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수교수nschoi76@naver.com
- 서정대학교 교수
- (전) YTn 대표이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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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수의 열린경제] ‘사업보국(事業報國) 2.0’, 질적성장과 지속가능경영으로 시선이 바뀌었다 [최남수 서정대 교수] 지난 3월 31일에 열린 제48회 상공의 날 기념식은 정부와 기업의 ‘공통 인식’이 확인된 자리였다. 이날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성장을 불평등, 환경, 안전 등보다 앞세워 왔던 것을 바꿔야 한다며 기업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를 중시하는 따뜻한 자본주의, 이해관계자를 끌어안는 새로운 자본주의, 그리고 지속가능발전을 구체적인 변화의 방향으로 제시했다. 이날 기념식에 앞서 있은 환담에서 대한상의 회장인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문 대통령에게 “경제 회복을 위해 다양하게 기업의 의견을 수렴해 나가겠다”면서 “사업보국을 기업가 정신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이 한국 경제의 대전환을 위해 기업이 큰 역할을 해줄 것을 주문했다면, 최 회장은 기업이 사업을 통해 나라에 보답하는 책임과 역할을 다할 것을 다짐한 것이다. 이날 최 회장의 발언으로 사업보국이라는 기업의 소명이 모처럼 귀환했다. 사업보국이 처음 공식화된 것은 삼성그룹의 창업이념이 담긴 1973년의 ‘삼성 제2차 경영 5개년 계획’이었다. 삼성의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은 사업보국과 인재제일, 합리추구를 그룹의 경영이념으로 제시했다. 이병철 회장은 1987년 한 매체에 기고한 글에서 사업보국에 대한 자신을 생각을 이렇게 정리했다. “인간 사회에 있어서 최고의 미덕은 봉사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경영하는 기업의 사명도 의심할 여지없이 국가, 국민, 그리고 인류에 대하여 봉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에 앞서 1984년에 삼성인력개발원이 펴낸 ‘삼성 이해’는 좀 더 구체적인 얘기를 하고 있다. “기업이 사업 활동을 하는 데는 여러 종류의 관계 분야가 있다. 원료를 구입하는 구입처를 비롯해서 자금을 제공해 주는 주주와 은행, 제품을 사 주는 일반 수요자와 단골 고객, 이 밖에도 지역사회 등 수많은 상대들과 갖가지 형태의 관계를 지니면서 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많은 관계자들을 희생시키면서 자기만의 발전을 꾀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 기업의 목적은 가능한 한 돈을 많이 벌어 주주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내용의 밀튼 프리드먼 독트린이 발표된 게 1970년인데,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기업인이 있었다는 게 흥미롭다. 어쨌든 사업보국을 소환한 최태원 회장 입장에서는 부친인 고 최종현 회장도 실천한 이 정신의 맥을 되살리고 본인이 강조해온 기업의 사회적 가치 창출을 한국 기업이 지향해야 할 새 좌표로 제시하고자 하는 의욕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업보국을 재가동하기 위해서는 한국 기업을 바라보는 사회의 냉정한 시선을 직시해야 한다.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기업인 에델만이 2020년 11월에 한국을 포함한 27개국에서 3만3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1 신뢰지수’ 조사 결과를 보자. 먼저 기업 전반의 신뢰도. 글로벌 평균은 61%이고, 1위는 82%를 기록한 인도이다. 한국은 불과 47%로 맨 뒤에서 셋째에 머물렀다. 에델만은 기업이 불신을 받는 나라로 한국, 일본, 러시아 3개국을 들었다. 또 다른 조사 결과는 더욱 심각하다. 근로자들에게 고용주에 대한 신뢰도를 물었더니 한국은 58%로 27개국 중 꼴찌였다. 글로벌 평균은 76%이고, 1위는 인도네시아(92%)이다. 에델만은 27개국 고용주의 신뢰도를 신뢰·중립·불신으로 분류했는데, 26개국은 모두 ‘신뢰’로 평가된 데 비해 한국만 유일하게 ‘중립’ 판정을 받았다. 조사 대상 고용주는 기업·NGO·정부·미디어인데, 기업 고용주에 대한 평가를 상당 부분 반영하고 있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한국 기업은 왜 이런 평가를 받게 된 것일까? 기업인으로서는 억울한 느낌도 있을 것이다. 한강의 기적을 이뤄내고, 해외 시장을 누비고,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냈는데 평가가 너무 박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낙수효과가 사라지면서 기업의 성장이 국민 전반의 삶의 풍요로 연결되지 않고, 양극화가 심화되고, 정경유착 등 부정적 사례가 끊이지 않으면서 기업을 보는 곱지 않은 시선이 형성된 것이다. 기업은 사업보국을 해왔다고 할지 모르지만, 기업 내외부의 시선은 그렇지 않은 상태이다. 이는 결국 과거의 ‘사업보국 1.0’과 앞으로의 ‘사업보국 2.0’이 본질적으로 달라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경제개발 초기에서 중진국으로 오는 과정에서는 성장이 ‘지상과제’로 여겨졌던 만큼 환경 훼손과 인권 침해 등 부정적 측면들이 심각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특히 외환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가 강제 수입되면서 기업은 자본시장의 요구대로 성장을 하고 이익만 많이 내면 된다는 사고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한국 경제가 선진국 그룹에 속한 지금, 성장을 바라보는 시선이 크게 바뀌고 있다. ‘세계행복보고서 2020’은 이와 관련해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이 보고서는 경제개발 수준이 낮은 단계에서는 성장 자체가 국민의 행복도를 높이지만, 국가가 부유해질수록 불평등을 해소하고 환경의 질을 개선하는 등 지속가능한 성장을 하지 않으면 행복도는 정체된다고 진단하고 있다. 다시 말해, 빠른 성장보다는 미래의 성장 잠재력을 훼손하지 않는 건강한 성장이 국민의 행복을 증진한다는 얘기다. 세계경제포럼(WEF)의 클라우스 슈밥 회장도 저서 <위대한 리셋>에서 같은 관점의 주장을 펴고 있다. 슈밥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저성장이 ‘뉴노멀’로 자리잡을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성장에 집착하는 게 유용한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특히 세계 지도자들이 시민과 지구의 행복에 더 집중하고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동안 경제 번영의 지표로서 국내총생산(GDP)에 과도하게 의존한 결과 자연과 사회자원 고갈이라는 문제가 발생했는데, 이제는 이를 치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과거의 ‘사업보국 1.0’은 양적 성장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기업이 추구해야 할 ‘사업보국 2.0’은 질적인 성장과 경영이 될 것이다. 