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영박사
kinye79@gmail.com
-일본 와세다대학교 국제관계학 석·박사
- 전 뉴시스 도쿄특파원
- 〈 北朝鮮のリアル(북한의 현실) 〉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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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영의 재팬플래시] 한·일 양국을 비추는 거울 '저출산-고령화'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는 지난 23일 정기국회 시정방침 연설에서 현재 일본이 처한 가장 중대한 위기는 저출산 문제이며 정부의 최우선 정책도 저출산 대책이라고 선언했다. 기시다 총리는 “급속히 진행되는 저출산으로 인해 사회 기능이 제대로 유지될 수 없을지도 모르는 벼랑 끝 상황에 놓였다”면서 “아동·육아 정책은 더는 기다릴 수도 연기할 수도 없는 과제”라고 강조했다. 시정방침 연설은 연초 정기국회 개원 때 총리가 한 해의 국정 방침을 밝히는 연설이다. 따라서 일본 정부의 주요 추진 정책이 골고루 언급되기 마련이고, 올해는 그 첫 번째가 저출산 대책이 된 것이다. 그 뒤를 이어 방위력 강화, 원자력 정책, 투자 증대, 임금 인상, 코로나19 대책 등이 순서대로 강조됐다. 방위력 강화 문제만 해도 미·중 간 대결 구도와 우크라이나 전쟁, 북한 위협 등으로 최근 일본의 ‘전수방위(專守防衛) 원칙’이 사실상 ‘반격능력 보유’로 바뀌는 등 안보정책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면서 시급한 국가적 과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이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문제가 저출산 대책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기시다 총리는 “어린이 최우선 사회를 만들어 출산율을 반전시켜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대책을 실현하겠다”고 다짐했다. 총리 자신이 전국을 돌며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육아 분야 종사자 등 모든 이들의 이야기를 골고루 듣겠다고도 약속했다. 우선 오는 4월 총리 직속으로 ‘아동가정청’을 신설하고 육아 관련 예산을 두 배로 늘릴 것이며, 실효성 있는 대책을 마련해서 집행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저출산 문제가 여성이나 부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성별과 연령대, 즉 전 국민의 문제라고 호소한 것이다. 일본이 본격적으로 저출산 문제에 주목하고 대책 강구에 나선 것은 아무리 짧게 잡더라도 30년을 훌쩍 넘는다. 그런데도 계속 떨어지고 있는 출산율을 잡지 못하고 있다. 대책은 고사하고 아직 정확한 원인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은 일본보다 출산율이 더 낮다. 한 여성이 가임 기간(15~49세)에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출생아 수를 뜻하는 합계출산율은 한국이 0.81명(2021년 기준) 수준으로 세계 최저다. OECD 38개국 중 1.0 이하는 한국이 유일하다. 일본은 1.30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국과 일본은 저출산·고령화 문제에서 서로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여긴다. 상대가 잘못한 것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 대책이라면 대책인 셈이다. 작년 말 이기일 보건복지부 제1차관이 일본 국립사회보장·인구문제연구소를 찾았다. 저출산 문제와 연금 개혁 등에 관해 일본 사례를 살펴보고 배우려는 취지였을 것이다. 이 차관이 저출산 대책을 묻자 모리이즈미 리에(守泉理恵) 인구동향연구부 제1실장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좋았다고 평가할 만한 정책이 없다. 저출산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특정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1990년대 이후 30여 년 동안이나 저출산 대책을 연구하고 정책을 뒷받침해온 연구소 책임자가 그래도 뭔가 배워보겠다고 찾아온 외국의 고위 담당자에게 이런 말밖에 할 수 없는 심정이야 오죽했을까. 일본 정부가 그동안 실시해온 저출산 대책과 출산율 추이를 살펴보면 모리이즈미 실장의 토로가 실감 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당초 저출산의 가장 큰 원인이 양육의 어려움에 있다고 보고 임신·출산·육아에 대한 경제적 지원에 집중했다. 임신부에게는 정기검진 비용을 지원하고 출산 시에는 일시금과 출산수당, 육아에는 휴직지원금과 아동수당 등을 지급해 왔다. 출산수당만 해도 현재 40만엔(약 380만원)이고 곧 50만엔으로 오를 예정이다. 이와 함께 육아휴직 제도를 활성화하고 보육시설을 확충하는 데도 힘을 쏟았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지원책들이다. 그러나 저출산 기조를 멈춰 세우는 데는 백약이 무효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7년부터 1949년 사이에 태어난 일본의 1차 베이비붐 세대를 뜻하는 이른바 ‘단카이(団塊) 세대’ 때는 합계출산율이 4.32에 달했다. 이후인 1950년부터 줄기 시작한 출산율은 1차 베이비붐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결혼·출산을 하게 되면서 잠시 반등하기도 했지만 2005년 1.26으로 사상 최저를 기록했다. 2018년 1.42로 상승하는 듯했지만 지난해 1.30으로 다시 감소했다. 신생아 수는 2016년 처음으로 100만명 아래로 떨어졌는데 작년에는 80만명 선도 무너질 것이 확실해 보인다. 기시다 총리의 절박한 호소도 이런 현실에서 출발하고 있다. 