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준 교수
ph410@anu.ac.kr
-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 한국서양중세사학회 회장
- 교수신문 논설위원
- [안상준의 함께꿈] 대통령 "기본기' 키우는 3가지 방법 2022년 3월 9일 대한민국 국민은 검사 출신 국민의힘 후보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당선을 위한 표차는 0.73%포인트에 불과했다. 선거 결과는 현명한 국민의 선택이면서, ‘오만한 정부는 심판당한다.’는 국민의 경고를 내포했다. 거대 야당에 맞선 대통령의 국정 운영 동력이 다소 부족하다고 판단했던지, 국민은 6월 지방선거에서 다시 한번 여당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제 여야가 엇비슷한 힘을 갖고 통합 지향적인 정치를 하리라고 국민은 은근히 기대했다. 하지만 대통령 취임 100일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는 실종 상태다. 대통령의 국정 운영 지지율은 한 달 넘게 20%대에 머물고, 주요 정당이 모두 비상상황에 빠져 있다. 선거에 져서 정권을 내준 제1 야당의 상황은 그렇다고 치자. 선거에 이기고 나서 당 대표의 직무를 정지하고, 기어이 비상상황이라고 우기는 집권당의 행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참으로 희한한 정치 상황이 대의제 민주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다. 제1 야당이 이제 전당대회를 마치고 새 대표체제를 완료함으로써 서서히 정비해 나가려는 가운데, 여당의 비상상황은 갈수록 심각해지는 모양새다. 취임 100일에 맞은 20%대 지지율과 여권의 내홍 모두 진원지는 명백하게 대통령 자신이다.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 대한 평가는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지난 100일 동안 국민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절망감을 줬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생각한다.”(김종인) “어떤 방향으로 나라를 이끌고 가겠다는 국정 목표와 비전이 없다.”(강원택) “결국 ‘반문재인’, ‘반민주당’이 윤석열 대통령과 윤석열 정부의 정체성이요, 가치관인 것 같습니다. 도대체 국정을 어떻게 운영해가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성한용)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정치가, 정치학자, 정치부 기자 세 사람이 지적한 부정적 평가의 핵심은 정치력의 부재로 수렴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으로서 김종인은 “참고 화합할 수 있는 능력”을, 강원택은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려는 윤 대통령의 겸허한 태도”를, 성한용은 2021년 11월 5일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약속한 “국민의 말씀을 경청하는 대통령”을 주문했다. 세 사람의 주문에는 성공한 대통령을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후 단행한 윤 대통령의 대통령실 인사 개편과 일련의 정책 제시를 살펴보면 이런 바람과는 동떨어져 보인다. 여전히 겸허한 태도 혹은 경청하는 자세와는 거리가 있는 대통령의 이미지가 굳어지고 있다. 그러는 와중에 영국 대표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칼럼을 통해 대통령의 국정 운영 능력을 직격했다. “대통령으로서 최소한의 정치적 스킬도 갖추지 못한 아마추어 같다. 기본부터 배우라.” 일국의 대통령에 관한 기사치고 너무나도 직설적이고 공격적이라 국민으로서 수치스럽고 낯뜨겁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대통령실이나 여당의 반응은 잠잠하고, 위의 기사를 다룬 매체는 소수에 불과했다. 이렇게 조용히 넘어가는 언론의 대응이 참으로 의아하다. 만약 일본 기자가 이런 논조로 비판을 했어도 같은 반응을 보였을까? 아니면 애당초 정치 초보 대통령에게 기대한 바가 없기에 어쩔 수 없다는 태도인가? 혹은 워낙 낮은 지지율 때문에 외국 언론의 비판을 귀 기울여 듣고 대응할 여력이 없어서일까? 오만가지 의문이 꼬리를 문다. 여기서 <이코노미스트>의 고향인 영국의 정치 상황을 들여다보자. 윤석열 대통령이 참고할 만한 좋은 자료이기 때문이다. 오는 9월 5일 영국 의회는 새 총리를 선출한다. 