재무적 가치와 같은 비중으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지속가능경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객, 근로자, 거래기업, 지역사회 등 이해관계자를 존중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와 가치사슬 전반에서 환경과 사회, 지배구조를 개선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ESG 경영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유엔이 2015년에 채택한 17개 항목의 지속가능개발목표(SDGs)이다. 맑은 물과 위생, 청정에너지, 불평등 완화, 지속가능한 도시, 책임 있는 소비와 생산, 기후변화 대응, 해양생태계 보존 등이 여기에 포함돼 있다. SDGs는 유엔이 2030년까지 달성하기로 한 의제로 해마다 고위 포럼에서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글로벌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SDGs는 기업 입장에서 보면 사회적 가치 창출이 재무적 가치 못지않게 중요하게 부각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뜻한다. 딜로이트 컨설팅은 “SDGs는 과거 수십년간에 걸쳐 글로벌 자본주의 속에서 구축돼온 현대 기업경영모델의 근간을 뒤흔드는 변화의 요구”라고 규정하고 있다. 특히 SDGs의 개별 항목들은 달성 수준이 높아질수록 삶에 대한 주관적인 만족도도 같이 높이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떨까?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2018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GDP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3개국 중 여섯째로 많고, 근로자 10만 명당 사고 사망자 수는 5.09명으로 넷째로 높다. 반면에 재생 에너지 사용 비율은 가장 낮다. 이 수치는 ‘사업보국 2.0’의 실행을 위해 기업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앞으로 기업들은 SDGs 등에 반영된 사회적 가치 창출을 본업과 분리된, 리스크나 평판을 관리하는 정도로 여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전사 차원의 전략에 적극적으로 포함시켜 생산과 경영 전반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접근이 필수적이다. 사회적 가치가 기업의 존재 목적, 사업, 제품, 서비스에 녹아들 때 건전한 성장 동력이 제대로 작동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실제로 지속가능경영을 모범적으로 실행에 옮긴 역할모델 기업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 등산 장비와 기능성 의류 제조기업인 파타고니아가 대표적이다. 파타고니아는 환경 문제 해결을 사업 전반에서 제일 우선시하며 견실한 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우량기업이다. 재활용 페트병에서 추출한 섬유로 재킷을 만들고, 유기농 천연섬유와 독성이 적은 염료 등을 써서 의류를 제조하고 있다. 또 보상판매 프로그램을 통해 의류를 되사들인 다음 세탁과 수선을 거쳐 재판매함으로써 제품의 사용 기간을 늘려 자원을 절약하고 있다. 필립스도 빼놓을 수 없는 기업이다. 필립스는 전구 판매량을 극대화하는 종전의 전략을 지양하고 조명의 설치·보수·운영 등 포괄적 서비스를 제공, 제품의 수명을 연장하는 것을 새로운 사업으로 채택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사회와 호흡을 같이하는 ‘사업보국 2.0’을 지향해야 하는 한국 기업들은 이본 슈나드 파타고니아 CEO가 들려주는 경영철학을 경청하고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끝없는 성장을 필요로 하고 자연 파괴에 대해 책임져야 마땅한 자본주의 모델이 반드시 대체돼야 한다고 믿는다. 파타고니아와 2000명의 직원은 옳은 일을 해서 세상에 유익하면서도 수익성이 있는 기업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전 세계 기업들에 입증해 보일 수단과 의지를 갖고 있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2021-04-14 03: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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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수의 열린경제] '디지털 원화' ..넘어야 할 산 많다 [최남수 서정대 교수] 팬데믹으로 우리는 사람과의 거리두기에 집중했다. 크게 의식은 못 했지만, 거리두기를 한 게 또 있다. 바로 지폐와 동전이다. 비대면 결제를 주로 하다 보니 현금 쓸 일이 크게 줄어들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현금이 코로나19를 전파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생겼다는 점이다. 실제로 바이러스가 지폐나 주화에서 수일간 생존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까지 했다. 중앙은행에 비상이 걸렸다. 한국은행과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중국 인민은행 등은 일정 기간 지폐를 보관하고 소독이나 살균을 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 같은 유명 관광지는 아예 현금을 받지 않기도 했다. 이래저래 모습을 감춰가는 현금 사용이 팬데믹 기간에 급격하게 감소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디지털화폐(CBDC)를 발행하는 방안에 대한 논의가 활기를 띠고 있다. 아예 현금을 없애고 ‘가상의 돈’을 만들자는 얘기이다. 중앙은행이 주체가 되는 일이어서 ‘빅이슈’이긴 하다. 하지만 아주 새로운 혁신이라고 보기 어려운 점도 있다. 이미 ‘○○페이’ 등을 포함해 우리는 일상에서 디지털 결제에 익숙해져 있다. CBDC는 경제의 디지털화 과정에 뒤늦게 승차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뜻 보면 모든 게 디지털화하는 세상인데,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문제는 CBDC 논의가 다층적(多層的) 측면이 있고, 장점과 더불어 리스크도 적지 않다는 데 있다. 왜 CBDC가 필요한지, 그리고 해외와 차별화된 ‘한국적 CBDC’는 무엇인지에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최근 들어 각국 중앙은행들은 디지털 화폐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은 연초에 내놓은 보고서에서 조사 대상 65개 중앙은행 중 86%가 어떤 형태로든 연구나 실험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바하마는 디지털 화폐인 ‘샌드 달러’를 시범 실시하고 있고, 중국은 여러 지역에서 대규모 파일럿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보스턴 연준(Fed)은 MIT와 공동으로 소매 CBCD 연구를 본격화하고 있다. 