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준교수
ph410@anu.ac.kr
-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 한국서양중세사학회 회장
- 교수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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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준의 함께꿈] 이주호가 내민 '교육개혁' 말은 그럴싸한데 … 연초 이주호 교육부장관은 대통령 업무보고를 통해 교육개혁 원년을 포고했다. 4대 개혁분야(학생맞춤, 가정맞춤, 지역맞춤, 산업맞춤)를 설정하고 10대 핵심정책(①디지털 기반 교육혁신 ②학교 교육력 제고 ③교사 혁신 지원체제 마련 ④유·보 통합 추진 ⑤늘봄학교 추진 ⑥과감한 규제혁신·권한 이양 및 대학 구조개혁 ⑦지역혁신 중심 대학지원체계(RISE) 구축 ⑧학교시설 복합화 지원 ⑨핵심 첨단분야 인재 육성 및 인재 양성 전략회의 출범 ⑩4대 교육개혁 입법)을 추진함으로써 교실을 깨우고, 교육의 평등을 보장하고, 교육으로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고, 세계를 이끌 인재를 양성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새 정부의 교육 분야 국정과제를 구현하기 위한 교육부의 실행 계획을 담은 업무보고인데, 장관 스스로 교육개혁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교육관계자들이 교육개혁안으로 받아들이며 반응이 뜨겁다. 무릇 교육개혁이라 하면 보다 근본적인 철학과 이념을 토대로 오랜 시간을 들여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하는 중대한 국가 중점사업이다. 그런데 신임 교육부 장관의 업무보고를 아무리 살펴도 뚜렷한 지향점이 보이지 않는다. 보고용 개혁 의지와 관료적 매뉴얼만 나열돼 있을 뿐 교육개혁을 추진하는 이유와 실행에 따른 여러 해결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부족하거나 상충하는 부분도 있어 교육계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교육개혁으로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이 적지 않다. 그런데 이 과제를 수행하려면 엄청난 재정 투여와 법령 개정이 긴급해 보이니 과연 이 정책들이 실행될 수 있을지 미지수로 다가온다. 개혁의 필연성에 대하여 장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급격한 기술진보, 코로나19, 인구감소 등 환경변화에 따라 우리 사회는 새로운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교육’이 사회 난제 해결의 실마리가 되어 줄 것을 요구한다.” 교육부가 제시한 3가지 사회적 난제는 다음과 같다. 1. 격차에 따른 사회적 갈등 심화 2. 인구감소에 따른 지역소멸 3. 기술경쟁 심화, 산업구조 변화. 그동안 수많은 전문가가 지적해온 사항들이라 새삼스러울 게 없다. 이런 여건이 지금 갑작스러운 개혁의 당위성으로 떠오른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념과 철학의 부재는 교육개혁을 추진하는 현 정부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예나 지금이나 보수 정부는 경쟁 교육의 강화를 지향하고 극단적인 중앙중심적 사고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실제로 10여 년 전 이명박 정부의 교육기술과학부 장관 시절에 이주호 장관은 고교 다양화 등 교육의 무한 경쟁체제를 도입한 장본인이다. 또한 보수 엘리트는 지역소멸을 외면하고 서울 집중을 부추긴다. 노무현 정부가 행정수도 건설로 지방분권화를 시도했을 때 헌법재판소는 관습헌법 개념을 끌어들여 대전환의 물꼬를 틀어막은 대표적인 보수세력이었다. 지금도 정부는 반도체학과 증원으로 수도권 집중의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 이런 정체성과 어긋나는 맞춤형 교육모델 제시와 지방시대 표방은 보수정권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구호가 아닌지 의심이 간다. 여기서 당연히 교육개혁을 구현하는 정책들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주호 장관은 대학의 자율성을 확대하고 지역 대학의 관리 권한을 지방정부에 넘겨 대학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정책 목표를 제시했다. 대학의 자율성 확대는 언뜻 들으면 타당하고 멋있어 보인다. 그러나 자율의 주체가 대학 구성원이 아니라 대학법인이 되면 우리의 상상과 기대는 산산이 부서진다. 교육과 연구의 자율성은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이지만, 한국 대학체제에서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사립대학에서는 지금까지 ‘법인의 자율성’을 의미해왔다. 사학법인이 대학을 사유재산처럼 여기고 학사 및 인사·재정에 전권을 휘두르는 사립대학의 현실에서 법인의 자율성 확대는 대학의 처분을 포함한 광범위한 자율을 의미하기에 대학체제의 급격한 변화를 초래할 수도 있다. 지방대학의 관리 권한을 지방정부에 이양하여 지방정부와 지방대학이 협력하고 지역에 맞는 인재를 양성하려는 지방대학시대(대통령 국정과제 85번)는 분명 멋진 구호처럼 들린다. 그런데 이런 전환에 동반하는 산적한 현안을 어떻게 처리할지 방향도 지침도 교육부는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국립대 관리 권한 이양의 법적 근거와 이양 권한의 범위, 지방정부와 대학의 협력 관계를 설정하는 법적 근거, 지방정부가 대학을 지원할 수 있는 법적 근거 및 고등교육 재정의 확보 등 대학의 생존에 결부된 문제가 산적해 있는데 단기간에 해결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쩌면 지방대학시대에 대한 명확한 비전과 미래상이 있는지조차 의심이 갈 정도이다. 고등교육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할 항목은 “과감한 규제혁신·권한 이양 및 대학 구조개혁”이다. 핵심은 사립대학의 설립과 운영에 관한 4대 요건, 즉 교사(校舍), 교지(校地), 교원(敎員), 교육용 기본재산에 관한 각종 기준의 완화이다. 자율화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사립대 법인협의회가 오랫동안 요구한 사항이라는 점이 상기되어야 한다. 이제 대학법인들은 아마도 사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규제 완화 조항들을 이용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이런 정책들이 사립대 재정개선에 도움을 줄지도 의문이지만, 교육환경의 질 저하는 피할 수 없는 미래로 보인다. 예를 들어 겸임교수나 초빙교수 등 비정년트랙 교수의 비중이 전체 교원의 5분의 1에서 3분의 1로 확대되면, 대학의 정년트랙 교원 비중은 그만큼 줄어들고 그에 비례해 대학교육의 질적 저하가 예상된다. 나아가 이제 교육부의 대학평가가 폐지되고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의 인증평가로 바뀐다. 획일적인 대학평가의 폐지를 환영하면서도 본질적인 변화는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대학 간 자율적 협의체인 대교협이 실제로는 다수의 교육부 주요 사업을 위탁하여 수행하는 기관으로서 ‘교육부 2중대’라는 의혹을 사고 있기 때문이다. 인증평가에 대한 형식적인 문제도 있다. 대교협은 회원교의 회비를 받아 운영되는 기관이다. 그런데 회원교를 대상으로 국가의 재정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인증평가를 수행하는 건 모순이고 이해충돌 소지가 있어 보인다. 또한 대교협의 전문성에 대한 지적도 나오는 가운데, 전문가들이 엉뚱한 지표로 대학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평가가 왜곡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정원·학사·재정 운영에 관한 자율권 확대 조치는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을 대학 내로 끌어들이는 조치나 다름없다. 