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논설고문
leejaeho6424@gmail.com
- 아주경제 초빙논설위원
- 前 동아일보 정치부장, 논설실장
- 前 관훈클럽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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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예측 불허' 반도체 전쟁 …尹대통령 '가치외교' 결실 보여줄 때 미-중 반도체 전쟁과 ‘가치외교’ 미-중 반도체 전쟁이 격화되고 있다. 그 사이에 낀 한국도 입장이 난처해졌다. 윤석열 정부의 ‘가치외교’ 논쟁도 재연되는 느낌이다. 가치외교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해 보인다. 중국은 지난달 21일 미국 마이크론사의 반도체에 대해 보안심사 불합격을 이유로 구매 중단조치를 내렸다. 작년 10월 미국이 삼성, SK하이닉스 등 외국 기업들의 첨단 반도체장비 대(對) 중국 수출을 통제하겠다고 한 데 대한 보복 성격이 짙다. 이에 미국은 마이크론사 제재로 초래될 중국의 반도체 부족량을 한국 기업들이 메워주지 말라고 요청(압박)하고 나섰다. 세계 반도체시장은 삼성, SK하이닉스, 마이크론 3사가 장악하고 있다. D램을 기준으로 시장 점유율은 삼성 43%, SK하이닉스 35%, 마이크론 15%다. 마이크론이 중국시장에서 퇴출되면 중국은 반도체 공급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미국은 그 공백을 한국기업들이 나서서 메꾸지 말라는 것이다. 한미 동맹관계에 비춰 우리로선 미국의 이런 요청을 외면하기 어려우나, 중국과의 관계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삼성과 SK하이닉스는 각각 중국에 33조, 35조원을 투자했다.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면 우리 기업이 입게 될 피해도 크다. 시안(西安)에 반도체 공장이 있는 삼성부터 대규모 투자가 유보되고 제품 업그레이드 계획에도 제동이 걸리게 된다. 최악의 경우 중국에서 ‘철수’하는 방안까지도 검토해야 할지 모른다. 벌써 중국 근무 인력의 일부를 한국으로 휴가 보냈다는 얘기도 들린다. 삼성은 원래 중국에 더 투자할 생각이었고, 중국도 이를 반겼다고 한다. 하지만 모두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한국, 중국의 반도체 부족분 메우지 말라” 미국은 작년 10월 외국 기업들이 미국의 첨단 반도체 장비와 기술을 중국에 들일 경우 미 상무부의 별도 허가(수출통제 면제조치)를 받도록 하면서도, 삼성과 SK하이닉스에 대해서는 이를 1년 간 유예해줬다. 유예기간은 오는 10월로 끝난다. 미국이 다시 유예해줄 것인가? VOA(미국의 소리 방송)은 지난달 23일 “한-미 간 지속적인 협의가 이뤄지고 있는 걸로 관측된다.”고 보도했다. 재(再)유예 여부가 반도체 전쟁의 한 고비가 될 판이다. 미-중 반도체 전쟁은 미국의 기술 패권에 도전하는 중국과 이를 어떻게든 막거나 늦춰보려는 미국 간 싸움이다. 거기에다 2024년 대선에서 재선을 노리는 바이든 대통령의 국내정치적 계산까지 더해져 더 첨예한 양상을 띠고 있다. 지난달 27일 미국 주도로 한국 일본 호주 인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14개국이 디트로이트에 모여 IPEF(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 공급망 협정을 타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로선 ‘재유예’를 받고, 향후 예상되는 장애까지도 제거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야 한다. 그럼에도 아직 겉으로 드러난 논의나 움직임은 없다. 미국의 일부 정책 당국자들 사이에서 중국과의 관계가 탈동조화(decoupling‧관계단절)에서 디리스킹(de-risking), 곧 ‘위험 줄이기’로 전환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발언들이 나오고 있긴 하다. 바이든 대통령도 지난달 21일 G7 정상회의 폐막 후 “미중관계가 조만간 해빙(thaw)되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미 하원의 외교위원장 마이클 매콜과 미-중 전략경쟁특위 마이크 갤러거 위원장은 2일 미 상무부에 보낸 서한에서 삼성과 SK하이닉스가 마이크론 공백을 메우게 하지마라고 거듭 촉구했다. 공화당의 대표적인 대중 강경파인 두 사람은 “우리는 미국의 동맹들과 함께 중국의 경제적 강압에 단호히 반격해야 할 때”라면서 이같이 촉구했다. 이들은 삼성과 SK하이닉스가 받고 있는 ‘수출통제 유예조치’까지 거론하고 나섰다. “두 기업이 예외(유예)를 적용받는 것은 중국 정부에 위험한 신호를 보내고 한국과의 동맹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美 안보와 경제에 기여, 代價는? 우리 정부의 입장은 “기업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장영진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은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나 글로벌 사업을 하니 양쪽을 감안해서 잘 판단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ZDNet Korea 5월25일) 하지만 이제라도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는 없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우리 사정이 그만큼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 지난달 우리의 무역수지는 21억 달러 적자였다. 