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낭기 논설고문
ngkim@ajunews.com
- 아주경제 논설고문
- 前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본부장
- 前조선일보 논설위원
- [김낭기의 관점]이재명, 권력투쟁 정치에서 리더십의 정치로 나아가야 4·10 국회의원 총선이 더불어민주당 압승, 국민의힘 참패로 끝나자 윤석열 대통령이 정치 행태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쏟아진다. 상당 부분 옳은 지적이다. 그러나 그런 지적을 받아야 할 사람은 윤 대통령만이 아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윤 대통령 못지않게 정치 행태의 변화가 요구된다. 이 대표는 총선 공천 과정을 통해 민주당을 장악했다. 그리고 총선 압승으로 국회를 장악했다. 이 대표의 정치적 위상이 총선 전과는 크게 달라졌다. 그런 만큼 정치에서 이 대표의 역할과 책임이 커졌다. 그가 진정한 정치 지도자의 면모를 보일 수 있느냐가 우리 정치의 중대한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 대표는 2022년 3월 대선에서 패배한 이후 지금까지 권력 투쟁의 정치를 해왔다.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모든 것을 쏟는 정치가 권력 투쟁의 정치다. 대선에서 패했으면 일정 기간 자숙의 모습을 보이는 게 그간의 관례다. 그러나 이 대표는 그러지 않았다. 곧바로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국회의원이 됐다. 이어 민주당 대표 경선에 도전해 대표직을 차지했다. 권력에 대한 욕망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준다. 이 대표의 권력 집착은 타고난 본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법 리스크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목적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실제로 이 대표는 ‘방탄’에 성공했다. 한번은 민주당이 국회 체포동의안을 부결시키는 바람에 구속될 위기에서 벗어났다. 또 한번은 민주당 일부 의원 이탈로 체포 동의안이 가결됐으나 법원이 영장을 기각해 구속을 면했다. 이제 이 대표가 민주당을 장악하고 총선에서 압승해 국회 권력을 쟁취했으니 정부는 물론이고 법원도 과거보다 더 이 대표 눈치를 볼 가능성이 커졌다. 이 대표의 권력 유지를 위한 ‘방탄’이 한층 더 튼튼해졌다 진실성·신뢰성 무시하며 권력 추구에 올인 이 대표는 민주당 대표로 있는 동안 진실성이나 신뢰성 같은 가치는 고려하지 않는 듯한 행태를 서슴지 않았다. 대장동 사건 등으로 자신의 측근 5명이 숨지는 일이 터졌음에도 주눅들거나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들을 모른다'고 했다. ‘그들을 죽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검찰’이라고 했다. 국회의원 불체포특권을 포기하겠다고 몇 번이나 약속하고는 막상 체포될 수 있는 순간이 오자 말을 뒤집었다. 이런 일들은 권력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행동을 해도 된다는 권력 지상주의 행태라는 말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 대표의 권력 투쟁 정치는 총선 공천 과정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났다. ‘비명횡사, 친명횡재’로 불리는 공천 결과가 그것이다. 민주당은 막말 파문으로 친명 후보가 사퇴한 지역구에서 경선을 두 번이나 치르면서까지 하면서 결국 박용진 후보를 탈락시켰다. 박 후보는 평소 이 대표를 비판해 왔다. 자신에게 도전하는 사람은 절대 살려두지 않는다는 이 대표의 냉혹한 권력 의지가 읽혀지는 장면이다. 이 대표는 선거운동 과정에서는 선동식 정치 행태를 보였다. “대파 한 단에 875원이면 합리적인 가격”이라는 윤 대통령 발언을 공격거리로 삼은 게 대표적이다. 윤 대통령 발언 전문을 보면 당초 MBC가 윤 대통령 발언 취지를 거두절미하고 왜곡했음이 드러난다. 윤 대통령은 '원래 가격은 1700원 정도인데 875원에 판매 중'이라는 마트 관계자의 안내에 "여기 하나로마트는 이렇게 하는데 다른 데는 이렇게 싸게 사기 어려운 것 아니냐"고 질문했다. 이에 관계자가 "(농협중앙) 회장님이 대대적인 할인행사를 하라고 했다"고 하자 농협중앙회장은 "원래는 2550원",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한창 비쌀 때에는 3900원까지"라고 설명했다. 이에 윤 대통령은 "대파 875원이면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생각이 든다"고 했다. 윤 대통령이 물가를 몰라서 대파 한 단을 875원이라고 한 게 아니라 '875원이라면 소비자 입장에서 합리적인 가격일 텐데’라는 뜻으로 희망 사항을 말한 것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총선 압승으로 정치 위상 높아져 그럼에도 이 대표와 민주당은 윤 대통령이 대파 한 단 값도 모르고 엉뚱한 소리를 한다고 공격했다. 이 대표는 과거에 ‘우리 존경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라고 했다가 논란에 휩싸이자 "(박 전 대통령을) 진짜 존경하는 줄 알더라. 말이라는 것은 맥락이 있는데 맥락을 무시한 것이 진짜 문제"라고 했다. 대파 논란이야말로 맥락을 무시한 말이다. 전형적인 거두절미식 선동이다. 권력 투쟁에서 선동은 빠지지 않는 수단이다. 민주당 일부 지지자들은 투표소에 대파를 들고 가는 쇼를 벌이기도 했다. 그만큼 대파 논란이 선거에서 유리할 것으로 봤다는 방증이다. 실제로 대파 논란은 총선 표심에 큰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 분석된다. 이 대표는 선거를 앞두고 몇 차례 재판 받으러 법원에 출석하면서는 ‘이게 다 정치 검찰이 노린 결과’라고 했다. 재판 일정은 검찰이 아닌 담당 재판부가 정한다. 재판장조차 ‘재판 일정은 재판부가 정한다’라고 했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마치 검찰의 장난 때문에 선거를 앞두고 법정에 들락거려야 하는 듯이 말했다. 이 역시 교묘한 선동이다. 내막을 잘 모르는 유권자들은 ‘정치 검찰 탓’이라는 이 대표 말을 믿고 ‘검찰 독재 심판’이라는 이 대표 주장에 손을 들어줬을 것이다. 이번 총선을 계기로 이 대표의 정치적 영향력과 위상이 총선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높아졌다. 이제 이 대표는 그 영향력과 위상에 걸맞게 정치 행태를 바꿔야 할 때가 됐다. 권력 투쟁 정치에서 리더십의 정치로 나아가야 할 때이다. 권력 투쟁 정치에선 권력 그 자체가 목적이다. 리더십의 정치에서 권력은 정치다운 정치를 하기 위한 수단이다. 리더십은 지도하는 기능이다. 나라가 나아갈 방향과 목표를 제시하고, 그걸 달성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고, 국민들이 동참하도록 이끄는 기능이다. 중·장기적으로 우리나라가 헤쳐나가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제시하면서 국민을 설득해 이해와 지지를 이끌어내는 게 정치 지도자의 역할이다. 이 대표는 ‘소극적 복지에서 적극적 복지로’를 주장한다. 탈락자를 구제하는 소극적 복지에서 탈락자가 생기지 않게 하는 적극적 복지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 구체적 내용이 기본 소득, 기본 주택, 기본 대출 등 ‘3대 기본 시리즈’이다. 사회·경제적 약자를 보듬고 지원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라는 나름의 인식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사회·경제적 약자를 보듬고 지원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일이 중·장기적으로 우리나라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크고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국정의 방향과 목표라고 할 수는 없다. 정치 지도자 면모 보여줘야 할 때 국정 방향과 목표가 되려면 대내적으로는 국가를 경제·문화·법치 등 주요 분야에서 선진국으로 한 단계 더 도약시키는 원대하고 포괄적인 비전이 담겨야 한다. 이 대표는 그 비전이 있는가? 이 대표의 ‘적극적 복지론’은 복지 분야의 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적극적 복지론은 퍼주기 정책이다. 퍼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퍼줄 돈을 마련하는 일은 더 중요하다. 퍼주려면 나라 경제가 잘 돌아가 재정이 튼튼해져야 한다. 경제가 잘 돌아가게 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국민연금이나 건강보험도 개혁이 시급하다. 연금과 건강보험 재정 고갈을 막으려면 국민들에게 돈을 더 내게 하든지, 연금 수령액이나 건강보험 혜택 수준을 낮추든지 해야 한다. 이에 대해 이 대표는 어떤 구상을 갖고 있는가? 돈을 더 내는 것도, 혜택이 줄어드는 것도 대부분 국민은 싫어 한다. 그러나 싫어한다고 방치할 문제가 아니다. 진정한 정치 지도자라면 국민이 당장은 싫어할지라도 미래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그 구상을 밝히고 국민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대표는 그런 구상과 설득력을 갖추고 있는가? 대외적으로는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 강대국과의 외교· 안보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가야 하는지가 중요한 문제이다. 흔히 말하듯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식으로 간단히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처한 외교·안보 현실은 수학으로 치면 초등생도 할 수 있는 더하기와 빼기 수준이 아니다. 대학생도 풀기 어려운 고차원 방정식 수준이다. 이 대표는 이 어려운 외교· 안보 문제를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지 구상이 있는가? 그는 ‘중국과 대만의 문제가 어찌 되든 우리와 뭔 상관이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우리가 왜 끼어드나’라고 했다. 고차원 방정식으로도 풀기 어려운 문제를 더하기와 빼기만 하면 충분하다는 식이다. 이 정도 인식 수준으로 복잡하고 냉엄한 국제 현실에서 과연 국가를 안전하게 이끌 정치 지도자가 될 수 있겠는가? 권력 투쟁 정치는 교활하고 사악한 술수의 정치다. 거짓, 왜곡, 선동, 말 뒤집기를 아무 거리낌 없이 행한다. 권력 쟁취라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리더십의 정치는 다르다. 신뢰성, 진실성, 인간성 같은 기본 가치를 존중한다. 선동 대신 설명하고 설득한다. 공공의 이익이라는 정당한 목적을 사실과 이치에 근거한 정당한 방법으로 추구한다. 이 대표가 권력 투쟁 정치에서 벗어나 리더십 정치로 나아갈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정치학과ㆍ 대학원 정치학 석사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본부장 ▶원주 한라대 특임교수 2024-04-14 16:14:26
- [김낭기의 관점] 중도층의 합리적 선택이 나라 미래 결정한다 이번 4·10 국회의원 총선에서도 선거 결과를 좌우할 사람들은 중도파 또는 무당층이다. 총선을 앞두고 실시된 여러 여론조사에서 중도파는 대략 30% 수준이다. 선거가 다가올수록 자신을 중도파라고 하는 응답 비율이 작아지긴 한다. 거대 양당인 더불어민주당 또는 국민의힘 중 어느 한쪽으로 마음을 굳힌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30%에 이르는 중도파의 존재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더불어민주당이나 국민의힘에는 전통적 지지층이 있다. 지역, 나이, 이념에 따라 고정돼 있다. 이들 전통적 지지층은 선거 때마다 더불어민주당 또는 국민의힘에 ‘묻지 마’ 투표를 한다.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이 정치를 잘하든 못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선거 당시 상황에 따라 양당 지지층의 결속력에 다소 차이가 날 수는 있지만, 선거 결과를 좌우할 정도는 되지 않는다. 중도파 또는 무당층은 말 그대로 어떤 특정 정당도 고정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투표를 할 때 지역, 나이, 이념에 얽매이지 않는다. 어떤 정당이 정치를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가장 중요하게 따져서 표를 던질 뿐이다. 당연히 선거 때마다 지지하는 정당이 달라지고, 이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정당의 승패가 결정된다. 중도파 또는 무당층의 선택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전 국민 1인당 25만원'···긴급 처방이냐 매표 행위냐 그럼 중도파는 이번 총선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무엇을 기준으로 지지할 정당을 골라야 할까? 그 기준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 그 정당의 국가 운영 철학을 빼놓을 수 없다. 그 정당이 큰 테두리에서 국가를 어떤 철학을 갖고 어떤 방향으로 운영할 것인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정당의 국가 운영 철학은 그 정당의 대표적이거나 상징적인 정책에서 나타난다. 이 정책을 잘 살펴보면 그 정당의 국가 운영 철학을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더불어민주당의 경우 이재명 대표가 말한 ‘민생 회복 지원금’ 정책이 상징적인 정책의 하나이다. 민생 회복 지원금이란 국민 모두에게 1인당 25만원, 가구당 100만원을 지급하는 정책이다. 이 대표는 “여기에 필요한 예산은 13조원”이라며 “이 돈으로 죽어가는 민생 경제와 소상공인, 골목 경제, 지방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했다. 이 대표는 전 국민에게 25만원씩 총 13조원을 풀면 소비가 활성화돼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대표 주장대로 당장은 돈이 돌아 소비가 늘 수는 있다. 하지만 ‘반짝 효과’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문재인 정부 때도 긴급 재난 지원금을 풀었지만 소비 진작 효과는 단기간에 그치고 말았다. 이 대표는 민생 회복 지원금을 ‘민생 경제 심폐 소생술’이라고 했다. 심장이 멈춰 생명을 잃어가는 사람에게 심폐 소생술이 필요하듯, 민생 경제가 죽어가는 상황이니 긴급 지원금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경제가 어렵다고 해도 당장 가구당 100만원을 풀지 않으면 숨이 넘어갈 만큼 긴박한 상황은 아니다. 그럼에도 '심폐 소생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선거에서 돈으로 표를 얻기 위해 상황을 의도적으로 왜곡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나아가 국가의 바람직한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보다 근본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큰 정부'냐 '작은 정부'냐 하는 논란이다. 