정원을 자율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면 사립대는 물론이고 국립대마저 인기 학과 위주로 설치하고 더 많은 정원을 배정할 게 뻔하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지방의 대부분 사립대는 어문학, 철학, 역사 등 인문대 학과들과 물리, 수학, 생물 등 자연과학 기초학문 학과들을 폐지하거나 통폐합하고 있다. 최근에는 수도권 대학에서도 기초학문 분야 외면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그 자리에는 물리치료, 치위생학 등 의료보건 분야 학과를 비롯하여 사회복지, 조리, 동물복지 등 취업의 단기 성과가 높은 학과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중이다. 따라서 자율적 정원조정이 시작되면 기초학문 분야는 예고된 재앙처럼 고사할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국립대라도 기초학문의 보루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미 국회에 발의된 ‘기초학술기본법’이나 한국인문사회연합회가 제안하여 국회교육위원장이 발의를 준비 중인 ‘인문사회기본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체 연구개발(R&D) 예산의 몇 퍼센트만이라도 인문사회 분야에 의무적으로 할당하여 최선의 학과 존치와 후속 연구세대 양성을 위한 토대를 지켜야 한다. 또한 교육개혁 추진을 위한 입법 과제의 하나로 제시된 시·도지사-교육감 러닝메이트제 도입은 교육개혁의 지향점이 교육자치의 말살이 아닌지 의심케 한다. 지역에 보다 더 다가가는 교육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명백한 억지로 보인다. 권한과 역할이 전혀 다르고 상하관계도 아닌 자치단체장과 교육감을 러닝메이트로 묶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시·도지사-교육감 러닝메이트제 발상의 저변에는 ‘교육이 행정의 하위에 있다’고 여기는 인식이 깔려 있다. 발상 자체가 교육의 자율성을 보장한 헌법 조항을 위배한다. 현재의 교육감 선거 시행의 허점을 파고들어 교육자치제 자체를 무산시키려는 불순한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교육감이 자치단체장의 러닝메이트가 되면 교육은 정치에 종속되고 교육자치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교육부 장관이 어느 날 갑자기 교육개혁을 외치며 지난 정권의 교육정책을 무조건 폐기해버린다. 자유를 강조하는 대통령과 보조를 맞추어 장관은 자율에 방점을 찍고 사학법인의 오래된 민원을 처리하듯 일사천리로 진행한다. 개혁에 대한 교육 주체들의 우려와 적응 여부는 크게 고려하지 않는 눈치다. 교육이 산업을 위하여 존재할 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대통령의 철학에 맞게 실용적인 정책의 도입은 개혁으로 포장된다. 개혁 추진 과정의 혼란과 정쟁이 불을 보듯 훤히 예상된다. 무엇보다도 국민적 지지와 교육관계자와 학교 구성원의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정책마다 교육 주체들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과제가 예상되어 다수 야당을 설득하여 법을 개정하는 과정이 무난히 완료될지 심히 우려된다. 혹여나 야당의 반대로 교육개혁이 실패했다는 알리바이를 만들어 총선에서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는 속셈이 아니기를 바란다. 백년대계를 위한 교육개혁이 추진되기를 바라며 ‘교육’의 정의를 다시 한번 상기한다. 교육은 사람을 가르치고(敎) 키우는(育) 행위이다. 라틴어 e-duc-are(이끌어내다)에서 유래한 영어 단어 ‘education’은 배우는 사람으로부터 (잠재)능력을 이끌어내는 행위를 가리킨다. 모든 인간은 각기 다른 능력을 갖고 태어나기에 그 능력이 발현되도록 가르치고 키우는 행위가 바로 교육이다. 전인교육이 중요한 이유다. 필자의 경험상 강의실의 학생은 자신들이 존중받는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집중한다. “단 한 명도 놓치지 않는 개별 맞춤형 교육”이 한 명이라도 서열에서 이탈하지 않는 기능적인 접근이 아니라 전인교육을 위한 이념적 토대로서 설정되기를 바란다.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학과 졸업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 학위 취득 △2021년 5월부터 한국 대학체제의 개혁 방안을 모색하는 ‘삼각지연구팀’에 참여해 <대학법체제정비>(2021)와 <고등교육 패러다임 대전환을 위한 대학정책> 공저 △교수신문 기획연재 '대학법과 대학의 미래'의 책임편집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2023-01-26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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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준의 함께꿈] 교육은 백년대계 …경제논리 끼어들면 미래 없다 2022년이 저물어 간다. 봄부터 브랜드 칼럼 ‘안상준의 함께꿈’을 쓰기 시작하여 세모를 맞이하니 마음속에서 소소한 감회가 꿈틀거린다. ‘함께 꿈을 꾸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교육에서 보고자 했다. 교육은 대한민국이 10위권 경제대국으로 발전하는 원동력이었다. 땅 팔고 소 팔고 다 팔아서라도 내 자식은 대학에 보내야 한다는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절박한 소망이 이루어낸 결실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지독한 교육열이 대한민국을 망치는 주범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교육열이 대학의 서열화를 부추겨 대학체제 전반이 부실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급기야 10위권 경제대국 대한민국의 대학체제는 세계를 선도하기는커녕 소멸을 걱정할 지경에 이르렀다. 대학교수로서 필자 역시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고, 부끄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무엇이 문제인가? 필자는 ‘함께꿈’을 쓰기 전에 특별기획으로 네 편의 칼럼에서 ‘위기의 대학’을 다루었다. 관리의 위기, 정체성의 위기, 경쟁력의 위기 그리고 소멸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위기의 근원과 나름의 대안을 제시했다. 그 가운데 가장 중대한 위기를 꼽는다면 단연 ‘경쟁력의 위기’라고 생각한다. 대학의 수준은 교수의 역량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학 구성원의 역량과 관련한 정체성의 위기와 경쟁력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실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근원적인 문제와 맞서야 한다. 대학의 존재 이유 그리고 사회적 책무와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장기적으로 또 근본적으로 문제의 근원을 천착하는 노력을 기울이고자 한다. 다른 한편으로 관리의 위기와 소멸의 위기는 대학을 둘러싼 환경 및 정부의 정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왜 대학이 소멸하는가? 대학이 소멸해도 되는가? 소멸은 폐쇄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지역의 인구 소멸에 따른 대학의 소멸이 과연 정당한지 의문이다. 또한 대학의 소멸이 지역의 소멸을 부추기는 인과관계에 대한 정합성도 검증이 필요하다. 이런 의문과 검증에 대한 문제 제기는 대학의 본성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대학은 고등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라는 정의에는 변함없겠지만, 사회경제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소멸될 수 있는 특수목적의 기관인가? 