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수 작가
dslee@globalpeace.org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며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글로벌피스재단에서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 진행하고 있다.
- [이두수의 절차탁마] 민주주의라는 나무 [이두수 작가] 4월에 맡는 라일락 향기는 언제나 신선하다. 어찌 4월에 라일락 향기만이 있겠냐마는 어릴 적 추억은 그만큼 강렬하다. 꽃 향기가 주는 따뜻함, 신선함 그리고 편안함은 봄을 맞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것 같다. 4월을 맞아 국립 4.19 민주묘지를 찾아 참배를 하고 주변 둘레길을 걸었다. 북한산을 걸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산에서 바라보는 서울은 참으로 아름답다. 산은 적당히 높아 나무가 우거지고 계곡엔 물이 흘러 물고기들이 어른거린다. 후덥지근해진 날씨지만 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꽃 향기와 더불어 4월의 봄을 더 아름답게 만든다. 이런 자유와 여유로움이 민주묘지에 묻힌 선배들의 희생 덕분임을 온몸으로 느낀다. 함께 걷던 배문태 선생은 당시를 회상하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나는 여기 올 때마다 여기 누워 있는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기분이 착잡해지네. 당시 나도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대학에 들어갈 그때였거든. 우리나라가 이만큼 민주화되어 사는 것은 이들의 희생이 크지. 나는 여기 있는 이들을 보며 아직도 살아 있는 게 미안한 거야. 이들에게 더 이상 미안하지 않기 위해 살아 있는 동안 나는 통일된 조국을 만들겠다고 다짐을 하곤 하지.” 나무를 보면 신기하지 않은가.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서 있는 나무를 보며 나도 인생의 꿈을 향해 수직으로 서는 힘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그 환경을 사랑하며 자기 것화하는 바위 위에 굽은 소나무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못생긴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다. 쓸모없어 보이는 것이 결국 제구실을 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대부분은 산에 잘 생기고 곧은 나무는 먼저 잘려서 요긴하게 쓰이고 결국에는 제일 못생긴 나무만 남아서 중요한 선산을 지킨다는 이야기로, 평소에 보잘것없어 보이더라도 언젠가 결국에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니 무시하면 안 된다는 뜻의 속담이다. 과거엔 나라를 생각하며 나무를 심었다면 이제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나무를 심으면 좋겠다. 사무실이나 노동 현장에서 일하다가 이렇게 자연으로 나오면 몸과 마음이 리프레시되는 것은 물과 나무를 벗하기 때문이다. RE100이니 지구온난화 방지라는 거대 담론을 떠나서 나를 위해 나무를 심으면 좋겠다. 정원이 없으면 집 안에 화분에라도 심어 내 나무를 한 그루 가꿔보자. 그래도 공간이 없으면 내 마음속에라도 나무를 심고 가꾸면 좋겠다. 그 나무가 민주주의 나무라면 더 좋겠다. 아파트 건설에 있어서도 골조공사는 사실 모든 아파트가 브랜드만 다를 뿐 기본 골조는 거의 비슷하다. 외장이나 페인트 색깔만 다르다. 그래서 요즘 브랜드 아파트는 조경에 신경을 쓴다. 어떤 나무를 심는냐에 따라 아파트 차별화를 가져온다. 건물을 지을 때 수직과 수평이 매우 중요하다. 기둥이 수직으로 서야 보를 수평으로 이을 수 있다. 기둥과 보가 수평, 수직을 이루어야 벽이라는 평면을 만들 수 있다. 수직이란 지구 중력의 중심과 직선을 이루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수평은 이러한 수직과 90도 각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둥과 보가 수직과 수평관계를 이루어 큐브 형태를 이루었을 때가 가장 안정적이다. 수평, 수직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굴곡이나 기울기를 달리해 미적 변화를 줄 수도 있다. 지구는 구형이기 때문에 어디에 있든 중력의 중심과는 수직으로 설 수 있다. 바른 자세는 이렇게 중심과 가장 가깝게 서 있는 자세다. 이러한 원리는 자연과학만이 아니라 인문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본다. 우리가 말하는 원칙과 상식이란 이런 기준에서 나온다. 물론 인간은 상상력과 정이라고 하는 초월적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초월적 힘도 가치라고 하는 인문적 측정 기준을 넘어서거나 남용하면 무리가 생기고 관계는 헝클어지기 시작한다. 우리 사회의 학연, 지연, 혈연의 폐해는 이런 정적인 힘이 과도하게 작용해서 생기는 문제다. 2024년 4월에는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었다. 인구가 많아진 것도 있지만 전문화된 현대사회에선 자신을 대신해서 공동체를 이끌어갈 대표자를 뽑고, 그렇게 뽑은 대표자가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면 해임할 수 있는 것이 선거다. 흔히 선거를 ‘뽑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떨어뜨리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대표자가 임기 중에 비리와 부정을 저지르거나 대표자로서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시민들은 다음 선거에서 다른 후보자에게 투표함으로써 대표자를 교체한다. 이 때문에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부른다.(나무라고 부르면 더 좋겠다) 이번 선거 결과를 보면, 전국 254개 선거구의 총 투표수는 2923만4129표로, 이 중 더불어민주당의 득표수는 1475만8083표(50.5%), 국민의힘은 1317만9769표(45.1%)로, 양당의 득표율 격차는 5.4%포인트에 불과했다. 하지만 의석수에는 엄청난 차이가 났다. 지역구에서만 민주당은 161석을 얻어 단독 과반을 훌쩍 넘겼고 국민의힘 당선자는 90명에 불과했다. 두 정당 간 지역구 의석수 차이는 약 1.8배에 달했다. 특히 이번 총선의 최대 승부처였던 서울과 충청권에선 득표율과 의석수의 괴리감이 더 컸다. 서울에서 양당의 득표율 격차는 5.9%포인트였지만 전체 48석 중 37석을 민주당이 독식했다. 대전·세종·충남·충북 등 충청권에선 민주당이 단 4.3%포인트를 앞서 전체 28석 중 21석을 휩쓸었다. 반대로 국민의힘은 충청권에서 45.8%의 표를 얻고도 7석밖에 얻지 못했다. 이러한 격차가 나타나는 이유는 득표율 1위만 당선되고 나머지는 사표(死票)가 되는 현행 소선구제의 특징 때문이다. 승자독식에 따른 단순다수대표제가 민의를 대표했다고 볼 수 있을까? 전체 의석이 아닌 비례대표 의석에 대해서만 정당 득표율을 기준으로 배분하는 기존 병립형으로는 민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문제의식 아래 우리나라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했다. 하지만 위성정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의 출현은 비례대표제에 대한 문제점을 다시 부각시키고 있다. 원래 준연동형 비례제하에서 하나의 정당으로 총선을 치르면 양당의 경우 지역구 당선자로 인해 비례대표 의석 수가 병립형 비례제 시기보다 줄어들게 되고, 소수 정당이 비례대표 득표율에 가까운 원내 의석 수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원래 취지였지만 위성정당을 만들게 되면 명목상으로는 위성정당에서는 지역구 당선자가 없기 때문에 비례 득표율을 손해 없이 고스란히 비례대표 의석수로 전환할 수 있으며 추후 합당으로 비례대표 의석수를 당으로 가져올 수 있으며, 심지어는 선거 전 일부 의원을 위성정당에 꿔주는 사례도 있다. 창당 과정에 드는 비용이나 기존 정당과의 유사성으로 유권자에게 혼란을 준다. 유권자를 단지 정치 소비자로 취급하는 것이다. 하이예크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를 매우 강조했다. 인류 역사의 전 기간에 걸쳐 사회 발전의 일반적 방향은 각 개인의 자유로운 일상적 활동을 보장할 때이며 관습이나 정해진 방식을 따르게 한 속박에서 그들을 해방시키는 것이라고도 했다. 혹여나 이번 선거가 개인의 의지나 민의가 잘못 왜곡되어 집단화·진영화의 도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민주주의는 원래 정해진 룰이 없다. 끊임없이 현실과 타협하며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해 가고 진화해 가는 제도다. 며칠 전 우희종 교수는 강연에서 우리 사회의 다양한 시각을 같은 피사체를 보고 피카소와 달리의 표현이 다름과 같은 것이 아니겠냐고 말했다. 폭력이란 공동체의 관계를 단절시키거나 왜곡시키는 것을 말하며, 이런 왜곡에 대한 잘못된 개인적인 신념(어리석음)도 폭력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진보 진영에서 진화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원래 이 진화(Evolution)의 개념은 어떤 특수한 종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 상황, 위치에서 가장 안정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시민운동 차원에서 말하면 옳고 그름이라는 관념의 선택이 아니라 현장에 맞느냐 적합하냐 하는 선택과 이에 따른 실천이며 행동이라는 것이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다. 즉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겸손과 부드러움을 간직하지만 홍수와 같은 대재앙을 일으키는 무서운 힘으로 나타난다는 물의 속성을 도가에선 최고의 선(上善)으로까지 표현하고 있다. 대개는 힘이 있는 권력자들, 특히 정치인들에게 요구되는 품성이라고 말하지만 이런 인품은 70% 이상 물로 이루어진 인체를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은 물만이 아니라 모든 액체, 공기도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흐른다.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은 물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성격이라기보다는 중력이 있기 때문이다. 질량을 가진 모든 물질은 서로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구라고 하는 행성의 중심에서 잡아당기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타난 표상을 우상화하거나 신격화하는 데 집중할 것이 아니라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게 작용케 하는 과학적 힘에 집중하면 좋겠다. 청명한 날 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시작한 꽃 향기 충만한 4월도 이제 지나간다. 각자가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쓰러지지 않는 든든한 나무가 되어보자.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2024-04-29 20:21:31
- [이두수의 절차탁마] 건설현장에서 생각해 보는 민주주의 '축제' [이두수 작가]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왔다. 선거를 국민 축제라고 말은 하지만 즐거움이 빠진 행사여서 국민들의 관심도 자꾸 멀어져 가고 있다. 즐거움은커녕 증오와 분열만 보인다. 원래 정치란 것이 그런 거라고 하면 할말은 없지만… 솔직히 정치인이 TV에 나오면 재미있나. 감동이 있나. 누구 얼굴이 나오면 그를 마땅치 않게 여기는 사람들은 욕부터 한다. 이런 것은 개인 교양 수준의 문제겠지만 옆에서 듣기에는 기분이 편치 않다. 심한 경우에는 근로자들끼리 편이 갈라져 정치적 설전으로 주변이 시끄러워진다. 그래서 그런지 노동자들의 식당에는 늘 가수들의 오디션이나 오락 프로그램만 틀어 놓는다. 선거를 ‘국민축제’라고 하는 말은 아마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만든 광고 카피가 아닐까 생각한다. 원래 축제는 공동체의 참여와 화합으로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기획한다. 하지만 우리 선거판은 증오만 키우고 분열만 양산하는 싸움판이다. 국회의원 선거라고 함은 이 나라 민의를 대표하는 일종의 국가대표 선발전이다. 국가대표의 깜(감)이 되는지 함량이 되는지 과거의 이력을 보며 검증하여 뽑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오디션 프로그램에 익숙해져 스포츠나 예능프로그램에서 대표를 선발하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봐왔다. 누군가 힘있는 사람의 영입이나 추천을 차단하고 오로지 선수의 실력, 끼, 능력, 열정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경쟁하게 하여 수준을 높여 나간다. 검증의 이 과정이 보는 자체가 감동이고 기쁨이다. 전문가들이 내놓는 엄중한 비평을 들으면서도 겸허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가며 도전하는 모습, 후보자들 간에 경쟁은 치열하게 하면서도 서로를 격려하며 응원하는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을 준다. 이런 과정이 한류를 세계 최고의 문화 콘텐츠로 만들었다.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인들이 같이 보고 즐기고 공감하는 것이다. 이런 스토리나 감동이 없는 쇼 프로그램을 가지고 일반 오디션 참가자들이 우승하여 받게 되는 보상보다 몇 백배의 혜택과 국가를 대표한다는 명예와 국정을 책임지는 막중한 권한을 받는 우리 국회의원 선발과정은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화만 돋구며 진행도 아주 후졌다. 기획사를 바꾸고 싶다. 왜 그럴까. 기획사의 문제일까 아니면 팬들의 문제일까. 아니면 민주주의라는 이 판 자체에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우리는 정치 스타를 키우려는 팬심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민주주의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AI 시대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사라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민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호기심과 질문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 정치에 대해 의문을 가져야 하고 질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끓는 물에 웅크린 개구리 꼴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그간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공한 세계 최초의 나라라고 자랑했고 자긍심을 가져왔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왜냐하면 산업화나 민주화라고 하는 것은 결과물이 아니라 그 과정을 의미하기 때문에 지금도 우린 현재 진행형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진행형이라 하는 것은 내 몸으로 체화하고 몸으로 익혀 나가는 것을 말한다. 서구의 데모크라시(Democracy)라는 말을 우리는 민주주의라고 번역해 사용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번역한 것은 아니고 중국이나 일본에서 번역한 말을 우리는 같은 한자권이라는 혜택으로 그 용어를 음차한 것에 불과하다. 중국에서도 처음에는 데모크라시를 번역할 수 없어 ‘德謨克拉西’ (demokelaxi)라고 표기하다가 고전에서 말하는 民主라고 표현했다. 