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 소장
carmine.draco@gmail.com
-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 ESG연구소 소장 겸 (사)ESG코리아 철학대표
- 前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
- [안치용의 비욘드 ESG] 자산불평등이 부른 탄소불평등 [안치용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세계적인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가 최근 구설에 오른 건 기후정의의 상징적 장면이다. 스위프트는 2월 11일 오후 3시 30분(현지시간)이 조금 넘어서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했다. 이날 오후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얼리전트 스타디움에서 열린 미국프로풋볼(NFL) 결승전, 즉 ‘슈퍼볼’을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슈퍼볼 우승 트로피는 스위프트의 연인 트래비스 켈시가 소속된 캔자스시티에 돌아갔다. 캔자스시티가 승리한 뒤 시상식장에 내려와 그가 켈시와 포옹하고 입을 맞추는 장면이 전 세계 매체에 보도됐다. 스위프트의 ‘사랑꾼’ 행각은 켈시에게는 더없이 사랑스러운 것이었겠지만 대중의 눈엔 논란이 됐다. 스위프트는 10일 오후 6시(현지시간) 도쿄돔에서 시작한 콘서트를 3시간 30분가량 진행하고 한 시간 만에 하네다 공항에 도착해 자신의 전용기 다소 브레게 미스테르 팰콘 900을 타고 곧 바로 연인의 슈퍼볼을 보기 위해 라스베이거스로 향했다. 4000만 달러짜리 전용기로 이동한 거리는 약 8900㎞로 며칠 뒤인 16일 호주 공연을 위해 움직인 것까지 합치면 연료로 약 3만3000ℓ를 썼다. 이에 따른 탄소 배출량은 약 90톤. 워싱턴포스트(WP)는 “(스위프트의 전용기 이동에 따른 탄소 배출이) 올해 내내 평균적인 미국인 6명이 배출한 탄소를 합친 것보다 많은 양”이라고 했다. 스위프트는 2022년에 ‘탄소 배출이 가장 많은 유명인 1위’로 선정됐다. 스위프트는 전용기 사용 등으로 그해 상반기에만 세계인의 평균을 1500배 상회하는 8293톤을 배출했다. 영국의 지속가능성 마케팅 업체 ‘야드’는 이 같은 내용을 공개하며 유명인들이 전용기를 과도하게 띄우며 탄소를 배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스위프트 측은 전용기 사용으로 배출한 탄소를 상쇄하기 위해 배출권 구매 등으로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고 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고 WP는 전했다. ■새로운 불평등 지표, 탄소=이날 슈퍼볼을 보기 위해 전용기를 띄운 사람이 스위프트만은 아니었다. WP는 비즈니스 항공편 추적업체 WingX 통계를 인용해 “스위프트를 태운 전용기는 지난 주말 라스베이거스로 향한 전용기 882대 중 하나”라며 올해 슈퍼볼 관람을 위해 이용한 전용기는 역대 두 번째로 많았다고 보도했다. 슈퍼볼에 가장 많은 전용기가 집결한 때는 지난해로 애리조나 글렌데일에서 열린 슈퍼볼 경기에 931대가 날아들었다.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리려는 부유층의 무절제한 낭비나 과시형 소비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과소비에 따른 탄소 과다 배출은 다른 차원의 문제를 야기한다. 부유층의 과거 과소비는 자신의 재산을 탕진하고 주변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현재의 과소비에 따른 탄소 과다 배출은 타인에게 실질적인 손해를 끼친다는 데서 새로운 차원의 사회적 문제가 된다. 출처: 옥스팜 2020년 옥스팜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90~2015년 기준 전 세계 상위 1% 부유층(6300만명)이 소비활동으로 배출한 이산화탄소는 전 세계 배출량에서 15%를 차지했다. 범위를 상위 10%(6억3000만명)로 넓히면 비중이 52%였다. 소득 하위 50%(31억명)가 배출한 탄소는 전체 중 7%에 불과했다. 소득 상위 1%가 소득 하위 50%에 비해 두 배 넘는 탄소를 뿜어내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새로운 글로벌 의제를 제시한다. 기후정의다. 탄소불평등은 부동산이나 소득·자산 불평등과 완전히 다르고 더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불평등이 편익의 편중에 머물지 않고 보편적 비용으로 직결하고, 게다가 비용을 치를 능력이 부족할수록 더 큰 비용을 치르게 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비용을 지불하는 사람이나 집단, 국가는 편익을 누리지도 못한다. 윤리적 관점을 논외로 하면,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지 않았지만 스위프트가 전용기 사용에 따른 탄소 배출을 배출권 구입으로 상쇄했다는 측면에서 최소한의 양식은 지킨 셈이다. 반면 전용기 900대가량을 몰고 온 부자들이 대중의 감시에 노출된 스위프트처럼 상쇄의 길을 택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전용기 사용이 슈퍼볼에만 국한한 사안이 아니고 탄소불평등이 전용기 사용에만 국한하지도 않을 것이다. <불편한 진실>이라는 기념비적 저서로 기후변화 담론을 세계에 공론화하는 데 크게 기여한 앨 고어가 탄소불평등과 관련한 ‘불편한 진실’로 10여년 전 여론의 질타를 받은 적이 있다. 미국 명문가 출신인 고어는 테네시주 내슈빌에 거실 20개와 욕실 8개가 있는 대저택을 소유하고 있으며 다른 곳에도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다. 논란이 된 건 고어 부부가 사는 내슈빌 대저택의 전기요금이었다. 미국인 가정의 평균 전기 사용량에 비해 약 20배 많은 전력을 썼다는 사실이 폭로돼 한동안 이중성이 도마에 올랐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며 진보적인 시각을 취하고 있는 스위프트 또한 탄소 과다 배출과 관련한 공격을 종종 받는다. 미국 보수 정치평론가 앤 콜터가 “그렇다. 우리는 석유가 필요해서 이라크를 침공한다. 그래야만 너희들이 자가용 비행기와 리무진을 타고 다닐 것이 아니냐”고 한때 할리우드를 겨냥해 일갈한 적이 있다. 콜터의 경구가 당시 민주당 진영을 공격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부유층의 탄소 과다 배출을 꼬집었다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라크 침공을 그렇게 쉽게 정당화하거나 희화화해서는 안 됐다. 출처: CDG(국제개발센터) ■세계적 규모의 탄소불평등 탄소불평등에 기반한 기후정의 문제는 국민국가의 국경을 넘어선다. 주지하듯 주로 선진국에서 발생한 온실가스가 국경 안에 머물지 않고 북극·아프리카 등 전 세계를 무대로 들쑤시고 다니기 때문이다. 국제개발센터(CDG)의 기후위기 취약국가 종합순위는 중국, 인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적도기니, 브룬디, 수단, 방글라데시, 르완다, 세네갈, 나미비아 순으로 1~10위였다. 10위권에 OECD 국가는 한 나라도 포함되지 않았다. 중국과 인도를 빼고 온실가스 배출량도 하위권에 속한다. 온실가스는 적게 배출하고 피해는 많이 보는 국가들에서 목격되는 불평등과 부정의가 기후정의의 핵심 쟁점이다. 대표적으로 탄소 저배출 국가인 파키스탄에서 2022년 여름 지구온난화로 인해 대규모 홍수가 일어나 국토가 3분의 1이나 잠기는 재앙을 당했다. 이에 따라 그해 11월 이집트에서 열린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7)에서 기후변화 피해를 당한 중저소득 국가에 선진국이 보상하는 ‘손실과 피해’ 보상 기금 마련에 합의했다.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고 국가별 분담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에 관한 구체적 합의가 쉽지 않겠지만 지구촌 차원에서 탄소불평등을 인정하며 기후정의를 위한 국제적인 행동계획을 수립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적용하기 쉽지 않은 CBDR 원칙 1992년 ‘환경과 개발에 관한 리우 선언’에 명시된 CBDR(Common But Differentiated Responsibilities) 원칙은 공동의 책임을 인정하지만 국가 간에는 차별적 책임이 있다는 논리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 역사적 책임의 차이와 환경문제를 다룰 수 있는 경제적·기술적 능력의 차이를 인정하여 국제의무를 차별화하는 내용이다. 현실에서 CBDR 원칙을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예컨대 파키스탄에 기후위기에 따른 피해를 보상한다고 할 때 국가별로 어떻게 차별적 책임을 부과할 것인지 합의를 끌어낼 수 있을까. 지금 전 세계에 기후위기를 일으키는 온실가스 중 인간이 인위적으로 배출한 것은 산업화 이후 수백 년에 걸쳐 쌓인 것으로, 누적 배출량은 미국이 1위지만 현재 배출량은 중국이 1위다. ‘차별적 책임’을 산정할 때 현재의 책임과 현재완료의 책임 사이에서 어느 쪽이 더 큰 책임을 져야 하는지 국가 간에 합의가 도출될 수 있을까. 더구나 첨예하게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두 나라가 다름 아닌 중국과 미국이다. 기후정의는 이처럼 국내보다는 국제적으로 더 문제가 되기에 해법이 잘 찾아지지 않는다. 위기는 글로벌하지만 의사 결정이 국민국가 수준에 맡겨져 있다는 근본적인 거버넌스의 한계 때문이다. 기후정의는 20세기 말에 들어 인류가 처음으로 자각한 전혀 새로운 문제지만 이 문제는 인류가 시급히 풀어야 할 문제 목록 최상단에 위치한다. 그전까지 지구촌은 개별 국가 차원에서 작동하는 환경정의를 어떻게 실현할지를 고민했다. 환경정의도 레이철 카슨 등이 활약한 20세기 중반에 등장했으니 비교적 새로운 의제였다. 산업화에 따른 환경오염 문제가 심각했지만, 국가가 개입하여 우선순위를 조정하며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더라도 환경정의에 관해선 나름 해법을 찾아갈 수 있었다. 기후정의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의사 결정을 위한 글로벌 거버넌스를 마련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환경정의와 달리 해법 마련 가능성을 어둡게 한다. 그나마 글로벌 거버넌스라고 존재하는 유엔이라는 것이 세계정부와는 한참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결합한 국민국가 체제는 결국 기후위기라는 글로벌 의제를 해결하는 데 바람직한 시스템이 아닌 것이 밝혀질 테고, 기후정의는 기후위기의 심화 속에서 표류하다가 과거 유행한 세계시민이란 말처럼 폐허 속에서 실현해야 했지만 하지 못한 통한의 개념으로 후세가 곱씹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면 너무 비관적인가. 공동의, 그리고 차별적 재앙이 본격화하고 있어서 낙관론을 살리려면 서둘러 움직여야 한다. 자료 도움: 박예린(경기연구원 연구원) 안치용 필자 주요 이력 △ESG연구소 소장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전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 2024-04-02 16:11:10
- [안치용의 비욘드 ESG] 미국 역차별 반발에 뒷걸음질? 시험대 오른 소수자 포용 정책 [안치용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미국에서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정책이 뒷걸음하고 있다. 소수자 우대 정책에 백인 역차별 논란이 제기되면서 DEI 정책에 대한 미국 보수층의 반발이 실제 법제화로 이어지는 분위기다. 뉴욕타임스(NYT)는 스펜서 콕스 미국 유타주(州) 주지사가 지난 2월 1일 주의회가 송부한 DEI 정책 금지법에 서명했다고 이날 보도했다. 콕스 주지사가 서명한 법안은 공립 교육기관과 주 공공기관에서 DEI 정책을 없애는 것을 골자로 한다. 당장 공공기관의 각종 프로그램에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능력 중심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을 인종차별이나 성차별로 매도하는 것도 금지된다. 교육기관이 일부 소수인종 학생을 선별적으로 지원하는 대신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관련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이러한 반(反)DEI 움직임이 유타주에서만 있는 건 아니다. NYT는 지난해부터 미국 내에서 DEI 정책을 금지하려는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다고 전했다. 유타를 포함해 텍사스, 노스다코타, 노스캐롤라이나 등 8개 주에서 DEI 금지법이 제정됐다. 텍사스주에서는 올해 들어 DEI 금지법이 발효됐다. 이에 따라 텍사스 내 공공기관은 소수인종을 우대하거나 다양성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인력을 채용하거나 특혜를 줄 수 없게 됐다. 텍사스주립대는 교내에 설치된 ‘다문화촉진센터’를 폐쇄하고, 졸업식 행사에서 흑인·히스패닉·아시아계 학생을 위한 별도의 이벤트에 자금을 대는 것도 중단했다. 테네시주의 DEI 금지법에는 공립대학이 교직원에게 편견 해소를 위한 의무교육을 실시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이 담겼다. 미국 보수층이 DEI를 백인에 대한 역차별로 판단해 대놓고 조직적인 반대 운동을 벌이면서 보수색이 짙은 지역을 중심으로 DEI를 폐기하는 법제화가 실제로 이뤄지고 있다고 NYT는 분석했다. 미국에서 8번째로 DEI 금지법이 발효된 유타주는 대표적인 보수 우세 지역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DEI란?=DEI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다양성(Diversity), 형평성(Equity), 포용성(Inclusion)이란 세 가치를 한꺼번에 부르는 말이다. 다양성은 인구학적 다양성을 포함해 다양한 배경을 가진 구성원이 공존하게 하는 것이다. 