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 교수
asia@sogang.ac.kr
- 서강대 정치학 박사
-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 역임
-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26) 소설이 담아낸 베트남의 굴곡진 현대사 [이한우 전 서강대 교수] 최근 국내에서 <서울의 봄> <건국전쟁> <파묘> 등 영화를 통해 역사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몇 해 전에는 정부가 국정 국사 교과서를 만들려다 국민의 저항에 부딪힌 적도 있었다. 그때 베트남도 국정 교과서를 복수의 검인정 교과서로 바꾸려는데 한국은 어찌 역행하려는가 하는 비판도 제기됐다. 교과서를 복수로 발간하더라도 공산당 1당이 통치하는 당·국가 체제인 베트남에서 다원화된 역사 해석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베트남 현대사는 민족 독립과 국가 통일의 역사이며, 공산당의 영도와 인민들의 부단한 노력이 이 역사를 만들었다는 게 공식적 견해다. 권위주의 통치자나 국가주의자들은 역사를 독점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사회에는 다른 견해가 존재한다. 베트남에서는 소설 형식을 빌려 공식 역사와 다른 베트남 현대사를 묘사하기도 한다. 베트남인 작가 호앙밍뜨엉이 그 예다. 그는 <시인, 강을 건너다>에서 한 가정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베트남 현대사의 곡절들을 서술했다. 마침 배양수 부산외대 교수가 이를 한글번역본으로 내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상충하는 인물로 구성된 가족사 베트남은 19세기 후반에 프랑스 식민지로 전락하고 1941년부터 일본의 공동 지배를 받았다. 1945년 8월에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면서 호찌민과 월맹(베트민)이 주도하여 독립된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하지만 곧 프랑스가 식민지배를 복구하려고 베트남으로 복귀한다. 이후 1946년 말부터 시작된 양측 간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은 1954년 5월에 베트남의 승리로 끝난다. 베트남은 전쟁에서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강하지 않았기에 제네바회담에서 분단안을 받아들여 1954년 7월부터 남북 베트남이 분단 상태로 공존하게 됐다. 이로써 북부에는 사회주의 체제, 남부에는 자유주의 체제가 들어섰다. 이후 양측은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 즉 베트남전쟁을 벌인 끝에 북부가 남부를 통일하기에 이른다. 이런 과정에서 베트남 가족 구성은 상충하는 인물들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테면 베트남 북부에 살던 한 가정은 이렇다. 아버지는 땅을 조금 가진 중농이나 소지주였으나 프랑스에 대한 저항전쟁 때 민족운동을 하던 공산주의자들을 돕는다. 그러나 토지개혁 때 지주로 몰려 처형당하거나 이를 피해 남부로 이주한다. 한 자녀는 공산주의운동에 전념하여 고위직에까지 오른다. 한 자녀는 북부에서 공산주의에 동조하면서도 지식인으로서 필화사건을 겪으며 고난을 겪는다. 한 자녀는 1954년 남북 분단 때 남부로 이주하여 자유주의 정권을 위해 참전하거나 고위직에 올랐다가 1975년 통일 전후에 미국으로 이주하거나 베트남에 남는다. 분단 시기에 남부 출신 가족 내에도 북부를 지지하던 사람이 있었고 남부를 지지하던 사람이 있었다. 이런 한 가족 내 다양하면서 상충하는 구성은 분단 시기 베트남 가족에 적지 않았다고 한다. 호앙밍뜨엉이 <시인, 강을 건너다>에서 주인공으로 세운 응우옌끼푹은 하노이 서쪽의 한 마을 출신으로 한의사이며, 공산주의자는 아니면서도 반식민 민족운동을 하는 공산주의자들을 돕는다. 그러나 그는 첫째와 둘째 아들을 월맹 군대에 보냈으면서도 셋째 아들이 프랑스에 유학하기를 바란다. 그는 사회주의식 토지개혁 과정에서 토지개혁대 대장의 농간에 넘어간 양아들이 그를 악덕 지주로 비판하자 인민재판 전에 자살하고 만다. 그의 아들들은 북부에 거주하는 공산주의 혁명가와 지식인, 이념을 모르는 보통 사람, 남부로 이주하여 남부 정권의 공무원이 된 사람 등 다양하다. 그 양아들의 친아버지는 프랑스인 혼혈아 출신으로 월맹군을 소탕하던 프랑스군 장교다. 그는 1954년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단되자 남부로 이주해 남부 정권의 고위 장교로 있으며 우리의 도지사 격인 지방 성장을 맡는다. 이로써 작가는 베트남 현대사에 등장한 여러 인물상을 드러낸다. 그들은 프랑스 식민지배의 산물인 혼혈아, 공산주의 민족운동가, 비공산주의 민족운동가, 식민지 시기 프랑스 부역자 및 분단 후 남부 정권 지지자 등이다. [호앙밍뜨엉의 소설 <시인, 강을 건너다>] -토지개혁의 ‘흑역사’와 전쟁의 참화 현대 베트남 국가 건설 과정에서 가장 큰 격동은 북부에서 1953년 시작된 토지개혁이었다. 당시 5% 지주 규정으로 인해 지주가 아닌 사람도 지주로 몰려 희생되기도 했는데, 희생된 사람이 1만6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정치지도자들은 토지개혁 과정의 오류를 깨닫고 1956년에 이를 서둘러 종료했다. 따라서 북부의 토지개혁은 베트남 현대사에서 ‘흑역사’에 해당하기에 지도자들은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하기를 꺼린다. 이 소설의 주인공 푹은 그 절정기인 1955년에 '검은 폭풍 같은 토지개혁'을 맞는다. 지주로 몰려 재산을 빼앗긴다. 도자기는 깨지고 유교 경전은 불태워 버려진다. 논은 물론이고 잘 가꿔졌던 정원 응우옌끼비엔은 훼손되고, 넓은 마당을 가진 집도 농민들에게 넘겨진다. 정교하게 지었던 조상 사당은 허물어져 그 벽돌은 농민들이 담장을 쌓는 데 사용한다. 나중에 응우옌씨 가문은 1980년대 중반에야 빼앗겼던 정원을 되찾아 복원하고 사당을 다시 짓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당의 복원은 피붙이가 아닌 양아들에 의해 이뤄진다. 토지개혁 이후 북부 농촌은 집단농장화가 진행됐다. 이는 토지개혁에 비해서는 사회에 큰 충격을 주지는 않았다. 1960년 무렵에 농촌은 대부분 ‘합작사’라는 이름의 초급 단계 집단농장으로 재편된다. 남북 베트남은 곧 1960년대 중반부터 베트남전쟁의 격랑 속으로 빠져든다. 북부 마을은 미군기의 공습으로 병원, 다리, 시장 등 곳곳에 피해를 입었다. 북부 사람들은 식민지배 시기 프랑스보다 미국이 더 야만적이고 잔학했다고 느끼며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웠다. 농민들은 식량이 부족했지만 이를 전선으로 더 보내려는 노력을 이어갔다. 한편 이 소설에서 통일 이전 남부로 이주한 사람은 주인공 푹의 셋째 아들과 양아들의 친아버지인 프랑스 혼혈아였다. 푹은 셋째 아들이 북부에서 떠나 계속 공부하길 원했기에 그 아들은 남부로 이주해 공부를 마친 후 남부 정부의 공무원이 된다. 프랑스 혼혈아는 1954년 월맹 세력이 북부에서 권력을 회복하기 전에 프랑스군 지역 초소장으로 있다가 이후 남부로 이주해 지방 성의 성장이 되어 권력을 이어간다. -남부 위상의 변화와 훼손된 혁명적 순수성 베트남전쟁 시기에 북부 지도자들에게 남부 정부는 공식적으로 미국의 괴뢰정권이었다. 베트남은 통일 이후에도 통일 이전 남부 정권을 지칭할 때 미국의 괴뢰라고 칭하였다. 1991년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기 이전에 남북한이 상대방을 공식 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괴뢰라고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베트남이 개혁정책을 집행한 이후에도 남부 정권을 괴뢰정권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으나 최근에는 드물게 국가명인 ‘베트남공화국’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는 통일 직전인 1974년에 중국이 파라셀 군도 남서부를 침략할 때 저항하다 희생된 남베트남 군인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열 수 있게 몇 해 전부터 용인한 것과 연관된다고 짐작한다. 한편 개혁으로 국가가 발전하면서 해외에 있는 남부 출신 베트남 동포들을 포용할 수 있는 여력을 갖게 된 점도 이에 한몫한 듯하다. 이 소설에서 통일 이후, 특히 개혁 시기에 각 인물의 생존 방식은 기존 캐릭터의 본질을 뒤집는다. 통일 이전에 남부로 이주해 공무원이 됐던 푹의 셋째 아들은 교통부 도로교량총국 계획국장 보좌관이 됐고 통일 이후에 국장급 이상이 참가하는 사회주의 개조학습에서 빠질 수 있었다. 오히려 북부에서 문필가였던 둘째 아들이 문예운동에 참여한 경력으로 인해 개조학습을 받아야 했다. 푹의 큰아들은 공산당 간부가 되어 재산을 모으고, 맏손자는 러시아에서 밀수꾼으로서 재산을 모은다. 푹의 큰아들 부자는 1985년 화폐개혁 때 미리 돈을 금으로 바꿔 큰 부를 축적해 붉은 자본가가 된다. 맏손자는 부동산, 자동차 매매사업으로 큰돈을 벌고, 심한 낭비벽으로 1년에 자동차를 두세 대 바꾸고 애인을 다리 긴 모델들로 서너 명씩 바꾼다. 이렇게 일부 권력자 가족은 자본주의 물결에 편승해 자본가, 즉 기업인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호앙밍뜨엉이 이 소설 속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다. 우선 드는 생각은 그가 여러 유형의 인간상을 보임으로써 베트남 현대사가 이들이 살아낸 역정을 통해 복합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이념의 허망함까지는 아닐지라도 국가나 이념보다는 인간의 삶 자체가 의미 있고 중시되어야 한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는 듯하다. 필자 주요 이력 ▷서강대 정치학 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와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2024-03-06 06:00:00
-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25) 베트남의 초특급부자들 …그들은 어떻게 탄생했나? [이한우 전 서강대 교수] <포브스>는 금년 초 10억 달러 이상 자산을 가진 세계 최고 부자들인 ‘유에스 달러 빌리어네어스’ 명단에 베트남 최고 부자 다섯 명을 올렸다. 빈 그룹의 팜녓브엉, 비엣젯 항공의 응우옌티프엉타오, 호아팟 철강그룹의 쩐딘롱, 쯔엉하이 오토(Thaco)의 쩐바즈엉, 테크콤 뱅크의 호훙아인이 그들이다. 2019년부터 이 명단에 있던 마산 그룹의 응우옌당꽝은 이번에 빠졌다. 팜녓브엉이 2013년 빌리어네어스 명단에 가장 먼저 올랐고, 베트남 부자들이 이 명단에 아홉 명까지 오르기도 했다. 노바랜드의 부이타인년, 선샤인 그룹의 도아인뚜언, VP뱅크의 응오찌중도 빌리어네어스 명단에 올랐던 최고 부자들이다. 사회주의 국가 베트남에서 이들은 어떻게 세계적 부자가 됐을까? 자못 궁금하다. 탈사회주의 개혁 과정에서 부자가 되는 길 사회주의 국가가 탈사회주의 개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본가, 즉 기업인이 탄생하는 길은 일반적으로 두 갈래가 있다. 하나는 개혁 이전 사회주의 체제에서 공산당 고위 지도자, 정부 고위 관료 또는 국영기업 고위 관리자가 부를 축적하여 ‘붉은 자본가(red capitalist)'가 되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민간인으로서 개혁 과정에서 생기는 기회를 잡아 부를 축적하는 민간 기업인이다. 그간 러시아 및 동유럽의 올리가르히처럼 탈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붉은 자본가의 등장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베트남에서 민간 대기업의 기업인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 형성돼 왔을까? 베트남에도 붉은 자본가들이 적지 않게 있으리라고 짐작하지만 잘 드러나지는 않는다. 붉은 자본가들은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부를 축적하는 게 일반적이다. 베트남에서도 1990년대부터 국영기업의 민영화가 추진되었다. 국영기업의 민영화는 비효율적인 기업을 파산하거나 기업 간 합병하는 방식도 있었지만, 주식회사로 민영화하는 방식이 대세였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베트남은 국영기업을 주식회사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전면적 민영화가 아닌 부분적 민영화를 시행했다. 