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논설위원leejaeho6424@gmail.com
- 아주경제 초빙논설위원
- 前 동아일보 정치부장, 논설실장
- 前 관훈클럽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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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노멀 시대 정치개혁 대제언] <2> 우리는 늘 맞고 너희는 틀렸다? 나, ‘편 가르기’ 정치로 대처 못한다 [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교수 ] [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정치의 주된 목적과 기능은 국민을 하나로 묶는 데 있다. 헌법정신에 동의해서 그 나라의 국민으로 살기로 한 이상, 그걸 구현하는 일에 너와 내가 따로일 수 없다. 개별 사안에 대해선 저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고, 또 달라야 하지만 크게 보면 하나여야 한다. 소위 통합이다. 정치는 통합을 이루고 지키는 데 최우선의 가치를 둬야 한다. 우리 정치가 과연 그러한가. 국회 국민통합위원회(공동위원장 임채정·김형오)가 지난 14일 내놓은 조사 결과는 우려할 만하다. 국회도서관 DB 등록 전문가 1801명을 상대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 한국사회의 분열과 갈등’에 대한 전망을 물었더니 응답자의 80.9%가 “더 심각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답했다. 분열의 원인으로는 ‘정치’가 63.1%로 ‘경제적 원인’ 30.9%보다 두 배 이상 높았다. 정치가 국민 통합은커녕 분열의 주범으로 꼽힌 것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원론적으로 보면 한국정치의 후진성과 비효율 탓이 크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회장은 생전에 “한국의 행정력은 3류, 정치력은 4류, 기업경쟁력은 2류”라고 했지만, 우리 정치는 여전히 갈등을 민주적으로 해소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정치가 제 역할을 못하니 남은 것은 날것 그대로의 분열과 대결뿐이다. 때로는 정치가 이를 부추기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국민은 내 편, 네 편으로 나뉘고 사회는 갈라진다. 문재인 정권 4년 동안 이런 현상은 더 심해졌다. 정책은 ‘배 아픔’이 아닌 ‘배고픔’에 초점을 이 정권 들어 한국정치는 확증편향(確證偏向)에 빠진 사람들의 전쟁터처럼 느껴진다. 모두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하기 때문이다. 사안에 대한 객관적 기준이나 판단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나의 견해(선입관)를 지지하고 뒤받쳐주면 다 내편이고, 그렇지 않으면 반대편, 곧 적(敵)이다. 인지능력의 결함인 확증편향으로 편 가르기가 심해졌는지, 아니면 편 가르기 때문에 확증편향이 심해졌는지는 연구과제이겠지만 양자가 교호작용을 통해 우리 정치를 더 깊은 분열과 비효율의 늪으로 몰아간 것은 분명하다. 그 생생한 현장을 우리는 조국사태와 검찰개혁 논란 등 숱한 내로남불의 위선 사례를 통해 질리도록 목격했다. 부동산정책도 마찬가지다. 25차례나 대책을 내놓았음에도 잡히지 않던 집값은 정부가 지난달 80만호 주택 공급대책을 내놓자 비로소 주춤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전문가들의 조언대로 공급 위주의 정책을 폈더라면 어땠을까. 흔히 국가의 정책은 국민의 ‘배 아픔’이 아닌 ‘배고픔’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들 한다. 서울의 특정지역에 대한 정서적 편견과, 부동산을 세금으로 때려잡겠다는 아집에서 일찍 벗어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확증편향과 편 가르기의 종착역은 진영(陣營‧block)이다. 무릇 진영이라 함은 자신의 진영에 속하는 사람에게는 ‘안전’을 보장해주고, 대신 진영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체제나 메커니즘을 말한다. 요즘 같은 국민국가(nation state) 시대엔 안전과 충성을 맞바꿔주는 것은 국가가 유일하고, 또 유일해야 한다. 그런데 그 국가 안에 진영이 생기고, 국민이 진영에 충성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익명과 댓글로 무장한 군중이 진영의 보호를 믿고 떼를 지어 몰려다닌다면 국가의 존재 이유가 부정될 수도 있다. 진영화의 위험이 여기에 있다. 진영에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진영의 승패다. 따라서 상대는 타도의 대상이다. 친(親)조국 쪽에서 보면 반대세력은 적폐·친일파·토착왜구이고, 반(反)조국 쪽에서 보면 저들은 종북주의자·주사파·사이비 사회주의자다. 때로는 양측이 서로 실체도 없는 허상(虛像)을 만들어놓고 싸우는 것처럼 비칠 때도 있다. 서로에게 상대는 만들어진 적(敵)이다. 진영은 확증편향을 강화하고, 강화된 확증편향은 편 가르기를 심화시킨다. ‘확증편향→편 가르기→진영화→확증편향→편 가르기→진영화···’로 이어지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누가? 1차적인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다. 문 대통령은 과연 그 책무를 다 했는가. 진정성 있는 소통과 대화 노력을 통해서 말이다. 아쉽게도 문 대통령은 그 고리를 끊어주지 못했다. 오히려 야당으로부터 “편 가르기를 정치에 이용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친일파가 아니라는 공인인증서라도? 실제로 '편 가르기'는 이 정권의 주된 무기처럼 보였다. 대통령이 취임과 함께 '적폐청산'을 들고 나왔을 때 이미 편 가르기는 예고됐었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 저를 지지하지 않은 국민 한분 한분도 섬기겠다”고 했다. 하지만 말뿐이었다. 대통령의 모든 인사, 의전, 언행에서 국민이 느낀 건 편 가르기를 통해 우리 편의 결속을 강화하라는 독려 메시지 같았다. 41.1% 득표율로 당선된 대통령이 다수 국민을 청산의 대상으로 몰고, 그 지지 세력은 한 술 더 떠 ‘토착왜구’로 낙인까지 찍었으니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할까. 나는 이 정권의 패착 중의 하나가 국민을 친일(親日)과 반일(反日)로 나눈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정권 입장에선 대단히 좋은 카드였을 것이다. 왜? 친일‧반일은 우선 쉽고 명쾌하며 감성적이다. 경제나 대북정책처럼 복잡하지가 않다. 친일은 악(惡), 반일은 선(善)이다. 전자는 ‘친일=보수=기득권=악’이고, 후자는 ‘반일=진보=사회적 약자=선’이다. 이처럼 단순한 등식을 통해 정권이 나서기도 전에 국민 스스로가 “내 조상 중에 혹여 친일파는 없었는지···” 지레 걱정하도록 만들었다면 이보다 효과적인 편 가르기가 없다. 대체 언제까지 국민을 친일-반일 프레임에 묶어둘 셈인지 모르겠다. 악질 친일파들은 이미 세상을 떴는데, 연좌제 특별법이라도 만들어 그 후손들을 단죄하겠다는 건가. 일부 인사들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려면 친일파의 묘(墓)는 파헤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광복회장은 “적폐청산의 핵심은 바로 친일청산”(광복회 홈페이지)이라고 공언했다. 이제 사람들은 “우리 집안에는 친일파가 없었다”는 걸 증명하는 공인인증서라도 만들어서 가지고 다녀야 할 판이다. 