여성이나 아이들에게 지원만 한다고 출산율이 올라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확해진 만큼 지금 당장 사회 전체가 총체적으로 심각한 위기의식을 갖고 나서지 않으면 사회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절박함 아래 총리 자신이 맨 선두에 서겠다는 각오인 것이다. 저출산과 맞물린 문제가 고령화다. 갈수록 노인 인구는 늘어날 수밖에 없는데 출산율이 받쳐주지 않으면 사회의 노령화는 불가피하다. 유엔 기준에 따르면 65세 이상 인구가 총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7% 이상이면 고령화사회, 14% 이상은 고령사회, 20% 이상이면 초고령사회로 나뉜다. 일본은 1970년 고령화사회, 1995년 고령사회, 2010년 초고령사회로 진입했다. 2021년에 29.1%를 기록했으며 이탈리아(23.6%), 독일(22%) 등을 제치고 압도적인 세계 1위다. 고령화사회에서 고령사회로 진입하는 데 영국은 45년, 스웨덴은 85년 걸렸지만 일본은 불과 25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한국은 2000년 고령화사회에 진입한 뒤 17년 만인 2017년 고령사회로 돌입해 일본보다 속도가 더 빠르다. 2025년에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하고 2050년에는 일본을 추월해 세계 최고 고령사회가 될 전망이다. 초고령사회가 초래하는 문제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것이다. 좀 과장하자면 일본의 모든 문제는 고령화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정부의 재정 구조를 한번 들여다보자. 2020년 일본 정부의 일반회계 예산 102조6580억엔 가운데 ‘사회보장 관계비’가 35조8608억엔으로 34.9%에 달한다. 이 중 ‘고령자를 위한 3대 급부 항목(연금·의료·간호)’이 28조616억엔으로 ‘사회보장 관계비’에서 80%를 차지한다. 전체 예산에서도 29%에 달한다. 이에 비해 저출산 대책비는 3조387억엔 남짓에 불과하다. 고령자를 위한 연금특별회계 규모도 70조2899억엔에 달하지만 일하는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노동보험특별회계 규모는 4조72억엔에 그친다. 사회보장 비용 대부분이 미래를 짊어져야 할 어린이와 현재를 책임진 노동인구가 아니라 과거 세대에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한 나라가 현재 인구를 유지하려면 합계출산율이 최소한 2.0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전문가들은 합계출산율 1.58이 인구구조 변화에서 중요한 분기점으로 본다. 일본은 1989년에 1.57을 기록했다. 이른바 ‘1.57 쇼크’로 일본 사회가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묘하게도 일본의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이 시작된 시기가 이 무렵이었다. 소비세 제도가 처음 도입된 것도 그해였다. 늘어나는 사회보장비 등으로 부족해진 정부 예산을 채우기 위해 도입된 소비세는 경기를 위축시켜 일본 경제를 만성적 디플레이션 상황에 빠지게 만든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잃어버린 10년이 20년, 30년으로 이어지면서 일본 경제가 여전히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동안 출산율은 점점 더 하락했고 소비세율도 3%, 5%, 10%로 뛰었다. 일본이 고령화사회에서 초고령사회로 달려가면서 사회보장비도 함께 증가세를 보였다. 일본은 1991년 정부 부채가 GDP(국내총생산) 대비 62.2%였지만 급속한 고령화로 지출이 증가하면서 2021년에는 262.5%에 달했다. 일본은 고령사회로 진입하기 직전인 1994년부터 매년 적자 국채를 발행하고 있는데 누적 적자는 1200조엔을 넘어서고 있다. 지금은 정부 예산 중 3분의 1 정도가 국채 원리금과 이자를 갚는 데 들어간다. 이 때문에 일본은 현재 세계적 추세인 금리 인상도 할 수 없는 처지로 몰리고 있다. 10년간 일본 특파원으로 일한 영국 BBC 기자는 최근 일본을 떠나며 쓴 칼럼에서 “일본은 과거에 갇혀 있다”고 썼다. 그가 일본의 문제점으로 꼽은 것은 관료주의와 외국인 배척 정서, 그리고 사회의 고령화였다. 그는 특히 지방 노년층 지배 세력이 오랜 기간 변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면서 “메이지유신과 2차 대전 패전 후에도 살아남은 이 압도적인 남성 지배층은 민족주의와 ‘일본은 특별하다’는 확신으로 무장했으며 일본이 전쟁에서 침략자가 아닌 희생자였다고 믿는다”고 분석했다. 일본 사회의 고령화는 낡은 국가주의 잔재를 지속시키면서 정치와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것도 막고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저출산·고령화 문제는 한국과 일본이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았다. 상대를 보면 자기 모습이 그대로 비친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이제 제대로 한번 해결해 보겠다고 결의를 다지는데 한국에서는 저출산·고령사회 문제를 책임졌던 사람이 여당 내 당권 경쟁에 휘말려 이도 저도 아닌 처지가 되어 버렸다. 조윤영 필자 주요 이력 ▷이화여대 북한학 석사 ▷일본 와세다대 국제관계학 석·박사 ▷뉴시스 도쿄특파원 ▷<北朝鮮のリアル(북한의 현실)> 저자 2023-01-31 07:5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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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영의 재팬플래시] '戰'자 가다듬는 일본, 군사강국으로 도약하나 일본 국민은 2022년 한 해를 상징하는 한자로 ‘戰(전)’자를 뽑았다. ‘올해의 한자’는 매년 11월 1일부터 12월 5일까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뒤 ‘한자의 날’인 12월 12일 발표된다. 