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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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세로’는 횡설수설(橫說竪說) 종횡무진(縱橫無盡)의
횡수(橫竪가로세로)와 종횡(縱橫세로가로)을 한글로 번역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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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일연스님 …가파른 절벽 위에 뿔을 걸고 숨은 산양처럼 은둔하다 [원철 스님] 지역마다 자기고장의 특색을 살리는 명칭으로 동네이름까지 바꾸는 일이 더러 있다. 군위의 ‘삼국유사면’도 그러한 경우라고 하겠다. 《삼국유사》는 2022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 목록에 등재된 명저이다. 삼국유사의 산실인 인각사가 위치한 지역의 행정구역명은 본래 경북 군위군 고로면이었다. 돌에 새겨진 ‘고로우체국’ 검은 글씨 뒤로 새로 지은 이층짜리 전형적인 시골 우체국 건물에는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삼국유사 우체국’으로 간판을 바꾸었다. 인근 고속도로에도 ‘삼국유사 군위휴게소’가 있다. 모두가 지역사회의 가장 유명한 문화유산인 《삼국유사》를 널리 알리기 위함이다. 하지(夏至)가 막 지나간 뜨거운 여름 날 인각사(麟角寺)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했다. 병풍처럼 우뚝 솟은 절벽 아래로 위천(渭川)이 반달모양을 그리며 휘감아 흐르는 평지에 자리잡은 사찰이다. 인각 즉 ‘기린 뿔’이란 절 이름이 특이하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는 기린은 뿔이 없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린은 용의 머리에 사슴의 몸과 뿔 그리고 소의 꼬리에 말의 발굽과 갈기를 가진 상서러움을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일본 기린맥주 상표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신편동국여지승람》에는 “동구(洞口 입구)에 석벽(石壁 깍아지른 바위)이 촉립(矗立 우뚝 서 있음)해 있는데, 옛날부터 전하기를 기린이 그 위에 뿔을 걸어 두었으므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바위 위에 뿔을 걸어둔다는 말을 이해하려면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당나라 운거도응(雲居道應 ?~902. 조동종)선사의 선문답인 ‘영양괘각(羚羊掛角)’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겠다. 영양은 뿔을 나무에 거는 방법을 사용하여 몸을 숨기면서 발 자취를 없앤다. 영양은 산양(山羊)의 일종이다. 사냥개가 발자국을 따라 사냥꾼을 안내하지만 영양은 뿔을 나뭇가지에 걸고서 몸을 공중에 띄운 채 숨어있기 때문에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이를 선불교에서는 몰종적(沒蹤跡)이라 한다. 허공을 나는 새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살아가는 삶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일연선사도 임종할 무렵 “뿔을 세 개 가진 기린이 바다에 들어가고...”라는 말씀을 남겼다. 기린이 바위 사이에 뿔을 걸고서 숨는 것처럼 일연선사는 만년에 이 곳에서 흔적없이 은둔코자 했으며 마지막에는 흔적없이 종적을 감추는 삶을 선택했던 것이다. 인각사에는 일연(一然 1206~1289)선사의 부도와 탑비가 남아 있다. 절 밖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것을 제대로 관리하고자 1962년 인각사 경내로 옮겼다. 비교적 온전한 부도와는 달리 비석은 갈라지고 넘어져 거의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도괴된 채 비각 안에 서 있다. 그럼에도 최고급 비석재료인 귀한 검은 오석(烏石)이 뿜어내는 품위와 몇 자 남지 않았지만 명필로 유명한 왕희지(王羲之 303~361)서체의 명품인지라 ‘오리지널’만이 가질 수 있는 품격은 여전하다. 원본비석은 구산선문 문도들의 정성과 역량을 총결집하여 1295년(국사열반 6년 후) 세웠다. 글은 정치외교가인 민지(閔漬 1248~1326)에게 부탁했다. 그는 당시 장원급제한 인물이라는 유명세를 자랑했다. 또 죽허(竹虛)스님은 4천자나 되는 왕희지체 글자를 모으기 위해 집자(集字)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고려최고의 비석을 만들겠다고 모두가 소매를 걷어붙인 것이다. [일연공원 입구] 하지만 의도와는 달리 나타난 결과는 정반대였다. 조선시대가 되면서 불교계는 위축되었고 시설관리 능력마저 저하되면서 너도 나도 왕희지 명필 비문을 탁본하겠다고 몰려든 것이다. 지나친 탁본은 비석보존에 치명상이다. 개인 뿐만 아니라 심지어 중국 명나라와 일본의 탁본요청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비석을 가루로 만들어 물에 타서 마시면 과거에 급제한다거나 혹은 비석을 세 번 돌고나서 손으로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신앙심까지 가세했다. 또 좋은 재료로 벼루를 만들겠다고 시골선비들이 오석을 잘라가는 일까지 겹쳤다. 게다가 위치도 경내가 아닌 동남쪽 방향으로 4~5리 떨어진 곳에 외따로 있는지라 관리의 손길마저 제대로 받지 못한 탓에 훼손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불행중 다행인 것은 비록 원본비석은 도괴되었으나 탁본 수십여점이 개인소장품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공공기관인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그리고 미국 버클리대학 동아시아 도서관 또 일본 천리대 등에도 탁본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부산출신의 재야 서지학자 박영돈 선생 덕분에 빠진 글자를 탁본끼리 서로 대조해가며 짜맞춘 결과 거의 원본에 가깝도록 복원할 수 있었다. 명필의 글씨가 화(禍)가 된 동시에 복(福)이 되는 양면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희귀한 사례라고 하겠다. 비석은 국사탄생 800주년기념사업으로 2006년 경내에 완전한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도괴된 비석] 일연선사는 1283년 국사(國師)자리를 사직하고 개경에서 인각사로 내려왔다. 이유는 95세인 모친을 봉양하기 위함이다. 이듬해 모친이 돌아가셨으니 함께 산 것은 반년 남짓하다. 스스로 호를 목암(睦庵)이라 했다. 당나라 목주(睦州 절강성)출신인 도명(道明)선사의 효행을 본받는다는 의미이다. 목주도명은 만년에 큰절의 어른인 방장자리를 버리고 홀로 시골 암자에서 노모를 모시고 살았다. 짚신을 팔아 어머니를 봉양한 연유로 진포혜(陳蒲鞋)라는 별명이 붙었다. 진씨 성을 가진 짚신스님이란 뜻이다. 일연스님의 생전효도는 6개월 정도에 불과했지만 사후 효도는 영원히 이어졌다. 열반할 때 제자들에게 부도를 세울 자리를 지정해 주었다. 절 동쪽으로 2km 남짓 떨어진 곳이였다. 알고보니 정면 산 위에 있는 어머니 산소가 보이는 자리였다. 아침에 비친 햇볕이 부도에 반사되면서 어머니의 무덤을 비추었다. 밤이 되면 사찰 석등에 불을 밝히면 그 불빛이 당신의 부도까지 닿았다. 부도의 불빛이 다시 어머니 무덤을 비추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동네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복원한 비석] 현재 지역주민의 일연스님 사랑은 끝이 없다. 옮겨버린 원래 부도자리 빈터에는 역사성을 살려 다시 새로 만든 부도를 안치했다. 어머니 산소 앞에는 1997년 ‘낙랑군부인이씨지묘(樂浪君夫人李氏之墓)’ 글자를 새긴 상석을 마련했다.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옛이야기를 구체적 형상으로 다시 살려낸 것이다. 2017년 모친무덤과 아들의 원래 부도터를 잇는 길이 포함된 ‘일연 테마로드’ 라는 순례길을 만들었다. 효도길 끝자락에는 ‘일연공원’까지 조성하여 삼국유사 편찬이라는 기념비적 업적을 후손들이 영원히 기억토록 했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4-07-25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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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한양의 태릉에서 서라벌의 화랑을 만나는 시간여행 [원철 스님] 제주도와 남해안에서 시작된 장마가 차츰차츰 북상하고 있다고 일기예보는 전한다. 흐린 하늘에서 추적추적 빗방울이 떨어진다. 무슨 행사건 날씨가 반 쯤 도와줘야 무난하게 치룰 수 있다. 나머지 반만 인간의 몫이라고 하겠다. 