편 가르기는 이 정권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국정 철학, 포용(包容)과도 배치된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다 끌어안고 가겠다는 게 포용이다. 혹여 이 정권은 포용을 경제적·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지원이나 복지 확충 정도로 좁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포용은 정치적·이념적으로도 확장되어야 옳다. 앞으로는 포용을 외치면서 뒤로는 반목과 대립을 방조·조장하는 데 몰두한다면 진정한 포용이 아니다. 그게 위선이다. ‘오만의 파벌화’는 민주주의를 파괴 어떻게 하면 편 가르기의 유혹과 진영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미국의 철학자이자 인식론의 대가인 마이클 린치(코네티컷대학)의 ‘파벌적 오만’이 참고가 될 법하다. 그는 2019년 저서 (한국어 제목 : 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 성원 옮김, 2019년 메디치)에서 오만을 “자신의 세계관이 다른 사람의 증거와 경험을 통해 개선될 여지가 없다고 고집하는 태도”로 봤다. 이런 태도가 “한 집단에서 공유되고, 그 내용 면에서 사회적인 성격을 띨 때, 즉 ‘우리’의 일부로서 경험되고 ‘그들’(반대자들)을 겨냥할 때 파벌적 오만”이 된다고 했다. 쉽게 말하면 ‘오만의 파벌화’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결과는 치명적이라고 했다. 인간성의 말살과 민주주의의 파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이 정권의 속칭 ‘문빠’를 ‘파벌적 오만’의 전형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린치는 ‘지적 겸손함(intellectual humility)'을 회복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자신의 세계관이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새로운 증거를 통해 향상될 여지가 있다고 보라”는 것이다. 교과서 같은 말이긴 하나 이런 마음가짐과 실천이 국가의 진영화를 극복하는 첫걸음이라는 걸 부인하기는 어렵다. 자신도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소통이 되고, 상대의 비전과 정책도 수용할 수 있다. 원래 문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기대도 그런 게 아니었던가.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국민과 소통함으로써 모두의 대통령이 될 거라는 희망 말이다. 이제 지구상의 모든 국가는 ‘포스트 코로나 경주’를 위한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다. 누가 승자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정치’가 짐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안다. 국민을 내 편, 네 편으로 나누는 정치, 각자의 진영 속에 똬리를 튼 채 반목하고 증오하는 정치, 린치의 말을 빌리면 무엇을 ‘사실’로 여길지에 대한 합의조차 없는 정치로는 완주할 수 없다는 것을. 2021-03-30 05:5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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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 '국민통합' 위해 몸 던져야....아니면? 나오지 마시라 [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교수 ] [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하 윤석열)이 정치에 뛰어든다면 정치발전에는 어떤 영향을 줄까. 아웅다웅하는 눈앞의 현실정치를 떠나 보다 본질적인 문제를 놓고 고민해보자. 정치발전은 대중의 정치참여가 확장되고, 정치체제의 효율성(문제 해결능력)이 높아지며, 민주주의의 공고화가 이뤄지는 상태를 말한다. 보편적 정의가 그렇다는 거고 한국적 상황에선 조금 다를 것이다. 정치참여만 해도 ‘과잉’을 걱정할 정도라면 옛날만큼 절대적이지는 않다, 나는 대결정치(진영화)의 완화, 곧 통합을 한국 정치발전의 첫 번째 과제로 꼽고 싶다. 과도한 진영화로 인한 갈등과 분열이 블랙홀처럼 한국사회의 모든 잠재력과 가능성을 집어삼키고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의 정치 진출은 결과적으로 우리 정치의 극단화(진영화)와 단순화를 심화시킬 확률이 높다. 처음부터 적(敵)이었던 사람보다 같은 편이었다가 적이 되는 사람에게 더 원한이 맺히는 법이다. 조국 전 법무장관부터 “진보 정부에 대한 집요한 표적수사로 보수 야권 대권후보로 부각되더니, 대선을 1년 앞두고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국민 보호’를 선언하며(구실로) 사직했다.”고 맹비난했다. “윤석열의 ‘법치’는 “법치로 포장된 ‘검치’(檢治)”일뿐이라고도 했다. 이 한마디에 모든 게 다 들어있다. 싸움은 공수(攻守)가 뒤바뀐 ‘조국대전’이 될 게 분명하고, 어젠다는 ‘법치와 정의’라는 단순화된 원론(原論)으로 시종할 가능성이 높다. 윤석열을 대선 정국의 한 복판으로 불러낸 건 이 정권이다. 한 꺼풀 더 벗기고 들어가면 운동권적 이중성(위선)이다. 지난 4년 간 국민이 진저리를 친 것은 ‘우리는 정의, 당신네들은 불의’라는 이중 잣대였다. 우리는 정의니까 뭘 해도 옳다는 인식 말이다. 이 정권 들어 국회의 인사청문보고서 채택 없이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만 29명이다. 그 중 한 사람인 국토교통부장관은 LH직원들의 신도시 땅 투기 당시 사장으로 조사 대상일 텐데 외려 조사를 총괄 중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자신들만이 ‘정의’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독선이 결국 ’윤석열 찍어내기‘로 정점을 찍었다. 尹을 불러낸 운동권적 이중성 ‘나만 옳다’는 독선으로 치자면 검찰 또한 뒤지지 않는다. 검찰은 자신들이 수사하고 내린 결론만이 옳고 정의라고 믿는다. 법원의 무죄 판결에 입장표명은 하면서도 잘못 기소된 사람들에게는 재심에서 뒤집히지 않는 한 사과하지 않는다. 2019년 6월25일 당시 문무일 총장이 과거 검찰의 부실수사와 인권침해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한 게 사실상 처음이자 마지막 사과다. 윤석열의 정치 참여는 정치와 선거를 “내가 정의”라는 두 세력 간의 대결로 단순화시킬 위험성이 있다. 그 싸움의 외피는 물론 문빠 중심의 팬덤 정치와 ‘윤석열 표 법치정치’로 나타날 거고. ‘윤빠’도 곧 생길 것이다. 윤사모 비공식회원만 벌써 2만이 넘는다고 한다. 검찰총장이 정치권력, 그것도 절대권력(통치권력)을 향해 한 번에 직진하는 경우는 일찍이 우리 정치사에 없었다. 총장이 바로 국회의원으로 간 경우조차도 1995년 김도언 총장이 유일하다. 김 총장은 임기를 마치고 이듬해인 1996년 신한국당 공천으로 부산 금정구에서 당선됐다. 당시 검사들은 평소 총장을 정치로부터 초월적인 존재라고 믿었기에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고 한다. 윤석열은 국회를 건너뛰고 단숨에 대권주자 반열에 올라섰다. 지난주 문화일보 여론조사에선 그의 정치 진출에 대해 “적절하다”는 응답이 47.2%로, ‘적절하지 않다’는 응답 45.7%보다 다소 높았다. 한 진보 언론인은 칼럼(한겨레 3월9일)을 통해 그에게 “출마하지 마시라”고 했지만 그를 정치판으로 불러낸 게 누군가. 지역주의의 유령도 벌써 어른거린다. 윤석열은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부친이 충남 논산 출신이어서 충청도 사람으로 간주된다. 