그 방식은 정부가 국영기업 주식 일부를 여전히 보유하고, 일부를 기업 종사자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판매하고, 일부를 외부 투자자에게 판매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민영화 방식은 ‘사유화’가 아니라 ‘주식화’ 또는 ‘주식회사화’라고 불렸다. 초기에 민영화된 중소기업에서 일반인에게 판매되는 비중이 높았으나 후기에 국가 경제에서 중요한 국영기업에 대해서는 민영화 이후에도 정부의 주식 보유 비중이 높았다. 이런 민영화 방식으로 인해 베트남에서 대규모 붉은 자본가가 탄생하는 데는 제약이 있었으나 중소 규모의 붉은 자본가들은 등장했다고 여겨진다. 민영화 과정에서 기존의 기업 관리자들은 닥쳐올 시장경쟁에 대한 우려로 주식회사로 전환하는 것을 주저하게 되는데, 이들에게 이권을 많이 준 경우에는 민영화 과정이 빨리 진전되기도 했다. 정부 관련 부처의 고위 관료나 국영기업 고위 관리자들은 국영기업의 민영화 과정에서 이권을 챙길 수 있었다. 예컨대 하노이 호안끼엠 호수 서쪽에 위치한 옛 푸자 호텔은 민영화가 빨리 진전된 사례였다. 전직 고위 관료들이 하노이에서 첫 고급 주거지로 개발된 씨뿌짜의 고급 빌라들을 여러 채 소유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들에 대한 소문은 무성하지만 이에 대한 근거를 확보하기는 어렵다. 이들은 부를 축적하는 과정이 투명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그들의 부를 숨겨두고 있을 것이다. 한편 베트남에서 민간인으로서 대기업을 일으킨 기업인들은 어떤 경로로 등장했을까? 이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호찌민시에서 시장경제화의 기회를 잡은 국내파고, 다른 부류는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시작해 국내로 돌아온 귀국파다. 이들 민간인 출신 사업가들도 공산당 및 정부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사업을 일으킬 수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는 1960~1980년대 한국의 고성장 시기 정경유착의 베트남판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팜녓브엉의 빈 그룹이 호찌민시에 세운 랜드마크 81.] 국내파 민간 기업인의 성장 베트남이 1975년 통일된 후에도 남부, 특히 호찌민시에는 민간 경제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민간인들은 한 가구 또는 그보다 조금 큰 규모의 상업과 소규모 제조업을 담당했다. 이러한 남부 자본주의 체제의 유산은 개혁 과정에서 민간기업 성장의 환경을 제공했다. 호찌민시에는 1990년대 초부터 민간 기업인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몇 명의 사례를 들어보자. 반틴팟 그룹의 쯔엉미란이 이 부류에 속한다. 그는 레스토랑과 상업으로 시작해 부동산으로 사업 범위를 넓혔다. 그는 화인으로서 홍콩인 남편을 통해 사업 수완과 자금을 조달했다. 그는 1990년대 중반에 안동 시장 재개발과 윈저 플라자 호텔 투자로 이름을 알렸다. 사이공 상업은행(SCB)을 인수하고 최대주주가 됐다. 그러나 그는 2023년 말 SCB에서 부정 대출을 하는 등 16조원 상당을 횡령한 혐의로 체포됐다. 공무원들에게 제공한 뇌물이 67억원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는 오랫동안 호찌민시 정치인들과 교류해왔다고 알려졌다. 도안응우옌득은 중남부 빈딘 출신으로 처음 중부 고원지대에서 학교에 납품하는 책상을 생산하는 것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목재가공 사업을 확장하고, 호앙안잘라이 그룹을 설립해 부동산, 고무 가공, 수력발전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했다. 그는 축구학교를 설립하고 프로축구팀을 운영하며 박항서 감독과도 친분이 깊다고 알려져 있다. 쩜베는 남부 메콩 델타의 짜빈 출신 기업인이다. 그는 어릴 때 사이공으로 이주하여 전통시장에서 일했다. 그의 사업은 처음에 목재가공이었고, 이후 건설, 부동산, 금융 부문으로 확장해 사콤뱅크(Sacombank)에 참여했다. 노바랜드의 부이타인년은 메콩 델타의 동탑 출신으로 수의학을 공부한 뒤 독일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그 후 호찌민시 지방정부에서 가축 사육과 수의학 분야에 종사하다가 1992년에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는 처음에 가축용 약품 등을 취급하다가 이후 부동산으로 사업을 확장해 대기업인이 됐다. 그가 독일에서 공부한 경력이 있지만 사업을 국내에서 시작했기에 국내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 귀국파의 성장과 활약 개혁 이전 사회주의 시기에 베트남의 일부 인재들은 소련과 동유럽에 유학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들 중 대다수는 귀국 후 관계나 학계에서 활동했지만 개혁정책을 채택한 이후 극히 소수는 비즈니스맨으로 변신했다. 몇몇 사례를 보자. 베트남 기업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이가 빈 그룹의 팜녓브엉이다. 현재 그는 포브스의 세계 부자 순위에서 600위대에 랭크돼 있는데 300위대에 랭크되기도 했다. 그는 하노이에서 출생했지만 부친의 고향에 따라 하띤 출신으로 여겨진다. 1980년대 말 모스크바 지질탐사대학에서 공부하고 우크라이나로 옮겨 레스토랑을 열었고 라면을 생산하는 식품가공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이후 이 사업을 네슬레에 팔고 귀국했는데, 그의 사업 규모는 당시 1억5000만 달러 규모였다. 그는 귀국 후 부동산 사업에 집중하여 빈펄 리조트, 빈홈즈 아파트, 빈꼼 몰 등 사업을 열었고, 이후 빈멕 병원, 빈스쿨 및 빈유니 교육사업, 빈패스트 자동차 등으로 확장했다. 비엣젯 항공의 응우옌티프엉타오는 하노이 출신으로 플레하노프 러시아경제대학을 졸업하고 러시아 멘델레프 화학기술대학에서 경제관리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92년 남편과 함께 러시아에서 소비코(Sovico) 회사를 설립하여 중공업 기계와 물자를 베트남으로 수입했고, 1997년 이래 부동산과 은행 사업으로 확장했다. HDBank, 다낭의 푸라마 리조트, 남사이공의 드래곤시티, 푸꾸옥 리조트 등이다. 프엉타오는 2007년에 비엣젯 항공을 설립하여 베트남의 대표적 저비용항공사를 출범시켰다. 마산 그룹의 호훙아인과 응우옌당꽝은 각각 하노이와 중부 꽝찌 출신으로 러시아에서 라면 사업을 시작했다. 그들은 식품사업을 베트남으로 들여와 마산 그룹을 설립하여 라면과 간장 생산을 시작한 이래 식품부문 최고 기업으로 만들었다. 호훙아인은 테크콤 뱅크 주식을 사들여 지배지주가 된다. 마산은 베트남 내 최대 식품기업이 됐고 빈 그룹의 빈마트를 인수하기도 했다. 테크콤 뱅크는 베트남 내 최대 민간은행이 됐다. 응우옌득끼엔은 하노이 출신으로 베트남군사기술대학에 입학한 후 헝가리로 유학을 떠났다. 대학 졸업 후 국영 베트남섬유의류회사에서 일하며 러시아와 교역하는 데 종사했다. 이후 그는 1990년대에 아시아상업은행(ACB)을 설립하고 다른 몇 개 소형 은행의 경영에도 관여했다. 하지만 그는 2012년에 체포되어 사기, 탈세, 불법 거래 등으로 30년형을 선고받았다. - 부동산과 은행을 통해 성장한 베트남 부자들 베트남의 부자들이 등장하고 성장하는 과정으로 보면 ‘붉은 자본가’가 두드러지지 않았다. 개혁 이전 사회주의 시기의 공산당 고위 지도자와 정부의 고위 관료들은 개혁 이후 새로운 기업인으로 변신하지 않았다. 그 대신 베트남 기업인들은 민간인으로 출발해 시장경제화의 기회를 잡아 대기업인으로 성장했다. 기업인의 성장 과정은 1990년대 국내파의 성장과 1990년대 말 또는 2000년대 귀국파의 약진으로 요약된다. 이들이 대부분 부동산과 은행을 통해 급속히 성장했다는 점도 주목할 점이다. 베트남 기업인 등장의 길에서 민간의 힘이 국가의 힘을 압도하는 듯하지만 이는 정치와 경제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필자 주요 이력 ▷서강대 정치학 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와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2024-01-23 06:00:00
-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24) 수교 50년 베트남-일본 …수백년 교류의 발자취 [이한우 전 서강대교수] 50년을 맞은 베트남-일본 관계 베트남과 일본이 양자 관계의 최고 단계인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었다. 양국은 1973년 9월 21일 수교하여 올해 수교 50주년을 맞았는데, 수교 50주년에 즈음하여 보반트엉 베트남 국가주석이 11월에 일본을 방문했다. 베트남 국가주석의 일본 방문 첫날에 양국은 양자 관계를 '아시아와 세계에서 평화와 번영을 위한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는 데 합의했다. 이로써 일본은 중국, 러시아, 인도, 한국, 미국에 이어 베트남과 최고위 양자 관계를 맺은 국가가 됐다. 한국이 베트남에 대한 외국인 투자 순위에서 누계로 1위를 차지하고 있고, 교역도 중국, 미국에 이어 3위에 있기에 한국인들은 베트남에서 일본의 경제적 위상에 주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일본은 베트남의 4위 교역 대상국이고 3위 외국인 투자국이다. 일본은 베트남에 ODA를 제공하는 국가 중 부동의 1위에 있으며 그 규모도 2위인 한국보다 8~9배나 많은 금액이다. 현재 베트남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약 2만3000명이지만 일본에 거주하는 베트남인은 약 50만명에 달한다. 한국인과 베트남인이 상대국에 각각 약 20만명 거주하는 것과 대비된다. 이렇게 베트남은 한국만큼이나 일본과 밀접하며 분야에 따라서는 그 이상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에 그간의 베트남과 일본의 관계를 되짚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보반트엉 베트남 국가주석의 일본 방문을 계기로 양국 관계를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기로 합의한 것에 대한 베트남 신문들의 보도. 출처: Tuoi Tre, Thanh Nien 신문 캡처] 베트남-일본 관계의 역사 역사적으로 한국은 중국에 간 사신들을 중심으로 베트남과 교류를 간간이 이어갔다면 일본은 베트남과 오래전부터 교역을 통한 교류와 근대 이래 지식인들의 교류를 지속해왔다. 일본인들은 16~17세기에 베트남 중부를 방문하여 활발하게 교역 활동을 벌였다. 다낭 남쪽 호이안 중심 거리에 일본이 16세기 말에 건설한 내원교는 영어로 ‘Japanese Bridge’라고 하듯이 일본이 건설한 것이다. 이는 동쪽의 중국인 거리와 서쪽의 일본인 거리를 잇는 다리다. 진주의 선비 조완벽이 1604년과 1606년 사이에 세 차례나 베트남에 다녀와 한국인 최초의 베트남 방문 기록을 남긴 것도 일본인 상인과 동행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정유재란 때인 1597년에 일본으로 잡혀가 10년간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교토의 거상 스미노쿠라 료이의 주인선을 타고 베트남을 방문한 것이다. 그가 베트남에 간 것은 당시 국제어인 한문을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미혜 동덕여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조완벽이 방문한 곳이 베트남 호이안이 아니라 중북부에 있는 응에안 지방이었는데, 이를 보면 베트남은 일본과 여러 지역에서 교역했던 듯하다. 근현대에 들어 베트남과 일본 관계를 논할 때 가장 중요하게 드는 것이 판보이쩌우가 1906년부터 벌인 ‘동유운동’이다. 이는 베트남 학생들을 일본으로 유학시키는 운동이었다. 판보이쩌우는 20세기 초에 판쩌우찐과 함께 베트남 사상가이자 민족운동가로서 쌍벽을 이루던 인물이었다. 동유운동으로 베트남인 약 200명이 일본에 유학했지만 프랑스의 탄압에 일본이 협력하면서 이 운동은 1909년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당시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 근대화의 길을 걸으며 강국으로 등장하여 여러 아시아 국가들이 모범으로 삼을 국가로 여겨졌다. 