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논설실장
isomis@ajunews.com
- 아주경제 논설실장
- 이빈섬 시인·빈섬 블로그 (isomis.blog.me)
- 추사에 미치다, 남자현 평전, 미인별곡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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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92)] 죽음을 오해하지 말라 독일 화가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1497~1543)은 '무덤 속의 예수(Christ in the Tomb)'를 그려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죽은 예수는 눈을 뜨고 있고 오른쪽 중지손가락은 펴진 채 바닥에 무엇인가를 쓰려다 만 듯 멈춰있다. 이것은 단순한 그림이지만, 인류 속에 깃든 종교적 상상력을 일거에 깨는 '팩트 폭격'일 수 있다. 관찰자의 시선 앞에 놓인 예수의 주검이라는 피사체는, 신화로 덧칠해온 이미지와 해석을 제한하면서 리얼리즘이 지닌 명료한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16세기 독일 화가 한스 홀바인 '무덤 속의 예수'.]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흘리셨습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는 죽기 직전에 성가대 지휘를 하는 친구 안톤 슈톨을 위해 'Ave Verum Corpus(참되신 육신이여, 거룩한 성체)'를 작곡했다. 모테트(motet, 무반주 다성 성악곡) 형식의 종교음악이다. 이 성체 찬미가는 14세기부터 불려지던 곡으로 교황 인노첸시오 6세의 작품이라고 전해지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이 곡의 가사를 번역하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참되신 몸이 나심을 경배합니다. 모진 수난을 겪고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에 그 수난을 기억하게 하소서'라는 내용이다. 국내에서도 '존귀하신 구주'라는 제목으로 성체 찬미가가 불리고 있다. 성서에 드러난 예수의 삶을 살펴보면, 살아서 활동했던 행적들은 많은 부분이 지워져 있다. 죽기 3년쯤 전부터의 언행이 드러나다가 고통스런 형틀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의 삶 중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부분은 죽음이다. 류영모는 기독교가 '죽음의 발언'을 가장 극적으로 명료하게 제시하는 종교임을 통찰했다. 예수가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은 삶 속에서 현실적 고통의 제거나 경감이 아니었다. 기적을 통해 고통을 회피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도 아니다. 그는 다만 제대로 죽는 법을 가르쳐주러 왔다. 이 세상의 어떤 종교도 신이 '인간'으로 직접 태어나 '인간'으로 죽는 법을 가르쳐주기 위해 실행을 해보인 경우는 없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맞은 까닭은, 신이 인간의 권력을 무너뜨리거나 압도할 만한 권능이 없어서가 아니다. 인간의 권력을 응징하는 일은, 신이 스스로 만든 피조물에 대한 이견을 제시하는 것과 같다. 신은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까닭도 없다. 예수는 하느님이 낸 인자(人子)로 그 생애가 모두 신의 메시지이지만, 핵심은 십자가에 응결된 의미 곧 죽음이었다. 기독교는 '죽음을 발언하는 종교'다. 기독교는 끊임없이 죽음을 기억하게 하고 죽음을 의미화하는 종교다. 어떤 종교나 사상도 이토록 죽음에 집중해 꾸준히 발언함으로써 인간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왜 살려고 태어난 인간에게 예수는 죽음을 보여주었는가. 왜 살려고 태어난 인간은 필멸하는가. 예수는 그 질문이 지닌 '전제'를 돌아보게 했다. 죽음은 육신의 멸망을 말하는 것이며, 모든 죽음은 몸의 생물학적인 멈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스스로의 삶이 육체로 제한되어 있으며 육체의 소멸은 곧 인간 자체의 소멸로 굳게 인식해 왔다. 예수는 그 확고한 오류를 벗겨주러 온 것이다. 육체의 죽음은 인간 전체의 죽음이 아니며, 생물학적 시한성(時限性)은 오직 육체의 생멸에 해당되는 것일 뿐이다. 예수는 자신에게 닥친 위험과 그에 따른 죽음을 전혀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죽음을 회피하지 않은 것, 심지어 부당한 죽음이고 권력의 놀림거리가 되는 죽음이라 할지라도 회피하지 않은 것. 이 점이 중요하다. 육신의 사멸이, 그가 설파한 영적인 삶을 완성시키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영적인 삶의 완성은, 신과의 합일이며 영성으로의 부활이었다. 홀바인의 죽은 예수는, 오로지 영혼이 빠져나간 그 몸을 비춘다. 영혼이 빠져나간 몸을, 영혼이 들어있는 몸(관객인 우리들)이 바라보는 셈이다. 가톨릭의 성체찬미가는 '죽은 몸'이 의미하는 영혼의 반전을 예찬하는 노래다. 기독교에서 죽은 몸은 끝없이 전시되며, 죽은 몸으로 이룬 무엇을 환기시키고 있다. 우리는 죽은 몸에서 죽음을 보지만, 성서는 죽은 몸에서 참삶을 본다. 즉 몸을 벗은 새로운 탄생 혹은 영적인 거듭남을 의미하는 부활을 본다. 죽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믿느냐. 그 해석을 스스로가 실천할 수 있느냐. 이 질문이 기독교이며 기독교는 오직 이 질문뿐이다. 류영모는 예수를 이렇게 설명했다. "하느님의 아들이란 죽음을 넘어섰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과 죽음을 넘어선다는 것은 같은 말입니다. 죽음과 깨달음은 같은 말입니다. 지식을 넘어선 사람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죽음을 넘어서고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죽어야 삽니다. 완전히 내가 없어져야 참나입니다. 깨달음은 인간의 가장 순수한 맨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가장 순수한 것이 참입니다. 이 세상에서 참기쁨을 맛보려면 '나'라는 것이 적어져야 합니다. '나'가 적어져서 아주 적어져서 없어지면 기쁨만이 남습니다." 류영모는 8시간 동안 죽었고, 11형제 죽음을 봤다 류영모가 나기 4년 전인 1886년에 나라에는 콜레라가 크게 번졌다. 서울에도 수많은 사람이 죽어 갔다. 송장을 나르는 들것이 수구문(水口門, 시신 내보내던 문으로 서울 중구 광희동에 있다) 밖으로 줄을 잇다시피 하였다. 그 뒤로 해마다 여름이면 콜레라가 돌았다. 콜레라가 얼마나 무서우면 범 같다 하여 호열자(虎列刺)라 이름하였을까. 세균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한방의학으로는 속수무책이었다. 1897년 7살의 류영모도 콜레라에 걸렸다. 쌀뜨물 같은 설사를 계속하여 탈수증으로 거의 죽어 가고 있었다. 고쳐줄 수 있는 의사가 없으니 그야말로 천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김완전은 설사 때문에 아이가 죽어 간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설사를 억지로라도 막으려고 손바닥으로 아들의 항문을 막았다. 항문을 막은 지 8시간쯤 지나자 죽어 가던 영모의 몸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기적이었다. 항문을 솜으로 틀어막고서 미음을 끓여 떠 먹이니 아이는 다시 살아났다. 죽음에서 건져낸 어머니. 류영모는 그때 다시 한번 태어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류영모는 서른 살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주위 사람들의 안쓰러워하는 말을 들으면서 자랐다. 형제 자매가 13명이었다. 그중에서 스무 살을 넘기며 살아남은 것은 두 명뿐이었다. 류영모와 동생 류영철(永哲)인데, 류영모 위로 형이나 누나가 몇인지, 혹은 아래로 동생들이 몇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여러 형제들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자랐다는 점은 의미가 깊다. 인생관 형성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 형제의 요절 가운데서도 류영모가 21세 때 잃은 동생 영묵(永黙·당시 19세)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충격으로 남았다. 류영모는 11명의 형제자매가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성장했다. 류영모에게 죽음은 다중적인 의미였을 것이다. 조선이라는 국가가 도탄에 빠져 있으며, 창궐하는 역병으로 주위 사람들이 스러져가는 풍경들이 겹치면서 대체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현실적이고 다급한 고민들이 그를 휩쓸고 있었다. 가난과 절망의 일상 속에서 탈출구처럼 여겨졌던 곳이 교회였을 것이다.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을 안은 15세 소년이 만난 기독교는 언뜻 봐도 기이했다. 삶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언급이 없고 오직 예수의 죽음을 중심으로 한 믿음과 찬송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종교는 죽음의 역설을 담은 놀라운 가르침이었다. 그는 '예수의 피'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꽃이 피다'할 때, '피다'는 무엇인가. 피가 밴다는 의미라고 그는 풀었다. '꽃이 지다'할 때의 '지다'는 무엇인가. 그 피가 지워진다는 의미다. 생명은 피가 뱄다가 피가 지워져 사라지는 것이다. 피가 무서운 것은 그것이 제 자리를 벗어날 때의 죽음이 떠오르기 때문이고, 피의 빛깔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생명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류영모는 "꽃다운 피, 피다운 꽃이 예수가 십자가에 흘린 피"라고 말했다. 이 피를 '화혈(花血)'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예수가 피를 흘리는 것을 보았지만, 그것은 '꽃피'였으며 바로 꽃이 피어나는 현장이었다. 꽃피는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의로운 피이며 신의 아들이 되는 성숙한 피라고 류영모는 말한다. 저 꽃피는 죽음을 넘어서는 인간이며, 죽음을 넘어서는 인간일 때에 비로소 인간은 미성년을 벗어난다고 했다. 스스로 어린 날 '임사(臨死) 지경'을 겪고,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그가 깨달은 바가, 저 '성숙한 생사관'이었다. '죽음'의 왜곡을 가장 참을 수 없었다 소년은 그러나, 20대에 교회를 떠났다. 종교의 원천은 분명히 진실을 담고 있었지만, 그 바탕이 흐려지면서 의문을 품게 하는 다른 것들이 많이 끼어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종교를 신앙하려면 그 종교의 교의는 믿을 만한 것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이다. 나의 선조 전래로 믿어온 교의 속에 있는 예수가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였으며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뒤에 무덤에 장사 지낸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가까운 이 몇 사람이 보는 가운데서 승천하였다는 것은 나로서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나는 이 교의가 우주의 본질에 대해서 내가 마음에 그리는 것과 조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토인비의 '회고록' 중에서) 이 말이 류영모의 심경을 대변하고 있었을 것이다. 류영모는, 기독교회의 변질이나 교리의 헛된 번잡으로 인한 예수정신의 증발에 깊은 문제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본질적인 것은, '죽음'을 심각하게 왜곡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의 죽음을 왜곡하는 것은 이 종교의 모든 것을 버리는 것과도 같다고 여겼다. 그것은 견딜 수 없었다. 부활과 영생은 육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예수가 보여주었다. 스스로 죽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몸이 무엇인지 알려주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여전히 육신의 부활과 육신의 영생이란 기적을 꿈꾸며 '죽음'을 모면하려는 믿음만 키웠을 뿐이다. 예수는 스스로의 죽음으로 인류를 죄에서 구하는 속죄(贖罪)를 하러온 것이 아니다. 육신의 충동을 모든 것으로 여기며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 육신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하여 다른 삶을 살도록 권하러 온 것이다. 예수는 우리 육신이 저지르는 죄를 결코 갚아준 것이 아니다. 육신의 죄 또한 신의 뜻 안에 있다. 그 욕망에 어떻게 대처하여 이윽고 몸삶에서 벗어나는지를, 신은 예수를 통해 알려주고자 한 것이다. 그것이 사랑을 가득 담은 신의 눈길이었다. 그 아름다운 참을 놓친 '피상의 믿음'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류영모는 스스로를 비정통이라 선언하고 교회와 교리를 벗어났다. 그는 오직 '죽음의 사표(師表)'인 예수를 스승으로 삼고자 했고, 예수처럼 죽고자 하는 길을 걸었다. 류영모는 죽음에 대해 이렇게 단호하게 말했다. "죽은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자는 것도 멸망입니다. 몸은 예수의 몸도 거짓생명의 탈을 쓴 것입니다. 이 몸을 버리고 얼나로 하느님 아버지께로 가는 게 영원한 생명에 드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로 간다는 것은 몸나로 죽고 얼나로 깬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만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다석 류영모] 죽삶사상은 '얼나예수'의 참가르침 다석사상의 핵심은 '얼나사상'이다. 몸이 죽고 얼은 산다는 '몸죽얼삶(肉死靈生, 죽삶)'의 전제는 '몸이 죽는다'는 엄연하고 당연한 사실이다. 죽삶사상은 얼나에 매진하고 얼나를 신앙하며 얼나와 영원히 함께하는 전제로, 죽음이 그 역할을 뚜렷이 한다는 생각이다. 몸이 죽을 수 있음을 기뻐하라. 그래야 얼이 온전히 신에게로 귀일하기 때문이다. 몸을 건사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몸이 부르는 충동에 빠지는 삶은, '얼나'로부터의 이탈일 수밖에 없다. 얼나사상의 완결은 반드시 '죽음'이라는 경로를 통해서 가능하다. 도마복음서 5장에는 인상적인 예수의 말이 담겨 있다. "사람에게 잡아먹혀서 사람이 되는 사자는 복이 있다. 그리고 사자에게 잡아먹힐 인간은 저주받은 것이다. 그리고 사자는 여전히 인간이 될 것이다." 인간과 사자가 육식(肉食)을 하는 동물임을 빗대어 표현한 이 말은, 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이야기다. 인간 내부에는 '인자(人子, 신이 내린 사람의 아들)'인 사람이 있고, 여느 짐승과 다르지 않은 사자가 있다. 사자는 배고프면 먹으려 들고, 다른 사자를 보면 공격하려고 들고, 또 이성(異性)을 보면 교접하려고 든다. 인간이 마음속에서 사자를 잡아먹으면, 그는 얼나로 거듭난다. 그러나 사자가 인간을 잡아먹으면, 신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사자가 인간인 것처럼 살아가다가 사자의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이토록 통렬한 비유가 어디 있겠는가. 