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수 교수
nschoi76@naver.com
- 서정대학교 교수
- (전) YTn 대표이사 사장
- [최남수의 열린경제] 사회적 책임 넘어 신냉전 시대 기업의 새로운 도전 .. 정치적 책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주목을 받아온 미국 대학원이 있다. 주인공은 예일대 경영대학원. 이 대학원의 제프리 소넨펠드 교수는 러시아에 진출해있는 기업들이 전쟁 개시 후 보인 행태에 따라 A~F의 평가 등급을 매기고 이를 공개하고 있다. A등급은 러시아 내 사업을 총체적으로 중단했거나 철수한 기업으로 1월 28일 현재 347개에 이르고 있다. 스타벅스, 블랙록, 포드, IBM, 넷플릭스, 나이키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B등급은 일시적으로 일부 또는 전체 영업을 멈춘 상태에서 나중에 러시아로 복귀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488개 기업이다. 아마존, 애플, 아우디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어 C등급은 일부 중요한 사업은 축소했지만 다른 사업은 여전히 지속하고 있는 167개 기업이다. 신규 투자 등만 중단하고 실질적으로 사업을 계속하고 있는 162개 기업은 D등급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가장 낮은 F등급은 전쟁에 아랑곳하지 않고 러시아에서 영업을 계속하고 있는 알리바바와 텐센트 등 225개 기업에 주어졌다. 예일대 경영대학원이 이 등급 명단을 수시로 업데이트해 공표하는 것은 기업들이 러시아 사업을 그만두거나 줄이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에서 비즈니스를 해온 1389개 기업 가운데 1000개가 넘는 기업이 사업을 축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버드 로스쿨도 예일대와 비슷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 학교의 연구진은 러시아에서 자회사를 운영해온 75개 비금융 유럽기업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다. 눈길을 끄는 점은 이들 75개 기업의 평균 ESG 점수가 100점 만점에 78점으로 다른 기업의 평균치 64점보다 크게 높다는 것이다. 특히 S(사회)와 인권 점수는 각각 81점과 84점으로 다른 기업의 64점과 67점을 많이 웃돌았다. 문제는 이렇게 ESG와 인권 평가가 좋은 기업들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무력 침공한 지 일정 시점이 지난 후에도 러시아를 비판하는 발표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또 조사 당시(2022년 3월 15일) 기준으로 영업을 중단하겠다고 밝힌 기업도 53%에 불과했다. 하버드 로스쿨은 이들 기업의 이런 행태 탓에 ESG에 대한 회의론이 나오고 있다고 비판했다. 어찌 됐건 러시아 내 사업 영위에 대한 비판 여론이 고조되면서 많은 기업이 러시아에서 아예 몸을 빼거나 일시적으로 영업을 중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일본 의류기업인 유니클로의 경우 처음에는 러시아인들도 옷이 필요하다며 러시아 내 49개 점포의 문을 계속 열었지만 여론이 심각하게 돌아가자 마침내 가게 문을 닫았다. 네슬레도 상황은 마찬가지. 영업을 계속하다가 소비자들이 분노를 표시하고 해킹 사건까지 발생하자 핵심 품목을 제외한 다른 제품의 판매를 접었다. 이처럼 러시아 내 사업에 쏠리는 곱지 않은 시선은 무엇보다 기업들에 ESG 경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ESG는 윤리적인 경영을 포함하고 있는데 불법무도한 침략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에서 돈벌이를 하는 것은 이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 사업을 그만두라는 요구가 무리한 주장이라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오랜 기간 러시아에서 일궈놓은 사업 기반을 정치·외교적인 이유로 하루아침에 포기하라고 하는 것은 경제에 대한 정치의 지나친 개입이라는 지적이다. 특히 현실적으로 기업이 부담해야 하는 손실 규모가 만만치 않다. 예컨대 러시아 정부가 철수 기업의 자산을 압류하는 방안을 추진함에 따라 메르세데스 벤츠는 22억 달러의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형평성 문제도 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있고 인권운동가들을 처형하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서구의 기업들이 수십 년 동안 영업을 해온 것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소비자와 직원들이 기업이 더욱 윤리적 행동을 해줄 것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은 이제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이슈에 대해 명확한 견해를 밝혀야 한다는 요청에 빈번하게 직면하고 있다. 퍼블릭 어페어스 카운슬의 조사 결과를 보면 이해관계자로부터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입장 표명을 요구받는 미국 기업의 비율은 2016년에만 해도 60% 정도였으나 2021년에는 90%로 크게 상승했다. 특히 직원들의 주문이 강한 상태이다. 지난 2018년 미 국방부가 인공지능을 이용해 드론 타격률을 높이는 방안을 추진하고 여기에 구글이 참여할 수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구글 직원들이 강하게 반발한 게 대표적 사례이다. 당시 구글은 직원들의 희망을 수용해 인공지능을 무기나 부당한 감시활동에 사용하지 않겠다는 지침을 마련했다. 이런 움직임들은 기업이 사회적 책임활동을 넘어서 이제는 ’정치적 책임 활동(CPR:Corporate Political Responsibility)’도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해석되고 있다. CPR는 이제 기업들이 새롭게 적응해야 하는 현실이 되고 있다. 정치나 외교 등 경제외적인 영역에서 비윤리적인 일이 일어나면 이에 분명하게 반대하고 행동을 취하는 게 ESG의 가치에 부합한다는 시각이다. 기업으로서는 쏟아지는 요구를 어떻게 모두 만족시킬 수 있겠냐며 불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과거에 흑인차별을 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사업을 하는 기업을 비판하는 여론이 세계적으로 확산됐던 적이 있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때보다 더욱 자주 그리고 강력하게 기업이 사회의 다양한 이슈에 대해 태도를 밝히라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한국 기업에는 ‘남의 나라’ 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서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국내 기업이 영업을 중단한 것은 한국 기업도 이미 CPR의 영향권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두 기업에 대해 예일대가 매긴 등급은 B이다. 한발 더 나아가 미국 정부는 우리 정부와의 고위급 회담 등을 통해 일부 한국 기업의 러시아 잔류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는 의사를 전해온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더구나 지금은 미국과 중국 간의 신냉전 시대가 본격화되고 있는 시점이다. 