이후 일본이 주변국을 침략하며 모범국 위상은 사라지고 제국주의 국가로 전락했지만 말이다. 제국주의 일본은 중국을 공격한 데 이어 1940년 9월에 베트남으로 진격해 들어가 1941년 후반에 전국을 석권했다. 일본은 당시 베트남을 식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를 제압했으나 프랑스에 대해 식민 통치를 지속하도록 허용하다가 1945년 3월에 직접 지배로 전환한 바 있다. 일본이 1945년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많은 양곡을 베트남에서 공출해 북부 홍강 델타에서만 한 해에 200만명을 굶어 죽게 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일본이 항복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곧바로 베트남은 독립을 선포했다. 프랑스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식민 지배를 복구하려고 획책하여 베트남과 프랑스는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을 치른다. 이 시기에 베트남은 일본과 소원해졌다가 일본은 남베트남과 먼저 수교하게 된다. 일본은 1960~1970년대 베트남전쟁 시기에 미국 군사기지로 기능했고 소비재 공급처이기도 했다. 미국 B52 폭격기가 오키나와 공군기지에서 출격해 북베트남을 때렸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은 선풍기, 녹음기 등 일본산 제품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미국이 베트남에 대한 개입을 중지하고 미군을 철수하려고 파리평화협정을 1973년 1월에 체결하자 일본은 발 빠르게 그해 9월에 북베트남과 관계를 정상화했다. 양국 관계가 급속히 발전하지는 않았다. 개혁 시기 최고의 협력 파트너 1975년 4월에 베트남전쟁이 종결되자 베트남은 한국과 관계를 단절했지만 일본과는 이전처럼 관계를 유지해갔다. 그러나 베트남이 1978년 12월에 캄보디아를 침공하면서 내려진 금수 조치에 일본도 동참하면서 실질적 관계는 중지됐다. 이후 일본은 베트남에 대한 원조도 중단했다가 1992년 11월에야 재개하게 된다. 베트남과 일본 간 협력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베트남이 개혁에 착수하면서부터다. 이제 양국 경제 관계는 매우 밀접해져 있다. 2022년에 베트남은 일본에 242억5000만 달러를 수출하고 233억9000만 달러를 수입해 교역 총액 476억4000만 달러로 일본은 베트남의 제4위 교역 대상국 지위에 있다. 베트남은 지난 10년간 일본과 교역에서 적자를 내는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흑자를 내 왔다. 한국은 2022년에 교역액 877억 달러로 베트남의 제3위 교역 대상국 지위에 있다. 일본은 2023년 10월까지 등록 자본금 누계로 714억 달러를 투자해 제3위 직접투자국 지위에 있다. 한국은 베트남에 대한 직접투자 순위에서 지난 10년간 1위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베트남인들은 대체로 일본이 한국보다 한 수 위인 국가로 인식한다. 물건을 살 때도 일본 제품을 고급으로 여기는 편이다. 오래전부터 혼다는 현대 베트남에서 곧 오토바이를 뜻했다. 개혁 초반기에 “아이 해브 어 드림”은 미래에 대한 꿈을 가졌다는 뜻이기도 하면서 태국산 드림Ⅱ 혼다 오토바이를 가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드림Ⅱ는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 가장 갖고 싶은 선망의 오토바이였다. 요즘엔 오토바이와 스쿠터가 다양하게 판매되고 있지만 말이다. 이제 베트남인들 사이에 한국산 제품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졌다. 베트남이 자동차 시대로 전환해가면서 한국의 현대·기아와 도요타가 베트남 시장에서 경쟁을 벌인다. 일본의 이온몰이 베트남 사업을 확장해 한국의 롯데마트에 긴장감을 줬다. 해양 안보 분야에서는 베트남과 일본의 관계가 매우 긴밀하다. 모두 남중국해에 직접 이해를 가진 국가들이어서 일본이 베트남에 해양경비정을 제공하는 등 협력 관계는 확대되어왔다. 한국이 현 정부 들어 남중국해 문제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한·미·일 공조를 통해 중국에 대응하려 하고 있어 해양 안보 분야에서 베트남과도 협력이 확대될 것이다. 베트남에 대한 문화적 영향력 면에서는 한국이 앞선다고 생각하는 게 대체로 맞지만 모든 면에서 그런 건 아니다. 베트남이 개혁에 착수하면서 외국에 문호를 열자 <오싱>이 베트남인들 사이에 높은 인기를 끌었다. <오싱>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극히 어려운 상황에 처했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 TV 드라마였다. 베트남이 통일 이후 10년간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끝에 막 개혁에 착수했던 시기에 베트남인들은 어려움을 이겨내는 <오싱>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지금도 <오싱>은 베트남에서 농담으로 가사도우미라는 뜻으로 쓰인다. 이후 한국 드라마가 도입되면서 <오싱>으로 대표된 일본 드라마 인기는 줄었고 한국 드라마가 이를 대체해 한류를 확산시켰다. 이처럼 베트남을 사이에 두고 한국과 일본은 여러모로 관련돼 있다. 모두 역사적 상흔도 지니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베트남인들이 방문하고 싶은 나라 순위에서 1~2위를 다툰다. 한편 베트남 이외 동남아 대부분 국가에서 일본의 영향은 강하게 작용하나 베트남에서만큼은 한국 위상이 일본에 버금간다. 그러나 한국 언론만 보면 지금 베트남이 한국풍 일색이라고 느낄 수도 있는데 이는 큰 오산이다. 베트남과 일본의 인연이 깊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필자 주요 이력 ▷서강대 정치학 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와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2023-12-07 06:00:00
-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23) '사회주의' 베트남, 민간 주도 경제로 방향 트나 [이한우 전 서강대 교수] 응우옌쑤언푹 베트남 총리는 2019년 6월 14일 하이퐁 딘부-깟하이(Dinh Vu-Cat Hai) 공업단지에 있는 빈패스트(Vinfast) 자동차 생산공장 개장식에 참석하여 “오늘날 빈패스트의 성공은 전 베트남 자동차산업의 위업이며, 우리나라를 글로벌 수준에 다가가게 할 것이다. 사유(민간) 부문이 경제성장의 중요한 동력임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라고 칭송했다. 응우옌푸쫑 공산당 총비서(서기장)는 이미 2017년 11월 14일 빈패스트 건설 현장을 방문하여 빈패스트 자동차 프로젝트를 높이 평가하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빈패스트가 속한 빈(Vin)그룹은 민간 재벌로서 '베트남의 삼성'으로 불린다. 이런 민간기업 활동에 공산당 총비서와 총리가 지극한 관심을 보이고 후원한 것은 ‘사회주의 국가’인 베트남에서 드문 일이었다. 베트남 지도자들은 1990년대 초반 이래 계속하여 국가 발전 목표로 “공업화, 현대화”를 부르짖었다. 이를 달성하는 데 국유경제 부문이 전체 국가 경제의 주도 부문이라고 역설해왔다. 2013년 헌법 개정 과정에서도 국유경제의 주도적 역할을 규정한 문구를 헌법에서 삭제하자는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베트남 정부가 공식적으로는 국유경제의 선도성을 여전히 유지하면서 국가 최고위 지도자들이 민간기업을 경제 발전의 동력이라고 공식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최근에 빈(Vin)그룹 사례에서 보듯이 베트남 최고위 지도자들이 민간 대기업을 지원하기 시작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그렇다면 최근 민간 대기업에 대한 지원은 이러한 경제 발전 전략상 변화를 뜻하는 것인가? - 경제 발전 전략의 변화 얼마 전까지 베트남 정부의 공업화 전략은 산업 부문별 육성 정책보다도 소유 부문별 발전 전략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베트남이 개혁에 착수한 이래 다양한 소유제의 공존을 인정했으나 주도적 역할은 계속하여 국유경제 부문에 두었다. 그 공업화 전략은 국가 경제의 근간을 국영기업이 담당하고 비핵심 부문을 민간기업이 담당하여 국유경제 부문이 국가 경제의 주도적 역할을 하도록 배치하는 것이었다. 2011년 제11차 공산당대회에서 채택된 '2011~2020년 사회경제발전전략'에서도 경제 각 소유 부문의 경영자 주권과 공평성을 담보하여야 한다고 하면서도 ‘사회주의 지향 시장경제체제’를 완성해야 한다는 목표는 여전히 견지됐다. 기업 부문에서는, 국영기업, 특히 국영기업집단과 ‘총공사’(소규모 기업집단) 기업 활동의 효과를 증진시켜야 한다고 했다. 국영기업을 주식회사로 전환하여 강력한 다소유(多所有) 기업집단을 건설해야 하는데 그 가운데 국가가 지배적 역할을 행사해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베트남 공산당과 정부는 2011년 시점에서도 소유제를 다양화하면서도 국유경제의 주도적 역할을 여전히 강조하면서 국영기업의 경영효율을 증진시키는 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 후 베트남은 2016년 제12차 공산당대회에서 소유 부문별·기업 유형별 평등이 증진되었다고 평가하면서도 ‘사회주의 지향 시장경제체제’ 발전을 여전히 기본 목표로 두었다. 한편 베트남 지도부는 민간경제 부문의 육성책도 제시했다. 전면적 개혁이 선언된 1986년 12월 제6차 공산당대회에서 다양한 소유제의 공존을 언급했다. '사유(민간)경제'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쓰인 것은 1989년경부터였다. 민간기업에 대한 법은 1990년에 채택된 ‘사영기업법’이었지만 실제로 민간기업의 허가와 활동은 제한적이었다. 1990년대 말에 동아시아 경제위기가 베트남에도 영향을 끼쳐 경제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자 베트남 정부는 국영기업과 민간기업을 포함하여 새롭게 1999년 기업법을 채택해 2000년부터 시행했다. 이 기업법은 정부가 제한한 분야 이외의 모든 분야에서 기업 설립을 허용하면서 민간기업의 성장을 가속화했다. 2000년에 새 기업법이 시행된 후 2년간 신규 민간기업이 3만5000개 이상 설립됐는데 이는 그 이전 10년간 설립된 민간기업 수와 비슷했다. 이후에 기업법은 2005년과 2014년에 개정됐는데 이는 세계무역기구(WTO)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을 앞둔 제도적 정비 과정의 일환이었다. 민간기업 발전을 본격적으로 장려한 것은 2010년대부터다. 2011년 제11차 공산당대회에서 채택된 '2011~2020 경제사회발전전략'에는 “사유(민간)경제가 경제의 여러 동력 중 하나”라고 언급됐고 2016년 제12차 공산당대회 '정치보고'에는 “사유(민간)경제가 경제의 ‘중요한’ 동력”이라고 평가됐다. 이 보고는 “사영(민간)기업집단을 설립하고 개인들이 국영기업집단에 자본을 투자하도록 장려해야 한다”는 점도 언급했다. 2021년 제13차 공산당대회에서도 같은 논조가 유지됐다. 제13차 공산당대회 '정치보고'는 “사영(민간)기업과 국영기업 간 협력과 연계를 장려한다”고 언급했다. 이렇게 보면 2010년대 중반부터 민간기업에 대한 새로운 인식하에 국유경제 부문과 민간경제 부문의 협력 또는 연계가 중요한 문제로 제시됐다. 이러한 민간기업의 활성화 과정에서 중소 규모 기업이 다수 설립됐고 대형 기업과 민간 재벌이 등장했다. 예컨대 빈(Vin)그룹, 비엣젯항공, 마산(Masan)그룹, 화팟(Hoa Phat)철강, 쯔엉하이 오토(Thaco), 선(Sun)그룹 등이 그들이다. 대형 민간기업들의 성장은 베트남 정부의 경제 발전 전략상 환경을 변화시켰다. - 경제구조의 변화 베트남 경제 전체에서 민간기업의 역할을 중시하게 된 것은 경제 환경의 변화를 반영한다. 베트남 경제구조에서 국유경제 부문 비중이 지속적으로 감소했고 국내 비국유((민간)경제 부문과 외국인 투자 부문이 증가해 왔다. GDP에서 국유경제 부문 비중은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40%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었지만 이제 20%에 근접하는 정도로 감소했고 국내 민간경제 부문 비중이 절반 이상, 외국인 투자 비중이 10% 미만에서 증가해 20% 이상을 차지하게 됐다. 