다행스럽게도 실내행사인지라 이동할 때를 제외하고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이하 육사로 표기함)에서 열리는 ‘호국영령 위령대재’에 참석했다. 6.25전쟁 때 산화한 국군과 유엔군을 추모하는 연례행사다. ‘호국’이란 말을 잊고 살다가 유월이 되어야 한번 쯤 생각하는 것이 우리네의 일상적 삶이다. 그래서 의례(儀禮)가 필요한 것이다. [사진 1. 육군사관학교 입구에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 대한불교조계종 군종(軍宗)교구가 주관한 행사에 초청된 불교계 인사들을 배려하여 육사 박물관측은 입구 로비에 ‘풍상세월(風霜歲月)’이란 서예작품을 특별전시 했다.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했던 만해(卍海 1879~1944 한용운)선사의 글씨다. ‘풍상세월 인생유수(人生流水)’라는 말은 스님께서 평소에 즐겨 사용하던 말씀이라는 소갯말로써 관람객의 이해를 도왔다. 세상의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삶은 물처럼 흘러가기 마련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일제강점기라는 차가운 바람(風)과 얼어붙은 서리(霜)같던 시대적 환경의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자신의 신념을 굳히지 않고 독립의지를 다짐하던 기개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 필묵이다. ‘만해거사(卍海居士)’라고 찍어놓은 붉은 낙관글씨에서 보듯 독립운동을 하려면 때로는 승려라는 신분마저 감추어야 했던 시절임을 넌지시 알려주는 자료라 하겠다. [사진 2. 육사정문 뒷면 화랑대 현판과 화랑대역 간판] [사진 3. 육사 박물관에 소장된 만해 한용운 스님 글씨] 육사 캠퍼스를 일러 흔히 ‘화랑대(花郞臺)’라고 부른다. 화랑은 신라시대 호국의 상징인 ‘화랑도’에서 연유한다. 화랑이란 이름이 경북 경주를 떠나 서울로 옮겨지면서 작은 언덕이란 의미의 ‘대(臺)’라는 글자가 추가되었다. 뿐만 아니라 화랑대라는 이름은 근대와 현대에 들어오면서 이 지역에서 분화에 분화를 거듭한다. 서울에서 춘천가는 경춘선 철길에는 화랑대역이 생겼다. 지하철이 개통되면서 땅 밑에도 화랑대역이 생겼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상의 화랑대역은 지하의 화랑대역에게 자기역할을 넘겼다. 그리고는 폐역이 되었지만 철도공원으로 남아 근·현대사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다시 자리잡았다. 화랑이란 이름은 시대와 세대를 이어가며 여전히 우리생활 안에서 고전적 상표로 살아있는 것이다. [사진 4. 태릉입구의 안내판] 행사를 마치고 일행과 헤어진 뒤 혼자 남아서 지상에 있는 화랑대역 공원을 찾았다. 역건물과 일이백미터 정도의 폭을 두고서 거의 일렬의 위치에 육사정문을 만들었다. 한옥형식을 빌린 시멘트 건물이지만 단청을 칠하고 기와까지 올렸다. 절집의 산문(山門)을 연상케 한다. 정문 후면에는 ‘화랑대’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눈길을 윗쪽으로 돌리니 일제 강점기 건물양식인 역사(驛舍)에는 ‘화랑대역’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다. 두 건물의 글씨를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위치에 서서 한동안 발길을 떼지 못했다. 고대의 ‘화랑’을 매개로 근대와 현대가 서로 이어지면서 장소의 역사성을 증명하는 공간을 만났기 때문이다. 기차가 있는 풍경을 상호로 내건 카페의 이층으로 올라갔다. 빗물이 흐르는 창문너머로 보이는 철로 위에는 증기기관차 전동차 기차 등 갖가지 객차가 옛물건처럼 전시되어 있다. 당시에는 최첨단 이동수단이었지만 지금은 노천박물관에 진열되면서 지난 세대에게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 유물이 된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해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찌 과거없는 현재가 있을 수 있겠는가. 과거는 과거대로 최선을 다했으니 현재는 현재대로 최선을 다하면 될 일이다. 미래의 어느 날이 되면 현재 최선의 기술인 최첨단 ktx 고속열차도 언젠간 유물이 되어 저 곳 어디엔가 빈 자리를 찾아서 올 터이다. 화랑대역의 명칭도 알고보면 1958년 변경된 이름이다. 1939년 경춘선 개통시에는 ‘태릉역’이었다. 20여년을 사용한 뒤에 시효가 소멸되었다. 태릉은 조선왕릉의 이름이지만 주변의 지역명을 대신했다. 지금도 태릉선수촌 태릉국제사격장 등의 이름으로 살아있다. 그 이름의 뿌리를 찾아서 화랑대역에서 태릉방향으로 걸었다. 부산하던 도시풍광이 일거에 한적한 시골 분위기로 바뀐다.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夏至) 무렵인지라 비가 오락가락하는 늦은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사방은 여전히 훤하다. 문정왕후(1501~1565)의 태릉을 찾아오는 관람객들에게 안내소에서 강릉(康陵 문정왕후 아들인 왕과 왕비의 능)으로 넘어가는 산책길은 멧돼지의 잦은 출몰로 인하여 폐쇄되었다고 알려준다. 입구의 홍살문과 사당인 정자각 너머 위엄을 갖춘 왕릉을 마주하고서 현대판 신도비(神道碑 능 입구에 행적을 새긴 비석)인 안내판을 읽었다. 허응보우(虛應普雨 1515~1565)선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폐지되었던 승과(僧科)고시를 다시 실시케 했다고 써놓았다.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역사의 한 획을 그을 만큼 중요한 업적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 시험을 통해 서산·사명 대사가 발탁되었기 때문이다. 뒷날 승군(僧軍)을 지휘하면서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일등공신의 출발점인 까닭이다. [사진 5. 태릉 전경] 역사란 해석학이라고 했다. 물론 해석의 권한은 해석하는 사람에게 있다. 그래서 나름대로 과감한 해석을 시도했다. 서라벌에 뿌리를 두고 있는 1500년 역사의 화랑이란 이름과 한양에 근거를 두고서 500년 역사를 가진 태릉이란 이름은 각각 출발지가 달랐다. 하지만 백여년 전에 태릉역이 생기면서 변화가 일어난다. 이후 두 이름이 연결되면서 화랑대역이 되었다. 철도는 사람과 물자를 이어주면서 정신까지 함께 이어주었다. 신라 화랑과 조선 승군 그리고 한국 육사가 ‘호국’이라는 가치를 공유하면서 동일한 공간에서 만나도록 주선했다. 이 모든 것을 서로 연결시켜 준 플렛폼은 문정왕후의 태릉이라 하겠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4-06-24 14: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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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양주 회암사에서 만난 '겹쳐짐의 미학' [원철 스님] 비가 내리는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대구에서 머물고 있는 도반이 경기 양주 회암사 사리를 친견하고자 일부러 시간을 쪼개서 올라왔다는 문자를 보냈다. 회암사박물관 출입문을 찍은 인증샷도 함께 전송했다. 멀리서 찾아 올 만큼 회암사 터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이다. 넓은 부지에 남아있는 주춧돌과 석축 그리고 돌계단이 어우러진 공간은 폐허지가 주는 허허로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무상한 아름다움은 일년에 수만명의 답사객을 부르는 지역사회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최근에는 이런저런 일로 두 번을 다녀왔다. ‘겹쳐짐의 미학’을 정리할 수 있는 나름의 성과를 얻었다. 첫째, 궁궐과 사찰이 겹쳐진 모습을 만났다. 태조 이성계(1335~1408)와 무학대사가 함께 머물렀던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제일의 규모였다고 한다. 조선왕실의 원찰(願刹)인 동시에 행궁(行宮) 역할을 했던 까닭이다. 목은 이색(1328~1396)선생은 “당우가 엄청나게 크고 아름답고 화려하기가 동국의 제일이니 중국에서도 비견할만한 사찰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사찰인 동시에 궁궐이요 궁궐인 동시에 사찰인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비록 폐사지가 되었지만 지금 남아있는 흔적만으로도 본래의 화려한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둘째, 고려와 조선의 역사가 겹쳐진 곳이다. 그 곳에는 불교를 숭상한 고려왕실와 유교를 국시(國是)로 한 조선왕조가 힘겨루기를 하던 현장이기도 하다. 고려 공민왕 이후부터 조선초기까지 불교계의 중심인물인 지공선현(指空禪賢) 나옹혜근(懶翁慧勤1320~1376) 무학자초(無學自超1327~1376)스님께서 활동하던 근거지였다. 회암사지(址)를 옆으로 끼고서 포장도로를 따라 천보산 방향으로 올라가면 새로 지은 회암사가 자리잡고 있다. 