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렬 논설고문
jrpak88@gmail.com
- 고려대 철학과
- 중앙대 정치학 박사
-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 EBS 이사
- 연합통신 이사
- 언론중재위원
-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 [박종렬의 제왕학] '순천 촌놈' 인요한이 뿌린 씨앗 [박종렬 논설고문] 5대째 이 땅에 뿌리내린 가족 “내가 웬만한 전라도 사람보다 더 징한 ‘전라도 사람 인요한’으로 살게 된 사연들의 기록이다. 나는 내 핏속에 흐르는 한국인 기질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를 키운 8할은 한국 사람들의 그 뜨거운 정이었다. 내 영혼은 한국 사람들의 그 ‘강직하고 따뜻한 심성’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것에 길들여졌다.”(《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 인요한, 2006. 생각의 나무) 130년 전 갑오년(1894년)은 갑오경장, 동학혁명, 청일전쟁이 한 해에 동시다발로 일어난 천지개벽이라 할 미증유의 혼란으로 한 시대를 마감하는 시대였다. 갑진년인 올해는 1월 대만 총통선거를 필두로 미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대만, 일본, 영국 등 20여 개국을 포함해 대한민국도 4월 총선을 앞두고 있어 그야말로 천하 대란의 시대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대로 새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으로 등장하면서 기대를 모으는 것처럼 새 인물들이 정치판에 등장해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서울 강서구청장 선거 참패 12일 만인 지난해 10월 26일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으로 혜성처럼 등장했던 인요한(印曜翰·1959년 12월 8일~ )도 의외의 인물. 지난해 12월 11일 당 최고위원회의에 ‘지도부·친윤(친윤석열)·중진 의원들의 불출마·험지 출마(희생)’를 포함한 6개 혁신안을 백서 형태로 보고했으나 험지 출마·불출마론으로 지도부와 갈등 속에 현실정치의 벽을 못 넘고 혁신위는 예정보다 2주 먼저 40여 일 만에 '조기 종료‘했다. 그는 ‘혁신이 혁명보다 어렵다’는 기득권 깨기의 지난(至難)함을 보여 주고, “정치와 거리를 둘 것”이라고 했지만 “다양성 희박한 한국에서 정치판 흔든 미국인 아웃사이더”(WSJ, 2023.12.8.)로 ‘국적·이색 배경·폭넓은 스펙트럼 등 상징적 다양성 주목’으로 정치판을 뒤흔들었다. 혁신위 시작 때 “정치해 본 적 없고, 32년 동안 의사만 해서 공부할 게 많다”며 겸양 자세였지만 치밀하게 계산된 ‘밥상머리 교육’ ‘구들방 아랫목 도덕교육’ ‘매 맞고 우유 먹을래’ 등 그가 툭툭 던진 정치적 메시지는 불멸의 어록(語錄)이 되었다. 인요한의 본명은 존 올더먼 린튼(John Alderman Linton). 한국 이름 성씨 인은 린튼의 린에서 따왔고 요한의 영어식 이름이 존(John)이다. 어린 시절을 대부분 전남 순천에서 보내 영어보다 전라도 사투리가 더 능숙했던 ‘개구쟁이 짠’이로 유명했다. 지금도 가장 좋아하고 허물없이 지내는 사람들은 함께 쥐불놀이하고 서리하러 다니던 순천 친구들이라는 그는 ‘특별귀화 1호’ 한국인으로 2012년 3월 21일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2012년 귀화하면서 얻은 그의 본관은 ‘순천 인(印)씨’. 성씨 본관 등록 당시 순천 인씨 시조(始祖)가 된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인돈)과 아버지 휴 린턴(인휴)을 가문의 시조 및 중시조로 삼고 있다. 한국에 5대째 뿌리 내린 그 집안의 120여 년 가족사는 한국 근현대사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조선 고종 때인 1895년 4월 8일 스코틀랜드계 미국인이며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이자 진외증조부(陳外曾祖父)인 유진 벨(Eugene Bell, 배유지·裵裕祉·1868~1925)이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되었다. 이들 가족은 전라북도 전주에 정착했고, 광주·목포 지역에서 현재까지 4대째 선교 및 교육사업을 펼쳐왔다. 1959년 한남대학교 전신인 대전대학을 비롯한 다수의 교육기관과 의료기관을 세웠고, 유진 벨 재단을 출범시켜 북한 결핵 퇴치를 위주로 한 의료 지원에 400억원 넘는 의약품과 의료장비를 지원했다. 인요한의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인돈·1891~1960)은 유진 벨 선교사의 사위다. 미국 조지아공대를 수석 졸업하고 모친 사망 뒤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21세이던 1912년 한국으로 왔다. 이후 48년간 전주와 군산 일대에서 선교와 교육, 의료봉사를 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주치의를 맡았고, 1917년 영명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를 후원했다. 한국 독립운동을 외국 신문을 통해 전파하는 등 해외 홍보를 주도했다. 군산 만세시위를 배후에서 지도했으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거부로 고초를 겪은 공로로 2010년 3·1운동 91주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아버지 휴 린턴(인휴·1926~1984)은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났다. 미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태평양 전쟁에 참전해 한국인 포로를 돌봤다. 전라남도 지방 도서 및 농촌 지역에 612개 교회를 개척했고, 6·25전쟁 당시 대위 계급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으며, 이후 선교활동을 하다 순천에서 음주운전 버스에 치여 사망했다. 그의 형인 스티브 린턴(인세반·1950~)은 한양대 교수를 지냈고, 1995년부터 북한 결핵 퇴치 및 의료 지원을 해오고 있는 ‘유진벨 재단’ 회장직을 맡고 있다. 유진벨 재단은 북한에 결핵 진료소 200여 개를 세우고, 어머니는 호암재단 상금 1억원으로 구급차를 사 기증했다. 인요한은 1997년 북한을 처음 방문한 이래 총 29번 방북한 남다른 기록도 갖고 있다. 전라도 출신 열혈청년 1980년대 초반 20대 전라도 출신 열혈청년이었던 그는 연세대 의대 1학년 재학 중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만난다. 그는 당시 대사관 직원을 사칭해 검문소 7개를 거치며 참혹했던 광주 현장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 또 <뉴스위크> 등 광주 시민군의 외국 언론 기자회견장에서 5·18 진실을 알리는 영어 통역을 했는데, 이로 인해 전두환 정부 때 추방 경고를 받기도 했다. 이후 ‘요주의 인물’로 찍혀 2년여 보안사 요원의 사찰 대상이었다. 1987년 연세대 의대에서 학사·석사(1992년)·의학박사(1996년), 1990년 고려대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과 석사 등을 취득했다. 1991년 연세대 의과대학 가정의학과 조교수로 시작해 의료인으로 활동했으며, 2012년부터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직을 맡고 있다. 2015년에는 국민의힘 전신인 새누리당 대한민국 대통합위원회 부위원장, 제4대 한국 국제보건의료재단 총재를 맡아 본격적으로 현실 참여에 나섰다. 한국 지형 맞춤형 구급차 개발 1984년 4월 10일 인요한은 부친상을 계기로 한국형 앰뷸런스를 최초로 개발하면서 한국 응급의료학의 초석을 놓았다. 아버지가 순천에서 교회 물품을 싣고 오다가 만취한 기사가 운전하던 관광버스에 치여 중상을 입었을 때였다. 당시 구급차가 없어서 큰 병원이 있는 광주광역시로 택시 뒷좌석에 실려 이송되던 중 사망했다. 1992년 미국 남장로교 측에서 받은 부친 추모 자금을 바탕 삼아 미국 구급차 구조를 본떠 국산 승합차를 개조한 구급차를 제작해 고향인 순천소방서에 기증했다. 한국 국적을 취득한 그가 장차 정계 진출을 이뤄 대한민국 국회의원, 외교관 등으로 임용된다면 그의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직은 짐작하기 어렵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 1년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세계 41위인 한국 축구를 조련해 ‘4강 신화’를 달성하면서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린 거스 히딩크 전 한국축구 대표팀 감독처럼 그의 정치적 역할을 기대하는 여론도 있다. 쿠바의 체 게바라,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와 함께 의사 출신으로 세계 3대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쑨원(孫文)은 “작은 의사는 병을 고치고, 더 나은 의사는 사람을 고치며, 진정으로 큰 의사는 나라를 고친다(小醫治病 中醫治人 大醫治國).”고 했다. 캐나다 출신 외과 의사로 스페인 내전과 중공의 항일투쟁에 참전한 의료개혁가 노먼 베순은 “질병을 돌보되 사람을 돌보지 못하는 이는 소의(小醫), 사람을 돌보되 사회를 돌보지 못하는 이는 중의(中醫), 질병과 사람, 사회를 통일적으로 파악해 그 모두를 고치는 이가 대의(大醫)”라고 했다. 이들이 혁명이나 사회개혁에 헌신하게 된 것은 사람의 병을 치료하다가 아예 그 질환을 앓게 만든 사회적 병리를 고치기 위해 온 몸을 던진 것이다. 의사 출신인 그 역시 본업과 함께 우리나라 현대 정치사의 격렬한 소용돌이 속에서 활발한 사회 참여를 해왔다. 그렇다면 그는 ‘하와이’에서 케냐 출신 흑인 아버지와 캔자스주 출신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다양한 인종·문화적 경험과 아웃사이더라는 약점을 극복하고 흑인 최초로 미국 대통령이 된 버락 오바마처럼 될 것인가? 결과를 예단하기 어렵지만, 2023년 귀화인·이민자 2세·외국인을 합친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230만여 명(전체 인구 중 4%)에 이르는 현실에서 인요한의 출현은 선진국이라면서도 막다른 길, 즉 ‘아포리아에 빠진 대한민국’의 정치계에 신선한 자극을 준 것은 명백하다. 잠룡이 꿈틀거리고 있다 천마산 자락에서 상통천문(上通天文)하고 하달지리(下達地理)해 세상사를 두루 살핀다는 중찰인사(中察人事)에 능한 노선사(老禪師)는 “앞으로 대의(大醫)가 출현해 병란(兵亂)을 병란(病亂)으로 불의 무도한 천하를 바로잡는 광구천하(匡救天下)에 나서 남북이 자유 통일돼 대한민국은 대륙으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된다. 엄청난 일이 이 시대에 벌어지고 있다. 광구천하가 되면 웅비(雄飛)하는 한민족 시대가 반드시 열릴 것”이라고 전제하고 “일제의 분열정책에 따라 100여 년 동안 국민학교에서부터 청백군으로 나눠 싸움만 훈련받아온 한국인에게 히딩크 같은 용병(傭兵)을 모셔 대한민국의 판을 다시 짜야 할 때가 왔다. 모소대나무는 100년이 지나야 꽃이 핀다는데 ‘적선지가 필유여경’이라고 잠룡이 꿈틀거리고 있다”며 다언삭궁(多言數窮)이니 불여수중(不如守中)이라며 말을 아꼈다. 스님이 예로 든 모소대나무는 희귀종 대나무로 일명 모죽(毛竹)이라 불린다. 이 대나무는 땅이 척박하든 기름지든 파종 후 4년 동안 아무리 물을 주고 가꾸어도 3㎝밖에 자리지 않는다. 하지만 5년이 지나면 손가락만 하던 죽순이 갑자기 하루에 30㎝ 가까이 쑥쑥 자라며 폭발적으로 성장해 대략 6주가 지나면 15m 이상 자라나 텅 비어 있던 대나무밭이 빽빽하고 울창한 대나무 숲으로 변하며 ‘비약적인 발전(quantum leap)’을 이룬다. 황무지에서 불과 두어 달 사이 엄청난 높이의 대나무 숲을 형성한다. 인요한 집안은 장장 4대에 걸쳐 128년 동안 대한민국 남쪽 지방에 깊은 뿌리를 내렸다. 외증조부 유진 벨은 목포에 영흥남학교와 정명여학교(1903년)를 세웠고, 1907년 광주에 ‘유일한 하나님만을 섬긴다’며 ‘으뜸’이라는 뜻을 지닌 숭일(崇一)학교와 1908년 수피아여학교를 설립했다. 광주 최초 병원인 재중병원(현 광주기독병원) 설립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송정리교회(1901년), 해남군 우수영교회(1902년) 등 전라도에 600여 개 교회를 설립했다. 인요한의 국내외 인맥 역시 다양하다. 백수(白壽)를 다하고 지난해 12월 1일 작고한 키신저가 방한 중 복통이 났을 때 치료했고, 미국 대통령을 지냈던 카터, 클린턴, 부시와도 남다른 교류를 맺고 있다고 한다. ‘통합과 화해를 실천’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멘토로 존경한다는 그는 ‘민주당이 김대중 정신을 잃어버렸다’며 민주당은 한 번도 자신을 불러주지 않았다고 한다. 덕망과 경륜을 갖추고도 때를 만나지 못해 은인자중(隱忍自重)하고 있는 정세균 노무현재단 이사장(전 국무총리·국회의장)이 자신의 할아버지가 교장을 지낸 전주 신흥고 출신이라고 자랑하는 그는 “좋은 분으로 큰어른으로 모신다”며 ‘훌륭한 대통령감’이라고 칭송한 바 있다. 예수가 등장하기 직전 세례를 베풀던 구약 시대 최후의 예언자 요한의 이름을 딴 그의 지인지감(知人之鑑)의 귀추가 주목된다. 임채청 동아일보 사장, 지난해 바이든 대통령이 방문한 풍력발전 타워(기둥) 세계 1위 ‘씨에스윈드’ 김성권 회장도 신흥고가 배출한 인물. 조수진 의원도 인요한의 조부모가 교장을 지낸 전주 기전여고 출신으로 사석에서는 그를 ‘스승님’이라고 부른다. 숭일고 출신으로는 팔로군(현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을 작곡한 정율성, 국방부 장관을 지낸 조영길 장군, 최초 100만 관객을 돌파한 ‘서편제’로 전설적 영화감독이 된 임권택이 있고, 서편제 여주인공 오정해는 목포 정명여중 출신. 수피아여고는 현해탄을 넘나들며 트로트 가수로 이름을 날린 김연자, 1970년대 유명 MC 최미나(허정무 축구 감독 부인) 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18대 대선 때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선거대책위원회에 합류해 호남 유세 때 지지 연설을 하면서 '대한민국 여성 대통령론'을 편 그는 박근혜 대통령 인수위원회에서 국민대통합 부위원장도 지냈다. 모소대나무는 100년 만에 꽃을 피운다는데, 인요한 가문이 4대에 걸쳐 ‘마땅히 머무를 바 없이 마음을 낸다(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금강경)'는 정신으로 이 땅에 뿌린 교육과 의료, 선교의 씨앗들이 어떤 결실로 이어질지, ‘순천 인씨’ 시조인 인요한 박사의 향후 거취가 주목된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2024-01-07 15:30:01
- [박종렬의 제왕학] 정치판 휘젓는 벽안의 자칭 '천하잡놈' [박종렬 논설고문] 큰 태풍이 읍써서 바다와 갯벌이/ 한번 시원히 뒤집히지 않응께 말이여/ 꼬막들이 영 시원찮다야// 근디 자넨 좀 어쩌께 지냉가/ 자네가 감옥 안 가고 몸 성한께 좋긴 하네만/ 이놈의 시대가 말이여, 너무 오래 태풍이 읍써어/ 정권 왔다니 갔다니 깔짝대는 거 말고 말여/ 썩은 것들 한번 깨끗이 갈아엎는 태풍이 읍써어// 어이 친구, 자네 죽었능가 살았능가 -(시인 박노해 ‘꼬막’) 자칭 ‘천하 잡놈’이라는 인요한 연세대 의대 가정의학과 교수 겸 국제진료센터 소장(64). 전남 순천(順天) 출신인 그는 2023년 10월 23일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에 발탁돼 한 달 넘게 거침없는 행보를 펼쳤다. 대한민국이 경제는 ‘한강의 기적’을 이뤘으나 정치판도 환골탈태(換骨奪胎)해야 한다는 그가 ‘혁신’을 내걸고 동분서주했다. 전라도 특유의 욕을 걸판지게 하지 못해 입이 근질근질하다며, ‘잡놈’은 ‘못되게 구는 사람’이 아니라 ‘박식하고 대인관계 좋은 친구’의 애칭(愛稱)이라고 유권해석('순천에선 욕을 해야 돼!' 인요한, 순천표 ‘욕(?) 강의’ SBS, @집사부일체 75회 2019년 6월 23일)한다. 엘리트와 부자가 권력의 탈을 쓰고 있지만 황금만능주의에 매몰돼 오로지 돈으로 자신을 비롯한 모든 가치를 결정한다. 탐욕과 부도덕을 당당하게 드러낸 정치사기꾼 모리배, 소시오패스 같은 마음과 몸가짐이 매우 천박한 통칭 ‘잡(雜)놈’들이 위선(僞善)을 떨며 설치는 한국 정치판에서 스스로 잡놈임을 당당히 고백(?)하는 그가 오히려 솔찬히 솔직해 보인다. 잡놈에게도 서열이 있어 서해에서 ‘유월 사리’ 때 잡히는 새우는 새하얗고 깨끗해서 ‘육젓’은 새우젓 가운데 최고로 친다. 하지만 ‘오월 사리’ 때 잡히는 새우는 밴댕이 꼴뚜기 새끼 등 온갖 잡것이 뒤섞여 새우젓 취급을 받지 못한다. ‘사람 중에도 못된 짓만 하며 지저분하게 구는 불한당(不汗黨)’을 오월 사리 때 새우 같다고 해서 ‘오사리잡놈’이라 부른다. 세계 선진국들은 5차산업 혁명에 대비해 새로 판을 짜는 국가전략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비전도, 미래 전략도 없는 시정잡배보다 못한 그야말로 ‘오사리잡놈’ 같은 정치사기꾼들의 정쟁이 끝이 없다. 정치판은 상식은 물론 시비선악(是非善惡)마저 헷갈리게 하는 난장판이 됐다. 그야말로 우주가 혼란스러워 자연이 무질서하자 인간이 미쳐 날뛰는 천하대란(天下大亂) 시대다. 물론 희망은 있다. 난극당치(亂極當治)라고, ‘혼란이 극에 달하면 새로운 질서’가 오는 법. 빈부 양극화와 보수-진보 간 이념논쟁으로 날이 새고 지는 오늘날 대한민국을, 시인의 말처럼 ‘썩은 것들 한번 깨끗이 갈아엎는 태풍’처럼 대청소할 때가 과연 다가올 것인가. 저항시인 이육사의 광야(曠野)에 등장하는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처럼 ‘초인’이 대망(待望) 되는 시대다. 그렇기에 집권여당을 ‘조사분(?)’ 인요한 혁신위원장 행보가 관심을 끌었다. 그가 재능과 도량을 아울러 이르는 기국(器局)이 큰 빼어난 인물인지 아직 평가가 이르다. 하지만 위원장 취임 이래 ‘붕정만리(鵬程萬里)’까지는 아니지만 ’낮도깨비’처럼 제주에 번쩍, 대구·부산에 번쩍 신출귀몰(神出鬼沒), 전국을 휘젓고 다닌 190㎝ 거구(巨軀)인 ‘한국판 몬스터(怪物)’의 광폭 행보가 화제가 되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 사랑,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 펴내 인요한 위원장은 미국과 대한민국의 이중 국적자다. 1959년 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 예수병원에서 태어났지만 유년 시절을 전남 순천에서 보냈다.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2006년)이란 수필집 제목처럼 그의 순천 사랑은 병적(?)이다. 미국에서 4년 살고 난 뒤 은근히 미국이 마음에 들어 아예 이민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순천이 그리워져서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그는 인터뷰 때마다 개구일성(開口一聲)으로 ‘순천이 우주(宇宙)의 중심’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지구의 중심’이라는 중국(中心之國) 차원의 ‘글로벌’을 뛰어넘어 ‘메타버스(Metaverse)시대’에 걸맞게 ‘유니버셜’로 사고의 축(軸)을 우주 공간으로 확대한다. 