첨단기술 ‘전선’에서 미국이 중국을 봉쇄하려는 전략을 추진함에 따라 한국 기업도 점점 여기에 발을 맞추는 게 불가피해지고 있다. 경제와 무역의 정치화 추세 속에서 정치·외교적인 성격의 선택을 요구받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인권 등과 관련해 특정 국가의 비도덕적, 비윤리적 행태가 문제시되는 상황은 더욱 그렇다. IBM은 이런 이슈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를 결정할 때 다섯 가지의 ‘이정표 질문’을 던져본다고 한다. 이 이슈가 비즈니스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가? 그동안 이런 이슈에 개입한 적이 있는가? 이해관계자들이 무엇이라고 얘기하는가? 경쟁사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개입함으로써 의미 있는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어찌 보면 좀 나이브하고 원론적인 접근법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 이슈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만을 근거로 해서 대응 방법을 찾기엔 복잡다단한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PR컨설팅 회사인 에델만이 지난해 11월 28개국에서 3만20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3 신뢰 지표’ 조사는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와 미국, 일본 등 19개국의 응답자 절반 이상이 기업이 기후변화, 경제적 불평등, 건강 등 논쟁적인 사회적 이슈에 대응할 때 정치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고 대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와 정치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면서 기업이 어려움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기업으로선 곤혹스런 상황이다. 환경과 사람을 돌보는 투명한 ESG경영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신냉전 등 지정학적 긴장으로 인해 정치적 책임에 대한 압박도 강화되고 있어서다. 기업으로선 뾰족한 대응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지만, 크게 보아 두 가지로 대응하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 먼저 인권 침해 등 ESG에 어긋나는 사안에 대해서는 ESG 가치를 지키는 방향을 선택하는 게 맞을 것이다. 다음으로 중국과의 패권 경쟁 구도 속에서 미국 편에 서야 하는 것 같은 이슈에 대해서는 ‘정경분리’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전략을 쓰는 게 좋을 듯싶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기업을 측면지원해 곤경을 헤쳐나갈 수 있는 외교적 해법 마련에 나서는 게 중요하다. CPR가 새로운 비즈니스 환경으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는 만큼 종전과는 차원이 다른 민관(民官)의 새로운 시선과 지혜, 그리고 긴밀한 공조가 필요한 때이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2023-02-08 17:42:39
- [최남수의 열린경제] 계묘년 '상저하고' 한국경제 … 지속 가능한 성장 날개를 펴라 2019년 11월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이 시작된 이래 보건과 경제 두 측면에서 ‘쌍둥이 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보건 위기는 백신 접종 확대 등으로 어느 정도 진정 국면으로 들어섰다. 경제 위기는 그 양상이 바뀌면서 아직 끝이 보이지 않고 있다. 그동안 각국이 겪어온 경제난은 코로나 확산에 따른 봉쇄 조치로 수요과 공급이 동시에 얼어붙은 탓이다. 이게 1차 위기의 원인이었고, 대책은 중앙은행과 정부의 곳간에서 대규모 자금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팬데믹으로 치러야 할 막대한 비용을 시기적으로 분산시키는 방법이기도 했다. 문제는 경제에는 공짜가 없다는 데 있다. 풀린 뭉칫돈이 지금에 와서는 2차 위기의 불씨가 되고 있다. 많이 풀린 돈이 물가를 자극하고 있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공급망 충격 등이 가세하면서 물가의 고삐가 풀려버렸다. 결국 미국 FRB 등 각국 중앙은행이 금리 인상 강행군에 나서면서 통화환수발(發) 2차 위기가 본격화하고 있다. 그래도 1차 위기에 비해서는 관리 가능한 수준이라고 본다. 정책으로 시작된 2차 위기의 매듭은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정책이 풀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같은 궤적에 있다. 정부가 최근에 내놓은 ‘2023년 경제정책 방향’을 보면 그 고민의 흔적이 뚜렷하다. 정부는 올 상반기를 고비로 보고 있다. 물가가 올 초까지는 높은 수준을 이어갈 것이지만 원자재 가격 하락과 수요 둔화 등에 따라 상승 압력이 점차 둔화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2023년 소비자물가 상승률 예상치는 지난해(5.1%)보다 낮아진 3.5%다. 성장률은 하반기로 갈수록 세계 경제 개선 등에 힘입어 점차 나아질 것이라는 게 정부 전망이다. 그래도 연간 성장률은 올해 2.5%에서 1.6%로 낮아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상저하고(上低下高)가 될 것이란 얘기다. 2023년 경제정책 방향은 이런 경제기상도에 대한 처방을 담고 있다. 한마디로 물가 안정화 노력을 계속하면서 성장을 부추기기 위한 노력을 가속화하겠다는 것이다. 역대 최대 수준인 총 50조원 규모의 시설 투자 자금을 지원하는 것을 비롯해 중소기업과 수출 지원 등을 위해 정책금융을 45조원 확대하고 반도체, 해외 건설, 디지털 등 5대 분야를 중심으로 수출 경쟁력 제고 방안을 추진하겠다는 게 경기 부양 대책의 골격이다. 여기에 모빌리티, 에너지, 금융 등 7개 테마별로 핵심 규제를 혁신해 나가겠다는 게 경제의 활력을 키울 방안으로 자리 잡고 있다. 2023년 경제 운용 청사진에서 눈에 띄는 점은 별도의 ‘정책 바구니’로 ‘신성장 4.0 전략’이 추가됐다는 점이다. 성장 잠재력이 취약해지는 시점에서 한국 경제의 재도약을 위한 ‘총론의 방향타’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신성장 4.0 전략은 크게 세 가지 틀을 갖추고 있다. 첫째는 에너지와 의료 등 미래 기술을 선제적으로 확보해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충하고, 둘째는 디지털 기술혁신을 일상의 변화로 연결하며, 셋째는 반도체와 배터리 등 신산업 전략을 통해 초격차를 창출하겠다는 것이다. 신성장 4.0 전략이 궁극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국민소득 5만 달러 달성과 초일류 국가로의 도약이다. 국가의 미래 비전으로 적절하다는 판단이다. 하지만 일부 아쉬운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중요한 점은 한국 경제가 이미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올라섰는데도 여전히 양(量) 위주의 사고가 지배적이고 이를 뒷받침할 질(質)적 고려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속 가능한 발전에 대한 체계적인 추진 전략이 보이지를 않는다. 