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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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세로’는 횡설수설(橫說竪說) 종횡무진(縱橫無盡)의
횡수(橫竪가로세로)와 종횡(縱橫세로가로)을 한글로 번역한 것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비석을 겸한 융합형 탑이 되었으니 불교중앙박물관 직원들의 출장길에 얹혀 함께 길을 나섰다. 본 업무인 충남 청양 칠갑산 깊은 계곡에 자리 잡은 장곡사(長谷寺)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부여 정림사 오층석탑을 찾았다. 주변은 깔끔하게 정리해 놓았고 새로 지은 유물관 규모도 장대하다. 연못도 복원하고 건물터도 발굴을 거의 마쳤다. 이 모든 작업을 뒷받침한 주인공은 오층석탑이다. 도심의 평지 안에 우뚝 솟아 있는 이 탑은 1400년 역사를 자랑한다. 창건 당시 모습 그대로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된 연유 가운데 하나는 탑신에 새겨진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592~667)의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는 글씨도 한몫했다. 역사가 주는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라 하겠다. 오랜 세월 동안 중국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말해주는 또 다른 흔적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평제탑(平濟塔·백제를 평정했다는 의미)’이란 이름으로도 불렸다. 이제 글씨는 풍우로 마멸되어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글씨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지나갈 만큼 희미해졌다. 제목인 시작 부분의 큰 글씨도 눈을 부릅떠야 보일 정도다. 비문은 탑 하단 4면에 빙 둘러 새겼다. 1면에 24행, 2면에 29행, 3면에 28행, 4면에 36행 등 총 117행이다. 각 행에는 16자 또는 18자를 새겼으니 총 2216자가 된다. 옆으로 누워 있는 ‘사면 비석’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글씨는 당시에 가독력을 높이려고 붉은 칠까지 했다고 한다. 색은 이미 바랜 지 오래되었다. 어쨌거나 비석을 겸한 융합형 조형물이 된 셈이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비문의 원문까지 찾는 기회를 가졌다. 시작은 이랬다.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는 큰 제목 아래 ‘현경(顯慶) 5년(660) 경신(庚申) 8월 기미삭(己巳朔 15일) 계미(癸未)에 세운다’는 날짜를 기록하고 연이어 ‘낙주(洛州) 하남(河南) 사람 권회소(權懷素)가 썼다’고 했다. 내용은 당나라가 백제 정벌에 나선 이유, 출정한 당군의 편성, 정벌에 참여할 장군들에 대한 공적과 칭송, 포로 압송과 행정구역 변경에 관한 것, 마지막으로 소정방의 위업이 길이 남으리라는 문구로 끝을 맺고 있다. 하고 싶은 말은 하나도 빼지 않고 모두 들어간 긴 글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구심이 남는다. 그렇게 할 것 같으면 왜 제대로 된 거창한 기념비석을 만들지 않고 기존 탑에 부랴부랴 새긴 것일까? 그 시절 일정을 대충 살펴본다면 해답이 나올 것도 같다. 660년 7월 18일 왕도 부여에 진입했고 660년 8월 15일(신라 태종무열왕 7년) 탑에 기록을 남겼다. 한 달 정도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뭔가 허겁지겁했던 당시 분위기가 감지된다. 백제 부흥군의 강력한 저항은 물론 동맹인 신라와 외교적 마찰까지 겹치면서 참전비조차 여유롭게 만들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기존의 가장 잘생긴 탑에 비석의 역할까지 맡긴 것이다. 하긴 궂은 역사도 역사다. 승자의 갑질이야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도를 넘은 무례함의 극치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백제·신라는 물론 당나라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시간 또한 흐르고 흘렀다. 일제강점기인 1942년에 후지사와 가즈오(藤澤一夫) 등에 의해 탑 주변에 대한 발굴작업이 있었다.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大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고 새겨진 기와 조각이 출토되었다. 참고로 태평은 요(遼)나라 연호다. 태평 8년은 고려 현종 19년인데, 서기로 환산한다면 1028년이 된다. 이 덕분에 본래 이름인 ‘정림사 탑’을 되찾게 된 것이다. 고미술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은 한국을 ‘석탑의 나라’라고 부른다. 일본은 목탑, 중국은 전탑(塼塔·벽돌탑)이 대세인 것을 두고 한 말이라 하겠다. 동북아 삼국 가운데 일본은 상대적으로 나무가 넉넉했고 중국은 벽돌 재료인 황토가 풍부했으며 한국은 화강암이 지천에 널려 있다. 탑 역시 주변에서 가장 익숙하고 구하기 쉬운 재료를 사용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인도와 중국의 벽돌탑 제작기술도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경주 분황사 모전탑과 의성·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 북부지방에서 전탑 몇 기를 만들었다. 목탑도 마찬가지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충북 보은 법주사 팔상전이 유일하다. 몽골 침략 때 불타버린 경주 황룡사 구층탑도 목탑이었다고 한다. 목탑은 예술적 가치는 뛰어나지만 손이 많이 가고 보존하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 특히 전쟁과 화재에 매우 취약했다. 궁리 끝에 나무에서 돌로 재료를 바꾸었다. 목탑 제작 기법으로 석탑을 만들었다. 목탑 같은 석탑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돌이 나무와 같을 수는 없다. 목조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창의적 변화를 시도하여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해야 했다. 