벌써 15개월째다. 최대 수출품목인 반도체 수출 부진 탓이 결정적이다. 반도체 수출액은 작년 같은 달보다 36.2%나 줄었고, 수출 증가율은 10개월째 마이너스다. 무엇보다 중국을 대체할만한 시장을 못 찾고 있는 게 문제다. 큰 틀에서 보면 우리가 움직일 공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윤석열 정부는 안보와 동맹은 물론 경제와 산업의 관점에서도 한미관계 개선에 나름 최선을 다했고 바이든 행정부도 그 덕을 봤기 때문이다. 윤 정부는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에 참여하고, 한일관계를 정상화함으로써 아‧태지역에서 중국을 견제하고 안정과 평화, 그리고 항행의 자유를 확보하려는 바이든 정부의 동아시아전략 유지에 크게 도움을 줬다. 특히 한일관계 정상화는 미국의 고민거리 중의 하나였던 동북아에서의 안보우려를 크게 덜어준 것이었다. 윤 정부가 일제 강제징용 배상문제로 경색됐던 한일관계를 정상화했을 때 “최대의 수혜자는 바이든”이라는 말도 나왔다. 2022년 한미정상회담 때는 삼성 현대 등 한국의 대표적 기업들이 앞을 다퉈 미국에 대규모 공장건설과 투자를 약속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윤 대통령은 “미국에 편중됐다”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문재인 정권 때 왼쪽으로 흘렀던 외교의 錘(추)가 오른 쪽으로 되돌아오는 과정에서 나올 수 있는 지적이긴 했다. 문제는 ‘대미 편중’이 ‘가치외교’란 개념과 연결되면서 윤 정부의 외교가 ‘가치외교’로 규정되고, 야당을 비롯한 반대 세력의 과도한 비판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념외교’ 공격, 초점이 안 맞는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지난 4월2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가치외교, 멋있게 보일지는 모르지만…’이란 제목의 글을 올렸다. 윤 대통령이 워싱턴 한미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하는 날이었다. 이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경쟁하는 강대국에 둘러싸인 나라의 외교는 철저하게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여야 한다. 한쪽에 기대고 다른 쪽과 적대하면 경제는 폭망, 안보는 위기라는 최악의 상황으로 갈 위험이 크다. 친구가 아니면 적(敵)이라는 이분법으로 외교전에 나서서는 안 된다. 국익이 우선이어야 한다.” 이 대표의 이런 주장은 지나친 감이 있다. 지구상의 어떤 나라도 국익 우선의 실용외교를 하지 않는 나라가 없다. 한국은 특히 그렇다. 한국은 구조적으로 4대 강국에 둘러싸인 채 살아왔기에 편중 외교의 위험성과 한계를 본능적으로 안다. 비록 미국과 소련의 양극적 냉전체제 아래서 미국 중심의 진영에 속하긴 했어도, 기회가 오자 어떤 나라보다도 먼저 북방정책을 통해 외교의 지평을 넓힌 나라가 한국이다. 우리 외교관들에게 “당신은 친구가 아니면 적(敵)이라는 이분법으로 외교전에 나선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웃을 것이다. 어떤 외교관도, 그가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외교관이라면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윤석열 정부의 외교가 ‘가치외교’라면 그것은 이재명 대표가 말한 다분히 상식적인 것들을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서 국익은 물론 인류의 평화와 안정을 도모하는 한 단계 높은 외교를 하자는 것일 게다. 윤 대통령은 대선 때부터 달라진 한국의 위상에 맞게 우리 외교도 달라져야 한다고 말해왔다. 물론 그렇다고 윤 대통령이 외교를 잘하고 있느냐는 별개다. 가치외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걸 통해서 우리가 어떤 실익(實益)을 얻을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지적도 백번 옳다. 그러나 적어도 ‘가치외교’를 경직되고 교조적인 ‘이념외교’ 쯤으로 치환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논쟁은 가치중립적이어야 하나 방법이 항상 결과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한-중-일, 한-미-일 협의체 활용하라 ‘가치외교’는 굳이 그 연원을 따지자면 국제정치학에서의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간의 경합에 닿아있다. 크게 보면 ‘가치외교’는 이상주의를 그 뿌리로 하고 있다. 전후(戰後)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대결, 곧 1차 대논쟁은 이상주의의 패배로 귀결됐다는 것이 중론이다. 진영(陣營)을 막론하고 전후 외교의 영역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은 모두 현실주의에 바탕을 둔 외교였다. 윤 정부가 이점을 잊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서, 보편적 이상과 규범으로 자유민주주의와 법치를 강조한 것은 바른 방향이다. 그걸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국력과 리더십이 있느냐가 문제이지 그 자체가 부정되고 비판받을 일은 아닌 것이다. 