올해는 모두 22만3768표 중 1만804표를 얻은 ‘戰’이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아사히신문은 그 배경으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꼽았다. 또 카타르 월드컵에서 보여준 일본대표팀의 선전,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에서 활약하고 있는 오타니 쇼헤이(大谷翔平)의 분투 등도 ‘戰’의 의미에 넣었다. 여기에다 코로나19, 물가 인상 등도 배경이 됐을 것으로 보았다. 산케이신문은 북한의 미사일 도발도 이유가 됐다고 지적했다. 일본 국민이 고른 올해의 한자 ‘戰’은 전쟁만이 아니라 스포츠와 일상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경쟁과 힘든 삶을 포괄하는 의미인 셈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올 한해 가장 뚜렷하게 느낀 감정은 무엇보다도 전쟁의 불안과 안보 위기라는 엄연한 현실일 것이다. 국민이 ‘戰’ 자를 선택하고 난 나흘 후인 지난 16일 일본 정부가 이른바 3대 안보 문서를 개정해 적의 미사일 기지에 대한 ‘반격능력’을 부여하는 결정을 했다는 사실도 그냥 우연으로 치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마이니치신문이 정부 결정 직후인 17∼18일에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반격능력 보유 결정’에 대한 찬성이 59%로 반대(27%)보다 배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 정부의 이번 조치는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지켜온 ‘전수방위(專守防衛)’ 원칙을 사실상 포기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 점에서 일본 안보정책의 대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일본 국내외에서의 논란도 거세다. 일본 정부가 규정한 ‘반격능력’은 적국이 일본에 대한 공격 착수를 확인할 경우 먼저 적의 미사일 발사대 등을 타격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자국뿐 아니라 ‘일본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타국’에 대한 무력 공격이 발생했을 때도 적국을 공격할 수 있다. 사실상 유사시 선제공격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라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고, 따라서 공격을 받았을 때 최소한의 방어만 한다는 ‘전수방위’를 포기한 것이라는 해석이 뒤따르는 것이다. 물론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는 16일 기자회견에서 “전수방위를 견지하겠다”, “평화 국가 행보는 변하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전수방위 원칙이 일본의 평화헌법에 기초하고 있는 만큼 총리로서는 그걸 명시적으로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튿날 진보 성향의 도쿄신문 1면 톱 제목은 ‘전수방위 형해화(形骸化)’였다. 일본 언론에서 제기하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논란의 핵심으로 좀 더 들어가 보자. 우선 이번 안보 문서 개정의 총론적 의미에 대한 언론 해설은 대개 이렇다. 지금까지 일본은 방어에만, 즉 방패의 역할만 하고 공격 곧 창의 역할은 미국이 맡아왔는데 이제부터는 일본도 공격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일본이 방패 역할만 맡는 것은 변함없고, 단지 방패가 전진 배치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요미우리신문은 “중국, 북한, 러시아에 에워싸인 일본의 안보 환경이 전후 가장 긴박해졌다는 위기감이 있다”라며 “일본 정부가 반격능력 보유를 통해 기대하는 것은 억지력 향상이며, 방위력을 근본적으로 강화한 뒤 미국과 협력해 역내에서 중국과 힘의 균형을 이루려 하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반격능력은 실제로 어떨 때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 예를 들어 북한의 미사일 발사 움직임이 있고, 이동식 발사차량(TEL)이 기지에서 나와서 미사일을 세웠을 경우 이것이 과연 일본을 겨냥한 것인지를 언제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실제로는 북한 미사일이 발사돼 어느 정도 날아가야 분석해 알 수 있을 것이다. 북한 미사일이 일본 영해에 떨어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북한 미사일이 일본 열도 위를 넘어 공해상에 떨어지는 일은 실제로 있었고 이때 경계 사이렌이 울리기도 한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생기면 일본의 대응은 달라질 것인가. 이렇게 되면 결국은 적의 의도와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하기 위한 정보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집권 자민당과 방위성에서는 반격능력 보유 자체가 억지력을 강화한다는 데 중점을 둔다. 일본은 앞으로 미국에서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을 도입할 계획인데, 그 첫 단계로 2027년까지 순항 미사일 500발을 구매해서 조기 배치한다. 일본 이지스함은 1척에 최대 100발 정도를 실을 수 있고, 모두 8척을 보유하고 있다. 8척이 동시에 출동하는 일은 극히 드물겠지만 어쨌든 일본이 최대 800발의 순항 미사일을 쏠 수 있다는 것을 알면 주변국들이 일본을 쉽게 공격할 수 있을까, 라는 것이 방위성의 시각이다. 