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준 교수
hjunkim@kangwon.ac.kr
- 서울대 인류학과 학사·석사
- 호주국립대학 박사
-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 [김형준의 indonesia 스토리] '천문학적 비용' 무상급식 도입 …복지 국가 질주하는 인도네시아 [강원대 문화인류학과교수] 인도네시아의 대통령 당선자 프라보워 수비안토의 공약집에는 17개 중장기 과제와 8개 단기 과제가 제시되어 있다. 식량·물·에너지 자급자족, 부정부패 방지, 빈곤 퇴치 등이 포함된 중장기 과제 중 하나는 경제적 평등과 중소기업 강화 및 신수도의 지속적 개발이다. 현 조코위 대통령의 정책 계승을 공언한 프라보워가 조코위의 핵심 정책인 신수도 이전을 독립 과제로 설정하지 않고 다른 프로그램에 덧붙여 제시함으로써 그것이 새 정부의 우선 정책이 아님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당선 확정 후의 상황 역시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신도시 이전 사업의 지속 여부가 여론의 큰 주목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가장 큰 관심과 논란을 불러일으킨 문제는 무료 급식 프로그램이었다. 무료 급식은 프라보워의 단기 과제 중 첫 번째 공약이었다. 유치원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무료 점심 제공을 목표로 하는 이 프로그램은 선거 캠페인 기간뿐만 아니라 선거 후에도 사회적 담론의 중심에 있었다. 당선 후 프라보워는 이 정책의 추진 의사를 재확인했을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방문 중 현지의 무료 급식 상황을 살펴보고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인도네시아에서 무료 급식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정책이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수업이 오전 7시 무렵 시작해서 보통 12시나 1시에 끝나기에 점심시간이 따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쉬는 시간에 간단히 간식을 먹는 정도가 학생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따라서, 기존 관행에서 벗어나 점심시간을 신설하고 무료 급식을 도입한다는 공약은 혁신적 구상이라 평가받을 수 있었다. 프라보워는 유아와 청소년의 신체적 성장 지체를 거론하면서 무료 급식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또한, 초중고 학생의 25%가 아침을 거르고 등교하는 상황, 다른 말로 하면, 하교할 때까지 상당수 학생이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하는 상황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료 급식 공약이 여론의 주목을 받자, 선거 캠프에서는 이를 뒷받침할 다양한 논리를 제시했다. 건강 상태 개선에 따라 기대할 수 있는 학력 상승, 사회적 불평등 축소와 기회균등 확대, 점심을 함께함으로써 생길 친밀감 증가 등이 부각되었다. 경제 성장에 미칠 잠재적 효과 역시 언급되어서, 영양 상태 개선으로 양질의 노동력 배출이 가능해지고, 급식 제공에 참여할 농어민, 축산업자, 상인, 중소기업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배고픈 학생을 없애자는 주장 자체를 반대하는 목소리는 뚜렷하게 제기되지 않았다. 반면, 프로그램의 구체적 실행 방안, 특히 비용과 관련하여 부정적 의견이 쏟아졌다. 프라보워의 계획에 따르면 한 끼 급식 비용은 1만5000루피아(Rupiah)였다. 1만 루피아가 한화로 환산하면 대략 850원이기에, 그 비용은 1300원 정도인 셈이었다. 무료 급식 대상 학생이 7800만명으로 추산되었기에 전체 예산은 440조 루피아(약 37조원)에 달하리라 예상되었다. 이는 2024년 정부 예산 3300조 루피아의 13%에 해당하는 천문학적인 규모로서, 무료 급식에 대한 투자가 타당한지를 둘러싼 논란을 촉발했다. 프라보워 측에서는 무료 급식의 전면 시행이 2029년에야 가능할 것이며, 시행 첫해에 필요한 예산은 100~120조 루피아(약 8조~10조원) 정도라고 지적했다. 또한, 그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구매 대신 직접 조리 방식을 취하고, 기존 예산을 재조정함으로써 예산 규모를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추산치에 따르면, 첫해에 필요한 경비는 정부 예산의 2% 이내인 50조 루피아(약 4조원) 정도로서 현재 예산 범위 내에서 실행 가능한 수준이었다. 예산 문제 외에도 운영 과정에서 발생할 여러 문제점이 언급되었다. 특히 새로운 부정부패 고리의 발생 가능성, 교육 예산 전용으로 인한 교육의 질 저하, 기존 농산물 시장의 교란과 인플레이션 촉발 등이 거론되었다. 그 개념조차 생소하고, 막대한 예산이 투여되며, 운영 경험이 전무함에도 프라보워가 무료 급식을 추진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근 10년 동안 인도네시아에서 전개된 혁신적 변화 과정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에 부상한 복지 국가 개념과 그 확대 적용, 그리고 그것의 정치적 효용성이라는 틀 속에서 무료 급식의 정치적 의미를 파악해 볼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복지 개념은 1997년 아시아 경제 위기 이후 조금씩 유입되었다. 이전까지 정부 지원은 대체로 시혜적 성격을 띠어서, 정치적 필요에 따라 대통령이 선택적으로 일회성 지원을 제공하는 형식이 일반적이었다. 복지라는 표현의 사용조차 부적절한 시절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경제 위기 이후 실업자와 빈곤층이 급증하자 정부는 이들을 지원하는 조치를 시작했다. 그러나 복지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정부 지원은 일시적이고 비체계적이었으며, 경제 상황이 호전되자 지원 역시 축소되었다. 2004년 유도요노 대통령의 취임 이후 인도네시아 복지 정책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유가 보조금 축소 계획을 세운 유도요노 정부는 이로 인해 발생할 대중적 저항을 완화하고자 유가 보조금 일부를 저소득층에 대한 직접 지원으로 전환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 결과 인도네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빈곤층을 대상으로 한 생계 지원금이 대규모로 제공될 수 있었다. 하지만 운영상의 미숙함과 유가 변동에 따른 예산상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보조금은 체계적이고 정기적인 지원책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유도요노 정권에서 전개된 또 다른 변화는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의 도입이었다. 관련 법안은 2004년에 마련되었지만, 정부의 추진 의지 부족으로 의료보험 시행은 계속 미루어졌다. 이에 시민사회 단체의 압력이 커지자, 정부는 5년의 유예 기간을 거친 후 2014년 실행을 결정했다. 저소득층의 경우 정부가 보험료를 전액 부담하고, 취업자의 경우 고용주와 피고용자가 보험료를 분담하는 형식으로 보험이 설계되었다. 2000년대 이후 간헐적으로 시행되었던 복지 정책은 2014년 조코위 정부가 들어서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먼저, 유도요노 정부에서 유예된 의료보험이 본격 시행됨에 따라,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의료비 보조가 이루어졌고, 의료 보장을 받는 대상 역시 점진적으로 확대되었다. 의료 보장에 추가하여 조코위 정부는 교육비 지원, 쌀을 포함한 현물 지원, 현금 지원 등 세 가지 정책을 시행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일회적이고 시혜적 성격을 띠었던 정부 지원이 복지라는 틀 속에서 통합적으로 이루어질 기반이 마련되었다. 효율적 복지 체계 구축을 위해 정부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저소득층 선별 작업을 진행했고, 이를 기초로 하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또한 복지 카드를 도입함으로써 복지 혜택의 접근성을 높였다. 조코위 정부의 복지 드라이브는 예산 배정에 있어 획기적인 변화를 수반했다. 2014년 전체 예산의 1%에 불과하던 의료 관련 예산은 2016년 5.1%로 급증했으며, 이후에도 4~5%의 비중을 유지하고 있다. 복지 관련 예산 역시 2014년 0.6%에서 2016년 11.9%로 대폭 증가했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중 한때 14%까지 상승했던 사회보장 예산은 2023년 전체 예산의 10.8%를 차지했다. [Editor: Ryan Nong POS-KUPANG.com] 복지 정책의 확장은 혜택을 받는 대상의 확대로 이어졌다. 2023년 자료를 보면, 10㎏의 쌀을 지원받는 가구는 2200만 가구, 인구 규모로는 8900만명에 달했고, 생필품 지원 수혜 가구는 1800만 가구에 이르렀다. 현금 지원을 받는 대상 역시 대략 2000만 가구로 추산되었다. 여기에 더해 정부는 현금과 생필품 수혜 가구 중 임신부, 유아, 장애인, 노인, 학생이 있는 천만 가구를 선별하여 추가 현금을 지원했고, 저소득층 학생 1700만명을 대상으로 연간 백만 루피아까지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코로나 팬데믹 국면을 거치며 실업자, 노인, 중소 상공인을 대상으로 시행된 보조금이 이후에도 지속되었기에 현재 15종 내외의 복지 관련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급격한 예산 증가를 필요로 한다는 면에서 복지 확대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이는 복지 국가 건설에 대한 조코위의 단호한 태도를 반영했다. 이러한 조코위의 행보는 정부 지원의 직접 수혜자뿐 아니라 일반 국민에게도 뚜렷하게 각인되었고, 과거 어떤 대통령보다 국민의 복지 향상에 진정성을 가진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그에게 부여했다. 대통령 임기 말임에도 조코위의 정치적 영향력은 강력하게 지속되었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일부를 제외하고 그에 대한 지지율은 70~80%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높은 수준의 지지율 저변에는 복지 정책 실현이라는 그의 업적이 놓여 있다. 9000만명에 달하는 국민이 난생 처음 정기적이고 체계적인 복지 지원을 받게 되면서, 이들은 조코위의 강력한 지지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조코위의 성공은 프라보워의 무료 급식 정책 입안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조코위의 정책과 달리 무료 급식은 보편 복지의 성격을 가진다. 조코위 정부에서 복지를 체감하지 못한 중산층까지 거의 모든 국민이 정부 지원의 혜택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적 선택을 통해 프라보워 역시 조코위가 누려온 높은 대중적 지지와 2029년 재선을 기대할 수 있다. 복지 국가를 향한 인도네시아의 질주는 앞으로 지속될 것처럼 보인다. 물론 걸림돌도 있다. 조코위 정부에서의 복지 예산 확대, 다른 식으로 말하면, 다른 부문에서의 예산 축소가 초래한 긴장과 불만은 5% 이상의 경제 성장이 계속되고 예산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상당 부분 완화될 수 있었다. 이는 앞으로의 복지 정책 역시 경제 성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지난 10년 동안 지속된 경제 성장 추세가 앞으로도 이어질 때, 프라보워가 꿈꾸는 재선의 길은 복지 국가 건설의 꿈과 함께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 (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 (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2024-04-25 06:00:00