이 같은 연구가 곧바로 ‘실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CBDC의 발행을 위해서는 관련법 개정 등 제도 정비가 선행돼야 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이 174개 회원국의 중앙은행법을 조사한 결과 현재 법적으로 CBDC를 발행하는 게 가능한 국가는 40%에 불과하다. 지난해 2월 CBDC 전담 조직을 출범시킨 한은은 최근 외부 연구 용역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한은이 디지털 화폐를 시중에 유통하기 위해서는 한은법은 물론 민·형법 개정이 필요한 것으로 지적됐다. 이렇듯 각국이 CBDC에 발을 담그고는 있지만, 그 속내는 각기 다른 게 현실이다. 가장 대표적이고 표면적인 CBDC 발행의 이유는 현금 사용의 급감이다. 소비자들이 현금 대신 디지털 통화를 선호하고 있으니 중앙은행도 이를 수용하자는 것이다. 대표적인 국가는 스웨덴이다. 스웨덴은 현금 결제 비중이 13.0%(2018년)에 그치고 있다. 현금 결제를 거부하는 사례가 늘어나는 등 ‘현금 없는 사회’를 향해 빠르게 나아가고 있다. 스웨덴 정부는 이를 반영해 2017년부터 디지털 화폐 발행을 위한 ‘e-크로나’ 프로젝트를 실시해 오다가 최근 이를 내년 2월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금액 기준으로 현금 이용 비중은 2017년의 20.3%에서 2019년에는 17.4%로 더욱 낮아졌다. 개인이 지갑 속에 가지고 다니는 현금도 2019년에 5만3000원으로 2년 전보다 2만7000원이나 줄어들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던져본다. 현금 사용이 크게 줄어든 것은 CBDC 도입의 필요충분조건인가? 답은 ‘신중한 접근이 필요함’이다. 한은이 발표한 ‘2019년 지급수단 및 모바일 금융서비스 이용행태 조사 결과’를 보면 60, 70대가 현금을 상대적으로 많이 쓰고, 특히 70대 이상은 현금 사용이 압도적이다. 이들 고령층은 디지털 통화가 나오면 피해가 우려되는 연령층이다. 디지털 활용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은행 계좌가 없는 사람들에게 중앙은행이 직접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금융 포용’이 CBDC의 장점으로 지적되곤 한다. 하지만 이는 대부분 국민이 계좌를 가지고 있는 한국적 상황에선 현실적이지 않다. 오히려 ‘디지털 디바이드’가 더 이슈가 될 수 있다. CBDC 발행을 추진하는 또 다른 동기를 보여주고 있는 국가는 중국이다. 중국 당국은 먼저 알리페이 등 민간의 디지털 통화가 시장을 주도해 가고 있는 데 대해 견제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 큰 자극은 외부에서 왔다. 때는 2019년 6월. 세계적으로 27억명이 넘는 사용자를 보유한 페이스북이 가상화폐인 ‘리브라’를 발행하겠다고 발표해 각국 중앙은행이 발칵 뒤집혔다. 이 계획대로라면 페이스북 이용자들은 블록체인을 통해 중앙은행이나 상업은행 등 중개 기관을 거치지 않고 리브라를 이용해 자유롭게 해외송금이나 결제를 할 수 있게 될 터였다. 이렇게 되면, 중앙은행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서 대규모 자금이 국제적으로 이동하는 게 가능해져 통화정책의 유효성과 통화 주권에 큰 구멍이 생기게 된다. 당시 트럼프 행정부는 페이스북의 계획에 강하게 제동을 걸고 나왔다. 리브라 발행계획은 중단됐다. 페이스북은 최근 규제당국의 우려를 어느 정도 해소한 새로운 가상화폐인 ‘디엠’의 발행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중국으로선 ‘리브라’로 인한 통화 주권 훼손 가능성이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디지털 화폐시장에서 통화 패권을 미국에 내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CBDC 발행을 준비하기 위한 보폭을 빨리 가져간 이유이다. 중국은 내친김에 디지털 위안화의 국제화를 위한 움직임도 본격화하고 있다. 중국은 최근 국제은행 간 금융통신협회(SWIFT)와 디지털 화폐 유통을 위한 합작법인을 설립했다. 의미가 작지 않은 ‘사건’이다. SWIFT는 국제 외환거래에 대한 정보를 은행들과 공유하는 기관이다. 미국 은행들이 국제 결제를 중개해 미국 금융지배력의 핵심축으로 작동해온 기구이다. 중국이 SWIFT와 손잡았다는 것은 달러 패권의 안마당을 들여다본 것이나 다름없다. 중국이 이처럼 빠르게 움직여 가자 느긋하던 미국의 입장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 미국은 종전에는 CBDC는 빨리하는 것보다 제대로 하는 게 중요하다며 관망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이 ‘화폐 전쟁’을 걸어오는 조짐이 본격화되자 ‘적극 대응’으로 선회하고 있다. 재닛 옐런 재무부 장관은 “중앙은행이 CBDC를 들여다보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긍정적 입장을 나타냈다. 제롬 파월 FRB 의장은 한 발 더 나아가 “디지털 달러 발행은 우선 순위가 높은 일”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미국의 정책 변화는 중국의 공세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것이다. 앞으로 미·중 디지털 화폐 경쟁은 어떻게 진행될까. 앞서가는 중국이 달러 패권에 도전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이는 디지털 위안화에 대한 과대평가라고 생각한다. 디지털 화폐는 국제 거래가 훨씬 용이해서 위안화의 외환시장 거래 비중은 현 수준인 4% 선보다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패권에 근접하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 통화 패권은 정책의 속도만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투명하고 신뢰도 높은 통화정책, 화폐가치의 안정, 자본시장의 개방과 내외국인 투자자의 동동 대우 등 제도적 인프라를 갖추는 게 긴요하다. 중국은 이런 점에서 미국에 절대적 열세이다. 아직은 해야 할 숙제가 많다. 한국 입장에서 디지털 원화 발행의 필요성을 가장 크게 느끼게 하는 요인 중 하나는 바로 디지털 달러화와 디지털 위안화의 발행 가능성이다. 국내에서 이들 외국 디지털 통화의 보유가 늘어나면 이는 곧 자금의 해외 유출을 가져와 국내 금융 시스템과 통화정책에 경고음을 울리게 될 것이다. 결국 이에 대한 대응은 대응대로 해나가면서 디지털 원화를 시장에 내놓는 게 불가피한 선택이 될 것이다. 더 적극적 입장에서 보면 디지털 원화를 활용해 그동안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해온 원화의 국제화를 추진할 수 있는 계기로도 삼을 수 있을 것이다. CBDC 발행은 이점과 문제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빅테크 기업에 집중되고 있는 디지털 결제 시장에서 경쟁을 촉발하고, 재난지원금 같은 재정지출을 금융기관을 거치지 않고 수혜자에게 직접 빠르게 지급할 수 있는 것 등이 장점이다. 반면 디지털 화폐는 프라이버시와 개인 재산권 침해, 은행의 자금 중개기능 약화 등 문제점을 가져올 수 있다. 개인이 한국은행에 계좌를 갖는 식으로 일이 진행되면, 한은이 마음만 먹으면 자금거래를 들여다볼 수 있는 ‘빅브러더’가 될 수 있다. 