천하를 거머쥐려는 대장부의 웅대한 포부를 뜻하는 ‘대붕도남(大鵬圖南)’(<장자> 소요유편), 즉 대업(大業)의 웅지(雄志)를 품은 야심가(野心家)가 아니면 입에 올릴 수 없는 천기누설(天機漏洩)이다. 구한말 임오군란 후 낙백시절 흥선대원군이 호남을 유람하다 너른 순천 벌을 보며 땅이 기름지고 풍성해 사람 살기 좋은 곳이라 ‘지불여순천(地不如順天)’이라 평했는데 그는 ‘지구상에 순천만큼 좋은 곳이 없다’고 허세를 담은 재해석으로 풍(?)을 떤다. 순천(順天) 지명은 ‘하늘의 뜻에 따르는’ 것이라며 천하를 논하는 그는 2016년 6월 16일에는 고향 순천시 ‘순천만국가정원’ 명예 홍보대사 1호를 맡았다. 그는 그동안 퇴직하는 날 바로 고향 순천으로 돌아간다고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조렸다. 호남표준말(‘순천이 우주의 중심’이라 전라도 사투리가 아니라고)을 포함해 8개 국어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구사하는 ‘파란 눈의 토종 한국인’ 인 위원장. 그의 입에선 이제는 전라도 사람도 기억이 희미한 찰진 ‘호남 사투리’가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다. 말이 막히거나 곤란한 질문에 임기응변으로 ‘감픈 놈’ ‘허벌나게’ ‘거시기’ 등 걸쭉한 사투리를 적절한 타이밍에 맞춰 다양한 뉘앙스를 풍기는 레토릭으로 활용한다. 총선 앞두고 혜성처럼 등장한 벽안의 한국인 어린 시절 유난히 큰 두상(頭相) 때문에 ‘앞뒤 꼭지 3천 리, 왔다 갔다 6천 리, 돌아가면 9천 리’라는 놀림을 받으며 동네방네 쇳덩어리는 물론 염소 쇠 목줄까지 엿 바꿔 먹어 이빨까지 다 망가졌다는 개구쟁이 소년 인요한, 아명은 인쨔니.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말처럼 어린 시절 야생마(野生馬)처럼 자랐고 ‘엿장수’가 꿈이었던 그가 집권여당을 혁신한다며 ‘변화. 통합. 희생. 놀라운 미래’라는 구호를 내걸고 정치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정치판을 휘저었다. 총선 출마나 윤석열 정부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로 세평에 올랐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혁신위원장으로 발탁돼 김기현 국민의힘 당대표에게 ‘혁신위원회 구성·활동 범위·기한 등 전권을 부여’받아 활동을 시작한 뒤 각종 혁신안을 제시했다. 1호 안건은 ‘당내 통합과 화합을 위한 대사면’이었고 이어 11월 3일 당 지도부와 중진, 친윤(친윤석열)계 의원들의 ‘불출마 선언 및 험지 출마’ 등이 담긴 2호 안을 발표했다. 당대표를 포함한 이른바 ‘윤핵관’들에게 불출마 선언 혹은 험지 출마를 권고했으며 국회의원 정수 10% 축소, 불체포특권 포기, 세비 박탈, 하위 비율 20% 현역 컷오프 등도 제안했다. 취임 일성으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야 한다”는 과거 이건희 삼성 회장의 신경영 선언에서 따온 혁신을 강조한 그는 ‘얼굴 자체가 다른 것이 바로 변화의 상징’이라며 “제가 원래 의사로, 당에 필요한 쓴 약을 지을 것”이라며 결기를 드러냈다. “당내 낙동강 하류 세력은 뒷전에 서야 한다”며 영남 중진 물갈이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에 한 현역 의원이 “대구·경북 시·도민에게 깊은 영혼의 상처를 줬다"며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자 “낙동강 하류는 6·25 때 우리를 지킨 곳이다. 이후 많은 대통령이 거기에서 나왔다. 좀 더 다양성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야기한 것이지, 농담도 못합니까”라며 물러섰다. '낙동강 하류'라고 해서 상류(TK)도 아닌 하류(이른바 낙동강 벨트 지역)를 지칭한다는 그의 히트 앤드 런, 즉 ‘치고 빠지는 식’ 전술은 노련한 정치인들의 언론플레이를 뺨치게 한다. 말실수였지만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은근슬쩍 해프닝으로 치부되었다. 만약 다른 정치인 같았으면 구설이 무성할 설화(舌禍)일 텐데 애교로 넘어간 것이다. ‘국민의힘’은 100석 넘는 의석을 갖고 있지만 수도권 의석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이른바 영남 지역 중진 현역 의원들이 수도권에 출마해 야당 독식을 견제해야 한다는 제안에 장제원·김기현 등 몇몇 의원들이 오히려 지역구 사수 의지를 드러냈고, 인요한 혁신위원장은 시한을 정해 중진·친윤 의원들에게 '결단'을 촉구했다. '험지 출마 요구'를 두고 기 싸움이 이어지는 가운데 김기현 대표는 '급발진'이라는 표현으로 유감을 드러냈다. 이른바 윤핵관으로 윤 대통령 당선인 시절 비서실장을 지낸 킹메이커 장제원 의원은 4000여 명을 동원한 지지모임에서 “알량한 정치 인생을 연장하려고 서울 가지 않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함께 죽겠습니다”라며 16년 동안 가꾸어 온 지역구 사수 의지를 공개 석상에서 강조했다. 11월 12일 부산 지역구 교회 간증에서 “우리가 뭐가 두렵겠나. 저는 그래서 눈치 안 보고 산다. 나는 내 할 말 하고 산다”며 반발했다. 인 위원장은 그동안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부터 이준석 전 대표,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 홍준표 대구시장 등을 차례로 만났다. 그의 이런 통합 행보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성과는 거두지 못해 ‘혁신위 무용론’까지 제기되었다. 험지 출마를 종용받은 김기현 대표는 “총선은 ‘지도부 지휘’로 치르는 종합예술”이라며 혁신위의 속도 조절을 언급하자 용퇴론을 거둬들일 생각은 없다고 못 박았다. 그는 윤석열 대통령 측에서 “소신껏 맡은 임무를 거침없이 하라”는 메시지를 받았다(2023년 11월 15일.)는 일화를 소개하며 대통령의 뜻이 혁신위와 함께한다는 사실을 밝히며 ‘중진·친윤 용퇴론’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인 위원장은 라디오 인터뷰 등에서 “(혁신안에) 역행하는 사람도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냥 우유를 마실래, 매를 좀 맞고 우유를 마실래’라는 입장”이라며 “저는, 안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강경했다. 그는 권고 대상자들의 자발적 ‘결단’을 촉구한 데서 한발 나아가 압박 수위를 높이며 ‘12월 마지노선’을 제시했지만 중진들은 결단을 미루면서 당내에서는 현실화가 힘들 것이라는 관측도 높아가고 있다. 인 위원장은 당 혁신안을 내놓는 본연의 역할을 넘어 “나는 민주당 의원들 입당에도 열려 있다”며 민주당 비명계 의원들까지 공개적으로 만났다. 내년 22대 총선과 관련해 3일간 잠행 끝에 지난달 30일 공천관리위원장을 요구하는 배수진을 친 폭탄선언에 2시간 만에 김기현 대표는 거부했다. 김 대표를 비롯한 이미 토사구팽(兎死狗烹) 대상이 된 윤핵관들은 이중 플레이에 능소능대한 윤 대통령의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라는 암수(暗手)에 말려들었다. ‘현타’에 무지몽매(無知蒙昧)한 김 대표는 ‘자신의 발탁을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는 인 위원장 언급대로 이제 호랑이를 타고 달리고 있으니 내려도 죽고, 타고 있어도 죽을 수밖에 없는 기호지세(騎虎之勢) 형국으로 ‘자신을 잡아먹을 호랑이를 키우는 꼴’이 된 셈이다. 혁신위 활동 종료 기간이 임박한 가운데 기성 정치판의 ‘틀을 깨고 판을 바꾸려는’ 혁신위와 당 지도부·중진 간 공천을 둘러싼 수 싸움의 귀추가 주목된다. 인요한, 그는 의사이면서 기독교 선교역사를 간증하는 최고 인기 강사다. 폭넓은 독서력을 바탕으로 전라도 사투리를 적절하게 섞어 수백 명의 청중을 웃기고 울리는 유머 감각도 갖췄다. 이는 그가 정치인으로서도 훌륭한 자질을 갖추고 있음을 입증한다. ‘벽안(碧眼)의 호남 아들’로 “박정희, 근로자, 어머니가 남한을 일으킨 3대 힘”이라고 주장하고 “이 국가, 이 나라 잘 지켜야 합니다”라고 역설하는 등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애국심’을 자랑한다. 또 ‘정치판에 큰 인물이 없다’는 한탄 속에서 “한국 정치는 국가 성장 수준보다 너무 뒤처져 있다”며 “전라도 말로 어문짓거리(엉뚱한 일)만 하는 거 아니냐”고 지적하는 등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그가 지향하는 정치적 종착점이 어디일지 지켜볼 일이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2023-12-04 06:00:00
- [박종렬의 제왕학] '상대의 강함을 역이용 하라" …푸틴의 '유도(柔道) 정치학' [박종렬 논설고문] “50년 전 레닌그라드 거리는 나에게 한 가지 규칙을 가르쳐줬습니다. 만약 싸움을 피할 수 없다면 내가 먼저 주먹을 날려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푸틴은 체첸 반군 학살을 변호할 때도 ‘그들을 쓸어버리겠다.’는 식으로 길거리 싸움꾼이 구사할 법한 언어를 사용했다. 지지자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자신의 ‘마초 이미지 메이킹’을 통해 팬덤을 만들어 집권 24년째 60%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72세가 되는 내년까지 총리와 대통령으로 24년 대권을 장악한 푸틴은 29년여 소비에트연방을 통치한 이오시프 스탈린 이후 최장기 집권자다. 내년 3월 17일로 예정된 대선에서 당선되면 그는 84세까지 추가 12년 장기 집권이 가능해 총리 기간 제외하고 ‘33년 대통령’으로 거의 ‘종신 차르’로 군림하게 된다. 1999년 총리 취임 이래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2000년 처음 대통령에 당선된 뒤 3선 연임 금지에 막혀 2008년 대학 후배인 최측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총리 직책에서 상왕으로 군림했다. 총리 당시 2008년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 임기를 4년에서 6년으로 늘렸다. 2012~2018년 연임한 그는 2020년 또 한 차례 헌법을 고쳐 임기를 ‘중임 2회’로 제한했다. 개정된 조항은 차기 대통령부터 적용함으로써 현직은 이전 조항을 따른다는 특별조항으로 차기 대선 가도를 닦아 놨다. 5개월여 남은 2024년 3월 대선 캠페인 준비에 착수한 푸틴에게 교착 상태에 빠진 ‘우크라이나 전쟁’은 최대 이슈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 등 서방세계 시각은 장기 집권 독재자, 정적(政敵) 살해자, (우크라이나) 영토 침략자 등 부정적 시각이 지배적이지만 현재 러시아 국민 약 60% 이상이 푸틴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어 선거는 절차상 요식행위라는 보도다. ‘이미지 정치’를 적극 활용한 푸틴은 선거용 이미지 제고를 위해 2000년에는 전투기를 타고 체첸으로 날아갔다. 소련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인 1989년 5월 31일 비공식 단체로 시작한 러시아 오토바이 라이더들인 ‘밤의 늑대들’의 2014년 크림반도 점령 축하 축제에도 참석해 러시아인의 애국심을 자극했다. 전격적인 우크라이나 침공도 내년 대선을 위한 떡밥으로 조기 승리를 통해 ‘밴드왜건 효과’를 노린 ‘승자 이미지’를 전이(轉移)시키는 캠페인의 일환이었으나 지지부진한 전황(戰況)으로 차질을 빚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는 해킹에 안전하고 절차를 간소화해 유권자들도 투표하기 편해진다는 이유로 블록체인 투표 플랫폼이라는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는 선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옛 소련이 붕괴된 후 10년 가까이 체제 전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수반되었던 1990년대 혼란과 경기 쇠퇴는 러시아를 초강대국 위상에서 개발도상국 수준으로 추락시켰다. 이에 푸틴은 2000년 집권과 동시에 구악 재벌들을 몰아내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석유 등 자원을 통해 경제를 활성화하고 파편화된 사회를 통합해 국가 정체성 확립에 나섰다. 동시에 러시아의 추락한 국제적 위상 복원을 위해 전격적으로 국가 혁신 작업을 실행해 큰 지지를 얻었다. 그동안 늙고 무기력한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들과 병들고 노쇠한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에 지친 러시아 국민에게 젊고 건강한 40대 지도자 푸틴은 새로운 희망의 아이콘으로 국민을 열광시켰다. 부국강병 정책 추진으로 경제성장 러시아 사람들에게 푸틴은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영웅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1990년대는 소련이 해체되고 급진 개혁파인 옐친이 이끈 극단적인 혼란의 시대였다. 1991년 러시아 초대 대통령에 오른 옐친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도입해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던 러시아 경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이었다. 당시 물품 가격과 생산 자유화 정책이 시행되자 모든 물가가 미친 듯이 뛰어오른 ‘초(超)인플레이션’이 벌어졌다. 러시아인들의 예금은 휴지조각이 돼 버렸다. 시장경제에 적응하지 못한 국영기업들은 잇따라 도산했고 덩달아 실업률도 치솟았다. 살아남은 에너지 관련 산업들은 옐친 측근들과 결탁한 ‘올리가르히’라 불리던 신흥 재벌들 손으로 넘어갔다. 신흥 재벌들의 부정부패는 더욱 극성을 부려 국영기업을 마구잡이로 민영화했고 그 과정에서 알짜 기업들이 속속 서방 진영으로 팔려나갔다. 급기야 1998년 외환위기를 맞아 모라토리엄(채무지급유예)을 선언함으로써 러시아는 ‘국가부도’에 처했다. 1990년 러시아 1인당 GDP는 약 5300달러 수준이었다. 하지만 옐친 임기 말인 1998년에는 1600달러 수준으로 추락했다. 빈곤층이 무려 90%에 달했고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치안도 극도로 불안해지고 살인 범죄가 속출했다. 영화를 보거나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도, 버스를 타고 거리를 걷는 것도 모두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불안한 일상이었다. 이른바 러시아 마피아들이 지하 경제를 장악하면서 이들과 결탁하지 않고선 장사하기도 쉽지 않았다. 지난 세기 공산 진영 패권국으로서 미국과 경쟁하며 냉전 시대를 이끈 러시아 인구는 미국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GDP도 미국 대비 10% 수준으로 떨어지는 등 러시아는 삼류 국가로 전락했다. 러시아 혼란이 정점에 이르던 1999년 말 옐친이 사임하고 당시 총리였던 푸틴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으면서 러시아는 활로를 찾기 시작했다. 푸틴이 대통령에 오른 2000년부터 2008년까지 러시아 경제는 연평균 7%대 초고속 성장을 거듭했다. 절대 빈곤층 비율도 약 30%에서 14%로 줄었고 평균 임금은 2배로 상승했다. 대학 입학자가 50% 늘었고 청년 실업률은 4분의 1로 줄었다. 당연히 젊은 세대가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 복지가 늘면서 출산율과 평균수명이 대폭 높아지고 대신 범죄율과 자살률은 대폭 감소했다. 거리에는 카페들이 다시 들어서기 시작했고, 백화점에서 마음대로 물건도 살 수 있게 되었으며, 원하면 해외여행도 가능해졌다. 이렇듯 국가 이미지 제고는 실제적인 경제 발전의 수치로 뒷받침되면서 일부 정치적 반대 세력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푸틴의 인기는 고공 행진을 해온 것이다. 푸틴은 취임 이후 줄곧 60% 이상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2014년 크림반도 병합을 통해 러시아인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당시 푸틴 지지율은 무려 87%에 달했다. 경기 침체와 연금 개혁 등 부정적 요인들로 말미암아 현재는 60%에 다소 못 미치는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차르 꿈꾸는 러시아 팽창주의자 푸틴의 야망 차르(tsar)를 꿈꾸는 러시아 팽창주의자 푸틴의 야망은 어디까지일까? 러시아 남서부 영토 분쟁, 즉 체첸전쟁을 종식한 그는 2014년 3월 크림반도를 군사력으로 합병해 영토 확장을 이뤘다.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러시아 국경까지 확장된 것에 분개한 그는 그동안의 치욕을 극복하고 러시아를 다시 ‘강력한 나라’로 만들려는 의도를 공공연히 드러냈다. 크림반도 병합을 통해 영토 문제에서는 추호의 양보도 없다는 강한 면모를 보여주자 푸틴의 인기는 단박에 20%포인트 상승했다. 러시아에서는 푸틴이 제정러시아 예카테리나 여제 이후 ‘영토를 확장한 왕’이라는 농담이 돌았다. 또 옐친 시대 총리였던 그가 1999년 12월 전격적으로 실시했던 체첸 진압 작전은 독립국이었던 체첸공화국을 러시아 품으로 다시 돌려놓았다. 1999년 8월 총리 임명 당시 푸틴 지지율은 2%에 불과했고, 9월 여론조사에서도 대통령 후보 1위는 프리마코프 전 총리, 2위는 루시코프 모스크바 시장, 3위는 주가노프 공산당 위원장이었다. 푸틴은 4위였다. 그런데 푸틴이 주도한 체첸전쟁 승리는 불과 반년 만에 무명의 정치인을 이듬해인 2000년 대통령 자리에 앉히는 마술을 부린 것이다. KGB 출신 첩보원이자 평범한 관료였던 무명의 푸틴이 무너져 버린 러시아 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다. 그는 최고 권력자가 되면서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던 ‘올리가르히’들을 탈세, 사기, 횡령 등 혐의로 대거 체포해 러시아 재벌을 바퀴벌레라 부르며 부정부패 집단을 숙청했다. 올리가르히(oligarch)는 과거 소비에트연방(USSR)에 속했던 러시아, 우크라이나에서 국유기업의 민영화 등 자본주의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신흥 재벌 집단을 말한다. 푸틴은 체제 변혁으로 혼란한 틈을 타 은밀하게 번성한 이른바 러시아 마피아들을 대거 체포해 사회질서도 빠르게 잡아갔다. 국부 유출을 막기 위해 국유기업 민영화를 금지했고 최대 산업인 석유와 가스를 다시 국유화했다. 이후 석유 가격이 폭등하자 국유화한 석유·가스 기업 덕에 국가 재정이 튼실해져 체첸과 치른 2차 전쟁에서 승리했고 추가적인 연방 해체를 막을 수 있게 되었다. 