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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11 FRI
브랜드칼럼
이한우 교수
이한우 교수 asia@sogang.ac.kr
  • - 서강대 정치학 박사
    -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 역임
    -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39) 제국이 머물다 간 '달랏' .. 고산의 숨결이 살아있는 '사파'

    여행 포털 ‘여기어때’가 한국인이 2025년에 가장 가고 싶은 여행지로 일본, 유럽 다음으로 베트남을 꼽았다고 한다. 개별 국가로 한다면 베트남이 2위에 오른 셈이다. 베트남이 그다지 멀지 않고 ‘가성비’ 높은 여행지이기에 여전히 인기 있는 것 같다. 올여름 휴가 때도 많은 이들이 베트남으로 향할 모양이다. 많은 이가 다녀온 다낭을 벗어나 이제는 다른 지역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작년 10월 초 랭키파이의 베트남 선호 여행지 트렌드 지수에서 하노이, 달랏, 하롱베이, 사파가 1위부터 4위까지 차지했다. 여기에서 하노이와 하롱베이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곳이니 달랏과 사파로 향해 보는 것도 좋겠다. 더위를 피해 바다로 풍덩 들어가는 것도 괜찮겠으나 바람이 불어오는 산으로 향해 볼 만하다. 얼마 전 안전사고로 여행객들이 희생되기도 해 안전에 한껏 유의하면서 말이다. 베트남이 늘 더운 나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 남부와 중부는 늘 덥다. 북부는 살짝 4계절이 있고 겨울이 우리 가을 같은데 그곳도 긴 기간 동안 덥다. 여름 한낮에 40도를 넘는 때도 종종 있다. 베트남에 더운 곳이 많다 보니 프랑스가 베트남을 지배하면서 더위를 피할 지역을 찾는 것도 필요했다. 베트남은 19세기 후반부터 1945년까지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식민지 시기에 피서지로 개발된 대표적 휴양지가 바로 남부의 달랏과 북부의 사파다. 서늘한 휴양지, 봄의 도시 달랏 달랏은 베트남 서남쪽 해발 1500m 럼동성의 럼비엔 고원 지대에 있다. 식민정부는 서부 고원지대를 장악하기 위해 탐사대를 보내곤 했다. 이곳이 휴양지로 된 것은 1890년대 알렉상드르 예르생이 이 지역을 탐사하고 당시 식민정부 총독 폴 두메르가 개발하면서부터다. 예르생이 달랏을 탐사한 1893년을 달랏 탄생의 기점으로 잡기도 한다. 그는 페스트균을 발견한 의사로 유명하다. 프랑스는 1858년부터 베트남을 침략해 일부 지역을 빼앗기 시작했고 1883년 전국을 지배하게 됐다. 1887년에는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포함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을 수립했고 이후 라오스를 이에 편입했다. 1941년부터는 일본이 인도차이나를 이중 지배하게 됐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호찌민을 중심으로 한 베트민(월맹) 세력이 1945년 9월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프랑스가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화하려고 획책해 1946년 말부터 1954년 5월까지 양자 간에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 중에 프랑스는 바오다이(Bao Dai) 황제를 내세워 1949년 ‘베트남국’을 수립했다. 1954년 7월 제네바협정으로 프랑스가 완전히 물러가고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베트남민주공화국’은 북부, ‘베트남국’은 남부를 통치하게 됐다. 달랏은 이러한 베트남 근현대사를 품고 식민지 휴양도시로서 발전해갔다. 1919년에 쑤언흐엉(Xuan Huong) 호수가 조성됐다. 달랏 시내 중심에 위치한 쑤언흐엉은 춘향(春香)이란 뜻이다. 발전소를 세우기 위해 댐을 만들며 작은 웅덩이였던 곳이 호수로 됐다. 식민정부는 이를 통해 전기와 상수를 공급했다. 1922년에는 그랜드 호텔, 즉 현재의 달랏 팰리스 호텔이 문을 열었다. 1938년에는 달랏 기차역이 완공됐다. 지금은 기차가 달랏역에서 출발해 짜이맛까지 관광용으로 운행되고 있는데, 식민지 시기에 이 철로가 판랑-탑짬까지 이어졌고 거기서 남으로 사이공, 북으로 냐짱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이 유산으로 베트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역이 됐다. 달랏 대성당은 1942년에 완성됐다. 고딕 양식에 표면을 분홍색으로 칠해 호찌민시 떤딘 성당과 다낭 대성당에 견줄 만하다. 달랏 대성당도 다낭 대성당처럼 첨탑 위에 닭 조형물을 얹어 놓았다. 도멘 드 마리 성당도 유서 깊은 성당이다. 이 성당은 1930년 완공되었다가 1943년에 재건되었다고 한다. 지붕은 베트남 서부 산간지대 주택 모양을 본떴고 벽은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건축 양식을 모방했다고 한다. 수녀원 성당으로 기능하고 있다. 1930년대에는 베트남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의 여름 궁전이 세워졌다. 궁전이라고 하지만 근대식 건축 형식을 따랐다. 현재 관람할 수 있는 곳은 제3 별궁이다. 제1 별궁은 1년여 전에 문을 닫아 아직 열지 않았고, 제2 별궁 구역은 게스트하우스로 쓰이고 있다. 그의 부인 남프엉(Nam Phuong) 황후의 별장도 달랏에 작은 규모로 지어졌다. 남프엉은 근현대사의 풍랑 속에서 품위를 지켰기에 지금도 베트남인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바오다이는 비운의 황제였다. 그는 프랑스 식민 지배하에서 국내 통치를 담당하다가 1945년 3월에 일본이 직접 통치하면서 세운 ‘베트남제국’의 국가수반으로 동원됐다.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 시기인 1949년에 프랑스는 바오다이를 앞세워 ‘베트남국’을 수립했다. 1954년 남북으로 분단된 후 바로 다음 해 10월에 바오다이 정부에서 총리였던 응오딘지엠이 주도하여 ‘베트남국’을 ‘베트남공화국’으로 전환하면서 바오다이는 폐위되고 말았다. 남북 분단 시기에 달랏은 교육 도시이자 남부 문화의 산실이기도 했다. 카페 뚱(Cafe Tung)은 지금도 1960년대, 1970년대 다방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남부의 유명한 대중가요 작곡가 찐꽁선도 달랏 지역에서 작곡을 시작했다. 그는 여기에서 그의 곡을 주로 불렀던 카인리를 만났다. 그들은 사이공(현 호찌민시)으로 옮겨 음악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영화 <나와 찐>(Em va Trinh)은 찐꽁선과 카인리가 카페 뚱에서 만나는 장면을 연출했다. 달랏 시내를 한눈에 보려면 로빈 힐에 올라 시내를 눈에 담고 케이블카를 타고 발밑으로 펼쳐진 소나무 숲을 보는 것도 좋다. 케이블카는 쭉럼(Truc Lam·죽림) 불교 선원 부근에 도착하게 된다. 쭉럼 선원은 선원이라는 명칭 그대로 차분한 분위기 속에 수행하기에 알맞은 분위기를 지녔다. 그 경내에선 발걸음도 조심스레 디뎌야 할 것 같다. 케이블카를 타지 않는다면 리엔크엉 공항 가는 길에 잠깐 들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쭉럼 선원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지녔다면 린프억(Linh Phuoc) 불교사원은 화려한 장식을 가득 담았다. 도자기 파편으로 사원 건물과 용을 장식했고, 거대한 종과 불상, 아름다운 조형물로 사원을 가득 채웠다. 여기에 더해 노란 국화꽃으로 장식한 관세음보살상은 바람에 꽃을 날리며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본래 달랏 지역은 소수종족의 땅이었다. 