집필 = 이상국 논설실장 감수 및 자문 =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2021-01-18 19: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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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91)] 십자가는 무엇인가, 참죽음이 복음이었다 예수는 죽으러 왔다. 성서가 기록한 예수의 위대한 길은 오로지 '죽음의 프레젠테이션'이었다. 예수의 죽음 외에 성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라. 모두 죽음을 위한 준비 같은 것이었다. 그 죽음은 신의 명령이었다. 예수가 전한 복음은 '죽는 방법'이었고, 신의 사랑 또한 거기에 있었다. 류영모는 성서 중에서 예수가 죽음을 앞두고 한 기도(요한복음 17장 결별의 기도)를 가장 주목했다. 이것이야 말로 메시지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류영모는 말했다. "예수는 죽음을 앞에 놓고 나는 죽음을 위해서 왔다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죽으러 왔다. 예수는 죽음을 생명을 깨는 것으로 본 듯하다. 나무가 불이 되는 것이 죽음이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진리정신을 드러낼 때가 왔다. 진리정신은 죽음을 넘어설 때 드러난다. 죽을 수 있는 것이 정신이다. 사람은 때와 터와 람(값어치)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죽을 때 죽어야 하고, 죽을 터에서 죽어야 하고, 죽을 보람으로 죽어야 한다. 예수는 세 가지를 다 계산해본 결과,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한 것이다. 새가 알맞은 때에 알을 까듯이 지금이 죽을 적기(適機)라고 결정한 것이다.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다. 계산은 끝났다." 인간의 죽음은 어떤 의미인가. 류영모는 평생 그것에 대해 집요하게 궁구(窮究)했다. '생명(生命)'이라는 말이 있다. 태어나는 일과 명령받는 일 즉 죽는 일을 결합한 말이다. 생명을 타고난 모든 존재는 생명의 명령을 받는다. 하나는 태어났으니 살아라 하는 명령이고 하나는 살았으니 죽으라 하는 명령이다. 생명은 결코 이를 위반할 수 없다. 태어나지 않은 생명이 없었듯이 죽지 않은 생명도 없었다.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1477?~1576)의 '부활'(1544)'.] 죽음의 명령은 '완전히 소멸하라'는 명령 인간도 생명의 하나인 만큼 태어나고 어김없이 죽는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놀라운 점이 있다. 짐승들을 보라. 토끼, 너구리, 호랑이, 개, 비둘기, 오래전 거대한 짐승인 공룡까지. 그들도 생명이었고, 태어났으며 빠짐없이 죽었다. 그 짐승들의 특징은, 자기 생애에서 무엇인가를 추가해 자손에게 물려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간만이 자기 생명을 넘어 후대에게 기억과 기록을 넘겨준다. 인간이 만든 문명은 바로 생애를 넘어 무엇인가를 축적해내는 능력의 결과이다. 수십만년을 살아낸 곤충이나 인간보다 더 오래전부터 살아왔던 짐승들은, 거의 같은 수준의 살이를 반복한다. 무엇인가를 남기고 추가하지 못한다. 생명(生命)이라는 말을 다시 살펴보면, 생명은 태어난 자에게 신이 내리는 엄혹한 명령이다. 그것은 단순히 '죽으라'는 명령이 아니다. 생을 받으면서 이뤄낸 모든 것을 소멸시키라는 명령이다. 대개 생명은 육신이 소멸함으로써 모든 것이 사라지게 돼 있다. 멸망은 존재가 지닌 것과 이룬 것을 완전하게 소멸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직 인간만은 육신이 소멸한 다음에도, 무엇인가가 남아있다. 상속과 유물과 유적과 기술과 기록과 삶의 방식과 문화와 도시와 세계가 남아있다. 이것이 인간의 특별한 점이다. 신은 이런 일이 가능하도록 인간에게는 생명 속에 다른 생명을 넣어주었다. 그 다른 생명이 세상과 지구를 바꿔온 셈이다. 신은 인간에게만은, 생명을 주면서 네 생에서 있었던 모든 것을 다 소멸하고 지우고 버리라고 말하지 않았다. 짐승과 똑같이 갖고 있던 육신만을 버리라고 명령했다. 이것이 신의 은총의 정수다. 왜 그랬을까. 인간에게 신의 출장소인 얼나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류영모의 죽음사상이다. 인간은 이런 자신을 자각하지 못했다. 짐승에게는 없는 그 능력을 지닌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짐승이 진화한 결과 두뇌가 좋아져서 그런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두뇌의 진화는 누가 가능케 한 것일까. 인간이 만들어낸 세계는 인간의 특별한 점이 지속적으로 발휘되어온 결과다. 짐승에게도 일정한 판단이나 감정이 있다. 짐승이 지니고 있는 정(情, 감각적인 판단을 중심으로 한 마음)은 그러나, 인간처럼 뚜렷하게 시간을 초월해 축적되지 않고 죽음과 함께 소멸한다. 인간의 특별한 점을 우린 '영혼'이라 일컫는다. 생명 가운데 그것이 뚜렷이 발휘하는 것은 인간뿐이다. 이 영혼의 능력이 전방위적으로 그 근원을 찾아나선 행위가 종교이며 신앙이며 사상이다. 류영모는 말했다. "종교의 핵심은 죽음이다. 죽는 연습이 철학이요 죽음을 이기자는 것이 종교이다. 죽는 연습은 영원한 생명을 기르기 위해서이다. 몸으로 죽는 연습이 얼로 부활하는 연습이다." 인간만은 '완전소멸'하지 않는다 다시 죽음으로 돌아가자. 짐승도 죽고 사람도 죽는다. 짐승은 죽으면서 깨끗이 그 생을 소멸한다. 인간은 죽으면서 육신은 소멸하지만, 죽지 않는 무엇인가를 이어간다. 인류 문명 전체가 인간의 사업이 아니라 신의 사업이라고도 말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인간 육신은 죽지만, 인간 속에 깃든 신은 오히려 그때 온전히 깨어난다고 믿는 사람이 바로 예수였다. 인간 속에 깃든 신을 성령이라고 불렀고, 류영모는 얼나(얼의 나)라고 불렀다. 예수가 죽는 시범을 보이러 온 까닭은, 대담하고 용감하게 죽는 무용담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음의 의미를 교정해주기 위해서였다. 인간의 죽음은, 몸죽음일 뿐이요 진짜 삶의 시작이라는 역설이었다. 류영모는 이를 '몸이 죽을 때 영생(얼삶)에 이른다'고 표현했다. 이른바 '몸죽얼삶(肉死靈生)'이다. 이것을 류영모의 '죽삶(死生)사상'으로 요약할 수 있다. 죽음 이전의 인간 삶은, 짐승들도 받았던 몸생명을 살아내는 삶이었다. 죽음 이후의 삶은 육신 속에 깃들어서 기적을 일으켜온 '신의 임재(臨在)'인 얼나가 신과 귀일(歸一)하는 대전환의 기적이다. 그러니 아낌없이 죽고 서슴없이 죽으라. 네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육신의 본능이고 네가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것은 얼나의 생각이다. 죽음은 고통이 아니라, 생명이 고통이며 생명까지만 고통이다. 죽음은 그 고통을 초월하여 태어나기 전부터 받았던 사랑의 품 속으로 깃드는 일이다. 이런 '몸얼(肉靈)'의 대전환을 위하여, 예수는 스스로 죽어보였고, 류영모도 그 길을 따라갔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죽음 맛을 좀 보고 싶다. 그런데 그 죽음 맛을 보기 싫다는 게 뭔가. 이 몸은 내던지고 얼은 들려야 한다. 땅에서 온 몸은 죽어 땅에 떨어지고 위에서 온 얼은 들리어 하느님께로 올리운다. 왜 죽을 것을 겁내는가. 우리에게 빚이 있기 때문이다. 빚이 죄이다. 빚을 다 갚아버리고 원대한 하나에 참례하면 군색할 것 하나도 없다. 원대한 하나에 합쳐지는 것이 우리가 온전하게 되는 거다. 병이 든 곳을 꿰매어 삶을 연장하려는 것은 찢어진 옷을 꿰매어 계속 입자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밥 먹고 똥 누고 하는 이 일 얼마나 더 해보자고 애쓰는 것은 참 우스운 일이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육체적 생각을 내던져야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죽음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한다. 나는 모름지기 이 세상을 떠나도 좋다고 생각한다. 죽는 것이야말로 축하할 일인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산다. 죽음을 넘어서 울리는 소리, 그것이 복음(福音)이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죽음은 삶의 고개를 넘어선다고 본다. 죽음은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나는 인생을 죽음부터라고 생각한다. 몸나가 죽고서 얼나로 사는 것이다. 몸나는 얼나를 기르기 위한 도시락 같은 것이다. 몸나가 달걀이라면 얼나는 병아리다. 병아리가 다 자라면 알껍질을 깨고 나와야 한다." 류영모는 예수의 죽음을 실천했다 우리는 탄생과 죽음 사이에 있다. 탄생은 이미 실행되었고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기에 그 사이 어딘가 쯤에서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존재다. 모든 생명의 본능은 '죽음에 대한 회피'에 집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삶을 지속하고 싶으며 죽고 싶지 않다는 생명체들의 소망은, 그러나 시한부로 정해진 죽음 앞에서 예외없이 좌절된다. 차이는 있어도, 태어난 이상 누구나 죽는다는 점에는 예외가 없다. 생명이란 말은 우리가 숨쉬기를 부여받은 고귀한 특권임에 틀림없지만, 생명이란 글자의 뒤에 있는 명(命)에는 이미 죽을 시간이 기입되어 있다. 불가피한 죽음의 운명 앞에서, 인간은 무엇을 꿈꾸는가. 종교나 사상은 죽음에 대해 어떤 발언을 하는가. 류영모의 사상은, 삶보다 죽음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게 특징이다. 그에게 삶은, '죽음'을 위한 치밀하고도 치열한 준비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류영모는 많은 사람들이 삶에서 추구하는 가치를 하찮게 여겼다. 세상의 권세나 부귀 같은 것들은 오히려 '위대한 죽음'을 방해하는 허튼 욕망의 지향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죽음에 대한 관점을 획기적으로 바꿨기 때문이었다. 류영모가 지닌 죽음에 대한 관점을 정확히 보여준 선행자(先行者) 예수에게서 참죽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성서의 예수 행적을 깊이 살핀 결과 류영모는 그 핵심이 죽음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삶의 자취들조차도, 유심히 들여다보면 오직 '죽는 순간'을 위한 길이었다. 예수는 신의 메시지를 품고 지상에 등장했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였다. 죽는 법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온 것이다. 신의 메시지 전체가 '죽음의 혁명'이었다. 나처럼 죽을 수 있다면, 그 삶은 최고의 삶이라는 걸, 예수는 온몸으로 웅변한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 매달린 몸으로 형상화되어 후세의 아이콘으로 남은 까닭은, 그의 죽음이 진정한 신의(神意)임을 되새기기 위해서이다. 류영모가 예수처럼 살고자 한 것과 예수의 길을 따르고자 한 것은, 바로 저 '망설임 없는 죽음의 길'을 행하고자 함이었다. 물론 류영모가 단순히, 죽음 자체를 경배한 것은 아니다. 예수가 그토록 감연히 죽고자 했던 것은, 죽음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그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신과의 합일(合一)이며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귀일(歸一)이라는 것을 뚜렷이 알고 있었다. 육신이 멸망하는 일이 빚어내는 생물학적인 충격에 전혀 휘둘리지 않은 것은, 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 때문이었다. 류영모는 예수의 죽음을 실천하는 인간으로 살기를 원했고 죽기를 원했다. 예수가 많은 인간들 앞에서, 그리고 역사 앞에서, 공개적으로 죽음을 전시(展示)한 까닭은, 당시 인간권력에 굴복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육신의 극한 고통과 함께 맞는 죽음은 인간이 가장 기피하는 방식의 '생명 양상'이 아닐 수 없다. 예수 죽음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서 생겨난다. 육신의 죽음은 생명을 부여받은 몸의 최후일 뿐이며, 모든 것의 죽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것의 죽음이 아닐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의 죽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숨이 끊어졌을 때, 얼나(성령)는 일어나 신에게로 안겼다. 그 십자가는 "죽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외친 것이다. 오직 '죽음이란 통과의례'로서만 닿을 수 있는 신과의 완전한 합일은 바로 이런 것이다. 류영모는 평생을 부양한 자기 내부의 얼나가, 육체의 나를 깨뜨리는 파사(破私)를 통해 신과 합쳐지는 '죽음의 맛'을 그렸다. 이 상황을 그는 '깨달음(육신을 깨서 얼나로 닿음)'이라고 불렀다. [다석 류영모 초상[그림=박상덕]] '부활과 영생' 기적의 미스커뮤니케이션 기독교가 역사상 인류의 가장 방대한 지지를 받게 된 까닭은, 예수가 보여준 '죽음의 시전(示展)'을 철저히 오해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예수는 탄생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생명체의 한계를 사는 인간에게 놀라운 기적을 전했다. 인간의 자식으로 태어나지 않는 인간이 가능하며, 죽지 않는 인간이 가능하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인간이 가능하다는 메시지였다. 탄생과 죽음을 완전히 극복하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알려준 것이다. 그 메시지를 받아든 많은 사람들은, 육신의 탄생과 육신의 죽음, 그리고 육신의 부활을 상상했다. 예수가 전한 신의 메시지는, 얼나로 탄생하는 것, 얼나로 죽는 것, 얼나로 재탄생하는 것에 대한 내용이었다. 육신이 살고 싶었던 인간에게는 스스로 듣고 싶은 말들이 들렸고, 얼나로 표현된 신의 사랑을 전하고 싶었던 예수는 목숨을 바쳐 이것을 전했다. 류영모는, 이 충격적인 미스커뮤니케이션을 바로잡으려 한 '후지자(後知者)'였다. 오직 얼나로 귀일하는 인간과 신의 믿음을, 사상의 중심으로 삼았던 그였기에, 예수의 죽음이 예수 이후의 인간 중에서 가장 생생하고도 정확한 메시지로 읽혔을 것이다. 그는 예수의 죽음을 믿었으며, 그 죽음이 곧 신의 고결한 사랑의 메시지라고 생각했다. 그는 예수의 죽음을 실천하고자 했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듯이 죽는 게 죽는 것이 아니라는 그의 반어(反語)는, 인간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영생(永生)이 오직 '얼나의 삶'을 말하는 것임을 후련히 드러낸다. 류영모는 죽지 않았다. 그의 얼나는 태어난 적도 없고 죽은 적도 없다. 이 '참'을 직면해야 류영모 사상을 만난 것이다. 집필 = 이상국 논설실장 감수 및 자문 =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2021-01-11 14: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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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 이상국 낱말의습격] 이재용 '승어부(勝於父)'란 말의 어색함 [4일 평택사업장을 찾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오른쪽에서 두번째)이 반도체 EUV 전용라인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제공]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움직임에 관한 최근의 보도에는 '승어부(勝於父)'라는 말이 단골로 따라다닌다. 