큰 정부는 예산을 많이 쓰고 국민 생활에 많이 개입한다. 작은 정부는 그 반대다. 큰 정부가 되면 재정 부담이 커지고 그 부담을 감당하려면 세금을 더 많이 거둬들여야 한다. 세금을 늘리면 경제 활력이 떨어져 국민 전체의 소득이 줄고 이는 소비 감소를 불어오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 대표 주장대로 소비를 늘려 경제를 살리기 위한 목적이라면 반짝 효과에 그칠 일회성 정책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업 투자 지원과 일자리 창출로 경제를 살리는 정책이 장기적으로 더 효율적일 수 있다. 국민의힘 상징적 공약의 하나로는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폐지를 들 수 있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국민의힘은 금투세 폐지법안(소득세법 개정안)을 제출했지만, 거대 야당인 민주당이 반대해 통과되지 않고 폐기될 상황”이라며 “국민의힘이 1400만 개인 투자자의 힘이 되겠다. 금투세 폐지를 반드시 해낼 것”이라고 했다. 한 위원장은 국민들을 향해 “총선 결과에 따라 금투세가 폐지될지 아니면 시행될지가 결정된다”고 했다. 정책 들여다보면 정당이 보인다 금투세는 주식·채권·펀드·파생상품 같은 금융투자로 일정 수준 이상의 양도 소득을 올린 투자자에게 부과하는 세금이다. 주식투자로 5000만원, 펀드 등 기타 상품으로 250만원 이상 벌면 이익의 20~25%를 과세한다. 금투세는 2022년부터 시행될 예정이었으나 주식시장 침체를 이유로 2년간 유예돼 2025년부터 시행된다. 금투세가 시행되면 개인 투자자들이 국내 주식시장 대신 외국 주식시장으로 옮겨 갈 수 있다. 이는 국내 주식시장 활성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국민의힘은 금투세를 폐지하면 장기적으로 국내 주식시장이 활성화돼 1400만 개인 투자자에게 이익이 될 것으로 본다. 그러나 금투세 폐지는 조세 형평 원칙에 어긋날 수 있다.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는 말대로 근로소득처럼 투자소득에도 과세해야 하는 게 조세형평 원칙에 맞을 수 있다. 세금 감면으로 경제를 활성화해 장기적으로 국민이 이익을 보게 하는 정책을 따를 것인가, 조세 형평이라는 원칙을 따를 것인가의 문제이다. 외교 안보 정책에서도 양당 국가 운영 철학의 상징성이 드러난다. 이재명 대표는 “중국인들이 한국이 싫다고 한국 물건을 사지 않는다. 왜 중국을 집적거리느냐, 그냥 ‘셰셰(謝謝·고맙다는 중국 말)’, 대만에도 ‘셰셰’ 이러면 되지”라고 했다. 이 대표는 “지난 2년 동안 윤석열 정권이 가장 크게 망가트린 게 외교”라며 “(중국과 대만의) 양안 문제에 우리가 왜 개입하나, 대만해협이 뭘 어떻게 되든 우리가 뭔 상관 있나”라고 했다. 이 대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우리가 왜 끼나"라고도 했다. 윤석열 정부가 한·미·일 협력 강화만을 중시하고 중국과 러시아를 멀리하거나 자극한다는 비판이 담겨 있다. 이에 대해 한동훈 위원장은 “민주당의 대중국 굴종 인식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고 비판했다. 한 위원장은 “이 대표는 작년 6월 주한 중국 대사관을 직접 찾아가서 외교부의 국장급에 불과한 싱하이밍 대사에게 훈시에 가까운 일장 연설을 15분간 고분고분 듣고 왔다”며 "중국 패배에 베팅(‘건다’는 뜻) 하다간 후회한다는 싱 대사의 협박에 가까운 발언에 한마디 반박도 못한 게 이 대표다. 실수로 반박을 못한 게 아니라 그런 생각이라는 점을 이번 셰셰 발언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했다. 그는 "중국 불법 어선이 서해까지 들어오고 한복, 김치를 자기들 문화라 주장하고 동북공정으로 (우리 역사를 자기네 역사라고) 우리 역사에 대한 잘못된 주장을 해도 이 대표는 그 뜻을 받아들여 '셰셰'할 것인지 묻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민주당 강민석 대변인은 “중국은 우리 최대 교역국이다. 최대 교역국과 잘 지내라는 말이 왜 사대주의냐”며 “외교의 목적은 국익이다. 국익 실현을 위한 외교를 하라는 게 무슨 굴종적 자세냐”라고 했다. 민주당 주장대로 최대 교역국인 중국과 잘 지내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대중국 및 대러시아 정책은 한·미·일 안보·경제 협력 체계라는 우리 외교 안보 정책의 큰 틀을 떠나서 논의할 수는 없다. 막말·자질 논란보다 중요한 '국가 운영 철학' 우리가 중국이나 러시아라는 주변 강대국의 간섭과 압박에서 벗어나 국가 주권을 지킬 수 있는 가장 기본적 토대는 한·미 안보 동맹을 기반으로 하는 한·미·일 협력 관계다. 최대 교역국인 중국과도 잘 지내면서 안보의 기둥이 되고 있는 미국·일본과도 잘 지내는 게 우리의 과제이고 숙명이다. 우리가 중국과 대만의 양안 문제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두 문제가 한·미·일 협력 체계라는 우리 외교 안보 정책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한·미·일 협력 체계를 유지하려면 중국과 대만 간의 양안 문제나 러시와와 우크라이나 전쟁 같은 국제 문제에 대해 우리는 미·일과 보조를 맞춰야 할 수밖에 없다. 안 그러면 한·미·일 협력 체계가 흔들릴 수 있고 이는 우리의 안보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게 우리가 놓인 현실이다. 민주당 말대로 ‘국익’ 외교를 한다면 이런 복잡한 국제정세를 잘 헤아려 심사숙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대만해협이 어떻게 되든 우리가 뭔 상관이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왜 끼어드나’ 라고 쉽게 말할 일이 아니다. ‘셰셰’ 논란에는 외교 안보 국정 운영 철학에 대한 이 대표와 한 위원장의 근본적 차이가 담겨 있다. 이 밖에도 민주당과 국민의힘 간에는 국정 운영 철학 차이를 보여주는 정책들이 많이 있다. 후보들의 막말이나 자질도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중요한 게 양당의 국가 운영 철학이다. 이번 총선에서 어느 쪽 국가 운영 철학이 국가와 국민에게 더 이익이 될지 하는 판단이 내려진다. 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중도파 또는 무당층이다. 이들이 어떤 쪽을 선택하느냐에 나라의 미래 운명이 걸려 있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정치학과ㆍ 대학원 정치학 석사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본부장 ▶원주 한라대 특임교수 2024-03-28 15:57:24
- [김낭기의 관점] 의사 파업을 정당화하기 어려운 이유 의사 파업이 끝날 조짐이 없다. 지난달 말 전공의들이 집단 사직하며 병원을 떠날 때만 해도 의사 파업이 길어야 1~2주 만에 끝날 것으로 예상됐다. 정부가 의사들에게 손을 들든, 의사들이 정부에 손을 들든 할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파업이 벌써 4주째 이어지고 있다. 이젠 빅5 병원 의사들까지 파업에 동참하려 한다. 서울대병원 의사들은 오는 18일까지 정부가 의대 증원 방침을 바꾸지 않으면 집단 사직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다른 빅5 병원 의사들도 연대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의사 파업 사태를 보면서 당혹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의사 파업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화물연대 등 일반 노조 파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다른 노조 파업은 물류나 산업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이다. 의사 파업은 사람 생명을 담보로 한다. 의사들이 병원을 떠나면 환자들이 생명에 위협을 받는다.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아무리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담보로 파업하는 게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많은 사람들이 당혹감을 느끼는 이유는 이런 의문 때문일 것이다. 생명을 담보로 한 파업에 당혹감 정부는 2035년에는 65세 이상 인구가 1530만명으로 증가하는 등 노령화가 급속히 진행돼 의사가 1만5000명 부족할 것으로 예상한다. 한국개발연구원,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서울대 등 3개 기관은 연구 보고서에서 2035년 의사 수가 1만명 부족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부는 여기에 의료 취약 지역에 필요한 의사 5000명을 더해 총 1만5000명 부족으로 결론 내렸다고 설명한다. 5년간 의대 정원을 매년 2000명씩 늘리고 5년 뒤에 의대 정원을 재조정할 예정이라고 했다. 보건복지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건통계’를 인용해 2021년 기준 한국 인구 1000명당 임상 의사 수가 2.6명(한의사 포함)이라고 밝혔다. OECD 평균(3.7명)보다 30% 정도 적다. 연간 대학 의학계열(한의학 포함) 학과 졸업자 역시 인구 10만명당 7.3명으로 OECD 30개 회원국 중 이스라엘(6.8명), 일본(7.2명)에 이어 세 번째로 적었다. 그러나 의사들은 의사 수가 부족하지 않다며 증원에 반대한다. 의사 수가 부족한지 아닌지는 정밀한 과학적 검증의 대상이다. 정부 방침대로 5년 동안 매년 2000명을 늘리는 게 적정한지는 논란거리가 될 수는 있다. 정부도 5년 뒤 의대 정원을 재조정할 수 있다고 했다. 다만 관련 통계로 보면 한국의 의사 수가 선진국 주요 국가보다 적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의사들도 이 현실을 받아들일 만하다. 그러나 의사들은 정반대다. '증원 백지회'만 주장한다. 의사가 부족하지도 않지만, 의사를 증원한다고 해서 의료계 최대 문제인 필수 의료 인력과 지방 의료 인력 부족을 해결할 수 없다고 한다. 의사를 증원한다고 필수 의료 인력과 지방 의료 인력 부족이 저절로 해결될 수 없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의사를 늘리면 그중 일부가 필수 의료 분야나 지방 병원으로 가는 '낙수 효과'가 발생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낙수 효과가 과연 있을지, 있다면 얼마나 클지는 알 수 없다. 정부 대책 거부하고 '증원 백지화'만 주장 그래서 정부는 의사 증원과 별도로 필수 의료와 지방 의료 인력 확충 정책도 내놓고 있다. 필수 의료 분야에는 건강보험 수가를 올려 보상을 확대해 주기로 했다. '의료사고 처리 특례법'을 만들어 의사가 책임보험과 종합보험에 들면 의료 사고에 대한 법적 책임도 대폭 완화해 주기로 했다. 의료 사고를 당한 환자는 의사가 가입한 보험에서 손해배상금을 전액 받게 해 의사나 병원의 부담을 줄여주기로 했다. 정부가 공개한 '의료사고 처리 특례법' 초안에 따르면 미용 같은 비필수 진료과 의사는 진료 기록, CCTV 위조 등 고의적 불법 행위가 없는 한 환자가 상해를 입더라도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다. 필수 진료과 의사는 면책 범위가 더 넓어진다. 고의적 불법행위가 없는 한 환자가 가벼운 상해는 물론 중상해를 입어도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다. 환자가 사망했을 때라도 고의적 불법이 없으면 감형받고, 불가항력일 때는 처벌되지 않는다. 정부는 모든 의사가 책임보험에 의무적으로 가입하게 하고, 필수 진료과 의사의 책임보험비는 정부가 지원하기로 했다. 의료 사고에 대한 법적 책임 완화는 필수 진료과로 꼽히는 내과, 산부인과, 소아과, 응급의학과 의사들이 오래전부터 요구해온 사안이다. 정부는 지방의료 인력 확충을 위해 2028학년도부터 의대 입학생 60%를 지역 인재로 선발하되 '비수도권 지역에서 중학교를 입학·졸업한 뒤 해당 의대가 있는 지역의 고교를 입학·졸업한 학생'으로 자격 조건을 강화하기로 했다. 지방 중·고교 입학·졸업자로 한 이유는 예컨대 서울에서 학교 다니다가 중간에 지방으로 전학 가서 의대에 입학하고 졸업 뒤에는 서울로 되돌아오는 편법을 막기 위해서다. 중·고교를 지방에서 나왔다면 지방 연고가 그만큼 강해 의대 졸업 후에도 지방 병원에서 근무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의사들은 정부의 필수 의료 대책까지 거부하고 있다. 정부 대책이 미흡한 점이 많고, 전공의들을 병원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꼼수라고 주장한다. 정부 대책에는 여러 가지 보완할 점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점은 앞으로 더 논의해서 보완하면 된다. 그럼에도 의사들은 자기들이 요구해온 대책까지 거부하며 ‘증원 철회’만을 외친다. 의사들은 정부 방침대로 의사를 증원하면 의료 체계가 붕괴되고 의대 수업이 부실해진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이 맞는지도 의문이지만, 그런 위험이 있다면 정부에 예상되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책을 요구해 고쳐 나가면 된다. 그러지 않고 증원 철회만 주장하니 의료 붕괴와 의대 수업 부실 우려는 증원을 반대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고 속셈은 따로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과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의사 늘어 수입 줄까 우려하는 듯 의사가 늘어나면 의사 수입은 줄어든다. 지금의 의사는 물론이고 장래의 의사인 의대 학생들도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의사들이 다른 직종에 비해 더 많은 수입을 올리는 지금의 체제를 선호하고 지키려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생각할 점이 있다. 의사는 일반 직장인 평균 연봉의 몇 배에 달하는 고연봉을 받고 고수입을 올리는 게 당연한가 하는 점이다. 의사들의 고연봉·고수입은 시장경제 논리로만 보면 정당할 수 있다. 의사가 되려면 남보다 더 노력해서 수능에서 좋은 점수를 받고 의대에 들어가 10년간 수련해야 한다. 그러자면 머리도 좋고 노력하는 기질도 갖춰야 한다. 의사는 이런 능력과 노력의 산물이다. 능력과 노력으로 이룬 성과에는 그에 걸맞은 보상을 하는 게 시장경제 원리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지낸 로버트 노직(1938~2002)은 시장의 결과는 정당하다고 말한다. 자기가 정당하게 소유한 것을 정당하게 사용해서 얻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는 개인이 능력과 기질을 이용해 모은 재산은 물론이고 타고난 능력과 기질도 그 개인의 소유물이라고 한다. 의사는 자기 개인의 정당한 소유물을 정당하게 이용해서 의사가 됐다. 그러니 능력이 떨어지거나 노력하는 기질이 없어서 의사가 되지 못한 사람들보다 고연봉을 받고 고수입을 올리는 것은 노직 주장대로 한다면 정당하다. 부유한 부모를 둔 덕분에 의사가 된 경우는 어떨까? 가난한 집안보다 부유한 집안 출신이 의사가 되기에 유리한 게 현실이다. 어려서부터 사교육도 받고 등록금이 다른 학과보다 훨씬 비싼 의대에 입학할 수 있다. 부유한 계층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성공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천장에 부딪힌다는 ‘계급 천장’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노직은 이렇게 부유한 부모 덕분에 남들보다 성공하게 됐다고 하더라도 부모가 정당하게 번 재산을 자식에게 정당하게 사용한 이상 그 결과는 정당하다고 한다. 