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수 교수
nschoi76@naver.com
- 서정대학교 교수
- (전) YTn 대표이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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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수의 열린경제] EU發 '공급망 실사' 파고가 몰려온다 [최남수 서정대 교수] 글로벌 경제의 뜨거운 이슈 중 하나인 공급망. 제품의 생산과정이 ‘컨베이어 벨트‘처럼 지역적으로 연결돼있는 가치사슬의 핵심축이다. 안정적으로 굴러가는 듯하던 공급망은 최근 들어 그 안에 구조적인 불안 요인을 내포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팬데믹 기간에는 록다운으로 멈춰섰고, 한두 가지 부품의 생산 차질로 전체가 마비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또 무역분쟁의 와중에서 핵심 부품은 상대국을 향한 무기로 변질되기도 했다. 더 큰 틀에서는 미·중 패권경쟁의 국면 속에서 공급망을 ’내 편’과 ’네 편‘을 가려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공급망의 ’스트레스 수위‘를 높이는 또 하나의 변수가 부상하고 있다. 바로 EU(유럽연합)가 주도하고 있는 공급망에 대한 실사 지침(CSDDD)이다. 이 지침은 지난 6월 1일 유럽의회의 표결 문턱을 넘어섰다. 앞으로 EU집행위원회와 의회, 그리고 이사회 간에 3자 협의가 개시될 예정인데 2025년 이후 입법이 마무리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 지침이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일정 규모 이상의 EU 기업과 EU내 외국 기업의 공급망에 대해 환경과 인권을 중심으로 포괄적인 ESG 실사를 하도록 의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들여다보면, 기업 자체 활동뿐만 아니라 자회사와 협력사의 인권 및 환경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식별하고 이를 예방·완화·제거하는 등 적절한 조치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인권의 경우 근로조건, 아동노동, 강제노동, 뇌물과 부패방지, 결사의 자유, 단결권, 단체교섭권 보장 등이, 또 환경은 기후변화, 생물다양성, 대기·토양·수질 오염, 천연자원 과소비, 폐기물 관리 등이 실사 대상이다. 특히 기후변화와 관련해서는 지구 기온상승 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1.5℃ 이내로 억제하기로 한 파리기후협약에 부합하는 전략을 수립하고, 2030년과 2050년까지의 온실가스 배출 감축 목표를 설정하며, 공급망 내 기업의 탈 탄소 수준을 포함시키도록 하고 있다. 유념해서 봐야 할 대목은 실사 의무 위반에 대한 제재 수준이다. 행정적으로 벌금이 부과되는 것은 물론 공공조달 입찰과 유통, 그리고 수출이 금지될 수 있다. 고객사와의 거래가 중단될 수 있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위반 기업을 대상으로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EU 차원의 움직임과 별도로 개별 국가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 노르웨이는 유사한 법률을 이미 시행하고 있으며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 벨기에 등 국가의 의회에는 관련 법안이 제출돼 있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해 ’위구르 강제노동 금지법‘이 발효됐으며 캘리포니아주에서는 공급망 투명성법이 제정돼있는 상태이다. 이렇듯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공급망 실사의 법제화 추세로 당장 EU지역에 수출하는 국내 기업에 비상이 걸렸다. EU에 법인이나 지사를 설치한 기업은 물론 공급망에 포함된 기업까지 지침 적용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 5월에 내놓은 ’공급망 실사 대응을 위한 기업 지원 방안‘에서 “실사 의무는 EU 역내뿐 아니라 역외기업에도 적용되고 공급망 전반에도 의무화해 수출기업에 상당한 영향이 우려된다”고 진단했다. 특히 대(對)EU 수출이 많은 자동차와 부품업종 등을 중심으로 중소·중견 기업을 포함한 상당수 국내기업에 부정적 여파가 미치고 공급망 안에 있는 협력업체도 간접 영향권에 들어갈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현재 EU에 수출을 하는 국내 기업은 1만8000여 개에 이르고 있다. 대기업이 527개, 중견기업이 1181개, 그리고 중소기업이 1만6206개 사다. 문제는 국내 기업의 대응 태세가 매우 취약하다는 데 있다. 대한상의가 내놓은 ‘2023년 ESG 주요 현안과 정책과제’ 조사 결과(기업 300곳 대상)를 보면 공급망 실사를 가장 큰 ESG 현안으로 본 응답 비율이 40.3%로 가장 높았다. 하지만 대비 수준은 낮았다. 단기적 대응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해 원청기업의 48.2%, 협력업체의 47.0%가 별다른 조치가 없다고 답했다. 신경은 크게 쓰고 있지만 아직은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공급망에 대한 부담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은 자체적인 공급망 실사에 들어감은 물론 탄소 감축 등에 도움이 되지 않는 협력업체들에 대해 엄격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영국계 은행인 스탠다드차타드가 조사한 결과를 보면 다국적 대기업의 탄소 배출량 중 공급체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73%에 이르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 기업은 협력업체의 탄소 배출을 줄이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78%의 대기업은 2025년까지 탄소 감축에 진전이 없는 협력업체와의 거래를 끊겠다는 입장인데 35%의 기업이 공급망에서 배제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BMW가 3년 평균 150여 개사를, 그리고 GE가 2020년 기준으로 71개사를 공급망에서 빼낸 것도 같은 맥락에서 진행된 일이다. 공급망 관리를 강화하고 있는 것은 국내 대기업도 마찬가지다. 전경련이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펴낸 30대 그룹 소속 75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8.7%인 44개사가 ‘협력사 행동규범’을 만들어 협력회사가 이를 준수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규범에는 근로시간 준수, 강제근로 금지 등 인권과 온실가스 관리 등 환경, 안전보건, 기업윤리, 경영시스템 항목이 들어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은 글로벌 공급망이 환경과 인권 등 ESG의 가치를 내재화하는 쪽으로 탈바꿈될 것임을 예고해주고 있다. 관련 기준이 낮은 기업 또는 국가에서 높은 기업과 국가로 공급망이 이동하는 대수술 작업이 이뤄질 것이라는 얘기다. 정부와 기업이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감안했으면 하는 몇 가지 점을 지적해본다. 먼저 정부는 국제 통상협상 무대에서 공급망 규제의 복잡성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현재 공급망 실사 논의는 EU뿐만 아니라 개별 국가 차원에서도 이뤄지고 있어 기업 입장에서는 규제 적응을 위한 부담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다. 통상협상을 통해 불합리한 제도에 대해서는 문제 제기를 하고 더 나아가 기후공시나 지속가능공시처럼 국제 표준안을 만들어가는 방안도 검토됐으면 한다. 다음으로 공급망 실사에 대한 정부 관련 부처의 공동 대응이 이뤄져야 한다. EU 지침안을 보면 내용이 상당히 포괄적이다. 환경 부문에서는 국내 기업이 가장 취약한 영역인 생물다양성이 들어있고, 기후변화와 관련해서는 공급망에서의 탄소배출인 스코프3의 감축을 시사하는 항목이 포함돼있다. 또 공시와 관련해 EU가 마련한 지속가능보고지침(CSRD)과 연계하도록 하는 내용도 있다. 이렇듯 다양한 사안이 담겨 있고 기업에 주는 영향이 클 것으로 보이는 만큼 공급망 실사 대응은 이를 주관하는 산업통상자원부뿐만 아니라 기획재정부, 환경부, 중소벤처기업부 등이 한 몸을 이뤄서 해나가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아울러 대기업이 ESG 역량이 부족한 협력업체를 실효성 있게 지원할 수 있도록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안이 마련됐으면 한다. 현재 공급망 실사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걱정스러운 점이 나타나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최근 페널티를 주는 방식의 공급망 실사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중기중앙회는 “ESG 평가 결과가 나쁜 협력사를 공급망에서 탈락시키는 생존 게임 방식의 공급망 실사는 산업기반을 약화시킬 뿐”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물론 대기업 입장에서 ESG 경영이 지나치게 부진한 협력사를 안고 갈 수 없다는 판단을 불가피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ESG 경영의 초기 단계에 있는 국내 현실을 감안했을 때 협력사를 적극적으로 돕는 방식으로 ‘상생협력’이 진행되는 게 바람직하다. 정부도 정책적으로 이런 방향으로 유도를 하고 있지만, 현실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자금 지출이 수반되는 대기업의 협력사 지원에 대해서는 세제 혜택 부여 등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은 어떨까 싶다. 기업의 경우 모든 업종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접근보다는 업종별 대응이 더 적합해 보인다. 예컨대 의류 산업과 정유 산업은 실사 지침에서 주시하고 있는 ‘부정적 영향’이 나타나는 분야와 방식이 크게 다르다. 업종별 특이성을 고려해 동종 업종끼리 함께 대응하는 게 적합한 이유이다. 이미 산업별 이니셔티브가 존재하는 자동차와 전자 등 업종은 이를 중심으로, 그렇지 않은 산업은 산업별 협의체 등이 중심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비슷한 문제에 직면한 기업끼리 정보를 공유하고 함께 이를 해결해나갈 수 있도록 실시간 협의 및 대응을 위한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도 논의됐으면 한다. 그동안 ESG 논의가 진전되면서 ESG 경영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영역은 결국 공급망이라는 점에 공감이 형성되고 있다. 중요한 점은 공급망에 초점을 맞춘 ‘ESG 렌즈’가 1차 협력사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아직까지 공급망의 심도(深度)를 어디까지로 할지 논의는 활발하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2차, 3차 등으로 범위가 확장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외부에서 몰려오는 파고(波高)에 수동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이번 기회에 공급망 자체의 체질을 ESG를 중심으로 개선하기 위한 종합대책 수립 등 능동적인 자세가 긴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 경제는 수출 의존도가 높은 만큼 ‘풀뿌리 공급망’의 ESG 혁신은 이제 피해갈 수 없는 과제가 됐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2023-08-31 21:3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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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수의 열린경제] 국방 경제 산업 …'3각 방패' 갖춘 한국 “고객들이 대만에 전쟁이 날까 봐 우려하고 있는지요?” 2021년 7월 15일 마크 류 TSMC 회장은 한 금융분석가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류 회장은 주저하지 않고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답변을 했다. “전 세계가 대만의 반도체 공급망에 의존하고 있고 아무도 그걸 교란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는 부연 설명을 했다.(<칩워> 크리스 밀러 저) 이 같은 류 회장 발언 뒤에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의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 대만을 중국이 무력 침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이른바 실리콘 실드(Silicon Shield), 반도체 방패론이다. 실제로 대만 반도체 산업의 세계적 위상은 반도체 방패론의 근거가 되고 있다. 