절 마당 동편으로 언덕같은 느낌을 주는 산등성이를 따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각각 독립된 당당한 모습의 삼화상 부도 3개가 그 시절을 대변하고 있다. [회암사 나옹선사 부도] 청사초롱 등(燈)에는 ‘삼화상 수행성지’라는 글자를 새겼다. 삼화상은 현재까지도 절집에서는 신통한 영험을 가진 인물로 존경받고 있다. 회암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에서 삼화상의 진영을 모시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선후기 정조 때 ‘삼화상 교서(敎書)’가 내려져 국가적 차원에서 추모행사가 이루어지면서 명실상부한 나라의 스승으로 자리매김 했다. 영정이 없는 사찰에서는 삼화상의 이름을 적은 놓은 문자불(文字佛)로써 진영을 대신할만큼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셋째, 삼화상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지공선사는 중국과 인도가 겹쳐지는 인물이다. 석가족의 혈통을 물려받았으며 당시 인도불교의 중심인 나란다(那爛陀)대학에서 수학했다. 북인도 전역을 돌면서 수행한 후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元나라)에 들어와서 활동했다. 1326년(충숙왕13)부터 3년간 고려에 와서 금강산·개성·인천·양산 통도사 등을 돌며 교화를 펼쳤다. ‘달마대사의 화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고려 사람들의 흠모를 받았으며 나옹·무학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회암사터 사리탑] 넷쩨, 또 지공선사는 고승인 동시에 풍수의 대가라는 이미지가 겹쳐지는 인물이다. 왜냐하면 회암사 터를 점지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자 나옹에게 『삼산양수(三山兩水)』라는 수기(受記 예언)를 내렸다. 삼산과 양수가 합친 중간지점에 마치 인도의 나란타사(寺)와 같은 터가 있으니 그 곳을 찾아 사찰을 지으라고 한 것이다. 삼산은 삼각산(백운대 만경대 인수봉)이며 이수는 한강과 장단강을 말한다는 해설이 뒤따랐다. 양주 회암사의 위치는 가깝게는 삼각산을 마주보면서 남쪽에는 한강이 있고 북쪽에는 장단강(長湍江)이 있는 곳이다. 삼산양수의 수기(三山兩水之記)에 딱 부합하는 터라고 하겠다. 인도의 나란타는 당신이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이다. 양주 천보산 산세가 나란다 대학이 자리잡은 곳과 비슷하다는 설명이 자연스럽게 추가되었다. [회암사터 사리탑 참배행렬] 다섯째, 회암사 경내에 있는 사리탑에는 한국과 미국이 겹쳐졌다. 그 사리는 일백여년 전 일제강점기 때 해외로 반출되었고 손바꿈을 통해 1939년 이후 미국 보스톤미술관에서 소장했다. 사리의 존재가 2004년 처음 알려졌고 2009년부터 반환논의가 시작된 후 많은 이의 땀과 노력이 합해지면서 2024년 5월 드디어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은 이를 기념하는 대규모 행사를 했다. 그리고 회암사박물관에서 일반인도 사리를 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봉안 이후에는 태평양 너머 미국까지 겹쳐지는 글로벌 사리탑이 될 것이다. [회암사 무학대사 부도] 회암사 옛터에서 여말선초 삼화상으로 불리는 고승을 동시에 만났다. 또 풍수지리 전문가로써 안목까지 발휘된 곳이다. 궁궐과 사찰이 겹쳐진 건축물 위에서 고려와 조선의 역사가 중첩된 시간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인도와 중국 그리고 미국까지 관계된 공간임도 알게 되었다. 참으로 많은 옛인연들이 겹겹으로 쌓여있는 터에 다시 새로운 시절인연들이 하나하나 더해지고 있었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4-05-28 15: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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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땅에 묻은 삶은 계란에서 닭이 태어났다는 곳 [원철 스님] 이른 아침 소양강댐 주변은 물안개로 가득하다. 해가 뜨면서 차츰차츰 주변이 제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길가의 가파른 시멘트 벽 위에 길다랗게 세로로 덧댄 낡은 마루바닥재로 마감을 한 70년대 스타일의 간판이 보인다. 오래 전부터 지역사회에 전해오는 스토리텔링 3개가 꼰대세대도 읽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주먹만한 글씨로 촘촘히 박혀 있다. 만든지도 꽤 오래 되었고 바탕색마저 다소 바래긴 했지만 독해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왼쪽에는 짧은 이야기 두 편이 아래 위로 나란히 적혀있고, 오른 쪽은 긴 이야기 한 편을 써놓았다. 비교적 구성이 탄탄한 한천자(漢天子) 전설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마을 입구를 알리는 표지판 한(漢)씨 성을 가진 총각이 부친과 함께 머슴살이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난한 살림으로 인하여 묘자리를 구할 수가 없어 남새밭에 가매장을 했다. 어느 날 스님들이 나타나서 하룻 밤 묵어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한다. 총각은 자기 방에서 함께 머물게 했다. 부탁한 계란은 끓는 여물 솥에서 삶은 뒤 드시라고 갖다 주었다. 한 밤중이 되어 스님들이 길을 나서자 총각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몰래 따라갔다. 가리산 중턱에 이르자 그 계란을 땅에 묻고서 밤새 기다리는게 아닌가. 여명이 밝아 올 무렵 땅 속에서 수탉이 나오더니 홰를 치며 크게 울었다. “진짜 명당이로다.” 그 후 총각은 아버지 시신을 그 자리에 묻었다. 발복(發福)하여 천자(天子 임금)가 되었다. 구전(口傳)이라고 하는 것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전달하는 사람이 자기생각을 다시 보태고 윤색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전설도 마찬가지다. 스님이 계란을 달라고 하니 당연히 먹는 줄 알고 삶아서 드렸다. 머슴총각의 사려깊은 배려심이 돋보인다. 그리고 스님은 날계란도 아닌 익힌 계란으로 병아리도 아닌 수탉을 만들어 내니 도력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 땅은 알을 품고서 금방 닭으로 키울 정도로 생기와 생명력을 갖춘 명당이라는 사실도 넌지시 암시해준다. 명당이 되려면 터도 중요하지만 그 터를 사용하는 주인이 그만한 복을 지어야 한다. 이를 강조하기 위하여 스님의 3가지 처방과 함께 머슴총각의 드라마틱한 상상력과 행동이 더해지는 구조로 진화한다. 즉 첫째 금으로 된 관을 사용해야 하며 둘째 황소 백 마리를 재물로 바쳐야 하며 셋째 관을 땅 속에 묻을 때 철갑과 투구를 쓴 사람이 곡(哭)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머슴총각은 노란 귀리 짚으로 만든 두루말이 멍석으로 금으로 만든 관을 대신하여 아버지의 시신을 쌌으며, 솥뚜껑을 투구처럼 쓰고 하관(下棺)하면서 크게 울었고, 몸에서 피를 빨아먹고 황소만큼 자란 이(蝑) 백 마리를 잡아서 재물로 바쳤다는 내용이 추가 되었다. 한(漢)씨라는 성은 한(漢)나라를 연상케 한다. 그리하여 한씨 총각의 활동무대는 중국으로 바뀌었다. 짚으로 만든 북을 쳐서 소리나는 사람이 천자가 된다는 공고문이 나붙었다. 신라의 이사금은 떡을 물고서 남보다 많은 치아자국으로 인하여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차례대로 북을 쳤지만 누구도 소리를 내지 못했다. 한씨가 북을 치자 온 장안에 북소리가 울려 퍼졌고 총각은 천자(天子)로 추대되었다. 뒷날 천자 부친의 무덤이 너무 초라한 것 아니냐는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강원도 가리산 지형이 너무 험하여 중국 황실에서 올 수가 없어 치산(治山 산소를 매만지고 다듬는 일)하지 못한 까닭이라는 설명이 보태지면서 현재와 같은 탄탄한 구조를 가진 이야기로 완성되었다. 가리산과 한천자의 묘를 알리는 공공안내판 구전의 배경인 ‘한천자 묘’는 이미 인터넷 검색을 해 두었다. 위치는 춘천시 북산면 물로리 58-1번지다. 인근에 은주사(銀住寺)라는 절이 있다. 소양강댐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물로리로 가는 방법도 있다고 한다. 육로를 이용하는 것이 더 쉬운지라 주소를 따라갔다. 홍천을 경유하여 다시 춘천으로 들어가는 경로다. 포장된 도로에 봄날임에도 불구하고 ‘월동장비 미착용시 진입금지’라는 안내문이 군데군데 있을만큼 가파르고 험했다. 지난 겨울 머물던 곳에서 밤새 내린 눈 때문에 길이 막혀 차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전내내 갇혔던 까닭에 그 날 일정 두 건을 펑크냈던 기억까지 되살아 날 정도였다. 마지막 표지판 가도 가도 목적지를 가르키는 표지판은 1도 보이지 않는다. 