다양한 배경이란 인종, 성, 종교, 성적 취향, 사회경제적 지위, 언어, 장애, 종교적 신념, 정치적 관점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구성원 사이의 관계와 상호작용에 영향을 미치는 실재하거나 인식된 차이이다. AT&T, 구글, 3M, 러쉬 등 주요 글로벌 기업이 매년 다양성 보고서를 발표하여 조직원 다양성 비율을 공개한다. 미국에서는 인종이 상대적으로 중요한 다양한 가치로 받아들여진다. 그만큼 인종차별이 여전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공정성으로도 번역하는 형평성은 제도나 시스템을 통한 절차나 분배가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으로 존 롤즈의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연상시킨다. 평등(Equality)이 구성원에게 자원을 균등하게 배분하자는 이념인 반면 공정은 구성원 사이에 격차가 있음을 인정하고 장애인, 고졸채용자, 비정규직노동자 등 비주류 구성원도 균등한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적절한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불가피하게 불평등을 용인해야 한다면 어떤 기준을 따라야 하는지에 관한 원칙으로, 가장 불우한 사람의 편익을 최대화해야 한다는 롤즈의 ‘최소극대화(maximin) 원칙’에 맞닿아 있다. 포용성은 다양한 특성을 가진 개인이 조직에서 ‘다름’을 존중받고, ‘심리적 안전감’을 느끼며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용어 자체로는 배제(exclusion)의 반대말로, ‘조직 내에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해도 피해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느끼는’ 심리적 안전감을 토대로 구성원이 가진 ‘다름’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하고,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여, 예컨대 기업이라면 생산성을 높이는 게 포용성의 핵심이 된다. 소극적 의미로는 일상생활에서 흑인, 동양인, 동성애자 등 소수자를 차별하는 마이크로어그레션(microaggression)이 원천 배제된 상황이 출발점일 수 있다. 마이크로어그레션은 ‘아주 작은’이라는 뜻의 마이크로(micro)와 ‘공격’이라는 뜻의 어그레션(aggression)의 합성어로, 예를 들어 식당에서 같이 앉는 것을 피하는 행동과 같은 일상 속의 차별을 통해 상대에게 모욕감이나 적대감을 표현하는 것이 마이크로어그레션에 해당한다. ▲정의 혹은 생산성=이 세 가지 가치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따로 떼어서 설명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다양성이 형평성과 포용성이란 가치가 만들어낸 결과일 수 있지만, 다양성 없이 형평성과 포용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양성과 형평성이 개념상 구분이 있지만 현실에서 겹치는 측면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어서, DEI를 I&D(포용성과 다양성, Inclusion & Diversity)로 줄여 쓰기도 한다. 반대로 세부적으로 더 구분해 소속감(belonging)의 B를 추가한 DEIB, DEIB에 접근성(accessibility)의 A를 더하여 DEIAB라는 용어를 개발해 쓰기도 하나 결국 DEI를 더 잘 설명하기 위한 방법론이다. 경영학에서는 DEI와 기업 생산성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져 DEI가 기업 생산성 향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가 많이 보고돼 있다. 생산성을 논외로 하고, 공정으로서 정의처럼 DEI를 그 자체로 보편적 가치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기업에서 대체로 정의를 다루지는 않을 것이니 말이다. 정의 대신 수익성에 신경을 쓰는 기업에서 지속가능경영과 ESG경영 흐름에 따라 지속가능성 임원 등 과거에 없던 직제가 생겨나는 가운데 SAP에서는 ‘Global Head of People Sustainability & Chief Diversity and Inclusion Officer’란 직함이 목격된다. I&D를 D&I로 바꿔서 다양성과 형평성을 다루는 임원인 CD&IO를 CEO나 CFO처럼 만든 것인데, 글로벌 기업인 만큼 여기에 ‘People Sustainability’를 추가해 포괄적으로 이 부문을 책임지게 했다. 글로벌 기업에는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유사한 직제가 많이 생겼다. 미국과 유럽에서 DEI가 조금 더 복잡하고 섬세하다면 한국에서 DEI는 주로 여성에 초점이 맞춰진다. 인종 문제가 상대적으로 덜하다고 판단하거나 이 문제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일 수 있으며, 동성애나 다른 소수자 문제는 아직 대면할 여건이 안 됐다고 외면하는 상황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사회에서 젠더 의제는 비교적 공론화한 상태이고 성차별 해소에 관한 압력이나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된 상태여서 일종의 여성할당제가 여러 분야에서 확산하고 있다. ESG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으로 알려진 국내 유수 대기업에 근무하는 30대 중반의 여성 중간간부 박 아무개 과장은 “확실히 사내 분위기가 여성을 우대하는 쪽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맞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경영전문대학원에서는 ‘여성 사외이사 전문과정’을 만들어 지금 7기를 모집 중이다. 홍보문안에 “개정된 자본시장법에 따라 자산 총액 2조원 이상의 상장사는 여성 이사를 1명 이상 선임해야 한다”고 적시하며 “각계의 경륜 있는 여성리더를 위한 전문 교육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라고 밝혔다. 이화여대의 ‘여성 사외이사 전문과정’이 성공적으로 운영되는 모습을 두고 여성인 어느 교수는 양가적인 감정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는 식의 대응이 오랫동안 사회적 약자로 차별받은 여성에게 나쁜 전략일 수는 없지만, 실력이 아니라 배려로 어떤 지위에 오르려는 여성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또 실제로 실력 있는 여성까지 도매금으로 묻어가기도 해 씁쓸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박 과장도 “사내에서 남성 입사 동기들이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불이익을 당한다고 인식하는 듯하며, 여성으로 어느 정도 두각을 나타내면 비슷한 역량의 남성에 비해 유리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DEI가 자리잡은 지 오래인 미국에서는 인종·여성할당제에 대해 능력주의를 도태시켜 미국 사회를 자기해체의 길을 걷게 한다는 반발이 백인 보수층을 중심으로 터져 나온다. 특히 소수자 우대 정책을 펴는 미국 일부 명문대학을 두고는 학문적 자살을 감행한다는 비난 공세를 퍼붓는다. 유타주를 포함하여 8개주에서 DEI 금지법이 제정된 것은 이런 분위기에 힘입었다.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둔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는 지난 1월 미국 내 사무소들의 인턴십·장학금 관련 흑인 우대 정책을 폐기하고, 미국의 가난한 백인 학생들에게도 인턴십과 장학금 기회를 열어주었다. PwC 외에 화이자 등 일부 미국 기업들이 회사의 흑인 우대 제도를 손본 것으로 전해진다. ▲정의는 생산적이다=PwC의 정책변화는 유타주의 사례와는 결을 달리한다. DEI를 폐기한 것이 아니라 조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성과 포용의 기준으로 인종 대신 가난을 택한 것이므로 어느 정도 논리적 타당성을 갖고 공정으로서 정의에도 부합한다. 핵심은 DEI가 공시적 관점의 정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능력주의를 획일적 평등의 관점에서 적용하면 소수자는 주류사회에 진입할 기회를 잡지 못한다. 주류사회에 진입하여 성장하는 과정과 재생산을 통해 역량을 키울 수 있기에 역량을 키울 기회 자체가 없는 모습의 진입장벽 존재는, 능력주의를 인정하더라도 능력주의의 올바른 바탕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DEI를 통시적 관점에서 파악하여 능력을 키울 여건이 평등하게 제공되었나를 보면서 능력주의를 적용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PwC처럼 DEI 정책 내에서 수혜 대상을 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과도적으로 한때 역차별이 일어나고 반대로 과도한 특혜를 받는 계층이나 집단, 계급이 있을 수는 있다. 과거에 받은 차별이 현재에 해소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현상으로, 어느 정도 강압적 조정 없이 새로운 노멀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최소극대화(maximin) 원칙’은 인간 사회를 문명사회로 지탱하는 근간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 공시적 비효율을 감내하는 그런 통시적 조정 과정을 거쳐 사회는 전체의 역량과 생산성을 키운다. 정의는 장기적으로 생산적이다. 안치용 필자 주요 이력 △ESG연구소 소장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전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 2024-02-23 06:00:00
- [안치용의 비욘드 ESG] 원자력 발전 확대 …CF100이 RE100의 대안인가? [안치용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경기 남부에 조성하는 반도체 클러스터에 원자력으로 전력을 공급하는 방안을 두고 논란이 거세다. 지난 15일 반도체 민생토론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탈원전을 하게 되면 반도체뿐만 아니라 첨단산업이라는 건 포기해야 한다”고 말해 사실상 원자력 발전 확대를 선언했다. 이날 윤 대통령의 발언 이후 우리나라의 전력공급 방안을 두고 격론이 벌어지고 있는데, 요약하면 ‘RE100 대 CF100’의 대결이다. 사용전력의 100%를 태양광 풍력 등과 같은 재생에너지로 조달하자는 ‘RE100’ 관점에서는 윤 정부의 원전 확대 방침이 세계적 재생에너지 전환 추세에 역행한다고 비판한다. 재생에너지 가격이 높아 현실적으로 RE100을 고수하는 건 산업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결과적으로 국가경쟁력을 갉아먹게 된다는 반론이 있고, 윤 정부는 이 주장에 힘을 싣는다. ▲“니가 가라 하와이”=21세기 인류의 최대 현안인 기후위기의 원인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국민국가 체제의 한계에서 비롯했다고 볼 수 있다. 국민국가들이 ‘국부’의 관점에서 자국 발전(發展) 우선 정책을 펴다 보니 지구에 생태계가 감당 못할 온실가스가 빠른 속도로 쌓이며 현재의 기후변화를 불렀다. 문제는 기본적으로는 여전히 중상주의 체질을 벗어나지 못한 세계 각국의 이해를 조정해 실제로 글로벌한 차원에서 온실가스를 감축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데에 있다. 파리기후협약이 생각만큼 순항하지 못하는 배경이다. 각국은 지구를 구해야 한다는 대의에 공감하면서도 각론에서는 자국의 산업 키우고 국부를 증진하는 데에 양보할 마음이 없다. ‘아메리카 퍼스트’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파리협약에서 탈퇴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한마디로 영화 <친구>의 대사처럼 “니가 가라 하와이”인 셈이다. 어느 나라도 국부를 희생하고 국민생활 수준을 떨어뜨리는 방향의 기후정책을 수용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국민국가의 정치체제가 정치지도자의 그런 선택을 용납하지 않는다. 반도체 클러스터에 어떤 전기를 공급할 것이냐는 논란의 본질이다. 말하자면 이 문제에 관한 한 윤석열은 트럼프의 길을 가고 있다. 이 논의가 간단하지 않은 게 한국 정부가 주장한, 재생에너지보다 원자력 사용을 늘려서 탄소중립을 달성하자는 CF100(carbon free 100%)이 국민국가 차원에서 더 좋은 해법이냐는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다. 당연히 단기적으로는 유리하고 현실적이다. 현재로선 RE100이 기업에 더 큰 비용을 물게 한다. RE100을 달성하는 방법으론 크게 신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REC) 구매, PPA(Power Purchase Agreement), 녹색프리미엄요금제가 있는데 모두 RE100을 신경 쓰지 않고 전기를 사용하는 것과 비교해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예컨대 가장 많이 활용되는 REC 구매는 같은 전기를 대략 150% 가격에 구매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REC 구매 가격은 월평균 현물가격으로 2021년 12월에 1REC당 3만8779원에서 지난해 12월 7만5624원으로 오르는 등 상승추세이다. RE100이 확산하면 더 오를 수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17일 설명자료를 내어 반도체 클러스터에 원전 전력을 공급하겠다는 윤 대통령의 언급을 보충했다. 