현금이 사라진 상태에서 마이너스 금리가 부과될 경우, 예금 인출로 이를 피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져 재산권 침해를 둘러싼 분쟁도 예상된다. 특히 은행예금이 한은으로 쏠려 은행의 자금 중개 기능이 취약해질 우려가 있다. 종합하면, 우리 입장에서 CBDC 발행은 충분한 연구 검토와 준비는 하되 서두를 일은 아닌 것같다. 현금 수요가 일정 부분 지속되고 있는 데다 민간의 디지털 화폐가 신뢰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 등 해외의 움직임이 가장 큰 압박 요인인 만큼 추이를 지켜보며 차분하게 대처해 나가야 한다. 국내적으로는 디지털 취약 계층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상당 기간 현금 사용을 병행하고, 프라이버시와 재산권 보장, 금융시장 안정 등을 위한 철저한 대비책이 마련돼야 한다. 무엇보다 왜 CBDC가 필요한지, 그리고 한국만의 차별화된 디지털 화폐는 무엇인지에 대해 충분한 논의 과정을 거치고 이를 통해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게 중요한 선행조건이 될 것이다. 2021-03-17 03: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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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수의 열린경제] 팬데믹의 교훈 '기업가형 국가'에 답이 있다 [최남수 서정대 교수]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한파(寒波)’. 아무래도 어두운 소식이 많을 때이다. 다행인 것은 도전적인 기업가 정신이 주눅 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최근 통계인 2020년 3분기 창업기업 동향을 보면 새로 문을 연 기업 수가 34만3128개다. 1년 전보다 13.3%가 늘어났다. 경제의 디지털·비대면화에 따라 정보통신업과 도·소매업의 창업이 크게 늘어났다. 제조업 창업도 7분기 만에 증가세로 돌아섰다. 미국도 상황은 마찬가지. 더 이코노미스트지는 최근 보도에서 미국에서의 창업이 데이터 처리 등 IT산업을 중심으로 기록적인 수준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려는 기업가의 촉수는 분주하게 가동되고 있는 것이다. 불황은 ‘동면의 시간’이 아니다. 경제의 새 살이 돋아나는 혁신의 시기이다. 1930년대 대공황으로 가보자. 당시 미국의 생산성은 의외로 매년 1.8%라는 ‘준수한 속도’로 늘어났다. 앨런 그린스펀 전 FRB 의장은 저서 ‘미국 자본주의 역사’에서 엄청난 혁신의 힘이 작용한 덕분이라고 진단한다. 실제로 전화기에서부터 비행기에 이르는 기술적 진보가 이때 일어났다. S-42 비행정이 샌프란시스코에서 호놀룰루까지 3800㎞를 최초로 단번에 주파한 게 1935년이다. 이 시기에 현대적 편의점인 세븐일레븐이 선을 보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듀폰이 나일론을 발명한 것을 비롯해 저밀도 폴리에틸렌, 스티로폼 등 신규 화학제품이 잇따라 개발됐다. 상황이 힘든 만큼 상상력의 힘도 커졌다. 1930년대에 제작된 할리우드 영화는 5000여편에 이른다. ‘백설공주’, ‘오즈의 마법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걸작이 경기침체에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와 휴식의 시간을 주었다. 대규모 재정지출의 활약상이 돋보인 상황 속에서 민간의 활력도 새로운 미래의 싹을 틔워가는 때였다. 이는 팬데믹 위기 속의 경제에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 정부와 민간의 공조와 역할 분담에 대해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전례 없는 바이러스 확산으로 경제의 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가 ‘소방수’로 강력하고 빠르게 등판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취약계층과 소상공인에게 자금을 긴급 수혈하고, 위기에 처한 산업에 ‘자금 파이프라인’을 열어주는 등의 응급조치는 경제의 두 축인 수요와 공급이 붕괴하는 것을 막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이다. ‘큰 정부’가 전면에 나서는 게 정답인 시기이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의 경제 현장은 그렇다고 정부가 경제를 지나치게 압도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자생적으로 숨통을 틔워가고 있는 민간의 혁신이 상승 기류를 탈 수 있도록 정부가 한쪽으로 비켜설 줄도 알고, 이를 측면 지원하는 ‘2선의 역할’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지난해 경제 성적표를 들여다보자. 의미 있는 흐름을 읽을 수 있다. 2020년 실질 경제성장률은 –1.0%. 감소 폭이 훨씬 컸던 다른 나라에 비해 양호한 수준이다. 한국 경제의 선방은 일차적으로는 대규모 재정 투입으로 정부 소비가 5.0% 늘어난 데 힘입은 것이다. 더 중요한 요인이 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기업의 설비투자가 경제 위기의 와중에서도 6.8%나 확대된 게 성장률 급락에 제동을 건 안전판 역할을 했다. 투자는 2018년부터 2년 연속 감소세를 지속했지만, 오히려 팬데믹 충격이 강타한 지난해에 증가세로 돌아섰다. 지난해 경제 성장 내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성장률이 민·관(民官)의 합작품이라는 점을 얘기해주고 있다. 정부가 많은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민간기업의 투자 확대라는 ‘맞장구’가 없었다면 이룰 수 없는 성장률이었다. 결국 ‘큰 정부’의 시대도 민간의 활력이라는 ‘공명(共鳴)’이 울려야 지속가능한 것이다. 더구나 정부가 경기를 떠받치는 것은 무제한 가능하지 않다. 재정지출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과 국가신인도에 대한 영향 등 제약 조건 아래서 운용될 수밖에 없다. 또 언젠가는 재정 건전성을 향해 ‘회군’해야 하는 순간도 다가오게 돼 있다. 지금부터는 경기 회복의 바통을 재정에서 민간으로 넘기기 위한 정책적 노력이 긴요한 이유이다. 이런 점에서 연초에 세계은행이 2021년 경기 전망을 하면서 던진 화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데이비드 맬패스 세계은행 총재는 “팬데믹 영향을 극복하고 투자 확대를 유도하기 위해 각국 정부는 적극적으로 기업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부가 투자 지향적인 개혁을 하지 않는다면 경기 회복은 더딜 것이라는 게 세계은행의 경고이다. 이제부터는 기업이 움직일 수 있게 여건을 혁신하라는 주문이다. 이와 관련해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1933년의 마지막 날에 뉴욕타임스에 실은 칼럼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조언한 내용을 되새겨 봐야 한다. 