여기서 다시 한번 대한민국 대학체제의 특수성에 주목한다. 대학의 공공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사립대학 법인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법원은 사립대학은 재단법인의 사유재산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사립대학은 공공재정을 요구하면서도 공공재정의 지원에 따른 책무와 감사는 거부한다. 그들은 등록금 인상을 주장한다. 법인의 자율성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재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도 공공성 문제가 불거지면, 부실과 비리의 꼬리표를 달고 있는 사립대학까지 나서서 당당하게 공공재정의 투여를 요구한다. 이러니 전반적인 대학에 대한 우호적 국민 여론이 형성될 수 없고, 대학 정책은 여기서부터 표류한다. 우리나라 대학의 80%를 차지하는 사립대학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한국 대학체제의 발전은 요원하다. 그 연장선상에서 국가가 설립하고 운영하는 국립대는 대학정책의 중심에서 벗어나 방치되고, 획일적인 평가에 휩쓸려 특수한 성질을 잃어버렸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국립대학은 지방에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지방대의 위신은 나날이 추락해 나락을 향하는 지경이다. 지금의 지방 국립대들은 이미 사회적 낙인이 찍힌 상태에서 발전을 도모해야 하는 시지프스와 같은 운명을 지녔다. 한편 보수언론은 철밥통 국립대의 무사안일주의를 비난하고, 학생들은 지방 국립대라는 이유로 외면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한민국 대학을 한 단계 진화·발전시킬 수 있을까? 먼저 교육 당국은 대한민국 대학체제에 대한 종합적인 조사와 발전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대한민국 대학체제가 미래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하여 어떤 방향으로 진화해야 하는지 대계를 제시하고 이에 맞춰 개별 대학의 특성을 정밀하게 진단하고 사명과 역할을 부여해야 한다. 이때 설립 주체, 대학의 위치, 지역의 특수성, 대학의 특수한 역량 등 다양한 요소들을 평가하여 국가의 지원계획과 평가방침을 제시해야 한다. 적어도 소멸 위기에 놓인 지방대학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재 교육부 장관이 언론을 향하여 쏟아내는 미래 대학정책의 방향은 국가적 차원의 대학체제 전환이라기보다는 사립대학 법인의 오랜 민원을 해결하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대학의 자율성을 존중한다는 미명 아래 대학의 설립과 운영에 관한 규정과 규제를 마구잡이로 풀어주는 게 아닌지 의문이다. 정부 재정을 투여하기 어렵고 국민의 눈총 때문에 등록금을 올릴 수도 없으니, 규제라도 풀어서 사립대학 스스로 살아갈 방도를 찾으라는 조치는 아닌가 싶다. 이러한 규제 완화 대책에 사립대학의 부실과 비리를 방지할 대책은 포함되어 있는지 묻고 싶다. 도덕적 해이에 빠진 사립대학 법인들이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하고 교육환경이 열악해졌는데도 법인을 해산하지 않는 사태에 이를 경우에 대해서는 과연 어떤 대안을 마련해놓았는지 의문이 든다. 필자의 짧은 소견으로는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고로 교육은 백년대계라 했다. 사람을 키우는 일에 근시안적 경제논리가 끼어들면 교육의 미래는 없다. 교육은 결코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학생이 돈으로 보일 때 교육은 부패하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교수가 강의실에서 진리를 매개로 학생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강의실에는 허위로 가득 찬 지식과 정보만 난무할 것이다. 대학이 진리의 전당만을 고집할 수 없지만, 끝내 진리의 전당이라는 기본 기능을 무시하는 한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적어도 다른 선진 국가들과 경쟁할 고등인력 양성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過而不改 是謂過矣’.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치지 않으니, 이것이 진정한 잘못이다. 교수신문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 ‘과이불개(過而不改)’가 유래한 구절이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치지 않는 풍조가 세상을 덮고 있으니 교수들의 탄식이 하늘을 찌른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잘못을 저지르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상대화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정부와 정치권 인사들의 이런 행태가 자주 확인되어 국민의 불쾌지수가 매우 높아진 상태다. 과이불개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교육부는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좀체 개선의 여지도, 개전의 정도 보이지 않아 답답하기 그지 없다. 그들은 극우보수정권이 들어서면 본능적으로 영혼 없는 공무원처럼 움직이고, 중도보수정권이 들어서면 대학 위에 군림하여 평가의 칼을 휘두른다. 교육정책은 5년마다 근간도 비전도 없었다는 듯이 바뀌고, 교육과정은 갈수록 퇴행한다. 얼마 전 국가교육위원회가 수많은 논란을 잠재우고 통과시킨 개정 교육과정을 보노라면 기가 막힐 지경이다. 형식은 지극히 비민주적이고 내용은 너무나도 퇴행적이다. 국민의 의견수렴 절차는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전문가 집단의 연구결과를 뒤집는 요식 행위가 되었고, 21세기 사회를 살아갈 미래세대가 배울 교과과정의 내용에 생태전환교육과 노동교육, 사회적 소수자 교육 및 성평등교육이 삭제되거나 왜곡되었다. 더욱이 연구진이 한사코 용인하지 않은 ‘자유민주주의’를 민주주의를 대체하는 용어로 결정함으로써 진실을 호도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다가 다시 학도호국단이 출범하지나 않을까 싶은 기우마저 든다. 미래지향적인 교육과정 대신 정권의 입맛에 맞는 내용과 이념을 가르치겠다는 의도가 자못 궁금하다. 교육이 그토록 가볍고 사소한 것인지 묻고 싶다. 미래세계는 진실로 불투명하게 전개될 전망이다. 영국의 콜린스 사전은 올해의 단어로 ‘퍼머크라이시스’(permanent+crisis=영구적 위기)를 선정했다. 기후위기, 우크라이나 전쟁, 인플레이션, 코로나 팬데믹 등 장기간에 걸친 불안정과 불안이 끝날 기미가 없다는 절망적인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독일 언어학회가 선정한 올해의 단어인 ‘시대전환’(Zeitenwende)도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지난 3월 독일 총리 올라프 숄츠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연설에서 사용하였고, 전쟁이 진행되면서 핵전쟁이나 제3차대전이 심상치 않게 거론되고 또 에너지문제가 국민의 삶을 위협하고 있어 이제 세계는 새로운 시대로 전환하고 있고, 동시에 전환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에서 시작된 세계 경제의 하강 국면이 코로나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 등 예상하지 못한 변수들을 만나 전 세계 경제를 침체 국면으로 몰고 가는 듯하다. 인플레이션과 전기 부족 사태는 현재 유럽 각국의 서민층을 심각한 공포로 몰아넣고, 각국 정부는 시민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하여 엄청난 규모의 에너지 보조금 지출을 감수하고 있다. 이런 정세 속에서 청년들은 꿈을 잃어가고 있다. 