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석작가iohcsj@gmail.com
- (전) 주간조선 편집장
- 과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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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의 추억 '反수소'...한국 물리학도 도전중 [최준석 작가, ‘나는 과학책으로 세상을 다시 배웠다’ 저자. [최준석, 과학의 시선] 스위스 제네바의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는 GBAR라는 이름의 실험을 한다. 한국에서는 서울대 물리학과 김선기 교수(입자물리학-실험)가 이끄는 그룹이 참여하고 있다. CERN은 세계 최대의 입자가속기 LHC(거대강입자충돌기)를 갖고 있고 있는, 세계 고에너지 물리학의 중심지다. 크고 작은 실험을 많이 하며, GBAR실험은 그중에서 아주 작은 실험에 속한다. GBAR실험이 흥미롭게 보이는 건 반물질(Anti-matter)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반물질‘은 ’물질‘(Matter)과 전기 부호만 다르고 나머지 물리적 특징은 똑같다. 가령 전자(Electron)는 물질인데, 전자의 반물질은 양전자(Positron)이다. 전자는 음전기를 가지나, 양전자는 양전기를 띤다. 질량, 스핀 등 나머지는 두 개가 똑같아 구분할 수 없다. 전자 말고도 모든 입자는 반물질 쌍을 갖고 있다. 즉 반입자가 있다. 수소의 반물질은 반수소, 양성자의 반물질은 반양성자 하는 식이다. GBAR실험의 목표는 ‘반(反)수소‘의 중력 가속도 정밀 측정이다. 한국 그룹은 GBAR(Gravitational Behaviour of Anti hydrogen at Rest) 실험을 위해 두 가지 실험 장비를 만들었다. 반양성자(anti-proton)를 모아놓은 장치(반양성자 트랩)와 TOF(Time of Flight) 카운터라는 장치다. 김 교수는 지난해 여름, 이들 장비를 갖고 제자들과 제네바로 떠났다. 장비를 그곳에 설치하고, 데이터가 나오는 걸 볼 거라고 했다. GBAR실험에는 모두 9개국 그룹이 참여한다. 인류는 중력가속도를 정밀하게 측정하려고 애를 써왔다. 중력이 자연에 있는 기본 힘 4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궁극적인 중력이론으로 얘기되는 양자 중력 이론(Quantum Gravity Theory)을 갖고 있지 않다. CERN이 반수소를 갖고 중력가속도를 측정해보는 것도 자연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반수소를 극저온에서 공중에 가둬뒀다가, 자유낙하 시키면서 ‘중력가속도’를 재보겠다는 구상이 GBAR실험이다. 반수소의 중력가속도는 수소와 같은 걸로 추정된다. 하지만 재보기 전에는 100% 장담할 수 없다. 그러니 해보는 거다. 반물질은 태초에는 물질과 똑같은 양이 존재했다고 물리학자는 믿고 있다. 빅뱅 직후의 우주는 대단히 뜨겁고 큰 에너지로 가득 찼고,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방정식 E=mc^2에 따르면 에너지(E)와 물질(m)은 모습을 바꾼다. 그래서 빅뱅 직후 높은 에너지는 순간적으로 물질과 반물질 쌍으로 바꾼다(쌍생성). 그리고 물질과 반물질은 서로 만나는 순간 에너지로 바뀌면서 폭발한다(쌍소멸). 이때 물질에 갇혀 있던 에너지는 감마선 형태로 나온다. 감마선은 대단히 에너지가 높은 광자다. 그러니 빅뱅 직후에는 쌍생성과 쌍소멸이 끝없이 일어났고, 물질과 반물질은 똑같은 양이 만들어지고, 똑같이 사라졌다. 그런데, 지금 물리학자들이 궁금해 하는 건 반물질은 다 어디로 갔느냐는 것이다. 빅뱅 이후 138억년이 지난 지금, 우주에는 반물질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우주에는 물질이 가득할 뿐, 반물질은 모두 사라졌다. 반물질은 CERN의 LHC(거대강입자충돌기)와 같은 인공적인 시설에서 만들어지거나, 자연에서 순간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물질로 된 별이 있으면, 반물질로 된 별도 있어야 하는데, 천문학자는 반물질 별이 빛나는 건 관측하지 못했다. 태초에 무수히 많았던 반물질들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중성미자(Neutrino)가 ‘반물질 실종’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물리학자들은 보고 있다. 다시 얘기하면 우주에 물질만 존재하고, 반물질은 왜 사라졌는가 하는 궁금증은 중성미자를 파고들면 이해할 수 있을 걸로 추정되고 있다. 중성미자는 전기를 띠지 않고(중성) 질량은 아주 가벼운 입자다. 현재까지 물리학자는 세 종류가 있다는 걸 확인했고, 네 번째 중성미자가 있을 걸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중성미자의 질량을 알아내려고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마디로 중성미자는 미지의 입자이고, 새로운 물리학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때문에 21세기 초 입자물리학은 물론이고, 천체물리학에서도 뜨거운 토픽 중 하나다. 한국의 입자물리학자와 천문학자 100명은 지난해 11월 한국에도 중성미자 망원경(KNO, Korean Neutrino Obsevatory)를 만들자고 정부에 제안해 비상한 관심을 끈 바 있다. KNO를 갖고 물리학자가 탐구할 제 1목표가 ‘반물질 실종’ 사건 이유 규명이다. KNO는 중성미자 천문학과 중성미자 물리학을 위한 도구가 되며, 이번 보고서 작성 책임자인 유인태 성균관대 교수(입자물리학 실험)는 “KNO프로젝트를 시작한다면, 한국의 기초과학이 아주 크게 도약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유인태 교수는 중성미자 물리학 실험에 참여해왔으며, 현재 한국물리학회 부회장으로 일한다. 유인태 교수는 전화 통화에서 “우주는 왜 물질로 가득 찼는가 하는 건 중성미자와 반중성미자의 진동 확률이라는 걸 각각 조사해 비교하면 된다. 두 개가 다르다면, 분명 차이가 있어야 한다. 그 단서가 일본의 중성미자 실험에서 일부 나왔다. 그리고 이를 정밀하게 측정하려고 하는 게 한국의 KNO이고, 일본의 차세대 실험인 ‘하이퍼-가미오칸데’다”라고 말했다. 유 교수에 따르면, 고에너지 물리를 하기 위한 입자가속기를 갖고 있는 일본의 국립연구소인 J-PARC는 중성미자 세 개 중의 하나인 뮤온중성미자를 만들어 300㎞ 떨어진 슈퍼-가미오칸데 지하실험장으로 쏜다. 그런데 때로 J-PARC는 뮤온중성미자 대신 뮤온중성미자의 반물질인 반뮤온중성미자를 만들어 보낸다. 일본의 중성미자 관측소인 슈퍼-가미오칸데는 뮤온중성미자(물질)를 보내올 때와, 반 뮤온중성미자(반물질)를 보내올 때의 진동 확률을 비교 측정했다. 두 개의 진동 확률이 똑같으면 새로울 게 없다. 그런데 두 개가 다르면 크게 새로운 일이 된다. 물질-반물질 비대칭의 증거가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유 교수는 “일본의 실험에서 일부 단서는 나왔지만 단정적으로 말할 정도는 아니다. 측정의 불확실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도 기존의 ‘슈퍼-가미오칸데 실험’을 업그레이드해서 감도를 높이려고 한다. 그게 ‘하이퍼-가미오칸데’실험을 지난해 착공한 이유다”라고 말했다. 중성미자에 ‘물질-반물질 비대칭’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시선을 돌리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강신규 서울과학기술대학 교수는 한국의 대표적인 중성미자 물리학 이론가 중 한 명이다. 강신규 교수는 전화통화에서 “중성미자는 현재 세 종류가 있는 걸로 알려져 있는데, 그 외에도 질량이 대단히 무거운 중성미자가 있지 않을까 하고 물리학자들은 생각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강 교수에 따르면, 그 대단히 무거운 중성미자가 우주가 진화하면서 ‘경입자’와 ‘반(反)경입자’로 붕괴했다는 이론이 있다. 경입자는 전자, 뮤온, 타우입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반 경입자는 ‘양전자’ ‘반 뮤온’ ‘반 타우입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대단히 무거운 중성미자의 특정한 대칭성(CP대칭성=전하거울대칭)이 깨져 있으면 ‘경입자‘가 ’반 경입자‘보다 약간 많이 생긴다. 강신규 교수는 그 비율은 물질인 ‘경입자’가 100만1개 만들어질 때, 반물질인 ‘반 경입자‘가 100만개 만들어지는 정도라고 했다. 