설명자료에서 “일부 글로벌 기업들은 제품 생산 과정에서 재생에너지 사용 비율을 늘릴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RE100 달성을 선언한 기업들은 녹색프리미엄, REC 구매 등의 방법으로 재생에너지 사용 비중을 늘려가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상당한 추가 비용이 발생해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지난해 9월 유엔 총회에서 윤 대통령은 국가별로 다른 에너지 공급 여건을 고려하고 RE100 이행에 따른 기업들의 과도한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원전을 포함한 모든 무탄소에너지를 적극 활용하자는 무탄소에너지(CFE) 이니셔티브를 제안한 바 있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이 말한 CFE는 원전 전력이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현실을 따르겠다는 발상이다. 전력 수요 폭증을 감안할 때 신규 전력원을 발굴해야 하는데, 윤 정부가 이처럼 원전에서 조달하는 쪽으로 방향을 설정하면서 원전 발전량 비중 목표가 올라갈 전망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0년 12월에 나온 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2030년 원전 발전 비중 목표가 25%였지만 지난해 1월 현 정부는 신규 원전 건설 없이 32.4%로 목표를 상향했다. 현 정부가 발표할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는 신규 원전 건설을 포함하여 2030년 원전 발전 비중 목표가 더 올라갈 전망이다. 실제로 국내 발전량 중 원전 비중은 다시 올라가 대략 30%에 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외에도 중국 영국 프랑스 등이 새로이 원전 건설 계획을 발표하는 등 세계적으로도 원전 대체가 생각만큼 순조롭지 못한 상황이다. 온실가스 저감이 핵심 현안으로 떠오르며 재생에너지의 간헐성 문제를 해결하면서 탄소를 적게 배출하는 원전이 다시 주목받고 있고, 빌 게이츠가 온실가스 문제 해법으로 원전을 지지한다는 이야기 또한 회자되고 있다. 한국으로서는 원전 생태계 유지가 원전 수출국으로서 지위를 지키고 원자력 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데 긍정적이다. 원전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이처럼 현실론에 막혀 원전 발전은 다시 살아나고 있다. ▲24/7 CFE=그러나 한국 정부의 CF100이 국가경쟁력을 유지하고 키우는 데 좋은 착수인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세계경제포럼(WEF)에 참석 중인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지난 18일 원전 논쟁에 뛰어들어 “반도체라인 증설을 하면서 원전 충당하겠다고 이야기하는 건 세계적 트렌드나 산업에 대해 모르는 무식한 이야기”라며 “앞으로 몇 년 안에 RE100을 달성하지 못하면 반도체를 포함한 우리 수출 품목들의 수출길이 막힐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BMW, 볼보 등 유럽 완성차 업체들이 국내 부품 수출 기업에 2025년까지 ‘재생에너지 100%를 사용해 제품을 생산하는 RE100 목표 이행계획서’ 제출을 요구해 국내 기업들을 당혹게 하는 등 관련 사례가 늘어나고 있기에 “무식한 이야기”란 과격한 표현을 쓴 김 지사의 주장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국제적으론 RE100을 요구하지, CF100을 요구하지 않는다. CF100의 선두주자는 구글이다. 2017년에 처음으로 연간 에너지 소비량을 100% 재생에너지로 충당한 구글은 2018년 ‘연중무휴 무탄소 에너지(24/7 Carbon-Free Energy)’ 사용을 세계 최초로 선언했다. 구글의 ‘24/7 CFE’ 100% 달성 목표 연도는 2030년. 2021년엔 사용한 에너지의 67%를 무탄소로 조달했다. 2017년에 RE100을 달성한 구글이 아직 CF100에 이르지 못한 이유는 사용 에너지 전체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하지 못하고 일부를 REC 구매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구글은 2017년 RE100을 처음 달성한 이후 2022년까지 6년 연속 RE100을 달성했다. 사실 내용상으론 CF100을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다. ‘24/7 CFE’는 시간·위치 기반 청정에너지 조달에 중점을 둔다. 필요한 전력을 언제 어디서나 무탄소로 충당해야 하므로 ‘시간 일치’와 ‘현지 조달’이 필수적이다. ‘간헐성’으로 표현되는 재생에너지 공급의 불안정성을 극복하기 위해 전력소요시설과 가까운 곳에서 청정에너지를 끌어오거나 시설 자체 혹은 인근에 배터리를 갖춘 태양광·풍력발전소나 하이브리드 발전소를 건설할 필요가 있다. 핵심은 간헐성 극복을 위한 기술들이 태양광·풍력발전을 더 잘 적용하기 위한 보조수단이고, 여전히 ‘24/7 CFE’의 중심은 재생에너지라는 사실이다. 구글의 사례에서 보았듯 ‘24/7 CFE’는 RE100을 우선한다. 재생에너지 사용 100% 이후에 추가적으로 전력의 완전한 탈탄소화를 위해 CFE를 다음 단계로 선택하기에 한국 정부의 CF100과는 결이 아주 다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1년 12월 미국의 모든 연방 기관에 ‘24/7 CFE’ 조건의 전력 구매를 요구하는 행정명령 14057호에 서명한 것에서도 이 기조가 유지된다. 2030년까지 100%의 CFE를 달성하되, 이 중 50% 이상을 연중무휴 대응할 수 있는 현지의 재생에너지로 제공한다는 게 목표다. 따라서 탄소중립만을 내세우며 기후대응 정책인 RE100을 건너뛰고 CF100으로 직행하는 것은 자칫 위험한 정책이 될 수 있다. 산업부는 “무탄소에너지 논의를 시작한 것은 RE100을 부정하거나 CF100만을 추진하겠다는 취지가 아니라 RE100을 보완 병행 추진하면서 국내 기업의 RE100 이행에 따른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현실적 방안을 모색해보고 국제적 확산을 시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분명한 것은 구글 등이 말하는 ‘24/7 CFE’와 CF100은 완전히 다른 정책이다. 국제재생에너지기구(IRENA)에 따르면 2022년 전 세계 재생에너지 용량은 3372GW로 전년(3077GW) 대비 8.9% 증가했다. 한국의 재생에너지 발전량은 거의 늘지 않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2003년 처음으로 비중이 1%대에 진입했고 2018년 8.44%를 최고점으로 2020년 6.41%까지 떨어졌다가 2021년 7.15%로 회복됐다. 재생에너지 정책에서 한국의 특이점은 신재생에너지란 용어를 쓴다는 것으로 연료전지·IGCC(석탄가스화 복합화력발전)를 신에너지로 분류해 재생에너지와 묶어서 통계를 내고 있다. 통계의 착시가 일어날 수 있다. 김 지사는 “이번 정부 들어서 재생에너지에 대한 수요를 억누르는 방향으로 가는 정책을 많이 쓰고 있다”며 “수요가 늘어나서 공급이 많이 늘어야 가격이 저렴해진다”고 진단했다. “재생에너지 수요를 늘리면 공급이 늘고 가격도 덩달아 하락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공급이 늘고 가격이 하락하는 시기까지 기다릴 체력이 충분해야 하며 동시에 정부 입장에서는 그 기간에 정책적으로 응급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무엇보다 RE100이든 CF100이든 재생에너지 확대라는 대세를 거스를 순 없다. 참고로 게이츠가 지지하고 후원하는 원전은 우리나라에서 가동되는 것과 같은 대형 원전이 아니라 출력이 300MW보다 작은 소형모듈원자로(SMR, small modular reactor)이다. 안치용 필자 주요 이력 △ESG연구소 소장 겸 (사)ESG코리아 철학대표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전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 2024-01-24 09:25:36
- [안치용의 비욘드 ESG] 지구 지킴이의 작은 실천 …다회용기 다회사용 [안치용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정부의 일회용품 사용 규제 철회로 환경단체와 친환경제품 생산업체들이 반발하는 등 혼선이 이어지고 있다. 11월 29일 국회 앞에서는 종이빨대를 바닥에 버리는 퍼포먼스가 열렸다.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와 종이빨대생존대책협의회, 전국카페사장협동조합 등이 환경부의 일회용품 사용 규제 철회에 따른 친환경제품 생산 피해 대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벌인 행사였다. 앞서 11월 7일 환경부는 계도 기간 1년을 두고 시행키로 한 일회용품 사용 규제를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한다는 이유로 사실상 철회했다. 이날 임상준 환경부 차관은 브리핑에서 “원가 상승과 고물가, 고금리, 어려운 경제 상황에 고통을 겪는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에게 규제로 또 하나 짐을 지우는 것은 정부의 도리가 아니다”고 말했다. 환경부는 규제 대신 자발적 참여와 시민들의 인식 개선을 위한 각종 지원과 다양한 캠페인 등을 벌여 일회용품을 줄이는 생활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유도할 계획이다. 환경부의 지원 방안 중에는 다회용기 지원 사업이 들어 있고 관련 예상 68억원을 마련하기 위해 국회와 협의 중이다. ▲온라인 음식서비스 시장의 폭발적 성장 사회 전반의 디지털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가운데 코로나19로 비대면 소비가 급증하고 음식 배달앱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음식의 온라인 구매가 일상적인 풍경으로 자리를 잡았다. 음식서비스 온라인쇼핑 거래액은 통계청이 공식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2017년 2조7326억원에서 2018년 5조2628억원, 2019년 9조7353억원, 2020년 17조3370억원, 2021년 26조1597억원, 2022년 26조5940억원으로 최근 성장세가 둔화하였지만 짧은 기간에 시장이 말 그대로 폭발했다. 5년 사이에 약 10배로 시장 규모가 커졌다. 이러한 폭발적 성장은 배달앱 빅3인 배달의민족, 요기요, 쿠팡이츠가 주도했다. 배달의민족이 시장점유율 과반을 기록하고 있고 빅3가 사실상 시장 전체를 과점한 상태다. 온라인 음식배달 시장의 성장은 언론에 오르내리기로는 배달 용기 쓰레기가 매일 830만개 발생한다는 새로운 사회문제를 낳았다. 배달앱이 보편화하기 전에는 없던 새로운 종류의 쓰레기다. 물론 기존 방문 식당에서도 일부 일회용 용기를 사용하기는 하였지만 전면적인 온라인 음식배달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 숫자는 일회용 배달에 들어가는 용기를 3개로 계산하였기에 실제 배출되는 배달 용기 쓰레기는 상식적으로 하루 1000만개를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간으로는 36억개 넘는 배달 용기 쓰레기가 코로나19 이후 사회 곳곳에서 배출되고 있는 셈이다. 녹색연합이 2021년 4월 시행한 ’배달쓰레기에 관한 시민 인식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42%가 ’마음이 불편하거나 걱정이 된다‘, 34%가 ’죄책감이 든다‘고 답했다. 배달쓰레기 처리대책 중 가장 시급한 것으로는 40%가 다회용기 사용 확대, 33%가 일회용기 감소를 위한 규제를 들었다. 일회용기 규제가 미뤄지고 있어서 현실적인 배달쓰레기 저감 대책은 다회용기 사용 확대밖에는 없다. 그러나 갈 길이 너무 멀다. 아주경제 2023년 3월 23일자 《배달앱 '다회용기' 써보니···서비스 업체 적고 이용 불가 메뉴도》 기사를 보면 이용자가 다회용기에 담은 음식을 배달시켜 먹는 게 꽤 어렵고 불편한 일임을 알 수 있다. 녹색연합은 2022년 11월 17일 보도자료에서 배달음식 다회용기 서비스가 하루 60건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일회용품이 음식배달에서만 발생하는 건 아니다. 최근 환경부가 규제를 완화한 고객 방문 매장에서도 일회용품은 넘쳐난다. 골목마다 볼 수 있는 커피전문점에서 매장 내 취식보다는 테이크아웃 비율이 더 높아 일회용품 쓰레기가 줄어들 수 없는 상황이다. 결국 매장 내 일회용품 사용을 최소화하면서 배달이나 테이크아웃에서 다회용기를 사용하게 하는 것만이 이 문제에서는 사실상 유일한 해답이다. ▲독일의 판트(Pfand) 제도 ’판트 제도‘는 독일의 공병 보증금 제도다. 판트는 보증금 혹은 예치금을 뜻하는 독일어다. 유리병, 페트병, 캔과 같은 빈 병을 무인회수기에 반납하면 개수에 따라 돈을 환급해 준다. 독일은 2022년 1월 1일 포장재법을 개정하여 같은 해 7월 3일 전면 시행에 들어가 모든 음료 포장재가 판트 적용 대상이 됐다. 우유와 유제품 포장에 대해서는 유예기간을 더 두어서 2024년 판트 제도를 적용할 예정이다. 판트제도가 시행되면서 소비자는 생수나 탄산수 같은 음료를 사면서 제품 가격 외에 최소 제품당 0.25유로의 보증금(판트)을 같이 결제한다. 상품 가격과 판트가 계산서에 따로 표시된다. 소비자가 나중에 판트기계에 빈병 혹은 용기를 반납하면 미리 낸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 독일 포장재법 주요 개정 사항엔 판트 제도 외에 케이터링, 배달서비스, 카페와 레스토랑 등이 테이크아웃 시 재사용 가능한 포장재 사용을 의무화한 것이 포함된다. 즉 우리나라처럼 일회용기에 담아서 음식을 배달하거나 가져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2023년 1월 1일 시행에 들어간 개정안은 노동자 5명 이하 소기업과 사업면적 80㎡ 이하 영업장에 대해 예외로 두었지만 이러한 소규모 상점에서도 소비자가 다회용기에 포장해 달라고 요청하면 응해야 한다. 판트 제도, 테이크아웃이나 배달 시 다회용기 의무화 등 선도적인 친환경 정책으로 독일은 재활용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에 이름을 올렸다. 플라스틱 재활용률이 약 46%에 달하고 병 하나당 재사용 횟수가 40회 이상이며 재사용률은 95%다. ▲라라워시 등 한국 다회용기 사업 한국은 최근 환경부 조치에서 보듯 세계적 흐름에 역행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 방침과 무관하게 다회용기 사업은 국내에서도 조금씩 싹을 틔우고 있다. 경기도지역자활센터에서 운영하는 라라워시를 비롯하여 7개 업체가 사업을 하고 있다. 