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논설고문
leejaeho6424@gmail.com
- 아주경제 초빙논설위원
- 前 동아일보 정치부장, 논설실장
- 前 관훈클럽 총무
- [이재호의 그게 그렇지요] 꽉 막힌 '벽' …여당의 예고된 참패 [이재호 논설고문] 4‧10 총선이 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여야는 승패 분석과 향후 정국 전망에 여념이 없지만 이번 선거가 “역대급 저질 선거”였다는 오명을 벗기는 어려워 보인다. 국가의 미래에 대한 반듯한 어젠다는 물론 이렇다 할 정책도 이슈도 안 보였고 그저 막말뿐인 선거였다. 우리 정치가 왜 이렇게 작아지고 남루해졌을까. 선거가 미래를 선도하지 못하고 과거에 매임으로써 정치의 퇴행은 가속화됐다. 산적한 국가적 과제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국민의힘의 선거 참패는 한마디로 불통 이미지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해도, 무슨 호소를 해도 귀 기울여 듣지 않을 것처럼 꽉 막힌 벽 같은 이미지에 국민이 질린 것이다. 처음부터 그랬으면 또 몰랐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초엔 도어스태핑(door stepping)을 통해 제법 소통도 할 것처럼 보였으나 곧 이를 중단했고, 이후 기자회견다운 기자회견 한번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인사에서도 검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대통령은 능력 있고 똑똑한 사람을 데려다 쓴다고 했겠지만 국민을 우습게 아는 행위였다. 특정 대학에 검사면 다 우수하다는 인식은 이미 구시대의 잔재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이 AI 시대에 웬 검사냐는 국민의 시선을 한 번이라도 직시한 적이 있는지 의문이다. 불신과 혐오의 선거판 크게 보면 여야가 ‘정권 심판론’과 ‘이·조(이재명·조국) 심판론’으로 맞붙는다고 했을 때부터 예견됐던 일이다. 민생을 비롯한 모든 이슈들이 두 심판론 사이에서 증발했고, 그 빈자리를 끝 모를 불신과 혐오가 채웠다. 선거판은 지난 대선에 이어 다시 ‘검사 대 피의자’ 프레임으로 되돌아간 듯하다. 이 프레임에선 어느 한쪽이 무죄로 방면되거나 처벌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사법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한 갈등의 심화가 우려돼 일각에선 ‘정치의 복원’을 거론하기도 했으나 윤 대통령 치하에선 쉽지 않은 일임은 누구나 알았다. 검찰은 선거 중이던 지난 8일 이재명 대표의 최측근으로 쌍방울 불법 대북송금 의혹 사건의 핵심인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에게 징역 15년, 벌금 10억원과 추징금 3억4000만원을 구형했다. 이 대표 또한 이 사건과 관련해 제3자 뇌물 혐의를 받고 있다(이화영 부지사에 대한 선고기일은 6월 7일이다). 조국혁신당으로 인해 상황이 더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 조국 대표는 그동안 드러내놓고 ‘복수혈전’을 예고해왔다. 윤 대통령의 남은 임기 3년이 “너무 길다”고 했고, “김건희 특검법과 한동훈 특검법도 발의하겠다.”고 했다, 총선 직전에는 “김건희 특검법이 통과되면 여러분은 하반기에 김건희씨가 법정에 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자녀 입시비리 혐의로 1·2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범죄 피의자가 대통령과 정치를 겁박한 셈이다. 조 대표는 대법원 판결로 유죄가 확정되면 바로 감옥행이다. 정치판 자체를 떠나야 한다. 그런 그가 윤 대통령을 레임덕(Lame duck·절름발이 오리)에서 데드덕(Dead duck·죽은 오리)으로 만들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정상은 아니다. 조 대표의 움직임은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당 재정비 작업과도 맞물린다. 이 과정에서 조 대표와 민주당의 선명성 경쟁 또는 연대로 대여 투쟁 강도가 더 세질 가능성도 있다. 여기에 총선으로 새롭게 원내에 진출한 군소 정당들이 가세할 수도 있다. 벌써 조 대표의 ‘복수혈전’이 윤 정부에 비판적인 범야권에 의해 대통령 탄핵의 불쏘시개로 쓰이고 있다. 이 막장 드라마의 연출자는 재야 원로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다. 그는 지난달 14일 오마이TV와 인터뷰하면서 “이번 총선은 문재인 정부(제1기 촛불정부)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성공하는 제2기 촛불정부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공언했다. 그는 “조국혁신당의 바람도 있지만 조국은 조연일 수밖에 없고 민주당의 이재명이 주역이 될 수밖에 없다”면서 “이재명 말고 누가 2기 촛불정부를 만들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돌려서 말할 필요가 없다. 제2기 촛불정부의 조기 수립이라는 얘기는 윤석열 정권을 빨리 끌어내리고 이재명을 다음 대안으로 빨리 만들자는 것”이라고 했다. 처음 이 기사를 봤을 때 나는 설마 했다. 우리 사회의 원로이자 재야 지도자인 영문학자(86‧하버드대 영문학박사)가 드러내놓고 사실상 ‘민중혁명’을 획책하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 나를 대북 문제와 이념 문제에 정통한 한 선배는 딱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이른바 좌파라는 사람들의 생리와 투쟁 방식에 대해 그렇게도 모르냐는 핀잔이 담긴 표정이었다. 이재명·조국의 연대 가능성 그는 조국 대표와 이재명 대표가 연대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둘이 손을 잡거나, 이 대표가 대장동 사건으로 사법 처리돼 영어의 몸이 된다고 해도 그 뒤를 이을 사람들 중에 조 대표는 포함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했다. “이미 야권과 진보 좌파 또는 친북 좌파는 이 대표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기 시작했다”면서 “어쩌면 우리는 공천파동으로 민주당에서 한때 배제된 박용진 의원과 임종석 전 의원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무슨 말인가. 그들이 갖은 수모를 참아가며 당에 잔류한 것은 우리마저 떠나면 70여 년 의회민주주의 전통을 고수해온 민주당은 소멸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거라고 했다. 한국 야당사의 큰 맥(脈)이었던 DJ(김대중) 민주당의 동교동계는 사실상 사라졌다. 남은 인사는 올해 94세인 권노갑 민주당 상임고문 정도다. DJ의 3남인 김홍걸 전 의원은 지난 1월 이재명 대표가 주도한 공천 심사에서 낙마했다. 재산신고 누락 등이 문제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선거에서 우리는 한국 정치의 세대교체, 임무교체를 현장에서 지켜보았다. 그 교체가 정치 발전과 국민 통합, 그리고 협치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것인가 혹여 맹목적 종북이나 시대의 유물이 된 좌파 이념에 대한 수용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끝까지 살펴야 한다. 조 대표는 일관되게 “민주당과의 합당은 없다”고 했다. 이번 총선에서 선전한 그가 민주당과 국민의힘 사이에서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하게 된다면 사안에 따라 국민의힘과 연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전에 사법처리될 가능성이 있지만 어제의 적(敵)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셈이다. 이제 국민의힘은 조 대표의 심기까지 살펴야 하게 됐다. 그는 당선 후 일성으로 윤 대통령에게 그동안의 실정(失政)에 대해 국민께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조 대표 뒤에는 문재인 전 대통령도 있다. 이미 정치에 뛰어든 문 대통령은 총선 중 일부 민주당 후보 지원 유세를 펼치면서 “대한민국이 퇴행하고 있다”고 현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나도 숟가락 하나 얹고 싶다”고 했다. 스스로 또 하나의 게임 플레이어(game player)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재임 중 그의 비서실장이었던 임종석은 ”(윤석열 정부 들어) 무너져가는 외교나 정치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시고, 그렇게 소리를 내는 것이 국민들에 대한 당신 책임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고 했지만 본격적인 ‘정치 재개’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한동훈의 거취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거취도 관심사다. 8월로 예상되는 새 지도부 구성 때 당대표를 맡아 대권 주자로서 위상을 굳힐 수도 있고, 아니면 총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잠시 정치판을 떠날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유력 대권 주자로서 위상은 살아 있을 것이다. 비록 선거를 승리로 이끌지는 못했지만 고군분투했던 그의 헌신과 열정은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한동훈의 움직임에 따라 차기 대권 경쟁은 조기에 가시화할 게 분명하다. 벌써 잠룡(潛龍)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여권에선 한동훈, 오세훈, 안철수, 나경원, 원희룡 등이, 민주당 쪽에선 이재명 대표 외에 김동연 경기지사 이름이 나돈다. 정치는 ‘생물(生物)'이라고 했다.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크고 있는지 누가 아는가. 벌써 이쪽저쪽으로 줄을 섰다는 사람들도 있다. 이 모두가 윤 대통령에겐 부담이다.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원칙과 상식에 충실하되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통합과 포용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어 보인다. 필자는 지난번 칼럼에서 윤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의 1대1 영수회담 가능성에 대해 “대통령으로서는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관에 관한 문제일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제는 갑과 을이 바뀐 것일까. 선거는 끝났지만 22대 총선 얘기는 계속된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2024-04-11 12:48:40