하마다 야스카즈(浜田靖一) 방위상은 기자회견에서 “상대국의 전략, 전술적 계산을 복잡하게 해 일본에 대한 미사일 공격을 그만두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주변국의 군사기술이 고도화하면서 기존 미사일 방어체계만으로는 요격이 어려워져 요격과 반격을 결합한 통합 미사일 방어체제로의 이행이 불가피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물론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일본의 무력 증강이 주변국을 자극할 것이 뻔하고, 자칫 반격능력이 선제공격 능력과 동일시 되어 역내 안보 불안이 야기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일본 정부는 방위 전략 변화에 따른 자금 조달 계획도 함께 제시했다. 앞으로 5년간(2023~2027 회계연도) 방위비 총액을 43조엔으로 명기했는데, 이는 현행 계획(2019∼2023)에 반영된 27조4700억엔보다 56.5% 늘어난 액수다. 연간 방위비는 매년 약 1조엔씩 늘려 5년 후인 2027년엔 올해(5조3687억엔)의 2배인 11조엔 안팎이 될 전망이다. 이렇게 되면 일본은 인도, 독일, 영국을 추월해 미국, 중국에 이은 세계 3위의 방위비 지출 국가가 되고, 현재 국내총생산(GDP)의 1% 수준인 방위 예산은 2%로 늘어나게 된다. GDP 2%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 수준이다. 일본 정부는 지난 23일 각의(국무회의)에서 당장 내년(회계연도 2023년 4월 시작) 방위비를 올해보다 26% 늘어난 사상 최대인 약 6조8000억엔으로 편성했다. 전체 예산 증가율 6.3%보다 4배 이상 높은 증가율이다. 이와 별도로 세외 수입 등을 모은 ‘방위력 강화 기금’을 만들어 4조6000억엔을 계상하기도 했다. 경기 침체로 허덕이는 가운데서도 일본 정부가 국정의 방향과 무게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수치라고 할 수 있다. 내년도 방위비에는 적의 미사일 기지 등을 공격하기 위한 원거리 타격 능력을 갖춘 미국산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 구매 비용 2113억엔이 포함됐다. 또 육상자위대가 보유한 지상 발사형 ‘12식 지대함 유도탄’의 사거리를 늘리고, 지상은 물론 함정과 전투기에서도 발사할 수 있는 개량형 미사일의 개발 및 양산에도 1270억엔을 투입한다. 음속의 5배 이상 속도로 변칙 궤도로 비행해 요격이 어려운 극초음속 미사일의 개발을 위한 585억엔도 반영했다. 이런 무기들이 모두 공격용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그동안 장거리 미사일뿐 아니라 항속거리가 긴 전투기나 수송기 등은 전수방위 범주에 들지 않는다며 보유를 자제해 왔지만 앞으로 이런 브레이크는 점차 제동력을 잃게 된 것이다. 일본의 이번 반격능력 보유 선언을 놓고 방위정책의 ‘역사적’ 전환이라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지만, 일본의 이런 움직임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또한, 앞으로도 지속할 것이다. 2차대전 패전 이후 군대를 군대라 하지 못하고, 자위대의 존재마저 헌법에 새기지 못한 채 전쟁을 포기한 국가가 된 일본이 ‘정상국가’ 회귀를 위해 차근차근 발걸음을 떼오다 이번에 ‘빅 스텝’을 밟았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안보정책 변화는 2010년대 들어 미·중 간 대결의 본격화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고도화 등으로 동아시아 정세가 긴장되면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일본의 정책 변화는 3대 안보 문서로 불리는 국가안보전략, 국가방위전략, 방위력 정비계획에 담겼으며, 이번의 반격능력 보유도 3대 문서 개정으로 구체화 됐다. 일본의 방위력 강화는 각종 안보 관련 법제와 문건의 정비를 통해 무력 사용의 범위와 원칙을 확장해 나가면서 동시에 방위비 증액을 통한 실질적인 군사력 증강을 통해 이루어져 왔다. 대외정세의 변화가 본격화되던 시기인 2013년은 일본의 현재 안보정책이 자리 잡은 원년이라고 할 만하다. 3대 안보 문서 중 가장 기본이 되면서 방위정책의 장기적 방향을 제시하는 국가안보전략이 마련된 것이 이때였고,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설치된 것도 이 해였다. 이제 일본은 정상국가 등정에서 정상에 있는 개헌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박차를 가할 가능성이 크다. 국내에서는 일본의 반격능력 보유가 한국의 승인 없이 일본이 북한을 공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현재의 한·일관계를 고려할 때 이 문제를 우리가 이슈화한다고 해서 일본이 크게 신경 쓸 것 같지는 않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대응은 한국이, 중국에 대한 견제는 일본이 상당 부분 맡아주기를 기대할 것이다. 미국은 이미 몇 달 전부터 일본의 반격능력 보유를 공개적으로 환영해 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미·중 대립,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 등으로 격동하는 세계정세를 타고 군사강국으로 나아가는 일본을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할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이 문제를 뿌리 깊은 반일 감정만으로 대처해서는 해답이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미니박스] 1. 일본 방위비 추이 2. 