작년 말 파기환송심 공판에서 이부회장이 진술한 내용 속에 들어있던 말이다. '승어부'는 아버지보다 낫다는 의미이고, 문자속이 있는 옛사람들이 중얼거리듯 내뱉던 말에 가깝다. 그 아버지를 떠올리며 자식을 높게 품평하는 말로, '그 아버지도 뛰어났지만'이란 전제를 붙여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 칭찬하는 표현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법정 진술에서 했던 말은 이것이다. "두 달 전 이건희 회장님 영결식이 있었습니다. 회장님 고교 친구분께서 추도사를 해주셨습니다. 그분은 선대로부터 회사를 넘겨받아 지금의 삼성을 키워놓은 이회장 예를 전 산업사에서 접하지 못했다며 '승어부'라는 말을 꺼내셨습니다. 아버지를 능가하는 것이 증가한 의미의 효도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선대보다 더 크고, 더 강하게 키우는 게 최고의 효도라는 가르침입니다. 그 가르침이 지금도 제 머릿속에 강렬하게 맴돕니다." 이건희 전회장의 동창이 고인을 평가하며, 그 부친인 이병철 창업주보다 나았다는 의미로 '승어부'를 쓴 것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전 KPK통상 김필규 회장이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이건희 회장보다 '승어부'한 인물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를 들은 이재용부회장이. 아버지 이건희가 할아버지 이병철보다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면 나 또한 그런 열정과 노력을 본받아 이건희보다 나은 경영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한 것이다. 아버지를 지키는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업적을 뛰어넘어 사업을 확장하는 것이 '최고의 효도'라는 의미로 '승어부'라는 말을 썼다. 이걸 언론들이 받아서 '이재용의 승어부'라는 표현을 즐겨쓰기 시작했다.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 [사진=데일리동방] 그러나, 한자어로 표현되어 있어 그럴 듯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 말은 효(孝)가 지향하는 공경과 겸허의 정신을 담은 말은 아니다. 부자(父子)를 모두 잘 아는 제삼자의 입에서, 아버지도 뛰어났지만 자식도 뛰어나다는 찬사를 내놓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아들이 다시 입에 담기에 적절한 말은 아니다. 자식이 승어부를 벼르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예의가 아닐 수 있다. 그 뜻은 이해할 수 있지만 너무 '날 것'에 가깝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 대신 자식의 교만이 드러날 수도 있다. 이건희 전회장이 이병철 창업주를 뛰어넘은 것은, 결과적으로 이뤄낸 사실이지 이건희가 승어부를 벼른데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재용 부회장은 아버지보다 더 크고 뚜렷하게 삼성을 키워내는 것이 최고의 효도라는 의미로 승어부라는 말을 썼지만, 그가 표현한 내용은 차후엔 효도일 수 있어도 부친을 잃은 자식이 바로 입에 담기에는 다소 외람되고 경우 없는 말이다. 이재용의 '승어부'는, 이미 국가적인 기업인 삼성을 지금보다 훨씬 더 키워놓겠다는 의지를 법정에서 강조함으로써 당면한 질곡의 크기를 줄이고자 하는 의도를 담았을 것이다. 이건희보다 더 잘 해서 삼성을 키워놓을테니, 이 중대한 경영 의지를 이 국난의 시기에 영어(囹圄)에 두지 말라는 호소이다. 삼성 3대의 '사업보국(事業報國)'을 환기시키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이해는 간다. 아들 이재용이 아버지 이건희의 '승어부'를, 또한 계승하겠다고 마음 먹었다면 그것은 아버지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시대를 이겨내 새로운 시대의 기업을 일궈나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아버지의 반도체가 아들 이재용에게 와서는 시스템 반도체가 되고 4차 혁명의 선도기업이 되는 것이다. 시대는 시대를 낳았지만, 낳은 시대는 낳아준 시대를 승어부하며 진보할 수 밖에 없다. 이재용 부회장 또한 시대의 의무, 미래의 소명을 받은 것이다. 아버지의 영광을 기반으로, 스스로의 오리진을 만들어나가는 것. 이것은 '이재용의 야망'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삼성의 승어부 정신'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상국 논설실장 ........................... 다음은 '승어부'란 말이 등장한, 이재용 최후진술 전문(2020년 12월30일 파기환송심 결심 공판)이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두 분 판사님. 오늘 저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두 번 다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면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제가 삼성에서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한 것은 20여 년 전으로 반도체와 통신 인터넷 산업의 황금기가 시작될 때였습니다. 수많은 글로벌 기업들을 때로는 고객사, 때로는 경쟁사로 맞으며 다양한 경험 맞았습니다. 스티브 잡스, 손정의 회장과 교류하는 행운도 얻고 창업자로부터 회사 넘겨받은 전문경영인이 혁신 노하우로 회사 수백 배 수천 배로 키우는 기회도 봤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우리가 저 사람들과 맞서 싸울 수 있을까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삼성도 망하겠다는 위기감이 피부에 와닿았습니다. 주위 기업 부침을 보면서 한시도 방심 힌 적 없었습니다. 통신업계에서 선두 달리던 유럽 미국 기업들 한순간에 무너지는 과정도 옆에서 봤습니다. 일본 아날로그 기술 가진 기업들도 그랬습니다. 중국 기업들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절박한 위기의식에서 하루하루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2014년 5월 이건희 회장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경황이 없던 와중에 박근혜 대통령과 독대자리가 있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결단코 그렇게 대처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 일 때문에 회사와 임직원들이 오랫동안 고생했습니다. 많은 국민들께도 좋은 모습 보이지 못해 송구스러울 생각입니다. 참 답답하고 참담한 시간이었습니다. 솔직히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저의 불찰, 저의 잘못, 제 책임입니다. 제가 못났고 제가 부족했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깊이 뉘우칩니다. 재판장님, 두 분 판사님 이 사건은 제 인생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됐습니다. 1년 가까운 수감생활 포함해 4년간 조사 재판 시간은 제게 소중한 성찰의 계기가 됐습니다. 제가 과거에 무엇 잘못했는지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제가 또 앞으로 무엇 해야 할지 고민할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이 재판과정에서 삼성과 저를 외부에서 지켜보는 준법감시위원회가 생겼습니다. 재판부께서는 단순한 재판 진행 그 이상을 해주셨습니다 삼성이란 기업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역할 해야 할지, 준법문화를 어떻게 발전시켜야 할지 나아가 저 이재용은 어떤 기업인이 돼야 하는지 깊이 고민할 수 있는 화두를 던져주셨습니다. 그전에는 선진기업을 벤치마킹하고, 불철주야 연구개발에만 몰두하고 최선다해 회사를 키우는 게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준법문화라는 토양 위에서 체크, 또 체크하고 법률적 검토를 거듭해 의사결정을 해야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고 궁극적으로 사업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재판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뒤늦게 깨달은 만큼 더욱 확실하게 실천해나가겠습니다. 실제로 저희 회사에서는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작지 않은 변화입니다. 저 스스로도 준법경영 변화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최근 회의들을 그 전과 비교해보면 제가 이전에 하지 않았던 질문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컴플라이언스팀은 뭐라고 하던가요' '법무팀 검토 끝났나요' '준법감시위원회까지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조금이라도 문제가 될 건 또 묻고 묻습니다. 외부 목소리도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 인정받고 자랑할 만한 변화는 아닙니다. 첫걸음을 뗐지만, 변화는 이제부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쉽지 않을 것입니다.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멀리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과거로 돌아갈 일은 결코 결코 없을 것입니다. 법에 어긋나는 일은 물론이고 오해를 불러일으킬 일도 하지 않겠습니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반드시 정도를 걸어가겠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사업지원TF에 대한 우려도 들었습니다. 오늘 특검도 언급한 걸 잘 들었습니다. 사업지원TF는 다른 조직보다 더욱 엄격하게 준법감시를 받게 하겠습니다. 더욱 투명하게 운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를 포함해 누구도 어떤 조직도 삼성에서는 결코 예외로 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난날 삼성 최고경영진의 잘못도 저 자신의 관여 여부와 관계없이 뒤돌아보겠습니다. 사건 경위 하나하나 되짚어보고 그런 사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이중 삼중으로 재발방지책 마련하겠습니다. 준법감시위원히가 본연 역할하는 데 부족함 없도록 충분한 뒷받침 하겠다 그간 위원회를 너무 자주 뵈면 우리 감시하는 위원회 의미 퇴색될까 봐 주저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위원들 정기적으로 뵙고 저와 삼성에 대한 소중한 충고와 질책도 듣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모두가 철저하게 준밥감시 틀 안에 있는 회사로 만들겠습니다. 아니 준법 넘어 최고 수준 투명성과 도덕성 갖춘 회사로 만들겠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추진하겠습니다. 분명하게 약속드립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두 분 판사님, 저는 지난 5월 준법감시위원회 권고 받아들여 경영권 승계에 대한 저의 평소 갖고 있던 소신을 밝혔습니다. 제 아이들이 경영권 승계문제와 관련해 언급되는 일 자체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삼성이 이런 문제로 또다시 논란에 쌓이는 일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무노조 경영이라는 말도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노조와 경영진이 활발하게 소통하는 문화 만들겠습니다. 다른 약속들도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아울러 국민들과 삼성이 한 약속 책임지고 지키겠다. 지켜봐주십시오. 재판장님 길어지겠지만 옛날이야기 하나만 하겠습니다. 1987년 이병철 회장님 돌아가실 때저는 대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임종을 지켜보며 경황없는 중에도 아버님은 다른 일 모두 제쳐두고 일본 지점장에게 전화를 거셨습니다. 도시바, 소니, 히타치, 산요, 마스시타 등 당시 일본 주요 기업들의 최고경영자들과 미팅 약속을 잡으라는 지시였습니다. 삼성의 큰 고객사이자 앞서가던 기업들이었습니다. 다음 해 1월 아버님은 일본에서 어학연수 중이던 저를 그 모든 회의에 데려가셨습니다. 당시 삼성 회장이지만 삼성 위상이 지금과 달라 회장이나 사장이 아니라 전무, 상무급, 심지어 부장급 엔지니어가 나와도 일일이 만나 머리를 숙이고 최신시설 동향이나 정보를 얻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합니다. 그 이후로도 이건희 회장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인재라면 몇 번이고 찾아가서 모셔왔습니다. 그 치열함이 어쩌면 삼성 DNA가 됐다고 생각. 삼성은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제가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삼성이 일부 분야에서 대한민국 선두기업 됐으나 사회적 역할, 책임, 국민의 신뢰가 얼마나 막중한지는 간과했습니다. 우리 국민의 기대와 눈높이가 얼마나 높은지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순환출자를 해소하고 선단식 경영 도입하지만, 아직 많은 분들 기대에 충족 못 하고 있습니다. 저는 삼성에 쏟아진 많은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삼성은 이제 달라질 겁니다. 저부터 달라질 겁니다. 이제 어떤 일이 있어도 제 개인적 이익을 취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로지 회사 가치 높이고 사회에 기여하는 일만 하겠습니다. 재벌 폐해 개혁하는 일에도 과감히 나서겠습니다. 우리가 잘하는 사업에 집중하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 국민에게도 평생 갚지 못할 빚이 있습니다. 꼭 되돌려 드리겠습니다. 더 많은 협력사들이 우리와 성장하도록 하겠습니다. 선두기업으로서 몇 배 몇십 배 더 큰 책임감을 갖겠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두 달 전 이건희 회장님 영결식이 있었습니다. 회장님 고교 친구분께서 추도사를 해주셨습니다. 그분은 선대로부터 회사를 넘겨받아 지금의 삼성을 키워놓은 이회장 예를 전 산업사에서 접하지 못했다며 '승어부'라는 말을 꺼내셨습니다. 아버지를 능가하는 것이 증가한 의미의 효도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선대보다 더 크고, 더 강하게 키우는 게 최고의 효도라는 가르침입니다. 그 가르침이 지금도 제 머릿속에 강렬하게 맴돕니다. 경쟁에서 이기고 회사 성장은 기본입니다. 신사업 발굴해서 사업 확장도 당연한 책무입니다. 하지만 제가 꿈꾸는 승어부는 더 큰 의미를 담아야 한다고 봅니다. 저의 정신자세와 회사 문화를 바꾸고 여러 제도를 바꾸며 외부 여러 부당한 압력이 들어와도 거부하는 준법감시제도를 만들겠습니다. 학계 벤처업계 중소기업계 등과 유기적 협력해서 우리 산업생태계 더욱 건강해질 수 있도록 최선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삼성 임직원들이 우리 회사 자랑스럽게 여기고, 모든 국민들이 사랑하고 신뢰하는 기업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초일류기업 지속가능한 기업이 가능한 것이고 기업인 이재용이 추구하는 일관된 꿈입니다. 