정부가 불평등을 바로잡으려고 개입하는 것은 정의에 어긋난다고 말한다. 의사 고연봉·고수입은 당연한가 이에 대해 역시 하버드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지낸 존 롤스(1921~2002년)는 시장의 결과라고 해서 무조건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한다. 시장의 결과는 타고난 재능과 기질의 결과이다. 어떤 부모를 뒀느냐도 시장의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남다른 재능과 기질을 타고나는 것은 운이다. 부유한 부모를 만나는 것도 전적으로 운이다. 그런데 타고난 운은 개인이 어찌할 수 없다. 개인의 선택과 통제 범위 밖에 있다. 롤스는 우리가 선택하고 통제할 수 없는 결과까지 개인의 몫으로 돌릴 수는 없다고 한다. 불운을 타고난 사람에게 그 불운의 결과를 혼자 감당하라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 마찬가지로 행운을 타고난 사람에게 그 행운의 결과를 혼자 독차지하게 하는 것도 부당하다. 롤스는 과정은 외면한 채 결과만 따질 수는 없다고 한다. 불운을 타고나 흙수저가 된 사람은 영원히 흙수저로 살고, 행운을 타고나 금수저가 된 사람은 영원히 금수저로 살아야 한다면 이는 정의라고 할 수 없다는 뜻이 롤스의 주장에 담겨 있다. 롤스는 불운을 타고난 사람에게 정부가 여러 가지 복지 혜택을 줘 불평을 해소해 줘야 하듯이, 행운을 타고난 사람에게는 일정한 제한을 가해 재산을 재분배하는 게 정의라고 한다. 롤스 이론대로 의사라고 해서 일반 직장인 평균 수입의 몇 배나 되는 고연봉을 받고 고수입을 올리는 것이 꼭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 능력과 노력의 결과 의사가 된 점을 존중해 일반 직장인보다 더 높은 수입을 얻는 것은 인정하되 너무 높은 보상이 되지 않도록 정부가 적절히 통제할 필요가 있다. 의사 증원은 의료 시스템이 지금보다 더 잘 작동하도록 하려는 게 근본 취지이다. 하지만 의사가 늘어나면 의사 수입이 줄어드는 효과도 낼 수 있다. 고연봉·고수입이 자연스럽게 조정될 수 있다. 의대 입학생 수를 2000명씩 늘리면 의대 쏠림 현상이 심해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반도체 등 기술입국에 필요한 분야로 진줄하는 학생들이 적어지면 국가적으로 손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과도기적인 현상에 그칠 수 있다. 의사가 늘어나서 ‘의사=안정적 고수입 보장’이라는 현실과 인식이 바뀌면 의대 쏠림 현상은 오히려 완화될 가능성이 크다. 자원 배분이 정상화될 수 있다. 의사 파업에는 의사 증원에 따른 의사 수입 감소라는 의사들의 불안과 불만이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의사의 고수입·고연봉이 반드시 정당하지만은 않다면 국민 생명을 담보로 고수입·고연봉을 지키려는 의사 파업도 정당하다고만 하기는 어렵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정치학과·대학원 정치학 석사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본부장 ▷원주 한라대 특임교수 2024-03-14 20:28:18
- [김낭기의 관점] 美 트럼프 대통령 출마 자격 …시민들이 물었다 미국 공화당의 유력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여러가지 민·형사소송에 휘말려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끄는 소송이 있다. 2020년 대선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선거 결과를 뒤집으려 한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직에 도전하는 것을 막겠다며 미국 시민들이 벌이는 헌법 소송이다. 연방대법원에서 조만간 이 소송의 결론을 내린다. 미국 정계와 법조계는 물론 일반 국민의 눈이 연방대법원이 어떤 판결을 할지에 쏠려 있다. 판결 결과에 따라서는 트럼프가 공직 취임권이 박탈돼 대통령 선거에 나서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지금까지 4가지 사건으로 기소돼 형사 재판을 앞두고 있다. 그 중 두 개는 전직 포르노 배우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숨기기 위해 그 배우에게 입막음성 돈 13만 달러(약 1억7000만원)를 지급하고자 회계 장부를 허위로 작성한 사건, 플로리다주 사저에 백악관 기밀문건을 불법으로 보관하고 돌려주기를 거부한 사건이다. 또 다른 두 개는 2020년 11월 자신이 조 바이든 현 대통령에게 패배한 대선에 불복해 선거 결과를 뒤집으려 한 사건이다. 트럼프는 이 같은 4개의 개별 형사 사건에서 모두 합쳐 무려 91개 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다. 다른 한편에서는 헌법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이 헌법 소송은 트럼프가 유죄냐 무죄를 따지는 다른 재판과는 성격이 다르다. 트럼프가 대통령직을 맡을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재판이다. 미국 수정헌법 제 14조 3항을 트럼프에게 적용해 트럼프의 공직 취임권을 박탈해야 하느냐 아니냐가 재판의 핵심이다. 제 14조3항은 ‘미국 헌법을 지지하기로 선서한 사람이 내란이나 모반에 가담하면 공직을 맡을 수 없다’고 정하고 있다. 2021년 1월 6일 국회의사당 난입 선동 혐의 콜로라도주 대법원은 지난해 12월 19일 이 조항을 적용해 트럼프를 콜로라도주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 명단에서 빼야 한다고 판결했다. 트럼프는 미국 의회가 2020년 11월 치러진 대선에서 현 바이든 대통령이 당선됐음을 확인하기 위해 2021년 1월 6일 회의를 열었을 때 회의를 막으려고 자기 지지자들을 선동하고 부추겨 국회의사당을 습격하도록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총까지 든 시민들이 국회의사당을 습격한 사상 초유의 사건으로 당시 미국은 발칵 뒤집혔다. 이 사건 이후 수정헌법 14조 3항에 따라 트럼프가 대통령직을 맡을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는 소송이 여러 주에서 이어졌다. 이 소송의 핵심 쟁점은 네 가지다. ①트럼프 지지자들이 2020대선 결과의 공식 확인 절차를 중단시키기 위해 의사당에 난입한 것이 ‘반란’인가, ②반란이라면 트럼프가 사전에 지지자들에게 선거 불복 메시지를 던지고, 의사당 난입 사건 당일에는 불복을 독려하는 연설을 하고,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에는 해산을 권고하지 않고 방치한 행위가 ‘반란 가담’인가, ③ 14조3항의 해석과 적용은 정치적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법원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인가, ④14조 3항에서 말하는 ‘공직’에 대통령직도 포함되는가이다. 콜로라도주 하급심은 ①~③항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④항에는 ‘아니다’라고 했다. 취임 자격이 박탈되는 ‘공직’에 대통령직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의 공직 취임 자격을 박탈해 달라는 청원을 기각하는 판결을 했다. 하급심은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14조3항에는 취임 자격이 박탈되는 ‘공직’이 나열돼 있는데 대통령직은 여기에 명문으로 언급돼 있지 않다는 게 첫째 이유였다. 또 하나는 대통령의 취임 선서 내용과 14조3항의 선서 내용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대통령은 취임할 때 헌법을 ‘보존하고 보호하고 방어’할 것을 선서한다. 그런데, 14조 3항은 헌법을 ‘지지’하기로 선서한 사람으로 돼 있기 때문에 대통령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두 가지는 트럼프 변호인들이 재판 과정에서 주장했다. 하급심은 그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콜로라도주 대법원은 대법관 7명 중 4대 3의 다수결로 ④항에 대해서도 ‘그렇다’고 판결했다. 대통령직도 14조3항에서 말하는 취임 자격 박탈 대상 ‘공직’에 해당한다고 했다. 따라서 트럼프는 대통령직을 맡을 수 없기에 선거법에 따라서 콜로라도주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 명단에서 빼야 한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14조3항의 ‘공직’에 대통령직이 특별히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대통령직이 너무나 분명한 공직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다”고 했다. 트럼프의 대통령 자격 박탈에 반대의견을 낸 대법관 3명은 절차상 이유로 그리 했다. 트럼프가 반란에 가담했는지, 14조3항이 대통령직에도 적용되는지 하는 실체적 이유가 아니었다. 이들은 각 주(州)의 법원이 연방의회의 적절한 선행 조치 없이 이런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월권이라고 했다. '대통령 될 자격 있나' 논란 대통령직이 14조3항에서 말하는 ‘공직’에 해당하는지 아닌지 하는 논란이 벌어진다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없어 보인다. 공직으로 치면 대통령직보다 더 헌법을 지키는 데 모범이 돼야 할 공직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트럼프 변호인들은 대통령직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트럼프를 제소한 측에서는 “14조3항에 적혀 있는 ‘공직’이라는 단어의 평범한 의미에 일부러 눈을 감는 어이없는 주장”이라고 반박한다. 트럼프가 헌법을 ‘보존, 보호, 방어’한다고 선서했지, ‘지지’한다고 선서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더욱 실소를 자아낸다. ‘보존, 보호, 방어’에는 ‘지지’의 의미가 전제돼 있다고 보는 게 상식이다. 지지하지 않고서야 보존, 보호, 방어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트럼프 측은 14조3항 규정대로 ‘지지’한다고 선서하지 않았으니 3항이 대통령직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트럼프 측은 지자자들의 의사당 난입이 ‘반란’이 아니라고도 주장한다. 반란이란 ‘무기를 들고 전쟁을 일으키는 행위’라고 한다. 트럼프를 제소한 측은 ‘선거 결과를 뒤집기 위해 의사당에 총을 들고 난입한 폭동이 어찌 반란이 아니냐’고 반박한다. 콜로라도주 대법원도 판결문에서 “평화로운 권력 이양을 위해 필요한 절차를 진행하는 의회의 행위를 막거나 방해하기 위해 공공연하게 집단적으로 폭력을 사용하거나 사용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은 반란이라고 하기에 충분하다”고 했다. 트럼프는 콜로라도주 대법원 판결을 맹비난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민주당이 오는 11월 대선에서 바이든을 당선시키고 자기를 낙선시키려고 꾸민 책략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공화당 차원의 반발은 없다. 민주당도 조용하다. 판결을 환영한다든지, 트럼프는 즉각 후보 사퇴하라는 주장이 나올 법하지만 그렇지 않다. 뉴욕타임스는 대부분의 민주당원들은 이 소송에 관여하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가 의사당 난입 사건에 가담한 것은 자명하다”라면서도 “트럼프의 대통령직 자격 박탈 여부는 법원 결정에 따를 일”이라고 원론적인 말만 했다. 우리 같으면 재판 결과를 놓고 지지와 반대로 나라가 두 동강이 나고, 법원을 죽여라 살려라 난리를 치고, 여당과 야당은 사필귀정이니, 정치 판결이니 하고 싸우느라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을 일이다. 미국에서는 정치 공방 대신 수정헌법 제14조3항의 해석과 적용을 둘러싼 법률적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조항은 미국이 남북으로 갈려 싸운 남북전쟁(1861~1865년) 직후인 1868년 만들어졌다. 남부 7개 주(州)는 1861년 연방정부인 아메리카합중국(미국)에서 탈퇴해 '남부연합'이라는 별도 정부를 수립하고 남북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1865년 전쟁에서 패배하고 항복했다. 남부연합은 미국 입장에서 보면 반란 세력이다. 미국은 그런 남부연합 출신들이 공직을 맡는 것을 막으려고 수정헌법 14조 3항을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조항은 단 한 번만 적용됐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이 전쟁에 반대해 폭동을 선동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회주의 계열 하원의원을 제명할 때였다. 이처럼 적용된 적이 단 한 번뿐이기에 이 조항의 의미를 두고 논란이 벌어질 일도 없었다. 그런데 트럼프 지지자들이 2021년 1월 6일 의사당에 난입한 사건을 계기로 이 조항이 비로소 현실 문제가 된 것이다. 이 조항의 해석과 적용을 놓고 논쟁이 벌어지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놀라운 일은 미국 민주주의 가장 묵직한 이슈를 다루는 14조3항 관련 헌법 소송이 정당이나 정치인들이 아니라 뜻밖에도 무명의 일반 시민들이나 비영리단체에 의해 제기됐다는 점이다.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현재 미국 50개 주 가운데 최소 35개 주에서 ‘트럼프 대통령직 박탈’을 위한 헌법 소송이 벌어지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이 소송을 낸 사람들이 크게 세 보류라고 보도했다. 존 앤서니 카스트로라는 40세의 텍사스 출신 무명 공화당원, ‘워싱턴의 책임성과 윤리를 위한 시민들’과 ‘인민을 위한 자유 언론’이라는 두 개의 비영리단체, 지역주민들 모임이다. 평범한 시민들이 헌법 소송 주도 놀라워 콜로라도주 대법원 판결은 ‘워싱턴의 책임성과 윤리를 위한 시민들’이 이끌어냈다. 콜로라도주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메인주 국무장관이 이 판결을 근거로 트럼프의 대통령직 자격을 박탈하고 공화당 예비경선 명단에서 트럼프를 삭제한다고 발표했다. 메인주는 법원이 아니라 국무장관이 이런 결정을 하도록 법에 규정돼 있다. 메인주의 결정을 이끌어낸 것은 지역주민들 모임이다. 특이한 사람은 존 앤서니 카스트로이다. 뉴욕타임스는 카스트로가 트럼프를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자 명단에서 빼려고 최소 27개 주의 법원을 드나들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만큼 여러 주에서 소송을 냈다는 말이다. 법학 석사 출신인 카스트로는 “좀 더 잘 알려진 누군가 이 소송에 나서주길 바랐으나 아무도 나서지 않아 혼자서 하기로 했다”고 한다. ‘트럼프 자격 박탈’ 소송은 제기하는 사람에 따라 형식이나 논리가 각양각색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보도했다. 2020년 대선 패배를 뒤집으려 한 트럼프가 과연 다시 대통령직을 맡을 자격이 있는지를 묻고 있다는 점이라고 했다. 선거 불복으로 헌법을 위반한 사람이 헌법 수호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 다시 되도록 내버려 둬도 되느냐고 묻는다는 말이다. 콜로라도주 대법원 판결을 인용할지 파기할지는 연방대법원에 달려 있다. 연방대법원은 지난 8일 트럼프 측과 제소자 측을 불러 질의 응답을 벌였다. 뉴욕타임스는 그 내용으로 볼 때 연방대법관들이 콜로라도주 대법원 판결의 적절성에 회의적인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연방대법원이 콜로라도주 대법원 판결을 파기할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했다. 그러면 트럼프는 대통령 선거에 나설 수 있다. 그러나 연방대법원 판결 결과에 관계 없이 이번 헌법 소송은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대통령 선거 결과에 불복한 사람이 다시 대통령직에 도전하는 것을 바라만 볼 수는 없다는 문제 의식이 표출됐다. 그 문제를 집회나 시위 또는 정치 공세 같은 비법률적 방법이 아니라 헌법에 따라 해결하려고 했다. 헌법 소송으로 이끈 주역이 정당이나 정치인이 아닌 일반시민들이다. ‘죽어 있던’ 헌법 조항을 끄집어 내 민주주의와 헌법에 관한 쟁점들에 대해 무엇이 적절한지 국가적으로 토론하고 있다. 이런 게 미국의 힘이 아닐까.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정치학과ㆍ 대학원 정치학 석사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본부장 ▶원주 한라대 특임교수 2024-02-18 17:45:58