베트남 통계총국은 소유 부문별 GDP 비중 통계에서 세 부문에 더하여 2010년대부터 '세금(-보조금)' 항목을 넣어 네 항목을 제시하고 있다. 예컨대 2010년에 두 통계 방식에 따른 각 소유 부문별 GDP 비중을 비교해 보면 약간씩 차이를 보인다. 소유 부문별 GDP 비중(%) 연도 1990 1995 2000 2005 2010 2010 2015 2020 국유 부문 31.8 40.1 38.5 38.4 33.7 29.34 22.84 20.67 국내 비국유(민간) 부문 68.2 53.5 48.2 45.6 47.5 42.96 50.63 50.56 외국인 투자 부문 6.3 13.3 16.0 18.7 15.15 17.46 20.00 세금(-보조금) 12.55 9.07 8.77 출처: <통계연감> 정리 (2010년 통계는 세항목으로 구분한 것과 네 항목으로 구분한 것을 함께 제시) 한편 공업생산액에서 국유 부문 비중은 1990년대에 50% 이상에서 감소해 2010년에 19.1%를 기록한 이후 계속 20% 이하를 기록하고 있다. 국내 민간경제 부문 비중은 1990년 46%에서 이제 80% 이상으로 증가했다. 여기에서 국내 민간 부문이 부침을 거듭하는 가운데 30% 전후를 보였고 외국인 투자 부문은 지속적으로 증가해 2013년 50%에 이르게 됐다. 베트남 통계총국이 2014년부터 소유 부문별 공업생산액 통계를 제시하지 않아 최근 그 비중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부타인 뜨아인(Vu Thanh Tu Anh)은 2017년 공업생산액 중 국유 부문 비중이 19%, 외국인 투자 부문을 포함한 민간 부문 비중이 81%였다고 추산했다. 소유 부문별 공업생산액 비중(%) 연도 1990 1995 2000 2005 2010 2013 2017* 국유 부문 54.1 57.3 34.2 24.9 19.1 16.3 19.0 국내 비국유(민간) 부문 41.4 28.2 24.5 31.3 38.9 33.6 81.0 집체 12.2 0.8 0.6 0.4 0.4 - 사유 0.7 2.4 14.2 22.8 32.5 - 가계 28.4 20.7 9.7 8.1 6.0 - 혼합 0.1 4.3 - - 외국인 투자 부문 4.5 14.5 41.3 43.8 42.0 50.1 출처: <통계연감> 정리 * 2017년 통계는 Vu-Thanh에 따름 - 민간기업 중시 경제 발전 전략 그간 경제구조 변화를 보면 국유경제 부문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에 근접한 수준에 이르렀고 공업생산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 이하로 감소했다. 국유경제 부문 비중의 지속적 감소는 국유경제 부문이 국가 경제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공산당과 정부의 주장을 무색하게 한다. 물론 공산당과 정부는 국가 경제의 기간산업들을 100% 정부 소유 국영기업으로 존속시키며 이것이 곧 경제 전반의 주도 부문으로서 기능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베트남 국영기업의 비효율은 지속되고 있고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어 국가 경제에서 국유경제 부문의 주도적 역할은 ‘레토릭’에 불과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게 됐다. 최근 베트남 최고위 정치지도자들이 빈그룹에 대해 지지하는 사례에서 보듯이 베트남은 기존 국영기업 중심에서 벗어나 민간기업을 중요한 경제성장의 파트너로 삼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공식적으로는 베트남이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하기에 민간경제 부문이 국가 경제의 중추가 되는 정책을 공식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변화는 ‘민관 협력’이라는 형식하에 실질적 민간경제의 진흥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이러한 ‘사유화’의 방향은 대외적으로 외국인 투자를 지속적으로 유인하고 대내적으로 민간기업을 발전시키게 될 것이다. 따라서 베트남은 국영기업이 사회에 공공재를 공급하며 국유경제 부문의 주도성을 명목상 유지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국영기업 대신에 민간기업을 중시하는 경제 발전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해 가고 있다. VinFast 박람회에서 처음 선보인 VF3 모델 [사진=베트남통신사] 필자 주요 이력 ▷서강대 정치학 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와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2023-10-12 08:46:12
-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22) 남부 호찌민시와 북부 하노이 …너무 다른 베트남의 한인 사회 [이한우 교수] 한국과 베트남은 작년 12월에 국교 수립 30주년을 맞았다. 그간 양국은 여러 분야에서 협력 관계를 발전시켜 왔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진전된 분야는 경제다. 수교 이후 30년간 양국 간 교역은 150배 이상 증가했고 한국은 이제 베트남의 제3위 교역 대상국이 됐다. 베트남에 투자한 외국인 기업의 직접투자액 순위에서 누계로 한국이 가장 앞선다. 투자 프로젝트 수는 2022년 중반에 9000개를 넘어섰다. 그러나 양국 간 협력 관계가 거시경제 지표로만 제시될 수는 없다. ‘돈’ 흐름뿐만 아니라 ‘사람’ 흐름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제 상대국에 거주하는 인구는 각기 20만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기 위해 이주하는 베트남인 여성은 한국인과 결혼하는 외국인 배우자 출신국 순위에서 상위권에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진정되고 2023년에 한국으로 결혼 이주해 온 여성들 가운데 베트남인이 가장 많았다. 한국에서 한국인 남성과 베트남인 여성이 만든 다문화 가정은 공식 통계로는 4만여 가구지만 세간에는 6만가구에 이르렀다고 알려졌다. 최근에는 양국 출신 부부로 구성된 다문화가정이 베트남 내에서 증가하고 있다. 한국인 남성과 베트남인 여성이 결혼해 베트남에 거주하는 한·베 가정이 증가하고 있어 그 수는 현재 약 1만여 가정으로 추산된다. 이로써 베트남에는 한국인 공동체, 한국에는 베트남인 공동체가 형성됐다. 얼마 전에 채수홍 서울대 교수가 베트남 내 한인 사회에 관한 책을 출판했는데 이를 참고하여 베트남 내 한인 사회를 들여다보자. 베트남 한인 사회의 시작 베트남 내 한국인의 거주는 상인들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일본군에 속했던 한국인 중 일부가 베트남에 잔류하면서 시작됐다. 김기태 교수에 따르면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당시 한국인이 하노이에 약 100명, 사이공(현 호찌민시)에 약 2000명 있었다고 한다. 한편 최상수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965년경 남베트남에 상주하고 있던 한국인 동포는 164명이었다. 남베트남 거주 한국인이 1945년 2000명에서 1965년경 200명 이하로 줄어든 이유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1945년 사이공에 한국인이 2000명 있었다는 주장도 신뢰하기 어렵다. 윤대영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946년에 한국인 124명이 베트남 하이퐁에서 일본을 거쳐 부산에 들어왔는데 당시 한국인 10여 명이 베트남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1945년경 베트남에 있던 한국인이 200명 정도였을 것이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전반 베트남전쟁 시기에 베트남에 거주한 한국 민간인은 연인원으로 5만명에 달했다. 한 시점에 베트남에 거주한 한국 민간인 기술자들은 1만명을 넘었다. 1975년 전쟁이 끝나며 한국인들은 대부분 베트남을 떠났다. 1992년 수교 이후 베트남 거주 한국인 증가세는 베트남 개혁·개방 정책과 맞물려 있다. 베트남 북부 지도자들은 1975년 통일된 후 남부를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하려 하지만 부분적 성공만을 거뒀다. 이로써 베트남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전반에 극심한 경제 침체를 겪게 된다. 베트남 지도자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1980년대 초반에 부분적 경제 개혁 정책을 도입하여 경제성장의 성과를 일부 거뒀다. 그러나 베트남이 1980년대 중반에 다시 경제적 침체를 맞아 공산당과 정부는 1986년 12월 제6차 공산당대회에서 전면적 개혁인 ‘도이머이’를 선포하게 된다. 이 ‘도이머이’ 정책은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집행되기 시작했다. 베트남의 대외경제 관계는 1990년대 들어, 특히 미국과 국제금융기구가 베트남에 대한 금수 조치를 해제한 1994년 이후에 급속히 확대된다. 이후 외국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베트남에 투자를 확대해 간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블루오션에서 새로운 사업 기회를 실현하기 위해 베트남으로 이주하거나 베트남에 투자한 한국 기업의 주재원으로 파견되면서 오늘날 베트남 내 한인 사회를 구성한다. 채 교수는 한국과 베트남이 1992년 12월 수교하기 이전에 베트남에 거주하는 한국인 수를 약 50명으로 파악했다. 이 수가 1996년 말 호찌민시 인근에 5000여 명, 하노이 인근에 500여 명으로 증가했다. 그는 1997년 후반 이래 한국의 ‘IMF 사태’ 때에도 베트남 내 한국인 거주자가 줄지 않았다는 것도 밝혔다. 한국의 베트남에 대한 투자가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의 소규모 투자가 늘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에 거주하는 한국인 수는 2000년대 초에 약 1만명 또는 1만5000명, 2010년대 초에 약 10만명으로 증가했고 2019년에 20만명까지 증가한 것으로 추산된다. [채수홍 교수 저서 <베트남 한인의 베트남 정착과 초국적 삶의 정치] 베트남 한인 사회의 구성 채 교수가 한인 사회 구성에 있어 호찌민시와 하노이를 비교한 것은 매우 흥미롭다. 호찌민시는 베트남이 1975년 통일되기 이전에 사이공이었다. 한국은 남베트남과 국교를 맺고 있었고 북베트남을 공식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베트남전쟁에서 남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했다. 이 베트남 파병이 남부, 특히 호찌민시 한인 사회의 ‘원로’ 그룹을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 통일 이전 남베트남 사회와 연관이 있던 한국인들이 개혁‧개방 시기에 다시 베트남을 찾아 사업을 시작하며 한인 사회의 ‘원로’ 그룹을 구성했다. 이후 베트남에 대한 투자가 늘면서 한국 대기업의 지사와 상사의 주재원을 비롯한 한국인 수가 늘게 됐다. 이들은 ‘원로’ 그룹과 구분되는 부류, 즉 제2세대에 속한다. 이렇게 남베트남의 한인 사회는 상이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지닌 부류들로 구성됐다. 이에 비해 하노이를 중심으로 한 북부의 한인 사회는 개혁·개방 이후에 한국 기업이 진출하며 이주한 한국인들로 주로 구성됐다. 개혁·개방 이후에 베트남으로 이주한 한국인들 가운데도 대기업 지사 및 상사의 주재원과 중소 규모의 자기 사업체를 운영하는 기업주 또는 여기에서 일하는 공장 매니저들은 사회경제적 기반이 달랐다. 베트남 경제가 발전하지 않아 경제적 차이에 따른 생활양식의 차이를 보일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1990년대 중반까지 이들 간에 구분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채 교수에 따르면 이들 간 사회경제적 분화는 1995년경부터 시작된다. 