- [김형준의 indonesia 스토리] '준비된 대통령' 프라보워 …연대와 타협이냐 권력독점이냐 [김형준 강원대 문화인류학과교수] 지난 2월 14일, 인도네시아에서는 대통령과 부통령, 국회의원, 지역대표의원, 지방의회 의원을 선출하는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가 끝나고 20여 일이 지난 현재까지 선거관리위원회의 공식 개표율은 대통령 선거의 경우 대략 78%, 국회의원 선거는 65%에 머물러 있다. 82만여 개 투표소에서 전체 유권자의 85%인 1억7000여 만명이 참여한 투표 결과 집계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됨은 당연하지만, 선거 종료 후 하루가 지나지 않아 개표가 종결되는 우리의 상황과 비교할 때, 인도네시아의 개표 과정은 경이로운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하지만, 더딘 집계 과정은 인도네시아에서 이미 예견된 바로, 선관위의 공식 개표 결과 발표는 선거가 끝나고 한 달여가 지난 3월 20일로 예정되어 있다. 인도네시아 선거 과정에서 주목받은 문제 중 하나는 선거 관리원의 대규모 과로사였다. 특히 5년 전 치러진 선거에서 이 문제가 두드러져서, 공식 사망자 수가 900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 이번 선거를 앞두고 선관위에서는 신체검사를 통해 선거 관리원을 선발하고 관리 인원을 보강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사망자 수가 대폭 감소했지만, 여전히 그 규모는 100여 명에 이르렀다. 더딘 개표율과 선거 관리원의 과로사는 선거에 부여된 상징적 의미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선거는 오랫동안 ‘민주주의의 축제’라 불려왔다. 민주적 관행이 일상에 깊게 뿌리내리지 못한 상황에서 선거가 민주주의의 축제임을 보여줄 방식은 개표 과정의 공정성과 투명성이었다. 따라서, 개표는 과도하게 여겨질 정도로 세심하고 꼼꼼한 절차를 거쳐 진행되었다. 투표가 끝난 후 곧바로 해당 투표소에서 진행되는 개표 과정은 유권자들의 직접적인 참여 아래 이루어진다. 개표한 투표용지를 선거 관리원이 양손에 펼쳐 든 채 기표된 후보나 정당의 이름을 거명하고 이를 유권자에게 보여주며 확인받으면, 다른 선거 관리원이 커다란 게시판에 부착된 집계표에 그 결과를 일일이 기록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몇 백명이 투표한 투표소에서 개표 과정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절차적 투명성에 대한 강조는 개표뿐만 아니라 집계 과정에도 적용된다. 컴퓨터로 최종 집계가 이루어지지만, 개표 결과를 컴퓨터에 입력하기 전까지 투표소에서 집계한 결과는 여러 단계의 검토 과정을 거치게 된다. 투명성 확보를 위해 이 과정 역시 모두 수작업으로 진행되며, 확인과 재확인을 거쳐 최종 결과가 선관위에 등록된다. 누구나 쉽게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환경이 인도네시아에 정착된 지도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수작업에 의존한 개표 절차는 쉽게 변화될 수 없는 전통으로 확립되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개표 과정이 취급됨으로써 선거 관리원의 과로사나 지연된 개표 결과 발표와 같은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관행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선관위의 공식 발표가 예정되어 있음에도 프라보워 수비안토 후보의 대통령 선거 승리는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선거 직후 십여 개의 여론조사기관에서 발표한 출구조사에서 프라보워가 압도적 지지를 받았으며, 현재까지 선관위의 공식 집계에서도 유사한 경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프라보워 후보의 득표율은 약 58%로, 다른 두 후보의 득표율인 25%와 17%를 크게 상회했다. 절반을 넘어선 프라보워의 득표는 이번 대선 과정에서 나타난 가장 큰 이변이라 평가될 수 있다. 작년 10월까지 진행된 여론조사에서 그의 지지율은 다른 후보자와 비슷하거나 약간 앞서는 수준이었다. 선거 캠페인 동안 그의 지지율이 상승세를 타며 선거 직전 50%에 육박하는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지만, 그가 절반을 크게 넘는 지지를 얻어 1차 선거에서 승리하리라고는 쉽게 예상할 수 없었다. 짧은 기간 동안 전개된 급격한 지지율 상승에는 프라보워의 부통령 후보 선택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현직 조코위 대통령의 장남 기브란(Gibran)을 부통령에 지명함으로써, 프라보워는 80%의 지지율을 넘나드는 조코위의 인기를 등에 업고 선거 캠페인을 펼칠 수 있었다. 선거 중립을 유지해야 했던 조코위는 프라보워를 직접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선거 기간 중 다양한 방식으로 프라보워가 자신의 후계자임을 드러냈다. 프라보워의 승리는 기브란의 승리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이번 선거의 최대 수혜자가 조코위이며,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새로운 정권에서도 지속될 것이라는 예상이 제기되었다. 큰 무리가 없어 보이는 설명인 듯하지만, 그 실현 가능성을 균형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프라보워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를 단순히 조코위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정치인으로 속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프라보워에 관해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키워드는 특전사와 수하르토이다. 그는 1998년까지 30년 이상 인도네시아를 지배한 독재자 수하르토의 사위였으며, 수하르토 정권 말기 특전사 사령관으로 활동했다. 수하르토 퇴진을 촉발한 민주화 운동 진압 과정에서 그는 민간인을 납치하여 살해한 인물로 지목되었고, 수하르토 퇴진 후 발생한 폭동과 극심한 사회적 혼란의 배후로도 알려져 있다. 수하르토 퇴진 후 불명예 제대한 프라보워는 동생의 도움을 받아 농업과 광산업을 중심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몇 년 만에 놀라운 부를 축적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2004년 대선을 앞두고 정계에 입문했으며, 자신이 설립한 정당을 통해 2009년 부통령 후보에 선임되었다. 2014년과 2019년, 조코위와 일대일로 맞붙은 대선 2차 선거에서 프라보워는 40%가 넘는 득표율을 얻을 정도로 높은 대중적 지지를 끌어냈다. 이러한 경력을 고려하면 그는 인도네시아의 어느 정치인보다 오랫동안 대통령 자리를 꿈꾸고 준비해 온 인물이라 평가될 수 있다. 군 경력과 수하르토와의 연관성은 부정적 꼬리표로서 프라보워를 항상 쫓아다녔다. 하지만, 2009년 이후 네 차례의 대선 과정을 거치며 이런 이미지는 상당 부분 희석되었을 뿐 아니라 긍정적으로 전환되기까지 했다. 그의 경력이 민간인 출신 후보자들이 내세우지 못하는 강력한 지도자라는 이미지 구축에 일조했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 캠페인에서 프라보워는 자신의 강경한 이미지를 완화하려는 전략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대규모 대중 유세 중 연단에 선 그는 거리낌 없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는데, ‘귀여운 춤’이라 불린 그의 비디오 클립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확산하며 젊은 세대의 큰 관심을 끌어냈다.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그는 ‘옆집 아저씨’와 같은 친근함을 부각하고자 했다. 다른 후보자의 의견에 반박하기보다는 이를 수용하려는 태도를 과할 정도로 취했고, 자신의 경력에 대한 날 선 비판을 엉뚱한 대화로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프라보워의 캠페인 과정은 인도네시아의 전통 예술인 그림자극을 연상시킨다. 인도의 서사시를 기본 줄거리로 하는 그림자극에는 토착적 성격의 캐릭터가 등장한다. 다른 등장인물과 달리 기이한 외모를 지닌 이들은 우스꽝스럽고 때로 천박하기까지 한 언행으로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는 광대 역할을 하지만, 실상 이들은 강력한 힘을 가진 토착 신이다.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희화화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프라보워의 캠페인 방식은 외유내강의 성품을 지닌 이상적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냄으로써 대중적 지지를 얻는 데 기여했다. 이번 선거에서 조코위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에 기반하여 프라보워가 승리했음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를 근거로 앞으로 출범할 프라보워 정권을 단순히 조코위 정권의 연장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무엇보다 대중적 영향력을 갖춘 정치인으로서 프라보워가 자신만의 독자적 세력을 견고하게 구축해 왔고, 오랫동안 자신만의 정책과 통치 방법을 준비해왔기 때문이다. 또한,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압도적 지지로 당선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앞으로 보여줄 독립적 행보를 뒷받침할 정치적 자산으로 작용할 것이다. 프라보워의 독자적 행보를 예상하게 하는 또 다른 요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조코위와 연관된다. 장남인 기브란이 부통령이 됨으로써 조코위는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이어갈 발판을 마련했지만,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소속한 정당을 배신하는 선택을 했다. 그가 등을 돌린 인도네시아 투쟁민주당은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다수당의 위상을 유지한 반면 그는 자신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 정치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이는 자연인으로 돌아간 조코위의 정치적 행보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대통령 선거 결과는 유력 인사를 중심으로 한 정치 왕조가 인도네시아 사회에 미치는 중대한 영향을 재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민주화 전망과 관련해서 더욱 중요한 사실은 프라보워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많은 비판을 받아 왔지만, 인도네시아에서 절차적 수준의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유력 정치 세력 간 연대와 타협이었으며, 이는 어떤 정치 세력도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프라보워의 개인적·정치적 배경은 그가 기존의 정치적 균형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독점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런 의미에서 앞으로 형성될 프라보워와 기존 정치 세력 간 역학 관계는 인도네시아 민주주의의 미래를 결정지을 핵심 요인이 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 (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 (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2024-03-08 06:00:00