그 배경에는 보리스 존슨 총리의 무능이 깔려 있다. ‘파티 게이트’ 사건, 생활비 위기와 세금 인상 같은 요인 외에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국정 운영을 위한 집중력과 아이디어가 부족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존슨의 측근은 그를 “통제 불능의 쇼핑 카트”라고 비난했고, 보수당 의원은 “존슨은 청렴성과 능력, 비전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윤석열 대통령이 배워야 하는 정치의 기본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제1 기본 과제는 정치적 문법 습득과 정치적 역량의 체득이다. 검찰총장이 곧장 대통령이 되었을 때, 많은 국민이 우려했다.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검사가 복잡한 이해관계를 풀어내는 정치가로 변신하고,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까지 보듬는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은 성공적인 변신이라고 평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준석 당 대표와 갈등을 처리하는 방식이 시금석이 되리라고 예상했다. 대선 기간에 윤석열과 이준석은 후보와 당 대표로서 여러 차례 마찰을 빚다가 화해하기를 반복했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는 두 사람은 오직 선거 승리를 위해 불편한 동거를 참아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치 초보 윤석열에게 이준석은 정치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시련의 대상으로 적절한 인물로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윤 대통령에게 이준석은 “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 대표”였다. ‘밉지만 그래도 승리를 위해 헌신한 당 대표를 인정함으로써, 검사의 좁은 안목과 딱딱한 사고를 극복하는 촉매제로 인식하고 승자의 여유를 보여주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지금의 낮은 지지율과 여당의 내홍은 없었으리라 본다. “너그러우면 많은 사람을 얻게 되고, 신의가 있으면 백성이 따르게 되며, …… 공정하면 백성들이 기뻐할 것이다.”(논어 20.1) 둘째로 대통령은 정치가의 진정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스킬을 배워야 한다. 그는 짐짓 소통을 강조한다. 대통령실 이전도 소통을 구실로 관철했고, 출근길에 기자와 나누는 약식 문답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소통의 방식이 선택적이고 일방적인 관점으로 보일 때가 많다. 그래서 그 의도에 의문을 갖게 한다.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이준석 대표와 갈등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대통령은 “다른 정치인들께서 어떤 정치적 발언을 하셨는지 제가 제대로 챙길 기회도 없고”라고 논점 이탈 화법으로 응답을 회피했다. 인사의 난맥상에 대해서 질문받자 “전 정권에 지명된 장관 중에 이렇게 훌륭한 사람 봤냐?”고 반문하며 논점을 뭉그러뜨렸다. 이런 태도에 대해서 “윤 대통령은 인기 없는 정책을 납득시키는 훨씬 어려운 업무를 익히는 건 고사하고, 지지를 받는 정책을 자신의 생각으로 표현하는 기본적인 정치 트릭조차 아직 배우지 못했다”는 <이코노미스트> 기자의 비판은 정곡을 찌른다. 왜 대통령이 되었는지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나섰는지 주체적인 인식이 부족하기에 매사에 대응이 서툴고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셋째로 대통령은 인사가 만사라는 조직 운영의 경험칙을 배워야 한다. 내각의 진용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영남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한 60세 전후의 남자들’로 요약되었다. 한사코 인선의 기준이 실력이었다고 강조했지만, 고 아베 총리의 1기 내각과 비교되며 ‘(소꿉)친구 내각’이라는 언론의 비아냥을 들어야 했고 장관급 내정자가 여럿 낙마함으로써 체면을 구겼다. 정부의 구성을 보면 더욱 실망스럽다. 무엇보다도 여론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특수통 검사와 검찰 식구들을 내각, 대통령실, 권력기관(국정원과 감사원 등)의 요직에 대거 기용하여 검찰공화국의 오명을 자처했다. 자기 휘하에 있던 부하들을 데리고 일국의 대통령으로서 행세하겠다는 그의 식견이 매우 딱하고, 스스로 후보 수락 연설을 통해 밝힌 경청하고 소통하겠다는 자세와 배치하는 행보가 아닐 수 없다. 내각 구성에서 나타난 심한 남녀 불균형은 얼마나 세계적인 추세와 동떨어진 인사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환경부와 중기벤처부 단 두 개 부서에 여성 장관이 기용된 우리의 내각과 달리, 대통령제의 미국과 내각제의 독일 모두 남녀 동수로 내각을 구성하고 있다. 