코호족, 마족, 므농족 등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달랏 시내만 가면 이제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없다. 평지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와 그들의 흔적을 찾기 어렵게 만들었다. 소수종족 문화와 인도차이나 최고봉을 품은 사파 사파는 1920년대 프랑스 식민지하에서 북부의 휴양도시로 개발됐다. 해발 1650m의 고지대다. 사파는 중국의 윈난성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베트남 북부 라오까이성에 속해 있다. 3143m 높이의 동남아 대륙부 최고봉인 판시판산을 곁에 두고 있다. 달랏과 달리 사파는 1~2월에 우리의 늦가을 또는 초겨울 같은 날씨로 춥다. 사파는 몽(Hmong)족의 땅이다. 자오족, 따이족 등도 함께 이 땅에 산다. 몽족은 흐몽이라고 잘못 불리기도 하는데, 중국에서는 먀오족이라고 한다. 달랏과 달리 사파 시내에는 소수종족 사람들이 거리에 넘쳐난다. 사파 중심에 있는 석조 성당 앞 광장에는 소수종족 어린이들이 놀이를 하다가 물건을 팔기도 한다. 이 성당은 단순화한 유럽풍 고딕 양식으로 소박하게 지어졌다. 함롱산에 오르면 사파 시내와 호수 전경을 볼 수 있다. 소수종족 마을을 간단히 보려면 깟깟 마을을 다녀오면 된다. 어떤 이는 이곳이 테마파크처럼 됐다고 아쉬움을 토로한다. 사파가 이제 너무 인공적이고 상업화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수종족을 만나보지 못한 여행객에게는 이채롭게 보인다. 소수종족의 자연 마을을 보려면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할 것이다. 다랑논 트레킹을 하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먼 거리에 있는 리조트에서 ‘속세’를 잊고 며칠 지내다 오는 것도 생각해볼 만하다. 페이스북(현 메타) CEO 마크 저커버그가 사파의 토파스 에코로지에서 쉬고 갔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시내에서 먼 거리에 있는 곳이다. 동남아 대륙부 최고봉 판시판 정상에 오르려면 푸니쿨라 열차를 타고 케이블카를 타고 또 열차를 타고 가야 한다. 그런 후 계단을 오르면 3143m 정상에 이른다. 백두산이 2744m, 한라산이 1950m인 것과 비교된다. 케이블카를 타는 동안 아래에 펼쳐진 다랑논의 장관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산악지대 주민들은 산비탈을 깎고 축대를 쌓아 다랑논을 만들었다. 여행객들에게야 그 풍경을 감상하며 즐기는 곳이지만, 주민들에게는 살아가려는 고된 노동의 터다. 한동안 유행했던 일요일 박하 시장의 ‘사랑 시장’ 이야기는 이제 전설로 남았다. 사랑했던 사람들이 다른 이와 결혼한 후 옛 연인을 잊지 못하자 ‘사랑 시장’에서 1년에 한 번 만날 기회를 준다는 이야기다. 박하 시장은 사파에서 좀 떨어져 있는 가장 큰 소수종족 시장인데,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관광객을 끌기 위해 만든 신화인지 확인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자 이제 떠날 시간이다. 필자 주요 약력 ▷서강대 정치학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39) 제국이 머물다 간 달랏 .. 고산의 숨결이 살아있는 사파
  •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38) 베트남 지방조직도 '다이어트'

    베트남이 중앙정부 조직 개편에 이어 지방정부 조직 개편에 나섰다. 이번 조직 개편은 비단 행정부, 국회 등 국가기관에 국한하지 않는다. 공산당 중앙 조직이 이미 개편됐고 지방 위원회도 개편되고 있다. 공산당과 정부는 현재 지방정부 개편작업을 진행하고 있고 6월 말까지 이를 완료할 예정이다. 베트남 정치체계가 1975년 통일, 1976년 7월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출범과 함께 재편된 이후 가장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만하다. 이러한 대대적 정치체계 개편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개편이 가져올 정치사회적 영향은 무엇일까? 중앙 정치체계 개편 베트남 정치체계는 공산당이 국가와 사회를 영도하는 체계다. 공산당은 5년마다 전국대표대회(공산당대회)를 개최하여 위원 200명으로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한다. 이 중앙집행위원회가 매년 두 차례 이상 회의를 열어 국가 정책을 심의하고 그 방향을 제시한다. 당 중앙집행위원회 산하에는 중앙사무처, 중앙감찰위원회가 있고, 6개 위원회가 있었는데 이번에 중앙조직위원회, 중앙내정위원회, 중앙정책전략위원회, 중앙선전교육동원위원회 등 4개로 통폐합됐다. 공산당대회가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며, 중앙집행위원회가 그 위원 가운데 위원 15~20명으로 정치국을 구성하고, 정치국 서열 1위인 인사가 총비서(서기장)에 오르는 체계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국회는 상무위원회와 9개 위원회 중 4개 위원회를 통폐합하여 폐지하고 2개 위원회를 신설하여, 상무위원회와 7개 위원회로 재구성됐다. 중앙행정조직은 18개 부에서 5개 부를 통폐합하여 폐지하고 1개를 신설하여 총 14개 부로 개편됐다. 이에 대해서는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35) 정부조직 '20%' 군살빼기 …새로운 도약 노리는 베트남”(2025년 2월 26일자)에서 자세히 서술한 바 있다. 최근 국회는 차기 국회의원 및 지방 인민의회 의원 선거일을 예년의 5월과 달리 내년 3월 15일로 정하면서 현 의원들 임기를 그때까지로 단축하는 결정을 내렸다. 또한 국회의원 선거 후 첫 회의를 60일 이내에 소집하는 것에서 45일 이내에 소집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기존에는 국회가 국회의원 및 지방 인민의회 선거를 5월에 치른 후 첫 회의를 7월에 열었는데, 이는 1월에 열리는 공산당대회 이후 지나치게 긴 기간이었다. 이번에 내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당기며 이러한 결점은 해소될 것이다. 보통 공산당대회에서 선임되는 중앙집행위원회 위원들이 차기 국회 및 행정부를 비롯한 국가기관의 주요 직위를 담당한다. 공산당대회 이후 열리는 국회의원 선거 후 첫 국회가 국가주석 및 부주석, 국회의장 및 부의장, 총리, 부총리, 장관 등 국가기관의 주요 인사들을 선임하게 된다. 지방 정부 조직 개편 현재 중앙 조직과 더불어 지방 조직 개편작업이 대대적으로 진행 중이다. 기존의 베트남 지방정부 조직은 3급으로 구성됐는데, 정부는 이를 두 개 급으로 개편하려고 한다. 기존의 3급은 (1)6개 중앙직속시 및 57개 성(tinh) (2)중앙직속시 또는 성 산하 시, 농촌의 현(huyen) 또는 티싸(thi xa), 도시의 꿘(quan), (3)농촌의 싸(xa) 또는 티쩐(thi tran), 도시의 프엉(phuong)으로 구성됐다. 이 가운데 63개 중앙직속시 및 성은 34개로 개편될 예정이다. 6개 중앙직속시 가운데 이번에 개편되는 곳은 호찌민시, 하이퐁, 다낭, 껀터이며 변경되지 않는 곳은 하노이와 후에이다. 성 가운데 48개가 개편되며, 9개는 변경 없이 지속된다. 현, 티싸, 꿘을 포함하는 중간급 지방 조직은 폐지될 예정이다. 이로써 지방 조직은 중앙직속시 및 성, 그리고 싸 및 프엉 수준의 기초 단위와 특구로 구성될 것이다. 싸급 기초단위 수도 60~70% 줄일 예정이다. 그렇다면 기초단위 크기가 현재보다 더 큰 규모로 확대되리라 예상된다. 지방에서 현급 조직의 폐지는 비단 지방행정기관만이 아니라 공안, 검찰, 법원 등 사법기관과 사회단체 총괄조직인 베트남조국전선, 그리고 공산당 위원회 조직 재편에도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다. 