공공 영역에 속한 라라워시와 사회적 기업인 레빗 외에 나머지 5곳은 영리기업으로 신진마스타와 프라임 두 곳의 연간 매출이 100억원을 훌쩍 넘는다. 다회용기 사업은 다회용기 공급과 수거·세척, 세척 후 재공급 구조로 이루어진다. 내용상 세척이 사업의 핵심을 이룬다.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등 교육기관에서 단체급식 시설로 시장이 커지고 있다. 최근 삼성증권이 발표한 ‘기업의 다회용기 세척서비스 지불의사가격(WTP, Willingness To Pay)’ 분석보고서에 따르면 식기 1개당 WTP는 2018년 약 70원 수준에서 2020년 약 200원까지 올랐다. 잠재 고객의 WTP는 상승하고, 서비스 원가는 떨어지는 추세여서 다회용기 세척서비스 시장은 지속해서 확대될 것으로 삼성증권은 전망했다. 다회용기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이는 데 그치지 않고 온실가스를 감축에 기여한다. 말 그대로 다회 사용했을 때 환경적으로 다회용기가 우위에 선다. 아주대 ESG센터의 전과정평가(LCA) 결과 일회용컵의 탄소발자국은 100gCO₂e로 다회용컵을 1회만 사용했을 때 248gCO₂e에 비해 탄소발자국이 낮았다. 텀블러와 비교하면 마찬가지로 일회용컵이 더 환경적으로 우수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회용컵을 3회 이상만 사용하면 다회용컵이 일회용컵보다 환경적으로 우수했고 사용 횟수가 많아질수록 당연히 환경성의 격차가 더 벌어졌다. 10회 사용 시 다회용컵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일회용컵의 40%였다. 국내에서 일회용컵이 연간 53억개 사용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다회용기 보급 확대는 불가피해 보인다. 라라워시는 2018년 11월 성남점을 시작으로 현재 경기도 내에 17개 사업단을 운영하고 있다. 다회용기 보급과 자활을 결합한 일종의 공공사업이어서 도비 지원을 받는다. 현재 일자리 219개를 창출했고, 올해 3분기까지 매출을 약 13억원 올렸다. 최선린 경기광역자활센터 부장은 “경기도 내 모든 기초지자체로 사업단을 확대하여 일자리 창출과 온실가스 감축, 플라스틱 쓰레기 저감을 동시에 꾀하는 바람직한 공공사업 모델로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다회용기 확산을 위해서는 공공 영역의 우선 사용을 비롯해 제도와 관행 개선이 동시에 진행돼야 한다. 더불어 다회용기 자체를 재활용플라스틱으로 만들 수 있도록 법률 개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는 음식물을 담는 용기여서 재활용플라스틱 사용을 기계적으로 금지한 상태다. 플라스틱을 줄이겠다며 새로운 플라스틱으로 다회용기를 만드는 건 지양하면 좋겠다. 안치용 필자 주요 이력 △ESG연구소 소장 겸 (사)ESG코리아 철학대표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전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 2023-11-30 15:55:48
- [안치용의 비욘드 ESG] 아이 모습을 한 AI로봇이 '인간'에게 희망인 세상 [안치용 교수] 영화 <크리에이터>의 ‘알피’가 ‘인간’에게 희망인 세상 10월 3일 개봉한 <크리에이터>는 인류의 존망이 달린 AI와 전쟁을 그린 영화다. 포스터나 홍보물만 봐서는 이러한 소재를 다룬 다른 영화와 외관상 설정이 흡사해 스토리가 익숙한 SF영화 같다. AI가 LA에 핵폭탄을 터뜨린 후 인류와 AI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고, 인간이 승리하는 쪽으로 종전의 기대가 높아가는 시점이 영화의 무대다. 주인공인 전 특수부대 요원 조슈아(존 데이비드 워싱턴)는 흔쾌하지 않았지만 실종된 아내 마야(젬마 찬)의 행방을 찾았다는 소식에 특별작전에 합류한다. 이 작전의 목표는 AI 진영에서 개발한 것으로 알려진 인류를 위협할 강력한 무기와 이 무기를 만든 ‘크리에이터’를 찾아서 무기와 창조자를 모두 없애는 것이다. 이 무기와 창조자를 제거하면 AI 진영이 패배하고, 제거에 실패하면 AI 진영이 승리한다. 그 무기는 아이 모습을 한 AI 로봇 ‘알피’였다. 알피의 ‘크리에이터’인 조슈아의 아내 마야는 둘 사이에 생긴 복중 태아를 복제하여 알피를 만들었고 알피는 인간처럼 성장한다. 알피는 마야를 엄마로 생각하고 자신을 인간으로 인식한다. 사실 극중에서 인간과 다른 점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크리에이터’의 ‘human’과 ‘person’=마야가 알피의 엄마라면 조슈아는 논리상 아빠가 된다. AI를 “프로그래밍이지 인간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조슈아에게 이런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 초반부와 달리 시간이 흐르며 조슈아는 알피가 인간임을 혹은 인간과 동일한 존재임을 받아들인다. 알피에게도 정체성 혼란이 있다. 알피가 조슈아와 대화하며 자신과 조슈아가 ‘천국’에 못 가는 이유로 조슈아는 착하지 못해서,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서라고 말한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알피가 인간을 ‘person’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이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human’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다. 시나리오에서 왜 ‘human’ 대신 ‘person’을 채택했을까. 아마 동물권 논의에 주요한 기여를 한 철학자 토머스 화이트의 ‘비인간 인격체(非人間 人格體·non-human person)’란 용어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이 용어에는 ‘person’과 ‘human’이 모두 들어간다. ‘human’을 법률 용어로 풀면 ‘자연인’ 정도로 번역되는 ‘natural person’이다. 회사와 같은 법인(法人)은 ‘juridical person’ 또는 ‘legal person’이다. AI 로봇 알피가 되고자 하는 존재는 ‘human’이 아니라 ‘person’이다. 어느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모습이라고 상상하면 알피가 실제로는 ‘person’이 아닌 ‘human’을 썼을 것 같다. 영화에서는 공들여 ‘person’이란 단어를 등장시켰다. 영화 ‘크리에이터’는 AI 묵시록을 그리지 않았다. AI와 인간(human)이 동등한 인격체(person)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을 소재로 삼았다. ▲새로운 인격체의 기준=동물권 담론은 생태주의와 맞물려 새롭게 주목받는 윤리적 영역이자 일종의 존재론이다. 동물권을 옹호하며 화이트가 제시한 ‘비인간 인격체’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Alive(살아 있음) Aware(자아 인식) Feels pleasure and pain(기쁨과 고통을 느낌) Has emotions(감정을 가지고 있음) Possesses self-consciousness, personality(자의식과 개성을 가지고 있음) Exhibits self-controlled behaviour(통제된 행동을 할 수 있음) Able to recognise and treat other persons appropriately(타인을 적절히 인식하고 대우할 수 있음) Exhibits higher order intellectual abilities(고등의 지적 능력을 행사할 수 있음) 비인간 인격체는 학문적으로는 물론 동물권 운동에서 (일부) 동물의 대안적 명칭으로 활용된다. 미국 동물보호단체 ‘비인간 인격체 권리 프로젝트(NhRP·Nonhuman Rights Project)’에서 이 용어를 아예 단체명에 넣었다. 유인원, 코끼리, 돌고래 등이 비인간 인격체로 자주 거론되는 동물에 해당한다. 동물권 옹호 단체들은 동물 전시·공연 금지와 동물실험 철폐를 주장한다. 2021년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동물을 ‘법인’으로 인정했다. 미국 법원은 콜롬비아 마그달레나강 유역에 거주하는 하마가 소송의 원고로서 요청한 사안을 받아들였다. 동물의 소송 당사자성이 인정된 특별한 사례다. 이에 앞서 2013년 5월 인도 정부는 돌고래 수족관을 금지하며 돌고래를 권리를 가진 비인간 인격체로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동물의 권리가 헌법에 명시됐다. 2002년 독일 헌법 20a 조항이 “국가는 미래 세대를 위한 책임으로서 헌법 질서 범위 내에서 입법을 통하여 그리고 법률과 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행정과 사법을 통하여 자연적 생활 기반과 동물(Lebensgrundlagen und die Tiere)을 보호한다”로 바뀌었다. ‘Lebensgrundlagen’ 다음에 ‘동물(und die Tiere)’을 삽입한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에 분명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비판 또한 존재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개념은 인간 중심주의에 입각하고 있다. 인간이 판단한 인격을 중심으로 고등동물을 정의했으며, 더불어 고등동물만이 보호 대상이 아니라는 반론이 가능하다. 근본적으로 회사와 같은 다른 법인과 달리 동물은 법인으로 인정되더라도 수동적 존재에 머물며 결코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한계를 보인다. 인간이 파악한 동물의 권리를 인간이 대리할 따름이다. 화이트의 비인간 인격체 논의를 보며 동물보호단체에서 말하는 고등동물보다 오히려 영화 <크리에이터>의 AI로봇이 그 조건에 더 부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인 알피뿐 아니라 등장한 거의 모든 AI가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심지어 AI 승려까지 나온다. AI가 영혼과 영성까지 추구하는 풍경이 흥미롭게 그려졌다. 다만 동물과 달리 <크리에이터> 속 AI는 현실이 아니다. 하지만 언제일지 모르지만 다가올 미래라고 할 때, 더구나 동물과 달리 AI는 권리를 ‘주체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할 때 동물권 담론에 도입된 비인간 인격체 개념이 AI로봇에 적용되는 건 불가피해 보인다.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화이트의 조건 중 ‘Alive’가 무엇보다 쟁점이 될 것 같다. 마찬가지로 인간 중심주의 발상이지만 <크리에이터>처럼 AI가 인간(person)으로 인정받으려면 ‘불쾌한 골짜기’의 문턱을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불쾌한 골짜기’는 인간이 로봇 등 인간이 아닌 존재를 볼 때 그것과 인간 사이의 유사성이 높을수록 더 많은 호감을 느끼게 되지만 유사성이 어느 수준에 다다르면 오히려 호감도가 하락한다는, 즉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는 이론이다. 1970년 일본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森政弘)가 소개한 개념이다. 여기서 ‘불쾌(Uncanny)’는 독일 정신과 의사 에른스트 옌치가 1906년에 제시한 ‘Das Unheimliche’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불쾌’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가 정말로 살아 있는 게 맞는지 아니면 살아 있지 않아 보이는 존재가 사실은 살아 있는 것은 아닌지’를 의심하는 데에서 비롯한 감정이다. 가장 비근한 예로 좀비를 떠올리면 되겠다. ‘골짜기(Valley)’는 호감도와 닮은 정도를 변수로 한 그래프 모양 때문에 생겼다. 모리의 설명에 따르면 이 그래프상 곡선은 크게 3개 국면으로 구성된다. 인간은 로봇이 인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을수록 호감을 느낀다. 하지만 비슷한 정도가 특정 수준으로 치솟으면 인간의 감정에 거부감이 생기면서 호감도가 하락해 곡선 또한 상승에서 하강으로 돌아선다. ‘Uncanny’ 혹은 ‘Das Unheimliche’가 개입하기 시작한다. 하강 곡선은 ‘비슷한 정도’가 훨씬 더 강해진 또 다른 특정 수준에 이르면 하강을 멈추고 다시 상승한다. 이렇게 급하강한 후 급상승한 호감도 구간은 그래프상 곡선에서 깊은 V자 모양을 하게 돼 ‘골짜기’를 형성한다. ‘불쾌’와 ‘골짜기’를 결합한 ‘불쾌한 골짜기’의 성립이다. 2019년 영국 케임브리지대는 국제학술지 <신경과학>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 독일 아헨공대 휴먼테크놀로지센터와 공동연구에서 “뇌 전두엽에 위치한 시각피질의 활성화 정도를 통해 ‘불쾌한 골짜기’를 규명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요약하면 실험 참가자 21명을 대상으로 실제 사람, 마네킹, 안드로이드(사람과 구분하기 어려운 인조인간),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 산업용 기계 로봇 등 이미지를 보여주며 질문을 던졌고 그 반응을 자기공명영상(MRI)으로 촬영해 뇌의 어떤 영역이 활성화하는지 확인한 결과 실험 참가자에게서 공통으로 전형적인 ‘불쾌한 골짜기’ 현상이 나타났다. <크리에이터>는 영화 <서기 2019 블레이드 러너>(1982년)와 노벨상 수상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클라라와 태양>(2021년) 등에 등장한 ‘불쾌한 골짜기’ 문제를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해결한다. 극중 대사 “person”과 같은 맥락에서 알피를 포함해 <크리에이터>의 AI는 모두 머리 아래쪽에 구멍이 뚫려 있다. 사람인지 로봇인지 의심을 일으켜 불쾌를 자아낼 수 있는 ‘불쾌한 골짜기’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을 사전에 막았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건 다르게 만들어 ‘person’과 ‘human’에 대한 혼동을 차단했다. 그러나 턱이 시작하는 지점에 구멍이 휑하게 뚫린 AI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고 더 평화를 사랑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기후위기가 본격화하면 인간으로서는 동물 보호보다 동물자원 보호가 더 사활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그즈음 AI와 관련하여 비인간 인격체 논의가 본격화하지 싶다. 묵시록과 연결돼 기후위기와 쌍으로 내우외환이 될지, 영화 <크리에이터>처럼 공존 가능성이 열릴지 두고 볼 일이지만, 준비는 지금부터 해도 빠르지 않다. 성공적으로 기후위기를 극복한 22세기 지구의 주인이 인간(human)이 아닌 건 마음이 아프다. 하긴, 꼭 그렇게 생각할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 안치용 필자 주요 이력 △ESG연구소 소장 겸 (사)ESG코리아 철학대표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전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 2023-10-16 06:00:00
