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준 논설주간
gjgu7749@ajunews.com
- 아주경제 논설주간
- (전)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지국장)
- [박승준의 지피지기] 3중전회 7월 지각개최 … 중국 공산당에 무슨 일이? [박승준 논설주간] 지난 4월 30일 중국 관영 중앙TV는 “오늘 개최한 정치국 회의에서 중국공산당 제20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 회의를 오는 7월에 개최하기로 결정했다”고 톱뉴스로 보도했다. “정치국 회의는 중앙총서기 시진핑(習近平)이 주재했다”고 아울러 전했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 임기는 5년이다.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는 5년에 7차례 정도 개최된다. 중앙위원회는 정 위원 205명에 후보위원 171명을 더해 모두 376명으로 구성된다.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는 중국공산당이 개최하는 회의 가운데 가장 중요한 회의로, 정 위원과 후보위원 모두가 참석한다.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 가운데에서도 제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3중전회)는 당대회(전국대표대회) 기간에 열리는 1차와 2차 중앙위 전체회의에서 새로 선출된 중앙위원 전체가 처음으로 모여 당의 가장 중요한 개혁 과제를 논의하는 관례를 지난 46년간 지켜왔다. 1978년 12월에 열린 제11기 3중전회에서는 “마오쩌둥(毛澤東) 동지가 내린 지시와 결정은 무엇이든 옳다”는 ‘양개범시(兩個凡是)’의 관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권력자 덩샤오핑(鄧小平)이 제시한 ‘개혁·개방’을 당의 중심사상으로 채택했다. 1984년 10월에 열린 제12기 3중전회에서는 ‘계획적 상품경제’를 도입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후 대체로 5년마다 한 차례씩 10~12월 가을에 개최된 3중전회에서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신농촌 건설’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 ‘농촌 토지 소유제 개혁’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제도 완비’ 등 굵직굵직한 개혁 과제들을 채택해 왔다. 그러는 사이 중국의 경제체제는 마오쩌둥 시대의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변화해 왔고, 1990년대 들어서는 연평균 10% 안팎의 고도성장을 이룩해 왔다. 그러나 2012년 11월 시진핑이 당 총서기로 선출된 이후 2018년 가을에 열려야 정상인 제19기 3중전회는 10개월을 앞당긴 2018년 2월에 개최됐다. 19기 3중전회는 ‘당과 국가 기구 개편의 심화’ 안건을 채택했고, 이어서 3월에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는 헌법에서 국가주석의 3연임을 금지하는 조항을 삭제함으로써 시진핑의 3연임 시대를 열어놓았다. 2018년 가을에 열려야 할 19기 3중전회를 앞당겨 2월에 개최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2022년 10월에 개최된 전당대회에서 중국공산당 사상 첫 3연임 당 총서기로 선출된 시진핑 앞길을 가로막을 사람이나 세력은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40년 넘는 관례에 따르면 중국공산당은 지난해 가을에 20기 3중전회를 개최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20기 3중전회는 개최되지 않았고, 베이징발 로이터 통신은 “이에 대해 중국공산당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지난해 가을에 개최되었어야 할 20기 3중전회는 왜 지난 40여 년간의 관례를 무너뜨리고 10개월이 지난 오는 7월에 개최된다고 고지됐을까. 이와 관련해 2022년 12월 30일 주미 중국대사에서 외교부장으로 발탁된 친강(秦剛) 사태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2023년 3월에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국무위원으로 승격된 뒤 4개월 만인 7월 25일 중국 관영 중앙TV는 “최고 입법기구인 전인대 상무위원회가 이날 긴급회의를 열어 친강 국무위원을 면직하고 왕이(王毅) 정치국 위원을 신임 외교부장으로 임명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친강은 현재도 중앙위원 자격은 박탈되지 않았고, 정 위원 205명 가운데 한 명으로 올라 있다. 정부인 국무원에서는 직위가 정리됐지만 당에서는 아직 정리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시진핑이 지원하는 늑대(戰狼) 외교의 상징 인물이던 친강은 지난해 6월 25일 베이징에서 스리랑카·베트남 외교부 장관, 러시아 외교차관과 잇따라 회담한 것을 마지막으로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친강의 행방은 벌써 1년 가까이 일절 알려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베이징 주재 외국 특파원들은 “아무도 친강의 행방에 대해 언급하지 못하는 걸 보면 그 이유는 오직 한 사람(시진핑) 때문이라는 논리가 성립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장이 갑자기 실종되고, 1년 가까이 아무런 공식 설명이 없는 것은 아무래도 비정상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친강 외교부장 실종에 이어 3개월 후인 지난해 10월 24일 중국중앙TV는 전인대 상무위원회가 6차 회의를 열어 리상푸(李尙福) 국방부장을 면직했다고 발표했다. 전인대는 리샹푸 국방부장 면직 사유를 밝히지 않았고, 중국중앙TV는 친강 전 외교부장이 이날 국무위원직에서 해임됐다고 보도했다. 리상푸 국방부장은 지난해 8월 29일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아프리카 평화 안보 포럼 참석 이후 50일 이상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공산당 중앙정치국 집체 학습과 국경절 리셉션 등 주요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아 부패 혐의로 실각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는 지난해 7월 말 리위차오(李玉超) 로켓군사령관이 전격 경질된 뒤 군 납품 관련 부패에 연루됐다는 소문이 베이징에 나돌았다. 친강 외교부장과 리상푸 국방부장에 앞서 샤오야칭(肖亞慶) 공업정보화부 부장은 2022년 7월에 부패 혐의로 실각했고, 지난해 7월에서 12월 말 사이에 인민해방군 장성 9명이 전인대 대표직을 박탈당한 뒤 직위해제됐다. 직위해제된 장성 9명 가운데 5명은 로켓군 소속이었다고 미국 스탠퍼드대학 소속 중국정치 전문가 우궈광(吳國光) 박사가 중국 전문 인터넷 계간 차이나 리더십 모니터(China Leadership Monitror) 2024년 봄호에서 공개했다. 1989년 톈안먼 사태 당시 학생시위에 참여했던 당 기관지 인민일보 기자 출신인 우궈광은 “시진핑은 마오쩌둥 시절 핵무기 개발과 위성 발사를 가능하게 했던 거국체제(擧國體制)를 본떠 군인과 테크노크라트 출신들을 발탁해서 ‘신형 거국체제’ 형성을 꿈꿨으나 부패의 만연으로 통치체제가 흔들리는 위기를 맞게 됐다”고 분석했다. 시진핑은 나름의 통치시스템을 형성하기 위해 칭화(靑華) 후배인 계량경제학 전공인 경제학 박사 장궈칭(張國淸·60)을 부총리 겸 정치국원으로 발탁했고, 같은 칭화대 후배로 핵반응 원자로 전공인 리간제(李干杰·60)를 정치국원 겸 당 서기처 서기 겸 조직부장이라는 중책을 맡겨 놓았다. 시진핑은 자신의 3연임을 결정한 2022년 말 20차 당대회에서 이들을 발탁하면서 이들 테크너크라트들을 활용해 견고한 통치체제 형성을 꿈꾸었던 것으로 보였다는 것이 우궈광의 진단이다. 그러나 군과 정부의 중요 조직을 관장하는 테크너크라트들이 친강 외교부장의 실각을 시작으로 줄줄이 부패에 연루되어 실각하면서 겉으로는 견고해 보였던 시진핑의 통치체제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물론 시진핑의 통치체제는 현재도 외형상으로는 견고한 것으로 보이지만 시진핑은 3연임을 결정한 2022년 20차 당대회 이후 2023년 가을에 개최해야 할 3중전회를 개최하지 못하고 중국공산당 역사에 전례가 없는 7월 한여름 개최라는 이변을 연출하게 됐다. 이런 통치체제의 불안정은 2022년에 그 겉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코로나 팬데믹 이후 경제 회복을 제대로 못 하는 원인으로 작용해서 미국에 대한 GDP 추격 전선에서는 구체적인 수치로 나타나고 있다. 2021년 중국 GDP는 17조759억 달러를 기록하며 미국 GDP 23조5940억 달러 대비 75.3%까지 추격했다가 2022년에는 미국 GDP 25조7440달러 대비 70.3%에 해당하는 18조1000억 달러로 후퇴하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2022년 가을 20차 당대회에서 3연임을 확보한 시진핑 체제는 잇단 인사 실패에도 불구하고 외형적으로는 더욱 단단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내부에서는 통치 거버넌스의 실패로 금이 가고 있는 것으로 진단된다. 물론 중국 경제는 현재도 1978년 이후 40여 년간 지속된 덩샤오핑 체제가 남긴 민간 분야의 활기와 외국 자본 도입, 대외무역을 통해 올해 5% 성장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 시진핑이 이끄는 통치체제 내부에는 금이 가고 있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현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 ▷호서대 초빙교수 2024-05-07 06:00:00
- [광화문 토크] "국가흥망 결정하는 건 국민" 아주경제신문은 오는 10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이번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2009~2010년 제40대 대한민국 총리를 지낸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 겸 한반도미래인구연구원 이사장(77)을 인터뷰했다. 인터뷰는 박승준 논설주간, 구동현 기자, 남궁진웅 기자가 지난 27일 오후 서울 신림동에 있는 동반성장연구소에서 진행했다. 인터뷰에서 정운찬 이사장은 “국가흥망 필부유책(國家興亡 匹夫有責)이라는 말이 있듯이 내 투표가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생각으로 유권자의 권리를 행사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운찬 전 총리는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므로 투표를 하는 것은 권리이자 의무”라면서 “유권자들이 투표를 잘하면 좀 더 질서있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 전 총리는 “거짓말하는 후보, 헛소리하는 후보에게 표를 안 주면 우리나라의 미래가 좀 더 나아질 것”이라고 했다. -이번 총선의 역사적 의미는 어떤 것입니까. "저는 지금 우리나라는 무질서의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오는 10일 제22대 총선 투표를 잘하건 못하건 무질서가 다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개선되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각 정당 대표들 하는 걸 봤더니 진짜 무질서예요. 거짓말하고, 뻔뻔하고,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죄의식이 없고, 피의자를 넘어 범법자인 데다 아무런 개념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후보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는 것도 없으면서 아는 척하고, 짧은 지식으로 사람들을 선동하는 일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이번 총선에서는 아무리 잘 뽑아도 이 무질서가 질서로 금방 회귀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다소 질서를 잡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크게는 안 바뀔 듯합니다. 각자가 투표를 잘하면 질서를 찾는 데 좀 도움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어떤 관점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겠습니까? "첫째는 우리 주위에 지금 투표를 안 하려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러나 우리가 자유민주주의를 택한 마당에 우리가 해야 할 거는 투표하는 거지요. 투표하는 것은 권리이자 의무이기 때문에 누구나 유권자들은 다 가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좀 더 의식을 가지고 가자, 내 투표가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지요. ‘국가흥망 필부유책(國家興亡 匹夫有責)’, 나라의 흥하고 망함이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영어로는 'People have the government they deserve'라는 말이 있지요. 