제대로 가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계속 들만큼 굽이굽이 에스(S)자를 거듭거듭 그리면서 골짜기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얼마를 달렸을까. 고속도로 휴게소 알림판 크기의 ‘어서 오십시오. 물로리 한천마을’이라는 다소 생뚱맞은 모양의 입간판을 만났다. 생경함과 반가움이 교차하면서도 ‘제대로 가고 있구나’하는 안도감을 준다. 얼마나 달렸을까. 드디어 관공서 표준형 안내판 ‘가리산 방향’과 ‘한천자 묘’가 나타난다. 이내 비포장길이 시작되었고 ‘절골로’라는 도로명 답게 드문드믄 사찰들이 자리잡고 있다. 별장같은 민가들도 사이사이 보인다. 드디어 마지막 절인 은주사가 나타났다. 산신각을 참배하면서 오늘 일정을 무사히 마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이제부터 묘까지는 본격적인 가리산(加里山) 등산길이다. 한천자 묘 이 묘자리는 풍수연구가 사이에서 반드시 둘러봐야 하는 명당터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산삼을 캐는 심마니들도 방문인사를 빠뜨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꿈을 이루기 위하여 많은 이들이 땀 흘리며 찾아오기를 마다하지 않는 곳으로 입소문난 곳이다. ‘기적의 천자길’ 따라 세워진 안내판 1.꿈-2.신념-3.기적(하늘이 돕다)-4.기적(기적은 계속된다)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따라가다가 숨을 몰아 쉴 무렵 마침내 목적지가 눈 안으로 들어왔다. 작은 계곡을 조심조심 건넜다. 곁에 ‘한천자 묘’라는 설명문과 안내판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칠 만큼 평범하고 소박한 한 무덤이다. 하지만 보통사람의 눈에도 그 터 만큼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비범한 터에는 그 자리에 어울리는 전설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4-03-26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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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대한민국 부자 1번지 솥바위 그리고 승산마을을 찾다 [원철 스님] 한 해가 시작될 무렵에는 정암(鼎巖·솥바위, 경남 의령)을 찾는 사람이 평소보다 많다. 솥바위를 중심으로 반경 20리 안에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부자를 배출한다는 전설을 지닌 바위다. 그 전설 덕분인지 정암을 중심으로 한국 재벌가인 삼성, 효성, 금성(LG.GS 전신) 집안 본생가(本生家)가 삼각형을 이루면서 자리 잡았다. 전설이 전설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전설이 현실이 될 때는 설득력을 가진다. 설득력 있는 장소는 명소가 되고 명소는 사람을 부르게 마련이다. 바위신앙의 역사는 인류 출현과 함께할 만큼 그 역사가 길다. 특히 솥바위는 부(富)를 기원하는 성소(聖所)였다. 농업이 산업의 중심인 시절에는 솥 안에 가득한 모락모락 김이 나는 흰 쌀밥은 그 자체로 부귀의 상징인 까닭이다. 농업자본이 농업자본에서 멈춘다면 그것은 그대로 과거사로 정지된다. 즉 전설로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지역은 농업자본이 농업자본으로 멈춘 것이 아니라 상업자본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한 인재를 배출한 지역이라는 점에서 솥바위의 영험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또 부귀는 현대인들이 ‘대놓고 추앙하는’ 또 다른 종교로 자리매김하는 시류까지 한몫을 더했다. 따라서 ‘솥바위교’ 신도들도 날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날도 바위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선여인(善女人)들을 만났다. 경남 의령 솥바위 심리적으로 잠재적 솥바위 신도인 현대인들을 불러 모으는 정암을 찾았다. 새해가 되면 꼭 참배해야 하는 ‘기(氣) 충전소’임을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알고 있다. 지자체는 아예 ‘대한민국 부자일번지’를 표방하고 있다. 포토존 의자에는 ‘함께 부자가 되자’고 하면서 ‘富(부)’ ‘Rich(리치)’ 등 한문과 영어를 병기하여 구세대는 물론 신세대까지 동시에 불러 모으고 있다. 솥바위는 남강 가운데 우뚝하게 자리 잡았다. 풍수학자들은 물은 재물을 상징한다고 했다. 재물이 바위에 걸리면서 천천히 흐른다. 자연스럽게 재물이 쌓이는 구조다. 그런 바위를 나성(羅星)이라고 한다. 세 부자 집안 기업의 공통 상호인 ‘성(星)’자가 여기에서 비롯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요즘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예부터 정암진 나루터는 남해와 낙동강을 따라 온 물자들이 서부경남 내륙으로 들어가는 물류의 거점이었다. 근대에도 철교가 놓일 만큼 교통요지로서 위상도 만만찮았다. 관광객들이 포토존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먼저 전경을 살피고자 언덕 위에 있는 정자인 정암루(鼎巖樓)에 올랐다. 안내문에는 빼어난 경치로 인해 많은 선비와 가객들이 찾아 학문을 논하고 자연을 노래했다고 적혀 있다. 함안 가산(家山) 기슭에 무덤이 있다는 어변갑(魚變甲·1381~1435) 선생이 누각에서 주변 풍광을 노래한 시가 남아 있다. 그는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조선 초기 문신이다. 춘수정암횡련벽(春水鼎巖橫練碧)이요 춘풍자굴전병신(春風闍堀展屛新)이라. 봄날 흐르는 솥바위의 강물은 비단을 펼친 듯 푸르고 가을바람 부는 자굴산은 병풍을 펼친 듯 새롭네. 그 시에 자굴산(闍堀山)이 나온다. 인도 마갈타국 수도 왕사성 동북쪽에 있는 기사굴산(耆闍崛山)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闍’는 ‘사’ 혹은 ‘자’로 읽는다. 보통 사굴산(강릉 굴산사 당간지주가 있는 산)이라고 하는데 이 지역에서는 자굴산이라고 부른다. 어쨋거나 사굴이건 자굴이건 모두 인도말 ‘기자쿠타(gijjha-kuta)’의 소리번역이다. 원문 발음대로라면 ‘사’보다는 ‘자’로 읽는 게 맞겠다. 하지만 자굴산보다는 사굴산으로 읽는 것이 모두에게 익숙한 편이다. 결국 문법은 많이 쓰는 사람 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지역사회에서 읽어왔던 관례는 존중되어야 한다. 기사굴산은 붓다께서 머물면서 설법하던 곳으로 세계적인 불교성지다. 법화경은 서두에 기사굴산에서 설했다는 말로 시작된다. 산봉우리가 독수리와 닮았다고 하여 영취산(靈鷲山·영축산)으로 부른다. 소리번역이 아니라 뜻번역이다. 전남 여수 등 전국 몇 곳에 영취산이 있다. 양산 통도사가 자리하고 있는 산은 한문으로 같은 표기를 함에도 불구하고 ‘영축산’으로 읽는다. 이 또한 지역사회의 읽기 관례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함안은 아라가야에 속하는 가야문화권이다. 고구려, 신라, 백제가 중국을 통해 불교를 받아들인 데 반하여 가야불교는 허황후와 장유화상에 의해 인도에서 직수입됐다. 남쪽 지방에 있는 산 이름에도 그런 흔적들이 남아 있다고 하겠다. 논어에는 ‘지자요수(智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고 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산 따로 물 따로’는 아니다. 늘 함께한다. 그래서 묶어서 요산요수(樂山樂水)라고 한다. 산은 인물을 키워주고 물은 재물을 늘려준다고 했다. 솥바위에서 진주 방향으로 구씨(LG)와 허씨(GS) 집안이 대대로 함께 살고 있는 승산(勝山)마을이 있다. 행정구역은 ‘지수(智水)면 승산(勝山)리’다. 산이름과 물이름이 함께 어우러진 명당마을이라 하겠다. 지자체에서 '부자 일번지'라는 홍보문구를 적어 놓았다. 승산마을 골목길을 찾는 사람들 사이에 끼여 마을길을 함께 걸었다. 600년 전통의 부자마을 허씨와 구씨 집성촌답게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번듯한 기와집이 동네 전체에 빼곡하다. 한양의 명문세도가들 사이에서도 ‘진주는 몰라도 승산은 안다’고 할 만큼 조선시대에도 큰 관심을 받은 동네라고 했다. 좋은 기운은 많이 받을수록 좋다고 하였으니 계속 동네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면서 거듭 두어 바퀴 걸었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4-02-26 09:5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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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조강(祖江)에서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시작되었다 [원철 스님] 양력으로 새해가 시작 된지도 한달이 지났다. 그러고 보니 음력 1월1일도 10여일 밖에 남지 않았다. 