얘기가 옆으로 흘렀지만 우리로선 어떻게든 ‘수출통제 면제’ 재유예를 받아야 한다. 외교부,산업통상자원부 등 관련부처는 물론 민간단체들까지도 나서야 한다. 문제의 핵심은 반도체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예측가능성을 높이는 데 있다. 그게 관련국들 모두를 위하는 길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주도해야 할 일이나 대선 때문에 어렵다면 누군가가 대신 해야 한다. 필자는 반도체 강국, 한국의 대통령이 그 일을 했으면 한다. 다자적 국제 논의구조를 만들자고 제안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침 올해 한국이 한-중-일 3국 협력체 의장국이다. 여기에다 지난해 한 미 일 3국 정상이 구성키로 합의한 한-미-일 3국 협의체를 붙인다면 논의에 탄력이 붙을 수도 있다. ‘대미 편중’ 논란에서 벗어나 진정한 ‘가치외교’의 힘을 보여줄 때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2023-06-07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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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균형점 찾아가는 대한민국 외교 윤 대통령과 한미정상 외교 80년대, 반미감정이 절정에 달했을 때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지금 용산에 미군이 아닌 중국군, 또는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어도 이처럼 거친 시위가 가능할까, 아마 어려울 거다, 상대가 미국이나 되니까 가능한 거라고. ‘미국이나 되니까’라는 말 속에는 미국에 대한 다양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적어도 관용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적 가치를 외면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담겨있었다. 우여곡절이 있긴 했어도 그런 믿음 위에서 70년 한·미동맹은 유지돼왔고, 현대사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운 성공한 동맹이 됐다.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 성과를 놓고 평이 갈리고 있다. 한쪽에선 “역대 최고의 성과를 냈다”고 말하지만 민주당을 비롯한 좌파진영에선 “미국 편에 서겠다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한반도의 긴장과 전쟁위험만 키웠다”고 비판한다. 대통령 스스로 미-중 신(新)냉전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갔다는 것이다. 어느 쪽 주장이 더 적실성이 있을까. 동북아는 이미 북방 3각(중‧러‧북한)과 남방 3각(미‧일‧한국)의 경쟁(대결) 구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남방 3각 열차에 올라타기로 결심한 것 같다. 모호성(ambiguity)의 전략에서 명료성(clarity)의 전략으로 바뀌었다고나 할까.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비춰 바른 선택이라고 본다. 그렇다고 북방 3각과의 관계를 대결 모드로만 가겠다는 건 물론 아닐 것이다. 윤 대통령이 이 고난도의 행보를 어떻게 이어갈지 주목된다. 다시 ‘죽창가’를 불러서야 윤 대통령은 일제 강제징용 문제를 ‘제3자 변제’로 풀겠다고 선언함으로써 한·일관계를 단숨에 정상화시켰고, 그 동력으로 한·미동맹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으며, 이를 통해 한‧미‧일 3각 협력체제가 재가동되도록 했다. 역대 지도자 중 이렇게 발 빠르게 상황에 대응하고, 주도한 사람은 드물다. 과거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을 떠올리게 한다. 좌(左)로 흘렀던 대한민국 외교의 시계가 급속히 균형점을 향해 돌아오고 있다. 윤 대통령은 방미 중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 우대국)에 복귀시키고, 아프리카 수단 민간인 구출 작전에서도 서로 협력한 데 대해 “한·일관계가 변해가는 것으로 앞으로도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지지 여부와 관계없이 그런 변화는 살려나가야 한다. ‘죽창가 정서’로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예정보다 앞당겨 며칠 뒤 방한한다. 19∽21일 히로시마에서 열릴 주요 7국(G7) 및 한‧미‧일 3국간 정상회의를 앞두고 우리 측과 의견을 조율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실현 가능성은 낮지만 일본은 오래전부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기를 희망해왔다. 한국은 요즘 들어 부쩍 G7의 추가 회원국(G8) 후보로 추천되어야 한다는 얘기를 듣는다. 리셋(reset)될 한·일관계의 미래가 궁금하다. 한미동맹이 최상의 克日, 用日策 엄밀히 말하면 ‘기회’는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먼저 있었다. 2015년 박근혜 정권 때 타결된 일본군 위안부 합의안’은 양측의 입장이 비교적 충실히 절충, 반영된 안으로 평가받았다.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고 했고, 한국에다 화해치유재단을 설립하기 위해 돈도 내놓았다. 