케인스는 이 공개서한에서 경제 개혁조치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경기 회복을 저해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그 개혁이 산업계의 자신감에 상처를 입히고, 기존의 행동 동기마저 꺾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대표적인 진보적 경제학자인 케인스가 경기를 되살리기 위해 기업의 의욕을 부추길 것을 강하게 권고한 말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런 일을 하기 위해 ‘큰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할까? ‘기업가형 국가’를 그 방향으로 제시해본다. 이 말은 2013년에 마리아나 마추카토 영국 석세스 대학 교수가 내놓은 개념인데, 이를 확대 해석한 방안을 제안해보려 한다. 팬데믹 위기 탈출을 위해 우선적으로 가시화됐으면 하는 ‘기업가형 국가’의 모습은 투자 활성화를 위한 규제 혁신이다. 기업의 반발 속에서 경제개혁 입법을 강행한 만큼 이제는 투자 촉진을 위한 규제 혁파에 나섰으면 한다. 이는 경기도 살리고 새로운 일자리도 만들면서 궁극적으로 재정지출을 줄일 수 있는 ‘일석삼조(一石三鳥)’의 선순환을 가져올 수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평가한 규제 완화의 정도에서 우리나라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보다 더 낮은 순위에 머물고 있다는 점은 곰곰이 되돌아봐야 할 한국 경제의 현주소이다. 한국은행은 산업 평균 기준으로 규제 완화를 10% 하게 되면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이 0.3% 포인트 확대된다고 분석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상품시장 규제가 OECD 국가 중 높은 수준인 만큼 진입 장벽을 완화하는 규제 개혁을 고려해야 한다는 게 한은의 의견이다. 무엇보다 기업의 기를 살리는 분위기 전환이 중요하다. 다음으로 정부는 민간의 혁신을 선도할 수 있다. 마추카토 교수가 그린 ‘기업가형 국가’의 전형이다. 정부는 상대적으로 단기 관점을 가진 기업보다 위험이 큰 혁신 투자에 나설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민간이 떠안으려 하지 않는 위험을 감수하고 시장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미국에서 철도에서 나노기술, 제약에 이르기까지 초기에 과감하게 이뤄진 기업가적 투자의 시발점은 국가였다. 특히 인터넷, GPS, 터치스크린 디스플레이, 시리(애플의 음성인식 서비스), 음성 작동 개인 단말기 등 스마트한 기술은 모두 미국 정부의 지원으로 개발됐다. 예컨대 인터넷은 미국 국방부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PRA)이 발명하고 상업화했다. 최근 우리 정부도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을 축으로 한 한국형 뉴딜을 추진하면서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이 같은 정책을 통해 선도적인 기술이 개발되고 이게 민간으로 확산되는 ‘민·관 기업가형 공조모델’이 가동되길 기대해본다. 기업가형 국가는 정부가 기업에 몇 발짝 다가서는 몸짓이다. 기업은 어떻게 변해야 할까? 사회와 잘 소통하고 상생하는 ‘기업 시민’을 그 답으로 제시해본다. 기업 시민은 말 그대로 기업도 사회의 구성원인 ‘시민’처럼 사회를 향해 법적·윤리적·경제적 책임을 다하는 개념이다. 요즘 국내외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와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단기적 주주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을 기업의 목적으로 보는 주주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양극화 심화 등 폐해로 인해 공감대를 잃은 상태이다. 이제 기업은 고객, 근로자, 거래 기업, 지역사회 등 이해관계자를 중시하는 경영을 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최근 ESG가 강조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ESG는 글로벌 비즈니스의 ‘드레스코드’가 될 전망이다. 환경을 훼손하고, 이해관계자의 권익을 외면하고, 지배구조가 불투명한 기업은 글로벌 무대에 서기 어렵거나 많은 불이익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투자자들이 기피하고, 자금조달 금리가 올라가고, 기업가치가 떨어지는 등 비용을 치르게 될 것이다. ESG는 종전의 CSR(사회적 책임활동)처럼 평판 개선을 위해 하는 ‘선택 사양’이 아니라 기업이 생존하고 성장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돼가고 있다. 팬데믹 이전과 이후는 본질적으로 다른 세상이다. 과거의 틀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만큼 오래된 사고와 행동의 관성을 끊어내야 한다. 발상의 대전환을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기업가형 국가와 기업 시민의 새로운 ‘접속’은 한국 경제가 위기를 돌파하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신 민·관 공조시대’를 열어가는 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2021-02-17 05: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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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수의 열린경제] 미래 경영 체력, ESG에서 나온다 [최남수 서정대 교수] #1 테슬라와 엑손 모빌. 이 두 회사의 주가 흐름은 친환경 에너지의 부상과 화석연료의 퇴조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전기차 업체인 테슬라의 시가총액은 8000억 달러 선을 넘나들고 있다. 석유와 가스 생산업체인 엑손 모빌의 시총은 2000억 달러로 테슬라의 4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엑손 모빌은 지난해 말 한 행동주의 투자기업으로부터 앞으로는 탄소 중립 에너지와 청정에너지 인프라 등에 적극적 투자를 하고 이 같은 전략적 변화를 위해 이사진을 교체하라는 요구를 받기도 했다. #2 최근 구글의 지주 회사인 알파벳에 첫 노조가 생겼다. 직원이 10만명이 넘는 구글에서 아직 노조원이 수백명에 그치는 노조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할지는 지켜볼 일이다. 그런데 이 노조가 내건 설립 명분이 흥미롭다. 워낙 급여 수준이 높은 직장이어서 그런지 임금 인상과 복지 확충에 대한 언급을 볼 수가 없다. 대신 알파벳이 사회와 경제 정의를 이루고 윤리적으로 행위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이익을 극대화하기보다는 사회와 환경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점을 노조가 중시하는 가치로 제시했다. 드론을 이용한 기습공격에 쓰이는 구글의 인공지능 기술을 미 국방부에 납품하는 것을 중단시킨 근로자들다운 모습이다. #3 미국에서는 기후 변화로 인해 해수면이 상승하면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이는 부동산은 그렇지 않은 건물보다 7% 낮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기온 상승 우려에 부동산 시장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에너지와 환경친화적으로 설계된 상업용 사무실 건물은 ‘녹색 인증’을 받고 있는데 전체의 41%에 해당하는 약 4700개 건물이 합격 판정을 받았다. 