- [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왜 사라졌나 [이재호 논설고문] 22대 총선의 막이 올랐다. 여야 예상 의석수와 승패 등을 놓고 전망이 분분하다. 이른바 ‘정부 지원론’과 ‘정부 견제론’이 맞서고 있다. 어느 쪽이 이기든 총선 후 정국은 극심한 국정의 체증(滯症) 또는 밀어붙이기식 독주(獨走)를 경험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야는 이미 공천 과정에서 상상하기도 어려운 막말과 증오의 표출로 충분히 예열돼 있는 상태다. 경쟁과 투쟁은 정치에서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거라고 하지만 우리는 너무 심하다. 양극단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해줄 세력도 기제도 없다. 개혁신당, 새로운 미래, 조국혁신당 등 일종의 파생 정당들이 있다지만 이들에게 그런 역할을 기대하기는 무리다. 어떤 정당은 순전히 개인의 방탄과 신원(伸冤)을 목적으로 급조되기도 했다. 의원 꿔주기 위성 정당으로 언제든지 본체에 합류할 정당도 있다. 어느 새 이게 우리 정치의 풍경이고 일상(日常)이 됐다. 세계 10위권 선진국이라지만 정치는 늘 우리를 참담하고 부끄럽게 만든다. 한국 정당정치의 출발점을 1945년 9월 16일 한민당의 결성으로 본다면 우리 정당사도 어언 한 세기가 다 되어간다. 그럼에도 민주적 정당정치의 핵심인 대화와 타협을 통한 합의의 미덕과 지혜는 여전히 멀리 있다. 품격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 정치 특유의 비타협성, 증오, 불화, 한마디로 뭉뚱그려 후진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이념과 역사, 정치인 개개인의 자질, 권위주의적 정치문화 등 정치학개론을 여러 권 써야 할 만큼 원인은 많다. 필자는 눈앞의 현실정치와의 관련 속에서 인정(認定)의 부재(不在) 또는 결여를 가장 먼저 지적하고 싶다. 정치의 상대방을 대화의 상대 또는 국정 운영의 파트너이자 조력자로서 ‘인정’을 안 하는 게 작금의 불화와 증오의 근본 원인이라는 얘기다. 그렇다고 이 문제를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의 영수회담 부재 탓으로 좁혀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인식은 대화 부재의 책임을 어느 한쪽에 지움으로써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 뿐이다. 윤 대통령을 잘 아는 전직 법조인에게 물었다. 그런 식으로 양자 간 회담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느냐고. 답은 “절대로 아니다”였다. 그 이유를 짐작할 만했다. 그건 정치지도자를 떠나 개인으로서 정체성(正體性‧identity)과 가치(價値)에 관한 문제였다. 이 문제는 아마도 이 대표에 대한 사법 리스크가 해소되거나 관련 재판이 마무리되어야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상사에서도 그렇지만 ‘인정의 부재’는 반발과 증오심을 키움으로써 관계를 더 소원해지게 만든다. ‘엇나간다.’는 말은 이런 경우에 들어맞는다. 이 대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노골적으로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암시했다. 사용한 언어도 직설적이었다. “대통령이 말을 안 들으면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고 했다가 “내쫓아야 한다” “중도해지해야 한다”고 갈수록 수위를 높였다. 이런 발언으로 지지층을 결집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마음껏 드러냈을지는 몰라도 정도는 아니다. 필자가 보기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과연 대통령과의 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하버드대학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 교수가 쓴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 2018년 어크로스)>를 다시 보자. 그들에 따르면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탱해온 것은 건국의 아버지들이 설계한 헌법 시스템 덕분만은 아니다. “두 가지의 기본적인 규범이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미국 사회의 견제와 균형을 유지해왔다. 그 두 가지 규범이란 정당이 상대 정당을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상호 관용(mutual toleration)과 이해(understanding), 그리고 제도적 권리를 행사할 때 신중함을 잃지 않는 자제(forbearance)를 말한다.” 지금 우리 상황에서 대통령이든 야당 대표든 누구든 경청해야 할 경구가 아닐 수 없다. 내친김에 조금 더 인용해보자. 그럴 가치가 충분히 있다. “이 두 규범은 20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미국 민주주의 기반을 강화해왔다. 양당의 지도자는 서로를 정당한 경쟁자로 받아들였고, 그들에게 시한부로 주어진 제도적 권리를 오로지 당의 이익을 위해서만 활용하려는 유혹에 굴복하지 않았다. 관용과 절제의 규범은 미국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연성(軟性) 가드레일로 기능하면서, 당파 싸움이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막아주었다. 반면 1930년대 유럽이나 1960년대와 1970년대 남미에서 나타난 자멸적인 당파 싸움은 여러 국가의 민주주의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우리에게도 ‘연성 가드레일’이 있는가. 윤 대통령이나 이 대표 모두 겸허히 자문해야 한다. 다시 ‘현실’의 영역으로 돌아가자. 두 사람 간 대화가 어렵다면 우회하는 방법이라도 찾아야 한다. 이런 제안에 발끈할 사람도 물론 있을 것이다. “지금이 제왕적 대통령의 시대도 아니고 야당 대표가 만나자고 하면 선뜻 만나야지” 하면서 말이다. 그에 대한 반박도 차고 넘칠 것이기에 서로 ‘절제’하고 ‘상호 관용’의 자세로 해법을 모색해보자. 필자는 이 대표가 꼭 대통령을 직접 만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국민의힘 대표와 일대일로 여야 대표회담을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굳이 격식이 필요하다면 그 회담을 ‘영수회담’이라고 부르면 될 일이다. 그 모습이 오히려 대통령과 집권 여당에 줄 압박은 상당하지 않겠는가. 꼭 그걸 의식해서가 아니라 그런 자세와 제안만으로도 의미가 클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막말정치로 시작되는 한국 정치의 퇴행과 후진화(後進化)를 막아야 한다. 얼음은 위에서부터 녹는다고 했다. 여야가 영수회담 또는 여야 대표 회담을 통해 막말정치의 근절을 선언하고 구체적인 실천 강령을 제시한다면 저 아래 지구당까지 분위기는 순식간에 바뀔 것이다.(이럴 때는 중앙집권제의 유산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게 고맙다) 막말정치로 한국 정치를 4류로 전락케 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야 가릴 것 없이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22대 총선을 그 출발점으로 삼자. 이 대표가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에게 먼저 만나자고 제안했으면 한다. 한국 민주주의를 죽음으로 내몰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2024-03-25 05:00:00
- [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막말'에 가려진 정책과 대안 …선거의 본령 회복하자 [이재호 논설고문] 여야가 4‧10 총선 10대 공약 중 최우선 과제로 제시한 게 저출생 문제다. 국민의힘도 민주당도 OECD 국가 최저인 0.78명의 출생률로는 국가의 미래를 논의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경쟁하듯 내놓은 대응책도 파격적이다. 국민의힘은 부총리급 인구부를 설치하고, 육아기 유연근무를 기업문화로 정착시키기로 했다. 남성 배우자의 출산휴가도 1개월로 의무화했다. 민주당도 저출생 대응 특별회계를 만들고, 아빠 1개월 유급휴가, 자녀 수에 따른 분양 전환 공공임대 아파트 제공, 자녀가 18세 될 때까지 월 20만원 아동수당 지급 등을 약속했다. 마침 국회 입법조사처(처장 박상철)도 지난 11일 저출생 대응책 마련에 도움이 될 만한 보고서를 내놓았다. ‘지방 소멸 대응책으로 도입된 생활인구 제도의 현황과 과제’(하혜영·임준배)라는 제목의 이 페이퍼는 ‘생활인구’라는 개념(모델)을 활용해 인구 감소 문제에 접근할 것을 제안한다. 저출생은 인구 감소-지방 소멸을 낳고, 지방 소멸은 다시 인구 감소-저출생의 악순환으로 이어지기에 어떻게든 그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고심의 산물로 보였다. 생활인구·관계인구 눈길을 끄는 것은 ‘생활인구’였다. ‘생활인구’란 한 지역의 인구를 파악할 때 주민등록상 인구뿐만 아니라 통학, 근무, 관광, 휴양 등을 목적으로 일시 체류하는 사람들도 포함하는 인구를 말한다. 인구 기반을 넓고 유연하게 상정함으로써 인구 감소와 지방 소멸도 막아보자는 거다. 한국은 2022년 6월 ‘인구감소지역 지원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생활인구’ 모델을 도입했다. 정부는 2024년까지 총 89개의 인구 감소 지역에 ‘생활인구’ 모델을 적용해 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작년부터 시행 중인 ‘고향올래(GO鄕 ALL來)' 5대 사업인 △두 지역 살아보기 △로컬유학 생활 인프라 조성 △은퇴자 공동체 마을 조성 △청년 복합공간 조성 △워케이션(worcation‧일과 휴가의 합성어)은 대표적인 ‘생활인구’ 늘리기 사업이다. 일본은 2010년대 초반부터 ‘생활인구’와 비슷한 ‘관계인구’ 개념을 내세워 지방 인구 감소에 대응해왔다. ‘관계인구’는 정주인구(주민등록상 인구)나 관광차 방문한 교류인구와는 다르다. ‘특정 지역에 계속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관계가 있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을 늘려 인구 감소를 막아보자는 거다. ‘관계인구’는 다카하시 히로유키(高橋博之)가 저서 <도시와 지방을 섞다-다베루 통신의 기적>에서 “교류인구와 정주인구 사이에서 잠자고 있는 ‘관계인구”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처음 쓴 것이라고 한다. 인구지리학자도 아닌 필자가 ‘생활인구’ 또는 ‘관계인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순전히 선거 때문이다. 더 지켜봐야겠지만 필자 개인적으로는 ‘생활인구’ 대목에서 이번 총선이 그나마 ‘막말선거’에서 ‘정책선거’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랬으면 좋겠다는 희망 차원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정책선거’의 흔적이라도 발견한 느낌이었다. 선거판을 따라다니던 햇병아리 기자 시절부터 선배들에게 귀가 아프도록 들은 말이 있다. '경마식 보도(horse-race journalism)를 지양하라'는 충고였다. 공약과 정책에 대한 심층적 분석 대신 몇 번 경주마가 앞서고 있는지, 뒤지고 있는지 하는 식으로 보도하지 말라는 것.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해 늘 고민했는데 요즘은 ‘막말’을 놓고 똑같은 고민 중이다. 자고 일어나면 막말 논란이 터져 나와 막말을 경마식으로 보도하기에 정신이 없을 정도다. 양상도 사뭇 달라졌다. 디지털 시대답게 요즘은 아무리 오래전에 한 말도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드러난다. 한번 뱉은 말은 영원히 부인도 변명도 할 수 없게 됐다. 막말은 막말을 한 사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당(黨)은 물론 우리 정치에 회복하기 어려운 부담을 안긴다. 막말을 한 공천 내정자를 바꿀 것인가, 말 것인가, 여당은 바꾼다는데 야당은 왜 안 바꾸는가, 누구는 봐주고 누구는 왜 안 봐주는가, 단순 징계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대권 가도에 장애물로 인식돼 내쳐지는 것인가, 그 파문은 끝없이 이어진다. 같은 당내에서도 당직자들끼리 생각이 다르다. 5‧18을 폄훼한 후보는 즉각 공천이 취소됐는데 천안함 피격사건을 두고 막말을 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도 없어 유가족들이 울분을 토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막말의 분노가 가리고 있는 것들 막말의 폐해 중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하나 있다. 자극적 막말이 낳은 분노와 혐오에 매몰돼 정작 따져봐야 할 문제들은 그냥 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톺아볼 필요가 있어서다. 예컨대 막말 차원을 벗어나 일관되게 반국가적 이념 지향을 보여 온 사람이나 세력이 있다면 그들이 의도했건 않았건 간에 막말 논쟁으로 인해 이런 사실들이 혹여 가려지는 것은 아닌지 따져봐야 한다. 철지난 색깔논쟁을 하자는 게 아니다. 자유민주주의 동료시민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책임과 의무다. 국내 진보세력의 맥을 이어온 NL계 중추 통합진보당(통진당)은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됐다. 그럼에도 일부 잔존 인사들은 여전히 활동 중이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통진당 해산 이후 진보 진영은 정당, 노조, 사회단체 등 3축이 모두 특정 지역, 특정 세력에 의해 장악됐다는 주장도 있다. 나는 정통, 전통 민주당의 정신과 철학, 민주화를 위한 긴 투쟁의 시간들이 이들 진보 진영과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가 궁금하다. 누군가는 이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한다. 그것이 흔히 말하는 이념의 스펙트럼을 넓히기 위한 노력의 일환인지, 아니면 다른 원대한 꿈이라도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요즘 위성정당 비례대표 후보자들의 면면을 보면 한때 반미(反美)를 외치고 미군 철수를 주장했던 이력쯤은 흔해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다. 한국 사회는 그만큼 성숙해지고 유연해진 것인가. 다시 정책으로 돌아가자. 필자는 과문한 탓에 ‘생활인구’ ‘관계인구’ 개념에 대해 뒤늦게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보면 이런 사례들이 널렸을 것이다. 안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점검하고 평가해야 할 공약과 현안들은 차고도 넘친다. 선거란 온 국민이 공부하는 학습의 시간이다. 선의의 경쟁을 통해 더 나은 정책과 대안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모든 선거의 본령이고, 이번 선거는 더욱 그렇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2024-03-20 06:00:00