현행 지속가능발전법은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미래 세대가 사용할 경제·사회·환경 등의 자원을 낭비하거나 여건을 저하시키지 않고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을 지속 가능성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에 기초해 ‘경제의 성장, 사회의 안정과 통합 및 환경의 보전이 균형을 이루는 발전’이 바로 지속 가능 발전이다. 이와 관련해 각국이 주력하고 있는 영역은 바로 녹색성장이다. 같은 성장을 하더라도 이제는 환경을 훼손하지 않고 회복시키는 그린 성장을 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럽연합(EU)은 ‘호라이즌(Horizon) 유럽’이라는 성장전략에서 5개 과제를 선정했는데 이 중 4개(기후 회복력, 바다와 담수 복원, 기후 중립 도시 100개, 토양과 생명 관리)가 그린 성장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독일도 ‘하이테크 전략 2025’의 3대 영역에 지속 가능성을 포함시켰고 부속 과제로 산업의 탄소중립화, 플라스틱 저감, 지속 가능 순환경제, 생물다양성 확보 등을 선정해 놓고 있다. 전기차 보조금 문제로 논란을 빚고 있는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도 내용을 들여다보면 에너지 안보 및 기후변화 대응 지출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물론 2023년 경제정책 방향과 신성장 전략에도 산업, 수송 등 부문별 탄소 감축 목표 설정, 탄소 포집 같은 핵심 기술 개발, 에너지 절약, 탄소중립 도시 10개 조성 등 각론이 들어 있긴 하다. 하지만 탄소중립 산업을 만드는 데 전력투구하면서 이를 새로운 지속 가능 성장의 동력으로 삼고 이를 통해 양질의 일자리도 창출하겠다는 총론적 의지가 잘 읽히지를 않는다. 특히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40%(2018년 대비) 감축해야 하는 목표를 어떻게 달성하고 그 과정에서 한국 경제의 녹색 도약을 어떻게 실현할지에 대한 구체적 로드맵이 빠져 있다. 이 대목에서 컨설팅 기업인 딜로이트의 진단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금세기 중반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해 세계 경제를 전환하는 것은 경제적 가치를 창출할 전례 없는 기회다. 탈탄소 사회에서 새로운 기회를 파악하고 경제구조 전환이 모두에게 긍정적 영향을 발휘하게 하면 2050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일자리가 3억개 이상 추가로 만들어질 수 있다.” 지속 가능한 성장과 그린 성장이 산발적인 각론에서 성장전략의 중심축으로 격상돼야 하는 이유다. 같은 관점에서 환경과 사람을 돌보는 투명하고 윤리적인 기업 경영을 강조하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정책의 비중도 지금보다 확대될 필요가 있다. 성장 전략과 관련해 또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점은 하향 추세를 지속하고 있는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가시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에 발표된 정책에서도 이를 의식한 대책이 포함돼 있긴 하다. 투자 활성화 방안, 생산성 향상 노력, 여성과 고령층의 경제활동 참여율 제고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각론으로는 부족하다. 이대로라면 0% 또는 마이너스로 떨어질지 모를 잠재성장률을 적정 수준으로 상향 조정하는 일은 국가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위한 중차대한 과제다. 그런 만큼 잠재성장률 2%대를 마지노선으로 지키겠다는 목표를 공론화하고 이를 위한 종합 대책을 세워 일관성 있게 추진해야 한다. 성장 전략의 ‘상단 메뉴’에 항상 들어가야 하는 숙제다. 이 밖에 정부는 ‘신성장 4.0’을 간판으로 내세운 만큼 낙수효과를 통해 성장의 과실이 경제 전반에 퍼져나갈 수 있도록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 성장을 유도해야 하며, 경제의 덩치가 커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낮은 수준인 국민의 행복도를 올리는 실효성 있는 대책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2023년은 위기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성장의 물꼬를 열어가야 하는 해다. 이 때문에 당장은 눈앞의 단기 대책에 더 많은 무게중심이 쏠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정부는 긴 호흡으로 국가의 중장기 가치를 제고하고 한국 경제의 질적 기반을 다지는 일에도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게 명실상부하게 초일류 국가로 가는 길이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2023-01-03 18:45:15
- [최남수의 열린경제] 탈(脫)중국 아닌 감(減)중국 전략 짜자 애플 최고경영자 팀 쿡. 그는 2019년 이래 중국에 잘 가지 않는다고 한다. 팀 쿡은 지난 5월 미국 실리콘밸리에 있는 쿠퍼티노 애플 본사에서 팜민찐 베트남 총리와 만났다. 애플은 곧 베트남에서 맥북 노트북을 생산할 예정이다. 더 이코노미스트 보도에 따르면 내년에는 애플의 첫 인도 매장이 문을 열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앞서 지난 9월에는 인도에서 신형 모델인 아이폰14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중국 일변도로 공급망을 관리해온 애플이 미국과 중국의 긴장이 고조되는 국면에서 전략적으로 베트남과 인도를 중시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하지만 애플의 고민은 깊다. 일부 제품의 조립기지를 중국 밖으로 옮기고 있지만 중국이 다른 나라가 대체할 수 없는 강점을 가지고 있어서다. 팀 쿡은 “중국에는 숙련된 근로자와 정교한 수준의 로봇, 그리고 컴퓨터 과학 등이 있는데 이를 다른 곳에서 찾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실토하고 있다. 최근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놓고 가장 자주 언급되는 어휘 중 하나는 디커플링이나 탈중국이다. 과거 냉전 국면 때 미국과 옛 소련이 그랬던 것처럼 미·중 양국이 각자 진영으로 ‘헤쳐 모여’ 하면서 서로 등을 돌릴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실제는 어떨까? 두 나라 간 무역 동향을 보면 수출입이 축소되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먼저 전체 교역. 2017년에만 해도 중국은 미국의 1위 통상국가로 교역 비중이 16.4%에 달했다. 올 들어 9월까지 이 수치는 13.2%로 낮아졌고 중국의 위상도 3위로 떨어졌다. 이를 수출입으로 나눠서 보자. 같은 기간 동안 미국의 대중 수입 비중은 21.6%에서 17.0%로 하락했다. 대중 수출도 8.4%에서 7.0%로 줄어들었다. 문제는 이를 미국과 중국의 디커플링 움직임으로 볼 수 있는냐다. 답은 그리 선명하지 않다. 미국의 대중 수입 추이를 들여다보자. 사상 최대치였던 때는 2018년으로 5385억 달러 규모였다. 이게 지난해에는 5049억 달러로 감소했다. 대중 수입이 하락세로 돌아선 것은 트럼프 행정부 당시부터 상당수 중국 제품에 고율의 보복관세가 부과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중국 수입의존도는 여전히 만만치 않은 수준이다. 