그럼 어떻게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그러니까 아까 말씀드린 그 다섯 가지 부류 사람들한테는 찍지 말자는 것입니다." -최근 기고에서 “산업화의 성공이 민주화로 이어져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평화적 정권 교체는 잘 이뤄지고 있는데 제도로서의 민주화와 의식의 민주화는 잘 정착되지 않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어릴 때 프랭크 스코필드(1889~1970) 박사한테 인격 형성에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거짓말하는 정치인을 지목했지만 스코필드 박사는 '부정부패를 안고서는 절대 발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장기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교육 혁신, 사회 혁신, 정치 혁신인데 정치 혁신은 아직 쉽게 이루기는 자신 없고, 부정부패를 없애는 게 중요한데 현재 부정부패가 너무 많아요. 부정부패가 난무하는 속에서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너무 부만 추구하지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결혼을 한다, 애를 낳는다 이런 가치도 큰 가치인데, 결혼하고 애 낳고서는 내가 저축도 못하고 집도 못 살 텐데 하는 생각 때문에 결혼도 출산도 기피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조직이 다양해져야 합니다. 조직이 다양하다고 하는 것은 여러 부류의 사람으로 구성돼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 나라에 민주주의가 잘 안 되는 이유는 어떤 조직이든지 다양하게 구성돼 있을 뿐만 아니라 구성원끼리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회 전체도 다양하고, 사회를 구성하는 조직들도 다양해서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는 연습을 해야 하는데 그게 지금 안 되고 있습니다. 제가 그걸 극복하려고 서울대 총장(2002~2006) 때 지역 균형 선발제를 했어요. 지역 균형하고 다음으로 계층 균형을 하고 싶었는데 지역 균형도 너무 힘들어서 계층 균형은 엄두도 못 냈습니다. 다양한 사회 속에서 가치 추구의 다양성이 있어야 다름을 인정할 줄 알고, 민주주의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사회의 불균형 성장이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 임금 격차와 계층 간 양극화를 조성했다고도 하셨습니다. 우리 사회는 계층 간 양극화를 어떻게 넘어서야 하겠습니까. "결국 양극화는 선 성장, 후 분배 정책을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양극화를 극복하는 방법이 뭐 없을까 해서 제가 이익공유제 같은 것들을 말해 놓았습니다. 중소기업 적합 업종 선정, 그다음에 정부 발주도 대기업을 통해서 중소기업으로 가는 게 아니라 중소기업에 직접 발주하는 방식도 말해 놓았습니다. 중기적으로는 중소기업을 키워야 하고, 장기적으로는 교육 혁신, 인재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양극화는 진영 논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걸 꼭 하나 지적해 줬으면 좋겠는데, 이데올로기 시대는 갔다는 것입니다. 지금 무슨 이데올로기가 필요합니까. 국익, 그중에서도 경제적 국익이 중심이 된 세상입니다. 개딸이건 태극기건 곤란합니다." -이번 총선에서 선택이 잘못 이뤄지면 대한민국이 아르헨티나처럼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런 주장을 어떻게 보십니까. "아르헨티나는 20세기 초에 세계 5대 경제 대국이었어요. 지금 굉장히 어려운 나라가 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오직 포퓰리즘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데 대해 저는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포퓰리즘을 옹호하는 건 아닙니다. 포퓰리즘은 근절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포퓰리즘이 난무하고 있어요. 표 얻는 데만 관심이 있지요. 과거부터 정치하는 사람들이 정치의 맛을 보더니 재미를 붙여서 '표를 얻어야지. 그래야 오래 앉아 있지' 해서 포퓰리즘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전에 전직 재정경제부 장관께서 쓴 책에서 “한국 경제는 정치가 망가뜨린다”는 주장을 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견해는. "저는 거기에 대해 꼭 찬성하지는 않습니다. 경제가 정말로 좋으면 정치가 발전할 수밖에 없지요. 정치가 진짜 좋으면 또 경제가 발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반대 논리도 있죠. 박정희 대통령 때 경제는 잘 됐는데 정치 가 잘 안 되지 않았나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짧게는 몰라도 길게 보면 정치하고 경제는 같이 간다고 생각합니다. 정치가 경제를 망가뜨렸다고 하는 것은 직업 공무원들이 자기방어하는 거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대학 1학년 때 좋아한 조지 더글러스 하워드 콜(G. D. H. Cole·1889~1959) 옥스퍼드대 교수가 있는데 '정치와 경제는 같이 간다'고 했어요. 어릴 때 읽은 책이라 항상 머릿속에 남아 있어요. 저는 ‘한국 경제는 정치가 망가뜨린다’에 대해서는 반드시 맞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유권자 혁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번 총선에서 유권자 혁명이 이루어진다면 어떤 방향이어야 하겠습니까. "유권자 혁명이라는 건 유권자들이 표를 잘 찍어서 이 나라 좀 잘 만들자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대해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이번에 아무리 잘 찍어도 질서 유지, 질서 회복 아니면 질서 창조는 잘 안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유권자 혁명이라는 말은 좀 과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유권자 개개인이 ‘거짓말하는 사람 찍지 말아야지’ ‘헛소리하는 사람 찍지 말아야지’ 이런 식으로 투표하다 보면 지금보다 좀 나아질 수도 있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국가흥망 필부유책’인데 이렇게 한다고 나라가 이 방향으로 가고, 저렇게 한다고 저 방향으로 가는 건 아닐지 모르지만 그래도 각 국민들이 조심하면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는 나아지지 않을까요. 그래도 누가 정직한가, 누가 좀 무게가 있나, 누가 좀 자기 의견이 있나, 누가 헛소리 안 하나, 누가 죄의식이 좀 더 있나, 누가 사과를 할 줄 아는가 이런 걸 따져서 투표하면 도움은 확실히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동반성장연구소를 만드신 의미와 현황을 소개해 주십시오. "‘동반성장’이라 하면 사회주의라고 그래서 섭섭한데, 저는 집이 어려워서 중학교 안 가고 취직할 뻔했어요. 6학년 때 여름 내 클래스 메이트의 부모가 우리 집에 와서 '너 공부 잘하는데 그래도 중학교 가야지 일류 중학교 가면 등록금 우리가 대준다'라고 했어요. 그분들이 합격자 발표 다음 날 저를 스코필드 박사한테 데리고 갔어요. 스코필드 박사가 중 1~3학년 때 등록금도 대주고 약간의 용돈도 주고 하셨어요. 고등학교 들어가서는 그분한테 성경도 배우고 인격 향상에도 큰 도움을 받았죠. 저는 우리 아버지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우리 키우면서 고생 무지무지하게 했어요. 어머니는 저보고 법대 가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며칠 후 김근태 선배를 만났어요. '근태형 저 법대 갑니다' 했더니 그 자리에서 ‘너 법대 안 맞는다’고 했어요. 이유를 물었더니 '사시 패스하면 판사, 검사, 변호사 할 테지만, 판사를 하면 칼날 같은 판결을 내려야 하는데 너 마음이 우유부단하잖아. 검사는 강압 수사를 가끔 해야 되는데 너 마음이 약하잖아. 그리고 변호사는 가끔 고객을 위해서 흑을 백이라고 그러고 백을 흑이라고 해야 되는데 너 거짓말 못하잖아'라고 하더군요. 그때가 1966년이에요. 그때 스코필드 박사 말씀이 '너희 나라 국력 신장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을 가르쳐주는 학과가 첫번 째 조건이고 두 번째 조건은 지금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성장은 되고 있지만 소득 격차, 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있는데도 한국의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눈곱만치도 없어서 참 안타깝다. 그런 격차를 줄이는 방안을 가르쳐주는 학과로 가라고 해서 경제학과로 가게 된 거예요. 나중에 이명박 정부에서 총리 할 때 이명박 대통령한테 가서 '중견 기업인이 이민 가겠다니 중소기업이 오죽하겠습니까. 특단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나라 파탄 납니다' 했더니 청와대에서 동반성장위원회를 만들기로 결의를 했습니다. 2010년에 발족했죠. 대통령이 만들어 놓았지만 측근들이 전혀 협조를 안 해서 위원장을 그만두고 한 2개월 놀다가 그것과는 독립적으로 동반성장연구소를 만들어서 이제 12년 됐습니다." 정운찬 전 총리 프로필 △1947년 출생 △ 경기고, 서울대 경제학과, 미국 프린스턴대 경제학 박사 △미국 컬럼비아대 경제학 교수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서울대 제23대 총장 △대한민국 제40대 국무총리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 △제22대 한국야구위원회 총재 △한반도미래인구연구원 이사장 =정리 구동현 기자 / 사진=남궁진웅 기자 2024-04-01 05:00:00
- [박승준의 지피지기] 시진핑의 요즘 화두는 '신질(新質)생산력' [박승준 논설주간] 지난 5일 오후 시진핑(習近平)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은 이날 오전에 개막한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장쑤(江蘇) 대표단 회의에 참석했다. 시진핑은 지난해 1월 장쑤성 인민대표로 당선된 뒤 작년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인민대표단 회의에 참석했다. 모두 6명으로 이루어진 장수 대표단의 소위원회 회의에 참석한 시진핑은 “각 지역 실정에 맞는 신질(新質) 생산력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 관영 미디어에 따르면 시진핑이 ‘신질 생산력’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지난해 9월 헤이룽장(黑龍江)성을 시찰할 때가 처음이었다. 시진핑은 헤이룽장성 현지에서 열린 ‘신시대 동북 전면 진흥 추진을 위한 좌담회’에서 이런 말을 해서 관영 미디어들의 주목을 받았다. “과학기술 혁신에 맞추어 전략적으로 신흥 산업과 미래 산업을 발전시키면 신질 생산력 형성을 가속화하게 된다. 새로운 에너지 산업을 키우고, 새로운 재료산업, 전자정보산업 등 전략적 신흥 산업과 미래 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면 ‘신질 생산력’ 형성을 가속화하고 산업 전반에 새로운 동력을 증강하게 된다.” 헤이룽장성의 당 위원회와 정부 관료들은 ‘신질 생산력’이란 용어를 받아적기는 했지만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려야 했다. 시진핑은 지난해 12월 열린 당 중앙경제공작회의와 올 들어 1월 31일 열린 정치국 제11차 집체학습에 나와서도 ‘신질 생산력’이란 알 듯 말 듯한 용어를 사용했다. 이 회의에는 정치국원들 가운데 허리펑(何立峰·69·부총리), 장궈칭(張國淸·60·부총리), 위안자쥔(袁家軍·62·충칭시 당 위원회 서기), 마싱루이(馬興瑞·65·신장위구르자치구 당 위원회 서기) 등 핵심 경제담당 당료들이 참석하고, 류궈중(劉國中·62·부총리)과 한때 후계자로 지목되던 천민얼(陳民爾·64·톈진시 당 위원회 서기) 등은 서면으로 의견을 제시했다. 정치국 집체학습에서 시진핑은 ‘신질 생산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비교적 알기 쉽게 설명을 했다. “신질 생산력이란 전통적인 경제성장 방식에서 벗어나 생산력을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첨단 과학기술, 높은 효능과 품질을 가진 새로운 발전 이념의 선진 생산력을 가리키는 말이다. 특징은 혁신에 있으며, 관건은 우수한 품질에 있으나, 본질은 선진 생산력이다. 과학기술 혁신은 새로운 산업과 새로운 방식, 새로운 동력을 자극하는 것이 신질 생산력 발전의 핵심 요소다.” 시진핑은 “높은 수준의 대외 개방은 신질 생산력을 발전시키기 위한 양호한 국제 환경을 조성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시진핑이 제시한 ‘신질 생산력’이 대체 무슨 말인지에 대해 런던정치경제학원(LSE)에서 연구원으로 있는 셜리 위(Shirly 于澤)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홍콩에서 발행되는 영자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지난 16일 게재했다. 