- [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어쩌다 우리 정치에 품격이 실종됐나 [이재호 논설고문]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얼굴에 숯 검댕이 묻었다. 설 연휴 직전인 8일 서울 노원구 백사마을에서 저소득층 가구에 연탄 2000장을 배달하면서 묻은 것이다. 공유된 영상을 보면 일부 당직자들이 장난 삼아 한 위원장 얼굴에 검댕을 묻혔고, 미처 피하지 못한 한 위원장이 파안대소하는 모습이 나온다. 민형배 민주당 의원이 이를 문제 삼았다. 자신의 페이스북에 “한 위원장의 옷은 멀쩡한데 대체 왜 얼굴에만 검댕이 묻었나”라면서 “연탄 화장? 연탄 나르기마저 정치적 쇼를 위한 장식으로 이용한 것 아니냐”는 글을 올렸다. 박정하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이 즉각 반박했다. “하다하다 ‘연탄 정치 쇼’라는 주장까지 나온다”며 “답답할 뿐”이라고 했다. 한 위원장의 프로야구 롯데 경기 관람 여부도 논란이 됐다. 한 위원장이 부산고검으로 좌천됐을 때(2020년 1월∽2020년 6월) 사직구장에서 롯데 경기를 봤다고 말하지만 거짓말이라는 거다. 당시엔 코로나로 프로야구를 무관중으로 치를 때였다는 것. 한 위원장이 자신과 부산의 인연을 과시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거다. 한 위원장은 인증샷까지 올렸지만 이 사진조차도 2008년 부산지검에 근무할 때 찍은 거라는 주장이 나와 또 시끄러웠다. 한없이 작아진 한국 정치 어쩌다가 우리 정치가 이렇게 작아졌을까. 세계 10위권 경제대국, K-팝과 K-방산을 앞세운 문화‧군사대국이라지만 정치는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허구한 날 가십거리도 안 되는 하찮은 사안을 놓고 티격태격한다. 최근엔 ‘운동권과 검찰 중 누가 더 룸살롱에 자주 갔느냐’를 놓고 논쟁을 벌일 정도다. 깃털처럼 가벼운 한국 정치의 기저에 도사리고 있는 건 혐오다. 상대가 그냥 싫고 미운 거다. 정치가 한국 사회에 주어진 시대적 과제 해결에 어떤 적실성(relevance)을 가지려면 이런 혐오의 벽부터 넘어서야 한다. 나는 거대 야당인 민주당이 우리 정치를 좀 더 근사하고 멋진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 사회에 가장 시급한 과제는 뭘까. 총체적인 시대의 흐름에서 본다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일 것이다. 이른바 1987년 체제가 들어서면서 민주화는 그런대로 이뤄졌고, 민주주의도 더는 타는 목마름의 대상이 아닌 것처럼 돼버렸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민주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최근 최장집(고려대 명예교수)의 역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19년 개정 2판 12쇄)를 다시 읽었다. 2002년 초판이 나온 이래 일관되게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 천착해온 그의 고뇌가 담겨 있는 책이다. 결론 부분에서 한 구절 인용한다. IMF 금융위기로 시장 근본주의적인 정책(신자유주의)이 더욱 급진적으로 취해졌다며 그가 한 지적이다. 우리의 민주주의, 뭘 위해 기능하나 “···민주화 이후 절차적 수준에서의 민주화와 발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와는 다른 차원이라 할 사회경제적 수준에서 민주화는 퇴보했고, 현재도 계속 퇴보하고 있다는 걸 말하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특징으로서 정치적 민주화, 경제적 민주화, 절차적 민주화, 실질적 민주주의가 서로 역진적으로 전개되는 경향을 나타낸 거라고 할 수 있다. ···분명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는 계급 구조와 사회 분열을 완화하는 체제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한국 민주주의는 무엇을 위해 기능하고 있는가?” 이 물음에 먼저 답해야 하는 건 역시 민주당이다. 어찌됐든 민주당이 이 땅의 민주화에 큰 역할을 한 건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민주화 때문에 고초를 겪었고, 대개는 이를 계기로 정치권에 들어와 30년 넘게 굴곡진 한국 민주주의 현장을 지켜본 사람들이다. 물론 오늘의 민주당을 김영삼·김대중으로 이어져온 전통 또는 정통 민주당과 동일 선상에 놓을 수 있느냐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사법 리스크로 얼룩진 당대표의 존재부터가 그렇다. 그럼에도 한국 민주주의를 얘기하면서 민주당을 뒷전으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영국 사회학자 콜린 크라우치(Colin Crouch)는 2005년 ‘포스트 민주주의(Post Democracy)'라는 저서를 냈다. 한국에선 2008년 ‘민주주의 시대의 종말’이라는 부제와 함께 번역·출판됐다.(옮김이 이한, 미지북스) 갈등이론으로 유명한 독일 사회학자 랄프 다렌도르프(Ralf Dahrendorf)는 이 책 추천사에서 “크라우치는 제3의 길 옹호자가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대안인 자유 민주주의와 평등주의적 민주주의 중에서 단호히 후자(평등주의적 민주주의)를 를 택한다”고 소개한 바 있다. 새로운 정치계급의 배태? 크라우치는 “다국적 기업의 정치적 중요성이 커지고, 갈수록 수동적이 되어가는 노동자계급의 쇠락 속에서 기업들의 정치고문과 로비스트들로 이뤄진 새로운 정치계급이 그 공백을 메우고 있다”고 본다. 이로 인해 정부의 경제적 행위가 왜곡되고, 신자유주의자들이 신봉하는 시장이 부패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의 주장은 유럽처럼 사회민주주의 뿌리가 강한 곳에서는 맞을지 몰라도 한국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민주화 인사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혹여 민주화 내부에서 이미 새로운 정치계급이 배태되고 그들이 깊숙이 기득권화됐거나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민주당의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는 어느 쪽인가. 자유주의 지향인가, 평등주의 지향인가. 윤석열 정부가 자유주의적이라는 건 알겠는데 민주당은? 노무현·문재인 정권을 경험하면서 사회 전반에 걸쳐 진보적 색채가 강해지기는 했어도 평균적으로는 중도 보수 정도로 봐야 한다는 인식도 있다. 맞는가? 이 밖에도 민주당이 분명하게 답해야 할 사안들은 많다. 이를 통해 당의 정체성은 물론 집권 비전까지도 보여줘야 한다. 그건 부담이면서, 우리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건강하게 발전시키는 가치 있는 일이기도 하다. 혐오정치는 自害 행위 그럼에도 들리는 건 혐오로 가득 찬 막말과 냉소, 조롱뿐이다. 사안의 경중과, 투쟁의 경중이 크게 다른 경우도 많다. 자원봉사를 나온 상대 당 대표를 보고 얼굴에 숯 검댕을 일부러 묻히지 않았냐고 할 정도면 할 말 다한 것이다. 내가 보기엔 그건 일종의 자해(自害)다. 품격까지는 바라지 않는다고 해도 건전한 민주시민의 일원으로 사안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고, 최소한의 교양인 수준에 맞게 이를 표출하는 게 그렇게도 어려운 일일까. 그렇다고 여권의 공세에 ‘대응’이라도 제대로 하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지난 7일 한 위원장은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검사 독재가 있었다면 이재명 대표는 감옥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지지자들 중엔 “역시, 한동훈!”이라며 카타르시스를 느꼈겠지만 사실관계나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말이다. 검찰은 분명히 배임, 위증교사, 뇌물 등 혐의로 이 대표를 ‘감옥’에 보내려고 했다. 법원이 구속영장을 기각해 이뤄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검찰독재가 아니어서 감옥에 안 간 것처럼 말한다면 사실을 호도하는 거다. 그의 말이 설령 상징적인 언급이었다고 해도 민주당은 마땅히 이 점을 지적하고 넘어갔어야 했다. 최장집은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최선의 경로를 이렇게 제시한다. “자신의 지지기반을 견고히 하면서도 넓은 인적·지적 자원들을 동원하는 데 성공하고, 결과적으로 민주주의를 광범위한 사회적 기반 위에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민주적인 것이 곧 유능한 시스템을 만들며, 유능한 시스템이 다시 민주주의의 기반을 튼튼하게 하는 인과적 순환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민주당 또는 운동권은 지금 그런 경로를 구축 중인가. 무능함이 권위주의를 불러서야 그는 경고한다. “한국 현실에서는 민주정부의 무능력이 권위주의적 내지는 엘리트주의적 경향을 강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은 훨씬 크고 직접적이다.” 이런 섬뜩한 경고 앞에서도 계속해서 지엽말단적인 가십거리로 상대 당과 티격태격하기나 하고, 막말이나 할 건가. 상대에 대한 혐오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막말 대신 비전과 정책, 능력, 그리고 이성적이고 품격 있는 대화로, 민주와 이후의 착하고 유능한 민주주의 시대로 넘어가야 한다. 다시 ‘폐족(廢族)’의 시대로 돌아갈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올해는 글로벌 슈퍼 선거의 해다. 세계 65개국에서 대선, 총선 등 각급 선거가 치러진다. 유권자만 42억명으로 세계 인구의 절반이다. 일찍이 전후 30여 년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룸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했던 대한민국, 그러나 그 한 축이었던 민주화 세력이 청산의 대상으로 몰리고 있는 오늘, 우리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한국과 세계에 어떤 성찰을 줄 것인가. 공천 경쟁이 끝나고 총선의 본 막이 오르고 있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2024-02-20 06:00:00