영국의 옥스퍼드 사전이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고블린 모드’(Goblin Mode)는 이런 청년 정서를 되돌아보게 한다. 이것은 ‘대충 만족하고, 나태하고, 부주의한 상태’를 가리키며, 그런 상태를 표출하며 사회적 규범이나 기대를 거부하는 청년 세대의 무기력한 모습을 지적한다. 드레스 코드나 사회적 교류를 거부하는 태도가 대표적인 사례다. 현재 한국 사회에 흔히 보는 청년들의 모습이 영국에서도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세계는 초연결사회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이렇듯 전 세계적으로 올해의 단어들이 각국의 국민에게 짜증을 유발하는 현실과 비관적인 미래를 반영한다. 더욱이 내년에는 경기침체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리라고 전문가들은 우려와 경고를 쏟아낸다. 그렇다면 내년에 선정되는 올해의 단어는 금년보다 훨씬 우울하고 참혹하지 않을까 두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꿈꾸는 삶’을 지향한다. ‘함께꿈’이 있는 한 기어코 쉽게 무너지지 않고 다시 피어나리라는 희망을 갖는다. 역시 새해다. 새해에는 새로운 다짐, 새로운 희망으로 힘차게 출발해보고 싶다. 교육부 또한 부디 미래지향적 보편적 교육을 실천하여 필자의 기대에 등불이 되어주길 기대해본다.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학과 졸업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 학위 취득 △2021년 5월부터 한국 대학체제의 개혁 방안을 모색하는 ‘삼각지연구팀’에 참여해 <대학법체제정비>(2021)와 <고등교육 패러다임 대전환을 위한 대학정책> 공저 △교수신문 기획연재 '대학법과 대학의 미래'의 책임편집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2022-12-27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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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준의 함께꿈] 독서를 즐기는 독일인… 독서가 괴로운 한국인 최근 서울 마포구청장이 구립 작은도서관 운영 종료를 발표하면서 한바탕 논란이 일었다. 지난 20여 년간 마포구가 작은도서관 설치와 운영에서 모범을 보인 지자체였다는 점에서 이 발표는 적잖은 충격을 던졌다. 결과적으로 ‘도서관을 폐관하지 않는다’는 마포구 측 방침이 기사로 확인되었지만 이 소동은 도서관 확산에 관심이 많은 필자에게 우리 사회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작은도서관 운영 종료를 고려한 표면적인 이유는 예산 절감이었다. 지난해 작은도서관 운영에 들어간 마포구 예산은 7억2000만원, 이용자 수는 15만~20만명으로 1인당 3600~4800원 정도 쓰였다. 예산 소요액과 시민 편익을 고려할 때 예산 절감은 타당한 이유로 보이지 않는다. 이어진 마포구청장의 해명은 다른 이유를 짐작케 한다. “(부모들이) 마포를 떠나는 이유가 아이들이 좋은 대학을 못 가기 때문에 그렇다. ··· (고교생들에게) 돈도 안 들어가고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잘 만들어주자, 이게 제 목적”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그러면서 작은도서관에 스터디 카페 기능을 추가·대체하면 자율학습 환경이 보강되어 주요 대학 진학률이 오를 것이라고 호도했다. 게다가 구청장은 “(관내 대학) 총장들한테 동냥하러 갔다. 마포구 아이들이 다 지방으로 대학교 간다고 한다. 우리 지역 주민들에게 문턱을 좀 낮춰주는 제도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는 일부 주민 의견을 들어 지역 차별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발언으로 미루어 구청장이 평소에 책 혹은 독서문화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지녔는지 짐작이 갔다. 독서를 사치로 인식하니 일부 주민 의견에 부화뇌동하여 작은도서관 폐쇄 결정을 내린 것은 혹시 아닐까? 마포구 작은도서관의 소동은 사실 독서에 관한 한국인의 낮은 인식과 무관하지 않다. 지표가 보여주듯이 한국인의 독서문화는 선진국과 거리가 멀다. 한국인이 독서에 할애하는 시간은 (2015년 기준) 하루 평균 6분에 불과하다. 독서 시간이 짧은데 독서량이 많을 리 없다. 2021년 국민독서실태조사(2020년 9월~2021년 8월)에 따르면 1년간 한국 성인의 평균 종합 독서량은 4.5권이다. 2019년 7.5권에 비해서 3권 줄었고, 2015년 유엔 연간 평균 독서량 조사 당시 9.6권과 비교하면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2015년 기준으로 선진국 국민과 비교하면 국제적인 망신에 가까운 수준이다. 미국은 79.2권, 프랑스는 70.8권, 일본은 73.2권이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독서량과 독서 횟수가 갈수록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연간 종합 독서율, 즉 1년에 1권 이상 읽거나 들은 사람 비율이 2020년 47.5%로, 한국 성인 중 절반 이상이 1년에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는다. 이는 2019년(55.7%)보다 8%포인트가량 떨어진 수치다. 2013년 71.4%를 기록한 이래 해마다 떨어지는 추세(2015년 65.3%, 2017년 55.9%)라 더욱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요컨대 한국인은 책을 ‘매우 적게’ 읽고, 시간이 지날수록 독서량이 더 줄어든다. 낮은 독서량과 독서율은 출판시장에 영향을 미친다. 문학지 가운데 다수가 사라졌고 사회과학 출판시장은 오래전에 고사한 가운데 유명 시집 시리즈는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독자를 잃은 작가들이 부업을 겸하지 않고 생계를 잇기 어려운 현실에서 우리는 위대한 작가의 탄생을 기대할 수 있을까? 한국 문학의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을 다룬 칼럼에서 “한국인은 책은 읽지 않으면서 노벨상만 바란다”는 2020년 미국 시사교양지 <뉴요커> 문학평론가 마이틸리 리오의 지적은 통렬하면서도 한편 적확해 얄미운 감정마저 솟는다. 적은 독서량과 짧은 독서 시간은 ‘읽고 이해하는 능력’, 즉 ‘문해력’ 저하로 이어진다. 최근 들어 언론 매체들은 한국인이 디지털 정보 홍수에 빠져서 단편적인 정보 흡수를 지나치게 중시한 나머지 문맥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고 지적한다. 또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학교 교육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독서 능력과 문해력이 더욱 떨어지고 상하 간 수준의 격차가 더욱 벌어진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제 학업성취도 평가(PISA) 연구’ 보고서(2021년 12월)를 보면 문해력 저하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원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상위 5개국(한국, 일본, 싱가포르, 핀란드, 에스토니아) 학생의 평가 결과를 2009년 성취도와 비교·분석한 보고서에 따르면 읽기, 수학, 과학 등 세 가지 영역에서 한국 학생의 평균 점수가 2009년에 비해 모두 내려갔다. 그중에서도 특히 읽기 능력의 성취도가 낮고 복합적 텍스트 읽기 능력은 심각한 상황으로 나타났다. 문장의 의미를 그대로 이해하는 능력인 ‘축자적 의미 표상' 정답률(46.5%)은 9년간 15%p 낮아져 5개국 가운데 가장 크게 떨어졌다. 또한 서로 다른 저자가 쓴 복합적 유형의 자료를 읽고 평가해 의견을 적는 문항이나 여러 자료를 검토해 실생활의 문제에 적용하는 문항의 정답률은 현저히 낮았다. 한국인이 평생 책을 가장 많이 읽는 시기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다. 그때는 부모 권유(강요)로 책을 읽는다. 그러나 대개의 부모는 고학년에 이르면 독서를 권하지 않거나 심하면 독서를 못하게 막는다고 한다. 