더 나아가 미국과 독일의 여성 국무위원 다수가 실세 장관이라는 점이 놀랍다. 미국의 부통령, 재무장관, 내무장관 및 독일의 외무장관, 내무장관, 국방장관, 교육장관을 여성이 맡고 있다. 창피한 수준의 내각 성비가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되자 대통령은 공석이었던 보건복지부와 교육부 장관에 여성을 기용했다. 하지만 보건복지부 장관 내정자는 인사 검증 과정에서 낙마했고, 교육부 장관 내정자는 인사청문회 없이 임명된 후 갖은 구설수와 정책 오류의 책임을 지고 한 달여 만에 자진하여 사퇴했다. 국정 운영에서 탕평 인사는 국사책에 나오는 역사적 지식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위한 필수적인 요건이다. 대통령이 처음이라 어리둥절할지 모르겠지만, 뛰어난 인재를 모시기 위해 천하에 방을 붙이고 삼고초려를 실천하길 바란다. 정치가 실종된 상황에서 바야흐로 정치평론이 전성시대를 맞고 있다. 온 국민이 정치평론가가 되어 대통령의 미래를 걱정하고 영부인의 행보에 민감하게 관심을 보인다. 자유기고가 김소민의 <한겨레신문> 기고문 “롤모델 김건희…Hal su it da, 나도 박사가 될 수 있다!”는 영부인의 표절 사건이 미칠 사회적 파장을 신랄하면서도 유쾌하게 지적했다. 대통령과 영부인이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국민의 스트레스를 푸는 풍자와 해학의 사회로 가는 모습은 오히려 건강한 사회의 지표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통령의 완강한 태도, 영부인의 모르쇠 전략이 지속될 경우, 정치적·사회적 신뢰의 붕괴와 국격의 추락은 국민에게 씻을 수 없는 부끄러움을 안길 것이다. 대통령이 실수와 오류를 인정하고 사과를 두려워하지 않는 유연한 자세로 국민에게 신뢰와 안심을 주는 모습을 보고 싶다. “충심과 신의를 주로 하고 자기보다 못한 자를 벗하지 말며 잘못이 있으면 고치는 것을 꺼리지 말아야 한다”는 옛 성현의 말을 귀담아듣길 권한다.(논어 9.24)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학과 졸업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2021년 5월부터 한국 대학체제의 개혁 방안을 모색하는 ‘삼각지연구팀’에 참여, <대학법체제정비>(2021)와 <고등교육 패러다임 대전환을 위한 대학정책>(근간) 공저 △교수신문 기획연재 '대학법과 대학의 미래'의 책임편집 2022-08-30 06:00:00
- [안상준의 함께꿈] 반도체 인재양성 … 尹의 '지방대학 시대' 공약 뒤집기? “교육부는 과학기술 인재를 공급하는 역할을 할 때만 의미가 있다. 혁신을 수행하지 않으면 교육부가 개혁 대상이 될 수 있다.” 지난 7일 국무회의에서 반도체 분야 인재 양성 방안을 주문하는 대통령의 발언이다. 다분히 노기가 느껴지는 위협적인 발언에 며칠 뒤 총리는 반도체 관련 학과 정원을 수도권과 지방에서 각기 1만명씩 증원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교육부는 수도권 대학의 학부 정원 총량을 제한하는 수도권정비계획법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고, 다수의 정부 부처(교육부, 기획재정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와 업계, 연구기관 등이 참여하는 ‘반도체 등 첨단 산업 인재 양성 특별팀’을 만들었다. 이르면 내달 초 ‘반도체 등 첨단 산업 인재 양성 지원 방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대통령의 지시에 교육부가 신속하게 대책을 발표하자 반도체 관련 기업은 환영하는 분위기가 역력하지만 교육계와 반도체 전문가들은 고등교육 전반, 반도체를 둘러싼 학문 간 관계, 지역사회에 미칠 부작용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부정적인 반응은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반도체 전문가들은 단기적인 학과 증설의 효과와 한계를 지적한다. 무엇보다 현실적인 제약은 투자 재원이다. 반도체 인재 양성에는 막대한 투자가 따른다. 이는 대학이 감당할 수 없는 규모여서 현재 대학과 반도체 대기업이 취업을 전제로 하는 계약학과를 운영하고 있다. 계약학과 제도 시행에 따라서 삼성전자는 성균관대·연세대·KAIST·포스텍과, SK하이닉스는 고려대·서강대·한양대와 손을 잡고 2023년 입시부터 360명을 선발한다. 대부분 서울 주요 대학에 편중돼 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한정된 정부 예산으로 단기간에 수도권과 비수도권 대학에서 반도체학과 증설이 가능할지 의문이 든다. 실험·실습을 위한 건물이나 토지를 확보해야 함은 물론이고, 기업에 마련된 실험·실습실을 이용할 수 있도록 이동수업 제한 규제를 완화해야 교육적 효과를 높일 수 있다. 일부 전문가는 병역특례 할당 인원 증가 같은 인센티브가 있어야 학부생 정원을 늘릴 수 있다고 제안하기도 한다. 