- [김낭기의 관점]한동훈의 불체포 특권 포기 선언, 이대로 가면 공염불 되고 말 것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국회의원 불체포특권 포기를 서약해야 4월 국회의원 총선 후보자로 공천하겠다고 선언했다. 불체포특권에 대한 국민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해서일 것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과거 한때 불체포특권을 포기하겠다고 공개 약속 했었다. 그는 나중에 자신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되자 말을 뒤집었지만 불체포특권 포기가 국민에게 호소력이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은 틀림없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국회의원 불체포특권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강하다. 불체포특권 포기가 정치 개혁의 대표적 방안 중 하나로 여겨질 정도이다. 문제는 헌법에 보장된 불체포특권을 포기하겠다고 약속만 하면 실제로 포기될 수 있는 것인가이다. 불체포특권은 국회의원 개인의 권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제도’의 하나다. 제도가 개인의 의사에 따라 무력화될 수 있느냐가 불체포특권 포기 논란의 핵심이다. 불체포특권은 영국에서 16~17세기에 의회제도와 민주주의가 발전하면서 생겨난 제도이다. 당시 왕은 중산층한테서 세금을 거둬 왕정을 운영했다. 왕은 절대적 권한을 행사하며 세금을 마음대로 거뒀다. 그러나 경제 발전으로 중산층 세력이 커지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중산층이 왕에게 대항하기 시작했다. 중산층은 자신들이 대표자를 뽑을 테니 이 대표자들과 협의해 세금을 거두라고 왕에게 요구했다. 대표자와 협의하지 않으면 세금을 내지 않겠다고 했다. 의회민주주의 발달사에서 그 유명한 ‘대표 없이 세금 없다’는 구호가 그때 상황을 대변해 준다. 그 대표자들이 의회의원이다. 왕은 처음에는 중산층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나 갈수록 중산층 세력이 커지고 이들이 내는 세금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결국 중산층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의회가 힘을 키워 갔다. 이후 중산층은 갈수록 왕의 절대적 권한 행사를 견제하려 했다. 그중 하나가 의회의원이 의회에서 왕정을 비판하더라도 왕이 의회 동의 없이 함부로 잡아가지 못하게 하는 제도의 도입이었다. 바로 불체포특권이다. 이뿐이 아니다. 의회의원들이 의회에서 왕정을 비판하려고 한 말에는 책임을 묻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게 면책 특권이다. 의회의원들은 왕이 임명한 내각대신(大臣), 즉 장관들에게 불만이 있을 경우 의회가 결의하면 내각대신을 해임하라고 왕에게 요구했다. 중산층 세금에 의존해야 하는 왕은 어쩔 수 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여기서 생겨난 게 요즘 민주당이 전가의 보도로 사용하는 탄핵 제도이다. 국회의원 방탄 장치로 전락, 비판 여론 크지만 이처럼 불체포특권은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왕으로부터 의회를 지키기 위해 생겨났다. 1603년 영국 의회가 불체포특권을 담은 ‘의회 특권법’(Privilege of Parliament Act)을 처음 법제화했다. 이를 1789년 미국이 헌법에 수용했다. 이후 프랑스, 독일, 일본 등 많은 나라가 불체포특권을 헌법적 기본 권리로 채택했다. 우리도 1948년 정부 수립 때 미국 헌법을 본받아 불체포특권을 헌법에 넣었다. 과거 유신정권이나 전두환 군사정권 같은 민주화 이전 시대에는 불체포특권이 정권으로부터 국회의원과 국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정권이 국회를 장악하고 있어 국회가 제 기능을 다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헌법에 불체포특권이 규정돼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정권이 국회의원을 함부로 체포하거나 구속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게 했다. 국회를 정권의 탄압으로부터 지키는 최소한의 안전판 역할을 한 것이다. 민주화가 된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정권이 국회의원을 불법 부당하게 탄압하기는 불가능하다. 정권의 권력이 국민의 힘을 누를 수가 없다. 대통령 권력이 국회 권력을 누를 수 없는 세상이다. 언론과 각종 단체들도 정권을 견제한다. 사법부도 정권에 장악돼 있지 않고 상당한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제 정권 탄압으로부터 국회의원을 보호하기 위한 불체포특권 제도는 굳이 없어도 될 정도이다. 오히려 불체포특권은 국회의원들이 비리를 저지르고도 국회 권력을 방패 삼아 체포와 구속을 면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국회가 동료 의원을 감싸는 방탄 장치로 전락해 있다. 많은 국민들이 불체포특권 폐지를 정치 개혁 최우선 순위의 하나로 꼽게 된 게 바로 이래서다. 이러니 한동훈 위원장이 불체포특권 포기를 들고나오고, 이재명 대표가 한때나마 불체포특권 포기를 약속하고 나온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불체포특권이 포기한다고 해서 포기될 수 있느냐이다. 일반적으로 권리는 당사자가 그 권리의 행사를 포기하겠다고 하면 별다른 조치 없이 즉각 포기의 법적 효력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1심 재판에서 진 사람은 2심에 항소하고 나아가 대법원에 상고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 당사자가 항소권이나 상고권을 포기하면 그는 항소할 수 없고 상고도 할 수 없다. 구속영장 실질심사도 마찬가지다. 피의자가 실질심사를 받을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하면 그 효과는 즉각 나타나 법원은 실질심사 없이 영장 발부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재판에 넘겨진 사람은 국민참여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 이 역시 당사자가 포기하면 국민참여재판은 열리지 않는다. 포기하겠다고 해서 포기되지 않아 그러나 불체포특권 포기는 다르다. 불체포특권은 국회 동의 없이는 체포나 구속되지 않을 헌법상 권리를 말한다. 불체포특권 포기가 가능하려면 포기의 법적 효과가 다른 권리의 포기 때처럼 별다른 조치 없이 즉각 나타나야 한다. 당사자가 포기한다고 하면 국회의 체포 동의안 표결 절차가 법적으로 불필요해져야 한다. 그리고 법원은 국회 동의 없이도 영장 발부 여부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는 헌법상 불가능하다. 아무리 당사자가 불체포특권을 포기하겠다고 하더라도 국회 동의 절차를 생략할 수는 없다. 국회 동의 없이 법원이 영장을 발부할 수도 없다. 국회의원이 국회 체포 동의안 표결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자발적으로 법원 영장 심사에 응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경우라도 법원은 국회 동의 없이 체포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국회의원이 불체포특권 포기를 약속하면 국회 체포 동의안 표결 과정에서 동의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커질 수는 있다. 영장이 청구된 국회의원이 신상발언을 통해 특권 포기 의사를 밝히면 다른 국회의원들은 찬성 표을 던지더라도 마음의 부담이 덜해질 수 있다. 게다가 다른 국회의원들도 공천 과정에서부터 특권 포기를 서약했다면 체포 동의안에 찬성 표를 던져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요인들이 합쳐져 체포 동의안에 찬성표를 던지는 의원이 많게 나와 동의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 하지만 설사 그렇게 해서 체포 동의안이 통과돼 당사자가 체포된다고 해도 그건 ‘표결에 의한 체포 동의’의 결과이지 ‘특권 포기’의 결과가 아니다. 아무리 특권을 포기하겠다고 해도 체포 동의안에 대한 찬반 표결 절차는 거쳐야 하고 여기서 동의안이 통과돼야 체포될 수 있다. 불체포특권을 누리지 못하게 된 이유가 ‘포기’라는 개인의 의사 때문이 아니라 ‘국회의 체포 동의’라는 헌법상 절차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불체포특권 포기는 법적 효과가 별다른 조치 없이 즉각 나타나는 다른 권리의 포기와는 법적, 실제적 성격이 다르다. 개인이 포기한다고 해서 곧바로 포기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말로 그치지 말고 제도적 대안 제시해야 국회의원이 불체포특권에 안주하지 않고 포기하겠다면 그 취지는 높이 사 줄 만하다. 단순한 선거 전략이 아니라 진정으로 국민 여론을 받들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그러나 다른 권리들처럼 개인이 포기한다고 하면 곧바로 포기되는 양 말하는 것은 문제가 다르다. 많은 국민들은 ‘불체포특권 포기를 약속만 하면 비리 혐의 국회의원이 국회 동의 절차 없이 곧바로 체포될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불체포특권 포기 약속은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해 국민을 호도하고 심하면 속이는 일이 될 수 있다. 헌법 개정 없이 불체포특권 포기는 불가능하다. 불체포특권 포기를 약속하려면 말로만 그러지 말고 제도적 대안을 함께 제시하는 게 옳다. 조해진 국민의힘 의원은 작년 7월 불체포특권 포기와 관련한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법안의 핵심은 국회의원이 불체포특권을 포기하고 스스로 영장실질심사에 응하고자 할 경우 다른 의원들에게 체포 동의안 표결을 위한 임시회를 열지 말아 달라고 요청할 수 있도록 하는 절차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에 앞서 권성동, 정우택, 유의동,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도 불체포특권의 오·남용을 막기 위한 개정안을 각각 대표 발의했다. 이 법안들은 현행 ‘72시간 내’로 규정된 체포동의안 표결 기간을 단축하고, 무기명인 투표 방식을 기명으로 변경하며, 기한 내 처리되지 않은 경우 가결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았다. 이들 의원이 낸 법안을 종합해 영장이 청구된 당사자가 임시회를 열지 말아달라고 요청할 수 있게 하고, 그 경우 임시회를 열지 않으며, 72시간이 지나면 가결된 것으로 간주하는 식으로 국회법을 개정하면 불체포특권 포기를 미흡하나마 법적 제도로 구현할 수 있다. 이런 제도적 대안의 제시 없이 말로만 불체포특권을 포기하겠다고 해선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면 다시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크다. 실행이 따르지 않아 실속이 없는 빈말, 이른바 구두선이 선거 때마다 반복될 게 뻔하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정치학과ㆍ 대학원 정치학 석사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본부장 ▶원주 한라대 특임교수 2024-01-17 17:14:29
- [김낭기의 관점]윤 대통령, '김건희 특검'에 대한 발상 전환을 의장대 사열 지켜보는 김건희 여사와 막시마 왕비 (암스테르담=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 김건희 여사와 막시마 네덜란드 왕비가 지난 12일(현지시간) 암스테르담 담 광장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빌럼 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이 의장대 사열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오는 28일 국회에서 ‘김건희 특검법’을 강행 통과시키겠다고 공언했다.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의혹이 특검 대상이다. 국민의힘은 특검법이 통과되면 윤석열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건의할 것이라고 한다. 특검법 일부 내용을 수정해 내년 4월 총선 이후 특검을 실시하자는 절충론도 국민의힘 주변에선 나오고 있지만 민주당이 반대해 성사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특검법이 실제로 통과되면 정부·여당으로선 곤혹스러운 처지에 빠진다. 거부권을 행사하기도, 행사하지 않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럴 때 과감히 발상의 전환을 해 보면 어떨까? 특검법을 수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김건희 특검’을 법치를 존중하고 실천하는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주는 기회로 삼는 것이다. 민주당이 추진하는 김건희 특검법은 그 내용을 보면 정부·여당으로선 수용하기 쉽지 않다. 무엇보다 특검 임명 방법이 그렇다. 야당인 민주당과 정의당이 특검 후보 2명을 추천하면 대통령이 그중 1명을 임명하게 했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특검 후보 추천 과정에서 뺐다. 민주당과 정의당이 처음부터 입맛에 맞는 사람을 특검 후보로 고를 수 있게 한 것이다. 민주당은 문재인 정부 시절 ‘드루킹 특검’ 때도 특검 후보 추천 과정에서 여당인 민주당은 빠지고 야당들만 참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때는 대한변협에서 4명을 추천하면 그중 2명을 야당이 대통령에게 추천하게 했다. 야당이 일방적으로 고르지 않고 대한변협을 거치게 하는 ‘중립성 보완’ 장치를 둔 것이다. 김건희 특검법은 이런 장치 없이 민주당과 정의당이 처음부터 일방적으로 후보를 고를 수 있게 한 게 결정적으로 다르다. 