성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책과 관련된 긍정적인 경험 없이 독서량이 꾸준히 줄다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거의 읽지 않게 된다. 독서는 즐거운 기억보다 고통스러운 숙제의 기억으로 남아 있으니 성인이 되어서도 다시 책을 잡는 게 쉽지 않으리라 본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문해력 하락에 대하여 “읽기 목적이 분명한 상황에서 과제 중심 독서와 문제 해결적 독서가 취약하고 이 점을 보완할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평가원의 제언은 공허하게 들린다. 평가원은 수능을 주관하는 기관이다. 수능이 어떤 시험인가? 수능 국어 문제는 지문 읽기와 정답 고르기를 통해 학생의 우열을 가리는 게 목표다. 학생은 책을 읽고 생각하고 주장하고 토론하는 과정보다 오로지 문제를 풀기 위해 ’지문‘을 읽는다. 그러니 독서는 늘 성적과 연계되고, 독서는 어린 시절의 악몽과도 같다. 문해력을 증진하는 교육의 모범적인 해외 사례들은 이미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다만 입시 교육 때문에 학교 교육에서 구현하지 못할 뿐이다. 캐나다는 쓰기 교육을 중시한다. 학생들이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해 주장의 이유와 근거를 제시하면 선생님은 글의 짜임과 맥락을 중심으로 지도한다. 네덜란드는 선생님이 문제를 제시하고 학생이 독서와 조사, 정리를 통해 스스로 문제 해결 방법을 찾는 방식을 선호한다. 또한 핀란드는 가정 내 독서와 토론을 통하여 독서의 동기를 부여하는 독특한 독서교육을 권장하고, 미국은 책을 읽고 토론을 통해 내용을 숙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에세이를 작성하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요컨대 문해력 교육의 핵심은 학습자 스스로 읽고 쓰는 능력의 향상이다. 결국 한국인이 책을 적게 읽고 또 읽고도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학교에서 읽고 쓰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참된 국어교육이 없는 한 한국인의 독서문화는 영원히 정착되지 않는다. 그러니 진정한 독서의 참맛을 알게 하려면 반드시 수능을 대비한 문제풀이식 국어교육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필자가 1999년 4월에 마인츠시를 찾았을 때 거리에는 '지난 천년 간 가장 위대한 인물 구텐베르크'라는 매우 흥미로운 현수막이 나붙었다. 유럽인이 근대문명을 개척하고 오늘날 지배적인 위치에 오르는 데 가장 큰 공헌이 인쇄술, 즉 책의 보급이라는 의미였다. 마인츠시의 브랜드 가치는 구텐베르크와 분리될 수 없다.(동아일보, 1999. 1. 7 참조) 인쇄술의 발달과 보급은 수천 년간 지속된 특정 계층의 문자 독점을 깨는 역사적인 이정표였다. 15세기 중엽부터 유럽 사람은 쓰고 베끼는(write, transcribe) 대신 활자를 사용하여 종이책을 찍어냈다(press). ‘새로운 매체’를 통해서 사람들이 성경과 과학서적을 읽으면서 우리가 ‘근대’라 부르는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성직자의 성경해석 독점이 끝나자 곧이어 종교개혁(1517년)이 일어나고, 혁명적인 주장이 담긴 전단지(Flugblätter)가 날아다니면서 독일 농민전쟁(1524년) 같은 민중의 저항이 전국적인 수준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생각하는 개인’의 탄생을 알리는 데카르트 명제('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나 근대적 지식권력의 중요성을 표현한 베이컨의 명제('아는 것이 힘이다')가 출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후 유럽 전역에는 책 읽는 문화가 보급되었다. 국가와 군주는 앞다투어 도서관을 지었고 시민들은 카페에 모여 책을 읽었다. 이들은 낡은 질서를 부정하며 계몽을 외쳤고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식민지를 개척하고 재화를 축적했다. 구질서를 파괴하는 정치혁명(프랑스혁명)과 새로운 사회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산업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이 바로 ‘책 읽는 시민’이었다. 그들이 사회의 주인으로서 민주주의를 구현했고 자본주의적 생산 질서를 창안한 것이다. 필자가 경험한 독일 대학의 역량은 도서관 투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과마다 전문 사서가 배치된 별도의 도서관이 있고, 학과 규모에 따라 도서관 규모가 결정되지만 장서가 20만권에 이르는 단일 학과 도서관이 있을 정도로 독일 대학의 도서관 투자는 인상적이었다. 독일 대학의 학과 도서관은 학생의 학습활동이 이루어지는 중심 공간으로, 학생들은 수업에 필요한 도서를 일차적으로 학과 도서관에서 찾고 교수들은 해당 학기 수업에 사용할 교재를 정해진 서가에 비치함으로써 수강생이 공평하게 이용하도록 배려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대학의 위기를 거론하며 고등교육 재정 확충이 필요하다고 아우성이다. 재원을 두고 교육부와 교육청이 으르렁거리고, 정치권은 어찌 되었든 이번에는 재정 확충의 토대를 마련하겠다고 결의를 다진다. 그 와중에 대학의 역량 강화를 위하여 도서관 예산이 대폭 늘어나는 미래를 꿈꾸어 본다. 아무리 이미지 중심 시대가 도래했다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읽고 쓰고 상상하는 교육이 일상에서 자연스레 자리 잡지 않으면 그 사회는 결국 도태되기 마련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독서를 부디 숙제 혹은 입시 수단으로만 여기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을 책임지는 어른들의 인식 변화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부디 도서관이 늘어나고 부모와 함께 자연스레 책을 읽는 아이들로 가득 차는 올바른 독서문화가 우리에게도 정착되길 바라본다.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학과 졸업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 학위 취득 △2021년 5월부터 한국 대학체제의 개혁 방안을 모색하는 ‘삼각지연구팀’에 참여해 <대학법체제정비>(2021)와 <고등교육 패러다임 대전환을 위한 대학정책> 공저 △교수신문 기획연재 '대학법과 대학의 미래'의 책임편집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2022-11-29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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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준의 함께 꿈] '여자 무솔리니' 총리까지 … 유럽에 부는 극우 돌풍 무솔리니 집권 이래 100년 만에 이탈리아 정국 주도권이 극우 정당 수중에 들어갔다. 극우 정당 후보가 연거푸 결선투표에 오른 최근 두 차례 프랑스 대선은 프랑스 국민에게 극우 정권을 허용할 것인지 물었다. 게다가 복지국가 스웨덴에서 네오나치 세력에 뿌리를 둔 극우 정당이 원내 2당에 오르는 이변이 연출되었다. 이 밖에도 스페인의 ‘폭스’, 네덜란드의 ‘자유당’, 독일의 ‘독일을 위한 대안’, 영국의 ‘영국국민당’ 등 유럽 내 극우 정당들의 지지세 확대는 예사롭지 않다. 민주주의 체제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수준으로 극우 세력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극우 세력이 기성 정치의 대안으로서 우리 미래를 지켜줄까? 우리는 히틀러와 무솔리니 같은 희대의 극우 지도자들을 다시 맞이할 수도 있을까? 이탈리아, 프랑스, 스웨덴의 상황을 진단하고 극우 세력의 확산이 초래할 미래를 예측해본다. 지난 22일 이탈리아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가 탄생했다. 그의 이름은 조르자 멜로니, 그에게는 ‘여자 무솔리니’라는 별명이 따라붙는다.