그 시작이 정림사 탑인 것이다. 그 기술은 신라 고려로 이어지면서 한국이 석탑의 나라가 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삼국사기》는 백제미학을 이렇게 정리했다. 화이불치 검이불루(華而不侈 儉而不陋)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고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3-02-16 09:02:09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신년 강물 앞에서 작년 다리를 바라보다 새해 첫날 저녁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임진강역은 우리 일행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지라 적요함이 가득하다. 혼자 근무하던 역무원께서 관광객인 우리를 위해 퇴근시간을 늦추고 있다. 경의중앙선 전철역 종점에서 막차가 떠나는 뒷모습을 멀리서 보았다. 임진강역과 문산역을 오가는 셔틀전통열차다. 평일에는 오전 두 번 오후 두 번, 주말 그리고 공휴일에는 오전 6번 오후 6번 다닌다고 친절한 안내판이 알려준다. 2000년 남북철도연결 기공식 후 2001년 완공했다. 규모는 작았지만 남북화합의 상징으로 존재감을 자랑했다. 2020년 전철이 연장되면서 비로소 제대로 된 역으로써 기능을 하게 되었다. 인근에는 철도종단점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글씨가 새겨진 기념물이 있다. 달리고 싶다고 외치던 그 철마기관차는 만신창이가 된 채 70여년 동안 그대로 서 있다. 반세기 넘게 비무장지대에 방치되어 있다가 2004년 등록문화재 78호로 지정되면서 포스코의 지원을 받아 녹슨 때를 벗겨내고 현재 위치로 이동하여 전시 중이다. 당시 기관사이던 한준기(1927년생)씨의 증언에 의하면 1950년 12월 전쟁물자를 싣고 개성에서 평양으로 가던 도중 중공군의 개입으로 황해도 평산군 한포역에서 후진하여 장단역에 도착했을 무렵 피격을 당해 탈선되면서 버려졌다. 천여개의 총탄자국과 휘어진 바퀴가 전쟁참상을 그대로 전해준다. 장단역 내에 버려져 있던 레일과 침목을 재활용한 기차길도 설치하여 현장감을 살리고자 했다. 철원 월정리 역에는 한국전쟁을 함께 치룬 객차 잔해가 남아 있으니 그 둘을 조합하는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 기차건 역이건 철로건 모두 이동을 전제로 한 운송시설이다. 거기에는 다리가 빠질 수는 없다. 1906년 경의선(서울-신의주)이 완공되면서 임진강 위로 상행(서울방향) 하행(신의주 방향)용 다리 두 개가 각각 건설되었다. 기술부족인지 지형상 애로 때문인지 몰라도 한 개의 다리로 상하행선을 모두 담아내지 못했다. 부산에서도 경성가는 노선을 상행선이라 불렀고 신의주에서도 경성가는 노선을 상행선이라 불렀다. 경성(현재 서울)이 한반도의 중심인 까닭이다. 지형상으로는 평양으로 올라간다고 해야할 것 같은데 당시 사람들은 평양으로 내려간다고 했다. 하지만 6.25으로 인하여 오십여년 만에 두 다리는 교각만 남긴 채 폭격으로 끊어진다. 휴전을 앞두고 하행선인 신의주행 서쪽다리는 필요성에 의해 복원된다. 철로가 아니라 일차선 도로였다. 1953년 전쟁포로 교환을 위한 것이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부족했다. 교각 끝은 강변의 고수부지 그리고 늪지였다. 복구된 철교의 남쪽 끝에서 가장 짧은 거리인 사선(斜線)으로 꺾어진 임시다리가 필요했다. 당시 포로들은 차량으로 경의선 철교까지 온 후 걸어서 임시 다리를 통해 일만여명이 넘어왔다. 그 뒤 ‘자유의 다리’라고 명명했다. 자유의 다리는 주재료가 목재다 하지만 교각의 기둥을 만들면서 통나무 4개를 튼튼하게 묶다보니 약간의 철골부재가 더해졌다. 6개 교각을 가진 다리의 총길이는 83m이며 높이는 8m 폭은 4.5~7m이다.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피폐화되었지만 화해시대를 맞이하여 1995년 복구되었다. 1996년 문화재(경기도지정기념물 제162호)로 지정했고 2000년 일반인에게 개방하면서 현재 안보관광지로서 그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하지만 두 다리 가운데 동편에 있는 다리는 완전히 잊혀졌다. 하지만 잊는다고 해서 잊혀지는게 아니다. 왜냐하면 때가 되면 그 기억은 다시 소환되기 마련인 까닭이다. 2016년 부서진 기관차 복원을 시작점으로 하여 중간 쯤에는 체험형 객실을 재현했고 마지막 부분에는 5개의 교각 위로 임진강 경관을 자유롭게 조망할 수 있는 105m 폭5m 통유리형 관광용 시설을 만들었다. ‘통일되면 없어질 다리’라는 별명도 붙였다. 정식명칭은 순우리말인 ‘독개다리’다. 인근의 독개마을은 없어졌지만 이름은 그대로 남아 다리이름이 된 것이다. 인근에 남북회담으로 유명한 판문점은 본래 ‘널문리’였다. 전쟁을 거치면서 한자식 표현인 판문점(板門店)으로 바뀌었다. ‘판문점은 당일견학이 불가하며 온라인으로 사전예약하라’는 안내판도 보인다. 다음을 기약해야겠다. 판문점 남북공동경비구역(JSA)에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유명하다. 가게 된다면 전통한옥 건물인 25평 무량수전도 참배해야겠다. 육이오 희생자 위패를 모신 곳으로 2017년 완성했다. 곁에는 군법당 ‘영수사’가 있다. 2004년 미군숙소 건물을 개조하여 사찰로 이용하고 있다. 분단의 상징이자 냉전시대의 잔상이 그대로 남아있는 이 지역에 화해와 상생 그리고 평화와 통일의 상징으로 새로운 ‘통일대교’가 1998년 완공되었다. 자동차를 위한 도로다. 본래 있던 철교는 기차통행을 위해 레일을 다시 깔았고 잠시나마 임진각역에서 도라산역까지 운행길로 사용했다. 한 때 남북교류로 왁자지껄했던 두 다리 주변은 현재 고요만이 가득하다. 그 적막함도 언젠가는 다시 분주함으로 바뀔 날이 오리라. 금기불여석(今旣不如昔) 후당불여금(後當不如今) 현재가 옛날만 못한다면 장래도 현재만 못할 것이다(종용록 53칙)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3-01-14 06:00:00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폐허는 성찰을 부르는 힘이 있으니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 어느 날 최북단 마지막 기차역이라는 철원 월정리역을 찾았다. 민간인통제구역 안에 있는지라 출입절차를 미리 밟아야 했다. 지난 여름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5~1682 조선시대 4대 문장가. 전서 글씨체 대가)선생의 무덤을 찾았을 때 민통선 통과의례를 치른 바 있으니 DMZ방문은 올해 두 번째다. 붐비는 여느 관광명소와는 달리 한적한 미답지가 주는 허허로움과 함께 폐허의 처연함이 주는 또 다른 미학이 일행을 맞이한다. 이 역에서 마지막 기적소리를 울렸던 인민군 화물열차와 객차 일부라고 했다. 