- [안치용의 비욘드 ESG] 화석연료와 더 독하게 '헤어질 결심' [안치용 교수] 독일 에너지업계에서 쓰는 용어 중에 'Dunkelflauten'이라는 게 있다. ‘Dunkel’은 어둡다는 뜻으로 이 뜻에서 파생하여 흑맥주를 지칭하기도 한다. ‘Flauten’은 ‘Flaute’의 복수로 무풍 상태를 의미한다. /둥켈플라우텐(Dunkelflauten)'은 태양이나 바람이 충분하지 못하여 태양광이나 풍력발전이 미미한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필요 에너지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쓰겠다는 국제적 흐름인 RE100과 관련하여 둥켈플라우텐이란 용어가 자주 사용된다. ▲'Dunkelflauten'=예컨대 다음 그래프에서는 전력 수요량에 비해 풍력 에너지 공급량이 넘치거나 모자라는 모습이 보이는데, 그래프상 모자라는 부분이 둥켈플라우텐에 해당한다. 공장이나 설비에서 필요로 하는 전력이 대체로 일정한 반면 태양광이나 풍력 발전을 통해 생산되는 전기는 들쑥날쑥하다. 유럽 어느 지역 공장의 실제 풍력전기 수급 2주치 상황을 기록한 그래프에서 첫째 주 말고 둘째 주가 둥켈플라우텐에 해당한다. 이 공장은 100% 재생에너지 사용을 약속한, 즉 RE100을 약속한 곳이지만, 재생에너지 공급이 안 되는 둥켈플라우텐엔 화석연료로 만든 전기를 쓸 수밖에 없다. 화석연료로 만든 전기를 이용함으로써 재생에너지 100% 사용 약속을 저버린 이 공장이 RE100을 달성할 기회는 영영 사라진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공장의 해태가 아니라 풍력발전소가 제때 전기를 공급하지 못해서 빚어진 사태인 만큼 화석연료를 쓴 만큼 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REC·Renewable Energy Certificate)를 구매하면 RE100에 머문 것으로 인정된다. 실제로 RE100 기업 가운데 소요 에너지 전량을 재생에너지로 쓰는 곳은 드물다. 대부분 화석연료 기반 에너지를 부분적으로 사용하면서 화석연료 사용량만큼을 REC로 상쇄하여 RE100을 달성한다. REC 활용 비율이 국제적으로는 사용 에너지의 40%를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뱅크오브아메리카처럼 거의 REC 구매만으로 RE100 달성 기업에 이름을 올리는 곳도 있다. ▲RE100=RE100(Renewable Energy 100%)은 국제적으로 추진되는 민간 차원의 자발적 이니셔티브다. 국가 단위에서 수립되는 재생에너지 확산 정책과 별개로 기업 등 개별 조직 차원에서 진행한다. 비영리 단체인 ‘더 클라이밋 그룹’과 CDP(Carbon Disclose Project)의 파트너십으로 2014년 9월 유엔 기후정상회의에서 출범했다. 재생에너지(Renewable Energy)는 주지하듯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연속적인 공급(생산)이 가능하고 사용 과정에서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적은 에너지원을 뜻한다. RE100에서 용인하는 친환경 발전원으로는 바이오매스(바이오가스 포함), 지열, 태양광, 태양열, 수력, 풍력 에너지 등이 있으며 태양광과 풍력이 경쟁력 우위를 확보하면서 두 곳에 투자가 집중되고 있다. 동시에 역으로 태양광과 풍력을 중심으로 투자가 확대하고 발전원가가 하락하며 태양광과 풍력발전의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있다. 양의 피드백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의 ‘2021 세계 에너지 투자 현황’에 따르면 2020년 재생에너지 발전 투자 금액은 전년 대비 6.9% 늘어난 3588억 달러로, 세계 전력부문 투자의 46.1%를 기록했다. 2020년 신규 풍력설비는 2019년의 두 배인 114GW였으며, 같은 해 신규 태양광설비 또한 전년보다 25% 늘어난 135GW였다. 에너지 연구기관인 BNEF는 2040년까지 전 세계 신규 발전설비 투자액(10조2000억 달러)의 72%인 7조4000억 달러가 재생에너지에 몰릴 것으로 예측했다. 전 세계에서 RE100에 참여한 기업은 400곳을 넘어섰다. RE100 2021 연례 보고에 따르면 2021년 연간 보고에 참여한 315개 RE100 회원사는 2020년 전력 소비량(340TWh)의 평균 45%를 재생에너지로 조달했다. 앞서 살펴본 둥켈플라우텐이 RE100 천명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재생에너지 조달비율을 사용 에너지의 절반 미만에 머물게 한다. ▲24/7 CFE=국제재생에너지기구(IRENA)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재생에너지 공급량은 3372GW로 전년(3077GW) 대비 8.9% 증가했다. IRENA는 21세기 말까지 지구표면 평균온도 상승 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로 막으려면 연간 재생에너지 공급량을 2030년까지 현재 수준의 3배로 확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전략은 타당한 것이지만 다른 보완책이 병행되어야 한다. 살펴본 대로 둥켈플라우텐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RE100은 완벽한 온실가스 저감 대책이 될 수 없다. 대중은 흔히 RE100을 선언한 기업이 연중무휴 24시간(24/7/365) 재생에너지를 쓴다고 착각하지만 RE100 2021 연례 보고에서 나타났듯 재생에너지 조달 비율이 45%에 그쳤다. 핵심 재생에너지인 풍력과 태양광 전력 공급에 변동성이 존재하기에, 둥켈플라우텐에 발생한 수급 불일치를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해소하는 것이 관건이다.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해법은 저장장치다. 인용한 그래프에서 재생에너지 공급량이 소요량을 상회하는 첫째 주에 잉여 전력을 저장했다가 다음 주 둥켈플라우텐에 사용하면 깔끔해 보인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재 저장장치의 한계는 몇 시간에 불과하다. 며칠이나 몇 주가 되어야 둥켈플라우텐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데 저장 기간이 턱없이 짧다. 시급히 기술혁신이 이루어져야 할 부문이고 이제 막 가능성을 타진하는 중이다. 이에 따라 100% 재생에너지에 이어 100% 무탄소 에너지 사용이 에너지 분야의 핵심적 관심사로 떠오르게 된다. 100% 무탄소 에너지 사용을 세계적 의제로 제안한 곳은 구글이다. 구글은 2018년 ‘24/7 CFE(Carbon-Free Energy·연중무휴 무탄소 에너지)’ 정책을 발표했다. 이에 앞서 2017년에 구글은 처음으로 자사 연간 에너지 소비량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했다. 구글이 RE100을 달성하자마자 24/7CFE란 의제를 제기한 까닭은 재생에너지 수급불일치에 따라 RE100 달성에도 불구하고 화석연료와 완벽하게 결별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7년 이후 매해 RE100을 달성하고 있지만, 2021년을 예로 들면 그해 사용한 에너지의 67%만 무탄소로 조달했다. 명목상 RE100 달성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3분의 1은 여전히 탄소를 배출하는 화석연료를 쓰고 있다는 뜻이다. 구글은 2030년 ‘24/7 CFE’ 달성을 목표로 둥켈플라우텐 문제 해결에 노력하고 있다. ‘24/7 CFE’는 재생에너지 공급 효율을 높이면서 저장장치의 성능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것과 결부된다. 100% 재생에너지 충당이 어려울 때 그만큼 REC 구입을 인정한 RE100보다 ‘24/7 CFE’는 훨씬 까다롭고 근본적인 개념이다. ‘24/7 CFE’와 RE100은 시간 기준이 다르다. 연간 기준인 RE100과 달리 ‘24/7 CFE’는 시간(hour) 단위로 재생에너지 공급 계획을 수립한다. 필요 전력을 상시적으로 무탄소로 공급하는 데 중요한 원칙은 ‘시간 일치’와 ‘현지 조달’이다. 무탄소전력 수급을 시간별로 계획해 구매한 재생에너지가 전력소비로 연결하도록 하고, 소비 지역에서 청정 전력을 구매해 전력 소비자가 자기 책임하에 온실가스 배출량을 ‘0’으로 만들 수 있다. 풍력과 태양광 전력을 주요하게 활용하되 지열이나 수력과 같은 대체 재생 에너지원을 함께 활용하여 둥켈플라우텐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에너지 저장 솔루션과 혼합 재생에너지원 개발이 중요해진다. 에너지를 소비하는 기업이 중심인 RE100과 달리 ‘24/7 CFE’가 에너지 구매자, 공급업체, 정부, 비정부기구, 학술기관 등 에너지 생태계 전반의 이해관계자를 포괄하는 이유가 이러한 배경에서 해명된다. 2021년 9월 미국 뉴욕시에서 주요 에너지 구매자, 공급업체, 솔루션 제공업체, 정부 등은 ‘모두를 위한 지속 가능한 에너지(SEforALL)’ 및 유엔에너지(UN-Energy)와 협력하여 ‘연중무휴 무탄소 에너지 협약(24/7 Carbon-Free Energy Compact)’을 출범했다. 여기서 핵심은 ‘24/7 CFE’에 동원된 많은 에너지 기술이 태양광과 풍력발전을 더 잘 이용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24/7 CFE’은 재생에너지에 초점을 맞춘 에너지 활용 지침이라는 사실이 잊혀서는 곤란하다. 베를린공과대학이 최근 시뮬레이션한 바에 따르면 아일랜드에서 2025년 ‘24/7 CFE’을 적용한 결과 RE100에 비해 이 나라 발전 분야에서 탄소를 약 15% 줄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대학 연구팀은 ‘24/7 CFE’의 90~95%를 달성하는 데 추가로 아주 많은 비용이 소요되지 않았으나 마지막 5%p에서 탄소를 없애는 데는 약 3배의 비용이 들었다고 분석했다. RE100에 이어 등장한 24/7 CFE’는 미래 에너지 분야의 확고한 흐름이 될 공산이 크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021년 12월 미국의 모든 연방 기관에 ‘24/7 CFE’ 조건의 전력 구매를 요구하는 행정명령 14057호에 서명했다. 2030년까지 100%의 CFE를 달성하고 이 중 50% 이상을 연중무휴 대응할 수 있는 현지의 재생에너지로 제공한다는 게 목표다. 한국 정부는 제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초안에서 2030년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 목표(21.6%)를 2021년 전 정부에서 확정한 2030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상 비중(30.2%)보다 크게 줄였다. <성장의 한계> 50주년을 기념하여 로마클럽에서 ‘인류 생존을 위한 가이드’ 성격으로 발간하여 최근 국내에 번역된 <모두를 위한 지구>는 총 에너지 비용과 관련하여 당분한 급격한 상승을 감수해야만 지속 가능한 미래를 담보하는, 이 책에서 ‘거대한 도약’이라 명명한 전환을 이룰 수 있다고 밝혔다. 고통과 비용을 얼마나 감수할 수 있느냐가 지구와 국가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뜻이다. 8월 22일은 20회 에너지의 날이었다. 우리나라 에너지 정책에 관해 고민이 더 깊어진 기념일이었다. 안치용 필자 주요 이력 △ESG연구소 소장 겸 (사)ESG코리아 철학대표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전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 2023-08-31 23:46:35