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은 그의 총리 취임 선서는 베니토 무솔리니가 로마 진군으로 권력을 쟁취한 지 정확히 100년 만에 다시 파시스트 정당이 집권에 성공했음을 알리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탈리아의 운명이 극우파 수중으로 넘어갔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탈리아에서 신자유주의 확산에 협조한 중도 정당들의 몰락은 오래된 현상이다. 그들의 정치적 빈 공간은 ‘오성운동’ 같은 포퓰리즘 정당이나 ‘동맹’이나 ‘이탈리아 형제들’ 같이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를 기반으로 이민자와 외국인 노동자 수용을 거부하는 극우 정당들에 의해서 채워졌다. 2021년 2월 거국내각은 이탈리아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하나의 이정표로 삼을 만하다. 그해 1월 오성운동이 주도한 연립정부가 붕괴하자 코로나19 팬데믹의 확산과 사회경제적 위기에 대처할 정부의 구성이 강력하게 요청되었다. 정파적 색채가 엷은 마리오 드라기가 총리로 지명되었고 의회 내 최대 정파인 오성운동을 비롯하여 좌우 정파들을 아우르는 거국내각이 구성되었다. 유럽중앙은행 총재를 지낸 온건한 경제학자인 드라기는 코로나 정국에서 무난하게 비교적 안정적으로 국정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야기된 경제적 위기를 타개하려는 드라기의 대규모 민생 지원 방안이 오성운동 등 다수 정파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서 거국내각의 균열과 드라기의 사임으로 이어졌다. 거국내각 분열의 결정적인 원인은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푸틴에 대한 유럽연합의 제재를 둘러싼 정당 간 이견이었다. 드라기는 유럽연합이나 나토가 주도하는 푸틴 제제에 동조하고 러시아 가스 수입 금지 조치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반면 포퓰리스트와 우파 정치인들은 수입 금지 조치에 따른 에너지 가격 인상을 우려하고 러시아와 외교적 단절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드라기와 마찰을 빚었다. 거국내각 붕괴 이후 이탈리아 여론조사는 우파연합의 승리를 예상케 했다. 역대 최저 투표율이 보여주듯이 이탈리아에서 정치는 극도의 혐오 대상으로 전락했고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은 더욱 깊어졌다. 멜로니의 집권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주요 정당 가운데 홀로 드라기의 거국내각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이 선택으로 멜로니는 정파적 지분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정치인이 아니라는 선명한 정치적 인상을 이탈리아 국민에게 강렬하게 심어주었다. 15세부터 파시스트 정당의 계보를 잇는 ‘이탈리아 사회운동’ 청년부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멜로니는 공공연히 무솔리니를 찬양하며 극우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미혼모로서 홀로 딸을 키우며 2008년 31세에 베를루스코니 4번째 내각의 최연소 청소년 장관으로 발탁된 입지전적 이력은 인상적이다. 기성 중도 정당의 가치를 대체하는 멜로니의 행보가 자못 궁금하다. 제5공화국 이래 프랑스의 정치는 중도 우파와 좌파의 대결 구도로 치러졌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간 프랑스 대선에서 드러난 중요한 경향은 중도 정당의 몰락과 극우 정당의 부상으로 요약된다. 이런 경향의 결정판은 2017년 대선이었다. 프랑스 중도 정당의 몰락은 내부자의 반란으로 입증되었다. 집권 사회당의 30대 엘리트 각료 에마뉘엘 마크롱은 사회당의 미래를 포기했다. 그리고 그는 신당(‘전진하는 공화국’)을 창당하며 대선 후보로 나섰다. 마크롱의 포퓰리즘에 기댄 선거 전략은 화려한 조명을 받았다. 그의 결선투표 상대는 전통적인 맞수 중도 우파의 후보가 아니라 극우 정당 ‘국민연합’의 마린 르펜이었다. 1차 투표에서 각기 23%와 21%를 득표하여 1·2위로 결선에 오른 마크롱과 르펜의 대결에서 여론의 관심은 마크롱의 승리보다 극우 정권의 탄생 여부에 쏠렸다. 66% 대 33%, 마크롱의 대승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프랑스 국민의 양심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2022년 마크롱과 르펜은 다시 결선투표에서 맞붙었고 이번에도 마크롱의 승리로 끝났다. 58.3% 대 41.7%. 득표율 차이는 33%에서 17%로 줄어들었다. 이 수치의 중요성은 대선 한 달 만에 치른 프랑스 총선에서 확연하게 드러났다. 집권 여당은 하원 577석 중 과반인 289석에 한참 못 미치는 251석을 확보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5년 전 350석에 비하면 충격적인 패배라 할 만하다. 국민은 결코 두 번 속지 않는다. 선거 결과를 분석해보면 135석으로 원내 2당 지위를 얻은 좌파연합의 선전이 대단히 고무적이다. 그러나 선거의 진정한 승자는 89석으로 원내 3당에 오른 극우 정당 ‘국민연합’으로 보인다. 이전 총선에서 얻은 의석이 8석에 불과했고 르펜의 대선 패배를 고려하면 국민연합의 약진은 ‘집권을 허용할 순 없었다. 하지만 의회에서 잘해 보라’는 유권자 마음으로 읽힌다. 르펜의 연설은 이에 화답한다. “이제 우리는 전국 정당이 되었다. 우리의 성공으로 마크롱은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고, 마크롱으로부터 국가를 지켜낼 수 있게 되었다. ··· 프랑스와 프랑스인의 국익이 우리의 유일한 기준이다.” 노란 조끼를 거리로 불러냈던 마크롱의 부자 감세와 연금개혁, 노동개혁 등 주요 정책에 수정이 불가피해 보인다. 극우파의 확장은 대표적인 복지국가 스웨덴에서도 심상치 않다. 지난 9월 11일 치른 스웨덴 총선에서 극우 성향의 ‘스웨덴민주당’이 원내 제2당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이 당은 1988년 나치를 추종하는 극우단체와 외국인 수용을 거부하는 포퓰리즘 진보당의 합병으로 탄생했고, 기괴하고 혐오스러운 복장의 네오나치주의자들(일명 ‘스킨헤드’)이 당의 이미지를 대변하면서 오랫동안 스웨덴 국민에게 외면당했다. 스웨덴민주당의 변신은 2005년 26세의 ‘스웨덴 극우 건축가’ 임미 오케손이 당대표로 선출되면서 시작되었다. 오케손은 낡고 부패한 기성 정치 세력에 대한 대안으로서 극우 정당을 제시한 인물이다. 그는 극우 인종주의 성향의 인사들을 퇴출하고 당에서 외국인 혐오와 반유대주의에 대한 언급을 금지함으로써 당의 인종주의적 색채를 희석하고 네오나치의 이미지를 벗겨내는 데 주력했다. 그 결과는 지지율 상승으로 돌아왔다. 2006년 총선에서 득표율 2.9%를 획득하여 이미지 변신에 성공하더니 2010년 총선에서는 원내 정당이 되었고 급기야 2018년 총선에서는 62석(17.8%)을 얻어 제2야당이 되는 기염을 토했다. 이런 성장세에 비추어 보면 올해 총선 결과는 어느 정도 예고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유로존 경제 규모 2위인 프랑스와 3위인 이탈리아, 그리고 대표적인 복지국가 스웨덴에서 일어난 극우 정치 세력의 확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좁게 보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저항이고, 넓게 보면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대한 경고다. ‘프랑스와 프랑스인의 국익이 우리의 유일한 기준’ ‘스웨덴을 다시 위대하게’와 같은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캐치프레이즈가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처럼 유권자들에게 큰 호소력을 갖는다는 얘기다. 같은 맥락에서 난민 없는 사회, 외국인 범죄자 추방 등 민족주의와 인종주의가 버무려진 공약들이 유권자의 불안 심리를 깊숙이 파고든다. 