육이오 때 유엔군의 폭격을 받아 탈선된 열차는 버려졌고 증기기관차는 포연 속에서 북쪽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70년이라는 시간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더불어 그 위로 눈·비·바람도 그만큼 지나갔다. 잔해는 포탄과 총탄 자국을 안고서 전쟁의 상흔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철로 위에 주저앉은 모습은 이제 더 이상 버틸 힘조차 없는지 객차로서 자기 모습조차 포기한 채 그냥 널부러져 있다. 45도쯤 기울어진 녹슨 바퀴 때문에 ‘기차가 맞구나’하는 생각이 들 뿐, 전체적으로는 길게 쌓아놓은 고철더미처럼 보인다. 고철열차라도 남쪽으로 끌고 가려는지 4001호 디젤 기관차가 생뚱맞은 모습으로 선로 끝에 서있다. 본래 서울 용산에서 동해안 원산으로 가는 경원선 철도였다. 철로는 1914년 개통했고 월정리 역은 1934년 신축했다. 건물은 전쟁으로 소실됐고 1988년 복원했다. 본래 역사(驛舍)가 비무장지대 안쪽인 까닭에 남쪽으로 1㎞쯤 옮긴 위치였다. 한문으로 쓰여진 ‘月井里驛(월정리역)’이 당시의 문자표기법을 그대로 보여준다. 인근 철원역은 직원 80여 명이 근무할 만큼 규모있는 역이었다고 했다. 일제 강점기 시절 당시 인구가 10만명가량 되는 대도시이며, 금강산 가는 전기철도의 분기점이었기 때문이다. 후삼국 시절 궁예왕이 태봉국의 도성으로 삼을 만큼 넓은 평야지역이기도 하다. 현재 ‘오대쌀’을 생산하는 평야는 3분의 1 정도 남쪽에서 농사를 짓고 그 나머지는 모두 비무장지대 너머 북쪽이다. 남북으로 통하던 철로는 폐기된 상태이며 역 경내에 전시용 철로를 백미터 정도 관광용으로 복원해 둔 정도다. 오늘도 표지판은 ‘鐵馬(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구호를 열차를 대신하여 외치고 있다. 출입을 통제하는 것은 군사적인 이유뿐만 아니다. 2018년 안보관광지로 개방된 이후에도 아프리카돼지열병 그리고 조류독감 또는 코로나19 등으로 인하여 수시로 막히고 열리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인간들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군사보호지역을 설정해 둔 덕분에 두루미 등 많은 종류의 날짐승과 각종 길짐승에게는 더없이 평화로운 안식처가 되었다. 전쟁과 평화라는 양면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민통선 안의 별천지를 빠져 나오니 또 다른 전쟁유물인 ‘철원 노동당사 건물’이 기다리고 있다. 1946년 건립한 560평 지상 3층의 러시아식 공법의 건물로 벽돌과 콘크리트를 주재료로 사용했다. 좌우 대칭적인 평면과 함께 비례가 정돈된 입면(立面) 그리고 언덕 위에 자리 잡은 것 등이 합해지면서 권위적인 느낌을 더했다. 현재 2층과 3층은 외벽만 남기고 내부는 무너진 상태로 골격만 남았다. 수많은 포탄자국 총탄자국 속에서도 뼈대가 남아있을 만큼 튼튼하게 지어진 건물임을 증명해 준다. 하지만 현재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앞쪽은 비교적 멀쩡한 편이지만 옆쪽과 뒤쪽은 수많은 철근 지지대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버티고 있는 형국이다. 언젠가 찾았던 일본 히로시마 ‘원폭 돔(겐바쿠 도무)’을 생각나게 한다. 체코 출신 건축가가 설계했고 1915년에 지어진 지상 3층 벽돌 건물이다. 1945년 8월 6일 원폭투하에도 중앙돔과 외벽 일부가 살아남았다.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다. 풍화를 막기 위한 정기적 보수공사는 새 건물 관리비를 능가한다고 들었다. 불편한 전쟁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철원 노동당사와 일부분 닮았다고 하겠다. 노동당사는 근대문화유산 22호로 지정되었다. 70년 동안 풍우에 노출되면서 콘크리트 등이 부식되자 보수를 했고 또 벽체의 보존처리와 함께 외벽탈락 방지를 위한 공사가 뒤따랐다. 2022년 5월 야간 조명시설까지 갖추면서 일몰 후 찾아오는 관광객까지 배려했다. 이 지역도 1990년대 이전까지 민간인 출입통제 구역이었다. 그 규제가 완화되면서 비로소 전쟁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있는 이 건축물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 무렵 유명한 뮤지션으로 이름을 날리던 ‘서태지와 아이들’은 뮤직비디오 ‘발해를 꿈꾸며’의 배경으로 삼으면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후 kbs 열린음악회 등 크고 작은 여러 가지 문화행사의 무대로 활용되면서 지금은 모두에게 친숙한 장소가 된 것이다. 무엇이건 익숙하면 편안해진다. 불편했던 그 건물도 마찬가지다. 인간과 자연이 합작한 전위예술 작품인 월정리역 기차 잔해와 노동당사 건물에서 폐허미가 주는 비장함을 만났다. 그것은 전쟁으로 파괴된 인공적 폐허이자 자연에 의해 낡아가는 자연적 폐허가 겹치면서 또 다른 미학적인 완성을 향해가는 진행형 ‘노천 예술’이었다. 하지만 과거의 온전했던 모습보다는 현재의 상실과 소멸이 더 강하게 소환될 수밖에 없다. 과거는 이미 사라지고 없지만 거기에 부여한 의미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폐허는 성찰을 부르는 힘이 있다고 누군가 말했다. 전쟁과 평화 그리고 나타남과 사라짐이라는 양면성을 가진 두 전쟁 유물 앞에서 모든 것은 변해가기 마련이라는 ‘공(空)의 이치’를 다시금 음미하게 된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2-12-17 09:57:03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정말 탑에 진심이네요 고택과 고탑 앞을 가로 지르던 철길을 걷어내면서 시작된 안동 임청각 주변은 공원화 사업으로 분주하다. 특히 탑 앞을 가로 막고 서있던 방음벽 철거만으로도 그동안 답답함과 숨막힘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덕분에 높이 17m 7층인 한국최고의 규모를 자랑하는 전탑(塼塔 돌을 벽돌처럼 깎아 만든 탑. 국보)이 더욱 훤출하다. 찾는 이들은 동남서북으로 돌면서 사방에서 배례(拜禮)할 수 있고 또 멀리서 가까이서 원근(遠近)을 오가며 바라볼 수 있도록 본래공간을 회복한 것이다. 늦가을 푸른 하늘을 이고 서있는 도로표지판에는 ‘안동 법흥사지 칠층 전탑’ 그리고 ‘고성이씨 탑동종택’이라고 써놓았다. 유명한 종갓집 앞에도 ‘탑동’이란 말은 빠지지 않았다. 그만큼 고택과 전탑은 둘이면서 또 하나됨을 추구했던 것은 이 가문의 불가적 인연이 한 몫했다. 이 집안 출신인 고려 말 행촌 이암(杏村 李嵒 1297~1364)선생은 공민왕 때 고위관료를 지냈다. 말년에는 벼슬을 버리고 강화도에 은둔하면서 1363년〈단군세기〉를 저술한 역사학자이기도 하다. 동생은 운암(雲庵)이라는 고승이었다. 