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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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세로’는 횡설수설(橫說竪說) 종횡무진(縱橫無盡)의
횡수(橫竪가로세로)와 종횡(縱橫세로가로)을 한글로 번역한 것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땅에 묻은 삶은 계란에서 닭이 태어났다는 곳 [원철 스님] 이른 아침 소양강댐 주변은 물안개로 가득하다. 해가 뜨면서 차츰차츰 주변이 제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길가의 가파른 시멘트 벽 위에 길다랗게 세로로 덧댄 낡은 마루바닥재로 마감을 한 70년대 스타일의 간판이 보인다. 오래 전부터 지역사회에 전해오는 스토리텔링 3개가 꼰대세대도 읽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주먹만한 글씨로 촘촘히 박혀 있다. 만든지도 꽤 오래 되었고 바탕색마저 다소 바래긴 했지만 독해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왼쪽에는 짧은 이야기 두 편이 아래 위로 나란히 적혀있고, 오른 쪽은 긴 이야기 한 편을 써놓았다. 비교적 구성이 탄탄한 한천자(漢天子) 전설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마을 입구를 알리는 표지판 한(漢)씨 성을 가진 총각이 부친과 함께 머슴살이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난한 살림으로 인하여 묘자리를 구할 수가 없어 남새밭에 가매장을 했다. 어느 날 스님들이 나타나서 하룻 밤 묵어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한다. 총각은 자기 방에서 함께 머물게 했다. 부탁한 계란은 끓는 여물 솥에서 삶은 뒤 드시라고 갖다 주었다. 한 밤중이 되어 스님들이 길을 나서자 총각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몰래 따라갔다. 가리산 중턱에 이르자 그 계란을 땅에 묻고서 밤새 기다리는게 아닌가. 여명이 밝아 올 무렵 땅 속에서 수탉이 나오더니 홰를 치며 크게 울었다. “진짜 명당이로다.” 그 후 총각은 아버지 시신을 그 자리에 묻었다. 발복(發福)하여 천자(天子 임금)가 되었다. 구전(口傳)이라고 하는 것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전달하는 사람이 자기생각을 다시 보태고 윤색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전설도 마찬가지다. 스님이 계란을 달라고 하니 당연히 먹는 줄 알고 삶아서 드렸다. 머슴총각의 사려깊은 배려심이 돋보인다. 그리고 스님은 날계란도 아닌 익힌 계란으로 병아리도 아닌 수탉을 만들어 내니 도력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 땅은 알을 품고서 금방 닭으로 키울 정도로 생기와 생명력을 갖춘 명당이라는 사실도 넌지시 암시해준다. 명당이 되려면 터도 중요하지만 그 터를 사용하는 주인이 그만한 복을 지어야 한다. 이를 강조하기 위하여 스님의 3가지 처방과 함께 머슴총각의 드라마틱한 상상력과 행동이 더해지는 구조로 진화한다. 즉 첫째 금으로 된 관을 사용해야 하며 둘째 황소 백 마리를 재물로 바쳐야 하며 셋째 관을 땅 속에 묻을 때 철갑과 투구를 쓴 사람이 곡(哭)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머슴총각은 노란 귀리 짚으로 만든 두루말이 멍석으로 금으로 만든 관을 대신하여 아버지의 시신을 쌌으며, 솥뚜껑을 투구처럼 쓰고 하관(下棺)하면서 크게 울었고, 몸에서 피를 빨아먹고 황소만큼 자란 이(蝑) 백 마리를 잡아서 재물로 바쳤다는 내용이 추가 되었다. 한(漢)씨라는 성은 한(漢)나라를 연상케 한다. 그리하여 한씨 총각의 활동무대는 중국으로 바뀌었다. 짚으로 만든 북을 쳐서 소리나는 사람이 천자가 된다는 공고문이 나붙었다. 신라의 이사금은 떡을 물고서 남보다 많은 치아자국으로 인하여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차례대로 북을 쳤지만 누구도 소리를 내지 못했다. 한씨가 북을 치자 온 장안에 북소리가 울려 퍼졌고 총각은 천자(天子)로 추대되었다. 뒷날 천자 부친의 무덤이 너무 초라한 것 아니냐는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강원도 가리산 지형이 너무 험하여 중국 황실에서 올 수가 없어 치산(治山 산소를 매만지고 다듬는 일)하지 못한 까닭이라는 설명이 보태지면서 현재와 같은 탄탄한 구조를 가진 이야기로 완성되었다. 가리산과 한천자의 묘를 알리는 공공안내판 구전의 배경인 ‘한천자 묘’는 이미 인터넷 검색을 해 두었다. 위치는 춘천시 북산면 물로리 58-1번지다. 인근에 은주사(銀住寺)라는 절이 있다. 소양강댐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물로리로 가는 방법도 있다고 한다. 육로를 이용하는 것이 더 쉬운지라 주소를 따라갔다. 홍천을 경유하여 다시 춘천으로 들어가는 경로다. 포장된 도로에 봄날임에도 불구하고 ‘월동장비 미착용시 진입금지’라는 안내문이 군데군데 있을만큼 가파르고 험했다. 지난 겨울 머물던 곳에서 밤새 내린 눈 때문에 길이 막혀 차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전내내 갇혔던 까닭에 그 날 일정 두 건을 펑크냈던 기억까지 되살아 날 정도였다. 마지막 표지판 가도 가도 목적지를 가르키는 표지판은 1도 보이지 않는다. 제대로 가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계속 들만큼 굽이굽이 에스(S)자를 거듭거듭 그리면서 골짜기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얼마를 달렸을까. 고속도로 휴게소 알림판 크기의 ‘어서 오십시오. 물로리 한천마을’이라는 다소 생뚱맞은 모양의 입간판을 만났다. 생경함과 반가움이 교차하면서도 ‘제대로 가고 있구나’하는 안도감을 준다. 얼마나 달렸을까. 드디어 관공서 표준형 안내판 ‘가리산 방향’과 ‘한천자 묘’가 나타난다. 이내 비포장길이 시작되었고 ‘절골로’라는 도로명 답게 드문드믄 사찰들이 자리잡고 있다. 별장같은 민가들도 사이사이 보인다. 드디어 마지막 절인 은주사가 나타났다. 산신각을 참배하면서 오늘 일정을 무사히 마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이제부터 묘까지는 본격적인 가리산(加里山) 등산길이다. 한천자 묘 이 묘자리는 풍수연구가 사이에서 반드시 둘러봐야 하는 명당터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산삼을 캐는 심마니들도 방문인사를 빠뜨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꿈을 이루기 위하여 많은 이들이 땀 흘리며 찾아오기를 마다하지 않는 곳으로 입소문난 곳이다. ‘기적의 천자길’ 따라 세워진 안내판 1.꿈-2.신념-3.기적(하늘이 돕다)-4.기적(기적은 계속된다)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따라가다가 숨을 몰아 쉴 무렵 마침내 목적지가 눈 안으로 들어왔다. 작은 계곡을 조심조심 건넜다. 곁에 ‘한천자 묘’라는 설명문과 안내판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칠 만큼 평범하고 소박한 한 무덤이다. 하지만 보통사람의 눈에도 그 터 만큼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비범한 터에는 그 자리에 어울리는 전설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4-03-26 07:00:00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대한민국 부자 1번지 솥바위 그리고 승산마을을 찾다 [원철 스님] 한 해가 시작될 무렵에는 정암(鼎巖·솥바위, 경남 의령)을 찾는 사람이 평소보다 많다. 솥바위를 중심으로 반경 20리 안에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부자를 배출한다는 전설을 지닌 바위다. 그 전설 덕분인지 정암을 중심으로 한국 재벌가인 삼성, 효성, 금성(LG.GS 전신) 집안 본생가(本生家)가 삼각형을 이루면서 자리 잡았다. 전설이 전설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전설이 현실이 될 때는 설득력을 가진다. 설득력 있는 장소는 명소가 되고 명소는 사람을 부르게 마련이다. 바위신앙의 역사는 인류 출현과 함께할 만큼 그 역사가 길다. 특히 솥바위는 부(富)를 기원하는 성소(聖所)였다. 농업이 산업의 중심인 시절에는 솥 안에 가득한 모락모락 김이 나는 흰 쌀밥은 그 자체로 부귀의 상징인 까닭이다. 농업자본이 농업자본에서 멈춘다면 그것은 그대로 과거사로 정지된다. 즉 전설로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지역은 농업자본이 농업자본으로 멈춘 것이 아니라 상업자본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한 인재를 배출한 지역이라는 점에서 솥바위의 영험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또 부귀는 현대인들이 ‘대놓고 추앙하는’ 또 다른 종교로 자리매김하는 시류까지 한몫을 더했다. 