- [김형준의 indonesia 스토리] 신이 창조할 때 미소를 지은 나라 .. 印尼의 '자원 민족주의' [김형준 강원대 문화인류학과교수] 인도네시아 자바의 농촌을 처음 방문했을 때 목격한 모습은 매우 낯설었다. 벼의 성장주기에 맞춰 단일한 색으로 채워진 들녘에 익숙한 나에게, 다양한 색채가 공존하는 풍경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추수가 끝난 논 바로 옆에서 갓 심은 벼가 자라고 있었고, 그 옆에는 초록과 노란빛으로 물든 논이 위치했다. 이런 상황은 열대 지역이라는 지리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었다. 녹색 혁명 이후 벼 성장주기가 4개월 이내로 단축되면서 1년에 세 번의 수확이 가능해졌고, 이는 농촌의 모습을 변모시켰다. 1년 이모작, 그것도 쌀과 보리의 이모작에 만족해야 했던 우리에게 1년 삼모작은 인도네시아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듯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몇몇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 인도네시아는 쌀 자급자족을 달성하지 못했다. 이는 과도한 인구 증가, 물과 경작지 부족, 소비자 취향 변화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세 번의 수확이 가능한 인도네시아에서 쌀을 오랫동안 수입해야 했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인도네시아의 풍요로움은 농작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셋째로 큰 산림면적을 보유하고 있으며, 군도라는 특성으로 인해 넓은 해양을 가지고 있다. 지하자원 역시 풍요의 원천이다. 금, 구리, 가스, 석유, 니켈, 석탄, 희토류, 보크사이트 등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으며, 주석의 경우 전 세계 매장량의 17%를 차지한다. 이로 인해 “신이 인도네시아를 창조할 때 미소를 지었다”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풍요로운 자연이라는 수사는 오랫동안 거론되었지만, 그것이 긍정적 의미로만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인도네시아의 경제 상황이 자연적 풍요로움을 반영할 만큼 좋은 상태에 놓여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재력과 현실 사이의 격차에 관해 말하면서 인도네시아 사람이 자주 지적한 측면은 관리의 문제였다. 태생적 풍요로움을 적절하게 관리하지 못함으로써 인도네시아가 저개발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결국, 문제의 근원은 자원 관리의 주체인 정치인과 관료로 귀착되었다. 이러한 자조적 분위기는 최근 들어 급속히 변화했고, 자원 관리에 대한 호의적 평가로 대체되었다. 변화의 중심에는 니켈 원광 수출금지 정책과 같은 조코위(Jokowi) 정부의 단호한 조치가 있었다. 이 정책은 정부가 자원을 제대로 관리하고 있다는 인상을 확산시킴으로써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광물 원광 수출금지 조치는 자원 민족주의의 한 형태이다. 이 용어가 내포한 국수주의적 성격으로 인해 인도네시아에서는 ‘후방화’(hilirisasi)라는 개념을 통해 국가적 원자재 개발에서 가치 사슬의 후방을 지향하는 전략으로 이를 설명한다. 어떤 말이 사용되든, 자원 활용에 있어 정부의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간여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자유주의 정책과 대조된다. 풍부한 자원을 보유한 인도네시아에서 자원 민족주의가 부상할 수 있음은 이해할 만하지만, 그것이 왜 최근에야 주목받게 되었는지는 흥미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인도네시아에서 자원 민족주의가 처음 표출된 시기는 1980년대였다. 정부는 국내 목재 산업 육성과 산림 자원의 부가가치 제고를 위해 원목 수출을 금지하고 가공 후 수출만을 허용하는 정책을 도입했다. 1985년에 원목 수출이, 이어서 제재목 수출이 금지되자, 한국을 포함한 외국기업의 철수가 이어졌고, 이는 목재 수출 급감과 고용 축소라는 부작용을 결과했다. 그럼에도 이 정책은 외국기업의 직접 투자를 유도하고 목재 산업의 생산성 향상을 촉진하는 등 장기적으로는 긍정적 효과를 가져왔다고 평가되었다. 원목 수출금지는 정부가 자원 관리를 제고할 정책적 수단을 가지고 있음을 예시했지만, 자원 민족주의적 접근은 그 후 다른 자원으로 확대적용되지 않았다. 이는 자원 개발을 매개로 구축된 정경 유착 고리, 정치인과 군부 카르텔의 이권을 보호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특히, 수하르토 대통령의 가족이 이 카르텔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자원 민족주의 정책은 쉽게 확장될 수 없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수하르토 독재의 종말과 함께 시작된 민주화 과정에서 자원 관리 문제는 중요한 이슈로 부상했다. 자원 개발을 매개로 한 부정부패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었지만, 기득권 세력의 저항으로 인해 큰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파푸아 지역의 그레스버그(Gresberg) 광산이 대중적 관심을 받게 되었는데, 이 광산은 세계에서 가장 큰 금광 중 하나이자 주요 구리 생산지였다. 수하르토 정부에서 첫 외국인 직접 투자 사례로 개발된 이 광산은 미국의 프리포트(Freeport) 회사에 의해 운영되었다. 지속적인 인프라 투자를 통해 생산이 안정되자 이 회사의 수익은 꾸준히 증가했고, 특히 구리 가격이 급등한 2000년대 중반 그 순수익이 매년 수십억 달러에 이르리라 추정되었다. 수하르토 정권에서 시작했고, 심각한 환경 파괴, 오염, 인권 침해 문제에도 사업이 계속될 수 있었음은 부패한 정치인과의 유착에 기대어 프리포트가 운영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공식 회계에서조차 프리포트의 수익이 인도네시아 정부가 받는 세금과 로열티 수입을 크게 초과한다는 보도는 국민적 분노를 일으켰다.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정치권에 대한 압력이 가중되자, 국회는 2009년 광산업에 관한 법을 제정했다. 이 법안의 핵심은 국내에서 가공하지 않은 광물 수출을 금지하는 것이었고, 제련 시설 부재라는 현실을 참작하여 5년의 유예 기간을 두었다. 자원 민족주의 정서에 기대어 제정된 이 법안이 제대로 실행될 수 있으리라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는 광산 업체에도 적용되어서, 유예 기간이 끝난 2014년 제련 시설을 마련한 기업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들은 유예 기간이 연장되거나 다른 형태의 타협안이 제시될 것이라 예상했다. 이런 기대는 2014년 일부 현실화해서, 정부는 수출금지 대신 추가 관세 부과와 같은 유화책을 제시했다. 이런 타협적 행보는 인도네시아 행정의 일상적 운용 방식에 부합했지만, 조코위 대통령의 당선이라는 새로운 변수를 반영하지 못했다. 자원 민족주의에 대한 조코위 정부의 접근은 광산업에 투자한 외국기업이 과반의 주식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한 조치를 강하게 밀어붙임으로써 명확해졌다. 이 정책은 광산법에 근거를 두고 있었지만, 법안에 명시된 10년의 유예 기간을 단축하여 적용한 것이었다. 자원 민족주의 정책의 강력한 추진 의지를 표명하고자 했던 조코위 정부는 그 대상으로 프리포트를 지목했다. 정부의 압력에 맞서 프리포트는 강력한 대응 전략을 펼쳤다. 광산 활동을 중단했고, 현지 고용인을 대규모로 해고했다. 이러한 행보는 파푸아 지역의 안정을 훼손하고, 나아가 분리주의 운동을 자극해 정부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리라 우려되었다. 국제재판소에 제소할 것이라는 프리포트의 위협 후 일년여에 걸쳐 진행된 협상에서 조코위 정부는 승리를 거두었다. 프리포트는 90%에 이르던 지분을 49%로 축소하고 이를 인도네시아 정부에 양도하기로 합의했는데, 그에 대한 대가로 2041년까지 채굴 허가 연장을 얻어냈을 뿐이다. 프리포트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조코위 정부의 다음 목표는 니켈이었다. 전기차 산업 확대에 따라 니켈의 전략적 가치가 증가하자 정부는 2019년 원광 수출금지라는 광산법을 실행에 옮겼다. 이는 곧바로 무역 마찰을 일으켜 유럽연합은 이 정책을 WTO에 제소했다. WTO는 인도네시아의 광물 수출 규제가 국제 무역 규정을 위반했다고 판시했으며, IMF 역시 수출 제한 조치의 단계적 폐지를 권고했다. 이에 굴하지 않은 채, 조코위 정부는 분쟁 소송의 최종 결과가 나올 때까지 수출 제한 정책을 철회하지 않으리라는 의지를 천명했다. 여기에는 정부의 행보에 대한 국내의 강력한 지지가 한몫을 했다. 소송을 통해 시간을 끌면서 국내에 제련 시설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전략적 고려 역시 작용했다. 또한, 인도네시아 정부의 단호한 태도에 놀란 외국기업이 인도네시아에 전기 배터리 공장 건설을 추진했다는 사실은 자원 민족주의 정책의 효과에 대한 확신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조코위 정부는 석탄, 보크사이트, 구리 등 다른 자원에 대한 수출금지 정책을 추진할 계획을 발표했다. 조코위 정부의 강력한 자원 민족주의 정책은 풍부한 자원을 활용한 경제 개발이 가능할 수 있으리라는 인식을 확대했다. 또한, 자원에 대한 주권적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함으로써, 국가적 자긍심과 경제 발전에 대한 자신감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시각을 바꾸면 다른 해석 역시 가능하다. 우리를 포함한 외국기업의 관점에서 볼 때, 인도네시아의 자원 민족주의 정책은 법적, 제도적 불확실성을 증가시키고 불공정한 경제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제대로 된 투자와 사업을 위협하는 요소이다. 자의적인 정책 변화는 현지 상황에 대해 끊임없이 대응해야 할 필요성을 부과함으로써, 경영상의 어려움을 가중한다. 이런 측면에서 인도네시아의 최근 정책은 자유주의 무역 질서를 위협하는 행보라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외부 압력에 대해 주권 국가로서의 권리를 내세우며 당당하게 대응하는 인도네시아의 모습에서 어떤 부러움을 느끼게 됨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 (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 (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2024-02-05 06:00:00
- [김형준의 indonesia 스토리] 히잡 쓴 배구선수 …한류, 지속가능성을 엿보다 [김형준 강원대 문화인류학과교수] 몇 주 전, 인도네시아 지인이 소셜 미디어인 왓츠앱을 통해 메시지를 보내왔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이기에 기쁜 마음으로 메시지를 열자 흥미로운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유튜브에서 지금 메가와티(Megawati)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순간 인도네시아의 전 대통령으로 현재에도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Soekarnoputri)가 떠올랐고, 그녀가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발표하고 있으리라 예상할 수 있었다. 유튜브 채널을 어디에서 볼 수 있는지를 묻는 다급한 질문에 그는 예상치 못한 사진과 함께 인터넷 주소를 보내주었다. 사진에는 배구 경기장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유튜브 채널에서는 배구 경기가 중계되고 있었고 그 배경은 한국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경기를 친구가 언급한 것도, 메가와티를 거론한 것도 언뜻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영상을 계속 보자 히잡을 쓴 선수를 찾을 수 있었다. 한국 V리그에 등장한 인도네시아 선수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낯선 모습이었다. 이날 메가와티 퍼르티위(Pertiwi) 선수가 소속한 정관장 레드스파크스 팀은 세트스코어 2:3으로 승리하지 못했다. 경기 실황을 전달해주던 인도네시아 친구는 자기 팀이 패배하자 눈물을 흘리는 아이콘을 보냈지만, 경기 중간중간의 메시지를 통해 그가 메가와티에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기에는 선수로서 메가와티의 활약이 큰 몫을 했지만, 그녀가 활동하는 곳이 한국이라는 사실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 한국 여자 배구가 세계 정상을 다툴 정도로 높은 수준에 있지 않음에도, 메가와티에 열광하고 나아가 그녀의 활약에 자긍심을 느끼는 친구의 모습은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이 가진 긍정적 이미지를 투영하지 않고서는 쉽게 설명할 수 없다.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우리나라의 이미지는 지난 20여 년 동안 급격히 변화했다. 과거 인도네시아 사람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고, 큰 관심을 끌지 못했던 국가에서 한국은 누구나 단편적이지만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고 호감을 표명하는 국가로 전환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한류가 놓여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처음으로 인도네시아에서 조사했던 1990년대 초중반, 한국인이라는 소개를 들은 대다수 현지인은 인삼을 언급했다. 우리나라가 인삼의 나라로 불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백여 년의 역사를 가졌기 때문이다. 20세기를 전후하여 한국인 보부상이 동남아 곳곳에서 인삼을 팔며 돌아다녔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이때부터 인삼의 나라라는 정체성은 동남아 여러 지역으로 퍼졌고, 인도네시아 농촌 주민에게까지 각인될 수 있었다. 백여 년이나 지속된 인삼의 나라 이미지는 ‘윈터 소나타’로 알려진 겨울연가가 2000년대 중반 현지 방송을 타며 변화의 흐름에 놓이게 되었다. 이 드라마가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었다면, 곧이어 방영된 대장금은 한국 드라마에 관한 관심을 중장년층으로 확장시킬 수 있었다. 