또 16국사를 배출한 승보종찰 송광사의 13대 국사를 지낸 각진(覺眞1270~1355)대사가 삼촌이라고 조용헌 선생은 족보를 추적하여 저서 《명문가》에 밝혀 두었다. ‘탑동103카페’라는 입간판이 서 있는 솟을대문을 지나 고택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의 직사각형 연못에는 서리를 맞고서 말라버린 연잎과 연실이 가득하다. 법당 자리로 추정되는 터에 지어진 전형적인 한옥 안으로 들어갔다. ‘북정(北亭)’과 ‘영모각(永慕閣)’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정자 기능과 사당기능을 함께 하는 공간임을 짐작케 해준다. 현재는 ‘북카페’로 운영되고 있다. 여기서 바라보는 전탑풍광이 가장 일품이다. 창호문을 열고서 앉고 서기를 반복하며 탑을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살폈다. 카페주인이 차와 디저트를 갖다주며 한 마디 던졌다. “정말 탑에 진심이시네요.” 안동을 다녀온지 며칠 뒤 서울 종로 인사동 어느 갤러리에서 열린 ‘탑 사진전’을 찾게 되었다. 작가는 언젠가 새벽 경주 감은사 탑 앞에서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삘’이 꽂이더라고 했다. 그 감동은 인물 ·패션분야 사진에서 탑 사진까지 영역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특이한 것은 탑의 뒷배경을 인물사진 찍을 때처럼 암막천으로 완전히 가리고는 오직 탑만 드러나게 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리하여 사진을 감상하는 이로 하여금 모든 시선을 탑에 집중토록 만들었다. 관람객들은 이구동성으로 ‘정말 탑에 진심’이라고 입을 모았다. 법흥사지 전탑을 찾았을 때 이미 ‘탑에 진심’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 날 탑동카페에서 차를 한 모금 하고서 숨을 돌린 후 탑 너머 강 건너편을 바라보았던 기억까지 더듬었다. 나지막한 작은 산이 눈앞을 가려주는 안산(案山)노릇을 하면서 이 터를 더욱 안온하게 해준다. 언덕 끝자락에는 낙동강과 반변천이 합류한다. 흔히 명당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쌍계합수(雙溪合水)지점은 따로 와부탄(瓦斧灘)이라고 불렀다. 11대 종손인 허주 이종악(虛舟 李宗岳 1726~1773)선생은 1764년 집 앞에서 배를 띄우고 반변천을 따라 오르면서 주변 풍광을 12폭 그림으로 남겼다. 그 가운데 일곱번째 ‘선사심진(仙寺尋眞)’은 신선이 살고 있을 것 같은 운치있는 절을 찾는 그림이며 12번째 마지막 그림 ‘반구관등(伴鷗觀燈)’은 반구정에서 민가에 켜진 등불을 바라본다는 주제로 그린 그림이다. 봄이 무르익은 사월초파일 무렵 5박6일의 뱃놀이 일정이었다. 이 터는 행촌 이암의 손자인 이증(李增1419~1480)이 안동에 자리를 잡으면서 그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의 둘째 아들 이굉(李汯)은 집 앞의 두물머리인 와부탄에 1513년 귀래정(歸來亭)을 세운다. 이어서 셋째아들 이명(李洺)이 1519년 이 자리에 임청각(臨淸閣)을 건립한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500년 역사를 지닌 고성(固城)이씨 종택인 1000평 99칸 규모의 한옥이 완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집 앞으로 철도가 지나가면서 훼손되어 현재 70칸 정도가 보존되고 있다. 그 때 철도에는 증기기관차가 달렸다. 옛 안동역에는 증기기차에 물을 공급했던 급수탑(근대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있다. 임청각 주인인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 1858~1932) 선생은 1911년 1월5일 가산을 정리하여 독립자금을 마련한 후 안동역에서 증기기관차를 타고 칼끝보다 날카로운 삭풍을 헤치며 만주 망명길에 올랐다. 그 때 바라봤던 급수탑일 것이다. 하지만 디젤기관차 시대로 바뀌면서 노선자체가 현재 역 건물 쪽으로 수십미터 이상 이동한 것 같다. 이후 급수탑은 기능을 상실하면서 역 경내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가장자리에 혼자 우두커니 서있다. 하지만 안동역 마저도 2020년 12월 딴 곳으로 옮겨갔다. 임청각 복원을 위한 철로 이전사업의 일환이다. ‘라떼’세대의 인기대중가요인 ‘안동역 앞에서’ 노래비도 세월이 흐른 뒤에는 후손들이 “역도 아닌 자리에 이 비석이 왜 있느냐?”고 되물을 것 같다. 이미 역으로서 기능은 사라지고 지역사회 문화소통공간으로 변모한 까닭이다. 그럼에도 역 광장 한 켠에는 법림사 옛터 오층전탑(보물)과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법림사 터에는 기차역을 만들었고 법흥사 터에는 종갓집이 들어왔다. 그럼에도 탑은 꿋꿋이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면서 두 곳이 모두 신라시대 창건된 장구한 역사를 가진 절터임을 말없이 알려 준다. 어쨋거나 모든 것은 변해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변해간다는 그 사실을 알려주는 증표라는 점에서 전탑과 급수탑 그리고 노래비와 레일 또 정자터가 주는 의미까지 읽어내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라 하겠다. 임청각과 귀래정 명칭은 중국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귀거래사(歸去來辭)’라는 작품에서 비롯되었다. 명시는 시대와 지역을 뛰어 넘기에 원저자의 고향집 뿐만 아니라 안동종택에도 잘 어울린다. 등동고이서소(登東皐以舒嘯)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을 불고 임청류이부시(臨淸流而賦詩) 맑은 물가에서 시를 짓는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2-11-15 06:00:00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승일교-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광복 후 삼팔선은 지도 위에 존재한 가상선이었지만 현실세계에도 군데군데 주요한 지점에는 반드시 표식을 남겼다. 강원도 철원 가는 길에서 삼팔선 표지석을 만났다. 여기에서 목적지인 승일교까지 차로 이동하는 데 30분가량 걸린다. 6·25 전쟁 이후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삼팔선 너머 북쪽으로 그 시간만큼 더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길가에 서 있는 ‘남북경협거점도시’라는 공익광고판을 스쳐 지나간다. 늦은 오후인지라 승일공원 주차장은 한적하다. 느긋한 걸음걸이로 강가로 천천히 내려갔다. 