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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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세로’는 횡설수설(橫說竪說) 종횡무진(縱橫無盡)의
횡수(橫竪가로세로)와 종횡(縱橫세로가로)을 한글로 번역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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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폐허는 성찰을 부르는 힘이 있으니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 어느 날 최북단 마지막 기차역이라는 철원 월정리역을 찾았다. 민간인통제구역 안에 있는지라 출입절차를 미리 밟아야 했다. 지난 여름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5~1682 조선시대 4대 문장가. 전서 글씨체 대가)선생의 무덤을 찾았을 때 민통선 통과의례를 치른 바 있으니 DMZ방문은 올해 두 번째다. 붐비는 여느 관광명소와는 달리 한적한 미답지가 주는 허허로움과 함께 폐허의 처연함이 주는 또 다른 미학이 일행을 맞이한다. 이 역에서 마지막 기적소리를 울렸던 인민군 화물열차와 객차 일부라고 했다. 육이오 때 유엔군의 폭격을 받아 탈선된 열차는 버려졌고 증기기관차는 포연 속에서 북쪽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70년이라는 시간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더불어 그 위로 눈·비·바람도 그만큼 지나갔다. 잔해는 포탄과 총탄 자국을 안고서 전쟁의 상흔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철로 위에 주저앉은 모습은 이제 더 이상 버틸 힘조차 없는지 객차로서 자기 모습조차 포기한 채 그냥 널부러져 있다. 45도쯤 기울어진 녹슨 바퀴 때문에 ‘기차가 맞구나’하는 생각이 들 뿐, 전체적으로는 길게 쌓아놓은 고철더미처럼 보인다. 고철열차라도 남쪽으로 끌고 가려는지 4001호 디젤 기관차가 생뚱맞은 모습으로 선로 끝에 서있다. 본래 서울 용산에서 동해안 원산으로 가는 경원선 철도였다. 철로는 1914년 개통했고 월정리 역은 1934년 신축했다. 건물은 전쟁으로 소실됐고 1988년 복원했다. 본래 역사(驛舍)가 비무장지대 안쪽인 까닭에 남쪽으로 1㎞쯤 옮긴 위치였다. 한문으로 쓰여진 ‘月井里驛(월정리역)’이 당시의 문자표기법을 그대로 보여준다. 인근 철원역은 직원 80여 명이 근무할 만큼 규모있는 역이었다고 했다. 일제 강점기 시절 당시 인구가 10만명가량 되는 대도시이며, 금강산 가는 전기철도의 분기점이었기 때문이다. 후삼국 시절 궁예왕이 태봉국의 도성으로 삼을 만큼 넓은 평야지역이기도 하다. 현재 ‘오대쌀’을 생산하는 평야는 3분의 1 정도 남쪽에서 농사를 짓고 그 나머지는 모두 비무장지대 너머 북쪽이다. 남북으로 통하던 철로는 폐기된 상태이며 역 경내에 전시용 철로를 백미터 정도 관광용으로 복원해 둔 정도다. 오늘도 표지판은 ‘鐵馬(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구호를 열차를 대신하여 외치고 있다. 출입을 통제하는 것은 군사적인 이유뿐만 아니다. 2018년 안보관광지로 개방된 이후에도 아프리카돼지열병 그리고 조류독감 또는 코로나19 등으로 인하여 수시로 막히고 열리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인간들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군사보호지역을 설정해 둔 덕분에 두루미 등 많은 종류의 날짐승과 각종 길짐승에게는 더없이 평화로운 안식처가 되었다. 전쟁과 평화라는 양면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민통선 안의 별천지를 빠져 나오니 또 다른 전쟁유물인 ‘철원 노동당사 건물’이 기다리고 있다. 1946년 건립한 560평 지상 3층의 러시아식 공법의 건물로 벽돌과 콘크리트를 주재료로 사용했다. 좌우 대칭적인 평면과 함께 비례가 정돈된 입면(立面) 그리고 언덕 위에 자리 잡은 것 등이 합해지면서 권위적인 느낌을 더했다. 현재 2층과 3층은 외벽만 남기고 내부는 무너진 상태로 골격만 남았다. 