따라서 ‘솥바위교’ 신도들도 날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날도 바위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선여인(善女人)들을 만났다. 경남 의령 솥바위 심리적으로 잠재적 솥바위 신도인 현대인들을 불러 모으는 정암을 찾았다. 새해가 되면 꼭 참배해야 하는 ‘기(氣) 충전소’임을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알고 있다. 지자체는 아예 ‘대한민국 부자일번지’를 표방하고 있다. 포토존 의자에는 ‘함께 부자가 되자’고 하면서 ‘富(부)’ ‘Rich(리치)’ 등 한문과 영어를 병기하여 구세대는 물론 신세대까지 동시에 불러 모으고 있다. 솥바위는 남강 가운데 우뚝하게 자리 잡았다. 풍수학자들은 물은 재물을 상징한다고 했다. 재물이 바위에 걸리면서 천천히 흐른다. 자연스럽게 재물이 쌓이는 구조다. 그런 바위를 나성(羅星)이라고 한다. 세 부자 집안 기업의 공통 상호인 ‘성(星)’자가 여기에서 비롯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요즘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예부터 정암진 나루터는 남해와 낙동강을 따라 온 물자들이 서부경남 내륙으로 들어가는 물류의 거점이었다. 근대에도 철교가 놓일 만큼 교통요지로서 위상도 만만찮았다. 관광객들이 포토존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먼저 전경을 살피고자 언덕 위에 있는 정자인 정암루(鼎巖樓)에 올랐다. 안내문에는 빼어난 경치로 인해 많은 선비와 가객들이 찾아 학문을 논하고 자연을 노래했다고 적혀 있다. 함안 가산(家山) 기슭에 무덤이 있다는 어변갑(魚變甲·1381~1435) 선생이 누각에서 주변 풍광을 노래한 시가 남아 있다. 그는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조선 초기 문신이다. 춘수정암횡련벽(春水鼎巖橫練碧)이요 춘풍자굴전병신(春風闍堀展屛新)이라. 봄날 흐르는 솥바위의 강물은 비단을 펼친 듯 푸르고 가을바람 부는 자굴산은 병풍을 펼친 듯 새롭네. 그 시에 자굴산(闍堀山)이 나온다. 인도 마갈타국 수도 왕사성 동북쪽에 있는 기사굴산(耆闍崛山)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闍’는 ‘사’ 혹은 ‘자’로 읽는다. 보통 사굴산(강릉 굴산사 당간지주가 있는 산)이라고 하는데 이 지역에서는 자굴산이라고 부른다. 어쨋거나 사굴이건 자굴이건 모두 인도말 ‘기자쿠타(gijjha-kuta)’의 소리번역이다. 원문 발음대로라면 ‘사’보다는 ‘자’로 읽는 게 맞겠다. 하지만 자굴산보다는 사굴산으로 읽는 것이 모두에게 익숙한 편이다. 결국 문법은 많이 쓰는 사람 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지역사회에서 읽어왔던 관례는 존중되어야 한다. 기사굴산은 붓다께서 머물면서 설법하던 곳으로 세계적인 불교성지다. 법화경은 서두에 기사굴산에서 설했다는 말로 시작된다. 산봉우리가 독수리와 닮았다고 하여 영취산(靈鷲山·영축산)으로 부른다. 소리번역이 아니라 뜻번역이다. 전남 여수 등 전국 몇 곳에 영취산이 있다. 양산 통도사가 자리하고 있는 산은 한문으로 같은 표기를 함에도 불구하고 ‘영축산’으로 읽는다. 이 또한 지역사회의 읽기 관례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함안은 아라가야에 속하는 가야문화권이다. 고구려, 신라, 백제가 중국을 통해 불교를 받아들인 데 반하여 가야불교는 허황후와 장유화상에 의해 인도에서 직수입됐다. 남쪽 지방에 있는 산 이름에도 그런 흔적들이 남아 있다고 하겠다. 논어에는 ‘지자요수(智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고 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산 따로 물 따로’는 아니다. 늘 함께한다. 그래서 묶어서 요산요수(樂山樂水)라고 한다. 산은 인물을 키워주고 물은 재물을 늘려준다고 했다. 솥바위에서 진주 방향으로 구씨(LG)와 허씨(GS) 집안이 대대로 함께 살고 있는 승산(勝山)마을이 있다. 행정구역은 ‘지수(智水)면 승산(勝山)리’다. 산이름과 물이름이 함께 어우러진 명당마을이라 하겠다. 지자체에서 '부자 일번지'라는 홍보문구를 적어 놓았다. 승산마을 골목길을 찾는 사람들 사이에 끼여 마을길을 함께 걸었다. 600년 전통의 부자마을 허씨와 구씨 집성촌답게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번듯한 기와집이 동네 전체에 빼곡하다. 한양의 명문세도가들 사이에서도 ‘진주는 몰라도 승산은 안다’고 할 만큼 조선시대에도 큰 관심을 받은 동네라고 했다. 좋은 기운은 많이 받을수록 좋다고 하였으니 계속 동네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면서 거듭 두어 바퀴 걸었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4-02-26 09:54:52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조강(祖江)에서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시작되었다 [원철 스님] 양력으로 새해가 시작 된지도 한달이 지났다. 그러고 보니 음력 1월1일도 10여일 밖에 남지 않았다. 양력과 음력을 동시에 사용하다보니 양력설부터 음력설까지 한 달은 ‘설날’이 아니라 ‘설월’이 되었다. 설날 어원을 찾아보니 ‘섦다’에서 나왔다는 학설도 있었다. 고어의 ‘섦다’는 ‘자중하고 근신한다’는 뜻이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자중하고 근신하면서 올 한해 동안 별일없기를 기원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그래서 한문으로는 설날을 신일(愼日. 愼 삼갈 신)이라고도 표기한 것이리라. 정월(正月)인 동시에 신월(愼月)인지라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가급적 움직이는 것 조차 삼가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첫달이 무탈해야 일년내내 평안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삼강주막, 사진=삼강나루캠핑장 파브르팬션] 이 달의 답사 역시 ‘방구석에서 상상하는 삼강답사’로 대체했다. 세 강이 만나는 곳을 생각해보니 맨먼저 떠오르는 곳이 경북 예천의 ‘삼강주막’이다. 강물의 뱃길이 중요한 운송수단이었을 때 번화한 장터를 지키면서 오가는 길손에게 숙식을 제공했다는 주막이다. 하지만 철길 찻길이 발달하면서 나루터는 기능을 잃게 되고 주막 역시 용도를 다하게 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곳이 되었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와 ‘마지막 주막’이라는 의미가 부각되면서 관광지로 변신하는데 성공했다. 주변의 옛시장은 물론 오가던 상인과 손님들이 머물면서 이용했던 공간까지 복원한 까닭이다. 삼강은 낙동강 내성천 금천이 합해지는 곳이다. 천(川)자가 붙은 두 냇물의 규모는 강(江)이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모자랐지만 합수지점 만큼은 당당하게 강(江)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속리산, 사진=국립공원공단] 산 꼭대기에도 삼강이 있다. 충북 보은군 속리산 천왕봉의 삼파수(三派水 三波水 혹은 三陀水라고도 함. 陀 비탈질 타) 구역이다. 물 한줄기 없는 산꼭대기에서 만날 수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삼강이라 하겠다. 삼강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비였다. 천왕봉 꼭대기에 빗물이 떨어진 후 동쪽으로 흘러가면 낙동강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가면 금강이 되며 북쪽으로 흘러가면 남한강이 되었다. 눈도 마찬가지다. 겨울내내 내린 눈이 쌓여서 얼음이 되었고 이듬 해 봄이 오면 녹기 시작했다. 그 녹은 물이 흐르는 방향에 따라 갈길이 달라지는 삼강의 시작점이 된 것이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삼강을 예리한 눈으로 포착한 뒤 이를 삼파수라고 이름붙인 이는 누굴까? 속리산에 숨어 살던 이름없는 수행자였을 것이다. [임진강,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박과사전] 바닷가에도 삼강이 있다. 한반도에서 가장 거대한 삼강을 찾는다면 한강과 예성강 임진강이 만나는 조강(祖江)구역이라 하겠다. 강화도 북부해안선과 맞닿은 곳이라 강인지 바다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지만 아무튼 선인들은 이 곳을 조강이라고 불렀다. 