이를 뒤집어버린 게 문 정권이다. ‘졸속’을 이유로 문 대통령은 합의이행 중단을 선언했다. 이 대목이 민주당으로선 가장 아플 것이다. 판을 바꾸고 키울 드문 기회를 걷어 스스로 차버린 셈이다. 지금이라도 진지한 성찰이 필요해 보인다. 윤 대통령의 방미 결과를 폄훼하고 조롱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을 때가 아니다. 흔히 ‘동맹외교의 시대’라고 한다. 개별국가 차원을 넘어, 동맹을 만들고, 동맹을 통해 안전도 보장받고, 공통의 이익도 추구한다는 뜻이다. 미소(美蘇) 냉전이 끝나고, 1991년 바르샤바조약기구가 해체되면서 체코 폴란드 헝가리 등 동구권 국가들이 대거 NATO에 가입한 게 이를 웅변한다. 심지어는 소련의 일부였던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까지도 NATO 회원국이 됐다. 미·중 신냉전 시대, 불안한 경제와 공급망 재편 속에서 모든 나라는 하나라도 더 내 편을 만들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 한·일관계도 동맹외교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지난 3월 한·일정상회담 규탄대회에서 윤 대통령을 겨냥해 “강제동원 변제, 지소미아(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원상복귀 등을 통해 한·일 군사협력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면서 “자위대가 다시 한반도에 진주하지 않을까 두렵다”고 했다. 우국충정에서 한 말이겠지만 낡고 상투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대표는 자신이 그렇게도 걱정하는 자위대를 제어해주는 게 미국을 고리로 한 한‧미‧일 협력(동맹) 체제임을 잠시 망각한 것 같다. 한·미동맹이 최상의 극일(克日), 용일(用日)의 방책이다. ‘빈손외교’ 주장의 자가당착 한·미정상회담에 대한 민주당 인사들의 비난과 조롱, 냉소는 과도한 감이 있다. 이 대표는 “아낌없이 퍼주는 글로벌 호갱 외교”라고 했다. ‘호갱’은 어리숙해 속이기 쉬운 고객을 지칭하는 속어다. 대통령이 화동(花童)의 볼에 입 맞춘 걸 두고 “성적 학대”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국빈 만찬 노래에 대해선 “저 정도에 기립박수면 제가 했으면 아마 (참석자들이) 기절했을 것”이라고 한 의원도 있었다. 그는 이른바 공공외교, 감성외교의 시각으로 이를 볼 안목은 없었던 듯하다. 윤 대통령 노래의 주 고객은 미국 국민과 세계였다. 민주당은 이번 한·미정상 외교를 ‘빈손외교’라고 한다. 이런 평가는 북핵문제에 관한 한 자가당착이다. ‘빈손외교’라 함은 실질적인 핵 억지 강화책을 얻어내지 못했다는 비판일 것이다. 만약 NATO식 핵 공유나 전술핵 배치를 확약 받았다면 ‘빈손외교’라는 말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민주당의 원조 386들은 “북이 핵을 개발하면 그 핵이 결국엔 우리 것이 되니 나쁘지 않다”고 했던 사람들이다. “김정일, 김정은이 설마 같은 민족에게 핵을 쏘겠느냐”고도 했다. 그런 민주당이 윤 정부가 핵 억지 강화에 실패해 ‘빈손외교’를 했다고 질책하니 앞뒤가 안 맞는다. 386들의 논리대로라면 오히려 ‘빈손외교’에 안도해야 하는 것 아닌가. 민주당은 북핵 문제에 관한 한 체계적인 입장정리가 안 돼 있는 듯하다. 국제정치학자 이상우(85) 교수는 저서 <21세기 국제환경과 대한민국의 생존전략>(2020)에서 미-중 신냉전체제가 지속되면 한국은 앞으로도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계속 강화해 가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한국에게 한미 군사동맹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며, 현재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포괄적 동맹으로, 미국-일본-호주-인도의 4국 협력체제를 한국이 포함된 5국 협력체제로 발전시켜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박정희 정권 때부터 역대 정권의 외교‧안보‧국방정책의 자문에 응해온 이 분야의 원로 대가다. 서강대 교수, 한림대 총장, 국가안보총괄점검회의 의장, 국방선진화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물론 대표적인 보수우파다. 중립과 고립 그의 말은 이어진다. “한국은 미-중 냉전에서 어느 편도 들지 말고 중립을 지키면서 등거리 외교를 펴는 게 자주권을 지키고 안전을 확보하는 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잘못된 생각이다. 자유민주주의를 국시로 하는 한국이 취할 전략이 못 된다. 오히려 미·중 양국과 멀어지는 고립을 자초하는 전략이다.” 그는 한·일관계에 대해서도 지금과 같은 사실상의 한‧미‧일 3국 동맹체제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중국의 팽창을 억지하는 미국의 전략은 미-일 동맹과 한-미 동맹이라는 두 개의 기둥 위에 서있다”면서 “정치적인 이유로 한-일 동맹이 어렵기 때문에 한-일 준동맹 상태로 미국과 한-미-일 3국 동맹체제를 형성했고, 이를 통해 구(舊)냉전 시대엔 소련의 압박을 막아냈고, 지금은 중국의 군사압력에 맞서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우 교수의 주장은 윤 대통령의 대일, 대미, 대동북아 전략과 다르지 않다. 