- [안치용의 비욘드 ESG] 우리가 맹그로브 숲을 보존해야 하는 이유 [안치용 교수] 7월 26일은 ‘국제 맹그로브 생태계 보존의 날’이다. 2015년 11월 6일 유네스코 총회에서 맹그로브 숲 보존을 위해 매년 7월 26일을 맹그로브 생태계 보존의 날로 지정하였다. 유엔에서 기념일을 지정한 까닭은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은 맹그로브가 지구온난화 속도를 늦추고 생태계를 보호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는 뜻이겠다. 맹그로브 숲 ◆새로이 각광받는 맹그로브=맹그로브 숲은 조간대에 있다. 조간대는 만조 때 해안선과 간조 때 해안선 사이의 땅으로 대체로 염습지다. 육지와 바다 각각에 인간의 피부에 해당한다. 맹그로브는 다른 대부분 나무와 달리 바닷물에서 생장할 수 있다. 맹그로브 뿌리는 음전하(-)를 띠고 있어서 염화 이온(Cl-)은 밀어내고 나트륨 이온(Na+)은 끌어당겨 뿌리 표면에 달라붙게 만든다. 이런 연유로 바닷물 속에 있어도 염분(NaCl)이 뿌리 안쪽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물만 빨아들일 수 있다. 이렇게 염분이 90% 이상 뿌리에서 걸러지고 나머지는 잎에서 소금 덩어리로 배출된다. 맹그로브가 바닷물에서 소금을 걸러내는 방식은 담수화 기술을 개발하는 데 아이디어를 제공했다고 한다. 조간대의 맹그로브 숲은 해안에서 완충림 역할을 한다. 즉 태풍, 해일, 쓰나미 등 자연재해를 최일선에서 막아 해안가 피해를 줄이고, 맹그로브의 수많은 뿌리가 토양을 고정하여 해변 침식을 억제한다. 어떤 맹그로브 종은 받침뿌리가 땅속으로 10m가량 파고들어 갈 정도로 탄탄하게 땅과 연결된다. 지구상에 100종 가까운 맹그로브가 존재하며 사람 키 정도에서 물 위로 40m나 자라는 것까지 다양하다. 모든 맹그로브는 물이 천천히 흘러 세립질 저질(底質)이 쌓일 수 있는 저산소 토양에서 서식한다. 산호와 마찬가지로 낮은 온도를 싫어해 열대 및 아열대 지역에서 자란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전 세계 맹그로브 숲의 면적은 1480만헥타르(㏊)다. 아시아가 555만㏊로 가장 넓고, 아프리카(324만㏊), 북아메리카 및 중앙아메리카(255만㏊), 남아메리카(212만㏊), 오세아니아(126만㏊) 순으로 분포한다. 기온이 낮은 유럽과 남극대륙에는 맹그로브 숲이 없다. 세계 맹그로브 숲의 40% 이상이 인도네시아(19%), 브라질(9%), 나이지리아(7%), 멕시코(6%)에 있다. 맹그로브 숲은 두꺼운 뿌리가 땅속 깊이 자리할 뿐 아니라 서로 빽빽하게 엉켜 있어 매우 안정적이다. 숲이 해안선의 변화에 조응해 아주 느린 속도지만 같이 이동하기에 지구온난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 시대에 천연 제방으로 거론된다. 복잡하게 뒤엉킨 맹그로브 숲의 뿌리 체계는 수중에서 질산염·인산염 등 많은 오염 물질을 걸러낸다. 강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수질을 개선하는 천연 필터인 셈이다. 많은 물고기와 생명종이 음식과 피난처를 찾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맹그로브 숲이 조성된 바닷가는 그렇지 않은 바닷가에 비해 어획량이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맹그로브의 뿌리와 물고기들 ◆사라진 맹그로브 숲, 가라앉는 도시=그러나 그동안 맹그로브 숲의 가치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맹그로브 숲을 보유한 인도네시아는 인구 대국이기도 하다. 경제 개발에 따라 무분별하게 맹그로브 숲이 파괴되거나 개간되었다. 2015년 기준으로 인도네시아 맹그로브 숲의 약 40%가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맹그로브 숲이 있던 자리에 주거지나 물새우와 밀크피시 양식장이 들어섰다. 방파제 및 천연 제방 역할을 하던 맹그로브 숲이 사라지고 해수면 상승과 대규모 지하수 개발이 겹치면서 인도네시아가 가라앉고 있다. 특히 수도인 자바섬 자카르타는 세계에서 가장 빨리 가라앉는 도시가 됐다. 고층 건물이 즐비한 인구 과밀인 자카르타는 매년 지반이 내려앉아 현재 도시의 40%가 해수면보다 낮은 상태로 전해진다. 이에 따라 2019년 8월 보르네오섬 동칼리만탄으로 수도를 옮기기로 하고 2년 반이 지난 지난해 1월 새 수도 명칭을 누산타라(Nusantara)로 발표했다. 서둘러 수도를 옮겨야 할 정도로 자카르타 상황이 심각하다. 강우나 홍수와 무관한 자카르타의 침수 모습은 종종 언론 보도로 전해진다. 당연히 맹그로브 숲이 사라진 이유만으로 자카르타가 가라앉고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지반 침하 이유에서 맹그로브 숲의 파괴를 빼놓을 수는 없다. 태국에서도 맹그로브 숲의 손실이 심각하다. 3100㎞에 이르는 긴 해안을 보유한 태국은 전체 해안 중 약 4분의 1인 700㎞가량이 심각한 침식으로 고통받고 있다. 태국 해안에 광범위하게 서식하던 맹그로브 숲이 줄어들면서 해안 침식이 더 가속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엔과 태국 정부가 조사한 결과 1961~2000년 사이 태국 해안의 맹그로브 숲 3분의 1이 증발했다. 맹그로브 숲이 동남아를 비롯해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계기는 2004년 12월 26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서부 해안의 40㎞ 지점에서 발생한 매그니튜드 9.1~9.3의 초대형 해저 지진. 이 지짐으로 30만명 이상이 숨지고 5만명이 실종됐으며 170만명가량 난민이 생겼다. 사망·실종 피해 대부분은 쓰나미 때문이었다. 재앙이 지나간 후 맹그로브 숲이 온전한 지역이 그렇지 않은 지역에 비해 피해가 눈에 띌 정도로 작은 것이 확인되며 맹그로브 복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된다. 맹그로브의 천연 제방 효과는 미국에서도 확인됐다. 2017년 허리케인 어마가 미국 플로리다를 강타했을 때 그곳의 맹그로브 숲이 50만명 이상을 보호했고 15억 달러의 직접적인 홍수 피해를 방지한 것으로 추산됐다. ◆지구온난화 시대의 총아=맹그로브 숲은 자신의 몸(바이오매스)과 뿌리내린 해양 진흙에 이산화탄소를 저장한다. 유엔 ‘적도 이니셔티브’의 2020년 연구에 따르면 맹그로브 숲 1㏊당 1500톤 이상의 탄소가 그 아래에 저장되어 있다. 육지 숲보다 8배 많은 양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맹그로브 숲과 연안습지는 열대림보다 10배 빠른 속도로 탄소를 격리한다. 더 빠르게 더 많은 탄소를 제거하는 맹그로브의 효과가 알려지면서 맹그로브 숲은 지구온난화 시대에 매우 중요한 탄소 저장고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유엔은 맹그로브가 격리한 탄소를 ‘블루카본’으로 정의했다. 2009년 유엔 보고서 <블루카본-건강한 해양의 탄소 포집 역할>에서 처음 언급된 블루카본은 어패류, 잘피, 염생식물 등 바닷가에 서식하는 생물과 맹그로브 숲, 염습지 등 해양 생태계가 흡수한 탄소를 뜻한다. 탄소 흡수 속도가 육상 생태계보다 최대 50배 이상 빠르고 탄소를 수천 년간 격리·저장할 수 있다. 지구의 탄소는 블루카본, 블랙카본, 그린카본 등 3가지로 구분하는데 블랙카본은 석탄·석유 등 화석연료나 나무 등이 불완전 연소하면서 발생하는 탄소를 가리키며, 그린카본은 열대우림과 침엽수림 등 육상 생태계가 흡수한 탄소다. 연안의 맹그로브 숲이 파괴되면 탄소 격리 능력이 사라지는 데 그치지 않고 맹그로브가 이미 격리해 몸에 저장한 탄소를 방출하는 이중의 피해를 유발한다. 이에 따라 맹그로브 숲 보존이 국제적 관심사로 급부상하게 된다. 맹그로브 파괴로 위기에 직면한 베트남,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10개국은 ‘미래를 위한 맹그로브’ 프로젝트를 통해 숲 복원에 나섰다. 특히 수도의 지반 침하 문제를 겪고 있는 인도네시아 국가개발계획청은 2045년까지 시행할 맹그로브 보존 장기 로드맵을 만들어 맹그로브 복원에 열의를 보이고 있다. 방글라데시(60%)와 인도(40%)에 걸친 세계적으로 큰 맹그로브 숲 중 하나인 순다르반 지역(140만㏊)의 맹그로브 숲 복원사업은 ‘아시아의 허파 재생’ 사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맹그로브 액션 프로젝트’는 전 세계 맹그로브 숲을 보존하고 복원하기 위해 설립된 미국의 비영리 단체다. 이 단체는 건강한 맹그로브 숲이 특히 가난한 해안 지역사회에 지속 가능한 삶을 제공하고 자연재해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보고 지역민이 복구 사업에 참여하는 ‘지역사회 기반 맹그로브 복원(CBEMR)’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기업도 맹글로브 숲 복원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애플은 콜롬비아 카리브해 연안에 맹그로브 군락지 조성 사업을 벌여 1만1000㏊를 복원 중이다. 이 사업으로 1만7000톤의 탄소를 흡수해 자사의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할 계획이다. 케냐 해양수산연구소는 가지만 일대에서 지역민과 협력하여 맹그로브 숲을 복원하고 여기서 생긴 탄소배출권 수익으로 지역사회 발전에 투자하고 있다. 한국 기업 중에서는 SK이노베이션과 SK어스온이 2018년부터 베트남 미얀마 해변 136SK어스온에 맹그로브 묘목 53만그루를 심었다. 포스코인터내셔널과 KB국민카드는 인도네시아 해안에 맹그로브 묘목을 식재했다. 일각에서는 한국에서 맹그로브 숲을 조성할 준비를 하고 있다. 맹그로브 서식 북방한계선이 계속 올라가면서 조만간 우리나라 남쪽에 맹그로브를 심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이다. 지구온난화의 역설적 풍경이다. 현재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에 26종, 일본에 6종의 맹그로브가 서식하고 있다. 한국에 맹그로브가 살고 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온난화 추세가 계속되면 맹그로브 중에서 추위에 강한 종이 우리나라에 자리 잡을 확률이 점점 더 높아지게 되고, 더불어 한국으로서는 지구온난화 대응의 선택지가 늘어나게 된다. 좋을 일일까. 우리나라 남쪽 갯벌에 맹그로브 숲이 조성된 이색 풍경을 만일 보게 된다면 어떤 마음이 들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다. 안치용 필자 주요 이력 △ESG연구소 소장 겸 (사)ESG코리아 철학대표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전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 2023-07-26 06:00:00
- [안치용의 비욘드 ESG] 기후 난민 '북극곰'에겐 시간이 없다 온실가스는 세계를 주유하며 편재하지만 기후변화는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지구에서 가장 변화가 큰 곳은 북극이다. 미국 국립해양대기청(NOAA)이 2006년 이래로 매년 발표하는 ‘북극 성적표(Arctic Report Card)’에 따르면 북극은 다른 지역보다 두 배 이상 빠르게 온난화하고 있다. 2020년 6월 북극권의 시베리아 베르호얀스크 마을 기온이 섭씨 38도를 기록해 북극 기온으로는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 세계기상기구(WMO)는 지난달 17일 2027년 안에 지구 표면 평균기온이 66% 확률로 1.5도 상승제한 목표를 넘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인류 문명이 배출하는 탄소와 올해 말 발생할 것으로 예측되는 엘니뇨로 그 가능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1.5도’ 돌파는 지구 표면 평균기온이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 이상 오른다는 의미다. ‘1.5도’는 인류가 정한 지구온난화 저지선이다. ◆그롤라와 피즐리의 등장 기온 상승은 북극 생태계의 근간인 해빙 면적을 좌우한다. 해빙은 북극을 둘러싼 대륙 안쪽 바다의 최상층이 얼어붙은 것으로 북극 생태계뿐 아니라 지구의 기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해빙 면적은 얼음 농도가 15% 이상인 바다의 범위로 정의된다. 해빙은 북극권 해양 포유류를 대표하는 북극곰이 살아가는 터전이다. 그롤라 베어의 등장은 해빙이 줄어들면서 북극곰의 삶이 위협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2006년 캐나다 북극권에서 그롤라가 처음 발견됐다. 인간에게 사냥당한 곰이 얼핏 북극곰인 줄 알았으나 뭔가 생김새가 달라 연구 대상이 됐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생명과학 회사 WGI에서 사냥으로 죽은 이 곰의 DNA 검사를 한 결과 암컷 북극곰과 수컷 회색곰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곰이었다. 캐나다 환경부의 야생동물 부서에서 일하는 연구원 이언 스털링은 이 혼혈 곰에다 그롤라 베어(grolar bear)라고 이름을 붙였다. 북극곰을 뜻하는 폴라(polar)와 회색곰을 뜻하는 그리즐리(grizzly)의 합성어다. 외관상 그롤라 베어는 북극곰과 회색곰 모두의 특징을 지녔다. 털은 전반적으로 흰색이지만 발 부분에 회색곰의 흔적인 회색 털이 섞여 있다. 몸 전반적인 모습과 크기는 북극곰에 가까우나 얼굴은 회색곰과 유사했다. 4년 뒤인 2010년에는 북극곰 수컷과 회색곰 암컷의 교배종인 피즐리 베어(pizzly bear)가 확인되었다. 참고로 이종교배의 작명은 아버지를 먼저 쓰는 가부장제 전통을 따른다. 그해에 미국 국립해양포유류연구소 소속 브렌든 켈리 연구팀은 <네이처>에 "기후변화로 생태계가 파괴됨에 따라 북극 해양 포유류 34개 종이 이종교배가 가능한 환경에 처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34개 종에 당연히 북극곰과 회색곰이 들어 있다. 그롤라와 피즐리의 등장은 기후변화 때문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북극곰이 남하하고 회색곰이 북상하며 두 종의 서식지가 겹쳐 생긴 일이다. 초반에는 이러한 일이 예외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지금은 일반적 사실이 되고 있다. 2014년 내셔널지오그래픽팀이 알래스카의 카크토비크 마을을 탐사하여 고래 뼈더미에 접근한 목적은 그롤라와 피즐리가 한 생물 종으로서 존재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에서 북극곰과 회색곰이 동시에 나타나며 그동안 보지 못한 생김새의 곰을 보았다는 마을 주민들의 전언이 관찰 카메라 촬영을 통해 사실로 확인됐다. 국립해양포유류연구소 소속인 켈리는 북극의 이종교배종을 연구하면서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서 서식지의 벽이 허물어져 이례적인 종간 교배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생태계 혼란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거주지 소멸로 난민이 된 북극곰 북극곰 난민이 생긴 이유는 그들의 영토가 소멸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극 해빙은 계절 순환에 따라 3월에 최대 면적을 보이고 봄과 여름에 얼음이 녹아 9월에 최소 면적이 된다. 미국 국립빙설자료센터에 따르면 9월 기준으로 해빙 면적이 1979년에 약 645만㎢였지만 2021년엔 413만㎢로 줄었다. 그사이 한반도 면적 10배 이상의 얼음이 증발했다. 빙설자료센터는 북극 해빙 넓이가 10년에 평균 13.1%씩 감소한다고 분석했다. 면적만이 문제가 아니다. 북극 해빙의 질을 평가하는 또 다른 중요한 지표는 얼음의 나이다. 바닷물이 얼어 형성되는 해빙은 겨울에 생겼다가 여름에 녹는 단년생 얼음과 한 번 이상 녹지 않고 여름을 지낸 다년생 얼음으로 나뉜다. 다년생 얼음이 두께 4m까지 이르는 반면 단년생 얼음은 가장 두꺼워도 그 절반 정도에 머물고 다년생 얼음보다 쉽게 녹는다. 다년생 얼음은 북극 해빙 면적과 질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다년생 얼음은 1985년 9월 440만㎢에서 2021년 9월 129만㎢로 감소했다. 만들어진 지 4년 이상인 두꺼운 얼음이 1985년 30.6%였으나 2021년에는 3.5%에 불과했다. 북극 해빙 대부분이 형성된 지 1년 미만인 얇은 얼음으로 바뀌고 있다는 뜻이다. 