당시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이 ‘장금이’라는 말을 인사말처럼 건넬 정도로 그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인도네시아에서 한류의 흐름을 직접 경험했지만, 한류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내 입장은 부정적이었다. 인도네시아를 연구하면서, 한국 드라마에 내재한 우리의 정서와 행동 양식이 인도네시아 문화와 친화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년 뒤, 이 예상이 완전히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2010년대에 접어들어 한국 드라마에 관한 관심은 영화, 음악, 게임을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확대되었고, 모든 연령층을 한류 소비자로 포섭할 수 있었다. 한류의 장점 중 하나는 그것이 한국적인 특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류의 유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적인 것에 관한 관심과 호감으로 전환했다. 한국 라면과 화장품이 인기를 끈 후 인도네시아 사람의 관심은 한류 속 콘텐츠로 익숙해진 한국 음식으로 이어졌다. 대도시 쇼핑몰을 중심으로 한국 음식점이 우후죽순 세워졌고, 곧이어 거리의 일반 음식점에서도 우리 음식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한국 음식 확산은 소강상태에 접어드는 듯했지만, 그 열기를 억누르지는 못했다. 최근에는 대도시가 아닌 중소 도시로 한국 음식점 확산이 가속화되어서, 자바의 경우 인구 10만명의 소도시에서도 한국 음식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한국에 관한 관심은 인도네시아 사람의 관광 욕구 역시 자극했다. 2019년 사상 최대인 27만명에 달했던 방한 인도네시아 관광객은 코로나 국면을 벗어난 올해 1~10월 사이 19만명으로 급속히 회복하는 추세를 보였다. 같은 기간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한국 관광객이 28만명임을 고려해보면, 양국의 관광객 규모는 흥미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이를 위해 몇몇 동남아 국가의 자료를 살펴보기로 한다. 올 1~10월 사이 태국 방문 한국 관광객은 130만명, 한국 방문 태국 관광객은 31만명이었고, 베트남 방문 한국 관광객은 290만명, 한국 방문 베트남 관광객은 35만명이었으며, 필리핀 방문 한국 관광객은 110만명, 한국 방문 필리핀 관광객은 35만명이었다. 이 자료와 비교해보면, 인도네시아 관광객과 한국 관광객 사이의 편차가 훨씬 작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관광 분야에서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관계가 상당히 호혜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호혜적 관광 활동은 여행지로서의 한국에 대한 인도네시아 사람의 높은 선호도에 기인했다. 2022년 인도네시아 통계청 자료를 보면, 전체 해외 방문자 중 한국 방문자 수는 상위권에 속했고, 인도네시아 사람의 전통적 선호 관광지인 일본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이 자료는 한류의 힘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한류 콘텐츠의 선정성을 문제 삼아 보수적 이슬람 집단이 때로 반한류 정서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인도네시아 사회 일반에서 한류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표출되지 않았다. 내가 만난 공무원, 정치인, 학자에게서도 같은 태도가 나타났지만, 이들과의 대화 중 나를 곤혹스럽게 하는 질문이 있었다. 이들은 한류 확산에 비견되는 상황이 한국에서 전개되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달리 말해 ‘인도네시아류’가 한국 사회에 존재하거나 앞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인도네시아 문화 중 세계적으로 관심받는 대상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독특한 제조 방식, 다양한 색채와 문양으로 유명한 바틱(batik), 셀 수 없는 열대의 향신료가 가미된 음식 른당(rendang), 인도·아랍풍과 말레이풍이 조화롭게 혼합된 대중음악 당둣(dangdut), 공연 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그림자극 와양(wayang) 등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문화 요소 중 어느 것도 우리에게 친숙하지는 않다. 한국의 대형마트에서 인도네시아산 라면인 미고랭(mie goreng)을 찾을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 입맛을 사로잡는 대중 음식으로 자리 잡을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한국 내 ‘인도네시아류’ 가능성에 관한 질문에 나는 얼버무리듯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두 국가 간 문화 교류가 일방향적으로 전개되었고, 앞으로도 그 추이가 크게 변하지 않으리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도네시아 배구선수 메가와티의 한국 리그 참여는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녀의 활약상은 인도네시아 미디어의 주목을 받아서, 소속팀 경기 결과는 신문과 방송의 주요 기사로 보도되었다. 소셜 미디어에는 그녀를 응원하는 수많은 채널과 계정이 만들어졌고, 많은 현지인이 경기를 시청하고 있다. 현지 보도에서 강조되는 측면 중 하나는 그녀가 온몸을 가리는 복장과 히잡을 고수한다는 점이다. 이는 비이슬람권 지역인 한국에서 자신의 종교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당당한 무슬림으로서의 모습을 부각함으로써, 절대 다수가 무슬림인 인도네시아 사람에게 자긍심을 가져다줄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미디어에서 주목하는 또 다른 측면은 그녀의 활약이 한국에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는 점이다. 일정 정도의 과장이 포함되었지만, 미디어 보도에서는 메가와티의 활약상에 대해 한국의 배구 팬 역시 열광하고 있으며, 이들이 그녀의 종교적, 종족적 차이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을 부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메가와티는 한국에서의 ‘인도네시아류’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그려지고 있다. 메가와티가 한국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배구연맹이 올해 처음 도입한 ‘아시아 쿼터제’이다. 여자 배구만을 놓고 본다면, 이 제도를 통해 태국, 인도네시아, 일본, 필리핀 국적 선수가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 모두가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친 것은 아니지만, 메가와티 사례처럼 이들의 한국 리그 참여가 가진 긍정적 영향은 명확하다. 이들의 한국 활동은 이들이 속한 국가 국민에게 자긍심을 가져다줄 수 있으며, 이는 한류가 가진 문제점인 일방향성을 완화할 잠재력을 내포한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 스포츠계의 아시아 쿼터제 도입은 한류에 대해 고민해온 정부나 학계에서 고려하지 못했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아시아권 선수의 한국 활동이 한류의 일방향성을 완화함으로써, 그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데 일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 (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 (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2024-01-04 06:00:00
- [김형준의 indonesia 스토리] 부통령 후보가 된 조코위 장남 …印尼 대선 불안한 그림자 [김형준 강원대 문화인류학과교수] “정치에서는 어떤 일이라도 벌어질 수 있다.” 이는 인도네시아 정치인이 자주 언급하는 말로서, 정당 간 합종연횡이 빈번하고 개인의 소속 정당 교체가 자주 이루어지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동시에 이는 정치적 이념, 도의, 충성보다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정치인의 행보를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가진다. 십여 개의 정당이 경합하는 다당제 체제에서 정당과 정치인 간 연합은 자연스러운 모습이지만, 그 결합과 분리의 양상은 외부인이 쉽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롭게 전개되어왔다. 특히, 2024년 2월 대선에 참가할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 등록을 목전에 둔 지난 10월의 상황은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있다는 말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인도네시아 정치의 본질일 수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 정당 간 합종연횡은 첫 대통령 직선제 선거가 치러진 2004년을 기점으로 하여 인도네시아 정치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1998년 경제 위기로 인해 수하르토 독재 정권이 와해하기 전까지 인도네시아에는 세 개의 정당만이 활동했다. 이후 민주화 과정이 진행되면서 수십 개의 정당이 출현했고, 2004년 대선에 출마한 5명의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 선정 과정에서 정당 간 연합이 가시화되었다. 이런 정치적 현실은 선거법 개정에도 영향을 미쳐서, 후보 난립이 가져올 부정적 영향의 축소라는 명분으로 국회 의석수의 20% 혹은 직전 총선 득표율 25% 이상을 획득한 정당이나 정당 연합만이 대통령 후보를 추천할 수 있게 되었다. 2019년 총선에서 국회의원을 배출한 9개 정당 중 하나만이 20% 이상의 의석을 획득했다는 현실을 고려해보면, 개정 선거법은 대선 후보 배출을 위한 정당 간 연합을 필수적 정치 과정으로 바꿔놨다. 2024년 대선에 참가할 세 명의 대통령 후보는 극적인 장면 없이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첫 번째는 대통령 후보를 단독으로 지명할 자격을 충족하고 있으며 현 조코위 대통령이 소속한 정당인 ‘인도네시아 투쟁민주당’(PDI-P)의 후보, 간자르 프라노워(Ganjar Pranowo)이다. 유권자의 14% 정도가 속한 중부 자바 주지사를 두 차례 역임한 그는 풍부한 행정 경험과 대중적 인기를 지닌 무리 없는 후보라 평가되었다. 두 번째는 2014년과 2019년 두 차례 대선에서 조코위 대통령과 경쟁한 프라보워 수비안토(Prabowo Subianto)이다. 이러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코위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으로 활동했고, 지난 몇 년간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이 세운 정당이 독자적으로 후보를 지명할 수 없었기에, 그는 세 개의 중소 정당과 연대하여 대통령 후보 자격을 얻어냈다. 세 번째 후보는 2017-22년 사이 자카르타 주지사를 지낸 아니스 바스웨단(Anies Baswedan)이다. 다른 후보와 비교할 때, 그의 정치적 정체성은 모호한데, 이는 세 정당의 지지를 통해 대선 후보가 된 현재에도 그의 소속 정당이 없음을 통해서 확인될 수 있다. 지난 10여 년 동안 그는 무소속 정치인으로 여러 정당의 활동에 간여하고 여러 정당의 지지를 받아 출마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그가 가진 높은 개인적 역량과 대중적 지지에 기반을 둔 것으로서, 인도네시아의 독특한 정치 상황을 가감 없이 드러내 준다. 높은 인기를 가진 지도자가 없지만 대통령 후보 배출을 통해 정치적 존재감을 확보해야 하는 정당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식으로 외부 인물을 수혈할 수 있는 것이다. 세 명의 대통령 후보가 상대적으로 큰 무리 없이 등장했던 것과 달리, 이들의 러닝메이트가 될 부통령 선임 과정은 정치적 합종연횡에 익숙한 이들조차 쉽게 상상할 수 없던 상황을 연출했다. 먼저, 집권 여당의 간자르 후보 러닝메이트 선임 과정은 극적인 장면을 기대했던 이들을 실망하게 할 정도로 밋밋하게 진행되었다. 같은 당 소속이면서 부통령감이라는 평가를 오랫동안 받아 온 현직 장관이 후보로 선임되었기 때문이다. 돌발적 상황을 기대하던 이들에게 아니스 후보의 러닝메이트 선택 과정은 만족스러울 만했다. 