관세 부과 대상이 아닌 중국 제품들이 물밀 듯이 미국으로 들어가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이들 품목의 수입은 무역 전쟁 이전보다 50% 이상 늘어나 전체 대중 수입품 중 47%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대표적인 제품은 노트북, 컴퓨터 모니터, 전화기, 비디오게임 콘솔, 장난감이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재택근무 증가로 이들 상품에 대한 수요가 많이 늘어난 것이 수입 급증의 주요인이다. 노트북과 컴퓨터 모니터 같은 제품은 전체 수입품 중 중국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92%에 이른다. 이렇게 보면 디커플링 논의에 대한 진단이 어느 정도 가능해진다. 목소리는 크지만 경제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이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해 국제무역체제에 편입된 게 벌써 20여 년이다. 긴 세월 동안 미·중 양국 경제는 서로 긴밀하게 얽혀왔다. 상호 교역이 거의 없었던 미·소 냉전과 유사한 신냉전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시나리오다. 자신은 멀쩡한 채 상대에게만 상처를 입히는 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치러야 할 비용이 크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세계경제가 미·중 상호 대립 체제로 재편되면 전 세계 국가들의 국내총생산(GDP)이 매년 1.5% 감소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 외교 전문 매체인 포린폴리시는 “경제적 디커플링은 무리한 주문”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미국 상공회의소를 비롯한 재계도 디커플링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 미국 기업인은 “중국에 들어가서 13년을 보냈는데 지금에 와서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디커플링은 허장성세(虛張聲勢)인가? 실제보다 부풀려 얘기되고 있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거친 공세는 기세가 등등하지만 ‘전면적인 대중 거리두기’를 위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추격 속도에 제동을 걸기 위해 중국의 급소인 첨단 기술을 봉쇄하려는 ‘부분적인 기술 디커플링’ 전략이라는 시각이다. 화웨이 등 중국 IT업체에 대한 제재, 중국의 반도체 생산 및 개발 능력을 제한하려는 반도체 지원법, 글로벌 배터리 공급망 안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억제하려는 인플레이션 축소법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취해진 조치들이다. 미·중 간 긴장이 높아지면서 우리나라에서도 탈중국 얘기가 종종 나오고 있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올해 10개월 동안 대중국 수출은 1629억 달러로 전체 수출 중 25.3%를 차지했다. 대중 수입 비중도 22.5%를 기록했다. 교역의 4분의 1 가까이가 중국하고 이뤄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코로나19로 강력한 봉쇄 조치를 취하자 대중 수출이 급감하면서 무역수지가 적자 행진을 계속하는 등 홍역을 치르고 있다. 이는 우리에게 필요한 전략이 지나치게 높은 대중 의존도를 낮추는 ‘감(減)중국’이지 디커플링이나 탈중국은 아니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물론 부분적으로 중국 내 생산 공장을 베트남 등으로 옮기는 ‘중국+1’ 전략과 함께 미국이 추진하는 ‘기술동맹’에 참여하는 일은 불가피할 것이다. 하지만 미국도 나서지 않고 있는 전면적 디커플링이나 탈중국은 우리의 선택지가 될 수 없다. ‘감 중국’에 집중하는 게 바람직하다. 이와 관련해 미국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는 한국 기업에 대해 대중 중간재 의존도를 축소하고 수출국과 투자 지역을 중국 외 국가로 다변화하며 국내 투자를 확대할 것 등을 권고했다. ‘감 중국’ 전략의 핵심이다. 여기에서 짚어볼 점은 대중 의존도를 어느 선까지 낮추는 게 적절할까 하는 것이다. 현재 GDP 기준으로 중국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8% 선이다. 필자는 글로벌 경제에서 차지하는 중국 경제의 몫이 의존도의 적정선이라고 본다. 현재 수출 의존도 25%는 과도하다.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다른 수출 시장의 저변을 넓히는 등 적극적인 대응으로 이를 하향 조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도 대중 수출의 구성 품목에 큰 변화를 줘야 한다. 중국의 수입 대체 전략으로 중간재 수출 전망이 밝지 않은 만큼 성장 가능성이 큰 내수 소비재 시장을 ‘대체 시장’으로 보고 파고들어야 한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샌드위치’ 처지가 된 한국 경제의 안정적인 생존 및 성장 전략이 긴요하다. 다양한 대책이 실행돼야 하겠지만 핵심은 10위권 경제 강국으로서 한국이 미·중 양국이 필요로 하는 기술과 상품, 그리고 일자리 등을 제공하는 경협 파트너가 되는 길일 것이다. 어느 한쪽에 과도하게 기울지 않고 균형을 잡아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고슴도치’ 같은 존재가 돼야 하며 최대의 무기는 초격차 기술 강국으로서 위상을 확보하는 것이다.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으로선 안미경중(安美經中)은 물론 경미경중(經美經中)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미·중 대결 구도를 잘 헤쳐나가는 방법은 경제를 잘하는 길밖에 없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2022-12-13 06:00:00
- [최남수의 열린경제] 美 민주당과 공화당의 ESG 이념전쟁 지난 2000년부터 ESG의 실행력에 탄력이 붙은 것은 미국의 가세(加勢) 덕분이다. 그동안 EU(유럽연합)가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를 앞장서 추진해왔지만, 상황은 순탄하지 않았다. 미국 공화당의 트럼프 행정부가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탈퇴하고 반(反) ESG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당의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ESG에 순풍이 불기 시작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파리기후변화협약에 재가입한 데 이어 ESG 관련 정책들에 드라이브를 걸어왔다. 그중 하나가 현재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추진하고 있는 기후공시 의무화 방안이다. 이 정책이 확정되면 미국 상장사들은 탄소 배출량 등을 시장에 공시해야 한다. 