통치 메커니즘의 변화와 지속 공산당과 정부는 지방 정치체계 개편으로 통치와 행정의 효율성을 증대시키리라 기대하고 있다. 베트남 지도자들은 그간 지방 정치 조직이 3급으로 구성되어 상호 기능이 중첩되는 등 비효율적이었다고 지적한다. 이에 따라 지방의 중간급인 현을 폐지하고 현의 기능을 상위의 성과 하위의 싸에 분산하고자 한다. 이는 중앙에서 기층에 이르는 거리를 짧게 하여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증가시킬 수 있다. 그간에도 공산당 정치국은 중앙직속시 및 성급 공산당위원회 비서뿐만 아니라 지방 인민의회 주석(의장) 및 행정조직인 인민위원회 주석(위원장)의 인사에 관여해왔다. 제도적으로는 당 중앙이 그 후보를 추천하여 지방 인민의회가 동급의 인민의회 및 인민위원회 주석 및 부주석을 선임해왔다. 당 중앙이 추천한 후보는 직책별로 단일 후보이기에 실제로는 지명한 것과 마찬가지다. 향후에도 이 메커니즘이 지속될 것이므로 당 중앙의 중앙직속시 및 성급 통제와 성급의 싸급 기초단위에 대한 통제가 이어지면서 중앙의 지방 기관에 대한 장악은 지속될 것이다. 베트남 정부는 중간급 지방행정조직 축소와 공무원 수 감축을 통해 재정을 확충하고자 한다. 더불어 각급 국가기관에서 공무원들에게 임기 만료 이전에 퇴임하도록 권유하고 있는데, 최근에 퇴임하는 공무원들이 증가하며 퇴직금 부담이 일시에 증가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유능한 인재들이 공공 부문에서 민간 부문으로 빠져나갈 가능성도 엿보인다고 한다. 공무원 수 감축을 통한 정부의 재정 확충은 공무원 급여 인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급여 인상이 곧 부패 감소로 직결되지 않는 점도 있다. 지방 성의 통합은 지방의 균형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일부 통합되는 성 가운데 내륙에 있던 성은 가급적 해안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안에 접한 성과 통합하여 물류의 원활화를 도모하고자 한다. 북부의 하이퐁시-하이즈엉, 흥옌-타이빈, 하남-닌빈-남딘의 통합이 그 사례다. 중부에서는 꽝응아이-꼰뚬, 자라이-빈딘, 닥락-푸옌, 럼동-닥농-빈투언 등의 통합이 그 사례다. 남부에서는 호찌민시-바리어-붕따우-빈즈엉, 동탑-띠엔장, 껀터-속짱-허우장의 통합 등이 그 사례다. 한편 통합 이후 거대 중앙직속시 또는 성이 등장하는 문제도 있다. 호찌민시가 그 대표적 사례가 될 것이다. 호찌민시는 바리어-붕따우 및 빈즈엉성과 통합될 예정인데 지역총생산(GRDP)에서 수위를 달리는 세 지역의 통합은 경제적 측면에서 거대 도시를 만드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통치의 효율성·효과성 증진과 권력 강화 이러한 정치체계의 전면적 개편은 또럼 공산당 총비서가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정치체계 개편은 거버넌스의 향상으로 통치의 효율성과 효과성을 높일 것이다. 더불어 2045년까지 선진국 대열에 들려는 베트남의 야심 찬 목표를 달성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재편 과정이 지나치게 급속히 추진되고 있어 문제점도 있는 듯하다. 예컨대 복수의 시 또는 성을 통합하면서 어느 명칭을 채택할 것인가 하는 논쟁도 있다.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지방의 자율성이 강한 전통을 갖고 있는데, 기초 단위인 싸급 규모를 확대하면 전통적 마을의 범위를 넘어서는 기초 행정단위가 출범하게 된다. 또한 일정 기간에는 정책 결정과 집행에 혼선이 있을 수 있다. 이렇게 급속히 정치체계를 개편하는 것은 명목상 효율적 정부를 통하여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하려는 데 있지만 한편으로는 내년 1월에 개최될 예정인 제14차 공산당대회를 앞두고 현 최고위 지도자가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정치체계 개편 과정에서 기존 인사들을 교체하고, 지방정부를 축소하여 차기 공산당대회에서 지방 출신 인사의 당 중앙집행위원회 진출을 줄임으로써 상대적으로 중앙 권력의 강화를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오는 6월 3일 21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다. 차기 정부는 베트남의 조직 개편 내용을 면밀히 검토해 중앙정부 조직의 효율성을 높이고 필요하다면 시·군 통폐합 등 지방 조직에 큰 변화를 주어야 한다. 인구 감소 추세가 완연한 가운데 수도권 편중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30년 전 만들어진 낡은 행정체제를 과감히 손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 주요 약력 ▷서강대 정치학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38) 베트남 지방조직도 다이어트
  •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37) 베트남 통일 50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

    통일의 대업과 개인들의 삶 베트남은 올해 통일 5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해 여러 행사를 대대적으로 열고 있다. 거리에는 베트남 국기와 공산당기뿐만 아니라 통일 전 남베트남해방민족전선(NLF, National Liberation Front)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경축 행사에서 참가자들은 베트남 국기와 NLF 기를 함께 흔들고 있다. 그간 NLF 깃발이 거리에서 공공연히 휘날리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사이공에서 호찌민시로 이름을 바꾼 거리에서 통일 50년 후에 다시 휘날리게 됐다. 50년 전 베트남이 통일될 때 마지막 모습은 이러했다. 1975년 4월 30일 NLF 기를 단 북베트남 탱크들이 사이공 거리에 쇄도했다. 11시에 843호를 비롯한 T-54 탱크들이 남베트남 대통령 공관인 독립궁의 철문을 부수고 경내로 진입했다. 이 장면은 남베트남 정권의 종말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탱크에서 내린 한 병사는 NLF 기를 들고 독립궁으로 달려 들어가 위층 발코니에서 이 깃발을 휘날렸다. NLF 기는 위, 아래에 반씩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된 바탕에 금빛 별을 가운데에 둔 것이었다. 북베트남 및 통일 베트남의 국기가 전체 빨간색 바탕에 금빛 별을 둔 것과 조금 달랐다. 이 기는 1960년 NLF가 결성되며 사용되다가 1969년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가 결성되면서 계속 사용된 것이다. 통일의 순간에 이 깃발을 휘날린 것은 남베트남 내 공산세력이 주도하는 NLF와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가 남베트남에서 승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독립궁 내에는 28일부터 사흘째 대통령직에 있던 즈엉반민 대통령과 각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 이전 10년간 남베트남을 통치하던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은 4월 21일 그 직에서 물러난 후 26일 해외로 도피한 상태였다. 그해 11월에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는 통합을 결정했다. 베트남은 다음 해 전국 총선거를 치러 통일 국회에서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으로 출범했다. 이로써 장기간의 베트남전쟁은 끝났고, 베트남은 독립과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이후 NLF 기는 사라졌고 사회는 북부 주도로 통합돼갔다. 