환경, 사회, 지배구조를 중시하는 ESG에 대한 논의가 국내외에서 활기를 띠고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사례들은 다양한 분야에 스며들고 있는 ‘ESG 현장’을 잘 보여주고 있다. ESG는 15년 전인 지난 2006년에 UN이 제정한 ‘책임투자 원칙(PRI)에서 처음 나온 개념이다. PRI는 기업에 대한 투자 여부를 결정할 때 ESG를 중시하도록 기준을 제시했다. 현재 세계적으로 2300개가 넘는 금융기관들이 이 원칙에 서명했다. 이들이 운용하고 있는 자산은 80조 달러를 웃돌고 있다. ESG의 세부 내용을 보면, 먼저 환경(E:Environmental)의 경우 기후 변화 정책, 공기 및 수질 오염, 재생에너지 사용 등을 평가하고 있다. ’사회(S:Social)‘는 지역사회와의 소통, 고객 관계, 인권, 제품 안전 등이 평가 항목으로 기업이 다양한 이해관계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배구조(G:Governance)’는 이사회 구성, 투명성, 주주 관계 등 기업의 경영 구조와 내적 통제를 들여다보는 항목이다. ESG는 최근 들어 글로벌 경제의 핵심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해 말 세계경제포럼(WEF)은 ‘다보스 선언 2020’에서 기업의 성과는 주주에 대한 수익뿐만 아니라 ESG 목표를 어떻게 달성하고 있는지를 기준으로 측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컨설팅기업인 매킨지도 올해 본격화될 ‘넥스트 노멀(next normal)’ 추세 중 하나로 ESG를 들면서 녹색 기술 기업이 향후 수십년 동안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미국 나스닥은 2021년 증시 전망을 내놓으면서 5가지의 큰 흐름을 제시했는데 ESG 투자의 가속화를 그중 두 번째로 꼽았다. 이렇듯 ESG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 크게 보아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팬데믹과 기후 변화 대응을 중시하는 미국 바이든 행정부의 출범을 계기로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여기에다 주주 이익만을 중시하는 주주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고객, 근로자, 거래기업, 지역사회 등 이해관계자를 중시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논의가 활성화되고 있는 것도 한 이유가 되고 있다. [1] 올해는 ESG 중 특히 환경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한 해가 될 전망이다. 가장 큰 전환점은 바이든 행정부가 이끄는 미국의 파리기후협약 재가입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15년 협약 채택 당시 목표는 지구 평균기온 상승 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1.5°C로 억제하는 것이었다. 현재 상황은 ‘궤도 이탈’이다. 지금 같은 속도로 기온이 올라가면 12년 안에 1.5°C ‘천장’이 뚫리고 금세기 말에는 기온이 3°C 상승할 것으로 우려된다. 오는 11월에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리는 파리기후협약 후속 회의에 더욱 시선이 쏠리고 있는 이유이다. 현재 각국은 파리협정에 따라 2050년(중국은 2060년)까지 탄소 중립을 달성하겠다는 선언을 했는데 11월 회의에서 더 전향적인 목표가 설정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ESG에 대한 기업 입장도 뚜렷하게 바뀌고 있다. 종전에는 규제 회피 중심의 소극적 자세였다면 이제는 비즈니스 모델 측면에서 수익을 추구하는 적극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팬데믹 국면에서 경기 회복을 위해 각국 정부가 그린뉴딜 정책에 나서면서 자금이 녹색 산업에 몰리고 있는 데다 자본시장에서 ESG 성과가 부진한 기업을 기피하는 투자자들의 움직임도 본격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이제는 재생에너지나 친환경 제품 등 신사업을 추진하거나 저탄소 기술 도입 등으로 기존 사업을 환경친화적으로 전환하는 방식으로 ESG에서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찾고 있다. ESG가 돈만 쓰는 대상이 아니라 돈벌이도 되는 비즈니스로 전략적 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총수가 ESG 경영을 진두 지휘하고 있는 SK그룹, 수소산업 생태계 육성에 승부수를 둔 현대자동차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실제로 ESG를 중시하는 경영을 하는 기업은 성과도 좋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7월에 나온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보고서는 ESG 관리 수준이 높은 기업은 위험도도 낮고 수익성이 높은 것으로 분석했다. 특히 ESG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새로운 기업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매킨지는 진단하고 있다. 먼저 ESG는 기업의 신뢰도를 높여 추가적인 성장 기회를 제공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롱비치는 대규모 인프라 건설 사업을 진행하면서 우수한 지속가능경영을 한 민간 기업을 참여시켰다. ESG가 제품에 대한 소비자 수요를 확대한 예도 있다. 유니레버는 물을 훨씬 덜 쓰는 식기 세척 세제인 ‘선라이트(Sunlight)’를 시판한 이후 기업 이미지가 좋아져 다른 제품까지 매출이 늘어나는 성과를 올렸다. 비용을 크게 줄인 기업도 있다. 3M은 제조공정 개선과 폐기물 재사용 등 방식을 써서 22억 달러를 절감했고, 3만5000대의 수송 차량을 전기차나 하이브리드 차량으로 전환하는 계획을 추진 중인 페덱스는 지금까지 20%의 차량을 교체해 연료 소비를 19억ℓ 가까이 줄였다. ESG는 생산성 향상을 통해 기업 성과를 개선하기도 한다. 실력 있는 인재를 확보하거나 직원들의 만족도를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런던 비즈니스 스쿨의 연구진이 포천지가 선정한 ‘일하기 좋은 100대 기업’을 대상으로 25년간에 걸쳐 조사한 결과 이들 기업의 주가 수익률은 다른 기업에 비해 2.3~3.8% 높게 나타났다. 하지만 ‘ESG 경영’은 아직 갈 길이 멀고, 선결돼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먼저 ESG를 정확하게 평가하는 개선된 기준이 필요하다. 현재는 이런 기준이 미비해 실제로는 친환경 경영을 하지 않으면서도 녹색 경영을 하는 것처럼 공표하는 ‘그린워싱(greenwashing)’을 가려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예컨대 제조업체가 대규모 벌목으로 삼림을 파괴하는 것을 감춘 채 재생지 활용 등만을 강조하면 이에 현혹되기 십상이다. 말만 떠들썩하게 하고 실행이 없는 허장성세(虛張聲勢)를 드러낼 체계적인 공시 기준이 필요하다. 