최근 들어 미국에서는 ESG가 ‘이념전쟁’으로 번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공화당 측 인사들이 ESG에 대한 공격을 본격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화당은 그동안 11월 중간선거에서 하원 의석의 과반을 차지하면 ESG 투자를 규제하는 법안을 만들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중간선거 결과 이 말이 현실이 되면서 앞으로 하원에서 공화당의 반 ESG 입법 공세가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움직임은 기본적으로 공화당 측이 기후변화의 과학적 근거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는 데다 ESG가 공화당의 돈줄인 거대 석유기업 등 화석연료 기업을 겨냥하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ESG가 상장사에 과격한 환경 및 사회 어젠다를 강요하고 있다"며 공화당 의원들이 ESG 원칙의 적용을 중단시킬 것을 촉구한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의 발언은 이런 의도를 잘 드러내고 있다. 공화당 인사들이 주지사를 맡은 주 정부들은 한술 더 떠 기후변화 대응과 ESG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금융기관들을 제재하기 위해 44개의 법안을 성안한 상태이다. 주별 움직임을 보면, 차기 대선에서 공화당 내 강력한 후보군에 속해 있는 론 드샌티스 주지사가 연임에 성공한 플로리다주가 선두에 서고 있다. 플로리다주는 지난 8월 은퇴연금의 운용과 관련해 결의안을 채택했는데 ESG 같은 비재무적이거나 정치적 요인을 고려하지 말고 수익률 극대화를 추구하라는 요구를 담았다. 텍사스주는 지난해 주의 투자 및 은퇴 펀드들이 총기 제조와 화석연료 기업들을 ‘보이콧’하는 블랙록과 유럽의 금융 그룹 등 금융기관들과 거래를 중단하도록 했다. 또 주 연금 펀드들이 보유한 블랙록과 UBS 등 기업의 주식을 팔겠다는 방침도 발표했다. 루이지애나주는 최근 블랙록에 투자자금을 연말까지 모두 찾아가겠다고 통보했다. 블랙록에서 빠져나갈 자금은 7억9400만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같은 제재 대열에는 웨스트 버지니아주, 켄터키주 등이 참여하고 있다. 공화당 소속 주 정부들의 제재로 금융기관들이 입게 될 피해는 어느 정도나 될까? 영향이 그리 크지는 않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블랙록은 현재 플로리다주의 은퇴연금 자금 72억 달러를 운용하고 있다. 연간 수수료 수입은 720만 달러 수준이다. 이는 194억 달러에 이르는 연간 수익에 비하면 아주 작은 규모이다. 게다가 시 정부 채권 시장에서 문제가 생기고 있다. 주요 금융기관을 이 시장에서 배제함으로써 시장 자체가 덜 경쟁적으로 바뀌어 텍사스주 당국이 부담해야 할 이자율이 상승하고 있다. 공화당의 반 ESG 공세가 이어지자 민주당은 ESG에 대한 지원사격으로 맞서고 있다. 뉴욕주, 매사추세츠주, 캘리포니아주와 11개 다른 주의 민주당 소속 재무 담당 관료들은 블랙록을 지지하는 서한을 내놓았다. 이들은 이 서한에서 “기후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투자자를 벌주려는 주 정부들은 향후 성장 기회를 잃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민주당 소속 주들은 거꾸로 이들 금융기관에 ESG 투자를 더욱 확대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이렇듯 미국에서 ESG가 이념 논쟁으로 번지고 있는 것은 향후 ESG의 진로와 관련해 우려스러운 점이 있다. 중간선거에서 하원의 과반을 차지한 공화당이 반 ESG 입법으로 ESG에 제동을 걸려고 할 것으로 보여 공화당과 민주당 간에 ESG 이념전쟁이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미국은 물론 글로벌 무대에서 기후변화 대응과 ESG경영 확산에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의제는 인류의 생존과 자본주의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제기된 이슈여서 정쟁(政爭)으로 그 대세를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먼저 기후변화의 경우 기상재난의 빈발로 위기의식이 높아지면서 산업화 이전에 대비한 지구 기온의 상승 폭을 1.5℃ 이내로 제한하자는 파리기후변화협약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각국의 소극적 대응으로 사실상 달성이 어려워졌다는 비관론 속에 더욱 강도 높은 탄소 배출 감축 노력이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들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다. 지구온난화를 억제하기 위해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45%(2010년 대비) 줄이고,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이뤄야 하는 것은 단지 ‘말의 성찬’이 아니라 ‘살 만한 지구’를 후손에게 물려줘야 하는 인류에게 주어진 중대한 숙제이다. 환경과 사람을 돌보는 윤리적이고 투명한 경영을 지향하는 ESG는 어떤가? ESG는 이제 기업경영의 본류로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글로벌 차원에서는 지속 가능성 및 기후공시, 공급망에 대한 환경 및 인권 실사 등을 중심으로 ESG를 제도화하려는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투자, 금융, 신용평가, ESG 등급, 공급체인, 소비자 등 다양한 부문에서도 ESG의 가치가 뿌리를 내리면서 새로운 경제질서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ESG를 주도해온 투자의 흐름을 보면 ESG의 역주행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얘기에 가깝다. 투자자들은 ESG를 리스크와 기회의 두 측면에서 보고 있다. 환경을 망치고 이해관계자를 외면하며 비윤리적인 행위를 하는 경영은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다. 반대로 ESG 경영을 잘하는 기업은 새로운 성장 기회를 통해 장기적 기업가치를 키울 수 있는 잠재력이 크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 만큼 지속가능 우량기업에 투자자금이 계속 몰리고 있다. 모닝스타는 지난 2018년 이후 이들 자금 규모가 세 배나 늘어나 2조4700억 달러에 이르고 있다고 집계했다. UBS그룹의 콜름 켈러허 회장은 “여러 가지 도전적 과제가 있지만, 투자자들이 ESG에 초점을 맞추는 추세는 중단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 이유로 X세대와 MZ세대 등 투자자들이 ESG를 원하고 있기 때문임을 들었다. 중요한 의미를 지닌 발언이다. 미국 공화당이 ESG에 적극적인 금융기관들에 아무리 괘씸죄를 적용해 다양한 제재를 가해도 이들의 고객인 개인 투자자들이 ESG를 원하고 있는 만큼 정치가 경제를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더구나 기업도 ESG 대세론에 공감하고 있다. S&P500 기업의 거의 대부분(92%)이 ESG보고서를 공시하고 있다. 재무를 담당하는 CFO들은 ESG에 대한 공세로 SEC의 기후공시 의무화 방안이 중도에 좌초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또 한 가지. 주주만 우대하는 자본주의를 그만두고 이해관계자 모두를 존중하는 기업 경영을 하자는 이해관계자자본주의는 시대적 의제가 됐다. 