야당 특검법안, 특검 임명 방식 등 문제점 있지만 김건희 특검법에는 ‘특별검사나 특별검사의 명을 받은 특별검사보는 국민의 알권리 보장을 위해 피의사실 외 수사 과정에 관한 언론 브리핑을 실시할 수 있다’는 조항도 있다. 이는 과거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의혹 특검법’이나 ‘드루킹 특검법’에도 있기는 했다. 김건희 특검법 역시 그런 전례를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은 시기가 다르다. 지금은 내년 4월 10일 치르는 총선을 몇 달 앞두고 있다. 총선을 앞두고 수사 내용에 대한 언론 브리핑이 실시되면 총선은 ‘김건희 얘기’로 지고 샐 수 있다. 민주당 입맛대로 뽑은 특검이나 특검보가 정치적으로 편향되지 않고 공정하고 중립적인 자세로 브리핑을 할지도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자칫하면 확인되지 않은 내용까지 마구 인터넷에 떠돌아 정부·여당을 공격하는 선전·선동에 악용될 가능성이 크다. 사정이 이러니 국민의힘에서 대통령 거부권 얘기가 나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거부권을 행사하면 특검법은 폐기될 수밖에 없다. 총선에서 ‘김건희 얘기’가 선전·선동에 악용되는 사태를 막을 수는 있다. 그러나 다른 법도 아니고 대통령 부인이 관련된 법이다. 이런 법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국민들한테 민망한 일이다. 진퇴양난이다. 거부권을 행사하면 당장 총선에서 선전·선동에 악용되는 일은 피할 수 있겠지만 여론의 비난을 받게 된다. 여론의 비난이 총선에 악재가 될 수도 있다.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여론의 비난은 피할 수 있지만 선전·선동에 악용되는 일을 막을 수 없다. 이 역시 총선에 악재가 될 수 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거부권 행사냐 아니냐’에 얽매이지 말고 특검을 과감히 수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정부·여당, 특히 윤석열 대통령이 법치주의에 대한 굳은 신념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법치주의의 핵심은 ‘법 앞에 평등’이다. 우리 국민 대다수가 간절히 바라는 게 법 앞에 평등이다. 국민들은 권세와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사법기관에서 일반인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공직자가 아닌 민간인 중 현직 대통령 부인만큼 권세와 지위가 높은 사람은 없다. 일반인과 똑같이 행동해 국민들이 법 앞에 평등을 실감하게 할 수 있는 최적격자가 바로 김건희 여사다. '법 앞에 평등'은 국민의 간절한 요구 김건희 여사가 법 앞에 평등을 보여주는 방법은 간단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검찰 수사를 전후해 보였던 모습과 정반대로만 하면 된다. 이 대표와 민주당 사람들은 이 대표가 몇 차례 검찰 조사를 받는 동안 여러 면에서 일반인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지난해 12월 이 대표에게 수원지검 성남지청 부장검사가 소환을 통보하자 이 대표 측근은 ‘부장검사가 아니라 성남지청장이 당대표 비서실장에게 연락해 예우를 갖춰 말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라고 했다. 제1야당 대표에게 성남지청 최고 책임자가 아닌 부장검사가 통보하는 것은 ‘예우’에 맞지 않는다는 말이다. 일반인들에게는 부장검사는커녕 수사를 담당한 일선 검사가 통보하지도 않는다. 검찰 직원이 통보한다. 그런다고 해서 ‘왜 예우를 갖추지 않느냐’고 하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다. 김건희 여사에게 특검팀 중 누가 소환을 통보할지는 모른다. 고등검찰청 검사장급인 특별검사나 지방검찰청 검사장급인 특별 검사보가 통보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들은 직급상으로 보면 성남지청장보다도 높다. 김 여사는 누가 통보하든 일절 시비 걸지 말고 순순히 따르면 된다. 국민의힘이나 대통령실 관계자들도 예우 문제를 들어 시비를 걸면 안 된다. 그게 일반인들과 똑같이 행동하는 것이다. ‘왜 특별검사가 직접 통보하지 않고 아랫사람들이 하느냐’고 하면 특별 대우을 바라는 것이고 이는 법 앞에 평등에 어긋나는 일이다. 이 대표는 지난 1월 검찰이 평일 중 두 번에 걸쳐 출석할 것을 통보하자 ‘주중에는 일을 해야 하니 토요일에, 그것도 한 번만 출석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수사팀과 협의 없이 검찰 출석 날짜를 결정해 언론에 발표했다. 이 역시 일반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검찰이 두 번 나오라는데 한 번만 나가고, 그것도 저 편한 대로 토요일에 가겠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김건희 여사는 특검이 소환을 통보하면 만사 제치고 그 날짜에 출석해야 한다. 대통령과 함께 외국을 방문하는 아주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다른 일정이 있다고 해도 다 취소하고 출석해야 한다. 그게 일반인들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일반인들에게는 통할 수 없는 일을 자기에게는 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법 앞에 평등'을 부정하는 일이다. 이재명 대표 '법치 훼손'을 반면교사로 이 대표는 작년 9월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검찰 소환 통보를 받았을 때는 서면 진술서만 보내고 출석은 하지 않았다. 기자들이 당시 안호영 민주당 수석대변인에게 ‘일반인들도 고발을 당하면 검찰 소환 조사를 받는데 당대표라는 이유로 서면 조사만 받으면 형평성에 맞지 않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안 수석대변인은 “서면 조사 요구에 응하면 굳이 출석할 필요가 없다”고 답했다. 검찰이 출석하라는데 자기 맘대로 서면 진술서만 보내고 출석하지 않겠다고 할 수 있는 배짱 좋은 일반인은 없다. 김건희 여사가 서면 진술서로 대신하겠다는 둥 엉뚱한 소리 하지 말고 직접 출석한다면 일반인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 밖에 이 대표는 검찰 조사 때 미리 준비한 서면 답변서를 제출하고 검찰 심문에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묵비권도 법률상 보장된 권리이긴 하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행사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김 여사는 아무리 곤란한 질문이 나오더라도 국민에게 설명한다는 자세로 성실하게 답변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이 대표는 지난 9월 쌍방울그룹 대북송금 의혹으로 검찰 조사를 받고 나온 뒤 “예상했던 대로 증거라고는 단 하나도 제시받지 못했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내용으로 범죄를 조작해 보겠다는 정치 검찰에 연민을 느낀다”고 말했다. 일반인들은 할 수 없는 언행이다. 김건희 여사는 특검 조사를 받은 뒤 ‘정치 수사’ 운운하며 특검을 비난하는 말은 할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 ‘경위야 어떻든 대통령 아내로서 국민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죄송하다’는 한마디면 충분하다. 이 대표가 검찰에 출석할 때 민주당 의원들이 떼지어 나와 호위하고, 지지자들은 검찰청 주변에 몰려들어 검찰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 대표는 소환 시간과 장소가 명시된 포스터를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걸 보고 지지자들이 모였다. 이 대표는 “공포통치 종식과 민주정치 회복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제물이 되겠다”는 장문의 입장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김 여사는 특검에 출석할 때 떠들썩하게 하지 말고 혼자서 조용히 오고 가야 한다. 일반인들은 다 그렇게 한다. 필요하면 변호사만 대동하면 된다. 법치 준수로 국민 감동 준다면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의혹 사건은 문재인 정부 때인 2020년 4월 민주당 의원들이 김 여사를 고발하면서 시작됐다. 검찰은 2021년 12월 권오수 전 도이치모터스 회장을 91명 명의의 157개 계좌를 활용해 주가를 조작한 혐의로 기소했다. 그 1년 8개월 동안 문재인 정부 검찰은 이 사건을 조사했지만 김 여사는 수사를 계속한다는 이유로 기소하지 않았다. 당시 윤석열 검찰총장은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수사 지휘 중단을 지시해 이 사건 수사에 관여하지 못했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2월 권오수 전 회장에게 유죄를 선고하면서 ‘김건희 계좌 3개와 그의 모친 최은순 계좌 1개가 시세조종 행위에 동원된 차명 또는 위탁 계좌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 여사 계좌가 주가 조작에 활용됐다고 해서 김 여사가 주가 조작 범행에 가담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김 여사가 주가 조작을 인지했거나 공모했는지가 밝혀져야 범죄가 인정될 수 있다. 검사 출신인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2월 국회 답변에서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판결문을 보면 계좌 명의자가 수십 명이 나오는데 검찰이 기소한 사람은 그 중 1명”이며 “만약 다른 사람을 기소할 증거가 있었다면 기소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여사는 증거가 없어 기소하지 못했다는 취지다. 그렇다면 김 여사로서는 더욱더 특검 조사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김 여사가 특검 조사를 통해 ‘법 앞에 평등’을 유감없이 보여준다면 그 자체로 우리 법치주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국민들에게 ‘공정과 상식’의 가치를 새삼 느끼게 할 수 있다. 나아가 윤 대통령과 정부·여당을 보는 눈이 달라질 수 있다. 특검이 언론 브리핑을 통해 수사 상황을 생중계할 수 있다. 근거 없는 소문이 사실인 양 인터넷에 떠돌 수 있다. 이건 총선을 앞둔 정부·여당에 악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많은 국민이 그토록 갈구하는 법 앞에 평등을 직접 실천하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줘 국민을 감동시킨다면 그것대로 큰 가치가 있는 일이다. 김 여사에 대한 일부 부정적 인식도 크게 줄일 수 있다. 이런 요인들이 모이면 총선에서도 악재를 뛰어넘는 호재가 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발상의 전환은 그래서 해 볼 만하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정치학과·대학원 정치학 석사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본부장 ▶원주 한라대 특임교수 2023-12-21 11:00:05
- [김낭기의 관점]송영길의 '어린 놈'·조국의 '비법률적 명예회복' 발언에 담긴 그릇된 법의식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9월 27일 서울 용산구 자택 앞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검찰은 이날 송 전 대표의 '외곽조직 불법 후원금 의혹'을 수사하기 위해 자택을 압수수색했다.(사진=연합뉴스) '법 앞에 평등' · 사법 제도 무시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한동훈 법무부 장관에게 ‘어린놈’ ‘건방진 놈’이라고 해서 막말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막말을 한 건 맞는다. 그러나 그게 문제의 전부가 아니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법의식이 뒤틀리고 잘못됐다는 점이다. 법의식이란 간단히 말하면 법을 대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법 앞에 평등'을 무시하고 자기는 예외인 듯하거나 사법 체계의 기능을 부정하는 행동과 태도가 뒤틀리고 잘못된 법의식의 본보기다. 송 전 대표의 '어린놈' 발언에는 이런 뒤틀리고 잘못된 법의식이 드러난다. 송 전 대표뿐만 아니라 민주당 일부 의원들이나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같은 야권 인사들도 그렇다. 송 전 대표는 “이 어린놈이 국회에 와서 (국회의원) 300명이 자기보다 인생 선배일 뿐만 아니라 한참 검찰 선배를 조롱하고 능멸하고”라며 “이런 놈을 그냥 놔둬야 되겠나”라고 했다. 한 장관이 국무위원으로서 국회에 와서 보인 행태를 문제 삼았다. 아무리 장관 행태가 잘못됐더라도 '이놈 저놈' 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일이지만, 백보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진짜 문제는 송 전 대표가 이 말에 이어 돈 봉투 사건에 대해 한 말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 때문에 지금 100명 넘는 사람들이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에 불려가서 조사를 받고 그러니까 사실 너무 괴롭고 힘들고 죄송스럽다”며 “이게 무슨 중대한 범죄라고 6개월 동안 이 XX을 하고 있는데 정말 미쳐버릴 것 같다. XX놈들 아닌가”라고 했다. 바로 이 말이 송 전 대표의 뒤틀리고 잘못된 법의식을 보여준다 . 돈봉투 사건은 2021년 민주당 대표 경선 때 송영길 대표 후보 캠프 관계자들이 민주당 의원 등에게 돈 봉투를 전달했다는 사건이다. 송 전 대표 보좌관 박모씨는 민주당을 탈당한 윤관석 무소속 의원에게 현금 6000만원을 전달한 혐의를 법정에서 인정했다. 지난 8월 구속 기소된 윤관석 의원도 그동안 모든 범행을 부인하다 재판이 시작되자 이정근 전 민주당 사무부총장에게서 100만원씩 담겨 있는 돈 봉투 20개를 받았다고 법정에서 인정했다. 검찰은 돈 봉투 수수 정황이 있는 의원이 19명이라고 밝힌 바 있다. 돈 봉투 사건이 '중대한 범죄' 아니라니 당대표를 뽑는 경선 때 돈 봉투를 뿌렸다면 결코 가벼이 볼 일이 아니다. 이런 일은 50년 전 막걸리 선거, 고무신 선거가 벌어지던 후진국 시절에나 있던 일이다. 이제 선거 때 유권자들에게 돈 봉투를 뿌린다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런 구시대적 일이 불과 2년 전 민주당 대표 경선 때 벌어졌다면 어떻게 ‘중대한 범죄’가 아닌가. 불법의 중대성 여부를 자기한테 불리하냐 아니냐로 따지기 때문으로 볼 수밖에 없다. 송 전 대표는 국민의힘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더라도 ‘이게 무슨 중대한 범죄라고 이 XX을 하느냐’고 했을까? 남의 잘못은 중대하고 자기 잘못은 별것 아니라고 여기는 게 바로 '법 앞에 평등' 원칙에 어긋나는 행태다. 송 전 대표는 ‘어린놈’ 발언에 대해 방송 인터뷰에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는 “분노의 표시였다는 말씀을 드린다”며 “한 장관이 취하고 있는 모습은 거의 사적인 조직폭력이다. 