길이 끝나면서 가파른 내리막 시멘트 계단이 나왔고 그 계단마저 끝나는 급경사 부분은 물가까지 좁다란 철계단을 설치하여 다리를 강바닥에서 하늘 방향으로 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한탄강의 검은 협곡 위로 시멘트로 만든 두 개의 장대한 교각을 중심으로 반월형 구조물 3개가 서로 이어지는 당당한 연출이 장관이다. 그 옆으로 나란히 1999년 ‘한탄대교’가 개통되었지만 오히려 승일교(본래 이름이 ‘한탄교’였다)의 짝퉁처럼 보일 만큼 오래된 오리지널 다리로서 여전히 그 위엄을 과시했다. 다시 공원 방향으로 올라와서 다리 상판 위로 걸을 수 있는 길 입구를 찾았다. 건설한 지 오래된 다리인지라 차량 이동이 가능한 시절에도 13톤 이하 자동차와 장갑차만 통과할 수 있다는 표지판을 세웠던 모양이다. 특히 ‘대형 장갑차 통행금지’를 의미하는 표식을 함께 병기한 것이 전방 군사지역이라는 사실을 실감케 해준다. 대형 다리를 새로 만든 뒤에는 모든 기능을 새 다리에 넘기고 본래 다리는 사람과 자전거만 통과하는 관광레저용으로 바뀌었다. 밤에는 조명 빛까지 더해진다고 하니 야경 감상까지 하려면 따로 시간을 내야겠다. 길이 120m, 높이 35m, 너비 8m인 다리는 튼튼해 보이는 교각과 달리 상판 바닥과 난간은 100여 년 비바람 흔적을 고스란히 머금고서 바랠 만큼 바랬다.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으로 다리 위를 걸으면서 좌우와 전후 풍광을 찬찬히 음미했다. “···험한 세상의 다리 되어 너를 지키리···”라는 오래된 노래 가사가 딱 어울리는 곳이다. 남북을 이어주는 ‘험한 세상의 다리’가 건설된 뒤 탄생 이야기는 시대상을 반영하면서 수많은 사람들 입으로 전해졌고 또 가지에 가지를 치면서 변주에 변주를 거듭했다. 첫째, 승일교(承日橋)다. 이승만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고 한다. 북쪽의 김일성이 시작하고 남쪽의 이승만이 완성했다는 뜻이다. 삼팔선이 그어진 뒤 북쪽에서 필요에 의해 다리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나 6·25 전쟁으로 인하여 중단된 뒤 휴전이 되면서 남쪽에서 나머지 부분을 완공했다는 것이다. 둘째, 승일교(勝日橋)다. 남북이 극도의 긴장관계를 지속하면서 이 다리를 인근 군부대에서 관리하던 시절에는 ‘김일성을 이기자(勝日橋)’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더라고 유홍준 선생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권2에서 당신이 경험한 에피소드를 양념처럼 끼워 놓았다. 셋째, 승일교(昇日橋)다. 6·25 전쟁 때 한탄강을 넘어 북진하다가 장렬하게 산화한 박승일(朴昇日) 연대장 공적을 기리면서 붙인 이름이다. 이는 1985년 승일교 입구에 기념비를 세우면서 현재 정설로 굳어졌다. 유홍준 선생은 같은 책에서 1번 설을 완전 지지하는 내용만 실었다가 급기야 유족 측의 거센 항의를 받고서 3번 설을 추가하여 다시 출판했던 민감한 사안이기도 하다. 네 번째 새로운 설이 2006년 2월 28일자 철원신문에 등장했다. 지역주민인 박상용씨가 소장하고 있던 새로운 자료가 공개된 것이다. 1952년 미군 공병대 장교인 제임스 N 패트슨 중위의 일기였다. 영어로 된 원문 20여 장과 공사 현장 사진까지 포함된 것이라고 한다. 그 자료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때 공사가 시작된 미완성 다리를 1952년 미군 공병대가 나머지 부분을 완공했다는 내용이다. 남북 합작이 아니라 미일(美日) 합작인 셈이다. 이 설을 따른다면 착공 시기는 일제강점기까지 올라가게 된다. 어쨌거나 특이한 것은 그 와중에도 다리를 설계한 사람 이름과 경력이 전해 온다는 사실이다. 주인공은 김명여 선생으로 당시 철원농업전문학교 토목과 과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일본 규슈(九州)공대 출신이며 진남포 제련소 굴뚝을 설계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설계자는 단 한 명이다. 하지만 이후 등장하는 시공·관리 주최국을 모두 열거한다면 한국, 북한, 일본, 미국 등 4개국이다. 진짜 다국적 다리인 셈이다. 어쨌거나 승일교는 한반도의 아픔과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는 조형기념물이다. 시대적 필요성에 의해 시기를 달리하여 부분 부분 이어가며 만들긴 했지만 결국 하나의 다리로 완성될 수 있었다. 착공과 준공의 주관자가 달랐고 시공자와 공법이 각각 다른 까닭에 보통 사람 눈에도 아치의 크기와 교각의 모양이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런 역사성과 함께 아름다운 조형미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2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 다리의 건설은 양쪽을 연결하는 것이 목적이다. 남북 연결이라는 토목 공학적인 본래 의미가 부각되면서 당시 동네 주민과 공사장 인부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불린 이름이라는 1번 설에 대한 심정적 동조자는 계속 늘어나게 마련이다. 남과 북의 의도치 않은 합작은 말 만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에 의해 뒷날 ‘남북경협의 원조’라는 별명까지 붙게 되었다. 4번 설까지 보태지면서 합작의 의미는 더욱 도드라진다. 이럴 때는 한글이 최고다. 한자는 빼고 그냥 소리나는 대로 ‘승일교’라고 부르면서 2번 설, 3번 설을 포함하여 각자 시각에서 해석하고 자기 입맛에 맞는 것을 선택하고 지지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금강경은 ‘약견제상비상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라고 했다. 만약 모든 이름이 진짜 이름이 아님을 알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이름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2-10-06 16:59:54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닭은 나무 위로 올라가고 오리는 물 아래로 내려온다 장맛비 끝나니 땡볕이 뒤끝 작렬이다. 습도까지 높아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온몸에 땀이 흐른다. 하필 이런 날을 골라 일행 3인은 엄청 가파른 경사길을 자랑하는 묵호등대 아래의 ‘논골담길’ 골목투어를 자청했다. 긴비 끝에 몸을 말리는 일도 과히 나쁘지 않다고 하면서. 골목 끝 바다가 훤히 보이는 ‘바람의 언덕’에 자리잡은 에어컨 바람 가득한 카페에 앉아 땀을 식히며 급히 팥빙수를 찾았고 H는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 커피)’를 주문했다. 