지난 2019년 8월 미국 재계가 선제적으로 이 이슈를 공론화시킨 것은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양극화 심화 등 ‘곪은 상처’를 해소하기 위해 이제는 자본주의를 개혁할 때가 됐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한국 재계가 지난 5월 이해관계자에 대한 신뢰와 존중을 강조하는 기업선언문을 내놓은 것도 이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어쨌든 미국 중간선거 결과는 앞으로 ESG의 진로에 적지 않은 진통이 있을 것임을 예고해주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방향이 올바른 일이어도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는 게 역사가 보여주는 사실이다. ESG는 고탄소 경제에서 저탄소 경제로, 환경훼손에서 환경보호로, 그리고 주주자본주의에서 이해관계자자본주의로 가는 경제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말한다. 토머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는 것은 직선의 과정이 아니라고 설파했다. 견고한 기존 질서를 바꿔 가는 여정(旅程)은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는 울퉁불퉁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환경과 사람을 돌보는 ESG 경영은 이제 기업을 넘어서 인류 생존과 사회·경제의 통합력 유지를 위한 필수조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동안 다져져 온 이 공감대는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자본주의 혁신의 새로운 나침반으로서 ESG의 역할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2022-11-15 08:43:13
- [최남수의 열린경제] 중국몽 맞선 '미국몽' 파상공세 …제조업, 발상을 전환하자 ‘중국몽(中國夢)’에 맞서는 ‘미국몽(美國夢)’의 공세가 파상적이다. 바이든 행정부와 미 의회가 미국의 산업 리더십을 되찾기 위해 내놓고 있는 조치는 법과 행정조치, 두 가닥으로 진행되고 있다. 먼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반도체 및 과학법, 인프라투자법, 미국혁신경쟁법 등이 큰 얼개의 ‘아메리칸 퍼스트 2.0’의 판을 구축하고 있다. 측면에서는 바이 아메리칸, 생명공학 및 바이오 제조 이니셔티브, 외국인 투자 규제 강화 등 행정명령이 미국 경제의 진군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들 조치로 미국 주요 첨단산업에는 앞으로 대규모 자금이 투입된다. 지난해 11월 인프라법이 미 의회에서 통과됨에 따라 탄소 포집 같은 신 청정에너지 기술에 200억 달러 이상이, 그리고 전기자동차 충전소에 80억 달러가 투자될 예정이다. 반도체 및 과학법은 반도체 시설 건축과 연구, 인력 개발 등에 520억 달러를 지원하는 방안을 비롯해 인공지능 등 첨단산업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2800억 달러의 연방 재정을 동원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국 자동차를 세액공제 대상에서 제외해 큰 논란이 일고 있는 인플레 감축법은 에너지와 기후변화 대응 부문에 3860억 달러를 지출하도록 하고 있다. 지금까지 얘기한 일련의 조치들은 미국 제조업의 실지(失地)를 회복하겠다는 ‘미국몽’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사가 지난 9월 9일 오하이오주의 리킹 카운티에서 열렸다. 인텔의 새 공장 착공식이 열리는 자리였다. 여기에는 바이든 대통령이 참석했다. 이날 바이든은 미국 정부가 양자컴퓨터에서 생명공학까지 모든 분야에 투자하겠다는 청사진을 밝혔다. “미래의 산업에서 세계를 리드하겠다”는 야심 찬 출사표를 던졌다. 미국이 신(新)산업정책의 깃발을 본격적으로 든 순간이었다. 그동안 미국에서는 산업정책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거나 이를 거부하는 태도가 주류를 이뤄왔다. 정책이 경제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에 대한 견제심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제는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다. 중국이 제조 2025, 일대일로 등 대내외를 겨냥한 확장정책을 펴면서 미국의 턱밑까지 추격해왔기 때문이다. 정부가 앞장서는 국가자본주의의 힘에 기댄 중국의 진격이 위협적인 만큼 미국도 정부가 팔을 걷어붙이고 제조업 리더십을 부활시키겠다는 맞대응 전략을 펴고 있는 것이다. 미·중 산업정책의 격돌이다. 미국 정부의 이 같은 정책 선회는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다. 오래된 깊은 논의 속에서 정책의 판이 움직여온 결과이다. 이 변화의 과정을 들여다봐야 앞으로 미국 산업정책의 방향타를 잘 가늠해볼 수 있다. 36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86년 말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은 산업생산성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미국의 산업적 성과가 심각하게 퇴조해 국가 경제의 장래가 위협을 받고 있다는 위기의식에 따른 것이었다. 3년 후인 1989년 이 위원회는 ‘메이드 인 아메리카(부제: MIT가 진단한 미국 경제 재건을 위한 처방)’라는 제목의 책자를 펴냈다. 이 책은 미국 제조업의 취약점을 조목조목 짚고 있다. 경영자들이 단기적 목표에 너무 집중하고 있고, 노동력의 질적 수준이 떨어졌으며, 인적 자원이 경시되고 있는 등의 문제점을 망라했다. MIT는 정책 처방전으로 기초연구 투자, 현대적 설비와 공정 엔지니어링에 대한 지원 강화, 혁신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 제거 등을 제안했다. 이 대학교는 2010년대 들어서는 <메이킹 인 아메리카>라는 비슷한 제목의 새 책을 출간해 쏟아져 들어오는 중국 제품에 대항하려면 제조업의 부흥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미국 정부에 피력했다. 제조업의 중요성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이런 흐름이 이어지는 가운데 2008년의 금융위기는 미국이 제조업을 바라보는 시선을 크게 바꾸게 되는 계기가 된다. 당시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야기된 경제위기의 와중에서 미국의 간판급 자동차 회사인 GM과 크라이슬러는 빈사 상태에 놓였다. 결국 정부가 직접 긴급 자금을 수혈하면서 이들 회사는 기사회생한다. 상황이 악화되면 문제가 보이는 법. 오바마 행정부는 제조업이 공동화라는 심각한 중병에 걸려있음에 주목하게 된다. 실제로 2001년부터 2011년까지 10년 사이에 사라진 제조업 일자리는 500만개에 달했다. 제조업의 실질 부가가치 성장률(연간)도 1990년대의 4.9%에서 1.4%로 뚝 떨어졌다. 병(病)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한 오바마 행정부는 2012년에 ‘제조업 르네상스’를 기치로 내걸고 제조업 부활 정책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이 제조업 르네상스 정책이 가진 문제의식은 같은 해에 나온 개리 피사노 등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 두 명이 집필한 <왜 제조업 르네상스인가>라는 책에 잘 정리돼 있다. 