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경 체력' 논란까지 부른 현 정부의 편향된 법 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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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낭기 논설고문
입력 2019-06-0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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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낭기 고문[남궁진웅 기자, timeid@ajunews.com]

여자 경찰관의 체력이, 아니 남녀를 떠나 경찰관의 체력이 진짜 문제인가? 지난 5월 13일 서울 구로구 대림동에서 발생한 주취객 사건 이후 여경(女警) 무용론이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여경이 술에 취한 남성을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다고 해서다.

당시 술 취한 남성 두 명이 소란을 피운다는 신고를 받고 남녀 경찰관 두 명이 출동했다. 남자 경찰관이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타이르자 이 중 한 남성이 남자 경찰관에게 욕설을 하며 뺨을 때렸다. 발로 차기도 했다. 경찰관이 이 사람을 체포하려 하자 이번엔 일행인 다른 사람이 경찰관을 끌어당겼다. 이 과정에서 여성 경찰관이 남성들을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고, “남자분 한 분 나오세요”라고 시민들에게 도움까지 청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여경 질타론이 터져 나왔다. ‘여경의 체력 검증을 더 강화하라’거나 ‘여경은 내근만 시키라’라는 주장은 약과였다. 네티즌은 물론 몇몇 국회의원까지 여경 무용론 또는 여경 폐지론을 들고 나왔다. 이에 경찰청이 1분 59초가량의 전체 동영상을 공개하고 "여경도 피의자를 제압했고, 소극적 대응을 하지 않았다"고 해명까지 해야 했다.

두 경찰관이 모두 남성이었다면 여성 경찰관보다 제압하기가 더 쉬웠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남성 경찰관이 특별히 체격도 작고 힘이 약했다면 여성 경찰관과 별 차이가 없었을 수도 있다. 더구나 두 남성이 격투기 선수이기라도 했다면 어지간히 힘 센 남성 경찰관이라도 쉽게 제압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체력이 강한 경찰관이라도 이 세상 어떤 사람이든 제압할 수 있을 만큼 강할 수는 없다.

문제는 경찰관 체력이 아닌 무너진 공권력

결국 대림동 사건의 본질은 경찰관 체력이 아니다. 여경이냐 남경이냐는 더욱 아니다. 허약한 공권력, 무시되는 공권력,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공권력이 본질이다. 공권력이란 경찰관 개인의 체력이 아니다. 국가의 법 집행 기관으로서 필요 시 물리적 강제력, 즉 무기를 쓸 수 있는 힘이다. 곤봉이나 가스총, 전기 충격기는 물론이고 권총까지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말했듯이 국가란 ‘물리적 강제력의 합법적 독점 조직’이다. 국민에게 물리적 강제력을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 국가라는 말이다.국가를 대신해 그 물리력을 현장에서 사용하는 기관이 바로 경찰이다.

그런데 대림동 사건에서 경찰은 국가의 합법적 물리력을 쓰지 않았다. 당시 남성 경찰관은 삼단봉, 권총을 갖고 있었다. 여성 경찰관은 삼단봉과 테이저건을 휴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취객이 몸으로 덤비며 공무 집행을 방해하는 상황에서 삼단봉 같은 초보적 진압 장비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미국 같았으면 경찰관이 경찰봉으로 때려 제압했을 것이다. 미국은 원칙적으로 경찰이 범법자보다 한 단계 높은 물리력을 쓰는 것을 허용한다. 주먹을 휘두르면 전기충격기나 가스총을, 칼을 들고 있으면 총을 쏠 수 있게 한다. 우리로 치면 ‘과잉 진압’이다. 그래야 질서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대림동 현장의 경찰관들은 왜 진압 장비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사실은 ‘사용하지 못했다’는 게 정확한 말일지 모른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현 정부 들어 경찰은 갈수록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림동 사건은 그 한 단면에 불과하다. 민노총 조합원들의 불법 현장을 진압하러 갔다가 오히려 끌려 나오고 폭행당하기까지 한다. 회사 사무실을 점거하고 임원을 폭행해도 진압은커녕 “짭새가 왜 여기 와 있느냐”하는 조롱이나 듣는다. 오죽하면 경찰관 폭행 혐의로 조사받으러 온 노조원들이 경찰서에서 자기들끼리 인증 샷을 찍으며 활개치고 다닐까. 민노총 노조원들이 법원의 철수 명령에도 불구하고 울산 현대중공업 주주총회장을 닷새나 점거해도 경찰은 지켜보기만 했다.