보수 우파여서가 아니라 한반도와 동북아의 안정과 평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게 기본이고, 논의의 출발점임을 알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의 미-중 사이에서의 명료화 전략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렇다고 두 강대국 사이를 민첩하게 헤집고 다님으로써 유사시 피해를 최소화한다는 이른바 ‘헤징(hedging)’까지도 포기하겠냐마는 명료화를 통해 글로벌 중추국가로서 원칙과 명분은 물론 국익(國益)까지도 챙기겠다는 것이니 우리 외교관들은 어깨가 한층 무거워졌다. 방향은 분명해졌고, 남은 것은 모두의 역량과 열(熱)과 성의(誠意)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2023-05-04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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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尹의 '한.일 외교 이니셔티브'...'국제체제론' 관점에서 보니 ‘국제’가 없는 대일외교 비판 ‘일제 강제동원 제3자 변제 결정’ 등 윤석열 대통령의 한·일 관계 정상화 노력을 필자는 ‘윤석열 이니셔티브(Initiative)'라고 부르고 싶다. ‘굴욕외교’라는 일각의 비판이 있지만 드물게 주도적인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우리 외교가 독자적으로 뭘 해본 적은 거의 없다. 크고 작은 결정은 모두 미국이 내렸거나 미국의 묵인과 협조 아래 이뤄졌다. 한국은 신생 독립국으로서 국력도 보잘것없었고 미·소(美蘇) 양극화에 기반한 엄혹한 냉전 체제 속에서 발언권을 갖기도 어려웠다.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전까지 우리에게 외교란 유엔에서 남북 간 표(票) 대결하는 게 사실상 전부였다. 한국이 제 목소리를 낸 것은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의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과 유엔 가입, 김대중 정권의 남북 정상회담 정도였다.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관철하기 위해 이 대통령이 단행한 반공포로 석방은 약소국 독자외교의 전설로 남아 있다. ‘윤석열 이니셔티브’를 이런 역사의 변곡점들과 같은 레벨에 놓을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겠지만 한·일 관계의 틀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리라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우리 스스로가 그런 인식과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비판과 비난만이 능사가 아니다. ‘윤석열 이니셔티브’와 GPS ‘글로벌 중추국가(Global Pivotal State)'로 우뚝 서겠다는 것은 윤 대통령의 핵심 대선 공약이다. 흔히 ‘GPS’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글로벌 중추국가는 ‘한반도의 지리적 경계를 넘어 국제 협력과 질서에 선도적 역할을 하는 국가’를 뜻한다. 그런 국가가 되려면 우선 이웃 국가와의 관계부터 다져야 하는 게 상식이다. 집 뒷마당이 늘 소란스럽고 불안해서야 GPS는 물론 무슨 일인들 마음 놓고 할 수 있겠는가. 특별히 새로울 것도 없다. 그동안 한·일 양국 지식인들부터가 입만 열면 “과거사 문제 정리를 통한 양국 관계 개선이 동북아 평화를 위한 첫걸음”이라고 했다. 소위 ‘리버럴’을 자임하는 진보적 인사들일수록 더 그랬다. 한·일 관계를 주제로 한 어떤 토론 자리에서도 결론은 늘 같았다. ‘윤석열 이니셔티브’는 이런 소망과 당위에 기초해 한·일 선린·우호관계를 정립하고 동북아 평화와 번영을 함께 추구해 나가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피해자인 우리가 먼저 강제징용 배상에 나설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일 과거사 문제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거의 무차별적으로 공격당하고 있다. 오므라이스 한 그릇에 뭘 팔아? 한·일 관계 속성상 긍정평가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해도 과도하다는 느낌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부터 “일본에 조공을 바치고 화해를 간청하는 항복식 같은 참담한 모습”이었다며 영업사원(윤 대통령)이 나라를 판 격이라고 했다. 또 “오므라이스 한 그릇에 국가 자존심과 피해자 인권, 역사의 정리를 다 맞바꿨다. ··· 한반도가 전쟁의 화약고가 되지 않을까, 자위대가 다시 한반도에 진주하지 않을까 두렵다”고도 했다. 그러나 야당의 누구도 “그렇다면 문제의 대법원 배상 판결이 나온 2018년 이후 4년 동안 문재인 정권은 왜 구경만 했느냐”는 질문에는 명쾌하게 답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비판은 물론 정부가 자초한 면도 있다. 로버트 퍼트넘(하버드)의 양면게임이론(two−level game)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외교란 언제나 상대 국가의 동의와 우리 측의 컨센서스가 함께 충족될 때 소기의 성과를 낸다. 윤석열 정부의 대(對)국민 설득 노력이 좀 더 적극적이고 치밀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기다렸다는 듯이 발표된 일본 초등학교 검정교과서의 역사 왜곡(독도는 일본 고유영토 주장 등)도 사태를 키웠다. 