이들 교수는 미국 제조업이 내리막길을 걷게 된 것은 전략의 오류에 따른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연구개발은 미국에서 하고, 제조는 생산비가 낮고 시장이 있는 해외로 넘기는 전략이 패착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와 관련해 ‘산업공유지’와 ‘거리의 경제’가 산업경쟁력의 원천이라고 강조한다. ‘산업공유지’는 기술과 지식, 경험 등을 공유하는 공급업체, 고객사, 숙련 근로자, 대학 등을 한데 묶은 개념이다. ‘거리의 경제’는 이들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어야 활발한 소통을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경쟁력 강화의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 제조업체들은 이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 결과 산업공유지와 거리의 경제가 가져오는 상승효과가 사라지면서 제조업의 경쟁력이 취약해졌다. 심지어 미국에 남겨뒀던 연구개발 기능마저 제조망이 있는 해외로 이동시켜야 하는 일도 벌어졌다. 코닥이 대표적 사례이다. 세계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를 개발한 코닥은 완성품과 부품의 제조에 필요한 공급망을 일본 등 아시아지역으로 옮겼다. 문제는 연구개발과 제조 활동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데서 오는 ‘동맥경화증’이 가시화하자 아예 연구개발기능마저 아시아로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미국은 해외이전이 가져온 제조업의 공동화가 국가의 경제안보 위기를 가져왔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민주당 정부의 대부분 정책을 폐기했던 트럼프가 제조업 르네상스 정책만을 존속시켰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같은 제조업 중시 정책의 기조는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코로나19와 글로벌 공급망의 혼란 사태를 계기로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 안에 위치한 제조업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미국 제조업이 전체 국내총생산(GDP)과 직접 고용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각각 11%와 8% 수준이다. 하지만 기업 연구개발 투자 중 비중이 70%에 달하고 있으며, 수출의 60%, 생산성 증가율의 35%, 자본투자의 20%를 차지하고 있다. 중요도가 그만큼 큰 산업이다. 이렇게 보면 바이든 행정부가 지금 펼치고 있는 산업정책은 제조업 르네상스를 대폭 강화한 확장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개별 정책들의 수면 밑에서는 중국을 제치고 제조업 리더십(현재 제조업 순위 1위 중국, 2위 미국)을 확보하려는 미국의 그랜드 플랜 ‘미국몽’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리쇼어링이든 프렌드쇼어링이든 핵심은 미국 제조업의 부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만큼 필요할 경우 같은 맥락의 입법과 행정조치들이 이어질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이런 산업 기류의 변화에 한국 경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정부는 현재 기업의 활력 회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규제 완화를 추진하고 있다. 2022년 경제정책 방향에서는 차세대 성장동력 보강을 위한 방안으로 유망 신산업 육성, 주력 제조업과 서비스산업의 혁신 등을 제시했다. 하지만 현재 국회에서는 당장 발등의 불로 떨어진 반도체산업경쟁력강화법조차 논의가 지지부진한 상태이다. 글로벌 무대에서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산업정책을 내세운 제조업의 ‘한 판 승부’가 본격화하고 있는 상황에 비춰볼 때 안이한 대응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중요한 점은 제조업에 대한 시선을 바꿔야 한다는 점이다. 제조업은 이제 경제 자체를 넘어 경제 안보의 주축이 된 상황이다. 반도체 등 제조업에 대한 지원을 특혜로 본다면 이는 단견에 불과하다. 특혜가 우려된다면 대기업과 중견·중소기업의 동반성장을 담보하는 조치로 보완하면 될 일이다. 제조업이 국가경제의 명운을 좌우하는 시대이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함을 미국이 잘 보여주고 있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2022-10-30 17:04:11
- [최남수의 열린경제] '넥스트 ESG' 경영의 핵심 이슈 ESG(환경·사회·지배구조)는 그동안 어찌 보면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였다. 글로벌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입어야 하는 ‘드레스코드’가 된 ESG 경영은 기업의 생존과 성장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ESG가 논쟁의 대상이 되는 양상이다.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 그동안 ESG를 앞장서 주도해온 EU(유럽연합)는 러시아가 가스 공급을 줄이자 궁여지책으로 화석연료 발전을 늘리고 있다. 그러자 ESG가 뒷걸음질하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이에 대한 EU의 응수는 중장기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원전 및 재생에너지 생산 확대다. 길게 보면 러시아가 자충수에 몰릴 수도 있다. 미국에서는 ESG가 이른바 ‘문화전쟁’의 이슈가 되고 있다. 공화당 인사들이 ESG와 기후변화 논의에 대해 좌파적 사고라며 이를 정치·이념 이슈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공화당 인물은 대선 주자 후보군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론 드샌티스 플로리다주지사. 그는 지난달에 주연금이 투자 의사 결정을 할 때 ESG를 고려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공화당 소속 정치인이 주지사인 텍사스주도 이 대열에 섰다. 주정부가 에너지 기업들을 ‘보이콧’하는 블랙록 등 금융 기업과 금융거래를 중단했다. 화석연료 기업들이 공화당의 주요한 돈줄이라는 점과 관련이 깊은 움직임이다. 하지만 ‘반(反)ESG’를 대세로 보긴 어렵다. 바이든 행정부가 관련 입법을 통해 기후변화 대응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데다 민주당이 ‘지휘봉’을 잡은 캘리포니아주 등 다른 주에서는 친ESG 정책을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내 전반적 여론도 ESG와 기후변화 대응에 대해서는 우호적이다. 이런 가운데 영국 주간지인 더 이코노미스트 7월 21일자는 ESG를 특집으로 다뤘다. 이 잡지도 ESG에 대해 심도 있게 문제를 제기했다. 먼저 서로 상충되는 목표를 제시하고 지표가 표준화돼 있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특히 기업이 좋은 일을 해도 성과가 좋은지 그 상관관계가 불분명하고 등급이 기관마다 들쭉날쭉하게 나오는 등 결함이 적지 않다고 평가했다. 이 잡지는 그렇다고 ESG를 폐기하자는 뜻은 아니라며 개선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ESG에 대한 이 같은 공방은 사실 벌어질 때가 돼서 벌어지고 있는 측면이 있다. ESG에 대한 논의가 실행 의지와 맞물리면서 본격화한 것은 2년여에 불과하다. 