그는 이미 충청 대망론의 중심인물이 돼 있다. 지난주 두 차례의 대선지지도 조사(문화일보, TBS)에서 이재명 경기지사(22.4%, 24.1%)와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13.8%, 14.9%)를 제치고 1위를(28.3%, 32.4%)차지했을 때도 서울(39.8%)과 대전‧세종‧충청(37.5%)의 지지율이 전국 평균보다 높았다.(동아일보 3월8일) 야권 일각에선 그를 중심으로 충청-TK(대구 경북) 연대를 이뤄 문재인 정권의 호남-PK(부산 경남)에 맞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가 사퇴 하루 전에 전격 방문한 곳이 대구였다는 점을 이와 연관 짓기도 한다. 1997년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을 추억하는 사람들은 한국정치에선 현실적으로 지역 간 연대 없이 대선 승리는 어렵다고들 한다. 윤석열은 어떨까. 정치발전의 암적 존재라는 지역주의에 기대고 싶은 유혹을 떨쳐버릴 수 있을까. 호남-PK에 충청-TK로 맞서야? 정체성(identity)의 문제는 더 심각할 것이다. 보수정당의 두 전직 대통령을 잡아넣은 그가 그 정당의 대선후보로 나올 수 있을까. 초한지(楚漢志)를 조금 빌리면 한신(韓信)이 한 때의 적(敵)이자 자신의 손으로 패퇴시켰던 항우(項羽)의 잔병들을 끌어 모아 유방(劉邦)에 맞서는 꼴과도 같다.(실제로는 한신이 유방을 도와 항우를 꺾고 한의 건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만 끝내 유방에 의해 죽는다. 이른바 토사구팽이다.) 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하 박근혜)에 대한 윤석열의 입장도 궁금하다. 그가 입당하게 되면 그의 손으로 감옥에 보낸 박의 사면을 주장할까. 아니, 주장할 수 있을까. 어떤 논리로? 사면 주장 없이 그가 국민의 힘을 아우를 수 있을까? 실로 미묘하고 복잡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제3지대 창당이 그 대안으로 거론되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론조사(문화일보)는 윤이 대선에 나간다면 ‘국민의 힘’ 소속으로 출마해야 한다는 응답이 41.9%로 가장 높다.(신당 창당은 14.4%, 무소속 후보는 13.7%) 비록 인기 없는 야당이지만 반문(反文) 세력을 결집시키려면 국민의 힘을 중심으로 뭉치는 게 낫다는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 역시 정치의 양극화에 대한 우려를 가중시킨다. 윤의 주변에선 신당 창당 쪽으로 무게중심이 기울었다는 전언도 있다. 그럴 경우 국민의 힘 측에서 만족할 만큼 동조 탈당(헤쳐모여)이 이뤄질지, 안철수도 합류할지가 핵심 포인트라고 하겠다. 정치컨설턴트 박성민은 “이재명의 독주와 윤석열의 사실상 출사로 양 진영이 해체되고 있다.”고 진단하고 “내년 대선은 진영이 최대로 결집한 2012년 대선보다는 양 진영이 모두 분열된 1987년 대선과 유사할 것”으로 내다봤다.(경향신문 3월6일) 그러나 대권주자들 수가 늘어난다고 진영이 해체됐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낙연, 이재명은 해체될 진영도, 뛰쳐나갈 진영도 없다. 안철수는 이미 서울시장 쪽으로 빠져나갔다. 홍준표는 2017년 다자구도 대선에서 쓴맛을 봤는데 또 나설까? ‘4자 필승론’의 수혜자는 민주당? 박성민은 다자구도가 되면 87년 대선 때처럼 ‘4자 필승론’‧이 다시 나올 거로 예측했다. 당시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노태우 후보가 출마해 노태우가 승리했다. 야권 표가 양 김 사이에서 갈린 탓이었다. 이번에도 4자 구도가 된다면, 야(野)쪽에서 누가 나오든 민주당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설령 윤석열이 국민의 힘에 입당해도 케미스트리(화학적 결합)가 안되면 ‘4자 필승론’의 수혜자는 결국 민주당이 될 것이다. 4자든, 양자든 이번 대선이 양극단으로 치닫는 우리 정치에 그만 브레이크를 걸어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정치인 윤석열의 소명(召命)은 여기에 있다고 나는 본다. 이왕 정치에 뛰어들기로 했다면 국민을 가르기 보다는 국민이 하나가 되는 정치를 구현하는데 앞장서는 게 옳지 않겠는가. 그러려면 내용과 실질이 있는 정치를 하겠다는 구체적인 어젠다로 국민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단순성 구호와 반문 정서, 국민의 분노에만 기대서는 한계가 있다. 그가 내세우는 ‘법치와 정의’만 해도 국민은 헷갈린다. 법치와 정의라면 검찰개혁이 핵심인데 윤석열의 검찰개혁은 이 정권의 개혁과는 어떻게 다른가. 수사와 기소를 더 확실하게 분리하자는 것인가, 아니면 어정쩡한 상태로 두거나, 과거 상태로 돌아가자는 것인가. 어디 검찰개혁 뿐일까. 다른 많은 영역에서도 이런 구체적인 물음에 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원론이 아닌 각론으로 구축된 그 토대 위에서 국민통합을 얘기해야 한다. 국민이 편이 갈려 서로 증오하고 싸우는 나라에선 백약이 무효다. 문재인 정권에서 우리는 질리도록 경험했다. 그의 주사위가 이미 던져졌다면, ‘별의 순간’이 오고 있다면, 구체적인 비전과 어젠다로 국민통합을 위해 몸을 던져야 한다. 그런 각오와 리더십과 역량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나오지 마시라. 2021-03-12 0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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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년전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이 文대통령에게 귀뜸하는 외교術 [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교수 ] [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한반도와 주변정세가 심상치 않을 때마다 140여년 전 청나라 사람 황준헌(黃遵憲‧황쭌셴·당시 주일 청국공사관 참찬관)이 쓴 ‘조선책략’(朝鮮策略)을 다시 보게 된다. 단순 비교는 물론 어렵지만 시사하는 바는 많다. “과거를 멀리 보는 사람은 미래도 멀리 보게 된다”고 했던가. ‘조선책략‘의 요체는 친중(親中), 결일(結日), 연미(聯美)에 있다. 러시아(아라사‧俄羅斯)의 남진을 막고(방아‧防俄),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조선은 중국과 친하게 지내고(계속 섬기고), 일본과는 협조관계를 맺고, 미국과는 연대하라는 권고다. 청나라가 반(反)러시아 전선의 구축을 위해 이이제이(以夷制夷) 차원에서 조선도 끌어들인 거지만 황준헌은 이를 조선에도 유용한 생존전략으로 본 것이다. 1880년 9월 수신사로 일본에 와 있던 김홍집은 황으로부터 이 책자를 건네받고 고종에게 전한다. 고종을 위시한 개화파들이 크게 고무되었음은 물론이다. 고종은 곧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1882년 5월), 이어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과도 수교한다. 위정척사파의 반대를 누르고 쇄국의 빗장을 푼 것이다. ‘조선책략’으로 조선은 민족국가(nation state)를 단위로 하는 근대적 국제체제와 다자주의, 세력균형의 개념에 눈을 뜨게 됐다는 평가도 있다. 그럼에도 청-일, 러-일의 각축 속에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고종이 러시아를 끌어들임으로써, 영국과 미국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용인토록 해준 게 결정적 원인이었다. 중국의 조선 속국화와 ‘親美論’ ‘조선책략’에는 조선을 영원히 중국의 속국으로 삼으려는 청나라의 집요함이 생생히 드러난다. 