대만 섬 서쪽에 위치한 TSMC는 세계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이 2022년 4분기 기준으로 58.5%에 이르고 있다. TSMC는 물론 또 다른 파운드리 강자인 UMC를 보유하고 있는 대만은 세계 메모리 칩의 11%를 생산하고 있다. 특히 컴퓨터, 전화, 데이터센터, 전자 장비 대부분을 작동하게 하는 로직 칩의 37%를 대만 기업이 제조하고 있다. 산업의 ‘힘’에 바탕을 둔 반도체 방패론. 중요한 점은 이 말이 미디어나 학계가 만들어 낸 용어가 아니라 대만 정부가 대외적으로 전파하고 있는 ‘소신’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2021년 말 외교 전문지인 포린 어페어에 기고한 글에서 “대만의 반도체 산업은 권위주의적 정권의 공격적 행동에 대해 대만을 방어할 수 있게 하는 반도체 방패”라고 역설했다. 이 글에서 차이잉원 총통은 대만은 반도체뿐만 아니라 바이오 기술과 재생에너지 같은 분야에서 안정적인 글로벌 공급망을 창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며 첨단 제품의 생산 허브로서 자국(自國)의 역할을 강조했다. 대만 총통이 앞장서 얘기하고 있는 반도체 방패론은 따지고 보면 대만의 반도체 산업이 가지고 있는 전략적 중요성을 고려할 때 미국이 중국의 대만 침공을 방관하지 않고 적극적인 방어에 나설 것이라는 얘기나 다름없다. 미국은 이 문제에 관한 한 전략적 모호성의 태도를 취해왔다. 하지만 2022년 9월에 이례적인 일이 일어났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중국의 공격이 있을 경우 미군은 대만을 방어할 것이라며 이 원칙을 깨뜨리는 듯한 발언을 했다. 백악관 관리들이 즉시 미국의 대만 정책에는 변화가 없다며 무마에 나섰지만 미국 정부가 ‘치고 빠지기식’ 입장을 보인 것은 그만큼 깊은 고심의 흔적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반도체는 대만의 국가방위를 지키는 방패가 될 것인가?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크리스 밀러는 반도체 방패론에 대해 “현 상황을 대단히 낙관적으로 보는 견해”라고 단언한다. 중국이 전면적 침공 없이 부분적인 항공 및 해양 봉쇄 등 다양한 선택지를 가지고 있고 이게 대만의 항전 의지도 꺾고 미국의 개입도 어렵게 하는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물론 반대쪽 견해도 만만치 않게 존재한다. 유명 저자인 이안 부루마는 프로젝트 신디케이트에 실린 기고문에서 대만은 미국이 지킬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부루마는 두 가지 근거를 든다. 하나는 첨단 반도체의 90% 이상을 생산하는 대만이 중국의 수중에 들어가면 미·중 패권 경쟁이 중국에 유리하게 기울 것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중국이 대만을 점령하면 한국과 일본이 미국의 방위 약속에 대한 신뢰를 잃어 핵무장에 나서려고 할 것이라는 점이다. 반도체 전문가인 권석준 성균관대 교수도 ‘방패론자’다. 그는 저서 <반도체 삼국지>에서 “중국 정부가 만에 하나 미친 짓을 한다면 그것은 대만에 대한 강제 무력 합병과 이후 TSMC에 대한 국유기업화가 될 것”이라며 미국이 이를 좌시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이 중 어떤 주장이 맞을지는 지금으로선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만큼 사안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다만 반도체 방패론이 말해주는 중요한 가치는 한 산업이 국가안보의 핵심 변수로 부상했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논의의 무대를 한반도로 옮겨와 보자. 주지하다시피 북한은 핵 위협의 수위를 계속 높이고 있다. 미사일의 비행 거리를 늘려 미국 본토를 사정권에 넣으려 하고 있다. 미국에 샌프란시스코나 로스앤젤레스 같은 도시가 공격받을 수 있다는 압박을 가해 유사시 한국을 지원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분석된다. 안보 불안이 고조되자 미국 전술핵 재배치 주장이나 자체 핵무장론이 나올 정도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4월 말에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한·미 핵협의그룹(NCG) 창설을 통해 한국이 북한의 핵 공격에 대비한 전략 수립에 참여하는 것 등을 골자로 한 워싱턴 선언을 채택했다. 미국의 확장 억제 약속에 대한 신뢰를 제고하려는 조치였다. 북한의 핵 공세에 대해서는 ‘강대강’의 대응 조치가 필요하다. 하지만 여기에서 대만처럼 우리나라에서도 반도체 방패론이 유효할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미리 얘기하면 ‘그렇다’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합하면 메모리반도체 시장 점유율이 70%를 넘는 데다 전체 반도체 시장의 25%를 한국 기업들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선폭 7㎚ 이하 첨단공정의 양산이 가능한 두 개 기업 중 하나가 삼성전자(다른 하나는 TSMC)다. 메모리 제조의 글로벌 허브인 한국의 안보는 세계 경제의 안보와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임형규 전 삼성전자 사장은 저서 <히든 히어로스>에서 “한국의 지배력이 압도적인 메모리반도체 역시 먹거리 문제를 뛰어넘어 국가의 안보적 가치를 지닌 산업”이라며 “‘대체 불가능한 필수재’인 한국의 메모리반도체 없이는 전 세계 4차 산업혁명도 진전되기 힘들다”고 강조한다. 좀 더 직설적으로 얘기하면 최상위 반도체 기업 두 개를 보유한 한국은 미국의 세계 전략상 반드시 방어해야 하는 자유세계의 소중한 자산인 것이다. 중요한 점은 한국이 갖는 전략적 가치가 반도체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가치는 바로 세계 경제에서 갖는 한국의 중차대한 위상에 있다. 경제 규모(국내총생산 GDP) 면에서 우리나라는 세계 13위에 랭크돼 있다. 무역 규모는 세계 8위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내놓은 국제경쟁력 평가에서도 13위로 상위권에 올라 있다. 또 유에스 앤드 월드리포트가 올해 초에 발표한 ‘2022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에서 우리나라는 미국, 중국, 러시아, 독일, 영국에 이어 6위를 기록했다. 프랑스, 일본, 캐나다 등 다른 선진국보다도 높은 순위다. 이뿐만이 아니다. 첨단산업도 글로벌 주요 공급자 위치를 단단하게 확보해 놓은 상태다. 예컨대 세계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시장 점유율이 2022년을 기준으로 대형 97%, 중소형 71%로 부동의 1위다. 아직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지는 않았지만 수소차 시장에서도 1위를 달리고 있다. 이와 함께 전기차용 배터리(점유율 23.7%)와 이미지센서(29%)도 세계 2위를 유지하고 있다. ‘G8 가입론’의 근거가 되는 국력의 좌표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이 같은 사실은 북한의 핵위협으로 흔들릴 수 없는 자유 진영 내 한국의 강고한 위치를 말해주고 있다. 미국 백악관은 2022년 10월 발표한 ‘국가안보 전략’에서 향후 10년을 미국 리더십의 결정적 시기로 진단했다. 이 문건에서 미국은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대치 국면에서 동맹은 가장 중요한 전략 자산이라며 국익을 위해 군사력 사용을 주저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지정학적 위치뿐만 아니라 경제와 산업에서도 전략적 중요도가 큰 동맹국인 한국은 미국이 방어해야 할 대표적인 국가 중 하나임은 부인할 수 없다. 1950년 1월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딘 애치슨은 한국이 미국의 방어선 밖에 있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이로부터 다섯 달이 지난 6월 북한은 남침했고, 미국은 마침내 애치슨 라인 바깥의 국가를 방어하기 위해 전쟁에 개입했다. 공산주의 저지에 실패하면 다른 지역에서 미국이 쌓아온 신뢰가 무너져 내릴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훗날 애치슨은 “한국이 우리를 구했다”고 회고했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공산권에 대응해 선제적 군사 투자를 할 수 있었다. 이로부터 70여 년이 흐른 지금 한반도의 남쪽은 미국의 ‘신(新)애치슨 라인’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한국은 미국 입장에서 걸려 있는 포괄적 이해가 너무 큰 지역이다. 물론 북한의 위협에 대응해 미국의 핵 확장 억제를 확고하게 다지면서 자체 군사력을 키우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한국은 반도체는 물론 경제 자체가 방패인 나라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국방과 경제, 그리고 산업이 서로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함께 맞물려 있는 ‘3각 방패’를 우리는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풀어나가야 할 과제는 계속 경제도 잘하고 산업도 고도화해 한국의 전략적 이익, 즉 ‘몸값’을 키워나가는 일일 것이다. 이게 안보의 핵심적 ‘맥점’이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2023-07-04 08:5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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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수의 열린경제] 탄소배출 공시 시대 코앞 …'저탄소 코리아' 길찾자 정부는 지난 3월에 국가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는 2030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2018년 대비 40%)를 달성하기 위한 부문별 목표의 조정 내용이 포함됐다. 전환 부분의 감축 목표치를 종전의 44.4%에서 45.9%로 소폭 상향한 반면 산업은 14.5%에서 11.4%로 3.1%포인트 내린 게 특징이다. 정부는 “산업 부문은 원료 수급, 기술 전망 등 현실적인 국내 여건을 고려하여 감축목표를 완화했다”고 설명했다. 화석연료를 많이 사용하는 제조업의 비중이 높은 산업구조를 고려할 때 탄소를 획기적으로 줄이기 어려운 현실을 반영한 정책의 선회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국내외 여건이 이런 시나리오가 먹혀들 수 있는 쪽으로 움직인다면야 만사 ‘OK’다. 제조업은 상대적으로 천천히 탄소배출을 줄여나가도 돼 소프트랜딩의 길이 열리게 된다. 하지만 상황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 유럽연합(EU)이 탄소 배출을 많이 하는 외국 기업에 불이익을 주는 제도를 확정한데다 글로벌 차원에서 기업의 탄소 배출 공시를 의무화하는 제도가 본격적인 시동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EU로 가보자.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와 기후변화 대응을 선도하고 있는 EU는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1990년에 대비해 55% 줄이기로 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입법안 패키지 ‘핏포 55(Fit for 55)’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이다. 이 제도는 환경규제가 약한 외국에서 생산된 수입 제품에 대해 EU 제품보다 탄소배출 비용을 적게 지불한 만큼 관세 형태의 탄소 가격을 물리겠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 차이만큼 수입 제품에 대해 CBAM 인증서를 구매하도록 의무화해 금전적 부담을 지우겠다는 것이다. 이 제도는 EU 기업이 탄소 규제가 약한 다른 나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자신들은 저탄소 구조로 전환하느라 원가가 높아졌는데 다른 나라의 고탄소 제품이 아무런 규제도 받지 않고 수입되는 불공정 무역 문제를 해소하겠다는 의도도 담겨 있다. CBAM과 관련해 지난해 말부터 의미 있는 진전이 이뤄져 왔다. 그동안 EU 집행위원회와 이사회, 유럽의회는 각자의 안을 내놓았는데 지난해 말 최종 입법안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고 최근 유럽의회와 이사회가 이를 공식 승인했다. 핵심 내용을 보면, 올해 10월부터 2025년까지의 전환 기간을 거쳐 2026년 1월부터 탄소국경조정제도를 본격 시행하는 것으로 일정이 확정됐다. 전환 기간에 대상 업체들은 탄소 배출량을 보고하면 된다. CBAM 인증서 구매는 2026년부터 의무화된다. 대상 품목은 당초 집행위와 이사회는 5개, 유럽의회는 9개를 주장했으나 결국 철강·알루미늄·시멘트·비료·전력·수소 6개 제품으로 결정됐다. 다만, 과도 기간에 플라스틱과 유기화학품 등을 추가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이 제도가 적용되는 탄소 배출량에는 생산공정에서의 직접 배출량과 외부에서 사들인 열과 전기 사용으로 인한 간접 배출량이 포함됐다. CBAM은 국내 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비상이 걸린 곳은 철강업종이다. 