환경과 사람을 돌보는 투명한 경영을 하자는 큰 방향성은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 있지만 디테일은 정비되지 않은 게 많은 실정이다. ESG에 대한 공격은 그 기반을 잘 다져나가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실제로 ESG에 대한 논의는 최근 본질적으로 국면이 달라진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두드러진 변화는 그동안은 ESG를 왜 해야 하는지, 즉 ‘Why’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다면 이제는 ESG를 어떻게 실행에 옮기고 구체적인 성과를 낼지, 즉 ‘What & How’로 논의의 초점이 옮겨갔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ESG 경영 논의의 폭이 넓어지면서 심도(深度)도 깊어지고 있다. 필자는 이 같은 변화를 ‘넥스트 ESG’로 규정한다. 넥스트 ESG의 핵심은 가속화하고 있는 제도화다. 기후공시, 공급망 대응, 탄소국경조정세 등 기업들이 실제로 대응해야 할 일들이 많아지고 있다. 먼저, 기업이 탄소를 얼마나 배출하고 있는지를 공시하도록 하는 ‘기후공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탄소를 배출하고 있는 기업의 가치사슬 경로에 대해 알아보자. 기업이 탄소를 배출하는 영역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스코프(scope) 1, 스코프 2, 스코프 3이다. 이 중 스코프 1은 기업이 소유하고 통제하고 있는 곳에서 직접 발생시키는 탄소 배출이다. 화학 공정, 보일러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다음으로 스코프 2는 기업이 사용하는 전기와 동력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배출되는 탄소다. 마지막으로 스코프 3. 기업이 원자재 등을 사들이고 제품을 판매하는 공급망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을 말한다. 여기에는 기계 구입, 폐기물, 수송, 유통, 판매 제품의 가공, 자산의 임대차 등이 포함된다. 직원이 해외 출장을 가거나 출퇴근을 할 때 배출되는 탄소도 들어간다. 그만큼 기업으로서는 측정하고 관리하기가 어려운 영역이다. 중요한 점은 절반 이상의 탄소 배출이 스코프 3에서 이뤄져 이를 관리하지 않고는 탄소를 획기적으로 줄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현재 기업들이 탄소를 얼마나 배출하고 있는지를 공시하도록 하는 논의는 두 갈래로 진행되고 있다. 하나는 지난해 10월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제26차 유엔기후협약당사국총회에서 출범한 ISSB(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 이 기관은 최근 발표한 기후공시 프로토타입(prototype)에서 앞에서 설명한 스코프 1, 스코프 2, 스코프 3를 기업이 모두 공시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특히 스코프 3에 대해서는 관련 활동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고 있다. ISSB는 올해 안에 최종안을 내놓는다는 계획이다. 이 안이 확정되면 여러 국가와 규제기관에서 신속하게 도입할 것으로 보인다. ISSB 안이 G20와 국제증권관리위원회 등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별도로 미국 증권관리위원회(SEC)도 지난 3월 상장기업에 기후공시를 의무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을 보면 탄소 배출의 경우 스코프 1과 스코프 2는 모든 상장사가 공시하도록 했다. 다만, 스코프 3 공시는 ISSB 안보다는 다소 완화된 내용이다. 스코프 3 탄소 배출이 상장사에 중요하거나 상장사가 스코프 3를 포함한 감축 목표를 설정한 경우로 제한했다. 지금까지 소개한 기후공시 방안은 시행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다. 또 우리나라를 비롯한 각국이 보완이 필요한 부문에 대해 의견을 낸 상태여서 일부 내용도 수정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탄소 배출량 공시 자체는 새로운 글로벌 룰로 도입되는 게 대세다. 탄소 배출이 많은 제조업 비중이 높은 한국 산업으로서는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글로벌 비즈니스를 하려면 피할 수 없는 흐름이어서 세밀한 대응이 필요한 때다. 이와 함께 EU가 시행할 채비를 갖추고 있는 공급망 실사 지침도 잘 대응해야 할 제도로 꼽힌다. 이 지침은 기업이 글로벌 가치사슬 전반에서 아동 노동 등 인권을 훼손하고 오염과 생물다양성 손실 등 환경을 해치는 행위를 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를 위해 기업 본사와 자회사 그리고 공급사슬에서 인권과 환경에 대한 실사 의무를 갖도록 했다. 이 의무를 위반한 기업에는 벌금 부과 등 제재가 가해진다. 중요한 대목은 피해자들이 소송을 통해 기업에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이 실사 지침은 EU 의회와 이사회에서 1년여 동안 협의를 거쳐 승인될 예정인데 최종 채택되면 회원국들은 2년 안에 국가별로 법률을 마련해 시행해야 한다. 이에 따라 EU 지역에 수출하는 국내 기업에도 비상이 걸렸다. EU에 지사를 설치한 기업은 물론 EU 기업과 거래해 공급망에 포함된 기업들이 지침 적용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글로벌 기업들이 공급망 실사를 협력사 선정 시 주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어 이래저래 인권과 환경에 대한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국제무대에서 외면받을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다. 한국생산성본부는 공급망 실사법이 발효되면 자동차부품, 반도체, 제약, 바이오, 화장품 등 산업이 우선적으로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적용 범위가 확대된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도 국내 기업의 피해가 우려된다. CBAM은 탄소 배출이 많은 국가에서 수입되는 제품에 대해 탄소국경세를 물리겠다는 것이 골자다. 1년 전에 나온 EU 집행위원회 안만 해도 대상이 철강, 시멘트, 비료, 알루미늄, 전력 등 5개 분야였지만 지난 6월에 나온 유럽의회 안은 유기화학물질, 플라스틱, 수소, 암모니아 등 4개 업종을 추가했다. 시범 시행기간도 2024년 12월로 1년을 앞당겨 CBAM 시행 자체가 더 빨라지도록 했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EU 지역에 수출을 많이 하는 기업들은 부담이 커질 전망이다. 예컨대 석유화학 기업은 수출액의 5%, 철강은 10%까지 탄소국경세를 물게 될 것으로 법무법인 화우는 분석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넥스트 ESG 시대’에는 ESG 경영에 대한 제도적 틀이 해외에서부터 본격화할 것임을 예고해주고 있다. 기업이 ESG를 경영 전반에 내재화함으로써 비즈니스 모델을 혁신해 나가야 하는 ‘ESG 트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도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업이 ESG 제도의 외풍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정책 청사진을 제시하면서 대응 역량이 부족한 중견 및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데 역점을 둬야 한다는 지적이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2022-09-20 17: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