선정된 인물이 프라보워 후보를 추대한 정당 연합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자기 정당이 지지하는 후보가 아닌 경쟁 후보의 러닝메이트 자리를 꿰찬 것이다. 이 행보는 아니스 후보의 러닝메이트 자리를 노리며 그를 지지하던 ‘민주당’(Partai Demokrat)을 격분시켰다. 민주당은 곧바로 아니스 후보 지지를 철회하고 프라보워 후보 지지로 입장을 선회했다. 그 결과 프라보워 후보를 지지했던 정당과 아니스 후보를 지지했던 정당이 각기 입장을 전환하여 상대방의 자리를 차지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짧은 기간 내에 진행된 이 변화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정치적 논리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예시했다. 민주당이 재빨리 프라보워 후보 지지로 선회한 데에는 그의 러닝메이트가 결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이런 기대와 달리 프라보워 후보는 부통령 지명을 계속 연기했고, 후보 등록 직전에야 중부 자바 수라카르타(Surakarta)의 시장인 36살의 기브란 라카부밍(Gibran Rakabuming)을 러닝메이트로 선정했다. 물론 그의 경력보다 훨씬 중요한 점은 그가 조코위 대통령의 맏아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족벌 정치는 인도네시아의 최근 정치를 특징짓는 요소라 거론되어왔다. 민주화 국면 이후 대통령 자리에 오른 5명의 전·현직 대통령 중 한 명을 제외한 네 명의 자녀들이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만을 고려한다면 조코위 대통령 아들의 지명 역시 어떤 일도 가능하다는 정치적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의 지명은 이전의 합종연횡과는 상이한 평가를 받으며 시민 사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부통령 후보 지명 직전까지 그가 후보 자격을 완전히 갖추었다고 평가될 수 없었던 상황에 기인했다. 인도네시아 선거법에는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의 연령 제한 조항이 포함되어서, 40세 이상의 사람만이 입후보할 수 있었다. 이 기준에서 볼 때, 기브란 후보는 출마 자격을 충족하지 못했고, 이런 이유로 그는 대선 레이스의 주요 구성원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물론 그가 완전히 배제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후보자 연령 제한을 문제시하는 헌법소원이 제기되었고, 대선 후보 등록을 앞두고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예정되었기 때문이다. 상당수의 정치평론가는 이 헌법소원이 기각되고 40세 연령 제한이 존치될 것이라 예상했다. 이는 족벌 정치의 논리를 역으로 적용한 결과였다. 조코위 대통령의 매제라는 친족 관계로 인해 헌재 소장이 자신의 조카인 기브란 후보를 편파적으로 편드는 판결을 내리기 쉽지 않으리라 판단되었다. 상식에 맞아 보였던 이 시각은 결과적으로 정치 논리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헌재는 40세 연령 제한을 합헌이라 판단했지만, 직접 선거를 통해 지자체장으로 선출된 경험이 있는 인물에게 이 조항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예외 규정을 추가했다. 헌재 결정이 발표되자마자 프라보워 후보는 인도네시아 투쟁민주당을 탈당할 여유조차 없던 기브란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했다.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있다는 논리의 적용 범위가 무한대일 수 있음을 단정적으로 보여주는 행보였다. 정당 간 합종연횡에 대한 불만이 강하게 제기되지 않던 이전과 달리 기브란 후보의 선임은 시민 사회의 광범위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기브란의 고모부가 헌재 협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그에게 우호적인 판결을 유도했다는 고백이 헌재 재판관에 의해 제기되면서 비판적 시각에 기름을 부었다. 시민들의 잇따른 제소에 헌재는 윤리위를 소집하여 헌재 소장의 심의 참여가 이해충돌 방지라는 윤리 강령을 위반했는지 검토하기로 했다. 족벌 정치에 대한 관용적 분위기가 기브란에게 적용되지 않은 핵심 이유는 이 문제가 정치에만 국한되지 않고 법의 영역을 포함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라도 정치에서 벌어질 수 있다면, 정치 외적 영역에서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정서가 힘을 받았으며, 이는 정치 영역으로 환류되어 정치적 공모와 결탁, 족벌 정치에 대한 문제 제기로 이어졌다. 수하르토 퇴진 이후 전개된 민주화 과정에 대해 정치 분석가들은 한동안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민주주의가 절차적으로만 실행될 뿐 실질적 진전을 가져오지 못했다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차적 차원의 민주주의가 20여 년 동안 이어지고, 평화적 정권 교체가 계속됨에 따라, 인도네시아 정치를 보는 시각 역시 조금씩 변화했고, 동남아에서 가장 모범적인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다는 평가가 제시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수하르토 퇴진 당시 제기된 정치적 담합과 족벌 정치 반대라는 구호가 25년이 지난 현재 다시 터져 나오고 있는 상황은 그동안 진전되고 있다고 믿어졌던 민주주의의 기반이 여전히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국가의 폭력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시민 사회의 불만이 대규모로 표출되지 않는다고 해서 민주화의 진전을 의미한다고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향후 대선 레이스 과정은 인도네시아의 정치적 역동성을 파악할 기회를 제공해 준다. 프라보워-기브란 후보의 대선 가도 성공 여부는 어떤 일이라도 벌어질 수 있다는 정치적 논리가 유효한지를 확인해 줌으로써 인도네시아 민주화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는 지시계로 작용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 (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 (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2023-11-08 06:00:00
- [김형준의 Indonesia 스토리] '항공기 생산국' 인도네시아의 딜레마 [김형준 강원대 문화인류학과교수] 인도네시아 도심의 거리는 자동차와 오토바이로 가득 차 있다. 교통 체증 속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이려는 차량이 뒤엉켜 연출하는 혼돈의 모습은 인도네시아의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관련 통계를 보면, 교통지옥의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100만 인구의 자카르타를 예로 들면, 2022년 등록 자동차 수가 360만대, 등록 오토바이가 1700만대 정도였다. 자동차만 놓고 볼 때 320만대가 등록된 서울과 큰 차이가 없지만, 여기에 다섯 배나 많은 오토바이를 추가하면, 주민 수의 두 배에 육박하는 차량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셈이라 할 수 있다. 오토바이는 인도네시아인이 선호하는 교통수단이다. 승용차보다 가격과 운행비가 저렴하고 교통 체증에서도 재빠르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1억3000만대의 오토바이가 등록된 최근 상황은 그리 오래된 모습이 아니다. 소득 증가에 비례하여 오토바이 역시 증가했기에 20여 년 전에는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2000만대 정도만이 등록되었을 뿐이다.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오토바이가 부의 과시 수단이던 1990년대, 도로를 보며 떠올린 궁금증은 오토바이의 절대다수가 일본 제품이라는 점이었다. 혼다, 스즈키, 야마하 오토바이로 가득 채워진 도로의 모습에서 무언가 석연치 않음을 느꼈다. 수입대체 산업화라는 경제발전 모델에 익숙한 내게 있어 오토바이 국산화가 진행되지 않았음은 인도네시아 경제의 한계를 드러내는 듯했다. 국산 오토바이가 부재한 상황에 관해 현지인들은 명확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았다. 일본산 오토바이의 품질이 뛰어나기에 국산 오토바이를 고집하기보다는 수입하는 편이 낫다는 식의 설명을 가장 많이 들었다. 여기에서는 선진국과의 기술력 차이를 쿨하게 인정하는 듯한 현실 안주적 태도를 읽을 수 있었다. 이에 국산 오토바이의 부재가 기술적 후진성이나 종속성과 연결되지 않느냐는 조금은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을 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을 듣게 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 항공기를 자체 제작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리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비행기를 인도네시아에서 자체 제작한다고? 자전거에서 시작하여 오토바이, 자동차 순으로 차근차근 축적한 기술력에 기반하여 항공기 생산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내게 현지인의 주장은 어불성설에 가까웠다. 이들의 답변은 터무니없었지만, 이들이 제시한 근거는 상당히 설득력 있었다. 유학 후 독일에서 일하던 천재 엔지니어인 하비비(Habibie)를 당시 대통령 수하르토가 귀국시켰고,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그가 항공기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관련 정보를 조금 찾아보자 이들의 말이 거짓이 아님이 드러났다. 또한, 1995년 N250으로 명명된 비행기가 시험운항에 성공함으로써 인도네시아는 항공기 생산국 반열에 올랐다. 이런 이유로 항공기 제작은 인도네시아인에게 있어 국가적 자긍심의 원천이었고, 오토바이를 만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지 않는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제공했다. 야심 차게 시작한 인도네시아의 항공 산업은 1997년 경제위기라는 복병을 만났다. IMF의 요구에 맞추어, 항공 사업을 전담하던 국영기업은 예산 낭비의 전형이라는 불명예를 받으며 해체되었고, 관련 전문인력은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이런 절망적 상황이 항공 산업에 대한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2000년대 초 경제 상황이 조금 호전되자 정부는 해체된 기업을 ‘인도네시아 항공회사’(Dirgantara Indonesia)로 재편하여 출범시킴으로써, 항공 산업에 대한 의지를 재천명했다. 인도네시아 항공회사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모습을 접하게 된다. 수송기와 여객기 등 다목적으로 활용되는 쌍발 프로펠러 비행기 4종의 사진이 첫 화면을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품 섹션에는 4종의 헬리콥터가 추가로 소개되어 있다. 일반적인 상품 카탈로그와 달리 그 가격이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언론 보도를 통해 주력 판매 기종인 N219의 가격이 미화 6~800만 달러, 이보다 사양이 좋은 CN-235가 2500만 달러 정도임을 확인할 수 있다. 국가적 자긍심의 원천으로서 현지 언론은 인도네시아 항공 산업에 많은 관심을 드러냈고, 특히 그 수출 현황을 자주 기사화했다. 보도에 따르면, 2022년을 기준으로 286대의 CN-235가 인도네시아뿐 아니라 베네수엘라, 세네갈, 아랍에미리트, 파키스탄, 터키, 네팔, 말레이시아, 태국, 브루나이 그리고 한국에서 운용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 항공회사 홈페이지에서 한국은 단순한 항공기 수입국 정도가 아니라 CN235 기종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도입한 나라로 소개되어 있다. 자국 항공기에 대한 자부심을 언론 보도에서 찾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도네시아 항공 산업의 전망이 그리 밝은 것은 아니다. 자료를 보면, 설립 후 2020년까지 축적된 손실 규모가 약 18조 루피아(1조5000억여 원)에 이르렀고, 설립 후 단 한 차례 1000만 달러 정도의 이익을 냈을 뿐이다. 막대한 적자는 최근 항공회사 사장의 갑작스러운 해임의 원인이 된 듯하다. 