또 기업간 비교를 위해 일관되고 표준화된 데이터가 필요하지만, 기업마다 데이터 작성 방법이 제각각인 점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움직임은 세계경제포럼이 딜로이트 등 세계 4대 회계법인과 공동으로 작업을 하고 있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측정지표(SCM)’이다. 이 지표는 자본주의의 개혁을 착근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고 있는데 ESG가 핵심 지표로 포함돼 있다. 반부패, 온실가스 배출량, 자연 훼손, 물 소비량, 급여의 평등 여부, 산업재해, 근로자 훈련, 신규 채용과 이직자 등 구체적 지표를 기업들이 공시하도록 하고 있다. 앞으로 SCM이 확정돼 실행에 들어가면 ESG의 본격 시행을 위한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국내 기업은 최근 ESG에 의욕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지만, 외국 기업에 비해 아직은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이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 상장법인 908개를 대상으로 평가한 2020년 ESG 등급을 보면 가장 높은 S등급은 1개 기업도 없고, A+는 16개사, A는 95개사로 우수기업이 12.2%에 그치고 있다. B+를 받은 기업이 146개사, B가 318개사, C 306개사이고 D등급 기업도 27개이다. 아직 ESG가 기업 경영의 핵심축이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한국 경제가 제조업 강국이라는 점이 ESG에는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온실가스와 폐기물 배출량, 에너지 소비량 등 환경 측면에서 개선할 요소가 많다. 이런 점은 앞으로 각국이 탄소 국경세 부과 등 녹색보호주의 경향을 보이면 수출 애로요인이 될 것으로 우려된다. 경영전략의 최고 권위자인 마이클 포터 하버드대학 교수는 지난 2011년 ‘공유가치 창출’을 기업의 새로운 경영목표로 제시했다. 기업이 단지 평판 개선을 위해 사회적 책임 활동을 하는 데 머물 것이 아니라 가치 사슬 전반에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ESG는 환경을 중시하고, 이해관계자와 호흡을 같이하는 공유가치 창출을 구체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시동이 걸린 만큼 한국 기업들이 발상의 전환과 꾸준한 실행 의지로 ‘ESG 경영의 선두권’에 진입하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2021-01-20 18:4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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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수의 열린경제] ‘통합의 정치’, 경제도 행복도 키운다! [최남수 교수] 영화 ‘쉰들러 리스트’. 1939년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의 한 도시가 배경이다. 독일인 사업가인 오스카 쉰들러가 강제수용소에서 참혹한 상황에 놓인 유대인들을 구하는 감동적인 실화를 담았다. 아프리카를 무대로 한 비슷한 영화가 있다. 1994년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의 상황을 다룬 ‘호텔 르완다’. 이 영화 또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당시 르완다는 양대 세력인 투치족과 후투족이 서로 총을 겨눠 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나왔다. 평화협정으로 잠시 안정을 찾는 듯했지만, 다수 종족인 후투족 출신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르완다는 다시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분노한 후투족은 투치족에 복수의 공격을 한다. 이때 최고급 호텔인 밀 콜린스의 지배인 폴 루세사비기나는 100일 동안 호텔로 몰려든 투치족 난민 1200여명을 목숨을 걸고 보호한다. 6년 후인 2000년 봄 투치족 반군 조직인 르완다 애국전선(RPF)을 지휘했던 폴 카가메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RPF가 군사적 승리를 거둔 데 따른 것이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무차별 복수극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카가메는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범죄에 대한 단죄는 최소화했다. 후투족 최고위급 인사들은 국제형사재판소에 넘겼다. 다른 한편으론 ‘우리는 모두 르완다인’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인종을 따지지 않는 나라를 만들자”고 국민에게 호소했다. 그는 인종차별을 공식적으로 철폐했다. 후투족이니, 투치족이니 하는 단어를 아예 교과서에서 삭제해 버렸다. 같은 인종끼리 단체를 만드는 논의 자체를 불법화했다. 학살 범죄자들은 1만2000여개에 이르는 마을 법정 ‘가가차’에서 다뤘다. 목적은 처벌이 아니었다. 피고가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마을공동체가 이들을 끌어안았다. 사회적 통합을 추진한 카가메의 리더십에 따라 르완다는 과거에는 서로 적이었던 후투족과 투치족이 같은 마을에서 살고 직장에서 동료로 일하는 사회로 바뀌었다. 조너선 테퍼먼은 저서 ‘픽스’에서 당시 르완다가 ‘고통스러운 화해의 길’을 선택했다고 평가하며, “위기를 돌파하려는 지도자들은 절충과 타협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번에는 1970년대 초반의 칠레로 가보자. 1973년 9월 쿠데타가 일어난다. 우파 군부정권이 시작됐다. 50대 후반의 장군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정권을 잡았다. 그는 장기집권을 하며 반대세력을 폭력으로 억압했다. 1976년까지 칠레 국민의 1%에 해당하는 13만명이 체포됐다. 이들 중 수천명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됐다. 다른 국가에서 추적을 당하다가 살해된 칠레인도 수백명에 이른다. 피노체트는 임기를 8년 연장한 후 1997년에 다시 8년을 늘리려고 국민투표에 부쳤다가 58%의 반대표가 나와 자리에서 물러났다. 정권은 좌파와 중도 정당의 연합체인 ‘콘세르타시온’으로 넘어갔다. 새 정부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구성했다. 먼저 피노체트 정권이 저지른 범죄 행위에 대한 진상 규명과 처벌이 진행됐다. 피노체트는 살인과 금융 범죄 등 혐의로 기소돼 가택 연금 상태에 있다가 2006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살인과 고문에 책임이 있는 수십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관용과 타협도 같이 이뤄졌다. 1990년 3월에 취임한 파트리시오 아일윈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모든 칠레인을 위한 칠레’를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경제정책은 좌파 정권임에도 불구하고 우파 정권이 시행했던 정책을 적지 않게 이어갔다. 