국립기상과학원은 이에 따라 북극의 연평균 빙하량이 21세기 말에 현재 대비 최소 19%에서 최대 76%까지 줄어들 것으로 예측했다. 여름에는 21세기 중반 이후 북극에서 얼음이 거의 소멸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소멸 시기가 더 이를 것으로 보는 연구도 있다. 북극 해빙의 소멸은 되먹임 효과를 가져와 북극과 지구 전체 기후에 심대한 파급효과를 초래하며 북극곰이란 생명종에게는 멸종의 길을 열게 된다. ◆멸종 시나리오 현재 북극에 북극곰이 수만 마리가 살고 있지만 21세기가 끝날 때 몇 마리가 살아남아 있을까. 해빙 시점이 점점 더 빨라지고, 얼음이 다시 어는 시점이 늦어지면서 북극곰이 남아 있는 얼음과 얼음 사이, 얼음과 육지 사이를 헤엄쳐 이동하는 거리가 늘어난다. 장거리 수영이 가능한 북극곰이지만 수영은 걷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쓰야 하고, 특히 새끼 북극곰에게는 큰 시련이 된다. 평소 바닷속에서 유영할 때 콧구멍을 닫아 물이 폐로 들어가는 것을 막지만 북극곰은 어류가 아니어서 무한정으로 콧구멍을 닫고 바다를 이동할 수 없다. 이동 거리가 늘어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먹이다. 북극곰의 사냥 전술은 바다 얼음에 나 있는 바다표범의 원뿔 모양 숨구멍 위에서 몇 시간이고 기다리다가 바다표범이 숨을 쉬기 위해 숨구멍으로 떠오르면 앞발로 바다표범의 머리를 때려 기절시키는 것이다. 이어 바다표범의 목을 물어 다른 곳에 가서 먹는다. 북극 해빙이 녹으면 기존 사냥 전술을 버려야 한다. 북극곰의 생태를 관찰한 결과 바다 위 사냥터를 잃고 육지로 이동한 뒤에는 바다표범을 사냥할 기회가 거의 없어 굶주렸다. 몇몇 북극곰이 새알과 베리 같은 육지 음식을 먹지만 생존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바다 얼음이 계속해서 녹으며 북극에서 북극곰이 익사 또는 아사할 확률이 높아지면서 북극곰에게 알을 빼앗기는 흰기러기 같은 철새의 번식도 난관에 처한다. 얼음 감소와 함께 해수 온도 상승 또한 북극곰의 생존을 위협한다. 미국 플로리다공대와 노스캐롤라이나대 연구팀이 2018년 5월 <네이처 기후변화>에 게재한 논문에서 온실가스 방출로 촉발된 바닷물 온도 상승이 2100년 안에 해양생물의 파멸적 손실과 해양 먹이사슬의 급격한 변화를 초래할 것으로 전망했다. 연구는 21세기 말까지 바닷물이 평균 2.8도도 상승할 것으로 보이며 해양생물 중 상당수가 이러한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고 분석했다. 북극곰이 견디지 못하는 해양생물 중 하나에 해당함은 물론이다. ◆북극곰 없는 22세기 혹은 21세기? 지난 간빙기에도 북극곰과 회색곰의 교배가 있었다. 2009년 북극해 인근 알래스카에서 발견된 ‘브루노’라는 10만년 전 고대 북극곰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당시 북극곰과 회색곰 사이에 광범위한 교잡(hybridization)이 있었음이 확인됐다. 현존하는 회색곰 유전자의 10%에 해당하는 유전자를 고대 북극곰이 남겼으니 두 종간 교류가 얼마나 빈번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두 곰은 이후 다시 각자 삶으로 돌아가 각자 영역에서 독립된 종으로 살아왔다. 20세기까지는 그랬다. 북극 얼음이 사라진 다음에 그롤라와 피즐리란 형태로 북극곰의 유전자가 일부 전해질 수 있겠지만, 만일 어느 날 북극에 얼음이 돌아온다고 가정한다면 그때 북극곰을 다시 볼 수 있게 될까. 약 2만~4만년 전 멸종한 네안데르탈인이 멸종 전에 한동안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와 공존했으며 그 기간에 둘 사이에 자손을 남겼고, 그 유전자가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으로 최근 연구 결과에서 확인된다.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 간, 10만년 전 북극곰과 회색곰 간 만남은 서서히 시작돼 오래 지속되다가 천천히 끊어졌다. 지금 북극곰은 100년을 채 못 남기고 종의 생존 혹은 하다못해 흔적을 남길 수 있는지가 결정될 듯하다. 네안데르탈인은 현생 인류 유전자의 4% 이하로 흔적을 남기고 종적을 감췄다. 북극곰은 회색곰에 10%가량 유전자를 남겨놓고는 다시 개별 종의 삶을 살았다. 이번에 북극곰이 처한 곤경은 지난번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어서 영토를 잃고 난민으로 지내다가 이전처럼 고토로 복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우리는 남은 21세기 내내 북극해에서 북극곰이 헤엄치다 탈진해 빠져 죽고, 북극권 육지에서 굶어 죽는 모습을 고통스럽게 지켜보게 될 것이다. 북극곰의 곤경이 북극곰에서 끝나지 않을 것임은 강조할 필요조차 없겠다. 안치용 필자 주요 이력 △ESG연구소 소장 겸 (사)ESG코리아 철학대표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전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 2023-06-28 06:00:00
- [안치용의 비욘드 ESG] '꿀벌 지킴이' 자처한 세계 자동차업계…그들의 변신은 무죄일까 자동차 산업은 대표적인 탄소배출 업종이다. 제조과정에서 당연히 온실가스를 생성한다.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탄소의 모습은 주로 배기가스이다. 전기자동차가 등장하고 있지만 아직 배기가스는 가시적이고 체감하는 대표적 탄소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비영리 연구단체 유럽수송환경연합이 지난해 9월 28일 발표한 ‘변장한 석유 기업 - 스코프3 의무 보고라는 탄소 폭탄과 투자자가 자동차 주식과 자동차 ESG 등급을 피해야 하는 이유’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자동차 산업이 온실가스를 어떻게 슬그머니 사회로 전가하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보고서는 도요타, 폭스바겐, 르노-닛산-미쓰비시, 메르세데스-벤츠, 혼다, 포드, 현대기아차, BMW, 스텔란티스 등 9개 기업을 조사했다. 탄소 배출량을 산정하는 범위는 스코프1~3으로 나뉜다. 스코프1은 해당 기업이 공장 등을 가동해 직접 배출하는 범주다. 스코프2는 기업이 사용하는 에너지로 인한 간접 배출을 뜻한다. 스코프3은 간단히 에너지를 제외한 모든 간접 배출 범주이다. 스코프3에 흔히 ‘공급망’이란 용어가 따라붙는다. 보고서가 9개 자동차 제조사의 스코프3 탄소 배출량을 분석한 결과, 전체 탄소 배출량에서 스코프3 비중이 98%였다. 석유화학기업 엑손모빌 85%, 유통기업 월마트 80%, ICT기업 구글 58% 등에 비하면 현저하게 높은 수준이다. 우리가 체감하듯 자동차는 공장보다는 도로 위에서 내뿜는 탄소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외부효과=경제학에서 쓰는 외부효과라는 말은 기업과 같은 경제 주체가 본연의 경제활동을 수행한 결과, 또는 과정에서 예상하지 않은 혜택을 주거나 손해를 입히는 현상이다. 이때 혜택과 손해에 대해 대가를 받거나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야 한다. 포스코가 철강을 만들면서 대규모로 온실가스를 배출하거나 양봉업자가 꿀을 모으면서 주변 과수원의 수분을 도와주는 것이 오랫동안 외부효과의 대표 사례로 거론됐다. 포스코가 철강생산을 염두에 두었지 온실가스를 배출하기로 작정하지는 않았을 터이고, 양봉업자 또한 과수원의 꽃에서 꿀을 모아올 생각이었지 벌을 보내 과실수의 수분을 도와줄 생각은 아니었다. 외부효과가 양봉처럼 긍정적일 때(혜택)는 외부경제, 외부효과가 온실가스처럼 부정적일 때(피해)는 외부비경제라고 구분하지만, 외부효과 하면 통상 외부비경제로 읽히는 문맥이 많다. 양봉은 교과서 등에서 외부경제로 꼽는 대표적 사례다. 본래 목적이나 정의상 양봉은 꿀벌을 이용해 꿀을 채집하는 경제활동이다. 벌통을 부려놓은 인근 지역의 과수원과 자연 상태 초목의 가루받이에 기여할 의사가 양봉업자에겐 전혀 없었다. 여기서 꿀벌의 도움으로 과수원에 과일이 열리고 과수원 주인은 과일을 팔아 돈을 벌게 되지만 과수원 주인이 양봉업자에게 가루받이 비용을 내지 않는다는 게 핵심이다. 외부효과로 혜택이 생겼지만 그 혜택에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야, 즉 ‘부불(不拂)’해야 외부효과(외부경제)가 된다. 혜택이 아니라 피해를 발생시켜도 마찬가지로, 의사가 없고 대가 또한 없어야 외부효과(외부비경제)가 된다. 과거에 온실가스를 배출하면서 그게 지구온난화 물질인지 모른 채 비용을 물지 않았을 때 외부효과가 된다. 요약하면 시장 내에서 돈을 주고받는 혹은 돈을 벌기 위한 행위의 결과가, 행위의 다른 측면에서 돈을 주고받지 않는 새로운 경제적 효과를 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양봉의 변신=양봉(養蜂)은 축산업의 한 분야이며 벌을 기른다는 뜻으로 영어로도 ‘beekeeping’이다. 양봉이란 말 자체에는 ‘꿀을 채취하는 활동’, 즉 채밀(採蜜)이 들어 있지 않다. 따라서 엄밀하게 용어에 근거해 따지고 들면 양봉업 중에서 채밀만이 경제적 행위일 이유는 없다. 벌이 꿀을 모으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가루받이를 해주었으면 돈을 받지 말란 법 또한 없다. 미국 캘리포니아 아몬드 농장에서는 이런 상상이 현실이 된다. 2월 아몬드꽃이 피는 계절이 오면 미국의 대표 농산물인 아몬드의 가루받이를 위해 미국 전역에서 양봉업자가 모여든다. 꿀처럼 정확하게 양을 재서 팔지 않지만 어쨌든 가루받이를 대가로 양봉업자는 아몬드농장에서 돈을 받는다. 수분이 본업이고 채밀이 부업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환경경제학에서 양봉을 더는 외부경제로 표시하면 안 될 것 같다. 대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상품화의 수준 또는 범위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꿀은 슈퍼마켓이나 온라인 쇼핑몰 등에서 누구나 살 수 있는 상품이고 수요자가 전 세계에 두루 존재하지만(한국 소비자는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 세계 전역의 꿀을 언제든지 살 수 있다), 가루받이는 캘리포니아 아몬드농장 같이 특별한 곳에서만 돈으로 거래하는 일종의 서비스 상품이 된다. 아직 많은 나라에서 수분은 공짜로 해주는 외부경제에 머문다. ◆온실가스라고 같은 온실가스는 아니다=양봉은 특수한 사례이고 외부효과 중에는 안타깝게도 외부비경제가 훨씬 많은 편이다.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공짜로 혜택이 생기는 영역이 있다면 영리한 사람들이 어떻게든 그 혜택으로 돈을 만들려 할 공산이 크다. 흔히 부정적 의미로 쓸 때의 대표적인 외부효과는 온실가스다. 애매하지만 지금은 ‘였다’라고 써야 할 수도 있다. 상품을 만들면서 온실가스를 ‘공짜’로 대기에 배출했을 땐 외부비경제지만, 배출한 온실가스에 대해 비용을 문다면 ‘외부’라는 말을 쓸 수 없게 된다. 온실가스는 기후에 미치는 명확한 부정적 영향으로 정의돼 있어 산업생산에서 배출한 양에 비례해 기업이 비용을 내야 한다. 지금은 온실가스가 시장제도 안에서 파악되어 대가를 지불하는 비용 요인에 가깝다. 하지만 모든 탄소에 대해 비용을 무는 건 아니다. 예컨대 앞서 보고서에서 보았듯, 98%의 탄소가 출고 이후에 발생하는 자동차 업계는 아직은 그 98%의 탄소에 책임지지 않는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이 곧 스코프3까지 보고를 의무화한다는 말은 아직 제대로 스코프3 산정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계산되지 않은 것을 비용화할 수는 없다. 자동차 제조사를 예로 들면 어떤 범위의 탄소는 비용이고, 어떤 범위의 탄소는 비용이 아니다. 즉 온실가스는 외부효과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외부효과가 없어야 좋은 기업=외부비경제에 해당하는 외부효과의 점점 많은 영역이 기업 ‘내부’의 사안으로 바뀌고 있다. ‘생산자 책임 재활용(EPR, Extended Producer Responsibility)’ 제도처럼 외부효과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분명히 하려는 움직임이 갈수록 뚜렷해진다. 스코프3도 비슷한 맥락이다. 과거에 회피가 가능했던 사안에 대해 살펴보았듯 새롭게 책임을 물리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 범위가 더 커지는 추세다. 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책임이 적었던 소비자 또한 앞으로 자신의 소비행위에 대해 기업만큼은 아니어도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요구를 받을 것이다. ‘외부’에 책임소재가 불분명하게 흩어져 있던 것들이 기업이든 개인이든 책임을 물으며 책임이 있는 곳의 ‘내부’로 이전되는 현상은 앞으로 더 확고해진다. 외부효과란 말이 담아내는 사안이 줄어들수록 세상이 더 좋아진다고 보아 틀린 말이 아니다. 외부효과 비용이 클수록 기업은 그 시장에서 빨리 떠난다. 휘발유 디젤유 등 화석연료를 대신해 전기로 움직이는 자동차로 자동차 산업이 발 빠르게 이전하는 이유 중엔 과거 방식의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날지 모른다는 불안이 포함된다. 동시에 기업시민으로 책임을 느끼기 때문이라는 자동차 제조사들의 천명이 아주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단순히 도로 위에 전기차가 굴러다닌다고 해서 완전히 친환경이 되는 건 아니지만, 즉 전기차의 에너지원인 전기가 종전처럼 화석연료를 쓰는 발전을 통해 공급된다면 도로가 아닌 발전소에서 배기가스를 내뿜는 격이어서 중요한 문제를 남겨두고 있지만, 질소산화물과 같은 대기오염을 줄이는 데엔 긍정적이다. ◆세계 벌의 날=5월 20일은 ‘세계 벌의 날’이다. 전 세계적으로 벌이 수난을 겪으면서 생태계에 위협이 되자 유엔이 2017년 12월에 ‘세계 벌의 날’을 제정했다. 자동차 업계는 벌의 수난과 실종에 책임이 있다. 대기오염물질이 벌의 활동성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자동차 업계엔 양봉이 유행이다. 롤스로이스는 유엔이 5월 20일을 세계 꿀벌의 날로 지정한 2017년에 ‘꿀벌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꿀벌 프로젝트’는 롤스로이스가 펼치는 다양한 환경보호 활동의 하나로, 영국 굿우드에 있는 생산 공장에 양봉장을 마련해 개체 수가 급감 중인 꿀벌에게 안전한 서식 환경을 제공한다. ‘꿀벌 프로젝트’가 성과를 거둬 굿우드의 약 17만㎡ 부지에 자생하는 50만 그루의 나무, 관목, 야생화 등에서 25만 마리의 꿀벌이 열심히 채밀해 2020년에는 ‘롤스로이스 꿀’을 생산했다. 람보르기니는 2022년 5월 20일 다섯 번째 세계 꿀벌의 날을 맞아 자사의 꿀벌 연구 기술을 공개했다. 람보르기니 본사가 위치한 이탈리아 볼로냐의 람보르기니 공원에서는 약 60만 마리의 꿀벌이 13개의 스마트 벌집을 드나든다. 꿀벌들은 꿀을 모으면서 주변의 환경 정보를 모으는 역할을 함께 수행한다. 공원 양봉장에서 채취한 벌꿀은 직원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낸다. 포르쉐 또한 본사가 있는 독일 라이프치히 주행시험장의 4만㎡ 서식지에서 300만 마리의 꿀벌을 기른다. 재미있게도 양봉이 일종의 유행처럼 돼 버린 세계 자동차업계에서 최대 양봉업자인 셈이다. 포르쉐가 연간 생산하는 꿀은 400㎏으로 포르쉐 라이프치히 서비스센터에서 병당 8유로에 판매한다. 수익금은 꿀벌 보호에 쓴다. 포르쉐에 비해 규모가 작지만 벤틀리도 꿀벌 30만 마리를 키우며 꿀벌이 좋아하는 나무와 들꽃 서식지를 조성하고 있다. 세계 자동차 업계의 꿀벌 사랑은 상징적이다. 꿀벌 개체 수 급감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를 제공한 자동차 기업들이 꿀벌 개체 수 복원에 나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양봉을 하지 말란 법은 없다. 그 정도 여력이야 있겠고, 기업이 홍보에 신경 쓰는 게 생리이기에 백안시할 것까지는 없다. 다만 양봉보다는 더 친환경적이고 탄소를 덜 배출하는 자동차를 만드는 본업에 온힘을 쏟아야 한다는 점을 새삼 강조하고 싶다. 그들로 인해 대기에 쌓인 온실가스가 어마어마하니 하는 말이다. 안치용 필자 주요 이력 △ESG연구소 소장 겸 (사)ESG코리아 철학대표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전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 2023-05-22 06:00:00