안팎에서 “이게 한·일 정상회담의 결과물이냐” “역시 일본···”이라는 개탄의 목소리가 높다. 복합 경쟁의 시대와 상호의존성의 쇠퇴 국내 대표적 싱크탱크인 아산정책연구원(원장 최강)은 작년 12월 말 ‘2023년 국제정세 전망'이란 연례 보고서를 내놓았다. 주제는 ‘복합경쟁(Complex Competition)'. 국가 간 경쟁이 격화돼 경쟁의 질(質)도, 양상도 그만큼 다층화하고 복잡해졌다는 취지에서다. 과거의 경쟁이 기존 국제 질서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벌이는 경쟁이었다면, 오늘의 경쟁은 미국과 중국 주도로 국제 질서와 체제를 새롭게 재편하려는 경쟁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첨단 과학기술 분야 위주로 중국이 배제된 새 질서를, 중국은 미국 중심의 기존 질서에서 최고가 될 수 없다면 차라리 새로운 세계의 패자(霸者)를 꿈꾸면서 미국을 배제하려 한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국제사회에서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이 쇠퇴하는 것을 우려했다. 상호의존성은 국가 간 과열 경쟁과 갈등 심화를 막아주는 안전판 같은 것이다. 전후(戰後) 국제사회가 전례 없이 긴 평화의 시대를 누려온 것도 상호의존성의 증가 때문이다. 국가들이 서로 더 많이 의존하게 되면서 전쟁은 줄고 공존·공영의 기회는 늘었던 것이다. 국제정치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이상주의 또는 제도주의의 요체도 상호의존성에 있다. 국제정치체제론 관점에서도 보자 상호의존성이 후퇴한 자리는 절연(絶緣·insulation) 또는 탈동조화(decoupling)가 채우게 된다. 한 예로 반도체, 배터리, 희토류, 등 미래 기술·소재 관련 분야에서 공급망 재편·분리 시도도 그래서 나왔다는 것. 경쟁의 과열 속에 불신과 불안도 그만큼 커졌기 때문이다. 이제 세계는 △인도‧태평양 지역이 분쟁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핵확산 금지체제가 불안정해지며 △군비경쟁이 가속화하고 △중근동에 대한 중·러의 틈새 공략이 시도되고 △경제 리스크가 커지고 기술 경쟁과 인권 논쟁도 심화될 것으로 보고서는 전망했다. 복합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각 분야에서 다양한 전략, 전술, 해법들이 논의되고 있을 터여서 크게 걱정은 안 한다.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관대했던 개발 시대 이래 관련 대책이나 대안들도 넘쳐나지 않았나. 나는 진부하지만 국제정치체제론(international political system) 관점에서 몇 마디를 보태고 싶을 뿐이다. 국제정치체제론은 일부 비판적 시각도 있지만 여전히 국제정치를 분석하는 가장 명쾌하고 유용한 틀이다. 위험과 기회가 공존할 양극적-다극체제 복합 경쟁이 우리에게 던지는 과제의 핵심은 외교적 재량권의 확대 여부와 선택의 딜레마다. 체제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동북아는 미·중에 의한 양극적–다극체제(Bi-Multipolar system)로 이미 접어들었다는 게 내 판단이다. 미·중을 두 개의 극(極)으로 해서 그 주위에 일본, 한국 등 중견 국가들이 포진한 체제 말이다. 일찍이 양극체제가 다극체제보다 더 안정적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석학 케네스 왈츠(Kenneth Waltz·1924∽2013년)였다. 구조적 현실주의자인 그는 강력한 두 개의 극(極) 국가에 의해 여타 국가들에 대한 통제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왈츠의 이런 주장에 대해 로즈크랜스(Richard Rosecrance)는 “양극체제는 기본적으로 제로섬 체제여서 더 위험하다”고 반박하고, 이 두 체제가 결합된 양극적-다극체제가 더 안정적이라고 했다. 이 체제에선 두 개의 극(極)국가-예컨대 미국과 중국-가 체제 밖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조정하는 조정자 역할을 하고, 그 외 다수 국가들은 두 극국가 사이에서 갈등을 중재·완화하는 완충자 역할을 한다. 양극체제와 다극체제의 장점을 결합한 체제다. 나는 지금의 동북아 체제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본다. 이 체제에선 엄격한 양극체제보다 상대적으로 중견 국가들의 재량권이 커진다. 기회와 위험이 공존한다는 얘기다. (로즈크랜스가 란 논문에서 이런 주장을 한 게 1966년이다) 야당 대표, 좀 더 사려 깊은 비판을 다음은 선택의 딜레마다. 두 강대국, 두 진영 가운데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피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얘기다. 예컨대 중국은 그동안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이른바 안미경중(安美經中)에 대해 비교적 관대했지만 미국과 경쟁하는 강도가 세어질수록 더 까다롭게 나올 게 분명하다. 아산정책연구원은 이 딜레마에 대한 대응으로 ‘전략적 명확성(strategic clarity)'을 주문했다. 가치와 체제가 개입되는 지역 및 국제적 쟁점에 대해서는 찬반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게 유리하다는 것이다. 그래야 중장기적으로는 투명성의 강화로 상호 신뢰를 확장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공감한다. 설명이 길어졌지만 어떤 나라의 외교도, 대외정책도 단순한 건 없다. 