정치지도자들은 민족적 대업의 성취에 열광하느라 전쟁을 겪어낸 사람들의 간난신고한 삶을 잘 보지 못했다. 이를 살피는 일은 베트남인 작가들이 맡았다. 그들은 소설에서 보통 사람들의 삶을 그렸고 읽는 이에게 공감과 위안을 줬다. 최근에 한글본으로 출간된 스엉응웻밍 작가의 <랑하의 밤>과 응우옌판꾸에마이 작가의 <산이 노래하다>도 그렇다. 이를 통해 베트남 사람들이 전쟁과 전후에 겪어낸 삶을 엿볼 수 있다. 스엉응웻밍 작가의 <랑하의 밤>과 응우옌판꾸에마이 작가의 <산이 노래하다> - 소설에 그려진 전쟁의 이면 베트남전쟁을 다룬 소설 가운데 세계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바오닌의 <전쟁의 슬픔>이다. 작가는 전쟁에서 승리하여 통일을 이루기 위한 대의의 이면에 전쟁에 참여한 개인들이 겪게 되는 슬픔을 그렸다. 전쟁터로 떠나며 겪게 되는 연인과의 이별, 가족과의 이별로 인한 슬픔은 통일의 대의에 묻혔다. 참전 군인으로서 동료들을 전장에서 잃었던 바오닌은 이런 개인들의 슬픔을 묘사해 읽는 이에게 큰 공감을 줬다. 전쟁에 참전한 개인들의 사연은 베트남이 개혁에 착수한 이래 서술될 수 있었다. <랑하의 밤>은 현역 군인 작가 스엉응웻밍의 단편집이다. 여기에 들어 있는 '랑하의 밤'은 주인공 쯔엉이 전쟁이 끝난 후 랑하 마을의 집에 돌아왔지만 기족들에게 자신을 밝히지 못하고 쯔엉의 친구라고 둘러대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가 자신을 밝히지 않은 것은 전쟁에서 상처를 입어 얼굴이 흉측하게 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목욕하는 아내를 보고서도 다가가지 못하고 안타까움을 삭여야 했다. 쯔엉이 너무 오래 돌아오지 않자 그 아내에게 청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도 일그러진 얼굴로 인해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다. 마침내 그는 떠나고 만다. 떠나는 기차에서 울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고 배낭끈을 꽉 쥐면서... '쩌우강 나루터 사람'은 전쟁터에 나갔던 이모가 돌아오지 않다가, 가족들이 그의 전사통지서를 받은 후 이모의 연인이었던 남자가 다른 여성과 결혼하는 날에 이모가 돌아오는 이야기다. 남자는 기술을 배우러 외국에 갔을 때 밤마다 이모를 생각했고, 이모는 쯔엉선 산맥에 있을 때 일기의 페이지마다 남자의 이름을 적었다. 이모는 쯔엉선 산맥에서 싸웠고 무릎을 다쳐 절단하여 불구의 몸이 됐다. 쯔엉선 산맥은 북에서 남으로 길게 뻗은 베트남 서부 산간지역이다. 여기에 전쟁 시기 북에서 남으로 군인과 군수물자를 나르던 호찌민 루트가 있었다. 이모가 돌아오는 날 이모의 연인이던 남자는 외국에서 돌아와 다른 여자와 결혼축하연을 연다. 이모가 돌아온 것을 알게 된 남자가 이모에게 다시 시작하자고 했지만, 불구가 된 이모는 이를 완강히 거부한다. 이모는 여군 간호사였기에 마을 진료소를 맡는다. 옛 연인의 아내가 출산에 어려움을 겪던 끝에 이모가 아이를 받아낸다. 그 부부는 아이 이름을 이모의 이름과 같게 짓는다. 이모는 숙모가 죽으며 남긴 아이를 돌보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붉은 단풍잎'은 전쟁 중 야전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던 여성이 강간을 당해 생긴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으로 인해 전후에 연인과 사랑을 나눌 수 없어 고통을 겪는 이야기다. 두 연인은 파리의 분위기 좋은 방에서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으나 여성의 PTSD로 인해 환영이 보여 중간에 멈춰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현대사의 시련을 이겨낸 삶 <산이 노래하다>를 쓴 응우옌판꾸에마이는 남부 박리우(박리에우)에서 난 여성 작가다. 그러나 소설은 응에안, 하노이 등 중북부와 북부 지역에서 있었던 일을 주로 다룬다. 소설은 프랑스의 식민지배, 일본의 점령, 북부의 대기근과 토지개혁, 그리고 분단과 전쟁, 통일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흐엉은 현재와 과거를 왔다갔다 하며 가족들이 겪은 시련을 드러낸다. 남부 밀림으로 가 수년간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어머니가 군의관으로 자원하여 남부로 갔기에 흐엉은 할머니와 주로 살아간다. 할머니의 고향은 중북부 응에안이었다. 일본 점령기에는 대기근을 겪어야 했다. 베트남은 1945년 해방된 후에 프랑스가 다시 식민지배를 복구하려고 획책해 프랑스와 전쟁을 치렀고, 이후 1954년 종전하면서 남북으로 분단됐다. 북부에서는 토지개혁이 전개됐고 일부 지주들이 희생됐다. 남북 대치 상황에서, 흐엉의 삼촌들은 전쟁에 참전하게 됐다. 이어 남북 간 전쟁에서 미국이 남부를 지원하며 북부에 대한 공습을 가했다. 흐엉은 미군의 하노이 폭격을 피해 방공호로 피하던 일, 할머니와 함께 지방으로 피난 가던 일을 상기한다. 1975년 전쟁은 끝났고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 어느 삼촌은 오지 않았다. 흐엉은 “공식적으로 전쟁이 끝난 날, 할머니와 나는 서로 축하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평화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와야만 찾아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베트남에는 지금도 전쟁으로 희생된 부모나 자녀를 가진 가정이 많다. 흐엉의 기준으로 아직 평화가 찾아오지 않은 가정들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독립, 전쟁, 통일의 대업 뒤에서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었는가! 사람들은 그 고통을 이겨내고 격동의 현대사를 살아냈다. 작가들은 이들의 삶에서 고통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사랑과 희망으로 승화시켜 낸다. 이처럼 통일의 대업을 성취한 이후 50년이 지난 지금, 통일만큼이나 값진 사람들의 삶을 세심히 살피는 노력을 기울이는 일도 필요하다. <산이 노래하다>에서 할머니가 해준 말을 다시 새겨본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베트남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시련은 저 산만큼이나 높았어. ... ... 인생사에서 한 발짝 물러서면 비로소 전체를 볼 수 있는 법이란다.” 전쟁과 가난과 억압의 현대사를 헤쳐온 베트남인들의 삶에 같은 고난의 역사를 이겨내온 한국인들은 공감하게 된다. 필자 주요 약력 서강대 정치학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37) 베트남 통일 50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
  •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36) '붉은 베트남' …민간기업이 달린다