- [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뉴보수'의 아이콘 한동훈' …익숙함과 결별부터 [이재호 논설고문] 성탄 연휴, 한동훈 열풍 속에 심규진 교수가 쓴 <73년생 한동훈-보수정치의 복원과 대한민국의 미래>(2023년 새빛)를 읽었다. 출판된 지 일주일이 채 안된 책인데 한동훈 신드롬의 의미를 천착하고 있다. 책머리에 여러 사람이 추천사를 썼다. 몇 줄의 추천사가 책의 내용과 출간 취지를 간명하고 명쾌하게 일러줄 때가 많다. 서민 교수(단국대 의대)의 추천사를 보자. “정치혐오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장관이 신드롬의 주인공이 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한동훈 신드롬의 근원은 무얼까. (저자는) 신드롬의 근원을 분석하면서 한동훈이라는 뉴보수의 아이콘을 통해 보수진영의 승리를 위한 혁신적 전략을 제시한다. ‘한나땡’(한동훈이 나와 주면 땡큐)을 외치며 애써 그를 폄하하는 분들도 이 책을 읽어보기를 빈다.” 이양승 교수(군산대‧무역학)는 “586의 권력 도착증에 따라 한국 정치는 아수라판이 됐다”면서 “73년생이자 92학번인 한동훈은 ‘서태지 시대’ ‘신인류’ 정치 꿈나무”라고 했다. 그는 “한국 정치는 ‘분노장애’, 경제는 ‘공황장애’, 교육은 ‘인격장애’를 안고 있어서 변곡점이 필요하다”며 이 책은 그 변곡점을 찾기 위한 ‘한동훈 사용서’라고 했다. 한동훈에 대한 보수진영의 기대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586 정치 대체할 뉴보수의 아이콘 이 책의 저자는 이화여대(신문방송학)를 나와 미시간 주립대학과 시라큐스 대학에서 매스커뮤니케이션으로 석, 박사학위를 받았다. 싱가포르 경영대학 교수를 거쳐 지금은 스페인의 IE대학 경영대학에서 디지털 미디어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21년에는 여의도연구원 데이터랩 실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한동훈의 열렬한 지지자임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한동훈을 “경제적, 문화적, 지성적 결핍 없이 유복한 환경에서 바른 가치관과 반듯한 매너를 체화한 대한민국 교육시스템의 최고의 아웃풋(output‧ 산출물)으로 본다. 이런 인물이 주목받고 있는 그 자체가 한국 정치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이 양분해 주도해온 정치지형은 소명을 다했고, 그 자리를 이권 카르텔이 차지해 사익 (私益)추구에 몰두하는 구태‧적폐세력으로 변질 됐다는 것. 따라서 한동훈처럼 어디에도 부채가 없는 사람이 정치의 새 주역으로 나서야 한다는 인식이 그를 불러냈다는 거다. 한동훈에 대한 저자의 기대는 ‘능력주의’ 대목에서 정점을 찍는다. 여기서 능력주의는 ‘한동훈표 능력주의’다. “촌스러운 ‘짠내’ 동정과 눈물, 자수성가의 신파가 없는, (여러 면에서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대조되는) 쿨하고 세련된 능력주의”다. 예컨대 “취업난에 시달리며 민노총 카르텔에 불만이 쌓인 젊은 세대는 능력주의가 정치적 편향성으로부터 그나마 자유로운 솔루션(해법)이라고 믿고 있는데, 그런 믿음도 한동훈표 능력주의와 함께 소환됐다는 것이다. 의미부여, 또는 상찬이 과도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실력 있는 분들을 모셔와야” 그럼에도 이런 인식들은 ‘한동훈 현상’을 보다 거시적, 입체적으로 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머리 좋은 수재(秀才), 뛰어난 언변, 윤석열 대통령과의 관계, 차기대권 주자 등과 같은 익숙함을 넘어서서, 심지어는 ‘세대교체’라는 말조차도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로 깊숙이 톺아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특정 정치인에 대한 지지 여부를 떠나서, 그런 시각으로 보지 않으면 여든, 야든 본질을 놓칠 수 있다는 것. 쉽게 말하면 한동훈 현상 앞에서 총선 공천을 눈앞에 둔 여야 중진들부터 목덜미가 서늘함을 느끼겠지만, 그 이상이어야 한다는 거다. 사실 그런 절박함은 한동훈 자신에게 가장 크고 무겁게 다가올 터이다. 그는 한국 정치, 나아가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주도하고 감당할 소명의식과 진정성이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먼저 물어야하기 때문이다. 하필 그 첫 번째 시험대가 눈앞의 총선(공천)이다. 정치경험이 전무한 0선의 젊은 전직 각료에게는 벅차거나 가혹한 일일 수도 있다.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면 당장 당의 비상대책위원회 구성부터 해야 한다. 일각에선 “비대위원 전원을 70년대 이후 출생자로 채워서 올드한 586 정당 민주당을 젊은 789(70, 80, 90년대 출생자들) 정당으로 심판하자(하태경 의원)는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했다. 한동훈은 비대위 구성에 대해 “실력 있는 분을 모셔오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능력주의, 이 글의 도입부에 언급한 심규진 교수의 ‘세련되고 쿨한 능력주의’와 같은 맥락이겠으나 조금은 신중할 필요도 있다. 능력주의(meritocracy)가 만능의 칼은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는 2년 전인 2021년 2월 1일 이 칼럼난에서 하버드 대학 마이클 샌델 교수의 신간 <공정하다는 착각>(원제목 <능력의 폭정>(Tyranny of Merit 2021년)을 소개한 적이 있다. 샌델은 이 책에서 능력주의가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공동체의 삶을 팍팍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능력주의를 부정한다기보다는 그 ‘폐해를 지적한 것인데 샌델의 해법은 간단하다. “자신의 성공에 대한 운(運)의 기여를 인정함으로써 우리가 더 겸손해지고, 빛나는 자리에 앉지 못하는 사람들도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조건의 평등’을 갖춰나가야 한다”는 거다. 필자는 특급 엘리트 한동훈의 생각이 궁금하다. 가슴속의 한 가지 계책과 만권의 장서 능력주의 얘기가 나온 김에 옛날 얘기 한 토막 해보자. 말 그대로 올드한, 다들 아는 얘기다. 적벽대전을 앞두고 제갈량이 오나라의 손권을 끌어들이기 위해 손권을 찾아갔다. 손권은 제갈량의 실력(능력)을 확인하고 싶었다. 오나라의 내로라하는 지식인과 전략가들을 큰 천막에 모아 제갈량을 테스트하게 했다. 이들로부터 집중 검증을 받은 후 천막을 박차고 나온 공명이 일갈했다. “가슴속에 한 가지 계책도 없는 것들이 머릿속에 든 만권(萬卷)의 장서를 자랑하는구나!” 이 얘기를 듣고 통쾌함을 느낀 사람이 나뿐일까. 필자는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강력한 힘 중의 하나가 반(反)엘리트주의(Anti-elitism)라고 생각해왔다. 엘리트들이 정치권력을 독점하는 걸 못마땅해 하거나 반대하는 대중주의 말이다. 그들은 세상을 꾸려나가는 건 엘리트가 아니라 다수 대중이라고 믿는다. 거칠게 말하면 ‘너만 잘났느냐, 나도 잘났다’는 거다. 엘리트의 존재와 가치(價値)를 인정하지 않고 심한 경우 적개심을 드러내기 일쑤인데 그 동력은 시기심(猜忌心)이다. 나는 짧지 않은 기자 생활 중 이 시기심의 덫에 걸렸다가 몸 성히 빠져나온 정치인을 본 적이 없다. 반엘리트주의는 포퓰리즘을 동력으로 삼는데, 때로는 양자가 서로 앞뒤를 바꾸기도 한다. 反엘리트주의와 과하지욕(胯下之辱) 어떻든 이제는 한동훈의 시간이다. 현실의 시간이다. 그로서는 민주당이 28일 강행처리하겠다고 공언한 김건희 특검법에 대한 대응이 첫 시험대가 될 것이다. 그는 이미 “법 앞에 예외는 없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야당의 특검법은) 총선기간에 선전 선동하기 좋게 만들어진 악법으로, 이런 점이 국회 절차 내에서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특검법안이 통과되고 난 후 대통령에게 수용을 건의할 가능성은 제로다. 대통령과의 이른바 수직적 관계 때문이 아니라 한때 수사와 법무행정의 총책임자로서 스스로를 부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모욕이 될 것이다. 일부 언론은 독소조항을 없앤 뒤 총선 후 추진하는 방안을 적극 제안해야 한다고 하지만, 용산이 이를 수용할 리 만무다. 민주당의 이태원 특별법과 고 채수근 해병대 상병 사망사건 국정조사, 대장동 50억 클럽 특검 등 3개 제안을 모두 수용하는 대신 김건희 특검법에서 일부 양보를 얻어내는 방안도 있을 수 있겠으나 가능성은 희박하다. 민주당과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해봐? 글쎄다. 그러려면 평소 민주당 사람들에 대한 ‘조롱’을 자제했어야 했다. ‘한동훈 신드롬’의 주인공, ‘보수의 희망’이 지지자들의 환호가 채 그치기도 전에 최대의 난관에 빠진 형국이다. 그가 이 딜레마를 어떻게 헤치고 나올 것인가. 정치인으로서의 성공적인 변신 여부는 여기에 달렸다. 국민은 이를 보면서 한동훈의 미래를 점칠 것이다. 그에 앞서 그가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이다. ‘검사 한동훈’은 이제 잊어야 한다. 한신(韓信)의 과하지욕(胯下之辱)의 고사가 생각나는 성탄 연휴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2023-12-27 06:00:00
- [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카르텔 정치' 그냥 두고 한국정치 '전진' 없다 [이재호 논설고문] 정치학개론 시간에 학생들에게 묻는다. 상향식 공천과 하향식 공천 중 어떤 게 더 민주적인가.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다. “상향식!”. 주민들이 경선으로 밑에서 후보를 뽑아 올리는 상향식이, 위에서 후보를 결정해 내리 꽂는 하향식보다 더 민주적이라고 평소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맞다. 4지선다형으로 이 문제를 내고 답을 고르라면 답은 ‘상향식’이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도 봐야 한다고 부연 설명한다. “상향식은 지역기반이 튼튼한 다선(多選)의원이나 평소 지역 대소사에 얼굴을 자주 내미는 사람들이 유리하다. 경선의 민주적 취지는 인정하나 정치 신인들에겐 그만큼 불리한 게 현실이다. 정당이 ‘젊은 피’를 수혈해 정치의 세대교체도 이루고 당의 면모도 바꾸고 싶다면 이 점까지도 고민해야 한다.” 공천, 상향식 대 하향식 과거 김영삼(YS) 김대중(DJ)은 이런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 재야(在野) 인사들 중 신망이 두텁고 능력 있는 인사들을 경선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영입했다. 특히 YS는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이재오 김문수 홍준표 안상수 등을 과감히 끌어들여 당의 외연을 넓혔을 뿐 아니라 선거에서도 이겼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도 이명박 정권은 정치적 라이벌 박근혜로 하여금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게 하고 김종인 이상돈 이준석 등을 영입해 승리했다. 그럼에도 하향식 공천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부정적 인식은 뿌리가 깊다. 권위주의 시절 이래로 공천 부조리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공천은 권력자가 정치를 지배하는 주요 수단 중의 하나였다. 후보 줄 세우기와 검은 돈 정치로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정치에 대한 불신을 낳았다. 공천비리는 지금도 ‘엘리트의 선순환’을 막는 대표적인 후진국병(病) 중의 하나다. 국민의힘 혁신위원회(위원장 인요한)가 17일 ‘예외 없는 상향식 공천’을 4번째 혁신안으로 들고 나왔다. 혁신위는 “닫힌 국민의 마음을 치료하겠다는 생각으로 상향식 공천을 통한 공정한 경쟁을 제시한다.”면서 “대통령실 출신 인사도 예외가 없다”고 못 박았다. 바른 방향이다. 공천 갈등이 선거 패배로 이어지곤 했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혁신위는 이에 앞서 중진의원들의 불출마 또는 험지 출마를 제1호 혁신안으로 내놓았다. 파장이 자못 크다. 기대와 반발이 엇갈린다. 필자 생각으로는 혁신안 제시의 순서를 조금 바꿨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상향식 공천’과 제2호 혁신안(의원 불체포특권 포기, 의원수 10% 감축), 제3호 혁신안(서울강남과 영남권에 청년 공천)이 먼저 나오고 ‘험지 출마’의 중진용퇴 제안은 그 다음에 나왔어야 했다. 그게 당위와 전략, 두 차원에서 합리적인 순서였다. “험지 출마 요청은 공무담임권 침해” 선거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혁신위가 중진들에게 직접적으로 불출마나 험지출마를 요청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자칫하면 개인의 공무담임권(피선거권) 침해가 될 수도 있다. 선거는 본인이 출마할 지역구를 결정하고, 유권자들(국민)이 이를 추인하는 것이지, 당이나 정부기관이 정해주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물론 다른 선진국에서도 없는 일이다. 다선(多選)의 중진의원들은 공개적으로 반발했다. 한 유력 의원은 지지자들을 모아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고향에서 시작한 정치 고향에서 끝내겠다며 거부 의사를 명백히 한 의원도 있다. 혁신위 내부에선 “이럴 바에야 해체하자”는 목소리도 나온다고 한다. 그 사이 이준석 전 대표는 신당 창당을 선언했고, 이 정권의 ‘총아’라 할 한동훈 법무장관은 보수의 중심인 대구를 방문했다. 주말과 휴일, 국민의 관심은 한 장관 총선 출마론에 집중됐다. 인 위원장은 “경쟁력이 있는 분들이 와서 도와야 한다”고 했다. 당 안팎에선 원희롱 의원이 이재명 대표의 지역구인 인천 계양을로 출마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백가쟁명의 총선 국면 속에서 혁신위의 ‘험지 출마론’은 자칫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형국이다. 