이때 민주는 ‘백성의 주인’인 군주를 의미했고, 신해혁명 시기에 와서야 ‘백성이 주인’의 의미로 민주를 사용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민의정치, 민본주의, 민중정치라고 번역해 오다가 민주주의로 정착해왔다고 한다. 민주 뒤에 ‘-주의’라고 붙인 것은 일본인들은 오랫동안 천황제를 신봉해 왔기 때문에 군주의 백성에 대한 통치이념인 유교의 민본주의 영향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인들은 서구의 이 민주정치제도를 백성이 군주에 대항한다는 의미로 처음엔 하극상(下剋上)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어찌 되었건 우린 이웃나라에서 고심하며 번역한 용어를 손쉽게 음차해서 사용하고 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고 본다. 어떤 사물이나 개념을 받아들일 때 그 쓰임새와 내력에 대해 충분히 연구하고 고민하지 않으면 그 본질을 알 수 없거니와 내 것으로 만들기 어렵다. 그저 겉모습만 보고 흉내만 내기 때문이다. 선거일이 다가오는데 우린 지금 뭘 하자는 것인가? 자신들의 대표를 뽑아 상대에게 복수하자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치부를 덮어버리고 자신의 사적이익을 넓히자는 것인가. 내 보기엔 우리 선수들 대부분이 그 정도 함량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민주주주의에 대한 고민이 없다. 자신이 국가대표가 되겠다면 이런 나라를 만들어 가겠다는 출사표가 보이지 않는다. 고작 주장하는 것이 있다면 지역구 민원을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예산을 많이 따오겠다, 혹은 어떤 시설을 유치하겠다는 자신의 힘만을 과시하는 공약이 대부분이다.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적당한가. 북한에선 인민이 굶어 죽는 판에 이름뿐인 인민민주주의라는 군주제를 실시하며 인민의 낙원이라고 뽐낸다. 이런 체제를 대면하는 우리 민주제는 우리 국민을 보호하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 우리의 대표들은 180여 개의 특권과 연봉은 세계에서 넷째로 많이 받고 있으면서도 국민과 나라를 위해 도대체 뭘 하는 사람들인지 모를 지경인데 이런 사람들이 굳이 필요할까? 차라리 전문가 그룹에게 위임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것이 해고하기도 쉽다. 3월이면 우리는 3·1절을 기념하며 시작한다. 하지만 3·1독립만세운동을 벌이며 외쳤던 ‘대한독립만세”가 독립될 나라인 대한민국이 국왕을 옹립하는 군주제인 대한제국이나 조선이 아니라 국민이 주인인 서구식 민주주의 국가였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가 만들어 갈 민주주의가 어떠해야 하는지 더 세밀하게 배려하고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 세계 문화를 리드할 문화선도국이라고 하면서도 아직까지 과거 한국을 식민통치한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원색적인 비난으로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다. 대한민국의 경제를 떠받치는 산업의 중추인 건설업의 노동자는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일용직 근로자다. 일용직이라는 것은 날품팔이라는 의미다. 용어 자체가 인스턴트하다. 언제든 쓰고 버리는 존재들이다. 다들 명품 아파트에 살고 싶어하지만 아파트를 만드는 건설인을 명장으로 만들겠다는 국가정책도 없고 교육 프로그램도 없다. 노동자가 더 필요하면 외국에서 수입해서 쓰겠다는 편하고 쉬운 발상만 한다. 그러면서 선거 때만 오면 ‘노동의 숭고한 가치’를 깊이 간직하겠다고 말만 나부낀다. 북한은 미국과 대화하기 위해 핵을 만들었다고 하다가 이제는 남한을 핵전쟁으로 접수하겠다며 위협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통일에 대한 관심은 사라져 가고 있다. 이제는 서로 따로 살자는 여론도 높아져 가고 있다. 그렇다고 통일을 포기할 것인가. 통일된 나라가 어떠해야 하는지, 남과 북이 합의할 수 있는 통일 비전이 무엇인지 모색하거나 연구하는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 본인의 삶이 타인의 인권을 빼앗거나 무시하면서 민주화를 외치는 사람, 통일의 비전도 없이 통일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은 소음을 양산하는 공해다. 국가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치적을 쌓겠다고 하는 사람은 사기꾼이다. 세계에 유례 없는 저출산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국가인력개발계획도 없이 외국인노동자 쿼터제만 만지작거리는 사람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적어도 민주주의를 이끌어가겠다는 선수라면 로버트 달 교수가 말한, 민주주의를 한다고 하는 것은 정직이나 공정의 가치를 실현해 가는 과정이며 이를 위한 시민의 용기와 사랑이라는 휴먼 가치를 어떻게 실행하고 보존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시끄러운 선거 확성기 앞에서 어제 인사동의 전시회에서 한 작가로부터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기계로 대량생산된 개성 없는 기성품이 넘쳐나고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며 소비를 강요받고 있는 우리 사회에,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지 돌아보게 하는 고요함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소유의 욕망에서 벗어나 고요와 평안을 느낄 수 있고 시대가 변해도 본질로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우리 것의 고유한 가치도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우리 정치도 그랬으면 좋겠다. 인류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홍익인간의 이념을 건국이념으로 채택한 5000년의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다. 픽-하고 웃어 넘길 옛날얘기가 아니라 이 비전을 현대에 맞게 세련되게 리폼해서 우리가 만들어 갈 새로운 나라의 지표가 되면 좋겠다. 이번 투표도 선동가의 구호에 흥분하지 말고 존엄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며 의무를 다해가는 민주시민이 되길 기대해 본다. 그림 설명: 꽃무늬 입은 노동자 “일하다 보면 꽃을 볼 일도 없지만 그래도 꽃 피는 들판을 그려보곤 하지요. 올봄에는 꽃 소식이 늦네요. 꽃이 없으면 아쉽지만 아무려면 어때요. 내 맘속에 그려보면 되지요. 꽃무늬 바지를 입고 일하면 맘도 편하고 푸근해지는 거 같아요. 꽃 피는 세상을 그려봅니다.” -건설노동자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2024-03-29 12:51:17
- [이두수의 절차탁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주체 …'나와 너' 그리고 소통 [이두수 작가] 건설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나와 팀원 관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이것은 일당이 많고 적음을 넘어 팀원간의 역할분담과 서로의 협조관계가 원만하지 않으면 오랫동안 일을 같이 할 수 없거니와 일에 대한 보람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노동자와 회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노동에 대한 가치문제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되긴 하지만 같이 일하는 동료들, 즉 ‘나와 너의 관계’는 무엇인가하는 문제는 노사문제나 노노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일의 성과나 현장의 안전문제까지 연결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주제다. 아시안컵 축구대회에서 불거진 손흥민과 이강인의 갈등에서 벌어진 팀워크의 문제도 결국은 ‘나와 너의 관계’에서 벌어진 문제다. 손흥민은 아버지의 독한 훈련을 잘 버텨낸 것으로 유명하다. 반면 이강인은 어릴 때부터 축구신동으로 자유롭게 자기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에서 성장했다고 듣고 있다. 이런 성장배경과 기질의 차이가 있음에도 한 팀이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축구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적인 문제와도 연결된다. 총선이 다가오면서 우리 사회는 나와 너, 혹은 내편 니편으로 갈리면서 그 어느 때보다 심한 갈등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런 것은 인식의 방식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 말의 ‘알다’라는 말은 알에서 왔다고 본다. 새의 알처럼 알은 전체를 포용한 말이다. 알맹이, 알몸, 알통 같은 말을 보면 알은 사물의 핵심과 진수, 알짜배기를 일컫는 말들이다. 무엇을 안다는 것은 대상의 핵심에 접근하는 것이며 그렇다고 한 부분만 아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두루두루 아는 박식한 지식이 우리 말의 앎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그럴까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모르는 것이 없다. 반면에 일본어로 알다는 와카루 分かる다. 와카루는 나누는 것이다. 한자어로도 이해 理解、분석 分析 이런 말을 보면 동양권에서도 앎은 분해하는 과정이다. 서양의 근대과학은 사물을 잘게 쪼개어 분석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물질을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위까지 쪼갠 그 단위를 원자(Atom)라 불렀다. 인간도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위를 인디비듀얼 Individual이라 했고 이를 개인 個人으로 번역했다. 하지만 동양에선 이렇게 분절화된 개인보다는 인간 人間, 즉 사람人 사이間의 관계에 더 주목했던 거 같다. 주체와 대상 이 세상을 크게 나누어 본다면 나는 주체와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세상은 나와 연결된 관계구조다. 물론 주체가 항상 나일 수는 없지만 한 문장이 주어와 술어의 관계인 것처럼 이 세상도 크게 보면 나와 너라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상에서 ‘알다’와 비슷하게 사용하는 말이 ‘우리’다. 우리는 ‘나’와 ‘너’라는 개념을 알기 전에 ‘우리’라는 말을 먼저 사용했던 거 같다. 우리 속에 ‘나’와 ‘너’가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우리라는 말을 써왔던 거 같다. 우리라는 말을 하기 전에 우리는 ‘나’와 ‘너’에 대해 먼저 살펴야 한다. 우리라는 말 속에는 나와 너가 있다. 나와 너의 관계성이 바로 우리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성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말한다. 주체와 대상 간의 관계가 상호 모순적이냐 아니면 상호 보완적 관계로 보느냐에 따라 주체와 대상은 원수관계가 될 수도 있고 파트너의 관계가 될 수 있다. 모순적 관계라고 하는 것은 상대를 적으로 보는 것이다. 적은 쓰러뜨려야 하고 제거해야 하는 상대다. 그래서 싸움을 벌여야 하고 싸워 이겨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탄생이 온갖 바이러스와의 싸움이고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도 1등을 놓고 경쟁하고, 사회에 나와서는 최고가 되기 위한 투쟁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삶은 원래부터 고통이고 전쟁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상호 보완적 관계라고 한다면 상대는 나를 도와주거나 보완해주는 관계이므로 나에게 필요한 존재다. 상대를 파트너로 보는 것은 너와 내가 전체를 이루는 한 구성원이라는 의식이다. 현장에서 기계를 사용하다 보면 고장이 난다. 고장의 원인은 대개 작은 부속품, 볼트가 빠지거나 퓨즈가 끊어지거나 하는 등 사소하고 작은 것에서 일어난다. 아무리 작아도 그 한 부품이 없거나 망가지면 기계는 작동을 멈춘다. 그래서 작고 사소한 한 부분 한 부분의 파트너가 귀한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상호 보완적인 관계는 가족관계에서 그 모델을 볼 수 있다. 가족간의 관계는 서로 사랑하고 때로는 상대를 위해 희생도 한다. 특히 부모와 자식관계에서는 모든 조건을 초월하기도 한다. 부자관계만이 아니라 남녀간의 관계도 상식과 논리를 초월하기도 하고, 어떤 이념이나 가치, 우정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버릴 수 있는 비상함도 나타난다.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을 보면, 꽃나무와 바람은 적대적 관계가 아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바람과 꽃나무의 관계를 보자. 꽃나무에게는 바람이 필요한 것이다. 흔들리는 나무는 살아있음이다. 죽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는다. 바람에 나무가 쓰러지고 가지가 찢긴다 해도 나무에겐 바람이 필요하다. 태풍이 피해를 준다고 없앨 수는 없다, 태풍이 불어야 자연은 그만큼 더 건강해지고 다양해지는 것이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를 읽어보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나와 꽃, 아니면 그 어떤 대상이 나와 이런 사이라면 그와 나는 원수가 될 수 없다. 그가 없이는 나도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주체와 대상은 그런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관계는 그렇게 상호 보완적인 것이다. 상대를 까부수고 제거해야 할 상대가 아닌 것이다. 주체와 대상이 이렇게 서로를 높여주고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어 새로운 결과물을 내기 위해서는 목적이 같아야 한다. 공유할 비전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개혁신당의 파국은 정당의 뜻과 이념의 정체성이 맞지 않는 사람들이 비례대표 의석이라도 잡아보려는 꼼수에 불과해 결국 파행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No players is bigger than the club”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이 말은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에서 우승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잉글랜드 리그를 최고 자리에 올려놓은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말이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은 한 선수의 기량이나 인기가 아니라 팀에 대한 지속적인 헌신성이다. 이러한 팀 비전에 구성원들이 하나가 될 때 강한 힘이 나오는 것이다. 수수작용과 소통 건설현장엔 아침에 일을 시작하기 전 TBM이라는 시간을 갖는다. 툴박스 미팅 Tool Box Meeting의 약자로 공정별로 하는 미팅시간이다. 조회시간에 전체가 공유해야 할 현장소장의 훈시를 듣기는 하지만, 티비엠 시간엔 팀장(예전엔 십장이라 했음) 중심으로 당일 할 일에 대한 실무적인 내용을 가지고 간단히 정보를 교환하는 것이다. 어제 한 일은 잘 진행되었는지 체크하고 오늘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수행하는 데 불안전 요인이 무엇인지 간단히 확인하는 시간이다. 이런 소통의 시간이 비록 짧지만 필요하다. 