우리나라는 대(對)EU 5위 철강 수출국으로 그 규모가 43억 달러(2021년)에 이르고 있다. 철강업은 탄소를 많이 내뿜는 업종인 만큼 CBAM 구매 부담이 생기면 수출 경쟁력이 약화될 것으로 우려된다. 전환 기간 중 수소환원제철과 CCUS(탄소포집·이용·저장) 기술 등을 활용해 탄소 배출을 크게 줄여야 하는 일이 발등의 불로 떨어졌다. 알루미늄의 경우 연간 수출량이 5억 달러로 철강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투입재인 잉곳의 생산공정이 탄소를 많이 배출해 부정적 영향이 예상된다. 나머지 비료, 시멘트, 전력, 수소 4개 품목은 수출이 적거나 없는 상태이다. 하지만 CBAM의 여파는 여기에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EU가 앞으로 플라스틱이나 유기화학품 등을 대상에 추가하면 부정적 영향이 우려된다. EU 수출물량이 플라스틱은 철강보다 많은 연간 50억 달러, 유기화학물은 18억 달러에 이르기 때문이다. CBAM은 탄소 배출이 무역장벽화하고 있는 사례이다. 탄소 배출 감축 부담을 가져오는 대내외 여건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기업들은 필요한 전력의 100%를 태양광이나 풍력 같은 재생에너지로 사용하겠다는 RE100에 가입하고 있다. 현재 157개 국내 기업이 참여를 선언한 상태다. 목표 시점은 2025년부터 2050년까지 다양하다. 기업은 자발적으로 RE100에 가입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글로벌 무대해서 사업을 하려면 ‘꼭 입어야 하는 드레스코드’ 같은 ‘사적 규제’가 작동하고 있는 탓이 크다. 앞으로 RE100에 대한 압박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는 기업들이 탄소를 배출하는 화석연료의 활용을 크게 줄여나가야 함을 시사한다. 여기에다 기업 공시의 큰 판을 바꾸는 제도적 변화가 임박한 상태다. 기후공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탄소배출 공시안이 이미 시행에 들어갔거나 확정을 눈앞에 두고 있다. 기업은 크게 스코프 1, 스코프 2, 스코프 3 등 세 가지 통로를 통해 탄소를 배출하고 있다. 스코프 1은 기업이 소유·통제하고 있는 공장 등 시설에서 발생하는 직접적 배출이다. 스코프 2는 기업이 구매하는 전기와 동력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탄소를 말한다. 스코프 3는 협력업체는 물론 물류, 제품의 사용과 폐기 등 기업 외부에서의 간접적 배출량이다. 스코프 3는 측정과 관리가 어려워 기업들이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전체 탄소배출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스코프 3를 빼고 기후공시를 하자는 것은 ‘알맹이’를 없애자는 얘기와 다름이 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현재 지속가능 및 기후공시 제도에서 가장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곳은 역시 EU다. EU는 지난 1월부터 이미 지속가능성공시지침(CSRD)을 시행하고 있다. 5000개 EU 역내외 기업에 적용되는 CSRD는 스코프 1, 2, 3 모두의 탄소 배출 공시를 의무화하고 있다. 특히 기후변화가 기업에 미치는 영향은 물론 기업이 기후에 주는 영향도 알리도록 하고 있다. 이른바 이중중대성 원칙이다. CSRD는 2024년부터 2029년 사이에 단계적으로 적용 대상이 확대된다. 글로벌 무대에서의 기후공시안도 확정을 앞두고 있다. 이 작업을 맡고 있는 기관은 ISSB(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인데 6월 말에 최종안을 공표한 다음 이를 내년 1월부터 발효하겠다는 일정을 잡아놓고 있다. ISSB안 또한 스코프 1, 2, 3 전체의 탄소 배출량을 공시하도록 하고 있다. 다만, 협력업체들의 자료를 수집하는 데 어려움이 적지 않은 점을 감안해 스코프 3는 시행 시기를 1년 늦추기로 했다. ISSB안은 최종안이 나오면 비교적 빠른 속도로 각국이 도입할 것으로 보인다. G7과 G20, 국제증권관리위원회와 40개국 이상의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이 이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미국 SEC(증권거래위원회). SEC는 지난해 3월 상장사의 기후공시를 의무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대상은 EU와 ISSB의 방안과 동일하게 스코프 1, 2, 3를 포괄하고 있다. 다만, 스코프 3는 상장사에 ‘중요한’ 경우, 그리고 상장사가 스코프 3를 포함한 탄소감축 목표를 설정한 경우로 제한하고 있다. 현재 이 안을 놓고 찬반 논란이 한창인데 공화당과 일부 기업이 반발하고 있어 스코프 3 공시안이 완화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SEC안도 올해 안에 확정되고 2024년부터 시행에 들어갈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기후공시는 이제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됐다. 오는 2025년에 자산규모 2조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부터 ESG 공시를 의무화하겠다는 계획인 정부도 글로벌 제도화의 흐름을 고려해 기후공시부터 관련 기준을 마련한다는 방침이다. 이에 앞서 내년부터 ISSB안이 시행되면 우리나라도 도입 압박을 받게 될 전망이다. EU의 CSRD와 미국 SEC안은 현지에 진출한 일정 규모 이상의 국내 기업은 적용 대상이 된다. 또 미국과 EU 기업의 공급망에 들어있는 기업도 이를 우회할 수 없다. 문제는 스코프 3 탄소 배출이다. 대다수 기업이 이를 공시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특히 중소기업의 준비가 부진한 상황이다. 하지만 지구온난화를 억제하기 위해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해야 하는 일이 글로벌 대명제가 된 상태에서 기업 전 영역에서의 탄소 배출을 공시하는 것은 세계적인 공감대가 모아진 실행 과제이다. 전면적 기후 공시가 기업 경영환경의 ‘뉴노멀’이 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특히 기후공시는 개별 기업의 탄소 배출 ‘성적표’가 드러나는 것과 함께 매년 탄소 배출을 얼마나 줄이고 있는지에 대해 시장의 감시체제가 가동될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결국 탄소 배출 감축은 향후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할 수 있는 요인이 될 전망이다. 기업들은 힘겨운 과제라고 하소연하고 있지만 저탄소 산업구조로의 전환은 되돌릴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됐다. 국가의 탄소감축 목표와 관련한 기업의 부담이 줄어들었다고 방심하면 수출시장에서 그리고 공시제도가 가동되는 금융 및 자본시장에서 국내 기업은 적지 않은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다. 다행히 탄소중립을 위기가 아닌 기회로 인식하는 기업이 많이 늘어나고 있어 기업가정신이 주도하는 ‘탄소 혁신’에 기대를 걸어본다. 아울러 정부가 화학, 철강, 시멘트,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등 4대 탄소 다배출 업종의 탄소중립 기술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만큼 민관의 공조가 ‘저탄소 코리아’로 가는 길을 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2023-05-23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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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수의 열린경제] 정부의 시장 개입을 보는 시선 이명박 정부 시절. 처음에 재계는 나름대로 큰 기대를 가졌다. 친기업 성향인 보수 정부인 데다 대통령이 기업을 잘 아는 CEO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가가 크게 오르면서 생활 밀접 52개 품목에 대한 이른바 ‘MB 물가’ 관리에 들어가자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더구나 당시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은 자신이 공인회계사임을 앞세우고 기름값 원가와 유통구조를 샅샅이 뜯어보겠다며 유가 인하를 압박하기도 했다. “아는 사람이 더한다”는 볼멘소리가 재계에서 터져나왔다. 늘 그렇듯 고개를 드는 물가는 ‘큰 정부’를 소환한다. 윤석열 정부도 마찬가지다. 자유와 규제 완화의 깃발을 들었지만 민생 전반을 옥죄는 물가 앞에선 국민의 ‘주머니 사정’을 배려하는 쪽으로 정책을 선회했다. 국민의 지갑은 얇아져 가는데 올라가는 금리에 무임 승차해 쉽게 이익을 늘린 은행의 ‘눈치 없는’ 성과급 잔치. 여기에 ‘은행은 공공재적 시스템!’이라며 경고 카드를 들고나온 정부의 공세. 이 상황은 사실 따지고 보면 은행이 자초한 일이며 정부로서도 팔짱 끼고 방치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물가의 고삐를 잡으려는 행정 조치의 과녁에는 통신사, 주류업체, 정유업계 등이 포함됐다. 시장경제에 대한 이 같은 정부의 개입을 어떻게 봐야 할까? 자유를 얘기해 놓고 정부가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 논리다. 시장은 불가침(?)의 성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한번 따져보자. ‘시장’ 하면 우리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떠올린다. 이 책을 읽어보지 않았어도 많이 알려진 상식. 모두가 이기적으로 행동해도 시장은 알아서 경제에 가장 바람직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마술 상자’ 같은 순기능을 한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시장에 정부가 끼어들 틈은 없다. 국부론에서 애덤 스미스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자신이 진실로 사회의 이익을 증진하려고 의도하는 것보다 효과적으로 이익을 증진한다”며 경제주체가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을 달성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의 역할을 강조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언급이 이 책에 단 한 번 나올 뿐인데 시장경제의 근간을 떠받드는 핵심적인 논리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역시 강력한 메시지는 길이와 무관하다. 어찌 됐건 국부론에만 머물면 ‘시장은 만능’이라는 생각에 갇히게 된다. 논의의 지평이 바뀌는 실마리는 스미스의 다른 저작에서 발견된다. 1776년에 나온 국부론보다 17년 전인 1759년에 쓰인 ‘도덕감정론’이 그 주인공이다. 이 책에서 스미스는 이기심보다는 연민, 자애, 동정심을 강조한다. “자기 자신을 위하는 사심을 억제하고 남을 위한 자애심은 방임(放任)하는 것이 인간의 천성을 완미(完美)하게 만드는 길이다.” 그러면서 그는 “미덕의 완미함은 우리 자신의 번영이 전체의 번영과 일치하거나 혹은 전체의 번영에 기여하는 범위 내에서만 우리 자신의 번영을 추구하는 것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개인보다 전체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이기심의 자제가 필요하며 이런 맥락에서 국가는 사회의 행복과 불행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사회단체라는 게 스미스의 또 다른 주장이다. 결국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의 긴장은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는 시선이 중요함을 말해준다. 시장이 절대적 명제는 아니며 사회의 행복을 증진하는 국가의 역할이 같이 가야 사회와 경제에 무게중심이 생긴다는 것이다. 문제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조의 편향성이 엎치락뒤치락하며 국가나 시장의 과잉이 가시화할 때가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대표적 인물은 시장주의의 본산인 시카고학파의 대부인 밀턴 프리드먼이다. 그의 논지는 그저 시장 절대주의와 기업 자유로의 직진이다. 한마디로 시장이 알아서 잘하니 정부는 최대한 뒤로 빠져 있으라는 얘기다. 그는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정부는 게임의 규칙을 정하고 이를 해석하는 심판으로 역할을 줄일 것을 요구한다. 정부 재정에 대해서는 “경기 변동을 일으키는 다른 힘들을 상쇄하는 균형 바퀴가 되기는커녕 그 자체로서 경기 교란과 불안정의 주된 원천이 되었다”고 비판한다. 이런 시각이다 보니 기업 경영에 대해서도 ‘자유’를 주장한다. 1970년에 나온 ‘프리드먼 독트린’에서 그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이익을 늘리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런 목적을 가진 기업에 고용 창출, 오염 방지 등 활동을 하라고 하는 것은 사회주의라며 ‘색깔론’을 덧입히기도 한다. 