양력과 음력을 동시에 사용하다보니 양력설부터 음력설까지 한 달은 ‘설날’이 아니라 ‘설월’이 되었다. 설날 어원을 찾아보니 ‘섦다’에서 나왔다는 학설도 있었다. 고어의 ‘섦다’는 ‘자중하고 근신한다’는 뜻이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자중하고 근신하면서 올 한해 동안 별일없기를 기원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그래서 한문으로는 설날을 신일(愼日. 愼 삼갈 신)이라고도 표기한 것이리라. 정월(正月)인 동시에 신월(愼月)인지라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가급적 움직이는 것 조차 삼가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첫달이 무탈해야 일년내내 평안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삼강주막, 사진=삼강나루캠핑장 파브르팬션] 이 달의 답사 역시 ‘방구석에서 상상하는 삼강답사’로 대체했다. 세 강이 만나는 곳을 생각해보니 맨먼저 떠오르는 곳이 경북 예천의 ‘삼강주막’이다. 강물의 뱃길이 중요한 운송수단이었을 때 번화한 장터를 지키면서 오가는 길손에게 숙식을 제공했다는 주막이다. 하지만 철길 찻길이 발달하면서 나루터는 기능을 잃게 되고 주막 역시 용도를 다하게 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곳이 되었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와 ‘마지막 주막’이라는 의미가 부각되면서 관광지로 변신하는데 성공했다. 주변의 옛시장은 물론 오가던 상인과 손님들이 머물면서 이용했던 공간까지 복원한 까닭이다. 삼강은 낙동강 내성천 금천이 합해지는 곳이다. 천(川)자가 붙은 두 냇물의 규모는 강(江)이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모자랐지만 합수지점 만큼은 당당하게 강(江)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속리산, 사진=국립공원공단] 산 꼭대기에도 삼강이 있다. 충북 보은군 속리산 천왕봉의 삼파수(三派水 三波水 혹은 三陀水라고도 함. 陀 비탈질 타) 구역이다. 물 한줄기 없는 산꼭대기에서 만날 수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삼강이라 하겠다. 삼강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비였다. 천왕봉 꼭대기에 빗물이 떨어진 후 동쪽으로 흘러가면 낙동강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가면 금강이 되며 북쪽으로 흘러가면 남한강이 되었다. 눈도 마찬가지다. 겨울내내 내린 눈이 쌓여서 얼음이 되었고 이듬 해 봄이 오면 녹기 시작했다. 그 녹은 물이 흐르는 방향에 따라 갈길이 달라지는 삼강의 시작점이 된 것이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삼강을 예리한 눈으로 포착한 뒤 이를 삼파수라고 이름붙인 이는 누굴까? 속리산에 숨어 살던 이름없는 수행자였을 것이다. [임진강,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박과사전] 바닷가에도 삼강이 있다. 한반도에서 가장 거대한 삼강을 찾는다면 한강과 예성강 임진강이 만나는 조강(祖江)구역이라 하겠다. 강화도 북부해안선과 맞닿은 곳이라 강인지 바다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지만 아무튼 선인들은 이 곳을 조강이라고 불렀다. 조선의 실학자 이긍익(1736~1806)선생이 지은《연려실기술》에는 ‘교하 서쪽에 이르러 한강은 임진강과 합하고 통진 북쪽에 이르러서는 조강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현재 군사적인 이유로 전체경관을 조망하기는 어렵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없다면 옛조상들의 시각을 통해 그 모습을 짐작할 수 밖에 없겠다. 다행이도 고려시대 이규보(李奎報1168~1241) 거사는 ‘조강부(祖江賦)’라는 글을 남겨 두었다. 그는 당시 수도인 개경(개성)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계양(桂陽 현재 인천시 계양구)으로 부임하는 길은 배를 타고서 조강을 건너야 한다. 강물이 너무 넓은 까닭에 검게 보였으며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 여러 강물이 모인 까닭에 파도가 심할 뿐만 아니라 소용돌이까지 쳤다고 했다. “넓고 넓은 강물이...시커먼 빛 굼실굼실 보기에도 무서워라. 달리는 뭇 내를 모았으니 솥의 물이 들끓는 듯...바람도 없는데 물결치니 눈 같은 물결이 쾅쾅 돌에 부딪치는 모양... 저 사공은 집채같은 물결에는 익숙해도 빙빙 도는 소용돌이를 무서워하네. (중략)” 조강(祖江 할아버지 강)은 ‘근본이 되는 강’ ‘시원이 되는 강’이라는 뜻이 되겠다. 그래서 선인들은 조강을 단순히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모인 보통 삼강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로부터 아들 딸 손자 손녀로 이어지는 것처럼 조강에서 한강 예성강 임진강이 시작되었다는 역발상까지 했던 것이다. 근거는 밀물이다. 만조 때 바닷물이 육지방향으로 밀려 오면서 역류가 되어 삼강으로 다시 흘러들어가는 광경을 예사롭게 여기지 않았다. 즉 조강에 호수처럼 바닷물과 강물이 가득차면서 거꾸로 한강 예성강 임진강의 시원(始源)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태고적부터 비록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주기적으로 반복하며 ‘삼강의 역류’를 만들어낸다는 의미로 조강이라고 불렀던 것이 아닐까? 속리산 천왕봉에 내린 눈비가 각자 삼강을 향해 흘러가는 것을 보고서 삼파수라는 이름을 붙인 것 만큼이나 경이롭다. 조강은 우리나라의 ‘근본이 되는 강’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조강은 조선의 도읍지 한강 뿐만 아니라 고려의 세계무역 중심지였던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와 미래 코리아 수도의 후보지라는 교하(交河 임진강과 한강의 합수지역. 경기도 파주시 교화읍)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이다. 신월(愼月)이 끝나고 봄 기운이 퍼질 무렵 적당한 날을 골라 강화도 섬 안의 섬인 교동도 전망대로 가서 조강(祖江)을 제대로 살피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그 위를 푸른 용처럼 날아다니며 갑진년 청룡의 해를 장대한 스케일로 웅대하게 시작해야겠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4-01-29 13:3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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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황강의 푸른 빛을 머금고서 [원철 스님] 영남지방 낙동강의 지류 가운데 경남에서 가장 긴 강은 남강과 황강이다. 남강은 진주 촉석루를 품으면서 임진왜란의 진주성 전투와 논개 스토리를 남겼다. 황강은 덕유산에서 발원하여 거창 수승대 앞을 지나 합천댐에서 잠깐 머물렀다가 다시 합천 읍내를 휘감아 흐른다. 모래톱이 아름다운 강변 맞은 편 절벽의 대야성(大耶城)과 연호사(烟湖寺) 그리고 함벽루(涵碧樓)에는 많은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있다. 대야산성ㅡ연호사 ㅡ 함벽루ㅡ 불교문화전수관ㅡ일주문으로 이어지는 황강 풍경 대야성 전투는 삼국시대로 거슬려 올라간다. 신라와 백제가 황강을 국경선 삼아 대치하던 군사요충지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 몇 천명이 전사하고 일천명의 포로가 나올만큼 당시로서는 어머어마한 규모였다. 대야주 도독 부인은 뒷날 태종무열왕이 된 김춘추(金春秋 603~661)의 딸 고타소(古陀炤)였다. 사위인 김품석과 함께 그 전투에서 산화(散花)했다. 그 소식을 들은 서라벌의 아버지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하루종일 기둥에 기댄 채로 서 있었으며 그 앞을 다른 가족이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슬퍼했다고 한다. 전사자 영혼의 명복을 빌고 또 지역사회에 남은 가족과 주민을 위로하기 위한 사찰이 세워졌다. 대야성과 강물로 이어진 곳이다. 풍수가들은 누런 소가 강물을 마시는 자리라고 했다. 그래서 산 이름도 황우산(黃牛山)이다. 황우는 부처님의 성씨인 ‘고타마’에서 왔을 것이다. 인도말 고타마는 ‘훌륭한 소’라는 뜻이다. 한문으로 옮기면 그대로 황우(黃牛)가 된다. 전쟁 후 핏빛으로 물든 강물을 정화하여 맑은 물로 바꾸는 역할을 맡긴 것이다. 창건주 와우(臥牛)대사 법명도 그 의미의 연장선상으로 보인다. ‘누런 소가 강물을 마시는 자리’는 전쟁 트라우마로 인하여 생긴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성지가 된 것이다. 남명 조식(南冥曹植 1501~1572)선생은 그런 황강의 역사를 시로 남겼다. 길가 풀은 이름없이 죽어가고(路草無名死) 산의 구름은 제멋대로 일어난다.