베이징(北京)대학에서 정치경제학 박사학위를 딴 중국 정치경제 전문가다. “시진핑이 말한 신질 생산력이란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경제성장 방식을 마르크시스트적으로 이론화한 것이다. 신질 생산력을 통해 시진핑은 인포테크, 바이오테크, 인공지능(AI), 양자(量子·Quantum) 컴퓨팅, 신에너지, 신재료, 우주개발 등 첨단 과학기술 분야를 모두 망라해서 중국 경제가 새로운 발전을 해나가야 한다는 야망을 표현한 것이다. 신질 생산력이란 용어가 의미하는 중국 경제의 새로운 발전 전략은 3개의 목표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외국 과학기술을 중국 과학기술로 대체하는 것, 신속한 산업화, 그리고 국방과학 기술을 중국 과학기술로 전략적으로 대체하는 것 등이다.” 셜리 위는 시진핑이 제시한 신질 생산력은 보다 구체적으로 2025년을 목표 연도로 한 중국 특유의 브랜드 개발을 위한 ‘China 2025’의 새로운 버전의 전략을 개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China 2025는 불필요하게 미국과 유럽의 견제를 받는 프로젝트로 변질됐기 때문에 2025년 이후에는 ‘신질 생산력’이라는 마르크스적 이론을 이용한 중국의 경제영역 확보 전략을 제시한 것이라는 진단이다. 1976년 마오쩌둥(毛澤東)이 죽은 후 권력을 장악한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은 중국공산당과 정부 관료들에게 “과학기술이 제1의 생산력(科技是第一生産力)”이라는 구호를 제시했다. 과학기술을 산업에 활용하는 데 어두웠던 마오쩌둥 시대가 낮은 경제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반면 과학기술이 제1의 생산력이라는 구호로 과학기술에 묶여 있던 족쇄를 풀어주자 중국 경제는 폭발적인 성장을 해왔다. 1978년부터 40여 년간 평균 경제성장률 10%를 넘는 빠른 속도로 경제 발전을 한 결과 중국은 과학기술 면에서도 고도의 발전을 해왔다. 최근 들어서는 전기자동차와 AI, 양자 컴퓨팅 분야에서는 미국과 유럽의 수준을 넘어서는 역량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리창(李强) 총리는 지난 5일 전인대 개막 첫날 정부공작보고를 통해 “안정 속 성장(穩中求進)을 올해의 경제 화두로 삼겠다”고 했다. 리창 총리는 이어 “성장 속의 안정(以進促穩)과 목표를 세우면 반드시 달성하는 선립후파(先立後破)도 올해의 경제기조로 추구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시진핑이 제시한 ‘신질 생산력’과 관련해서는 “현대화 산업체계 건설을 통해 신질 생산력을 가속화하겠다”고 강조했다. 중국 경제는 지난해 GDP 성장률 5.2%를 기록했다. 결코 낮은 수치는 아니지만 지난해 대학 졸업자 1158만명의 일자리를 마련해주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지난해 6월 16~24세 청년실업률은 21.3%에 달했다는 것이 중국 국가통계국이 발표한 수치다. 중국 전역에는 짓다가 만 아파트가 귀신의 도시(鬼城)처럼 널려 있는 가운데 대형 부동산 그룹 헝다(恒達·Ever Grande)는 지난 1월 29일 홍콩법원에서 파산을 명령받았다. 지난해 외국인직접투자(FDI)는 330억 달러 규모로 1993년 이래 가장 낮은 수치를 보여주었다. 중국 주재 외국 기업 종사자들에게도 반(反)간첩법을 적용해서 베이징 중심가와 상하이(上海)의 황푸(黃浦)강변 산책로에서는 외국인을 찾아보기 힘든 지경이 됐다. 중국 외교부는 동유럽 국가들과 비자면제협정을 맺어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다. 현재 중국 경제의 문제는 신질 생산력 확보의 문제가 아니라 시진핑 주석이 이끄는 정치경제 리더십에 대해 미국과 유럽이 등을 돌리고 있는 점이다. 이런 분위기를 모를 리 없는 시진핑 주석은 지난 20일 마오쩌둥의 혁명 성지인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시와 창더(常德)시를 시찰했다. 시진핑은 근대 이래 많은 무산계급 혁명가를 배출한 후난 제1사범학원을 방문해서 청년 마오쩌둥을 주제로 한 전시회를 참관했다. 이 자리에서 시진핑은 이런 연설을 했다. 시진핑은 “국가가 강대해지기 위해서는 교육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제1사범학원은 애국주의 교육을 펼치고 홍색의 유전자를 전승해온 곳으로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을 잘 지키는 민족 부흥의 인재들을 잘 길러내고 있다”고 치하했다. 시진핑은 제1사범에서 마오쩌둥이 앉아 공부하던 자리도 돌아보았다. 이어서 시진핑은 이 지역에 있는 중국·독일 합자 기업으로 리튬전지의 극재료를 생산하는 BASF 공장을 둘러보았다. 이 공장에서 시진핑은 또다시 ‘신질 생산력’을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현재 중국 경제가 위기라는 진단이 내려지고 있는 이유는 이처럼 시진핑의 정치 리더십이 혼란스러운 메시지를 중국 인민들과 외부로 내보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개방을 강조하고 싶으면 후난성에서 멀지 않은 광둥(廣東)성 선전(深圳) 경제특구를 방문해서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의 얼굴 사진이라도 찾아보면 되겠지만 요즘 시진핑에게 덩샤오핑은 이미 잊힌 인물이 되고 말았다. 시진핑은 신질 생산력을 강조하면서 “개혁·개방의 확대가 신질 생산력 확보에 중요한 국제 환경을 제공해준다”고 말하면서도 개혁·개방의 상징적 도시 선전에 있는 덩샤오핑 초상화는 돌아보지 않고 있다. 시진핑이 만들어내는 대외 이미지는 “마오쩌둥의 혁명을 따르는 정치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시진핑이 강조하는 ‘신질 생산력’ 확보는 그리 쉽지 않지 않을까.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현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 ▷호서대 초빙교수 2024-03-25 06:00:00
- [박승준의 지피지기] 급격히 줄어드는 중국 FDI…전인대(全人大)에서 해법 찾을까 [박승준 논설주간] 중국의 유일한 개방적 정치행사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가 다음 주 3월 5일 베이징(北京)에서 개막한다.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회 사무국은 이달 초에 일찌감치 “개방적이고 투명한 정신으로 내외신 기자들의 전인대 취재를 돕기 위한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인대 상임위 사무국은 “외국 기자들은 해당 국가 주재 중국 공관에 전인대 취재 비자를 신청하기 바란다”고 관영 신화(新華)통신을 통해 공지했고, 신청 기간은 지난 18일로 마감됐다. 베이징 서쪽 푸싱(復興)로에 미디어센터도 개설하고, 27일부터 업무를 개시한다. 내외신 기자들은 전인대 개막 첫날 리창(李强) 총리가 2시간에 걸쳐 읽어 내려가는 ‘정부 공작 보고’도 현장에서 들을 수 있고, 국무원 각부 장관도 인터뷰할 수 있으며, 총리와 외교부장이 주재하는 뉴스브리핑에도 참석할 수 있다. 해마다 전인대 개막일인 3월 5일은 개구리가 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驚蟄) 무렵이다. 중국 정부는 1978년에 시작된 ‘개혁·개방(改革開放)’ 시대를 이끈 덩샤오핑(鄧小平) 시대 때부터 전인대를 외국 기자들에게 개방해 왔다. 이때쯤이면 대체로 칙칙하고 어두운 색깔의 옷을 즐겨 입는 베이징 시민들도 전인대에 참석하기 위해 중국 전역에서 모여든 3000명에 가까운 인민대표들과 함께 옷차림을 밝은색으로 바꿔 입어 베이징의 인상을 화려하게 변화시킨다. 그러나 올해 전인대 개막을 앞둔 중국 인민들은 물론 중국공산당과 정부 지도자들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리오프닝 노력에도 4%대에 머물러 있는 경제성장률과 성장 부진에 따른 취업률 저하, 중국 GDP의 25%를 차지하는 중국 부동산 업계의 대표 주자 헝다(恒達·Evergrande)가 지난달 29일 홍콩법원에서 청산 명령을 받은 사실 등 중국 사람들이 가장 중시하는 ‘밥그릇 문제’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홍콩법원이란 중국이 1978년부터 45년 넘게 건설해 오려던 경제적인 법치(法治·Rule of Law)의 기준을 제공해 온 기관이다. 굳이 헝다 청산 문제가 아니더라도 전국 중소 도시들에 짓다가 만 아파트와 공공기관 건물들이 빚어내는 을씨년스러운 고스트 시티(Ghost City·鬼城)의 어두움이 중국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국 사람들과 당정(黨政) 지도자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수치는 근년에 들어 급격한 감소 추세를 보여주고 있는 FDI(Foreign Direct Investment·外商直接投資·外國人直接投資)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과 함께 시작돼 중국인들에게 가난과 죽음을 가져다준 마오쩌둥(毛澤東) 시대는 37년 만인 1976년 9월 마오의 사망으로 끝났다. 이후 1978년 중국공산당 11기 3차 중앙위 전체 회의에서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사상해방(思想解放)’을 제시해서 대권을 잡은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 시대가 2012년 11월 시진핑(習近平)이 당 총서기에 올라 ‘프티 마오쩌둥(Petite Mao Zedong·작은 마오쩌둥)’을 향해 달려가는 국가전략 노선의 전환을 시도하기 전까지 추구한 가장 중요한 수치가 FDI였다. 덩샤오핑이 1977년 미국을 방문해서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미국 사람들에게 웃음을 던진 이유도, 자오쯔양(趙紫陽) 총리가 1984년 1월 중국공산당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중산복(中山服·일명 인민복) 대신 양복을 입고 미국을 방문해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만난 이유도 미국의 중국에 대한 직접투자를 유치하기 위해서였다. 덩샤오핑은 1980년 상하이(上海)시 지도자들에게 중국 대륙 한가운데를 관통해서 동쪽 상하이로 흐르는 장강(長江)의 끝머리에 ‘룽터우(龍頭·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푸둥(浦東) 지역에 현대식 고층 빌딩으로 이루어진 쇼룸을 건설하도록 한 것도 외국인 직접투자를 유치하기 위해서였다. 세계은행(World Bank) 데이터에 따르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시대가 막 시작된 1980년 중국의 FDI는 5700만 달러에 불과했다. 이후 선부론(先富論·누구든 먼저 부자가 되라. 부자가 되는 것은 죄악이 아니다)과 사회주의 시장경제 구축을 일관되게 추구한 2011년까지 31년 동안 중국의 FDI는 2800억7000만 달러로 무려 5000배 가까이 폭증했다. 중국의 FDI는 시진핑 시대와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거치면서 2021년 3440억7000만 달러로 정점(頂点·Peak)를 찍은 뒤 2022년 1801억7000만 달러로 급감하고, 지난해에는 중국 국가외환관리국 집계에 따르면 330억 달러로 급격히 쪼그라드는 추세를 보여주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중국 경제 최고 전문가인 미국 캘리포니아대학(University of California, San Diago)의 배리 노튼(Barry Naughton) 교수에 따르면 FDI는 사회주의 시장경제 시대의 중국에 제조업과 수출 주도 산업의 기본 동력으로 작용했다. 노튼은 명저 ‘The Chinese Economy, Transition and Growth(중국 경제의 전환과 성장)’에서 “중국의 FDI 유치는 홍콩과 대만을 창구로 해서 유입되기 시작했으며, 1990년대에 홍수를 이루어 홍콩 인근에 선전(深圳) 경제특구가 건설된 주동력도 FDI였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2011년 11월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당선되어 대권을 장악하고, 2020년 10월 덩샤오핑이 건설한 개혁·개방 시대의 정치 관례를 깨고 3연임 당 총서기와 국가주석에 오른 시진핑이 덩샤오핑 시대의 선부론 대신 공동부유론(共同富裕論)을 제시하고, ‘쌍순환(雙循環)’ 이론에 따른 내수경제의 건설로 중국 경제의 기조를 바꾸었다. 이후 시진핑은 알리바바의 마윈(馬云)에게 정치적 공격을 가해 마윈이 이끌어 온 인터넷 플랫폼 기업들을 위축시키고, 부동산 업계 1·2위인 헝다와 비구이위안(碧桂園·Country Garden)을 채무불이행 사태로 몰아가도록 하자 FDI는 2021년에서 2022년 사이에 2분의 1 수준으로 급감한 뒤, 2022년에서 지난해 사이에는 5분의 1 이하로 급감하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日本經濟新聞)은 중국의 FDI 급감에 대해 “중국 정부가 국가안보를 강조하면서 반(反) 간첩법을 제정해서 외국 기업 직원들을 감시·억류하고, 중국 시장에 대한 조사 자체를 범죄시하는 분위기를 조성한 것도 큰 이유를 제공했다”고 분석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미국 여론조사 기업인 갤럽도 지난해 중국 사무소를 폐쇄했다. 덩샤오핑 시대가 40여 년간 건설해 놓은 개혁·개방과 시장경제 시대는 시진핑의 공동부유론과 마오쩌둥 딜레당트(Delettante·애호가)적 국정 운영으로 이대로 종언(終焉)을 고하는 것일까. 