요즘 시선으로 보면 너무 나간 것이다. 프리드먼 독트린은 이후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에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를 거치면서 시장 절대우위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로 이어진다. 정부의 영역은 크게 좁혀지고 규제 완화, 민영화, 무역 개방 등이 확산된다. 신자유주의는 국제 무역의 확대와 개도국의 경제 개발 등 적지 않은 열매를 맺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양극화 심화와 환경 훼손 등 큰 부작용을 초래했고, 2008년 금융위기 와중에 이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지면서 사실상 좌초했다. 신자유주의의 퇴조는 동전의 양면이었던 프리드먼 독트린의 쇠락을 뜻한다. 실제로 이를 반영해 프리드먼 후예들은 노선을 일부 수정했다. 시카고대학의 스티글러 센터는 2020년 프리드먼 독트린이 나온 지 50주년을 기념하는 취지로 발간한 논문집에서 프리드먼이 부정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인정했다. 이 논문집에서 루이스 진갈레스 교수는 프리드먼의 견해는 완전경쟁시장에서만 유효하다며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독과점 기업이 존재하는 시장에서는 이 독트린이 적용되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그는 거대 기업들은 이익이 아니라 사회 후생(厚生)을 극대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기업의 자유를 제한하는 외적 요구를 인정한 셈이다. 발상의 커다란 전환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역사의 종말’에서 자유주의의 승리를 선언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학교 교수는 최근 저서 ‘자유주의와 그 불만’에서 경제적 자유주의가 신자유주의로 변질해 기괴한 불평등의 모습을 낳았다고 비판한다. 특히 “정부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과도한 적대감은 명백히 비합리적”이라며 “국가는 공공재를 공급하는 데 필요하다”고 말한다. 국가를 경제성장과 개인적 자유의 ‘적’으로 악마화했던 시대와 결별해야 한다는 것이 후쿠야마의 제언이다. 정부는 특히 경제에 걸림돌이 아니라 촉매제 역할도 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리스크가 너무 커 민간기업이 뛰어들지 못하는 초기 기술 투자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해 이를 성공시킨 다음 이 기술을 민간으로 넘겨주는 ‘기업가형 정부’의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아이폰의 탄생을 가져온 인터넷, GPS, 터치스크린 디스플레이 등 핵심 기술이 미국 정부의 지원으로 개발된 게 대표적 사례다. 마리아나 마추카토는 “정부는 흔히 여겨지는 것보다 가치 창조에 훨씬 더 많은 기여를 하고 있지만 정부의 가치 창조 역량은 매우 심하게 저평가받고 있다”고 지적한다.(‘가치의 모든 것’) 지금까지의 논의는 최근 이뤄진 정부의 시장 개입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 중요한 사실은 과잉 개입도 문제지만 시장을 교정하는 정책 자체를 시장의 자유를 훼손하는 ‘악’으로 보는 사고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어른거리는 사고 구조이다. 정책이 국민 다수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공동선(善)을 지향하거나 경제에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면 합목적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경제위기 국면에서 서민 가계의 안정을 위해 물가를 억제하고 시장의 도덕적 해이를 견제하고 나선 정책은 적절성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다만 개입이 과도한지를 살피는 사회적 감시는 물론 정부의 절제와 지혜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정부의 역할에 대해 곱씹어볼 만한 의견을 들려준다. 밀은 먼저 정부가 개입해서 안 되는 두 가지 경우를 언급한다. 정부보다 개인이 그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때와 이미 비대해진 정부 권력을 더 강화하려고 할 때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행위에 대해서는 사회가 간섭할 수 있다고 말한다. 목적이 정부의 권력 확대인지, 부정적 영향의 차단인지에 따라 시장 개입이 정당한지가 판가름 난다는 것이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2023-04-20 23:4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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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수의 열린경제] 기후변화에 흔들리는 생물다양성 …방치하면 매년 2.7조 달러 경제적 손실 자연 하면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시선을 더 크게 넓혀보면 자연의 역할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기온 상승을 억제하는가 하면, 수질을 조절하고 물이 잘 순환하게 한다. 또 식량을 공급하고 건축자재, 의약 재료 등 다양한 산업 원료를 제공하고 있다. 자연이 주는 ‘생태적 서비스’의 대표적 사례들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생물다양성(biodiversity)이란 용어가 자주 언급되고 있다. 생물다양성은 미생물을 포함한 동물과 식물 등 생명체와 생명체가 존재하는 환경, 즉 생태계의 다양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 말이 중요해진 이유는 생물다양성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 인류의 삶과 경제에 위기 신호가 깜빡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생물다양성 손실 이슈다. 세계경제포럼(WEF)에 따르면 그동안 인류의 활동은 토지의 75%와 해양 환경의 66%를 심각하게 변화시켰다. 수백만 종이 멸종 위기에 직면하는 등 식물과 동물 종 25%가량이 생존에 위협을 받고 있다. 특히 1970년 이래 포유류, 조류, 파충류, 양서류 그리고 어류가 평균 68%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인류가 환경에 압박을 가함으로써 생물다양성이 상실되는 속도가 자연적인 소멸 속도보다 100배나 빠른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기후변화가 이를 가속화하고 있다. 동물 20종 중 한 종은 지구온난화, 이 한 가지 요인 때문에 멸종될 상황에 놓여 있으며, 해상 어류 가운데 4분의 1이 머무는 터인 산호초의 99% 이상이 훼손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그 결과 생물다양성 손실은 향후 10년간 인류에게 가장 큰 리스크 중 하나가 될 것으로 꼽히고 있다. 생물다양성 손실은 그 자체로도 심각한 문제다.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사회와 경제활동이 본질적으로 여기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WEF의 연구 결과를 보면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 중 절반이 넘는 44조 달러의 경제적 가치 창출이 자연과 생태적 서비스에 크게 기대고 있다. 의존도가 높은 3대 산업은 건설(4조 달러), 농업(2조5000억 달러), 식음료(1.4조 달러)다. 이들 3개 산업의 규모는 독일 경제의 2배 가까운 수준이다. 게다가 화학, 항공, 여행, 부동산 등 6개 산업의 공급체인이 창출하는 총부가가치의 절반 이상이 자연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창출되고 있다. 이렇듯 자연의 기여도가 큰 만큼 생물다양성이 흔들리고 있는 현상은 그대로 경제 및 경영 리스크로 이어지고 있다. 자연 파괴가 가져오는 기업 리스크는 크게 3가지로 구분되고 있다. 먼저, 기업이 자연에 의존하는 데서 오는 리스크다. 커피가 좋은 예다. 기후변화와 병충해, 삼림파괴 때문에 커피 품종의 60%가 사라질 위험에 놓여 있다. 이런 우려가 현실화하면 글로벌 커피 시장은 심각한 불안정 상태에 빠질 것으로 보인다. 또 기후변화로 인해 대규모의 산호초 손실이 일어나면 관광산업에 대한 부정적 여파가 클 것으로 예상된다. 두 번째 리스크는 기업이 자연에 주는 부정적 영향과 관련이 깊다. 현재 각국 정부는 이를 억제하기 위해 다양한 규제를 도입하고 있다. 프랑스는 기업이 공급체인에 대한 환경 평가를 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을 제정했으며, 인도네시아는 새로운 농업 허가를 제한함으로써 습지 개발 모라토리움(중단)을 선언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투자자와 신용평가사도 기업을 평가할 때 환경에 대한 영향을 들여다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리스크는 자연 손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서 생기고 있다. 보건이 적절한 예다. 실제로 우리는 글로벌 경제의 발목을 잡아 온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을 통해 자연 훼손이 가져오는 파괴적 결과를 지난 3년여 동안 목도해 왔다. 에볼라나 지카바이러스도 삼림 파괴가 발생시킨 감염병이다. 결국 생물다양성 손실은 이를 방치하면 경제에 큰 충격을 줄 것으로 우려된다. 세계은행은 자연이 제공하는 생태적 서비스가 붕괴하면 2030년까지 매년 글로벌 GDP가 2.7조 달러씩 줄어들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충격적인 연구 결과도 있다. 매사추세츠 등 대학 연구진의 분석 결과를 보면 꽃가루받이를 하는 곤충이 크게 줄면서 과일, 채소, 그리고 견과류 생산이 3~5% 감소하고 이로 인한 식량 부족과 질병 발생으로 세계적으로 사망자가 42만7000명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생물다양성 손실에 빨간불이 켜지면서 경제에 악영향이 우려됨에 따라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국제적 논의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먼저 국가 간 협의 테이블. 이와 관련해 중요한 분기점은 지난해 12월 20일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제15차 생물다양성협약 당사국총회(COP15)다. 196개국이 참가한 이 회의에서는 전 지구적 생물다양성 전략 계획인 쿤밍-몬트리올 글로벌 생물다양성 프레임워크(GBF)가 채택됐다. GBF의 핵심은 2050년까지 ‘자연과 조화로운 삶’이라는 비전을 달성하고, 이에 앞서 2030년까지 ‘30×30’ 목표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30×30’은 육상과 해상의 각각 30%를 보전·관리한다는 내용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2030년까지 생물다양성 손실을 중단시키고 회복시켜 ‘네이처 포지티브(nature-positive)’를 이루겠다는 로드맵이다. 이와 별도로 생물다양성에 미치는 기업의 부정적 영향을 줄여나가기 위한 민간의 보폭도 커지고 있다. 이 대열에는 기후변화와 ESG(환경·사회·지배구조)처럼 투자자들이 선제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투자자들은 생물다양성을 기후변화와 같은 기업의 리스크로 보고 있다. 상황이 나빠지면 피투자 기업의 재무 상태가 악화해 자산 가치가 급락할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12월 기관투자자들이 연합체인 ʻ네이처 액션 100ʼ을 출범시킨 이유다. 이들은 앞으로 100개 핵심 기업을 선정한 다음 해당 기업이 자연을 보호하고 회복시킬 방안을 내놓도록 압박해간다는 계획이다. 투자자들의 움직임과 관련해 눈여겨볼 것은 ʻ자연자본ʼ이라는 개념이다. 자연도 공장이나 기계같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만큼 자본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숲, 해양, 물 등 자연 자원뿐만 아니라 생태계를 지탱하는 생물다양성도 자연자본에 포함돼 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은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이 자연자본에 중대하게 의존하고 있는 만큼 이를 기업이 지속 가능한 중장기 재무 이익을 창출하는 요소로 보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투자자들이 특히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은 자연과 관련된 공시제도의 도입으로 현재 TNFD(자연 관련 재무 공시 태스크포스)가 운영되고 있다. TNFD는 블랙록,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금융기관과 기업 등이 참여하고 있는데 기후 관련 공시 프레임워크인 TCFD와 유사한 틀로 만들어지고 있다. 