수많은 포탄자국 총탄자국 속에서도 뼈대가 남아있을 만큼 튼튼하게 지어진 건물임을 증명해 준다. 하지만 현재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앞쪽은 비교적 멀쩡한 편이지만 옆쪽과 뒤쪽은 수많은 철근 지지대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버티고 있는 형국이다. 언젠가 찾았던 일본 히로시마 ‘원폭 돔(겐바쿠 도무)’을 생각나게 한다. 체코 출신 건축가가 설계했고 1915년에 지어진 지상 3층 벽돌 건물이다. 1945년 8월 6일 원폭투하에도 중앙돔과 외벽 일부가 살아남았다.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다. 풍화를 막기 위한 정기적 보수공사는 새 건물 관리비를 능가한다고 들었다. 불편한 전쟁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철원 노동당사와 일부분 닮았다고 하겠다. 노동당사는 근대문화유산 22호로 지정되었다. 70년 동안 풍우에 노출되면서 콘크리트 등이 부식되자 보수를 했고 또 벽체의 보존처리와 함께 외벽탈락 방지를 위한 공사가 뒤따랐다. 2022년 5월 야간 조명시설까지 갖추면서 일몰 후 찾아오는 관광객까지 배려했다. 이 지역도 1990년대 이전까지 민간인 출입통제 구역이었다. 그 규제가 완화되면서 비로소 전쟁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있는 이 건축물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 무렵 유명한 뮤지션으로 이름을 날리던 ‘서태지와 아이들’은 뮤직비디오 ‘발해를 꿈꾸며’의 배경으로 삼으면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후 kbs 열린음악회 등 크고 작은 여러 가지 문화행사의 무대로 활용되면서 지금은 모두에게 친숙한 장소가 된 것이다. 무엇이건 익숙하면 편안해진다. 불편했던 그 건물도 마찬가지다. 인간과 자연이 합작한 전위예술 작품인 월정리역 기차 잔해와 노동당사 건물에서 폐허미가 주는 비장함을 만났다. 그것은 전쟁으로 파괴된 인공적 폐허이자 자연에 의해 낡아가는 자연적 폐허가 겹치면서 또 다른 미학적인 완성을 향해가는 진행형 ‘노천 예술’이었다. 하지만 과거의 온전했던 모습보다는 현재의 상실과 소멸이 더 강하게 소환될 수밖에 없다. 과거는 이미 사라지고 없지만 거기에 부여한 의미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폐허는 성찰을 부르는 힘이 있다고 누군가 말했다. 전쟁과 평화 그리고 나타남과 사라짐이라는 양면성을 가진 두 전쟁 유물 앞에서 모든 것은 변해가기 마련이라는 ‘공(空)의 이치’를 다시금 음미하게 된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2-12-17 09:5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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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정말 탑에 진심이네요 고택과 고탑 앞을 가로 지르던 철길을 걷어내면서 시작된 안동 임청각 주변은 공원화 사업으로 분주하다. 특히 탑 앞을 가로 막고 서있던 방음벽 철거만으로도 그동안 답답함과 숨막힘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덕분에 높이 17m 7층인 한국최고의 규모를 자랑하는 전탑(塼塔 돌을 벽돌처럼 깎아 만든 탑. 국보)이 더욱 훤출하다. 찾는 이들은 동남서북으로 돌면서 사방에서 배례(拜禮)할 수 있고 또 멀리서 가까이서 원근(遠近)을 오가며 바라볼 수 있도록 본래공간을 회복한 것이다. 늦가을 푸른 하늘을 이고 서있는 도로표지판에는 ‘안동 법흥사지 칠층 전탑’ 그리고 ‘고성이씨 탑동종택’이라고 써놓았다. 유명한 종갓집 앞에도 ‘탑동’이란 말은 빠지지 않았다. 그만큼 고택과 전탑은 둘이면서 또 하나됨을 추구했던 것은 이 가문의 불가적 인연이 한 몫했다. 이 집안 출신인 고려 말 행촌 이암(杏村 李嵒 1297~1364)선생은 공민왕 때 고위관료를 지냈다. 말년에는 벼슬을 버리고 강화도에 은둔하면서 1363년〈단군세기〉를 저술한 역사학자이기도 하다. 동생은 운암(雲庵)이라는 고승이었다. 또 16국사를 배출한 승보종찰 송광사의 13대 국사를 지낸 각진(覺眞1270~1355)대사가 삼촌이라고 조용헌 선생은 족보를 추적하여 저서 《명문가》에 밝혀 두었다. ‘탑동103카페’라는 입간판이 서 있는 솟을대문을 지나 고택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의 직사각형 연못에는 서리를 맞고서 말라버린 연잎과 연실이 가득하다. 