주요국 방위비 지출(2021년도) 조윤영 필자 주요 이력 △이화여대 북한학 석사 △일본 와세다대 국제관계학 석·박사 △뉴시스 도쿄특파원 △<北朝鮮のリアル(북한의 현실)> 저자 2022-12-30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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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영의 재팬플래시] 동병상련? 지지율 하락 늪에 빠진 尹ㆍ기시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의 지지율 내림세가 멈추지 않는다. 기시다 총리가 이끄는 내각의 지지율이 이달 들어 30%대를 기록하며 날개 없는 추락을 계속하고 있다. 일부 조사에서는 정권 유지의 위험수역으로 간주하는 20%대로 떨어졌다. 아사히신문은 지난 12~13일 이뤄진 여론조사에서 기시다 내각 지지율이 37%라고 보도했다. 공영방송 NHK는 지난 11~13일 조사에서 전달보다 5%포인트 떨어진 33%로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전했다. 지지(時事)통신 조사 결과는 심각하다. 이 통신사의 11월 여론조사에 따르면 기시다 내각 지지율은 27.7%를 기록했다. 기시다 내각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43.5%였다. 지난해 10월 출범해 이제 막 집권 1년을 넘긴 기시다 내각의 지지율 추이에는 기시다 내각의 태생적 한계와 일본 국민의 기대치가 그대로 교차 반영되고 있다. 1년 전 기시다 내각 출범 당시 지지율은 50% 선에 그쳤다. 내각 출범 당시 지지율로는 역대 최저 수준이었다. 2020년 9월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내각이 출범할 당시 지지율은 74%에 달했다(요미우리신문). 1년 후 그 지지율이 30% 이하로 추락하면서 결국 스가 총리는 당 총재 선거 출마까지 포기해야 했지만 내각 출범 초기에는 높은 지지율을 누리는 것이 보통이다. 일본 국민이 기시다 내각의 출범을 냉정하게 평가했던 가장 큰 이유는 신선미 결핍이었다. 아베 추종자들이 요직을 차지한 기시다 내각을 놓고 ‘아베의 제4기 내각(두 차례 아베 집권과 스가 내각에 이은)’이라는 혹평도 나왔다. 아베의 장기 집권에 따른 피로감과 스가의 코로나19 대응 실패 등에 따른 국민의 불만이 기시다 내각에 그대로 이월된 것이다. 일본 내각은 출범 2개월 후에 첫 고비를 맞는다. 출범 프리미엄은 사라지고 국민의 냉정한 평가가 시작되기 때문에 대개 지지율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기시다 내각은 출범 프리미엄을 누리지 못한 대신 ‘취임 2개월의 벽’을 무난히 넘어섰다. 50% 선에서 출발한 지지율은 2개월 만에 60%를 훌쩍 넘은 것이다. 니혼게이자이 65%, 요미우리 62%를 기록했다. 지지율 상승을 이끈 것은 코로나19 대응에 대한 긍정적 평가였다. 2000년 이후 집권한 총리 9명 중 취임 2개월 후 내각 지지율이 오른 총리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와 2차 집권 때 아베 신조(安倍晋三)뿐이었는데 여기에 기시다도 끼이게 된 것이다. 기시다 내각 지지율 추락은 아베의 죽음과 함께 시작됐다. 아베 암살 사건이 처음엔 국민적 동정심을 유발해 참의원 선거의 압승 요인으로도 작용했지만 곧바로 악재로 변하고 말았다. 아베 암살범의 범행 동기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옛 통일교·이하 가정연합)에 대한 원한으로 드러나면서 자민당과 가정연합 간 내밀한 관계가 대형 스캔들로 비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시다가 아베의 장례를 국장으로 결정한 데 대해서도 여론은 싸늘했다. 기시다로서는 아베의 죽음을 최대한 예우하는 것이 인간적 도리일 뿐 아니라 지지층 결집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겠지만 국민 여론은 ‘국장은 과하다’는 것이었다. 아베의 국장 발표 직후인 7월 30일부터 이틀간 실시된 교도통신 여론조사에서 국장 반대는 53.3%, 찬성은 45.1%로 나타났다.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시다 내각이 국장을 강행하자 인터넷 포털에서는 “빨간불도 다 같이 건너면 무섭지 않다는 식으로는 정권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 베스트 댓글로 꼽히기도 했다. 가정연합 관련 의혹으로 여론이 들끓자 기시다는 지난 9월 각료 19명 중 14명을 바꾸는 대폭 개각을 단행했지만 여론을 돌려놓지는 못했다. 뒤늦게 일본 정부는 지난 10월 가정연합 조사 절차에 착수했고 가정연합과 접점이 확인된 야마기와 다이시로(山際大志郞) 경제재생담당상은 사퇴했다. 기시다는 종교법인 자격 박탈과 해산을 염두에 두고 문부과학성에 가정연합 조사를 지시하기도 했다. 또 가정연합 합동결혼식으로 결혼해서 한국에 사는 일본인 중 본인 의사에 반해 귀국을 못하는 사람에게 지원하는 방안도 검토하는 등 이런저런 대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기시다의 지지율 내림세는 이어졌고 40% 선을 지나 이제 30% 선도 위험해진 것이다. 기시다의 지지율 하락에는 국내외 경제 상황을 비롯한 여러 가지 복합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다. 문제는 다양한 현안들에 대처하는 내각의 능력이 국민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는 것이라고 일본의 정치평론가들은 지적한다. 무엇보다 내각의 팀워크와 결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목숨 걸고 정권을 지키려는 측근이 없다는 지적이 공공연히 언론에 나오기도 한다. 가장 최근에 불거진 하나시 야스히로(葉梨康弘) 법무상의 실언 문제도 기시다 내각의 느슨하고 흐트러진 기강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만하다. 하나시 법무상은 지난 9일 한 모임에서 “(법무상은) 아침에 사형(집행) 도장을 찍으면 낮 뉴스에나 톱이 되는 그런 일밖에 없는 밋밋한 자리”라고 했다. 본인 직책을 가볍게 생각하는 뉘앙스였다. 게다가 그는 “법무상이 돼도 돈이 모이지 않고 좀처럼 표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까지 보탰다. 