큰 틀에서 보면 자연 관련 지배구조, 전략, 위험관리, 측정 지표와 목표치를 공시하도록 하는 게 핵심 내용이다. 현재 일정대로라면 올 상반기 중에는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가 탄소 배출 등 지속 가능 공시 표준 확정안을 공표하고 오는 9월에는 TNFD도 최종안을 발표한다는 계획이다. 특히 ISSB는 TNFD와 협의해 기후 공시와 자연 생태계, 생물다양성 등 이슈를 연계하는 안에 대해서도 검토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생물다양성과 자연자본 얘기는 더 이상 기업 경영과 멀리 떨어져 있는 ʻ한가한 이슈ʼ가 아니다. 지구온난화를 억제하기 위해 각국이 파리기후협약에 서명했던 것처럼 생물다양성의 ʻ파리기후협약 버전ʼ을 만들려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돈 냄새에 민감한 투자자들이 생물다양성을 기업 가치에 리스크를 가져올 요인으로 보고 공시제도 도입과 함께 경영 관여 등을 통해 기업이 이를 관리해나가도록 제도화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ESG, 기후변화, 그리고 생물다양성에 대해 별도 또는 통합의 공시 표준안이 올해 안에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기업 ESG 경영에 있어 ʻ기후변화 다음은 생물다양성ʼ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 이유다. 생물다양성은 기업에 부담을 주는 것만은 아니다. 자연 친화적인 경영이 이뤄지면 2030년까지 매년 10조 달러의 새로운 기업 가치가 만들어질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젠 ʻ네이처 포지티브ʼ라는 새 물결에 탑승하지 않으면 기업이 생존하고 성장하기 어려운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전향적으로 움직여 새 길을 개척할지 아니면 기존 비즈니스 모델에 집착하다가 위기에 직면할지, 선택은 기업 몫이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2023-03-27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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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수의 열린경제] 사회적 책임 넘어 신냉전 시대 기업의 새로운 도전 .. 정치적 책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주목을 받아온 미국 대학원이 있다. 주인공은 예일대 경영대학원. 이 대학원의 제프리 소넨펠드 교수는 러시아에 진출해있는 기업들이 전쟁 개시 후 보인 행태에 따라 A~F의 평가 등급을 매기고 이를 공개하고 있다. A등급은 러시아 내 사업을 총체적으로 중단했거나 철수한 기업으로 1월 28일 현재 347개에 이르고 있다. 스타벅스, 블랙록, 포드, IBM, 넷플릭스, 나이키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B등급은 일시적으로 일부 또는 전체 영업을 멈춘 상태에서 나중에 러시아로 복귀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488개 기업이다. 아마존, 애플, 아우디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어 C등급은 일부 중요한 사업은 축소했지만 다른 사업은 여전히 지속하고 있는 167개 기업이다. 신규 투자 등만 중단하고 실질적으로 사업을 계속하고 있는 162개 기업은 D등급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가장 낮은 F등급은 전쟁에 아랑곳하지 않고 러시아에서 영업을 계속하고 있는 알리바바와 텐센트 등 225개 기업에 주어졌다. 예일대 경영대학원이 이 등급 명단을 수시로 업데이트해 공표하는 것은 기업들이 러시아 사업을 그만두거나 줄이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에서 비즈니스를 해온 1389개 기업 가운데 1000개가 넘는 기업이 사업을 축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버드 로스쿨도 예일대와 비슷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 학교의 연구진은 러시아에서 자회사를 운영해온 75개 비금융 유럽기업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다. 눈길을 끄는 점은 이들 75개 기업의 평균 ESG 점수가 100점 만점에 78점으로 다른 기업의 평균치 64점보다 크게 높다는 것이다. 특히 S(사회)와 인권 점수는 각각 81점과 84점으로 다른 기업의 64점과 67점을 많이 웃돌았다. 문제는 이렇게 ESG와 인권 평가가 좋은 기업들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무력 침공한 지 일정 시점이 지난 후에도 러시아를 비판하는 발표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또 조사 당시(2022년 3월 15일) 기준으로 영업을 중단하겠다고 밝힌 기업도 53%에 불과했다. 하버드 로스쿨은 이들 기업의 이런 행태 탓에 ESG에 대한 회의론이 나오고 있다고 비판했다. 어찌 됐건 러시아 내 사업 영위에 대한 비판 여론이 고조되면서 많은 기업이 러시아에서 아예 몸을 빼거나 일시적으로 영업을 중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일본 의류기업인 유니클로의 경우 처음에는 러시아인들도 옷이 필요하다며 러시아 내 49개 점포의 문을 계속 열었지만 여론이 심각하게 돌아가자 마침내 가게 문을 닫았다. 네슬레도 상황은 마찬가지. 영업을 계속하다가 소비자들이 분노를 표시하고 해킹 사건까지 발생하자 핵심 품목을 제외한 다른 제품의 판매를 접었다. 이처럼 러시아 내 사업에 쏠리는 곱지 않은 시선은 무엇보다 기업들에 ESG 경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ESG는 윤리적인 경영을 포함하고 있는데 불법무도한 침략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에서 돈벌이를 하는 것은 이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 사업을 그만두라는 요구가 무리한 주장이라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오랜 기간 러시아에서 일궈놓은 사업 기반을 정치·외교적인 이유로 하루아침에 포기하라고 하는 것은 경제에 대한 정치의 지나친 개입이라는 지적이다. 특히 현실적으로 기업이 부담해야 하는 손실 규모가 만만치 않다. 예컨대 러시아 정부가 철수 기업의 자산을 압류하는 방안을 추진함에 따라 메르세데스 벤츠는 22억 달러의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형평성 문제도 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있고 인권운동가들을 처형하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서구의 기업들이 수십 년 동안 영업을 해온 것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소비자와 직원들이 기업이 더욱 윤리적 행동을 해줄 것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은 이제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이슈에 대해 명확한 견해를 밝혀야 한다는 요청에 빈번하게 직면하고 있다. 퍼블릭 어페어스 카운슬의 조사 결과를 보면 이해관계자로부터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입장 표명을 요구받는 미국 기업의 비율은 2016년에만 해도 60% 정도였으나 2021년에는 90%로 크게 상승했다. 특히 직원들의 주문이 강한 상태이다. 지난 2018년 미 국방부가 인공지능을 이용해 드론 타격률을 높이는 방안을 추진하고 여기에 구글이 참여할 수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구글 직원들이 강하게 반발한 게 대표적 사례이다. 당시 구글은 직원들의 희망을 수용해 인공지능을 무기나 부당한 감시활동에 사용하지 않겠다는 지침을 마련했다. 이런 움직임들은 기업이 사회적 책임활동을 넘어서 이제는 ’정치적 책임 활동(CPR:Corporate Political Responsibility)’도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해석되고 있다. CPR는 이제 기업들이 새롭게 적응해야 하는 현실이 되고 있다. 정치나 외교 등 경제외적인 영역에서 비윤리적인 일이 일어나면 이에 분명하게 반대하고 행동을 취하는 게 ESG의 가치에 부합한다는 시각이다. 기업으로서는 쏟아지는 요구를 어떻게 모두 만족시킬 수 있겠냐며 불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과거에 흑인차별을 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사업을 하는 기업을 비판하는 여론이 세계적으로 확산됐던 적이 있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때보다 더욱 자주 그리고 강력하게 기업이 사회의 다양한 이슈에 대해 태도를 밝히라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한국 기업에는 ‘남의 나라’ 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서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국내 기업이 영업을 중단한 것은 한국 기업도 이미 CPR의 영향권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두 기업에 대해 예일대가 매긴 등급은 B이다. 한발 더 나아가 미국 정부는 우리 정부와의 고위급 회담 등을 통해 일부 한국 기업의 러시아 잔류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는 의사를 전해온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더구나 지금은 미국과 중국 간의 신냉전 시대가 본격화되고 있는 시점이다. 첨단기술 ‘전선’에서 미국이 중국을 봉쇄하려는 전략을 추진함에 따라 한국 기업도 점점 여기에 발을 맞추는 게 불가피해지고 있다. 경제와 무역의 정치화 추세 속에서 정치·외교적인 성격의 선택을 요구받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인권 등과 관련해 특정 국가의 비도덕적, 비윤리적 행태가 문제시되는 상황은 더욱 그렇다. IBM은 이런 이슈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를 결정할 때 다섯 가지의 ‘이정표 질문’을 던져본다고 한다. 이 이슈가 비즈니스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가? 그동안 이런 이슈에 개입한 적이 있는가? 이해관계자들이 무엇이라고 얘기하는가? 경쟁사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개입함으로써 의미 있는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어찌 보면 좀 나이브하고 원론적인 접근법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 이슈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만을 근거로 해서 대응 방법을 찾기엔 복잡다단한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PR컨설팅 회사인 에델만이 지난해 11월 28개국에서 3만20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3 신뢰 지표’ 조사는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와 미국, 일본 등 19개국의 응답자 절반 이상이 기업이 기후변화, 경제적 불평등, 건강 등 논쟁적인 사회적 이슈에 대응할 때 정치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고 대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와 정치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면서 기업이 어려움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기업으로선 곤혹스런 상황이다. 환경과 사람을 돌보는 투명한 ESG경영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신냉전 등 지정학적 긴장으로 인해 정치적 책임에 대한 압박도 강화되고 있어서다. 기업으로선 뾰족한 대응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지만, 크게 보아 두 가지로 대응하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 먼저 인권 침해 등 ESG에 어긋나는 사안에 대해서는 ESG 가치를 지키는 방향을 선택하는 게 맞을 것이다. 