여기까지는 일상인지라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D는 ‘아연따(따뜻한 아메리카노 연하게)’ 그리고 ‘얼음 3조각 추가’를 요구했다. 주문할 때 길게 설명해야 하고 또 바리스타에게 제대로 전달되는지 그리고 커피가 나올 때까지 예의주시해야 한다. 차가운 것을 마시지 못하는 체질인지라 더운 여름날 나름의 비법으로 개발한 신제품(?)이지만 동시에 밤잠에 방해되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까지 염두에 둔 거의 처방전 수준이기 때문이다. 강원도 남쪽 해변에 있는 묵호(墨湖)라는 지명은 조선 후기 순조 때 동해안 해일피해 복구를 위해 지역을 시찰하던 강릉대도호부 이유응 부사가 지었다고 한다. 바다의 물빛이 검고 물가의 물새도 검은 빛깔이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오이진(烏耳津)이라고 불렀다고 하니 예로부터 ‘검은 것’이 지역을 대표하던 이미지였던 모양이다. 현재도 항구의 무연탄과 석탄의 많은 물동량이 묵호라는 이미지를 이어가고 있다. 바다를 굳이 ‘호수’라고 부른 것도 해일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풍수적 비보(裨補 도와서 모자란 것을 채움) 성격이 강했을 것이다. 동해의 항구마을은 정동진 아야진 주문진 등 세 글자 지명이 많다. 묵호진동(墨湖津洞)이란 동네이름 속에 ‘묵호진’이란 세 글자가 여전히 그 흔적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1980년 삼척 북평읍과 명주군 묵호읍이 합해지면서 동해시(東海市)가 되었다. 드디어 호수 호(湖)자는 본래 의미인 바다 해(海)자를 찾게 되었다. 지명도 이렇게 시절 인연을 따라 바뀌어가기 마련이다. 묵호등대 아랫마을은 70년 근대항구 역사의 변화무쌍함 속에서도 현재 그 시절 그 모습으로 남아있는 귀중한 공간이다. 70년대 명태 오징어가 지천으로 넘쳐나던 시절, 빈손으로 와도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이었다. 희망을 찾아 사람들이 몰려왔고 해안가 언덕 위에는 얼기설기 급하게 지은 판잣집들이 층층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호경기는 길지 않았다. 80년대 이후 연근해 수산물 생산이 급감하면서 일거리가 없어진 사람들은 하나 둘 마을을 떠났고 동네 집은 차츰차츰 빈집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동네사람들과 지방자치단체가 힘을 합쳐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마을살리기 방안을 찾았다. 그리하여 과거의 존중을 통해 미래를 재충전하는 ‘추억의 감성공간’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언덕길은 논길이 되었다. 손질한 명태와 오징어를 말리기 위해 운반하던 길이 논처럼 질척거렸기 때문이다. 붉은 언덕은 지게가 흘린 물로 언제나 질퍽했다. 머리에 인 고무대야 행렬도 그 물을 추가했다. 주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이주한 탓에 어촌임에도 농촌 이름을 붙였다. 언덕마을은 다랭이 논을 연상케 했다. 그래서 ‘논골’이 되었다. 지게꾼 없는 당시 묵호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묵호의 가장 낮은 바닷가부터 세찬 바람이 부는 언덕 꼭대기 덕장까지 종일 묵호의 끝에서 끝을 이어 나갔기 때문이다. 필수품은 장화였다. 가부장적 시절에는 그 중요성을 ‘마누라 없이 살아도 장화 없이 못 산다’고 했지만 양성평등시대가 되면서 ‘신랑 없이 살아도 장화 없이 못 살고 신부 없이 살아도 장화 없이 못 산다’로 슬그머니 담화(담벽에 그린 그림)의 내용이 고쳐진 것을 보면서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동네 안 언덕길에 있던 명태와 오징어를 늘어놓던 빨랫줄 수준의 덕장은 이미 흔적도 없이 대부분 사라졌다. 하지만 이를 담 그림으로 남겨 두었다. 건너편 언덕 위에는 도로명도 ‘덕장ㅇ길’이다. 길가에는 ‘ㅇㅇ수산 언바람 묵호태’ 혹은 ‘ㅇㅇ네 덕장’이라는 간판과 함께 중소기업형 덕장이 즐비하다. 수입한 냉동오징어와 명태를 기계를 이용하여 손질을 마친 후 널어서 말리는 시설이었다. ‘언바람 묵호태’는 11월 말에서 이듬해 3월 말까지 눈비를 맞히지 않고 전통 해풍 건조방식으로 제조하는 데 20여일이 소요된다고 한다. 가공방식은 바뀌어도 ‘묵호태’라는 전통적 이름은 여전히 남아있다. 말린 명태를 ‘언바람태’라고 하는 이름이 정겹다. 주변을 찬 바람으로 얼게 만드는 겨울바람을 ‘언바람’이라고 부르는 지역말도 그대로 살아있다. 겨울에 다시 덕장구경을 와야겠다는 마음을 일어나게 만든다. 절집에 전해오는 파릉호감(巴陵顥鑑 당나라 말기) 선사의 오래된 말씀을 급히 소환했다. 계한상수(鷄寒上樹)하고 압한하수(鴨寒下樹)니라 닭은 추우면 나무로 올라가고 오리는 추우면 물로 내려가느니라 그 시절 사람들이 함께 언덕마을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지만 거기에도 상하(上下)가 있었다. 마을 아래쪽에 사는 사람은 주로 허드레 뱃일을 했고 마을 위쪽에 사는 사람들은 주로 명태 오징어 말리는 덕장 일을 했다. 따라서 아침이면 바닷가 쪽으로 내려가는 이들도 있었고 반대로 언덕 쪽으로 올라오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보니 관광객도 해안가 혹은 백사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언덕 위쪽 등대 혹은 놀이시설 그리고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이들로 나누어진다. 닭과 오리의 삶의 방식 차이는 인간세계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고나 할까.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2-08-05 06:00:00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연천역에서 급수탑의 독백을 듣다 벌써 이 자리를 지킨 세월이 100년입니다. 요즈음 하늘은 짙은 회색 구름이 낮게 드리웠고 가까이 보이는 한탄강 물빛도 덩달아 잿빛입니다. 장마철인지라 무시로 빗줄기가 쏟아집니다. 세찬 소나기를 시도 때도 없이 온몸으로 두들겨 맞고 나니 이런저런 생각이 일어납니다. 동시에 옛일을 되돌아보니 내(급수탑)가 연천역에 자리를 잡은 것도 순전히 물 때문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서울 용산역에서 동해안 원산까지 철길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1912년 서울과 원산 중간 지점인 연천역이 생겼습니다. 증기기관차는 물로 움직입니다. 