조선의 실학자 이긍익(1736~1806)선생이 지은《연려실기술》에는 ‘교하 서쪽에 이르러 한강은 임진강과 합하고 통진 북쪽에 이르러서는 조강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현재 군사적인 이유로 전체경관을 조망하기는 어렵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없다면 옛조상들의 시각을 통해 그 모습을 짐작할 수 밖에 없겠다. 다행이도 고려시대 이규보(李奎報1168~1241) 거사는 ‘조강부(祖江賦)’라는 글을 남겨 두었다. 그는 당시 수도인 개경(개성)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계양(桂陽 현재 인천시 계양구)으로 부임하는 길은 배를 타고서 조강을 건너야 한다. 강물이 너무 넓은 까닭에 검게 보였으며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 여러 강물이 모인 까닭에 파도가 심할 뿐만 아니라 소용돌이까지 쳤다고 했다. “넓고 넓은 강물이...시커먼 빛 굼실굼실 보기에도 무서워라. 달리는 뭇 내를 모았으니 솥의 물이 들끓는 듯...바람도 없는데 물결치니 눈 같은 물결이 쾅쾅 돌에 부딪치는 모양... 저 사공은 집채같은 물결에는 익숙해도 빙빙 도는 소용돌이를 무서워하네. (중략)” 조강(祖江 할아버지 강)은 ‘근본이 되는 강’ ‘시원이 되는 강’이라는 뜻이 되겠다. 그래서 선인들은 조강을 단순히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모인 보통 삼강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로부터 아들 딸 손자 손녀로 이어지는 것처럼 조강에서 한강 예성강 임진강이 시작되었다는 역발상까지 했던 것이다. 근거는 밀물이다. 만조 때 바닷물이 육지방향으로 밀려 오면서 역류가 되어 삼강으로 다시 흘러들어가는 광경을 예사롭게 여기지 않았다. 즉 조강에 호수처럼 바닷물과 강물이 가득차면서 거꾸로 한강 예성강 임진강의 시원(始源)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태고적부터 비록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주기적으로 반복하며 ‘삼강의 역류’를 만들어낸다는 의미로 조강이라고 불렀던 것이 아닐까? 속리산 천왕봉에 내린 눈비가 각자 삼강을 향해 흘러가는 것을 보고서 삼파수라는 이름을 붙인 것 만큼이나 경이롭다. 조강은 우리나라의 ‘근본이 되는 강’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조강은 조선의 도읍지 한강 뿐만 아니라 고려의 세계무역 중심지였던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와 미래 코리아 수도의 후보지라는 교하(交河 임진강과 한강의 합수지역. 경기도 파주시 교화읍)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이다. 신월(愼月)이 끝나고 봄 기운이 퍼질 무렵 적당한 날을 골라 강화도 섬 안의 섬인 교동도 전망대로 가서 조강(祖江)을 제대로 살피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그 위를 푸른 용처럼 날아다니며 갑진년 청룡의 해를 장대한 스케일로 웅대하게 시작해야겠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4-01-29 13:31:52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황강의 푸른 빛을 머금고서 [원철 스님] 영남지방 낙동강의 지류 가운데 경남에서 가장 긴 강은 남강과 황강이다. 남강은 진주 촉석루를 품으면서 임진왜란의 진주성 전투와 논개 스토리를 남겼다. 황강은 덕유산에서 발원하여 거창 수승대 앞을 지나 합천댐에서 잠깐 머물렀다가 다시 합천 읍내를 휘감아 흐른다. 모래톱이 아름다운 강변 맞은 편 절벽의 대야성(大耶城)과 연호사(烟湖寺) 그리고 함벽루(涵碧樓)에는 많은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있다. 대야산성ㅡ연호사 ㅡ 함벽루ㅡ 불교문화전수관ㅡ일주문으로 이어지는 황강 풍경 대야성 전투는 삼국시대로 거슬려 올라간다. 신라와 백제가 황강을 국경선 삼아 대치하던 군사요충지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 몇 천명이 전사하고 일천명의 포로가 나올만큼 당시로서는 어머어마한 규모였다. 대야주 도독 부인은 뒷날 태종무열왕이 된 김춘추(金春秋 603~661)의 딸 고타소(古陀炤)였다. 사위인 김품석과 함께 그 전투에서 산화(散花)했다. 그 소식을 들은 서라벌의 아버지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하루종일 기둥에 기댄 채로 서 있었으며 그 앞을 다른 가족이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슬퍼했다고 한다. 전사자 영혼의 명복을 빌고 또 지역사회에 남은 가족과 주민을 위로하기 위한 사찰이 세워졌다. 대야성과 강물로 이어진 곳이다. 풍수가들은 누런 소가 강물을 마시는 자리라고 했다. 그래서 산 이름도 황우산(黃牛山)이다. 황우는 부처님의 성씨인 ‘고타마’에서 왔을 것이다. 인도말 고타마는 ‘훌륭한 소’라는 뜻이다. 한문으로 옮기면 그대로 황우(黃牛)가 된다. 전쟁 후 핏빛으로 물든 강물을 정화하여 맑은 물로 바꾸는 역할을 맡긴 것이다. 창건주 와우(臥牛)대사 법명도 그 의미의 연장선상으로 보인다. ‘누런 소가 강물을 마시는 자리’는 전쟁 트라우마로 인하여 생긴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성지가 된 것이다. 남명 조식(南冥曹植 1501~1572)선생은 그런 황강의 역사를 시로 남겼다. 길가 풀은 이름없이 죽어가고(路草無名死) 산의 구름은 제멋대로 일어난다.(山雲恣意生) 강은 무한의 한(恨)을 흘러 보내며 (江流無限恨) 돌과는 서로 다투지 않는구나.(不與石頭爭)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면서 산하는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기 마련이다. 강물은 맑음을 되찾았고 아침이면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煙) 한낮에는 흰 모래밭이 햇볕에 반짝이는 너머 늪지인 정양호수(湖)가 한 눈에 들어오는 경치를 자랑하는 연호사(烟湖寺) 동쪽 곁에는 새로운 누각이 ‘절처럼’ 들어왔다. 함벽루(涵碧樓)는 1321년(고려 충숙왕 8년) 합주(陜州)의 행정책임자(知州事 군수)인 김영돈(金永暾 1285~1348)이 건립했다. 함벽(涵碧)은 ‘푸른 빛으로 적신다’는 뜻이다. 물가에 있는 나무집인지라 습기와 홍수 때문에 연호사와 더불어 수차례에 걸쳐 수리에 수리를 거듭했을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함벽루 기(記)’에 의하면 1680년 합천 군수 조지항(趙持恒)이 중창한 것이다. 동시에 연호사도 함께 수리했다는 기록까지 남겼다. 함벽루가 너무 퇴락하여 중수코자 하였으나 재정의 어려움 때문에 날로 고민이 깊어졌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여름홍수에 뜻밖에 기둥과 대들보가 될만한 재목 100여개가 떠내려 왔다. 그리고 못을 주조할 수 있는 쇳가루도 모래톱에 함께 쌓였다. 범람한 물은 사금은 아니지만 꼭 필요했던 사철(沙鐵)까지 가져 온 셈이다. 홍수는 집을 떠내려가기도 하지만 집을 만들 수 있는 나무를 싣고 오기도 하는 두 얼굴 이었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선생은 이를 두고서 ‘사람의 정성이 나무와 쇠를 감동시킨 결과’라고 했다. 남은 재목과 여력으로 함벽루 서편 연호사까지 중수할 수 있었다. 이렇게 불가의 사찰과 유림의 누각은 다시금 조화를 이루었다. 함벽루는 대야산성 절벽 강 기슭에 위치하며 황강과 늪지인 정양호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 때문에 시인과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기 위해 자주 찾았다. 전국의 많은 누각이 있지만 추녀 끝의 낙숫물이 바로 강물로 떨어지는 곳은 남한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특히 그 소리를 듣고자 비오는 날이면 많은 이들이 찾아왔다. 뒷날 강물의 흐름이 다소 바뀌고 떠내려간 축대를 거듭 쌓으면서도 그 의미를 살리기 위해 중수할 때마다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를 지키고자 부단한 노력이 뒤따랐다. 처마의 낙숫물이 강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살리기 위해 산책데크길과 축대사이에 틈을 두었다 앞면 3칸 측면 2칸 대들보 5량인 별로 크지도 않는 넓이의 누각 안에 빼곡이 걸려 있는 현판들이 하도 많은지라 하나하나 세어보니 족히 스무개가 넘었다. 아마 여러 가지 이유로 수없이 내걸리고 또 수 없이 내려지면서 교체에 교체를 거듭했을 것이다. 현재 남은 것이 이 정도이니 가히 누각의 명성과 주변 풍광의 뛰어남을 짐작할 만하다. 퇴계 이황(1502~1571)과 남명 조식 선생 글도 보인다. 지역선비들도 질세라 이름자를 빠뜨리지 않았다. 시월의 긴 연휴를 맞아 오랜만에 연호사를 찾았다. 