다음으로 중국과의 패권 경쟁 구도 속에서 미국 편에 서야 하는 것 같은 이슈에 대해서는 ‘정경분리’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전략을 쓰는 게 좋을 듯싶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기업을 측면지원해 곤경을 헤쳐나갈 수 있는 외교적 해법 마련에 나서는 게 중요하다. CPR가 새로운 비즈니스 환경으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는 만큼 종전과는 차원이 다른 민관(民官)의 새로운 시선과 지혜, 그리고 긴밀한 공조가 필요한 때이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2023-02-08 17:4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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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수의 열린경제] 계묘년 '상저하고' 한국경제 … 지속 가능한 성장 날개를 펴라 2019년 11월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이 시작된 이래 보건과 경제 두 측면에서 ‘쌍둥이 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보건 위기는 백신 접종 확대 등으로 어느 정도 진정 국면으로 들어섰다. 경제 위기는 그 양상이 바뀌면서 아직 끝이 보이지 않고 있다. 그동안 각국이 겪어온 경제난은 코로나 확산에 따른 봉쇄 조치로 수요과 공급이 동시에 얼어붙은 탓이다. 이게 1차 위기의 원인이었고, 대책은 중앙은행과 정부의 곳간에서 대규모 자금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팬데믹으로 치러야 할 막대한 비용을 시기적으로 분산시키는 방법이기도 했다. 문제는 경제에는 공짜가 없다는 데 있다. 풀린 뭉칫돈이 지금에 와서는 2차 위기의 불씨가 되고 있다. 많이 풀린 돈이 물가를 자극하고 있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공급망 충격 등이 가세하면서 물가의 고삐가 풀려버렸다. 결국 미국 FRB 등 각국 중앙은행이 금리 인상 강행군에 나서면서 통화환수발(發) 2차 위기가 본격화하고 있다. 그래도 1차 위기에 비해서는 관리 가능한 수준이라고 본다. 정책으로 시작된 2차 위기의 매듭은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정책이 풀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같은 궤적에 있다. 정부가 최근에 내놓은 ‘2023년 경제정책 방향’을 보면 그 고민의 흔적이 뚜렷하다. 정부는 올 상반기를 고비로 보고 있다. 물가가 올 초까지는 높은 수준을 이어갈 것이지만 원자재 가격 하락과 수요 둔화 등에 따라 상승 압력이 점차 둔화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2023년 소비자물가 상승률 예상치는 지난해(5.1%)보다 낮아진 3.5%다. 성장률은 하반기로 갈수록 세계 경제 개선 등에 힘입어 점차 나아질 것이라는 게 정부 전망이다. 그래도 연간 성장률은 올해 2.5%에서 1.6%로 낮아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상저하고(上低下高)가 될 것이란 얘기다. 2023년 경제정책 방향은 이런 경제기상도에 대한 처방을 담고 있다. 한마디로 물가 안정화 노력을 계속하면서 성장을 부추기기 위한 노력을 가속화하겠다는 것이다. 역대 최대 수준인 총 50조원 규모의 시설 투자 자금을 지원하는 것을 비롯해 중소기업과 수출 지원 등을 위해 정책금융을 45조원 확대하고 반도체, 해외 건설, 디지털 등 5대 분야를 중심으로 수출 경쟁력 제고 방안을 추진하겠다는 게 경기 부양 대책의 골격이다. 여기에 모빌리티, 에너지, 금융 등 7개 테마별로 핵심 규제를 혁신해 나가겠다는 게 경제의 활력을 키울 방안으로 자리 잡고 있다. 2023년 경제 운용 청사진에서 눈에 띄는 점은 별도의 ‘정책 바구니’로 ‘신성장 4.0 전략’이 추가됐다는 점이다. 성장 잠재력이 취약해지는 시점에서 한국 경제의 재도약을 위한 ‘총론의 방향타’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신성장 4.0 전략은 크게 세 가지 틀을 갖추고 있다. 첫째는 에너지와 의료 등 미래 기술을 선제적으로 확보해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충하고, 둘째는 디지털 기술혁신을 일상의 변화로 연결하며, 셋째는 반도체와 배터리 등 신산업 전략을 통해 초격차를 창출하겠다는 것이다. 신성장 4.0 전략이 궁극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국민소득 5만 달러 달성과 초일류 국가로의 도약이다. 국가의 미래 비전으로 적절하다는 판단이다. 하지만 일부 아쉬운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중요한 점은 한국 경제가 이미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올라섰는데도 여전히 양(量) 위주의 사고가 지배적이고 이를 뒷받침할 질(質)적 고려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속 가능한 발전에 대한 체계적인 추진 전략이 보이지를 않는다. 현행 지속가능발전법은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미래 세대가 사용할 경제·사회·환경 등의 자원을 낭비하거나 여건을 저하시키지 않고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을 지속 가능성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에 기초해 ‘경제의 성장, 사회의 안정과 통합 및 환경의 보전이 균형을 이루는 발전’이 바로 지속 가능 발전이다. 이와 관련해 각국이 주력하고 있는 영역은 바로 녹색성장이다. 같은 성장을 하더라도 이제는 환경을 훼손하지 않고 회복시키는 그린 성장을 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럽연합(EU)은 ‘호라이즌(Horizon) 유럽’이라는 성장전략에서 5개 과제를 선정했는데 이 중 4개(기후 회복력, 바다와 담수 복원, 기후 중립 도시 100개, 토양과 생명 관리)가 그린 성장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독일도 ‘하이테크 전략 2025’의 3대 영역에 지속 가능성을 포함시켰고 부속 과제로 산업의 탄소중립화, 플라스틱 저감, 지속 가능 순환경제, 생물다양성 확보 등을 선정해 놓고 있다. 전기차 보조금 문제로 논란을 빚고 있는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도 내용을 들여다보면 에너지 안보 및 기후변화 대응 지출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물론 2023년 경제정책 방향과 신성장 전략에도 산업, 수송 등 부문별 탄소 감축 목표 설정, 탄소 포집 같은 핵심 기술 개발, 에너지 절약, 탄소중립 도시 10개 조성 등 각론이 들어 있긴 하다. 하지만 탄소중립 산업을 만드는 데 전력투구하면서 이를 새로운 지속 가능 성장의 동력으로 삼고 이를 통해 양질의 일자리도 창출하겠다는 총론적 의지가 잘 읽히지를 않는다. 특히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40%(2018년 대비) 감축해야 하는 목표를 어떻게 달성하고 그 과정에서 한국 경제의 녹색 도약을 어떻게 실현할지에 대한 구체적 로드맵이 빠져 있다. 이 대목에서 컨설팅 기업인 딜로이트의 진단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금세기 중반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해 세계 경제를 전환하는 것은 경제적 가치를 창출할 전례 없는 기회다. 탈탄소 사회에서 새로운 기회를 파악하고 경제구조 전환이 모두에게 긍정적 영향을 발휘하게 하면 2050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일자리가 3억개 이상 추가로 만들어질 수 있다.” 지속 가능한 성장과 그린 성장이 산발적인 각론에서 성장전략의 중심축으로 격상돼야 하는 이유다. 같은 관점에서 환경과 사람을 돌보는 투명하고 윤리적인 기업 경영을 강조하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정책의 비중도 지금보다 확대될 필요가 있다. 성장 전략과 관련해 또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점은 하향 추세를 지속하고 있는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가시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에 발표된 정책에서도 이를 의식한 대책이 포함돼 있긴 하다. 투자 활성화 방안, 생산성 향상 노력, 여성과 고령층의 경제활동 참여율 제고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각론으로는 부족하다. 이대로라면 0% 또는 마이너스로 떨어질지 모를 잠재성장률을 적정 수준으로 상향 조정하는 일은 국가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위한 중차대한 과제다. 그런 만큼 잠재성장률 2%대를 마지노선으로 지키겠다는 목표를 공론화하고 이를 위한 종합 대책을 세워 일관성 있게 추진해야 한다. 성장 전략의 ‘상단 메뉴’에 항상 들어가야 하는 숙제다. 이 밖에 정부는 ‘신성장 4.0’을 간판으로 내세운 만큼 낙수효과를 통해 성장의 과실이 경제 전반에 퍼져나갈 수 있도록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 성장을 유도해야 하며, 경제의 덩치가 커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낮은 수준인 국민의 행복도를 올리는 실효성 있는 대책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2023년은 위기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성장의 물꼬를 열어가야 하는 해다. 이 때문에 당장은 눈앞의 단기 대책에 더 많은 무게중심이 쏠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정부는 긴 호흡으로 국가의 중장기 가치를 제고하고 한국 경제의 질적 기반을 다지는 일에도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게 명실상부하게 초일류 국가로 가는 길이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2023-01-03 18: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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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수의 열린경제] 탈(脫)중국 아닌 감(減)중국 전략 짜자 애플 최고경영자 팀 쿡. 그는 2019년 이래 중국에 잘 가지 않는다고 한다. 팀 쿡은 지난 5월 미국 실리콘밸리에 있는 쿠퍼티노 애플 본사에서 팜민찐 베트남 총리와 만났다. 애플은 곧 베트남에서 맥북 노트북을 생산할 예정이다. 더 이코노미스트 보도에 따르면 내년에는 애플의 첫 인도 매장이 문을 열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앞서 지난 9월에는 인도에서 신형 모델인 아이폰14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중국 일변도로 공급망을 관리해온 애플이 미국과 중국의 긴장이 고조되는 국면에서 전략적으로 베트남과 인도를 중시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하지만 애플의 고민은 깊다. 일부 제품의 조립기지를 중국 밖으로 옮기고 있지만 중국이 다른 나라가 대체할 수 없는 강점을 가지고 있어서다. 팀 쿡은 “중국에는 숙련된 근로자와 정교한 수준의 로봇, 그리고 컴퓨터 과학 등이 있는데 이를 다른 곳에서 찾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실토하고 있다. 최근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놓고 가장 자주 언급되는 어휘 중 하나는 디커플링이나 탈중국이다. 과거 냉전 국면 때 미국과 옛 소련이 그랬던 것처럼 미·중 양국이 각자 진영으로 ‘헤쳐 모여’ 하면서 서로 등을 돌릴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실제는 어떨까? 두 나라 간 무역 동향을 보면 수출입이 축소되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먼저 전체 교역. 2017년에만 해도 중국은 미국의 1위 통상국가로 교역 비중이 16.4%에 달했다. 올 들어 9월까지 이 수치는 13.2%로 낮아졌고 중국의 위상도 3위로 떨어졌다. 이를 수출입으로 나눠서 보자. 같은 기간 동안 미국의 대중 수입 비중은 21.6%에서 17.0%로 하락했다. 대중 수출도 8.4%에서 7.0%로 줄어들었다. 문제는 이를 미국과 중국의 디커플링 움직임으로 볼 수 있는냐다. 답은 그리 선명하지 않다. 미국의 대중 수입 추이를 들여다보자. 사상 최대치였던 때는 2018년으로 5385억 달러 규모였다. 이게 지난해에는 5049억 달러로 감소했다. 대중 수입이 하락세로 돌아선 것은 트럼프 행정부 당시부터 상당수 중국 제품에 고율의 보복관세가 부과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중국 수입의존도는 여전히 만만치 않은 수준이다. 관세 부과 대상이 아닌 중국 제품들이 물밀 듯이 미국으로 들어가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이들 품목의 수입은 무역 전쟁 이전보다 50% 이상 늘어나 전체 대중 수입품 중 47%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대표적인 제품은 노트북, 컴퓨터 모니터, 전화기, 비디오게임 콘솔, 장난감이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재택근무 증가로 이들 상품에 대한 수요가 많이 늘어난 것이 수입 급증의 주요인이다. 노트북과 컴퓨터 모니터 같은 제품은 전체 수입품 중 중국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92%에 이른다. 이렇게 보면 디커플링 논의에 대한 진단이 어느 정도 가능해진다. 목소리는 크지만 경제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이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해 국제무역체제에 편입된 게 벌써 20여 년이다. 