200㎞ 남짓한 경원선 전 구간을 주파하기에는 용산역의 1차 급수량으로는 물이 모자랐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중간 기착지인 연천역에 2차 급수를 위한 시설이 필요했습니다. 경원선 유일한 급수탑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도 붙었습니다. 괜히 우쭐해졌습니다. 교통량의 예측대로 상자형 급수탑에서 제공하는 물 공급은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상자형 급수탑 시절은 잠깐이었습니다. 연천역에서 멀지 않은 철원역에서 금강산 가는 철도가 뚫리게 됩니다. 한반도 제일의 불교성지인 동시에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금강산을 찾는 관광객은 날로 늘었습니다. 게다가 원산에서 함흥·청진 방향으로 이어지는 철도까지 개통되면서 물동량과 이동객이 기하급수로 증가합니다. 기존의 급수탑으로는 물이 부족했습니다. 급기야 3배 용량인 23m 높이의 원통형 급수탑을 다시 만들어야 했습니다. 드디어 나(급수탑)의 전성시대가 온 것입니다. 급수탑은 기능도 기능이지만 그 자체로 관광거리였습니다. 별다른 큰 건물이 없던 시절인지라 커다란 굴뚝 혹은 등대 같은 급수탑 자체가 볼거리인 까닭입니다. 게다가 본래 기능인 수증기를 내뿜으며 탄수차(炭水車)에 물을 공급하는 그 과정도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연천역 정차시간은 꽤 길었습니다. 여행객과 지역민이 함께 어우러지는 공간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습니다. 역 주변에 번개장터가 형성되었고 간식거리와 지역 특산물까지 상거래가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남북 분단과 6·25전쟁은 평화롭던 주변의 모든 것을 바꾸었습니다. 역사(驛舍)는 전쟁 와중에 불타 없어졌습니다. 역 건물은 없어도 철로만 무사하면 군사용 열차가 다닐 수 있습니다. 그래도 급수탑은 시멘트로 만든 튼튼한 구조물인 까닭에 곳곳에 총탄 자국을 남기면서도 살아남았습니다. 물론 급수탑이 없어지면 기차가 움직일 수 없다는 쓸모가 한몫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자 역 건물은 얼기설기 다시 지으면서 본래 기능을 회복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엄청난 변화가 생겼습니다. 전혀 본 적이 없는 신형 디젤기관차가 등장한 것입니다. 한동안 증기차와 디젤차가 교대로 달리는가 했더니 시간이 흐르면서 증기차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디젤차 숫자는 차츰차츰 늘었습니다. 중간 휴식이 생겨서 좋긴 했습니다만 휴식 횟수가 잦아지면서 한편으로 불안한 마음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적중합니다. 증기차가 사라지면서 완전한 디젤기관차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급수탑도 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우두커니 서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디젤기관차가 오가는 것을 바라봐야만 했습니다. 혹여 디젤차에 기술적으로 큰 문제가 생기면서 다시 증기차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 아닌 기대감도 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나(급수탑)의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능률과 효율 그리고 속도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경제개발 시대에 무용지물이라면서 뜯겨나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습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급수탑 기능을 정지시킨 디젤기관차 시대도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전동차 시대가 온 것입니다. 옛 역사(驛舍)는 이미 폐쇄되어 역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담장 안쪽으로는 전철 복선 공사를 위한 바닥 기초를 닦았고 하늘에는 급수탑보다도 더 높게 전동차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한 시설들을 세웁니다. 한두 개가 아니라 줄을 지어 즐비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옛 역 건물을 비켜선 자리에 우람한 새 건물과 함께 왕복 노선의 양쪽 플랫폼을 지붕 덮은 기다란 구름다리가 이어줍니다. 내년(2023년)에 개통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기의 급수탑은 야외전시 미술작품인 양 사이좋게 서 있습니다. 지금 나를 찾는 사람들은 형님인 상자형 작은 급수탑을 동생인 줄 압니다. 크고 우람한 원통형 급수탑이 당연히 형님일 거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 오해를 풀어주려고 우리 둘 앞에 설치된 몇 개의 세련된 안내판에는 화려했던 지난 시절의 이력은 물론 형과 아우의 서열을 족보처럼 남겨 두었습니다. 또 곁에는 미니어처 같은 움직이지 않는 증기기관차를 축소형으로 만들어 우리 형제를 달래려고 장난감처럼 갖다 놓았습니다. 주변에는 정원을 만들고 통로에는 장식용 레일을 깔았습니다. 철도공원 겸 야외 박물관이 된 것입니다. 다소 초라하긴 해도 남아 있는 옛 역사는 60여 년이 되었습니다. 특히 2기의 급수탑은 100년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고 그 존재 의미를 인정받은 덕분에 2003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근대사를 이 공간에서 지켜 온 공로 덕분에 우리 급수탑 형제는 다시 이 자리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은 변해가게 마련입니다. 태어날 무렵 주인은 일본이었고 광복 후 한동안 북측에서 관리하더니 전쟁 후에는 대한민국으로 담당자가 바뀌었습니다. 또 100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갖가지 사연을 안고서 우리 앞을 지나갔습니다. 이제 인근 동네의 청춘 남녀가 찾아와서 공원 벤치에 앉아 밀어를 속삭이는 공간으로도 활용됩니다. 또 휴일이면 급수탑 앞에서 관광객이 인증샷 찍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립니다. 