지금 송영길, 이재명 몇 번이냐? 100번 넘게 압수수색하고 분노가 안 생길 수가 있겠냐”고 했다. 이 말 역시 뒤틀리고 잘못된 법의식을 보여준다. 검찰이 불법 행위를 수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수사하지 않는다면 직무유기다. 법과 절차에 따라 진행하는 검찰 수사를 ‘사적인 조직폭력’이라고 하는 것은 사법 체계의 기능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말이나 같다. 비리 의혹에 대해 합법적 수사를 하는 것에 분노를 느낀다는 말도 뒤틀린 법의식의 표출이다. 그게 어떻게 분노의 대상인가? 부끄러움의 대상이 아닌가? 검찰이 음습한 정치적 고려에서 별건 수사나 뒷조사를 통해 돈 봉투 사건을 만들어 냈다면 또 모른다. 그러나 이번 수사는 그런 게 아니다. 이정근 전 민주당 사무부총장의 휴대전화 통화 녹취록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문제가 시작된 것이다. 송 전 대표는 ‘송영길, 이재명은 100번 넘게 압수수색을 했다’고 한다. 야당 인사가 관련된 수사에만 압수수색을 지나치게 많이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이원석 검찰총장이 지난 10월 국정감사 때 이렇게 반박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 압수수색을 할 때, 삼성·롯데·SK그룹에 대해 압수수색할 때 (민주당 측에서) 압수수색이 많다는 말씀 한마디도 안 하셨지 않으냐.” 내가 잘못한 사건이든, 남이 잘못한 사건이든 수사의 엄정함에 차이가 있으면 안 된다. 그건 불공정이고 부정의이다. 남한테는 엄정함을 요구하면서 자기한테는 그러면 안 된다고 여긴다면 '법 앞에 평등'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국회의원 당선되면 유죄가 무죄 되나 조국 전 법무부 장관도 뒤틀리고 잘못된 법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지금 재판을 받고 있는데 최대한 법률적으로 해명하고 소명하기 위해 노력을 할 것”이라며 “이것이 안 받아들여진다면 비법률적 방식으로 제 명예를 회복하는 길을 찾아야 하지 않냐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법체계 내에서 어떤 한 사람이 자신의 소명과 해명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때 그 사람은 비법률적 방식, 예를 들어 문화적·사회적·정치적 방식으로 자신을 소명하고 해명해야 될 본능이 있고 그러한 것이 시민의 권리”라고 주장했다. 조 전 장관은 자녀 입시 비리와 청와대 감찰 무마 혐의로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그의 말은 자신은 무죄인데 법원에서 유죄를 선고했으니 '법률적 해명과 소명'이 이뤄지지 않았고 그래서 '비법률적 방식으로 명예회복을 하겠다'는 뜻이다. 법치국가에서 해명과 소명을 법률적 방식과 비법률적 방식으로 나누는 것부터가 이해하기 어렵다. 조 전 장관은 비록 1심이지만 이미 유죄 판단을 받았다. 법치국가에서 유무죄 여부를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기관은 법원이다. 조 전 장관은 1심 유죄 판단이 2심이나 3심에서 바뀔 수도 있고 그대로 유지될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그의 유무죄 판단은 법원이 한다. 이게 민주주의 법치국가의 작동 원리다. 그런데도 그는 1심 유죄 판결이 났다고 해서 '법률적으로 해명과 소명을 호소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했다. 자기가 무죄임을 주장하고 증거를 냈는데도 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 주장과 증거의 신빙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신빙성을 더 갖춘 증거를 찾아서 무죄를 주장하면 된다. 그럼에도 끝내 유죄가 선고돼서 억울하다면 다른 증거를 찾아서 재심을 청구할 수도 있다. 이렇게 끝까지 법률적 방식으로 대응하는 게 사법 체계를 존중하고 법치주의를 따르는 방식이다. 조 전 장관 말대로 '법체계 내에서 소명과 해명이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때 문화적·사회적·정치적 방식 같은 비법률적 방식으로 소명하고 해명해야 할' 때도 있을 수 있다. 과거 미국에서는 흑인들이 버스 뒷자리에 흑인 좌석을 따로 떼어 배치한다든지, 학교에서 흑인 학생만 따로 학급을 편성한다든지 하는 차별을 당했다. 흑인들은 소송을 냈지만 당시 법체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흑인들은 ‘인종 차별’을 없애라며 시위를 벌였다. 이런 게 '비법률적 소명과 해명'이자 '본능'이고 '권리'일 수 있다. 인종 차별은 이를 당연시하는 당시 시대 상황의 산물이다. 그때는 흑백 평등 같은 가치관이 자리 잡기 전이었다. 법체계에도 그런 가치관이 반영돼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법체계에서는 아무리 해명하고 소명해도 통할 수가 없었다. 이럴 때는 '비법률적 방식으로 명예회복에 나서는 게' 정당할 수 있다. 툭하면 '탄핵' 외치는 민주당도 법치 무시 그러나 조 전 장관이 받는 혐의는 그런 유(類)가 아니다. 업무방해, 허위공문서 작성·행사, 사문서 위조,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등 시대 상황과 무관한 것들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행위는 이미 그 자체로서 범죄라는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다. 오직 유죄 증거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그럼에도 조 전 장관은 마치 자기 행위가 범죄가 아닌 정당한 행위인데 우리 법체계가 받아들이지 않는 듯이 '비법률적 명예회복'을 외친다. 사법 체계를 부정하고 사법 체계 밖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겠다고 한다. 이런 게 뒤틀리고 잘못된 법의식이다. 그는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 ‘비법률적 방식의 해명과 소명 그리고 명예회복’이 이뤄졌다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그가 당선된 뒤라도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아 피선거권을 잃게 되면 국회법에 따라 의원직도 자동적으로 잃게 된다. 진정한 해명이나 소명, 명예회복은 국회의원 당선 여부가 아니라 법원의 유무죄 판단에 달려 있다. 법치국가에서 비법률적 방식의 해명이나 명예회복이란 존재할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은 걸핏하면 탄핵을 들고 나온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현직 검사 2명, 방송위원장을 탄핵 소추 대상으로 꼽는다. 심지어 대통령 탄핵도 입에 올린다. 헌법재판소는 이미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 당시 탄핵의 기본 원칙을 천명했다. ‘탄핵이 결정되면 공직에서 파면되기 때문에 탄핵에는 파면을 정당화할 만큼 중대한 위법 사유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민주당이 탄핵 소추하겠다는 사람들이 과연 파면을 정당화할 만큼 중대한 위법을 저지르고 있는가? 민주당 스스로 잘 알 것이다. 그럼에도 툭하면 ‘탄핵’을 꺼낸다. 국회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으니 힘으로만 따지면 못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힘이 있다고 법과 상식을 무시하고 함부로 휘두르면 그 역시 법치를 무시하는 일이다. 이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게 비뚤어지고 잘못된 법의식이다. 국회의원이나 법무부 장관은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걸 업무의 본질로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직을 지낸 사람들은 누구보다 법을 존중하는 데 앞서야 한다. 그런데도 억지와 궤변을 늘어 놓으며 법을 부정하고 무시한다. 자기 이익 앞에 법은 안중에도 없다. 법은 내게 불리할 때도 존중하고 따라야 한다는 일반 시민들보다도 법의식이 뒤처져 있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본부장 ▷원주 한라대 특임교수 2023-11-22 14:27:51
- [김낭기의 관점] 온갖 비리 의혹에도 지지세 굳건한 '이재명 정치'의 비법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17일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대장동 배임·성남FC 뇌물' 관련 1심 2회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차기 민주당 대선후보가 될 가능성은 거의 100%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당 내외 지지세가 굳건하다. 그는 자기에게 닥친 어려운 상황을 지금까지는 용케도 잘 극복하고 있다. 국회에서 체포 동의안이 가결돼 구속될 위기에 처했지만 영장 심사 결과 기각돼 구치소 행을 피했다. 영장이 기각돼 오히려 정치적 입지가 강해졌다. 민주당 내에서도 그렇고 고정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그렇다. 지난 11일 실시된 서울 강서구청장 보선에서는 민주당 후보가 56%대 39%라는 큰 득표율 차이로 승리했다. 이 역시 이 대표가 유지하고 있는 굳건한 지지세의 반영이자 결과로 볼 수 있다. 이 대표는 현재까지 6개 사건 10개 혐의로 기소됐다. 앞으로 더 늘어날 수 있다. 수사와 재판을 받느라 검찰청과 법원을 쉴 새 없이 드나들고 있다. 우리 정치사에서 제1야당 대선 후보를 지냈고 현직 당 대표인 사람이 이런 상황에 처했던 적은 없다. 그럼에도 이 대표는 강고한 지지세를 유지하고 있다. 미스터리에 가까운 일이다. 그 이유가 뭘까? '정치와 도덕은 별개' <군주론> 그대로 윤석열 정부의 국정 운영 방향이나 방식에 대한 반감이 민주당과 이 대표 지지의 주요 원인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 민주당 지지세가 높아지는 현상은 자연스럽지만 반드시 이 대표 지지도도 높아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민주당 지지세가 강하더라도 이 대표 아닌 다른 사람이 당 대표를 맡고 있고 온갖 비리 의혹에 휘말려 있다면 그 사람이 그 의혹에도 불구하고 이 대표처럼 강한 지지세를 유지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결국 이 대표에 대한 강고한 지지세는 민주당 지지세와는 별개로 이 대표 개인의 요인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으로 봐야 한다. 어떤 요인이 작용했을까? 이 대표가 여러 비리 의혹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남다른 국정 운영 철학이나 리더십을 가졌기 때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그가 국민의 폭넓은 지지와 공감을 얻을 만큼 원대하고 체계적인 국정 철학을 제시했다고 보기 어렵다. 국민 마음을 한곳으로 모아 분열을 극복하고 국가를 다시 한번 부흥시킬 뛰어난 정치 지도력을 가졌다고 평가하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국정 철학이나 리더십 외에 다른 요인이 비리 의혹에도 불구하고 강한 지지세를 유지하게 하는 이유가 됐을 것이다. 그 요인으로 그의 독특한 정치 방식과 행태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이 대표는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정치를 하고 있다. 그런 정치 방식이 지지층과 일부 중도층에 먹혀들어 강력한 지지세를 형성하게 된 게 아닐까 한다. ‘현실주의적’이라고 한 것은 그의 정치 행태가 도덕이나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이익이 된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대표는 전형적인 마키아벨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스트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 행태를 가리킨다. 500년 전 <군주론>이라는 책을 쓴 이탈리아 정치가 마키아벨리에서 따온 말이다. 마키아벨리는 이 책에서 ‘정치인에게 필요한 최고 자질은 역경을 헤쳐나가는 능력’이라며 ‘그 능력을 발휘하려면 자비심, 신의, 인간성, 정직성, 양심 같은 도덕에 얽매여선 안 된다’고 했다. 이런 도덕을 좇다가는 험난한 세상을 돌파해 나갈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가능하면 그런 도덕을 갖춘 듯 보이게 하라’고 했다. ‘교활함과 속임수로 사람들의 환심을 사야 한다’고 했다. 그는 ‘그러나 필요할 때는 그 도덕과 정반대로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보통 때는 도덕적인 듯 행동하되 필요한 상황에서는 두 눈 딱 감고 도덕을 무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대장동 몸통은 윤석열' 역공 물론 여기에는 전제가 있다. 국가를 존망의 위기에서 구해내기 위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인 개인의 사리사익을 위해서 도덕을 경시해도 좋다는 게 결코 아니다. 그런데 이 말이 잘못 전해져 마치 자기 욕심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도 좋다는 말로 변질됐다. 마키아벨리는 교활함과 속임수의 사례로 몇 가지를 들었다. 그중 대표적인 게 ‘위대한 거짓말쟁이가 되라’와 ‘약속은 불리하면 지키지 말라’이다. 그는 거짓말을 하되 남이 거짓말이라고 여기지 않도록 교묘하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을 ‘위대한 거짓말쟁이라고 했다. 마키아벨리는 약속에 대해서도 자기에게 불리하거나 약속할 당시와 상황이 바뀌었다면 지킬 필요가 없다고 했다. 약속 위반을 그럴듯하게 정당화시킬 핑곗거리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고, 사람들은 이런 속임수에 넘어가기 쉽다고 했다. 이재명 대표는 대장동 사건이 터지자 ‘윤석열이 대장동 몸통’이라고 역공세를 폈다. 2011년 부산저축은행 불법대출 수사 당시 검사이던 윤 대통령이 대장동 자금책이자 대출 브로커인 조모씨의 부탁으로 대장동 대출 비리를 유야무야해 ‘결과적으로 대장동 사업의 종잣돈을 지켜줬으니’ 윤 대통령이 대장동 몸통이라는 주장이다. 윤 대통령이 조씨에게 커피를 타줬다는 점을 주요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당시 조씨를 수사한 검사는 윤 대통령이 아닌 다른 검사였고, 커피를 타준 사람도 검찰 직원임이 최근 드러났다. 설사 윤 대통령이 커피를 타 주고 불법 대출 수사를 유야무야한 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걸 갖고 ‘윤석열이 대장동 몸통’이라고 할 일은 결코 아니다. 흉악범이 날뛰게 된 것을 그 흉악범을 낳은 어머니 탓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도 이 대표는 아직도 그 주장을 펴고 있다. 그 결과 이 대표 지지자들에게 ‘대장동 몸통은 이재명이 아니라 윤석열’이라는 믿음을 심어줬다. 중도층 사람들에게는 ‘이재명이 대장동 몸통’이라는 인식을 흐리게 만들었다. 아무리 거짓말이라도 자꾸 들으면 솔깃해지는 게 사람들 마음이다. 