시진핑은 전국 각지에 마오쩌둥 동상을 세우고, 초상화를 거는 한편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강조하고는 있으나 덩샤오핑 개혁·개방 시대의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완전 해체하려는 생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은 자신의 시대를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신시대’로 규정해서 덩샤오핑 시대의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근본적으로 폐기할 의도는 아닌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홍콩 시사주간 아주주간(亞洲週刊) 최신 호에 따르면 중국 남부 후난(湖南)성 당 기관지 후난일보는 지난 18일 “덩샤오핑 사망 27주년을 기념하는 사상해방 대토론회를 개최한다”는 사고(社告)를 1면 머리기사로 게재했다. 마오쩌둥 출생지인 후난성 당 기관지 후난일보는 이 기사에서 선샤오밍(沈曉明) 후난성 당서기가 “덩샤오핑이 주도한 1978년의 진리표준 대토론회에서 교훈을 얻어 당원 간부들이 속박을 벗어나 시야를 넓히는 토론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는 언급을 했다고 전했다. 선샤오밍 당서기는 “드러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탕핑(躺平)과 같은 사고도 토론의 대상”이라고 적시했다. 그런가 하면 “개혁·개방은 그냥 읽기 쉽게 쓴 한 편의 소설이 아니다(改革開放不是爽文)”는 글귀가 요즘 중국 관영매체에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시대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닌 듯도 하다. 3월 5일 개막하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그런 목소리들이 나올까 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여본다.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현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 ▷호서대 초빙교수 2024-02-26 06:00:00
- [박승준의 지피지기] 대만 총통선거…중국의 대만 통일에 어떤 변수 될까 [박승준 논설주간] 대만 총통선거가 16일 앞으로 다가왔다. 제16대 대만 총통을 선출하는 대선(大選)이 오는 1월 13일 치러진다. 이번 총통선거에서는 대만 독립을 추구하는 민주진보당의 라이칭더(賴淸德·64) 후보가 중국과의 평화를 추구하는 국민당의 허우유이(侯友宜·66) 후보의 추격을 따돌리고 2200만 대만인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대권을 거머쥘 가능성이 높아진 흐름을 보이고 있다. 미국 국제정치학계가 신뢰도를 인정하는 인터넷신문 메이리다오(美麗島) 전자보(電子報)가 지난 12월 21·22·25일 사흘에 걸쳐 실시한 제 97차 지지율 조사 결과 라이칭더 후보는 지난 96차 조사 때보다 1.4%포인트 상승한 38.9%를 기록했고, 허우유이 후보는 3.2%포인트 하락한 29.4%를 기록해서, 표본오차범위 ±2.8%를 벗어난 9.5%포인트의 차이를 기록했다. 지난 7월 17일 제1차 조사를 실시한 메이리다오 전자보의 2024 총통선거 여론조사에서 라이칭더 후보는 계속해서 1위의 자리를 고수해왔으며, 허우유이 후보는 지난 12월 13일부터 17일까지 실시된 조사에서 처음으로 라이칭더 후보와 각각 31%로 동률을 기록한 이래 지속적으로 내리막 곡선을 그려왔다. 허우유이 후보는 라이칭더 후보와 표본조사 오차범위 내의 추격세를 유지하다가 이번 조사에서 처음으로 오차 범위 밖의 열세를 기록했다. 허우유이 후보와 라이칭더 후보가 31%의 동률을 기록했을 때 3위 후보인 대만민중당의 커원저(柯文哲·64) 후보와 후보통합을 논의하다가 통합이 결렬된 이후 지지율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커원저 후보의 지지율은 1위 라이칭더 후보 지지율의 절반 정도인 17~18%대의 지지율을 보여주고 있다. 커원저 후보가 소속한 대만민중당은 중국과의 통일 정책에서 라이칭더의 민주진보당과 허우유이의 국민당의 중간노선에 해당하는 “중국에 대한 방어력을 확보한 상태에서의 양안(兩岸) 교류”를 주장하고 있다. 세 후보의 프로필을 보면, 집권 민주진보당의 라이칭더 후보는 국립 대만대 물리치료학과와 미 하버드대 공공위생학과 석사학위를 받은 의사 출신으로 정계에 투신, 민주진보당 주석(당대표)과 고향인 타이난(臺南)시 시장, 행정원장(총리), 부총통을 거쳐 이번에 총통후보가 됐다. 대만의 역대 총통은 마오쩌둥(毛澤東)의 중국공산당과 벌인 국공내전에서 패한 국민당이 1947년 대만으로 건너온 이래 초대 장제스(蔣介石) 총통, 6대는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蔣經國), 8대 리덩후이(李登輝)까지 국민당 총통으로 이어져왔다. 대만의 첫 정권교체는 2000년에 실시된 제10대 총통선거에 처음으로 이뤄져 대만섬 출신 지식인들이 창당한 민주진보당(민진당) 후보인 천수이볜(陳水扁)이 당선됐다. 천수이볜은 4년 임기의 연임을 한 뒤, 국민당의 마잉주(馬英九) 후보에게 정권을 돌려주었다가, 2016년 제14대 총통선거에서 차이잉원(蔡英文) 후보가 정권을 다시 찾아온 뒤 연임을 하고있는 중이다. 이번에 라이칭더 후보가 허우여우이 후보를 꺾고 제16대 총통에 당선되면 차이잉원 총통의 민진당이 집권을 연장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대만섬 출신의 지식인들이 1986년에 창당한 민주진보당은 국민당이 지키려는 국호 중화민국(中華民國·Republic of China)이 아닌 대만공화국(Republic of Taiwan)을 추구한다. 민진당은 “대만이 중국 영토의 일부가 아니라 자체적인 독립공화국”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시진핑(習近平)의 중국공산당이 내세우는 통일방안 일국양제(一國兩制·대만은 자본주의, 대륙은 사회주의를 유지) 아래의 통일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특히 중국의 일국양제 통일방안의 첫 적용 대상인 홍콩이 1997년 중국으로 주권이 귀속된 이후 “50년간의 체제 보장” 약속을 중국공산당이 어긴 점을 비판하고 있다. 시진핑의 중국공산당은 홍콩의 입법원(Legislative Council) 선거에 적극 개입해서 이른바 ‘애국자 후보’로 불리는 중국공산당 지지자들만 후보 등록이 가능하도록 함으로써 일국양제 약속을 깼다. 홍콩의 일국양제에 대한 그런 인식을 대만국민들이 갖게 된 이후 민진당 지지율이 국민당을 앞서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국민당의 허우유이 총통후보는 중앙경찰학교 출신으로 내정부 경찰국장, 중앙경찰대 총장과 신베이(新北) 시장을 거쳐 이번에 총통후보로 발탁돼 뛰고 있다. 제3의 후보인 커원저 후보도 민진당의 라이칭더와 마찬가지로 의사 출신으로, 국립 대만대 의학과 출신으로, 2019년에 창당한 대만민중당 주석과 타이베이(臺北)시장을 거쳐 이번에 총통후보로 나섰다. 그러나 이번 대만총통 선거는 후보들의 프로필이나 정책비전보다도 중국과의 양안(兩岸)관계, 즉 대륙과의 통일방안이 더 큰 관심사가 되고 있다. 시진핑의 중국공산당은 시진핑의 3연임을 결정한 지난해 10월 16일 발표한 제20차 당대회 결정문을 통해 “평화통일 일국양제가 양안 통일에 최고의 방식”이라면서도 “그러나 외부세력의 간섭과 극소수의 대만독립 분자들의 분열활동에 대한 무력사용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다. 중국공산당의 대만 통일에 대한 그런 입장은 지난달 1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바이든과 시진핑의 미·중정상회담을 통해서도 미국측에 분명히 전달됐다고 중국은 주장하고 있다. 지난 22일 열린 중국 외교부 브리핑에서 왕원빈(汪文斌) 대변인은 “시진핑 주석과 바이든 대통령의 샌프란시스코 회담에서 시진핑 주석은 대만문제가 중·미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며 가장 민감한 문제라고 말했다”고 전하면서 “미국측은 결코 대만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혀야 하며, 중국은 어떻게든 통일을 할 것이며, 통일은 필연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 싱크탱크 전략문제연구소(CSIS)는 올해 1월 중국의 대만 침공을 가상한 ‘다음 번 전쟁의 첫 번째 전투(The First Battle of the Next War)’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해서 미국과 중국, 일본과 한국을 포함한 대만 유사시 참전 가능국들의 관심을 모았다. 이 보고서는 24차례의 워게임 시뮬레이션을 통해 중국의 타이완 침공이 성공할 것인지, 또 양측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를 것인지에 초점을 맞췄다. 그 결과 중국의 타이완 침공은 성공하지 못하며, 미국도 피해가 커 양측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는 것으로 나타났다. CSIS가 실시한 24회의 전쟁 시뮬레이션 과정에서, 미 해군은 2척의 항모와 10~20척의 대형 전함을 잃게 되고, 전쟁 시작 3주 만에 3200명의 미군이 전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20년간 전사한 미군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였다고 한다. 반면 중국 해군은 일본에서 동원된 미군의 미사일 공격에 궤멸되면서, 1만명이 전사하고 수만명의 전쟁 포로가 발생하는 것으로 제시됐다. 중국은 155대의 전투기와 138척의 주요 전함을 잃게 된다고 했다. 중국군의 선제공격은 대만 수도 타이베이와 중요도시들, 그리고 괌 주재 미군에 대한 미사일 공격으로 시작되지만 결과는 미국과 일본의 반격으로 대만 침공 중국군의 궤멸이라는 결과를 낳는다고 이 보고서는 제시했다. 또 지난달 30일 발표된 포린 어페어즈의 대만보고서는 베이징(北京)과 타이베이(臺北), 워싱턴 3자가 모두 전쟁을 대비한 무력 강화 방안에 집중하고 있는 중이라고 진단했다. 그런 가운데 중국은 대만이 대륙으로부터의 분리를 더 이상 추구하지 말 것을 촉구하고 있고, 대만과 미국은 중국의 대만 공격을 저지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포린 어페어즈의 이 같은 진단은 2주 뒤에 실시될 대만의 총통후보 선거 결과가 분리독립을 추구하는 민주진보당 라이칭더 후보의 승리로 귀결될 경우 오는 2027년으로 예상되는 중국의 대만 침공에 어떤 변수로 작용할까에 대한 진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입장에서는 70여 년 전 한반도에서 발생한 한국전쟁 개전으로 북한의 한국에 대한 침공이 마오의 중국공산당 군대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이어져 중국공산당의 대만 침공을 저지하는 효과를 낳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기 전에 북한을 부추겨 한국을 공격하도록 해서, 평택의 주한미군을 한반도에 묶어두려는 사전조치를 중국이 취하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을 우리로서는 검토해봐야 한다는 말이다.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현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 ▷호서대 초빙교수 2023-12-28 06:00:00
- [박승준의 지피지기] '대만 문제'에 극도 예민한 중국 …불필요한 자극은 말아야 [박승준 논설주간] 윤석열 대통령은 20일(현지시간)부터 3박4일간 이뤄진 영국 국빈 방문을 앞두고 영국 일간 더 텔레그래프와 인터뷰를 가졌다. 런던에 21일 배포된 텔레그래프지에 소개된 인터뷰에서 윤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남중국해의 긴장과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갈등, 그리고 북한의 위협은 서방과의 긴밀한 안보협력을 추구하게 만들고 있다.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남중국해에서의 해상질서는 중요한 문제이다.” 텔레그래프는 윤 대통령의 그런 국제정세 인식을 영어로 인쇄해서 런던에 배포했다. 윤 대통령의 회견내용은 베이징(北京) 시각으로 20일 오후 3시 30분에 시작된 중국외교부 마오닝(毛寧) 대변인의 뉴스브리핑에서 다뤄졌다. 신화통신 기자의 질문내용은 이랬다. “윤석열 한국 대통령은 20일 이뤄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중국은 동아시아의 자유와 평화, 번영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은 공공연히 유엔헌장과 안보리 결의 및 기타 국제규범을 위반하는 조선, 러시아와 3국 협력을 하고있어 국제적인 명예와 지위에 불리한 지위에 서있다. 중국은 동아시아 평화와 국제사회의 자유와 평화, 번영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한국은 상호존중과 호혜, 공동이익과 발전을 위해 건강한 한·중관계를 위해 일관되게 노력하고 있다. 인태지역은 조선의 핵위협과 대만해협, 남중국해의 긴장 등 다중적인 정치 리스크를 안고 있다. 한국 정부는 일관되게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을 강조해왔으며, 남중국해가 포함된 지역의 해양질서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이런 윤 대통령의 회견에 대한 중국의 논평은 무엇인가.” 