중의원 6선 의원으로 기시다 파벌에 속하는 하나시는 지난 8월 처음 입각했으며 그가 법무상이 된 이후 사형이 집행된 일도 없었다. 그의 발언이 알려지자 야당은 물론 여당 안에서도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기시다는 그를 지키려 했다. 그러다 결국 여론과 정치권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지난 11일 아세안 정상회의 참석을 위한 출국을 하루 미루어 가면서 그의 사퇴를 결정했다. 정가에서는 아베 전 총리였다면 곧바로 그를 물러나게 했을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만큼 기시다가 돌발 문제에 대처하는 기민함과 과단성이 떨어지고 이를 보완해줄 만한 측근도 주변에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아베 내각에서는 정권과 아베를 위해 모든 걸 던지겠다는 각오로 무장된 각료들로 충만했지만 기시다 내각에서는 그런 인물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베 내각에서는 특히 관방장관이었던 스가 전 총리가 유명했다. 스가는 2012년 12월 관방장관 취임 후 5년 동안 한 번도 요코하마 자택에 머문 적 없이 의원 숙소에서 지냈다. 일본 관방장관은 정부 대변인 역할뿐 아니라 각 부처 간 조정 역할까지 맡아 내각의 2인자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쏘아댈 때는 스가 관방장관이 비서관보다 먼저 총리 관저로 달려가 기자회견을 준비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아베 총리가 스캔들로 시달릴 때는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 “모릅니다” “질문을 짧게 하세요” 등으로 맞서면서 ‘아베 수비’에 전력투구해 ‘불통 스가’라는 악평을 얻기도 했지만 충성심 하나만은 유감없이 과시했다. 결국 스가는 관방장관 재임 기간 역대 1위에 오른 뒤 아베 뒤를 이어 총리까지 역임했다. 이런 스가 같은 각료가 기시다 내각에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기시다의 지지율이 떨어지는 데에는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 요인들이 많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경제 문제가 그렇다. 엔화 가치는 떨어지고 물가는 뛰고 있지만, 그렇다고 금리를 올리기도 어렵다. 아베 시절 아베노믹스 추진을 위한 통화 팽창 정책으로 정부 부채가 많이 늘어난 탓에 금리를 올리면 국채 이자를 감당하기가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물가가 오르면 임금도 올라야겠지만 기업들 사정도 만만치 않다. 기시다 총리는 작년 10월 취임 후 첫 시정 연설에서 ‘분배’를 12번 언급했지만 1년 후인 지난 10월 국회 연설에서는 ‘분배’가 사라졌다. ‘기시다노믹스’의 ‘새로운 자본주의’에서 내세웠던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도 ‘임금 인상의 선순환’으로 바뀌었다. 임금 인상률이 높은 고급 기술 인재를 끌어들여 기업의 생산성을 향상시켜 새로운 임금 인상을 낳는 선순환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일본판 소득 주도 성장론’을 포기하고 민간 주도 성장을 재촉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기시다로서는 자신의 기본 정책까지 바꿔가면서까지 나름 애를 써보고 있지만 지지율을 반등시키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시다의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기시다 총리 자신도 전임 스가 총리의 전철을 밟게 되지 않을까 우려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자민당 내에서는 법무상 경질 이후 ’포스트 기시다‘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고노 다로(河野太郞) 디지털상과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자민당 간사장 이름이 오르내린다고 한다. 기시다 정권 수립으로 힘이 꺾인 스가와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전 자민당 간사장 측에서도 반격의 칼을 갈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기시다 내각에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당분간 주요 선거가 없는 데다 야당 지지율이 워낙 낮다는 점이다. 지지통신의 11월 여론조사에서 자민당은 22.8%를 기록했는데 주요 야당인 입헌민주당은 4.8%, 일본유신회는 2.8%, 공산당은 0.3%로 나타났다. 연립여당인 공명당은 3.7%였다.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가 58.9%를 기록했다. 상황이 이러니 자민당 내에서도 본격적으로 기시다 교체 움직임이 일어나기보다는 당분간 기시다의 위기 대처 능력을 지켜볼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일본 기시다 내각의 지지율 하락과 그에 담긴 의미를 살펴보노라면 지지율 하락에 시달리는 윤석열 정부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정치 지도자의 지지율이 대내외 여건과 반드시 정비례하지는 않을 것이다. 주어진 조건이 우호적이라면 지지율 획득에도 유리하겠지만, 거꾸로 여러 악조건이 겹칠 때 지도자의 역량과 리더십이 더욱 돋보이고 국민 지지도 더욱 높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지도자와 집권 세력의 국정 능력·열정·태도 등인 것은 한국과 일본이 다를 수 없다. 