늘 하던 일도 다시 한번 주의를 환기시키지 않으면 언제든지 사고가 나기 때문이다. 최근 건설현장의 사고도 초심자보다 오래된 숙련노동자들의 사고가 더 많은 것이 이를 말해준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어도 건설현장에서 인명사고는 줄지 않았다. 법으로 규제한다고 안전사고가 줄지 않는다. 구성원들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태도, 어떤 관계로 일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회사가 나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일을 시킨다는 소외의식이나, 외국인 노동자들 때문에 내 일을 빼앗겼다는 적대의식으로는 건설 현장에서 신뢰분위기를 쌓을 수 없다. <나와 너>라는 책을 쓴 마르틴 부버의 책이 한때 유행한 적이 있다. 그는 한 사람의 자존감과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원인이 나와 너 사이의 관계가 깨진 데 있다고 보았다. 나와 너의 대화를 통해 상호관계를 이루는 것이 나의 자존감과 정체성을 회복하는 지름길이며 자아실현의 필수적 과정이라 했다. 이러한 바람직한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나의 시각이 자기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하고 상대를 이질적인 대상으로 보려고 하지 않는 노력이 필요하다. 상대를 나보다 못한 존재로 보거나 나의 지배대상 혹은 소유대상으로 삼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나와 너를 물과 불처럼 대립적인 존재라고 속단하는 태도가 나와 너를 가로막는 분계선이 된다. 각자는 상대방에 속하지 않는 고유한 속성을 가지고 있고, 너와 나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데서 상호관계가 시작된다고 그는 설명한다. 사람, 너를 보는 시각 상대를 나의 생각과 나의 목표에 종속시키려는 욕심, 즉 인위를 버리고, 세상에서 가장 연한 물처럼 인애심을 바탕으로 상대의 고유한 기질, 성품, 재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원한마저 덕으로 갚으려는 넉넉한 생각이 세상을 발전시키는 자연스러운 길이다라고 노자는 말했다. 이런 시각에서 사람인人이라는 한자를 다시 써보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사선을 긋고 그 밑에 선을 받치듯이 짧은 선을 그어 이것이 ‘사람人’이다 라고 표명한다.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한 사람을 그렇게 강해 보이지도 않는 또 다른 사람이 힘겹게 지탱해주는 형상이다. 이것이 사람인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仁이란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알면서도 쓰러지는 사람의 인생을 일으켜 세워주기 위해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는 두 번째(二) 사람의 마음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공자는 仁이란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어진 마음”이라 개념 짓고 인의 행함은 한 인간이 지닌 개성을 최대한 선하게 성장시키는 일이며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생활방식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신을 죽여야 인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도 다르지 않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주체인 나와 너가 가져야 할 덕목인 것이다. 그림 설명: TBM시간에 우리 팀장이 늘 강조하는 말씀은 “오늘 일은 오늘 마감되도록 꼼꼼하게 마무리 잘 하고 철저하게 확인하시오.” 꼼꼼하게, 잘, 철저하게…이렇게 일하기는 쉽지 않다. 어려운 일을 아주 쉽게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힘들지 않은 것은 서로의 신뢰관계 때문이다.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2024-02-29 06:00:00
- [이두수의 절차탁마] 인생이란 문장의 주어는 나 [이두수 작가] 진주어와 가주어 그리고 의미상의 주어 우리말에는 없지만 영어를 공부하다 보면 진주어, 가주어라는 말이 나오고 의미상의 주어라는 말이 나온다. 주어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용어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우리말은 주어를 굳이 강조하지 않는다. 말을 한참 듣다가도 그게 누구 말인데? 하고 물어볼 때가 있다. 내 얘기도 아니고 네 얘기도 아닌 그냥 ‘우리’로 퉁 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언어적 습관 때문인지 행위의 주어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으며 여기서 책임 소재가 발생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책임지고 싶지 않을 때 주어를 흐린다. ‘~카더라’ 하는 것은 말을 전하는 사람들은 주어가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 관심조차 없다. 선거철과 표현 요즘 4월에 있을 총선거 준비로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존재감을 나타내기 위해 여러 모임을 만들어 사람들을 모으고 길거리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사람들을 모아 본인 소개를 잘할 수 있는 모임이 출판기념회다. 그래서 그런지 내 주변에도 출판기념회가 여럿 있었다. 평소에 글도 써보고 책을 내 보며 자신의 생각과 비전을 표현해 왔으면 책을 받는 기쁨도 있겠지만, 대부분 후보자들의 출판기념회에서 받아보는 책은 출판기획사가 같은 곳인지 책 내용과 구성이 비슷해 책을 대하는 기분은 그리 좋지 못하다. 책 저자에 대해 신뢰감이 가지 않는데 왜 자꾸 이런 출판기념회를 하는지 모르겠다. 독자를 고려하지 않는 저자의 강압구조인 이런 출판기념회는 오히려 안 하니만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삶은 표현의 과정이다. 나는 ‘표현하다’는 말을 좋아한다. 한자로 써보면 表現, 겉으로 드러내다. 영어의 expression도 밖으로 드러내 놓는 것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 내적인 성격이나 성질, 즉 자기 생각과 비전, 뜻, 꿈, 야망 이런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 표현 수단이나 방법에는 글이나 말, 그림, 음악, 행위 등 여러 가지로 나타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표현은 창조와 같은 말일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창조행위도 신의 보이지 않는 성품이 이 세상과 사람으로 나타내 보인 것이다. 성육의 의미인 incarnation도 결국 보이지 않는 정신이나 뜻이 인간에게 구체화되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나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사람이 왜 사는가를 생각해 보면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되어 살아보려 몸부림치는 것이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공부하고, 일하고, 고민하고, 싸우고 하는 내용들이 이타적 삶이든, 자기 중심적인 삶이든 내가 중심이 되고 주체가 되어 살아보려는 발버둥이며 이것이 삶이며 그 축적이 역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러한 삶을 글로 표현해 본다면 한 문장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나는 ○○한다’ 혹은 ‘나는 ○○했다’처럼 ‘나’는 문장의 주어가 되고 ‘○○했다’가 동사가 되는 것이다. 내가 주인이 되는 세상이란 의미는 결국 나라는 주어가 무엇을 어떻게 나타낸다고 하는 동사적 표현이다. 문장의 기본 구조는 주어와 술어다. 주어란 서술어가 나타내는 행위나 상태의 주체가 되는 문장 성분을 말한다. 문장은 아무리 간단하여도 주어 하나와 서술어 하나를 갖추어야 함을 원칙으로 한다. 복잡한 문장이라 하더라도 주어-술어라는 틀을 기본으로 하여 확대되어 가므로 주어는 서술어와 함께 문장의 가장 기본이 되는 문장 성분이다. 물론 주어는 인간만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동작이나 상태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은 사람이거나 사물이 될 수 있으며 때로는 한 문장 자체가 주어가 될 수도 있다. 문장에서 주어는 술어의 행위나 상태의 주체가 되는 명사를 말하고, 술어의 행위, 동작, 인식을 나타내는 것을 동사라 하고, 상태를 나타내는 말을 형용사라고 지칭한다. 여기서 형용사는 동작의 의미를 전제로 하는 명령이나 청유형으로 활용하지 못한다. 주어는 술어가 있어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술어와 매칭되지 않는 주어는 가짜 주어다. 주어의 의지는 술어로 나타난다. 주어는 어떤 동사를 쓰느냐에 따라 자신의 역량과 의지와 뜻을 피력할 수 있다. 간혹 형용사를 동사처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하면 주어의 의미나 의지가 희석된다. ‘젊다'와 ‘늙다’를 예를 들어보자. 젊다는 한 시기의 상태를 의미하므로 형용사다. 그러나 늙다는 과정이 내포되어 있어 동사다. '젊는다'는 말이 안 되지만 '늙는다'는 말이 된다. 행복하다는 형용사다. 아주 기쁘고 좋은 상태를 말한다. '행복하세요'는 원래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건강하다'도 몸이 좋고 힘이 넘치는 상태를 말한다. '건강해라'는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아름답다'의 '아름다우세요'는 아름답다는 감탄의 뜻이지 '아름다우라'고 명령하거나 권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고 참 건강하세요!'는 감탄의 말로는 쓸 수 있지만 '건강하라'고 권면할 수는 없는 것이다. '행복해라'고 명령할 수 없는데 우린 언제부터인가 이런 식의 말을 자주 한다. 행복하자! 건강하자! 이런 말을 쓰는 것은 구호에 익숙하기 때문 아닐까. 아주 이상적인 상태를 설정해 놓고 그것을 이루라고 막 명령하는 거 같은 느낌에서 충돌이 생기는 것이다. 행동으로 나타날 수 없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라고 하는 주어의 그 의도나 의지가 강압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명령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실행되지 않는다. 문장 자체가 틀렸고 현실에서도 그렇다. 반복해서 이런 잘못된 지시나 명령을 내리면 주어의 권위가 형편없이 실추된다. 이는 곧 주어가 가주어나 의미상의 주어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주인의 역사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인간이 주인이 된 시대는 그리 길지 않다. 오랫동안 인류 역사라는 문장의 주어는 인간이 아닌 신이었다. 이를 신본주의 시대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존재, 동물이나 식물 또는 산이나 바다, 하늘 등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오로지 신의 영광 혹은 신의 섭리를 위해 존재할 때 존재 의미가 있었다. 이런 시대가 꽤 길었다. 이런 역사를 통해 지적 역량의 축적과 확대 덕분인지 모르지만 인간의 생각, 인간적 표현이 신을 대신하게 되었고 우선시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의 시점을 대개 서구의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시기로 보고 있다. 그렇다고 인간이 주어가 되었다고 해서 신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주어적 가치는 신이 부여한 인권이라는 천부인권에서 힘을 받는다. 시천주-사인여천-인내천이라는 동학의 가르침도 이런 궤를 같이한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너와 나의 가치를 이렇게 우주적 가치로 존귀하게 여기며 이웃을 평등하게 대하는 사상은 민주주의 시대를 열었다. 이런 사상적·정치적 변화와 더불어 경제와 과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세상은 역사상 유례없는 성장을 가져왔다. 그 가운데에서 한국은 정말 전례가 없을 정도로 단기간에 급격한 변화와 발전을 경험하고 있으며 그사이에 모순과 갈등 또한 엄청나게 겪고 있다. 내가 주인이 되어야 우리 말에는 주어가 생략되는 경우가 많다. “좋다”라고 말할 때 누가 좋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내가 좋은 건지, 네가 좋은 건지 아니면 우리가 좋은 건지 불분명하다. 그래서 사회생활을 잘하려면 실력보다는 상황 파악을 잘해야 출세한다. 보통은 화자의 중심은 내가 된다. 내가 주어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나를 ‘우리’로 대치한다. 사적인 부분도 나 대신 우리를 사용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공동 의지나 공동체 의식이 강한 것도 아니다. 내가 생략된 우리는 결국 나의 위치, 나의 지분을 차지하기 위한 분쟁과 분열의 소지만 만들 뿐이다. 주어가 술어의 행위나 상태의 주체가 된다고 하는 것은 주어는 주어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술어인 동사에도 집중해야 한다. 결국 동사에 의해 주어가 빛나기 때문이다. 동사에 주어의 의지와 의도가 나타난다. 본인은 행동하지 않고 남이 해 놓은 것을 인용하는 것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결과된 상태를 표현하는 것으로 그것은 형용사가 될 뿐이다. 주어에 적합한 동사를 쓸 때 문장이 힘을 얻는 것처럼 주체들은 자기만의 행동규칙이 있어야 한다. 자기의 정책과 디자인이 없으면 행동할 수 없고, 그런 행위가 없으니까 남의 것을 베끼고 남의 말꼬리나 잡고 시간만 때운다. 그것은 나만의 고유한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이다. 주어로서의 확신이 없으니까 자꾸 남과 비교하고 남을 흉내 내려고만 한다. 그러니 사회가 다양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치는 쏠림 현상이 심해지고 자기 의견이 확실하지 못하니까 힘 있는 쪽에 붙어 진영화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그렇다. 최근에 읽은 책에 이런 말이 있었다. “운명이란 것은 국지적 모래폭풍 같은 거지. 그 폭풍을 피하려고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지만 그럴 때마다 폭풍도 너를 따라 방향을 바꾸지. 폭풍은 바로 너 자신이야. 그러니까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래가 귀나 눈에 들어가지 않게 꽉 틀어 막고 그 폭풍 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폭풍이 올 줄 알면서 그 폭풍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열다섯 살 소년의 '터프함'이야.” 또 이런 말도 있다. “비극이란 운명에 발버둥치지만 결국 굴복 당하지. 인간은 그 결과를 알면서도 발버둥치는 거야. 발버둥쳐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역시 발버둥을 치는 거지. 인간의 존엄은 그런 부자유함에서 나온다. 인간의 존귀함은 발버둥치며 자신의 자유를 개척하고 탐색하는 데서 나오지. 그 개척과 탐색으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 인간은 부자유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유를 추구할 때 존엄과 존귀함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안티고네' 같은 그리스 비극이 제시하는 인간의 정의다. 