이 경우, 백만 개의 물질과 반물질은 서로 만나 사라지나, 나머지 한 개의 물질은 만날 반물질이 없으므로 사라지지 않고 우주에 남게 된다. 그리고 빅뱅 이후 우주의 온도가 내려가면서 그 온도가 100 GeV(1 기가전자볼트=10억 전자볼트) 아래로 내려갔을 때 물질과 반물질의 비대칭으로 남은 ‘물질’이 보존되게 된다. 즉 만들어진 물질은 더 이상 반물질을 만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해서 물질(경입자)은 우주에 무수히 많이 남게 되었고, 반물질은 모두 사라졌다는 게 이론가들의 아이디어다. 어쨌든 이제 우리는 손에 경입자를 갖고 있다. 그런데 문제가 더 있다. 경입자만으로는 현재 우주에 있는 물질을 만들 수 없다. 우주에는 경입자(전자, 뮤온, 타우입자) 외에, 중입자(Baryon)가 있다. 중입자는 세 개의 쿼크(Quark)로 이뤄진 양성자와 중성자를 가리킨다. 양성자와 중성자와 같은 중입자는 어디에서 왔을까. 강신규 교수는 “초기 우주에서 온도가 매우 높을 때에, 경입자가 중입자로 변신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제시한 이론이 나와 있다. 이를 ‘스팔레론 과정’(Sphaleron Process)이라고 한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양성자나 중성자는 스팔레론 과정에 따라 경입자가 변한 것으로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김수봉 전 서울대 교수는 한국을 대표하는 중성미자 물리학(실험) 연구자이다. 김수봉 교수에 따르면, 한국이 KNO를 만들면 일본의 중성미자 관측소보다 더 성능이 좋다. 일본 J-PARC가 쏜 중성미자를 갖고 한다는 면에서 일본 가미오칸데 실험과 같으나, J-PARC로부터 떨어져 있는 거리가 가미오칸데 실험장(300㎞)보다 한반도 남부의 대구 인근 비슬산(1000㎞)이 더 멀다. 그 때문에 중성미자의 진동 변환 특성을 보기에 낫다. 그리고 KNO는 ‘하이퍼-가미오칸데’보다 더 크게 지으려하기에 감도가 더 뛰어나다. 김수봉 교수나, 유인태 교수는 일본에서 하는 중성미자 실험에 참여하면서 중성미자 연구자로 성장해왔다. 그리고 이후 한국의 독자적인 중성미자 실험인 르노 실험(2011년 이후)을 수행하면서 자신들의 능력이 세계 수준임을 증명한 바 있다. 일본에서 배웠으나, 일본 못지않은 실력을 쌓은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KNO를 통해 중성미자 물리학 분야에서는 일본과 적어도 나란히 서고 싶어 한다. 일본은 중성미자 연구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미국보다 앞서 있다. KNO 실험을 준비하는 데는 3500억 원이 든다. 그런데 지하 1000m 속에 시설을 한번 만들어놓으면 운영비는 별로 들 게 없다. 3500억원, 돈 액수로 보면 작지 않다. 하지만 한국의 경제력으로 보아 그리 부담스런 액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쓸데없는 곳에 돈 낭비하지 말고, 과학자들이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2021-01-08 1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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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중성미자 삼국지 [최준석 작가, ‘나는 과학책으로 세상을 다시 배웠다’ 저자. [최준석, 과학의 시선] 러시아 핵물리학의 중심도시는 두브나(Dubna)다. 두브나는 모스크바 북쪽으로 112㎞ 떨어진, 볼가 강변에 있다. 러시아 최고의 핵물리학연구소인 합동원자핵연구소(JINR)가 이곳에 있다. 북한 핵물리학자들이 JINR에서 공부했다고도 전해진다. 2017년 9월 19일 한-중-일의 중성미자 물리학자 세 사람이 JINR에서 상을 받았다. 서울대 김수봉 교수, 중국 고에너지물리연구소의 왕이팡 박사, 그리고 일본 KEK(고에너지물리연구기구)의 니시가와 고이치로(西川 公一郎) 박사다. 이들이 받은 상은 브루노 폰테코르보 상. 중성미자 물리학자를 대상으로 하는 권위 있는 상이다. 흰색 대리석 기둥과 빨간색 벽의 건물 전면이 아름다운 JINR 건물에서 빅토르 마트비프(Matveev)소장이 시상했다. [러시아 두브나에 있는 JINR 건물] 브루노 폰테코르보는 러시아에서 활동한 이탈리아 물리학자다. 중성미자 연구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그를 기념하기 위해 러시아 합동원자핵연구소가 1995년 상을 만들었고, 입자물리학 분야의 중성미자 연구자를 대상으로 한다. 동아시아 삼국의 물리학자 세 사람이 나란히 이 상을 받은 건 이례적이다. 이들의 공적은 거칠게 얘기하면 중성미자의 질량을 측정하는 데 한 걸음 더 내디뎠다는 거다. 중성미자는 아직 베일에 싸여 있다. 중성미자는 전기적으로 중성이고, 아주 작은 입자이다. 질량이 아주 작기에 ‘미자’라는 단어가 이름에 들어가 있다. 중성미자는 질량도 모르고, 몇 종류가 있는지도 모른다. 좀 어려운 용어가 되겠지만, 중성미자의 CP(전하-패리티)대칭성이라는 게 깨져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중성미자는 다음 세대 입자물리학으로 가는 길을 열어줄 걸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래서 중성미자 물리학은 세계적으로 경쟁이 치열하다. 중성미자 물리학의 선두는 일본이다. 일본은 미국보다 앞서 있다. 일본 도쿄대학 우주선연구소의 물리학자들은 노벨물리학상 두 개를 받은 바 있다. 2002년 노벨상은 ‘중성미자 천문학’ 시대를 열었다는 공로로 받았고, 2015년 노벨상은 ‘중성미자 진동’(neutrino oscillation)이라는 현상 확인을 평가받았다. 특히 중성미자 진동 현상은 중성미자가 질량을 갖고 있다는 증거여서, 파문이 컸다. 기존의 입자물리학 교과서에 따르면 중성미자는 질량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교과서 내용(‘표준모형‘)을 뒤집는 연구 결과가 나왔으니, 충격파는 거셌다. 입자물리학자들은 ‘표준모형 너머의 새로운 물리학’을 찾아 나서야 했다. 김수봉, 왕이팡, 니시가와 고이치로 세 사람이 한 일은, 2015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두 사람이 한 일의 후속 작업이다. 중성미자 종류는 현재 최소 세 개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세 종류는 전자중성미자, 뮤온중성미자, 타우중성미자다. 중성미자 세 개는 시간이 지나면 다른 중성미자로 변한다(‘경입자 섞임’ mixing). 2015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도쿄대학의 가지타 다카아키 교수는, 세 개의 중성미자 중 전자중성미자가 뮤온중성미자로 바뀌는 ‘변환상수’를 측정했다. 그와 같은 해 노벨상을 받은 아서 맥도널드 교수(캐나다 퀸즈대학)는 뮤온중성미자가 타우중성미자로 바뀌는 변환상수를 측정했다. 두 노벨상 수상자가 하고 남은 연구는, 타우중성미자가 전자중성미자로 바뀌는 변환상수 측정이다. 이 측정 작업은 쉽지 않았다. 타우중성미자가 전자중성미자로 바뀌는 정도는 유달리 작았기 때문이다. [중국 다야 베이 실험 시설 내부의 광센서들]. 왕이팡 중국 고에너지물리연구소(IHEP) 박사가 이끄는 다야 베이(Daya Bay) 실험은 2005년 시작했다. 중국 남부의 홍콩에서 동북쪽으로 58㎞ 떨어진 광둥성 다야(大亞)만에 있는 핵 발전소들 인근에 지하실험장을 만들었다. 서울대 김수봉 교수 그룹은 왕이팡 그룹보다 1, 2년 늦게 실험을 시작했다. 과학기술부로부터 2006년 3월 연구비 116억원을 지원받아, 12개 대학의 연구자 34명이 참여하는 르노 실험(RENO, Reactor Experiment for Neutrino Oscillations, 원전중성미자실험) 그룹을 만들었다. 전남 영광의 한빛 원전 인근의 지하에 실험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공사 착수는 중국 다야 베이 실험보다 훨씬 늦었지만, ‘빨리 빨리’를 잘하는 한국인의 특장 때문인지, 검출기 설치를 중국보다 먼저 마쳤다. 르노 그룹은 2011년 11월 건설공사를 마치고, 검출기를 가동해 데이터를 얻기 시작한다는 걸 알리는 국제 세미나를 서울대에서 열었다. 세미나에 참석한 중국의 왕이팡 그룹은 “우리는 2012년 6월쯤 공사를 마무리하고, 검출기 가동을 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한국 그룹은 이 말을 듣고 좀 뿌듯했다. 중국의 다야 베이 실험과 한국의 르노 중성미자 실험은 원자력발전소 인근에 자리잡은 게 특징이다. 원자력발전소의 원자로에서는 중성미자가 어마어마하게 쏟아진다. 또 중성미자는 입자가속기에서도 만들 수 있고, 우주에서 날아오기도 하며, 지구 깊숙한 땅속에서도 나온다. 