그 밑바탕에는 정글 자본주의의 귀환과 사회적 양극화를 동반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파산에 따른 반동심리가 작용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각국의 경기부양책과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으로 기업의 연쇄 도산은 막았지만 일자리의 질은 나빠지고 다수 노동자의 삶은 불안의 울타리로 내몰렸다. 10년 이상 장기 불황의 늪에서 각자도생의 윤리가 널리 퍼지면서 사회 구성원은 정규직 일자리를 두고 아귀다툼을 벌였다. 시민의 생존이 불안해지고 미래가 불투명해질 때 제도권 기성 정치를 불신하는 포퓰리스트 정치 세력, 특히 극우 정당의 지도자들이 주목을 받는다. 오늘도 여전히 생필품과 에너지 비용 상승, 불평등 증가, 계층이동 감소, 늘어나는 이민자 등 다양한 요인들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절망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100년 전 경제위기 속에서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등장했다. 다수 국민은 열광했고, 폭력과 전쟁의 광기에 기꺼이 동참했다. 그 결과 수천만 명이 희생되고, 1945년 전쟁 종식과 함께 광기는 물러갔다. 비극의 역사를 마감하고 유럽은 의회민주주의를 회복하고 경제 건설에 매진하는 ‘황금의 30년’을 보냈다. 한쪽에서는 인민을 위한 정부를 표방하고, 한쪽에서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시민의 행복한 삶을 책임지는 정부를 표방했다. 또한 평화와 연대에 기초한 국제연합과 유럽연합 같은 국가 간 연합 체제들이 발전했다. 이제 극우 세력의 약진은 민주주의를 실천하며 우리가 지켜왔던 인권과 자유의 가치를 질식할지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난 50~60년간 좌파와 우파는 자유주의적 가치와 개인의 자유, 소수자의 권리를 발전시켜 왔지만 스웨덴민주당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이러한 진보가 멈추고 그간 당연히 여겼던 가치들이 퇴보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스웨덴 정치학교수 요나스 힌포스의 우려는 의미심장하다.(중앙일보 2022. 9. 22) 나아가 자국 우선주의 기치 앞에서 연대와 평화는 사치스러운 가치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이미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한 상황에서 독일이나 프랑스의 극우파가 집권한다면 유럽연합의 미래는 낙관할 수 없다. 민족 정서에 기초하여 힘의 우위를 강조하는 극우세력들 간 충돌이 재연되는 날에 인류는 다시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어리석은 전쟁으로 빠져들지도 모른다. 쿠오바디스. △연세대 사학과 졸업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 학위 취득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2021년 5월부터 한국 대학체제의 개혁 방안을 모색하는 ‘삼각지연구팀’에 참여, <대학법체제정비>(2021)와 <고등교육 패러다임 대전환을 위한 대학정책> △교수신문 기획연재 '대학법과 대학의 미래'의 책임편집 2022-10-27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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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준의 함께꿈] 尹의 편향된 교육철학… 혼돈의 교육정책 “대학 수시모집 경쟁률 서울-지방대 격차 3년 연속 커졌다”. 2023학년도 대입 수시모집 원서접수 결과에 관한 모 언론사 기사 제목이다. 미충원이 예상되는 대학의 80%가 비수도권에 몰려 있다는 분석에서 의약계열 지역인재 선발 의무, 지방대 육성 정책 등 백약이 무효하게 여겨진다. 원서접수 기간(9월 15일)에 교육부는 대학정원 감축 계획을 발표했다. 전체 감축 인원 1만6197명 가운데 비수도권 대학에서 1만4244명(88%)을 줄인다고 한다. 악순환의 결과로 보이지만 이제 수험생의 외면과 교육부의 정원 감축으로 지방대학의 폐교는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는 중이다. 당연히 지방 소멸은 예정된 수순이다. 우울한 소식은 초·중등교육에서도 들린다. 정부는 6~21세 학령인구가 감소하는 추세에 따라 공립학교 교원 정원을 줄인다고 발표했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동결한 사례는 있지만, 교원 정원의 감축은 사상 초유의 조치여서 학교 현장에 미치는 파장이 크리라 예상된다. 교총은 “과밀 학급이 여전히 많은 상황에서 교원 정원을 줄이면 학생 학습권, 교사 교권은 침해당할 수밖에 없다"고 비판한다. 유·초·중등부터 대학원까지 지금 대한민국의 교육체제는 학령인구 감소로 대전환의 단계에 들어섰다. 전 국민이 교육전문가를 자처할 만큼 교육열이 높은 우리 사회에서 대전환은 복잡한 이해관계의 충돌을 동반한다. 그런데 이 복잡하기 짝이 없고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교육정책이 현 정부에서 표류하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기껏해야 경제정책의 하위 범주로서 교육정책이 수립·실시되는 정도에 그친다. 여기에는 교육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의 편향적인 시각이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대선 후보 시절부터 대통령의 교육철학은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특이했다. 작년 이맘때 국립안동대를 방문하여 학생들과 격의 없이 나누었다는 대화의 내용은 눈과 귀를 의심할 만한 수준이었다. “임금에 큰 차이가 없으면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큰 의미가 있겠느냐.” 험난한 취업시장 진입을 애둘러 표현했다고 선의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절박한 심경으로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는 공감하기 어려운 언설로 보인다. “인문학이라는 것은 공학이나 자연과학 분야를 공부하며 병행해도 되는 것이며 많은 학생들이 대학 4년과 대학원까지 공부할 필요가 없다.” 인문학 교수인 필자가 받은 충격과 모욕은 차치하고, 전 국민의 마음을 보듬고 정책을 구현해야 하는 대통령직에 도전하는 분의 자세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대통령의 편향적인 교육관은 반도체 사랑에서 여과 없이 드러났다. “교육부는 과학기술 인재를 공급하는 역할을 할 때만 의미가 있다.” “(교육부는) 경제부처란 생각을 갖고 산업부, 중기부, 과기부와 함께 인력을 양성하라.” 대통령이 업무보고 자리에서 교육부에 주문한 발언들이다. 이미 당선자 시절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구성에서 교육을 ‘과학기술교육 분과’의 하위에 두었을 때, 교육 분야의 비중이 축소되고 최소한의 자율성도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교육전문가들은 우려했다. 윤석열 정부의 올바른 교육정책 부재 가능성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출한 칼럼은 참으로 씁쓸했다. 편향적인 교육관은 교육부 장관 인선의 난맥으로 이어졌다. 최초의 내정자(김인철)가 낙마하고, 두 번째 내정자(박순애)는 인사청문회 없이 임명장을 받았다. 무수히 제기된 도덕적 결함과 별개로, 장관은 교수로서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고 교육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었다. 교육전문가에 대한 신뢰 상실 말고 다른 근거로 해석하기는 어려웠다.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취학 연령 5세 하향’ 정책을 발표한 장관은 학부모들의 격렬한 항의를 견디지 못하고 35일 만에 사퇴했다. 교육 분야에서 일어난 참사였다. 현재까지 교육부 장관은 공석이다. 국정감사를 앞둔 시점에서 장관 없는 맹탕 국감에 대한 야당의 비판이 제기된다. 그러는 가운데 언론에는 교육부 장관 내정자에 관한 ‘설’이 기사로 뜬다. 