대기업 직원이나 재외공관 주재원들은 기업 또는 소속 기관의 지원으로 자녀들을 국제학교에 보낼 수 있었으나 자영업자와 중소기업 공장 매니저들은 그러하지 못했다. 이 밖에도 거주 형태와 생활양식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이는 등 사회경제적 분화가 가시화됐다. 1997년 맞은 한국의 ‘IMF 사태’가 베트남 내 중소 투자기업에 충격을 주었으나 대기업에는 큰 충격을 주지 않았는데, 이것도 한인 사회 내에 대기업 주재원과 여타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 간 구분을 두드러지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IMF 사태’ 이후 2000년대 초부터 한국인 소규모 투자자들이 베트남으로 이주하여 제3세대 한인 사회의 구성원이 됐다. 이와 더불어 2001년 베트남과 미국 간 양자무역협정(BTA) 발효 후 베트남 전국에 한국의 투자가 늘었고 2007년 베트남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시점을 전후로 하노이와 북부 지역에 삼성, LG 등 한국 대기업의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져 한인 사회의 구성을 변화시켰다. 베트남 한인 사회의 정치와 향후 과제 채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베트남 한인회 구성의 역사는 지역별 차이를 나타내고 이에 따라 다른 내부 정치를 보여 준다. 남부 호찌민시에서는 초기에 상대적으로 윤택하지 않은 자영업자와 중소 규모 기업인들이 중심이 되어 한인회가 만들어졌다. 이로 인해 대기업 직원이나 공관원으로 구성된 주재원들은 자신들과 ‘한인회 사람들’을 구별 지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호찌민시 한인 사회에서 ‘구별 짓기’는 한인회 내부의 갈등을 낳았다. 호찌민시 한인회는 회장 선거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갈등을 빚었다. 2020년이 돼서야 이 갈등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고 한다. 이에 비해 하노이 한인회는 부유한 기업인이나 주재원이 주축을 이루고 자영업자도 포함되어 만들어지고 운영되기에 이러한 ‘구별 짓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호찌민시 ‘원로’ 그룹을 구성한 인사들처럼 베트남이 통일되기 전 전쟁 시기에 베트남과 연관을 맺은 한국인이 통일 이후, 특히 개혁‧개방 정책을 시작한 이후에 하노이로 이주하여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베트남 개방 초기에 하노이에 거주하던 한국인 다수는 한국 상사의 주재원들이었다. 채 교수는 이러한 차이가 남부와 북부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성격상 차이에 기인한 점도 있다고 한다. 남부에는 의류, 봉제 등 중소기업이 다수 진출하여 이에 종사하는 공장 매니저들이 다수 이주했고, 여기에 자영업자들이 초기부터 사업을 시작한 반면 북부에는 대기업들이 진출하여 주재원들이 다수 이주했다. 이들을 계층적으로 구분하는 대표적인 기준은 거주지와 자녀의 학교였다. 대기업 주재원들은 회사의 지원으로 월세 2000~3000달러짜리 아파트에 살고 자녀를 국제학교에 보내는 반면 공장 매니저나 자영업자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하노이 거주 한인은 하노이 한인 사회가 품위와 가치를 유지하나 호찌민시 거주 한인 사회는 주재원 말고도 ‘여러 부류’의 집합이어서 그러하지 못하다고 폄훼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하노이 한인 사회도 ‘IMF 사태’ 충격이 어느 정도 해소된 2003년경부터 개인사업자나 현지 구직자(흔히 ‘현채’라고 함)가 다수 유입되면서 변하였다. 이에 더하여 2007년과 2013년에 북부 박닌과 타이응우옌에 삼성 휴대폰 공장이 들어서며 하노이 한인 사회는 큰 변화를 겪는다. 이로써 ‘품위를 유지하고 사는’ 부류와 그렇지 못한 부류로 양극화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도 구분 기준은 고급 아파트 월세 지불 능력과 자녀를 국제학교에 보낼 수 있는 경제력이 있느냐 여부다. 베트남 한인 사회에서 ‘품위 있는’ 한인들은 ‘품위 없는’ 이들을 무시한다. 채 교수는 이러한 한인 사회 내 구별 짓기 인식이 베트남인에 대한 한국인의 우월의식으로 전개된다는 점도 지적한다. 설사 베트남 내 한인 사회의 내부에 다양한 집단이 공존하여도 한국인들은 베트남인들을 대할 때 민족적 우위에 대한 확신하에 이를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이에 대해 베트남인들은 한국인들이 무례하고 강압적인 국민성을 갖고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이런 편향적 시각이 상대 국민과 문화에 대해 상호 ‘낙인찍기’로 이어지면서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런 현상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 한 경향일 것이다. 한편으로 한국인들 사이에, 그리고 한국인과 베트남인 사이에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더불어 사는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경향도 공존하고 있으니 말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강대 정치학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2023-08-25 06:00:00
-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21) 미-중 갈등 시대 …균형 외교는 베트남처럼 미·중 갈등은 현재 전 세계적 문제다. 특히 중국에 인접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미·중 갈등 속에서 활로를 찾으려고 분투하고 있다. 자유주의 국가로서 한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블록에 더 적극적으로 편입하는 것이 균형 있는 정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미·일에 편승한 일방적 관계가 가져올 리스크에 경계심을 높이는 목소리도 강하다. 상호 충돌하는 주장 속에서 베트남 사례를 통해 대외정책의 균형을 어떻게 모색할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베트남은 전쟁 시기부터 강대국을 잘 ‘요리하던’ 국가였다. 베트남이 비록 경제적으로 낮은 수준의 중소득국이지만 안보 등 대외전략에서는 상당한 수준의 전략을 구사해왔다. 최근 베트남을 둘러싸고 미국과 중국이 경합한 일을 정리해보자. 시진핑이 세 번째 총서기로 연임되며 외국의 최고지도자로서 베트남의 응우옌푸쫑 총비서(서기장)를 가장 먼저 초청했다. 중국은 작년 10월 30일부터 11월 1일까지 응우옌푸쫑 총비서를 베이징에 초청해 최고우호훈장을 안기며 융숭하게 대접했다. 일부 논자들은 이로써 베트남이 중국에 경도됐다고 평가했다. 이후 응우옌푸쫑 총비서는 올해 3월 29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전화 통화하며 양국 간 협력 강화를 재확인했다. 이래서 균형추는 미국 쪽으로 조금 움직였다. * 용의주도한 미국의 외교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올해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하노이를 다녀갔다. 블링컨이 일본에서 열리는 G7 외교장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는 길에 들른 것이다. 미·중 갈등이 첨예한 상황에서 방문한 것이라 더욱 주목을 받았다. 블링컨 국무장관과 팜민찐 총리는 양국 관계를 새로운 수준으로 향상시키자고 약속했다. 이 새로운 수준이 그간의 포괄적 협력관계보다 한 단계 높은 전략적 협력관계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바이든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하거나 응우옌푸쫑 총비서가 미국을 방문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다. 어쨌든 양국은 이를 위해 긴밀히 협의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 기회에 미국은 3.2㏊ 부지에 건축비만도 12억 달러인 세계에서 가장 비싼 대사관을 하노이에 신축하는 기공식을 했다. 역대 베트남 주재 미국 대사들도 블링컨의 베트남 방문에 동행했다. 테드 오시우스 전 대사는 지금 미국·아세안 비즈니스 카운슬 회장, 대니얼 크리튼브링크 전 대사는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로 활동하고 있다. 현 베트남 주재 미국 대사인 마크 내퍼는 오랫동안 한국에서 근무한 경험도 있고 주한 미국 대사대리로 있었기에 한반도·베트남·미국 관계를 잘 이해하는 인물이다. 내퍼 대사는 2022년 2월 베트남에 대사로 부임하며 베트남 국민들에게 유창한 베트남어로 부임 인사를 전했다. 전임 대사들도 베트남 국민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테드 오시우스 대사는 베트남 조왕신(부엌신) ‘옹따오(Ong Tao)’가 하늘로 한 해의 가정사를 보고하러 가는 음력 12월 23일에 물고기를 방생했고, 크리튼브링크 대사는 베트남 설인 ‘뗏(Tet)’을 축하하는 랩 뮤직 비디오를 유튜브에 방영하기도 했다. 블링컨은 하노이 방문 때 빈민(Binh Minh) 재즈클럽을 방문했다. 클럽 측은 그 다음 날에 생일을 맞는 블링컨을 위해 '해피 버스데이 투 유'를 연주했다. 이런 일들이 의도적인 것이라고 이해하지만 미국이 최근에 이런 일들을 통해 베트남에 적극적으로 다가가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그간 공공외교를 잘 수행해왔다. 미국이 베트남을 대하는 행태를 보면 미국은 베트남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용의주도하게 행동해왔다. 미국 대사는 2001년부터 베트남 문화 보존 미국대사 기금을 조성해 베트남 각지 문화를 보존하는 데 후원하고 있다.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의 수도였던 후에(Hue) 황궁 한쪽에 있는 조조묘에는 미국이 복원사업을 지원했다고 그 궁전 마당에 큼지막한 기념비를 세워 놓았다. 미국이 알게 모르게 베트남에 공을 들이는 모습이 이곳저곳에서 눈에 띈다. 현직 미국 대사와 총영사는 베트남 국민과 소통하기 위해 유튜브에 자주 등장한다. * 중국의 이중적 위상 베트남과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우호관계를 늘 강조한다. 블링컨 국무장관이 하노이를 다녀간 2주 후인 4월 말에 쯔엉티마이 베트남 공산당 상임비서가 베이징을 방문했다. 4월 26일에 마이 상임비서는 시진핑과 회담했다. 마이는 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임하는 중에 2023년 3월 6일부터 공산당 비서국 상임비서를 겸직하고 있다. 상임비서였던 보반트엉이 3월 2일 국가주석으로 선임되며 마이가 상임비서를 겸직하게 됐다. 마이의 베이징행은 신임 상임비서로서 인사차 방문이기도 하지만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하노이를 방문한 직후 이뤄진 '균형 있는' 외교의 일환이었다. 베트남은 중국과 전쟁을 불사할 결기를 가졌지만 신중하게 중국을 대한다. 2022년 12월에 한국과 베트남이 양자 관계의 최고 단계인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상향하면서 일본과는 상응한 관계로 상향하지 않았다. 한국이 베트남과 투자·교역에서 일본을 앞서지만 일본은 한국의 8~9배나 되는 공적개발원조(ODA)를 베트남에 제공해온 국가다. 베트남이 일본과 관계를 최고 단계로 상향하면 이는 중국에 대항해 미·일 그룹에 편승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중국으로부터 불필요한 의혹을 피하려고 한다. 최근 하노이를 방문한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양자 관계를 포괄적 관계에서 전략적 관계로 상향하자는 제안에 베트남이 응하지 않는 것도 중국을 고려한 조치다. 전략적 관계는 포괄적 전략적 관계보다 더 아래 단계인 양자 관계임에도 말이다. 