르노 그룹은 2012년 초 원하는 ‘변환상수’ 값을 얻었다. 발표하기 전에 데이터를 보며 논문을 다듬었다. 그런데 아뿔싸, 다야 베이 실험이 예상치 못하게 3월 8일에 논문을 내놓았다. 6월이 되어야 가동한다고 했던 중국 그룹이 어떻게 데이터를 얻었단 말인가, 충격이었다. 르노 그룹은 부랴부랴 작업을 해서 다야 베이의 발표 3주 뒤에 논문을 내놓았다. 논문이 학술지에 실린 날짜를 기준으로 하면 중국 그룹보다 1주일 늦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국 측은 2011년 11월 서울대에서 열린 르노 실험 워크솝에 참석했다가 충격을 받았다. 귀국해서 비상을 걸었고, 그해 크리스마스를 전후해서 일부 시설 가동에 들어갔다. 검출기가 모두 8개였는데, 그중에 되는 걸 먼저 가동했다. 그리고 데이터를 얻어, 마지막으로 남은 중성미자 변환상수를 확인할 수 있었다. [2016년 브루노 폰테코르보 상 수상자들...왼쪽 두 번째가 김수봉 전 서울대 교수]. 이로부터 5년 뒤 러시아 두브나에서 한-중-일의 경쟁 그룹 대표들은 브루노 코르보 상을 받기 위해 만났다. 이때 찍은 기념 사진이 온라인에 있어, 찾아볼 수 있었다. 수상자 세 사람과, 연구소 소장 해서 모두 네 사람이 나란히 서 있다. 사진을 보면서, 미묘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김수봉 교수의 뒤통수를 친 왕이팡 박사나, 뒤통수를 맞은 당사자나 표정이 밝지 않아 보인다. 내가 그렇게 봐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중성미자 선진국인 일본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과 중국이 바짝 추격해 오는듯해서 마음이 약간 급해질 것 같다. 특히 중국 고에너지 물리학의 급부상에 민감해 하지 않나 싶다. 한국물리학자들이 작성한 한 보고서는 중국 다야 베이 실험의 결과를 이렇게 평가한다. “중국에서 진행된 대형 국제공동연구 중 처음으로 세계적인 성과를 거둔 실험이었다. 중국 기초과학의 수준을 여러 단계 끌어올렸다고 평가된다.” 중국의 중성미자 실험을 이끈 왕이팡 박사는 실적을 인정받아 중국고에너지물리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중성미자 연구자가 중국 고에너지물리학계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중성미자 연구가 세계 입자물리학 분야에서 현재 비중이 어떤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중성미자 연구 경쟁은 끝나지 않았다. 중성미자 분야에는 미스터리가 많다. 메달이 많이 남아 있다. 새로운 라운드가 시작되고 있다. 그걸 알기 위해서는 더 성능이 좋은 장비를 구축해야 한다. 차세대 중성미자 실험으로 왕이팡의 중국 그룹은 ‘주노’(JUNO)실험을 준비하고 있다. 2015년 건설 공사에 들어갔고 2021년 데이터를 얻는 걸 목표로 한다. 왕이팡 그룹은 중국 정부로부터 전폭적인 연구비 지원을 받고,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JUNO실험의 목표는 세 개의 중성미자 가운데 어느 게 가장 무겁고, 어느 게 가장 가벼운지를 확인하는 거다. 한-중-일 삼국 중 중성미자 연구에서 가장 앞서 있는 일본은 3세대 가미오칸데 실험을 준비하고 있다. 3세대 실험에는 ‘하이퍼-가미오칸데’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1세대 실험 ‘가미오칸데’와 2세대 실험 ‘슈퍼-가미오칸데’가 노벨상을 따냈고, 하이퍼-가미오칸데 실험도 노벨상을 목표로 실험을 준비하고 있다. 2019년 12월 건설이 승인되었고, 2027년 데이터를 얻는 걸 목표로 한다. ‘하이퍼-가미오칸데’실험의 목표는 중성미자의 CP대칭성 붕괴 여부 확인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물질-반물질 대칭 파괴다. 물질-반물질 대칭 파괴를 달리 표현하면, 우주에 왜 물질만 있고, 반물질은 없는가 하는 문제이고, 이걸 확인하는 수단 중 하나가 중성미자의 CP대칭성 붕괴 여부 확인이다. 물질은 알 것 같은데, 반물질은 무엇인가? 두 개는 전하의 부호가 서로 다르고, 나머지 성질은 똑같다. 가령, 전자는 물질이고, 양전자(Positron)는 반물질이다. 전자는 음의 전기를 띠고, 양전자는 양의 전기를 갖고 있다. 우주의 아주 이른 시기, 즉 빅뱅 직후에는 물질과 반물질이 우주에 똑같은 양으로 존재했다. 예컨대 전자와 양전자가 똑같은 숫자로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주가 진화하면서 물질만 남고 반물질은 사라졌다. 이건 큰 미스터리라고 물리학자들은 말한다. 한국의 르노 실험은 후속 실험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김수봉 교수는 동분서주했으나, 후속실험인 르노-50실험 연구비를 마련하지 못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어쨌든 르노 실험 연구비는 작년으로 끊겼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르노 실험은 한국의 중성미자 물리학이 세계적인 수준에 근접했음을 알린 바 있다. 어렵게 마련한 120억원의 연구비로, 한국 고에너지 물리학사에서 돌출적으로 뛰어난 성과를 올렸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의 지원을 받지 못해 바쁜 걸음에 제동이 걸렸다. 연구에 참여했던 중성미자 연구자는 흩어졌고, 장비는 영광의 지하에서 곧 녹슬기 시작할 것이다. 입자가속기가 없는 나라에서 중성미자 연구는 비교적 적은 돈으로 고에너지물리학을 키울 수 있는 수단이다. 중성미자 연구는 분야가 많아, 한국에는 르노실험 말고 AMoRE실험(IBS지하실험연구단 김영덕 단장이 대표)이 있다. 하지만 AMoRE실험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다행스러운 건 새로운 중성미자 실험이 모색되고 있다는 거다. 한국의 입자물리학자들과 천문학자 100명이 KNO(한국 중성미자 관측소)라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3500억원이 들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학계가 구상한, 최초의 빅 사이언스 실험이다. 이 정도 규모는 한국에서 해본 적이 없다. 현재 이들은 정부의 누구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KNO를 성사시킬 수 있을지 모르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자기들끼리 모여 토론을 해왔고, 그 결과를 지난달 과학기술부에 제출했다. KNO가 어떻게 되는지를 일본과 중국, 그리고 미국과 유럽도 지켜보고 있다. 다야 베이 실험이 중국 기초과학을 도약시켰듯이, KNO는 한국 물리-천문학을 비상하게 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러면 한국의 젊은 중성미자 연구자가 또다시 러시아 두브나로 상을 받으러 가게 된다. 두브나로 가는 길은, 노벨상으로 가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2016년 브루노 폰테코르보 상 수상자들...왼쪽 두 번째가 김수봉 전 서울대 교수]. 2020-12-16 04:3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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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물리학자는 왜 日 연구소를 찾나? [최준석 작가, ‘나는 과학책으로 세상을 다시 배웠다’ 저자. [최준석, 과학의 시선] 일본에 KEK와 J-PARC라는, 가속기를 갖춘 국립 연구소가 있다. 두 기관의 존재를 알게 된 건 한국 물리학자들을 취재하면서다. 그들이 물리학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 이후의 연구 궤적은 어땠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KEK와 J-PARC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균관대 박일흥 교수, 서울대 김선기, 양운기 교수, 미국 시카고대학의 김영기 교수가 그곳에서 석사나 박사 학위를 할 때 일본에서 일했던 사람 중 일부다. 그들 말고도 한국의 입자물리학자와 핵물리학자들은 두 일본 국립물리학연구소의 문지방이 닳을 정도로 다녔고, 다니고 있다. KEK는 ‘일본고(高)에너지물리기구‘이고, J-PARC는 ’일본양성자가속기연구단지‘다. 