이것이 이뤄질 때 저 나름대로 승어부에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근 아버님을 여읜 아들로서 국격에 맞는 새로운 삼성 만들어 너무나도 존경하고 또 존경하는 아버님께 효도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적절한 부탁인지 모르겠으나 한가지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다 제 책임입니다. 죄를 물으실 일이 있으시다면 저한테 물어주십시오. 제 옆에 같이 계신 선배님들은 평생 회사를 헌신해온 분들입니다. 저를 꾸짖어주십시오. 이분들은 너무 꾸짖지 말아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끝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1-01-05 20: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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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90)] 기독교의 얼나는 인류 최고의 사상 [영화 '나사렛 예수'(1977)의 한 장면.] 예수가 말한 '나'는 바로 '얼나'다 1905년 봄 15세 소년 류영모는 서울 연동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온 지 112년, 기독교가 들어온 지 22년이 되던 해였다. 소년은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설교를 들었다. 게일은 'GOD'을 천주(天主)라는 말을 쓰느냐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느냐 고심하다가 '하나님'이란 우리말로 정착시킨, 한국 기독교의 선구적 헌신자다. 신약성경이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1887년이었고, 구약은 1910년이다. 류영모가 기독교에 입문하던 시절, 구약은 중국어 번역본이었다. 류영모는 기독교를 알게된 지 51년이 되는 1956년에, 이런 말을 하였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 14장 6절). 하느님이 주신 얼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는 하느님이 예수의 마음속에 보낸 얼나가 예수 자신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깨달은 것이다. 예수는 얼나와 길, 얼나와 진리, 얼나와 생명이 둘이 아닌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얼나를 길(道)로 표현한 이가 노자이며, 얼나를 진리로 표현한 이가 석가이며, 얼나를 생명으로 표현한 이가 예수다." 성서의 가장 유명한 구절을 풀어놓은 이 말에는 류영모가 평생을 통해 깨달은 진리가 숨어있다. 그는 예수의 말 중에서 주어(主語)인 '내(나)'를 '하느님이 주신 얼나'로 풀었다. 하느님이 주셨다는 것은 '얼나'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보완적인 수식어이며, 그는 예수가 스스로를 '나'라고 표현한 것을 '얼나'라고 분명하게 규정해준 것이다. 얼나는 얼(靈)의 나를 줄인 말로, 성령으로 태어난 '나'이다. 류영모의 '얼나'는 그의 사상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류영모가 위대한 이유는, 많은 이들이 추상적으로 혹은 개념적으로 이해했던 '얼나'를 뚜렷하게 사상의 중심주제로 궁구한 사상가였다는 점이다. 기독교를 배태한 서구인들 스스로도, 예수가 설파한 그 참뜻만큼 철두철미하게 인식하지 못했던 '성령'의 문제를, 동서양 사상의 해박한 회통(會通)과 기독교 사상 자체에 대한 순일한 정진을 거쳐 결정적인 깨달음에 당도했다는 바로 그 점이다. 기독교가 20세기에 이르러 동양의 어느 대각(大覺)에게서 본질적인 깨달음의 발화(發火)가 이토록 치열하게 이뤄질 것을 짐작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평생의 성서 연구 속에서 신의 진언(眞言)과 예수의 직언(直言)을 읽어냈다. 그 진언과 직언 바깥의 많은 수식(修飾)들은 종교에 대한 세속적 욕망을 담은 '인간들의 책략'으로 이뤄진 번잡한 해석과 과장과 미화들임을 간파했다. 예수라는 자아를 '얼나(靈我)'로 기표한 순간, 기독교는 세상의 많은 신앙과 종교와 사상이 지닌 보편을 가장 적실하게 실체화했으며 오직 그것만으로 생명을 얻은 종교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얼나의 잣대로 보면, '쭉정이'가 보인다 예수가 '얼나'로 거듭난 신의 아들(人子)이라는 뚜렷한 사실 앞에, 예수의 제자와 기자(記者)들이 쏟아낸 팩트와 가짜뉴스들은 알곡과 쭉정이처럼 가려질 수 있었다. '얼나'가 드러내는 가장 진지한 핵심은 '몸'이라는 다른 자아에 대한 문제성이었다. 류영모는 이것을 얼나와 대비하여 몸나(肉我)로 표현했다. 몸, 혹은 몸나. 이것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인간이 '자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생물학적 존재인 그것이다. 몸나의 존재성과 가치와 의미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짐승들이나 나무들도 몸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분명하며 뚜렷하다. 몸을 주관하는 의식이 있으며 생물학적 체계를 이끌어가는 시스템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태어나고 사멸하는 시간적인 존재다. 이 모든 것이 우주 만물의 생성사멸 대계(大系)를 지금 여기에 있게 한 창조주의 작품인 것도 의심할 나위가 없다. 다만 몸나는 얼나를 품고 있는 것이며, 시간의 태엽이 감긴 껍질일 뿐이다. 예수는, 그 몸의 삶이 진행되는 인간 속에, 신의 일부이자 대행자이자 뜻이자 아들이자 전부인 무엇이 완전하게 들어와 있음을 확신한 첫 사람이었다. 신의 그 무엇과, 인간이 뚜렷이 생각한 믿음이 굳게 하나로 일치하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절대세계와 상대세계가 결코 하나의 세계에서 만날 수 없다는 '모순'이, 신의 의지에 의해 혁신된 것이다. 이것이 예수 현상의 진면목이다. 그리고 이것 외에 어떤 현상도 예수 현상이란 이름을 붙일 수 없다. 만약 그런 이름이 붙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창작이거나 과장이거나 미화, 혹은 오해에 불과하다. 예수 이후 2000년간의 서구 역사가 일정하게 구축해온 기독교의 믿음과 기록과 교리와 교의와 준칙과 관행들은, 최초의 예수 현상에서 상당히 멀어져온 것이 사실이다. 류영모는 예수가 인간의 회임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 많은 초인적인 기적을 행사했으며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려냈다는 것,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것은 물리적인 혹은 역사적인 사실 여부를 따질 필요도 없는, 신앙적 군더더기로 이해했다.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로마의 폭력적 형틀인 십자가 자체에 대한 지나친 의미 부여도, 오히려 불필요한 신앙적 장식으로 보았다. 그것은 인간 속에 하느님의 '얼'이 들어와 있는 예수를 보여준 그 자체의 기적에 비하여 말초적이고 기복(祈福)적인 이야기 삽입일 뿐이라는 얘기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이런 이야기들이 끼어든 것은, '얼나의 기적'을 수많은 다양한 대중에게 제대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기에 끼워넣은 유치한 방편에 불과했다. 톨스토이는 4대 복음서를 하나로 요약한 '통일복음서'를 펴냈다. 그 속에는 교회가 지금껏 중요시해온 것들의 일부가 빠져있다. 세례 요한의 수태와 출생, 투옥과 죽음을 빼버렸고, 예수의 출생과 가족계보, 이집트 탈출 부분을 잘라냈고, 가나와 가버나움에서 펼친 그리스도 기적과 악마 축출, 바다 위를 걷는 기적, 무화과나무의 건조, 병자 치료, 죽은 이의 소생을 제외시켰다. 또 예수의 부활과 예수 예언의 성취 같은 부분도 없앴다. 기독교회의 입장에서 보자면, 가장 힘주어 전파해온 성서의 부분들을 잘라낸 셈이다. 통일복음서 서문에서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것들은 조금도 교훈을 담고 있지 않다. 경전을 번잡하게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복음서의 한 구절 한 구절이 다 신성하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예수는 무지한 군중에게 설교했다. 예수가 죽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그에 대해 들은 것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5만종의 기록물 중에서 세 가지를 고르고 한 가지 요한복음을 더 골랐다. 성경 복음이 모두 성령으로 보내진 것이라는 상투적인 견해에 미혹되어선 안 된다." 교회는 이렇게 의문을 제기하거나 반론을 제시하는 입들을 억압하고 이단으로 몰아내는 데 급급했으며, 스스로 예수의 본질을 잊거나 잃고 오히려 신의 존재에 대한 끝없는 불신을 양산하는 엉뚱한 길로 나아간 점이 있다. '형식적이고 생활적인 신앙'으로 규모를 불려온 교회와 교단은 참예수를 놓친 바 있었고 그 예수가 증언한 신의 길과 진리와 생명을 잃어버렸다. 서구교회의 오류와 모순을 맨눈으로 직관 류영모는 서구 교회의 어긋난 모습을 동양의 '맨눈'으로 직관했다. 그리고 기독교 정통신앙과 결별한다. 기독교 입문 7년 만인 1912년 무렵 조용히 교회를 나왔다. 하지만, 류영모 삶의 맥락에서, 서구 교회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을 읽어내는 데 굳이 치중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건 중요한 문제이나 류영모 사상의 본질을 드러내는 하나의 계기일 뿐이다. 그것이 필요하다면 저 신랄한 톨스토이나, <안티크리스트>를 쓴 니체 같은 뛰어난 지성들의 견해를 숙독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다. 하느님과 예수의 관계를 동양적 부자유친(父子有親) 관념으로 이해한 것은, 류영모의 독특한 사유다. 맹자가 설파한 오륜(五倫)은 다섯 가지 인간관계인 부자, 군신, 부부, 장유(어른과 어린이), 붕우의 핵심도리를 규정하고 있다. 그중에 아버지와 아들은 '친(親)'이란 모럴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 글자는 '친(亲, 어버이,몸,가까이함)'과 견(見)이 합쳐진 말이다. 어버이는 몸을 낳은 사람이기에 서로 늘 가까이 하며 보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어버이가 자식을 아끼는 내리사랑은 거의 생물학적으로 당연한 반면, 자식이 어버이를 아끼는 치사랑은 인간이 윤리적인 의식을 통해 높여야 하는 관계감정이라고 한다. 동양에서 쓴 이 윤리감각을, 류영모는 기독교의 하느님 아버지와 인자(人子)가 지녀야하는 신학적 모럴로 승화했다.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반면, 인간이 하느님을 가까이 하려는 감정은 끝없는 북돋움과 수행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류영모는 예수를 '신'으로 보지 않았다. '신의 대행자'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다만, 하느님이 그에게 얼나로 내려온 인간이며, 모든 신앙이 닿고자 하는 궁극적 모델이라고 생각했다. 신은 예수의 진정한 아버지였으며, 그는 사람으로서 완전한 신의 아들이었다. 그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음으로써 예수처럼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러 온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류영모는 예수를 '스승'이라고 일컬었다. 먼저 하느님 아들이 되어, 제자들을 부르고 있는 존재로 이해한 것이다. 류영모는 오로지 예수처럼 살고 예수처럼 생각하고 예수처럼 하느님 아버지를 모시며 예수처럼 사랑하며 예수처럼 외롭지만 분명한 길을 가고자 했다. 성서에 나온 부활을, 그는 '예수처럼 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하느님의 임재(臨在)인 얼나로 거듭나는 일이 예수처럼 되는 일이며, 바로 '부활의 기적'이다. 그리고 예수의 가장 중요한 실천인 '죽음'을 하느님과의 일체가 되는 깨달음으로 이해했다. ......................... [다석 류영모] [이빈섬의 '다석긔림노래'(2)] 얼나 어,하고 놀라는 사이 혀가 미끄러져 천장을 감습니다 몸없는 몸으로 속없는 속으로 자기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 얼 거기가 거기를 얼우는 소리, 얼 누구있습니까 항문에서 내장에서 심장에서 숨길에서 목구멍에서 어둠이 올라오며 부릅니다 얼웁니다 얼 굴을 돌아돌아 나온 얼굴 나 온얼굴 어둠이 내려가며 어루만집니다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다 들립니다 있는 말숨 없는 말숨 다 보입니다 천지의 빈탕이 내 속 한 점이었구나 딱 앉은 자리, 얼 위를 둘러봐도 아래를 내려봐도 아무도 없습니다 나와 하나 한과 나 얼척 없습니다 몸이 껍질이요 빔이 속인 줄 알겠습니다 온통 밖으로 헤맸던 눈들이 돌아와 내 안에 걸린 캄캄한 한 점을 봅니다 생각이 타오른 불꽃 불꽃이 사윈 끝생각 왜 거기 계십니까 천만 개의 예언이 퍼내고 퍼내도 남는 살음이여 그토록 저토록 이토록 막힌 궁리가 툭 터진 속자리 이렇게 시원한 살림이 계시다니요 누구가 누구를 찾아낸 기쁨, 얼 어디가 어디를 돌아본 놀람, 얼 몸이 아니라 몸의 몸 맘이 아니라 맘의 맘 없는 거기서 있는 여기까지 울리는 메아리 한 줄기 이토록 시원한 얼님과 나님을 뵈었습니다 ........................... [다석 류영모] 예수 "얼나를 모독하는 자 용서받을 수 없다" 얼나는, 상대세계에 가상적으로만 존재하는 '점(點)'과도 같다. 상대적인 인간의 육신에 깃든 절대적인 하느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상대세계와 절대세계가 공존할 수 없다는 이론적 관점에서는 모순이며 역설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얼(靈)'은 몸 속에 어떤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곳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것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인간 생각의 끝에 닿아있으며, 그 생각의 지향을 만들어내며 그 생각의 비약과 초월을 자극하며 인간 외의 어떤 생물에게서도 포착되지 않은 승화(昇華)하는 영적 성질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꾸준히 인간 사유의 화두가 되어온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런 말을 했다. "만약 육신이 영혼 때문에 존재하게 된 것이라면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만약 영혼이 육신 때문에 존재하게 된 것이라면 그건 놀라운 일 중에서도 놀라운 일일 것이다. 나는 영혼의 엄청난 풍요로움이 어떻게 이런 빈약한 육신 속에 깃들게 되었는지 놀란다"(도마복음 29장). 얼나가 있어서 몸이 만들어졌는가. 혹은 몸이 만들어지면서 얼나가 생겼는가. 이 수수께끼를 예수도 언급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얼이 몸을 생겨나게 한 것보다, 몸이 얼을 깃들게 했다면 그게 더 놀라운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예수가 말한 얼의 풍요는 바로, '하느님의 임재(臨在)'가 자아낸 풍요다. 