여기에 교수 확보 문제는 더욱 험난하다. 대학에서 강의할 반도체 전문 인력이 충분하지 않고, 그들 대부분은 이미 산업체에 자리를 잡았다. 따라서 이들을 영입하기 위해선 기존 교수들보다 훨씬 더 많은 연봉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국립대든 사립대든 재정 여건이 충분하지 않고, 나아가 대부분 대학이 연공서열식 임금 체제로 파격적인 보상이 쉽지 않은 구조여서 교수 영입에 어려움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반도체 인재 양성의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전문가도 다수 있다. “반도체(계약)학과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는 화학, 물리에서부터 전자, 자료, 기계 등 다양한 전공 능력을 조합하여 종합적인 반도체 기술이 완성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반도체학과가 필요하다면 증원이 아니라 반도체 산업과 관련된 학과(재료공학, 기계공학, 화학과 등)와 협의하여 복수전공, 부전공 등 다양한 형태로 만드는 게 바람직하다. 기존 학과 학생이 졸업학점 외에 반도체를 더 공부하고 싶다면 학·석사 통합 과정을 개설하면 된다. 장차 반도체학과가 확대되면 반도체를 둘러싼 다양한 전공들이 위축될 수 있다는 현실적 우려에서 이와 같은 대안을 제시한다. 같은 맥락에서 “반도체(산업)가 잘되면 반도체학과를 늘리고 배터리(이차전지)가 잘되면 배터리학과를 늘리는 식으로는 지속적인 학과 운영이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곱씹어봐야 한다. 이런 지적은 실제로 산업 현장에서 필요한 인력 수요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채 정치적 요구에 따라 움직이는 관료적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하여 씁쓸하다. 마치 공정라인에서 제품을 찍어내듯 학과를 설치하면 산업인력을 양성할 수 있다는 그릇된 교육관에서 비롯되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현장형·실무형 인재 양성에 치우쳐 원천 기술을 떠받치는 인재 양성은 뒷전으로 밀리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 산업계와 함께 선언한 '2030년까지 종합 반도체 강국 도약'은 석·박사급 고급 인재 양성 프로젝트였다. 궁극적으로 대학은 기업 현장 투입을 위한 엔지니어 육성이 아닌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고급형 인재 양성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둘째, 반도체학과 증설을 빌미로 수도권 대학 정원 동결을 해제하는 조치에 대한 지역 대학의 반응은 결사적이다. 경남 지역 한 대학교수는 “대안 없이 수도권 대학 정원을 늘려준다는 것은 지역 대학 죽이기나 다름없다.”고 일갈한다. 삼성반도체 총괄연구원 출신인 부산 지역 모 국립대 교수는 “수도권 대학의 반도체학과 정원을 늘리면 비수도권 대학 10개가 없어질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전망한다. 지난 23~24일 대구에서 열린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하계세미나에 참석한 총장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이러한 우려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교육부 출입기자단이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수도권 대학 학부 정원 총량 제한 철폐에 대해 비수도권 대학 총장 56명 중 52명(92.9%)이 반대했다. 이러한 반응의 이면에는 윤석열 정부가 내건 국정과제 85번 '이제는 지방 대학 시대' 표어에 기대를 걸었던 총장들의 실망감이 짙게 배어 있다. 윤석열 정부는 모든 인프라가 수도권에 집중되는 구조를 완화하고, 어디에 살든 균등한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는 지방 시대를 약속했다. 또한 지방 대학의 인재 양성과 기업의 지방 이전에 대한 지원 확대 등을 통해 메가시티 (초광역권 중심으로 신산업 생태계를 육성하고 교통 인프라 등을 구축하는 시스템)를 조성하겠다고도 말했다. 물론 이러한 정부 대책의 실현 여부는 불투명하다. 그래도 지역 대학 구성원들은 정부를 믿고 지방 소멸 위기를 막을 수도 있겠다는 일말의 희망을 걸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니 수도권 대학의 반도체학과 정원 증대는 이런 희망에 찬물을 끼얹는 엇박자 정책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의 공약이 그렇게 쉽게 뒤집혀도 되는가? 공약(公約)은 다만 정권을 잡기 위한 미끼일 뿐이며 정권을 잡은 뒤에는 간단하게 폐기할 수 있는 공약(空約)인가? 