대야성 연호사 함벽루 수심당 불교문화전수관 일주문으로 이어지는 강변의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대야(신라) 합주(고려) 합천(조선)으로 지명도 함께 이어졌다. 도량 인근에는 지역유지들의 공덕을 기록한 비석을 모은 ‘비림’과 함께 합천이씨 재실인 ‘공암정(孔巖亭)’ 그리고 ‘황벽루보존유림계’와 ‘대동계’ 비석, 강석정 시인의 황강시비. 활터인 죽죽정. 대야성 전투 때 활약한 충신 죽죽(竹竹)의 비각 등이 거리를 두고서 자기자리를 잡았다. 지자체와 지역주민 그리고 사찰이 함께 힘을 합해 가꾸는 살아있는 역사문화지구의 현장이라 하겠다. 사족을 보탠다면 합천군수를 지낸 강석정 시인은『연호사지(烟湖寺誌) 조계종출판사 2017)』저자이며 성철(性徹 1912~1993)스님은 합천 이씨집안 출신이다. 함벽루에서 바라본 황강의 풍광 연호사에는 강원(講院)에서 함께 공부했던 도반 J스님의 원력(願力)에 의하여 함벽루 동편에 수심당 불교문화전수관 일주문을 지으면서 비로소 사격을 제대로 갖추게 되었다. 황강이 내려다보이는 안심당(安心堂)에서 차를 나누며 옛 기억을 더듬었다. 1980년대 연호사는 일박이일 예비군 훈련을 받기 위해 일년에 한 두 번 정도 지역의 학인승려들이 와서 하룻밤 묵던 곳이다. 어느 해에는 심한 가뭄으로 얕아진 강물에 바지를 걷어올리고서 건넛편 군부대 훈련장까지 걸어갔던 기억 등을 이야기하며 함께 웃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어느 새 지난 일을 추억하는 구시대의 인물이 되었다는 말에 또 웃었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3-10-10 21:18:53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애랑바위를 향해 오줌을 누다 [원철 스님] 문화가 지역사회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시절이다. 가는 곳마다 지역문화를 선양하려는 노력이 활발하다. 유형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보이지 않는 무형문화까지 그 범위를 넓혔다. 스토리텔링 발굴을 통해 관광객을 부르고 또 그 발길을 오래도록 붙잡아 두는 것이 지역공무원과 주민들의 주요한 의무 아닌 의무가 되었다. 여름휴가 삼아 강원도 삼척에서 2박3일을 보냈다. ‘절친(절친구)’이 사찰주지로 머물고 있는 덕분에 바다가 보고 싶으면 훌쩍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올 때마다 ‘바다는 역시 동해야!’ 하면서 엄지를 치켜세운다. 유형의 관광자원 바다와 더불어 무형의 스토리텔링까지 더해진다면 이것이야말로 방문의 만족도를 더욱 높이는 일이다. 또 기록과 흔적까지 남아있다면 그 즐거움은 몇 배로 뛴다. 수로부인과 애랑낭자는 신분도 다르고 시대도 달랐지만 강원도 삼척 바닷가라는 동일지역이 배경이다. 그리고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수로부인 이야기는 『삼국유사』권2 ‘기이(紀異)’편에 나온다. 애랑낭자는 ‘해신당(海神堂)’이라는 사당의 주인이다. 구전으로 전해오던 전설을 채록하여 최근에 문자정리까지 마쳤다. [수로부인헌화공원] 먼저 ‘수로부인헌화’공원을 찾았다. 남화산은 공원이 조성되기 전부터 동해안의 유명한 일출명소였다. 수로부인은 신라 성덕왕 시절 강릉태수로 부임하던 부군 순정공(純貞公)을 따라 행차하던 도중 삼척 바닷가의 임해정(臨海亭) 인근에서 점심을 먹었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잠깐 사이에 부인이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미모에 반한 용왕의 초청에 의한 것이었다. 함께 가던 일행들은 납치로 간주하고 구할 대책을 논의했지만 바다세계 일이라 땅 위에서 할 수 있는,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때 어떤 노옹(老翁 어르신)이 나타나 처방책을 내놓았다. “여러 사람의 말은 무쇠도 녹인다고 하였으니 인근 어민들을 모아 막대기로 언덕을 두드리면서 노래를 불러보자.”고 건의했습니다. 물론 노래의 작사작곡은 노옹의 몫이였다. 뒷날 ‘해가(海歌)’라는 제목이 붙었다. 용왕의 명령에 따라 초청업무를 수행한 것은 심부름꾼인 거북이였던 모양이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아내 빼앗은 죄 그 얼마나 큰가? 네가 만약 어기고 돌려주지 않는다면 그물로 잡아서 구워 먹으리.” 그러자 얼마 후 거짓말같이 뭍으로 돌아왔다. 신랑은 부인을 보고서 반가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의구심과 함께 목소리를 착 깔고서 용궁에 다녀 온 과정을 따지듯이 하나하나 물었다. “칠보궁전에 음식은 맛있고 향기롭고 깨끗하여 인간세상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인의 옷에도 색다른 향기가 스며 있었는데 이 세상에서는 맡을 수 없는 향내가 났다. 위기상황이 발생했을 때 종적을 알 수 없는 노옹이 바람같이 나타나서 해결사 노릇을 했다. 진달래꽃을 갖기를 원하는 수로부인을 위해 용감하게 깎아지른 절벽으로 올라가면서 신라가요(향가)인 ‘헌화가(獻花歌)’를 부른 이도 어떤 노옹이었다. 필요한 곳마다 필요할 때마다 어김없이 신인(神人)이 등장하는 삼척바닷가는 참으로 신비로움을 더해주는 땅이라고 하겠다. 의심 많은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 스토리에 현실적인 감각을 입혀 다시 각색해 보았다. “......꽃이 만개한 호시절인지라 수로부인은 진달래 꽃을 안고서 바다 멀리 나가 해안가의 아름다운 봄경치를 전체적으로 감상하고 싶다고 혼자서 쫑알댔다. 그 말을 귓등으로 흘려보내지 않고 듣던 신랑은 즉시 어촌마을로 달려가서 여러 척의 배를 빌렸다. 먼길에 수고를 아끼지 않은 일행 모두를 나누어 태운 뒤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하고자 했다. 뱃놀이는 서라벌(경주)에서 해안가를 따라 걸어 올라오면서 누적된 여행피로를 모두 잊게 할 만큼 즐거웠다. 모두가 즐거움에 취해있던 사이에 누군가 너무 흥에 겨운 나머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갑자기 일어서는 바람에 배가 무게중심을 잃으면서 뒤집혔다. 수로부인이 탄 배였다. 일행은 당황하여 허둥지둥하고 있는데 어떤 노옹의 안내를 받은 동네어민들이 전부 달려와서 노련한 수영솜씨로 부인을 비롯한 물에 빠진 이들을 구했다. 공로자들에게 감사의 인사와 함께 금일봉을 전했다. 대표자의 인적사항이라도 알아두고자 나이를 물었더니 용띠였다.” 공원의 돌 조각으로 재현된 수로부인과 용왕은 거창한 자리 위에서 사이좋게 앉아있다. 멀리 언덕 위에는 신랑인 순정공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다. 주변의 광활한 언덕과 하늘 그리고 바다가 조화를 이루면서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수로헌화공원을 뒤로 하고서 해안가에 향나무가 둘러싼 절벽 위에 자리잡은 한 평짜리 작은 사당인 ‘해신당(海神堂)’으로 향했다. 해신당의 주인공 애랑낭자의 사랑이야기는 몇백년 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로 매우 직설적이다. 미래를 약속한 떠꺼머리 총각 이름은 덕배다. 애랑은 미역 등 해초를 채집하기 위해 덕배에게 해안가에서 멀리 떨어진 바위섬으로 데려 달라고 했다. 얼마 후 쓰나미가 몰려 왔고 애랑은 파도에 휩쓸려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그날 이후 흉어의 연속이다. 물고기가 전혀 잡히지 않는 것이였다. 수입이 아예 없던 어느 날이다. 어젯밤 꿈 속에서 만났던 애랑 생각까지 간절하던 덕배는 홧김에 분풀이 삼아 바다를 향해 오줌을 휘갈겼다. 어라! 이상하게도 그날부터 고기가 잡히기 시작했다. 다른 어민들도 소문을 듣고서 바로 따라 했다. 결과는 같았다. [바위섬의 애랑상] 이후 해신당을 짓고 애랑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해마다 공물로 남근(男根)모양을 향나무로 깎아서 바쳤다. 일곱개 혹은 다섯 개를 올렸다. 바위 섬에는 치마저고리 차림의 낭자모습의 실물도 세웠다. 육지에서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망원경까지 설치했다. 인근에서 영업을 하려는 사람들도 개업고사를 지낸 후에는 해신당에 들러 인사를 한 후 바닷가로 내려가 애랑바위를 향해 힘차게 소변을 본 뒤 사업의 성공을 기원하곤 했다. 현재까지도 여전히 살아있는 소박한 바닷가 민간신앙이라 하겠다. [해신당] 해신당 인근의 산비탈에는 지자체에서 의욕적으로 여러 가지 남근모양으로 오줌싸개 공원을 만들고 경사로에는 걷기 좋도록 나무계단까지 설치했다. 많은 사람들이 참배를 겸한 관광을 위해 찾아 온다고 한다. 우리 일행도 삼척의 성지(性地)공원(?)을 순례했다. 연신 킥킥거리며 한 바퀴를 돌았다. 지역사회의 원로이신 최선도 삼척문화원장께서 신라시대 노옹처럼 나타나 전 일정을 함께하면서 애로의 해결은 물론 친절한 설명까지 아끼지 않으셨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3-08-31 08:13:09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장맛비 속에서 춘원 이광수 별장을 찾다 [원철 스님] 7월 마지막 주와 8월 첫째주는 이른바 ‘여름휴가’기간이다. 