나는 가보지 못했으니, 이들 기관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온라인으로 사진을 찾아봤다. ‘구글 지도‘ 사이트의 ‘스트리트 뷰’ 서비스를 통해서는, KEK의 거리 풍경을 동네 산책하듯이 구경하기도 했다. KEK가 J-PARC보다 도쿄에서 지리적으로 가깝다. KEK는 도쿄만 건너편의 쓰쿠바에 있다. J-PARC는 도쿄에서 해안선을 따라 조금 올라간 도카이무라라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일본 KEK가 국제적으로 유명한 건 벨(Belle) 실험(1999~2010)이다. 벨 실험은 2008년 일본의 입자물리학 이론가 두 사람에게 노벨물리학상을 안겼다. 수상자는 고바야시 마코토(KEK 교수), 마스카와 도시히데(교토대학) 교수다. 고바야시와 마스카와 두 사람은 1973년 입자물리학 분야의 논문을 한 편 썼다. 설명하려면 내용이 길어지는데 그냥 짧게 표현하면 이렇다. “(기본 입자의 하나인) 쿼크가 적어도 6개라면 물질-반물질 대칭이 왜 깨지는지 설명할 수 있다.” ‘쿼크’와 ‘물질-반물질’이란 단어가 좀 낯설지 모르겠다. 쿼크는 원자핵 안에 있는 양성자나 중성자를 이루는 물질이라고 하면, 거의 다 설명한 게 된다. 쿼크는 양성자나 중성자 안에 세개씩 들어있다. ‘물질과 반물질’도 알고 보면 간단하다. 물질과 반물질은 서로 전하만 다르고 나머지 물리적 특징은 똑같다. 예컨대 전자라는 물질이 있다. 이 전자와 물리적 특징은 똑같고 전하의 부호만 다른 입자가 있다. 이 입자가 전자의 반물질이다. 이 입자는 ‘양전자’라고 부른다. 전자와 양전자를 갖고 한 실험이 바로 벨 실험이다. 벨 실험이나, 벨의 후속실험으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벨2실험에 쓰는 입자가속기가 바로, 전자와 양전자 충돌기 방식이다. ‘우주에 왜 이렇게 물질이 존재하는가’하는 물질의 기원은 빅퀘스천 중의 하나다. 고바야시와 마스카와의 1973년 논문은 이 질문을 풀려고 하는 과학자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이 질문을 달리 표현하면 우주에서 반물질은 사라졌는데, 왜 물질은 남아 있는가 하는 것이다. KEK가 일본인 이론물리학자 두 사람의 이론 검증을 위해 큰돈을 들여 시작한 게 ‘벨 실험’이다. 벨 실험에 참여한 한국 물리학자는 많다. 그중에서 나는 권영준 연세대 교수를 만나 취재한 바 있다. 그는 1996년 연세대 교수가 된 뒤부터 일본의 KEK실험에 참여했고, 올해 초까지 지난 2년간은 벨 실험 대표(Spokesperson)로 일하기도 했다. 일본 고에너지물리학 연구의 다른 중심지는 J-PARC이다. J-PARC 이름은 많이 들어봤으나, 개인적으로 내용을 잘 몰랐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찾아보다가 J-PARC의 물리실험에 참여하고 있는 한국 물리학자 몇 사람 이름을 알았다. 특히 김수봉 전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성균관대 기초과학연구소 수석연구원)가 J-PARC의 실험 하나에 참여하고 있었다. 김수봉 교수는 한국의 대표적인 중성미자 실험 연구자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다. 그래서 김 교수와 통화를 하고, J-PARC와 그가 참여하고 있는 실험에 관해 물었다. J-PARC는 KEK와 일본원자력연구소(JAERI)가 공동으로 설립키로 하고, 2001년 첫 삽을 떴다. J-PARC가 자랑하는 장비는 양성자가속기다. 양성자는 원자핵 안에 들어있는 입자이고, J-PARC에는 세개의 입자가속기가 있어, 양성자 빔을 만들고, 이 빔을 가속시키고, 더 빨리 가속시킨다. 그런 다음 양성자 빔을 표적에 충돌시킨다. 그러면 중성자와 중성미자 다발을 만들어낸다. 여기에서 나오는 중성자에 관심을 가진 쪽은 일본원자력연구소다. 이들은 원자로에서 핵분열이 일어날 때 중성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더 정확히 알고 싶어 하고, 그래서 중성자가 필요하다. 일본원자력연구소가 J-PARC 설립에 참여한 건 이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양성자가속기에서 나오는 또 하나의 산물인 중성미자 다발을 갖고 J-PARC는 뭘 하는가? 그 용도 중 하나는 약 300㎞ 떨어진 지하 1000m에 있는 실험장으로 쏘아 중성미자의 성질을 알아보는 실험을 하는 것이다. 이 실험은 T2K(Tokai to Kamiokande)라고 한다. 도카이무라(T)의 J-PARC에서 보낸 중성미자 다발을 받아 보는 곳은 슈퍼-가미오칸데(K)실험장이다. 중성미자는 땅속을 그냥 거침없이 지나가므로 터널과 같은 걸 만들 필요도 없다. 일본 서부 기후현에 있는 슈퍼-가미오칸데 실험은 날아오는 중성미자를 검출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만 있으면 된다. 도쿄대학 우주선 연구소가 운영하는 이 실험시설은 물 5만t(톤)이 담긴 거대한 수조와, 중성미자가 물 원자와 반응할 때 나오는 신호를 검출하기 위한 광(光)증배관 1만3000개를 갖추고 있다. 슈퍼-가미오칸데 실험은 일본에 노벨물리학상을 안겨준 또 다른 실험이다. 실험을 이끈 도쿄대 우주선연구소의 가지타 다카아키 교수가 2015년 노벨상을 받았다. 공적은 중성미자 진동 확인이다. 질량이 없는 입자인 줄 알았던 중성미자가 질량을 가진다는 걸 이 실험을 통해 확인하였다. J-PARC는 슈퍼-가미오칸데로 보내는 중성미자 말고, 이보다 좀 낮은 에너지를 가진 중성미자 빔도 만들어낸다. 김수봉 교수는 이 중성미자 다발을 갖고 하는 실험(JSNS^2)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지난달, 임기 4년의 이 실험 공동대표(Co-spokesperson)로 선임됐다. JSNS^2 실험은 ‘비활성중성미자’(Sterile Neutrino)라는 입자가 존재하는지를 확인하는 게 목표다. 비활성중성미자가 “있다” “없다” 하는 혼란스런 실험 결과들이 여러 실험에서 나왔는데, 보다 우수한 검출기를 만들어 이 논란을 종결 지으려 한다. 비활성중성미자의 존재가 확인되면, 우주의 또 다른 미지의 물질인 암흑물질의 정체를 규명하는 길이 열릴 것으로 기대된다. 김수봉 교수가 일본에 가서 실험을 하는 이유는 비활성중성미자의 존재 확인을 위해 필요한, 중성자 소스를 만들어내는 곳이 한국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3년 전 J-PARC의 JSNS^2실험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이전에는 전남 영광의 한빛 원전 인근의 지하에서 ‘르노 실험’(Reactor Experiment for Neutrino Oscillations, 줄여서 RENO)을 한 바 있다. 중성미자의 질량을 알아내기 위해 필요한 측정(중성미자의 세 번째 변환상수 측정)을 하는 게 르노 실험의 목표였으며, 김 교수 그룹은 2013년 큰 성과를 올렸다. 그런데 르노 실험이 종료되고 있고, 한국에서 후속 실험은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J-PARC의 연구 그룹이 손짓을 해오자 김수종 교수는 일본에서 돌파구를 찾은 것으로 보였다. 김 교수에 따르면 J-PARC의 실험에는 기존 르노 그룹을 더 보강해서 대거 참여했다. J-PARC의 이 실험은 큰 규모는 아니나, 어쨌든 전체 그룹 50명 중에서 한국 그룹이 규모 25명 이상으로 일본 그룹보다 더 크다. 성균관대학의 유인태, 카르스텐 로트 교수를 포함해 10개 대학 교수가 참여하고 있다. J-PARC에는 다른 물리실험이 있고, 이곳에는 한국의 다른 물리학자가 참여하고 있다. 김수봉 교수에 따르면 안정근 고려대 교수가 고토(KOTO)실험을 하고 있다. 안정근 교수는 핵물리학자이며, 일본 최초의 양성자가속기 KEK-PS 프로그램에서 공부한 바 있다. 고토 실험은 케이온이라는 입자의 희귀 붕괴 현상을 관측해서 새로운 물리학을 찾는 게 목적이라고 한다. 한국 고에너지 물리학자들이 일본(KEK나 J-PARC), 스위스 제네바(CERN, 유럽입자물리연구소), 미국(시카고 외곽의 국립 페르미가속기연구소 등), 독일(함부르크 소재 DESY연구소 등)에 가는 건 한국에는 고에너지 물리실험을 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고에너지 물리를 하기에 부합하는 높은 에너지 준위의 입자가속기가 한반도에는 없다. 한국의 대전, 포항, 경주에 있는 가속기들은 고에너지 물리학을 하는 도구가 아니다. 중에너지나 저에너지 물리를 하는 장비다. 그렇기에 예나 지금이나 고에너지 물리학자는 해외의 실험시설만 바라보고 있다. 최근 한국의 고에너지 물리학(입자, 핵물리학, 천체물리학) 연구자들을 만나보면 뭔가 요구하는 게 있다. 고에너지 물리학연구소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게 아니면 고에너지물리연구 센터라도 세워달라고 한다. 현재 IBS(기초과학연구원)가 대전에 만들고 있는 중이온가속기 시설 부지에 공간을 일부 줬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한국의 입자-핵-천체물리학의 현 주소는 노벨상을 기대할 수 있는 여건과는 천지 차이다. 