소련 비밀경찰인 KGB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는 KGB 동료들을 크렘린 대통령궁, 정부, 언론, 재계 등에 배치했다. 푸틴은 FSB와 연방경호국(FSO), 해외정보국(SVR)을 국가보안부(MGB)로 통합시켜 과거 KGB를 완벽하게 부활시켰다. 정보 장악을 통한 철권통치로 새로운 권위주의 통치체제를 확립해 반대 세력과 민주 진영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언론을 장악했다. 국제적으로 고립이 심화하는 가운데서도 이미지 정치로 지지는 더 높아지는 기이한 권력이 되었다. 모스크바 정치 분석가 니콜라이 페트로프는 “푸틴에게는 유도가 정치 철학”이라고 주장한다. 유도 검은 띠 소유자인 푸틴은 “상대 약점을 파악한 뒤 번개처럼 갑작스럽고 폭발적인 공격으로 균형을 잃게 만들어 상대가 자기 체중 때문에 스스로 쓰러지게” 하는 “상대 강점을 역이용”하는 유도술을 현실 정치에 원용하고 있다. 상대 체격과 체중을 역으로 이용해 무게중심을 흩트려 무너지게 한다는 원리다. 푸틴은 상대의 힘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역이용하는 유도의 원칙으로 러시아 고위 관리, 사업가, 기업들을 대상으로 가해진 서방 제재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역이용하고 있다. 그는 서방의 제재를 계기로 국내에서 권력을 확고히 다지고 외부의 영향을 차단하는 통치술을 구사하고 있다. 크림공화국을 합병한 것은 푸틴이 현 세계를 체스판이 아니라 유도 도장의 매트로 생각하고 혼돈에 빠진 우크라이나의 약점과 우유부단함을 이용해 전격적으로 진격해 성공했다. 2000년 대련 상대와 공동으로 ‘유도: 역사, 이론, 실제(Judo: History, Theory, Practice)’를 집필한 푸틴의 유도 사범 아나톨리 라클린은 2007년 한 인터뷰에서 “푸틴은 겨루기할 때 상당히 예측 불가능했다. 그는 예상치 못한 공격으로 상대를 누른 적이 많았다”고 말했다. 유도 친구들이 내무부 등 정부 고위직을 차지하면서 러시아의 ‘유도 통치집단(judocracy)’으로 불리는 가운데 푸틴은 “양보는 승리하는 데 필요할 때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크라이나에서 예상외로 고전하고 있는 푸틴은 자신보다 훨씬 강한 적들(미국, 중국, 유럽 등)을 상대할 수 있는 전술이 절실한 상황에 부닥쳤다. 유도에서처럼 그들이 스스로 에너지를 소진하게 하거나 그들의 강점에 노출되지 않고 그들을 꼼짝 못하게 누를 수 있는 위치로 그들을 유도하는 것이 푸틴의 전략이다. 그가 우크라이나 전장에서도 유도 전술을 쓰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평가지만 미국 등 서방의 대응책도 만만치 않아 고전하고 있다. “영웅 없는 시대보다 영웅을 요구하는 시대가 더욱 불행하다” 푸틴은 직접 전투기를 타고 군부대에 나타나는가 하면, 웃통을 벗고 호랑이나 곰 사냥을 하고, 70이 가까운 나이에 얼음을 깨고 한겨울 수영을 즐기는 등 ‘상남자 이미지’를 연출했다. 여기에 외국 정상과 회담할 때마다 일부러 지각해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이런 행동은 회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전술로, 2014년 메르켈 독일 총리는 4시간,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은 110분 기다리게 했다. 반대 사례도 있었다. 2018년 7월 트럼프는 약속 시각보다 30분 늦은 푸틴보다 20분 더 늦게 나타났고, 2019년 4월 북·러 회담에서 김정은은 30분 늦은 푸틴보다 30분 더 늦게 나타났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러시아인들에게는 당당하고 강력한 국가지도자 이미지로 비쳤다, 30년 결혼 생활 끝에 2013년 6월 6일 이혼한 전 부인 알렉산드로브나 류드밀라와 사이에 두 딸이 있다.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행정직에서 일하며 로큰롤 에어로빅 대회에서 활약한 바 있는 큰딸 카타리나(1985년생)와 둘째 딸인 내분비학 전문의 마리아(1986년생)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리듬체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인 알리나 카바예바는 현재 러시아 국회의원으로, 사실상 푸틴의 차기 아내로 거론되고 있다. 푸틴은 러시아 정교회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등 독실한 신앙인 면모도 드러내고 있다. 특히 2022년 12월 연례 기자회견에서 그는 애국심을 주제로 연설했는데 ‘러시아의 국가 이념은 애국심’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애국심은 조국의 발전에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영웅적인 과거를 고수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영웅적이고 성공적인 미래를 내다봐야 하며 이것이 바로 성공의 입장권이다. 현대 민주사회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이념은 애국심이다. 애국심은 반드시 탈(脫)정치화돼야 하고 러시아의 내적인 틀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애국심이야말로 가장 광범위하고 최고의 가치다.” 장기 집권을 넘어 종신 집권을 노리는, 그칠 줄 모르는 욕망의 화신 푸틴을 여전히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국민이 대다수인 러시아의 앞날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그리고 푸틴의 ‘영웅 신화’는 과연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과거 나치 시대를 살았던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는 이른바 ‘영웅론’에 대해 이렇게 갈파했다. “영웅 없는 시대는 불행하지만, 영웅을 요구하는 시대는 더욱 불행하다. 영웅을 요구하는 시대보다 영웅 없는 시대가 행복하다. 많은 국가는 영웅 없이도 잘살고 있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2023-11-03 06:00:00
- [박종렬의 제왕학] 소모적 장기전에 진입한 러·우 전쟁 ..설계자는 푸틴의 책사 '두긴' 박종렬 논설고문] “전쟁이 오래가면 병력은 둔해지고 사기가 꺾인다. 성을 공격하면 전투력이 소진되고 오랜 기간 군대를 운영하면 국가의 재정이 부족해진다. 군대가 약해지고 사기가 꺾이고 물자가 소진되면 재정이 파탄 난다. 내부 혹은 인접국에서 제후들이 이 틈을 타 일어나니 이런 상황이 되면 지혜로운 자라고 하더라도 후방의 상황을 감당할 수 없다.” (<손자병법> 2권 작전 편, 장기전의 위험 지적) 독재자는 결국 자승자박(自繩自縛), 스스로 만든 올가미에 걸려 파멸한다. 손자(孫子)의 가르침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서 오늘의 러시아가 처한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출구를 찾아야 하는 ‘23년 장기집권자’ 푸틴 대통령의 처지가 실감 나는 대목이다. ‘사흘 안에 우크라이나를 함락하겠다’던 푸틴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2월 전쟁이 시작된 후 러시아군 사상자는 30만 명, 우크라이나군 사상자는 20만 명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의 사상자가 50만 명 정도에 이르렀다고 미국 관리들을 인용, 보도했다.(NYT, 8.18.) 러시아군 사망자는 12만 명, 부상자는 17만∼18만 명, 우크라이나군은 사망자 7만 명, 부상자 10만∼12만 명인 것으로 집계됐다. 현재 우크라이나군 병력은 약 50만 명이지만, 러시아군은 130만 명 이상으로 관측되고 있다. 사망자는 민간인 집단학살이 포함됐지만 대부분 군인이다. 전쟁을 피해 고향을 등진 난민들도 최대 3천만여 명에 달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치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전쟁 발발 후 최근까지 1600만여 명의 우크라이나 국민이 전쟁을 피해 국경을 넘었다. 다시 귀국한 사람들을 제외해도 800만여 명에 달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이 타국에서 피난민 처지로 살고 있다. 러시아도 20만여 명의 지식인, 중산층이 해외로 나갔다. 두 나라 경제상황도 악화일로다. 국제통화기금(IMF)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우크라이나 GDP는 절반 수준으로 감소했고, 세계은행은 러시아 경제성장률이 2022년 –3.5%, 올해는 –3.3%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NHK 時論公論, 2023.1.12.) 2021년 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미국의 경고 메시지에 국제사회는 ‘설마 21세기에 침략 전쟁이 일어날까?’ 반신반의했다. 군사 전문가들은 ‘세계 2위 막강 군사력을 갖춘 러시아가 전쟁을 시작하면 국방력 순위 25위의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가 30분 이내에 초토화하고, 3일이면 사실상 전쟁이 끝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침공 초기 기세가 좋았던 러시아군의 조직력 붕괴, ‘나라를 지키겠다’라는 우크라이나군의 벼랑 끝 의지, 미국 등 서방국의 무기 지원 등 변수가 복합적으로 작동, ‘전쟁의 파라독스(paradox)’를 드러냈다. 전쟁은 단순한 수적 양적 군사력 우위가 승패를 결정짓는 요인이 아니다. 첨단 무기로 무장된 병력도 전쟁의 연속성과 지속성을 보장하기 위한 군수지원 능력, 훈련의 성숙도, 지휘부의 지도력 및 항공지원 능력 등 기본여건이 갖춰졌을 때 그 기능을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다. 러시아의 경우, 병력 및 화력 측면에서 우크라이나를 월등히 압도했지만, 개전 초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점령에 실패했다. 이로 인해 러시아는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겪었고, 반격에 나선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 점령하에 있는 북동부와 동부 돈바스 지역의 영토 탈환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서방국가들의 지원을 등에 업은 젤렌스키 대통령을 중심으로 2014년 뺏긴 크림반도 수복까지 다짐하며 항전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은 이제 20개월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전쟁이 장기전 양상으로 치닫자 푸틴의 고민은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미국을 필두로 서방 여러 나라로부터 지원을 받는 우크라이나와는 달리, 러시아는 점차 ‘공공의 적’ 처지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에너지 등 원자재와 식량값 급등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금리 인상 등을 연쇄적으로 촉발했다. ‘코로나 19’에 따른 글로벌 공급망 붕괴로 이미 침체한 세계 경제에 치명상을 안기고 있어 푸틴에 대한 국제적 비난 여론도 비등(沸騰)해지고 있다. 특히 ‘우군’이라고 믿었던 중국과 인도마저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등, 국제사회에서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러시아 우크라이나 양국은 재차 전열을 가다듬고 있어, 종전 실마리를 찾기는커녕 전쟁은 장기화, 교착국면에 빠져 있다. 이 와중에 자중지란(自中之亂)도 발생했다. 지난 6월 24일, 악명을 떨치는 러시아 민간 용병단체 와그너 그룹이 모스크바로 진격한 군사 반란이 그것이다. 비록 불과 하루 만에 철군하는 등 용병들의 반란은 불발로 끝났지만, 이후 8월 23일 와그너 그룹 수장인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암살 의혹’을 부른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는 등, 푸틴은 안팎으로 여러 어려움에 봉착해있는 상태다. 지난 9월 13일, 푸틴은 러시아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날아가 북한 김정은과 재래식 무기 거래 협상으로 의심받는 만남을 갖는 등,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다.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스스로 유엔 결의를 위반하는 위험한 행보를 펼치고 있다. 그만큼 러시아가 처한 상황이 좋지 않다는 방증이다. 북한의 러시아 밀착을 보여준 이번 회담은 한반도와 무관한 전쟁이 아님을 웅변하고 있다. 전쟁에 고전하고 있는 푸틴의 패착은 이른바 경적필패(輕敵必敗)다. 핵을 가진 초강대국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자만한 나머지 준비를 소홀히 하거나 상대방의 능력과 전략을 과소평가할 경우, 전쟁에서 패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손자병법>에서 지적한 ‘장기전의 위험’이 그대로 시현되고 있는 셈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경구대로 ‘푸틴’의 행태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 당시 ‘맥나마라’를 상기시킨다. 냉전 시대 미국과 구소련의 대리전쟁으로 불린 베트남 전쟁(1965.11.-1975.4.)은 남북으로 분단된 베트남 통일을 둘러싸고 전개됐다. 미국이 남베트남을 대표해 북베트남 공산주의자와 싸운 이 전쟁에서 84만 9,018명의 군인이 사망했다. 미군 5만 8,318명이 숨지는 희생을 치렀지만,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다. 최첨단 현대무기로 무장한 세계 최강의 미국을 상대로 물질적 역량으로는 비교할 수 없는 북베트남이 이긴 것이다. 많은 패인 가운데 전쟁 당시 미 국방부 장관 ‘로버트 맥나마라’ 이름을 따서 명명(命名)한 ‘맥나마라의 오류(McNamara Fallacy)’가 꼽힌다. 베트남 전쟁을 기획, 진두지휘한 맥나마라 장관은 1962년 베트남을 방문, “우리의 계량 평가는 미국이 승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호언장담, 정량적 관측만으로 결정을 내리고 다른 모든 요소를 무시했다. 6만여 명에 가까운 전사자를 내고 폭탄을 비 오듯 퍼부었지만 ‘절대 질 수 없는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다. 이는 맥나마라가 정글과 ‘베트남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인간의 의지’ 등, 전쟁 향방을 결정할 중요한 요소를 제대로 계량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버드대 조교수와 포드자동차 사장을 지내 당대 최고의 CEO로 평가받던 맥나마라 장관이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오류를 저지른 것은 ‘거울 이미지의 함정’에 빠진 탓이다. 다른 사람이 어떤 대상을 인식하는 방식이 나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나의 잣대로 모든 것을 재단할 때 거울 이미지 함정에 빠지고, 일을 그르치게 된다. 성공한 경험이 강한 사람이 환경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과거의 ‘성공법칙’을 고수, 생각이 굳어버리면 실패보다 무서운 ‘성공의 덫’(success trap) 함정에 빠져 망한다는 대표적 사례다. 2009년 7월 맥나마라가 93세 나이로 영면했을 때 뉴욕타임스는 ‘무익(無益)한 전쟁의 설계사 맥나마라 죽다’란 큰 제목으로 그의 부고 기사를 실었다. “이제껏 우리는 잘못했다. 정말 끔찍하게도 잘못했다. 우리는 다음 세대들에게 이유를 설명해줘야 할 빚을 지고 있다(Yet we were wrong, terribly wrong. We owe it to future generations to explain why).”(호찌민시:사이공시, 전쟁박물관에 전시된 맥나마라 글 ) 푸틴의 책사(策士) 알렉산드르 두긴 냉철한 판단과 과감한 개혁으로 역사상 러시아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높은 지지를 받아온 푸틴은 그동안 ‘전쟁’으로 집권 연장에 성공, 이제 종신 집권의 길에 들어섰다. 푸틴은 집권 후 체첸, 조지아, 크림반도의 침공을 승리로 이끌었다. 푸틴의 위상을 높이고 장기 집권의 결정적 기반이 됐다. 내년 3월17일 임기 6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둔 이번 전쟁도 그 연장선이었다. 1930년대 히틀러나 일본이 침략 중독증에 빠진 것과 비슷한 패턴으로 이른바 ‘푸틴이즘(Putinism)’의 국제정치적 발현이다. 러시아는 23년째 정치국도 중앙위원회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1인 독재체제를 구축, 푸틴 단 한 명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다. 푸틴은 언젠가 자신이 묘사했던 것처럼 ‘권력의 수직선(vertical of power)’이다. 하지만 지금 그 수직선은 여느 때보다 불안정해 보인다. 푸틴 대통령은 합법적인 선거절차를 거치며 집권해왔지만, 끊임없이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부 단합을 도모하면서 러시아의 ‘절대 존엄’으로 통치해왔다.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도 내년 대통령 선거와 장기 집권을 의식한 인기몰이라는 비판이 그래서 제기된다. 이번 전쟁 배후에는 사전 선거 공작과 함께 푸틴의 사상적 스승이자 푸틴 팽창주의 외교정책 입안자인 알렉산드르 두긴(Aleksandr Dugin)이란 배후 존재가 감춰져 있다. 1962년생으로 모스크바대 교수인 그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극단적 민족주의 성향의 파시스트 정치사상가다. 애초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반체제 인사였던 두긴은 1990년대 소련이 해체될 무렵 서방의 영향력에 대항해 러시아가 세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창했다. 두긴은 아일랜드 더블린에서부터 러시아의 극동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르는 유라시아 제국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1997년 저작 도서 <지정학의 기초 : 러시아의 지정학적(地政學的) 미래>를 통해 이름을 얻기 시작했다. 