춘원 이광수(1892~1950) 선생은 서울 종로구 홍지동의 소림사에서 1934년 여름휴가를 보냈다. 그것도 2주일 정도가 아니라 7월 8월 두달 동안 유숙했다. 이쯤 되면 템플스테이가 아니라 템플리빙이다. 사찰에 ‘머물렀다’가 아니라 ‘살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사실 처음 목적지는 사찰이 아니었다. 두 딸이 홍역에 걸린 것을 핑계삼아 명사십리 해당화로 유명한 동해안 원산 해수욕장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밤기차를 타고 혼자 가겠다고 하니 안주인이 펄쩍 뛰었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휴가기분을 유지하기 위해 쌌던 짐을 풀지도 않고 그대로 들고 간 곳이 소림사였다. 소림사의 원래 이름은 소림굴이다. 이름 그대로 바위굴이 유명하다. 조선을 건국하기 전 이 굴에서 기도한 인연을 가진 태조 이성계의 후원으로 1396년 혜철(慧哲)대사가 창건했다. 굳이 이름의 기원을 추적하자면 중국 달마대사의 소림굴이라 하겠다. 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후 굴 안에서 9년간 벽만 쳐다보고서 명상을 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중국 소림굴의 조선판 버전인 셈이다. 1817년 중건하면서 현재 이름으로 바꾸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두 번 정도 언급될 만큼 600여 년의 긴 역사를 지녔다. 소림굴의 ‘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김형규(金衡圭 1861~1935)의 <청우일록(靑又日錄)>에 나온다. “계곡 아래에서 세수를 하고 소림사를 살펴보았다. 절 뒤에는 큰 바위가 있었으며 바위 가운데 굴이 있었다. 이상히 여겨 물었더니 동자승이 ‘이곳은 달마대사가 머물던 자리’라고 대답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바위 모양은 마치 부채를 뒤집어 놓은 것처럼 구부러져 있었고 그 가운데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앉을 수 있었다. 어찌 기암이 아니겠는가?” 청우 선생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인 장동김씨 김병운(1814~1877)의 외아들이다. 1873년에서 1887년까지 11년간에 걸친 정치적 내용까지 포함한 기록물인 ‘청우일록’을 남겼다. 정확성과 객관성으로 자료가치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일기라고 하겠다. 춘원 선생도 한낮의 더위를 피해 소림굴 안으로 수시 출입했을 것이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동네로 산책을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마음에 드는 터를 발견했다. 감나무가 서 있는 150평 정도의 작은 밭이다. 세검정 계곡의 물소리와 앞쪽의 백악산 인왕산 그리고 뒤쪽의 북한산이 감싸고 있는 명당이다. 별장을 지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조선일보에 근무하면서 잘나가던 때였다. 예나 지금이나 집을 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집 한 채 짓고 나면 10년 늙는다는 말이 그냥 나온 소리가 아니다. 생각지도 않던 암반이 돌출했고 이를 제거하느라고 추가비용은 늘어만 갔다. 겪어보니 공사업자도 그렇게 믿음을 줄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모르긴 해도 집을 지으면서 우여곡절이 많았던 모양이다. 적지않은 비용을 사기 당하기도 했다. 얼마나 미웠으면 업자의 이름까지 ‘성조기(成造記)’란 글 한편에 두 번이나 반복해서 남겨 두었을까. 마음고생으로 인하여 전전긍긍하던 모습을 보다못한 안주인이 나섰다. 북촌 일대를 개발하여 근대식 작은 평수의 서민한옥을 분양하던 정세권(鄭世權 1888~1965) 선생과 연결되었다. 그이에게 일을 맡기고서야 모든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그날부턴 그야말로 팔짱 끼고 매일 집 짓는 일꾼들의 땀 흘리는 모습을 구경만 해도 아무 문제될 것이 없었다. 날마다 아침이면 공사장으로 왔고 해가 진 뒤에야 내려갔다. 춘원별장 샘물, 감나무, 향나무 얼마나 좋았던지 집이 완공도 되기 전에 이사를 했다. 착공한 지 백일쯤 될 무렵이다. 유리문과 차양막 그리고 전등시설도 이사를 한 뒤에서야 공사를 이어갈 정도였다. 이 집에 대한 애착을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기초공사를 하면서 바위를 깨다가 두 곳에서 발견한 샘물에 대한 찬사도 빠트리지 않았다. 단맛이 나는 맑은 물은 한 가족이 사용하기에는 충분한 양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좋아하던 ‘ㄷ자 한옥’에서 1934년부터 1939년 5월까지 5년정도 밖에 살지 못했다. 결국 효자동 본가로 돌아와야만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집주인이 바뀌었다. 다행히도 1972년 현재의 주인에 의해 다시 개축되었다. 이 집의 매입자가 개보수를 거쳐 복원했으나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한 덕분에 근대화된 한옥양식을 보여주는 건축학적으로 가치있는 건물로 인정 받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별장문화를 엿볼 수 있는 집으로서 2004년에 국가등록문화재 제87호 ‘서울 홍지동 이광수 별장터’로 지정되었다. 두 곳의 샘물과 ‘삘 꽂힌’ 감나무는 그대로 남아서 그 시절을 말없이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춘원이 직접 옮겨 심었다는 향나무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더불어 한국문학사에서도 의미있는 터로 자리매김 되었다. 서실 춘원헌 액자 여름 장맛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 한옥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와 함께 앞산의 운무를 바라보는 전망도 일품이다. ㄷ자 한옥의 왼쪽날개 부분은 창 넓은 누각형 서실로 사용하면서 ‘춘원헌(春園軒)’이라는 액자를 달아놓았다. 공개하지 않는 개인주택이지만 다행히 집주인의 배려로 집안을 둘러볼 수가 있었다. 종로구 여기저기에서 활동하는 도반 몇 명과 함께 주말에 잠깐 스쳐가듯 ‘한옥 스테이’를 한 셈이다. 소림사와 춘원별장 그리고 현재의 주인으로 이어지는 인연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음미했다. 현재 복원한 춘원별장의 마루바닥은 본래 마루라고한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3-07-26 06:00:00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광릉-세조임금과 월운 스님의 한글사랑이 어우러진 곳 광릉내(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인근 지역의 새로 짓는 아파트는 분양 광고할 때 ‘숲세권’을 빠뜨리지 않는다. 그것도 그냥 숲이 아니라 ‘왕의 숲’임을 엄청 강조한다. 왕숙천에는 ‘왕의 꽃길’을 조성했다. 이제는 제왕까지도 광고의 매개체로 삼아 소비자를 모으고 홍보를 통해 관광객을 부르는 시대가 되었다. 졸지에 소환당한 주인공은 조선의 일곱 번째 왕 세조(1417~1468 재위1455~1468)임금 이시다. 광릉숲은 동서 4km 남북 8km의 규모로 포천과 남양주 그리고 의정부에 걸쳐있으며 여의도 30배 면적인 약 31만평이라고 한다. 1468년 능림(陵林 왕릉을 보호하기 위한 숲)으로 지정된 이후 550여년간 자연 그대로 보존된 탓에 뒷날 유네스코 생물보존권 지역으로 선포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현재 광릉 숲 안에는 국립수목원과 연구소, 산림박물관, k대 평화복지대학원 등이 함께 자리잡고 있다. 자연 숲과 별로 어울릴 것 같지도 않는 건물들의 부조합도 용납되는 걸 보니 임금님의 품안이 참으로 넓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된다. ‘모두 나의 백성이니라’라고 하면서도 그 시절 같았으면 절대로 들어올 수 없는 시설이었을텐데 오백년이 흐르다보니 서슬 퍼랬던 왕도 이제는 마음이 많이 관대해지셨나 보다. 뿐만 아니라 관통도로의 교통량도 만만찮다. 자동차의 소음과 매연이 왕릉의 편안한 잠자리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닌지도 염려된다. 왕도 백성을 걱정해야겠지만 백성도 왕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왕릉인 광릉(사적197호)은 세조임금에서 시작된다. 생전에도 이 숲을 매우 좋아하셨다고 한다. 활쏘기를 좋아하여 사냥터 삼아 종종 다녀갔을 것이다. 