신화통신 기자의 질문은 길었고, 마오닝 대변인의 대답도 짧은 게 아니었다. “나도 관련 보도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중국은 국제문제에서 중요하고 건설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은 자신의 책임과 이익을 분명하게 알고 있으며,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은 할 필요가 없는지를 다 알고있다. 남이 손짓발짓(指手畵脚) 할 필요는 없다. 대만문제는 순전히 중국의 내정(內政)이며, 절대로 외부세력의 간섭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남중국해 문제에서도 중국과 동맹국들은 능력과 믿음, 지혜로 문제를 잘 처리하고 있다. 한국은 남중국해 문제의 당사국이 아니니, 성가시게 떠들(湊熱鬧) 필요가 없다.” 마오닝 대변인의 답변은 한마디로 “윤 대통령은 오지랖 넓게 말하지말라”는 것이었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들이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는 ‘손짓발짓(指手畵脚)’, ‘성가시게 떠든다(湊熱鬧)’같은 표현에서 그런 감정이 묻어났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의 브리핑은 대변인의 개인 의견이 아니며, 외교부 내부 회의를 거쳐 발표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날 브리핑에서 한국 연합뉴스 특파원이 “샌프란시스코 APEC회의에서 왜 한·중 정상회담이 이뤄지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물었다. 마오닝의 대답은 “시진핑 주석과 윤석열 대통령은 APEC회의에서 간단한 접촉(互動)을 했으며, 국제적인 다자 회담에서 리더들이 상호 접촉하는 것은 통상 있는 일이며 그 형식은 다양하다”는 것이었다. 영국은 중국에게 1840년부터 두 차례의 아편전쟁을 통해 100년간 반(半)식민지의 아픔을 안겨준 대표적인 유럽국가다. 윤 대통령이 영국을 방문한 데 대해 중국은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으며, 중국 외교부 브리핑장에서 이뤄진 신화통신 기자와 마오닝 대변인의 문답내용은 중국 외교부가 윤 대통령의 영국 방문 전후를 아주 상세하게 들여다보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 것이었다. 윤 대통령이 영국 방문을 앞두고 더 텔레그래프 지와 가진 회견에서 대만문제와 남중국해 문제를 언급했으니 중국 외교부로서는 시니컬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대만문제에 대한 중국의 입장은 지난 16일 샌프란시스코 APEC 회의를 계기로 이뤄진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간의 정상회담에서 중요한 문제로 언급됐다. 이 자리에서 시진핑 주석은 “대만문제는 중·미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며, 가장 민감한 문제”라고 말하고 “미국은 대만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주고, 대만을 무장시키는 행동을 정지해서, 중국의 평화통일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보여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중국은 마침내 통일을 할 것이며, 통일은 필연이다”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은 신냉전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며, 중국의 체제를 바꾸거나 동맹을 강화해서 중국에 반대하는 행동을 하지않을 것이며, 대만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다짐했다. 대만문제에 대한 중국의 기본 입장은 지난해 10월 16일 중국공산당 당대회(전국대표대회)에서 채택된 공보에 분명하게 나타나있다. 중국의 정치체제상 가장 중요한 것은 중국공산당의 결정이며, 이 결정은 5년마다 개최되는 당대회에서 채택된 공보(公報)에 나타난 것이 가장 중요하다. 시진핑 국가주석도 이 공보의 결론을 외국 정상들에게 풀어서 말하는 것뿐이다. 지난해 20차 당대회에서 채택된 공보에서 대만문제에 대한 결론은 “평화통일과 일국양제(一國兩制) 방침이 최적의 방식이다”라는 것과 “대만은 중국의 대만이며, 대만문제의 해결은 중국인들이 스스로 결정할 문제로, 최대의 성의를 다해 평화통일의 전망을 쟁취하되, 결코 무력사용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표현으로 정리됐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바이든과 만난 시진핑의 언급은 이 표현의 범주 안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시진핑이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2027년에 대만통일을 할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내려놓았다”는 미국발 전언은 당대회에서 채택된 결의안에는 없는 표현이다. 요즘 들어 유튜브에는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높아지는 분위기를 타고 부쩍 중국의 대만 침공 시나리오와 중국과 대만의 전쟁 시뮬레이션, 한반도의 주한미군이 중국 대만 전쟁에 끌려들어가는 과정에서 한국도 중국의 대만 침공을 저지하기 위한 전쟁에 개입하게 될 거라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돌고 있다. 이 이야기들은 주로 워싱턴에 있는 CSIS(Center for Strategic & International Studies · 미 국제전략문제연구소)나 캘리포니아 샌타모니카에 있는 RAND corperation 같은 전략문제 싱크탱크들의 보고서를 근거로 생산되고 있다. 어디까지나 미국의 시각에서 예상해본 중국의 대만 침공에 대한 가능성과 미국의 대응 시뮬레이션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 4월 서울대 산업공학 박사 출신의 중국 내 한국기업 주재원 30년 경력의 중국전문가 이철 박사(63)가 <이미 시작된 전쟁>이라는 책을 출간해서 주목을 받고 있다. 대만 출신의 아내와 결혼해서 중국에 주재해왔다는 저자는 <이미 시작된 전쟁>에서 “중국은 대만을 침공하기 전에 북한을 부추겨서 남한을 먼저 공격하게 한 다음 대만을 침공할 것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저자는 미 싱크탱크 CSIS가 지난 1월에 발표한 ‘다음 전쟁의 첫 번째 전투: 중국의 타이완 공격에 대한 워게임 결과(The first battle of next war : Wargaming a Chinese invasion of Taiwan)’에서 모두 24회의 워게임을 실시한 결과를 소개하면서, 중국의 대만 침공이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 정리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전했다. “한국은 중국의 군사력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의 주의를 산만하게 만들기 위해 중국의 지원과 부추김을 받은(incentivised) 북한의 적대행위도 두려워해야 한다. 미국은 중국이 대만을 공격할 경우 주한 미 공군 전력의 절반을 한국에서 빼내고 절반은 한국 보호를 위해 남겨둘 것이다.” 저자는 그러나 이 같은 견해는 중국과 대만에 초점을 맞춘 미국 워싱턴의 시각에서 본 것이고,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한반도에는 중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고, 한국과 미국에 대한 증오심에 가득 차 있으며, 수십년 동안 전쟁을 준비해온 북한을 활용하려 들 것이 뻔하다”는 주장을 폈다. “더구나 중국에 가장 가까이 있는 적은 바로 주한미군과, 미국이 전시작전권을 갖고있는 한국군이며 한국군은 50만 병력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400만 병력으로 확대할 수 있는 세계 6위의 군사 강국이다. 따라서 중국은 주한미군과 한국군에 대한 사전조치 없이 대만을 공격할 수 없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저자는 중국에서 살면서 알게 된 중국인의 사고방식에 비추어 “중국이 대만을 공격할 경우 먼저 북한을 부추겨 북한이 한국에 최소한 연평도 포격 이상의 충격과 인명피해를 입힐 수 있는 사태를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했다. 대만 문제는 중국에게는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며, 2027년까지 국가주석 3연임에 성공해서 장기집권에 들어간 시진핑에게는 대만과의 통일보다 중국 인민들에게 더 좋은 선물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우리 외교당국자들은 대만 문제로 불필요하게 중국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조언을 하고 싶다.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현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 ▷호서대 초빙교수 2023-11-24 05:00:00
- [박승준의 지피지기] 중국의 '조용한 침공'…'한국의 총선'도 노리나 [박승준 논설주간] 2018년에 영어판 ‘중국의 조용한 침공(Silent Invasion)’을 펴낸 호주 오스트레일리안 인스티튜트 소장 클라이브 해밀턴(Clive Hamilton)은 2021년에 펴낸 한글판 서문에서 이렇게 경고했다. “한국도 눈을 떠야 한다. 중국의 진정한 본질과 야망을 깨닫지 못하면 한국도 위험하다. ··· 베이징이 국제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추진하는 전략 목표는 대미 동맹 해체이며, 중국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노리는 주요 국가가 호주와 일본, 한국이다. 베이징은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갈라놓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한·미 동맹을 약화시키지 않는 한 한국을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해밀턴의 경고는 지금으로부터 넉 달 반 전인 지난 6월 8일 현실로 나타났다.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서울 성북구 대사관저로 만찬 초청을 한 자리에서 놀라운 말을 했다. “중·한 양국은 이사 갈 수 없는 이웃이고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입니다. ··· 현재 국제 정세가 복잡하게 변하고 있고 ··· 미국이 전력으로 중국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일각에서 미국이 승리할 것이고 중국이 패배할 것이라는 베팅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는 분명히 잘못된 판단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흐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싱하이밍 대사의 말에서 ‘미국이 승리할 것이고 중국이 패배할 것이라는 베팅을 하고 있는’ 쪽은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인 국민의힘 쪽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날 싱하이밍 대사는 주빈석 오른쪽에 앉은 이재명 대표에게 A4용지에 적어온 한글을 또박또박 읽어내려 갔다. 한국어를 잘 구사하는 싱 대사는 ‘베팅’이라는 단어는 발음하기에 익숙하지 않은 듯 서투른 소리를 냈다. 싱하이밍 대사가 이재명 대표에게 읽어준 내용은 미리 중국어본이 마련돼 있었던 듯 다음 날인 6월 9일 오전 9시 19분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운영하는 ‘인민망(人民網)’에 거의 전문이 보도됐다. “주한 대사 싱하이밍, 한국 공동민주당 당수 이재명에게 중·한 관계 등 문제에 대해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베팅’이라는 영어 단어는 도박할 도(賭)자로 번역되어 “(한국의) 어떤 사람은 미국이 이길 거라는 데 돈을 걸고 ···”라는 표현으로 소개됐다. 그로부터 석 달 열흘이 지난 9월 18일 싱하이밍 대사에게 왜 한국의 제1야당 이재명 대표를 초청해서 그런 놀라운 말을 했는지 직접 물어볼 기회가 생겼다. 그는 31년 전 1992년 8월 24일 이루어진 한·중 수교 때 수교 전부터 중국 교섭단 일원으로 참여해온 한·중 수교사의 산증인이라 한·중 관계에서 싱 대사가 모르는 일은 없을 정도였다. 한국인 5명과 함께 만찬에 초청받은 자리에서 질문을 해보았다. -석 달 전 이재명 대표에게 읽어준 A4용지 문장은 대사가 직접 쓴 것인가. “아니다. 그런 문장을 내가 맘대로 쓸 수는 없는 일이다. (본국 외교부가 보내왔거나 훈령에 따라 쓴 글이라는 뜻으로 들렸다.) -기자회견은 사전에 준비된 것인가. “아니다. 이 대표 측이 기자들을 데리고 온 것이다.” 그러니까 중국 본국 정부가 한국 정치에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사전에 기획한 데 따라 작성된 문장을 보내줘 A4용지에 적힌 문장을 보고 읽은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결국 싱 대사 본인 기획이 아니라 중국 외교당국 기획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라는 말이었다. 