인 위원장은 YTN 라디오(15일)에 나와 윤심(尹心)을 거론하기도 했다. “한 열흘 전에 제가 여러 사람을 통해 대통령을 뵙고 싶다고 했다. 대통령에게 직접 연락이 온 것은 아니고, 돌아서 온 말씀이 ‘만남은 오해의 소지가 너무 크다. 그냥 지금 하는 것을 소신껏 끝까지, 거침없이 하라’는 신호가 왔다”고 밝혔다. 인 위원장으로서는 중진들을 압박하기 위해 대통령을 거론했겠지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중진 용퇴론’에 대한 구조적 성찰이 필요 차제에 선거 때면 등장하는 ‘중진 용퇴론’에 대한 구조적 성찰이 필요해 보인다. 중진 용퇴론은 한국 정당체제 특유의 독과점구조와 무관치 않기 때문이다. 일찍이 장훈 교수(중앙대‧비교정치학)는 이 독과점구조를 ‘계승형 카르텔체제’로 규정하고, 이 카르텔체제로 인해 정치세력의 신규진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카르텔은 동종의 업자끼리 담합해 독과점의 혜택을 함께 누리는 걸 말한다. 장 교수의 설명이다. “(한국 정치는) 권위주의 시대의 집권당인 민정당과 신민당에 의해 1987년 이래 숱한 분열과 통합을 거듭했지만, 줄곧 이들 두 정당의 분파, 후신 또는 통합세력에 의해 지배되었고,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 이행에 참여했던 민정당과 신민당 외에는 어느 정치세력의 신규 진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권위주의 세력과 제도권 야당은 선택과 온존을 통해 권위주의 시대의 계승정당들이 민주화 이후에도 정당정치를 독과점 지배할 수 있는 제도적 질서를 구축했다.” (장훈 <20년의 실험–한국정치개혁의 이론과 역사> 2010년) 장 교수는 카르텔 정당체제를 한국 정치의 폐쇄성과 후진성의 원인으로 본 것인데, 오늘날 우리 정치의 퇴행과 비효율이 모두 거기에 맞닿아 있다. 한동훈 법무장관은 최근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와의 일련의 설전 과정에서 “한국 정치를 수십년간 후지게 만들어 왔다”고 직격했다. ‘후지다’는 말은 품질과 성능이 다른 것에 비해 뒤떨어진다는 뜻이다. 그런 ‘후진 정치’ 역시 카르텔 정당정치의 산물이다. 일각에선 이미 ‘국민의 짐’이 되고 있음에도 한 세대가 넘도록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586 현상’을 가리키기도 한다. 진입장벽 높이는 ‘카르텔 정당체제’ 필자는 평소 이 카르텔 정당체제가 깨지기를 염원해왔다. ‘후진 정치’, 여야의 적대적 상호공생관계에 의존하는 카르텔 정치의 종언 없이는 우리 정치에 미래는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단적인 예다. 21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이 밀어붙이긴 했으나 이 제도로 위성정당이 속출하고 의원 꿔주기가 자행됐다. 그럼에도 여야는 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조차 않고 있다. 이대로 가면 5개월 남은 내년 총선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질 판이다. 카르텔 정당체제를 지탱하는 주요 동력 중의 하나가 ‘지역감정’임은 물론이다. 중진 험지 출마 요구는 그렇게 해서라도 지역감정을 해소 또는 완화시켜보자는 것일 게다. 특정지역에서 특정 당 인사들만이 당선되는 선거판을 바꿔보자는 거다. 지역감정에 관한 한 인 위원장은 할 말이 많다.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오래전 그의 친형(미국사람)이 장가를 가게 됐다. 신부는 부산여자였는데 신부 아버님이 신부에게 이러시더란다. 왜 하필 전라도 남자냐고. 그에겐 미국사람보다도 전라도 출신이라는 게 더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인 위원장은 한국 정치의 악성 카르텔 정당체제에 어떤 빚도 없다. 그래서 나는 그의 고군분투를 이해한다. 물론 눈앞의 현실은 녹록지가 않다. 국민의힘 중진들의 용퇴 움직임은 전혀 없다. 오히려 민주당 측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움직임이 감지된다. “이재명 대표도 험지인 안동에서 출마하라”고 압박하는 목소리가 나온 것이다. “이재명 대표도 험지(안동) 출마해야” 민주당의 이원욱 의원은 “이 대표 역시 우리 정치에서 대표적인 기득권자 중의 한 명”이라면서 “이 대표가 (안동을) 선택해준다면 (저도) 가라는 데 가겠다”고 했다. 김두관 의원도 “지도부에서 당의 총선 승리를 위해 내가 어떤 역할이라도 하겠다는 정도의 메시지가 나와야 인요한, 이준석 등과의 혁신경쟁에서 밀리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세계일보 11월 17일) 지금까지 민주당에서 공식적으로 ‘용퇴’ 의사를 밝힌 사람은 박병석(전 국회의장 6선), 우상호(4선), 오영환(초선) 등 3명이다. 국민의힘은 대선 때 윤석열 당선인의 수행실장을 했던 이용 의원(초선 비례대표)만이 용퇴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다. 이 모습까지도 카르텔 정당체제의 상호의존의 반영일까. 분명한 것은 이 작은 나비의 날갯짓조차도 중진 험지 출마를 들이댄 인요한의 용기가 없었다면 나오기 어려웠을 거라는 거다. 대표적 엘리트 순환론자인 빌프레도 파레토(Vilfredo Pareto 1848~1923)는 엘리트는 순환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물이 고이면 썩듯이 한 사회, 한 국가의 엘리트도 부단히 교체, 순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파레토의 말이다. “엘리트 순환의 목적은 구(舊)엘리트의 몰락으로 인한 사회 전체의 파괴를 방지하는 데 있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2023-11-22 05:00:00
- [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허점투성이 9.19 남북 군사합의 …그냥 내버려둬라 [이재호 논설고문, 극동대 교수] 9‧19 남북 군사합의를 유지해야 하나 아니면 일시 효력 정지라도 시켜야 하나. 대북 문제가 또 한 번 시험대를 통과하고 있다. 정확한 판단과 대비, 현실적 대응이 긴요해 보인다. 9‧19 합의는 2018년 9월 평양을 방문한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하면서 채택한 평양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 분야 부속합의서를 지칭한다. 남북 간 적대행위를 일절 중지하고, 비무장지대와 서해 북방한계선 일대를 평화지대화하며, 남북 교류·접촉 활성화와 군사적 신뢰 구축을 위해 대책을 강구한다는 것이 골자다. 국민의힘은 9‧19 합의로 대북 정찰과 감시가 취약해져서 파기든 효력 정지든 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합의를 유지하는 게 안보 이익에 유리하다고 본다. 지난 12일 합동참모본부(합참) 국정감사에서도 양측은 날카롭게 대립했다. “9‧19 합의는 위장 평화 공세였다” 김승겸 합참 의장은 “9‧19 합의로 대북 감시 범위가 축소됐느냐”는 질의에 “9‧19 합의로 비행금지구역이 설정돼있다”며 “이로 인해 북한 감시 범위가 시간적·공간적으로 제약을 받고 있다”고 했다. 당시 북이 군사합의에 응한 배경은 "전형적인 위장 평화 공세였다"면서 “하마스 기습 침공을 보면 우크라이나 전쟁과 차이가 있다. 북한이 앞으로 전쟁을 일으키면 이와 유사할 것이란 점에서 시사점이 많다”고 답했다. 그러나 민주당 의원들은 우리 군이 최전방 부대의 무인기 말고도 고고도무인정찰기, 글로벌 호크와 금강‧백두 같은 정찰기를 갖고 있어서 비행금지구역 밖에서 충분히 북한을 중첩 감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성호 민주당 의원은 “9‧19 합의로 공중감시정찰에 약간 제약되는 측면이 있겠지만 합의가 유지됨으로써 얻는 이익이 더 크다”고 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지난달 19일 9‧19 군사합의 기념식에서 ‘합의’를 적극 옹호하고 나섰다. “9‧19는 남북 간에 사상 최초로 체결된 구체적인 군비 통제 합의로, 남북 간 군사 충돌을 막는 최후의 안전핀”이라는 것. “이 합의 덕분에 지난 정부 5년간 군사적 충돌이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희생된 사람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언제 그런 날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파탄 난 남북 관계를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고 했다. 文, ‘김여정 하명법’부터 사과해야 그러나 문 전 대통령은 이런 주장에 앞서 재임 중 ‘굴종 일변도’라고 비판받았던 자신의 대북 정책과 행태에 대해 유감 표명이라도 한마디하는 게 순서였다. 예컨대 끝내 위헌(違憲) 판정을 받은 대북 전단금지법(일명 김여정 하명법) 같은 어처구니없는 법을 밀어붙이고, 국민 혈세 170억원으로 지어준 판문점 남북연락사무소가 북의 무단 폭파로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된 데 대해 사과했어야 했다. 어디 그뿐인가. 탈북 선원 강제 북송과 해수부 공무원 월북몰이 논란은 또 어떻고. 그는 침묵했고, 자신의 대북 정책을 두둔하기에 바빴다. 이날 기념식이 퇴임 후 그가 참석한 첫 공식 행사였다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북 관계라는 게 회담하고 연설하고 악수하는 게 다가 아니다. 한때는 그런 외양(外樣) 자체가 소중했고 그게 ‘진전’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단계는 이미 지났다. 북이 핵 보유국이 되고 그로 인해 남북 관계의 본질이 바뀌고, 아울러 우리 내부에 그나마 존재했던 대북 컨센서스(합의)가 깨지면서 그렇게 됐다. 그 책임이 진보‧좌파진영의 오판, 독선, 무능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문 전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깊은 성찰이 필요해 보인다. 9‧19 합의는 우리 군사주권을 해체한 굴욕적 합의라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대표적인 예가 NLL(북방한계선)이 85㎞ 대 50㎞로 우리에게 불리하게 설정돼 서북 5개 도서와 덕적도 고립, 수도권 안전이 심각하게 우려된다는 것이다. 비행금지구역(20∽40㎞) 설정으로 북한 전방부대 동향, 장사정포 감시와 근접 정밀타격이 불가능해져 자칫하면 전시(戰時) 연합작전능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합의를 해준 장본인이 이제 와서 ‘나 때는···’ 운운하며 ‘남북 관계 파탄’을 걱정하는 걸 어떻게 봐야 하나. 군사훈련 규제, 신중했어야 북의 로켓·게릴라전 능력은 하마스보다 더 위협적이라고 한다. 수도권을 겨냥한 북의 장사정포는 총 240문이고 여기에 170㎜ 자주포 140문(사거리 54㎞), 240㎜ 방사포 200문(사거리 65∽70㎞) 등을 보유하고 있다. 이 정도면 1시간에 1만6000발을 쏟아부울 수 있다. 비정규 특수작전군만 20만명에 달한다. 이들은 하마스처럼 레이더 회피가 가능한 글라이더를 비롯해 땅굴, 잠수함, 공기부양정, 헬기 등을 이용해 전후방 침투가 가능하다. 9‧19 합의는 군비 통제 관점에서도 허점투성이다. 군비 통제란 적대 당사자 간 투명성 제고를 통해 오판 가능성을 줄이고 긴장을 완화하는 게 요체다. 투명성은 물론 상호주의와 등가성 원칙이 핵심이다. 그럼에도 정찰활동 금지(1조 3항)로 인해 정찰력이 우수한 우리 측에만 불리하다는 지적이 많다. 이윤식 여의도연구원 외교안보센터 실장은 “군사훈련 규제는 전투력 손실 등을 고려해서 신중하게 추진해야 함에도 2018년 11월 1일부터 각종 군사훈련을 중지시켰다”면서 “우리 측 활동이 제약받는 것에 비례해 북의 활동도 같은 규모로 규제해야 하는데 우리 측만 일방적으로 중단시켰다는 비판이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이와 다른 견해도 있다. 9‧19 합의는 남북 양쪽에 적용돼 우리만 양보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한반도 서부 지역은 군사분계선 이북 북한 상공 20㎞까지 비행금지구역이 설정돼 북한 전투기의 접근을 사전에 경보‧조처할 수 있다는 것. 김병주 민주당 의원은 “9‧19 합의 이전에도 한‧미 정찰기는 북한 대공미사일 사정거리 밖인 군사분계선 20㎞ 이남에서 비행했기 때문에 9‧19 합의로 북한의 도발 징후 감시가 허술해졌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이 합의가 남북에 공평하게 적용돼 한국군의 전선 감시가 어려워진 만큼 북한군의 전시활동도 제약받고 있는데 이 명백한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말하는 건 공정하지 못하다”는 주장도 있다.(서재정, 한겨레 10월 14일) 9‧19 판단과 대응 기준은 신뢰 어느 설명에 더 적실성(適實性)이 있을까. 군사적으로 끊임없이 따져봐야 할 문제지만 우리에겐 판단에 필요한 강력한 준거의 틀이 이미 존재한다. 