그리고 이런 인간적 태도의 가장 핵심적 관념은 바로 책임이다.”(영원한 소년의 정신 하루키 읽는 법/ 양자오 저) 세상은 표현하는 자가 주인이다. 세계는 권력자의 것일지 몰라도 삶만큼은 상상하고 읽고 쓰고 말하는 개인들의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문장의 주어는 내가 되는 것이다. 심오한 철학이 설명하는 세계나 신심 어린 종교가 말하는 이상 세계에 대한 추상적 언어를 자신의 구체적인 생활언어로 번역할 수 없다면 그는 자기 삶에 주어가 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이미지나 추상적 언어가 현실에서 제대로 기능하려면 구체적 자기 언어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하고 자기만의 표현력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그 비전이 이상적이고 아름답게 포장되었다 할지라도 내 삶에서 구체화할 수 없다면 그건 허상에 불과하다. 서양의 근대는 프랑스혁명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인상파 그림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있다. 진정한 의미의 문화적 상호작용이 인상파 그림에서부터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누구나 동일하게 경험하는 세상을 화폭에 똑같이 재현하려던 이전 시대의 그림에 비해 인상파 화가들은 자신의 순간적 내면의 경험을 화폭에 담으려 했다는 것이다. 재현(reprersentation)에서 표현(expression)의 시대로 변한 것이다. 나의 느낌, 나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해보자. 인류 문명은 그렇게 해서 변화·발전해 온 것이기 때문이며, 삶이라는 문장의 주어는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그림 설명: 한라산을 오르다. 삶이란 이렇게 안개와 구름이 뒤덮인 산을 오르는 과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언제 구름이 비가 되어 내릴지, 눈보라가 되어 몰아칠지 모르지만 묵묵히 산을 오르는 것이다. 언뜻 바람이 불어 안개와 구름이 걷히자 나타나는 아름다운 파란 하늘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한라산을 다녀와 남는 기억은 그 순간뿐이다.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글로벌피스재단에서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진행하고 있다. 2024-01-26 09:08:38
- [이두수의 절차탁마] 올해도 '나는 누구인가' 물었다 [이두수 작가] 우리가 혼자 또는 조직생활을 하면서 마음이 힘든 이유는 나와 주변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와 사회는 어떤 관계인가’ 등의 질문에 끊임없이 답을 찾는 과정이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이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은 ‘나는 무엇이 될 것인가’와 연동되어 있다. 어릴 적 나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던 큰형이 시골에 내려오면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었다. “이두수, 너는 커서 뭐가 될거야?” 사실 이 질문이 나에겐 무척 거북했다. 뭐라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커서 뭐가 될지 아무리 생각해도 될 만한 것이 없었고, 내가 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조차도 몰랐다. 그만큼 나에 대한 자신감이나 자존감이 약했다. 그런 나에게 이런 질문은 강요였고 협박이었다. 나는 지금도 이 질문을 나에게 던지며 답을 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답은 아니지만 힌트를 준 분이 계시다. 바로 아버지다. 아버지는 내게 뭐가 되라고 강요하지 않으셨다. 다만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야. 그렇게 살면 되는 거야”라고 하셨다. 다르다와 틀리다 우리 일상생활 중에 자주 접하는 잘못된 언어습관이 하나 있다. ‘다르다’와 ‘틀리다’이다. ‘다르다’는 ‘같다’의 반대말이고, ‘틀리다’는 ‘맞다’의 반대말이다. 영어로는 ‘different’와 ‘wrong’으로 표기한다. ‘다름’과 ‘틀림’은 그 의미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의 언어생활에서 이 구분을 명확하게 하지 않으며 보통은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너와 나는 달라’와 ‘나하고 너는 틀려’ 이 둘의 표현은 전혀 다른 의미의 문장이다. 하지만 우린 때로 이 문장을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예시처럼 ‘비교가 되는 둘 이상의 대상이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자 할 때는 ‘다르다’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 반면 ‘사실이 그릇되거나 어긋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할 때는 ‘틀리다’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 ‘다름’을 써야 할 자리에 ‘틀림’을 썼을 때 말의 의미는 엉뚱해지고 만다. 여기서 그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이 ‘틀림’은 ‘나쁨’으로 전이되고 ‘나쁨’은 ‘악’으로 점점 그 의미가 전승·확산되는 것이다. 다름은 서로의 입장이 같지 않고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사용하는 반면 틀림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 기준에 맞지 않고 그릇되고 어긋난 것을 ‘틀리다’고 할 수 있다. 의식이나 비전, 이념에 대한 전체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회에서 이 다름과 그름은 강한 쏠림 현상으로 틀림으로 전화되고 쉽게 악으로 규정되어 사회에서 매장당하는 어처구니없는 경향이 벌어진다.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에 따르면 단 하나의 진리가 있다는 믿음과 그 진리가 인간 세계에 어떠한 형태로든 관여한다는 믿음이 강하고 이 진리를 인간이 터득할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한 사회일수록 인간을 ‘정교한 통제’ ‘전체적 억압’ ‘현자의 독재’에 기초한 변화를 발전된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고 한다. 인터넷으로 연결된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콩 떠는 이야기 며칠 전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둘째 형이 콩을 떨다가 팔이 기계 속으로 말려들어가 큰 수술을 받았다. 면회를 갔는데 누워 있을 줄 알았는데 팔 이외는 멀쩡하다며 괜한 걸음을 했다고 핀잔을 주었다. 시골농가에서 다른 사람들보다는 농사를 제법 많이 짓는 형으로서는 오른손을 다친 것이 그에게 정신적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한 것 같다. 형의 이야기다. 예전에 농사는 한 마을이 함께 짓는 공동 행사였다. 특히 추수는 여러 사람 일손이 필요했고 하나의 축제였다. 산업화와 더불어 사람들 일손은 기계가 대신하게 되었다. 이번 사고는 혼자 콩을 떨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경운기를 쓸 때만 해도 추수하는 사람이 여럿 필요했고 기계 힘도 약해 사람이 기계에 끼인다고 해도 기계를 멈출 수 있었고, 누군가 구조할 사람이 있었다. 이제는 트랙터 엔진 힘을 이용하여 농기계를 사용하니 힘은 커졌고 사람이 기계에 끼여도 기계는 멈출 줄 모른다. 혼자 일하다 보니 주변에 도와줄 사람도 없다. 이번 사고를 통해 정말 사람이 무엇인지,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조상 대대로 지어 온 농사지만 그 기법은 완전히 달라졌다. 농사에 대한 태도도 달라졌다. 생명, 먹거리라기보다는 하나의 상품을 생산하는 생산자의 입장이고, 모두가 함께 짓는 농사가 아니고 나 혼자 밥벌이하는 하나의 사업이 되었다. 이렇게 해도 될까. 이렇게 살아도 될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사회 운영과 변화에는 정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정치가도 이 사회의 공동체 문화를 생각하기보다는 정치를 일종의 자기 사업으로 여길 것이라 생각하니 갑갑하고 답답하고···. 결국 내 문제로 돌아와, 그럼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로 환원되고 마네. 나와 우리라는 공동체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소설이 있다. 어느 날 일어나 보니 내가 벌레가 되어버린 것이다. 비슷한 내용으로 사람이 파리, 개미, 박쥐가 되는 내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주인공인 그레고르 잠자(Gregor Samsa)는 잠자고 일어났더니 자신이 큰 벌레로 변해 있었다. 가족은 혐오스러운 거대 벌레를 집 밖으로 내보낼 수도, 일을 시킬 수도 없기 때문에 그를 멀리하게 되었고, 그레고르는 자기 방 안에 갇혀서 먹이를 받아 먹으며 비참하고 희망 없는 삶을 살게 된다. 그레고르가 벌레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일할 사람이 없게 되어 가정의 살림은 극도로 궁핍해지고 주위 사람들 시선도 갈수록 차가워져갔다. 결국 그레고르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은 상처가 악화되어 쓸쓸히 어둠 속에서 죽음을 맞는다. 시체는 가족도 아니고 가사도우미 할머니가 쓰레기처럼 내다버렸다. 그리고 그레고르로 인한 고통에서 겨우 해방된 가족들은 밝은 미래를 그리며 이사를 간다. 올해 4월경부터 우리 사회에는 이 카프카의 ‘변신’ 소설을 패러디한 벌레 게임이 유행이었다. 느닷없이 부모님에게 '어느 날 자신이 바퀴벌레로 변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물음을 던져 반응을 살피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불안이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선 특별한 용어다. 우리나라, 우리 동네, 우리 학교, 우리 회사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집, 우리 엄마, 우리 딸, 우리 집사람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어떤 의미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우리라는 말 자체가 울타리의 의미를 가진 공간의 의미가 있어 같은 공간에 사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공간으로서 ‘우리’는 명사로 동물을 가두어 기르는 공간으로 사용한다. ‘내가 벌레로 변하면 어떻게 할거야?’라는 질문에는 우리로서 내가 아닌 우리 바깥의 나였을 때 우리의 인식은 어떻게 변할까에 대한 불안인 것이다. 우리 학교, 우리나라, 우리 회사, 우리 집에서 나는 어떤 위치에 있느냐다. 나는 거기에 존재하기는 하는가. 모두가 동일한 존재로 있을 때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해야 할 때는 독창적인 태도나 독창적인 생각이 통용되지 않는다, 독창적이 된다는 것은 이질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즉 벌레가 되는 것이다. 남들과 같은 생각, 남들과 같은 행동을 취하지 않아 벌레 같은 존재로 취급되었을 때, 즉 집단 왕따를 당했을 때 부모님은 나를 어떻게 대해줄 것인지에 대한 불안과 확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서 벗어나 ‘나’로 살려고 할 때 부모는 나를 인정하고 응원해줄 것인지에 대한 확인이다. 나, 유일무이한 존재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다. 자기 자신의 고유한 의미와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가 있다. 그래서 개성진리체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은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한다. 부처는 자신을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설파했다. 성서에서는 하나님의 지정의를 닮아 난 말씀의 실체란 뜻으로 인간을 개성진리체라고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고유하고 개성 있는 존재이며 그러한 특성을 살려 나가야 할 숙명적 존재라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모양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른 것을 기뻐하고 찬양하며 생각이 다른 것을 존중해야 마땅하다. 화엄경을 축약해 설명한 의상대사의 법성게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一微塵中含十方(일미진중함시방), ‘하나 가운데 일체가 있고 일체 가운데 하나가 있으며,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며, 하나의 미세 먼지 가운데 시방세계가 들어 있고, 일체 먼지 중에도 그러하다’라는 게송 중 한 구절이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나와 너는 이 우주에서 서로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연결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행복하면 남도 행복해지고, 남이 불행하면 나도 불행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아서 서로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관계적 존재로서 인간 人間이든 人이든 한자로 써보면 사람은 확실히 관계적 존재임을 알 수 있다. 間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적 존재를 말하고, 人은 사람이 서로 기댄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자립된 인간끼리 필요에 의해 서로 기댄 모습이라면 서로 동등하게 기울인 모습이거나 꼿꼿하게 선 상태에서 서로 손을 잡은 모습일 수도 있을 텐데 人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몸을 기울여서 돌보는 모습을 하고 있다. 서로 기대고 있지만 비대칭적으로 몸을 기울여서 취약성을 돌보는 것이 인간임을 표현하고 있다. 서로의 취약성으로 몸을 기울여서 돌보는 관계, 이 관계는 누구에게나 필수적이다. 수직적인 권위가 남성적 권력과 질서를 표현한다면 기울어진 선은 그와는 다른 질서와 세계 구성의 원리를 담지한다고 페미니스트들이 말하기는 하지만 타자를 향해 비스듬히 기울어진 상태에서만이 타자에게 갈 수 있고 응답할 수 있다. 한 개인을 지칭하는 個는 人변에 딱딱하다는 固를 쓴다. 고체에선 구성 성분이 교류할 수 없듯이 교류하지 못하는 인간은 물이 얼어 차가워진 얼음처럼 딱딱해진 것이 個다. 그래서 사람이 아닌 물건을 셀 때 개를 쓴다. 상대를 향한 말랑말랑한 마음이 없거나 뭉클하고 질척거리는 영혼이 없는 딱딱한 몸은 물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관계적 존재라고 하는 것은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관계가 좋다고 하는 것은 타인을 존엄한 존재로 기꺼이 수용하는 것이다. 이타성은 바로 여기에서 나오며 자유라고 하는 것은 이 상호관계 속에서 자유롭게 통교하는 것을 말한다. 실제 존재의 힘은 여기서 나오며 번식과 창조의 힘도 여기서 나온다. 각기 다른 너와 내가 평화롭게 관계한다면 우리 사회의 내부 통합도, 진영 논리도 아무 장애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영어에서도 상대를 기억하고 존중하는 말에는 모두 re-(다시)가 들어가 있다. 기억하다 re-member, 인정하다 re-cognize, 존중하다 re-spect 등 모두 상대를 내가 다시 기억하고 다시 한번 더 생각해 주는 것이다. 당신이 우리 공동체의 일원임을 우리가 기억하고, 달라진 변화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임을 인정하며, 당신이라는 고유함을 계속해서 ‘다시-보기’하겠다는 것이 존중이다. 전통적인 인권론이나 서구철학에서 인간 존엄의 개념은 인간의 이성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정언명령을 세운 칸트는 인간의 이성을 근거로 존엄을 설명했다. 인간은 이성이 있기에 생각할 줄 알고 선악의 법칙을 세우는 능력을 가진다. 자기 삶의 목적을 설정할 줄 알고 그에 따른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진다. 이 책임 능력은 인간 이성의 자율성에 기초한다. 인간은 너에 대해서 나를 세우고 선악을 분별하여 이것을 서로 견주어서 의견을 세우고 타인과 의사 소통할 수 있다. 이렇게 ‘나’로서 나타나는 것이 인격이다. 그러나 만년에 기억장애를 동반한 치매를 앓았던 칸트는 자신의 이성의 힘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성숙한 인간이라고 강조한 그였지만 말년의 그를 존엄하게 지켜준 것은 그 자신의 ‘이성’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인정’이었다. 12월 말 한 해를 돌아보며 어떻게 활동해왔는지에 대한 성찰보다는 삶이 무엇인지, 사는 것은 결국 나와 공동체의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서 세상을 변혁하고 변혁할 수 있는 힘이 나온다고 믿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태도가 삶의 시선과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림설명: ‘나 자신으로 서다’ 독립이란 말도 결국 나 자신의 힘으로 서는 것을 말한다. 개인이든 국가든 마찬가지다. 아무리 내가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해도 나 자신으로 서 있지 않으면 그 공동체는 나와 별 상관이 없다. 주변에서 아무리 나를 지켜주고 응원해준다고 해도 나는 나의 힘으로 서 있어야 존재감, 자존감을 얻을 수 있다.] 필자 소개 -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글로벌피스재단에서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진행하고 있다. 2023-12-29 13:32:31