- [안치용의 비욘드 ESG] 빙하에서 부활한 '아이스맨' …21세기 인류에 대한 경고 지난 2월 17일 국내 언론은 영국 데일리메일 등 외신을 인용해 알프스에서 죽은 채 발견된 누군가의 정체를 알리는 보도를 일제히 내보냈다. 이 누군가는 지난해 9월 알프스에서 시신으로 발견됐으며 확인 결과 1974년 12월 그곳에서 실종된 32세 영국 국적 탐험가로 밝혀졌다. 16일(현지시간) 외신에 따르면 당시 스위스 발레주(州) 그랑콩뱅에서 실종 신고된 이 영국인과 2022년 발견된 시신은 동일인이다. 발레주 경찰은 “해당 시신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실종자 명단을 확인하였고 영국 경찰과 협력해 DNA 분석을 마쳤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 알프스에서 시신이 자주 발견된다. 지난해 7월 스위스 마터호른봉 북서쪽 슈토키 빙하에서 발견된 시신은 1990년 실종 신고된 27세 독일 산악인으로 밝혀졌다. 이어 지난해 8월에는 융프라우 인근 알레치 빙하에서 1968년 추락한 경비행기 일부가 형체를 드러냈다. 2017년엔 1942년 초원에서 소젖을 짜고 돌아오다 행방이 묘연해진 스위스 부부가 빙하에서 미라 상태 시신으로 발견됐다. 이러한 잇단 시신 발견은 유족에겐 그나마 반가운 소식이지만 인류 전체로는 꼭 반길 일이 아니라는 데에서 마음이 착잡해진다. 지구온난화로 알프스 빙하와 얼음이 녹으면서 그 속에 갇혀 있던 시신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어서 더 많은 시신의 발견은 더 심각한 경고를 뜻한다. 알프스의 얼음이 녹으며 발견된 시신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외치(Ötzi)다. ◆아이스맨의 부활=1991년 9월 19일 독일인 헬무트·에리카 지몬 부부는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국경을 따라 흐르는 외츠탈 알프스 산맥을 등반하다가 피나일봉 근처 해발 3210m 지점에서 시신을 발견했다. 얼음에 묻힌 채 상반신을 드러낸 시신을 보고 지몬 부부는 조난된 등산객이거나 제1차 혹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낙오된 병사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시신이 요즘만큼 자주는 아니어도 더러 이 지역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신고를 받고 출동한 지역 경찰과 인근 산장 관리인 등이 전동 드릴과 도끼를 이용하여 시신을 꺼내려 했지만 날씨가 나빠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산악인으로 구성된 전문 발굴팀이 와서야 시체를 얼음에서 꺼낼 수 있었다. 냉동 상태인 시신을 빙하 밖으로 온전히 꺼내면서 함께 발굴한 그의 소지품을 보고 발굴팀이 깜짝 놀란다. 가공되지 않은 동물 가죽으로 만든 옷과 구리 도끼 등 고대인 것으로 보이는 물건이 잇달아 나왔다. 팀은 시신과 유류품을 발굴 현장에서 가까운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학으로 보냈다. 이 대학 고고학자들은 유류품을 분석하여 이 물건들의 주인이 약 4000년 전 청동기 시대 사람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후 시신의 피부에서 추출한 세포와 소지품을 대상으로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 한 결과 최초 추정보다 1000년 이상 올라가는 5300년 전 사람인 것으로 밝혀져 유럽 고고학계와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발견된 곳 지명을 따라 외치(Ötzi)로 명명된 이 고대인 시신은 유럽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미라다. 발굴 당시 시신과 유류품은 두 바위 더미 사이 도랑 같은 곳에 있었다. 그 위로 눈이 쌓이고 세월이 흐르며 빙하가 자리하면서 시신과 사망할 때 소지품이 5000년 넘도록 온전하게 보존되었다. 시신은 빙하의 무게에 눌려 두개골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납작한 모습이었고, 왼쪽 엉덩이와 허벅지 살이 야생동물에게 뜯어 먹혀 없어진 상태였다. ◆외치는 어떻게 죽었을까=외치의 키는 160㎝에 몸무게 50㎏ 내외, 혈액형 O형인 남성으로 사망 때 나이는 45세였다. 마지막 식사로 밀과 고사리, 염소와 붉은 사슴 고기를 먹었으며 사망 원인은 여러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등에 박힌 화살촉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추정됐다. 분석 결과 외치는 죽기 며칠 전부터 누군가와 격투를 벌였고, 운명(殞命)의 날에 등 뒤에서 쏜 화살에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두개골에도 큰 상처를 입었다. ‘유럽인의 조상’ 발견은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사이에 외치 소유권을 두고 분쟁을 일으켰다. 안정적이지 않은 빙하 지대라 국경선이 모호했는데, 항공사진으로 판독한 결과 시신 발굴 지점이 이탈리아 영토 92.56m 안쪽인 것으로 확인된다. 이에 따라 외치는 1998년부터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가 아닌 이탈리아 볼차노의 ‘사우스 티롤 고고학 박물관’에서 귀빈 대우를 받으며 전시되고 있다. 처음에 ‘유럽인의 조상’일 것이란 추측을 낳았지만 ‘아이스맨’으로 불리는 외치가 유럽인의 조상은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DNA를 분석한 결과 ‘아이스맨’ 후손이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아이스맨’ 외치가 자손 대신 저주를 남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외치를 발견한 헬무트 지몬이 시간이 흘러 2004년에 알프스 등반 중에 조난을 당해 숨진 것을 비롯해 외치의 발굴과 연구에 관련된 여러 명이 숨졌기 때문이다. ‘아이스맨의 저주’는 당연히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꾸며낸 허황한 이야기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아주 틀린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 ‘아이스맨’ 외치가 발견된 것 자체가 일종의 저주다. 빙하(氷河) 속에 묻혀 있던 5000년 전 시신이 발견된 까닭은 빙하가 녹았기 때문이고, 빙하가 녹은 건 지구온난화 때문이다. 인류 전체로는 지구온난화에 이은 기후 위기만 한 심각한 ‘저주’에 직면한 적이 없었다고 하여 틀린 말이 아니다. ◆5000년 전 사람이 현재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었던 이유=아닌 게 아니라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로 세계 곳곳에서 빙하(氷河)가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여름철 기온 상승과 마른 겨울이 겹치면서 고지대 만년설(萬年雪)이 계속 줄고 빙하까지 급격하게 손실되고 있다. 외치 사례에서 보았듯 유럽에서는 이 문제가 국가 간 국경선 다툼으로까지 이어진다. 스위스 빙하감시센터와 브뤼셀 자유대학교에 따르면 스위스 알프스 지역 최대 빙하인 모테라치 빙하는 경계선이 하루 5㎝씩 줄어들면서 2022년에는 60여 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크기가 줄었다. 두께가 수년 새 200m 얇아졌고, 빙하 끝부분에 해당하는 빙하설(氷河舌)은 3㎞ 짧아졌다. 서유럽에서 해발 고도가 가장 높아 ‘유럽의 지붕’으로 불리는 몽블랑(Mont Blanc)의 해발 고도가 달라지고 있는 현상 또한 기후변화의 상징적 풍경이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에 자리 잡은 몽블랑의 해발 고도는 2021년 9월 기준으로 4807.8m다. 2017년 조사(4808.72m)와 비교해 4년 사이에 92㎝ 줄어들었다. 2007년 4810.9m를 기록한 이후 몽블랑 높이가 계속 낮아져 14년 사이 3m 이상 키가 쪼그라들었다. 몽블랑 꼭대기 만년설이 감소한 것이 전체 신장 감소 원인이란 분석이 설득력 있게 제시된다. 더 큰 문제는 몽블랑 하면 떠올리는 정상의 만년설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것. 스위스 빙하감시센터에 따르면 2022년 폭염으로 알프스 만년설이 유지되는 ‘빙점 고도(기온이 0도로 떨어지는 높이)'는 역사상 가장 높은 해발 5184m까지 올라갔다. 빙하감시센터는 “예년에 3000~3500m였는데 2000m 가까이 올라갔다”며 “이 빙점고도는 몽블랑 정상(4809m)보다 더 높다”고 설명했다. 단순 수치상으로는 몽블랑 정상의 만년설이 녹아 없어질 심각한 위협에 맞닥뜨렸다는 뜻이다. ◆알프스 빙하의 소멸?=빙하가 이렇게 빠르게 녹고 있는 것은 여름이 더욱 더워졌을 뿐 아니라 기후변화로 해마다 ‘마른 겨울’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빙하 위에 쌓인 눈은 여름 햇볕을 반사해 빙하를 보호하고, 또 일부가 자연스럽게 녹았다 다시 얼어붙는 과정을 통해 빙하를 더 두껍게 만든다. 하지만 알프스 지역 겨울 적설량이 눈에 띄게 줄면서 여름에 빙하가 햇볕에 직접 노출된 면적이 늘고 빙하가 얼음으로 다시 보충되지도 않는 악순환이 일어났다.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는 “이런 속도라면 2100년쯤에 알프스 빙하의 80%가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스위스 정부는 “20세기 들어 알프스의 빙하 중 약 500개가 사라졌으며 나머지 4000여 개 빙하도 2100년까지 90%가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다”고 분석했다. 제네바대학 연구팀이 위성사진을 분석해본 결과 알프스에서 겨울철에 눈에 덮여 있지 않은 면적이 지난 22년간 5200㎢ 늘어났다. 서울시 면적(약 605㎢)의 9배에 육박하는 넓이다. 지난 70여 년간 알프스 지역 온도 상승 폭은 1.8도다. 비슷한 기간에 지구 전체로 약 0.5도 오른 것과 비교해 우려스러울 정도로 빠른 속도다. 언론 보도를 통해 알프스 빙하의 손실을 막기 위해 커다란 천을 덮어 빙하를 보호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근본적인 빙하 보호 대책이 아님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빙하를 지키겠다는 절박함이 잘 전해진다.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가 알프스산맥에 국한하지 않은 전 지구에 걸친 심각한 위협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현재의 문명을 책임지는 인류는 지구상에 인류가 등장한 이후 처음으로 ‘빚’을 내기 시작했다고. 탄소 빚이다. 흔히 근대인이라고 불리고 현대인이라고 해도 무방한 현 인류는 산업화 이후 독특한 발전의 길을 열었는데 그때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발전이라는 것이 빚을 내서 흥청망청 살았던 것임을 깨닫고 있다. 인류 문명 전체로 보면 짧디짧은 200~300년 전에 빚을 내기 시작했지만 빚의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빚이 빚을 낳고 점점 원금은커녕 이자를 감당할 수 없는 사태로 내몰리고 있다. 미안한 규정이긴 하나 ‘아이스맨’ 외치가 어쩐지 빚을 받으러 온 사채꾼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저주가 맞는 셈이다. 다만 후손이 걱정돼 파산하기 전에 미리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러 왔다면, 그래서 우리가 파산을 모면할 수 있다면 저주라기보다는 그 반대일 수도 있겠다. 안치용 필자 주요 이력 △ESG연구소 소장 겸 (사)ESG코리아 철학대표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전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 2023-04-19 06: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