왜 친중(親中)인가. “…중국이 사랑하는 나라로 조선만 한 나라가 없다. 조선이 우리의 번속(藩屬)이 된 지 이미 1천년이 지났다. 중국은 덕으로써 편안하게 지내게 하고, 은혜로써 품어줄 뿐, 한 번도 그 토지와 인민을 탐내는 마음을 가진 적이 없다.… 조선은 중국 섬기기에 더욱 힘써서 천하로 하여금 조선과 우리는 한집안 같음을 알도록 해야 한다.….” 그럼에도 미국에 대해선 다분히 호의적이다. 역시 러시아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강성함은 유럽의 여러 대지와 더불어 동‧서양 사이에 끼여 있기 때문에 항상 약한 자를 부조하고, 공의를 유지하며, 유럽 사람으로 하여금 그 악(惡)을 함부로 행할 수 없게 했다.…미국을 우방으로 끌어들이면 구원을 얻고 재앙을 풀 수 있다. 이것이 미국과 연(聯)해야 할 이유다.…” ‘조선책략’의 이런 대미 인식이 한국사회의 친미론(親美論)의 토양이 됐다는 주장도 있다. 박노자 교수(오슬로대‧한국학)에 따르면 “황쭌셴은 러시아를 악마로, 미국을 영토적 야심이 없는 동양의 수호천사로 생각했는데…그 영향을 받아 고종도 미국을 긍정적으로 보았고, 미 선교사들과 미션스쿨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었다”는 것이다. 이 미션스쿨 초기 졸업생들이 대한민국 건국 초기 지배층의 근골을 이룬 것으로 박 교수는 본다(중앙일보 2003년 3월27일). ‘조선책략’은 실현되지 못했다. 중국이 일본에 패퇴하고 조선이 일제에 먹히는 바람에 ‘친중’도, ‘결일’도 이뤄지지 않았다. ‘연미’도 미국의 소극적 태도로 무산됐다. 고종은 끝까지 미국의 개입과 보호에 기대를 걸었으나 돌아온 것은 1905년 일본의 조선 지배권을 인정해준 가쓰라-태프트 밀약뿐이었다. ‘조선책략’이 지금도 우리에게 주는 함의가 자못 심장한 이유다. 요즘처럼 미-중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듯한 상황에선 더욱 그렇다. ‘조선책략’은 적어도 국제정치학의 기초개념인 국력, 세력균형, 현실주의의 세 차원에서 톺아봐야 한다. 국력(힘)은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다. 어떤 방책도 힘이 따라주지 않으면 소용없다. 황준헌의 권고대로 친중, 결일, 연미했더라면 국권 상실의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걸 주도할 힘이 없는데 무슨 수로? 오늘날 4강 외교와 남북관계도 마찬가지다. 자강(自强)과 부국강병(富國强兵), 특히 동맹의 힘이 뒷받침해줘야 한다. 親中, 結日, 聯美가 지금 가능하다면 황준헌은 당시 동북아의 현상유지(status quo)체제, 곧 세력균형(balance of power) 체제가 유지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일본이 이미 이를 깨기로 마음먹고, 영미(英美)가 묵인, 방조하는 상황에선 현상타파, 곧 전쟁(청-일, 러-일, 중-일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세력균형체제는 역내(域內) 국가들이 함께 노력함으로써 유지된다. 당시 조선의 처지로는 낄 여지조차 없었지만 국가지도자의 능력에 따라서는 나라 크기와 관계없이 기대 이상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노태우 대통령은 북방정책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6월 클린턴 정권의 이해(理解)와 지원 속에서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킴으로써 동북아의 세력균형체제 유지에 기여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 운전자론’도 그런 의도에서 비롯됐겠지만 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역동적인 남북,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켰으나 북한의 핵보유가 기정사실화 되고, 핵능력은 고도화됐다. 북핵이 언제든 세력균형체제에 구멍을 낼 수도 있다는 점에서 ‘평화의 일상화’를 얘기할 상황은 아니다. 더욱이 한-미-일 삼각체제의 한 축인 한·일관계 악화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일외교를 실패로 규정하고, 이 정권 최대의 실책으로 꼽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바이든 미 정부까지도 유감과 우려를 표명하고 나설 정도다. 현실주의는 이상(理想)에 치우치지 않고 주어진 현실에 기초해 외교정책을 펴는 것을 의미한다. 이념이나 도덕적 가치에 매몰되지 않고 현실에 기반을 둔, 그래서 외교의 목적도, 수단도, 제한적인 게 현실주의다. 이런 점에서 ‘조선책략’의 ‘친중’ ‘결일’ ‘연미’는 국력과의 괴리가 컸던 당시보다 오히려 오늘에 더 맞는 현실주의적 방책 같다. 우리가 ‘친중’하고(과거처럼 섬긴다는 것은 아니고), ‘결일’하며, ‘연미’, 곧 ‘맹미(盟美)’할 수만 있다면 외교의 지평은 훨씬 넓어진다. 한·일관계만 해도 한미동맹이 어떤 반일(反日) 구호보다도 효과적인 일본 견제수단임을 알아야 한다. 결국 외교역량이 출중한 지도자와 우수한 외교관들이 나와야 한다. 美도 한국에 동맹의 인센티브를 줘야 향후 미-중에 대한 대응도 이 세 차원에서 논의되고 결정되는 게 바람직하다. 물론 문제는 항상 디테일에 있다. 원칙은 그럴듯하나 구체적인 현안에 들어가면 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쿼드(Quad)가 좋은 예다. 한미동맹을 생각하면 참여해야 하나, 중국의 반발도 고려해야 한다. 앞으로 미-중 사이에서 우리는 이와 유사한 현안들을 놓고 선택의 고민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한국이 정치‧군사적으로는 미국에 기대고, 경제적으로는 중국에 기대는 이중구조 때문이기도 하다. 진보 보수, 여야를 떠나 우리 시대가 직면한 실로 지난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생각들이 다 다르다. “선택해야 한다면 미국 쪽에 서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고, “지정학적으로 중국의 위상과 힘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거나, “사안별로 미·중 사이에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사람들도 있다. 분석과 진단은 차고 넘치지만 처방은 없는 형국이 이어지고 있다. 최영진 전 주미대사(2012.03-2013.05)의 견해는 주목할 만하다. 그는 “한-미-일 3각 협력관계를 강화하는 것이 국익에 부합한다”는 전제 아래 “3각 협력을 증진하되 그 협력이 중국을 대상으로 하거나 중국을 직접 타깃으로 하는 3국 공동입장이나 정책에는 선을 긋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최영진, ‘신조선책략’, 김영사 2013년) 조선왕조 500년을 관통하는 외교의 기본원칙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이었다. 큰 나라를 섬기고 다른 이웃과는 선린관계를 유지한다는 거였다. 여기서 큰 나라(大)는 물론 중국이다. 이제 그 자리에 한미동맹을 놓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중국판 사대교린이 1국 지배의 경성 위계질서체제(hard hierarchical system)였다면, 한미동맹판 사대교린은 연성 위계질서체제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1극체제 특유의 안정성에 의존하지만, 전자는 전체주의적 가치 위에 서있고, 후자는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 위에 서있다. 한미동맹 중심의 신(新)사대교린이 성공하려면 한미동맹 자체도 ‘협력적 참여동맹’으로 바뀌어야 함은 물론이다. 