- [이두수의 절차탁마] 가짜노동 극복하기 [이두수 작가] 11월은 가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이 시기에 비가 내리면 기분도 음습하다. 왠지 죽은 자가 찾아오기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11월에 비는 눈이 되지 못한 채 내리는 차가운 비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 11월은 그런 계절이다. 1과 1일이 병립되어 있어 마치 우리 사회가 서로 일인자가 된 듯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다. 그래서 11월은 불편하다.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 지난 토요일 인천의 작업현장은 무척 추웠다. 아침에 살얼음이 얼어 있었는데 한 낮이 되어도 풀리지 않아 미장을 하면서도 이것이 제대로 굳은 것인지, 아니면 얼어서 붙은 것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방동제를 쓰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라서 이 맘 때 날이 추워지면 작업하기가 곤란해진다. 불편함을 느낀다는 것은 내 마음이 의도한 것이나 원하는 것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아서 비롯되는 것이다. 작업자의 의도와는 달리 주변 환경이 변하여 이에 따른 대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곤란함을 느낀다. 일과 노동이 내 맘같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최상의 행복이겠지만, 세상일이 어디 그렇게 되는가. 실은 인류역사 자체가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와 행복을 추구해 온 것이 아닌가. 11월에 나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개인 그림 전시회를 계획해 왔다. 솔직이 나는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한다. 내 그림에 대한 자신감이 없다. 단지 내가 직접 겪고 있는 노동현장이나 삶의 현장에서 곁에 있는 동료들을 그렸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그런 작업현장을 그렸기에 사람들은 흥미로워 한다. 그래도 요즘은 그림을 잘 그리고 못 그리고를 떠나 그림에 얽힌 이야기에 더 관심을 갖는 거 같아 나에겐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현재 일하는 회사에 스페인 전시회를 위해 2주간의 휴가를 신청했다. 좀 과한 기간이다. 그것도 바쁜 연말에 행사도 많아, 누구는 준비하고 실행해야 하는데 나만 빠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는 것임에는 틀림없어 마음이 불편했다. 회사나 직원들에게 미안함을 무릅쓰고 이미 오래전부터 계획된 것이라 마드리드행 비행기를 타버렸다.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르는 여행이 주는 의외성과 세렌디피티를 믿으며 어쩌면 이번 여행이 내게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는 막연함을 가지고 비행기를 탔다. 창고에서 발견된 노동자의 스케치북 일용직 건설노동자의 그림이 해외 전시회라니, 그것도 단독으로… 개인적으로 영광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건설노동자를 대표하는 그런 의미 있는 행사가 될 것이라 마음먹었다. 요즘 한류 콘텐츠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고 인기도 끌고 있는데 이런 기회에 나도 편승해보자는 기분도 들었다. 한 건설노동자가 노동에 대한 고민과 나름의 시각을 가지고 그림으로 표현한 것을 글로벌하게 공유해 보는 것은 한 개인의 전시회를 넘어 건설노동자를 대표하는 내용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전시회가 열리는 스페인은 15세기 해양시대를 연 역사적 의미를 지닌 매우 중요한 나라다. 전시장은 마드리드 시내 론다 거리에 있었다. 론다는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나’를 집필한 곳이며 그가 말년을 보낸 곳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이 세상에 너 하나뿐이라서 널 사랑한 게 아니라, 널 사랑하다 보니 이 세상에 너 하나뿐이야’ 누에보 다리 위에서 던진 이 한마디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그 명대사가 추억처럼 남아 있는 곳이다. 스페인에는 우리나라에도 친숙한 예수회(제수이트)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프랑스나 독일 지역에서 칼빈이나 루터 등의 종교개혁의 바람이 일어났을 때 가톨릭을 보호하고 자체의 개혁을 부르짖으며 나타난 것이 이냐시오 테 로욜라를 중심한 제수이트다. 이들은 가톨릭의 전통과 교의에 따라 더욱 철저한 신앙을 하면서도 자기 반성과 절대복종을 근간으로 가톨릭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며 무엇보다 해외선교에 앞장섰다. 당시 조선에까지 가톨릭이 전래된 데에는 이들이 중국이나 일본선교에 앞장서면서 성경을 한문으로 번역해 놓은 ‘천주실의’ 라는 책을 조선의 사신들이 들여온 것에서 비롯되었다. 스페인은 이외에도 강점이 많은 나라다. 스페인어는 세계 21개국의 모국어가 되며 세계인구의 사용인구 중 중국어에 이어 2위를 차지한다. 근미래 기대수명 1위, 세계관광경쟁력 평가 1위, 태양열발전 세계 1위, 세계문화유산 보유국 3위, 와인생산 세계 3위, 그리고 역사상 최고의 문학으로 칭송받는 돈키호테의 나라이며, 살바도르 달리, 피카소, 고야 등 무수한 화가들 등 풍부한 역사적인 유산뿐만 아니라 미래를 볼 때도 많은 가능성이 있는 나라다. 이번 전시회 제목은 ‘창고에서 발견된 노동자의 스케치북’이다. 소제목으로 “꽃을 배달하는 사람들”로 정했다. 노동자의 스케치북은 노동자의 눈으로 노동자의 손으로 노동현장을 그렸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붙였다. 실제 이 그림은 노동현장에서 그려진 그림이기도 했고, 세련되게 잘 그린 그림은 아니며 오히려 투박하고 거칠다. 그래서 현장성이 더 느껴진다. 이른 새벽에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거리청소부, 사무실에서 만나는 건물 청소부, 길거리에서 건널목 안전을 지키는 자원봉사자, 그리고 건설현장에서 만나는 각 공정의 노동자들 모습이다. 그림은 노동과 일에 대한 성찰이 중심내용이다. 노동의 의미 그리고 진짜 노동과 가짜노동 고대 그리스에서 노동은 칭송되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당시 그리스 사회는 시민과 노예로 나뉘어 있었고, 시민들이 가진 특권 중의 하나가 여가였다. 그들은 여가 시간에 아고라에 모여 토론이나 강연 모임을 주로 했고, 시민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고 믿었다. 그러나 몸으로 하는 노동에 대한 생각은 좀 달랐다. 구두장이는 고객을 위해 구두를 만들지만 신발제작은 신발의 본질에 복종해야 하는 부수적 활동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여가시간을 스콜레(schole)라고 불렀고 이런 토론회나 강연회는 학교school의 기원이 되었다. 이런 배움은 더욱 더 완전한 인간, 진리에 근거한 삶을 만든다고 생각했다. 이와는 반대로 육체 노동은 하찮음의 대명사였고 부자연스런 인간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평생 일하는 사람은 그의 말조차도 가치가 낮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노예나 일꾼들이 가치 있게 여겨지지 않은 것은 그들이 잘못이라기 보다는 그들이 덜 고상하며 진리나 인격이 잘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노동의 본질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보기 시작했다. 마태복음 25장의 우화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한 주인이 여행을 떠나며 세 노예에게 달란트라는 금화를 맡겼다. 첫번째 노예에게는 금화 5개를, 두번째 노예에게는 금화 2개를, 세번째 노예에게는 금화 1개를 맡겼다. 첫번째와 두번째 노예는 장사를 해서 금화를 각각 10개와 4개로 불렸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이들은 자신이 불린 금화를 내보이니 주인은 그들을 칭찬하며 더 큰 책임을 맡길 거라고 말했다. 그런데 세번째 노예는 받은 금화를 땅에 묻었다. 주인이 돌아오자 그 노예는 묻었던 금화 1개를 내 보이자 주인은 화를 내며 그 금화를 첫번째 노예에게 주라고 명령했다. 이 우화는 다양한 해석을 해 볼 수 있다. 우선은 우리는 우리의 재능을 묻어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재능이나 재화를 발전시키며 제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이것은 그리스적 사고 방식에서 기독교적 방식으로 전환이다. 즉, 고대 그리스에서는 원래 가진 재능의 양이 중요했지만 기독교인에게는 그 재능으로 무엇을 했느냐가 더 중요해진 것이다. 즉 과정에서 중요한 가치가 생긴 것이다. 그리스인들에게는 더 많은 것을 가진 것이 중요했지만 기독교인들에게는 가진 것이 중요하기 보다는 양을 불리는 과정이 더 중요했다. 이것이 서구 문화에서 노동의 가치를 가지게 된 근원이다. 이런 생각은 독일의 헤겔이나 마르크스로도 연결되었다. 이들은 노동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했다. 일한다는 것이 인간이 되는 것이다. 노동하지 않는 것은 인간성을 실현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물론 이 노동은 임금제나 시간 일당제 노동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에는 자신이 탈 보트를 만들거나 자신이 먹을 음식을 만드는 일도 포함된다. 즉 노동은 처리활동이다. 어떤 사물을 만들고 처리하는 과정은 인간이 자신의 환경과 유기적으로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이며 한 인간이 세상으로 들어가서 자기 자신의 방식을 만드는 것이다. 인간이 환경을 주관하고 자신을 외면화하는 것을 노동이라고 마르크스와 헤겔은 말했다. 즉 노동은 인간의 내면을 외면화시키고, 또한 외부를 내면화 시키는 과정이며 활동이다. 그렇게 인간은 자신 안에서, 환경 안에서 자리를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일할 때, 즉 세계와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할 때 자유롭다. 이렇게 노동은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와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어서 노동은 ‘본질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세계와 유기적 상호작용하는 방식의 유일한 핵심은 본질적으로 살고 있는가 비본질적으로 살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이 문제는 노동이 인간을 세계에서 소외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는 뜻도 된다. 즉 인간의 성립과 봉괴는 모두 노동에 달려 있다. 이렇게 노동이 인간 존재에 있어 필수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의미 있는 과정에 참여할 때 안정감을 느낄 것이며, 비본질적인 노동에 참여할 때는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소외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소외상태란 무엇이 진짜 노동이고 무엇이 가짜노동인지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사무직 노동일수록 즉, 시간엄수, 해결책의 모색과 모방, 과시, 감사, 회의, 홍보, 규제 같은 것들이 오히려 노동자를 노동에서 소외시키며 결국에는 노동자가 자신이 하는 일에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게 만든다. 현대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과거보다 더 많은 일을 하면서도 일로부터 더 많은 소외감을 느낀다. 그래서 정신적 불안감이나 우울증이 더 많아지고 있다. 이것은 가짜 노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빈둥거리기, 시간 늘리기, 일 늘리기, 그리고 일 꾸며내기 등이 대표적이다. 그저 모니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려 대고 전자 달력을 칸칸이 채워보며 관리자의 눈을 속인다. 관리자의 눈을 속이기 보다는 자신이 필요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업무와는 상관 없는 뉴스나 보고, SNS나 블로그에 게시물을 올리고 채팅을 한다. 바쁜 척하면서 아무 결과나 결실을 내제 못하는 계획과 실행의 반복이다. 이런 일의 반복은 오히려 노동자로 하여금 자존감을 잃게 하며 급기야는 정신 분열증을 가져오는 것이다. 진짜가 된다고 하는 것 <창고에서 발견된 노동자의 스케치북>Cuadernos de arista dentro de una caja de herramientas이라는 제목의 내 전시회 오프닝 세레모니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소감을 전했다. 나는 최선(最善)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한자로 보면 ‘최고로 좋다’ 라고 하는 것은 있는 힘을 다하는 '최선을 다하는 행위'를 말한다. Best of best is a behavior to do your best. 이번 전시회 소제목은 ‘꽃을 배달하는 사람’이다. 여기 모인 여러분은 모두 '꽃을 배달하는 사람'이다. 