주재국 대사가 본국 지시에 따라 기자회견을 하고, 또 본국 외교당국이 준비해준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형식의 기자회견은 외교 현장에서 자주 반복되는 일이기도 하다. “미국이 전력으로 중국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일각에서 미국이 승리할 것이고 중국이 패배할 것이라는 베팅을 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라는 말은 싱 대사가 과거 청말에 조선과 관계를 농단한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같은 인물이라서 한 말이 아니라 중국의 ‘전랑(戰狼)외교’가 기획한 의도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호주의 클라이브 해밀턴은 ‘중국의 조용한 침공’에서 중국계 뉴질랜드 학자인 제임스 젠화 토(James Jianhua To)의 중국 연구 박사학위 논문을 인용해서 중국의 해외 거주 교포 활용 계획의 역사와 목표, 방침, 전술 등을 상세히 밝혀냈다고 소개했다. 이른바 중국공산당 통일전선 공작부가 주관하는 ‘교무(僑務)’란 해외 거주 중국인을 단순히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해외 거주 중국인을 활용해서 주재국 사회를 중국의 가치에 공감하고, 베이징이 수월하게 통제할 수 있도록 변화시키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법무부 외국인 출입국 통계(2021년 기준)에 따르면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 숫자는 213만명으로 한국인 전체 인구 대비 4.1%를 차지한다. 이 가운데 한국 국적이 없는 외국인 숫자는 165만명이고, 이 중 중국 국적인 한국인 동포(조선족)가 23%인 25만3,533명, 이른바 ‘한족’으로 분류되는 중국인이 15.6%인 17만852명으로 집계된다. 특히 우리 정부는 2005년 공직선거법 개정으로 영주 체류자격 취득일 후 3년 경과하면 참정권을 보장하고 있어 클라이브 해밀턴이 말한 대로 중국의 교무계획에 따라 한국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 상황이다. 내년 총선에 어떤 형태로든 중국 정부의 통일전선 공작 계획에 따라 한국 정치에 중국 정부가 간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 상태인 것이다. 더구나 우리 사회는 무슨 문제에 대해서든 시위를 조직해서 거리로 달려나가는 고질병을 갖고 있다. 23일자 인터내셔널판 뉴욕타임스는 한국 시위 풍토에 대해 “1980년대 이래 아시아에서 가장 활기찬 민주주의를 자랑하는 한국 수도에서는 진보(progressives)와 좌파(left wing), 그리고 보수(conservatives)와 우익(right wing) 두 그룹으로 나뉘어 모든 불만을 거리로 끌고 나가 시위로 표현하는 행동을 기호나 취미(penchant)로 여기고 있다”고 표현했다. 뉴욕타임스는 “한국에서는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항상 문제를 거리로 끌고 가고(always taking to the street) 있으며, 일부에서는 시위를 마치 록 페스티벌처럼 여기고 있다”고 보도했다. 최근 들어서는 좌익이든 우익이든 시위 확산을 위해 유튜브와 SNS를 통해 가짜뉴스와 정치적 편견을 공급하는 행태를 보여주고도 있다고 했다. 문제는 여론조사 지지도에서 여야가 거의 반반 지지도로 쪼개진 우리 정치 풍토에서 중국 국적을 가진 40만명(조선족과 한족 포함)이라는 숫자는 중국 정부가 교무공작을 통한 통일전선 활동을 통해 한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기에 충분한 숫자라고 봐야 할 것이다. 국민의힘이든 더불어민주당이든 국내 정치 흐름이 중국 정부의 통일전선 공작에 영향받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해마다 3월 5일에 정확히 개최되는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개막식을 보면 전국에서 베이징에 모인 3000명에 가까운 인민 대표들이 일사불란하게 박수를 치는 가운데 중국공산당 총서기를 비롯한 10명 미만의 지도부가 인민 대표들의 박수를 받으며 입장하는 광경을 TV 화면을 통해 보았을 것이다. 왜 이런 광경이 연출되는지는 중국 헌법 전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중국의 신민주주의 혁명의 승리와 사회주의 사업의 성취는 중국공산당이 각 민족 인민들을 영도해서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의 지도 아래 승리함으로써 얻어진 체제”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신민주주의란 이른바 사회주의 민주주의라는 것으로, 우리의 민주주의 체제와는 근본부터 다르며 중국에서는 다당제(多黨制)가 허용되지 않는다. 중국의 통일전선 공작은 중국공산당 1당 통치체제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는 작업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서울 금천구 대림동과 가리봉동 일원에는 중국 국적을 가진 조선족 동포들과 이른바 ‘한족’으로 분류되는 중국인들이 형성해 놓은 차이나타운이 있다. 중국어 간판이 주류를 이루고 중국 음식점과 각종 중국 일상생활용품 가게가 몰려 있는 이 차이나타운에서는 최근 자체적으로 조직한 조찬 포럼까지 열려 중국 국적자 중심의 정치적 의식화와 조직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일사불란하게 중국공산당 지지자들이며 이들을 중심으로 한국 정치에 간여하는 활동도 시작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우리 정당의 SNS 활동에도 참여해서 우리가 잘 사용하지 않는 ‘홍로점설(紅爐點雪·붉은 난로에 떨어진 한 움큼의 눈)’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누리꾼이 나타나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내년 총선이 중국 정부의 통일전선 공작의 영향을 받지 않고 우리 여야 정당 간 순수한 경쟁에 따라 치르는 정치 행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현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 ▷호서대 초빙교수 2023-10-26 06:00:00
- [박승준의 지피지기] '시진핑 리스크'에 커지는 불확실성 [박승준 논설주간]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 15일 미국 국무부에서 열린 아날레나 베어보크 독일 외무장관과 공동기자회견에서 리상푸(李尙福) 중국 국방부장 거취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블링컨의 대답은 “아는 바 없으며, 우리는 그동안도 그래왔듯이 어느 시점에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누구든지 중국 정부와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이었다. 리상푸 국방부장은 지난달 29일 중국과 아프리카 평화안보 포럼에서 기조연설한 이후 공식 석상에서 보이지 않고, 지난 7일 베트남과 개최할 예정이던 국방협력회의는 리 부장 건강을 이유로 연기됐다. 이에 관한 질문을 받은 미국 국무장관이 “아는 바 없다”고 대답함으로써 중국 국방부장 실종설을 뒷받침한 셈이 된 것이다. 친강(秦剛) 외교부장에 이어 리상푸 국방부장까지 실종? 현직 중국 외교부장 친강의 신변 이상을 처음 확인한 것은 박진 외교부 장관이었다. 박 장관은 지난 7월 14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아세안(ASEAN) 외교장관 회의(ARF)에서 왕이(王毅 중국 공산당 외교담당 정치국원을 만났다. 한·중 외교장관 회담은 7개월 전인 지난해 12월 박진 장관과 왕이 정치국원 겸 외교부장 사이에 화상회담으로, 그보다 4개월 전인 8월 9일에는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 근교에서 대면(對面)으로 이뤄졌다. 화상회담이 아니라 직접 대면한 것은 이번이 근 1년 만이다. 문제는 회담 내용보다 박진 장관의 카운터파트가 친강 현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어야 하는데 친강이 아니라 더 고위급인 왕이 정치국원이 나왔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중국 측이 갑자기 아세안 외교부장 회의를 격상시킬 의사를 가졌다거나 한국을 더욱 존중하는 자세를 보여주기 위해 고위급이 나타난 건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 외교부장 친강의 신상에 이상이 생겼다는 점이 관찰 대상이라는 것이다. 중국 측은 박진 장관에게는 “친강 외교부장 건강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미국과 함께 세계를 좌지우지한다는 중국 외교부장 신상에 이상이 생겼다는 사실은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 ‘외교부장 활동’에도 나타나 있다. 전 세계를 상대해야 하는 중국 외교부장의 ‘활동’ 소식은 지난 6월 25일 베이징(北京)을 방문한 러시아 외교차관 루덴코 안드레이 유레비치를 만난 데서 멈춰 서 있다. 이날 베이징을 방문한 또 다른 손님인 베트남 총리 팜민찐을 만나 회담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후 9월 18일 현재까지 3개월 가까이 행적이 보이지 않고 있다. 마오닝(毛寧)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친강의 부재를 묻는 질문에 “제공할 정보가 없다”고만 답해왔다. 중국이라는 자칭 ‘대국(大國)’의 외교부장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호사(好事)를 만난 대만 유튜버들은 난리가 났다. “홍콩 봉황TV 여성 뉴스 앵커 푸샤오톈(傅曉田·40)도 동시에 사라졌다” “케임브리지 출신에 미모인 푸샤오톈이 미국에서 주미대사를 하던 친강의 아기를 낳았다” “남녀 문제가 아닐 것이다. ··· 외교지휘권을 놓고 정치국원 왕이와 권력투쟁을 벌이다 문제가 생긴 것이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드라이브하는 반부패 캠페인에 걸려든 것이다” ··· 대만 유튜버들은 최고의 화제를 만나 온갖 설(說)을 쏟아냈다.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제공할 정보가 없다”는 말만 했고 심지어는 “신화통신을 보라”는 말을 해 베이징 주재 외국 특파원들의 실소(失笑)를 샀다. 베이징 주재 외국 특파원들은 “외교부 대변인이 아무 말을 못하는 걸 보면 친강 외교부장 실종에 중국 최고지도자 시진핑 국가주석이 관련돼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추측을 중국 외부로 전했다. 중국 장관들의 실종 뉴스가 나오는 가운데 중국 경제에 관한 비관적 뉴스들이 미국의 권위 있는 매체들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국 경제 기적의 종말(The End of China’s Economic Miracle).” 지난달 2일 출판된 포린 어페어즈 9·10월호에는 미국 PIIE(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 소장을 10년째 하고 있는 애덤 포즌(Adam Posen) 기고문이 실렸다. “중국은 시진핑 등 지도부의 억압적인 정책으로 인한 ‘경제적인 장기 코로나’를 겪고 있으며 코로나19 사태 이전부터 시작된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간섭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더욱 심해져 민간 분야의 신뢰가 위축돼 소비가 살아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시진핑 체제가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을 탄압하는 등 공산당 정권을 위협할 시장의 성장을 용납하지 않음으로써 경제 혁신이 억압돼 새로운 경제 동력이 생기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포즌 소장은 “미국이 중국과의 대결에서 중국의 이런 위기를 활용해 우위에 서야 할 기회”라고 주장했다. 뉴욕타임스 8월 26일자에는 “중국 경제의 문제는 ‘Top(시진핑)’에서 시작된다”는 에스워 프라사드(Eswar Prasad) 커넬대 다이슨(Dyson) 연구소 교수의 게스트 칼럼이 커다랗게 실렸다. 프라사드 교수는 “중국은 지금이 위험한 순간(perilous moment)이며 각종 수치들은 중국 경제의 시동이 꺼지고(stalling)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더욱 심각한 것은 중국 소비자들과 기업인들이 중국 정부가 중국 경제에 깊이 자리 잡은 문제를 인지하고 고칠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신뢰 상실의 문제가 퍼져 있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프라사드 교수는 “시진핑 정부가 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이미 나선형으로 추락하기 시작한 중국 경제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프라사드 교수는 최근 중국 여행을 통해 중국 정부와 기업 사이에 발생한 불협화음을 분명하게 느꼈으며 베이징 관리들은 자신들이 “구름 위에서 살고 있다(live above the clouds)”는 사실이 기업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전했다. 