(山雲恣意生) 강은 무한의 한(恨)을 흘러 보내며 (江流無限恨) 돌과는 서로 다투지 않는구나.(不與石頭爭)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면서 산하는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기 마련이다. 강물은 맑음을 되찾았고 아침이면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煙) 한낮에는 흰 모래밭이 햇볕에 반짝이는 너머 늪지인 정양호수(湖)가 한 눈에 들어오는 경치를 자랑하는 연호사(烟湖寺) 동쪽 곁에는 새로운 누각이 ‘절처럼’ 들어왔다. 함벽루(涵碧樓)는 1321년(고려 충숙왕 8년) 합주(陜州)의 행정책임자(知州事 군수)인 김영돈(金永暾 1285~1348)이 건립했다. 함벽(涵碧)은 ‘푸른 빛으로 적신다’는 뜻이다. 물가에 있는 나무집인지라 습기와 홍수 때문에 연호사와 더불어 수차례에 걸쳐 수리에 수리를 거듭했을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함벽루 기(記)’에 의하면 1680년 합천 군수 조지항(趙持恒)이 중창한 것이다. 동시에 연호사도 함께 수리했다는 기록까지 남겼다. 함벽루가 너무 퇴락하여 중수코자 하였으나 재정의 어려움 때문에 날로 고민이 깊어졌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여름홍수에 뜻밖에 기둥과 대들보가 될만한 재목 100여개가 떠내려 왔다. 그리고 못을 주조할 수 있는 쇳가루도 모래톱에 함께 쌓였다. 범람한 물은 사금은 아니지만 꼭 필요했던 사철(沙鐵)까지 가져 온 셈이다. 홍수는 집을 떠내려가기도 하지만 집을 만들 수 있는 나무를 싣고 오기도 하는 두 얼굴 이었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선생은 이를 두고서 ‘사람의 정성이 나무와 쇠를 감동시킨 결과’라고 했다. 남은 재목과 여력으로 함벽루 서편 연호사까지 중수할 수 있었다. 이렇게 불가의 사찰과 유림의 누각은 다시금 조화를 이루었다. 함벽루는 대야산성 절벽 강 기슭에 위치하며 황강과 늪지인 정양호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 때문에 시인과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기 위해 자주 찾았다. 전국의 많은 누각이 있지만 추녀 끝의 낙숫물이 바로 강물로 떨어지는 곳은 남한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특히 그 소리를 듣고자 비오는 날이면 많은 이들이 찾아왔다. 뒷날 강물의 흐름이 다소 바뀌고 떠내려간 축대를 거듭 쌓으면서도 그 의미를 살리기 위해 중수할 때마다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를 지키고자 부단한 노력이 뒤따랐다. 처마의 낙숫물이 강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살리기 위해 산책데크길과 축대사이에 틈을 두었다 앞면 3칸 측면 2칸 대들보 5량인 별로 크지도 않는 넓이의 누각 안에 빼곡이 걸려 있는 현판들이 하도 많은지라 하나하나 세어보니 족히 스무개가 넘었다. 아마 여러 가지 이유로 수없이 내걸리고 또 수 없이 내려지면서 교체에 교체를 거듭했을 것이다. 현재 남은 것이 이 정도이니 가히 누각의 명성과 주변 풍광의 뛰어남을 짐작할 만하다. 퇴계 이황(1502~1571)과 남명 조식 선생 글도 보인다. 지역선비들도 질세라 이름자를 빠뜨리지 않았다. 시월의 긴 연휴를 맞아 오랜만에 연호사를 찾았다. 대야성 연호사 함벽루 수심당 불교문화전수관 일주문으로 이어지는 강변의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대야(신라) 합주(고려) 합천(조선)으로 지명도 함께 이어졌다. 도량 인근에는 지역유지들의 공덕을 기록한 비석을 모은 ‘비림’과 함께 합천이씨 재실인 ‘공암정(孔巖亭)’ 그리고 ‘황벽루보존유림계’와 ‘대동계’ 비석, 강석정 시인의 황강시비. 활터인 죽죽정. 대야성 전투 때 활약한 충신 죽죽(竹竹)의 비각 등이 거리를 두고서 자기자리를 잡았다. 지자체와 지역주민 그리고 사찰이 함께 힘을 합해 가꾸는 살아있는 역사문화지구의 현장이라 하겠다. 사족을 보탠다면 합천군수를 지낸 강석정 시인은『연호사지(烟湖寺誌) 조계종출판사 2017)』저자이며 성철(性徹 1912~1993)스님은 합천 이씨집안 출신이다. 함벽루에서 바라본 황강의 풍광 연호사에는 강원(講院)에서 함께 공부했던 도반 J스님의 원력(願力)에 의하여 함벽루 동편에 수심당 불교문화전수관 일주문을 지으면서 비로소 사격을 제대로 갖추게 되었다. 황강이 내려다보이는 안심당(安心堂)에서 차를 나누며 옛 기억을 더듬었다. 1980년대 연호사는 일박이일 예비군 훈련을 받기 위해 일년에 한 두 번 정도 지역의 학인승려들이 와서 하룻밤 묵던 곳이다. 어느 해에는 심한 가뭄으로 얕아진 강물에 바지를 걷어올리고서 건넛편 군부대 훈련장까지 걸어갔던 기억 등을 이야기하며 함께 웃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어느 새 지난 일을 추억하는 구시대의 인물이 되었다는 말에 또 웃었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3-10-10 21: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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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애랑바위를 향해 오줌을 누다 [원철 스님] 문화가 지역사회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시절이다. 가는 곳마다 지역문화를 선양하려는 노력이 활발하다. 유형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보이지 않는 무형문화까지 그 범위를 넓혔다. 스토리텔링 발굴을 통해 관광객을 부르고 또 그 발길을 오래도록 붙잡아 두는 것이 지역공무원과 주민들의 주요한 의무 아닌 의무가 되었다. 여름휴가 삼아 강원도 삼척에서 2박3일을 보냈다. ‘절친(절친구)’이 사찰주지로 머물고 있는 덕분에 바다가 보고 싶으면 훌쩍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올 때마다 ‘바다는 역시 동해야!’ 하면서 엄지를 치켜세운다. 유형의 관광자원 바다와 더불어 무형의 스토리텔링까지 더해진다면 이것이야말로 방문의 만족도를 더욱 높이는 일이다. 또 기록과 흔적까지 남아있다면 그 즐거움은 몇 배로 뛴다. 수로부인과 애랑낭자는 신분도 다르고 시대도 달랐지만 강원도 삼척 바닷가라는 동일지역이 배경이다. 그리고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수로부인 이야기는 『삼국유사』권2 ‘기이(紀異)’편에 나온다. 애랑낭자는 ‘해신당(海神堂)’이라는 사당의 주인이다. 구전으로 전해오던 전설을 채록하여 최근에 문자정리까지 마쳤다. [수로부인헌화공원] 먼저 ‘수로부인헌화’공원을 찾았다. 남화산은 공원이 조성되기 전부터 동해안의 유명한 일출명소였다. 수로부인은 신라 성덕왕 시절 강릉태수로 부임하던 부군 순정공(純貞公)을 따라 행차하던 도중 삼척 바닷가의 임해정(臨海亭) 인근에서 점심을 먹었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잠깐 사이에 부인이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미모에 반한 용왕의 초청에 의한 것이었다. 함께 가던 일행들은 납치로 간주하고 구할 대책을 논의했지만 바다세계 일이라 땅 위에서 할 수 있는,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때 어떤 노옹(老翁 어르신)이 나타나 처방책을 내놓았다. “여러 사람의 말은 무쇠도 녹인다고 하였으니 인근 어민들을 모아 막대기로 언덕을 두드리면서 노래를 불러보자.”고 건의했습니다. 물론 노래의 작사작곡은 노옹의 몫이였다. 뒷날 ‘해가(海歌)’라는 제목이 붙었다. 용왕의 명령에 따라 초청업무를 수행한 것은 심부름꾼인 거북이였던 모양이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아내 빼앗은 죄 그 얼마나 큰가? 네가 만약 어기고 돌려주지 않는다면 그물로 잡아서 구워 먹으리.” 그러자 얼마 후 거짓말같이 뭍으로 돌아왔다. 신랑은 부인을 보고서 반가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의구심과 함께 목소리를 착 깔고서 용궁에 다녀 온 과정을 따지듯이 하나하나 물었다. “칠보궁전에 음식은 맛있고 향기롭고 깨끗하여 인간세상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인의 옷에도 색다른 향기가 스며 있었는데 이 세상에서는 맡을 수 없는 향내가 났다. 위기상황이 발생했을 때 종적을 알 수 없는 노옹이 바람같이 나타나서 해결사 노릇을 했다. 진달래꽃을 갖기를 원하는 수로부인을 위해 용감하게 깎아지른 절벽으로 올라가면서 신라가요(향가)인 ‘헌화가(獻花歌)’를 부른 이도 어떤 노옹이었다. 필요한 곳마다 필요할 때마다 어김없이 신인(神人)이 등장하는 삼척바닷가는 참으로 신비로움을 더해주는 땅이라고 하겠다. 의심 많은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 스토리에 현실적인 감각을 입혀 다시 각색해 보았다. “......꽃이 만개한 호시절인지라 수로부인은 진달래 꽃을 안고서 바다 멀리 나가 해안가의 아름다운 봄경치를 전체적으로 감상하고 싶다고 혼자서 쫑알댔다. 그 말을 귓등으로 흘려보내지 않고 듣던 신랑은 즉시 어촌마을로 달려가서 여러 척의 배를 빌렸다. 