조윤영 필자 주요 이력 △이화여대 북한학 석사 △일본 와세다대 국제관계학 석·박사 △뉴시스 도쿄특파원 △<北朝鮮のリアル(북한의 현실)> 저자 2022-11-22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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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영의 NK어프로치] 김정은, 스스로 출구 막고 최후 승부수 띄우나. 북한의 무력 도발이 아슬아슬하다. 북한은 올해 들어미사일을 44발이나 쏘았다. 탄도미사일은 엄연히 유엔의 제재 대상이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지 오래다. 미사일 사거리도 한국을 겨냥한 단거리부터, 일본을 때릴 수 있는 중거리, 미국령 괌까지 도달할 수 있는 장거리까지 다양하다. 최근에는 북한 미사일이 일본 열도 위를 날아가 일본 국민이 경악하는 일도 벌어졌다. 한국을 겨냥한 위협은 더욱 노골화됐다. 올해 초 북한판 이스칸데르(KN-23)를 시작으로 북한판 에이태큼스(KN-24), 초대형 방사포(KN-25) 등을 연이어 발사했다. 지난 14일 새벽에는 동·서해 완충구역으로 총 560여 발의 포 사격을 한 데 이어 18일과 19일에도 계속했다. 마치 불꽃놀이라도 하는 듯하다. 북한의 포들은 2018년 9·19 남북군사합의로 설정한 동·서해 완충구역 내에 떨어진 것으로 파악됐다. 북한이 군사합의를 명백히 위반한 것이다. 북한은 지난 8일 강원도 원산 일대에서 전투기 150여 대(북한 주장)를 동시에 출격시켜 공격 종합훈련을 하기도 했고, 지난 13일 밤부터 14일 밤까지 하루 사이 군사분계선(MDL) 일대에서 전투기 10여 대로 위협 비행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일들은 최근 북한이 핵무력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를 법제화를 통해 굳건히 하는가 하면 한국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위협하고 있는 가운데 벌어지고 있다. 북한이 말과 행동을 총동원해서 보여주고 있는 이러한 군사 도발은 빈도나 강도에서 위협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북한 나름대로 군사 충돌 위험을 고도로 통제하고 면밀하게 계산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북한의 도발적 행동은 대내외의 총체적 상황에 대한 나름의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대외적으로는 우선 한국의 보수 정권이 보여주는 원칙적이고 강경한 대북정책이, 문재인 정권이 그리워질 정도로 만만치 않게 느껴졌을 것이다. 여기에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의 북한 비핵화 실현 원칙에 입각한 대북 제재의 지속과 강화가 북한의 호흡을 가쁘게 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국제사회의 친러시아 진영에 대한 강한 압박이 북한에도 적잖은 부담이 됐을 수 있다. 또 미·중 대결로 인한 중국의 입지 약화가 북한에도 긍정적인 효과보다는 부정적인 영향이 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북한이 미국과 협상에 응하는 경우일지라도 현재의 미·중 갈등 속에 중국이 미·북 접근을 호의적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국이나 러시아나 자신들 앞가림하기 급급해 북한에 대한 지원은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북한 내부 사정도 갈수록 악화일로다. 북한 주민의 민심에 나침반 역할을 하는 식량난도 여전하다. 미국 농무부 산하 경제조사 서비스는 최근 북한의 올해 쌀 생산량이 지난해와 같은 수준인 136만톤일 것이라고 추산했다. 수백만 명이 아사한 ‘고난의 행군’ 시기였던 1994년 150만톤보다 적은 수준이다. 북한은 올해 극심한 가뭄으로 이모작이 어려웠고, 6월부터 8월까지는 폭우로 인한 홍수로 농경지가 대거 침수됐다. 북한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이번 여름은 옥수수가 나오는 철인데도 장마당의 쌀 가격이 올라 주민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보통 1㎏에 북한 돈 5000원대를 유지하던 쌀 가격이 6000원대로 20% 이상 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난의 행군’ 때처럼 무장 군인들이 협동농장의 탈곡장을 지키는 장면이 다시 등장했다. 황해남·북도 탈곡장에서는 옥수수를 훔치려는 주민들과 군인들 사이에 폭동 수준의 난투극이 벌어졌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코로나19에 따른 봉쇄 조치는 북·중 무역이 일부 재개되는 등 다소 완화됐지만 국가 물자 위주의 무역만 이루어지고 있어서 아직도 북한 주민들 삶을 옥죄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난의 행군’ 시기 배급제도가 무너진 북한 주민들의 생활은 이미 오래전부터 ‘장마당’에 의존하고 있다. 공장 대부분이 멈춰선 북한에선 ‘장마당’에서 팔리는 물건들이 거의 중국에서 들어오고 있어 코로나19에 따른 봉쇄는 주민들 삶을 낭떠러지로 모는 것과 다름없다. 북한이 요즘 대외적으로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는 데에는 이러한 내부의 어려움을 고려해서 주민 결속 효과를 노린 측면도 없다고 하기 어렵다. 북한이 군사 도발의 이유를 한·미 연합군사훈련에 갖다 대는 것은 사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부적으로 지금까지보다 훨씬 요란했다는 것이 북한 소식통의 전언이다. 지난 8월 실시된 한·미 연합군사훈련 당시 북한 당국은 8월 29일 주민들에게 “이번 연습은 우리 공화국을 불의에 군사적으로 타고 앉기 위한 북침 공격 연습”이라면서 “과거보다 훨씬 도전적이고 공격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선전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날부터 평양 시내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밤 10시를 기해 공습경보 훈련도 했다. 