이 사안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베트남과 미국 최고위 지도자들의 상호 방문 과정에서 나타날 것이다. * 관계 다변화를 추구하는 베트남 베트남의 균형 외교는 미국과 중국 관계에서만 작동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2023년 5월 G7 정상회의에 한국, 베트남 등 국가들의 정상도 초청하여 베트남의 팜민찐 총리가 참석했다. 팜민찐 총리는 히로시마에서 각국 정상들을 만나고 21일에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만났다. 한편 베트남 정치지도자들은 5월 21-23일 하노이에서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 메드베데프를 맞아 환대했다. 여기에서 응우옌푸쫑 총비서는 베트남과 러시아의 전통적 우호관계를 강조했다. 메드베데프 부의장은 22일에 보반트엉 국가주석, 팜민찐 총리 등과 회담을 했다. 팜민찐 총리는 전날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를 만나고 다음 날 러시아의 메드베데프를 만난 것이다. 러시아는 중국과 함께 베트남전쟁 시기에 북베트남에 막대한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통하여 베트남의 통일에 기여한 국가다. 통일 이후 베트남과 중국 관계가 소원해졌을 때 베트남의 주된 협력 파트너는 러시아였다. 베트남은 소련이 해체된 후 자본주의권 국가들과 경제협력을 확대해 왔지만 러시아와의 전통적 우호관계는 지속하고 있다. 베트남전쟁 시기에 소련의 군사 지원의 영향으로 현재 베트남 무기체계의 80%가 러시아제 무기로 구성돼 있다고 알려져 있다. 베트남은 러시아의 킬로(Kilo)급 잠수함 6기를 들여와 운용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 베트남은 러시아 무기 중심의 체계를 바꾸려고 무기 수입처를 다변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최근 연간 무기 수입에서 러시아의 비중은 줄고 있다. 베트남이 방위산업 분야에서 협력하려는 주요 대상국 중 하나가 한국이다. 베트남은 한국과 방산 협력을 강화하여 무기 수입처 다변화를 꾀하고 자국 생산을 늘리며 군사 기술의 전수를 희망하고 있다. 그간 베트남의 대외 협력관계를 보면 그 관계가 고정적이지 않았다. 베트남의 대외관계는 시기와 국면에 따라 매우 복합적이며 유연하게 적용돼왔다. 글로벌 중추국가를 지향하는 한국이 베트남의 대외전략을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다. 필자 주요 이력 ▷서강대 정치학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2023-06-19 06:00:00
-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20) 베트남 정치권 '붉은 씨앗'…제2 도이머이 주도할까 젊은 보반트엉(Vo Van Thuong, 1970년생) 공산당 상임 비서가 올해 3월 2일 베트남 국회에서 국가주석으로 선임됐다. 일부 논자들은 이를 베트남 정치에서 세대교체의 시작으로 봤다. 그렇다면 트엉 주석의 선임은 베트남 정치사에서 중요한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일찍이 일부 베트남 전문가들은 베트남의 정치 변동이 세대교체를 통해 일어날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베트남 정치에서 세대교체가 시작됐다면 앞으로 어떤 인물들이 주역으로 등장할까 자못 궁금하다. 더불어 신세대 정치인들은 어떤 생각을 가졌고 이전의 정치 지도자들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하는 점도 궁금하다.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고위 정치인의 자녀들이 정치 지도자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간에 동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최고위 정치인의 자녀들이 정치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현직에 있는 사람들만 들어도 김정은 총비서, 리셴룽 총리,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 등이 있다. 얼마 전에 국가수반이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전 필리핀 대통령,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도 대통령의 딸들이었다. 베트남에서 보반트엉이 국가주석으로 선임되며 언론들은 그가 보반끼엣 전 총리의 자녀니 손자니 하는 추측성 보도들을 냈다. 그를 비롯하여 베트남에도 중국의 태자당 같은 사람들이 있을까? -베트남의 태자당 ‘붉은 씨앗’의 등장 베트남에서도 얼마 전부터 고위 정치 지도자의 자녀들이 정치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붉은 씨앗(hat giong do)’이라고 불린다. ‘붉은 씨앗’은 유력 정치인의 자녀들만이 아니라 넓은 뜻으로는 신세대 사회주의 정치인들을 일컫는다. 세간에 가장 잘 알려진 ‘붉은 씨앗’은 농득마인(Nong Duc Manh)이다. 그가 정치 무대에 등단했을 때 그를 ‘붉은 씨앗’이라고 칭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호찌민의 아들로 알려졌다. 그가 2001년 공산당 총비서(서기장)로 선임됐을 때 어느 외신 기자가 그에게 호찌민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마인 총비서는 베트남 국민들은 모두 호찌민의 자녀들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1940년 박깐성에서 출생했다. 실제로는 1942년생이라는 소문도 있으나 이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호찌민이 중국 남부에서 혁명운동을 하다가 국경을 넘어 베트남 북부 산악지대인 까오방으로 귀국한 게 1941년 1월이었다. 박깐은 까오방의 바로 남쪽에 붙어 있는 지역이다. 농득마인은 1992년부터 10년간 국회의장, 2001년부터 10년간 공산당 총비서로 있었다. 베트남에서 정치 지도자로서 누릴 걸 다 누린 셈이다. 그가 총비서였을 때에는 ‘붉은 씨앗’ 정치인들에 대해 항간에 떠도는 얘기는 많지 않았다. 제1세대 정치 지도자의 자녀들이 정치 무대에 등장해 화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2011년 열린 제11차 공산당대회 때였다. 제11차 당대회에서는 전·현직 당 지도자의 자녀들이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됐다. 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들은 공산당 서열로 상위 200위 안에 드는 고위 인사들이다. 이들이 국가기관의 주요 직위를 겸직하며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보반트엉을 비롯해 농득마인 총비서의 아들 농꾸옥뚜언 박장성 당위원회 비서, 응우옌꺼타익(본명 팜반끄엉) 전 부총리 겸 외교부 장관의 아들 팜빈민 외교부 차관(이후 장관), 응우옌찌타인 대장의 아들 응우옌찌빈 국방부 차관, 하후이떱 전 공산당 총비서의 외손녀 응우옌티낌띠엔 의료보건부 차관(이후 장관), 쩐럼 전 베트남 라디오 방송국 총감독의 아들 쩐빈민 베트남 텔레비전 방송국 부총감독(이후 총감독)이 정위원으로 선임됐다. 또한 당시 총리였던 응우옌떤중의 아들 응우옌타인응이(Nguyen Thanh Nghi, 1976년생), 응우옌반찌 당 중앙감찰위원회 주임의 아들 응우옌쑤언아인(Nguyen Xuan Anh, 1976년생), 응우옌신훙 당시 부총리(이후 국회의장)의 조카 쩐시타인(Tran Sy Thanh, 1971년생)이 후보위원으로 선임됐다. 이들 가운데 지금 정치 무대에 남아 있는 인사는 보반트엉, 응우옌타인응이, 쩐시타인 등이다. 팜빈민은 외교부 장관과 부총리를 역임하고 올해 초에 사임했다. 응우옌찌빈은 2009년부터 2021년까지 국방부 차관으로 있었다. 2016년 제12차 당대회에서는 응우옌타인응이, 응우옌쑤언아인, 쩐시타인이 당 중앙집행위원회 후보위원에서 정위원으로 선임됐다. 보반트엉은 정위원으로 재선임되면서 당 정치국 위원으로도 선임됐다. -현직에 있는 ‘붉은 씨앗’ 현재 베트남에서 대표적 ‘붉은 씨앗’은 보반트엉 국가주석이다. 그는 공산당 비서국 상임 비서를 하다가 2023년 3월 국회에서 국가주석으로 선임됐다. 트엉 주석은 1970년 북부 하이즈엉(Hai Duong)에서 출생했으나 남부 메콩 델타의 빈롱(Vinh Long)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다. 트엉 집안이 남부의 빈롱성에서 베트남전쟁 때 북부로 이주해 살았기에 트엉도 북부의 하이즈엉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유년 시절에 북부에서 지내다가 통일 후 남부로 내려갔고, 호찌민시 인문사회과학대학에서 사회주의 철학을 공부했다. 베트남에서는 출생지와 출신지를 구별하는데, 출신지는 ‘꾸에꾸안(que quan)’이라고 하며 가족의 고향이다. 보통 부친이나 조부의 출신지를 말한다. 사회에서는 출생지보다는 출신자가 더 중요하다. 트엉 주석이 국가주석이 되며 누구의 자녀인지에 대한 추측이 난무했다. 전임 총리였던 보반끼엣의 아들, 손자, 집안 사람이라는 주장들이 섞여 있다. 트엉이 끼엣의 아들이라는 주장은 이렇다. 끼엣은 전쟁 중에 첫째 부인과 두 아들을 잃고 나중에 판르엉껌(Phan Luong Cam)과 재혼했다. 끼엣과 둘째 부인 사이에 자녀가 있다는 얘기는 공식적으로는 없으나 세간에는 트엉이 이들 사이에서 난 아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끼엣과 트엉은 모두 공식적으로 빈롱 출신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 중간 이름을 아버지 이름과 같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보반끼엣과 보반트엉의 중간 이름이 모두 ‘반(Van)’이다. ‘반’은 글월 문을 뜻하며 남자 이름에 흔히 쓰인다. 그러나 보반끼엣이 1939년 공산당에 입당하며 쓰기 시작한 새 이름이고 그전 실명은 판반호아(Phan Van Hoa)였기에 트엉이 끼엣의 아들이라는 주장이 사실에 부합하는지 모르겠다. 끼엣이 입당 후 사용한 이름에 따라 트엉이 ‘반’을 썼을 수도 있다. 끼엣은 1922년생이니 1970년생 트엉이 손자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트엉의 출신이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아 그가 보반끼엣의 자녀 세대 중 한 사람 정도로 추측할 뿐이다. 보반트엉 이외에도 2021년 제13차 공산당대회를 전후하여 유력 정치인 자녀 중 정치국 위원에 오른 인사들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제13기 정치국은 최고위 인사 18명으로 구성됐다. 팜빈민 부총리는 응우옌꺼타익 전 부총리 겸 외교부 장관의 아들이다. 그는 2016년 제12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선임돼 외교부 장관과 부총리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제13차 당대회에서는 정치국 위원으로 재선임됐고 부총리를 맡았으나 올해 초 사임했다. 쩐뚜언아인(Tran Tuan Anh, 1964년생)의 부친은 쩐득르엉 전 국가주석이다. 그는 2016년 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됐고 2021년 새롭게 정치국 위원으로 선임됐다. 그는 상공부 장관을 역임했고 지금은 공산당 중앙경제위원회 위원장으로 있다. 레민흥(Le Minh Hung, 1970년생) 당 중앙사무처장은 공안부 장관을 역임한 레민흐엉의 아들이다. 그는 당 정치국 위원은 아니며 2016년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됐고 베트남국가은행 총독(중앙은행 총재)을 역임했다. 그는 당 비서국 사무처장을 맡고 있으며 2021년 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됐다. 앞에 언급한 응우옌떤중 전 총리의 아들 응우옌타인응이는 2021년 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에 선임됐고 지금은 건설부 장관을 맡고 있다. 앞에 언급한 응우옌신훙 전 국회의장의 조카 쩐시타인은 하노이시 인민위원회 주석(위원장)으로 있다. 여기에 올해 초 팜빈민, 부득담 두 부총리가 사임한 후 쩐홍하 장관과 함께 새로 부총리가 된 쩐르우꽝(Tran Luu Quang, 1967년생)도 주목할 만한 인사다. 쩐르우꽝은 서남부 떠이닌 출신인데 하이퐁시 당 위원회 비서로 있다가 중앙 정치 무대로 옮겨 부총리가 됐다. - 베트남 정치에서 신세대와 제2의 ‘도이머이’ 이처럼 근래에 베트남 정치의 장에 신세대가 등장하며 그 일부는 이전 정치 지도자들의 자녀들로 구성됐다. 특히 2011년 이래 베트남 정치계에 자녀 세대 ‘붉은 씨앗’이 많아진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나이로 보면 1970년 전후에 출생한 인사들이다. 이들이 한 파벌에 속한 것은 아니지만 현 체제에 대한 충성도가 비교적 높은 인사들이라고 여겨진다. 옛 정치 지도자의 자녀들이 정치의 요직에 등용된 것은 혁명가 가족에 대한 신뢰와 사회주의자로서 잘 육성됐으리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보반트엉을 비롯해 신세대 정치인들의 정치적 견해를 담은 논설이 발표되지 않아 그들의 생각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신세대 정치인들이 자기 생각을 나타낼 때 그들의 ‘신사고’가 어떤지를 주목해봐야겠다. 제2의 ‘도이머이(Doi Moi·쇄신)’가 시작될지도 모른다. 필자 주요 이력 ▷서강대 정치학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2023-05-01 15:30:45