먼길에 수고를 아끼지 않은 일행 모두를 나누어 태운 뒤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하고자 했다. 뱃놀이는 서라벌(경주)에서 해안가를 따라 걸어 올라오면서 누적된 여행피로를 모두 잊게 할 만큼 즐거웠다. 모두가 즐거움에 취해있던 사이에 누군가 너무 흥에 겨운 나머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갑자기 일어서는 바람에 배가 무게중심을 잃으면서 뒤집혔다. 수로부인이 탄 배였다. 일행은 당황하여 허둥지둥하고 있는데 어떤 노옹의 안내를 받은 동네어민들이 전부 달려와서 노련한 수영솜씨로 부인을 비롯한 물에 빠진 이들을 구했다. 공로자들에게 감사의 인사와 함께 금일봉을 전했다. 대표자의 인적사항이라도 알아두고자 나이를 물었더니 용띠였다.” 공원의 돌 조각으로 재현된 수로부인과 용왕은 거창한 자리 위에서 사이좋게 앉아있다. 멀리 언덕 위에는 신랑인 순정공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다. 주변의 광활한 언덕과 하늘 그리고 바다가 조화를 이루면서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수로헌화공원을 뒤로 하고서 해안가에 향나무가 둘러싼 절벽 위에 자리잡은 한 평짜리 작은 사당인 ‘해신당(海神堂)’으로 향했다. 해신당의 주인공 애랑낭자의 사랑이야기는 몇백년 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로 매우 직설적이다. 미래를 약속한 떠꺼머리 총각 이름은 덕배다. 애랑은 미역 등 해초를 채집하기 위해 덕배에게 해안가에서 멀리 떨어진 바위섬으로 데려 달라고 했다. 얼마 후 쓰나미가 몰려 왔고 애랑은 파도에 휩쓸려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그날 이후 흉어의 연속이다. 물고기가 전혀 잡히지 않는 것이였다. 수입이 아예 없던 어느 날이다. 어젯밤 꿈 속에서 만났던 애랑 생각까지 간절하던 덕배는 홧김에 분풀이 삼아 바다를 향해 오줌을 휘갈겼다. 어라! 이상하게도 그날부터 고기가 잡히기 시작했다. 다른 어민들도 소문을 듣고서 바로 따라 했다. 결과는 같았다. [바위섬의 애랑상] 이후 해신당을 짓고 애랑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해마다 공물로 남근(男根)모양을 향나무로 깎아서 바쳤다. 일곱개 혹은 다섯 개를 올렸다. 바위 섬에는 치마저고리 차림의 낭자모습의 실물도 세웠다. 육지에서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망원경까지 설치했다. 인근에서 영업을 하려는 사람들도 개업고사를 지낸 후에는 해신당에 들러 인사를 한 후 바닷가로 내려가 애랑바위를 향해 힘차게 소변을 본 뒤 사업의 성공을 기원하곤 했다. 현재까지도 여전히 살아있는 소박한 바닷가 민간신앙이라 하겠다. [해신당] 해신당 인근의 산비탈에는 지자체에서 의욕적으로 여러 가지 남근모양으로 오줌싸개 공원을 만들고 경사로에는 걷기 좋도록 나무계단까지 설치했다. 많은 사람들이 참배를 겸한 관광을 위해 찾아 온다고 한다. 우리 일행도 삼척의 성지(性地)공원(?)을 순례했다. 연신 킥킥거리며 한 바퀴를 돌았다. 지역사회의 원로이신 최선도 삼척문화원장께서 신라시대 노옹처럼 나타나 전 일정을 함께하면서 애로의 해결은 물론 친절한 설명까지 아끼지 않으셨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3-08-31 08: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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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장맛비 속에서 춘원 이광수 별장을 찾다 [원철 스님] 7월 마지막 주와 8월 첫째주는 이른바 ‘여름휴가’기간이다. 춘원 이광수(1892~1950) 선생은 서울 종로구 홍지동의 소림사에서 1934년 여름휴가를 보냈다. 그것도 2주일 정도가 아니라 7월 8월 두달 동안 유숙했다. 이쯤 되면 템플스테이가 아니라 템플리빙이다. 사찰에 ‘머물렀다’가 아니라 ‘살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사실 처음 목적지는 사찰이 아니었다. 두 딸이 홍역에 걸린 것을 핑계삼아 명사십리 해당화로 유명한 동해안 원산 해수욕장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밤기차를 타고 혼자 가겠다고 하니 안주인이 펄쩍 뛰었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휴가기분을 유지하기 위해 쌌던 짐을 풀지도 않고 그대로 들고 간 곳이 소림사였다. 소림사의 원래 이름은 소림굴이다. 이름 그대로 바위굴이 유명하다. 조선을 건국하기 전 이 굴에서 기도한 인연을 가진 태조 이성계의 후원으로 1396년 혜철(慧哲)대사가 창건했다. 굳이 이름의 기원을 추적하자면 중국 달마대사의 소림굴이라 하겠다. 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후 굴 안에서 9년간 벽만 쳐다보고서 명상을 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중국 소림굴의 조선판 버전인 셈이다. 1817년 중건하면서 현재 이름으로 바꾸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두 번 정도 언급될 만큼 600여 년의 긴 역사를 지녔다. 소림굴의 ‘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김형규(金衡圭 1861~1935)의 <청우일록(靑又日錄)>에 나온다. “계곡 아래에서 세수를 하고 소림사를 살펴보았다. 절 뒤에는 큰 바위가 있었으며 바위 가운데 굴이 있었다. 이상히 여겨 물었더니 동자승이 ‘이곳은 달마대사가 머물던 자리’라고 대답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바위 모양은 마치 부채를 뒤집어 놓은 것처럼 구부러져 있었고 그 가운데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앉을 수 있었다. 어찌 기암이 아니겠는가?” 청우 선생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인 장동김씨 김병운(1814~1877)의 외아들이다. 1873년에서 1887년까지 11년간에 걸친 정치적 내용까지 포함한 기록물인 ‘청우일록’을 남겼다. 정확성과 객관성으로 자료가치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일기라고 하겠다. 춘원 선생도 한낮의 더위를 피해 소림굴 안으로 수시 출입했을 것이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동네로 산책을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마음에 드는 터를 발견했다. 감나무가 서 있는 150평 정도의 작은 밭이다. 세검정 계곡의 물소리와 앞쪽의 백악산 인왕산 그리고 뒤쪽의 북한산이 감싸고 있는 명당이다. 별장을 지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조선일보에 근무하면서 잘나가던 때였다. 예나 지금이나 집을 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집 한 채 짓고 나면 10년 늙는다는 말이 그냥 나온 소리가 아니다. 생각지도 않던 암반이 돌출했고 이를 제거하느라고 추가비용은 늘어만 갔다. 겪어보니 공사업자도 그렇게 믿음을 줄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모르긴 해도 집을 지으면서 우여곡절이 많았던 모양이다. 적지않은 비용을 사기 당하기도 했다. 얼마나 미웠으면 업자의 이름까지 ‘성조기(成造記)’란 글 한편에 두 번이나 반복해서 남겨 두었을까. 마음고생으로 인하여 전전긍긍하던 모습을 보다못한 안주인이 나섰다. 북촌 일대를 개발하여 근대식 작은 평수의 서민한옥을 분양하던 정세권(鄭世權 1888~1965) 선생과 연결되었다. 그이에게 일을 맡기고서야 모든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그날부턴 그야말로 팔짱 끼고 매일 집 짓는 일꾼들의 땀 흘리는 모습을 구경만 해도 아무 문제될 것이 없었다. 날마다 아침이면 공사장으로 왔고 해가 진 뒤에야 내려갔다. 춘원별장 샘물, 감나무, 향나무 얼마나 좋았던지 집이 완공도 되기 전에 이사를 했다. 착공한 지 백일쯤 될 무렵이다. 유리문과 차양막 그리고 전등시설도 이사를 한 뒤에서야 공사를 이어갈 정도였다. 이 집에 대한 애착을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기초공사를 하면서 바위를 깨다가 두 곳에서 발견한 샘물에 대한 찬사도 빠트리지 않았다. 단맛이 나는 맑은 물은 한 가족이 사용하기에는 충분한 양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좋아하던 ‘ㄷ자 한옥’에서 1934년부터 1939년 5월까지 5년정도 밖에 살지 못했다. 결국 효자동 본가로 돌아와야만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집주인이 바뀌었다. 다행히도 1972년 현재의 주인에 의해 다시 개축되었다. 이 집의 매입자가 개보수를 거쳐 복원했으나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한 덕분에 근대화된 한옥양식을 보여주는 건축학적으로 가치있는 건물로 인정 받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별장문화를 엿볼 수 있는 집으로서 2004년에 국가등록문화재 제87호 ‘서울 홍지동 이광수 별장터’로 지정되었다. 