그 길로 가기는 가야하는데, 첫걸음으로 일단 사무실 한 동을 희망하고 있다. 간절하게 들린다. 또 다른 움직임이 있다. 중성미자 천문학 시설을 만들자는 계획이다. 물리학자 천문학자 수십여 명이 달라붙어 프로젝트를 만들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KNO(Korea Neutrino Observatory)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중성미자는 핫한 분야이고, 최근 노벨상은 천체물리학 분야에서 연달아 나오고 있으니 주목받을 만한 연구가 아닐 수 없다. KNO는 일본 J-PARC가 만드는 중성미자 빔을 한반도 남쪽 대구 인근에서 받아볼 수 있다는 아이디어에 기반한다. 고에너지물리센터는 얼마 안 드는 구상이고, KNO프로젝트는 성사되는 데 5000억원 정도가 예상된다. 사이언스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한국도 인류의 지식 창출에 기여하고, 또 그를 통해 노벨상 수상도 희망한다면, 물리학 커뮤니티의 간절한 두 가지 소망이 빛을 볼 수 있도록 성원했으면 한다. [일본 KEK의 입자가속기 SuperKEKB: KEK 제공] [1] 2020-11-30 03:2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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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기후 악당', 사실 트럼프 때가 좋았다 [최준석 작가, ‘나는 과학책으로 세상을 다시 배웠다’ 저자. [최준석, 과학의 시선] 존 맥피의 ‘네 번째 원고’라는 책을 읽은 건 나의 글쓰기를 윤내기 위해서다. 존 맥피는 미국 잡지 '타임‘과 ‘뉴요커’에서 논픽션 작가로 명성을 날린 바 있다. 1931년생인데, 지금도 ‘뉴요커’에 글을 쓴다. 이 책을 본 건, 내가 직업으로 글을 쓰면서 허겁지겁 써왔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체계적으로 공부하면 글이 좀 개선 되려나 하는 갈증을 느낀다. 책을 봤음에도 능력 부족으로 글을 개선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몇 가지 기억에 남는 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미국 알래스카 북극권 자연에 대한 그의 묘사다. 존 맥피는 1970년대 3년간 매년 여름과 겨울 짧으면 한달, 길면 석달씩 알래스카를 찾아, 취재했다. 그리고 르포 기사를 썼다. 존 맥피에 따르면 알래스카의 강과 개천은 범람하는 계절이 아니면 투명하다. 연중 초콜릿 빛깔을 띠는 미국 동부의 강들과는 다르다. 뉴욕주 웨스트포인트를 흐르는 허드슨 강이나, 조 바이든을 승자로 확정한 펜실베이니아 주를 남북으로 흐르는 델라웨어 강이 초콜릿 색인 건, 인간이 토지 표면에서 식생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빗물이 토양을 강으로 실어 나르면서 한때 맑았던 물은 흙탕물이 되었다. 하지만 강 주변의 식생이 살아있는 알래스카의 강은 투명하다. 유럽인이 찾은 16세기 이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믿기 힘들면,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 가서 알래스카의 강 사진을 찾아보시라). ‘네 번째 원고‘ 책을 한장 한장 넘기며 나는 미국 대통령선거 개표 결과를 지켜보았다. 개표는 며칠에 걸쳐 천천히 진행되었기에 책 1장을 읽을 때는 트럼프가 승리한 줄로 알았고, 3장을 읽을 때는 위스콘신에서 바이든의 역전 가능성을 알리는 한 줄기 빛을 보았다. 그리고 이 책 읽기를 마쳤을 때는 바이든이 승리 연설을 하고 있었다. 바이든 당선자는 승리 후 네 가지 어젠다를 강조했다. 그중에서 최대 국내 이슈로는 코로나 바이러스 희생자 줄이기, 국제 이슈로는 기후변화 억제 대책을 말했다. 바이든은 특히 “기후 변화는 인류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라며 파리기후변화협정에 즉각 재가입할 거라고 했다. 그의 이런 입장은 선거에서 패배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과는 180도 다른 것이다. 트럼프는 인간 활동으로 인해 기후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 부인하고 그런 이야기를 “사기”라고 몰아세워왔다. 그리고 파리기후변화협정에서 탈퇴한 바 있다. 많은 한국인은 트럼프를 한심한 사람이라고 본다. 서울 광화문 광장 인근의 미국 대사관 앞에서 트럼프를 지지한다는 피켓을 들고 있는 한국인을 보면, 그는 한국 사회에서 한줌 밖에 안 되는 극우파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기후 변화 이슈와 관련해서만 보면 꼭 그렇지 않다. 한국은 이미 국제사회 일각에서 기후 악당으로 소문났고, 이런 한국에게는 트럼프 시절이 좋았다. 트럼프가 워낙 악당 노릇을 잘 해줬기에, 기후 악당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그만큼 화살을 피해갈 수 있었다. 한국이 기후 악당이라니, 무슨 소리냐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들을 위해 몇 가지 팩트를 준비했다. 기후행동트래커(climateactiontracker)라는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한국은 ‘빨강’으로 칠해져 있다. 빨간색 국가는 향후 지구 온도가 1.5도 상승으로 막는 걸 목표로 하는 국제사회 노력과는 동떨어진 “대단히 부족한”(highly insufficient)한 나라를 말한다. 다른 빨간 색 국가로는 중국, 일본이 있다. “1990년과 2014년 사이에 한국의 탄소 배출량은 두 배로 늘었다. 미국과 호주, 캐나다의 1인당 에너지 소모량은 줄어들고 있으나, 한국은 그렇지 않다”라고 기후행동트래커는 말한다. 한국과 같이 행동하면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1.5도에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라, 3~4도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그게 아니더라도 한국은 2016년에 사우디아라비아, 호주, 뉴질랜드와 함께 4대 기후 악당으로 꼽힌 바 있다. 국제사회는 한국을 지켜보고 있다. 한국이 석탄을 쓰는 화력발전소 가동을 문재인 정부에서 늘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으며, 두산중공업을 지원한 걸 비판하고 있다. 두산중공업을 이들은 화력발전소를 짓는 주요 업체라고 본다. 한국은 기후변화 억제를 위한 세계적인 노력에 마지못해 따랐고, 오히려 조 바이든 당선자의 기후변화 관련 강한 의지에 당황하는 모습이다. 지난 11월 10일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 그런 장면을 볼 수 있다. 민주당 사이트에 들어가면 ‘제19차 원내대책회의 모두 발언’이라는 제목의 자료가 있다. 이날 국회 본청의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회의실에서 나온 발언이 기록되어 있다. 김태년 원내대표(경기 성남 수정구) 발언을 옮겨본다. “바이든 당선인은 2050년 탄소중립과 파리기후협약 재가입을 약속했습니다. 미 차기 행정부는 탄소국경세를 부과하는 등 환경 규제를 강화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탄소중립과 기후위기 대응은 세계경제와 무역의 필수요건이 되고 있습니다...탄소국경세 등 규제가 강화되면 일부 주력 수출산업의 경쟁력이 약화될 수도 있습니다.” 문진석 원내부대표(충남 천안 갑)도 이어 같은 얘기를 했다. “조 바이든 당선인께서 공약한 파리기후 협약 복귀 약속은 탄소 중립 재생에너지 확대정책을 중심으로 한 기후위기 변화에 대한 대응이 미국 경제정책에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내 주요 발전원인 석탄발전, 내연기관, 자동차 등 주요 탄소 배출원에 대한 감축 계획과 대안 그리고 친환경 신재생 에너지 산업 지원정책 등 미국의 기후 변화에 대한 정책이 우리 경제에 미칠 파장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발 빠른 대응과 대책을 정부와 함께 준비해야 합니다.” 더불어민주당은 진보정당이어서 문재인 정부는 기후변화 대책에 능동적일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준비했던 ‘후보 정책 자료집’을 다시 찾아보았다. 