긴 세월 동안 미·중 양국 경제는 서로 긴밀하게 얽혀왔다. 상호 교역이 거의 없었던 미·소 냉전과 유사한 신냉전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시나리오다. 자신은 멀쩡한 채 상대에게만 상처를 입히는 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치러야 할 비용이 크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세계경제가 미·중 상호 대립 체제로 재편되면 전 세계 국가들의 국내총생산(GDP)이 매년 1.5% 감소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 외교 전문 매체인 포린폴리시는 “경제적 디커플링은 무리한 주문”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미국 상공회의소를 비롯한 재계도 디커플링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 미국 기업인은 “중국에 들어가서 13년을 보냈는데 지금에 와서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디커플링은 허장성세(虛張聲勢)인가? 실제보다 부풀려 얘기되고 있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거친 공세는 기세가 등등하지만 ‘전면적인 대중 거리두기’를 위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추격 속도에 제동을 걸기 위해 중국의 급소인 첨단 기술을 봉쇄하려는 ‘부분적인 기술 디커플링’ 전략이라는 시각이다. 화웨이 등 중국 IT업체에 대한 제재, 중국의 반도체 생산 및 개발 능력을 제한하려는 반도체 지원법, 글로벌 배터리 공급망 안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억제하려는 인플레이션 축소법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취해진 조치들이다. 미·중 간 긴장이 높아지면서 우리나라에서도 탈중국 얘기가 종종 나오고 있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올해 10개월 동안 대중국 수출은 1629억 달러로 전체 수출 중 25.3%를 차지했다. 대중 수입 비중도 22.5%를 기록했다. 교역의 4분의 1 가까이가 중국하고 이뤄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코로나19로 강력한 봉쇄 조치를 취하자 대중 수출이 급감하면서 무역수지가 적자 행진을 계속하는 등 홍역을 치르고 있다. 이는 우리에게 필요한 전략이 지나치게 높은 대중 의존도를 낮추는 ‘감(減)중국’이지 디커플링이나 탈중국은 아니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물론 부분적으로 중국 내 생산 공장을 베트남 등으로 옮기는 ‘중국+1’ 전략과 함께 미국이 추진하는 ‘기술동맹’에 참여하는 일은 불가피할 것이다. 하지만 미국도 나서지 않고 있는 전면적 디커플링이나 탈중국은 우리의 선택지가 될 수 없다. ‘감 중국’에 집중하는 게 바람직하다. 이와 관련해 미국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는 한국 기업에 대해 대중 중간재 의존도를 축소하고 수출국과 투자 지역을 중국 외 국가로 다변화하며 국내 투자를 확대할 것 등을 권고했다. ‘감 중국’ 전략의 핵심이다. 여기에서 짚어볼 점은 대중 의존도를 어느 선까지 낮추는 게 적절할까 하는 것이다. 현재 GDP 기준으로 중국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8% 선이다. 필자는 글로벌 경제에서 차지하는 중국 경제의 몫이 의존도의 적정선이라고 본다. 현재 수출 의존도 25%는 과도하다.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다른 수출 시장의 저변을 넓히는 등 적극적인 대응으로 이를 하향 조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도 대중 수출의 구성 품목에 큰 변화를 줘야 한다. 중국의 수입 대체 전략으로 중간재 수출 전망이 밝지 않은 만큼 성장 가능성이 큰 내수 소비재 시장을 ‘대체 시장’으로 보고 파고들어야 한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샌드위치’ 처지가 된 한국 경제의 안정적인 생존 및 성장 전략이 긴요하다. 다양한 대책이 실행돼야 하겠지만 핵심은 10위권 경제 강국으로서 한국이 미·중 양국이 필요로 하는 기술과 상품, 그리고 일자리 등을 제공하는 경협 파트너가 되는 길일 것이다. 어느 한쪽에 과도하게 기울지 않고 균형을 잡아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고슴도치’ 같은 존재가 돼야 하며 최대의 무기는 초격차 기술 강국으로서 위상을 확보하는 것이다.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으로선 안미경중(安美經中)은 물론 경미경중(經美經中)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미·중 대결 구도를 잘 헤쳐나가는 방법은 경제를 잘하는 길밖에 없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2022-12-13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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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수의 열린경제] 美 민주당과 공화당의 ESG 이념전쟁 지난 2000년부터 ESG의 실행력에 탄력이 붙은 것은 미국의 가세(加勢) 덕분이다. 그동안 EU(유럽연합)가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를 앞장서 추진해왔지만, 상황은 순탄하지 않았다. 미국 공화당의 트럼프 행정부가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탈퇴하고 반(反) ESG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당의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ESG에 순풍이 불기 시작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파리기후변화협약에 재가입한 데 이어 ESG 관련 정책들에 드라이브를 걸어왔다. 그중 하나가 현재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추진하고 있는 기후공시 의무화 방안이다. 이 정책이 확정되면 미국 상장사들은 탄소 배출량 등을 시장에 공시해야 한다. 최근 들어 미국에서는 ESG가 ‘이념전쟁’으로 번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공화당 측 인사들이 ESG에 대한 공격을 본격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화당은 그동안 11월 중간선거에서 하원 의석의 과반을 차지하면 ESG 투자를 규제하는 법안을 만들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중간선거 결과 이 말이 현실이 되면서 앞으로 하원에서 공화당의 반 ESG 입법 공세가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움직임은 기본적으로 공화당 측이 기후변화의 과학적 근거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는 데다 ESG가 공화당의 돈줄인 거대 석유기업 등 화석연료 기업을 겨냥하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ESG가 상장사에 과격한 환경 및 사회 어젠다를 강요하고 있다"며 공화당 의원들이 ESG 원칙의 적용을 중단시킬 것을 촉구한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의 발언은 이런 의도를 잘 드러내고 있다. 공화당 인사들이 주지사를 맡은 주 정부들은 한술 더 떠 기후변화 대응과 ESG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금융기관들을 제재하기 위해 44개의 법안을 성안한 상태이다. 주별 움직임을 보면, 차기 대선에서 공화당 내 강력한 후보군에 속해 있는 론 드샌티스 주지사가 연임에 성공한 플로리다주가 선두에 서고 있다. 플로리다주는 지난 8월 은퇴연금의 운용과 관련해 결의안을 채택했는데 ESG 같은 비재무적이거나 정치적 요인을 고려하지 말고 수익률 극대화를 추구하라는 요구를 담았다. 텍사스주는 지난해 주의 투자 및 은퇴 펀드들이 총기 제조와 화석연료 기업들을 ‘보이콧’하는 블랙록과 유럽의 금융 그룹 등 금융기관들과 거래를 중단하도록 했다. 또 주 연금 펀드들이 보유한 블랙록과 UBS 등 기업의 주식을 팔겠다는 방침도 발표했다. 루이지애나주는 최근 블랙록에 투자자금을 연말까지 모두 찾아가겠다고 통보했다. 블랙록에서 빠져나갈 자금은 7억9400만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같은 제재 대열에는 웨스트 버지니아주, 켄터키주 등이 참여하고 있다. 공화당 소속 주 정부들의 제재로 금융기관들이 입게 될 피해는 어느 정도나 될까? 영향이 그리 크지는 않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블랙록은 현재 플로리다주의 은퇴연금 자금 72억 달러를 운용하고 있다. 연간 수수료 수입은 720만 달러 수준이다. 이는 194억 달러에 이르는 연간 수익에 비하면 아주 작은 규모이다. 게다가 시 정부 채권 시장에서 문제가 생기고 있다. 주요 금융기관을 이 시장에서 배제함으로써 시장 자체가 덜 경쟁적으로 바뀌어 텍사스주 당국이 부담해야 할 이자율이 상승하고 있다. 공화당의 반 ESG 공세가 이어지자 민주당은 ESG에 대한 지원사격으로 맞서고 있다. 뉴욕주, 매사추세츠주, 캘리포니아주와 11개 다른 주의 민주당 소속 재무 담당 관료들은 블랙록을 지지하는 서한을 내놓았다. 이들은 이 서한에서 “기후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투자자를 벌주려는 주 정부들은 향후 성장 기회를 잃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민주당 소속 주들은 거꾸로 이들 금융기관에 ESG 투자를 더욱 확대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이렇듯 미국에서 ESG가 이념 논쟁으로 번지고 있는 것은 향후 ESG의 진로와 관련해 우려스러운 점이 있다. 중간선거에서 하원의 과반을 차지한 공화당이 반 ESG 입법으로 ESG에 제동을 걸려고 할 것으로 보여 공화당과 민주당 간에 ESG 이념전쟁이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미국은 물론 글로벌 무대에서 기후변화 대응과 ESG경영 확산에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의제는 인류의 생존과 자본주의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제기된 이슈여서 정쟁(政爭)으로 그 대세를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먼저 기후변화의 경우 기상재난의 빈발로 위기의식이 높아지면서 산업화 이전에 대비한 지구 기온의 상승 폭을 1.5℃ 이내로 제한하자는 파리기후변화협약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각국의 소극적 대응으로 사실상 달성이 어려워졌다는 비관론 속에 더욱 강도 높은 탄소 배출 감축 노력이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들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다. 지구온난화를 억제하기 위해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45%(2010년 대비) 줄이고,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이뤄야 하는 것은 단지 ‘말의 성찬’이 아니라 ‘살 만한 지구’를 후손에게 물려줘야 하는 인류에게 주어진 중대한 숙제이다. 환경과 사람을 돌보는 윤리적이고 투명한 경영을 지향하는 ESG는 어떤가? ESG는 이제 기업경영의 본류로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글로벌 차원에서는 지속 가능성 및 기후공시, 공급망에 대한 환경 및 인권 실사 등을 중심으로 ESG를 제도화하려는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투자, 금융, 신용평가, ESG 등급, 공급체인, 소비자 등 다양한 부문에서도 ESG의 가치가 뿌리를 내리면서 새로운 경제질서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ESG를 주도해온 투자의 흐름을 보면 ESG의 역주행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얘기에 가깝다. 투자자들은 ESG를 리스크와 기회의 두 측면에서 보고 있다. 환경을 망치고 이해관계자를 외면하며 비윤리적인 행위를 하는 경영은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다. 반대로 ESG 경영을 잘하는 기업은 새로운 성장 기회를 통해 장기적 기업가치를 키울 수 있는 잠재력이 크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 만큼 지속가능 우량기업에 투자자금이 계속 몰리고 있다. 모닝스타는 지난 2018년 이후 이들 자금 규모가 세 배나 늘어나 2조4700억 달러에 이르고 있다고 집계했다. UBS그룹의 콜름 켈러허 회장은 “여러 가지 도전적 과제가 있지만, 투자자들이 ESG에 초점을 맞추는 추세는 중단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 이유로 X세대와 MZ세대 등 투자자들이 ESG를 원하고 있기 때문임을 들었다. 중요한 의미를 지닌 발언이다. 