하물며 한·일 관계에서랴. 그 어려움을 알고, 그 복잡함을 알고 거기에 맞게 비판하고 질책해야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야당 대표가 “오므라이스 한 그릇” 운운하는 식의 비난과 조롱이 얼마나 위험하고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 자리에서 꼭 엘리트 외교와 대중 외교(mass diplomacy)를 거론해야 하나. 이러니까 “이번 비판 속에 정작 국제(國際)는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2023-04-07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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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우리는 새정치 'K-Politics'를 보고 싶다 누가 당대표가 되든 국민의힘 새 지도부의 최우선 과제는 내년 4월 총선에서의 승리일 것이다. 총선에서 이겨서 지금의 여소야대 체제를 바꾸지 않고서는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전 정권에서 임명된 공공기관장 하나 교체할 수 없는 상태가 계속된다면 새 정부의 철학과 정책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남은 임기 내내 야당과 티격태격만 하다가 끝날 수도 있다. 그로 인한 갈등의 심화와 국정 운영의 난맥상과 비효율은 여야(與野) 차원을 떠나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 터이다. 보수 우파의 대표적 정치평론가인 고성국 박사(고성국TV 대표)는 지난달 25일 대구에서 열린 ‘동서미래포럼’ 창립식에서 윤석열 정부의 성공조건으로 공천혁명과 정치쇄신을 들었다. “4월 총선을 계기로 젊고 참신하고 유능한 정치신인을 발굴해 대대적인 공천혁명을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다.(동서미래포럼은 지난 대선 때 영호남 화합운동을 벌였던 인사들이 선거 후 확대·재결성한 모임이다. 고 박사는 특별 연사로 초대됐다.) 내년 4월 총선에 尹 정권 성패 달려 그는 “모두들 ‘윤 정부의 성공을 위해 한 몸을 바치겠다’고 하는데 4월 총선에서 지면 무슨 수로 대통령을 도울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국민의힘과 자유 시민사회단체 및 지식인 그룹 간에 정치개혁 연대를 꾸려서 공천혁명 담론의 선점과 전파를 주도하라”고 했다. 이를 위해서 국민 체감도가 높은 국회의원 특권 전면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다. 공천혁명은 선거 때마다 나오는 얘기지만 이번엔 더 절박하게 다가온다. 나라 안팎으로 사정이 어려운 데다가 정치개혁에 대한 국민의 욕구도 그만큼 커진 탓이다. 공천혁명은 정치의 한 축을 바로 세우는 작업이다. 정치의 요체가 ‘가치의 권위적 배분’을 넘어, 한 시점에, 한 사회에 주어진 문제들을 얼마나 잘 해결할 수 있느냐 하는 능력(적실성)의 문제로 진화한 지 오래지만 요즘 이를 더 절감하게 된다. 공천은 그 첫 단추를 끼우는 작업이다.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좋은 정치는 좋은 공천에서 시작된다. 실패로부터 배운다고 몇 가지 사례를 보자. 21대 총선 참패의 교훈 보수 우파 정당으로서 국민의힘이 공천에서 실패했다고 평가되는 대표적인 총선이 2020년 21대 총선과 2016년 20대 총선이다. 21대 총선에서 국민의힘의 전신인 미래통합당은 득표율 41%로 지역구에서 84석을 얻었다.(비례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의 19석을 합치면 103석. 총 의석수는 300석) 상대인 더불어민주당은 49%로 163석을 차지했다. 충격적인 참패였다. 특히 수도권에선 전체 의석 121석 중 103석을 민주당에 내줬다. 그 패배의 결과로 만들어진 강고한 여대야소 정국 속에서 문재인 정권은 유화(宥和) 일변도의 대북정책, 소득주도 성장, ‘검수완박’ 등을 밀어붙였다. 지난 대선에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승리함으로써 뒤늦게 제동이 걸리긴 했지만 견제받지 않은 권력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공천관리위원장(2020년 1월 17일∽3월 13일)이었던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2021년 3월 <총선 참패와 생각나는 사람들>이란 제목의 책을 냈다. ‘공천고백기’란 부제(副題)가 말해주듯이 공천관리를 책임졌던 사람이 쓴 일종의 참회록이다. 저자가 “나 하나 불쏘시개 되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썼다”고 했듯이 웬만한 용기와 애당심 없이는 쓸 수 없는 책이다. 이런 고백록이 나온 것 자체가 우리 정치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그는 ‘참회록’이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과거의 잘못을 다스려 앞으로 닥칠 우환을 경계한다’는 징비록(懲毖錄)으로 읽혔다.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 특히 보수 우파에겐 가히 필독서다. 좋은 공천, 좋은 정치 그의 패인분석과 대안 제시는 실증적이고 구체적이다. 책에 따르면 당시 공천관리위는 이른바 ‘혁신공천’의 3대 원칙, 곧 △과감한 물갈이(인적쇄신) △구태 청산(계파별 나눠먹기 배제) △청년과 여성 신인 적극 충원을 내걸고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그 결과로 역대 총선에서 보기 힘든 ‘보수통합’을 일궈냈지만, 이게 표로 연결되지 않았다고 했다. 