기후 변화 관련 언급이 형식적으로만 되어 있었다. ‘신기후체제에 대응하는 에너지 거버넌스를 구축하겠습니다’라는 제목 아래 ‘신기후체제 대응을 위해 환경조직 재편 검토’ ‘(탄소)배출권 거래제도 전담 부서 조정 검토’라는 세부 항목이 형식적으로 나와 있을 뿐이다. 그나마 모두 ‘검토’ ‘검토’이다. 위에서 보았던 집권 더불어민주당 당직자들의 발언에서도 한국이 기후변화 관련해 국제적인 움직임과 발을 맞추지 못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김태년 원내대표는 “우리는 온실가스 감축 준비가 미흡한 편”이라고 했고, 문진석 원내부대표는 “우리의 준비가 미흡한 것도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월 28일 국회 연설에서 “2050년 탄소 중립을 목표로 나아가겠다”라고 선언했다. 그의 이날 발언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다. 주변국보다도 늦은 행보이다. 문 대통령보다 이틀 앞선 10월 26일 일본의 스가 요시히데 총리는 2050년 탄소 배출량 중립 선언을 한 바 있다.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도 지난 9월 22일 유엔(UN) 총회 연설에서 “중국은 2060년 전에 탄소 중립을 달성하겠다”고 밝혀 세계를 놀라게 한 바 있다. 중국은 세계에서 탄소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뒷북을 친 것이었다. 한국의 이런 느슨한 문제 의식은 정부뿐 아니라, 시민들에게도 만연해 있다고 생각한다. 일상에서 이를 느낀다. 한국 유권자 일부는 인간 활동으로 인해 지구온난화가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조차 혼란스러워한다. 기후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언론보도는 많으나, 실제로 그런지 확신하지 못한다. 나는 몇달 전 한 과학자로부터도 그런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바 있다. 그래서 얼마 뒤 포항공대의 기후학자 민승기 교수를 만났을 때 그 점을 다시 물었다. 민승기 교수는 “현재의 지구온난화는 당연히 인간 활동의 결과이다.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 보고서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기후과학자의 95% 이상은 인간 활동으로 인한 기후변화가 진행 중이라고 믿고 있다. 증거가 강력하다”라고 말했다. 한국은 그래도 미국보다는 기후변화를 최소화하려는 국제 사회의 노력과 함께하기 위한 여건이 좋다. 미국의 보수 진영은 기후변화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트럼프라는 개인뿐만 아니라, 미국 공화당의 공식적인 입장이다. 반면 한국의 보수당은 기후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보수정당인 국민의힘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니 그런 정책 노선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민주당보다 보수정당인 ‘국민의힘‘이 오히려 기후변화 관련 입장을 쉽고 뚜렷하게 찾아볼 수 있었다. 국민의힘 사이트에 나와 있는 ’강령‘인 ’모두의 내일을 위한 약속‘(2020년 9월 2일 개정)을 보면 7번째 항목이 깨끗한 지구, 지속가능한 대한민국이다. 여기에는 “전 지구적 기후변화에 대응하며, 자원이 지속되는 국토 환경을 만들고 자연과 조화를 이룬 건강하고 생산적인 삶을 지향한다” “기후변화협약에 발맞추어 온실가스 배출의 최소화를 위해 노력한다”라는 문구가 있다. 미국 논픽션 작가 존 맥피가 1960, 70년대 보았던 미국 알래스카의 하천 모습을 한강에서 보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한국인은 오염된 하천을 깨끗하게 만든 경험이 있다. 무한 성장 시대에 그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20세기 말 반전을 이뤄내 한강의 지류에는 맑은 물이 흐른다. 2050년까지 한국이 탄소배출 중립을 달성하려면 어려움을 각오해야 한다고 한다. 수소차, 전기차를 타는 정도로 풀 수 있는 게 아니다. 산업 구조를 대수술해야 한다.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이다. 그 길을 뚜벅뚜벅 가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비전과 의지, 리더십이 요구된다. 그리고 그걸 가능케 하는 건 깨어있는 유권자다. 2020-11-13 01: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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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수학자라면, 붓다는 물리학자일까? [최준석 작가, ‘나는 과학책으로 세상을 다시 배웠다’ 저자. [최준석, 과학의 시선] 2020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로저 펜로즈는 교양과학서를 많이 썼다. 동시대 영국을 대표하는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 못지않게 책을 냈다. 한국에도 단독 저서가 5종 소개되어 있다. 수리물리학계의 대가가 연구에 바쁜 짬을 내어 일반인을 위해 책을 썼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그가 노벨상을 받은 건 블랙홀 관련 연구(1965년)다. 블랙홀이 존재하느냐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1915년)이후 논란이었는데, 펜로즈의 1965년 연구는 50년 된 논란에 방점을 찍었다. 하지만 펜로즈를 특징짓는 건, 그게 다가 아니다. 그는 독특한 상상력을 자랑하는 물리학계의 이단자라는 다른 얼굴을 갖고 있다. 의식에 대한 연구와, 우주론에 관한 연구가 그런 흐름에 있다. 이 두 분야에서의 펜로즈 연구는 물리학계 주요 흐름에서는 벗어나있는 소수 견해에 속한다. 그가 쓴 교양과학서는 바로 이 두 개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펜로즈는 정작 자신의 가장 유명한 연구인 블랙홀 관련한 교양서는 쓰지 않았다. 의식은 어떻게 출현하는가와, 우주의 시작과 종말을 연구하는 우주론은 빅퀘스천에 속한다. 빅퀘스천은 쉽게 답을 구할 수 없는 거대한 질문들이다. ‘생명은 어떻게 출현했나’ ‘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있나’ ‘우주에는 다른 지적 생명체가 있나’가 그런 질문에 속한다. 펜로즈의 ‘의식의 물리학’에 관한 연구는 ‘황제의 새마음’과 ‘마음의 그림자’라는 두 권의 책에서 접할 수 있다. 펜로즈 교양과학서 목록을 잠깐 보면, 발행연도 순으로 보아 ‘황제의 새 마음’(1989년), ‘마음의 그림자’(1994년), ‘실체로 가는 길’(2004년), ‘시간의 순환’(2010년), ‘유행, 신조 그리고 공상’(2016년) 순이다. 그러니까 그의 교양과학서 중에는 의식 관련 책이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중반까지 나온 걸 알 수 있다. 펜로즈의 책에는 수식이 나온다. 호킹이 베스트셀러였던 ‘시간의 역사’에서 수식을 쓰지 않은 것과 다르다. 호킹은 수식 하나 쓸 때마다 잠재적인 독자의 절반이 떨어져 나간다는 출판사의 말을 수용했다. 하지만 펜로즈는 “수학 공식을 두려워하는 독자라면, 불쌍한 수식을 이해하기보다는 음미하는 수준으로 잠시 들여다본 후 다음 문장으로 서둘러 넘어가기 바란다. 얼마 후에 자신이 좀 붙으면, 그냥 지나갔던 수식으로 돌아와 거기에 담긴 독특한 특성들을 이해하려 해 보기 바란다”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수식이 나오기에 그가 쓴 교양물리학 책은 난도에 있어 최고봉이다. ‘황제의 새 마음’은 의식의 물리학적 기반을 탐구했다. 이 책은 큰 관심을 끌었다. 책은 ‘컴퓨터도 마음을 소유할 수 있는가’로부터 시작해 알고리즘, 튜링 검사, 실체(Reality)를 표현하는 언어로서 수학을 거쳐 ‘마음의 물리학’을 논한다. 펜로즈의 핵심 주장은 “사람의 생각이 아주 복잡한 컴퓨터의 행동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는 현재 철학계가 널리 받아들이는 관점을 반박”하는 것이었다. 요즘 언어로 표현하면 인공지능이 향후 인간과 같은 의식을 가질 거라는 주장을 논박한 것이다. 이로부터 5년 뒤에 내놓은 책 ‘마음의 그림자’에서 그는 한발 더 나아갔다. 펜로즈는 두뇌 활동과 양자역학을 연결시켜, 사람의 뇌가 양자컴퓨터라고 주장했다. 