예컨대 현실적으로 북핵 폐기가 어렵다면 미국과 유럽 일각에서 제기된 ‘아시아 핵기획그룹(ANPG)’의 창설을 지지하고 참여하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동맹이란 기본적으로 주고받는 관계다. 미국도 우리에게 뭔가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 2021-02-17 05: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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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은 왜 폭군이 되는가 [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교수 ] [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흔히 “아부(阿附)도 능력”이라고 한다. 윗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고 알랑거릴 줄도 아는 사람이 직장에서도 잘나간다는 뜻일 게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 교수(하버드)는 이를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아부까지도 능력으로 간주되는 세태를, 그가 보기에 오도되고 가혹한 능력주의의 한 폐해로 지목할 터다. 그의 새 책, <공정하다는 착각>(2020년 12월, 함규진 역, 와이즈베리)은 능력에 관한 기존관념을 흔들어놓는다. 원제목은 ‘능력의 폭정’(Tyranny of Merit). 능력이 왜 폭군이 됐을까. 능력주의 논쟁에 다시 불을 붙인 이 책에서 샌델은 능력주의가 불평등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능력에 따라 보상받는 것을 공정(公正)으로 알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않을뿐더러 외려 능력주의로 인해 불평등이 심화되고, 공동체의 삶까지 팍팍해진다는 것이다. 그는 ‘능력주의’란 렌즈를 통해 작게는 한 개인과 집단(대학, 기업 등), 크게는 국가와 사회의 공정한 작동원리는 과연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건 곧 개인과 국가, 시장과 정부와의 관계에 관한 본질적인 물음이다. 우리 정치가 어떤 내용의 답을 줄 수 있을까. 마침 부산‧서울시장 보궐선거에다가 내년 3월 대선까지 앞두고 있어서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가 아닐 수 없다. 능력주의(meritocracy)란 말은 영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영(Y0ung)이 1958년 출간한 <능력주의의 부상>에서 처음 썼다. 능력주의에 비판적이었던 영은 이 책에서 자신과 이름이 같은 주인공을 2034년의 영국으로 보내 능력주의의 실상을 둘러보게 한다(일종의 가상 소설이다). 그랬더니 귀족주의가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귀족주의가 등장하고, 빈부격차와 불평등은 더 공고해지고, 계급의 벽은 고착화돼 있더라는 것이다. 신분제사회를 철폐함으로써 모두가 능력에 따라 보상받는 ‘공정사회’를 꿈꾼 결과가 더 심한 불평등과 양극화였다. 영이 2001년 ‘가디언’지를 통해 ‘능력주의 타도“(Down with Meritocracy)를 외치게 되는 배경이다. 능력주의는 공정한가 샌델의 능력주의 비판도 궤를 같이한다. 알기 쉽게 예시로 풀어보자. 20대 취업준비생인 A는 한 대기업의 입사시험에 응시했다. 시험을 못 치르게 방해하는 사람은 물론 없었다. ‘기회의 균등’은 보장된 셈이다. 그러나 시험장에 간 A는 다른 응시자들이 모두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왔음을 알게 된다. 어학에서 뒤지면 합격은 어렵다. ‘기회의 균등’은 주어졌지만 ‘조건의 균등’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A는 낙방했다. 기업 측은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신입사원을 뽑았다”고 발표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그의 낙방을 문제 삼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재능이 부족했거나, 남보다 노력을 덜 했던 탓으로 간주됐다. 자신도 그렇게 여겼다. 합격한 학생들은 축하를 받았다. 능력으로 합격한, 능력 있는 학생들로 인정됐기 때문이다. 샌델에 따르면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합격자들은 오만(傲慢)해진다. 왜? 그들은 능력주의 사회에서 ‘능력’으로 보증된 엘리트들이기 때문이다. 반면 A처럼 낙방한 학생(loser)은 굴욕(屈辱)을 느낀다. 능력이 부족해서 떨어졌으니 하소연 할 데도 없다. 능력주의가 한 사회에서 불평등을 묵인, 방조, 정당화하는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한 경로다. 실패자(루저)의 굴욕은 능력자들(승자, 엘리트)에 대한 반감과 분노로 바뀌면서 반(反)엘리트주의의 온상이 되고, 반엘리트주의는 결국 포퓰리즘으로 이어진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태롭게 한다(최대의 수혜자가 트럼프였다). 샌델은 다시 묻는다. 이런데도 능력주의를 고집해야 하느냐고. 샌델의 능력주의를 읽고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옹호해온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휴지통에 던져버렸을지도 모른다. 능력주의가 문제라고? 그럼 대안은? 능력을 대신할 기준이나 가치가 있는가,라고 되물을 것이다. 사회학자 탈코트 파슨스(1902∽1979)는 저 유명한 패턴변수에서 인간의 귀속성(ascription)을 ‘전근대적 속성’으로, 업적성(achievement)을 ‘근대적 속성’으로 꼽은 바 있다. 능력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출생과 신분에 따라 보상(대우)이 달라지는 귀속성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인가. 반론은 차고도 넘친다. 압축 성장의 시대를 산 우리로선 더 그렇다. 그나마 능력주의가 준(準) 규범 역할을 했기에 한 세대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의 동시 달성이라는 기적 같은 성취를 이뤄낼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성공에 대한 運의 기여를 인정하라” 샌델이 능력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서 제시하는 해법은 “일에 대한 존엄성을 되살리고, 이를 통해 공동선에 기여토록”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은 임금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열망 때문이라는 것. 따라서 ‘내가 사회에 필요한 존재’라는 자부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 샌델은 능력주의의 폐해를 재생산하는 주범으로 미국의 명문대학들을 지목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신입생의 일정 비율을 제비뽑기로 뽑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자신의 성공에 대한 운(運)의 기여를 인정하는 사람은, 순전히 능력 때문에 성공했다고 믿는 사람보다 훨씬 겸손할 거라는 그의 생각과 맞닿아 있다. 샌델의 말이다. “종종 기회의 평등의 유일한 대안은 냉혹하고 억압적인 결과의 평등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또 다른 대안이 있다. 