿠가 차지했던 중심적 역할을 강조했다. 처음에는 이 해석을 들으며 외부인에 의한 착취와 학살의 역사를 무시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즉 식민 역사를 미화하려 한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인도네시아의 황금기라는 말이 떠올랐다. 정부가 유포하는 세계의 중심으로서 인도네시아라는 담론이 이곳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듯했다. 식민 역사의 참혹함을 잊지 않지만 말루쿠, 나아가 인도네시아가 한때 세계사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부각하려는 새로운 역사관이 출현한 것이다. 황금기로 나아가기 위해 프라보워 대통령은 연간 8% 경제성장률을 목표치로 제시했다. 경제가 잘 운영되었다고 이야기되는 지난 10년간 경제성장률이 5% 내외였음을 고려할 때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목표라 할 수 있다. 상당수 경제학자가 회의적인 시각을 취하고 있음을 지적한 프라보워는 한 국가의 지도자라면 용감하게 높은 목표를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늘만큼 높게 이상을 설정하면 하늘에 닿지 못하더라도 별 위에는 떨어질 수 있다고 말한 후 군인으로서 자기 경험을 예로 들며 8% 성장이 불가능한 목표가 아님을 역설했다. 자기 비하적이거나 자기 비판적인 시각으로 인도네시아의 현실을 평가하는 현지인의 모습에 익숙했던 나에게 있어 세계사의 중심을 강조하는 말루쿠의 역사 해석이나 인도네시아의 황금기에 대한 확신은 과거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이다. 그럼에도, 미래에 대한 긍정적이고 희망에 찬 인식이 대두되는 최근 상황을 보며 낯섦과 함께 일말의 기대감이 피어오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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