그는 특히 시진핑이 2021년에 도입한 ‘common prosperity(공동부유·共同富裕)’라는 정책 목표가 민간기업과 정부 관리들에게 ‘몽둥이질(cudgel)’을 해서 중국 공산당 노선을 따르라는 말로 인식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는 가운데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이 이자율을 낮춰 시중에 자금을 풀어도 미래를 걱정하는 가계와 기업의 소비로는 연결되지 않고 있어 점점 나선형 디플레이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가고 있다고 프라사드 교수는 진단했다. 중국에서 국가지도자급 인물이 돌연 종적을 감추고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11년 전인 2012년 9월 5일에는 베이징을 방문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의 카운터파트였던 시진핑 당시 국가부주석이 나타나지 않아 전 세계에 미스터리를 제공했다. 미국 국무장관이 방문해서 중국 국가부주석, 그것도 그해 가을 제18차 중국 공산당 당대회에서 당 최고지도자인 총서기에 선출될 예정이던 시진핑과 만나 회담하기로 돼 있었는데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시진핑은 열흘이 지난 9월 15일 베이징에 있는 중국농업대학 과학대중화 행사에 나타났다고 신화통신이 보도함으로써 열흘간의 미스터리는 풀렸다. 시진핑 실종 기간 중국 인터넷 검색엔진들은 중국어로 시진핑이라고 치면 ‘검색불가’만을 답으로 내놓아 미스터리를 더욱 증폭시켰다. 실종됐던 시진핑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열흘 만에 공개 행사에 나타났고 그해 가을 중국 공산당 총서기에 선출된 뒤 5년 임기를 두 번 하고 지난해 10월에는 마오쩌둥(毛澤東)이 1976년 죽은 뒤에는 처음으로 3연임 당총서기로 선출돼 미국과 유럽을 포함한 국제사회에서 독재자라는 말을 듣고 있다. 시진핑뿐만 아니라 중국 경제계 거물 마윈 알리바바 회장도 3년 반 전인 2020년 10월 상하이에서 열린 경제금융회의에서 중국 공산당 최고 경제 지휘자 왕치산(王岐山)이 지켜보는 가운데 “중국 금융시스템은 과거 전당포 수준”이라고 할 말 다했다가 실종 상태에 빠졌다. 마윈은 최근 들어서야 알리바바 경영 일선에 복귀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일본의 한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고위 지도자들과 관리들이 갑자기 실종되는 미스터리의 배후에는 중국 공산당 기율검사위원회라는 조직이 있다고 중국 공산당 관계자들은 말한다. 당 안팎에 문제가 생기면 기율검사위가 전화를 걸어 출두 장소를 알려주면 중국에서 아무리 높은 고위 지도자도 출두해서 외부와 연락이 차단된 채 2주일이건 3주일이건 조사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 기율검사위의 무소불위 권력은 이 위원회가 1억명에 가까운 당원들의 당원 자격을 박탈할 권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당원 자격을 박탈당하면 장관이든 부주석이든 현직은 자동적으로 면직당하고, 당원 자격을 박탈당한 중국 공산당원은 어디에서도 급여를 제공받지 못하기 때문에 당장 굶어죽을 지경에 빠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 기율심사위원회가 깨닫지 못하는 점은 자신들은 중국 고위 지도자들을 비밀장소로 호출해서 조사하는 작업이 중국 공산당 최고지도자 시진핑 당총서기의 리스크로 연결된다는 점을 모른다는 점이다.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현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 ▷호서대 초빙교수 2023-09-20 06:00:00
- [건국의 재조명] 한반도 국가 정통성은 대한민국에 있다 [박승준 논설주간]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황제 즉위식을 하고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고쳤다. 독립협회의 ‘칭제건원(稱帝建元)’ 건의를 받아들여 국체를 입헌군주국으로 바꾸었다. 지금의 헌법에 해당하는 ‘대한국(大韓國) 국제(國制)’ 제1조는 ‘대한국은 세계 만국이 공인한 자주독립제국이다’였고, 제2조는 ‘대한국의 정치는 만세 불변의 전제 정치’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대외 관계를 규정한 제9조는 ‘대한국 대황제는 각 조약 체결 국가에 사신을 파견하고, 선전·강화 및 제반 조약을 체결한다’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소멸한 대한제국은 줄여서 ‘대한국’ 또는 ‘한국’으로 호칭됐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일본제국 추밀원 의장이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가 체포된 후 자신을 “대한국인(大韓國人)”이라고 밝힌 것도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고친 후 일이었기 때문이다. 고종이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은 1894년에 발발해서 1895년에 종결된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됐기 때문이었다. 1895년 4월 17일 청일전쟁 승전국이 된 일본의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와 청의 북양통상대신 리훙장(李鴻章)이 서명한 시모노세키(下關) 조약의 제1조는 '청은 조선이 완전무결한 독립국임을 인정하며 그동안 조선이 청에 대해 해오던 전례(조공)는 앞으로 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돼있었다. 대한제국은 국제 제6조에 따라 3명의 공사(지금의 대사)를 청에 파견했다. 박제순(1902~1903), 박태영(1903~1904), 민영철(1904~1905) 세 사람이었다. 청도 대한제국에 쉬서우펑(徐壽朋‧1898~1901), 쉬타이선(許臺身‧1901~1904), 쩡광취안(曾廣銓‧1904~1906) 등 3명의 공사를 파견했다.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서 가능했던 대한제국과 청의 대등했던 외교관계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1905년 을사늑약으로 종결됐다. 일본은 1910년 한일합병을 한 이후에는 대한제국 국호를 다시 조선으로 되돌려 놓았다. 한일합병 9년 후인 1919년에 일어난 3‧1 만세운동은 국외에 모두 8개의 임시정부를 수립·선포하는 독립 열망으로 이어졌다. 독립운동사 연구가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2019년에 펴낸 ‘3‧1혁명과 임시정부’에 따르면 조선민국 임시정부, 신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간정부, 고려공화정부, 간도임시정부 등이 있었다고 하지만 수립 과정이 분명하지 않은 채 전단(傳單)으로만 발표됐다. 실제 조직과 기반을 갖추고 수립된 것은 중국 상하이(上海)와 러시아 연해주, 그리고 한성의 임시정부였다. 1919년 4월 10일과 11일 이틀에 걸쳐 상하이(上海) 프랑스 조계에서 신익희·조소앙 등 각 지방 출신 대표 29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차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의회)가 개최됐다. 의장에는 이동녕, 부의장에 손정도가 선출됐다. 국호는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결정됐다. 국무원 수뇌부를 선출하고, 10개조의 임시헌장을 통과시켰다. 10개조는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한다, 제3조 대한민국 인민은 남녀·빈부 및 계급 없이 일체 평등으로 한다(大韓民國臨時憲章, 한국근현대사사전). 이 임시헌장은 그해 9월 11일 ‘대한민국 임시 헌법(大韓民國臨時憲法)’으로 다시 공표됐다. 이 임시헌법에서 제3조에 ‘대한민국의 영토는 구한국(대한제국)의 판도로 한다’고 명시하고 제7조에서 ‘대한민국은 구 황실을 우대한다’고 밝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한제국을 계승함을 분명히 했다. 임시헌장에 따라 국무총리로 발표됐던 이승만은 임시헌법 체제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1925년 3월 7일 임시 의정원은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하고 4월 7일 임시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했다. 대한제국이 황제가 다스리는 양반상놈의 신분제 국가였다면 상하이 임시정부의 임시헌법은 남녀빈부와 계급이 없이 평등한 민주공화국임을 분명히 했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한 사건에 대해 ‘우남 이승만 평전 : 카리스마의 탄생’(이택선 저)은 “이승만은 국무총리나 집정관 총재 같은 각인되기 어려운 직함보다 대통령이라는 잘 알려진 호칭이 독립운동에 도움이 된다고 고집한 데서 빚어진 일”이라고 진단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 축하 기념 천장절 행사에서 일본군 장군들을 향해 폭탄을 던져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를 현장에서 즉사하게 하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癸)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 사건으로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항저우(杭州), 난징(南京)을 거쳐 쓰촨(四川)성 충칭(重慶)으로 청사를 옮겨 다녀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이 과정에서 중국 국민당뿐만 아니라 중국 공산당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운 것으로 기록돼 있다. 상하이 푸단(復旦)대 조선한국연구소 소속 원로 교수 스위안화(石源華)는 2012년 한국에서 출간한 ‘한중문화협회 연구’에서 “항일전쟁 기간에 중국 공산당은 항일민족 통일전선이라는 전략 방침에 따라 한국 독립운동 각 당파들과 광범위한 접촉을 한다는 방침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중국 공산당은 옌안(延安)에서 활동하는 한국독립동맹, 조선의용군, 조선혁명간부학교를 도와주는 한편 국민당 통치 지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다른 조직도 지원했다”고 밝혔다. 그는 “중국 공산당은 1941년 10월 옌안에서 개최된 각 민족 반파시스트 대회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을 명예주석으로 초청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스위안화는 이 책에서 “1941년 10월 11일에 조직된 한중문화협회라는 한·중 공동 항일조직에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명예이사로 참여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은 소련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학습하고 귀국한 저우바오중(周保中)을 1933년 만주 지역으로 보내 항일민족 통일전선 전략에 따라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을 조직하게 했다. 저우바오중에게 마오쩌둥이 맡긴 임무는 국민당 장제스(蔣介石)가 만주 지역에 병력을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 공산당이 주도하는 항일 민족 통일전선 역량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저우바오중은 현지에서 조선인들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김책을 발탁해서 1938년 6월 동북항일연군 제3군 정치부 주임으로 기용했다. 중국 공산당은 1936년 3월 남만주당 제2차 대표대회를 개최해 동북항일연군 제2군을 편성하고 제2군 정치위원으로 김일성을 임명한다. 김일성은 1937년 6월 8일 병력 150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일본 치하 보천보를 공격하는 유격활동을 벌이는 기록을 남겼다. 2년 전 세상을 떠난 재미 정치학자 이정식 교수가 1983년에 펴낸 ‘만주에서의 혁명투쟁 : 1922~1945년 중국 공산주의와 소련의 이익’은 일본 방위청 통계를 인용해서 김일성이 1940~1941년 만주에서 중국 공산당 동북항일연군 일원으로 소규모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한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김일성이 1941년 소련 연해주에 주둔하고 있던 극동군에 편입된 이후 상황은 재미 정치학자 서대숙 교수가 1988년에 출간한 ‘Kim Il Sung : the North Korean Leader'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저우바오중의 ’동북항일유격일기‘에도 이 부분이 기록돼 있다. 1992년 4월 평양에서 출판된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도 김일성이 중국 공산당 소속 항일 빨치산으로 활동한 기록이 나오지만, 기록은 1936년에서 그쳤고 1941년 소련 극동군으로 소속을 바꾼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이유는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가 출판되던 1992년에 이미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된 상황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러시아 학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가 2013년에 미국 뉴욕에서 출판한 ‘The Real North Korea : Life and Politics in the Stalinist Utopia’에는 30대인 김일성이 1945년 9월 소련 군함 푸가체프(Pugachev)호에서 소련 육군 대위 계급장을 달고 내렸으며 김일성 직책은 소련군 제88 독립여단 제1 조선인 대대 지휘관이었다. 