막대한 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도 존엄하고 고상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의 평등이다. 그것은 사회적 존경을 받는 일에서 역량을 개발하고 발휘하며, 널리 보급된 학습 문화를 공유하고, 동료시민들과 공적 문제에 대해서 숙의하는 것 등으로 이뤄진다.” 샌델 역시 능력주의의 폐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국가, 또는 공동체가 일정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시장에만 맡겨둘 수 없다는 것이다. 2015년 <능력주의는 허구다>(The Meritocracy Myth, 2015년, 김현정 역. 사이)라는 책을 낸 미국의 스티븐 맥나미, 로버트 밀러 교수는 능력 우선주의로 인한 불평등의 심화를 막으려면 다양한 조세정책과 재정정책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각종 불합리한 차별조처도 철폐하고, 주민들을 위한 자산형성 프로그램도 도입할 것을 권한다. 특히 상속세율을 높이고 면세조항을 과감히 삭제하면 세대가 바뀔 때 ‘판을 새롭게 짜게 되어’ 모두에게 좀 더 평등한 출발점을 만들어주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주장한다. ‘포용’을 발로 차는 嘗糞之徒의 아부 이런 제안에 대한 반론도 물론 차고 넘친다. 능력주의 옹호자들, 곧 자유주의 시장경제론들은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상속세를 과도하게 부과하면 어떤 부모가 밤 새워 일하겠는가, 개인의 삶은 개인에게 맡기고, 시장은 시장에 맡김으로써 정부의 개입을 줄여야 한다고. 그들은 그 근거로 동구 공산권 몰락의 서사까지 소환할 것이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보게 되는 논전(論戰) 중의 하나다. 논전의 수준은 각기 달라도 결국은 모두에게 사활적 관심사일 터다. 불행히도 모범답안은 없다. 나라마다 그 환경과 형편에 맞게 양쪽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장 보편적인 절충은 가장 상식적이다. 능력주의의 원칙은 지키되 뒤처진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 이상의 대안은 없어 보인다. 물론 이 또한 각론으로 들어가면 ‘자유주의 복지국가’냐, 또는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냐, 하는 식으로 나뉘겠지만 능력과 공공부조의 절충이란 큰 틀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능력주의의 칼날을 무디게 할 장치가 필요하다는 얘기인데 우리는 이미 갖고 있다. 포용정책이 바로 그거다. 나는 작년 4월 이 칼럼란을 통해 문재인 정권이 포용국가(inclusive state)를 미래비전으로 제시한 통찰력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코로나의 발톱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무기는 포용밖에 없다. 이 광포한 시대에 승자와 패자를 함께 안고 가는 것 말고 달리 무슨 길이 있겠는가. 문 대통령도 21일 세계경제포럼(WEF) 한국정상 특별연설에서 코로나 손실보상제와 이익공유제가 포용정책의 모델이 될 것이라고 했다. 지금도 아쉽다. 그때 통합당(지금의 국민의힘)도 포용 경쟁에 바로 뛰어들었어야 했다. ‘포용’이란 제목을 ‘지속가능한 포용’으로 바꾸고서라도 말이다(지금도 늦지 않다). 그렇다고 오해는 말기 바란다. 나는 특정 정당 지지자가 아니다. 그저 ‘포용’에 상처를 내는, 예컨대 ‘선출된 권력’ 운운하고, 공직이 욕심나 대통령에게 상분지도(嘗糞之徒)의 아부를 일삼는 사람들에게 절망할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포용이란 ‘백신’을 제 발로 차내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 2021-02-01 03: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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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통합 [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교수 ] [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이낙연 민주당 대표가 새해 첫날 꺼낸 ‘이명박 박근혜 사면’ 카드와 국민통합론에 대해 여론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이 대표는 “국민과 함께 전진하려면 사회갈등을 완화하고 국민통합을 이뤄야 한다”고 했지만 갤럽조사에선 사면 반대가 54%, 찬성이 37%였다(민주당 지지층에선 반대가 75%). 11일 리얼미터 조사에서도 사면이 국민통합에 기여하지 못할 것이란 응답이 56.1%로 기여할 거란 응답(38.8%)보다 많았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신년인사회(7일)에서 “새해는 통합의 해”라고 했던 문재인 대통령도 신년사(11일)에선 ‘통합’이란 말조차 입에 담지 않았다. 애초 사면과 통합을 분리했더라면 어땠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사면은 시기상조다. 자칫하면 진영 간 대립을 격화시킬 개연성이 크다. 박 전 대통령을 석방하게 되면 그를 지지해온 세력에겐 리더(장수)가 생기는 셈이다. 돌아온 장수 아래 재(再)충전될 그 힘이 어디로 분출될지는 불문가지다. 사면은 해야 한다. 그러나 내년 3월 대선 후, 문 대통령이 당선자의 건의를 받아서 하는 형식을 취하는 게 순리다. 그래야 문 대통령도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차원에서 짐을 벗을 수 있고, 새 대통령도 과거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임기를 시작할 수 있다. 美 의사당 난입사건을 반면교사로 사면은 그렇게 정리하고 지금은 여야를 막론하고 국민통합의 문제를 놓고 고민해야 한다. 지금 이 상태로 대선을 치른다면 누가 승자가 되든 극심한 대립과 분열에 휩싸일 소지가 농후하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선 불복과 지지자들에 의한 사상 초유의 국회의사당 난입사건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여야는 지금부터라도 머리를 맞대고 국민통합을 위해 제도적으로 손볼 데는 없는지 살펴야 한다. 선거철이 시작되면 그때는 이미 늦다. 주요 정당의 국민통합 관련 부서들끼리라도 소통하고 회합하기를 권한다. 대통령부터 그런 분위기 조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국민통합은 정의(定義)하기가 쉽지 않은 말이다. 우리는 거의 습관적으로 ‘국민통합’이라고 쓰지만 학계에선 주로 ‘사회통합’이라는 표현을 쓴다. ‘사회통합’이라고 쓰고, 괄호 안에 영어로 ‘social integration’이 아닌 ‘social cohesion’이라고 붙인다. 아마 사회통합이 국민통합보다 범위도 넓고, 가치중립적인 표현이어서 그런 게 아닌가싶다. 국민통합을 사회통합의 하위요소로 보기도 한다. ‘국민’(national)이라는 말에서 풍기는 국수적인 느낌도 마뜩잖았을 것이다. ‘cohesion’은 ‘결속’이다. 통합은 곧 결속이라는 뜻일 게다. (이런 미세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선 그냥 국민통합으로 쓰겠다.) 국민통합에 대한 다양한 이론에도 불구하고 통합은 한 국가가 지향해야 할 가장 보편적인 가치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국가 자체가 구성원들, 또는 구성요소들의 통합을 전제로 만들어지고 존재한다. 적어도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지금과 같은 민족국가, 또는 국민국가(nation-state)체제가 들어선 이후의 ‘국가’라면 다 그렇다. 