법당 자리로 추정되는 터에 지어진 전형적인 한옥 안으로 들어갔다. ‘북정(北亭)’과 ‘영모각(永慕閣)’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정자 기능과 사당기능을 함께 하는 공간임을 짐작케 해준다. 현재는 ‘북카페’로 운영되고 있다. 여기서 바라보는 전탑풍광이 가장 일품이다. 창호문을 열고서 앉고 서기를 반복하며 탑을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살폈다. 카페주인이 차와 디저트를 갖다주며 한 마디 던졌다. “정말 탑에 진심이시네요.” 안동을 다녀온지 며칠 뒤 서울 종로 인사동 어느 갤러리에서 열린 ‘탑 사진전’을 찾게 되었다. 작가는 언젠가 새벽 경주 감은사 탑 앞에서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삘’이 꽂이더라고 했다. 그 감동은 인물 ·패션분야 사진에서 탑 사진까지 영역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특이한 것은 탑의 뒷배경을 인물사진 찍을 때처럼 암막천으로 완전히 가리고는 오직 탑만 드러나게 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리하여 사진을 감상하는 이로 하여금 모든 시선을 탑에 집중토록 만들었다. 관람객들은 이구동성으로 ‘정말 탑에 진심’이라고 입을 모았다. 법흥사지 전탑을 찾았을 때 이미 ‘탑에 진심’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 날 탑동카페에서 차를 한 모금 하고서 숨을 돌린 후 탑 너머 강 건너편을 바라보았던 기억까지 더듬었다. 나지막한 작은 산이 눈앞을 가려주는 안산(案山)노릇을 하면서 이 터를 더욱 안온하게 해준다. 언덕 끝자락에는 낙동강과 반변천이 합류한다. 흔히 명당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쌍계합수(雙溪合水)지점은 따로 와부탄(瓦斧灘)이라고 불렀다. 11대 종손인 허주 이종악(虛舟 李宗岳 1726~1773)선생은 1764년 집 앞에서 배를 띄우고 반변천을 따라 오르면서 주변 풍광을 12폭 그림으로 남겼다. 그 가운데 일곱번째 ‘선사심진(仙寺尋眞)’은 신선이 살고 있을 것 같은 운치있는 절을 찾는 그림이며 12번째 마지막 그림 ‘반구관등(伴鷗觀燈)’은 반구정에서 민가에 켜진 등불을 바라본다는 주제로 그린 그림이다. 봄이 무르익은 사월초파일 무렵 5박6일의 뱃놀이 일정이었다. 이 터는 행촌 이암의 손자인 이증(李增1419~1480)이 안동에 자리를 잡으면서 그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의 둘째 아들 이굉(李汯)은 집 앞의 두물머리인 와부탄에 1513년 귀래정(歸來亭)을 세운다. 이어서 셋째아들 이명(李洺)이 1519년 이 자리에 임청각(臨淸閣)을 건립한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500년 역사를 지닌 고성(固城)이씨 종택인 1000평 99칸 규모의 한옥이 완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집 앞으로 철도가 지나가면서 훼손되어 현재 70칸 정도가 보존되고 있다. 그 때 철도에는 증기기관차가 달렸다. 옛 안동역에는 증기기차에 물을 공급했던 급수탑(근대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있다. 임청각 주인인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 1858~1932) 선생은 1911년 1월5일 가산을 정리하여 독립자금을 마련한 후 안동역에서 증기기관차를 타고 칼끝보다 날카로운 삭풍을 헤치며 만주 망명길에 올랐다. 그 때 바라봤던 급수탑일 것이다. 하지만 디젤기관차 시대로 바뀌면서 노선자체가 현재 역 건물 쪽으로 수십미터 이상 이동한 것 같다. 이후 급수탑은 기능을 상실하면서 역 경내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가장자리에 혼자 우두커니 서있다. 하지만 안동역 마저도 2020년 12월 딴 곳으로 옮겨갔다. 임청각 복원을 위한 철로 이전사업의 일환이다. ‘라떼’세대의 인기대중가요인 ‘안동역 앞에서’ 노래비도 세월이 흐른 뒤에는 후손들이 “역도 아닌 자리에 이 비석이 왜 있느냐?”고 되물을 것 같다. 