법정서 측근 끌어안는 모습 연출 이 대표는 지난 6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불체포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지난 8월 대장동 사건 등으로 검찰 수사를 받으러 가면서는 ‘“영장을 청구한다면 제 발로 (걸어가) 영장 심사를 받겠다”고 또다시 불체포 특권 포기를 천명했다. 그러나 막상 영장이 청구돼 국회에서 체포 동의 여부를 투표하게 되자 민주당 의원들에게 부결시키라고 했다. ’윤석열 검찰의 정치공작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불리하면 약속은 안 지켜도 되고 그 핑곗거리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마키아벨리스트 방식 그대로이다. 이 대표는 인간적 면모를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지난 6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대장동 사건 등을 다룬 공판에서였다. 이 대표는 재판이 끝날 무렵 피고인석에 나란히 앉은 정진상씨(전 민주당 대표실 정무조정실장)에 대한 ‘신체 접촉 허가’를 재판부에 요청했다. “(정진상씨의) 보석 조건 때문에 제가 전혀 접촉할 수 없다”며 “재판이 종료되면 대화하지 않을 테니 신체접촉을 할 수 있도록 부탁드린다. 한번 안아주고 싶다”고 했다. 재판부가 “그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고 했고, 이 대표는 재판이 끝나자 정씨의 등을 두드려주고 끌어안은 뒤 악수했다. 재판부가 이 대표 요청을 들어준 것은 부적절하다. 사사로움에 이끌리는 듯 보여 재판의 공정성을 의심받을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이 대표도 이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대표는 정씨를 안아줬다. 왜 그랬을까? 측근인 정씨에게 인간적인 미안함을 정말로 갖고 있어서일 수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대표의 속마음이 어떻든 이 대표가 자비롭거나 인간적인 모습을 정씨와 지지자들에게 보였다는 점이다. 그런 미덕을 과시하는 것만으로도 이 대표는 정씨와 지지자들의 환심을 살 수 있다. 정씨에게는 끝까지 이 대표에 대한 의리를 지키겠다는 마음을 갖게 하고, 지지자들에게는 ‘인간적인 이재명’이라는 인상을 심어 줄 수 있다. 다음 대선 전 혐의 하나라도 유죄 확정되면 '끝' 이 대표의 정치 방식은 최소한 현재까지는 통하고 있다. 그를 둘러싼 여러가지 비리 의혹에 대해 지지층에게는 검찰 수사가 조작이고 억지라는 믿음을 심어주고 있다. 이는 지지층의 지지를 더욱 강화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중도층에는 검찰 수사의 정당성에 대한 의심을 키우게 했다. 이는 이 대표에 대한 반감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낼 수 있다. 이 대표는 마키아벨리스트식 정치로 비리 의혹을 돌파해 나가며 지지층의 지지는 더욱 굳게 하고 중도층은 한발짝 더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그 결과 나타난 게 강고한 지지세이다. 문제는 이 대표 방식이 재판에서도 통할 것이냐이다. 이 대표는 10개 혐의 중 어느 하나에서라도 유죄 판결이 확정되면 대선 출마가 불가능해진다. 피선거권이 박탈되기 때문이다. 대선 출마가 불가한 유죄 확정 시한은 차기 대선일인 2027년 3월 3일이다. 이 대표가 대선 후보로 선출되더라도 선거일 이전에 유죄가 확정되면 그 순간부터 피선거권이 박탈된다. 윤석열 대통령 임기 동안 대법원장과 대법관 13명 등 전체 14명 중에 1명을 뺀 전원이 교체된다. 교체되는 13명 중 10명은 2024년 12월까지, 3명은 2026~2027년에 바뀐다. 2024년 12월이면 차기 대선으로부터 대략 2년 3개월 전이다. 최소한 대선 전 2년 3개월은 윤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이 과반수를 이루게 된다. 과반수이면 기존 판례도, 하급심 판결도 바꿀 수 있다. 1, 2심에서 이 대표에게 무죄가 선고되더라도 대법원에서 뒤집힐 수 있다. 이 대표가 마키아벨리스트식 정치로 굳은 지지세를 유지하는 데는 성공하고 있지만, 앞으로의 운명은 판사 손에 달려 있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본부장 ▶원주 한라대 특임교수 2023-10-18 19:06:56
- [김낭기의 관점]무당층 투표 심리로 내년 4월 총선을 전망해 보면 단식 중단 촉구하는 민주당 의원들 (서울=연합뉴스) 한상균 기자 = 15일 국회 더불어민주당 대표실에서 의원들이 이재명 대표에게 단식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내년 4월 10일 실시되는 국회의원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벌써부터 총선 결과에 대한 관심이 크다. 윤석열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번에는 국민의힘이 더불어민주당을 이겨 국회 권력을 뺏어 올 수 있을지를 주시한다. 윤석열 정부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번에도 더불어민주당이 국민의힘을 이겨 윤석열 정부를 비판하고 견제해 줄 수 있을지를 주시한다. 윤 대통령은 2022년 5월 취임 이후 국회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의 벽에 걸려서였다. 국민의힘이 대통령 선거에서는 승리했지만, 국회 권력은 더불어민주당에 뺏긴 상황이다. 진정한 정권 교체는 내년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과반수를 차지하거나 최소한 제1당이 돼 국회 권력을 쥐어야 이뤄진다고 할 수 있다.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더불어민주당에 이기면 윤 대통령은 국정 운영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 국민의 재신임을 받은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패배하면 국정 운영의 동력을 잃게 된다. 곧바로 레임덕에 빠질 수도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더욱 기세등등해질 것이다. 내년 총선은 윤 대통령이 진정한 정권 교체를 이루느냐, 아니면 레임덕에 빠지냐를 결정하게 된다. 그러니 벌써부터 총선에 관심이 클 만도 하다. 총선 결과를 예상하기는 어렵다. 다만 선거를 좌우할 중요 요인을 토대로 현재의 여야 상황을 살펴보면 선거 결과를 가늠할 수는 있다. 선거를 좌우할 중요 요인의 하나로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은 유권자들의 ‘정당 충성도’이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중 유권자들의 충성도가 더 높은 정당이 어디냐 하는 문제다. 특정 정당에 충성도가 높은 유권자는 그 정당에 ‘묻지 마’ 투표를 하게 된다. 그 정당에서 무슨 문젯거리가 발생하든, 그 정당의 후보가 어떤 인물이든 관계 없이 그 정당을 지지한다. 민주당 지지자는 ‘이재명 사법 리스크’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국민의힘 지지자는 ‘윤석열 역술인 논란’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정당 충성도는 과거 선거에서도 영향을 미쳤지만 이번에는 더욱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정치적 양극화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심하기 때문이다. 국민의힘·더불어민주당, '정당 충성도'는 비슷 그럼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충성도는 어떤가?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나타난다. 여론조사기관의 정당 지지도 조사 결과가 이를 보여준다. 한국갤럽이 지난 12일부터 14일까지 전국 만 18세 이상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정당 지지도는 국민의힘 33%, 더불어민주당 32%, 정의당 5%로 나타났다. 지지하는 정당이 없는 무당층은 29%였다. 다른 여론조사기관 조사에서도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각각 30% 안팎의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고, 무당층이 30% 내외를 차지하고 있다. 정당 충성도만으로는 승패를 가리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다만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의 결집도에서 차이가 날 수는 있다. 결집도가 더 강한 정당이 선거에 유리할 것임은 물론이다. 결집도에 영향을 미칠 요인은 여럿이겠지만,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흡인력이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다. 흡인력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다. 두 사람 중 누가 더 흡인력이 클까? 충성파들을 결집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있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충성파가 아닌 무당파의 움직임이다. 이들이 어느 쪽으로 쏠리느냐에 따라 선거 결과는 결정적으로 달라진다. 역대 선거에서도 무당파의 표심이 선거 결과를 좌우했다. 이번에는 무당파가 어떤 선택을 할까? 그들의 투표 심리를 결정하는 요인에 현재의 여야 상황을 비추어 보면 가늠할 수 있다. 무당층은 특정 정당에 대한 충성도가 거의 없는 사람들이다. 선거 때마다 지지하는 정당이 다르다. ‘묻지 마’ 투표를 하는 게 아니라 나름대로 ‘계산해서’ 투표를 하기 때문이다. 그 계산하는 방식은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전망적’ 방식과 ‘회고적’ 방식이다. 전망적 방식이란 특정 정당의 공약과 정책을 꼼꼼히 살펴 어느 당이 국정을 주도하는 게 더 좋을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회고적 방식이란 지금까지 어느 당이 더 잘했거나 못했는지를 따져 잘못한 쪽에 책임을 묻는 것이다. 전망적 투표가 미래의 가능성을 중시한다면 회고적 투표는 과거의 성과를 중시하는 셈이다. 무당층, 전망적 투표와 회고적 투표 전망적 투표는 당별 주요 정책과 후보의 자질 등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갖고 있어야 할 수 있다. 그래서 전망적 투표는 평소 정치에 관심이 많고 정치 현장의 흐름에 밝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회고적 투표는 별다른 정치 지식과 정보 없이도 가능하다. 누가 더 잘했거나 못했는지만을 따지면 돼 단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에 큰 관심이 없는 일반 대중 사이에서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현 정부가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탈원전 정책 폐기, 4대강 보 보존, 사드(SAAD, 고고도미사일) 배치 정상화, 한미 동맹 복원과 한일 관계 정상화, 대화보다는 힘에 의한 평화 같은 사안은 회고적 투표보다는 전망적 투표에 영향을 미칠 요인들이다. 이 정책들은 과거 문재인 정부가 폈던 정책을 뒤집는 것들이다. 현 정부·여당은 자기들 정책이 옳다고 주장하고 더불어민주당은 현 정부·여당 정책이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무당층이나 중도파 유권자들은 현 정부·여당 주장과 더불어민주당 주장 중 어느 쪽이 더 자기 입장에 맞고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될지를 판단하고 그 결과에 따라 투표할 것이다. 이들이 판단하는 근거는 양측이 서로 주장하고 반박하는 내용들이다. 정부·여당과 민주당 중 누가 더 정책의 타당성을 잘 설명해 무당층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을 것이냐가 관건이다. 누가 더 잘했거나 못했는지를 평가하는 회고적 투표에서는 표심을 가르는 중요 요소로 흔히 경제적 성과가 꼽힌다. 경제가 좋으면 현 정부에 유리하고, 나쁘면 불리하다고 한다. 미국 선거에서도 ‘바보야, 중요한 건 경제야!’가 핵심 정치 구호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경제 상황이 표심에 영향을 미칠 것임은 물론이다. 특히 경제 상황이 나쁠 때는 그 영향이 커질 것이다. 그러나 평소 수준이라면 경제 상황이 미치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을 수도 있다. 나아가 경제 상황이 투표 심리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은 유권자들의 의사 결정 심리를 너무 단순화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경제적 성과를 따진다는 말은 유권자들이 객관적 자료에 근거해 합리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유권자들이 선거에서 꼭 그렇게만 판단하는 것은 아니라는 미국 정치학계 연구 결과도 많다. 오히려 ‘감정적’ 또는 ‘정서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더 크다고 한다. 이성적으로 따져서 평가하기보다 마음이 가는 대로 평가한다는 말이다. 정책 타당성과 정서적 호소력이 관건 마음을 움직이는 데 영향을 미칠 만한 사안들은 무엇일까? 이재명 대표의 경우 검찰 수사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이 대표 수사를 잘했다고 평가할 것인가 잘못했다고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 대표 수사를 민주당은 ‘정적 제거’라고 주장한다. 국민의힘은 ‘도적 제거’라고 주장한다. 정적과 도적 중 어느 쪽이 무당파 유권자들의 느낌이나 감정에 더 들어맞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정적 제거라고 느낀다면 이 대표 수사를 잘못한 일이라고 평가할 것이고, 도적 제거라고 느낀다면 잘한 일이라고 평가할 것이다. 이 대표의 단식도 무당파 유권자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칠 요인이다. 이 대표 단식을 ‘처절한 몸부림’이라고 긍정적으로 느낄 수도 있고, ‘뜬금없다’고 부정적으로 느낄 수도 있다. 전자라면 이 대표가 단식하길 잘했다고 평가하고 후자라면 잘못했다고 평가하게 된다. 이 대표가 단식에 나서면서 내세운 명분 같은 객관적 사실보다 단식 그 자체를 어떻게 느끼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윤 대통령의 경우 틈날 때마다 ‘자유’ 를 강조하는 것이 유권자들 마음에 영향을 미칠 만한 요소다. 자유의 강조를 개인이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한다고 긍정적으로 느끼면 좋게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경쟁 만능주의나 성과 지상주의를 강요하는 주장이라고 부정적으로 느끼면 좋지 않게 평가할 것이다. 윤 대통령의 언어 표현도 유권자들 마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를 들면 ‘카르텔’ 같은 말이다. 윤 대통령은 비리로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그 이익을 지키기 위해 자기들끼리 똘똥 뭉치는 행태를 카르텔이라고 한다. 유권자들은 이 말을 논리적이고 사태의 핵심을 짚은 말이라고 느낄 수 있다. 반대로 ‘카르텔’이 뭔가 하고 생소하게 느낄 수도 있다. 전자냐 후자냐에 따라 윤 대통령이 ‘카르텔을 척결해야 한다’고 한 것을 잘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고 잘못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앞으로 여야는 서로 무당파를 잡으려고 총력전을 펼칠 것이다. 무당파를 잡으려면 전망적 투표나 회고적 투표를 하는 그들의 투표 심리를 파고들어야 한다. 정책 측면에서는 누가 더 그 당위성을 국민에게 잘 설명해 동의를 얻을지, 말과 행동에서는 누가 더 국민의 느낌이나 감정을 자극해 마음을 움직일지가 핵심이다. 내년 총선 결과는 이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본부장 ▶원주 한라대 특임교수㎘ 2023-09-17 14:46:26