따라서 그런 국가에 사는 국민의 삶은 본질적으로 통합의 삶이지 분열의 삶이 아니다. 국민통합은 “다양한 특성을 지닌 구성원들이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갖고 공동의 비전을 공유하며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상태”, 또는 “한 사회 내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잘 결속되어있느냐는 상태”로 정의되기도 한다(노대명 외, 사회통합 과제 및 추진전략 2009년, 한국사회통합지표연구 2010년). 통합을 시민의 헌신과 존경을 이끌어내고, 체제 안에서 실질적, 형식적 합의를 이룰 수 있느냐의 문제로 보는 시각도 있다. 결국 통합은 “국민이 가치와 이념에 대한 공유된 믿음 속에서 갈등과 분열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상태나 그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물론 갈등의 순기능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통합논의의 출발점은 국민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가치나 이념이 있느냐에 모아져야 한다(하나로 묶는다는 것은 정치적 표현이고, 엄밀히 말하면 화이부동(和而不同), 곧 화합하되 같지는 않은 상태를 말한다). 국민의 결속을 다질 가치가 뭔가 박근혜 정부 출범 직전인 2013년 1월 28일, 한국경제연구원(KERI) 주최로 ‘국민통합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란 주제의 토론회가 열렸다. 발제자인 강규형 교수(명지대‧ 전 KBS이사)는 ⓵대한민국의 정통성 인정 ⓶건전한 시장경제의 틀 ⓷자유민주주의 ⓸국제협력 대외개방 노선을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 할 기본가치로 꼽았다. 상대가 아무리 미워도, 설령 싸울 일이 있더라도 이 네 가지의 가치만큼은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는 거였다. 그로부터 8년이 흘렀다. 사회도, 정권도 바뀌었다. 진보의 바람은 더 거세졌다. 그럼에도 강 교수가 제시한 이 네 가지 가치는 여전히 유효할까. 나는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로서 이낙연 대표의 생각이 궁금하다. 이 가치들은 강 교수의 개인 의견이긴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우리 국민 절대 다수가 공감하고, 실천해온 가치였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로 인해 전후(戰後) 발전국가의 모범으로 추앙받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켜켜이 쌓인 부조리와 폐단이 결국 오늘의 적폐(積弊)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 대표는 이들 네 가지 가치에 더하거나 뺄 게 있다고 보는지, 그게 궁금하다. 정치전문기자인 성한용 한겨레신문 선임기자는 이 대표를 “2003년 초선 이래 세대통합, 이념통합, 지역통합을 주장해온 중도나 중도보수에 가까운 정치인”으로 분류한다. 그는 이 대표가 사면을 통해 “자신의 본래 정체성인 ‘통합’의 가치를 정면에 내세우고 ‘이낙연류’의 정치를 시작했다는 점은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한겨레 1월 10일). 그렇다면 더더욱 답해야 한다. 이 대표는 어떤 가치들을 우리 사회가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로 보는가. 국민 다수가 납득할 만한 답을 주지 못한다면 그의 통합론은 일각의 인식대로 레토릭(修辭)이거나 지지율 하락에서 벗어나보려는 방편에 불과할 수도 있다. 국민통합과 직결되는 건 역시 양극화 문제다. 소수가 부(富)를 비롯한 제반 가치들을 독점하고 있는 사회에선 통합이 쉽지 않다. 정부의 개입이 불가피하다면 어느 수준에서 개입이 이뤄져야 하는지,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 이 대표는 우리 실정에 맞게 시장과 국가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서 제시하고, 그 불가피성을 국민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테크노크라트 출신의 한 전직 고위관리는 필자에게 “균등과 불균등이 공존하는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했다. 경제와 사회의 역동성은 불균등에서 나오고, 통합과 안정의 동력은 균등에서 나온다는 취지였다. ‘토착왜구’ 발언, 누군가는 사과해야 법치와 행태의 영역에서도 국민통합은 이뤄져야 한다. 통합은 공정과 정의의 토대 위에서 세워져야 한다. 그걸 가능케 하는 게 법치다. 지난 4년간 집권세력이 보여준 숱한 내로남불 시비는 법치의 존재에 심각한 의문을 갖게 한 게 사실이다. 추미애 법무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 간 쟁송(爭訟)이 단적인 예다. 국민통합의 안전판이 되어야 할 법치가 통합을 훼손한 꼴이 됐다. 내편이 아니라는 이유로 절반의 국민을 배제하거나, 심지어는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 그런 행태도 즉각 멈췄으면 한다. 국민이 왜 갑자기 ‘토착왜구’가 되어야 하는가. 문 대통령과 추종자들에겐 그게 ‘양념’이었는지 몰라도 다수 국민은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역대 어떤 정권도 자국민(自國民)에게 그런 패륜의 언사를 쓴 적이 없다. 이에 대해서도 분명한 사과가 있어야 한다. 국민의 상처를 씻어주고 이를 통해 국가의 기본가치에 대한 공통된 믿음을 회복하게 하는 게 국민통합이다. 그럼으로써 불필요한 갈등과 분열은 줄이고, 코로나 사태 이후 밀어닥칠 안팎의 새로운 도전에 대비해야 한다. 이 대표는 과연 그럴 의지와 용기가 있는가. 국민이 묻고 있다. 단언컨대 지금과 같아서는 우리에게 미래는 없어 보인다. 누가 정권을 잡든…. 2021-01-15 04: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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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 찢은 정치, 붙인 '트롯' [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교수 ] [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겨울밤, 잘 익은 홍시를 보면 누군들 부모님 생각이 나지 않으랴. ‘반중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유자 아니라도 품은 직도 하다마는/품어가 반길 이 없으니 글로 설워하노라’. 고교시절 외었던 박인로(朴仁老 1561~1642)의 조홍시가(早紅柹歌)도 떠오를 터. 문득 나훈아의 ‘홍시’도 듣고 싶어질 게다.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 생각이 난다/…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겠다던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 코로나만 아니면 노래방으로 달려갔을 텐데…. 힘들었던 한 해를 그냥 보낼 수야 있나. 트로트 한 가락에라도 실어 보내야지. 그게 우리 시대, 세밑의 습속(習俗)이자 예의가 아닌가. 꺾어라, 그렇게 2020 트로트의 해가 저문다. 사람들은 왜 트로트에 끌릴까. 음악평론가 김철웅(전 경향신문 논설실장)은 2015년 트로트의 부활을 예견했던 것 같다. 