신경세포의 세포골격을 이루는 구조체는 미세소관(Microtubule)이라고 한다. 펜로즈는 미세소관 내부에서 양자 결맞음(Quantum Coherence) 현상이 일어나며, 의식의 출현은 미세소관과 관련되어 있을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펜로즈의 ‘양자컴퓨터 두뇌‘ 주장은 미국 MIT물리학자 맥스 테그마크(Tegmark)에 의해 2000년 논박되었다. 테그마크는 미소세관에서 양자 결맞음이 유지되는 시간을 계산을 해봤으나 너무 짧은 걸로 나왔다며, “우리 두뇌는 양자 컴퓨터로 작동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책 ‘맥스 테그마크의 유니버스’에 관련 내용). 펜로즈는 이를 반박했으나, 테그마크 논문 이후 펜로즈의 ‘의식의 물리학 연구‘는 외면받기 시작했다. 펜로즈의 또 다른 이단적인 연구인 ‘우주론’을 보자. 그의 우주론은 ‘순환우주론’이다. ‘등각순환우주론’(Conformal Cyclic Cosmology)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우주가 탄생과 죽음을 영원히 반복한다는 게 순환우주론이다. 동양은 순환우주론에 익숙하나, 펜로즈가 속한 다르다. 서양문화권은 단선적인 우주관을 갖고 있다. 우주에는 시작이 있고, 말세라는 종말이 있으며, 그걸로 끝이라고 믿는다. 서양 종교인 기독교의 우주관이 그걸 보여준다. 신이 우주를 창조했고, 시간이 지나 우주의 마지막 날이 오면 신이 최후의 심판을 할 거라고 한다. 그런 서양 문화의 시선으로 보면 순환우주론을 펴는 펜로즈는 이단적이다. 펜로즈의 ‘등각순환우주론’은 그의 책 ‘시간의 순환’(2010년)에 본격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2004년 책인 ‘실체로 가는 길’은 그와 관련한 예비 작업이라고도 말할 수 있고, 2016년 책 ‘유행, 신조 그리고 공상’에도 ‘등각순환우주론’이 둥장한다. 펜로즈는 ‘순환우주론’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통보받은 뒤 영국 신문 텔레그라프와 만났을 때 이 주장을 또 폈다. 텔레그라프 10월 6일자 온라인 기사를 보면 제목이 이렇다. “빅뱅 이전에 우주가 존재했다. 오늘날도 그걸 관측할 수 있다고 노벨상 수상자가 말하다”(An earlier universe existed before the Big Bang, and can still be observed today, says Nobel winner‘). 펜로즈의 순환우주론 연구에 가장 관심을 보인 건 인도 언론이다. 인도 언론이 ‘순환우주론’에 관심을 보인 건 힌두교의 우주관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인도인 10억 명 이상이 믿고 있는 힌두교는 순환우주관을 갖고 있고, 이 우주관에 따르면 각 우주의 길이는 43억 2000만년이다.(인터넷사전 ‘위키피디어’ 자료). 인도 전통은 상상할 수 없이 긴 시간을 우주의 나이로 제시했고, 놀랍게도 현대 우주론이 말하는 138억 년의 우주 역사에 가장 근접했다고 자부할지 모르겠다. 불교는 인도의 힌두교 전통에서 탄생했다. 불교 우주관도 힌두교와 비슷하다. 순환우주관을 갖고 있으며, 억겁(億劫)이라는 긴 시간을 말한다. 때문에 불교의 우주관은 현대 물리학과 매우 흡사하게 보인다. 한국 불교계 일각이 붓다를 놀라운 물리학자라고 생각하는 건 그 때문이다. 붓다의 존재론 또한 현대 물리학자 일부의 설명과 흡사하다. 붓다는 존재는 다른 존재와 인연으로 존재하고 또 사라진다는 연기론(緣起論)을 말했다. 물리학의 표현으로 하면 상호작용이다. 카를로 로벨리는 이탈리아의 이론 물리학자이자, 세계적인 명성을 갖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불자들의 가슴을 뛰게 한 바 있다. “입자들의 위치는 모든 순간 기술되지 않고 오직 특정 순간의 위치만 기술된다. 입자들이 다른 무언가와 상호작용하는 순간에만 기술할 수 있다...전자는 항상 존재하는 게 아니라, 상호작용할 때에만 존재한다. 다른 무언가와 충돌할 때에 어떤 장소에서 물질화한다.”(‘보이는 건 실재가 아니다’ 책) 책에는 좀 더 철학적인 문장도 있다. “실재는 대상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것은 변화무쌍한 흐름이다. 우리는 이런 가변성에 경계를 지음으로써 실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바다의 파도를 생각해 보라. 파도 하나는 어디에서 끝나나. 어디에서 시작하나? 누가 말할 수 있는가? 하지만 파도는 실재다...살아있는 체계는 끊임없이 자신을 재형성하며 외부 세계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특별한 체계이다.” 현대 물리학자의 말인지, 붓다가 기원전 6세기 갠지스 강변에서 한 이야기인지 얼핏 잘 구분이 안 되는 문장이다. 자연은 수학이라는 언어로 잘 기술된다. 그래서 ‘신은 수학자인가?’ 하는 말이 나왔다. 순환우주론이 맞다면, 그걸 말한 고타마 붓다는 물리학자였나? 하는 말도 나올 법하다. 펜로즈가 노벨상을 받은 뒤에 순환우주론 주장을 한 것에 대해 미국의 한 과학 작가(물리학 박사)는 ‘이제, 그런 주장은 그만해야 한다“라고 비판했다. 미국 격주간지 포브스에 쓴 기사에서 그는 ”노벨물리학상까지 받은 사람이 그런 주장을 하면 안 된다“면서 과거 탁월한 물리학자임에도 이단적인 우주론을 주장하는 바람에 노벨상에서 배제된 사례가 있었다고 말했다. 우주론 분야의 연구는 누가 맞는지는 판정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소수설이라고 쉽게 내칠 수는 없다. 블랙홀 이론이나, 빅뱅우주론도 소수설로 시작했다. 두 이론 모두 아인슈타인이라는 거물의 비토를 극복하고 살아남았다. 펜로즈는 저서 ‘시간의 순환’ 서문에서 자신의 주장을 “이단적이지만 기초가 굳건한 기하학적 물리학적 발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의 주장이 틀리더라도, 우주론학자의 상상력을 넓히는 효과는 분명 있지 않을까 싶다. 로저 펜로즈는 1931년생이니 올해 만 89세다. 2000년에 태어난 늦둥이 아들 맥스를 두고 있다는 걸 이 글을 쓰면서 알았다. 펜로즈 옹의 노벨상 수상을 멀리에서 축하하며, 양아버지 이름을 붙인 늦둥이 아들과 오래 행복하길 기원한다. [로저 펜로즈: 사진출처: 위키피디어} 2020-10-28 02:4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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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과학 모르는 한국 ..너무 먼 '노벨물리학상' [최준석 작가, ‘나는 과학책으로 세상을 다시 배웠다’ 저자. [최준석, 과학의 시선] 2020년 노벨상 시즌이 끝났다.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 분야에서 올해도 한국은 패싱~. 일본이 올해는 수상자를 배출하지 않아 한국인의 배가 좀 덜 아팠을까? 중국에서도 나오지 않았고. 하지만 노벨상 패싱의 허전함은 깊다. 언제 한국은 수상자를 배출하나? 알고 보면 이상한 게 있다. 한국은 두레박도 없이 우물물을 길으려는 측면이 있다. 노벨 과학상 3개 분야 중 화학과 생리의학 분야에는 후보로 거론되는 한국인이 있다. 그런데 노벨물리학상에서는 그런 인물이 없다는 점이다. 물리학은 기초학문 중에서도 기초다. 그런 물리학 분야에서는 왜 노벨상 후보자로 거론되는 사람이 한국에 없을까? 한국 물리학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역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는 고에너지 물리학 분야에서 절반 이상이 나왔다. 고에너지 물리학은 핵, 입자, 천체물리에 걸쳐 있다. 입자가속기로 만든 입자를 갖고 하는 연구다. 노벨물리학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는 한국인이 없다는 건 고에너지 물리학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얘기다. 고에너지 분야에서는 왜 명성을 쌓은 한국인 연구자가 없을까? 그 이유는 고에너지 물리학 분야에 정부가 투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고에너지 물리학, 특히 실험은 개인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정부가 나서야 한다. 그런데 한국에는 고에너지 물리 분야의 국립연구소가 없다. 한국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유일하게 국립 고에너지 물리 연구소가 없다. 고에너지 물리 실험에 투자 않는다는 건, 노벨물리학상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앞에서 말한 대로 고에너지 물리분야에서 절반 넘게 노벨물리학상을 가져가기 때문이다. 