    민간기업 육성 정책의 이해 또럼 총비서의 논설에 따르면, 베트남에서 “사유(민간)경제는 새로운 시대에 공업화와 현대화를 실현할 선도적 역량으로서, 국가의 경쟁력을 높이고, 국민의 생활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사회적 책임을 가지며, 문명화와 현대화된 사회 건설에 참여하고, 역동적이고 국제적으로 통합된 베트남 건설에 기여해야 하는” ‘책무’를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베트남 정부는 체제 개혁을 통해 민간기업들이 활동할 경제환경을 조성하는 데 진력할 것을 천명했다. 이러한 천명은 그간 수차례 있었다. 그러나 또럼의 논설처럼 민간경제를 선도적 경제부문으로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은 최근에 있는 일이다. 베트남은 그간 공식적으로는 국유경제부문을 국가 경제의 선도적 부문으로 인식하였고, 동시에 외국인투자부문에 우호적인 정책을 펼쳐왔다. 이번에 민간경제부문의 경제성장에서의 역할을 중시한 것은 국영기업 위주 성장의 한계를 인정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동시에 외국인투자부문과 경쟁할 수 있는 국내 민간기업을 육성하려는 정책 방향을 나타낸 것이라고 이해된다. 더불어 지도자들이 재벌급 민간기업의 육성을 지원하겠다는 의지도 피력하고 있어, 향후 베트남 민간 재벌의 성장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될 것이다. 국내 민간기업을 육성함으로써 국가 경제의 성장과 국내경제부문의 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것이다. 물론 국영기업을 도외시하거나 외국인투자기업에 제약을 가하겠다는 의도로 읽히진 않는다. 민간기업의 육성과 민간경제부문의 성장을 중시하는 최근의 논설들로 볼 때, 베트남은 2026년 초에 개최 예정인 제14차 공산당대회에서 민간경제부문을 중심에 둔 경제발전전략을 채택할 듯하다. 이로써 베트남 사회주의 체제는 전보다 더 탈사회주의화에 속도를 가하게 될 것이다. 민간기업 육성의 과제와 협력 이러한 당면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이 민간기업을 육성하는 데 걸림돌도 적지 않다. 베트남 민간기업은 대부분 중소기업인데, 지도자들은 이를 ‘강소’ 기업으로 육성해낼 방안을 찾아야 한다. 베트남의 기업들이 적정한 기술 수준을 갖추지 못해 외국인투자기업과의 협력에 한계를 보이고 있는 게 현실이다. 외국인투자기업으로부터 베트남 국내 기업으로의 기술이전도 늦은 편이다. 기술이전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이를 실현할 인센티브를 외국인투자기업에 제공해야 하는데, 베트남 정부가 이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갖고 있지 않은 듯하다. 한국이 베트남에 투자한 1위 국가로서 동반 성장의 목표하에 이런 방안을 함께 찾는 데 협력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베트남 수출의 70% 이상을 외국인투자기업이 담당하고 있기에, 베트남은 국내 기업의 수출 비중을 늘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 기업의 육성은 세계시장에서의 경쟁력을 갖추는 것과 연관되어야 한다. 베트남은 2030년에 중간 이상의 중소득국, 2045년에 고소득국이 되려는 목표를 세웠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연간 7% 정도의 GDP 성장을 지속해야 한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대기업에 집중하는 성장전략보다는 ‘강소’ 중소기업 육성전략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필자 주요 약력 서강대 정치학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36) 붉은 베트남 …민간기업이 달린다
  •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35) 정부조직 '20%' 군살빼기 …새로운 도약 노리는 베트남

    - 산하 기관 및 지방 정부의 개편 베트남의 지방행정조직은 3급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6개 중앙직속시와 57개 성, 현 또는 티싸, 싸 또는 티쩐이다. 이것은 각각 한국의 특별시나 광역시 또는 도, 군, 면 또는 읍에 해당한다. 중앙직속시 또는 성급 시 산하에는 꿘(quan)과 프엉(phuong)이 있다. 한국의 구와 동에 해당한다. 이 3급 지방단위마다 지방의회인 인민의회와 지방행정조직인 인민위원회가 있고, 이들을 지도하는 공산당위원회가 설치돼 있다. 정부는 이 가운데 도시에서 꿘과 프엉의 인민의회를 폐기하고, 지방에서 현 인민의회를 폐기하는 방안을 고려했으나 이번에 채택하지는 않았다. 경찰 업무를 담당하는 공안은 지방의 현급 공안조직을 폐기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 그러나 지방에서 국가기관의 개편은 그 범위가 방대하여 일시에 집행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공산당 정치국은 국가기관별로 지방 국가기관의 개편방안을 올해 안에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 국가기관 개편의 의미와 효과 이러한 중앙 및 지방 수준 국가기관의 통폐합은 정치경제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닐까? 중앙정부의 개편은 우선 정부기관 간 직능의 중첩을 피하고 정책의 효과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국회 및 공산당의 조직 개편도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조직 및 인원의 축소를 통한 업무 효율화와 정부 재정 절감 효과를 낳을 것이다. 베트남은 이번 정부조직 개편으로 20% 감축 효과를 나타내리라고 평가한다. 중앙정부 조직 개편에 따라 폐기된 부의 장관들은 타 부처로 이동했다. 예컨대 응우옌찌중 기획투자부 장관과 마이반찐 공산당 중앙동원위원회 위원장은 부총리로 선임됐다. 이로써 부총리가 5명에서 7명으로 증가하는 이례적 결과를 낳았는데, 이는 일시적 현상일 뿐이다. 이번 개편으로 국가부문에 종사하는 인원 중 10만명이 6개월 내에 감축되리라고 예상한다. 베트남에서 공안과 군을 제외한 국가부문 종사자는 400만명 정도라고 알려졌다. 장기적으로는 이의 20%에 해당하는 인원이 감축될 것으로 예상한다. 향후 진행될 일은 지방 수준의 국가기관 개편작업이다. 베트남의 논자들은 미국이나 중국과 비교해볼 때 베트남의 성 규모가 너무 작다고 한다. 정부는 국회가 정한 성급 인구와 면적 기준에 미달하는 성은 현재 각각 10개씩으로 판단하고 있다. 향후 이 성의 통합작업이 진행되리라고 본다. 또한 지방 3급 조직 중 중간에 있는 현급 국가기관의 필요성이 재검토될 것이다. 현급 인민의회를 폐기하고 행정조직인 인민위원회만 남기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방의 공안, 검찰, 법원 편제도 개편될 것이다. 지방 국가기관의 감축은 상대적으로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다. 향후 국가기관의 감축에 따라 관료수가 감소하면, 정부는 관료들의 급여 인상을 도모할 재정적 여력을 갖게 된다. 이의 효과는 중장기적으로 관료들의 부패를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부패의 감소는 분명히 내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 투자자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들 것이다. 현재 투자 승인을 위해서는 30~40개의 도장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이 도장 수를 줄이기 위해서는 정부조직의 슬림화와 함께 행정절차 간소화와 투명성 증대가 필수적이다. 베트남 정부가 조직 개편에 집중하느라 당장 행정절차 개선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는 것 같지는 않다. 정부조직 개편에 이어 행정절차 개선이 이루어진다면 중장기적으로 경제활동 환경 조성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오리라고 본다. 필자 주요 약력 서강대 정치학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35) 정부조직 20% 군살빼기 …새로운 도약 노리는 베트남
  •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34) 을사년 벽두 '베트남몽' 희망을 쐈다