대통령에게는 야속하게 들릴지도 모를 이런 반문에는 대통령의 왜곡된 교육관에 대한 우려가 담겨 있다. 여러 사람이 지적했듯이, 대통령은 정치 이력이 전혀 없는 검찰총장 출신이다. 검사동일체 원칙 아래 평생을 살아온 대통령에게 상명하복의 질서는 자연스러울지 모르겠다. 예전에는 교육도 상명하복의 질서가 지배했고, 우리 사회 여러 영역이 그런 분위기에 익숙했다. 그러나 우리는 개발도상국 시절을 지나 선진국으로 도약했고, 우리 시민문화는 세계인이 부러워할 정도로 성숙해졌다. 대통령의 지시에 공약도 뒤집고 교육정책, 나아가 국가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정책의 근간이 흔들리는 상황은 다분히 우려된다. 1970년대식 개발독재 교육정책으로 돌리겠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오죽하면 어느 칼럼니스트는 “문교부 시대로 돌아간 교육정책”이라고 비판했을까. 교육은 지극히 정치적인 사안이다. 이해 당사자가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단순하고도 명쾌하게(?) 자기 소신을 밝히는 데 주저함이 없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지대한 문제를 쾌도난마처럼 처리하는 방식에는 엄청난 부작용이 따를 수밖에 없다. 같은 맥락에서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드러낸 인문학에 대한 인식은 상당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인문학이라는 것은 공학이나 자연과학 분야를 공부하며 병행해도 되는 것이며 많은 학생들이 대학 4년과 대학원까지 공부할 필요가 없다.”(2021년 9월 13일, 안동대 학생과 윤석열 후보의 환담) 이는 국정을 책임질 한 나라의 대통령 후보자로서 학문에 대한 이해가 몹시 우려되는 발언으로 보인다. 대통령은 ‘자율과 창의로 만드는 담대한 미래’를 열겠다고 약속했다. 교육에서 자율성은 기본 덕목이고, 창의적 사고는 국민 다수의 행복을 견인할 핵심적인 요소다. 그러나 정작 대통령 자신은 자율과 창의를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는지 돌아보길 바란다. '이제는 지방 대학 시대'라는 멋진 공약은 반드시 구체적인 실행 계획과 함께 이행되어야 한다. 지방 대학은 나름으로 역사적 소명을 갖고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도 지역사회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대학이 사라진 이후 지역사회는 상상만으로도 악몽에 가깝다. 지방 대학 시대를 열기 위한 주요 과제들을 세심하게 검토하는 데에도 적잖은 시간이 걸린다. 정부는 지역 대학에 대한 지자체의 자율성과 책무성을 강화하기 위해 지역 대학에 대한 행정·재정 권한을 중앙정부에서 지자체로 위임한다고 했다. 이는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이에 대한 총장들의 반응이 이를 입증한다. 앞서 말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89명 가운데 45명(50.56%)이 찬성했고, 44명(49.44%)이 반대했다. '대학 정책에 대한 지자체의 전문성 부족'(29명, 65.91%)이 가장 큰 반대 이유였다. 그다음으로는 '지방 토호 세력과 대학이 결탁할 우려'(7명, 15.91%)를 꼽았다.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반도체 기술 인력 양성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력 양성의 과정과 절차를 면밀하게 검토하고 시행함으로써 학문과 산업계의 미래, 그리고 이해 당사자 간 충돌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지혜가 필요하다. 지방 대학 시대에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도 대한민국 국민이다. 새 시대를 여는 정책은 정권 초기의 동력으로 추진해야 한다. 지난 정권의 고등교육 정책에서 핵심은 공공성 강화였다. 하지만, 정권 초기에 대학 입시의 논란에 빠짐으로써 고등교육 정책이 실종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진정한 지방대학 시대를 열어줄 것을 기대하는 바이다.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학과 졸업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 학위 취득 △컬럼비아대 객원교수(2016~2017) △ 한국서양중세사학회 회장 (2020.07~2022.06) △2021년 5월부터 한국 대학 체제의 개혁 방안을 모색하는 ‘삼각지연구팀’에 참여해 <대학법체제정비>(2021)와 <고등교육 패러다임 대전환을 위한 대학정책>(2022) 공저 △교수신문 논설위원, 교수신문 기획연재 '대학법과 대학의 미래' 책임편집 2022-06-28 06:0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