뇌물과 같은 뚜렷한 근거 없이 공기업 사장을 해임하는 일이 극히 이례적임을 고려해보면, 인도네시아 항공 산업에 대한 정부의 부정적 시각이 여기에 투영된 것처럼 보인다. 한 일간지 기사는 인도네시아 항공 산업을 ‘살리기에도 내키지 않고, 죽는 것도 원하지 않는’이라는 현지 속담에 빗대어 설명했다. 계속된 적자에 시달리고, 급속한 경쟁력 제고가 불가능하며, 내수 판매 증가를 위해 필요한 소형 기종이 부재하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었으며, 항공 산업에 대한 정부 지원이 축소되고 정책 지향점이 드론 개발로 전환되고 있다는 설명이 부가되었다. 반면, 항공기 제작 역량을 오랫동안 축적해왔고, 항공 산업이 기술 혁신의 파급력이 큰 전략 산업이며, 소형 항공기에 대한 국내 수요가 꾸준히 확대되고 있다는 점은 이를 쉽게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으로 거론되었다. 여기에 국가적 자긍심과 항공 산업의 긴밀한 관련성을 추가하면, 순수한 경제적 관점만으로 항공 산업을 바라볼 수 없는 인도네시아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인도네시아가 항공기 생산국이라는 사실을 거의 인지하지 못하는 우리에게도 한국형 전투기(KF-X) 사업에 인도네시아가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언론 보도를 정리하면, 인도네시아는 전체 개발비의 20%인 1조7000억원을 투자하고 우리의 기술을 이전받아 현지에서 전투기를 생산하기로 2016년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는 이후 자신의 책무를 충족하지 못했다. 2019년까지 약 2000억원을 지급한 후 납부를 멈췄고, 작년과 올해 500억원 정도만을 지불하는 생색을 냈을 뿐이다. 항공기 공동 생산이 국가 간 협약에 기초하기에, 분담금 미납은 국제관례에 어긋날 뿐 아니라 상도의에도 맞지 않는 것으로 비쳤다. 이에 인도네시아에 대한 비판적 태도가 비등해졌고, 인도네시아를 배제한 채 우리의 예산만으로 전투기 사업을 완결짓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분담금 유예의 배경은 명확하지 않다. 팬데믹으로 인한 예산상의 어려움이 표면적 이유였지만, 인도네시아의 경제회복은 우리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었다. 게다가,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에 따르면, 분담금 유예 상황에서도 인도네시아는 미국과 프랑스 전투기 구매를 위한 양해 각서를 체결하기까지 했다. 무언가 일이 부드럽게 진행되고 있지 않음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도네시아 정부가 우리와의 계약을 파기하려는 것 같지는 않다. 2021년 개최된 KF-21 보라매 출고식에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영상 축사를 전달했고, 한국을 방문한 인도네시아 국방부 장관이 조속한 문제 해결을 약속했음은 계약 파기를 의도한다고 판단하기 어렵게 한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행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국 항공 산업에 대한 ‘살리기에도 내키지 않고, 죽는 것도 원하지 않는’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발을 빼기를 원치 않는 모습이 우리와의 협약을 바라보는 주도적 태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갈지자 행보는 우리에게 있어 당혹스러운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단순화시켜 이해할 필요는 없다. 또한, 이 문제를 바라볼 때 잊지 않아야 할 측면은 정해진 계약이라도 상황변화에 따라 재협상이 가능하다는 인도네시아식 행동 양식이 외교에도 적용된다는 점이다. 지속적 협의를 중시하는 인도네시아의 전략을 염두에 둘 때, 우리가 먼저 나서서 명확한 행보를 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한국형 전투기 개발 일정이 구체화할수록 더욱더 애가 타는 측은 인도네시아이기 때문이다. 항공 산업 발전에 대한 관심이 깊고, 항공 산업이 국가적 자긍심으로 자리 잡은 인도네시아에서 전투기 제작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매력적인 사업일 수밖에 없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 홈페이지를 보면, 우리 항공 산업에서 인도네시아가 차지하는 중요한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처음 개발한 국산 훈련기 KT1, 그리고 초음속 고등훈련기 T50의 첫 수출 대상국이 인도네시아였기 때문이다. 우리 항공 산업의 역사와 발을 맞추어 왔다는 사실에 더해 인도네시아가 커다란 시장 잠재력을 가진 곳이라는 사실 역시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최선의 대응책은 여유를 가지고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인도네시아의 참여를 독려하는 방식일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 (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 (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2023-09-13 06:00:00
- [김형준의 Indonesia 스토리] 혼전 성관계 금지 印尼 새 형법.. '다원성'과 줄다리기 [김형준 강원대 문화인류학과교수] 우리 언론의 인도네시아 관련 보도는 과거와 비교해 꾸준히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교류 확대에 발맞추어 다양한 분야에서 인도네시아 관련 뉴스가 보도되기 때문이다. 이런 뉴스 중 상당수는 일부 언론의 단편적 보도로 끝나지만, 예외적인 경우도 찾을 수 있다. 많은 언론이 동일한 뉴스를 반복적으로 재생산함으로써, 인도네시아에 대한 우리의 인식 형성에 일정한 역할을 하게 된다. 언론에서 선호하는 인도네시아 뉴스는 크게 세 범주로 나뉠 수 있다. 첫째는 우리와 직접 연관된 것으로, 대통령 순방 관련 기사가 대표적이다. 인도네시아 신수도 이전에 대한 올해 초 보도 역시 이 범주에 속한다. 둘째는 자연재해 관련 뉴스이다. 불의 고리라고 불리는 환태평양조산대에 놓여 있다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일년에도 여러 차례 대규모 지진과 쓰나미, 화산 폭발 등이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하기에 관련 기사를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마지막은 우리에게 상당히 ‘이색적으로’ 느껴지는 뉴스이다. 작년 말, 이런 성격을 띤 소식이 언론의 관심을 끌었는데, 혼전 성관계를 징역형으로 처벌하는 인도네시아의 형법 개정이었다. 이 보도는 이색적임과 동시에 당혹스러움을 가져오기도 했는데 개정안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하는 외국인에게도 적용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인도네시아를 관광하는 외국인 커플이 혼인 증명서 없이 호텔에 투숙할 때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추측으로 인해 형법 개정은 우리뿐 아니라 국제적인 뉴스거리가 되기도 했다. 개정 전 인도네시아 형법은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에 제정된 법률의 기본틀을 유지한 채 부분적인 수정만이 가해진 상태였다. 이로 인해 형법을 개정하자는 요구가 오랫동안 제기되었지만, 1990년대에 접어들어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고, 그 후 20여 년이 흐른 뒤에야 새로운 형법 체계가 완성되었다. 개정안 초안이 몇년 전 처음 공개되었을 때 시민 사회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그에 대한 반대는 점차 수그러들었고, 소수 조항만이 막판까지 문제시되었다. 대통령과 국가 기관에 대한 모독죄, 허위 뉴스나 유언비어 유포죄 등과 같이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조항과 비교할 때 인도네시아 국민의 핵심 관심사는 아니었지만, 혼전 성관계 금지 역시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이슈였다. 개정 전 형법에서 다루던 문제는 간통죄로서 기혼 남녀가 연루된 혼외 성관계는 기소의 대상이었고 최고 9개월의 징역형이 선고될 수 있었다. 개정 형법에서는 미혼 남녀의 성관계를 간통과 같은 범주로 취급할 뿐 아니라 혼전 동거 역시 범죄로 규정했다. 결과적으로 개정 형법은 혼인을 매개로 하지 않는 모든 성관계를 불법화한 셈이었다. 그에 대한 처벌 역시 강화되어 최고 1년의 징역형이나 벌금형 선고가 가능해졌다. 백년 이상의 전통을 지닌 간통죄와 달리 혼전 성관계는 개인의 자유, 사생활 보호와 관련되어 논란을 일으켰다. 국가가 개인의 사생활에 어느 정도까지 간섭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대해 개정 형법은 국가의 개입권을 인정했는데, 여기에는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은 논리, 즉 성관계를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나 사생활 문제로 치부할 수 없다는 시각이 작동했다. 이러한 논리를 뒷받침한 근거 중 하나는 인도네시아 농촌 지역의 전통 관행이었다. 인도네시아 농촌 마을은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직접적이고 집합적으로 대응하는 전통을 유지해왔다. 마을 구성원에 대한 외부인의 공격이나 절도는 외부 위협의 전형적 사례인데, 여기에 마을 외부 남성과 마을 여성 간 교제가 포함되기도 했다. 폭력이나 절도와 비교할 때 이성 교제는 훨씬 복잡한 문제로서 공동체적 대응을 필연적으로 유발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공동체적 대응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는 사실의 중요성은 간과될 수 없다. 혼전 성관계가 개인의 문제가 아닌, 가족, 이웃, 나아가 지역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공적 문제라는 인식에 기반을 두고 혼전 성관계를 범죄화하려는 주장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형법 개정을 지지한 측이 제시한 두 번째 논거는 종교로서, 이들은 인도네시아 국민의 절대다수인 87% 정도가 무슬림이며 이슬람에서 혼외 성관계를 금지한다는 사실을 거론했다. 나머지 13%에 해당하는 비무슬림과 관련하여 이들은 인도네시아의 국가 이념 중 하나가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고 모든 종교에서 프리섹스를 금기시하고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혼전 성관계 금지의 보편적 성격을 부각하고자 했다. 형법 개정안을 뒷받침하기 위해 관습과 종교가 이용되었지만, 그중 이슬람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 종교 중 이슬람에서 혼전 성관계를 가장 명확하게 금지하기 때문이다. 또한, 혼외 성관계를 지칭하기 위해 개정 형법에서는 토착어 대신 ‘지나’(zina)라는 아랍어 표현이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법 개정안에 이슬람 교리가 온전하게 적용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혼전 성관계에 대한 이슬람식 처벌 방식인 태형이 개정안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교리가 반영되었지만, 부분적으로만 적용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도네시아에서 전개되어 온 종교적 변화를 살펴보아야 한다. 1980년대 이후 인도네시아에서는 이슬람 교리를 일상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무슬림이 급증했다. 이슬람 부흥 혹은 이슬람화라고 불리는 이러한 움직임은 사적 영역에서 먼저 시작해서, 매일 5차례의 기도, 1년 중 한 달간의 금식과 같은 의무를 충족하고자 노력하는 무슬림의 규모가 확대되었다. 이런 상황이 어느 정도 진행되자, 이슬람화의 영향력은 2000년대에 접어들어 공적 영역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였다. 외부인이 이런 변화를 쉽게 감지할 수 있었던 사건 중 하나는 2010년대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를 통해 시행된 편의점에서의 주류 판매 금지였다. 무슬림 다수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이런 규정이 최근에야 제정되었음에 혹자는 놀라움을 표할 수도 있지만, 어디에서나 쉽게 접근할 수 있던 술을 특정 마트나 식당으로 제한했다는 점에서 가시성을 지닌 행보였다. 외부인과 직접 연관되지 않는 영역에서는 이슬람적 성격을 더욱 강하게 띠는 조례가 제정되었다. 학교 진학이나 공무원 임용 과정에서 경전 낭송 능력을 의무화하거나, 금요 예배 참여와 이슬람식 의복 착용을 강제하거나, 마사지 시설과 도박을 금지하거나, 심지어 여성의 외부 출입을 제약하는 조례가 만들어졌다. 