    2025년 국가기관의 ‘대대적’ 개편 최근 베트남 국내 정치부문에서 핫 이슈는 국가기관의 ‘슬림화’다. 베트남 정부는 이를 2026년 중반에 출범하는 제15기 정부에 적용하려고 한다. 현재 중앙 정부 부처 22개를 17개로 감축하고 중앙 부처급 기관의 재편성을 추진하고 있다. 중앙 정부는 재편성 이후 14개 부와 3개 부급 기관으로 구성될 것이다. 14개 부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 기획투자부와 재정부는 통합하여 재정부로, 내무부와 노동보훈사회부는 통합하여 내무부로, 건설부와 교통운송부는 통합하여 건설부로 개편될 예정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정보통신부의 신문 잡지 업무를 흡수하고, 과학기술부와 정보통신부는 통합하여 과학기술부로, 자원환경부와 농업 및 농촌발전부는 통합하여 농업 및 환경부로 개편될 예정이다. 또한 정부는 종교위원회와 민족위원회를 통합하여 민족 및 종교부를 설립할 예정이다. 국방부, 공안부, 외교부, 법무부, 상공부, 교육훈련부, 보건부는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부의 명칭은 바뀔 수 있다. 3개 부급 기관은 정부사무처, 정부감사처, 베트남국가은행이다. 더불어 중앙 정부 직속 기관으로 과학기술원, 사회과학원, 국영 TV, 국영 라디오, 베트남통신사의 5개 기관을 둘 것이다. 또한, 정부는 기업 내 국가자본관리위원회, 베트남국가재정감독위원회, 국고(국가재산국), 조세총국, 관세총국, 조달총국, 통계총국, 사회보험 등을 폐기하거나 개편하려고 한다. 이 가운데 기업 내 국가자본관리위원회는 폐기될 예정인데, 이 기관이 관리하던 19개 국영 기업집단 및 총공사(소규모 기업집단)는 각 중앙 부처로 이관된다. 대부분 기업은 관련 부처로 이관될 것이나, 일부 기업은 다른 부처로 이관될 수도 있다. 예컨대 정부는 과거에 정보통신부 소속이던 모비폰 이동통신을 공안부 소속으로 이전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높은 사업성과를 낸 국방부 소속 비엣텔을 벤치마킹하려는 의도로 읽히기도 하나, 한편으로는 통신보안을 강조하는 최근 상황 때문이기도 한 듯하다. 지방 행정체계도 큰 변화를 겪을 것이다. 정부는 국고, 조세, 관세 등의 지방 조직을 재편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 개편안은 금년 2월 임시국회에서 공식 논의될 예정이다. 이번 국가기관의 개편은 베트남 정치체계에서 ‘대대적’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정부는 이를 통해 각 기관의 산하 조직을 최소 15~20% 감축하게 될 것이다. 부처별 권한도 조정될 것이며, 이에 따라 정치지도자들의 권력관계도 변화할 것이다. ‘신기원’과 베트남의 미래 베트남은 2026년 초 제14차 공산당대회에서 ‘신기원’을 선언할 것 같다. 그간 베트남의 민족과 국가의 독립, 통일, 사회주의 건설, 도이머이 등 구시대의 성과를 기반으로 새로운 발전의 기원을 세운다는 것이다. 이는 베트남판 ‘중국몽’이 될 것이다. 또럼 총비서는 베트남이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려고 목표를 둔 2045년까지 20년 남았음을 언급했다. 베트남이 그때까지 1인당 평균소득 1만5000달러의 고소득국가로 성장해야 한다. 중장기 전망은 쉽지 않다. 몇몇 국제기관들이 올해 베트남의 GDP 성장률을 6% 이상 7%까지 전망한 것처럼, 베트남의 단기간 경제성장 전망은 비교적 밝다. 그러나 베트남이 성장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대외환경이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대외관계에서 곧 닥칠 핫 이슈는 트럼트 2기 정부의 출범이다. 2기 트럼프 정부가 보편적 관세 폭탄을 예고하고 있어 베트남에 대해 1기와 같은 정책을 펼지는 알 수 없다. 미국은 1기 트럼프 정부 때 베트남을 경유한 중국 제품의 우회 수출을 의심했었다. 미국은 베트남을 환율조작국으로 의심했지만 그렇게 지정하지는 않았다. 미국이 중국과의 경쟁 속에서 베트남에 제재를 가하지는 않았다. 최근에 중국이 베트남에 대한 투자를 늘렸고, 중국의 우회 투자 가능성도 엿보인다. 홍콩, 싱가포르를 포함한 범중화권이 베트남에 대한 투자를 증가시키고 있는 현상이 눈에 띈다. 베트남이 축구로 동남아 최고의 자리에 오르며 2025년 새해를 열었다. 베트남 국가대표 축구팀은 1월 5일 2024 아세안축구연맹 미쓰비시컵 결승전에서 우승하며 국민들에게 큰 기쁨을 안겼다. 국민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로 쇄도했고 함성을 토해냈다. 베트남 축구 대표팀을 이끄는 김상식 감독이 베트남에서 ‘제2의 박항서’가 됐다. 김상식 열풍이 박항서 열풍처럼 베트남에 일고 한국-베트남 관계에 훈풍을 불어넣고 있다. 이에 힘입어 올해도 한국과 베트남이 협력을 심화하는 한 해가 되리라 기대한다. 필자 주요 약력 서강대 정치학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34) 을사년 벽두 베트남몽 희망을 쐈다
  •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33) 푸꾸옥과 꼰다오: 옥빛 바다에 품은 역사의 비극

    이제 푸꾸옥은 개발이 많이 진행돼 관광지로서 면모를 잘 갖췄다. 베트남에서 가장 큰 민간기업인 빈(Vin) 그룹이 대규모 단지에 리조트와 놀이 시설, 관람 시설 등을 설비했다. 이를 벗어나 한적한 호텔에 머물며 해변에서 푸른 하늘로 솟은 야자수를 보며 수영하는 재미도 좋다. 자연환경 탓에 산호가 예쁘지 않아 스노클링의 재미가 적어 아쉽긴 하다. 남쪽에는 선(Sun) 그룹이 7.9㎞ 길이의 세계에서 가장 긴 해상 케이블카를 설치해 놨다. 케이블카를 타고 넓은 바다를 내려다보면 가슴이 쫙 펴지는 듯하다. 한편으로 꼰다오는 아직 사람들의 발길이 잦지 않아 생태 관광지로서 좋은 곳이다. 공항이 작아 ATR-72 프로펠러 비행기로 가거나 배로 가야 한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서는 원숭이들이 방문객을 반긴다. 가장 큰 꼰선 섬 인근의 작은 섬들은 거북이 서식처로 알려져 있다. 새끼 거북을 방류하는 일에 참여할 수도 있다. 새끼 거북을 방류하는 투어가 있는 날도 있고 없는 날도 있어서 꼰다오에서 하룻밤만 머물러서는 이 일에 참여하지 못할 수 있다. 이제 천혜의 자연 자원을 가진 이 두 섬이 과거의 상흔을 벗고 새로운 명소로 재탄생했다. 과거의 비극을 잊지는 않지만 이를 극복해낸 제주처럼 말이다. 역사의 상흔을 기억하는 일은 관련 연구자에게 맡겨두고 푸꾸옥과 꼰다오의 옥빛 바다와 파란 하늘을 즐기는 것도 좋겠다. 필자 주요 약력 서강대 정치학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33)  푸꾸옥과 꼰다오: 옥빛 바다에 품은 역사의 비극
  •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32) 베트남 권력 '빅4' …'대나무 외교'는 지속된다

    차기 최고위 지도자 후보군 2026년 초 제14차 공산당대회에서 누가 공산당 총비서로 선임될지 지금 예상하기 어렵지만,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해볼 수 있다. 또럼이 제13기 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회기 중간인 올해 8월에 총비서로 선임됐기에 차기 공산당대회까지 임기를 채운다면 약 1년 6개월간 총비서직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르엉끄엉도 1년 반 정도의 단기간에 국가주석직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이들이 이 정도로 최고위 권력 행사 후 은퇴할 가능성은 크지 않을 듯하다. 팜민찐 총리의 도전 가능성도 있지만 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또럼과 르엉끄엉이 차기 총비서 후보로 되기 위한 경쟁을 벌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로서는 또럼이 상대적으로 유리해 보인다. 또럼 현 총비서가 차기 인사소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 있다. 