국민에게 ‘보수가 통합됐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는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소회다. “··· 거기에다가 선거의 승패를 가르는 중도층도 끌어오지 못했다. 안정을 희구하면서도 변화에 대한 수용이 강한 중도층을 의식해 변화의 고삐를 끝까지 잡고 갔어야 하나 그러지 못했다. 고삐를 쥐고 전국을 누빌 유력인물(리더)도 없었다. ··· 역대 총선에선 대개 변화의 폭을 크게 움직인 쪽이 승리했다. 17대 탄핵풍의 진원지인 열린우리당, 18대 뉴타운 바람의 한나라당, 19대 경제민주화를 내걸고 변신한 변화의 새누리당 등이 그런 경우였다. ··· 이러는 사이에 코로나(재난) 지원금이 뿌려졌다. 전대미문의 역병 앞에서 민주당은 안정과 신뢰의 탑을 쌓아갔고 우리는 하나씩 무너져갔다. ···” 저자는 대안으로 ‘시스템 공천’을 제안한다. 의정활동이 공천에 직결되어야 하고, 지역관리를 잘하면 공천을 보장해주고, ‘포청천 윤리위’를 상설해 공천도 사전 검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공천관리위는 선거 5개월 전에 구성하고, 공천관리위원회의 독립성도 보장되어야 한다고 했다. 공천자 40%는 매년 의정활동 평가와 당무감사를 통해 미리 정해놓고, 나머지 60%는 공천관리위에서 심사해 확정하는 방안도 제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충분한 시간을 갖고 공천 작업을 심도 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에도 참고가 될 듯싶다. 공천파동 나면 공약은 묻힌다 2016년 제20대 총선을 앞두고 당시 새누리당(국민의 힘)은 들떠 있었다. 야권의 분열로 180석 이상을 얻을 거라는 전망들이 돌았다. 김무성 대표부터 그런 예상을 했다. 결과는 지역구 105석에 비례대표 17석 등 122석에 그쳤다. 123석을 얻은 민주당에 제1당을 내준 참패였다. 오만한 행태와 공천파동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당시의 진박 논쟁과 김무성 대표의 ‘옥새파동’은 지금도 조롱거리다. 이때도 총선백서가 나왔다. 참회록이라기보다는 유권자들과 일문일답하는 형식으로 정리된 백서였다. 그래서 이름도 <국민백서>. 국민이 물었다. 참패의 원인이 뭔가? 당이 답했다. “지지층의 외면을 자초한 공천파동이 가장 큰 원인이다. 지지층에게 지지할 근거를 주기보다는 지지를 철회할 근거를 주었다. ··· 계파 간 극한 대립 상황에서 리더십도 실종됐다. 여권 내 권력 획득과 방어에만 집중하다 보니 공당의 이미지를 상실했다.” 공천에 대한 평가를 구했더니 이런 답이 올라왔다. “민주당보다 못한 느낌이었다. 신선한 인재는 찾아볼 수 없고 구태의연한 현역 중심의 공천, 친박 중심의 공천이 식상했다.” 당도 이를 시인했다. “공천 파동과 집권 여당으로서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밥그릇을 놓고 싸우면서도 계속 지지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착각과 오만이 지지층까지 외면하게 만들었다. ···” 야당에도 타산지석 <국민백서>는 이 대목을 ‘공천파동의 쓰나미, 모든 것을 집어삼키다’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정리했다. “계파 갈등의 조짐은 공천관리위원회(공관위) 구성에서부터 시작됐다. ··· (계파 갈등으로) 얼렁뚱땅 구성된 공관위는 이한구 공관위원장을 비롯해 친박 중심으로 이뤄졌다. 공관위원들의 자질도 대내외적으로 도마에 올랐다. ··· 공천이 계속 지연되면서 당내 모든 조직과 대응능력이 마비되고, 본격적으로 선거준비에 돌입해서도 각각의 과정들이 유기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선거 전략을 진두지휘해야 할 사무총장 등 핵심라인이 공천정국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서 내부조직은 우왕좌왕했다. ··· (이를 포함한) 당내 계파갈등이 연일 언론을 통해 전달되면서 국민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다짐이나 공약은 모두 묻혔다. ···” 유감스럽지만 이게 현실이다. 필자는 이를 보다 생생하게 되살려주고 싶어서 가능한 한 원문을 그대로 인용했다. 마지막 부분, “계파갈등이 연일 전달(보도)되면서 공약은 묻혔다”가 유독 가슴을 친다. 정치현장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부분일 것이다. 민주당에도 타산지적이 될 듯하다. 주변적인 것들이 본질을 밀어내는, 가십(gossip)이 정책을 밀어내는 퇴행적 정치 관행과 보도는 SNS 유튜브 시대에 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4월 총선에 다가갈수록 더 심해질 것이다. 미리 대비하고 준비하는 수밖에 없다. 남아있는 1년여 시간은 결코 길지 않다. 지금 시작해도 늦다. 혁신공천을 통해 4월 총선에서 승리하고, 정치개혁도 이뤄내야 한다.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번 공천은 단순한 공천이 아니라 정치교체를 위한 공천으로 인식해야 한다. 공천혁명으로 정치선진화를 앞당겨 한국 정치의 틀을 바꿔야 한다. 언제까지 ‘4류 정치’라는 오명 속에서 헤맬 것인가. 우리도 우리 정치를 ‘K-정치’라고 부르고 싶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2023-03-08 15:37: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