국가적 수준에서는 2014년 할랄제품보장법이 국회를 통과해서, 국내에서 유통되는 모든 상품에 할랄 인증, 즉 이슬람 교리상 허용되는 재료를 사용했음을 표기하도록 의무화했다. 이슬람의 요소가 지방 조례나 국가법에 적용되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이슬람법이 국가법 체계에 충분히 스며들었다고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슬람의 요소가 이분법적 방식이 아닌 절충적인 방식으로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할랄제품보장법을 예로 들면, 이 법은 할랄 인증 표기를 의무화했지만,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는 제품의 유통 자체를 불법화하지 않았다. 그 결과 술과 돼지고기와 같이 이슬람에서 금지한 물품의 판매가 용인되었다. 혼전 성관계 금지 조항에서도 절충적인 성격을 찾을 수 있다. 개정안에 따르면, 혼전 성관계는 부모나 자녀의 고소를 통해서만 공소 제기가 가능한데, 이는 혼전 성관계가 현실에서 범죄시되기보다는 성관계를 맺은 남녀에게 결혼을 강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큼을 시사한다. 혼전 성관계 사실이 알려지거나 여성이 임신했을 때 이들의 결혼을 압박하는 공동체적 압력이 과거에도 작동했음을 고려해보면, 개정안은 이런 관습을 뒷받침하는 추가적 압박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 혼전 성관계 금지 조항의 삽입은 인도네시아에서 진행되어 온 종교적 변화와 같은 궤에 놓여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이슬람 교리를 국가법 체계에 편입시키려는 시도의 일환으로서, 국민의 절대다수가 무슬림이라는 현실이 법 제정에 고려되어야 한다는 이슬람 세력의 주장을 담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개정 형법은 절충적인 내용을 내포함으로써 인구의 13%가 비이슬람 교도라는 인도네시아 사회의 다원성을 인정하고 있다. 이처럼 두 입장이 공존함으로써 인도네시아 사회는 아직 강한 이슬람의 색채로 채워져 있지 않다. 이슬람과 다원성의 줄다리기가 계속되는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정치경제적 안정 상태가 지금처럼 유지될 때, 그 균형추가 이슬람 쪽으로 급격히 이동하지 않으리라는 점은 명확한 듯하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 (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 (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2023-07-13 06:00:00
- [김형준의 Indonesia 스토리] 인도네시아의 新수도 '누산타라' 언제쯤 실현될까 김형준 교수] 2014년 임기를 시작하여 재선에 성공한 조코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기 직전인 2019년 8월 수도 이전 계획을 발표했다. 2000년대 후반 이후 수도 이전 문제가 간간이 제기되었기에 혁신적인 정책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인도네시아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계획을 두 번째 임기를 목전에 두고 발표하리라고는 쉽게 예상할 수 없었다. 신수도는 칼리만탄섬 동부로 낙점되었는데, 이곳은 인도네시아 국토의 정중앙에 위치한 지역이다. 신수도의 명칭은 누산타라(Nusantara)로 정해졌다. 산스크리트어에 기원을 둔 이 표현은 군도를 의미하며, 수많은 섬으로 구성된 인도네시아를 지칭하는 토착적 표현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신수도의 위치와 명칭은 다양성에 기반을 둔 인도네시아 사회의 통합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야심 차게 시작된 신수도 프로젝트는 코로나라는 복병을 만나 동력을 상실하는 듯했다. 사그라드는 불씨를 살려내기 위해 조코위 대통령은 2021년 9월 신수도법 제정을 요청했고, 2022년 초 8개 원내 정당 중 7개 정당의 찬성으로 의결되었다. 법안 통과 후 채 4개월이 지나지 않아 수도 이전을 담당할 신수도청이 발족하여 구체적 행보를 시작했다. 다른 법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기간 내에 신수도법이 제정되고, 이례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신속하게 신수도청이 구성된 점은 신수도 프로젝트에 대한 대통령과 정치권의 강한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신속한 일 처리 과정과 달리 2024년을 기점으로 조코위 대통령의 공언처럼 신수도가 출범할 수 있을지는 불명확하다. 수도 이전의 첫 단계에 포함된 대통령궁 이전과 2024년 8월 17일 독립기념식 개최는 어느 정도 실현 가능한 듯하다. 하지만, 다양한 이익 집단이 의사결정 과정에 개입할 수밖에 없는 3~4개 행정부처의 이전이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지는 명확하지 않으며 그 이후의 상황은 더욱 불투명하다. 인프라 구축에 걸리는 시간이라는 현실적 문제보다 이러한 불확실성을 초래한 주된 이유는 조코위 대통령의 임기가 2024년 끝나며 실질적 이전 과정이 차기 대통령에 의해 주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수도에 대한 공감대가 널리 확산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의 임기 만료는 신수도의 운명이 차기 권력에 의해 좌우됨을 시사한다. 신수도 이전의 근거로 우리 언론에서 주목한 측면은 현 수도인 자카르타의 지반 침하 문제이다. 추산 방식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연간 많게는 25㎝부터 적게는 5㎝ 내외까지 지반이 내려앉고 있으며, 바다에 접해 있는 북부 지역 대부분이 해수면보다 낮아질 정도로 자카르타가 심각한 위기 상황에 봉착해 있다는 것이다. 지반 침하를 초래한 인구 밀집과 과도한 도시화가 단기간에 해결될 수 없는 상황에서 신수도 이전은 불가피한 선택으로 비칠 수 있다. 매년 25㎝씩 가라앉는 자카르타를 보면서 신수도와 같은 근본적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이는 정치인의 책임 회피로 규정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언론에서 지적하는 신수도 이전의 당위성을 인도네시아 사람이 같은 정도로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조코위 대통령에게조차 적용될 수 있어서, 신수도 이전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는 지반 침하를 거론하지 않았다. 그가 주목한 점은 지역 간 격차, 즉 자카르타로 대변되는 자바와 자바 외부의 도서 지역 사이의 불균형 해결이었으며, 인구 과밀과 환경 문제가 추가로 거론되었을 뿐이다. 지반 침하가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외부의 인식과 달리 인도네시아 사람에게 있어 그것이 절체절명의 문제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북부 해안가의 침수를 직접 경험하고 있는 자카르타 주민이 이 문제를 경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신수도 이전이 필수적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대형 방파제를 건설하고 제방을 높이 쌓는 것과 같은 기술적 방식을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식의 인식이 널리 유포되어 있다. 이러한 낙관적 태도는 신수도 이전의 당위성을 설득하는 데 제약으로 작용한다. 지반 침하와 비교할 때, 수도권으로 집중된 개발과 그에 따른 문제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런 이유로 조코위 대통령 역시 개발 격차를 신수도 이전의 핵심 논리로 설정했다. 하지만, 국토의 균형 발전이라는 논리를 통해 신수도 이전을 정당화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균형 발전을 모색할 방안이 반드시 신수도 이전이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신수도 이전 담론이 경제 문제를 중심으로 진행됨으로써 환경 문제가 내포하는 절박함이나 필연성을 부각하기에는 한계가 있는데, 바로 이런 맥락에서 신수도에 대한 인도네시아 사람의 인식을 이해할 수 있다. 신수도 계획 발표 후 실시된 여론 조사 결과는 대략 찬성 40%, 반대 40%, 보류 20%였다. 신수도 법안이 공포된 후 시행된 여론 조사에서도 큰 변화가 표출되지 않아서 2022년 후반부로 갈수록 찬성 견해가 조금 높아지는 경향이 나타나는 정도였다. 이러한 결과는 신수도 프로젝트가 상당한 정도의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다는 평가를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이 자료를 해석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측면은 지난 몇 년 동안 조코위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60%대를 유지했고 때로 70% 이상을 기록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압도적인 지지세와 비교한다면, 신수도에 대한 지지도는 높은 편에 해당하지 않는다. 대통령을 지지하는 지지자 중 상당수가 신수도 이전에 반대하거나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적절하다. 신수도 이전이 자신의 지지율에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인지함에도 조코위 대통령은 이전의 당위성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려 하지 않았다. 이미 입법화가 이루어지고 신수도청이 출범함으로써 신수도 이전이 되돌릴 수 없는 정책으로 확립되었다는 인식이 소극적 행보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법적·제도적 불확실성의 해소 여부와 관계없이 신수도의 운명을 가름할 핵심 요소는 조코위 대통령의 임기가 2024년 종료된다는 사실이며, 이로 인해 이전을 둘러싼 불확실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이전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신수도의 미래에 대해 고려할 때 차기 대통령의 입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2024년 대선을 앞두고 세 명의 후보자가 선두에 서 있다. 한 명은 조코위 대통령과 같은 정당의 후보자이고, 다른 한 명은 조코위 정부의 국방부 장관이며, 다른 한 명은 전직 자카르타 주지사이다. 이들 세 명의 유력 후보자뿐만 아니라 출마가 예상되는 다른 후보자 모두 신수도 이전에 대해 지지를 표명했다. 수도 이전을 강하게 반대하는 정당이나 시민사회 단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누구도 신수도 이전이 계획에 맞추어 진행되리라고 확신하지 못한다. 앞서 지적한 대로 신수도 이전이 대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수도 이전이 한국과 달리 육로로 연결된 지역으로의 이전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 직선거리로 자카르타에서 대략 1300㎞ 떨어져 있으며, 바다를 건너 2시간 이상 비행기로 날아가야 도착할 수 있는 지역으로 거처를 옮겨야 하는 공무원에게 있어 이전은 생각해보고 싶지 않은 선택지이다. 이들 중 누구도 반대 의사를 드러내지 않지만, 누구도 신수도로의 이전을 기정사실화하지 않고 있다. 조코위 대통령이 제안한 단계적 이전 계획 역시 그 표면적 명확성에도 불구하고 모호함을 내포하고 있다. 임기 내 이전을 촉진하기 위해 그는 대통령궁 건설과 이전을 첫 단계로 설정했지만, 대통령은 신수도에, 절대 다수의 국무위원은 자카르타에 있는 상황에서 국무회의를 어떻게 진행할지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이유로 차기 대통령의 행보를 기다려보자는 태도가 주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자바의 농촌에서 현장 조사를 수행할 때였다. 당시 경험한 특이한 상황 중 하나는 집과 모스크, 학교와 같은 건물을 짓는 과정이었다. 집짓기를 예로 들면, 주민 누구도 필요한 자금을 모두 모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비를 피할 정도의 구조물을 건립할 자금이 모이면, 이들은 집짓기를 결행했다. 원하는 만큼의 구조물을 만든 후 자금이 떨어지면 이들은 아직 완공되지 않은 집으로 이사했다. 여기에 살면서 여유 자금이 생길 때마다 이들은 유리창을 설치하고, 벽에 시멘트를 바르고, 바닥에 타일을 까는 등 보수 공사를 지속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했기에 집짓기를 시작하고 십여 년이 흐른 뒤에야 집을 완공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집을 완공할 자금을 모을 때까지 기다리기보다는 일단 시작하는 것이 효율적인 시간 이용이며 완성되지 않은 집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이점이 존재한다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 방식이었다. 일반인에게 익숙한 이러한 집짓기 방식은 신수도 이전 과정을 예상해보기 위해 적용될 수 있다. 여기에서 핵심은 언제까지 이전을 완결지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차기 대통령이 신수도 이전에 소극적이라면, 이전의 속도는 늦추어지게 될 것이다. 이전에 적극적인 대통령이 다시 출현한다면 그 과정은 보다 신속하게 진행될 것이다. 신수도 이전이 입법화됨으로 인해 그 이행 속도를 대상으로 논란이 발생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언젠가 미래의 한 시점에 신수도 이전이 완성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갖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겨질 것이며, 이 시기가 도래하기 전까지 자카르타는 수도로서의 역할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 (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 (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 Universitas Padjadjaran 객원교수 2023-05-25 06:00:00