예수가 언급한 것은 자신의 육신과 성령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지만, 모든 인간의 육신과 성령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즉 인간에게 주어진 얼과 몸으로 이뤄진 두 개의 자아를 인정하면서, 예수 자신 또한 육신에 존재하는 영혼의 놀라움을 가장 뚜렷하게 실현한 존재라는 인식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예수는 이런 말도 했다. "아버지에 대해 모독하는 자는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 아들(예수)을 모독하는 자도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이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도마복음 44장). 성령은 곧 얼나다. 하느님과 자신을 모독하는 것을 참을 수는 있지만, 자신과 하느님의 고유한 본질인 '얼나'를 모독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단언이다. 예수가 인자(人子)로 보내진 뜻은, 인간 속의 얼나를 통해 하느님을 증언하는 것이었으며, 그의 죽음은 '얼나'가 결코 육신의 죽음에 제약을 받지 않고 오히려 육신의 죽음으로 신에게 귀일하는 강력한 에너지를 드러내보인 위대한 전시(展示)였다. 얼나는 바로 예수의 유일한 메시지였고,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 그 자체였다. 류영모 사상은, 이 지점에서 발화한다. 그는 얼을 지닌 인간을 표현하는 간명하면서도 강력한 말을 만들었다. 그것이 '얼'과 '나'를 결합한 얼나다. 얼나는 몸나(身我) 혹은 제나(自我)로 불리는 육신에 대비한 자아의 개념이다. 몸나와 얼나는 두 개의 '나'가 아니라 하나의 '나'에 결합되는 양상이나 면모를 말하는 것이다. 얼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예수가 표현했듯, 몸에 속한 얼이나 몸을 낳은 얼이 '나'라는 존재에 얼마나 순일하면서도 지속적으로 합일하느냐에 따라 뚜렷해지거나 희미해지는 '얼의 나'다. '얼나'는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 인심유위 도심유미(人心惟危 道心惟微)처럼 위태롭고 아리송하여 늘 추스르고 생각의 불꽃으로 정진해야 하는 '잠정적인 상태'에 가깝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얼나라는 생각밖에는 다른 생각이 없다. 모든 게 얼나가 원점이 되어서 나온다. 얼나를 생각하면 묵은 것도 새것도 없다. 얼나가 중심이다. 불교의 중도, 노자의 수중(守中), 유교의 중용은 일체가 하느님께 돌아가자는 것이다. 얼나는 예사롭게 저거니 하고 갈 게 아니다. 이 얼나가 대실존(大實存)일 것이다. 이 얼나는 진실이니 할 정도가 아니다. 이 사람 생각은 늘 얼나를 떠나지 않고 얼나에서 모든 게 나온다. 이것을 모르면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 얼나는 '얼라'의 영(靈)에 가깝다 우리 말 사투리 중에 '얼라(어린아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예수는 '얼나'의 이상적 모델을 자주 '얼라'로 표현하곤 했다. 동심이 지닌, 인간 내면의 원형적인 순수야말로 신의 이미지에 가깝다고 본 것이다. 예수는 "너희 중에 어린아이가 된 자는 누구나 아버지의 나라를 알 수 있으며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이 될 수 있다"(도마복음 46장)고 말하기도 했다. 또 자신(예수)을 만날 수 있으려면 "옷을 벗고도 부끄러움이 없고 아이들처럼 발밑에 벗어놓은 옷을 함부로 밟는 그런 마음일 때"(도마복음 37장) 인자(人子)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을 보며 예수는 "이 아기들은 아버지 나라에 들어가는 이들(의 영성)과 같다"고 했고 "태어난 지 7일 밖에 안되는 어린아이에게 노인들은 생명의 장소를 물어보라"고 말하기도 했다. 얼나의 이상적인 영적 상황을, 인간의 탐욕이나 사회적인 에고와 성적 욕망이 육신에 들어앉기 이전인 상태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얼라와 통하는 얼나는, 우리 언어가 낳은 우연한 닮음이겠지만 '얼라'의 말뿌리를 이루는 '어리다'는 말이, '얼'이 고착되지 않았다는 뉘앙스가 있는 만큼 완전한 우연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예수는 육신의 할례를 받는 것을 비판하고(정말 필요했다면 모체에서 이미 할례를 받고 태어났을 것이다), 얼의 할례를 받으라고 말하기도 했다. 얼의 할례야말로 성령에 합당한 '얼나'로 가는 수행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류영모는 말했다. "우리 앞에는 영원한 생명인 얼줄이 드리워져 있다. 이 우주에는 도라 해도 좋고 법이라 해도 좋은 얼줄이 영원히 드리워져 있다. 우리는 이 얼줄을 버릴 수도 없고 떠날 수도 없다. 이 한 얼줄을 생각으로 찾아 잡고 좇아 살아야 한다. 이 얼의 줄, 정신의 줄, 영생의 줄, 말씀의 줄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집필 = 이상국 논설실장 감수 및 자문 =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2021-01-04 01:3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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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 이상국의 뷰] 소는 찾았습니까, 심우십도와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곽암의 십우도송 곽암(廓庵, 송나라 승려 곽암사원 廓庵師遠)의 十牛圖頌(십우도송, 십우도를 노래함). '열 장의 소그림(혹은 심우십도(尋牛十圖)라고도 한다)'을 보며 쓴 10편의 칠언절구다. 잃어버린 소를 찾는다는 것은 도(道)를 찾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찾는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방편이기도 하다.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할 때, 그 잃어버린 것을 얼른 채워야 한다고 생각할 때, 인간은 그 찾는 대상에 대해 지나치게 의미를 두고 가치를 매겨 오히려 마음의 평안함을 해치기 쉽다. 소는 중요한 것이고, 소는 목표이며 문제의 끝인 것 같지만, 그것은 그냥 '내'가 아닌 소일 뿐이며 그것이 내게로 들어온다 해도 내 손에 없었을 때와 달라진 건 없다. 찾아야할 것은 소가 아니라, 소를 찾아야 한다는 그 마음을 놓는 일이다. 잃어버린 것을 찾고나면 그것을 긴요하게 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 곁에 둔 채 다시 잊어버린다. 이것이 소유의 정체이며 이것이 득물(得物)의 진상이다. 진리는 소유나 득물에 있지 않고, 소유와 득물에 따라 움직이는 마음의 양상에 있다. 필요한 모든 것은, 그 물건이 아니라 그 물건이 필요하다는 마음의 진상을 보고 그 동요를 진정시켜 평화를 얻는 것에 있다. 소도 사람도 새끼줄도 다 잊어버려라 소도 사람도 새끼줄도 다 잊어버리는 것. 그것이 진정한 득물이며 인간사의 진리가 머무는 곳이라는 통찰을 담고 있는, 흥미로운 수행시다. 흰소의 해 아침에, 올해 마음이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 가만히 일러주는 시다. 이참에 시를 한번 곰곰이 읽어보는 것도 좋으리라. [밀양 만어사의 심우도 제1 '심우'] 제1편 심우(尋牛, 소를 찾아서) 忙忙撥草去追尋(망망발초거추심) 水濶山遙路更深(수활산요로경심) 力盡神疲無處覓(역진신피무처멱) 但聞楓樹晩蟬吟(단문풍수만선음) 부랴부랴 풀을 헤치며 찾아 나섰다 강은 넓고 산은 아득하고 가는 길은 깊구나 힘은 빠지고 정신은 지치고 찾을 곳이 없구나 다만 단풍나무 늦저녁 매미 우는 소리뿐 [밀양 만어사의 심우도 제2 '견적'] 제2편 견적(見跡, 발자국을 보다) 水邊林下跡偏多(수변임하적편다) 芳草離披見也麽(방초리피견야마) 縱是深山更深處(종시심산경심처) 遼天鼻孔怎藏他(요천비공즘장타) 물가 나무 밑에 발자국이 유난히 많은데 풀꽃이 떨어져나갔으니 보았도다 작은 자취 쭉 이어진 이 깊은 산 더 깊은 곳이라 한들 먼하늘 콧구멍을 어찌 따로 숨기겠는가 [밀양 만어사의 심우도 제3 '견우'] 제3편 견우(見牛, 소를 발견하다) 黃鸝枝上一聲聲(황례지상일성성) 日暖風和岸柳靑(일난풍화안류청) 只此更無回避處(지차경무회피처) 森森頭角畵難成(삼삼두각화난성) 노란 꾀꼬리 가지에 앉아 한 울음 우나니 햇살 따스하고 바람 좋은데 물가버들 푸르다 오롯이 이곳이 더없이 돌아숨을 자리인데 깊은 숲숲 드러낸 뿔 그려내기 어렵구나 [밀양 만어사의 심우도 제4 '득우'] 제4편 득우(得牛, 소를 얻다) 竭盡神通獲得渠(갈진신통획득거) 心强力壯卒難除(심강역장졸난제) 有時纔到高原上(유시재도고원상) 又入烟雲深處居(우입연운심처거) 온힘을 다해 신통하게 개울에서 붙잡아 얻었으나 마음은 굳세고 힘은 억세어 끝내 다루기 어렵구나 때가 되어 겨우 높은 언덕 위에 오르니 다시 안개구름 속 깊은 곳에 들다 [밀양 만어사의 심우도 제5 '목우'] 제5편 목우(牧牛, 소를 키우다) 鞭索時時不離身(편삭시시불리신) 恐伊縱步入埃塵(공이종보입애진) 相將牧得純和也(상장목득순화야) 羈鎖無抑自逐人(기쇄무억자축인) 새끼줄을 언제나 몸에서 못 벗기는 건 걸음을 곧장 딛어 티끌 속으로 들까 두려워서네 서로 잘하여 장차 길이 들고 부드러워지면 굴레로 가두지 않고 스스로 사람을 따르리 [밀양 만어사의 심우도 제6 '기우귀가'] 제6편 기우귀가(騎牛歸家, 소 타고 집에 오다) 騎牛迤邐欲還家(기우이리욕환가) 羌笛聲聲送晩霞(강적성성송만하) 一拍一歌無限意(일박일가무한의) 知音何必鼓脣牙(지음하필고순아) 소 타고 흔들흔들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피리소리가 울려퍼지며 저녁노을에 흐르네 한 박자 한 구절 끝없는 뜻이 담겨있으니 노래를 아는데 북의 가죽과 채가 필요하리오 [밀양 만어사의 심우도 제7 '망우재인'] 제7편 망우재인(忘牛在人, 소를 잊고 사람만 있구나) 騎牛已得到家山(기우이득도가산) 牛也空兮人也閑(우야공혜인야한) 紅日三竿猶作夢(홍일삼간유작몽) 鞭繩空頓草堂間(편승공돈초당간) 소를 타고 이윽고 산골 집에 이르니 소는 벌써 마음에 없어 사람은 한가롭다 붉은 해는 세 줄기 긴 빛인데 오히려 꿈을 꾸고 있구나 채찍은 쓸 일 없어 초가집 안에 가만히 놔뒀나니 [밀양 만어사의 심우도 제8 '인우구망'] 제8편 인우구망(人牛俱忘, 사람도 소도 다 잊었다) 鞭索人牛盡屬空(편삭인우진속공) 碧天寥廓信難通(벽천료곽신난통) 紅爐焰上爭容雪(홍로염상쟁용설) 到此方能合祖宗(도차방능합조종) 새끼줄도 사람도 소도 모두 텅빈 곳에 들었으니 푸른 하늘 허공 너른 곳 소통하기가 어렵구나 붉은 화로 불꽃 위에 다투며 눈발이 녹아내리듯 이쯤 이르면 옛사람 뜻과 맞아질 수 있다네 [밀양 만어사의 심우도 제9 '반본환원'] 제9편 반본환원(返本還源, 근본을 돌이켜 뿌리로 돌아감) 返本還源已費功(반본환원이비공) 爭如直下若盲聾(쟁여직하약맹롱) 庵中不見庵前物(암중불견암전물) 水自茫茫花自紅(수자망망화자홍) 근본 돌이켜 뿌리로 돌아가려니 이미 애쓴 바가 있어 바로 내려가려는듯 다투니 눈먼 자 귀먼 자와 같구나 암자에 앉아 암자 앞의 것도 못 보니 물은 스스로 아득아득하고 꽃은 저절로 붉었구나 [밀양 만어사의 심우도 제10 '입전수수'] 제10편 입전수수(入廛垂手, 손을 놓고 세상에 들다) 露胸跣足入廛來(노흉선족입전래) 抹土塗灰笑滿腮(말토도회소만시) 不用神仙眞秘訣(불용신선진비결) 直敎枯木放花開(직교고목방화개) 맨가슴과 맨발로 집에 들어와서 흙과 회로 벽을 바르니 웃음이 뺨에 가득하다 신선도 진리의 비결도 쓸 곳 없구나 죽은 나무를 직접 가르치니 바로 꽃이 피도다 [필자 번역] [만해 한용운 초상화.] 만해 한용운의 시 '심우장' 스님이었단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심우장(尋牛莊)'이라는 시를 남겼다. '소를 찾는 집'이란 뜻이다. 잃은 소 없건마는 찾을 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시 분명타 하면 찾은들 지닐소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尋牛莊).1' 심우장은, 서울 성북동에 있는 만해 한용운(1879~1944)의 옛집에 붙은 당호(堂號)다. 1933년 집을 지을 무렵, 남향으로 지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되는지라 그것을 피하여 등돌려 산비탈 쪽인 북향으로 지었다는 그 집이다. 그 때문에 응달이 되어 겨울엔 한없이 춥고 여름엔 습기로 후덥지근해 살기엔 더없이 불편한 거처였으나, 그는 이 불편당(不便堂)을 심신의 자리로 삼는다. 1944년 중풍으로 숨을 거둘 때에도 이 방에 있었다. 심우장은 선불교의 '깨달음 열 과정'을 은유로 표현한 심우십도에서 땄다. 현판은 서예가 독립운동가 오세창(1864~1953)이 썼다. 만해는 이 집을 '심우장'이라 이름하였으나, 도(道, 진리)라는 것이 어디 특별한 곳에 있어서 그것의 고삐를 잡아 끌고 온다는 다소 기계적인 은유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심우의 뜻을 곱씹는 시를 남겼다. 마음에 한 도가 있었는데 그걸 잃어버렸다는 상황이 우스꽝스럽고, 잃어버린 도를 굳이 찾아나선다는 것 또한 얄궂다고 생각했다. 찾음 속에 잃음의 강박이 있다 아마도 곽암스님의 10편 시보다 만해의 한 줄 핀잔이 훨씬 수(手)가 높지 않나 싶을 만큼 진리에 직핍한다. 무엇인가를 찾는다는 건, 잃음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찾음 속에 잃음의 강박이 들어있는 것이기에 찾았다 하더라도 잃은 것이나 다름 없다는 통찰이다. 잃고 찾음의 경계를 놓아버리고, 그것에 얽매이지 않으면 다시 잃어버릴 일이 없으니 찾은 것보다 더 제대로 찾은 것이 아니냐는 일갈이다. 이래서 고수는 고수다. [서울 성북동 '심우장'. (사진=연합뉴스)] 그리고 실우(失牛)와 심우(尋牛)로 도식화한 철학보다 '불실불심(不失不尋)'의 평정이 훨씬 부처의 뜻에 걸맞기도 하다. 만해에게는, 저 심우(尋牛)가 조국의 광복과 연결지어져 특히 간절해져 있던 상황인지라,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러 있던 일제 말기에 이를수록 저 심우의 강박이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기분을 부른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 끈을 끊어 놓아버리라는 건 곽암을 향한 불평이 아니라 스스로를 향한 심리처방 같은 것이기도 했으리라. 그래도, 그는 그 심우의 방에서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그 한기를 오롯이 느끼며 살아냈다. 심우장 방안에 걸린 '마저위절(磨杵葦絶)' 만해의 네 글자는, 절망을 이기는 치열한 공부의 풍경을 드러낸다. 마저(磨杵)는 절굿공이를 바늘로 만들만큼 갈고 닦는 것이요, 위절(葦絶)은 주역의 가죽(韋, 여기서는 갈대 葦) 표지가 닳도록 공부한 공자의 집요함이 숨어있는 것이다. 책을 읽고 글씨를 쓰고 생각을 다듬는 것이, 소를 잃고 찾는 공허한 경계보다 더 의미있고 절실한 수행처였는지 모른다. 만해에게는. 소를 찾던 사람. 소들이 사라진 빈 자리. 뒤늦게 마음이 따라 어슬렁어슬렁 거닐어 보는 흰소의 해 벽두. 이상국 논설실장 2021-01-03 23:4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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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 이상국 송년시] 허허(虛虛) 2020 2020 경자년 한 해가 저물고 있는 12월, 충남 안면도 꽃지 해수욕장을 찾은 시민들이 코로나19로 지친 일상을 위로라도 하듯 차분하게 석양을 바라보고 있다.[연합뉴스] [빈섬 이상국의 송년시] 허허(虛虛) 2020 - 저무는 이공이공(異恐利空)에게 해가 저뭅니다 숨 막히는 날들의 끝, 흐린 해 저뭅니다 해는 무엇하러 저무는지 마음도 저물지 못하고 입술 바짝바짝 타들고 애간장 저미는데 해는 무슨 낯으로 기우는지 붉어질 것도 없는 사람들 앞에서 무엇을 마무리 하라는지 그래도 문득 돌아보니 그 사람 생각납니다 복면같은 흰 두건 우주복 같이 둔한 가운 영혼도 박제된 채 피곤에 쩔은 어느 의료진 좁은 의자 위 잠깐 졸던 풍경에 우린 울었습니다 타인을 위해 목숨 바친다는 것 총알 날아드는 전쟁터에만 그런 건 아니더이다 이름 없는 영광에 사지(死地) 넘나들며 고결한 빛 남겼던 그들이 햇살이었습니다 그 사진 한 장이 마음에 또렷 남았습니다 힘겨운 날일수록 바른 것들은 더욱 곧아져 삶의 투정들이 그 거울에 오히려 무색해졌지요 하나의 해를 고단히 담아내며 알게된 것은 이 나라 바탕에 큰 마음이 있구나 쪼갤 수 없는 하나의 고결한 빛이 있구나 그러나 그건 잠깐의 위안일 뿐 왼쪽 뺨 때려 오른쪽을 다시 치는 우행의 나날 남불나행 내로남불 공감없는 쪽생각들이 자기만의 공터에서 내지르는 아우성을 이뤘습니다 정치는 독주하고 경제는 죽쑤고 갈피를 잃었습니다 코로나보다 무서운 우리 안의 역병 나라를 두 동강낸 생각 속의 분단 건너갈 수도 없을 만큼 깊이 파인 골짜기 세상에 이런 패거리 저런 거리두기를 보았는지요 첫날과 끝날까지 쥔 멱살 놓지 않은 나라 해가 저물도록 백신은 아직 당도하지 않았습니다 화해와 포용의 백신 또한 배송사고가 난 듯 합니다 이리 치고 저리 떠밀다 어느 새 맞는 시간 해 앞에 문득 먹먹해진 옷깃 그러나 여밀 마음도 못낸 채 마스크 속에서 부끄러움 잠시 붉어지나니 이상국 논설실장(이빈섬 시인) 異恐利空 : 너를 이공이공이라 부르마. 