그는 ‘노래가 위로다’라는 저서에서 “트로트는 한국사회의 음악적 집단체험이자 원체험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이게 잠재돼 있다가 때가 되면 표출되는 것인데, 이를 흔히 ‘취향변화’라고 하지만, “취향변화는 원체험과 친숙해지는 것으로 고리타분해지는 게 아니다”고 했다. 그는 가수 한영애의 입을 빌려 트로트가 좋은 이유 세 가지를 들었다. “노랫말이 좋아 들으면 경건해지고, 노래를 통해서 슬픔을 이겨내려는 감성이 좋으며, 감정을 필터링해서 다음 감정을 드러내는 굉장히 정교하고 정갈한 노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요는 한 시대의 시대상을 반영한다. 그래서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몇 개의 단락으로 나누고, 각 단락마다 유행했던 가요들을 통해 그 시대의 특성을 짚어내려 한다. 예컨대 일제 강점기에는 나라 잃은 설움을 주제로 한 가요(황성 옛터, 번지 없는 주막)가 많았고, 박정희 전두환 시절에는 권위주의 정권에 저항하는 노래(아침이슬, 임을 위한 행진곡)들이 인기를 누렸다는 식이다. “시대가 노래를 낳았다”는 것인데, “노래가 시대를 낳은” 측면도 물론 있을 것이다. 1980년대의 저항가요들이 그런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시대’와 ‘가요’의 교호(交互)작용으로 보는 게 더 적실성이 있다. 트로트의 시대적, 정치사회적 함의 대중문화평론가 이영미는 젊어서 포크와 록을 좋아했고, 트로트는 아예 경멸했던 ‘청년문화’세대가 중년이 돼 트로트에 빠지는 이유를 “현실의 삶에 대한 굴복” 탓으로 봤다.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했건만 나이 들어 결혼하고, 애 낳고, 버거운 삶의 무게로 비틀거릴 때, 무력감 속에서 트로트에 기대게 된다는 것이다.(이영미, ‘세시봉, 서태지와 트로트를 부르다’, 2011년) 그가 말하는 굴복은 순응, 또는 동화(同化)쯤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의 고백이다. “(젊어서) 나는 송창식과 양희은을 좋아하면서도 TV에 나오는 남진이나 나훈아의 노래에는 그 유치함과 천박함에 몸을 떨 정도였다.…그러나 모든 음악양식을 불편부당하게 받아들이려고 십수년 노력한 결과, 이제는 트로트에 감동하고 눈물 흘릴 정도가 됐다.”(‘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 2002년, 김철웅의 책에서 재인용) 가요를 사회과학 조사방법론의 일환인 내용분석(content analysis) 기법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노랫말(가사)에 어떤 말(단어)이 가장 빈번하게 쓰였는가를 조사해서, 해당 가요의 특성을 파악하고, 그런 가요가 나온 시대적 배경을 유추하는 것이다. 김용학 교수(연세대 사회학)는 2015년 내용분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학의 ‘연결망 분석기법’을 이용해 대중가요를 분석해 눈길을 끌었다. 1960년대, 1980년대, 2000년대 별로 각각 대중가요를 100곡씩을 골라 노랫말에 어떤 단어들이 자주 등장하며, 이 단어들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분석한 것이다. (김용학, ‘한국대중가요의 의미 연결망’, 2015년) 결론이 흥미롭다. 시대가 변해도 (가요에서) 항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핵심어는 단연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랑을 중심으로 마음, 가슴, 말, 눈물 등이 등장하며 사랑을 애틋하고 아픈 마음의 상태로 묘사하는 것이 시대를 관통하는 공통점”이라는 것. 60년대에는 고향이라는 단어가 빈번히 등장하여 전쟁과 피난, 도시화 등으로 인한 실향(失鄕)의 아픔과 연민이 표현되지만 80년대 이후에는 실향의 정서가 사라지고, 2000년대에는 ‘힘’내라는 표현이 부상하며, ‘술’에 취한 상태나 술을 마시는 장면을 노래하는 횟수가 급증한다고 했다. 이는 아무래도 90년대 후반의 IMF 위기와 2000년대 초반의 금융위기가 영향을 미친 탓으로 보인다. 공감은 기억의 공유(共有)에서 나온다 이런 흐름은 2020 트로트 열풍 속에서도 어떻게 변했을까. 트로트 오디션 프로의 기획자나 참가자들이라면 한번쯤 톺아봐야 할 듯싶다. 당장 선곡(選曲)과 경연에 도움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트로트의 호소력은 역시 공감(共感)에 있다. 공감은 감정이입(empathy), 곧 노래를 듣는 사람이 부르는 사람의 처지와 정서를 자신의 그것으로 받아들일 때 생긴다. 트로트만큼 감정이입이 분명히 드러나는 경우도 없다. 감정이입은 기억의 공유(共有)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공통의 기억들이 있기에 공감하는 것이다. 일제 침탈, 분단, 전쟁, 이산(離散), 가난, 독재, 발전,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좌절과 성취의 시간을 함께한 기억들이 새록새록 솟아나기에 눈물이 난다. 트로트는 기억-공감-눈물을 이어주는 매개체인 셈이다. 나는 정치가 갈라놓은 한국사회를 트로트가 붙였다고 생각한다. 기억의 공유면적을 넓힘으로써 말이다. 정치가 할 일을 트로트가 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정치란 적(敵)은 줄이고 친구는 늘려가는 것이라고들 한다. ‘국민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국민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공감의 폭을 부단히 넓혀가라는 얘기다. 이 정권이 과연 그러한가. 기억의 폭을 의도적으로 좁힘으로써 국민의 절반 이상을 적으로 돌리지나 않는지 의문일 때가 많다. 그래야 20년 집권이 가능하다고 믿는 걸까. 기억을 왜곡해 국민을 나누는 정치는 트로트만도 못한 정치다.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하는 것들의 소중함 한국에 트로트풍의 노래가 들어온 것은 1920년대 후반으로 알려져 있다. 1916년 4월 24일 단성사에서 신파극단 ‘예성좌’가 일본의 번안곡 ‘카츄사의 노래’를 부른 게 최초의 대중가요였다는 설도 있다. 트로트 100년 역사에는 우리 삶의 흔적들이 그대로 녹아있다. 우리는 공유하고 공감할 게 너무 많은 민족이다. 물론 어찌 좋은 기억만 있겠는가. 나쁜 기억도 슬픈 기억도 있게 마련이다. 그 모든 기억들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 그게 우리의 정체성이다. 정치의 궁극적 목표는 국민 통합과 화합에 있다. 위정자라면, 지도자라면, ‘다름’을 강조하기보다는 ‘같음’의 소중함을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트로트에서 그걸 느끼듯이 말이다. 그래야 지긋지긋한 반목과 대립의 시간을 끝낼 수 있다. 특정된 기억만이 기억은 아니다. 미국의 시사주간 타임(TIME‧12월 21일-28일자)은 올해의 인물로 조 바이든 대통령당선자와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당선자를 선정했다. 선정 이유는 “미국을 바꾸기 위해서, 분열(division)의 분노보다 공감(empathy)의 힘이 더 위대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해리스의 소감이 가슴에 울림을 준다. “당신이 어떤 인종이든 어떤 민족이든, 당신의 할머니가 무슨 언어를 썼든, 우리들의 절대 다수는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보다 하나가 되게 하는 것들을 더 많이 공유하고 있음을 알고 앞으로 나아갑시다.”(let’s move forward knowing that the vast majority of us have more in common than what separates us.) 2020-12-28 02:5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