경찰이 이 지경이 된 원인은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현 정부 법 집행 철학의 문제점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나라나 보수파 정부는 정의보다 질서를, 진보파 정부는 질서보다 정의를 더 강조한다. 각자 보수 또는 진보의 가치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정부, 질서보다 정의 앞세워···경찰관 몸 사리는 것은 당연

질서를 앞세우면 주장이나 목적의 정당성보다 행위나 그 수단의 불법성을 더 중시하게 된다. 따라서 불법과 무질서에 강력히 대응하게 된다. 경찰이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경찰 고위 간부의 책임을 묻는다. 반면 정의를 앞세우면 행위나 수단의 불법 여부보다 주장이나 목적의 정당성 여부를 더 중시하게 된다. 불법이라도 정권 기준에서 볼 때 정당하다고 여기면 문제삼지 않으려 한다.

현 정부는 질서보다 정의를 어느 정권 때보다 중시한다. 현 정부 들어 경찰청 인권침해 진상조사위원회가 설치돼 과거 정부 때의 시위 진압 사건을 조사했다. 이 위원회는 용산 철거민 진압 사건, 시위 중 숨진 농민 사망 사건, 제주 해군기지 시위에서 경찰이 과잉 진압을 했다며 대국민 사과를 하게 했다. 시위 진압 장비를 훼손하고 경찰을 다치게 한 시위대에 경찰이 청구한 10억원대 손해배상 소송의 철회를 권고하기도 했다.

용산 사건의 경우 경찰의 법 집행이 적법했다는 대법원 판결까지 나왔다. 제주 해군기지 시위를 주도한 인물은 경찰 공무 집행을 방해한 혐의로 유죄가 확정됐다. 그런데도 위원회는 사건 관련자들의 불법은 지적하지 않고 과잉 진압만을 문제삼았다. 그 사건들이 설사 불법이더라도 생존권 또는 평화라는 더 큰 가치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 정당하다는 인식이 아니고선 나올 수 없는 결론이다. 질서보다는 정의가 더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최근 검찰 과거사 위원회는 검찰의 용산 사건 수사를 철거민들이 요구하는 '정의로움'에 미치지 못했다고 결론내렸다.  질서보다 정의를 더 중시하는 법 집행 철학의 일면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요즘 경찰에는 “뺨을 맞더라도 참는 게 낫다”는 분위기가 퍼져 있다고 한다. 대법원이 합법적 법 집행이라고 판결한 사안에 대해서까지 과잉 진압이고 정의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니 경찰이 강력한 법 집행을 주저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뺨을 맞더라도 참는 게 낫다”는 자조적 분위기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칫하면 인권 침해 책임을 지게 되는데 누가 법대로 하려 하겠는가?

불법이라도 정당한 행위가 있을 수 있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는 합법적 의사 표현 통로마저 막혀 있었다. 노조활동은 물론이고 집회, 시위도 할 수 없었다. 수사기관의 가혹 행위가 다반사로 일어났지만 저항할 수 없었다. 저항은 곧 감옥행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불법 행위도, 때로는 폭력까지도 정당화될 수 있다. 공권력에 저항하는 것이 실정법에는 위반되더라도 인권이라는 더 큰 가치를 지키기 위해 불가피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질서보다 정의가 더 중요한 가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독재시대 질서와 민주시대 질서는 가치가 달라

그러나 이제는 민주주의 시대다. 합법적 의사 표현의 길이 열려 있다. 집회도, 시위도, 노조 활동도 법만 어기지 않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불법 공무집행에는 겁 먹지 않고 저항할 수 있다. 따라서 '불법이지만 정당한’ 행위는 이제 거의 없다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 불법은 불법일 뿐 아니라 부정의이다. 자기 이익이나 주장을 위해 공공질서를 해친다는 점에서 부정의다.

독재시대에는 질서가 정권 반대 집단이나 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명분으로 악용됐다. 그러나 민주주의 시대에서 질서는 개인과 사회를 자유의 남용으로터 지켜주는 울타리 역할을 한다. 자유가 늘어날수록 질서의 가치는 소중해진다. 그렇다면 질서보다 정의를 앞세우는 법 집행 철학도 달라져야 한다. 질서와 정의를 동등한 가치로 인정해야 한다. 정의를 추구하되 법 질서를 파괴하는 불법에는 엄중하게 대응하는 것이 그 첫걸음이다.

그러지 않고 질서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악, 정의는 그 악을 깨뜨리기 위한 선이라는 정치 선동적 구별에 집착하면 불법에 대한 공권력의 엄중한 집행은 불가능하다. 경찰은 갈수록 무력해진다. 그 결과는 대림동 사건에서처럼 아무나 경찰관 뺨을 때리는 공권력 무시 사태의 일상화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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