현재 공산당 정치국 위원 15명 중 6명이 공안 출신, 3명이 군부 출신으로, 정치국 내 공안 부문이 우위에 있다. 단지 정수 200명으로 구성된 제13기 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출범 시 공안 출신자는 군부 출신자보다 적었다. 제13기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중 공안 출신자는 6명, 군부 출신자는 23명이었다. 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가 정치국 위원을 선출하고 총비서를 선임하기에, 차기 중앙집행위원회의 부문별 구성은 차기 최고위 지도자 선임과정에 의미 있게 작용할 것이다. 한편 또럼, 르엉끄엉, 팜민찐은 모두 2026년 초에 65세를 넘긴 상태가 된다. 공산당 총비서를 포함한 정치국 위원이 되기 위한 나이는 65세 이하여야 하는 게 원칙이다. 그러나 응우옌푸쫑 전임 총비서가 65세를 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 승인’을 얻어 두 차례나 총비서로 선임된 적이 있다. 따라서 앞으로도 나이 제한으로 인해 총비서 후보로 나서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들 중 한두 명이 최고위 ‘네 기둥’ 직위를 지속한다면 최고위 지도부의 세대교체는 지체될 것이다. 이 최고위 지도자 4인이 차기 총비서 선임에 합의하지 못해 동반 퇴진하는 일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이들보다 젊은 세대 인사가 후보로 나설 가능성도 있다. 현 정치국 위원들 가운데 2026년 초에 65세 이하인 위원은 전체 15명 중 7명이다. 또럼 총비서의 ‘대나무 외교’ 계승 또럼 총비서 취임 이후에도 베트남의 대외관계는 비교적 순조롭게 전개됐다. 베트남이 개혁을 선포한 이후 곧 채택한 ‘다변화, 다양화’ 외교는 세계정치 무대에서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해 왔다. 베트남은 개혁 이전에 진영 외교에 기반하여 자본주의권에 대한 사회주의권의 승리를 대외정책의 기반으로 삼았었다. 베트남은 개혁 이후에 여전히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진영 외교를 일찍이 폐기했고 1990년대 초부터 다변화 외교를 실천해왔다. 응우옌푸쫑 전임 총비서는 이를 ‘대나무 외교’라고 하며 강조했다. 또럼 총비서 시기에도 이 기조는 유지되고 있다. 또럼 공안부장관이 올해 5월에 국가주석으로, 8월 3일에 총비서로 선임됐는데, 10월 21일 르엉끄엉 국가주석을 선임하기까지 총비서와 국가주석을 겸직하고 있었다. 그는 이 겸직 기간에 중국과 미국을 방문하면서 외교무대에 등단했다. 또럼은 공산당 총비서로 선임된 지 보름 만에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총서기 겸 국가주석과 회담했다. 두 지도자는 양국이 사회주의 형제이며 주요 외교 파트너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중국은 베트남과 ‘운명공동체’라고 주장하지만, 베트남은 중국과 ‘미래공유 공동체’라고 고집한다. 또럼은 9월 25일에 유엔 연차 총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해 뉴욕에서 바이든 대통령과 회담했다. 두 지도자는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양국은 지난해 9월 양자 관계를 포괄적 동반자 관계에서 두 단계를 뛰어넘어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했었다. 바이든은 남중국해에서 평화‧안정‧협력을 지속하기 위해 베트남과 긴밀히 협력하고 싶다고 했고, 또럼은 베트남이 독립, 자주, 다변화 외교를 지속할 것이라고 했다. 또럼은 미국 방문에 이어 쿠바를 방문하여 전통적 우호 관계를 확고히 했다. 그는 이후 10월 6-7일에 프랑코포니 정상회의 참석차 프랑스를 방문하여 마크롱 대통령과 회담하고 양국 관계를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했다. 이로써 프랑스는 유럽 국가 중 최초로 베트남의 최고위 수준 양자 관계국이 됐다. 이런 일련의 정상 외교는 또럼 총비서 겸 국가주석 개인의 사고에 기반한 성과라기보다 공산당 중앙대외위원회, 외교부 등 베트남 대외정책 집행기관의 집단적 사고의 산물이라고 봐야겠다. 베트남의 대외관계에서 제약도 여전히 있다. 베트남은 남중국해의 해상영유권을 둘러싼 갈등 상황에서 중국의 도발에 대응하는 데 적절한 방안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 있다. 중국이 아세안 및 베트남과 남중국해의 행동준칙을 마련하자고 해놓고 합의는 지체되고 있다. 미국은 최근 또럼 총비서 겸 국가주석의 미국 방문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에 시장경제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다. 이처럼 베트남의 외교는 그 한계도 있으나 국익에 기반한 실용주의 면모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필자 주요 약력 서강대 정치학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32) 베트남 권력 빅4 …대나무 외교는 지속된다
  •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31) 다낭과 호이안 …베트남과 한국의 인연을 찾아서

    호이안이 투본 강 하구에 토사가 쌓이며 교역항으로서 기능이 약화된 이후 다낭은 외국과의 교류 지점이었다. 다낭은 1954년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단된 후 남베트남 제2의 도시였다. 분단 이후 곧이어 베트남전이 격화되면서 다낭은 외국군의 베트남 출입구가 됐다. 한국과의 인연도 만들어졌다. 황석영이 소설 <무기의 그늘>에서 안영규 상병을 다낭 합동수사대로 보내며 자본주의 시장이 지배하는 베트남전쟁의 본질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각종 물건들이 넘쳐나던 곳이 ‘도끄랍(Doc Lap 독럽)’ 거리와 ‘르 로이(Le Loi 레러이)’ 거리 사이의 뒷골목이었다. 현재 독럽 거리는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레러이 거리는 그대로 있다. 이외에도 그때와 지금의 거리 모습은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처럼 다낭과 호이안이 역사적으로 한국과 인연이 있어 한국인들이 자신도 모르게 이 도시들에 친근감을 갖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인들은 옛 인연을 좇아 다낭과 호이안으로 달려간다. 필자 주요 약력 서강대 정치학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31) 다낭과 호이안 …베트남과 한국의 인연을 찾아서
  •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30) '진정한 사회주의자' 응우옌푸쫑 베트남 총비서가 남긴 것