노벨물리학상을 받는 한국인 학자가 나오길 기다리는 국민의 열망을 생각하면, 이런 한국의 현실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고에너지 분야의 학자들을 보자. 최초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는 X선을 발견한 뢴트겐이다. 그 이후 120년간의 수상자를 모두 확인하기 힘들었다. 해서 지난 10년의 자료만을 찾아보았다. 2011년 이후 올해까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중 고에너지 물리 분야는 여섯번을 차지했다. 2011년(우주의 가속팽창 발견), 2013년(힉스입자 발견), 2015년(중성미자 진동 발견), 2017년(중력파 발견), 2019년(물리적 우주론 구축과 외계행성 발견), 그리고 2020년(블랙홀 이론 연구와 발견)에 상을 받았다. 한국연구재단의 보고서도 이를 뒷받침한다. 지난해 10월 작성된 ‘노벨과학상 종합분석 보고서’는 “1980년 이후로 최근 40여년간 물리학은 입자물리 분야에서 가장 많은 수상자가 배출되었다”고 적고 있다. 선진국은 어떤 고에너지 물리 연구소를 갖고 있는가? 미국은, 가속기를 갖고 있고 고에너지 물리 연구를 하는 국립 연구소(National Lab)를 지역마다 두고 있다. 동부의 브룩헤이븐 국립가속기연구소(뉴욕주 롱아일랜드 소재), 중서부의 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시카고 외곽), 서부의 SLAC 국립가속기연구소(실리콘밸리의 스탠퍼드대학교)와 로렌스버클리 국립연구소(LBNL, 샌프란시스코 오른쪽 버클리 소재)가 그 일부다. 유럽 국가들은 공동으로 거대한 고에너지물리 연구소(CERN)를 운영하고 있다. CERN은 당대 최고의 입자가속기인 LHC(대형강입자충돌기)를 갖고 있으며, LHC에 투자함으로써 고에너지 물리의 세계 중심으로 우뚝 선 바 있다. 독일은 CERN에 매년 납부금으로 3000억원을 내는 한편, 자국에 고에너지물리 연구소를 두 개나 별도로 갖고 있다. DESY(함부르크 소재)와 GSI헬름홀츠 중이온연구소(다름슈타트 소재)가 기초과학 연구를 하고 있다. 시선을 돌려 한국 주변을 보자. 일본은 KEK(일본 고에너지가속기연구기구, 쓰쿠바 소재), j-PARC(일본원자력연구개발기구, 도카이 소재)와 같은 고에너지물리 연구소가 유명하다. KEK는 1971년에 설립됐다. 그리고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08년 KEK의 고바야시 마코토 교수가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중국 베이징의 한복판에는 중국과학원고등물리연구소(IHEP)가 있다. 천안문 앞 큰길인 장안대로를 따라 서쪽으로 조금 가면 IHEP 건물이 있다. IHEP는 거대한 지하 고에너지 물리 실험 시설을 추진하고 있다. IHEP는 허베이성 친황다오(秦皇島)시에 세계 최고의 입자가속기를 건설한다는 야망을 갖고 있다. 입자가속기가 들어갈 공간은 지하터널 100㎞ 길이. 이 입자가속기가 들어선다면, 중국은 유럽과 함께 세계 고에너지 물리의 양대 축으로 순식간에 도약할 전망이다. 한국은 고에너지 물리 연구소 설립 계획이 없을까? 없다. 그러다 보니, 벌어지는 난감한 일로는 이런 게 있다. 유럽을 대표하는 고에너지 물리연구소 CERN이나 미국 페르미연구소가 국제협력을 위해 자신들의 파트너에 해당하는 한국의 고에너지 물리 연구소를 찾을 때가 있다. 그런데 한국에는 그런 곳이 없는 것이다. 국제적인 민망함을 느끼는 순간이다. 가속기? 한국에도 몇 개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가속기가 있는 지역에 살고 있거나, 물리학에 약간이나마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한국에도 포항공대 안에 두 개의 가속기(전자가속기)가 있고, 경주(양성자가속기)에도 있다. 얼마 전 충북 오송에도 새로운 가속기를 짓기로 했다. 유감스럽게도 이들 가속기는 고에너지 물리 연구를 위한 시설이 아니다. 물질 물성을 연구하는 물리학자나, 제약 등 응용 분야 연구자가 쓰는 시설이다. 오송에 만들 가속기에 붙어 있는 이름이 그걸 말한다. ‘다목적 차세대 방사광 가속기’. ‘다목적’은 유용한 말로 들리나, 노벨상은 ‘다목적’ 시설을 갖고 얻을 수 있는 금메달이 아니다. 내년 말을 목표로 대전에 짓고 있는 중이온가속기(RAON)가 있다. 중이온가속기는 한국 정부가 순수과학을 위해 수천억원을 투자한 최초의 시설이라고 얘기된다. 하지만, 이 역시 ‘고에너지 물리학’ 시설로 가고 있지 않다. 핵물리학과 ‘응용과학’을 위한 가속기다. 그러다 보니 고에너지 물리학 분야의 큰 축인 입자물리학자들은 RAON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한국은 고에너지 물리연구소를 왜 세우려고 하지 않을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은, 한국은 ‘기초과학’에 대한 생각이 아직도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기초과학은 기초과학(Basic Science)이 아니다. 사실상 응용과학이다. 기초과학에 가까운, 응용과학을 ‘기초과학’이라고 포장하고 있다. 기초과학은 그런 게 아니다. 한국의 경제발전과 상관없다. 인류의 지식 확대가 목적이다. 그런데 한국의 정책 당국자는 경제발전과 관련이 약한 기초과학에는 투자할 생각이 없다. 국민적 공감대가 없어서 그런가? 그럴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노벨물리학상에 대한 기대는 접어야 한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고에너지 물리학 분야에 투자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노벨물리학상을 받길 바랄 수 있을까? 하늘에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가 고에너지 물리 연구소를 만들려 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기존의 정부 출연 연구소도 많다는 것이다. 국립연구소를 한번 만들면 없애기 힘든 만큼, 새 국립연구소는 만들지 않겠다는 게 과학기술부의 생각이다.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정부 출연 연구소들은 수십 개에 이르며, 이 중에는 시대적 사명을 다한 곳도 적지 않다. 그런 곳은 문을 닫거나, 새로운 임무를 부여하는 쪽으로 수술을 해야 한다. 한데, 구성원의 반발이 예상되니, 그냥 방치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정책 당국자가 할 일은 그런 불필요한 조직을 잘라내는 것이다.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서 시대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국립연구소를 만들지 못하겠다는 건 딱한 일이다. 국립 고에너지 물리연구소를 만드는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중이온가속기를 운영할 가속기연구소를 고에너지 물리연구소로 만드는 방안이 있다. 현재 중이온가속기 연구단은 시설이 완공되면 조직을 ‘가속기연구소’로 바꾸고, 그곳에는 가속기를 돌리는 인력만을 둔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그러지 않고, CERN이나 페르미연구소처럼, 사이언스가 연구소의 중심에 서게 하는 방안이 있다. 과학을 하는 인력이 중심이 되어 중이온가속기를 갖고 연구 하도록 하고, 가속기 과학자와 공학도는 이를 뒷받침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중이온가속기 연구소의 넓은 땅에 일단 건물 한 동을 짓는 방안이 있다. 그 건물에는 고에너지 물리연구소 간판을 다는 것이다. 중이온가속기라는 시설에 과학자(실험, 이론 모두)들은 가깝게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고에너지 물리 연구자들은 각 대학에 흩어져 있다. 이들을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연구소를 설립할 수 있다. 프랑스의 IN2P3(국립핵입자물리연구소), 이탈리아의 INFN(국립 핵물리연구소)가 그런 느슨한 방식의 고에너지 물리 연구소를 갖고 있다. 한 지역에 사무국을 두고, 각 대학의 연구자들이 그곳을 사무실이나 회의 공간으로 쓰고 있다. 한국이 OECD국가 중 고에너지물리학연구소가 없는 유일한 나라라는 건 불명예다. 하늘에서 감 떨어지기를 마냥 기다릴 일이 아니다. 멋진 고에너지 물리 연구소가 이 땅에 들어서는 걸 보고 싶다. 2020-10-12 03:5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