유난한 공포였던 한해여서 異恐(이공)이고 이로움(경제)은 빈손이었던 한해여서 利空(이공)이구나. 연초에 고개를 든 코로나는 갈수록 점증하는 재앙이 되었고, 인류가 뿔뿔이 흩어져 거리를 두고 공장이 멈추고 유통이 문을 닫으면서 일손을 놓고 버티는 사람들이 들끓고 정치 또한 의욕은 앞서고 지혜는 뒤처져 갈피를 못잡고 갈등과 소모만을 일삼았으니 모두가 불안하고 저마다 혼란스러운 세밑에 이르렀구나.) [2020년 아주경제 송년시.] 2020-12-31 15:5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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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89] 류영모는 예수를 스승이라 불렀다 섣부른 생각이 감히 용훼하기엔, 다석 류영모는 너무 크고 깊은 사람이다. 원고 30장을 꽉 채우는 시리즈 88회로, 그 생애를 일별하는 작업을 끝냈다. 지금부터는, 그의 사상을 나름으로 추슬러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나의 깜냥으로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것도 알 수 없다. 좋은 의욕의 발로라 해도, 위험천만한 상황이지만, 지금에 와서 그걸 생략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여러 제자들이 이미 많은 말씀을 하셨고, 정리도 하셨으며, 깊고 다양한 분석도 나와 있다. 그걸 살피며 가만히 돋는 갈증이 있었다. 정작 다석사상의 정수(精髓)를 정면으로 파고 들어가서 그의 위대함을 캐내려고 한, 곡괭이 자국은 미약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석사상은, 한국의 사상이 아니라 세계의 사상이며 역사적으로는 인류의 사상이다. 그것을 아울러 인간의 사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 한끼의 실천이나 동서양을 아우르는 해박함이나 우리말로 철학을 한 독창성과 같은, '방편'의 위대함에 치중하지 않겠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본질은, 그의 사상이 무엇을 지향했으며 어떤 성취를 거뒀으며 후세의 우리들에게 무엇을 남겼느냐는 점이 아닐까 한다. 다석은 무엇이었나. 무디기 짝이 없을 곡괭이 날 하나로, 한 사상의 거대한 광맥 속으로 무모하게 파고 들고자 한다. 거친 작업이니 감안과 용서를 바란다. 첫편은 다석사상 중에서 무비(無比)의 명료함을 지닌 고갱이라 할 수 있는 '얼나사상'이다. [다석 류영모] 죽음의 공포는 어디서 오는가 "죽음의 공포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그릇된 인생관에 의하여 제한되어 있는 인생의 한 소부분을 전인생이라고 해석하는 데서 생긴다." 톨스토이의 이 말은, 태어난 모든 인간이 지닌 치명적인 문제의 진상을 밝힌 탁월한 성찰이다. 죽음을 왜 두려워 하는가. 인생에 대해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제한되어 있는 인생의 한 소부분'은, 우리가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생이다. 이것을 인생의 전부라고 보는 시선이 왜 잘못인가. 우리가 태어나서 죽는 그 사이에 있는 인생은, 오직 몸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몸이 태어났고 몸이 죽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 말고 또 무엇이 있는가. 그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죽음의 공포는 '몸의 삶이 끝나는 것에 대한 공포'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몸이 전부가 아니라면, 죽음 또한 전부의 죽음일 수 없으며 죽음이 아닐 수도 있다. 바로 이 문제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몸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데서 온다. 톨스토이는, 몸의 삶이 인생의 소부분이라고 단언했다. 몸의 삶과 일시적으로 동행하는 다른 삶이 있다. 몸의 삶이 철저하게 시간에 속한 것이라면, 다른 삶은 시간을 초월한 것이다. 몸의 삶이 생멸을 겪는 상대세계의 것이라면, 다른 삶은 상대세계 너머에 있다. 몸의 삶 속에 다른 것이 들어와 있다 그 다른 삶을 뭐라고 말해도 좋다. 몸의 삶에 깃든 영원한 무엇. 그것을 성령이라 부르든, 얼이라 하든, 하느님이라 하든, 생령(生靈)이라 하든, 또다른 무엇이라 말하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왜 있는지, 그것이 어디에 있고 어디에서 오며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그것은 우리의 몸과 같은 것이 아니며 우리를 고양시키고 완전하게 하는 무엇이라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종교는 죽음이라는 육신의 멈춤 상태에 대한 충격과 허무를 직면하지 않기 위해 생겨났다고 여긴다. 톨스토이의 입장에서 말하면, 신이나 종교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다. 인간이 육신이 아닌 영적인 감관으로 접한 무엇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표현한 것에 가깝다. 죽음을 회피하기 위해 고안한 인간적 처방일 뿐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개체적 죽음은 완전한 멸망'이라는 원초적 오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신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다. 인간이 만난 것이다. 인간 육신의 어떤 안테나가 인간 육신 너머의 거대한 질서와 규칙을 만난 것이다. 영성(靈性)은 시간적 존재인 인간의 불완전을 극복하게 하고 완전하게 한다. 동서양 인류가 오래전부터 기록해온, 절대적인 존재에 관한 면모는 인간이 불멸의 염원을 담아 그려놓은 신기루가 아니라 육신의 삶을 살면서 뜻밖에 접한 영적인 존재에 대한 끝없는 증언들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톨스토이를 믿는가. 톨스토이가 한 이 말은, 문득 생각난 김에 한 말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반복되어온 말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 及吾無身, 吾有何患. (오소이유대환자, 위오유신. 급오무신, 오유하환) 노자 도덕경 13장이다. "내가 크게 걱정이 있는 까닭은 내게 육신이 있기 때문이다. 내게 육신이 없다면 내가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노자 또한, 인간의 많은 불안이 몸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갈파했다. 그러나 노자는, 그 불안의 원인이라고 여기는 육신이 사실은 인간 삶의 일부일 뿐이라는 점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다만, 인간이 본능적으로 육신을 사랑하는 맹목을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돌린다면 천하를 맡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부활은 영성의 삶이다 톨스토이의 생각은, 정확하게 기독교 성경에서 왔다. 성경에선, 육신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말하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 11장 25-26) 예수의 이 말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말이기도 하다. 부활과 영생에 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육신이 부활하고 육신이 죽어도 사는 것이고 영원히 죽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로 읽을 때, 2천년간 이 종교를 초현실적인 육신신앙으로 바꾼 그 혼선에 들어서게 된다. 예수는 신의 뜻을 전하는 존재이기에, 인간의 육신을 오래 살리는 '장수의 과학'이나 죽음을 맞았을 때 다시 살려내는 '신의 의료'를 제안했을 수가 없다. 신은 인간의 필생과 필멸을 기획한 창조주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그가 스스로의 창조원칙들을 깨며 그를 믿게 하려고 했다는 '인격신(인간의 캐릭터를 지닌 신)'의 발상은 결코 예수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이 아닌가. 예수가 말한 부활과 영생은, 육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야 맥락이 자연스러워진다. 즉 몸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몸이 죽어도 사는 게 있으며 몸의 죽음과는 상관없이 부활이 가능하며 살아있는 몸이 나를 믿을지라도 그 몸과 함께 있는 무엇이 너희를 영원히 죽지 않게 할 것이다. 이것을 믿느냐고 질문한 것이다. 불사와 부활과 영생은, 몸이 아니라 바로 영성의 삶이다. 톨스토이가, 몸의 삶과는 다르게 죽음을 겪지 않는다고 했던 그것이다. 인간 속의 신을 확고하게 말한 건 기독교뿐 기독교가 동양의 종교나 사상의 주류를 이룬 불교, 유교, 도교 등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본질을 이루는 차이를 말한다면, 인간에게 하느님이 들어와 있음을 확신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믿음의 체계를 구성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불교도 유교도 도교 속에도,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암시나 묘사는 있었지만, 인간 속에 들어온 신을 인간에게 직접 만나게 해주는 성서적인 기적을 프레젠테이션하지 않았다. 이 같은 생각을 쉽게 해내지 못한 까닭은, 상대세계(물질계와 현상계)에 존재하는 인간과 절대세계의 신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접점을 지니는 것의 상식적 한계를 상대세계의 관점으로는 넘어설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 때문에, 인간과 신의 사이에는 '애매모호하거나 어둑한 경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서양적 신관(神觀)이 그 경계를 뚫고 신과 인간을 소통하게 한 힘은, 고대 그리스로 대표되는 '인간의 거울인 신들의 세상'에 대한 상상력에 일정 부분 힘입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인간의 특징들이 그대로 투영된 신들은, 그들의 세계를 이루며 인간세계로 넘나들며 관계를 맺어나간다. 고대의 사유체계는, 신들의 개성을 뚜렷하게 함으로써 불가사의하고 예측불허의 미래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려 했던 것 같다. 유태인들은 알 수 없는 신에 대한 공포를 구약에서 '분노의 신'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예수가 지상에 옴으로써 분노의 신이 인간의 오해였음을 깨닫게 하고,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 신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며 자식처럼 귀하게 여기며 생명의 근본적인 한계에서 구원할 대상으로 삼고 있다. 신에 대한 관점의 획기적 전환은 기독교를 인류의 신앙으로까지 확장하게 하는 힘을 지니게 된다. 신은 왜 인간을 사랑하는가. 예수는 그 물음에 대해, 가장 놀라운 답을 주었다. 세상을 창조한 신은 인간에게 하느님 그 자신을 넣어주었으며 자기 속에 들어와 있는 그 하느님을 발견하라고 한 것이다. 예수는 스스로가 그 말이 진실임을 보여주는 뚜렷한 모델케이스였다.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으나 자신 속에 하느님이 있음을 자각하고 하느님의 메시지를 읽어냈다. 성서 속에는,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하느님과 하늘이란 신성한 위치 속에 있는 하느님이 뒤섞여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의 내면에 절대세계의 신이 들어와 있을 수 있다는 관점을 열어준 점이다. 기독교가 인류를 감동시킨 핵심은 여기에 있다. [영화 '부활'의 한 장면.] 예수는 얼나를 증언하러온 얼나 예수 말하시기를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人子)가 너희에게 주리니 아버지 하느님께서 도장을 찍으신 자니라."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느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한 6:27~29) 썩을 양식은 몸을 위한 양식이고 영생의 양식은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하느님인 얼나를 위한 양식이다. 얼나의 양식을 주는 이는 인자인 예수다. 예수는 하느님이 도장을 찍어 보증한 존재다. 천부(天符)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일을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예수는 명쾌하게 말해주었다. 얼나의 양식을 주는 존재이자, 얼나의 시범자(示範者)인 예수를 믿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만나는 일이다. 성서는, 인간 속에 '하느님의 얼'을 불어넣어준 예수를 믿는 일이 곧 하느님을 믿는 일이라고 설명해준다. 예수의 이 말은 인간에게 몸 이외에 영생하도록 있는 무엇이 깃들어 있으며 이것에 양식을 주는 일을 충실히 하라는 조언이다. 하느님이 도장을 찍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업인 예수는 바로 '인간 속에 든 얼나'다. 그 얼나를 부양하면, 예수와 같이 인자가 될 수 있으며 육신이 생을 멈추었을 때 하느님의 영생에 합일할 수 있다는 약속을 하고 있다. "내가 너희들에게 말하노니 어떤 이라도 예외없이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는 예수의 말은 '위로부터 난다'는 표현으로 인간 육신의 탄생과는 다른 탄생을 말하고 있다. 아래로부터 나는 탄생인 몸생명에 비하여 성령의 생명이자 하느님 그 자체인 얼생명은 위로부터 난다고 했다. 이 얼생명의 탄생은, 몸생명과는 상관없는 생명이지만 몸생명 위에 다시 태어나는 부활임을 암시하고 있다. "몸으로 난 것은 몸이요, 얼(靈)로 난 것은 얼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한 3:6~7)고 예수는 그 뜻을 분명히 한다. 류영모는 "피와 살을 가진 짐승인 우리가 개나 돼지와 다른 것은 하느님과 교통하는 얼을 가졌다는 것 밖에 없다. 예수는 뚜렷이 하느님을 모시고 태초부터 자기가 모신 하느님이라 불렀다. 나도 이에 성령의 숨을 쉼으로 뚜렷이 하느님의 아들로 사람답게 살겠다는 한마디만 하고 싶은 것이다."('다석어록')라고 하였다. 예수가 예수다운 것은 영원한 생명인 성령의 나를 가르쳐준 데 있다. 류영모와 간디가, 예수를 '하느님'으로서가 아니라 '스승'으로 모시고자 했던 까닭도 거기에 있다. 예수는 '얼나'의 앞길을 간 스승이기 때문이다. 기독교회가 예수라는 이름과 성경이라는 경전을 우리에게 건네주었지만, 그들은 핵심진리인 얼나를 제대로 전수해주지 못했다. 그야말로 '얼'빠진 종교를 전해줬다는 비판은 바로 거기서 나온다. 