이미 역으로서 기능은 사라지고 지역사회 문화소통공간으로 변모한 까닭이다. 그럼에도 역 광장 한 켠에는 법림사 옛터 오층전탑(보물)과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법림사 터에는 기차역을 만들었고 법흥사 터에는 종갓집이 들어왔다. 그럼에도 탑은 꿋꿋이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면서 두 곳이 모두 신라시대 창건된 장구한 역사를 가진 절터임을 말없이 알려 준다. 어쨋거나 모든 것은 변해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변해간다는 그 사실을 알려주는 증표라는 점에서 전탑과 급수탑 그리고 노래비와 레일 또 정자터가 주는 의미까지 읽어내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라 하겠다. 임청각과 귀래정 명칭은 중국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귀거래사(歸去來辭)’라는 작품에서 비롯되었다. 명시는 시대와 지역을 뛰어 넘기에 원저자의 고향집 뿐만 아니라 안동종택에도 잘 어울린다. 등동고이서소(登東皐以舒嘯)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을 불고 임청류이부시(臨淸流而賦詩) 맑은 물가에서 시를 짓는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2-11-15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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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승일교-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광복 후 삼팔선은 지도 위에 존재한 가상선이었지만 현실세계에도 군데군데 주요한 지점에는 반드시 표식을 남겼다. 강원도 철원 가는 길에서 삼팔선 표지석을 만났다. 여기에서 목적지인 승일교까지 차로 이동하는 데 30분가량 걸린다. 6·25 전쟁 이후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삼팔선 너머 북쪽으로 그 시간만큼 더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길가에 서 있는 ‘남북경협거점도시’라는 공익광고판을 스쳐 지나간다. 늦은 오후인지라 승일공원 주차장은 한적하다. 느긋한 걸음걸이로 강가로 천천히 내려갔다. 길이 끝나면서 가파른 내리막 시멘트 계단이 나왔고 그 계단마저 끝나는 급경사 부분은 물가까지 좁다란 철계단을 설치하여 다리를 강바닥에서 하늘 방향으로 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한탄강의 검은 협곡 위로 시멘트로 만든 두 개의 장대한 교각을 중심으로 반월형 구조물 3개가 서로 이어지는 당당한 연출이 장관이다. 그 옆으로 나란히 1999년 ‘한탄대교’가 개통되었지만 오히려 승일교(본래 이름이 ‘한탄교’였다)의 짝퉁처럼 보일 만큼 오래된 오리지널 다리로서 여전히 그 위엄을 과시했다. 다시 공원 방향으로 올라와서 다리 상판 위로 걸을 수 있는 길 입구를 찾았다. 건설한 지 오래된 다리인지라 차량 이동이 가능한 시절에도 13톤 이하 자동차와 장갑차만 통과할 수 있다는 표지판을 세웠던 모양이다. 특히 ‘대형 장갑차 통행금지’를 의미하는 표식을 함께 병기한 것이 전방 군사지역이라는 사실을 실감케 해준다. 대형 다리를 새로 만든 뒤에는 모든 기능을 새 다리에 넘기고 본래 다리는 사람과 자전거만 통과하는 관광레저용으로 바뀌었다. 밤에는 조명 빛까지 더해진다고 하니 야경 감상까지 하려면 따로 시간을 내야겠다. 길이 120m, 높이 35m, 너비 8m인 다리는 튼튼해 보이는 교각과 달리 상판 바닥과 난간은 100여 년 비바람 흔적을 고스란히 머금고서 바랠 만큼 바랬다.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으로 다리 위를 걸으면서 좌우와 전후 풍광을 찬찬히 음미했다. “···험한 세상의 다리 되어 너를 지키리···”라는 오래된 노래 가사가 딱 어울리는 곳이다. 남북을 이어주는 ‘험한 세상의 다리’가 건설된 뒤 탄생 이야기는 시대상을 반영하면서 수많은 사람들 입으로 전해졌고 또 가지에 가지를 치면서 변주에 변주를 거듭했다. 첫째, 승일교(承日橋)다. 이승만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고 한다. 