꽃이란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해 사는 사람을 말한다. 삶에 최선을 다하는 그 행위가 노동이다. 노동이란, 자기 내면의 가치나 규율 혹은 비전를 외면화하는 과정을 말한다. 그것이 루틴한 것이라도 늘 긍정적인 태도로 최선을 다해 일하는 사람, 그 사람이 진짜 노동자다. 이번 전시회 그림은 건설노동자나 청소노동자를 주로 그렸는데,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분들이다. 크게 대우받는 입장은 아니지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분들이다. 더러움, 오물, 먼지, 쓰레기 그리고 위험. 이런 것은 우리가 싫어하는 것들이지만 이런 것을 처리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노동자들이다. 겉으로 보면 어렵고 힘들고 더러워 보이지만 막상 이런 일도 해보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 우리가 평소에 이상으로 삼는 행복, 평화, 청결, 협동 이런 가치와 비전을 우리는 어떻게 이루려고 하는가. 말로 하는 연설, 멋진 글로 쓰는 칼럼 혹은 멋진 프로젝트 페이퍼 작성 등등 나름 의미있는 일들을 하고 있지만 그런 일들이 정말 행복한 보람으로 찾아오지는 않는다. 그것은 가짜노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짜 노동을 해야 한다. 내 내면의 가치와 이상을 실현하는 실천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Do your best! Do it 하는 것이다. 우린 행위를 노동이라고 한다.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하지만 몸으로 하는 행위에 좀 더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 그동안 우리는 몸으로 하는 행위를 비하하거나 천시해 왔다. 그리스 역사를 보더라도 몸으로 하는 노동은 주로 노예들이 담당했고 그래서 육체노동을 천시했다. 기독교, 특히 프로테스탄트의 등장으로 노동에 대한 관이 바뀌면서 비약적인 생산력의 발전을 가져왔다. 오늘 이 시간, 이 공간이 삶에 최선을 다하는 인생, 자기 삶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열심을 다하는 노동자, 꽃을 배달하는 그런 마음, 그런 생각을 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그림설명: 노동은 인간의 살아있는 행위다. 자신의 내면을 삶의 비전을 외면화 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공상적인 노동보다는 자신의 손으로 몸으로 일구어 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삶에 진실해지려는 과정이 노동이다.] 2023-11-21 06:00:00
- [이두수의 절차탁마] 연예.결혼.출산 삼포세대 …가장 큰 과제는 가정의 가치 회복 [이두수 작가] 지난주에 조카 J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결혼식이 드문 요즘 결혼식에 초대되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다. 결혼을 하지 않는 요즘 세태에 결혼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 결혼도 출산도 아니 연애도 하지 않아 이러다 국가가 소멸된다는 말까지 나오는 걸 보면 청년 결혼식에는 국가에서 결혼 장려금을 주어도 마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결혼은 예나 지금이나 일가친척이 다 모일 수 있는 경사스러운 축제이기 때문에 결혼식이 가져다 주는 사회 경제적 효과는 매우 크기 때문이다. 이런 행사를 청년에게 비용을 전부 부담시킨다는 것은 요즘 세상에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 선물로 내집마련 전세금을 지원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J는 남다른 성장과정을 거쳤다. 태어나 1년도 채 되기 전 엄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 외가에서 자랐고, 어느 정도 커서는 아버지와 함께 살다가 아버지도 사업 실패로 부양할 수 없게 되자 실부는 다시 외가에 양육을 부탁했다고 한다. “외가에서 돌보지 않으면 고아원에 보낼 수밖에 없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내 동생은 조카를 품었다고 한다. 본인도 남편과 사별한 가운데 두 아들을 키워야 하는 입장에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딸을 하나 더 낳았다고 생각하고 이를 악물었다고 한다. 결혼식장에서 엄마의 자리에 앉아 기쁘게 시집 보내는 조카를 아니 자신의 딸을 바라보는 동생의 모습이 무척 장해 보였다. 소설같이 아름다운 한 가족을 보는 듯했다.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훌륭하게 자란 조카들의 모습이 자랑스럽다. “이것이 사랑이지. 이것이 가족이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사촌 작은집 현관에 붙어있는 문구다. 다소 촌스럽지만 예전에는 어느 집이나 허름한 식당에도 걸려있던 문구다.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는 의미다. 가정이 화평해야 가족들이 심리적인 여유를 갖게 되고 얼굴 표정도 밝으니 사람들은 이런 가정을 좋아하게 되고 이런 집에 복이 들어오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웃으면 복이온다 笑門萬福來라는 문구도 많이 걸려 있었다. 물론 예전에도 각 가정에는 크고 작은 문제가 많이 있었지만 가화만사성을 이루기 위해 가족 구성원 모두가 노력했다. 가정만이 아니라 온 사회가 그런 분위기였다. 대다수의 가정에는 집이 좁아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셨고 손자손녀까지 3대가 함께 사는 가정이 많았다.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 핵가족이 되더니 요즘은 핵분열이 되어 1인 가구가 늘어나고 있다.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가정 내에 있던 노인, 청소년, 유아 양육을 사회가 떠맡게 되면서 노인복지, 청소년교육, 유아보육 등이 사회문제가 되어버렸다. 가정 내에서 화목과 화평을 이루며 행복의 원천이 되어야 할 존재들이 어쩌다 사회의 문제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루소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을 사유 재산의 "소유"라 지적했다. 인간은 소유라는 관념을 통해 자신의 재산과 남의 것을 구별하게 되었고, 자기 보존욕구에 따라 자기 재산에 대한 애착을 갖게 되었다. 뒤이어 기술과 도구의 사용으로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고 각자 소유하는 재산의 많고 적음도 알게 되었다. 혼자서 두 사람 몫의 양식을 차지하는 것이 유리함을 알아차리게 되자마자 평등이 사라지고 소유가 도입되고 노동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광대한 숲은 인간이 땀으로 적셔야 할 경작지로 변했고 이로부터 예속과 비참이 싹트고 증가하게 되었다. 정치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정부를 가지게 되는 바로 그때가 인류에게는 자연 상태와의 결별이다. 이로써 사람들은 생존욕구로부터 소유욕구로 바뀌게 된다. 즉 남의 것을 빼앗아 소유하려는 준비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인류 사회는 토머스 홉스의 말처럼 이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으로 변해 버린다. 이런 상태에서는 당연히 가진 자, 즉 힘센 자가 지배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가 된다. 갈수록 힘센 자의 지배는 강화되고 가난한 자, 즉 약한 자의 의무는 커간다. 그리하여 사회 속의 구성원 간의 인간 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굳어져 버린다. 이처럼 자연 상태의 인간 본성은 천성적으로 선하나, 사회 상태의 인간은 사악하다. 인간을 이렇게 타락시킨 장본인은 인간이 이룩한 발전과 인간이 획득한 지식이다. 그렇다면 자연 상태를 벗어난 인간이 순수하고 행복했던 그 '미개인의 신화적인 이미지'를 되찾는 길은 무엇인가? 아니, 그것까지 되찾지는 못할지라도 약한 자가 힘센 자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이 사회계약론이다. '자신의 힘과 자유를 일반의지에 양도'함으로써 법 앞에서의 평등과 그 속에서 시민의 자유를 누리는 사회를 루소는 그리고 있다. 우리 사회는 현재 루소가 이야기하는 대로 물질적 소유가 최고의 생존가치가 되어버렸다. 전통적인 가정에서는 가정 내에 조부모, 부모, 손주 이 3대가 어울리며 살아가면서 윤리와 교육 그리고 복지라는 가정의 가치를 유지해 왔지만 지금은 물질적 소유가 이 가정의 가치를 형편없고 후진 것으로 폄하해 버렸다. 가정에서 조부모, 부모, 손주는 과거, 현재, 미래를 상징하고 자녀, 형제, 부부, 부모의 사랑을 체험하며 인간다움을 배우는 곳인데도 말이다. 인구소멸, 국가소멸, 이제는 이 문제를 남의 이야기로 볼 것이 아니라 당장 우리 현실의 문제가 되었다. 물질적 소유와 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 믿음이 강할수록 가정의 가치는 약화되고 가정은 무너져왔다. 효, 사랑, 눈물, 땀이 어우러지는 가정이라는 아날로그의 질척한 문화보다는 디지털 문화의 깔끔함에 도취되어 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인공지능(AI)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믿음을 많은 사람들은 갖고 있다. 휴대폰 하나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편리한 기술에 적응해 갈수록 한편으로는 인간이 기술에 지배당하는 디스토피아에 대한 공포감도 증가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이런 불안은 더 커져갔다. 인간과 기계의 차이는 공감능력의 차이였다. 이제 사람들은 인공지능의 발달로 사람과 사람의 대면관계보다는 사회관계망(SNS)을 통한 접촉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가정 내에서나 사무실 내에서조차 대면접촉보다는 인터넷상의 대화를 더 선호하고 있다. 친구와 만나 이야기하면서도 손에서는 쉴 새 없이 문자로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직접 대면하는 가족 간이나 교실에서 학우들과의 대화가 어색해지고 예의가 없어지는 것이다. 인공지능에 의한 SNS 의존이 커질수록 우리는 자신의 사고와 행동까지 통제되고 조작될 수 있다. 이미 SNS를 통해 나의 취향과 패턴을 파악한 인공지능은 내가 좋아할 만한 것을 제안하기 때문에 내가 가고 싶은 곳, 사고 싶은 것을 조작당하며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순응해 가게 되는 것이다. 공감능력과 자율성을 잃은 인간은 자신이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역사를 통해 자유를 얻기 위해 생명을 던지면서까지 투쟁해 왔던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을까. 요즘도 사람을 사랑하기 어려워하고 애완동물에 더 많은 애정을 쏟고 있는데 인류애가 지속될 수 있을까. 인간이면서 인간에 대한 애정이 사라지기 때문에 가정은 해체되고, 가정이 해체되니 당연히 출산은 줄어드는 것이다. 출산의 급격한 감소는 가장 확실하게 현실적으로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다. 당장 현실적으로 내년 입학생 수는 386만으로 갑자기 100만명이 줄어든다. 그리고 그 이후 해마다 20만명씩 줄어들어 6년 후에는 236만명으로 줄어든다. 지금 학생 수의 절반으로 줄어드는 것이다. 학교문제, 군대문제, 노동인력문제가 매우 심각해지는 것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문제를 아무도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 지도자들이 여기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정치기반을 만드는 지역기반이 인구다. 이 나라 안보를 지켜낼 군인들이며, 회사의 사원이며 물건을 사줄 소비자다. 사람이 있어야 지속적인 발전을 할 수 있다. 당장 학교는 어떤가. 이제 몇 년 후면 지금의 학생 수가 반토막이 될 것이다. 교육감들은 교사 생존을 위해서라도 미래 학생들 모집을 위해 청년들에게 읍소해야 한다. 가화만사성, 어렵거나 심오한 말이 아니다. 하지만 이 문구가 가정마다 걸려있을 때 우리 가정은 건강했고 우리 사회는 활력이 넘쳤다. 가정이 있었기 때문에 어렵고 힘든 사람도 살아갈 힘이 있었다. 가정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에 좀 더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라도 가정의 가치가 회복되어야 한다. 경제도 안보도 교육도 부동산도 가정만큼 시급하지 않다. 가정이 무너지면 다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설명: 이 땅의 모든 선남선녀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단군 이래 가장 좋은 실력과 가장 빛나는 외모를 가진 청춘들, 힘내기를 바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가정을 만들기 바란다. 축하의 꽃다발을 보낸다.] [이두수 작가 제공] 필자 소개 -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글로벌피스재단에서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진행하고 있다. 2023-10-27 06:00:00
- [이두수의 절차탁마] 걸으며 하나되고 또 다른 나를 만난다 [이두수 작가] 느림과 멈춤, 산업화시대를 거치면서 이런 말들은 근면이나 성실과는 상치되는 아주 게으른 언어가 되었다. 한류의 세계적 확산과 함께 수출된 우리말이 있다면 아마 ‘빨리빨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빨리빨리’가 문화로 정착하려면 그 저변에 ‘눈치’라고 하는 구성원들의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 상대가 말하지 않아도 눈치껏 알아서 하는, 좋게 말하면 이것이 ‘정 문화’로 승화되지만, 구성원들이 눈치가 없으면 ‘빨리빨리’는 하나의 폭력언어가 된다. 특히 구성원들 간의 정 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빨리빨리를 요구한다면 여러가지 문제점이 발생한다. 디지털 문화에선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는 라떼문화의 추억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회는 아날로그를 넘어 디지털문화환경에서 초고속연결사회가 되면서 더 이상 ‘빨리빨리’ 라는 말이 필요 없게 되었다. 이제는 인간이 하는 것보다 기계가 하는 것이 더 정확해지는 시대가 된 것이다. 머지않아 사람이 운전하는 시대는 종식을 고할 것이다. 택시는 무인자율주행 택시가 될 것이고 사람이 운전하려고 하면 사회시스템이 오히려 더 불안해할지 모른다. 지금 우리는 인간은 무엇인지, 어떤 것이 인간미가 있다는 것인지 그 의미가 모호한 인간과 기계의 경계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인간, 너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되돌아보면 인류는 걸음으로 새로운 문화와 문명을 만들어 왔다. 걸음은 두 다리와 직결되어 있으나 정신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루소의 말을 빌리면 정신이 작동하려면 내 몸 또한 움직이는 상태에 있어야 한다. 루소는 걷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 홀로 걷고 걸었던 그 여행만큼 생각을 많이 한 순간은 없었다. 또 그때만큼 내 실체에 대해 많이 깨닫고 활력이 넘쳤던 적이 없다. 말하자면 걸을 때만큼 내가 나다웠던 적은 없다.’ <걷기 예찬>을 쓴 다비드 르 브르통(David Le Breton)은 현대 사회의 인류가 직면한 위기를 주체의 위기, 즉 정체성의 위기로 예단하고,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사상적 대안을 제시했는데 그가 내놓은 21세기 최고의 화두가 바로 ‘걷기’다. 