마태복음은 이 어리석음을 이미 경고하고 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 7:21) 집필 = 이상국 논설실장 감수 및 자문 =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2020-12-28 20:5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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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 이상국의 뷰] 예수는 AD1년 성탄절에 태어나지 않았다 AD는 '그리스도의 해'라는 의미 기원전과 기원후. BC와 AD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서력기원(西曆紀元, 줄여서 서기(西紀))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개념이다. 525년 스키티아 출신의 연대사가(年代史家)이자 신학자인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Dionysius Exiguus)가 교황 요한 1세의 명을 받아 저술한 '부활제의 서(書)'에서 처음 썼으며 9세기 샤를마뉴 시대 이후 서양에서 보편화됐다. 인류역사의 서양식 연대(年代) 표시의 기점인 '서기'를 우리나라가 공식 채택한 것은 1962년이다. 그 이전엔 단군기원(단기)이었다. 지금은 세계 거의 모든 국가가 연대표시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서기'는, 예수 복음의 광명이 지구촌 전체에 퍼졌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근대 이후 진행된 글로벌화는 역사를 기산(起算)하는 동일한 기준을 필요로 했고, 서구 문명의 확산 형식으로 통합되어 온 세계는 인류의 시간을 '서기'에 맞췄다.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예수의 시간'을 살게된 셈이다. 그 복음(福音)의 스케줄 속에서 나날이 숨쉬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삶의 시간들이 예사롭지 않아진다. BC는 before Christ(그리스도 이전)의 줄임말이며 AD는 Anno Domini(그리스도의 해라는 뜻의 라틴어)의 약어다. 원래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는 AD인 안노 도미니란 표현만을 시했다. 이후 AD 이전의 연도를 표현할 말이 필요하면서 BC란 말이 등장했다. AD만 라틴어 표현으로 되어 있는 것은, 그것이 사용된 시차 때문으로 보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암굴의 성모'(1483년)] BC4년까지 통치한 헤로데왕 때 예수 탄생? 이 기준에 따르면 예수는 AD 1년에 태어났다는 얘기가 된다. 신약성경 4대복음(마태, 마가,누가,요한)에는 예수가 탄생한 구체적 연도가 나오지 않는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예수가 태어나는 때가 헤로데왕이 다스리던 시대라고 기록되어 있다. 유대왕국의 마지막 왕조를 열었던 헤로데는 BC 37년 ~ BC 4년이 재위기간이었다. 두 복음서를 믿는다면 예수는 BC 4년 이전에 태어났어야 한다. 누가복음에는 예수가 복음을 펼치는 서른 살 무렵이 로마황제 티베리우스가 집권한지 15년이 된 때라고 말하고 있다. AD 28년이다. 예수가 복음을 펼친 때의 나이가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지 않은 점을 감안한다면, 32세로 잡았을 때 누가복음의 두 기록의 사실성이 충족될 수 있다. BC 4년에 태어나, 32세인 AD 28년에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성서의 기록은, BC와 AD가 잘못 기산되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가 태어난지 4년 뒤를 우리는 '그리스도의 해'라고 인류 문명의 시계를 맞추고 있는 셈이다. 2012년 전임 교황이었던 베네딕토16세가 이 오류를 인정한 책('나사렛 예수, 유년기의 기록')을 냈다. 예수는 서기 1년에 태어나지 않았으며 그 몇 해 전에 탄생했다고 밝힌 것이다. 이렇게 예수의 탄생 연도에 착오가 생긴 까닭은 BC와 AD를 도입한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가 계산을 잘못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012년 교황 "예수 탄생 연도가 틀렸다" 인정 그런데, 누가복음의 기록은 과연 믿을만한가에 대한 의문제기도 있다. 이 복음서에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칙령으로 인구조사가 진행됐고 예수의 부모가 자신들의 호적지인 베들레햄으로 돌아갔다가 예수를 마굿간에서 낳았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아우구스투스의 인구조사는 AD 6년에 시행됐다. 그렇다면 예수는 AD 6년 이후에 태어나야 한다. 학자들은 누가복음의 이 대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AD 6년 이후에는 헤로데왕도 없었고, 복음을 펼치는 시기가 22세가 되어 서른 살 무렵이 되지 않는다. 누가가 이런 무리한 얘기를 넣은 까닭은, 다윗이 난 베들레햄과 예수를 연결시켜 '다윗의 왕 예수'라는 혈통적 숭배를 자아내기 위해서였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다. 기록의 상충이 있지만, 학자들은 AD 4년경 예수 탄생을 정설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는 AD 4년 12월 25일에 태어난 것일까. 우리가 크리스마스(성탄절)라 부르는 12월 25일이 공식적인 기념일이 된 것은 AD 339년이다. 로마제국은 313년 기독교를 공인했고 336년에 12월 25일을 예수탄생 기념일로 정했다. 그 이듬해 이 날을 공식화한 것이다. 교부 히폴리투스가 예수 탄생일 첫 언급 로마제국이 이 기념일을 정하기 이전에도 예수 탄생을 기리는 날이 있었다. 1월 6일이었다. 이 날은 주현절(主顯節, epiphany)이라고 부르는 날로, 예수가 서른번째 생일에 세례를 받고 신의 아들로 공증을 받았던 날(공식적으로 등장했다 해서 공현(公現)절이라고도 한다)이다. 이 날은 또 3인의 동방박사에게 그리스도가 나타났던 날이기도 하다. 유럽에서는 이 날을 12일제(祭)라고 부른다. 예수가 탄생한지 12일째 되는 날이란 의미다. 1월 6일에서 12일을 빼면, 12월 25일이 나온다. 예수 탄생일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사람은 초대 교부로 일컬어지는 히폴리투스(170~235)다. 그는 춘분인 3월 25일 수태고지가 있었고, 9개월 뒤인 12월 25일 예수가 탄생했다고 했다. 12월 25일을 가리켜 1월 1일에서 거슬러올라 8번째 되는 날(1, 31 , 30, 29, 28, 27, 26, 25)이라고 표현했다. 수태고지가 잉태한지 한달 정도가 되었을 때 이뤄진 것이라면, 인간의 대체적인 회임기간인 10개월이 된다. 주현절을 12일제로 불렀던 것도, 히폴리투스의 탄생일 추정 이후에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히폴리투스가 내놓은 이런 날짜의 근거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복음의 기록이 전하고 있는 가장 명시적인 날짜는 예수가 처형된 날과 그 사흘 뒤인 부활한 날이다. 처형일은 유월절(逾越節) 첫날인 금요일이었다. 유월절은 유태의 최대명절이다. 출애굽기에 그 내용이 나온다. 신은 이집트가 히브리인 노예를 풀어주도록 하기 위해 이집트에 10가지 시련을 내린다. 그중 마지막 재앙은 이집트에서 태어난 모든 첫 아이와 가축을 죽이는 것이었다. 모세는 히브리인들에게 문간에 어린 양의 피를 발라두면 죽음의 사자가 그 집을 그냥 지나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유월(逾越, Passover, Pessah, 죽음의 신이 지나감)절이 된다. 예수 처형일과 부활일은 성서에 명시 예수의 시대에도 유태인들은 유월절을 신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보내고 싶어했다. 예수가 체포되고 처형된 때는 유월절 기간이었다. 예수가 제자들과 열었던 최후의 만찬 또한 유월절 식사였다.(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누가 22:15)) 요한복음은 로마총독이 매년 유월절을 맞아 유대인 죄수 1명을 풀어주는 관행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군중은 예수가 아니라 정치혁명가였던 바라바를 외쳤다. 고리도전서(5:7)에는 초기 기독교도들이 예수를 '유월절의 어린 양'이라고 불렀다고 전하고 있다. 그의 피가 죽음의 사자를 지나가게 했다는 의미다. 유월절 날짜는 레위기 23장에 나와 있다. 성력(유태 달력)으로 1월14일이다. 성력은 매년 9~10월에 신년이 시작된다. 이에 따르면 올해(2020년) 유월절은 4월8일에서 16일까지였다. 부활절은 서구 교회에서 춘분 당일 혹은 춘분 직후의 보름날 다음 첫번째 일요일로 정해놓았다. (325년 로마제국 니케아공의회가 이를 결정했던 해의 춘분은 3월 21일이었다.) 대개 3월22일부터 4월25일 사이다. 유태 달력으로만 따지면, 부활절은 유월절 이틀 뒤다. 올해는 4월12일이 부활절이었다. 4월 12일 부활을 했다면, 예수는 4월 9일에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다. 올해의 경우라면 예수는 유월절 첫날인 4월 8일 저녁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진 뒤 이튿날 9일 죽음을 맞은 셈이다. 초창기엔 부활절이 3월 25일이었다. 이 날은 춘분 날이며 수태고지일과 같은 날이다. (2020년 춘분은 3월 20일이다) 춘분은 태양의 중심이 적도 위를 똑바로 비추는 날이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고 추위와 더위가 같다.춘분이 지나고 첫 보름달이 뜨는 날 성모는 수태고지를 받았고, 예수는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했다. 이 날을 3월25일로 잡으면, 예수의 탄생과 죽음의 날짜가 나오게 된다. 예수는 BC 4년 12월 25일에 태어나 AD 28년 3월 23일에 죽음을 맞았다. 수태고지 날짜와 부활일이 같은 까닭 물론 순교일은 성서의 기록을 바탕으로 사실적인 추론이 가능하지만, 탄생일은 그야 말로 추정일 뿐이다. 부활한 날짜와 수태고지를 한 날짜를 맞춘 것은 유태인들의 믿음에 근거한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선지자나 예언자가 잉태된 날에 죽음을 맞는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에 맞춰 태어난 날짜가 정해질 수는 없다. 로마제국이 당시 채택했던 율리우스력으로 12월 25일은 동지였다. 일년 중 해가 가장 짧은 날이었고 어둠이 짙은 날이었다. 그리스도의 도래가 어둠을 밝히는 빛이라는 의미를 뚜렷이 드러낼 수 있는 상징성을 지닌 날짜였다. 다른 정치적인 의미도 있었다. 로마가 기독교를 수용하는 것은 유럽 대륙 전체를 지배하는 국가로서의 빅 픽처 안에 있었다. 12월 25일은 태양신을 우러르는 고대 로마의 기념일이기도 했다. 274년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는 솔 인빅투스(정복되지 않는 태양)이란 신에게 바치는 신전을 로마에 세웠다. 그는 12월 25일을 태양신에게 경배하는 태양절로 선포하기도 한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21년 매주 하루를 교회에 가는 예배일로 삼으면서, 그 날을 태양의 날(일요일)이라 불렀다. 이런 정치적인 의도들이 뒤섞이면서 12월 25일은 의심할 나위 없는 그리스도의 날이 되어왔다. 12월 25일은 로마의 태양절 물론 역사적 사실에 의거한 '그 날'이면 좋겠지만, 시간에 대한 기억과 기록과 기준들이 달라져 있는 지금, 이 일을 바로잡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리고 예수가 오신 날보다 예수가 다시 오신 날이 인류에게 훨씬 중요할 것이다. '부활'이야 말로 지금 안노 도미니(Anno Domini)를 살고 있는 우리가 영적으로 거듭나는 길을 제시한 인류 최고의 간증이기 때문이다. 이상국 논설실장 2020-12-25 22: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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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88) 9억번의 숨이 멈추다 [김효정-류영모 부부] 나너 너나, 네 글자만 알면 돼 1975년 1월 1일 류영모는 '다석일기'를 멈췄다. 그해 10월호 '성서신애' 206호에 주필 송두용이 이런 글을 실었다. "어느 날 류영모 선생님을 방문하였더니 선생님은 생시에 꿈을 꾸셨다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어느 날 버스를 타고 신문회관을 찾아가다가 차중에서 갑자기 생각이 바뀌어서 원효로 종점에서 내렸다. 어찌된 일인지 몰라 다시 버스로 돌아오다가 무슨 생각으로 남대문에서 내려 걸어서 구기동 집까지 오니 거의 하루해가 소비되었다. '나는 분명히 깨어 있으면서 꿈을 꾸었어요. 이것이 꿈 아닌 꿈이 아니고 무엇이요'." 1976년 8월 30일, 제자 박영호는 류영모의 마지막 말씀을 들었다. "나는 나라 하고, 하느님을 너라고 하였을 때 나를 하느님 너 속에 바쳐서 넣으면 하느님께서 너가 나아지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나너 너나'입니다. 나와 너는 나너(나누어)지는 것인데 여기서는 나너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 나너 너나. 하느님과 인간이 하나 되는 생명통일, 생명귀일을 네 글자로 표현한 것이다. 류영모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다. 류영모는 '생명'이라는 한시를 남겼다. 天命是性命(천명시성명) 천명은 성명이며 (하늘이 내린 명령은 하느님과 같이 되라는 명령이며) 革命反正命(혁명반정명) 혁명은 정명으로 되돌림이며 (그 명령을 바꾸는 것은 바른 명령으로 되돌리는 것이며) 知命自立命(지명자립명) 지명은 스스로 입명함이며 (그 명령을 깨닫는 것은 스스로 하느님의 명령을 세우는 것이며) 使命必復命(사명필복명) 사명은 반드시 복명함이다 (그 명령을 행하는 것은 반드시 하느님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생명을 '생물의 목숨' 정도로 이해하고 있지만, 生命(생명)이라는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태어나는 것(生)과 죽는 것(命)이 결합된 말인 것을 알 수 있다. 죽는 것이 '명령'의 의미인 '명(命)'이라는 말로 쓰인 까닭은, 죽음이란 것이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물주 혹은 창조주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류영모가 밝힌 '하느님에게로 가는 길' 류영모의 시 '생명'은, 이 점을 뚜렷이 밝히고 있다. 무릇 생명으로 태어난 존재는 신의 명령을 받는다. 첫째는 하느님과 같이 되라는 명령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에게 생명을 준 것은 하느님을 본받으라는 명령이라고 봤다. 이것이 천명이다. 천명을 부지런히 그리고 꾸준히 생각하고 실천함으로써 그 생명의 의무를 다하는 것. 그것이 천명을 다 하는 일이다. 둘째 하느님의 명령이 실천되지 않는 곳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는 가차없이 바른 명령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했다. 이것을 혁명이라고 말했다. 정치사회적인 개념의 '혁명' 또한 그 일부라고 할 수 있다. 류영모가 기존의 사상과 신앙이 지닌 오류에 대해 과감히 바로잡고 옳은 길을 향해 나아가자고 YMCA 강의에서 부르짖은 까닭도, 혁명을 하기 위해서였다. 셋째, 올바른 명령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궁구(窮究)하고 그 참을 스스로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하느님의 명령을 오직 자율로 세우는 것을 그는 '참지혜'라고 보았다. 평생 하루 한끼로 육신을 정갈히 하면서 무릎을 꿇고 나아가고자 했던 길이 바로 지명(知命, 하느님의 명령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것)이었다. 넷째, 생명의 완결인 죽음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하느님의 명령을 받은 인간이 다시 하느님의 명령 속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생명이 해야할 가장 중요한 미션이 바로 '제대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인간으로 태어나, 결코 회피할 수 없는 긴박하고 절실하며 유일한 사명이다. 