최근에는 이명박 정부의 교육부 장관 이주호, 현 한국개발연구원 교수의 입각설이 유력하게 대두된다. 돌고 돌아 또 이명박 정부의 인사로 낙점되는가? 인재풀이 너무 좁은 게 아닌가? 의구심이 난무한다. 자칭 경제 대통령 아래서 이주호 장관은 고교서열화와 경쟁교육을 부추기는 교육정책을 구현했다. 자사고 설립 등을 골자로 하는 ‘고교다양화 300’ 정책,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일제고사) 실시 및 평가결과 공개 등 그는 단연 경쟁교육 신봉자다. 그런데 현재 고등학교는 2025년 고교학점제 시행을 앞두고 다양한 세부정책을 다듬는 중이다. 이런 와중에 경쟁교육 신봉자가 교육부 수장에 오른다면, 교육 현장의 혼란은 불을 보듯 뻔하다. 또한, 이주호 교수는 지난 3월에 사실상 교육부 해체 의중을 내비친 ‘대학혁신을 위한 정부개혁 방안’ 보고서를 발표했다. 교육부의 대학정책 기능은 총리실로, 대입정책은 국가교육위원회로, 산학협력은 과기정통부로, 전문대 지원은 고용노동부로 이관하자고 주장했다. 교육부 해체론자가 교육부 수장에 오르는 이율배반적인 상황은 논란을 예고한다. 대통령은 교육에 관한 철학과 비전을 제시한 적이 없지만, 한편으로는 교육체제에 대한 인식이 그리 깊지 못하고 한편으로는 교육계에 대한 신뢰 또한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대한민국은 이제 선진국으로서 그에 맞는 인재를 배출해야 그 위상을 누릴 수 있다. 인재 배출은 교육전문가인 교수와 교사의 몫이다. 대통령은 당연히 그들의 사기를 진작하고, 그들의 역량을 맘껏 펼칠 수 있는 공간을 배려해야 한다. 그래야 대통령이 역점을 두고 추진하는 반도체 인재 양성도 가능하다. 그런데 반도체 인재만 양성해서는 부족하다. 진부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구글과 애플이 혁신적인 기술개발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인문학 전공자를 채용하는가? 인문학 없이 휴먼테크가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사례 아닌가? 교육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 부족은 정책의 오류로 드러날 개연성이 높다. 국가적 관심사로 떠오른 학제개편과 지방시대위원회의 문제를 중심으로 짚어보자. 지난 7월, 취학 연령 5세 하향 정책이 국민을 어리둥절하게 할 만큼 느닷없이 발표되었다. 사실 취학 연령 조정은 오래전부터 학제개편과 함께 논의된 사안이었지만, 이 숙성되지 않은 정책은 학부모를 설득하지 못한 채 격렬한 항의에 직면했다. 학부모가 수긍하지 못하는 교육정책은 결코 구현되지 못한다. 자식의 미래를 좌우하는 상황에서 항의도 거의 민란 수준으로 제기되기 때문이다. 장관은 사퇴할 빌미를 찾은 듯이 홀연히 떠났다. 이 사태는 대통령에게 귀중한 교훈을 남겼다고 생각한다. 결코, ‘대통령은 국민을 이길 수 없다.’ 학제개편과 관련하여 독일의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 독일에서는 원래 대학진학까지 초등 4년과 중등(김나지움) 9년, 총 13년이 걸렸다. 또한, 대학에는 학사과정이 없어 졸업장은 석사학위(Magister 또는 Diplom)를 가리켰다. 그래서 독일 학생의 노동시장 진입은 다른 나라에 비해서 현저히 늦었다. 유럽연합이 출범하고 노동력의 교류가 본격화하자 사회문제가 되었고, 그에 따라 볼로냐 프로세스*에 맞게 학제를 변경할 필요성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1999년 이후 지난한 토론과 합의과정을 거쳐 김나지움은 8년으로 줄었고, 대학에는 학사과정(B.A.)이 생겼다. 무려 200여 년 만의 학제 변화였다. 결국, 학제개편은 국가적 인력양성의 비전 아래 장기 계획을 수립하고 치밀한 세부정책이 마련될 때 가능하다는 교훈을 제시한다. 현 정부는 ‘지방시대’ ‘지방대학 시대’를 열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했다. 이를 이행할 목적으로 기존의 ‘국가균형발전위원회’와 ‘자치분권위원회’를 통합한 대통령 자문기구 ‘지방시대위원회’를 만들겠다고 한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두 위원회의 특별법을 통합한 새로운 특별법을 통해 지역 간 불균형을 해소하고 지역 특성에 맞는 발전과 자치분권으로 지역이 주도하는 균형발전을 추진함으로써 국민 누구나 어디서든 균등한 기회를 누리는 지방시대를 구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나 두 특별법이 지닌 상징성이나 기능과 업무상 내용의 차이를 고려하면, 지방시대위원회 특별법의 국회 통과는 장담하기 어렵다. 그보다도 문제의 핵심은 지방시대위원회의 위상이 예산편성권과 집행권이 없는 자문기구라는 점이다. 구체적인 정책 수단이 없는 자문기구가 균형발전과 자치분권 정책 수립과정에서 예상되는 무수한 갈등 요인을 어떻게 제어할지 의문이다. 여기서 반면교사 삼아 우여곡절 끝에 9월 27일 출범한 국가교육위원회(국교위)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국교위는 사회적 합의에 기반한 교육 비전, 중장기 정책 방향 및 교육제도 개선 등에 관한 국민의견 수렴·조정 등에 관한 업무를 수행하는 대통령 소속 행정위원회이다. 이런 위상에 대해서 출범 당시부터 국교위는 방송통신위원회나 개인정보보호위원회처럼 정부조직법상 중앙행정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반론이 거셌다. 그런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내년도 예산에 반영된 국교위의 예산과 조직은 행정위원회에 걸맞게 왜소하기 짝이 없다. 예산 88억, 조직 31명. 방통위나 개인정보위와 비교하면 각기 4분의 1 또는 5분의 1에 불과하다. 교육부의 정책 독점과 전횡을 막고 명실상부한 백년대계를 설계하는 기관으로서 탄생한 국가교육위원회가 오히려 교육부의 정책 기능을 보조하는 심의·자문기구에 그치거나, 아무리 좋게 봐도 교육부의 정책 추진을 보조하는 수준에 머물지도 모르겠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이럴진대 국가균형발전과 자치분권이라는 국가적 운명을 짊어진 지방시대위원회가 또 하나의 자문기구로 탄생하여 역할과 임무를 체계적으로 추진한다는 것은 기대난망이다.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끌어올린 에너지는 교육열이다. 이제는 그 에너지가 끓어 넘쳐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그만큼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한다는 의미다. 정부는 유·초등부터 대학원까지 미래세대가 맞이하는 사회에 맞는 인재를 배출하는 선진국형 교육체제를 수립할 시대적 사명을 부여받았다. 4차산업혁명, 기후정의, 새로운 에너지원 등 우리 앞에는 전대미문의 도전 과제들이 놓여 있다. 그러나 여전히 경제논리에 종속된 교육철학과 그에 기반한 교육정책이 현 정부를 지배하는 듯이 보인다. 교육의 공공성을 강화하기 위한 국가의 투자를 지극히 아까워하는 한편, 각자도생을 추구하는 개인의 무한한 교육투자를 당연시하는 분위기에 편승하려는 기류가 여전히 강하다. 정부에 당부한다. 교육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인재를 두루 기용하여 난국을 타개하기를. 당연히 교육전문가에 대한 대통령의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 ‘지방시대’와 ‘지방대학 시대’가 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지방시대가 와야 국가균형발전도 실현되고, 2등국민이 없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이 오지 않겠는가. [*볼로냐 프로세스 :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단일한 고등교육제도를 설립하고 대학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고자 1999년에 출범한 프로그램.] △연세대 사학과 졸업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2021년 5월부터 한국 대학체제의 개혁 방안을 모색하는 ‘삼각지연구팀’에 참여, <대학법체제정비>(2021)와 <고등교육 패러다임 대전환을 위한 대학정책>(근간) 공저 △교수신문 기획연재 '대학법과 대학의 미래'의 책임편집 2022-09-29 06: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