하지만 좋은 터는 이미 주인이 있기 마련이다. 동래정씨 정찬손 선생의 선영이었다고 한다. 왕릉을 모시면서 정씨 선영을 옮겨야만 했다. 뒷날 왕후릉도 들어왔다.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서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을 각각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二岡陵)이다. 비용절감을 위하여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두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나무관을 구덩이에 넣고 그 사이를 회다짐으로 메우는 회격(灰隔)방식은 노동인원을 절반으로 줄이는 경제적 효과로 이어졌다. 당신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특히 한글사랑은 유별났다. 왕자시절에도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했으며 창제 직후 시험삼아 언해(諺解 한글번역)한 『석보상절』과 『월인석보』를 편찬할 때도 힘을 보탰다. 왕위에 오른 뒤에는 본격적으로 훈민정음 보급을 위해 불교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1461년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했고 10여종 중요한 경서를 엄선하여 언해(諺解 한글번역)했다. 이 책들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 중세국어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학인시절 간경도감에서 나온 언해본을 읽기 위해 국어고어사전을 마련했던 기억도 새록새록하다. 현재 언해본 원본은 거의 국보 내지는 보물로 지정되었다. 11년간 지속된 사업으로 고승과 이름난 유학자 20여명이 번역에 참여하였으며 특히 구결(口訣 한문원문 문장이 끊어지는 부분에 우리 말로 토를 다는 일)작업에는 세조가 직접 관여 했다. 그 밖에 역부(役夫 뒷바라지하는 인부) 장인(匠人 종이, 먹, 책 등을 만들고 인쇄하는 기능직)등이 170여명으로 도합 200여명에 육박하는 거대한 조직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불교에 심취했고 등극 이전 그리고 이후에도 집현전 학사인 김수온의 형 신미(信眉 본명:김수성)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한글창제 및 번역에 관한 많은 자문을 받았다. 광릉내에는 969년 고려 때 창건된 운악사(雲嶽寺)가 있었다. 능림(陵林 왕릉을 보호하기 위한 숲)지정 이듬 해 1469 세조의 능찰(陵刹 왕릉을 수호하는 사찰)로 중창 한 후 임금의 진영(초상화)을 모신 숭은전(崇恩殿)을 건립했다. 얼마 후 현판을 봉선전(奉先殿)으로 바꾸었다. 사찰이름도 자연스럽게 ‘봉호선왕지능(奉護先王之陵 선왕의 능을 받들어 보호함)’이란 의미를 지닌 봉선사(奉先寺)로 바뀌었다. 당시에 만든 범종이 현재까지 남아서 소리로써 긴 역사를 이어주고 있다. 봉선사에서 반백년을 머물렸던 월운(月雲1929~2023) 노사(老師)는 스승이신 운허(耘虛 1892~1980 독립운동가.번역가)스님의 뒤를 이어 동국역경원장을 맡아 한글대장경 318책을 완간했다. 그리고 봉선사에 학림과 서당을 개설하여 수많은 번역인재를 양성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세조임금의 한글사랑이 오백년 후까지 고스란히 남아서 오십년 역경(譯經)사업을 보이지 않는 힘으로 외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날 모자라는 능력을 돌아보지 않고 호기롭게 번역한 책을 우편으로 스님께 보냈다. 얼마 후 칭찬과 격려말씀이 함께 담긴 친필 엽서가 도착했다. 어른께서 지닌 후학에 대한 애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인연이 닿지 않아 직접 당신 앞에서 책을 펴고서 함께 살지는 못했지만 가끔 봉선사로 와서 인사 올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하지만 이 절 저 절에서 당신이 배출한 승가의 제자들과 늘 도반이 되어 서로 탁마하면서 함께 지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재가제자들의 뛰어난 안목도 번역이 막힐 때마다 늘 큰 힘이 되었다. 친구의 친구가 친구인 것처럼 제자들의 도반 역시 제자나 다름없으리라. 남겨두신 사세게(辭世偈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말씀)를 가만히 음미해 본다. 첫구절은 ‘사승비승사속비속(似僧非僧似俗非俗 승려이면서 승려가 아니고 속인이면서 속인이 아니다)’라고 했다. 교리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승(僧)은 진리의 세계(진제眞諦), 속(俗)은 현실세계(속제俗諦)를 말한다. 따라서 진(眞.출가승)과 속(俗.세간인)을 동시에 벗어나면서도 또다시 그 둘 속으로 들어가 열심히 살았다는 ‘진속불이(眞俗不二. 진과 속은 결코 나누어 질 수 없다)’의 수행경지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비가 조금씩 오락가락하긴 하지만 대체로 흐린 날씨를 유지하는 날(2023년 6월21일 수요일) 월운 대강백(大講伯)의 다비식(장작을 사용하는 전통적인 불교 화장의식)을 마친 후 서울 조계사로 돌아오는 길에 세조왕릉을 찾았다. 두 어른의 한글사랑에 다시금 감사를 드리면서 두손모아 고개를 숙였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3-06-26 08:50:39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정작 옛다리 밑으로는 물이 흐르지 않더라 늦봄이지만 때 이른 더위와 강렬한 햇살을 온몸으로 맞으며 서울 성동구 화살곶벌(箭串坪)을 찾았다. 청계천과 중랑천이 합해지면서 한강으로 들어가는 합수 지점이다. 군사용 말을 키우거나 왕들 사냥터로 이용되었으며 때로는 군인들 훈련장으로 사용되던 곳이라고 한다. 그 덕분에 ‘화살’이란 조금 살벌한 이름이 지명에 붙었다. 하지만 땅이름과는 달리 널따란 평지는 야생화로 유명했던 모양이다. 조선 초기 문신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한양 인근 명소 10곳을 골라 시를 붙인 ‘한도십영(漢都十詠)’에 오를 정도로 괜찮은 경관이 있던 곳이다. 선생께서 어느 봄날 화살곶 들녘의 풀꽃을 찾아가 봄놀이를 즐겼다는 ‘전교심방(箭郊尋芳)’에는 주변 풍광까지 살뜰하게 묘사했다. “손바닥처럼 평평한 들에 풀은 돗자리 같은데(平郊如掌草如茵) ··· 삼삼오오 벗을 지어 풀꽃을 찾아가네(三三五五尋芳草)” 하지만 지금은 풀꽃을 감상하려 해도 접근하기조차 어렵다. 강으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막는 안전팬스에 더하여 ‘조류인플루엔자 예방을 위해 철새 도래지에 출입하지 말라’는 안내문 현수막까지 걸어 놓았다. 푸른 갈대는 이미 키를 넘길 만큼 자랐다. 또 저절로 자란 야생화가 아니라 인공으로 키운 꽃들이 여기저기서 그 역할을 대신했다. 거리를 두고서 눈으로만 바라보며 옛 풍경과 지금 풍경을 상상으로 비교해가며 살폈다. 왕들 사냥터에 출입하기 위해 다리가 필요했다. 당시로서는 이 정도 규모의 다리를 만들기도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교각을 놓고 나면 홍수가 쓸어갔다. 이 터에서 사냥을 즐기던 세종(재위 1418~1450)의 상왕(정종·태종)들은 몇 년 시차를 두고서 세상과 인연을 마쳤다. 다리도 필요 없게 되었다. 듬성듬성 교각 몇 개만 남긴 채 미완성으로 둔 세월이 50여 년이었다. 하지만 이 길은 한양에서 강원·충청으로 가는 교통 요충지다. 그래서 공사를 재개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성종(재위 1469~1494) 때 비로소 완성할 수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시대 다리 가운데 가장 길다고 한다. 다리 만드는 일은 당시로서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일이었다. 몇 번 실패를 거듭한 끝에 초빙한 전문가는 승려였다. 남들로 하여금 시냇물을 건널 수 있도록 해주는 선행은 월천공덕(越川功德)을 짓는 공익을 위한 일인지라 당신도 기꺼이 응했다. 얼마나 다리를 잘 만들었는지 평지를 걷는 것과 다름없다고 하여 성종은 ‘제반교(濟盤橋·반석 같은 평평한 다리)’라고 이름 지었다. 돌다리를 만드는 데 대청마루 까는 공법을 도입한 뛰어난 응용 기술이었던 것이다. 성종 시대를 함께 살았던 인물인 성현(成俔 1493~1504) 선생은《용재총화》 권9에 이 사실을 빠뜨리지 않았다. “어떤 승려가 일찍이 화살곶다리(箭串橋)를 구축하였다. 많은 돌을 채벌하여 대천(大川)을 건너는 다리를 만들었는데 길이가 300보를 넘었다. 안전하기가 집 안에 있는 것과 같아서 행인이 평지를 밟는 것과 같았다.” 또 그로부터 300여 년 후 인물인 이규경(李圭景 1788~?)