- [김형준의 Indonesia 스토리] '기회의 땅' 인도네시아의 성장 잠재력 김형준 교수] 아주 오래전 인도네시아를 인도와 혼동하는 경우를 우리 주변에서 접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인도네시아를 연구하려는 필자에게 이슬람이 아닌 불교에 관해 이야기하는 지인을 만날 수 있었다. 2000년대 접어들어 인도네시아와 교류가 확대됨에 따라 이런 착각은 사라졌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발리가 인도네시아에 속한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여전히 가능하다. 우리 사회에서 인도네시아를 특징짓는 확립된 이미지나 키워드를 특정하기는 쉽지 않다. 베트남 쌀국수와 같이 우리에게 각인된 인도네시아 음식이 없으며, 발리를 제외하고 우리가 쉽게 떠올릴 관광지 역시 흔치 않다. 우리와의 인적 교류 규모가 매년 50만여 명에 이르고, 우리의 10대 수출입 파트너에 포함된 적이 있을 정도로 핵심 교역국에 속하며, 인도네시아 출신 노동자 수만 명이 우리 산업 현장을 지키고 있음에도 우리와 인도네시아 관계는 술에 물 탄 듯 어정쩡한 성격을 띠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인도네시아를 직간접적으로 접해 보았거나 그에 대해 관심을 가진 한국인 사이에서는 공유되는 이미지가 있는 듯하다. 풍부한 잠재력을 가진 기회의 땅으로 인도네시아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것이다. 이 시각은 특히 지난 정부 때 신남방정책을 추진하면서 뚜렷하게 표출되었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기회의 땅이라는 이미지가 최근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필자가 인도네시아를 처음 연구한 1990년대 초에도 인도네시아의 잠재력을 거론하는 경우를 자주 접할 수 있었다. 1990년을 전후로 하여 정치적 안정 속에서 급격한 경제성장을 기록했던 인도네시아를 ‘아시아의 네 마리 용’에 빗대 ‘아시아의 호랑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1997년 인도네시아를 엄습한 외환위기 여파는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200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경제가 정상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2008년 금융위기 영향을 받지 않고 꾸준히 경제성장을 이어가자 잠재력 담론이 다시 부상했다. 하지만 외환위기를 거치며 기회의 땅이 일순간 상실의 땅으로 전환되는 모습을 목격한 필자에게 있어 변화의 조짐은 그리 큰 의미를 가진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멀지 않은 어느 순간 또다시 반전이 일어나리라는 비관적 시각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201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진부한 수사처럼 여기던 표현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인지할 기회를 조금씩 축적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를 연구하며 자주 현지를 방문했고, 지인들과 식사하면서 자료를 구했다. 만났던 사람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어떠하든 식당에서 음식값을 계산한 쪽은 항상 필자였다. 한국과의 경제적 격차 때문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음식값을 내겠다고 고집하는 지인이 나타났다. 최근 들어 이런 경우는 더욱 빈번해졌을 뿐 아니라 우리 기준으로도 적지 않은 금액을 선뜻 지불하는 상황 역시 발생했다. 인도네시아 사람의 경제적 삶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체감하도록 하는 모습이었다. 또 다른 경험은 한국 방문과 연관된다. 2010년대 중반까지 필자가 알던 인도네시아 사람 중 한국 기관의 초대 없이 한국을 방문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랬기에 현지에서 만난 사람에게 한국에 놀러 오라는 공수표를 날리는 일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상황이 급변해서 코로나 이전 몇 년 동안 한국을 방문한 인도네시아 사람과 매년 몇 차례씩 관광지를 돌아다녀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들 중 다수는 현지 소속 기관에서 여행비를 받았지만 일부는 자부담 여행객이었다. 저비용항공사 취항으로 인해 항공료가 낮아졌다 하더라도 체류비를 생각해보면 해외여행의 경제적 부담을 이들이 이전과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인도네시아의 꾸준한 경제성장과 연관 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5% 이상의 경제성장은 코로나 기간을 제외하고 지속되었다. 15년 이상 이어진 ‘고도’ 성장은 과거 경험해보지 못한 현상으로서 더욱 많은 일반인이 경제성장의 과실을 누리며 라이프스타일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지속적인 고도 성장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가 적절한 것만은 아니다. 높은 성장을 지속했다고 해보았자 1인당 국민소득은 4000달러대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2003년 1000달러, 2008년 2000달러, 2019년 4000달러 돌파라는 국민소득 추이는 여러 평가를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이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지역 간 격차가 고려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2019년 1인당 소득이 가장 높은 자카르타의 소득은 1만9000달러에 달했던 반면 가장 낮은 지역은 2000달러 수준이었다. 지역적 편차에 더해 2억8000만여 명이라는 인구 역시 감안해야 한다. 전체 인구 중 20%라 하더라도 우리 인구보다 많기 때문이다. 기회의 땅으로서 인도네시아의 잠재력이 무엇인지를 여러 각도에서 검토할 수 있다. 요즘 유행하는 ‘챗GPT’에 이를 묻자 풍부한 자연 자원, 인적 자원, 그리고 전략적 위치가 거론되었다. 알기 쉽게 정리한 내용이지만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세 측면 모두 오랫동안 인도네시아를 기회의 땅으로 여기도록 만든 요소였기 때문이다. ‘땅에 지팡이를 꽂아도 몇 년 안에 아름드리 나무가 된다’는 인도네시아 속담이 있다. 인도네시아 자연환경이 얼마나 비옥한지를 비유하는 말이다. 고무, 야자수, 커피, 목재 등 세계 생산량 최상위권에 놓인 인도네시아 농산물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니켈, 석탄, 주석, 구리, 보크사이트 등 생산도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상위권에 속하며 원유와 천연가스 매장량 역시 풍부하다. 인도네시아 인구가 2억8000만여 명으로 세계 4위에 자리매김함은 인적 자원의 풍부함을, 인도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인 말라카 해협이 인도네시아에 위치하고 있음은 지정학적 중요성을 요약한다. 풍부한 자원과 전략적 위치는 인도네시아를 오랫동안 기회의 땅으로 바라보도록 만든 요인이었다. 최근 변화를 체감하면서 이러한 잠재력의 실현 가능성을 보다 낙관적으로 평가하게 되었고, 무엇인가 중요한 변화가 이 기회의 땅에서 전개되고 있지 않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잠재력의 세 측면 중 먼저 거론할 영역은 인적 자원이다. 2010년 이전까지 대학 교육을 받은 인도네시아 사람은 전체 인구 중 10% 미만이었던 반면 최근 대학 진학률은 30%에 근접한다. 이는 소득 증가가 교육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고 인적 자원의 풍부함을 단순한 인구 규모가 아니라 높은 교육을 받은 양질의 노동력으로 전환하여 설명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자원에서 나타난 변화는 자연 자원의 풍부함 그 자체가 아니라 관리 방식이다. 2010년대 이후 인도네시아는 실질적 민주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절차적 차원의 민주주의를 공고히 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민주화된 정부하에서 자원 민족주의 경향이 강화되었고 1차 가공을 거치지 않은 원자재의 수출을 금지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 정책은 자연 자원에 부가가치를 추가함으로써 더욱 효율적으로 이를 활용하려는 의도를 지녔다. 국내외적 상황으로 인해 정책 수행이 원활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언론에도 보도된 것처럼 국내 가격 상승을 명분으로 야자유 수출 금지라는 강수를 정부가 둘 수 있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 과정을 거치며 자원의 풍부함은 관리되는 자원의 풍부함으로 전환되고 있으며 그 과실이 더욱 많은 사람에게 배분될 기반이 확대되었다. 2010년대 초반 현지의 정책 입안자들 사이에서는 머지않은 미래에 인도네시아가 세계 10대 경제 강국에 진입하리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뉴스를 들으며 필자는 상당히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다. 우리도 성취하지 못한 수준을 목표로 설정하는 일이 언감생심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가 오류가 아님을 보여줄 근거는 지금도 존재한다. 2022년 세계은행 자료를 보면 1조6000억 달러에 이르는 우리 GDP는 세계 10위권에 해당하는 반면 인도네시아는 15위권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10년 혹은 20년 이후 경제 상황을 예측한 자료에서는 다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인도네시아 경제는 세계 10위권에 진입하지만 우리는 그보다 두세 단계 아래에 놓이리라는 것이다. 예측은 예측일 뿐, 그것이 실현될 가능성은 별개다. 그럼에도 지난 10여 년 동안 변화를 체감하면서 세계 10대 경제권 진입이라는 인도네시아의 목표는 훨씬 더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기회의 땅이라는 말을 들은 지 30년이 넘었지만 그것이 단순한 수사가 아닐 수 있음을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실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 인도네시아는 더 이상 동남아시아에 있는 그런저런 나라일 수만은 없다. 우리가 더욱 적극적으로 간여하고 대응해야 하는 전략적 대상으로서 어떻게 효과적으로 이 기회의 땅을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더욱 진지한 관심과 노력이 따라야 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 (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 (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 Universitas Padjadjaran 객원교수 2023-04-17 06: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