북쪽의 김일성이 시작하고 남쪽의 이승만이 완성했다는 뜻이다. 삼팔선이 그어진 뒤 북쪽에서 필요에 의해 다리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나 6·25 전쟁으로 인하여 중단된 뒤 휴전이 되면서 남쪽에서 나머지 부분을 완공했다는 것이다. 둘째, 승일교(勝日橋)다. 남북이 극도의 긴장관계를 지속하면서 이 다리를 인근 군부대에서 관리하던 시절에는 ‘김일성을 이기자(勝日橋)’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더라고 유홍준 선생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권2에서 당신이 경험한 에피소드를 양념처럼 끼워 놓았다. 셋째, 승일교(昇日橋)다. 6·25 전쟁 때 한탄강을 넘어 북진하다가 장렬하게 산화한 박승일(朴昇日) 연대장 공적을 기리면서 붙인 이름이다. 이는 1985년 승일교 입구에 기념비를 세우면서 현재 정설로 굳어졌다. 유홍준 선생은 같은 책에서 1번 설을 완전 지지하는 내용만 실었다가 급기야 유족 측의 거센 항의를 받고서 3번 설을 추가하여 다시 출판했던 민감한 사안이기도 하다. 네 번째 새로운 설이 2006년 2월 28일자 철원신문에 등장했다. 지역주민인 박상용씨가 소장하고 있던 새로운 자료가 공개된 것이다. 1952년 미군 공병대 장교인 제임스 N 패트슨 중위의 일기였다. 영어로 된 원문 20여 장과 공사 현장 사진까지 포함된 것이라고 한다. 그 자료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때 공사가 시작된 미완성 다리를 1952년 미군 공병대가 나머지 부분을 완공했다는 내용이다. 남북 합작이 아니라 미일(美日) 합작인 셈이다. 이 설을 따른다면 착공 시기는 일제강점기까지 올라가게 된다. 어쨌거나 특이한 것은 그 와중에도 다리를 설계한 사람 이름과 경력이 전해 온다는 사실이다. 주인공은 김명여 선생으로 당시 철원농업전문학교 토목과 과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일본 규슈(九州)공대 출신이며 진남포 제련소 굴뚝을 설계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설계자는 단 한 명이다. 하지만 이후 등장하는 시공·관리 주최국을 모두 열거한다면 한국, 북한, 일본, 미국 등 4개국이다. 진짜 다국적 다리인 셈이다. 어쨌거나 승일교는 한반도의 아픔과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는 조형기념물이다. 시대적 필요성에 의해 시기를 달리하여 부분 부분 이어가며 만들긴 했지만 결국 하나의 다리로 완성될 수 있었다. 착공과 준공의 주관자가 달랐고 시공자와 공법이 각각 다른 까닭에 보통 사람 눈에도 아치의 크기와 교각의 모양이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런 역사성과 함께 아름다운 조형미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2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 다리의 건설은 양쪽을 연결하는 것이 목적이다. 남북 연결이라는 토목 공학적인 본래 의미가 부각되면서 당시 동네 주민과 공사장 인부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불린 이름이라는 1번 설에 대한 심정적 동조자는 계속 늘어나게 마련이다. 남과 북의 의도치 않은 합작은 말 만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에 의해 뒷날 ‘남북경협의 원조’라는 별명까지 붙게 되었다. 4번 설까지 보태지면서 합작의 의미는 더욱 도드라진다. 이럴 때는 한글이 최고다. 한자는 빼고 그냥 소리나는 대로 ‘승일교’라고 부르면서 2번 설, 3번 설을 포함하여 각자 시각에서 해석하고 자기 입맛에 맞는 것을 선택하고 지지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금강경은 ‘약견제상비상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라고 했다. 만약 모든 이름이 진짜 이름이 아님을 알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이름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22-10-06 16:5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