도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성종 14년 승려들이 흥인지문 밖 화살곶(箭串)에 다리를 놓았는데 왕이 제반교라 명명하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다리를 만들었던 스님 법명을 확인할 방법이 없어 참으로 유감스럽다. 하지만 안내판에는 이런 내용을 품은 ‘불교성지’라는 사실은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야사에 불과한 ‘태조가 함경도에서 돌아와 여기까지 마중 나온 이방원이 미워서 활을 쏘았다’는 이야기만 몇 줄 늘어 놓았다. 이제라도 ‘화살곶다리(箭串橋)’뿐만 아니라 ‘제반교’에 대한 전후사정 내용을 더하고 다리 이름도 병행하여 기록한다면 후세 사람으로서 전임 시공자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일이 될 것이다. 한글 세대에 맞추어 ‘살곶이다리&대청마루다리’도 괜찮겠다. 일절 불필요한 장식은 물론 난간조차도 없는 실용형 다리는 강물 흐름에 따라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훼손과 유실을 거쳐 현재 옛 다리 끝에는 새로운 콘크리트 다리를 덧대어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한쪽은 대학 건물에 가로막혔고 맞은편은 강변도로 폭만큼 지하도를 뚫어 놓았다. 통행을 위한 기능용 다리가 아니라 ‘역사관광용’ 다리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살곶이다리의 중랑천 상·하류 양방향을 살펴보니 얼추 네다섯 개의 새로운 현대식 다리가 물류와 교통편을 담당하고 있었다. 오리지널 옛 다리만 부분적으로 폰카에 제대로 담아 보겠다고 강 이쪽저쪽과 다리 주변을 맴돌았다. 어느 곳에서도 완전체로 잡히는 곳이 없다. 그만큼 지형지물의 변화가 심했다는 방증이리라. 결국 멀리 떨어진 전철용 다리 곁 인도로 올라갔다. 원경이긴 하지만 옛 다리와 이어진 새 다리 그리고 주변 현대식 다리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전문가용 카메라가 없으면 옛 다리만 잘라서 찍을 수도 없겠다. 밀짚모자를 단단히 여미고서 도시의 텁텁함이 묻어나오는 강바람을 맞으면서 눈에다가 야무지게 담았다. 정작 본래 다리 밑으로는 물이 흐르지 않고 옛 다리 아래 푸른 갈대 위로 바람만 흐르더라. 아니 풀밭 위로 다리가 흐르고 있더라.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3-05-24 14:09:45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시작은 '정원'인데 끝은 '농장'이더라 정원이야기 하나 –경남 산청 수선사 스스로 ‘가드너(정원사)’라고 부르며 정원관리를 수행삼아 정진하는 스님을 만났다. 지리산 수선사에서 30년을 가꾼 조경으로 인하여 지역의 유명관광지가 되었고 입소문을 타고서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소문대로 구석구석 손길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다듬지도 않고 칠도 하지 않은 비규격적인 모양의 나무다리 그리고 너와를 올린 천연덕스런 정자가 어우러진 연못 공간을 중심으로 하여 주변에는 잔디 나무 꽃 자연석들이 적절하게 어우러지면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힐링’ 공간을 제공하고 있었다. 가드너 스님과 차를 한잔 나누면서 그동안의 경험담도 들었다. 혹여 볼일이 있어 바깥으로 나가더라도 당일로 돌아왔다고 한다. 잡초를 뽑아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쌓인 풀일거리는 곱절로 힘을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여름에는 앞쪽에 풀을 뽑으면서 지나가면 벌써 뒤쪽에서 풀 자라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현재의 아담한 넓이가 한 사람이 관리할 수 있는 정원면적의 최대치라고 했다. 풀을 뽑는 일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마음의 번뇌를 제거하는 수행으로 이어졌다. 정원이야기 둘 –충북 청주 마야사 청주 교외의 마야사는 새로 창건한 절이다. 어느 화가의 아틀리에를 인수했다. 기존 기본조경을 존중하면서 거기에 당신의 취향을 더하여 10여년 동안 정원을 가꾸었다. 주변 경험자에게 묻기도 하고 조경잡지도 정기구독하고 정원에 관한 책도 다수 읽고 좋은 정원이 있다고 하면 수시로 찾아 다녔다. 이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서 도량이 안정감을 더했다. 제일 큰일은 풀과의 전쟁이라고 했다. ‘풀 코스’를 완주하는 일이 일상사가 되었다. 또 기존의 나무와 나무가 너무 가까워 서로에게 방해되면 과감하게 잘라냈다. 제갈공명의 ‘읍참마속’보다 더 가슴 아픈 ‘내 팔을 잘라내는’ 고통이 뒤따르더라고 했다. 작은 나무들은 어울릴 만한 자리로 옮겨 심었다. 옮기는 비용은 새로 나무를 사서 심는 비용에 비할 바가 아닌 엄청난 지출을 요구했다. 이식한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또 옮기다보면 죽는 경우도 더러 있기 마련이다. 차라리 그대로 둔 것만 못한 시행착오도 숱하게 치렀다. 입구의 빽빽한 참나무 동산은 과감하게 솎아내고 등성이 부분의 큰 나무만 일렬로 남겼다. 무조건 있는 그대로 두는 보존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도 몸으로 배우게 되었다. 큰 은행나무의 튼튼한 가지에는 그네의자를 매어 두었더니 어린아이와 함께 오는 젊은 엄마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이런저런 정원 가꾸기 체험을 모아놓은 책도 서너권 출간했다. 정원 이야기 셋 –전남 순천 선암사 올봄에는 매화구경도 못 가고 벚꽃놀이도 없이 보냈다. 봄 끝자락이지만 길을 나섰다. 순천지역에 생활 근거지를 두고 있는 오래 된 인연들과 ‘한국 제일의 사찰조경’이라는 선암사를 찾았다. 유명한 ‘선암매’ 고목들이 흙기와 담장을 따라 줄을 지어 선 채 연푸른 잎새를 달고서 우리를 맞이한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매화를 대신한 ‘겹벚꽃’이 만개한 장관을 연출했다. 홑벚꽃이 피고 지는 것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주고도 남는다. 이제 나이 탓인지 은은한 빛깔엔 무덤덤해지고 강렬한 색감이라야 몸이 겨우 반응을 한다. 겹벚꽃의 강렬함은 홑벚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찐한 감동을 주는 것은 큰 키를 가진 붉디 붉은 영산홍이다. 한 점의 잎도 없이 꽃을 가득 달고서 서 있다. 아래쪽 줄기와 가지에는 군더더기가 한 점도 없다. 그건 오랜 시간 동안 가지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부지런한 손길의 반영을 의미한다. 감동을 주는 일은 그냥 되는 게 없다. 무채색의 빛바랜 한옥 고택건물과 대비되면서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은 한동안 발길을 붙들어 맨다. 선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품은 칠전선원 뒤란의 돌로 만든 수곽이다. 4단으로 이어진 수곽과 수곽 사이에는 대나무 홈통을 따라 물과 물이 이어지며 흐른다. 진입부의 제법 긴 나무 홈통이 마당을 가로지르면서 첫 번째 직육면체 수곽인 사각형 안으로 졸졸 소리를 내며 물을 떨군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는 둥근형으로 넓이와 높이가 차츰차츰 작아지면서 전체적으로는 완만한 Z자 형태로 배치했다. 바닥에는 적당한 크기의 사각형 혹은 타원형 막돌 몇 십개를 자연스럽게 깔았는데 하나하나가 모이면서 또 전체적으로 세월의 더께까지 더해지면서 고졸한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일행들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폰 사진을 담기에 분주하다. 멀리서 가까이서 가로와 세로로 돌려가면서 그리고 확대와 축소를 거듭하며 원하는 장면을 포착하는 데 여념이 없다. 담장 너머 차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이 물로 차를 우려낸다면 누구에게나 천상의 맛을 제공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맛도 물맛이지만 수곽의 전체적인 자연스런 뛰어난 조형미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차인들과 사진작가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정원 이야기 넷 – 이름없는 옛 암자 호젓한 암자에서 스승과 제자가 단둘이 살았다. 어느 날 스승님이 급한 목소리로 불렀다. 그동안 눈에 거슬렸던 나무를 옮기자는 것이다. 열심히 땀을 뻘뻘 흘려가며 정성을 다해 옮겼다. 며칠이 지났다. 뿌리를 내렸는지 차츰차츰 잎이 생기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스승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저 자리가 아닌 것 같다면서 다시 옮기자고 했다. 