미국에 사회, 인종적인 갈등과 불안을 퍼뜨릴 것을 주장한 이 책은 당시 러시아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하지만 당시 혼란스러운 시장경제의 봇물에 휩쓸려 애국심을 강조하는 젊은 국수주의자의 작은 목소리에 그쳤다. 이후로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두긴의 극우 민족주의적 사상은 2000년 들어 푸틴의 ‘팽창주의 야욕’과 결합, 강력한 불꽃을 일으켰고 서서히 러시아 정치권의 주류 국책(國策) 이데올로기로 떠올랐다. 두긴은 또 “푸틴에게는 적이 없다. 설사 있을지라도 그들은 정신적으로 병들어 검진을 받아야 한다. 푸틴은 절대적이고, 대체 불가능하다.”며 푸틴 정권에 대한 지지 표명에도 앞장섰다. 2007년 저작인 <푸틴 대 푸틴>에서는 푸틴이 실증적이고, 조심스러운 ‘달과 같은’ 속성과 유라시아 제국의 부활, 서방과의 대결에 몰두하는 ‘태양과 같은’ 속성, 두 가지 특질을 지니고 있다고 분석했다. 두긴은 러시아 제국의 부활을 강조하고 우크라이나 침공의 명분이 된 이른바 ‘유라시아리즘’(Eurasianism)의 창시자다. 푸틴 대통령 역시 소련의 붕괴를 ‘역사적 비극’,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냉전 시대 세계질서를 양분했던 소련의 과거 시절에 대한 향수를 종종 드러냈다. 러시아가 국제질서에서 패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두긴은 오래전부터 ‘우크라이나 침공’을 주창해왔다. 두긴은 <지정학의 기초>에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합쳐질 운명이다. 절대로 독립국으로 내버려 두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에 동화되길 거부하는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혐오도 숨기지 않았다. 2014년 5월 우크라이나 오데사에서 친러시아 시위대 수십 명이 사망했을 때 “우크라이나는 지구상에서 사라지든지 처음부터 다시 (나라를) 시작해야 한다”며 각계각층, 지역에서 전면적인 반란을 일으키라고 선동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인 2022년 3월에는 현지 매체에 “‘태양과 같은’ 푸틴이 승리했고 이는 이미 예정돼 있다”라면서 “러시아는 루비콘강을 건넜고, 개인적으로 이것이 매우 기쁘다”라며 서방은 러시아를 무너뜨리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두긴은 자신의 SNS 텔레그램 채널에 “러시아 사회 전체가 전시 조직 체계를 갖추지 않으면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며 “러시아는 하나의 문명으로서 서방에 대항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끝까지 갈 것을 의미한다”는 비장한 글을 올리기도 했다(NYT). 두긴은 러시아 방송에 출연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이 있으며, 러시아는 결코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도 했다. <손자병법>은 ‘전쟁은 국가의 중대사(큰일)이다. 국민의 생사, 국가의 존망이 결정되는 길이니 깊이 살피지 않을 수 없다.’(國之大事 死生之地 存亡之道 不可不察也:국지대사 사생지지 존망지도 불가불찰야)고 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푸틴 예상과 달리, 갈수록 꼬이는 형국으로 치닫고 있다. 궁지에 몰린 푸틴이 핵무기 버튼을 만지작거린다는 보도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넘어 세계적 재앙으로 이어질 어두운 전조(前兆)를 보는 것 같다. 북·중·러 대 한·미·일의 신냉전 구도가 고착화되는 가운데 최근 우크라이나 문제로 얽힌 ‘김정은-푸틴 정상회담’으로 한반도가 ‘태풍의 눈’이 되어 패권전쟁 소용돌이 속으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빨려 들어가고 있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리스크는 우리의 처지와 비슷, 우크라이나 전쟁이 결코 ‘강 건너 불구경’일 수 없는 소이(所以)이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2023-09-25 08:00:00
- [박종렬의 제왕학] 우크라이나 32세 비밀병기가 이끄는 하이브리드 전쟁 박종렬 논설고문] 디지털미디어에 의한 하이브리드 전쟁(Hybrid Warfare) “당신이 화성을 정복, 식민지화하려는 동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식민지로 점령하려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우주로 보낸 로켓들이 성공적으로 지구로 귀환할 때, 러시아 로켓들은 우크라이나 민간인을 공격합니다. 스타링크 서비스를 지원해 러시아에 맞설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러시아군이 크루즈 미사일 등으로 우크라이나의 인터넷 서비스 폐쇄와 소셜미디어 차단을 노려 통신 등 기반시설을 정밀 타격해 통신네트워크부터 마비시키자 침공 이틀뒤인 지난해 2월26일, 우크라이나 디지털혁신부 장관 미하일로 페도로프가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페도로프는 우주 개발 기업 ‘스페이스X’의 위성 인터넷망인 ‘스타링크’(Starlink) CEO 일론 머스크에게 우크라이나에 스타링크 서비스 개시를 요청한 것이다. 머스크가 10시간 만에 요청을 승인, 서비스가 개시됨으로써 통신네트워크는 원상복구되었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우주여행 등 ‘인류의 화성 이주’라는 비현실적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도전하고 있는 머스크는 ‘골리앗 러시아에 맞선 다윗’이라는 우크라이나의 지원 요청에 즉각 화답한 것이다. 테슬러 전기자동차로 세계 최고 부자가 된 머스크는 트위터(twitter:트윗은 영어로 새가 지저귀는 소리 뜻하는 의성어)팔러워 1억4천여명을 거느린 세계적 인플루언서로 440억달러(약 63조원)에 “새가 자유를 얻었다(the bird is freed)”며 지난해 10월 트위터를 인수했다. 푸틴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를 걸고 한판 붙자”고 결투신청을 하는가하면 중국에서 셀럽으로 환대 받는 등 세계적 영향력을 가진 그는 ‘스타링크’로 우크라이나의 구세주가 되었다. 스타링크 서비스는 무게 227kg 소형 군집위성 4만여 개를 2027년까지 차례로 지구 500㎞ 상공 저궤도에 띄워 전 세계를 ‘초고속 인터넷’으로 촘촘히 연결해 빠른 인터넷 서비스망을 구축하는 프로젝트. 현재 약 4,000여개의 위성을 쏘아 2020년부터 서비스를 시작, 스타링크 덕분에 우크라이나군은 안정적인 통신 외에도 드론 등 전술 무기 전투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인터넷 디지털 시대에 벌어진 이번 전쟁에서 두 나라 모두 드론과 위성통신, AI 등을 통한 전술 전략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치열한 기술 경쟁을 벌이고 있다. 첨단 과학기술 전환기를 맞아 전쟁개념과 전투방식 자체가 과거에 없었던 전혀 새로운 방식과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즉, ‘군사력 중심의 전쟁’에서 ‘미디어 중심의 하이브리드 전쟁(Hybrid Warfare)’으로, ‘보이는 전쟁’에서 ‘보이지 않는 전쟁’으로, ‘근거리 전투’에서 ‘원거리 전투’로 전쟁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다. 2022년 기준, 미국 다음의 2위 군사 강국인 러시아의 하이브리드 전쟁위협과 회색지대 전략(Gray Zone Strategy:전략을 구사하는 국가가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지 않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안보 목표를 성취하려는 대부분의 전략적 행위)에 맞선 22위 수준의 우크라이나가 500여 일째 AI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분전(奮戰), 전황이 교착국면에 빠지면서 국제정치 구도도 지정학적 대전환기를 맞고 있다. ‘하이브리드(hybrid)’는 사전적으로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두 가지 이상의 요소를 뒤섞는 것’이란 의미로 ‘하이브리드전쟁’은 기존의 재래식 무기 등 군사적 수단과 더불어 다양한 비군사적 수단이 결합한 형태의 전쟁을 뜻한다. AI, 드론, 인공위성, 3D 등 다양한 첨단 과학기술을 활용한 미래형 무기 등 다양한 무기가 혼재된 형태로, 군사력과 기술력, 정치력, 경제력을 총망라한 개념의 전쟁이다. 러시아는 냉전 시대 이후 미국의 독보적인 경제력과 군사력을 따라잡을 수 없어 테러행위, 범죄행위, 그리고 범죄적인 사이버 공격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형태의 작전들이 동시에 복합적으로 전개되는 첨단 과학기술이 총동원된 하이테크 전쟁개념을 하이브리드전쟁으로 발전시켰다. 이후 하이브리드전 최강국 러시아는 2008년 조지아 침공과 2014년 크림반도 합병 때도 군사작전과 심리전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전술을 구사, 목적을 이뤘다. 디지털 시대의 하이브리드전쟁으로 주목받고 있는 이번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꾼 주인공은 페도로프 우크라이나 부총리 겸 디지털 혁신부장관. 올해 32세인 그는 우크라이나 남부 드네프르강 근처의 작은 마을 바시리브카 출신. 정계 입문 전 온라인 광고 캠페인 전문 디지털마케팅 회사를 창업한 그는 디지털 전문가로 2018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당시 젤렌스키 선거캠프에서 디지털 분야 감독을 맡았다. 당시 41세인 코미디언 출신 배우 젤렌스키는 ‘인민의 종(Servant of the people)’이라는 시트콤에서 주연을 맡아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개혁정치를 펼치는 청렴한 대통령’의 모습을 연기하다가 2000만여명이 시청하는 선풍적 인기를 끌어 단숨에 대권후보가 되었다. 드라마 이름을 따 ‘인민의 종 당’을 창당하여 정치에 입문, 대통령선거에 출마, 신선하고 깨끗한 ‘변화하는 젊음의 상징’으로 포지셔닝된 젤린스키는 2019년 4월 결선투표에서 73.2%의 득표율로 현직 대통령 프로셴코를 50%이상 따돌리며 역대 우크라이나 대통령 가운데 가장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부패한 정권을 비판한 고교 교사의 영상이 소셜미디어에서 급속하게 퍼지면서 우연히 대통령에 당선된다는 젤린스키가 주연 겸 제작한 ‘인민의 종’ 드라마가 현실이 된 것이다. 젤린스키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28세로 최연소 우크라이나 디지털혁신부 장관에 취임한 그는 사회 서비스의 디지털화를 추진하면서 정부 앱을 만들어 세금관리 등을 디지털화했다. 2021년에는 미국 실리콘 밸리를 방문해 팀 쿡(Tim Cook) 애플 CEO 등을 만나 친분을 쌓기도 했다. 하이브리드전쟁 시대 네트워크 전장 첨단무기 된 디지털 미디어 페도로프가 국제적 인물로 부상하게 된 것은 지난해 2월 24일 러시아 침공 직후인 2월26일 트위터에 “우리는 IT 군대를 만들고 있다. 디지털 인재가 필요하다”라는 글을 올리면서부터. 개전 초 인터넷 서비스와 휴대전화 통신망 파괴로 사이버 시스템과 커뮤니케이션이 마비되자 페도로프가 주도하는 디지털혁신부는 30만 명에 가까운 해커 등 IT 전문 자원봉사자들을 ‘우크라이나 IT 군대(IT ARMY of Ukraine)’라는 텔레그램 채널의 해커 그룹에 참여시켜 정예 사이버전 전담부대를 창설했다. 이들은 러시아 중요기관 웹사이트와 온라인 서비스를 파괴하는 등 보복에 나섰다. 2003년 온라인 커뮤니티 포챈(4chan)에서 ‘익명(匿名:Anonymous)’이란 이름으로 시작, 3,000명 정도로 추정되는 국제 해커 조직인 어나니머스와도 연계, 22년 2월 25일 러시아 국방부 데이터베이스를 해킹했고, 러시아 정부의 웹사이트와 관영 언론에 대한 디도스 공격도 감행했다. 페도로프의 디지털혁신부는 ‘E-에너미(E-Enemy)’로 알려진 텔레그렘 채팅봇을 개발, 국민 누구나 주변 러시아군의 동태를 보고할 수 있도록 했다. 에너미에 접속하면, 채팅봇이 사용자에게 러시아 군대 유형과 규모, 목격 장소, 접촉 시간 등 자세한 정보를 요구한다. 현재 30만 명 이상이 서비스에 가입, E-에너미로 우크라이나 전국에서 사진, 비디오로 촬영된 러시아군의 움직임과 위치의 다양한 정보가 수집된다. 이렇게 취득한 정보를 각종 군사작전에 활용하고 있으며, 수도 키이우를 놓고 격전을 벌일 당시 많은 정보가 수집돼 러시아군을 패퇴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디지털혁신부가 운영하는 전자정부 플랫폼은 개전 초 정부의 전자지갑을 만들어 6,000만 달러 상당의 암호화폐도 기부받았다. 러시아는 이번 전쟁에 20여만 명에 달하는 IT 전문가, 지식인들이 러시아를 탈출했지만, 우크라이나는 ‘30만여명의 IT 군대’를 창설하는 등, MZ세대인 페도로프가 국방의 한 축을 담당해 우크라이나가 버티고 있다는 평가다. “우크라이나의 최연소 장관인 미하일로 페도로프는 기술과 암호화폐, 그리고 소셜미디어를 현대판 전쟁 무기로 탈바꿈시켰다.”(, 2022.3.12.)라는 보도가 빈말이 아닌 셈이다. 페도로프는 또 전 세계 빅테크 기업 50여 곳의 CEO들을 상대로 이메일과 트위터 등으로 세계 경제에서 러시아를 분리하고 글로벌 인터넷에서 러시아를 차단하기 위한 반(反)러 제재 동참 캠페인을 전개했다.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빅 포’로 일컬어지는 구글과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의 머리글자를 딴 GAFA 등 미국 정보기술(IT) 공룡 업체와 넷플릭스, 인텔, 페이팔 등 빅테크 기업들에게 러시아에서 사업 중단을 촉구한 것이다. 그의 요청을 수용한 전 세계 빅테크 들도 우크라이나 편에 섰다. 애플은 러시아에서 제품 판매를 중단했고, 메타(옛 페이스북)와 트위터, 넷플릭스·유튜브가 러시아 국영 매체를 통한 정치적 선전 차단에 나서는가 하면 스페이스X·에어비앤비는 통신망이나 피란민 숙소 제공 등 우크라이나를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 구글은 우크라이나인의 안전을 위해 구글 지도 일부 기능을 비활성화시켰다. 미국 빅테크 기업과 천문학적 비용의 무기지원 등으로 버티고 있는 젤린스키 대통령에게 “끝까지 간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다짐대로 이 전쟁을 통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갈등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얽히고설킨 강대국들의 힘겨루기도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 네오콘이 추진한 30년 프로젝트의 정점이다.”는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 컬럼비아대학 교수 지적대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미국 대리전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브레진스키가 책 <거대한 체스판>에서 주장했듯이 이들 네오콘에게 우크라이나는 미국의 핵심이익이 걸린 사활적 지역이다.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은 미국의 글로벌 패권유지의 핵심 요소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진보 네오콘의 대리전이라는 진보학자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전쟁사에서 변곡점 가져온 딥 페이크가 사용된 최초 전쟁 페도로프는 해커(Hacker)와 행동주의자(Activist)의 합성어로 인터넷을 통한 컴퓨터 해킹을 투쟁 수단으로 사용하는 새로운 형태의 행동주의자, 즉, 불의(不義)에 저항하는 정치 사회적 신념을 알리기 위해 해킹하는 사회 활동가인 ‘핵티비스트’를 통해 지난해 2월26일에는 러시아 국영방송을 해킹, 우크라이나 국기가 휘날리고 국가가 울려 퍼지게 했다. 3월 2일에는 러시아 군사위성을 해킹해 러시아 전쟁지도부와 전선사령부와의 실시간 소통을 봉쇄했다. “2022년에는 현대 IT 기술이 탱크와 다연장 로켓, 미사일에 최고의 대응책이 될 것”이라던 페도로프의 전략은 적중,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여준 ‘디지털 봉쇄(digital blockade)’ 전략은 ”현대전쟁은 핵전쟁(Nuclear War)일 것”이라는 그동안의 생각도 바꿨다. 즉 현대전쟁은 디지털미디어에 의한 하이브리드전쟁’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전쟁 초 젤린스키 대통령이 화면에 등장, “무기를 내려놓아라!”고 말하는, 마치 러시아에 항복 선언을 하는 듯한 가짜영상이 나돌았다. AI 즉 인공지능의 영상합성조작용 ‘딥 페이크(deep fake)’ 기술이 동원된 것이다. 적군 병사를 인식하는 안면인식 소프트웨어에서부터 군수지원 효과를 높이기 위한 머신러닝(machine learning)도 적극 활용되고 있다. 인간의 눈으로 안면인식을 할 때 발생하는 오류 가능성은 6%지만,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사가 개발한 안면인식 소프트웨어 오류 발생률은 1%에 불과하다. 특히 저궤도 위성 스타링크는 데이터를 원격에서 공유, 스타링크 터미널을 이용하여 적군의 위치를 손바닥 보듯 손쉽게 확인하고 공격해 지상 정보 기반 작전의 미래를 통째로 변화시킨 네트워크전의 진수(眞髓)를 보여줬다. 지난해 3월 27일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우크라이나에 파병된 러시아군이 전쟁터에서 놀라울 정도의 빈도로 스마트폰이나 PTT 단말기(Push To Talk Radio) 무전기를 사용해 교신하고 있다”며, 감청이나 도청에 쉽게 노출되는 통신을 사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개전 이후 러시아군 장성 7명이 우크라이나군에 사살된 것도 스마트폰 위치 정보 노출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경적필패(輕敵必敗)라는 병법의 기본을 무시하고, 속전속결로 수도 키이우를 점령해 우크라이나의 항복을 받아낼 것으로 예상했던 러시아군이 통신보안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아 자충수(自充手)를 둔 셈이다. 병력이나 인구 등 현저한 열세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침공에 결사 항전하는 동귀어진(同歸於盡)으로 죽기를 결심하면 살 것이라는 필사즉생(必死則生)의 각오로 싸우는 디지털로 무장한 우크라이나의 저항 의지는 러시아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하이브리드전의 원조(元祖)인 러시아가 마치 컴퓨터에서 워게임 하듯 진행하는 우크라이나의 고도화된 하이브리드전에 고전하고 있는 현실은 상징적이다. 이번 전쟁은 70대의 ‘아날로그 세대’ 푸틴(1952년생)과 ‘디지털 세대’인 40대 젤린스키(1978년 생), 30대 페도로프(1991년생) 대결로 국가지도자 리더십과 국민의 디지털미디어 역량이 곧 국력이자 국방력인 시대를 경험하는 인류 전쟁사의 변곡점(inflection points)으로 기록될 것이다. 국방안보전략, 금융시스템, 에너지, 테러행위, 식량산업, 과학기술 등 국정의 모든 분야가 상호 연결 융합된 하이브리드 전쟁시대에 6800여 명의 해커를 보유, 내밀한 국방 기밀까지 탈취하는 하이브리드전쟁 실행 능력이 막강한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도 적절하고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해야 겠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2023-07-25 06:00:00