이택선 교수가 쓴 ‘우남 이승만 평전’에 따르면 미국에 머물고 있던 70세의 이승만은 10월 4일 미군 인사들의 협조로 귀국 허가를 받았고 하와이와 괌을 경유해서 도쿄(東京) 연합군최고사령부(GHQ)에 들러 맥아더를 만난 다음 1945년 10월 16일 오후 5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은 대한제국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소련은 물론이고 미국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데 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보다 한 달 늦은 19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귀국했으나 하지 중장이 지휘하는 미군정이 인정하지 않아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대통령에는 선거에서 당선된 이승만이 취임했고,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권총으로 암살당한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1987년에 마지막으로 개정된 대한민국 헌법 전문 첫 구절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가 현실에서는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3‧1운동 영향으로 탄생한 대한제국의 계승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남에서도 북에서도 인정받지 못했고 미군은 한국인 최초의 프린스턴대 국제정치학 박사 이승만을 선택하고, 소련군은 러시아어에 능통한 소련 육군 대위 김일성을 통치자로 선택했다. 조선을 국호로 선택한 김일성은 조선왕조와는 비교도 안 되는 전제국가를 한반도 북쪽에 건설해 놓았고, 권력을 나누어주는 데 인색했던 카리스마의 지도자 이승만은 헌법 전문에 ‘4‧19 정신이 항거했던 불의’로 기록됐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소멸한 대한제국의 법통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계승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에 한반도 유일합법 정부의 정통성이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현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 ▷호서대 초빙교수 2023-08-21 06:00:00
- [박승준의 지피지기] 과학 없는 진보 없고, 과학 없는 좌파 없다 [박승준 논설주간] “과학기술이 제1의 생산력입니다.” 1978년 9월 26일 중국공산당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이 한 말이다. 그보다 2년 전인 1976년 9월 마오쩌둥(毛澤東)이 죽은 다음 전국의 과학자들을 모아 개최한 ‘전국과학대회’에 나가서 연설하면서 강조한 말이다. 그의 말은 이어진다. “…과학기술이 제1의 생산력이라는 말은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입니다.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은 과학과 생산의 관계를 더욱 가깝게 만들었습니다. 과학기술이 생산력에 미치는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 덩샤오핑은 1988년 9월 5일 베이징(北京)으로 찾아온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구스타우 후사크를 만났을 때도 이 말을 강조했다. 그해 9월 12일 중국공산당 중앙당 간부들에게도 강조했다. “교육 과정에서도 과학기술이 제1의 생산력이라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 덩샤오핑은 1992년 2월 남쪽의 경제개발특구를 시찰하면서도 “과학기술이 제1의 생산력이며, 과학기술이 발전해야 산업의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세계은행(World Bank)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마오쩌둥이 죽은 1976년 중국의 GDP는 1539억4000만 달러(현재 가치)였고, 1인당 GDP는 153.94달러였다. 그때 우리 GDP는 299억 달러, 1인당 GDP는 834.1달러였다. 당시 중국의 GDP는 우리의 5배 정도, 1인당 GDP는 우리의 5분의 1 수준이었다. 그러던 것이 덩샤오핑이 리드하는 중국의 경제발전이 진행된 첫 10년 이후인 1990년 중국의 GDP는 3608억6000만 달러, 1인당 GDP는 317.9달러였다. 우리 GDP는 2833억7000만 달러, 1인당 GDP는 6610달러였다. 중국 GDP는 우리의 1.3배, 1인당 GDP는 우리의 20분의 1 정도였다. 과학기술을 강조하는 덩샤오핑 방식의 개혁개방과 빠른 경제발전의 두 번째 10년이 흐른 다음인 2000년 중국의 GDP는 1.21조(兆) 달러, 1인당 GDP는 959.4달러로 늘었다. 이때 우리의 GDP는 5761억8000만 달러, 1인당 GDP는 1만2257달러였다. 중국 GDP는 우리의 2배, 1인당 GDP는 13분의 1로 그 간격이 좁혀졌다. 2020년 중국 GDP는 14.69조 달러, 1인당 GDP는 1만408.7달러로, 우리 GDP 1.64조 달러의 9배 정도로 확대됐고, 1인당 GDP는 우리의 3만1721.3달러의 3분의 1 정도로 간격이 줄었다. 물론 덩샤오핑 식의 개혁개방 40여 년간 중국의 빠른 경제발전이 전적으로 덩샤오핑의 과학기술 강조에만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고, 덩샤오핑의 전임자 마오쩌둥도 실천하지는 않았지만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했다. 마오쩌둥은 강철 생산량을 단숨에 영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군중주의에 의존하기 위해 대약진운동을 벌이면서 마을마다 어설픈 용광로를 설치해서 지식인들의 웃음을 샀고, 식량 생산량을 늘리겠다고 밀과 벼를 촘촘히 심는 밀식(密植)을 지시했다가 바람이 안 통해 뿌리가 썩어 대기근을 초래한 뒤 반대하는 류샤오치(劉少奇)를 처형하는 비과학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주었다. 그런 마오도 말로는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1966년에 시작해서 10년간 계속된 문화혁명 기간에도 ‘마오쩌둥 어록’을 통해 “과학기술 없이는 생산력을 높일 방법이 없다(不搞科學技術, 生産力無法提高)”라고 강조했다. 마오는 ‘자연변증법 연구통신’이라는 잡지에 기고한 “혁명정신과 엄격한 과학적 태도”라는 글에서는 이런 말도 했다. “과거 우리가 인민정부, 인민군대라는 상부구조를 건설한 이유는 무엇인가. 상부구조를 건설한 이유는 생산을 위한 것이며, 생산력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이 필수요소이며, 과학기술 없이 생산력을 높이는 방법은 없다.” 중국공산당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원조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도 자신들이 추구하는 사회주의를 이전의 공상적(空想的) 사회주의와 구분해서 과학적 사회주의(Scientific Socialism)임을 강조했다. 이들은 ‘공산당선언’, ‘자본론’, ‘유겐 뒤링의 과학적 혁명론’ 등을 통해 자신들이 추구하는 사회주의가 과학적 이론에 근거한 과학적 사회주의임을 강조했다. 이들은 과학적 사회주의를 “인류 문명이 이뤄놓은 결정체(結晶體)”라고 강조하면서 “과학적 사회주의야말로 사회주의의 본질이며, 특징으로 인류사회가 만들어낸 발전이론의 최신 성과”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그러면서 “종교는 과학이 아니며, 종교에 대한 열광(熱狂)이 사회의 발전을 이룰 수는 없다”고 자본주의의 근본이 종교에서 출발했음을 비판했다. 필자가 베이징(北京) 주재 신문사 특파원으로 일하던 1997년 2월에 세상을 떠난 덩샤오핑의 죽음은 자본주의자인 필자에게 적지 않은 감동을 주었다. 덩샤오핑은 죽기 전 가족들에게 “사고행위가 끝난 사회주의자의 신체는 아무 쓸모가 없으니 태워서 바다에 뿌리고 어떤 기념관도 짓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평생 과학적 사회주의와 유물론(唯物論)을 추구해온 덩샤오핑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는 베이징 서쪽 바바오산(八寶山) 화장터에서 화장돼 비행기에 실려 동중국해에 뿌려졌고, 그의 유언에 따라 중국 어디에도 그의 기념관은 건립되지 않았다. 중국공산당원들이 “위대한 무산계급 혁명가”로 추앙하는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의 부인 덩잉차오 역시 1992년 7월에 세상을 떠나면서 “평생 동지였던 남편 언라이가 그랬듯이 사고행위가 끝난 사회주의자의 신체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므로 태워서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유언은 실행됐다. 물론 이들과는 달리 1976년 9월에 사망한 마오는 그런 유언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베이징 한복판 천안문 광장 중심부에 있는 마오쩌둥 기념관 지하에 파라핀 처리가 되어 보관돼 하루에 한 번씩 땅위로 끌어올려져 인민들에게 구경당하는 형벌 아닌 형벌을 받고 있다.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로 이른바 우리의 진보좌파 진영과 보수우파 진영이 대립 갈등하는 우리 정치를 지켜보면서 솔직히 당혹스러웠다. 이른바 진보좌파 진영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영국 옥스퍼드대 물리학 명예교수(Emeritus Professor) 웨이드 앨리슨(82)을 ‘돌팔이’라고 비난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보고서를 ‘깡통 보고서’라고 비난하는 지점이 당혹스러웠다. 진보좌파 진영이라면 당연히 과학을 무기로 논전을 전개해야 하고, 보수우파 진영은 종교적이고 전통적인 관념을 바탕으로 논전을 전개할 것으로 보았는데 그런 예상이 완전히 뒤집어져 당혹스러웠다. ‘과학’이라는 용어는 영어의 ‘science’를 일본사람들이 18~19세기에 한자로 ‘科學’이라고 번역해서 중국으로 역수출한 용어다. ‘science’라는 영어의 원래 뜻은 ‘물리학적 세계의 구조와 움직임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케임브리지 사전에 정의돼있다. 한자의 형성과정을 연구해서 만들어진 한나라 허신(許愼)이 남긴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과학의 과(科)라는 글자가 “벼 화(禾)와 말 두(斗)가 결합되어 곡식의 양을 측정한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글자라고 나와 있다. 영어 science를 과학(科學)이라고 번역한 일본산 한자용어가 중국으로 수입되기 전 19세기 중국 지식인들은 science를 ‘싸이선생(賽先生)’이라고 음역해서 사용했다. 기술을 가리키는 테크놀로지(technology)는 ‘터선생(特先生)’이라고 음역했다. 1840년 영국과 청나라가 벌인 아편전쟁에서 청왕조가 패배하고 중국이 서양의 반식민지가 되자 중국 지식인들은 그 이유를 “서양에는 싸이선생과 터선생이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없었다”고 진단했다. 변법자강(變法自强)을 주장한 캉유웨이(康有爲)와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식인과 혁명가들은 “산업혁명을 한 영국과 유럽에는 앞선 과학기술이 있었지만 중국에는 과학기술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 시대를 지나면서 과학기술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고 판단한 덩샤오핑은 1980년 개혁개방을 시작하면서 베이징 시내 한복판에 ‘싸이터(賽特‧사이언스 테크놀로지)’백화점을 만들게 했고, 전국에는 ‘싸이터’ 이름이 붙은 빌딩들이 들어섰다. 과학과 기술이 뒤떨어져 서양 제국주의의 반식민지로 전락한 청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과학이야말로 중세 종교의 세기를 넘어서 인류가 만들어낸 최신의 사고 수단과 분석의 틀이라는 것이 중국공산당 개혁개방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상식이다. 과학을 부정하고 과학자를 비난하는 우리의 진보좌파는 과연 과학을 넘어 어디로 가려고 하는 것일까.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현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 ▷호서대 초빙교수 2023-07-19 06: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