-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19) 국민 절반이 중산층 진입 '눈앞' … 베트남이 바뀐다 2020년에 어느 언론은 베트남에서 중산층이 빠르게 성장해 신규 아파트의 80%를 구매했다고 보도했다. 한 사회의 계층구조에서 중간에 위치한 중산층은 사회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집단으로 여겨진다. 중산층이 탄탄해야 사회경제적으로 안정된 사회를 이룬다. 이와 관련해 사회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사회구조의 변화와 그 효과에 주목한다. 기업들은 소비 패턴의 변화와 대응전략에 관심을 보인다. 정치적으로도 중산층의 성장은 민주화의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개발도상국에서 중산층의 성장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 한 사회에서 중산층이 성장하는 시기를 언제로 봐야 할까? 보통 1인당 GDP 미화 3000달러를 넘어서면 중산층이 성장하는 시기라고 보는 것 같다. 사람들의 소비 패턴도 변화하고, 승용차 판매량이 늘기 시작하는 시점도 이때다. 베트남의 1인당 GDP는 2020년에 2779달러였다가 2021년에 3717달러, 2022년에 4110달러에 이르렀다. 2020년과 비교해 2021년 한 해에 1000달러나 증가한 것이 경이롭다. 전 세계 경제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베트남이 플러스 성장세를 나타낸 데 그 원인이 있다고 짐작한다. 베트남은 2020년, 2021년, 2022년에 각각 2.9%, 2.6%, 8.0%의 GDP 성장률을 냈다. 베트남 중산층의 성장 베트남의 중산층이 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될까? 보통 하루에 미화 11달러 이상 30달러까지 소비할 수 있는 수입을 가진 사람들을 ‘갓 진입한 소비자집단’, 하루에 30달러 이상 70달러까지 소비력을 가진 사람들을 ‘안정으로 유지되는 소비자집단’, 하루에 70달러 이상 소비력을 가진 사람들을 ‘높은 구매력의 소비자집단’으로 본다. 중산층은 구매력평가지수(PPP)로 하루에 11달러 이상 70달러까지의 소비력을 가진 집단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하루에 11달러 이상 100달러까지 소비력을 가진 사람들을 중산층에 포함하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하루에 15달러 이상 소비력을 가진 사람들을 포함하기도 한다. 중산층의 속성에 단지 소득만이 아니라 교육수준, 직업, 사회적 지위 등을 포함하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가장 명확한 기준은 소득이다. 세계은행과 베트남 기획투자부가 낸 <베트남 2035>에 따르면, 2015년 무렵에 ‘세계적 기준의 중산층’에 포함될 수 있는 베트남의 인구 비율은 11%였다. 여기에서 ‘세계적 기준의 중산층’은 구매력평가지수 기준으로 하루에 미화 15달러의 소비력을 갖춘 사람들을 말한다. 브루킹스 연구소는 베트남의 중산층이 2016~2020년간 매년 18% 증가했다고 평가했다. 맥킨지는 2021년경 베트남에서 하루에 11달러 이상의 소비력을 가진 인구의 비중을 40%로 평가했다. 현재 베트남에서 매년 150만명이 중산층에 편입되고 있다고 한다. 베트남에서 소수의 고소득자가 있다고 본다면, 중산층의 비중은 전 인구의 3분의 1 정도라고 볼 수 있으며, 절반 정도로 추산되기도 한다. 베트남의 중산층은 미화 5000달러부터 3만5000달러의 연 소득을 올리나, 그들의 대부분은 1500달러에서 2000달러 사이의 월 급여를 받고 있다. 이러한 베트남 중산층의 성장세 속에서 최근 베트남 정부나 학자들도 중산층의 등장에 주목하고 있다. 외국 기업들은 이미 베트남의 소비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연구를 수행했다. 유로모니터는 베트남의 중산층 인구수가 2030년에 태국과 필리핀의 중산층 인구수를 뛰어넘을 것이라고 했다. 보스턴 컨설팅은 가계소득 기준으로 연 8000달러를 중산층의 기준으로 잡아, 베트남 중산층의 비중을 2017년에 20%에서 2030년에 40%로 증가할 것이라고 봤다. 맥킨지는 2030년에 하루에 11달러 이상의 소비력을 가진 인구의 비중이 75%로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세계은행은 2035년에 베트남 인구의 절반 이상이 중산층에 속할 것이라고 비교적 보수적으로 내다봤다. 중산층의 성장은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삶으로 이어진다. 근래에 베트남에서는 아파트 거주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고 소비가 두드러지게 확대돼왔다. 외국 건설사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 개발에 이어 빈(Vin)그룹을 비롯한 베트남 기업들의 아파트 건설이 확산되고 있다. 유통부문에서는 오래 전부터 빅씨(Big C)가 성업하다가 태국 회사에 팔렸고, 한국의 롯데마트가 15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최근에 일본의 이온(Aeon) 몰이 매장수를 늘리고 있다. 베트남 국내 기업으로는 빈콤(Vincom)이 공세적으로 나서고 있어, 하노이나 호찌민시뿐만 아니라 지방의 큰 도시에는 어김없이 빈콤몰(Vincom Mall)이 들어서 있다. 의류부문을 보면 지오다노, 자라(Zara), 에이치 앤 엠(H&M) 등의 해외 브랜드가 일찍부터 진출했고, 얼마 전에 일본의 유니클로가 베트남 시장에 진입해 매장수를 늘리고 있다. 중산층의 성장과 사회적 변화 중산층의 증가가 사회적으로는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베트남사회과학원의 레낌사(Le Kim Sa) 박사는 국가나 기업의 정책에 참여, 정부와 사회 간 소통 역할, 정책 집행에 대한 평가와 비평으로 여론 형성을 통해 사회적 순기능을 수행한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베트남사회과학원 사회학연구소장을 역임한 찐주이루언(Trinh Duy Luan) 교수는 베트남 중산층이 아직은 가족 단위의 일상생활에 집중하는 편이고 사회적으로 사회단체, 자선사업, 취미 활동, 종교 활동 등에 참여하는 등의 한정적 역할만을 수행한다고 분석했다. 베트남 중산층의 성장이 정치의 변화에 끼칠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나 예측하기는 어렵다. 일반적으로 한 사회에서 중산층의 성장은 민주화를 촉진한다고 알려져 있다. 1980년대 말 권위주의 체제로부터 민주화의 문턱을 넘은 동아시아 국가는 한국과 대만이었다. 한국과 대만이 1인당 GDP 3000달러를 넘어선 것은 각각 1987년(3555달러), 1984년(3224달러)이었고, 6000달러를 넘어선 것은 1990년(6610달러)과 1988년(6370달러)이었다. 단순히 보면 자유주의 국가에서 1인당 GDP가 3000달러를 넘어서면 민주화에 대한 압력이 강화되고 6000달러를 넘으며 민주화의 문턱을 넘게 된다고도 할 수 있다. 이는 경향을 말하는 것이지 단선적으로 경제성장에 따라 정치사회적 변화가 이렇게 나타나리라는 것은 아니어서, 이를 다른 국가에 기계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 동남아시아에서도 중산층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를 달성하지 못한 국가들이 많다. 중국과 베트남 같은 탈사회주의 국가에서는 1인당 GDP와 민주화의 관계가 의미 있는 것일까? 중국이 1인당 GDP 3000달러를 넘어선 때가 2008년(3468달러)이었고 6000달러를 넘어선 때가 2012년(6300달러)이었지만, 의미 있는 정치적 변동은 없었다. 베트남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 자못 궁금하다. 필자 주요 이력 △서강대 정치학박사 △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이한우 필자 주요 이력 ▷서강대 정치학박사 ▷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2023-03-20 06:00:00
-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18) '서열 2위' 푹 주석 돌연 사임 …베트남 정가에 무슨일? 정치적 격변기의 베트남 2022년 말과 2023년 초에 베트남은 정치적 격변을 겪고 있다. 작년은 한국과 베트남이 국교 수립 30주년을 맞는 해였기에 수많은 행사들이 열렸고, 12월 4일부터 6일까지 베트남 국가주석을 비롯한 주요 지도자들이 한국을 방문하며 피날레를 장식했다. 당시 한국 방문단은 응우옌쑤언푹 국가주석, 팜빈민 부총리를 비롯한 여러 명의 장관들로 구성됐다. 양국 간 정상회담, 기업인 및 베트남 관련 인사들과의 만남, 경기도 광주의 다문화가정 방문 등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사람들은 당시 우호적 분위기에 취해 이 방문단에 국가주석의 부인이 동행하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느끼지 않았다. 그때까지 베트남에서 정치적 격변이 물밑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작년 12월 30일에 베트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팜빈민, 부득담 두 부총리를 당 정치국 및 중앙위원회 위원직에서 면직시켰고, 올해 1월 5일에 국회는 이들을 부총리에서 면직시켰다. 잘 알려진 대로 이들은 코로나 시국에서 자국민의 귀국 과정에서 과도한 비용을 부과하고 뇌물을 챙긴 일, 코로나 진단 키트를 개발한 비엣아(Viet A) 회사로부터 뇌물을 받은 일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들과 장관, 차관, 대사 등을 비롯한 정부의 고위직 인사들이 여러 명 연루되어 자리에서 물러났다. 응우옌쑤언푹 국가주석이 이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고 당의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겠다고 요청하여, 1월 17일에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이를 승인했고, 18일에 국회는 그를 국가주석에서 면직시켰다. 이 일은 국가원수를 면직시키는 대사건이었지만, 관련 당사자들은 국가주석이 사임을 요청하는 형식을 취해 그의 체면을 깎아내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정부조직체계로 보면 고위 공무원들의 부패 연루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그들의 직속 상관인 총리가 지는 게 타당할 듯한데, 국가주석이 그 책임을 진 것은 그의 사임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항간에 떠도는 얘기로는, 코로나 진단 키트를 개발한 비엣아 주식의 80%가 누구의 소유인지 불분명한데 실제로는 푹 주석 부인의 것이라는 얘기다. 푹 주석의 가족들은 다양한 이권에 개입해 있다고 한다. 푹 주석의 사임 원인을 가정사로 돌리기에는 미흡하며, 최근 베트남의 정치적 격변을 작금의 정치경제 상황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현재의 정치적 격변을 이해하려면 10년 전으로 올라가 봐야 한다. 2011년 제11차 공산당대회에서 응우옌푸쫑이 총비서(총서기)에 처음으로 선출됐고, 베트남은 이후 국회에서 쯔엉떤상 국가주석, 응우옌떤중 총리, 응우옌신훙 국회의장으로 새 정부의 진용을 갖췄다. 