- [박종렬의 제왕학] 푸틴의 롤모델 '표트르 대제'의 무한 영토욕 박종렬 논설고문] “우리는 러시아인이 아니라 표트르인(Petrovian)이라고 해야 한다. 러시아는 표트르의 땅(Petrovia)이다.” 19세기 러시아 재무대신 칸크린 백작의 ‘표트르 대제’에 대한 인물평이다. 러시아는 17세기까지만 해도 농촌공동체 중심의 가난하고 미개했던 슬라브족의 나라였다. 이런 국가를 개명군주 표트르 대제(1672~1725, Peter the Great)는 동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시켰다. 표트르는 1682년, 10세 나이로 로마노프왕조의 공동왕좌에 올랐지만 야심만만한 25세 이복누이 소피아의 섭정하에서 불우하게 지냈다. 병립(竝立)정권으로 남매가 통치권을 놓고 갈등을 벌인 치열한 권력투쟁중 소피아의 쿠데타를 역습, 승리한 표트르는 타고난 명민함과 열정으로 모스크바대공국을 세계열강 ‘제정 러시아’로 환골탈태시킨 것이다. 17세기 후반 차르와 보야르(봉건 귀족)의 권력투쟁, 교회와 국가 간 갈등,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 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변방국가 러시아의 기존 질서를 파괴, 혁신을 일으켜 유럽의 열강으로 개혁했다. 낡고 오래된 러시아가 한 사람 ‘표트르의 등장’으로 반세기도 되지 않아 완전히 새로운 국가로 떠오른 것이다. 러시아 역사를 축약한다면, 표트르 대제 이전의 러시아와 표트르 대제 이후의 새로운 러시아로 구분할 정도다. 오늘날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보면서 표트르와 닮은 꼴인 푸틴 행보에 기시감을 느낀다. 가흥천하 가망천하(可興天下 可亡天下), “나라를 흥하게도 하고, 망하게도 한다”는 말대로 구 소련 해체이후 만신창이가 된 3류 국가를 ‘강대국 러시아’로 부활시킨 푸틴을 보면 국가의 흥망이 한 인물의 경륜과 역량에 달려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표트르 대제’ 꿈꾸는 푸틴의 열망이 일으킨 전쟁 전제군주 표트르는 2m가 넘는 장신(長身)이었다. 그는 왕위를 이복누이 소피아에게 맡긴 후, 선진기술을 익히기 위해 250명의 서유럽 방문사절단을 조직했다. 표트르는 스스로 하사 신분으로 위장해 프로이센에서 대포 제조술을 익혔고, 네덜란드에서는 조선기술을 배웠다. 영국에서 수학 기하학 응용과학까지 배운 그는 6개국을 거쳐 18개월 만에 귀국, 1696년 누이를 축출하고, 명실공히 전권을 장악했다. 대개혁에 나선 그는 야만의 동토 러시아를 경영용어를 빌리자면 리모델링(개조) 아닌 리스트럭처링(개혁), 리엔지니어링(혁신)해 새로운 근대국가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당시 해군력이 없던 러시아는 겨울에 얼지 않는 항구, 부동항(不凍港)을 얻으려면 남쪽으로 터키가 버티고 있는 흑해, 서쪽으로는 당시 군사 강국이었던 스웨덴이 통제하는 발트해로 진출해야 했다. 1696년 인구 1400만 러시아의 표트르는 러시아 최초로 해군을 창설했고 30만 대군을 양성했다. 그리고 당시 흑해 방면을 틀어쥐고 있던 오스만제국, 발트해의 맹주였던 스웨덴과 전쟁을 통해 세력을 확장했다. 그 당시 표트르가 창설한 러시아 해군은 이후 200여년 위세를 떨쳤고, 20세기 초반 ‘해상의 왕자’로 군림했던 영국해군마저 두려워할 정도였다. 군비확장을 끝낸 표트르는 1695년 아조프(Azov) 원정으로 오스만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1696년 7월 해군 지원에 힘입어 오스만제국 장악지역이던 흑해 연안의 아조프 요새 공략에 성공했다. 그는 첫 성과를 거뒀지만, 더 강력한 해군 양성을 위해 전국에서 인재 50여 명을 선발해 서유럽에서 항해 기술을 배우도록 특별 유학을 보냈고, 1697년에는 200명이 넘는 규모의 대사절단을 서유럽으로 파견, 인재를 양성했다. ‘나라를 부하게 하며 군대를 강화’시키는 부국강병(富國强兵)만이 살길이라는 법가(法家)사상을 바탕으로 국방력을 강화, 1700년 8월 발트해로 진출해 이후 20년 동안 지속한 스웨덴과의 북방 전쟁을 전개했다. 1711년 투르크와의 싸움에서는 패하였지만, 표트르는 스웨덴 함대를 격파한 뒤 곧바로 육군을 동원하여 핀란드를 침공하였고, 여세를 몰아 스웨덴 본국을 침략해 승리했다. 1721년 북방 전쟁에 승리, 8월 30일 니시타트 평화조약 체결로 발트해 연안을 획득하고, 이듬해 페르시아에 원정하여 카스피해 서안을 합병하였다. 스웨덴을 정복, 고대 노브고로드의 영토를 회복했고 발트해 연안에서는 강대국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동유럽의 전통적인 강대국이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사실상 속국(屬國)으로 만들었다. 인그리야, 카렐리야 일부, 에스트랸디야, 리플랸디야 지역 등 러시아 북부와 발트 해 연안지역을 병합함으로써 발트해로의 ‘전략적 출구’를 확보해 북방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교회의 종까지 녹여 대포를 만들 정도로 국방력을 강화, 전쟁에서 승리해 러시아를 유럽의 강국으로 끌어올렸다. 날카로운 통찰력과 깊은 책략을 지닌 표트르는 새로운 국가의 틀 속에 유럽 문화를 주입, 행정·산업·상업·기술·문화·교육도 개혁했다. 그는 학교건립·해외 유학·문자개량·신문창간·새 수도건설 등 서유럽식 근대화를 추진한 국가개혁를 통해 러시아를 유럽 열강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이처럼 정치, 군사,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낡은 법률과 미비한 제도 등 국가체제를 완전히 바꾼 근대화 개혁을 추진해 제정 러시아는 명실상부한 유럽의 강대국으로 등장한것이다. 특히 그는 불모지였던 늪지대를 메워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거대 도시를 건설, 모스크바에서 천도(遷都)했다. 수도 이전이라는 국책사업을 추진하면서 무리하게 진행된 토목공사와 철권통치에 저항한 민중반란 진압과정에서 10여만 명을 살상했다. 급진적 개혁을 반대하는 투쟁을 피의 숙청으로 진압한 그는 전제주의적 절대주의 체제를 구축, 당시 서유럽에서 퍼지고 있던 시민 계급 성장도 방해했다. 그러나 독재자 표트르가 강력한 통치력으로 추진한 국가개혁 덕분에 러시아는 중세적인 후진국에서 벗어나 근대적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철권통치의 수수께끼와 같은 괴력을 발휘하며 40년 가까이 국가개혁을 통해, 문명화된 강대국의 성장 기반을 마련한 표트르는 마침내 ‘러시아 제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1721년 10월 원로원에 의해 로마 초대 황제인 카이사르(시저)에서 따온 명칭인 황제(차르:Tsar)로 추대됐다. 역사가들로부터는 ‘대제(大帝:the Great)’를 뜻하는 표트르 대제(Pyotr Veliky)’ 칭호를 받았다. 레닌 동상이 헐린 현재도 모스크바에 30m 높이의 위용(偉容)을 자랑하는 표트르 대제 동상은 ‘역사는 흔히 그런 무자비한 악당을 통해 한 걸음씩 전진한다’라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집무실에 표트르 초상화를 걸어놓고 기회 있을 때마다 영토 확장 등 그의 치적을 꺼내며 그와 ‘영혼 대화’를 한다는 ‘러시아 대통령 푸틴’은 21세기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를 롤모델로 삼고 있다. 영토확장을 통해 ‘강대국 러시아의 원형’를 창조한 표트르가 되기를 열망하는 푸틴의 열망이 “우크라이나 땅은 빼앗는 게 아니라 되찾는 것”이라는 침공 당위성의 배경이 되고 있다. 표트르, “한 마디(寸)를 탐내면 한 마디를, 한 자(尺)를 탐내면 한 자를…” ‘위대한 황제’라는 표트르는 사악하고 기괴한 성품의 군주였다. 자신의 개혁정책에 반대하는 수많은 인명을 비정하게 살해했다. 심지어 자기 외아들인 황태자 알렉세이 표트로비치가 반란에 가담했다며 고문하고 사형까지 선고, 반개혁세력 제거에 활용할 정도였다. 제정 러시아의 토대를 구축한 위대한 지도자이면서 이반 뇌제(雷帝)나 스탈린보다 더 가혹한 희대의 폭군이었다. 53세에 요로결석 합병증으로 숨진 그는 “하느님께서 제 죄를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는 유언을 남겼다. 러시아 역사에서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표트르는 발군(拔群)의 치적으로 가장 뛰어난 통치자이자 성공한 개혁 군주로 평가되고 있다. “발트해와 흑해 연안의 땅은 러시아가 반드시 날마다 조금씩 잠식(蠶食)해야 한다. 한마디(寸)를 탐내면 한 마디를 갖게 되고 한 자(尺)를 탐내면 한 자를 갖게 된다. 그치는 곳이 없으면 끝나는 때도 없다.” (『역주 옥중 잡기』, 우남 이승만 전집 6권, 연세대학교 출판문화원, p.108. 2022.10.7.)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현안(懸案)이 된 요즈음 이승만 전 대통령이 백여 년 전에 주목한 ‘피터대제의 유언’은 러시아의 대외정책의 특징인 ‘무한한 영토욕’을 증명하는 상징적 자료다. 유언은 구한말 패권국 러시아의 영토 야욕을 경계해 일본이 퍼뜨린 공로주의(恐露主義)의 한 단면으로, 이승만을 비롯한 공로주의자(恐露主義者)들로 하여금 러시아를 경계하게 했다. 이승만은 한문으로 번역된 이 문건을 1910년에 한글로 출판한 『독립정신』의 ‘아라사(俄羅斯) 정치 내력’이라는 장(章)에서 아래와 같이 약술했다. “…1672년에 대피득(표트르 대제)이라 하는 인군이 평생에 각국을 병탄할 욕심이 있어 사방으로 토지를 널리 확장하고 마침내 장생(長生)할 계책이 없어 욕심을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줄 먼저 생각한지라. 미리 열네 조목 유언(遺言)을 지어 깊이 간수하고 그 후 자손으로 하여금 대대로 유전하며 비밀히 감추고 형편을 따라 본떠 행하라 하였나니, 그 중 대지가 강한 나라와 먼저 합하여 작은 나라를 나누어 없이하고, 그 후에는 틈을 타서 그 나라를 마저 쳐 없이하며 자유하는 나라에는 혼인을 통하거나 달리 결련(結連)하여 먼저 내정을 간섭하여 권리를 주장하라. 모든 이런 궤휼(詭誘)·간교(奸巧)한 계책의 뜻이 가장 음험한지라, 그 후로 누대(累代) 인군되는 이들이 다 준행하여 효험이 많더니 근래에 이르러 그 글이 발각되어 세상에 드러남에 그 ‘무한한 욕심’을 알고 각국이 크게 두려워하여 사람마다 전파하여 하나도 모르는 자 없도록 만들며 구라파주(유럽)에 모든 나라가 아라사(러시아)의 세력을 막기로 제일 긴급한 문제로 삼지 않는 자가 없는지라…” 20대 후반의 청년 이승만이 반역죄로 5년 7개월 감옥 생활 중 한문으로 필사한 ‘러시아 피터대제의 고명’(俄彼得大帝 顧命) 요지는 슬라브족의 뿌리 깊은 영토적 야심을 보여준다.(우남 이승만 전집 6권 : 역주 옥중잡기) 이 문건은 ‘표트르 1세’가 임종 전에 남긴 부탁의 말, 즉 유언장(遺言狀)이다. 이승만은 “재위 중에 서거하자 뒤를 이은 각 황제가 고명(顧命, 유언)을 상전(相傳)하여 버리지 않았다…. 1896년 겨울에 이르러 미국 대례상(大禮相, 미상) 보관인(報館人, 신문기자)이 진본 14조를 찾아냈다.”라고 기록했다. 이 문건은 1948년, 진본이 존재하지 않는 위서(僞書)로 판명 났다.(Dimitry V. Lehovich, "The Testament of Peter the Great", American Slavic and East European Review, 7(2): 111-124, Apr, 1948). 류석춘교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건은 러시아가 팽창정책을 펼칠 때마다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19세기 중반 크림전쟁으로 불리는 1차 동방전쟁(1853-56), 터키와의 전쟁인 2차 동방전쟁 (1877-78), 그리고 1차 세계대전 (1914 - 1918) 등이 그 예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러시아의 현대판 ‘짜르’라 불리는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오늘날은 과연 표트르 대제의 고명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일까.”라고 주장했다. (이승만의 ‘옥중잡기’ 중 ‘러시아 피터 대제의 유언’과 우크라 전쟁,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 자유일보, 2022.3.13) 러시아는 국토면적이 1,712만 ㎢에 동서 간 거리가 9600km에 달해 세계에서 가장 영토가 넓다. 총 11개의 시간대가 존재할 정도로 광대한 러시아는 우리나라 면적의 170여 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탐욕스러운 영토 확장 야심은 피터대제 이후 푸틴에 이르기까지 범슬라브주의, 유라시아이즘 등 명칭을 바꿔가며 그치지 않고 있다. 미 CIA에서 제공하는 The World Fact book(‘23) 통계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 다시 말해 지표면적의 7분의 1인 러시아는 미국의 1.8배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임에도 푸틴이 집무실에 표트르 대제 초상화를 걸어놓고 그의 고명인 영토 확장을 다짐하는 한, 우크라이나의 운명은 풍전등화(風前燈火)로 강대국 국제정치의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심장이고,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머리이며, 키예프는 어머니이다”는 슬라브 속담대로 우크라이나가 자신들의 땅이라는 러시아의 지정학적 선택은 영원히 반복될 숙명을 안고있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2023-06-22 06:00:00
- [박종렬의 제왕학] 21세기 시작과 함께 등장한 러시아의 신성( 新星) .. 박종렬 논설고문] “나는 그때 알게 되었어, 소냐. 권력은 용기를 내 몸을 굽혀 그것을 줍는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말이야. 오직 하나, 하나만이 필요한 거야. 용기를 내는 일만이 필요한 거야!” (도스토옙스키, 1821~1881년, <罪와 罰>, 제4부 제4장) 소설 <죄와 벌>에서 백해무익(百害無益)한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살해, 그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것이 낫다는 사회주의적 이상을 내세운 ‘인간 경계를 뛰어넘는 살인범’ 라스콜리니코프. 그가 굶주리는 가족을 위해 매춘부(賣春婦)가 된 소냐에게 ‘권력의 본질’을 말한 대목이다.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를 위해 자신을 던져 구원자 역할을 맡았던 ‘순수한 영혼’의 소냐에게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난 나폴레옹이 되고 싶었지. 그래서 죽였어”라고 외친다. ‘보통사람’이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지만 ‘비범한 권력자’가 대의명분을 위해 전쟁을 하고, 수천 명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는 라스콜리니코프는 ‘나폴레옹 같은 초인’은 인류를 위하여 사회의 도덕률을 넘어설 권리가 있다고 결론짓고, 자신을 나폴레옹에게 빗대 초인의식(超人意識)으로 심리적 무장을 한다. 따라서 그는 사회악이며 이(蝨)에 불과한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죽여도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긴 ‘예수의 영혼을 지닌 시저’ 같은 인물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에 소설의 무대가 된 상트페테르부르크 뒷골목에서 자신의 신념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청년 라스콜리니코프의 고뇌를 느끼며 ‘보통인간’의 경계를 뛰어넘은 초인사상(超人思想)을 익힌 푸틴이다. 훗날 대통령이 돼 수차례 전쟁을 치르고, 지금도 전쟁중인 푸틴이 추천한 9권의 책 가운데 2권이 가장 좋아하는 동향(同鄕) 작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카라마조프 형제>라고 밝힌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마키아벨리는『군주론』에서 “주어진 운명(fortuna)을 용기 있는 결단(virtu)으로 극복하는 자가 군주”라고 했다. 로마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키케로의 “운명은 강한 자를 돕는다”는 말대로 푸틴은 ‘강한 자가 승리하는 게 아니라, 승리한 자가 강한 자’임을 입증했다. . ‘권력의 본질’을 본능적으로 꿰뚫어 본 FSB(소련의 국내 치안과 방첩을 담당하던 KGB 제2총국의 후신 중 하나로, 러시아 국내 첩보와 방첩활동을 담당하는 정보기관으로 통칭 聯邦保安局)국장 푸틴이 ‘옐친 정부’ 권부(權府)인 FSB·구 KGB 등, 군부, 경찰 출신과 권력 실세 등 비밀기관에 종횡으로 엮인 ‘실로비키 네트워크’를 통해 ‘몸을 굽혀’ 용기를 내 ‘권력을 줍는 동안’, 총체적 난국에 빠진 러시아의 경제 정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1985년 고르바초프 서기장 집권 6년만인 1991년 초강대국 소련이 건국 74년 만에 15개 공화국으로 분리, 해체된 뒤 ‘러시아공화국’ 새 집권자가 된 옐친 초대 대통령의 무능한 국가경영은 엉망진창이었다. 미래 번영이나 희망을 줄 국가 비전 제시에 실패한 옐친에 실망한 러시아인들은 유능하고, 국익을 신장시킬 국가재건의 영웅을 대망(待望)하고 있었다. 이때 옐친은 권력서열이 한참 낮고, 중앙정계에 낯선 무명(無名:noname)의 첩보원 출신 푸틴 FSB국장을 파격적으로 총리에 발탁한다. 체첸전쟁 승리 ‘영웅 이미지’ 부각, 대통령 당선 총리가 된 푸틴은 당시 국가적 현안이었던 체첸전쟁에 직면,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돌파구를 마련했다. 1996년 체결된 정전협정으로 잠시 소강상태였던 1차 체첸 전쟁(1994~96년)은 막대한 전쟁비용 누적 등 국가리스크를 키우고 있었다. FSB 국장 때부터 체첸 독립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전쟁을 구상하고 있던 푸틴 총리는 체첸전쟁을 통해 옐친이 말한 ‘군인다운 태도’를 선보이는 기회를 포착했다. 