그건 신뢰다. 북한을 믿을 수 있느냐다. 믿을 수 있다면 비행금지구역 설정이나 감시, 정찰 등은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북은 지난 75년 동안 신뢰할 수 있는 상대로서 모습을 한 번도 보여주지 못했다. 남침 도발을 위해 몰래 땅굴까지 판 북한이 아닌가. 그렇다면 9‧19 합의가 언제든 우리의 정찰, 감시, 방어태세를 약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 대응해야 한다. 북의 9.19 합의 위반은 임계점을 넘어섰다. 공식 위반 횟수만 17차례에 달한다.(2022년 12월 31일 기준) 대표적인 예만 보자. 2019년 11월 23일에는 NLL 인근 창린도에서 김정은 지휘로 완충수역에 포사격을 했고, 2020년 5월에는 중부전선 우리 군 3사단 GP에 고사총을 쏘았다. 2022년 12월엔 소형무인기 5대를 MDL 이남으로 침투시켰다. 핵능력 고도화와 시도 때도 없이 쏘아댄 미사일은 말할 것도 없다. 2022년 9월에는 핵 무력에 의한 통일을 공언하고 핵 선제 사용을 법제화했다. 모두가 명백한 ‘합의’ 위반이고 도발이다. 이런 북 앞에서 비행금지구역 유불리를 얘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칫하면 또 ‘전쟁세력’으로 몰린다 신원식 신임 국방부 장관은 “한국은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보다도 훨씬 강도 높은 (북의) 위협에 놓여 있다”면서 “9‧19 합의로 북 도발 징후에 대한 감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어서 최대한 신속히 ‘합의’에 대한 효력 정지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바른 대응이라고 본다. 남북관계발전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남북 관계에 중대한 변화가 있을 때 남북 합의서 효력을 일부 정지할 수 있도록 돼 있다.(제23조 2항) 다만, 그렇다고 곧바로 효력 정지나 합의 파기로 가는 것은 현책이 아니다. 이를 도발의 구실로 삼으려는 북의 함정에 빠질 우려도 있지만 그보다는 윤석열 정부를 예의 ‘전쟁세력’으로 몰아갈 좌파의 거센 공세가 불을 보듯 뻔해서다. 자칫하면 또 반평화세력으로 몰려 덤터기를 쓸 수도 있다. 언제부터인가 평화 생색은 좌파가 내고 책임과 뒤처리는 보수우파가 맡는 게 대북 정책의 생태계가 되어버렸다. 개인적으로는 ‘효력 정지’란 말조차도 가능하면 안 썼으면 한다.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국민의힘 정부는 다시 ‘전쟁세력’이 되고 민주당은 ‘평화세력’이 된다. “평화 싫어, 그럼 전쟁하자는 거야?”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가 아닌가. 9.19 합의는 이미 사문화됐다. 그냥 내버려둬도 된다. 남북 관계의 창고를 뒤져보면 지난 70여 년간 북이 지키지 않아 휴지가 된 약속, 합의 문서들로 차고도 넘친다. 우리는 그런 문서들을 밟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2023-10-18 06:00:00
- [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캠프 데이비드 그 이후.. 한‧미‧일 합의 내실 다질때 인데 [이재호 논설고문, 극동대 교수] 캠프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의에 대해 문정인 연세대 명예교수는 “미국이 얻은 게 가장 많고, 일본도 잃은 것 없이 많은 걸 얻었는데 한국만 준 건 많고 얻은 건 별로 없다”고 했다.(한겨레 8월 26일) 노무현·문재인 정권에서 대표적 이데올로그로 활약해온 그는 한 발 나아가 “(미국 지식인들조차도) 미국 자체가 세계 안보에 가장 심각한 위험이라고 하는데 그런 미국에 모든 걸 올인하는 우리 현실이 더 큰 염려”라고 했다. 과연 그런가.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일 외교원 창설 60주년 기념식에서 “아직도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 반국가세력은 반일감정을 선동하고 캠프데이비드 한‧미‧일 협력체계가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험에 빠뜨릴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고 했다. “예측 가능성을 못 주는 외교로는 신뢰도 국익도 얻지 못한다”며 “세계적으로 명망 있는 외교관과 국제정치 석학들과 소통함으로써 우리 외교에 통찰을 주는 담론을 형성하고 이끌어 달라”고 했다. 준 것은 많고 얻은 것은 없다? 이에 앞서 전직 외교관 235명(‘나라 사랑 전직 외교관 모임’)은 캠프데이비드 합의를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문재인 정부 5년간 한·미 동맹이 형해화(形骸化)되고 한·일 관계는 최악이었던 상황을 회상하면 캠프데이비드 회의는 그 자체가 극적인 반전”이라고 했다. 이들은 “한‧미‧일 3국 정상이 세계적 핵심 이슈에 대해 공통의 가치관에 따라 한목소리로 상황을 주도하겠다고 결의하고, 대한민국 헌법의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에 따라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공식 지지했다”고 평가했다. 이 모임 공동대표인 김석우 전 통일부 차관·이재춘 전 러시아 대사·조원일 전 베트남 대사는 북방정책을 일선에서 수행했던 정통 외교관 출신들이다. 외교란 상대방이 있게 마련이어서 섣부른 낙관도 비관도 금물이지만 필자는 캠프데이비드 합의에 대해 긍정적이다. 국방연구원은 ⓵한‧미‧일 3국 협력의 제도화 ⓶인도·태평양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안보협력체 구성 ⓷위협에 대한 신속한 협의 기제 구축 등 3가지를 가장 큰 성과로 들었다.(이수훈, '캠프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의 성과와 과제', <동북아안보정세분석>, KIDA) 공감한다. 건국 이래 우리가 총체적 차원에서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우방과 이렇게 넓고 두텁게 연대를 형성한 적이 있었나 싶다. 여의도연구원의 평가도 이와 다르지 않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무엇이든지’ 3국 간 협력이 가능한 핫라인을 구축했고, 3자 회담 정례화를 통한 3국 간 협력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이윤식, '한미일 3국 정상회담 : 의미 성과 과제', 여의도연구원) 집권 여당 싱크탱크가 내놓은 평가라는 점을 감안해도 무리한 인식은 아니라고 본다. 언제까지 소국주의(小國主義) 틀 안에 갇혀 있을 건가. 자기비하적 외교에서 벗어날 때도 됐다. 편협한 小國主義에서 벗어나야 물론 우려도 있다. 한‧미‧일 간 결속이 강해지면 대척점에 있는 중국‧러시아‧북한 간 결속도 강해져 이에 대처할 부담도 커진다는 것이다. 일종의 ‘안보 딜레마(security dilemma)'다. 한반도와 주변 역학관계에 그런 속성이 있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도 “한국 외교가 총체적 위기에 빠질 것”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대화와 협력은 사라지고 전쟁의 위협이 횡행할 것”이라는 주장 등은 지나치다. “중국 견제가 핵심인 바이든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윤석열 정부가 적극 수용함으로써 한국 외교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훼손되고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환경의 군사적·이념적 진영화(陣營化)는 심화할 것”이라는 주장도 그렇다. 경계(警戒) 수준을 넘어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 될까 봐 두렵다. 그러나 국제관계는 언제나 경쟁과 협력, 안보와 대화가 함께 간다. 그걸 가능케 하는 게 외교다. 김정은의 訪러, 절묘한 타이밍 김정은(39)의 러시아 방문과 북·러 정상회담이 과장된 우려와 불안감을 부채질한 측면이 있다. 푸틴에게서 식량과 에너지 또는 핵잠수함 건조에 필요한 첨단 기술을 받고, 그 대가로 재래식 무기를 제공하는 거래가 이뤄질 것이라는 관측과 보도가 한‧미‧일 대 북‧중‧러 간 대결 구도의 심화를 뒷받침해주는 형국이 됐다. 김정은이 4년여 만에 러시아를 방문한 것이 공교롭게도 캠프데이비드 회의 직후에 이뤄짐으로써 이런 상황 인식을 낳은 셈이다. 그러나 빅터 차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아시아담당 부소장은 지난 7일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일각에선 동아시아에서 한‧미‧일 간 밀착이 북‧러 간 밀착을 불렀다고 비판하지만 북‧러 간 밀착은 서로의 필요에 의한 ‘정략결혼’이자 예정된 수순”이라며 “캠프데이비드 회동이 없었더라도 이런 일은 일어났을 것”이라고 했다. 어떻든 김정은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 이어 다시 한번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됐다. 이번에는 한‧미‧일과 북‧중‧러가 격돌하는 신냉전의 한복판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게 됐다. 의도적이었다면 가히 ‘타이밍의 대가’다. 나는 김정은의 러시아 방문을 캠프데이비드 체제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거나 보려는 어떤 인식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꾸로다. 그런 북이기에 이제라도 캠프데이비드 체제를 구축한 것은 현명한 대응이었다고 믿는다. 김정은과 푸틴이 유엔 결의 위반임에도 불구하고 관측대로 모종의 거래를 강행한다면 전후 70년 이상 유지되어온 현상유지(status quo) 체제를 흔드는 중대한 도발일 수 있다. 그 충격파를 가장 지근거리에서 감당해야 할 지역이 동북아고, 한반도다. 한‧미‧일 공동 대응, 곧 캠프데이비드 체제 차원의 대응이 절대적이다. 달리 무슨 해결책이 있는지 알기 어렵다. 대한민국이 자신들의 속국이었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나라, 방문하는 우리 대통령이 ‘혼밥’이나 먹었던 과거로 돌아갈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유사시 한국과 대만 중 어디를? 빅터 차 부소장은 “북이 러시아 측에서 핵잠수함 기술을 넘겨받았을 때 미국은 유사시에 대만과 한반도 중 어디부터 챙겨야 할지 상당한 딜레마에 빠지게 될 것”이라며 “지금 워싱턴에서는 대만과 한반도 비상사태가 동시에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고민과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우리로서는 캠프데이비드 체제라도 갖춰 놓았기에 그나마 다행 아닌가. 이 체제가 효과적으로 작동될 수 있도록 한‧미‧일 3국 간 합의를 내실화하고, 특히 3국 연대에서 가장 취약한 고리라는 한·일 관계를 유지·발전시키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우리는 노무현 정부 때 설익은 ‘동북아 균형자’를 자처했다가 중국의 비웃음을 사고 끝내 꼬리를 내려야 했던 아픈 과거가 있다. 진영을 떠나 그때 확인한 게 있다. 균형자는 바로 ‘미국’이라는 냉엄한 현실 말이다. 가까운 장래에도 동북아 균형자는 미국이다. 그 미국을 중심으로 한‧미‧일 3국이 손을 잡았다면 어떻게든 적극 활용해야 한다. 그 앞에서 친미·반미 논쟁은 사치다. 설령 ‘안보 딜레마’와 마주치게 되더라도 극복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협력과 대화 등 비군사적 수단을 총동원해 안보 환경을 개선해나간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의 ‘협력안보(cooperative security)'를 지향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바이든의 베트남 외교는 가치외교인가? 외교가 본디 그런 것 아닌가. 우리보다 크고 강한 나라와 상대할 때는 이러저런 어려움이 있게 마련이다. 그쯤은 극복해야 하고, 극복할 거라고 믿고 싶다. 우리 외교는 엄혹했던 양극적 냉전 시기를 살아냈고, 탈냉전의 혼돈 속에서 북방외교를 통해 이를 극복한 경험과 지혜, 그리고 인적·물적 자원이 있다. 그런 자산과 자신감이 있기에 ‘자유, 평화, 번영에 기여하는 글로벌 중추국가’를 대선의 핵심 공약으로 제시한 것 아닌가. 우리 외교를 정의(定義)도 불분명한 ‘가치외교’라는 허구적 프레임에 가두고, 정부와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해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는 자해(自害) 행위에서 그만 벗어났으면 한다. 자유민주주의 나라의 어떤 대통령도 외교관도 ‘국익외교(國益外交)'를 하지 ‘가치외교(價値外交)'를 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캠프데이비드 체제의 적실성(適實性)을 놓고 논란 중일 때 바이든 대통령은 베트남을 전격 방문해(10일) 양국 관계를 최고 수준인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했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이 철수한 지 50년 만에 중국, 러시아, 인도, 한국과 같은 반열에 올린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양국은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해 눈을 돌릴 것”이라고 했다. 이를 놓고 “미국이 북방에서 대중국 봉쇄망을 다진 데 이어 남방에서 포위망 구축에 나선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바이든 대통령의 이 외교는 ‘가치외교’인가 아닌가.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2023-09-14 06:00:00