세계적 석학인 재러드 다이아몬드 UCLA 교수는 <대변동>에서 “‘모든 칠레인을 위한 칠레’라는 국가적 정체성이 없었다면 칠레는 정치적 마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남미지역에서 가장 민주적이고 부유한 국가로 되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르완다와 칠레의 사례는 ‘과거사’를 처리하고 국가의 앞길을 잡아갈 때, 분열과 갈등보다는 화해와 용서를 선택한 포용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반대의 상황이 민주주의 종주국이라고 자처해온 미국에서 벌어져 왔다. 주인공은 트럼프 대통령. 그는 경쟁자를 적으로 여기는 혐오의 정치를 일삼았다. 마지막까지 선거 불복 소동을 벌이며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하는 ‘못난 패배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모든 성공적인 민주주의는 상호 관용 등 성문화되지 않은 비공식적 규범에 의존한다고 강조하며, 트럼프가 이 규범을 지속해서 파괴했다고 비판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트럼프의 정반대 쪽에 있다. 워싱턴은 임기 8년 동안 의회에서 보내오는 법안에 대부분 서명했다. 거부권 행사는 단 두 차례에 불과했다. 워싱턴은 “비록 내 생각과 많이 달랐지만, 입법부에 대한 존경의 차원에서 여러 법안에 서명했다”고 말했다. 반목의 정치인 트럼프와 협치의 정치인 워싱턴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우리가 자주 경험하는 현실은 이념과 정치적 입장 등의 차이로 끊임없이 갈등이 이어지는 상황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한 가지를 짚어보자. 상대를 배척하는 것은 ‘내가 절대적으로 옳다’는 자기 확신 탓이다. 그런데 신념이 그토록 선명할까? 미국의 대표적 진보 학자인 조지 레이코프는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에서 이 질문에 도전한다. 그는 ‘이중개념주의’라는 상당히 공감이 가는 관점을 제시한다. 사람의 뇌에는 진보와 보수 가치가 공존하고 있고, 쟁점마다 다른 기준을 적용한다는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보수이거나 진보인 사람은 없으며, 사안마다 이 두 가치를 왔다 갔다 한다는 말이다. ‘모두가 이중성’을 가졌다는 진실에 눈을 뜨게 해준다. 나를 돌아보아 상대를 몇 수 접어줄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실제로 사람이 본질적으로 이렇지 않은가? 인간의 본성을 진단하는 톨스토이의 관점은 정확하다. 그는 소설 <부활>에서 ‘착한 사람, 나쁜 사람, 똑똑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 등 사람을 한 가지로 규정하는 틀이 잘못됐다고 말한다. “사람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성질의 싹을 자기 안에 품고 있다. 때로는 이런 성질을, 때로는 저런 성질을 발현하며, 여전히 같은 사람이면서도 종종 본래의 모습과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 이렇듯 인간과 그 사조(思潮)가 갖는 모순과 불완전성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나에게는 ‘절대선’, 그리고 상대에게는 ‘절대악’의 기준을 가져다 대면 오판과 오류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이 대목에서 관용과 타협의 접점이 생기고, 유연하게 문제에 대처하는 실용주의의 공간이 열린다. 폴 콜리어 옥스퍼드대학교 교수는 <자본주의의 미래>에서 깊은 분열의 시대에 이념이 제시한 답은 ‘난폭한 좌우대립’이라며, 진정한 해결책은 ‘실용주의의 차가운 머리’라고 강조한다. 이념의 신조에 부합하느냐가 아니라 실제 효력을 발휘하느냐를 기준으로 정책을 판단하고, 좀 더 겸손한 역할을 하는 국가가 필요하다고 그는 강조한다. 특히 실용과 관용, 타협의 문화가 중요한 것은 사회적 안정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경제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고 국민의 행복도를 높이는 ‘좋은 약’이기 때문이다. 먼저 상대에 대한 인정은 ‘제3의 자본’으로 불리는 사회적 자본의 핵심 요소이다. 사회적 자본은 신뢰, 법 준수 등 규범, 이웃과의 친밀성 같은 네트워크로 구성되는데, 이는 정치 안정 등 사회 통합을 가져와 경제의 안정성을 높이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실제로 1970~2000년의 기간 중 56개 국가를 대상으로 조사한 해외의 한 연구 결과를 보면 사회 신뢰도가 높은 국가일수록 경제성장의 변동 폭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가 들쭉날쭉하지 않고 평탄하게 운영된다는 얘기다. 국내 연구에서도 같은 결론이 나왔다. 김정훈 경기연구원 연구위원과 김기호 한국은행 연구위원은 ‘사회자본의 경제안정화 효과’라는 연구 보고서에서 “한국의 경우 의회 신뢰도가 낮게 나타나는데 이는 정치 불안으로 인한 경제 변동성의 확대라는 문제를 유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한다. 경제 안정을 위해서 정치가 갈등을 유발하기보다는 해소하는 협치의 공간을 넓혀야 한다는 게 이들 연구진의 주문이다. 사회적 통합은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북유럽 사회는 항상 행복도 순위에서 세계 최상위권에 오르고 있다. ‘세계 행복보고서 2020’은 왜 그런지 다양한 요인을 분석했다. 그중 하나의 요인으로 꼽힌 것은 덴마크와 핀란드, 스웨덴 등 노르딕 국가가 사회적 통합 면에서 전 세계 ‘톱3’에 올라 있다는 점이다. 서로 단합하는 공동체성이 ‘행복한 북유럽’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분열된 사회는 국민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여건을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지적했다. 만연한 갈등은 사회적 안정도 해치고 이로 인해 국민의 행복감도 떨어뜨린다는 얘기다. 코로나19의 재확산과 팬데믹의 장기화로 모두가 아프고 힘든 시기이다. 많은 기업이 경영에 차질을 빚고 있다. 특히 자영업자와 취약 계층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코로나 블루’에 마음의 상처를 입고 있는 사람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해외에서 백신 접종이 시작됐지만 내년 후반이 돼야 한숨을 돌릴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지배적 전망이다. 방역의 고삐를 잡고 경기를 정상으로 되돌리는 일에 모든 역량이 집중돼야 한다. 경기도 살리고 국민의 행복감도 키워주는 통합과 협치의 정치는 국민적·시대적 요구이다. 마사 누스바움이 <타인에 대한 연민>에서 들려주는 말은 그래서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서로를 악으로 규정하는 한 밝은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고 협력과 인류애를 가능하게 할 사랑도 갖지 못한다.” 2020-12-22 15:0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