미국 공화당이 ESG에 적극적인 금융기관들에 아무리 괘씸죄를 적용해 다양한 제재를 가해도 이들의 고객인 개인 투자자들이 ESG를 원하고 있는 만큼 정치가 경제를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더구나 기업도 ESG 대세론에 공감하고 있다. S&P500 기업의 거의 대부분(92%)이 ESG보고서를 공시하고 있다. 재무를 담당하는 CFO들은 ESG에 대한 공세로 SEC의 기후공시 의무화 방안이 중도에 좌초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또 한 가지. 주주만 우대하는 자본주의를 그만두고 이해관계자 모두를 존중하는 기업 경영을 하자는 이해관계자자본주의는 시대적 의제가 됐다. 지난 2019년 8월 미국 재계가 선제적으로 이 이슈를 공론화시킨 것은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양극화 심화 등 ‘곪은 상처’를 해소하기 위해 이제는 자본주의를 개혁할 때가 됐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한국 재계가 지난 5월 이해관계자에 대한 신뢰와 존중을 강조하는 기업선언문을 내놓은 것도 이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어쨌든 미국 중간선거 결과는 앞으로 ESG의 진로에 적지 않은 진통이 있을 것임을 예고해주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방향이 올바른 일이어도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는 게 역사가 보여주는 사실이다. ESG는 고탄소 경제에서 저탄소 경제로, 환경훼손에서 환경보호로, 그리고 주주자본주의에서 이해관계자자본주의로 가는 경제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말한다. 토머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는 것은 직선의 과정이 아니라고 설파했다. 견고한 기존 질서를 바꿔 가는 여정(旅程)은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는 울퉁불퉁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환경과 사람을 돌보는 ESG 경영은 이제 기업을 넘어서 인류 생존과 사회·경제의 통합력 유지를 위한 필수조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동안 다져져 온 이 공감대는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자본주의 혁신의 새로운 나침반으로서 ESG의 역할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2022-11-15 08:4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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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수의 열린경제] 중국몽 맞선 '미국몽' 파상공세 …제조업, 발상을 전환하자 ‘중국몽(中國夢)’에 맞서는 ‘미국몽(美國夢)’의 공세가 파상적이다. 바이든 행정부와 미 의회가 미국의 산업 리더십을 되찾기 위해 내놓고 있는 조치는 법과 행정조치, 두 가닥으로 진행되고 있다. 먼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반도체 및 과학법, 인프라투자법, 미국혁신경쟁법 등이 큰 얼개의 ‘아메리칸 퍼스트 2.0’의 판을 구축하고 있다. 측면에서는 바이 아메리칸, 생명공학 및 바이오 제조 이니셔티브, 외국인 투자 규제 강화 등 행정명령이 미국 경제의 진군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들 조치로 미국 주요 첨단산업에는 앞으로 대규모 자금이 투입된다. 지난해 11월 인프라법이 미 의회에서 통과됨에 따라 탄소 포집 같은 신 청정에너지 기술에 200억 달러 이상이, 그리고 전기자동차 충전소에 80억 달러가 투자될 예정이다. 반도체 및 과학법은 반도체 시설 건축과 연구, 인력 개발 등에 520억 달러를 지원하는 방안을 비롯해 인공지능 등 첨단산업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2800억 달러의 연방 재정을 동원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국 자동차를 세액공제 대상에서 제외해 큰 논란이 일고 있는 인플레 감축법은 에너지와 기후변화 대응 부문에 3860억 달러를 지출하도록 하고 있다. 지금까지 얘기한 일련의 조치들은 미국 제조업의 실지(失地)를 회복하겠다는 ‘미국몽’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사가 지난 9월 9일 오하이오주의 리킹 카운티에서 열렸다. 인텔의 새 공장 착공식이 열리는 자리였다. 여기에는 바이든 대통령이 참석했다. 이날 바이든은 미국 정부가 양자컴퓨터에서 생명공학까지 모든 분야에 투자하겠다는 청사진을 밝혔다. “미래의 산업에서 세계를 리드하겠다”는 야심 찬 출사표를 던졌다. 미국이 신(新)산업정책의 깃발을 본격적으로 든 순간이었다. 그동안 미국에서는 산업정책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거나 이를 거부하는 태도가 주류를 이뤄왔다. 정책이 경제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에 대한 견제심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제는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다. 중국이 제조 2025, 일대일로 등 대내외를 겨냥한 확장정책을 펴면서 미국의 턱밑까지 추격해왔기 때문이다. 정부가 앞장서는 국가자본주의의 힘에 기댄 중국의 진격이 위협적인 만큼 미국도 정부가 팔을 걷어붙이고 제조업 리더십을 부활시키겠다는 맞대응 전략을 펴고 있는 것이다. 미·중 산업정책의 격돌이다. 미국 정부의 이 같은 정책 선회는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다. 오래된 깊은 논의 속에서 정책의 판이 움직여온 결과이다. 이 변화의 과정을 들여다봐야 앞으로 미국 산업정책의 방향타를 잘 가늠해볼 수 있다. 36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86년 말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은 산업생산성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미국의 산업적 성과가 심각하게 퇴조해 국가 경제의 장래가 위협을 받고 있다는 위기의식에 따른 것이었다. 3년 후인 1989년 이 위원회는 ‘메이드 인 아메리카(부제: MIT가 진단한 미국 경제 재건을 위한 처방)’라는 제목의 책자를 펴냈다. 이 책은 미국 제조업의 취약점을 조목조목 짚고 있다. 경영자들이 단기적 목표에 너무 집중하고 있고, 노동력의 질적 수준이 떨어졌으며, 인적 자원이 경시되고 있는 등의 문제점을 망라했다. MIT는 정책 처방전으로 기초연구 투자, 현대적 설비와 공정 엔지니어링에 대한 지원 강화, 혁신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 제거 등을 제안했다. 이 대학교는 2010년대 들어서는 <메이킹 인 아메리카>라는 비슷한 제목의 새 책을 출간해 쏟아져 들어오는 중국 제품에 대항하려면 제조업의 부흥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미국 정부에 피력했다. 제조업의 중요성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이런 흐름이 이어지는 가운데 2008년의 금융위기는 미국이 제조업을 바라보는 시선을 크게 바꾸게 되는 계기가 된다. 당시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야기된 경제위기의 와중에서 미국의 간판급 자동차 회사인 GM과 크라이슬러는 빈사 상태에 놓였다. 결국 정부가 직접 긴급 자금을 수혈하면서 이들 회사는 기사회생한다. 상황이 악화되면 문제가 보이는 법. 오바마 행정부는 제조업이 공동화라는 심각한 중병에 걸려있음에 주목하게 된다. 실제로 2001년부터 2011년까지 10년 사이에 사라진 제조업 일자리는 500만개에 달했다. 제조업의 실질 부가가치 성장률(연간)도 1990년대의 4.9%에서 1.4%로 뚝 떨어졌다. 병(病)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한 오바마 행정부는 2012년에 ‘제조업 르네상스’를 기치로 내걸고 제조업 부활 정책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이 제조업 르네상스 정책이 가진 문제의식은 같은 해에 나온 개리 피사노 등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 두 명이 집필한 <왜 제조업 르네상스인가>라는 책에 잘 정리돼 있다. 이들 교수는 미국 제조업이 내리막길을 걷게 된 것은 전략의 오류에 따른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연구개발은 미국에서 하고, 제조는 생산비가 낮고 시장이 있는 해외로 넘기는 전략이 패착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와 관련해 ‘산업공유지’와 ‘거리의 경제’가 산업경쟁력의 원천이라고 강조한다. ‘산업공유지’는 기술과 지식, 경험 등을 공유하는 공급업체, 고객사, 숙련 근로자, 대학 등을 한데 묶은 개념이다. ‘거리의 경제’는 이들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어야 활발한 소통을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경쟁력 강화의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 제조업체들은 이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 결과 산업공유지와 거리의 경제가 가져오는 상승효과가 사라지면서 제조업의 경쟁력이 취약해졌다. 심지어 미국에 남겨뒀던 연구개발 기능마저 제조망이 있는 해외로 이동시켜야 하는 일도 벌어졌다. 코닥이 대표적 사례이다. 세계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를 개발한 코닥은 완성품과 부품의 제조에 필요한 공급망을 일본 등 아시아지역으로 옮겼다. 문제는 연구개발과 제조 활동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데서 오는 ‘동맥경화증’이 가시화하자 아예 연구개발기능마저 아시아로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미국은 해외이전이 가져온 제조업의 공동화가 국가의 경제안보 위기를 가져왔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민주당 정부의 대부분 정책을 폐기했던 트럼프가 제조업 르네상스 정책만을 존속시켰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같은 제조업 중시 정책의 기조는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코로나19와 글로벌 공급망의 혼란 사태를 계기로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 안에 위치한 제조업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미국 제조업이 전체 국내총생산(GDP)과 직접 고용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각각 11%와 8% 수준이다. 하지만 기업 연구개발 투자 중 비중이 70%에 달하고 있으며, 수출의 60%, 생산성 증가율의 35%, 자본투자의 20%를 차지하고 있다. 중요도가 그만큼 큰 산업이다. 이렇게 보면 바이든 행정부가 지금 펼치고 있는 산업정책은 제조업 르네상스를 대폭 강화한 확장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개별 정책들의 수면 밑에서는 중국을 제치고 제조업 리더십(현재 제조업 순위 1위 중국, 2위 미국)을 확보하려는 미국의 그랜드 플랜 ‘미국몽’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리쇼어링이든 프렌드쇼어링이든 핵심은 미국 제조업의 부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만큼 필요할 경우 같은 맥락의 입법과 행정조치들이 이어질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이런 산업 기류의 변화에 한국 경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정부는 현재 기업의 활력 회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규제 완화를 추진하고 있다. 2022년 경제정책 방향에서는 차세대 성장동력 보강을 위한 방안으로 유망 신산업 육성, 주력 제조업과 서비스산업의 혁신 등을 제시했다. 하지만 현재 국회에서는 당장 발등의 불로 떨어진 반도체산업경쟁력강화법조차 논의가 지지부진한 상태이다. 글로벌 무대에서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산업정책을 내세운 제조업의 ‘한 판 승부’가 본격화하고 있는 상황에 비춰볼 때 안이한 대응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중요한 점은 제조업에 대한 시선을 바꿔야 한다는 점이다. 제조업은 이제 경제 자체를 넘어 경제 안보의 주축이 된 상황이다. 반도체 등 제조업에 대한 지원을 특혜로 본다면 이는 단견에 불과하다. 특혜가 우려된다면 대기업과 중견·중소기업의 동반성장을 담보하는 조치로 보완하면 될 일이다. 제조업이 국가경제의 명운을 좌우하는 시대이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함을 미국이 잘 보여주고 있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2022-10-30 17: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