- [김낭기의 관점](건국의 재조명) ③대한민국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 ? 1948년 8월15일 중앙청 앞에서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이 열리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 대한민국을 이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진보·좌파 진영 일부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한민국은 친일·분단 세력이 세운 반쪽짜리 국가라며 정통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올해 8월 15일로 대한민국 수립 75년을 맞지만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로 여기는 일부의 역사 인식은 여전하다. 그 인식은 정치·외교·안보·경제·교육 등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갈등과 분열과 대립의 씨앗이 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유엔이 인정한 한반도 유일 합법 정부이다. 유엔은 1948년 12월 12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총회에서 대한민국을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라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그 해 5월 10일 북한을 제외한 38도선 이남 지역에서 유엔 감시 아래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다. 당시 38도선 이북 지역인 북한은 소련의 거부로 유엔이 감시하는 국회의원 총선거 실시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하고 여기에서 선출된 국회의원들이 헌법을 제정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을 세웠다. 유엔은 이렇게 출범한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선언한 것이다. '친일파가 세운 남한 단독 정부'로 깎아내려 그러나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유엔 결의문 내용을 자의석으로 해석한다. 이명박 정부 때 중학교 역사 교과서 집필기준을 놓고 일부 국사학자들이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으로부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받았다’는 구절 가운데 ‘한반도의 유일한’이라는 부분을 빼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엔 감시 아래 선거가 실시된 지역은 38도선 이남뿐이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한반도 전체를 대표하는 유일 합법 정부가 아니라 38도선 이남인 남쪽 지역만을 대표하는 합법 정부라는 주장이다. 이들 주장대로 하면 38도선 이북의 북한 지역을 대표하는 합법 정부는 김일성이 세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북한도 남한과 대등한 합법 정부가 되는 것이다. 사실 북한 공산주의 세력은 남한에 앞서 1945~1947년에 소련 주도 아래 단독 정권 수립 준비를 단계적으로 해왔다. 1945년 10월 28일 북한 정권의 ‘태아’라고 할 수 있는 5도행정국을 창설했다. 1946년 2월 8일에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실질적인 공산 단독정부를 출범시키고 정규군인 ‘인민군’을 창설했다. 소련은 1947년 말에는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까지 정해 줬고, 1948년 2월에는 김일성 정권 수립에 사용할 헌법안까지 작성했다. 마침내 1948년 9월 9일 북한 최고인민회의에서 북한 헌법을 통과시켜 김일성 독재정권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웠다. 그럼에도 좌파 진영 측 인사들은 남한이 대한민국이라는 단독 정부를 세우는 바람에 ‘통일민족국가’ 수립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 단독 정부가 수립되지 않았으면 남북 통일 국가가 수립될 수 있었을 텐데 대한민국이 태어나는 바람에 남북이 분단됐다는 식이다.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로 보는 인식은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문재인 대통령은 2020년 4월 4·3 사건 72주년 추념식에서 "누구보다 먼저 꿈을 꾸었다는 이유로 제주는 처참한 죽음과 마주했고, 통일 정부 수립이라는 간절한 요구는 이념의 덫으로 돌아와 우리를 분열시켰다"고 했다. 그는 "교과서에 4·3이 '국가 공권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임을 명시하고, 진압 과정에서 국가의 폭력적 수단이 동원됐음을 기술하고 있다"며 "뜻깊다"고도 했다. 4·3 사건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반대해서 일으킨 무장 폭동을 군경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희생자가 다수 발생한 사건이다. 문 대통령이 ‘누구보다 먼저 꿈을 꾸었다’고 한 건 대한민국 정부가 아닌 남북 통일정부 수립을 꿈꿨다는 말일 것이다. 4·3 사건에서 민간인 희생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반대한 남로당 행위는 비판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은 남로당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이승만 정권의 '국가 폭력'은 강조하면서 정작 남로당의 책임은 거론하지 않았다. 일부 좌파 인사들이 유엔 결의문까지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폄하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친일파가 ‘미국 점령군’의 지원 아래 대한민국을 세워 일제시대 이래 계속 지배체제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인민’이 주인인 나라가 아니라 지주와 고위 관료 등 친일파가 주인인 나라라는 주장이다. 대한민국을 반쪽짜리 분단 국가이자 친일파가 지배하는 국가로 보니 대한민국을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 빼라는 사람들도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했던 시대"라며 "분열의 역사" "패배의 역사" "굴욕의 역사" 라고 주장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경기도지사 시절인 2021년 7월 1일 대선 출마를 선언한 뒤 고향인 경북 안동의 이육사문학관을 찾아가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의 정부 수립 단계와는 달라 친일 청산을 못하고 친일 세력들이 미(美) 점령군과 합작해서 다시 그 지배 체제를 그대로 유지했지 않으냐"라면서 "깨끗하게 나라가 출발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노무현 대통령이나 이 대표의 말에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다. 그러나 그런 인식의 연장 내지 반영이 아니라고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고 부정적으로 보는 인식은 우리 사회 여러 부문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남북 분단의 책임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게 지우며 이승만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게 그 대표적 사례의 하나다.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추앙하기는커녕 분단의 원흉으로 몰아간다. 따지자면 김일성에게 분단 책임이 더 크다. 그런데도 김일성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자유민주주의’ 논란도 반(反)대한민국 역사 인식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2007년 노무현 정부 때 마련된 교과서 집필 기준에는 대한민국 체제를 ‘민주주의’로 기술했다. 이를 이명박 정부 들어서 ‘자유민주주의’로 바꾸었다. 이 과정에서 좌파 성향 학자들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에는 자유민주주의도 있고 인민민주주의나 사회민주주의도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합쳐진 말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기본권을 중시한다. 사적 소유권이나 시장 경쟁 역시 자유주의 정신의 한 반영이다. 자유민주주의는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점과 함께 아무리 민주적으로 선출된 권력이라도 국민 자유와 기본권을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정신을 담고 있다. 반면에 사회민주주의는 사적 소유권과 자유 경쟁을 제한하는 사회주의 실현을 이상으로 하되 공산당식 혁명적 방법이 아니라 민주적 선거를 통해 추구한다는 게 핵심이다. 유럽 사회주의 정당들이 추구하는 이념이다. 인민민주주의는 북한이나 중국이 주장하는 체제로서, 노동자와 농민 등 소위 ‘무산 계급’의 독재를 말한다.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헌법 전문에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라고 해서 대한민국의 정치 이념이 자유민주주의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럼에도 좌파 진영에서 ‘자유’를 빼고 민주주의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뭐겠는가? 자유민주주의는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건국하면서 미국식 이념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승만과 대한민국을 부정적으로 보니 자유민주주의도 부정적으로 보면서 민주주의로 하자는 건 아닐까? 더욱이 북한은 인민민주주의를 지향한다. 자유민주주의를 재산 많은 일부 계층이 노동자와 농민 등 다수의 무산 계층을 착취하는 체제라고 주장한다. ‘민주주의’라고 하면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도 포괄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더욱더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닌가. 반(反)대한민국 인식은 외교, 안보, 대북 관계에서도 갈등의 요인이 되고 있다. 남한 단독 정부 수립으로 통일이 무산됐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이제라도 통일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주장은 대북 정책에서 압박과 제재보다 대화와 지원을 우선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한미동맹보다 ‘우리민족끼리’를 앞세운다. 문재인 정부는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임기 내내 지상 과제처럼 추구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6·25 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인 지난 7월 27일 국회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정전 70주년을 맞아 한반도의 불안정한 정세를 끝내고 항구적 평화 체제 구축을 위한 노력을 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오히려 '태어나길 정말 잘 한 나라' 반면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0일 유엔사 주요 간부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유엔사는 대한민국을 방어하는 강력한 힘”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북한은 지금도 유엔사를 한반도 적화 통일의 최대 걸림돌로 여기고 있다”며 “한반도 유사시 유엔사는 별도의 안보리 결의 없이도 회원국의 전력을 즉각적이며 자동적으로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고, 이것이 북한과 그들을 추종하는 반국가 세력들이 종전선언과 연계하여 유엔사 해체를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는 이유”라고 했다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이 이뤄지면 북한은 한미동맹 해체와 주한미군 철수, 유엔사 해체를 들고나올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북한은 1980년 이후 ‘고려연방제’를 주장하면서 ‘선결 조건’으로 △국가보안법 철폐 △공산주의 활동 보장 △미국·북한 평화협정 체결 협조 △평화협정 체결 후 주한미군 철수 △미국의 내정간섭 포기 등을 내걸었다. 대북 압박과 대화,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보는 눈이 좌파와 우파 진영 간에 이렇게 다르다. 그뿐이 아니다. 한·미·일 공조 강화냐 북·중·러 관계 개선이냐를 놓고도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외교 안보 문제를 둘러싼 이런 논란들도 그 연원을 거슬러올라가면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수립이 우리에게 얼마나 다행이었고 축복에 가까웠는지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세계적 위상이 보여준다. 경제는 세계 10위권에 올랐고, k-팝은 전 세계 젊은이를 사로잡는다. 신생 독립국에서는 보기 드물게 주기적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뤄지고, 모든 시민이 맘껏 자유를 누린다. 이 모든 것은 ‘자유’와 ‘민주’를 동시에 추구한 자유민주의 대한민국을 건국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회민주주의나 인민민주주의를 택했더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가 아니라 태어나길 정말로 잘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본부장 ▶원주 한라대 특임교수 2023-08-17 11:2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