그는 옐친 대통령에게 체첸에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절대 권한’을 요구한다. 푸틴 총리는 1차 전쟁과 달리 1999년 9월, 러시아군과 내무부 소속 병력에 전격적인 2차 체첸 침공을 명령해 체첸 전체 장악을 시도했다. 그는 여론이 어떻게 반응할지, 총리로서 정치적 생명은 안중에도 없는 듯, 체첸전쟁에 모든 것을 걸었다. 푸틴은 2주간 체첸 반군이 장악한 다게스탄 마을을 공습, 무자비하게 유린하는 공포감을 조성하며 체첸 초토화 작전을 전개했다. 직접 전투기를 몰고 전투 현장을 깜짝 방문해 공을 세운 러시아군에 훈장을 달아주는 장면 등을 연출, 늙고 병약한 옐친 대통령에 대비되는 젊고 강력한 40대 총리 이미지를 강렬하게 부각시켰다. 2차 전쟁의 경우, 1차 전쟁과 달리 모스크바 테러를 겪은 뒤라 푸틴의 과단성 있는 강력한 리더십에 조응(照應)해 지지율이 매우 높아졌다. 8월에 총리로 지명될 때 푸틴의 ‘대통령 후보’ 지지율은 2%에 불과했으나, 10월에는 27%, 11월에 40%를 넘어서면서 ‘국가적 영웅’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다. 이런 여세를 몰아 푸틴 총리는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자신의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인사들을 총리실장, 부총리, FSB 제1부국장, ‘단합당’ 원내 당수 등에 전격적으로 기용하는 한편, 구 KGB 동료들을 안보위원회 서기, FSB 국장 등에 발탁하여 친정체제를 구축했다. 거미줄처럼 깔린 실로비키 정보망을 통해 ‘황금 어항에 갇힌 금붕어’를 보듯 부패한 권력 집단이 된 옐친 패밀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받고 있던 푸틴은 착착 대권 장악을 위한 물밑작업을 추진했다. 40대 전후반의 파워 엘리트 100여 명으로 구성된 두뇌집단(think tank)인 ‘전략연구센터’를 발족시켜 대선 전략뿐만 아니라 ‘강한 러시아’를 목표로 한 ‘국가개조 프로젝트’를 은밀하게 추진했다. 집권 후 구체적인 통치로드맵도 작성해 러시아가 직면한 대내외적 복합 위기 대처방안을 준비한 것이다. 몸을 낮추고 때를 기다리는 이유는 나서야 할 때 제대로 나서기 위함이다. 미인에게는 질투가 따르고 영웅에게는 어려움이 따르는 법이어서 몸을 낮춰 인내심을 갖고 재능을 감추고 때를 기다리던 푸틴은 기회를 포착, 맹호출림(猛虎出林)격으로 대선을 앞두고 초반에 기세를 제압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정국 주도권 장악을 위한 기선제압책으로「러시아 연방 신국가 안보개념」(2000. 1. 10)과 우리나라의 국회 격인 국가두마의 개원 연설(1.18) 및「신 대외정책 개념」(3.24) 등 국가청사진을 발표, 국민적 지지를 기반으로 정국을 주도하면서 대권 장악을 모색하였다. 특별한 배경이나 뛰어난 경력이 없던 그는 ‘선수를 쳐서 적을 제압한다’라는 선즉제인(先則制人)의 병법에 따라 있는 힘을 다해 국가적 과제 해결에 선제적으로 대응, 성심껏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퇴임 후 길은 여러 갈래지만 퇴로(退路)를 못 찾아 방황하는 옐친 대통령을 향해서는 권력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척 자신의 재능과 본심을 숨기는 철저한 도회술(韜晦術)로 무장한 지략(智略)을 발휘, 옐친의 환심을 사며 대응했다. 옐친은 퇴임이 다가오며 마지막 숨통을 조여오는 국내외적인 위기상황에서 푸틴을 포함한 보리스 넴초프 부총리, 세르게이 스테파신 내무부 장관(이후 넉 달간 총리), 니콜라이 악세넨코 교통부 장관 등 10여 명의 보호막이 돼줄 후계자를 놓고 저울질하며 고심을 거듭했다. 결과적으로 푸틴은 퇴임 후가 불안한 옐친의 유일한 방패막이가 자신임을 ‘업무’를 통해 옐친 대통령과 옐친 패밀리에게 용의주도(用意周到)하게 정치적 포석을 통해 암시했던 셈이다. 당시 옐친의 사위로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최고 실세였던 유마셰프 비서실장은 훗날 푸틴의 업무처리 능력에 반해 푸틴을 행정실 제1부실장으로 발탁했다고 밝혔다. 그는 “푸틴과 몇 달 동안 함께 일하면서 그의 업무 능력을 확인했다”며 “사안을 분석하고, 아이디어를 내고, 추진하는 데 특히 뛰어났다”고 평가했다. 유마셰프는 “옐친은 1991년 소련의 붕괴를 이끌었던 세대는 자신과 함께 떠나야 하고, 20년 정도 젊은 45~50세 세대가 나라를 맡아야 한다”며 “나라를 믿고 맡길 수 있으며 자신의 개혁정책을 계속 추진할 사람을 원했다”고 증언했다. 재직 중 숱한 과오로 퇴임 후 ‘신변보장’을 고민하며 자신을 지켜줄 ‘신뢰할 만한’ 강직한 인물을 찾아 암중모색하던 옐친은 푸틴을 놓고 마지막 저울질을 했다. 유마셰프는 ‘푸틴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옐친에게 “푸틴이 일하는 방식을 지켜보니, 앞으로 더 큰 일, 더 어려운 일을 할 준비가 된 친구”로 ‘최고의 후보’라고 강력하게 추천, 킹메이커가 된다. 푸틴 총리를 후계자로 낙점한 옐친은 또 한 번의 정치적 도박으로, 2000년 새해가 밝기 3주 전 푸틴에게 러시아 연방의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제의했다. 푸틴은 ‘부담하기엔 다소 무거운 짐’이라며 ‘아직 준비가 덜 됐다’고 겸양하며 고사(固辭)했지만, 옐친은 “이것은 운명이요”라며, 임기 6개월을 남겨두고 1999년 말 대통령직 사임 의사를 밝혔다. ‘난극당치(亂極當治)’, 옐친 퇴진과 신성(新星) 푸틴 등장 소련의 갑작스러운 붕괴 이후 신생 러시아가 탄생했지만, 옐친 집권 말기 ‘100달러만 있으면 안될일이 없다’던 정치 경제 등 총체적 국가적 혼란은 그야말로 ‘난극당치(亂極當治)’였다. 중국의 주희(朱熹)가 <논어(論語)>해설에서 “혼란(混亂)이 극에 달해, 그 끝에 이르러 난세(亂世)가 되면 ‘새로운 질서’가 태동된다”고 지적한 대로 러시아는 새 질서를 주도할 새 인물을 대망하고 있었다. 오후만 되면 독한 보드카에 취한 알코올 중독과 고질적인 심장질환에 시달리는 옐친 대통령의 병상 통치는 국가경영의 비정상화를 가속화 해 사실상 국가경영이 마비되는 국정 난맥상이 극에 달한 국가적 위기상황이었다. 헌법에 따른 정상적 선거 일정상 대선이 2000년 6월이었지만 옐친 대통령이 임기를 6개월 앞당긴 조기 사임으로 총리인 푸틴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되면 ‘옐친 퇴임’ 90일 이내인 2000년 3월 26일에 대통령을 선출해야 했다. 현직 대통령 권한대행 ‘프리미엄’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선거를 치르게 배려한 것이다. 이런 정치적 고려 끝에 옐친 대통령은 인기 급락과 경제 파탄이라는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국가 위기 상황에서 1900년대가 끝나는 1999년 12월 31일, ‘금세기 마지막 날인 오늘’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푸틴 총리에게 ‘대통령직무 대리’를 맡긴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이날 낮 12시 공공 TV(ORT) 생방송에서 옐친은 창백하고 근엄한 표정을 한 채 건강에 대한 고려와 함께 후진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6개월 동안 더 권좌에 남아 있지 않고 당장 하야(下野)한다면서 전격적으로 ‘대통령직’ 사퇴 메시지, 즉 ‘새 천년을 새로운 인물과 맞이해야 한다’는 퇴임의 변(弁)을 밝혔다. 그는 재임 중 실책(失策)에 용서를 구하고 러시아가 새로운 정치 지도자들과 함께 ‘새로운 21세기’에 들어가는 ‘역사적 상황’을 통절하게 인식, “난 아직 현실로 다가오지 않은 당신들의 꿈을 위하여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또한 난 당신들의 희망을 옳다고 주장하지 못한 데 대한 용서를 구합니다.”라며 “나는 떠납니다. 할 수 있는 것을 나름대로 다 했습니다”고 담담하게 토로했다. 심신이 지쳐 집무가 힘들던 옐친대통령의 선양(禪讓)으로 ‘자신의 맡은 바 직책’에 최선을 다해 묵묵히 일해온 푸틴은 그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 기다리지도 않던 선물로 ‘러시아의 최고 권력자’가 된 것처럼 보인다. ‘결정적 시기’를 기다리며 인내하고 인내하던 시진핑(習近平)이 그랬던 것처럼 대권(大權)은 홀연히 찾아드는 선물 같은 것이라는 러시아판 맥연회수(驀然回首)였다. 소련이 해체된 난세의 천시(天時), 페테르부르크 중심의 네트워크라는 지리(地利)와 KGB 인맥이 뒷받침된 인화(人和) 3박자가 합을 이룬 천운(天運)이 그에게 돌아온 것이다. 푸틴의 등극은 이미 정해져 있어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천운으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천운(天運)의 運은 ‘돌 운’으로 결국 ‘운은 돌고 돈다’라는 의미로 운은 알아서 오고 또 알아서 간다고 하던가. 천시(天時)가 맞아떨어져 천명(天命)을 받은 푸틴은 드라마틱한 연출로 20세기가 끝나는 1999년 12월 31일 자정이 지나 21세기가 열린 2000년 1월 1일 정초(正初)부터 ‘러시아 연방 대통령 대행’으로 러시아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1999년 12월 31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 권한대행’의 첫 번째 포고령은 ‘러시아 연1974년 미국 부통령이었던 제럴드 포드가 대권을 승계하면서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관련 위법행위에 특사(特赦) 조처를 내림으로써 닉슨의 모든 형사 조치를 마무리한 것처럼 옐친의 퇴임 후 안전을 보장한 조치였다. 방 전 대통령과 그 가족에 대한 안전보장’으로, 옐친 전 대통령 패밀리에게 ‘평생 면책특권 보장과 여생의 안전’에 관한 것이었다. ‘러시아 연방 대통령 대행’ 푸틴은 2000년 3월 26일 합법적인 민주적 선거절차에 따라 쟁쟁한 거물들을 꺾고 53%의 지지율로 옐친 외 누구에게도 크게 신세 지지 않고 천운(天運)으로 48세에 ‘러시아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우리가 알아챌 겨를도 없이 우리 눈앞에 화려한 신데렐라(물론 남성이지만)의 등장이라는 여간해서 일어나지 않은 역사가 연출되고 있다. 이야기의 매력은 다음과 같은 데 있다. 권력을 잡기 위해 몸부림치는 자들이 아닌, 어제 갑자기 나타나 대통령 역할을 원하지 않는 자에게 권력이 돌아간 것이다. 이것은 전 국민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한국, 푸틴의 리더십을 배우다』, 미하일 출라키, 2005) 푸틴 대통령은 내년인 2024년까지 임기를 마치면 24년 집권, 옛 소련 시절 이오시프 스탈린 서기장(29년)을 제외하면 현대 러시아의 지도자 가운데 최장기 집권자가 된다. 84세가 되는 2036년까지 6년 임기의 대통령직을 두 차례 더 역임할 수 있어 사실상 종신 집권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천하에 무서울 게 없는 큰 권력을 가진 권력자라도 미련 없이 ‘급한 물살에서 용감히 물러나는’ 급류용퇴(急流勇退)처럼 물러날 때가 되면 용단을 내려 스스로 퇴진하는 항룡유회(亢龍有悔)하지 않는 지혜가 큰 지도자 덕목이다. 옐친은 진퇴(進退)의 묘수를 발휘, 푸틴 총리를 후계자로 선택하고 6개월 임기를 앞당겨 전격 사임하는 결단을 내려 국가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서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러시아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칭송받으며 76세로 천수(天壽)를 누렸다. 수나라 왕통(王通)도 <지학(止學)>에서 인간의 승패와 영욕에서 평범과 비범의 엇갈림이 ‘멈출 지(止)’란 한 글자에 달려 있다고 설파했다. 범사(凡事)에 때가 있듯이 ‘나아감’과 ‘물러설’ 때를 정확하게 잡아 행동하는 ‘지학(止學)의 묘용(妙用)’을 외면한 푸틴 대통령은 내년 선거 승리를 노려 우크라이나를 침공, 수만명 살상 등으로 국제전범으로까지 회자(膾炙)되고 있다. 종신 장기집권을 노린 교묘한 대중조작과 언론통제로 몇 차례 개헌을 통해 합법을 가장해 권력을 유지, 용퇴의 기회를 놓친 푸틴은 이제 기호지세(騎虎之勢)의 처지가 되었다. 호랑이를 타고 가다 도중에 내리면 잡아먹히듯 중도에 그만둘 수 없는 절박한 형세에 처한 푸틴의 미래는 히틀러 등 과거 독재자의 말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구소련의 영광을 재현할 만큼 ‘러시아 제국’ 재건의 토대를 닦았다는 평판을 얻은 푸틴이지만 공성신퇴(功成身退), 즉 어떤 자리에서 업적을 이뤘을 때 영광을 누리려고만 하고 물러날 때를 놓친다면 큰 화를 입는 경우가 많은 준엄한 역사의 교훈을 외면하고 있다. “우리는 ‘인간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을 역사로부터 배웠다”는 헤겔의 역설적인 지적을 무시하는 푸틴의 비극적 종말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는 감상이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2023-05-19 06:00:00
- [박종렬의 제왕학] 난세가 영웅을 부르고, 영웅이 난세를 부른다 박종렬 논설고문] 난세(亂世)에 ‘위기는 기회’, 새 인물 탄생 대망(待望) ‘난세가 영웅을 부르고, 영웅이 난세를 부른다’고 했던가? 천하가 혼란에 빠지면 힘 있는 사람에게 적당히 빌붙어 생존해야 한다. 그야말로 ‘십 리도 못 가는 파리가 천리마 꼬리에 붙어 천 리를 간다’는 부기미(附驥尾) 전술이다. 푸틴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기 전 60여 년 지속괸 냉전 시대가 종식되며 소련은 그야말로 ‘천하대란(天下大亂)’ 시대가 열린다. ‘무명의 스파이’ 출신인 푸틴은 ‘천리마’에 비견되는 옐친 대통령의 ‘총리’ 발탁으로 러시아에서 ‘영웅’으로 부각될 기회를 얻게 된다. 소련 붕괴 당시 대통령인 고르바초프(1931.3.2.~2022.8.30, 1985~1991 재임)는 1985년 소련의 8번째 지도자로 54세에 소련 사상 최연소 서기장 자리에 올랐다. 공산주의 혁명 이후 태어난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침체된 경제 회복과 정치적 민주화를 허용하고, 경제 효율성을 제고하려 분투했다. 미국에 맞선 공산 진영의 대표였던 소련식 사회주의 체제의 비능률적이고 불합리한 국가시스템의 ‘제도 피로화’ 현상 타파를 적극 추진한 것이다. 6년여 페레스트로이카(재건과 구조조정)와 글라스노스트(개방과 언론의 자유)로 상징된 일련의 개혁‧개방 정책, 즉 언론 통제와 적대적 대외 관계 형성 등을 완화하는 적폐 청산을 위한 개혁을 주도했다. 누적된 모순의 급진적 개혁은 공산당 보수파의 불만을 샀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쟁 비용 문제에 더해 1980년대 후반 유가 하락, 사상자 수만 명을 낸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1986년)까지 겹쳐 심각한 리더십 위기를 결과했다. 그는 당 정치국 압력을 피해 보려 1990년에 ‘서기장’ 대신 대통령직을 신설해 개혁 지도자로 이미지 메이킹을 통해 권력 유지를 위해 안간힘을 썼다. 1991년 8월 18일 밤 국가보안위원회(KGB)와 국방·내무부의 공산당 보수 강경파들은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구성해 흑해 크림반도 별장에서 휴가 중이던 고르바초프를 찾아가 사임을 요구했다. 이 제안을 거부하는 그를 쿠데타 세력이 연금하고 권력 장악을 시도했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부총리급 국무위원으로 모스크바시 지구당 제1서기(서울시장 권한대행에 해당) 옐친(1931.2.1~2007.4.23, 1991~1999 대통령 재임)은 쿠데타군이 모스크바를 장악하면 임시정부를 조직해 진압할 계획까지 세워 새로운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가난한 농촌 출신인 옐친은 우랄대학교 건축학과를 나와 젊은 시절에 건축 기사로 지내다가 1961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뛰어난 흡인력과 업무 능력으로 빠르게 승진한 그는 자신보다 4주 먼저 태어난 고르바초프가 최고 지도자에 오르면서 중용돼 1976년 스베르들롭스크주 지구당 제1서기를 거처 1981년 공산당 중앙위원으로 승승장구했다. 고르바초프는 당시 급진 개혁파 정치인으로 급부상한 옐친 도움으로 사흘 만에 쿠데타를 제압했지만 실질적 권력은 정치적 영향력이 급속도로 커진 옐친 등에게 넘어갔다. 쿠데타 진압으로 ‘민주화의 영웅’이 된 옐친은 이후 소련 정부를 완전히 무력화시킨 뒤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지도자와 함께 소비에트연방 해체를 결정한다. 국민의 열광적 지지를 얻은 옐친은 ‘러시아 공화국 연방’이라는 새로운 독립국가연합(CIS) 창설을 선언하고 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CIS)을 이끄는 최고 권력자가 됐다. 체제 전환이라는 정치적 격변기였던 당시 상황을 지켜보던 푸틴은 쿠데타 반대파인 옐친의 정치적 동지로 자신의 대학 은사인 솝차크 편에 선다. 대세가 이미 기울어진 것을 포착한 푸틴은 기회주의자답게 ‘권력 이동’이라는 시대 흐름에 기민하게 대응하며 정치적 입지를 마련한 것이다. 푸틴,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는 총리 발탁 소련 붕괴 후 ‘초대 대통령’이 된 옐친의 개혁이 전방위적으로 진행되면서 KGB가 해체돼 ‘실직자’가 된 푸틴은 대학 은사인 아나톨리 알렉산드로비치 솝차크(1937~2000) 배려로 모교인 레닌그라드대학 대외담당 부총장으로 취업했다. 솝차크가 1990년 5월 레닌그라드 시의회 의장으로 진출하고 이어 1991년 6월에는 레닌그라드 시장 선거에 당선되면서 새로운 정치 인생을 맞게 된다. 초대 레닌그라드 민선시장이 된 솝차크는 푸틴을 부시장으로 발탁한 것이다. ‘정치 참모’가 필요했던 솝차크 시장에게 푸틴은 모신(謀臣) 역을 맡은 ‘복심(腹心)’으로 핵심 측근이 되었다. 부시장 푸틴은 1995년 5월 옐친 대통령을 지지하는 정당인 ‘우리 집–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지부를 조직했다. 옐친 대통령 본인은 무소속이었으나 그가 임명한 총리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러시아 연방 정부주석은 옐친 보위를 위해 ‘우리 집–러시아’를 창당했다. ‘우리 집–러시아’는 자율적인 정치조직이라기보다는 행정부-대통령의 수족처럼 행동하는 정당을 일컫는 권력 정당(party of power)이었다. 푸틴은 ‘우리 집-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지도자로 정치적 위상이 격상됐다. 그는 KGB 첩보 요원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해 러시아 직선 초대 대통령인 친(親)옐친 인사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푸틴 후견인인 민선시장 솝차크가 1996년 6월 시장 재선거에서 도시에 만연한 범죄와 혼란에 따른 유권자의 환멸로 낙선하자 다시 ‘실업자’로 전락했다. 