    ‘진정한 사회주의자’와 이별 지난 19일 베트남 권력 서열 1위인 응우옌푸쫑 베트남 공산당 총비서가 8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는 2011년부터 2024년 사망 시까지 공산당 총비서로 있었으며, 레주언(Le Duan) 이후 가장 오랫동안 총비서직을 맡은 지도자였다. 그는 베트남 사회에 큰 영향을 남겼다. 사회주의 이념을 넘어 진정한 지도자의 전범을 보였다. 그가 총비서로 재임하는 기간에 사회주의 체제를 지탱하려고 노력했고, 사회에 만연한 부패를 일소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히 반부패운동을 추진했다. 이제 그는 갔다. 그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 응우옌푸쫑을 보면 그가 ‘진정한 사회주의자’의 면모를 지녔다고 느껴진다. 그는 자신과 가족, 그리고 사회주의 체제 유지에 엄격했다. 사욕을 채웠다고 알려진 바도 없다. 그는 1998년산 도요타 크라운 자동차를 사망할 때까지 사용해 검소함을 보였다. 2000년 하노이시 공산당위원회 비서로 취임하며 이 개인용 관용차를 쓰기 시작해 끝까지 바꾸지 않았다. 그는 가족들에게도 엄격했던 듯하다. 그의 부인이 최고 권력자의 부인이라고 나선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아들과 딸을 뒀는데, 이들이 이제까지 언론에 얼굴을 내민 적이 없었다. 그들은 정부 부처에서 일반 공무원으로 재직하고 있다고 한다. 사회적으로 그의 엄격함은 주로 사회주의 체제 유지와 반부패운동에서 나타났다. 그는 국가의 발전과 현 상황에서 사회주의 실현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했다. 현 체제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부패를 청산해야 한다는 굳은 신념을 가졌다. 특히 응우옌떤중 총리 재임 시기에 만연했던 지대추구(rent seeking) 행위를 국가 전체의 발전보다는 집단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비판했다. 정치권력을 가진 자들이 이를 이용해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행위를 일소하고자 했다. ‘불타는 화로’라고 불리며 2016년부터 본격화된 반부패운동은 많은 공산당원 및 관료들을 물러나게 했다. 베트남에서 반부패운동은 그 10년 전에 선포됐지만 지지부진하다가 응우옌푸쫑이 두 번째 총비서 임기를 시작하며 강력히 추진됐다. 이로써 베트남의 부패인식지수 순위는 작년에 180개 국가 중 83위로 큰 폭으로 상향했다. 균형외교로서 ‘대나무 외교’ 베트남 발전을 위해서라면 유연한 정책을 펴는 게 응우옌푸쫑의 기본적 생각이었다. 대외관계에서 그의 치적은 이념과 무관하게 ‘대나무 외교’로 잘 알려진 균형외교를 추구한 점이다. 특히 베트남이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펼쳐 최근 2년간 바이든, 시진핑, 푸틴 등 세계 강국의 지도자들을 하노이로 불러들였다. 그는 통일 이후 미국을 방문한 유일한 베트남 공산당 총비서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를 미국으로 초대했으나 그가 건강 때문에 또는 다른 이유로 두 번째 미국 방문을 실행하지 못했다. 응우옌푸쫑은 한국 및 한국인들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한국 기업인과 학자들의 협력하에 조철현 작가가 <베트남 총비서 응우옌푸쫑>을 발간해 그에게 헌정한 것도 이 우호관계의 산물이었다. 이는 세계 유일의 응우옌푸쫑 전기가 됐다. 공안 출신 우위의 권력구도 한편 응우옌푸쫑 총비서는 반부패운동을 지속하면서 공안 우위의 권력 구도라는 부산물을 남겼다. 2021년 1월 출범한 제13기 정치국 위원은 당초 18명이었으나 6명이나 중도 퇴임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정치국 위원들이 부패와 관련하여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이었다. 제13기 이전까지 정치국 위원이 중도 퇴임하는 일은 드물었고, 퇴임하더라도 그 수는 한두 명에 불과했다. 제13기 정치국 위원 전체 중 3분의 1이나 퇴임하며 최근 2년래 베트남 내에서 정치적 격변이 일었다. 이후 공산당은 2024년 5월 위원 4명을 충원하여 정치국을 16명 위원으로 구성했다. 그 이후 딘띠엔중 하노이시 당 위원회 비서가 중도 퇴임하고 응우옌푸쫑 총비서가 사망하며, 정치국 위원은 현재 14명으로 줄었다. 이들은 공안 출신 5명, 군 출신 3명, 당 전임자 및 국회 출신 4명, 학계 출신 1명, 테크노크라트 겸 당 전임자 1명으로 구성됐다. 최고위 인사 4인은 공안 출신 2명, 국회 출신 1명, 군 출신 1명으로 구성됐다. 이를 보면 정치국 전체와 최고위 인사 4인 중 공안 출신이 가장 우위를 보인다. 최고위 4인에 국회의장 1명이 있는데, 그를 당 및 국가기관에서 주로 경력을 쌓아온 인사로 분류하더라도 당 전임자의 쇠퇴는 분명하다. 더불어 테크노크라트가 쇠퇴했음은 분명하다. 베트남이 2026년 초로 예정된 제14차 공산당대회 이전에 정치국 위원을 보충할지는 알 수 없다. 또럼 국가주석은 신임 르엉땀꽝 공안부 장관을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시키려는 의사를 갖고 있을 듯하다. 정치국 내 공안 출신이 다수인 현 상황에서 위원들이 이에 대해 합의할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지체된 세대 교체 또한 응우옌푸쫑 총비서는 정치지도자들의 세대 교체를 준비하지 못했다. 사회주의 이념에 충실한 지도자를 선임하려다 보니 그는 65세를 넘긴 지도자를 차기 총비서 후보로 추대하려고도 했다. 2021년 제13차 공산당대회 직전에 쩐꾸옥브엉 당 상임비서를 차기 총비서 후보로 추대하려다 실패했다. 이는 새로운 세대 정치지도자들이 사회주의 체제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졌는지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최근 새로운 세대 중 가장 두드러졌던 인물은 보반트엉 전 국가주석이었다. 보반트엉은 1970년생으로 사회주의 혁명가의 자녀 세대인 ‘붉은 씨앗’ 지도자였다. 그는 호찌민공산청년단에서 경력을 쌓았고, 공산당 중앙선전교육위원회 위원장, 당 비서국 상임비서를 거쳐 2023년 초 응우옌쑤언푹 사임 이후 국가주석으로 선임됐다. 그러나 그도 부패에 연루돼 2024년 3월에 퇴임하고 말았다. 브엉딘후에 국회의장도 차기 총비서 후보로 유력했지만 부패에 연루돼 2024년 5월에 퇴임했다. 현재 차세대 지도자로 주목할 만한 인사는 레민흥 당 중앙조직위원회 위원장, 쩐시타인 하노이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정도다. 베트남 발전을 위하여 응우옌푸쫑 총비서는 이제 공과를 뒤로하고 하노이에 있는 마이직 국가지도자 묘지에 묻혔다. 그의 별세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의문을 던진다. 그가 강력히 추진하던 반부패운동은 어찌 될 것인가? ‘대나무 외교’로 불리던 균형외교는 지속될 것인가? 공안 출신 우위의 권력 구도는 베트남의 국가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우호적 환경은 조성될 것인가? 우선 드는 생각은 이렇다. 반부패운동은 한동안 지속된다고 하더라도 아무래도 동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응우옌푸쫑은 본인과 가족들이 부패에 연루되지 않았기에 이를 강력히 추진하는 동력을 가질 수 있었다. 현재로서는 그에 상당한 다른 인사가 최고 권력자로 등장하리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외교부문에서 베트남 균형외교의 기반은 다져졌으며, 공산당과 정부 내에 이에 대한 컨센서스가 있는 듯하다. 균형외교 대외정책은 지속될 것이다. 응우옌푸쫑이 건강이 악화되면서 후보자를 찾는 데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에 또럼 국가주석이 공산당 총비서 직무를 대행하게 됐다. 공안 우위의 권력 구도가 당장은 지속될 것이지만 지금부터 2026년 초 제14차 공산당대회까지 권력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질 것이다. 정치국 위원과 부총리 가운데 사임하게 될 인사가 또 있다는 소문도 있기에 향후 정국은 불안정하다. 베트남의 외국인 투자에 대한 정책은 정권의 변화에 따라 급변하진 않겠지만 베트남이 발전하려면 외국인 투자 의존도를 줄이고 국내 기업을 진흥시키는 데 진력할 수밖에 없다. 양자가 상호 이익을 도모할 타협책을 만들어 이 전환 과정을 유연하게 끌어가야 한다. 새로운 최고 지도자들이 빨리 실용주의 모드로 전환하고 박차를 가해야 국가 발전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 주요 약력 ▷서강대 정치학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30) 진정한 사회주의자 응우옌푸쫑 베트남 총비서가 남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