두 곳의 샘물과 ‘삘 꽂힌’ 감나무는 그대로 남아서 그 시절을 말없이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춘원이 직접 옮겨 심었다는 향나무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더불어 한국문학사에서도 의미있는 터로 자리매김 되었다. 서실 춘원헌 액자 여름 장맛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 한옥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와 함께 앞산의 운무를 바라보는 전망도 일품이다. ㄷ자 한옥의 왼쪽날개 부분은 창 넓은 누각형 서실로 사용하면서 ‘춘원헌(春園軒)’이라는 액자를 달아놓았다. 공개하지 않는 개인주택이지만 다행히 집주인의 배려로 집안을 둘러볼 수가 있었다. 종로구 여기저기에서 활동하는 도반 몇 명과 함께 주말에 잠깐 스쳐가듯 ‘한옥 스테이’를 한 셈이다. 소림사와 춘원별장 그리고 현재의 주인으로 이어지는 인연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음미했다. 현재 복원한 춘원별장의 마루바닥은 본래 마루라고한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3-07-26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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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광릉-세조임금과 월운 스님의 한글사랑이 어우러진 곳 광릉내(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인근 지역의 새로 짓는 아파트는 분양 광고할 때 ‘숲세권’을 빠뜨리지 않는다. 그것도 그냥 숲이 아니라 ‘왕의 숲’임을 엄청 강조한다. 왕숙천에는 ‘왕의 꽃길’을 조성했다. 이제는 제왕까지도 광고의 매개체로 삼아 소비자를 모으고 홍보를 통해 관광객을 부르는 시대가 되었다. 졸지에 소환당한 주인공은 조선의 일곱 번째 왕 세조(1417~1468 재위1455~1468)임금 이시다. 광릉숲은 동서 4km 남북 8km의 규모로 포천과 남양주 그리고 의정부에 걸쳐있으며 여의도 30배 면적인 약 31만평이라고 한다. 1468년 능림(陵林 왕릉을 보호하기 위한 숲)으로 지정된 이후 550여년간 자연 그대로 보존된 탓에 뒷날 유네스코 생물보존권 지역으로 선포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현재 광릉 숲 안에는 국립수목원과 연구소, 산림박물관, k대 평화복지대학원 등이 함께 자리잡고 있다. 자연 숲과 별로 어울릴 것 같지도 않는 건물들의 부조합도 용납되는 걸 보니 임금님의 품안이 참으로 넓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된다. ‘모두 나의 백성이니라’라고 하면서도 그 시절 같았으면 절대로 들어올 수 없는 시설이었을텐데 오백년이 흐르다보니 서슬 퍼랬던 왕도 이제는 마음이 많이 관대해지셨나 보다. 뿐만 아니라 관통도로의 교통량도 만만찮다. 자동차의 소음과 매연이 왕릉의 편안한 잠자리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닌지도 염려된다. 왕도 백성을 걱정해야겠지만 백성도 왕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왕릉인 광릉(사적197호)은 세조임금에서 시작된다. 생전에도 이 숲을 매우 좋아하셨다고 한다. 활쏘기를 좋아하여 사냥터 삼아 종종 다녀갔을 것이다. 하지만 좋은 터는 이미 주인이 있기 마련이다. 동래정씨 정찬손 선생의 선영이었다고 한다. 왕릉을 모시면서 정씨 선영을 옮겨야만 했다. 뒷날 왕후릉도 들어왔다.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서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을 각각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二岡陵)이다. 비용절감을 위하여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두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나무관을 구덩이에 넣고 그 사이를 회다짐으로 메우는 회격(灰隔)방식은 노동인원을 절반으로 줄이는 경제적 효과로 이어졌다. 당신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특히 한글사랑은 유별났다. 왕자시절에도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했으며 창제 직후 시험삼아 언해(諺解 한글번역)한 『석보상절』과 『월인석보』를 편찬할 때도 힘을 보탰다. 왕위에 오른 뒤에는 본격적으로 훈민정음 보급을 위해 불교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1461년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했고 10여종 중요한 경서를 엄선하여 언해(諺解 한글번역)했다. 이 책들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 중세국어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학인시절 간경도감에서 나온 언해본을 읽기 위해 국어고어사전을 마련했던 기억도 새록새록하다. 현재 언해본 원본은 거의 국보 내지는 보물로 지정되었다. 11년간 지속된 사업으로 고승과 이름난 유학자 20여명이 번역에 참여하였으며 특히 구결(口訣 한문원문 문장이 끊어지는 부분에 우리 말로 토를 다는 일)작업에는 세조가 직접 관여 했다. 그 밖에 역부(役夫 뒷바라지하는 인부) 장인(匠人 종이, 먹, 책 등을 만들고 인쇄하는 기능직)등이 170여명으로 도합 200여명에 육박하는 거대한 조직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불교에 심취했고 등극 이전 그리고 이후에도 집현전 학사인 김수온의 형 신미(信眉 본명:김수성)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한글창제 및 번역에 관한 많은 자문을 받았다. 광릉내에는 969년 고려 때 창건된 운악사(雲嶽寺)가 있었다. 능림(陵林 왕릉을 보호하기 위한 숲)지정 이듬 해 1469 세조의 능찰(陵刹 왕릉을 수호하는 사찰)로 중창 한 후 임금의 진영(초상화)을 모신 숭은전(崇恩殿)을 건립했다. 얼마 후 현판을 봉선전(奉先殿)으로 바꾸었다. 사찰이름도 자연스럽게 ‘봉호선왕지능(奉護先王之陵 선왕의 능을 받들어 보호함)’이란 의미를 지닌 봉선사(奉先寺)로 바뀌었다. 당시에 만든 범종이 현재까지 남아서 소리로써 긴 역사를 이어주고 있다. 봉선사에서 반백년을 머물렸던 월운(月雲1929~2023) 노사(老師)는 스승이신 운허(耘虛 1892~1980 독립운동가.번역가)스님의 뒤를 이어 동국역경원장을 맡아 한글대장경 318책을 완간했다. 그리고 봉선사에 학림과 서당을 개설하여 수많은 번역인재를 양성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세조임금의 한글사랑이 오백년 후까지 고스란히 남아서 오십년 역경(譯經)사업을 보이지 않는 힘으로 외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날 모자라는 능력을 돌아보지 않고 호기롭게 번역한 책을 우편으로 스님께 보냈다. 얼마 후 칭찬과 격려말씀이 함께 담긴 친필 엽서가 도착했다. 어른께서 지닌 후학에 대한 애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인연이 닿지 않아 직접 당신 앞에서 책을 펴고서 함께 살지는 못했지만 가끔 봉선사로 와서 인사 올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하지만 이 절 저 절에서 당신이 배출한 승가의 제자들과 늘 도반이 되어 서로 탁마하면서 함께 지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재가제자들의 뛰어난 안목도 번역이 막힐 때마다 늘 큰 힘이 되었다. 친구의 친구가 친구인 것처럼 제자들의 도반 역시 제자나 다름없으리라. 남겨두신 사세게(辭世偈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말씀)를 가만히 음미해 본다. 첫구절은 ‘사승비승사속비속(似僧非僧似俗非俗 승려이면서 승려가 아니고 속인이면서 속인이 아니다)’라고 했다. 교리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승(僧)은 진리의 세계(진제眞諦), 속(俗)은 현실세계(속제俗諦)를 말한다. 따라서 진(眞.출가승)과 속(俗.세간인)을 동시에 벗어나면서도 또다시 그 둘 속으로 들어가 열심히 살았다는 ‘진속불이(眞俗不二. 진과 속은 결코 나누어 질 수 없다)’의 수행경지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비가 조금씩 오락가락하긴 하지만 대체로 흐린 날씨를 유지하는 날(2023년 6월21일 수요일) 월운 대강백(大講伯)의 다비식(장작을 사용하는 전통적인 불교 화장의식)을 마친 후 서울 조계사로 돌아오는 길에 세조왕릉을 찾았다. 두 어른의 한글사랑에 다시금 감사를 드리면서 두손모아 고개를 숙였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3-06-26 08:50: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