갑자기 일자리를 잃은 푸틴은 변호사나 유도 트레이너 등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방황했다. 새로 당선된 시장이 푸틴에게 함께 일하자고 했으나 솝차크 시장의 은고(恩顧)를 입었던 푸틴은 “배신의 대가를 받느니 충성을 위해 교수형을 당하는 것이 좋다”고 단칼에 거부하고 의리를 지켜 주변에 배신을 모르는 ‘의리남’으로 각인된다. 이때 솝차크 시장과 함께 일했던 여러 부시장 중 한 명인 알렉세이 쿠드린과 경제부총리를 지낸 아나톨리 추바이스가 ‘실업자 푸틴’을 옐친 대통령 행정실장(비서실장)이자 사위로 최측근인 발렌틴 유마셰프에게 천거했다. 푸틴은 모스크바의 대통령 권부(權府)인 크렘린에 입성해 소련 해체 후 국유재산 처리를 담당한 ‘재산관리부 2인자’로 중앙 무대에서 새로운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깔끔하고 기강 잡힌 일 처리로 모스크바에 온 지 1년도 안 된 1997년 3월 대통령비서실 차장, 이어 제1부실장으로 고속 승진했다. 푸틴의 사심 없는 일 처리 솜씨를 눈여겨봐 온 옐친은 1998년 7월 KGB 후신인 연방정보국(FSB) 의장으로 발탁해 수직 상승을 거듭했다. KGB 입사 20여 년 만에 이름만 FSB로 바뀐 정보기관의 수장이 되어 ‘권력의 문’을 연 푸틴은 취임과 함께 ‘비밀경찰’도 부활시켰다. 권모술수(權謀術數)가 난무하는 정치판은 ‘정보가 권력’이고 정보 양(量)이 ‘권력의 크기’를 결정한다. 크렘린 권력 심장부 대통령궁을 거쳐 FSB를 장악한 푸틴은 신생 러시아의 모든 정보를 파악하는 위치에서 미래 권력의 향배를 주시하고 있었다. 체첸 독립을 막기 위한 체첸전쟁에서 과거 KGB의 역량을 FSB에 복원해 체첸 반군에 대한 역공작, 도청, 암살 등 주요 수단도 확보했다. 그가 KGB에서 단련된 노련한 솜씨로 묵묵히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근무하는 동안 1996년부터 시작된 옐친 대통령 집권 2기는 측근들의 전횡과 부패가 극심해지고 정치사회적 혼란의 난맥상이 극에 달했다. 소련 붕괴에 이은 10년간 난세가 된 러시아의 혼란과 불안은 새로운 지도자 출현을 재촉했다. 러시아 차르들과 스탈린 등 소련 독재 체제 유산인 비밀경찰 등 보안기구에 익숙한 ‘파워 엘리트’들은 KGB를 복원해 국가 경영을 정상적으로 작동시킬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를 갈망하고 있었다. 당시 옐친은 소련 몰락과 현대 러시아 출범 과정에서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 줬다. 그러나 취임 후 격무와 보드카 등 독주에 취한 알코올 중독, 심장병 등 질병으로 ‘종합병동’이 된 ‘재선 대통령’ 옐친은 퇴임 후 여생을 의탁할 차기 후계자 선택을 놓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정상회담에서 술주정이 특기였던 그는 각종 합병증으로 심신이 지쳐 퇴임 후 ‘신변 안전’을 고려해 후계자 선정을 고심한 것이다. 옐친은 장고 끝에 자신과 공산당이 주도하는 국가두마(러시아 연방 의회의 하원) 간 타협의 산물이었던 프리마코프를 1998년 9월 총리에 임명한다. 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중동 특파원 출신으로 옐친 정권하에서 FSB 의장과 외무장관, 총리를 맡아 냉전 종식 후 미국 독주를 막고자 국제질서의 다극화를 외치는 등 ‘준비된 대통령’으로 인기가 높았던 프리마코프. 그는 차기 주자로 급부상하자 ‘대통령 권한 축소’ 요구 등 옐친의 ‘역린(逆鱗)’을 건드렸다. 차기 대선에 대한 야심(野心)이 없음을 밝혀 옐친의 심기를 삭이려 했으나 오만해진 그는 1999년 5월 전격 해임당했다. 국정 주도권을 놓고 대통령에게 맞서는 등 갈등이 표면화된 것이다. ‘하나의 산에 호랑이 두 마리가 함께 살 수 없다(一山不容二虎)’라는 중국 속담대로다. 후임에 무색무취한 스테파신을 임명하자 해임된 프리마코프와 모스크바 시장 로슈코프는 연합정당을 결성했고, 특히 로슈코프 측은 옐친과 옐친 패밀리의 부정부패 의혹을 계속 제기했다. 의회에서는 공산당이 옐친 대통령의 1991년 소련 해체, 1993년 의회를 향한 무력대결, 체첸전쟁 개시, 군대 약화, 1990년대 경제위기 등 5개 죄목으로 탄핵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대통령 탄핵은 소련 해체와 옐친의 개혁에 대한 국민적 심판이라는 성격을 띠었다. 공산당뿐만 아니라 국민 다수도 크게 호응해 탄핵안이 의회에서 통과될 가능성이 농후해졌다. 절체절명(絶體絶命) 위기에 몰린 옐친은 정치적 도박을 결심한다. 그동안 정치적으로 키워준 스승 솝차크에게 ‘의리’를 지키고 확고한 충성으로 보좌하는 푸틴을 주목해 온 옐친은 푸틴에게 ‘차기 대권’을 암시하며 총리직을 제안하며 한때는 자기편이었지만 정적이 된 자들을 이기는 방법을 타진했다. 옐친의 총리직 제의에 대선(大選)을 염두에 둔 푸틴이 “선거운동은 정말 싫다”며 완강하게 사양했다. 옐친은 선거 전문팀인 미국 정치홍보 전문가들에게 스핀닥터 역을 맡겨 재선 때 신승(辛勝)했던 경험을 상기했다. 옐친은 선거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국민이 갈망하지만 옐친 자신에게 부족해 보이는 면모, 곧 신뢰, 권위, ‘군인다운 태도’를 보이면 된다고 집요하게 설득했다. 당시 FSB 책임자였던 푸틴은 주로 레닌그라드대 출신인 학연과 KGB 시절 강한 인연과 신뢰를 바탕으로 관계를 맺어온 실로비키(러시아어로 ‘제복을 입은 남자들’로,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후신인 연방보안국(FSB)을 비롯해 정보기관과 군, 경찰 출신 인사)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깔린 정보망과 도청 등을 통해 옐친 대통령실의 동정 등 ‘내밀한 권력의 기밀’을 손바닥 보듯 꿰뚫어 보고 있었다. 예부터 ‘지혜로운 자는 재주를 감추고 우둔(愚鈍)함을 보인다’고 했던가? 술에 절어 기분에 따라 통치하던 변덕쟁이 옐친 대통령 앞에서 푸틴은 ‘바보’처럼 한없이 몸을 낮췄다. 총리직을 맡으라고 설득해도 ‘아직 준비가 덜 됐다’며 발톱을 감추는 철저한 ‘도회술(韜晦術)’로 응대했다. 겸애설(兼愛說)이라는 독창적 학설을 창시한 중국 노나라 사상가 묵자(墨子)의 “미인은 문밖에 나오지 않아도 많은 사람이 만나길 원하고, 스스로 이름을 드러내려 애쓰기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것이 좋다”는 가르침대로 음지(陰地)에서 은밀하게 실력을 쌓으며 묵묵히 미래를 준비하고 후일을 도모(圖謀)한 것이다. 옐친은 한사코 총리직을 고사(固辭)한 푸틴을 설득해 1999년 8월 TV 연설에서 총리로 지명하고 그가 “다양한 정치 세력과 힘을 모아 러시아의 개혁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며 후계자임을 암시했다. 총체적 난국에 빠진 러시아의 경제·정치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던 때에 푸틴이 ‘위로는 단 한 사람만 섬기면 되고 아래로는 온 백성을 다스린다’는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총리에 발탁된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사는 새옹지마(塞翁之馬)여서 ‘중령 계급’인 ‘무명의 스파이’가 소련 붕괴 10년 만에, 모스크바 입성 3년 만에 정상 권력에 바짝 다가선 것이다. 시운(時運)이 맞아떨어진 푸틴이 ‘대통령선거에 나설 생각이 없지 않다’고 뒤늦게 밝혔지만 옐친의 공식 후계자로 확고부동하게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본인은 물론 언론도 당시 ‘무명인사’ 푸틴이 1년 동안 세 명이나 바뀌는 그 전임 총리들보다 오래 버티리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2023-04-18 06:00:00
- [박종렬의 제왕학] 레닌그라드 뒷골목에서 '불량 소년'이 터득한 정글의 법칙 박종렬 논설고문] [편집자주] 전쟁은 한 나라의 흥망(興亡)만이 아니라 국제 정세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러시아는 전쟁에 패하거나 경제 침체가 심각하면 혁명적 변혁이 일어난 역사가 있다. 1905년 ‘피의 일요일’ 혁명(러일전쟁 패배), 1917년 볼셰비키 혁명(1차 세계대전 패전·경제 침체) 그리고 구소련 해체(아프가니스탄 침공 후과)였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침공 이후 최소 28개국(25개국은 나토 회원국)에서 수십억 달러 상당의 무기와 군사 장비를 공급받았다. 전쟁 초기 16개국에서 의용군 1000여 명이 참전 지원을 하는 등 러시아를 상대로 전 세계가 전쟁을 벌이는 세계사에 유례없는 독특한 전쟁인 러시아 의용군우크라이나 전쟁 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제로섬 게임이 되고 있다. 2024년 종신 집권을 노리는 대선을 앞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정치생명을 걸고 전쟁을 시작해 이미 병합을 선언한 우크라이나 동부 4개 주는 포기할 수 없는 전리품이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수천 명의 민간인 사망자와 1800만여 명에 달하는 난민이 발생하고, 수도를 포함해 영토의 5분의 1을 러시아에 점령당해 크림반도를 포함한 영토의 완전한 수복을 위해 결사항전(決死抗戰) 태세다. 두 나라 모두 물러설 수 없는 장기화되는 전쟁으로 러시아가 어떻게 될지, 전 세계적 권력 지형에 어떤 변화가 올지 궁금하다. ‘푸틴의 전쟁’이라고 불리는 이번 전쟁의 주도자 푸틴을 해부한다. 1) 푸틴의 제왕(帝王) 캐릭터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콧잔등이 성할 날 없는’ 개구쟁이였던 나는 뒷골목 거리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한 것과 같은 생존 법칙을 배웠다. 싸울 때는 공격에 즉각 대응할 수 있어야 하고,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선 끝까지 버티며 결정타를 날려야 한다는 싸움 기술을 터득했다.”(<블라디미르 푸틴:삶의 역정> 올레그 블로츠키, 2002) 히틀러가 주도한 역사상 최악의 포위 작전 ‘레닌그라드 봉쇄’로 죽음이 덮친 도시 레닌그라드에서 성장한 푸틴은 국가보안위원회(KGB)에서도 어릴 때와 같이 “되도록이면 싸움에 휘말려서는 안 되지만 일단 시작하면 끝을 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술회했다. 러시아가 아닌 ‘푸틴’과의 싸움이라 불릴 정도로 전 세계를 상대로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호전적 성격의 잔혹한 독재자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거칠면서도 신중하고 계산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배경에는 원한과 호전성으로 똘똘 뭉친 그의 개인사가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푸틴은 어떻게 치명적인 원한을 품게 됐는가’라는 포린폴리시(FP) 기고문에서 윌리엄 타우브만 미국 애머스트 대학 교수는 푸틴의 무모한 듯 보이는 전쟁 개시 결정은 원래 그의 성장기에서 배태된 ‘억울할 때면 남을 비난하려는 경향을 보였다’는 그의 성격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분석했다.(연합통신, 2022.7.18.) 푸틴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레닌그라드 뒷골목 싸움에서 투쟁심과 승부 정신을 배운 골목 대장으로 성장해 일찍이 ‘약육강식(弱肉强食)’ 법칙을 터득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친서방 행보를 보이면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진(東進)으로 러시아 목에 칼을 들이대는 미국의 도전적 확장정책에 대한 응전인 오늘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레닌그라드 뒷골목에서 60여 년 전 잉태된 셈이다. 도시 뒷골목에서 ‘약육강식(弱肉强食)’ 법칙 터득한 불량소년 푸틴 푸틴은 흑룡(黑龍)의 해라는 임진년(壬辰年)인 1952년 10월 7일 소련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가난한 노동자 출신 41세 부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블라디미르 스피리도노비치 푸틴(1911~1999)과 어머니 마리야 이바노브나 푸티나(1911~1998) 부부는 모두 1911년생. 부부는 872일간 계속된 나치 독일군의 레닌그라드 봉쇄 과정에서 첫째 아이 알베르트를 어릴 적에 잃었다. 둘째 아이 빅토르는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전쟁으로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은 부부는 전쟁 후 41세에 얻은 늦둥이 푸틴을 오랜 고통 끝에 찾아온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애지중지(愛之重之)했다. 아버지 블라디미르 스피리도노비치 푸틴은 1차 세계대전, 러시아혁명과 내전을 겪은 군인 출신. 소련 해군에 징집돼 잠수함 부대에서 복무하다 다시 육군으로 1941년 재징집돼 서른 살에 레닌그라드에서 벌어진 독·소 전쟁에서 독일군 포격으로 한쪽 팔이 절단된 상이군인이었다. 할아버지 스피리돈 이바노비치 푸틴(1879~1965)은 레닌과 스탈린의 다차(주말별장)에서 일하는 전속 요리사였다. 어린 시절 폭력배가 길거리에 넘쳐나고 쥐들이 들끓는 서민들의 낡고 허름한 공동 주택에서 성장한 청소년기의 푸틴은 자서전에서 인정했듯이 초등학생 시절부터 또래 불량학생들과 어울리며 물건을 훔치거나 패싸움에 가담해 난투극을 벌이는 등 크고 작은 비행을 저지르던 문제아였다. 험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학교생활도 순탄치 않아 소련 공산당 어린이 조직인 피오네르 동맹에 한참 늦게 가입했다. 전후 공장에서 생산직으로 일하며 겨우 지역 공산당 중간 간부로 승진한 그의 부친과 독실한 정교회 신도이자 시간제 일거리로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던 모친은 당시 어린 푸틴의 행실을 교정하려 노력했으나 처음에는 큰 효과가 없었다. 초등학교에서는 개구쟁이로 공부도 못하고 학교 규율도 잘 지키지 않는 불량소년이었던 그는 상급 학교에 진학하면서 달라졌다. 부모의 꾸준하고도 엄격한 가정교육과 푸틴과 가깝던 운동 코치들의 지도 덕분에 푸틴은 고학년 시절부터 모범적인 학생으로 거듭났고 부진했던 성적이나 당 활동에서도 우수한 모습을 보이는 결기를 보여줬다. 그는 자서전에서 불같은 호전적인 성격으로 자신보다 덩치가 크고 힘이 센 동네 소년들과 싸우는 거친 어린 시절을 통해 강한 투쟁심과 승부 정신을 배웠다고 털어놓았다. 왜소한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초등학교 5학년인 12살에 레슬링과 유도를 혼합한 러시아 무술인 ‘삼보(sambo)’를 배우기 시작했다. 유도를 연마한 푸틴은 18살 무렵 유단자가 돼 전국 주니어 유도 대회에서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유도 애호가 푸틴은 전문가들과 공저로 두 번째 유도 교본을 출간하는 등 2000년 9월 일본 방문 당시 유도 발상지인 도쿄 고도칸(講道館)을 예고 없이 찾아 선수들과 즉석에서 대련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푸틴은 총리 시절이던 2010년 우리나라를 방문해 용인대에서 유도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도(柔道)의 특징인 유능제강(柔能制剛), 즉 상대방 힘을 역이용해 무너뜨리는 ‘부드러움이 능히 굳셈을 이긴다’는 원리를 익혔다. 돈도 배경도 없던 한미한 출신인 그는 ‘상황에 따라 지혜롭게 굽히고 펼 줄 아는’ 능굴능신(能屈能伸)하는 유연한 처세로 대권을 거머쥔 셈이다. 특히 공산 혁명 후 유도가 금지되자 러시아의 메치기, 태클 등 격투술을 합쳐 만든 무술인 ‘삼보’의 간교함과 공격성을 닮은 그의 성격은 통치술과 정치 행태에 접목돼 ‘마초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그는 경험을 통해 싸움이 불가피할 때는 '먼저 때려야 한다. 정말 많이 때려서 상대가 일어나지 못할 정도여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게 됐다. 푸틴의 초등학교 은사는 “그는 자신을 배신하거나 못되게 구는 사람은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독사(毒蛇)를 설 건들면 반드시 되무는 원리를 일찍이 터득하고 철저히 상대를 유린해야 한다는 싸움 법칙을 익힌 것이다. 조종사가 꿈이었던 16살 소년 푸틴은 1968년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소련 비밀첩보 요원의 활약상을 그린 '방패와 칼'이라는 영화를 본 뒤 첩보 요원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당시 옛 소련 스탈린의 공포통치 시절 정보기관으로 악명을 떨친 KGB 건물에 대담하게 들어가 KGB 요원이 되는 방법을 근무 장교에게 물었다고 한다. 군 복무를 마치거나 학위가 있어야 한다는 대답에 어떤 학위를 따는 게 가장 좋은지 재차 묻자 대답은 법학이었다. 이에 자극받은 그는 1970년 중상위권 실력이었으나 운 좋게 경쟁률이 40대 1쯤 되는 국립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법학과에 진학해 1975년《국제법에서 가장 선호하는 국가의 교역 원리》를 주제로 논문을 써 법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규율과 질서를 바로잡는 법학 공부에 흥미를 느껴 열심히 공부해 좋은 성적을 거뒀다. 1975년 졸업 후 검찰청에서 변호사로 일할 수도 있었으나 소년 시절 꿈대로 바로 KGB에 지원해 채용되었다. 10대 시절 스파이 영화를 보고 ‘스파이 한 명이 수천 명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그는 KGB의 과거 범죄행위는 과거의 일이고 오히려 국민이라면 국가 안위를 위해 마땅히 KGB에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길거리 청년에 불과했던 푸틴에게 KGB는 소련 공산당과 연고가 없어도 안위를 보장받으며 출세할 기회를 보장했다. 그는 KGB 근무 중 해외 파견자는 기혼자(旣婚者)여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서둘러 결혼을 한 뒤 해외정보국 요원으로 독일에 파견돼 활동하다(1985~1990년) 옛 소련 붕괴 뒤 귀국했다. 동독 드레스덴의 KGB 지부에서 복무하는 동안 중령으로 진급했다. KGB 생활을 15년 이상 한 때문인지 그는 보안 감각이 뛰어나고 사려가 깊으며 일단 목표를 결정하면 반드시 이를 달성해내는 추진력이 강한 인물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KGB의 해외 부문에서 스파이 공작. 인물 포섭 등으로 잔뼈가 굵은 그는 1990년 동독에서 레닌그라드로 귀환했으나 소련 붕괴에 따른 극심한 국가적 혼란으로 한때 전도가 막막했다. 직장 잃은 38세 KGB 요원에서 택시기사 거쳐 대통령까지 10년 국가사회 시스템의 갑작스러운 붕괴로 귀국한 그도 불투명한 미래에 불안을 느끼며 갈팡질팡했다. 