최근 걷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지만 지금도 걷기를 한다고 하면 “그건 출근하기 전 잠깐 공원을 걷는 것이지” 하거나, “그 시간에 골프를 하는 게 낫지 않냐, 같은 운동인데” 라거나 “바쁜데 자동차로 여행하는 게 더 낫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걷는다는 것은 단지 두 다리의 움직임만이 아니라 사색의 여행이라는 것을 걸어보면 안다. 브르통의 <걷기 예찬>에 따르면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한다는 것이다.” 도보 여행은 인생의 맛을 충만하게 느끼는 경험이 된다. 걷기는 걷는 시간 속에 녹아 있는 모든 인생의 참맛을 느끼고 음미할 수 있는 절대적인 경험이라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 우리는 바쁜 일상 속에서 인생이 주는 맛을 모두 비껴간 채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어떤 욕망에 따라서 시간의 암흑 속을 떠돌고 있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인생이라고 느끼고 있는 모든 일상의 분주함은 우리의 본질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허구인지도 모른다. “도보여행자는 ‘만인에게 주어진 아름다움’을 찾아 떠나는 여행자다. 걷기는 자연이라는 넓은 도서관에 입실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음미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걷기의 미학이다.” 요즘 해남 땅끝마을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걷기를 하고 있다. 9월 1일 시작해 33일간 매일 20킬로미터씩 600여 킬로미터를 걷는 것이다. 오늘 천안까지 왔다. 이 걷기의 이름이 “위대한 여정-코리안드림대행진”이다. 다가올 통일의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국민적인 참여와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걷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내가 걷기를 한다고 하니 사람들은 나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도 있고, 대단하다며 격려해 주는 사람도 있지만 아직까지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지는 않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처럼 계속 걷다 보면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내 뒤로 길게 줄을 서서 걷고 있지 않을까 하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통일된 한반도는 아주 먼 옛날 고조선을 건국할 때 홍익인간,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건국이념을 실현하는 나라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뜻은 우리 역사를 관통하는 역사의 뜻이며 유훈이다. 미국의 건국정신을 아메리칸 드림이라 부르는 것처럼, 홍익인간의 정신을 실현해 나가는 것을 ‘코리안 드림’이라 불러보자. 이번에 한반도를 종주하면서 우리의 산하를 보며,역사유적지를 가보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체험하게 되는 것은 역시 우리 민족에 관통하는 것, 바로 이 홍익인간의 위대한 정신의 확인이었다. 걷는 데 힘이 되라고 어떤 사람들은 비가 세차게 내리는데 밭에 가서 참외를 따왔다. 어떤 이는 아이스를 박스째 사가지고 오셨다. 함께 하지 못하는 미안함, 하나라도 더 주지 못해서 안달하는 안타까움, 이런 기적 같은 만남이 매일 이어졌다. 이 코리안 드림 운동은 홍익인간 정신이 구현되는 새로운 문화, 문명을 이루어 내는 매우 인문학적인 운동이다. 그래서 걷기를 하는 것이다. 걷기를 통해 역사를 만나고, 또 다른 나를 만나고, 자연을 만나고 신을 만나는 동적이면서도 사색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오늘 공주에서 천안으로 이어지는 구간에 참여한 장남기 선생(기업자문 대표)에게 걷기에 참여하게 된 동기를 물었다. “걷기란 나에게 있어 단절이고 대화다. 아무래도 사업가로서 해야 할 여러가지 일을 놓고 여기에 참여하려면 결단해야 한다. 일이라는 한쪽을 잘라내야 하는 것이고 대신 다른 한쪽과 이어주는 것이 바로 자연과의 대화다. 머리가 복잡하면 단절이 필요하다. 기존의 것과 단절이 필요하다. 거기엔 물론 용기가 필요하다. 자연을 보면 많은 가르침이 있다. 우리 절기 중 처서가 있다. 이 처서는 식물의 성장이 멈추는 시기다. 이 처서를 지나야 곡식과 과일이 익어가는 것이다. 성숙을 위해서는 멈춤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삶에는 멈춤의 미학이 필요하고 느림의 철학이 필요하다.” 옛말에 수노근선고 인노퇴선쇠(樹老根先枯 人老腿先衰)란 말이 있다. 나무는 뿌리가 먼저 늙고 사람은 다리가 먼저 늙는다는 뜻이다. 사람이 늙어가면서 대뇌에서 다리로 내려 보내는 명령이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고 전달 속도도 현저하게 낮아진다. 불로장생의 비결은 산삼이나 웅담, 녹용 같은 값비싼 보약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예로부터 다리가 튼튼해야 장수한다는 말이 있다. 사람은 다리가 튼튼하면 병 없이 오래 살 수 있다. 사람이 늙으면서 가장 걱정해야 하는 것은 머리카락이 희어지는 것도 아니고 피부가 늘어지고 주름살이 느는 것도 아니다. 다리와 무릎이 불편하여 거동이 어려워지는 것을 제일 걱정해야 한다. 장수하는 노인들은 걸음걸이가 바르고 바람처럼 가볍게 걷는 것이 특징이다. 두 다리가 튼튼하면 백 살이 넘어도 건강하다. 사람의 전체 골격과 근육의 절반은 두 다리에 있으며 평생 소모하는 에너지의 70%를 두 다리에서 소모한다. 사람의 몸에서 가장 큰 관절과 뼈는 다리에 모여 있다. 특별히 넓적다리의 근육이 강한 사람은 심장이 튼튼하고 뇌 기능이 명석한 사람이다. 미국 정부의 노년 문제 전문 연구학자 사치(Schach) 박사는 20살이 넘어서 운동을 하지 않으면 10년마다 근육이 5퍼센트씩 사라진다고 하였다. 뼛속의 철근이라고 부르는 칼슘이 차츰 빠져나가고 고관 관절과 무릎관절에 탈이 나기 시작한다고 하였다. 그로 인해 부딪치거나 넘어지면 뼈가 잘 부러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다리를 튼튼하게 할 수 있는가? 다리를 단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걷는 것이다. 다리를 힘들게 하고 피곤하게 하고 열심히 일하게 하는 것이 단련이다. 다리를 강하게 하려면 걸어야 하는 것이다. ‘걸으면서 싸우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걷는 이가 많아지면 사회 곳곳에 건강한 사람의 나무가 서고 높은 언성도 줄어들고 건강한 웃음꽃이 활짝 필 것이다. 아기가 태어나 기어만 다니다가 어느 날 일어서 첫 발자국을 뗄 때 모든 어른들이 박수치며 환호하는 순간이 있다. 내가 일어나 우주를 이고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신이 내린 첫 번째 선물을 받은 것이다. 걸으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인생을 이야기하고, 서로의 비전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지식을 나누고, 경험을 나누다보면 갈라진 우리 마음들이 하나로 모아질 것이다. 혼자만이 아니라 친구와 가족 또는 이웃들과 함께 걸어보자.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를 걸어보고, 내 나라를 걸어보고, 세계를 걸어보는 것이다. 내 한 걸음이 우리의 걸음이 되고, 우리의 걸음이 역사를 바꿀 대행진이 될 것이다. 걸음을 통해 ‘빨리 빨리’에서 느긋함으로, 조급함에서 성숙함으로 우리 문화의 스탠스를 바꿔보자. ‘놀면 놀면’ 혹은 ‘사묵 사묵’하게 걷는 우리네 양반걸음이 지역과 세계를 하나로 잇는 거대한 인문 문화의 발걸음이 될지 모른다. 걸으며 생각하는 것이 가장 인간다운 행위인 것이다. 자연과 신과 혹은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데 걷는 것만큼 품위 있는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걷는 자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해남 땅끝 마을에서 DMZ를 지나 백두산까지 아니 세상 끝까지 걸어가고 싶다. 만나는 사람마다 “당신이 하늘이오”라고 존경을 표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진리를 깨닫고 싶다. 걷는 자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걸음으로 새로운 문화와 문명을 만들 수 있다./그림, 이두수 작가] 필자 소개 -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글로벌피스재단에서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진행하고 있다. 2023-09-25 06:00:00
- [이두수의 절차탁마] 너와 내가 진짜 빛이 되어야 할 '光復' [이두수 작가] 지난 8월 15일 광복절 기념행사로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거행된 통일실천결의대회에 참석했다. 행사 마지막 식순으로 광복절 노래를 부르는데 가슴이 뭉클했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 일을 잊을 건가/ 다 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의 보람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힘써 힘써 나가세 이 노래를 부르며 광복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본다. 위키백과에 보면 광복절은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광복의 의미 광복절(光復節·National Liberation Day)은 영예롭게 회복한(光復) 날(節) 이란 뜻으로, 1945년 8월 15일에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한반도가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고, 3년 뒤인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을 경축하는 대한민국의 법정 공휴일이다.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국경일로 지정되었으며 3·1절, 제헌절, 개천절, 한글날과 함께 대한민국의 5대 국경일이다. 문제는 광복절에 대한 설명이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의 의미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독립기념일의 날이 같은 날이며 광복의 의미가 해방과 독립의 의미를 둘 다 함축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해마다 8월이 되면 우리는 8월 15일 광복절에 대한 의미를 놓고 이날이 해방일이냐, 독립일이냐 하는 논란과 함께 광복절이 몇 주년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인다. 그 의미의 연장선상에서 ‘통일’에 대한 의미까지 논쟁에 휘말린다. 광복의 의미를 ‘빼앗긴 주권을 회복한 날’로 본다면 그날은 언제일까?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한반도는 일제에서 해방되었다. 하지만 즉시 38선을 경계로 한반도 남북에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였다. 주권이 일제에서 우리에게 넘어 오지 못하고 미.소군정에 넘어간 것이다. 남한에서는 1948년 5월 10일 선거를 통해 국민의 대표 선출 - 5월 30일 제헌의회 소집 - 동 의회가 7월 17일 헌법 제정 - 7월 24일 그에 따라 초대 대통령이 선출 - 그의 주도로 8월 4일까지 행정부가 수립되어 비로소 8월 15일에 해방의 기쁨도 함께 경축하는 의미에서 이날에 독립을 선포한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선포식을 하게 되자 비로소 미군정이 주권을 이양하고 물러갔다. 이렇게 보면 일제에서 해방되었다고 ‘광복’된 것이 아니라 미군정이 종식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에 비로소 ‘광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원래 광복절을 국경일로 정하게 된 배경을 보면 광복절 제정 이유가 '잃었던 국권을 회복하고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을 경축하며 독립정신의 계승을 통한 국가 발전을 다짐하기 위함이다'. 독립을 위한 노력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보장받은 첫 번째 국제회의는 1943년 11월 27일 발표된 카이로 선언이다. 미국, 영국 그리고 중국이 전후 처리를 위해 모인 이 자리에서 한국을 독립시키자는 논의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중국 대표인 장제스가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주요 의제로 내세웠지만 미국은 그것을 중국의 위임통치 야욕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선언문에는 ‘가능한 한 가장 이른 시기에’를 ‘적절한 시기에’로 바뀌더니 나중에는 ‘적절한 절차로’라는 문구로 바뀌어 국제신탁통치의 여지를 남겼다. 우리 운명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하지 못하고 힘 있는 나라들의 역학관계에 의해 나라의 운명이 좌우되는 그런 처지에 있었지만 우리는 ‘적절한 시기에’ 독립을 시켜준다는 말에 환호했다. 사실 우리나라가 국제법적으로 독립을 처음으로 보장받은 조약은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이다.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청에 대해 조선의 독립을 조약 제1조항에 넣을 것을 요구했다. ‘제1조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독립 자주국임을 확인한다. 따라서 자주독립을 훼손하는 청국에 대한 조선국의 공헌(貢獻)·전례(典禮) 등은 장래에 완전히 폐지한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해는 1884년이다. 조선이 근대적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신분제를 타파하고 청나라에 대한 사대를 철폐하고 입헌군주제를 통한 독립국가로 나아가고자 했으나 청국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했다. 이후 10년 만인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갑신정변 주역들이 사면·복권되면서 청과 사대관계를 정리했다. 그 상징적인 건축물이 독립문이다. 독립문이 서 있던 자리는 조선 초기에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세운 모화관과 영은문이 있던 자리였다. 독립문은 과거 봉건시대를 청산하고 서구식 근대화를 따를 것이라는 의지의 표현으로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만들었다. 이 독립문을 세우면서 시민교육과 계몽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독립협회다. 이러한 선각자들의 노력도 국가적 비전이나 국민적 합의가 되어 있지 않으면 개혁도 지속할 수가 없다. 실제 고종은 러시아의 힘을 이용해 왕권을 유지하려 했고, 아관파천 이후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나름 독립국임을 내외에 선포했지만 국제적 역학관계를 해결할 힘이 없었다. 국민 지도자라고 하는 지방 유생들은 위정척사를 내세우며 기득권 유지를 위한 신분제 옹호와 이를 포장하기 위해 외세 배척이라는 깃발을 들었다. 이런 혼란을 겪다가 나라는 결국 일본에 합병되고 만 것이다. 해방, 독립, 광복, 그리고 통일 우리 사회가 아직도 해방, 독립, 광복에 대한 개념조차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큰 문제다. 이런 현상이 수습되지 못하고 혼란이 계속되는 그 원인적인 부분을 나는 세상을 보는 관점의 차이라고 본다.