언론들은 응우옌푸쫑과 응우옌신훙을 중도파, 쯔엉떤상과 응우옌떤중을 개혁파로 분류했다. 이들 가운데 국가주석이 국내 정치에서 권력을 행사하지 않고 국가 의례적 일만을 담당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정부의 일상적 권력은 총리에 의해 행사된다. 응우옌떤중은 2006년부터 총리직을 수행해오다가 2011년에 연임하게 됐다. 응우옌떤중이 총리직을 수행한 10년간은 베트남의 정치경제 권력구도에서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베트남에서 경제권력이 총리에게 집중되기 시작한 것은 2005년 무렵부터 시작된 국영기업집단의 형성과정과 맞물려 있다. 베트남은 세계경제로의 통합에 대응하여 국제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국영기업 대형화를 추구했다. 정부는 1994년부터 몇 개의 국영기업을 묶어 총공사(general corporation, 소형 기업집단)로 전환하여 약 100개를 만들었고, 2005년부터 일부 대형 총공사를 중심으로 한국의 재벌을 벤치마킹한 국영기업집단을 시험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베트남 정부는 국영기업집단을 13개까지 만들었다가 10개로 줄였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국영기업들은 중앙정부 또는 지방정부의 각 부처 산하에 편재되어 있었는데, 2005년 이후에 재편된 국영기업집단은 총리 관할 하에 편재돼 총리의 경제권력을 강화했다. 2000년 이래 급성장한 민간기업들은 총리를 비롯한 정부 지도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응우옌떤중 총리 시절에 국영기업의 부실화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예컨대, 선박 건조가 주업종인 비나신의 2010년 12월 디폴트(채무불이행) 선언, 해운회사 비나라인의 부실 등 대형 국영기업의 부실들이 이어졌다. ‘이익집단’(베트남어로, 뇸러이익 nhom loi ich)이라는 용어가 널리 퍼진 것도 이때였다. 이익집단은 자유주의 사회에서 민간의 자유로운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자발적 결사들이지만, 베트남에서는 국가 전체의 이익이 아니라 자기 집단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권력 집단으로 이해됐다. 학자들은 특히 응우옌떤중 정부 시기의 베트남 정치경제체제를 ‘지대 추구’ 행위가 만연한 ‘정실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사회라고 이해했다. 경제적 이익을 경제적 수단이 아닌 정치적 수단을 통해 획득하기에, 정경유착이 강화됐고 부패도 심화됐다. 숙정작업의 본격화 2011년 제11차 공산당대회 이후, 특히 응우옌푸쫑 총비서와 응우옌떤중 총리 간에 권력 경쟁이 본격화됐다. 응우옌떤중 총리는 국영기업 및 지방정부들과 긴밀히 협력하였고 상호 이익을 공유하는 관계를 발전시켰다. 특히 경제부문에서 그의 전횡은 공산당 고위 지도자들에게 경계심을 갖게 했다. 이에, 응우옌푸쫑은 2012년에 응우옌떤중 총리의 견책을 도모했다. 먼저 총비서는 당시 ‘동지 X’로 불리던 응우옌떤중 총리의 견책 안건을 공산당 정치국 회의에 부쳤고 16명으로 구성된 정치국으로부터 동의를 얻어냈지만, 200명으로 구성된 당 중앙위원회로부터 동의를 얻지 못했다고 알려졌다. 2012년 12월에 공산당은 반부패 숙정기관을 정부로부터 당 중앙위원회 산하에 두도록 하여 중앙내정위원회를 신설했고, 동시에 당 중앙위원회 산하에 경제위원회를 복구하여 공산당의 경제부문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응우옌푸쫑 총비서가 의도한 대로 숙정이 이뤄지지는 않았다. 2016년 제12차 공산당대회에서 응우옌떤중은 총비서 후보로 나서 응우옌푸쫑에게 도전했으나 마지막 순간에 이를 철회했고, 응우옌푸쫑이 총비서로 선임됐다. 이후 국회가 쩐다이꽝 국가주석, 응우옌티낌응언 국회의장, 응우옌쑤언푹 총리를 선임하여 최고위 지도부 진용을 갖췄다. 응우옌푸쫑이 제12차 공산당대회에서 응우옌떤중의 총비서 후보 추대를 막을 수 있었지만, 정치국 위원들과 최고위 지도자 4인의 구성에는 어느 정도 타협해야 했다고 여겨진다. 제12기 최고위 지도자 4인은 2명씩 양 진영에 속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응우옌푸쫑과 그의 지지자들이 제12기 정치국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한 것은 아니었다. 응우옌푸쫑은 제12기에 숙정작업을 본격적으로 개시했다. 첫 표적은 당시 정치국 위원 겸 호찌민시 당위원회 비서였던 딘라탕이었다. 그는 2017년 5월에 정치국 위원 및 호찌민시 당위원회 비서에서 면직되었고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했다. 그는 2006~2011년간 페트로 베트남 회장 시절의 불법행위, 직위 남용, 횡령 등의 혐의를 받고 2017년 12월에 체포되어 기소된 후 30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황쭝하이, 응우옌반빈 등 당시 정치국 위원과 레타인하이 전임 정치국 위원 겸 호찌민시 당위원회 비서도 견책할 것이라는 소식이 퍼졌다. 이들은 모두 응우옌떤중 정부에서 주요 직위를 역임한 인사들이었다. 응우옌쑤언푹은 응우옌떤중과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다. 응우옌푸쫑 총비서는 2021년 제13차 공산당대회에서 쩐꾸옥브엉 당시 당 상임비서를 차기 총비서로 추대하려고 했다. 하나 당 중앙위원회 내에서 이에 대한 합의를 얻어내지 못해, 응우옌푸쫑 본인이 다시 총비서 후보로 나섰다. 총비서는 65세 이하여야 하고 재임까지만 할 수 있다는 당의 규정으로 인해, 그는 두 가지 사항에 저촉됐지만 특별승인을 얻어 3연임의 총비서로 선임됐다. 그가 추천한 후보가 총비서 후보로 추대되지 못했으나 본인이 세 번이나 총비서로 선임될 수 있었던 것은 당 정치국 및 중앙위원회에서 그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이지는 않았더라도 많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제13기 최고위 지도부는 응우옌푸쫑 총비서, 응우옌쑤언푹 국가주석, 팜민찐 총리, 브엉딘후에 국회의장으로 구성됐다. 시진핑의 길을 걷나? 2022년 말과 2023년 초에 정치적 격변을 치러낸 응우옌푸쫑 총비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개인 권력을 강화하고 ‘시진핑 사상’을 언급하며 자신의 생각을 마오쩌둥 사상의 반열에 올리려는 시진핑과 같은 길을 걸으려는 것일까? 나는 그가 개인 권력욕이 강하여 최근 정치권력을 강화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가 개인 권력욕에 눈이 어두웠다면 2021년 제13차 공산당대회에서 처음부터 총비서 후보로 나섰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가진 권력욕은 개인 권력욕이 아니라 공산당 권력욕이라고 해야겠다. 여기에서 그가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정치권력을 강화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공산당 지배체제를 강화하려고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에 대한 답은 논쟁적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응우옌푸쫑 총비서가 공산당 지배의 근간을 위협하는 체제를 용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외부 관찰자들은 최근 베트남의 정치적 격변을 대체로 “정치화된 부패척결운동”으로 이해한다. 베트남 국민들은 부패척결운동을 지지하지만 정치권력 경쟁에는 색안경을 쓰고 볼 수밖에 없다. 베트남에서 팜빈민, 부득담 두 부총리가 물러난 것을 반기는 분위기는 아닌 듯하다. 그들은 많은 경험을 쌓고 능력을 갖춰 국가를 위해 활약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고위 정치 지도자들 중 그들만큼 때묻지 않은 사람들이 누가 있는가라는 비판도 제기되고, 이들이 다시 복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희망 섞인 의견도 나온다. 특히 팜빈민의 퇴임은 외교부문에서는 상당한 손실로 여겨진다. 미·중 간 갈등 상황이기에 그의 퇴임이 중국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음모론도 제기됐다. 베트남과 중국이 1975년 베트남전쟁이 끝난 후 소원해진 관계를 다시 정상화하기 위해 1991년에 중국의 청두에서 회담을 가졌을 때 중국이 팜빈민의 부친인 응우옌꺼타익 당시 외교부장관을 사임시키라고 요구한 것의 복사판이라는 것이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중국은 팜빈민의 퇴임을 바랐을 것이다. 시진핑이 작년 10월 총서기로서 세 번째 임기를 시작하며 가장 먼저 중국을 방문한 외국 지도자는 응우옌푸쫑 총비서였다. 당시 시진핑은 응우옌푸쫑을 극진히 대접했다. 미국과 중국 간에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베트남이 미국에 다가가고 있었기에, 중국이 베트남에게 강한 러브콜을 보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중국 관영 언론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으나, 이에 반해 외부 관찰자들은 그 효과가 그다지 크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편이었다. 그러나 최근 베트남 국가주석과 두 명의 실용적 노선의 부총리가 사임한 효과는 미·중 사이에서 베트남이 균형추를 중국 쪽으로 조금이라도 옮기는 것으로 나타나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베트남은 그간 실용적이고 균형적인 대외 정책으로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를 잘 수행해온 국가이기에, 이 균형추가 상황에 따라 또 이동할 것이지만 말이다. 경제부문에는 어떤 영향을 줄까? 베트남과 관련을 맺고 있는 한국인들의 주된 관심은 2023년 베트남의 정치적 격변이 경제부문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다. 당장 베트남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이 눈에 띄며 인허가 등 여러 과정이 지체되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한편으로는 베트남 당국이 이러한 정치적 격변이 경제부문에 부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려고 노력한다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외국인투자가 베트남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서 수출의 70%를 외국인투자 기업들이 담당하고 있다. 그 비중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기 직전인 2019년에 69%로 떨어졌지만 2022년에 74%로 증가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그간 쌓았던 네트워크를 다시 정비해야 하는 과제도 갖게 됐다. 최근에 베트남이 FLC 그룹과 떤황민 그룹에 제재를 가했지만, 외국인투자 기업에 대한 제재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외국인 투자자들은 기존의 협력방식을 갑작스럽게 단절할 수 없더라도, 부패척결운동을 통한 경제체제 전반의 건전화가 점진적으로나마 진행되는 것에 따른 대응방안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베트남 투자 기업인 ㅈ기업과 ㄹ기업의 사례를 비교한 연구가 재미있는 시사점을 준다. ㅈ기업은 ‘비공식적 협력 관계’를 지속했지만 ㄹ기업은 이를 단절했다가 손해를 보고 다시 옛 방식으로 복귀하여 호찌민시 2군에 있는 일부 구역의 개발권을 얻었다고 한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당분간은 두 트랙을 밟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한우 필자 주요 이력 ▷서강대 정치학박사 ▷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2023-01-31 19: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