경제가 파탄 난 당시 많은 이들이 그랬듯 무허가 택시 운전으로 생계를 이어 가기도 했다. 푸틴 스스로 국영방송 다큐멘터리에서 ‘1991년 소련 붕괴가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였느냐’는 질문에 “대부분의 러시아 국민에게 비극이었듯 나에게도 비극이었다”고 말했다. “달빛을 보며 택시를 몬 적도 있었다”며 “생계를 위한 돈을 벌기 위해 자가용으로 택시 영업을 했다. 솔직히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쾌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그는 “소련 붕괴는 곧 역사적인 러시아의 종말이었다”며 “국가는 40%의 영토를 잃었고, 비슷한 규모의 산업생산력과 국민을 상실했다”고 했다. 특히 “소련 붕괴와 함께 러시아인 2500만여 명이 하루아침에 국경 너머, 독립한 옛 소련 위성국들에 남게 됐다”고 지적했다. 우크라이나 등지에 흩어져 사는 러시아인들을 염두에 둔 이 발언을 보면 오늘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국외 러시아인을 보호하기 위한 ‘작전’으로 표현한 속내가 드러난다. 옛 소련 붕괴로 30대 후반에 직장을 잃고 생업을 위해 방황하던 푸틴은 KGB의 ‘활성 예비역’으로 전환해 위장 활동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는 모교인 레닌그라드대학 국제 관계 담당 부총장직을 맡았는데, 이 자리는 학생과 방문객 감시를 위해 마련된 KGB 몫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앞길이 불확실한 KGB를 떠나 정치경력을 시작할 기회를 얻는다. 자신에게 대학 재학 시절 조교수로 상법을 가르쳤던 레닌그라드대학(소련 붕괴 뒤 1991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으로 개명) 은사인 아나톨리 솝차크 교수가 1990년 5월 레닌그라드 시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자 그의 보좌관으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다. 사하로프, 옐친 등과 지역 간 대의원 그룹을 형성하며 개혁파의 저명 인사로'러시아 연방 헌법'을 작성한 솝차크 교수가 의장직을 그만두고 1991년 5월 초대 레닌그라드 시장 선거에서 당선된다. 숍차크 시장은 푸틴을 시청 산하 대외관계위원회 위원장으로 발탁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외 관계와 외국인 투자 촉진 사업을 맡겼다. 1991년 6월부터 5년 임기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을 역임한 솝차크 시장은 레닌그라드를 역사적 지명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변경하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솝차크 시장 배려로 상트페테르부르크시 국제관계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된 푸틴은 도박산업을 유치하고 국유기업의 원자재를 팔아 식량과 맞바꾸는 계약을 추진했으나 괄목할 만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시 감찰위원회는 석연치 않은 계약을 두고 부패 의혹으로 해고를 권고했으나 푸틴을 신뢰했던 솝차크 시장은 받아들이지 않고 끝까지 보호했다. 한편 푸틴은 드레스드너 방크, 도이체 방크 등 외국 자본을 들여오는 데는 꽤 성과를 거뒀다. 생산공장 특별지구를 조성해 하이네켄, 펩시, 코카콜라 등 유력 기업을 유치한 실적으로 1994년 제1부시장으로 승진한 푸틴은 KGB에 사표를 제출했다. 음지(陰地)에서 살아야 하는 KGB 스파이가 꿈이었던 푸틴의 본격적인 정치 인생이 시작되었다. 당시 영웅지상(英雄之相)도 아니고, 특별히 두각(頭角)도 드러내지 않아 본인은 물론 주변 그 누구도 푸틴이 10년 뒤 최고 권좌에 오를 잠룡(潛龍)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2023-03-13 06:00:00
- [박종렬의 제왕학] 푸틴, 승리한다 해도 '이미지 전쟁'에서 참패 박종렬 논설고문] “전쟁이 일어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지만 역사에 남을 패배를 당하게 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푸틴은 모든 전투에서 이겼을지는 몰라도 전쟁에서는 지고 있다. 러시아 제국을 재건하겠다는 그의 도박이 실패했음이 자명해지고 있다. 더 많은 우크라이나인의 피가 흐르면서 푸틴의 꿈은 망가지고 있다.”(영국 '가디언' 2022년 2월 .28일) 인류 문명사에 관한 ‘3부작’(사피엔스, 호모 데우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으로 유명한 이스라엘 역사학자이자 히브리대 교수인 유발 하라리(Yuval Harari)는 우크라이나 침공 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향해 “러시아 제국의 사망 진단서에는 ‘블라디미르 푸틴’이라는 이름이 적힐 것”이라며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적’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할 것”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의 주장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1년 가까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점점 현실화하고 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활용해 러시아 멸망 작전을 진행하면서 러시아는 푸틴 체제의 붕괴 혹은 국가체제 존망(存亡)의 기로에 서 있다. 전쟁으로 이민, 출산율 저하, 전사자 등으로 인구가 25만명 감소한 데 이어 청년 수만 명의 전사로 매년 15만명의 인구 소멸로 이어진다는 블룸버그통신 보도(2022년 10월 18일)는 이를 입증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2022년 8월 1일 기준 러시아 인구는 연초보다 47만5500명 감소해 1억4510만명이다. 옛 소련이 붕괴한 1991년의 1억4830만명보다 320만명이나 줄었다. 21세기 ‘차르(황제)’로 불리며 1999년 12월 31일 총리 겸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해 23년째 러시아를 통치하고 있는 푸틴 대통령. 그는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 국영방송 연설에서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전쟁’이란 표현 대신 ‘특별군사작전’을 전개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영토 점령 계획이 없다고 했지만 우크라이나의 ‘비무장화와 비나치화’ ‘젤린스키 정권 교체'를 추구하는 전면전임을 명확히 했다. 그는 무기력한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점령함으로써 러시아 안보를 위협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진(東進)을 저지하고 ‘강한 러시아’를 넘어 ‘옛 소련의 영광 재현’을 위해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푸틴 대통령 2005년 의회 연두 교서)이라는 옛 소련 붕괴에 대한 복수극을 연출한 셈이다. 2000년 대통령 취임 직후 ‘강한 러시아’ 건설을 정책 제1 목표로 삼았던 푸틴이 국방력 강화 등 20여 년간 부국강병(富國强兵)을 통해 냉전 시대 미국과 맞섰던 강대국 옛 소련 복원이라는 더 강력한 국가 목표를 위해 우크라이나 침략이라는 초강수를 둔 것이다. 자신의 이데올로그이자 책사(策士)인 두긴의 파시즘적 비전인 ‘유라시아주의(Eurasianism)'를 이번 전쟁을 통해 실천에 옮긴 것이다. 세계 육지의 37%를 차지하는 유럽과 아시아를 합쳐 최대의 대륙이 패권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유라시아주의’는 옛 소련 붕괴 후 미국과 중국의 패권에 맞서 재탄생한 ‘러시아 제국’을 꿈꾸는 새로운 파시즘이다. 푸틴은 2010년 카자흐스탄·벨라루스와 함께 출범한 ‘유라시아 관세 동맹’ 확대, 중앙아시아와 흑해 연안국을 포함한 단일 통화 경제권 확대를 꿈꾸는 ‘유라시아니즘’을 시현하고 있다. 푸틴은 그동안 카리스마 넘치는 강력한 지도자 이미지를 구축해 왔다. 극동(極東) 캄차카 해상에서 고래에 작살을 꽂는가 하면 상의를 벗은 채 시베리아 호랑이 사냥에 나서 마취된 호랑이를 쓰다듬는 등 깜짝쇼도 펼쳤다. TU-160 전략폭격기를 탔고, 북해함대를 방문해 잠수함을 타고 훈련에 동참하는가 하면 2000년 대선 직전 전투기를 타고 체첸 내전 현장을 방문하는 등 ‘강력한 리더’로서 이미지를 연출했다. 러시아 국민은 국가위기 돌파를 위해 배짱 넘치는 리더십을 보이는 푸틴에 매료되었다. 2001년 독일 의회에서 KGB 요원으로 독일 드레스덴에서 6년여 근무하며 익힌 유창한 독일어로 연설해 기립박수를 받는 모습을 TV로 지켜본 러시아 국민은 감동했다. 유도 공인 7단인 푸틴은 틈날 때마다 도장을 찾아 업어치기 하는 모습은 국민의 속을 후련하게 했다. 브레즈네프, 체르넨코 등 노쇠한 공산당 지도자와 병약한 주정뱅이 이미지의 옐친 전 대통령과 비교하면 젊고 박력 넘치는 40대 젊은 지도자 푸틴은 러시아 국민을 열광시켰다. 푸틴은 벌이는 전쟁마다 이기는 ‘불패(不敗) 신화’로 승승장구(乘勝長驅)하며 승리자 이미지를 구축해 왔다. 네 차례 대통령 선거에서도 승리해온 그의 ‘영웅 신화’는 전쟁에서 비롯됐다. 그가 주도한 체첸(2000년) 점령과 조지아 침공(2008년), 크림반도 합병(2014년), 시리아 내전 개입(2015년) 등 러시아의 군사적 개입은 항상 성공적이어서 러시아 국민을 열광시켰다. 옐친 대통령은 연방 보안국 국장(한국 국정원장 격)이자 연방 안보위원회 서기에 불과했던 푸틴을 파격적으로 신임 총리에 발탁했다. 이후 옐친이 푸틴을 후계자로 점지(點指)하고 1999년 12월 31일 조기 사임하면서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푸틴 총리를 지명한다. 38세에 옛 소련 붕괴로 실업자가 됐던 KGB 스파이 출신 푸틴이 10년 만에 우여곡절을 거쳐 정상에 올랐다. 푸틴은 무기력했던 옐친과 달리 체첸 반군 테러에 무자비하게 유린하는 전쟁을 통해 군과 경찰을 완전 장악하고 여세를 몰아 2000년 3월 대통령 선거에서 대권을 거머쥔다. 이후 장기 집권에 성공한 푸틴은 김대중부터 문재인 대통령까지 역대 대통령 5명을 다 만날 정도로 23년째 집권을 이어오고 있다. 합법적으로 선거를 통한 장기 집권을 위해 푸틴은 자신을 ‘러시아판(版) 루스벨트’로 포지셔닝했다. 미국 경제를 일으키고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자 전무후무한 ‘4선(選) 대통령’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평가받는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를 롤 모델로 삼은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0년대 세계를 휩쓴 ‘대공황’의 소용돌이 속에서 ‘뉴딜(New Deal)’ 정책을 통해 실업자가 수천만 명이던 미국 경제를 부흥시켰다. 그는 1941년 일본의 진주만(眞珠灣) 공격을 계기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당시 유럽의 변방이자 신생국 미국이 세계적인 군사적 강대국 반열에 오르는 길을 개척한 영웅으로 평가받는다. ‘푸틴=루스벨트’ 이미지 메이킹은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 크렘린(대통령궁) 행정실 부실장이 주도했다. 수르코프는 루스벨트 다큐멘터리를 러시아에서 방영해 그 이미지를 전이(轉移)시키는 방식으로 푸틴을 러시아를 재생시킨 국부(國父) 이미지로 부각시켰다. 그는 4선에 도전한 푸틴의 장기 집권에 대한 반감을 희석해 정당화하고 정권에 비판적 언론인을 회유·제거하는 등 미디어 통제와 정치선전을 교묘하게 배합했다. 옐친이 망가뜨린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영웅 푸틴’은 러시아를 위해 밤낮으로 애쓰는 지도자 이미지로 국내외에 각인되었다. 수르코프는 미국 정치 역사상 가장 유명한 킹 메이커로 평가되는 칼 로브(Karl Rove)에 비견되는 ‘스핀 닥터(spin doctor·정치홍보전문가)'로 푸틴 정권의 이미지 메이킹에서부터 이데올로기, 인사권 행사까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해온 정치고문이자 책사(策士)로 활약했다. 실제 푸틴은 옛 소련 해체로 혼란이 극에 달했던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재생시킨 업적을 바탕으로 국가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푸틴 체제를 비판만 하지 않는다면 러시아인들은 역사상 가장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푸틴 정권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거듭된 졸전으로 전황이 점점 불리해졌고 전쟁 발발 후 1년이 가까운 현재 나토 국가들과 서방 전체의 공적(公敵)이 되었다. 서방의 집단 지원을 받는 우크라이나의 공격에 대항하여 생존을 건 싸움을 벌여야 하는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48세에 집권해 70세를 넘기며 23년 동안 1인 독재 체제를 구축해 온 ‘푸틴 신화’가 우크라이나 전쟁 과정에서 빛을 잃어가고 있다. 푸틴은 ‘성공의 최대 적(敵)이 성공’이듯이 실패보다 무서운 ‘성공의 덫(success trap)’에 걸려 퇴로(退路)는 많은데 길을 잃고 있다.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는 어떤 정책적 결단을 내릴 때 부정적 증거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성향을 보인다. 반대로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앞세우는 이른바 ‘지나친 확신(overconfidence)’으로 제왕적 리더십을 발휘한다. 과거 히틀러 등 독재자들처럼 자신의 의사 결정이 항상 옳다는 과장된 믿음은 ‘성공의 함정’이 되어 자승자박(自繩自縛)하는 처절한 실패의 원인이 되었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푸틴도 그동안 카리스마 넘치는 마초 행각을 통해 강력한 지도자로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하면서 세계를 움직이는 국제적 영향력이 만만치 않았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국제적 왕따 신세로 전락했다. 오히려 나치독일 히틀러처럼 2차 세계대전의 학살자 이미지 혹은 과거 소비에트 공화국의 부활 또는 19세기 유럽의 광활한 영토를 차지했던 제정 러시아 시대로 회귀하는 국면이다. '대변 실금(失禁)' 현상이 노출됐다는 보도가 있을 정도로 71세(1952년생)인 병들고 노쇠한 지도자로 이미지가 투영되면서 국내외에서 ‘포스트 푸틴’이 거론될 정도로 조락(凋落)한 신세가 됐다. 개전 초 “사흘 안에 우크라이나를 함락하겠다”고 호언장담했던 푸틴을 조롱하는 메시지도 전 세계에 SNS를 통해 확산됐다. 역사상 최초로 시시각각 스마트폰으로 전 세계로 중계되는 침략 전쟁 실상을 통해 야만적 침략자로 비판받고 있다. 6000기에 달하는 가장 많은 핵무기를 보유한 강대국임에도 약소국인 우크라이나의 게릴라전식 저항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막강하다던 러시아 국방력과 푸틴의 무능한 민낯이 온 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상대적으로 그동안 조롱의 대상이던 코미디언 출신인 ‘취약한 리더십’의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영웅으로 평가되는 기현상마저 벌어지고 있다. 푸틴은 2023년 1월 18일 상트페테르부르크 방공미사일 제조공장을 방문해 “러시아의 강력한 군산복합체가 생산을 확충해 이는 끝내 승전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될 것”이라며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승리는 확실하다"고 주장했다(CNN 보도). 러시아 ‘대공 미사일’ 생산량이 세계 다른 모든 나라를 합친 것과 같고 미국보다는 3배나 많다“며 승리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전세가 교착 상태에 빠져 푸틴의 호언장담이 허장성세(虛張聲勢)로 평가절하되면서 초강대국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2023년 1월 20일 다보스포럼에 참석한 서방 여러 나라가 우크라이나에 탱크 등 화력 지원을 약속하자 러시아는 다시 핵 공격 가능성을 거론했다. 푸틴 최측근인 메드베데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핵 보유국이 재래식 전쟁에서 패배하면 핵전쟁이 촉발될 수 있다”는 엄포를 놓았고 크렘린궁도 러시아의 핵 원칙과 부합하는 발언이라며 위협 수위를 높였다. 이에 맞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캐나다의 탱크 200대 지원 약속 등에 힘을 얻어 2014년 러시아에 빼앗겼던 크림반도 수복 등 실지(失地) 회복을 통한 극적 반전을 노리고 있다. 서방의 지지를 얻은 우크라이나와 핵 카드까지 꺼낸 러시아의 강대강 대결로 ‘핵전쟁 가능성’까지 거론되며 ‘퇴로 없는 확전’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약체로 보고 호기롭게 쳐들어갔지만 러시아의 고전(苦戰)은 역설적으로 러시아가 허술한 무기와 무력한 전투력으로 ‘종이호랑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21세기 러시아 제국의 ‘차르’가 되고자 했던 푸틴의 타오르던 야망이 서서히 스러지고 있다. 전쟁은 백번 싸워 비록 백번 다 이겼다 하더라도 싸우는 과정에서 상대방도 깨지지만 나도 깨지므로 실패다. 그래서 전쟁에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부전이승(不戰而勝)이 최고의 승리다. ‘백번 싸워 백번 이기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 아니고 싸우지 않고도 적을 굴복시킬 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 손자병법 제3편 모공(孫子兵法 第三篇 謀攻)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수십만 명의 인명 살상과 수백만 명의 피난민으로 전 세계의 공분과 국제적 비판을 사고, 러시아 국내에서도 수천 명의 반전(反戰) 데모대를 투옥하면서 이룩한 승리는 ‘잃은 것이 더 많을 것’이며 푸틴에게는 ‘이미지 전쟁’에서 철저히 패배했다는 평가가 따를 것이다. 어떤 선의(善意)의 명분 있는 전쟁이라도 천하에 ‘의(義)로운’ 전쟁은 없다고 하지 않은가?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2023-02-15 17:5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