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의 시각이다. 세계의 근본은 물질이며 물질로 통일되어 있다는 유물변증법은 자연이나 사물현상을 대립물의 투쟁과 통일로 설명한다. 대립물들이 한 사물현상 안에서 서로 다른 것의 존재의 전제(의존)가 되는 관계를 통일이라고 하며 서로 다른 것의 존재를 부정(배척)하는 작용을 투쟁이라고 한다. 존재의 구성물이 대립물의 투쟁에 의해 존재·발전한다고 보며 역사의 발전 과정이나 오늘날 사회의 변화·발전도 이 시각에서 해석하고 설명한다. 우리 사회의 노사 문제, 교육 문제, 역사 문제, 의료 문제 심지어는 남녀 문제도 다 이런 시각에서 보고 처방을 내리는 것이다. 또 다른 시각은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성상(내적인 성격)과 형상(외적인 형태)으로 존재하고 이 두 요소는 차원은 다르지만 서로 닮았고 관계되어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두 요소는 서로 닮은 면이 있기 때문에 조건에 따라 가깝게 때로는 멀게 관계하며 존재한다. 그러므로 어떤 조건을 갖추느냐에 따라 그 관계성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이 두 존재를 대립물이라 볼 수 없으며 존재는 투쟁으로 발전하기보다는 관계성에 따라 발전과 퇴보를 한다고 보는 시각이다. 이런 시각과 관점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우리 사회의 혼란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광복이라는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통일을 바라보는 시각도 이것을 내부적 민족 문제로 보느냐, 지정학적 이슈로 보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 남북 분단은 우리가 원치 않은 상황이었으며 이걸 해결하는 것은 남북의 당사자들이라는 민족주의적인 부분이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축을 이뤘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한반도 상황이 국제적 상황이나 국내 위상 부분에서 더 이상 민족 문제로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한반도의 미래 비전을 민족 문제와 지정학적 이슈를 같이 엮는 일종의 그랜드 디자인 혹은 대전략에 우리 사회가 합의하는 게 중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는 국가나 민족이라는 거대 담론에서 개인의 독립이라는 측면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개인의 해방은 인권의 문제이며 개인의 독립이란 자존감의 회복이며 열등감의 극복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점은 결국 개인을 어떻게 보고 대하느냐의 문제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주보다 귀한 고유한 개인의 가치 회복은 기독교적 소명의식의 회복이며 유교에서 말하는 천명의 자각이다. 근대 시민운동의 효시라고 할 동학의 사인여천(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이며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슈(초인·넘어선 사람)의 각성이다. 자기의 고유한 개성과 삶의 철학을 겸비하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공헌할 수 있는 기술과 역량을 갖춘 시민이 되는 것이다. 광복절 노랫말처럼 ‘세계와 하늘에 닿을 자신을 빛내는' 것이다. 이 노랫말은 일제하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던 타고르의 시에 화답이라도 하는 듯, 이제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으니 동방의 밝은 빛이 되어 하늘에 닿을 때까지 힘써 나가자는 결의가 느껴진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대에 /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光復, 너와 내가 진짜 빛이 되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림 설명] 인간이 걷는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 처음 걸을 때 그의 삶이 시작되고 힘이 없어 걷지 못하게 될 때 그의 삶은 끝나는 것이다. 인간은 걷는 것에서 문화와 문명을 창조했다. 우리는 자신의 고유한 빛을 가지고 있다. 각자의 빛을 발하는 것이 자주, 독립, 해방, 통일이다 [이두수 작가 제공] 필자 소개 -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글로벌피스재단에서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진행하고 있다. 2023-08-28 06:00:00
- [이두수의 절차탁마] 내면의 빛과 만날 용기 [이두수 작가] 내 안의 법은 무엇인가 며칠째 비가 내린다. 충남 이남 지역에 막대한 인명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는 뉴스가 전해지고 있다. 재수 없는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비 내리는 창가에 기대어 창밖을 내다보는 것이 참 아름답다고 느끼기 때문에 비 내리는 것이 싫지 않다. 인지부조화의 한 면일 것이다. 어릴 적에도 장마 때면 아버지는 논물 보느라 종일 논에 나가 도랑물이 넘치지 않나, 논두렁이 터지지 않나 살펴보시며 애간장을 태우는데 나는 도랑물에 붕어라도 잡겠다고 족대를 훑고 다녔다. 지금도 휴대폰에는 비 피해가 없도록 산이나 물가에 나가지 않도록 경고하는 메시지가 자주 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빗물이 창문에 빗살무늬를 그려대며 내리는 창밖 풍경을 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다. 나를 움직이는 법은 무엇인가. 나를 나다운 독립된 실체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커피를 마시며 문득 드는 생각은 내가 만일 커피콩이라면, 아니 어떻게 하면 커피 같은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를 떠올리며 나에게 묻는다. 나에게 묻는다. 커피 원두 찌꺼기 함부로 버리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는 커피처럼 자신을 로스팅한 적이 있느냐. 사람들은 글이 안 써질 때 커피를 마신다. 뭔가 심각한 일이 생기면 커피를 찾고, 기쁘거나 즐거울 때도 커피를 찾는다. 커피는 이제 우리 생활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는 음료가 되었다. 커피의 맛이나 향, 색깔을 얻기 위해서는 로스팅이라는 과정을 겪는다. 생콩은 맛도 없거니와 그라인더로도 잘 갈리지 않는다. 한 인간의 삶도 커피와 같은 과정을 겪지 않고는 자기의 맛을 제대로 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것, 나의 맛을 나게 하려면 나의 삶을 태우는 것이다. 무엇인가에 심취하여 자신의 삶을 다 바쳐 뜨겁게 태워 화학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그 삶은 날콩처럼 밋밋한 맛이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변화를 거부하는 고집불통이 되는 것이다. 무엇인가에 자신의 삶을 뜨겁게 불태운 사람은 그 삶에서 광채가 나고 향이 난다. 때깔이 좋고 향이 난다고 해서 거기서 멈춘다면 원두에 지나지 않는다. 그라인더에 들어가 아주 곱게 갈려야 한다. 자신의 존재 형체가 완전히 사라진 가루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완전히 부정된 가루가 되었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가루에 뜨거운 물을 부어 바닥까지 내려가야 한다. 바닥까지 완전히 내려가 영혼까지 완전히 우러났을 때 커피에서 그윽한 향이 난다 하고, 맛은 쓰지만 달기도 하다는 평을 듣는다. 처음엔 맛이 쓰지만 마실수록 깊은 맛이 나야 좋은 커피다. 사람도 그렇다. 사람의 맛 사람에게도 맛이 나고 향이 나는 삶이 있다. 열심히 치열하게 사는 사람에게서 나는 사람 냄새다. 아직도 이런 말을 하냐며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이 아니라면 평범하게 슬슬 놀면서 평안하게 사는 게 좋다고 말하는 친구들도 주변에는 많지만 우리가 삶에 활력을 얻기 위해 커피를 찾듯이 사람도 뭔가 최선을 다해 삶을 불태우는 사람 곁에 있어야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며칠 전 최진석 교수님이 비슷한 경험을 글로 쓰셨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내려놓는 삶에 대해 말했다. "참되게 사는 길은 내려놓고, 비우고, 욕심내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사니 행복하고, 오히려 마음은 충족감으로 가득하다." 그러면서 자신은 고향에 내려가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눕고 싶을 때 눕고 사니 이 이상 행복할 수가 없고 자유로울 수가 없단다. 집에 가는 길에 나는 혼자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인간은 자고 싶을 때 자면서 고유한 특성을 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고 싶어도 안 잘 수 있어서 인간이다. 인간은 먹고 싶을 때 먹으면서 고유한 특성을 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먹고 싶어도 안 먹을 수 있어서 인간이다. 인간은 눕고 싶을 때 누우면서 고유한 특성을 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눕고 싶어도 안 누울 수 있어서 인간이다.” 인간은 사실 편한 상태를 추구하지만 그 편한 상태를 만들기 위해 불편을 감수해왔다. 오늘날의 문화나 문명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적인 여성해방은 세탁기와 전기밥솥이 발명되면서부터다. 이런 가전제품이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의 노력이 더해졌다. 이런 과정을 모르고 결과물만 취한다면 종속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다. 시끄럽고 귀찮게 하면 떡 하나 더 준다는 것으로, 상대가 감정이 상하면 더 떼를 쓰니 잘 달래주어 후환이 없게 한다는 말이다. 요즘 우리 사회의 개인이나 조직, 특히 정치 성향의 단체행동이 딱 이 모양이다. 이성적이지도 않고 과학적이지도 않은 내용을 마치 화학조미료만으로 맛을 낸 요리처럼 감성을 자극하는 노이즈 마케팅을 통해 사회를 분열시키고 혼란스럽게 만들어 여기서 파생되는 이익을 취하려는 모습이다. 줏대가 없는 사람은 자기 판단이나 생각이 없으니 떡 하나에 넘어가거나 떡 하나 더 달라는 무리에 휩쓸릴 수밖에 없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보면 가난한 구두공과 천사를 등장시켜 우리로 하여금 ‘사람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천사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모든 사람이 자신에 대한 걱정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돌보고 앞날을 계획했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마음에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몇 해 전 북해도에서 P라는 여성을 만났다. 북해도 아시히카와시에는 아시히야마라는 동물원이 있는데 일본 최북단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최고 인기의 동물원이다. 북극곰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펭귄유치원 같은 시민 친화적인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이다. 아사히야마 동물원의 한국어 해설이 바로 P씨 목소리다. 그녀의 목소리나 글은 이 지역 관공서나 관광지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으며, 한국에서 방송이나 드라마 촬영을 올 때도 대개 P씨를 통할 정도로 이 지역에선 제법 유명 인사다. 한국에 가장 많은 작품이 소개된 작가 미우라 아야코의 고향이 아사히카와인데 P씨의 삶이 미우라 작가와 비슷했다. 그녀는 ‘그림자 없는 삶’을 자신의 삶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고 했다. “제 삶은 북해도 겨울바람처럼 춥고 외로웠어요. 생명줄을 놓고 싶을 때가 많았죠. 그렇지만 북해도에도 봄이 있어요. 산 같은 눈을 녹여 예쁜 꽃을 피우는 고운 햇살이 있더라고요. 이웃들에게 고운 햇살처럼 살려고 무척 노력했어요. 나누면서 살려고 하니 같이 살아지네요.” 마음의 법, 이데올로기 그리고 진영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이나 ‘남을 위해 살아가라’는 말 또는 홍익인간의 ‘남을 이롭게 하라’는 말은 공통점이 있다. 이타적 삶이다. 이런 삶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쩨쩨한 삶이 아니며 궁색하지 않다. 기독교가 신과 개인 간의 약속을 중요시 여기지만 그 중심에는 사랑이 있다. 유교는 삼강오륜이라고 해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중요시 여기지만 그 중심에는 자신을 낮추려는 겸허가 있다. 불교는 모든 현상의 인연을 중시하며 현재의 인터넷망처럼 연결된 인연의 우주적 인드라망(불교에서 끊임없이 서로 연결되어 온 세상으로 퍼지는 법의 세계를 뜻하는 말)에서 자신의 내면의 빛을 강조하고 있다. 역시 그 중심은 타인을 향한 연민과 용서다. 사람이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의 법을 어겼을 때 느끼는 수치심이다. 마음의 법을 양심 혹은 본심이라고 한다. 개인에게 양심이나 본심이 있다 없다는 논쟁으로 성선설과 성악설이 갈리기도 한다. 진영 논리에선 기존의 선도 악의 개념으로 달라진다. 우리 쪽이 이기면 선이고 상대가 이기면 모든 것이 악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내면의 나와 만나는 것이다. 내면의 나와 만날 수 있는 용기다. 사람이 외적인 규율에 움직이면 타율적이고 자신의 규율에 움직이면 자율이다. 무수한 인연의 알고리즘에서 나의 내면의 빛과 만날 수 있는 용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리고 해야 되는 것은 서로가 그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이다. 그것이 내 마음의 법이 아닐까. 커피를 마시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다. 그림설명 정리정돈 청소는 사물이 제 각각의 쓸 자리,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일종의 코디네이팅이다. 즉, 정리정돈(整理整頓)하는 것이다. 理를 정하고 頓을 정한다. 유학의 理気논쟁을 整하고 불교의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논쟁을 整하는 것이 청소가 아닐까. 청소하는 아주머니조차 돈오세계를 깨우치고 이기논쟁을 청소걸레 하나로 잠재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설명- 정리정돈 - 청소는 사물이 제 각각의 쓸 자리,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일종의 코디네이팅이다. 즉, 정리정돈(整理整頓)하는 것이다. 理를 정하고 頓을 정한다. 유학의 理気논쟁을 整하고 불교의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논쟁을 整하는 것이 청소가 아닐까. 청소하는 아주머니조차 돈오세계를 깨우치고 이기논쟁을 청소걸레 하나로 잠재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두수 작가 제공]. nbsp; 필자 소개 -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글로벌피스재단에서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진행하고 있다. 2023-07-18 06: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