- [건국의 재조명] '한미동맹' 그의 선택이 옳았다 이재호 논설고문, 극동대 교수 [편집자주] 15일로 광복 78주년을 맞았다. 해마다 이맘때면 우리는 해방정국 3년(1945~1948년)과 뒤이은 ‘건국’에 관한 성찰의 시간을 되풀이해서 갖게 된다. 일제에서 해방되긴 했으나 상이한 이념과 체제로 남북은 갈라졌고 그 상처는 여전히 우리를 옥죄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건국절(建國節) 논란 하나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8월 15일이 광복절이면 건국절은? 기미 독립선언을 한 1919년 3월 1일인가, 아니면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인가. 때마침 초대 대통령 우남(雩南)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 바람이 거세다. 건국 대통령인 그를 보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되짚어 봄으로써 왜곡을 걷어내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자는 취지에서다. 그동안 우남에 대한 평가가 지나치게 부정 일변도였다는 자성(自省)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아주경제는 광복 78주년을 맞이해 우남 이승만 시대와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의미를 재조명하는 기획칼럼을 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이승만의 공과(功過) 우리 현대사에서 우남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지도자도 없다. 진보 좌파 진영의 대표적 저술가인 김삼웅(80‧전 민주당보 주간, 독립기념관장)이 쓴 <이승만 평전>(2020 두레)을 보자. 우남은 천하에 몹쓸 지도자다. 책의 부제부터가 「권력의 화신, 두 얼굴의 기회주의자」. 4백 쪽이 넘는 이 책에서 우남을 긍정 평가한 대목은 서문에 쓴 다음 글이 전부다. “젊은 시절 개혁적 선각자였고, 독립협회에 소속돼 개화운동에 참여, 만민공동회 연사와 제국신문 주필 역임, 6년여 투옥, 하와이 한인학원 운영과 태평양잡지 창간, 구미 위원부의 외교활동, 제네바 국제연맹회의 참석과 한국독립 호소 등은 업적에 속한다.” 반면, “우남의 과오와 반민족‧비민주적 행적은 차고 넘친다”고 했다. “일신의 영달을 앞세운 겉치레 독립운동, 분열을 부른 야망, 순진한 외교주의, 실질 없는 허세만 일삼다가 전쟁을 부른 무능 대통령, 상상을 뛰어넘는 정치의 모든 악행을 보여준 검은 머리 미국인”이라는 것이다. 우남이 그렇게도 사악하고 무능한 지도자였던가 싶다. 김삼웅은 “정직한 연구가들은 이승만의 공과(功過)를, 공 3, 과 7 정도로 평가한다.”고 했다. 덩샤오핑(鄧小平)이 마오쩌뚱(毛澤東)을 ‘공칠과삼’(공은 7, 과는 3)으로 평가했다는 일화를 비틀어 인용한 것인데 그렇다면 ‘공 3’에 대해서라도 충분히 언급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흔적은 없다. 현대사 연구자인 서중석(75‧성균관대 명예교수)이 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3–조봉암과 이승만, 평화통일 대 극우 반공독재>(2016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작금의 이승만 재평가 바람은 이런 극단적인 ‘우남 평가’에 대한 반발 또는 자성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지난 7월 26일 원로 우남 연구자인 유영익 교수(87‧전 국사편찬위원장)가 별세했다. 유 교수는 이화장(梨花莊)문서 연구로 우남 연구의 지층을 한 단계 높인 학자다. 이화장은 우남이 1948년 대통령이 돼 경무대(청와대)로 옮기기 전에 살았던 집이다. 유 교수는 우남의 양아들인 이인수(李仁秀)로부터 10만여 장의 방대한 문서를 넘겨받았다. 연세대 재직 중에는 현대한국학연구소도 설립했는데 이 연구소로부터 분리돼 나온 게 지금의 ‘이승만연구원’이다. 우남에 대한 유 교수의 평가는 사뭇 다르다. 그가 쓴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2019년 청미디어)에 따르면 “우남은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착실한 건국의 비전을 갖춘 인물”이었다. “우남은 1890년대 후반 독립협회의 급진적 개혁 지도자로서 대한제국의 정치제도를 혁신하려고 했을 때 품었던 꿈을 소중히 간직했다가 해방 후 건국과정에서 실현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비전은 “신생 한국을 아시아의 모범적 예수교국가, 동양의 모범적 자유 민주주의 국가, 반공의 보루, 평등한 사회, 교육수준이 높고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것”이었다. 박민식 보훈장관은 “우남이 자유대한민국의 초석을 마련했다는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공칠과삼’(功七過三)이 아니라 ‘공팔과이’(功八過二)로도 부족하다. 그에게 과오가 있다고 해도 동상 하나 못 세울 정도는 아닐 거”라고 했다. 공감한다. 우남의 줄 ···자유민주주의 우남이 장기집권을 위해 변칙적으로 헌법을 고치고(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선거를 획책하는 등 비민주적 행태를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큰 그림’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남은 대한민국의 기초를 놓은 건국 대통령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인류의 보편적 이념과 가치로 말이다. 당시로선 기적 같은 일이다. 전후(戰後), 세계 각지에서 30여 신생 독립국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처음부터 나라의 근본을 그렇게 설정한 국가는 드물었다. 대한민국이 우남 이후 한 세대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거의 유일한 신생국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우남의 혜안과 노선, 신념 덕이다. 필자는 주니어 기자 시절 남북대화를 일선에서 취재한 경험이 있다. 그때 북측 인사들은 사석에서 우리 측 관계자들에게 푸념 또는 시샘 비슷하게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솔직히 같은 민족인데 남쪽이 우리보다 뭐 특별히 잘나서 이렇게 잘살게 됐소? 그저 줄을 잘 선 것뿐이지!” 어떤 ‘줄’일까. 공산주의 전체주의가 아닌 자유민주주의의 줄, 곧 우남의 줄이다. 남정욱 숭실대 겸임교수는 “현행 체제를 87년 체제로, 상공업이 전면에서 경제개발을 이끌던 체제를 5·16 체제”로 보고 “이 두 체제는 우남의 48년 체제가 아니었으면 나타날 수 없었다.”고 했다.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은 우남의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는 “한국과 함께 출발한 다른 국가들과의 비교방식에 따른 평가여야 한다.”면서 “우남은 신생 독립국들의 민주주의 모델을 만들어낸 위대한 혁명가”라고 했다. (자유경제원, 광복 70년 토론회 2015년 7월) 신생국가 대한민국의 선택 우남은 신생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해 한미상호방위조약(1953년 체결)에 기초한 한미동맹을 택했다. 냉전의 심화 속에 한반도는 이미 분단 됐고, 북은 월등한 군사력으로 남을 압박하고, 일본은 미국의 전략적 고려에 힘입어 재부상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그는 미국에 기댔고 미국을 이용하고자 했다. 그게 현실적으로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었다. 우남의 판단이 옳았음은 그 후의 우리 현대사가 웅변한다. 1953년,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미국은 전쟁을 빨리 끝내려고 분단된 채로라도 휴전협정에 응하라고 성화를 부리던 그 무렵, 우리의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에 불과했다. 변방의 최빈국 중의 하나였던 한국이 세계 최강 미국과 1대1로 상호방위조약을 맺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국은 어떻게든 한국에 발목을 잡히는 일은 피하려고 했다. 미국으로선 굳이 한국이 아니더라도 일본을 통해 동북아에서 공산주의를 견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미국을 움직이기 위해 우남은 이해 6월 18일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기상천외의 한 수를 놓는다. 미국은 물론 세계가 놀랐다. 우남은 국제사회에서 ‘트러블메이커’, 또는 ‘한다면 하는 지도자’로 각인됐다. 이승만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을 지낸 김일주 전 고려대 겸임교수(정치학)는 “휴전협정이 체결되어버리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은 유야무야 될 수도 있음을 우남은 우려했다.”고 말했다. 이런 우남이 미국에게는 늘 눈엣가시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뒷날 회고록에서 우남을 “공산주의자들만큼 미국을 힘들게 했던 자”라고 했다. 미국은 한때 우남을 제거하기 위해 ‘에버레디 플랜’(Plan Everready)이란 비밀계획까지 세웠다. 국사편찬위의 박진희 편사연구관의 분석이다. “우남은 한미관계를 통해 안보를 보장받고 더 많은 원조를 얻어내려고 했다.…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 한국의 위상이 전적으로 미국에 달렸다고 생각했다.…일본에 대한 의혹과 경계도 미국을 지렛대 삼아 방어하려고 했다.” 박 연구관은 “원로 역사학자 방선주(90‧한국현대사 연구가)는 우남을 객관적 정세와 조건을 고려해 일본에 대한 강온 양면 전술을 구사한 현실주의적 정치가로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적 인물로 평가한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현실주의자를 위한 변명> 동녘 2013년) 우남은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이미 미소(美蘇) 양극에 의한 냉전(冷戰)의 시대가 왔음을 알았다. 그가 해방 직후인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같은 것을 만들자”(정읍 발언)고 했을 때 북은 소련과 조선로동당 주도하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설에 마지막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는 전 북한주재 소련대사였던 스티코프의 일기 등 옛 소련 측 문서에 의해 이미 드러난 사실이다. 그런데도 우남은 ‘분단의 원흉’이 돼 있다. 이런 인식은 당시 김구(1876∽1949년) 김규식(1881∽1950) 등 남북협상파들이 추구했던 ‘통일된 조국의 꿈’과 우남의 ‘단독정부’ 주장이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더 심화된 측면이 있다. 젊은 시절, 김구의 자서전인 <백범일지>를 읽고서 감동하지 않은 사람이 없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백범은 존경받아야 할 지도자이고, 남북협상(대화)도 해야 했을지 모르지만, 적화(赤化)라는 실존적 위협 앞에서 우리의 선택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우남은 이를 알았고 피하지 않았다. 건국의 기초 우남이 깔아놓은 건국의 기초 위에서, 한국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미국의 유력 시사주간지 ‘US 뉴스 & 월드 리포트’가 지난달 31일 발표한 강대국 순위에서 프랑스(7위)와 일본(8위)을 제치고 조사대상 25개국 중 6위에 오를 정도다. 