북한이 방어적 성격의 한·미 연합군사훈련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내부적으로도 한층 긴장을 고조시킨 것이다. 물론 김정은이 내부용으로만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한·미 연합군사훈련에 얼마나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지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도 잘 드러나 있다. 2019년 8월 5일자로 김정은이 트럼프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을 인용해 본다. “(한·미) 연합군사훈련은 도대체 누구에 대한 것이며 봉쇄시키려 하고 물리치려고 하며 공격하려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지금이나 미래에나 한국군은 우리의 적수가 될 수 없습니다. 한국군은 제 군대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미군이 한국 사람들과 함께 이 같은 편집증적이고 과민한 행동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 측이 골칫거리로 인식하는 ‘미사일 위협’과 ‘핵 문제’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당신 측과 한국군의 군사적 행동들입니다.” 이 밖에도 김정은은 이 편지에서 “제가 그렇게 강력히 중단을 요청했던 미국과 한국의 전쟁 연습”이라거나 “한국과의 ‘군사 게임’과 ‘전쟁 연습’이 끝났을 때 제게 다시 연락을 주기 바랍니다” 등의 말을 하고 있다. 재미있는 대목은 이 긴 편지의 마지막 부분이다. “모든 국가가 하는 아주 작은 미사일들의 성능 향상 실험 동안 각하께서도 언급하셨듯이 우리는 남쪽의 바보들을 약간 놀라게 했고 이는 퍽 재미있었습니다.” 김정은이 자신의 배포를 과시하면서 한국의 문재인 정권을 ‘바보’ 취급함으로써 트럼프에게 한반도 문제는 한국이 아니라 자신과 협상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북한이 지난 9월 핵무력 정책을 법으로 규정한 것은 국제사회의 비핵화 압력에 맞서 자신들의 핵무력은 더 이상 외부에서 왈가왈부할 일이 아님을 못 박으려는 의도일 것이다. 이 법에서 “핵무력은 국무위원장의 유일적 지휘에 복종한다”라거나 “국무위원장은 핵무기와 관련한 모든 결정권을 가진다”라고 규정함으로써 내부적으로 김정은의 권위를 더욱 강화하는 효과도 기대할 것이다. 북한은 현재로서는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를 완화할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 현상 타파를 위한 한·미 때리기를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국제 정세도 미국이 북한 핵 인정을 전제로 협상 테이블에 나올 가능성을 사실상 거의 없게 만들고 있다. 김정은으로서는 자신이 갈 길을 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할 것이다. 그 길은 작년 1월 제8차 당대회에서 ‘국방과학 발전 및 무기체계 개발 5개년 계획’을 제시하면서 내놓은 5대 전략무기일 것이다. 북한의 향후 핵·미사일 개발 시간표의 최우선 과제인 5대 전략무기는 고체연료 다탄두 대륙간탄도미사일, 장거리 순항미사일, 핵추진 잠수함, 변칙기동 탄도미사일, 극초음속 미사일이다. 이 계획하에 북한은 작년에 여덟 차례 미사일 시험발사를 했고, 올해에는 더욱 가속 페달을 밟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지금 핵 보유국을 넘어 핵강국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 핵강국 지위에 올라서면 미국이 북한 비핵화가 아니라 ‘핵무기 감축 협상’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북한이 목표로 하는 핵강국의 여정에서 당장의 고비는 7차 핵실험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7차 핵실험은 북한으로서도 쉽게 넘기 어려운 레드라인(금지선)으로 여기겠지만 만약 이 선을 넘게 된다면 이후 상황은 김정은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의 예상도 뛰어넘는, 말 그대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일촉즉발의 위기가 될 것이다. [미니박스] 북한은 지난달 8일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7차 회의에서 ‘핵무력 정책에 대하여(핵무력 정책)’를 법령으로 채택했다. 새롭게 발표된 핵무력 정책은 핵무력의 사명, 구성, 지휘통제, 사용 결정의 집행, 사용 원칙 등 총 11개 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한이 핵무력을 법제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북한은 김정은 집권 직후인 2013년 4월 ‘자위적 핵 보유국의 지위를 공공히 할 데 대하여’를 채택한 바 있다. 2013년에는 핵 보유국 지위를 강조했다면 이번 법제화는 핵무력 보유를 기정사실화하고 핵 사용에 관한 지침을 구체화했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핵무기 사용 조건에 있어서 임박·필요·불가피한 상황 등을 설정해 상대방의 핵 공격이나 재래식 공격과 상관없이 언제든 임의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게 해 놓은 것이다. 대내외적으로 핵무력 보유의 기정사실화를 넘어 핵무력 사용의 가능성까지 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윤영 필자 주요 이력 △이화여대 북한학 석사 △일본 와세다대 국제관계학 석·박사 △뉴시스 도쿄특파원 △<北朝鮮のリアル(북한의 현실)> 저자 2022-10-24 06: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