그렇게 몇 번을 옮겼다. 얼마 후 시들시들 하던 나무는 결국 죽었다. 나무가 죽은 것에 대한 미안함보다는 이제 힘든 삽질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에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며칠 후 또 곡괭이를 가지고 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뛰어갔더니 이번에는 바위를 저쪽으로 옮기자는 것이었다. 헐!!! 정원 이야기 다섯-어느 가정집 어떤 책에서 읽었다. 은퇴한 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소일거리는 정원을 관리하는 일이라고 했다. 물론 우리나라가 아니라 유럽의 이야기다. 이유는 집안을 지키고 있는 안주인과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면서도 필요한 내조를 받아가며 살 수 있는 좋은 방법이래나. 그러고보니 서로의 시야권 안에서 살면서도 심리적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적절한 공존의 타협책이긴 하다. 아예 가출하여 공간을 달리하며 ‘자연인’처럼 농장주를 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경제력과 체력이 받쳐줘야 하고 나름 조경학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춰야 하는 오랜 준비작업이 필요한 영역인 까닭이다. 그리고 하루 3번의 끼니도 스스로 해결해야 하니 이래저래 은퇴 후의 여유있는 낭만과는 거리가 먼 중노동 생활이 되기 십상이니 그것도 함부로 덤벼들 일은 아니라는 애정 어린 충고까지 덧붙였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3-04-25 11:20:23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금일봉'은 소금 한 봉지 였다는... 코로나와 함께 미세먼지 주의보가 일상화되었다. 낮에는 KF95가 찍힌 마스크로 해결하고 저녁이면 소금물로 코와 입안을 헹궈내는 일로 하루를 마감한다. 코로나가 해제되더라도 미세먼지 때문에 소금물 생활은 계속될 것 같다. 한동안 청주 도반 스님 절에서 얻어 온 죽염수를 이용했다. 큰 생수병에 담았는데 정제를 했는지 맑은 물과 다름없이 투명하다. 농도도 여간 진한 게 아니다. 사용할 때마다 맹물을 섞어 적당하게 희석해야 했다. 죽염은 대나무 속에 천일염을 넣고 황토로 입구를 막은 뒤 소나무 장작불로 가마에서 몇 번을 반복하여 구워내는 가공 소금이다. 오래전부터 절집에서는 구운소금을 만들어 사용해왔다. 가정집에서도 살림 잘하는 이는 프라이팬에 볶은 소금으로 음식의 간을 맞추기도 한다. 요즈음은 자기 브랜드를 내걸고 상품화되어 누구나 별다른 수고로움 없이 죽염과 구운 소금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소금은 종류도 많다. 육지에서 광석을 채취하듯 소금 덩어리를 캐내는 것을 암염이라고 한다. 하긴 소금이 광물에서 식품으로 분류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기의 일이라고 하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 옛날에는 소금이 국가의 전매사업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중요한 물품으로 취급했는지 알 수 있다. 한때는 군인 월급을 소금으로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솔저(soldier)라고 불렀다. 후에 월급쟁이를 샐러리 맨(salaly man)이라고 부르는 것도 모두 소금(salt)이란 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글자 그대로 작은 금(小金)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금일봉’이란 말은 소금 한 봉지를 의미할 수도 있겠다. 공영방송에서 2007년 6부작으로 제작된 ‘차마고도’에도 소금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야크를 길들이는 데 소금을 먹이로 사용했다. 그 소금은 우물에서 소금물을 퍼올려 소금밭에서 증발시킨 것이었다. 땅속에 있는 암염이 녹아서 지하수맥을 따라 흐르다가 우물로 모인 것이었다. 소금물 푸는 것부터 증발시키는 그 힘든 과정을 전부 여성의 힘으로 해결하는 소수민족 삶의 단편을 엿볼 수 있었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소금이라면 당연이 바닷물에서 나온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광산이나 우물에서 소금이 나온다는 것은 매스컴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현대 지질학자들에 의해 육지의 소금도 본래 바다에 있던 것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바다 밑에 있던 땅이 화산 활동이나 지진으로 지각변동을 일으키면서 솟아올랐고 그때 갖혀 있던 바닷물이 차츰차츰 증발하면서 소금만 남겨 두었다는 부연 설명이 뒤따랐다. 암염광산이나 소금우물 혹은 소금호수가 있는 육지는 한때 바다였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유적인 셈이다. 봄이 오는 날 전남 신안군 증도에 있는 대형 염전에 들렀다. 장성의 작은 암자에 있는 스님이 서울에 머물고 있는 수도승 몇 명을 봄바람이나 쐬자면서 데리고 간 곳이다. 겨우내 얼어 있던 염전의 밭두둑을 손질하면서 물 빠진 바닥도 논바닥처럼 평평하게 다듬고 있었다. 본래 소규모 염전이 있었는데 1953년 전(前)증도와 후(後)증도를 연결하는 제방을 완성함으로써 국내 최대 단일 염전을 조성할 수 있었다. 전쟁 직후라 일할 사람도 많았고 소금값도 괜찮았다고 한다. 하지만 외국산 수입 소금이 대량으로 들어오면서 경영난에 봉착했다. 1985년 손말철 선생이 인수한 후 140만평 염전은 또 다른 계기를 맞게 되었다. 염전 주변 환경을 청정하게 유지하면서 아예 ‘토판(土板)천일염’으로 특화하여 전통 소금 제작 방식을 고수한 덕분에 뒷날 ‘소금장인’까지 배출하는 명문가가 되었다. 나무로 만든 소금창고 수십 채, 소금 만드는 이들이 머물던 숙소 수십 채, 소금을 옮기는 수많은 수레, 수레길을 따라 놓인 레일 그리고 길 끝까지 이어진 전봇대 행렬, 양옆으로 펼쳐진 염전, 염전 안으로 소금을 이동하기 위하여 길게 뻗은 길을 겸한 다리 구조물 등이 현재도 그대로 살아 있는 삶의 현장이다. 주변에 서걱거리는 마른 갈대가 운치를 더해준다. 나무 소금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도심지에 있다면 바로 카페로 바꾸어도 엄청 인기가 있을 것 같은 흉내 낼 수 없는 땀의 세월이 켜켜이 쌓여 있고 투박한 나무로 이어진 소박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소금창고마다 전부 빠지지 않고 일련번호가 붙어 있는 걸로 봐서 그 자체가 관리 대상임을 알게 해준다. 이렇게 하드웨어는 물론 소프트웨어까지 함께 갖춘 가치를 인정받아 염전은 근대문화유산 360호, 석조 소금창고는 근대문화유산 361호, 2016년 국가주요어업유산, 2018년 국가유형문화재 134호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전라북도 변산반도 줄포 인근에도 긴 역사를 지닌 염전이 있다. 부안 개암사에는 죽염 제조법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고창 선운사(禪雲寺)에는 유명한 소금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백제 위덕왕 시절인 577년에 이 사찰이 창건된다. 큰 절을 지으려고 하면 넓고 양명한 명당터가 첫 번째 조건이다. 문제는 그런 좋은 자리에는 이미 주민들이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창건주인 검단(黔丹) 선사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단순 이주가 아니라 생계까지 해결해야 하는 큰일이었다. 고심 끝에 묘안을 찾아냈다. 산골 비탈 논밭 대신 바닷가 넓은 소금밭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당나라 유학 시절에 익혔던 그리고 당시로는 최첨단 기술인 소금 제조법을 주민들에게 전수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서로 윈윈하는 해결책으로 사찰도 건립하면서 주민의 행복권도 보장하는 대안의 모범사례를 제시한 것이다. 이후 주민들은 매년 첫 소금을 수확하면 사찰에 소금을 공양미처럼 올렸다. 이 ‘보은염(報恩鹽)’의 역사가 벌써 1500년이다. 소금이 흔한 시대가 되었다. 물이나 공기처럼 너무 흔해서 귀한 줄 모르고 살아간다. 당사자인 소금은 ‘작은 금’으로 제대로 대접을 받던 지난 시절을 생각하며 “아~ 옛날이여!” 라는 대중가요 한 자락을 읊조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3-03-19 11:5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