윤 대통령은 18일 한 미 일 3국 정상회의(캠프데이비드)에 참석한다. 달라진 한국의 위상을 실감케 한다. 과거 우남은 일본의 부활을 우려했고, 미국의 힘을 빌려 이를 견제하려고 했다. ‘외교에는 귀신’이란 소리를 들었던 우남이 지금 살아있다면 어떤 조언을 할까. 우남(1875∽1965)은 왕족 출신으로 세종대왕의 맏형인 양녕대군의 16세손이다.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다. 젊어서 독립운동에 나섰고, 배재학당과 미국의 명문 하버드와 프린스턴 대학(정치학 박사)을 나온 엘리트로 대한민국 제1, 2, 3대 대통령을 지냈다. 1960년 3·15 부정선거로 하야해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한다. 평소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했으나 그에 못지않게 자유민주주의와 개혁에 대한 신념도 강했다. 그의 재임 중에는 6‧25 전쟁 통에도 지방 면장선거가 치러졌다. 농지개혁과 의무교육도 실시됐다. 일찍이 에너지의 중요성을 알아 당시 문교부(교육부)에 원자력과를 설치하기도 했다. 김일주 교수는 “우남은 자신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바로 그 체제(자유민주주의)에 의해 하야했고, 이를 통해 역설적으로 국민에게 민주주의 위대성을 학습시켰다.”면서 “우남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4‧19를 폄하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4.19세대 출신 원로, 이승만 전 대통령 묘역서 참배 (서울=연합뉴스) 신현우 기자 = 이영일 전 의원(오른쪽) 등 각계 원로들이 3월 26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이승만 전 대통령 묘역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이들은 보도자료를 통해 이 전 대통령 탄생 148주년을 맞아 4.19세대 출신들이 이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다고 밝혔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2023-08-15 18:00:00
- [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北 동포 인권 보장하는 자유민주적 통일 이재호 논설고문, 극동대 교수 김정은 정권은 2022년 한 해에만 71발의 미사일을 쏘았다. 그 돈 2억 달러면 2600만 주민이 46일간 굶지 않고 지낼 수 있다고 한다(BBC 뉴스코리아). 김정은은 북 주민으로부터 그만 한 양의 식량을 수탈(收奪)한 셈이다. 지난 5월 발사했으나 실패한 정찰위성(장거리탄도미사일)도 그 비용이 10개월치 식량과 맞먹는다고 한다. 피 같은 식량을 허공에 뿌린 셈이다. 국방연구원은 북의 ICBM 발사 비용을 1기당 2000만∽3000만 달러로 추산한다. 김이 미사일을 1기만 덜 쏘아도 한 해 수입식량의 3분의1을 충당할 수 있다는 계산도 있다. 보유한 핵을 팔아서라도 인민을 굶주리지 않게 해야 할 판에 제 국민 수탈에만 여념이 없는 꼴이니 딱하다. 북은 오는 27일 자신들이 ‘전승절’이라고 부르는 6‧25전쟁 정전협정 기념일을 앞두고 정찰위성 재발사를 포함한 대규모 무력시위를 준비 중이다. 주민들은 또 그만큼 굶주려야 한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유엔의 ‘2023 국제인도주의 지원보고서’에 따르면 북은 심각한 식량난으로 인도적 지원이 필요한 주민이 전체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1040만명에 달한다. 1990년대 중‧후반 수많은 주민이 굶어 죽은 ‘고난의 행군’을 떠올리게 한다. 수탈당하지 않으려면 수탈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북 주민들이 알도록 하는 게 우선 중요하다. 핵 무력과 미사일 시위, 이 모든 게 내 삶에 대한 수탈 위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걸 인지하도록 해야 한다. 이를 가장 쉽게 보여줄 수단은 뭘까. 단연 대북전단(삐라)이다. 북 정권의 불의와 비리, 거짓과 기만이 담긴 전단을 만들어 북녘 주민들에게 직접 보내는 거다. 북 정권이 ‘전단’이라면 길길이 뛰는 걸 봐도 그 효과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권은 대북전단살포금지법(일명 김여정 하명법)이라는 법까지 만들어 이를 금지시켰다. ‘수탈정권’과 대북 굴종의 시대 문 정권 5년 동안 숱한 대북 저자세 행태가 있었지만 이보다 더한 굴종은 없었다. 김정은을 비판하는 전단을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날리는 것만으로도 3년 이하의 징역과 3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니, 어처구니없었다. 국민의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명백한 침해였다. 입법 과정도 참담했다. 김정은의 여동생으로 대남정책을 총괄하는 김여정이 2020년 6월 4일 “전단 살포 방지법이라도 만들라”고 하자, 하루 만에 법안이 발의됐다. 대표발의자는 당시 송영길 민주당 의원(외교통일위원장). 법안은 민주당 단독으로 강행 처리됐다. 북은 법안 통과를 압박하기 위해 우리 측이 235억여 원을 들여 개성공단에 지어준 남북연락사무소를 무단으로 폭파하기까지 했다. 국제사회의 여론도 들끓었다. 국제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HRW)는 “한국정부는 김정은의 행복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유엔의 제재 해제를 국제사회에 간청했다. 2018년 10월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의 정상회담도 그런 자리 중 하나였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은 미국이 상응 조치를 취하면 핵·미사일실험을 중단하고, 핵물질을 폐기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면서 북의 비핵화가 되돌릴 수 없는 단계에 왔다고 판단되면, 마크롱 대통령이 안보리상임이사국으로서 제재 완화에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청와대 브리핑). 이는 정권이 바뀌고 지난달 열렸던 윤석열 대통령과 마크롱의 회담과 대비된다. 윤 대통령은 “안보리 결의 위반인 북한의 불법적 도발에, 한국은 차기 안보리이사국으로서 프랑스와 긴밀히 협력, 대처할 것”이라고 했고, 마크롱은 북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를 강조했다. “북핵 위기에 결연히 대처하기 위해 한국을 지지할 것”이라고 했고, 북한의 인권침해까지 거론하며 지속적으로 단호히 규탄할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의 질타 문 정권 5년 동안 대북관계는 굴종 일변도였다. 9·19 남북 군사합의 위반, 탈북 어부 강제송환, 해수부 공무원 피살 사건 등을 겪었지만 북에 항의 한번 못했다. 아니, 안했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삶은 소대가리” 같은 막말을 들어야 했다.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그해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4∽9월)과 두 차례의 북·미정상회담(2018년 6월, 2019년 2월)이 열려 ‘핵 없는 한반도 실현’ ‘연내 종전선언’ 등이 논의되기는 했지만 실질적 성과는 없었다. 북·미관계는 오히려 나빠졌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한국자유총연맹 창립 제69주년 기념식에서 “우리는 올바른 역사관, 책임 있는 국가관, 명확한 안보관을 가져야 한다”면서 “그동안 왜곡된 역사의식, 무책임한 국가관을 가진 반국가세력들은 핵무장을 고도화하는 북한 공산집단에게 유엔안보리 제재를 풀어달라고 읍소하고, 유엔사를 해체하는 종전선언을 노래 부르고 다녔다”고 했다. 지난 2일에는 통일부에 대해서도 작심 비판했다. “그동안 통일부는 마치 대북지원부 같은 역할을 해왔다”면서 “통일부는 달라질 때가 됐으며, 북한 지원부가 아니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통일이라는 본연의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협력과 교류의 프레임이 바뀌다 윤 대통령의 이런 비판에 대해 야당과 진보 좌파 진영은 크게 반발했지만, 필자는 대통령의 상황인식과 처방이 북핵과 한반도문제를 다루는 데 적실성(適實性)을 갖는다고 믿는다. 줄잡아 한 세대(30년) 넘게 진행되어온 북의 공공연한 핵‧미사일 개발과 보유, 그리고 이 과정에서 보여준 반민족적 기만(欺瞞) 행태가 필자를 그렇게 만들었다. 아마도 동시대의 한국인이라면 대개는 그러했으리라. 북의 핵 보유로 김대중 대통령(재임 1998년 2월∽2003년 2월)의 햇볕정책은 적실성을 잃었다. 소위 ‘햇볕의 시대’에는 남북 사이의 교류‧협력이 지고지선이었다. 기능주의적 상호의존론의 관점에서 열심히 교류하고 협력하면 긴장도 완화되고 관계도 개선된다고 믿었다. 선의의 차원에서 ‘시간은 남북 모두의 편’이었다. 그러나 북핵 앞에서는 교류‧협력도 그 명분과 효용성을 잃었다. 이제는 아무리 교류‧협력을 해도 남북 간 본질적인 균형회복과 선의의 관계 개선은 어렵게 됐고, 남북은 다시 경쟁, 그것도 악성(군비) 경쟁의 시간으로 내몰리게 됐다. ‘교류‧협력 프레임’이 ‘군비경쟁 프레임’으로 바뀌는 프레임 체인지(frame change) 앞에서 통일부도 변했어야 했다. 대북 식량지원이나 열심히 하면 됐던 목가적인 남북대화의 시대는 지나갔음을 알았어야 했다. 윤 대통령의 질타는 이걸 지적한 것이다. 물론 통일부만의 책임은 아니다. 진보 좌파 정권의 철 지난 햇볕정책, 대화지상주의, 앞에서 지적한 대북 굴종 앞에서 통일부도 그 역할에 한계가 있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만 해도 최근 윤 대통령의 ‘반국가 세력’ 발언이 있자 “아직도 냉전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치욕스런 ‘김여정 하명법’을 만든 장본인이 쉽게 할 소리는 아니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통일부에 대한 윤 대통령의 주문은 한마디로 ‘통일부의 정상화’다. 1969년 통일원으로 출발한 통일부는 국내외적인 통일 환경의 변화에 따라 조직과 기능을 확대해왔다. 기본업무는 통일문제에 대해 국민의 중지를 모으고, 통일 의지를 고취시키며, 통일에 유리한 국내외적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통일을 앞당기는 데 있다. 그렇다면 어떤 통일인가? ‘우리가 민족사적 정통성을 지닌 평화통일의 주체라는 신념을 가지고, 남북 동포가 다 함께 잘살고, 우리 민족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통일’이다. 바꿔 말하면 ‘북 동포의 인권도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적 통일’이다. 그것이 우리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노래했던 그 통일이다. 그런데도 일부 정권에선 통일부의 존재 이유를 남북대화(교류‧협력), 특히 남북정상회담의 성사에서만 찾는 듯한 인식을 주었고, 그 과정에서 통일부는 회담 지원부서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거다. 윤 대통령에게 ‘인권’은 대단히 중요한 모티브다. 국제사회에서 통일 기반을 조성하려면 보편적 가치로서 인권문제가 분명하게 표명,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국제사회로부터의 호응과 지지도 기대할 수 있고, 통일 기반도 확충할 수 있다는 거다. 인권은 윤 대통령이 취임 이후 일관되게 강조해온 인류사회의 보편적 가치 중의 하나다. 상대적으로 진보 좌파 정권들은 북한 인권 문제에 소극적이었다. 북한 인권대사만 해도 5년간 공석으로 두다가 2022년 정권이 바뀌고서야 임명할 수 있었다. 유엔의 북한인권결의안 표결에는 기권하기 일쑤였다. 매사 북의 눈치를 봤다. 통일부 내에서도 통일교육과 홍보 기능은 사라지거나 약화됐다. 이런 통일부를 상대하는 북의 관심은 오직 우리 측이 자신들이 쓸 남북협력기금을 얼마나 조성하는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물론 “그럴수록 교류‧협력을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전쟁을 막으려면, 이른바 대결주의자들의 책동을 막으려면 그 길밖에는 없다는 거다. 그러나 그런 평화는 종이 쪼가리와 선의에 기대는 위선적 평화일 뿐이라는 시각 또한 있다. 윤 대통령은 명쾌하고 명료하게 자신의 심중을 드러냈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2023-07-06 06: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