여전히 역할이 있고 또 그동안의 노고와 가치를 알아주고 또 찾아주니 참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2-07-05 14:55:18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먹물의 흑색과 종이의 백색으로 묘역을 장식하다 묘역은 특이했다. 여느 무덤과는 확연히 다른 점은 비석은 대리석(몸체)과 화강암(받침)인 흰색이었다. 그 외 상석, 장명등, 무인석, 망주석 등은 각섬석, 운모편암으로 불리는 검은색 돌이었다. 화강암 받침돌마저 세월의 더께로 인해 거무데데해졌다. 흰색과 검은색의 대비감이 푸른 잔디의 봉분 그리고 주변과 어우러지면서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형언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이 자리의 주인공인 미수 허목(眉叟 許穆·1595~1682)) 선생이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일까? 능히 그랬을 것이라고 감히 상상해본다. 왜냐하면 비문 뒷면에 새겨진 글은 당신이 이 세상과 인연을 다하기 2년 전 1680년에 직접 지은 글(自銘自撰)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스스로 지은 글만큼 더 좋은 비문은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다. 묘역의 핵심인 비석을 자찬할 정도라면 묘역의 디자인도 남에게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닐까. 동방제일의 전서체(篆書體·상형문자 모양의 옛 한자 글씨체) 글씨 대가답게 먹과 벼루의 검은색 그리고 종이의 흰색을 이용한 당신만의 마지막 무대를 꾸민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난다. 특이한 묘역만큼 가는 길도 예사롭지 않았다. 내비게이션과 티맵의 안내를 따라 갔는데 종착지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다시 골목길을 반복하고 좁은 산길을 거듭 달렸다. 길 어귀 어느 곳에도 안내판은 없었고 단지 “목적지 인근입니다. 안내를 종료하겠습니다!” 하는 기계음 멘트가 끝나는 순간 그대로 갈 곳을 잃어버린 미아 신세를 반복했다. 다행히 초여름이라 해가 길다. 이제 믿을 것이라고는 아날로그밖에 없다. 마지막 안내를 받을 곳은 결국 사람뿐이기에 연천군 왕징면 면사무소를 찾았다. ‘민간인 통제구역’ 안쪽에 있다고 했다. 진입로에 있는 안내초소 위치를 알려 준다. 얼마 후 커다란 색색의 전구 4개가 세로로 땅 위에 세워진 신호등이 있는 건물이 보였다. 무슨 일로 왔냐고 묻는다. 목적지를 말했더니 “성묘 가는군요”라며 알아서 정리해준다. “성묘는 아니고 답사···”라고 혼잣말로 어물어물 말끝을 흐렸다. 출입허가에 필요한 몇 가지 절차를 밟은 뒤 졸지에 ‘성묘객’ 표찰을 달고 군용 차량의 안내를 받으며 민통선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지도 않았던 안보관광까지 겸하게 되었다. 곳곳에 모심기를 마친 논들이 보였고 그렇게 찾아 헤매던 ‘미수 허목 묘역 150m’ 안내판이 나타난다. 살던 집인 ‘은거당’ 자리도 인근에 남아 있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그냥 허허로운 벌판일 뿐이다. 농사철에 맞추어 잠시 옛터에 들어온 후손을 만난 덕분에 ‘미수 허목 선생 소전(小傳)’이란 안내책자까지 얻게 되었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인연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안내 소책자는 선생의 일생을 전반적으로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절집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다. 젊었을 때 명산대찰을 유람하면서 많은 승려와 교류했고 특히 정응(正凝) 대사와 친분이 두터웠다고 했다. 〈증부도정응사서(贈浮屠正凝師序·정응 스님에게 준 글)〉에서 보듯 교제 범위와 사상적 한계를 두지 않는 걸림 없는 사유세계의 자유로움을 엿보게 한다. “일찍이 문소(聞韶)에 갔다가 정응 대사를 만났다. 함께 밤낮으로 기뻐하며 노닌 지 한 달이 지났으나 항상 하루 같아 조금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나는 유교를 배웠고 정응은 불교를 공부하였으니 서로 신봉하는 바가 같지 않다. 서로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정이 없을 것인데 오히려 조금도 소원하지 않고 이처럼 좋아함은 무슨 이유일까? 나는 이미 나의 즐거움을 즐거워하고 정응은 또 그의 즐거움을 즐거워한다. 즐거움과 즐거움이 서로 만났기에 서로 다르다는 것을 잊음인가?”(양태진 미수 허목 선생 소전 36쪽) 미수 선생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때문이다. 척주는 강원도 삼척의 옛 지명으로, 선생께서 지방관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해일 피해를 막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흔히 ‘동해송(東海頌)’이라고 부른다. 그 영험으로 건립 이후 해안의 파도나 풍랑으로 인한 인근 주민의 피해가 사라졌다는 전설을 간직한 채 지금도 지역주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화재(火災)와 수재(水災)를 막아준다는 속설까지 더해져 그 글씨와 시는 전국 호사가들의 애장품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짐작건대 전서체 글씨가 주는 외형적인 힘과 시가 주는 내용적 힘이 합해진 결과일 것이다. 육지 중생과 바다 중생이 서로 도와 함께 평화롭게 살자는 기원문의 일부는 이러하다. 천오구수(天吳九首) 괴기일고(怪夔一股) 표회차우(飇回且雨)··· 해외잡종(海外雜種) 절당수속(絶黨殊俗) 동유함육(同宥咸育) 머리 아홉 달린 해신들과 외발 달린 괴물짐승 태풍 몰고 비 뿌리네··· 바다 밖의 잡종들도 무리와 풍속은 다르지만 용서하며 함께 살아가네 돌아오는 길에 임진강 저녁 풍광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카페에서 한숨을 돌리며 일정을 함께한 도반 M과 답사의 무사 마감을 자축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둘이 가라'고 했던가. 내비게이션을 탓하면서 중도에 포기할까 하다가 곁에 있는 도반의 격려 때문에 완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도와준 오늘의 모든 인연들께 다시 한번 두 손 모아 감사드렸다. 이제까지 다녔던 답사처 가운데 남의 손을 가장 많이 빌린 까닭이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2-06-05 18:4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