생명의 길은 바로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천로역정(天路歷程)이다. 류영모의 시, '생명'만 날마다 읽고 그 실천에 제대로 마음을 기울이기만 해도, 신의 명령대로 사는 길을 그대로 갈 수 있다. 그는 한 편의 시 속에, 생명의 길에 대한 안내도를 진북(眞北)의 별처럼 아로새겨 놓았다. 함석헌 부인 장례식, 류영모 추도의 말 1977년 여름에 안병무(安炳茂)가 내는 잡지 '현존(現存)'의 주간 송기득(宋基得)이 류영모를 탐방하였다. "선생님 말씀 한마디 들려 주세요." "말씀 그쯤 쉬어." "세상이 어찌 이 꼴입니까?" "두어 둬요." "사는 게 무엇입니까?" "이 밖에 별 게 있을 리가 있나 모를 일이야." 1978년 5월 10일 함석헌 부인 황득순(黃得順)의 장례식에 류영모가 참석하였다. 그 자리에서 사회자가 추도의 말씀을 해 달라고 말했다. 류영모는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여기 서서 말씀 한마디 하라고 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겠습니까? 말씀이란 건 사람이 하느님께 얻어서 하느님 뜻에 맞는다는 뜻으로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여기 마침 지나다가 역시 하느님께 맞는 말씀을 한마디 이 앞에 해 드리고 지내가자는 뜻입니다. 그걸 어떻게 해야 옳습니까?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렇게 말씀해서 우리 아버지 말씀을 한마디 드린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내고자 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이랬든 저랬든 여기서 지낼 동안에 하느님이 들으시면 어떠하실까? 하느님이 들으시기에 마땅한 말씀을 '이 사람이 얻어서 드리는 말씀으로 되어지이다' 하고 지나가고자 하는 바입니다. 아멘." 1980년 3월 13일. 류영모의 90세 생일이었다. 제자 박영호가 구기동 자택을 찾았다. 류영모는 널판 위에 꿇어앉아 있었다. 생불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박영호는 그 앞에 방석을 깔고 꿇어앉았다. 한마디 대화도 없었다. 일어나면서 박영호는 말했다. "오늘이 선생님 90회 생신 날입니다." 류영모는 귀에 손나팔을 하고 들으려고 했다. 저쪽에는 부인 김효정이 중태로 사람이 온 줄도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둘째 며느리 유윤용이 조용히 설명을 했다. "온종일 가도 말씀이 없으십니다." 박영호가 일어섰을 때 스승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이렇게 꼭 막히었는지 나고 드는 것을 도무지 몰라. 알 수 없어요. 저 얼굴(아내)이나 이 얼굴(박영호)이나 많이 낯익은 얼굴인데 도무지 시작을 알 수 없어요. 모를 일이야. 참 알 수 없어." 9억번의 숨을 쉬고 멈춘 류영모 7월 31일 부인 김효정이 87세의 나이(1893년 5월 17일생)로 세상을 떠났다. 류영모는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였다. 마루에서 밤을 지키는 조문객들을 보고 "왜 돌아가지 않으시오"라고 물었다. 김효정의 장례는 함석헌이 주재를 했다. 다른 의식(儀式) 없이 묵념의 기도만 했다. 함석헌은 류영모를 장흥의 신세계 공원묘지에 모시고 갔다. 홍일중의 승용차를 이용했다. 돌아올 때는 박영호가 구기동 자택으로 모셨다. 박영호가 집을 나서자 "가시겠소? 잘 가시오"라고 말을 하였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 187일 뒤인 1981년 2월 3일 오후 6시 30분에 류영모는 91년 입은 세상의 몸옷을 벗었다. 90년10개월23일. 날수로 3만3천200날을 살았다. 약 9억번의 숨을 쉬고 멈췄다. 류영모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마지막을 거룩하게 끝내야 끝이 힘을 줍니다. 끝이 힘을 준다는 말은 결단하는 데서 힘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끝이란 끊어 버리는 것으로 몸과 맘으로 된 나(自我)는 거짓이라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끊어 버리는(부정) 데서 정신이 자랍니다.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생명의 찰나 끝에 생명의 꽃이 핍니다. 마지막 숨 끝 그것이 꽃입니다. 그래서 유종지미(有終之美)라 합니다. 마지막을 꽃처럼 아름답게 끝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지막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이 마지막 끝을 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끝이 꽃입니다. 인생의 끝은 죽음인데 죽음이 끝이요 꽃입니다. 죽음이야말로 엄숙하고 거룩한 것입니다." 그는 죽음의 순간을 이렇게 시로 표현했다. 할딱 숨 너머 영원한 숨이 있습니다 속은 넓어지며 우리 꺼풀은 얇아지니 바탈 타고난 마음 그대로 왼통 올려 속알 굴러 깨쳐 솟아 날아 오르리로다 <류영모의 시> 하늘나라에 가는 것에 대해선 이렇게 역설했다. "참나를 알아야 하늘나라를 알아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몸생명은 가짜 생명입니다. 우리는 참 생명을 찾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통히 몸생명으로 좀 더 오래 살 수 없을까 하고 궁리합니다. 잠도 안 잤으면, 죽지도 않았으면 하고 바라지만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도 있어야 하고 밤도 있어야 합니다. 숨은 목숨인데 이렇게 할딱 숨을 쉬어야 사는 몸은 참 생명이 아닙니다. 이 할딱 숨 너머 영원한 숨이 있습니다. 누에는 죽어야 고치가 됩니다. 죽지 않으려는 생각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실을 뽑았으면 죽는 것입니다. 집을 지었으면 그 속에 드는 것입니다. 니르바나에 드는 것입니다. 생각의 실을 다 뽑기까지는 살아야 하고 실을 다 뽑으면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으려는 맘은 버려야 합니다. 무(無)에서 와서 무(無)로 가는 것 같아서 허무를 느끼는데 무가 무가 아닙니다. 신정(新正)의 새시대입니다. " 류영모는 생전에 화장을 바랐지만, 유족의 뜻에 따라 장흥 신세계 공원묘지에 묻혀 부인과 합장을 하게 됐다. 아들 류자상은 "아버님의 사상은 제자들이 이어받더라도 아버님의 유해만은 자식들에게 맡겨달라"고 청했다. 류영모와 김효정의 묘는 수난을 겪는다. 1998년 장흥지구의 대홍수로 산사태가 나서 신세계 공원묘지의 분묘가 유실됐다. 9월 17일 유가족이 천안 병천에 있는 풍산공원묘지로 옮겼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하느님을 내가 부릅니다. 아버지의 얼굴이 이승에는 없지만 부르는 내 맘에, 아무것도 없는 내 속에 있습니다. 과대망상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생각하여서 찾아야 합니다. 믿는 이는 이것을 계속 믿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생각은 나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 속에 하느님 아버지를 생각하는 성령이 끊임없이 오는 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큰 성령(하느님)이 계셔 깊은 생각을 내 속에 들게 하여 주십니다. " (류영모 어록) 숨을 끝으로 내쉰 것이 죽음 류영모는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긴 한시를 남겼다. 명쾌하고 유려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철학시(哲學詩)다. 표현 하나하나가 생명의 정수를 담아낸다. 필자가 그 뜻을 종잡아 풀어보았다. 大塊能變如常 小我執着欲常逢變乖常(대괴능변여상 소아집착욕상봉변괴상) 우주는 변할 수 있음으로 한결같은데 인간은 한결같음을 붙잡고 있다가 바뀜을 만나 한결같음에서 이탈했다 呼吸代謝百年九億 吸始以生呼終而死 一生一死不外氣息之頭尾也(호흡대사백년구억 흡시이생호종이사 일생일사불외기식지두미야) 내쉬고 들이쉬는 숨의 오가는 일이 백년간 9억번이다 처음 들이쉰 것이 삶이요 끝으로 내쉰 것이 죽음이다 나고 죽는 것은 숨쉬는 일의 처음과 마지막일 뿐이다 一吸無常恍兮反呼 一呼非常惚兮復吸(일흡무상황혜반호 일호비상홀혜부흡) 첫숨 들이쉴 때 무상하게 황홀하여 도로 내쉬고 첫숨을 내쉴 때 비상하게 황홀하여 다시 들이쉰다 一息之間可見生之無常命之非常 一呼一吸卽生命之左右也 呼吸死生 各二極而反復(일식지간가견생지무상명지비상 일호일흡즉생명지좌우야 호흡사생각이극이반복) 한 번 숨쉰 사이에 삶의 무상함과 죽음의 비상함을 볼 수 있구나 한 번 내쉬고 한 번 들이쉼은 곧 생명을 좌우하는 것이다 내쉼과 들이쉼, 죽음과 삶, 각각 두 끝이 반복되는 것이다. 氣息生命自中正而剛健 中正之謂常知常之謂道 一陰一陽謂之道(기식생명자중정이강건 중정지위상지상지위도 일음일양위지도) 힘차게 숨쉬는 생명은 스스로 중정中正이 되어 강건한 것인데 중정中正을 일러 상(常, 한결같음)이라 하고 상을 깨닫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한 번 음이 되고 한 번 양이 되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釋生命曰 無常生非常命 知常處中於東於西無非生命(석생명왈 무상생비상명 지상처중어동어서무비생명) 생명을 풀이하면 한결같음이 없는 것이 삶이요 한결같음이 아닌 것이 죽음인데, 한결같음을 깨닫고 가온(中)에 처하면, 동양이든 서양이든 하느님 명령 아닌 것은 없도다 [다석 류영모 초상화(석도 유형재 作)] [ 그림 읽기 : 다석 류영모 초상화 - 석도(夕濤) 유형재] 석도 유형재(兪衡在, 1955~ )는 10대 때부터 붓을 잡은 대전 출신의 서예가로 국내 10대 서예가로 손꼽힌다(서법예술사 선정). 그는 다양한 서법(書法)뿐 아니라 탄탄한 한학 실력까지 갖춰 시서화(詩書畵)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전통적으로 글씨와 그림은 뿌리가 같기(書畵同源) 때문일까. 그는 10여년 전부터 인물화에 손을 댔다. 인물화에도 묘하게 자신의 뿌리인 서법이 드러난다. 진한 먹을 바탕으로 윤곽을 강조하면서 속도감 있게 인물을 묘사한다. 그는 글씨를 쓰고 있는 추사 김정희의 모습을 담은 '완당집필도'를 비롯해, 왕희지 같은 서예 대가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리기도 했다. 유형재는 류영모 제자 박영호를 만나 이런 말을 했다. "글씨는 진리(道)를 담을 그릇인데 진리를 모르고 글씨만 쓰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이 말을 듣고 박영호는 유형재의 서실에서 6년간 다석사상 강좌를 열게 됐다.(1990년부터 1995년까지) 유형재는 연초서(連草書, 이어서 쓰는 초서 글씨)를 즐겼는데, 일필휘지하면 붓끝이 종이 위에서 떨어지지 않고 글자들이 한 글자인 것처럼 흐르며 쓰여진다. 박영호는 이 글씨를 보며 세상의 사람들이 한 '얼'로 꿰뚫린 모습 같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런 인연으로 유형재는 먹냄새가 짙게 밴 듯한 류영모 초상화를 그렸다. 동서양의 신학과 종교를 회통(會通)한 류영모를 잘 드러내고 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2020-12-23 20: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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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87)] 나 어디 좀 간다, 다석 실종사건 [다석 류영모] 과식하는 건, 밥 먹을 줄 모르는 것 낙상으로 입원한 지 29일 만에 서울대학병원에서 퇴원했다. 1961년 12월19일의 일이다. 71세의 몸이 의식을 잃은 채 실려갔다가, 근 한달 만에 돌아온 이 사건은 류영모의 사상과 믿음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육신은 결코 섬길 대상이 아니며 정신을 실어나르는 캐리어 정도로 인식했던 류영모에게, 사경(死境)을 방불하는 신체 위기는 삶과 죽음에 관해 더욱 깊이 음미할 만한 계기가 됐을 것이다. 그는 불교적 개념인 탐진치(貪瞋痴), 즉 탐욕(貪欲)과 진에(瞋恚, 성내는 일)와 우치(愚癡, 어리석음으로 저지르는 일)를 인간 육신이 불러일으키는 근원적인 문제의 핵심으로 보고, 본능에 붙어있는 그것을 이겨내는 것이 인간짐승(獸性)을 벗는 일이라고 역설해왔다. 탐욕의 핵심은 식욕이며, 진에는 승부욕이며, 우치는 색욕으로 압축했다. 가장 아끼는 제자와의 결별까지 부른 일은 색욕이었고 그가 짐승을 끝내 뿌리치지 못했기에 같은 길을 동행할 수 없다는 '파계(破戒)'로 규정한 바 있다. 류영모가 그토록 단호했던 까닭은, 색욕이 그만큼 질기고 집요한 '인간짐승'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낙상 이후 1962년 3월 2일 류영모 금요강좌가 다시 시작됐다. YMCA로 지팡이를 짚고 나와, 이런 말을 했다. "흔히들 식욕보다 색욕을 이기기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이번에 알았습니다. 낳은 지 첫돌만 되는 아기도 숟가락질로 밥 먹을 줄 안다고 하는데 환갑 진갑 다 지낸 내가 밥 먹을 줄 모른다고 하면 모두 웃겠지만, 생각해 보면 밥 먹을 줄 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떻든 과식하지 않도록 먹어야 밥 먹을 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배 안에 밥통(위)은 하느님이 주신 도시락인데 우리가 다 쓸 때까지 상하지 않도록 잘 쓰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지금 약국에 소화제가 약의 반을 차지하다시피 하는 것은 이 도시락을 함부로 쓰기 때문입니다. 회갑이 되도록 밥 먹을 줄 모르는 이가 많습니다. 옛날부터 겨울에는 한끼 빼고 두끼만 먹는 것이 내려오는 습관입니다. 일하는 이는 하루 두끼만 먹으면 됩니다. 주림을 면하기 위하여 먹어야 합니다. 나는 밥 한 그릇을 찬 없이도 곧 잘 먹습니다." 류영모는 1941년 2월 17일부터 하루 한끼를 먹기 시작했다. 1962년은 일식(一食)을 한 지 20년이 넘어가는 때였다. 그런데도 '내가 아직 밥 먹을 줄 모른다'고 말을 한 것이다. 즉 소식(小食)의 투철한 실천이 모자라다고 여긴 것이다.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했을까. 색욕보다 식욕이 더 질기다 그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링거를 빼고 식사를 시작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하루 한끼씩 먹는 재미를 알고 있는데 불교에서 모르니 우습지요. 살기 위해 한끼씩 먹는데 참 좋은 거예요. 나는 먹는 데는 급하지 않는 사람이야." 병원에서도 그는 한끼만 먹겠다고 했고, 의사들이 그것을 말렸다. 원기회복을 위해서는 병원에서 주는 식사를 다 먹어야 하고 완전히 몸이 돌아오면 그때부터 일식을 하라고 권했다. 퇴원한 뒤 그는 입맛이 돌아오지 않아 팥죽과 고구마로 연명을 했다. 그때 그는 죽을 때 몸 속에 음식이 남아있는 것을 생각하면 끔찍하다는 말을 했다. 몸을 비운 채 죽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그는 격렬할 만큼 강한 식욕이 돌아오는 때를 겪었을 것이다. 비어있는 육신을 채우려는, 몸의 메시지들을 느끼며 식욕이 얼마나 무섭고 강한 것인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식욕에 휘둘리지 않고 절제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이 짐승이 되지 않고 '사람답게 밥 먹을 줄 아는 일'이라는 진실을 대면한 것이다. 탐진치 중에서 왜 식욕에 해당하는 탐(貪)이 맨 앞에 있는지를, YMCA 강의에서 치열한 경험을 바탕으로 제자들에게 설명했다. 몸성히, 말놓이, 뜻태우의 실천론 류영모는 탐진치를 극복하는 실천을 '살림'이라고 표현했다. 육체는, 살림을 끌어내려 '죽임'으로 치닫게 하는 뿌리깊은 수성(獸性)으로 유혹하지만, 인간은 수행을 통해 하늘로 나아가는 '살림'을 할 수 있다. 그것을 몸성히, 맘놓이, 뜻태우라는 우리말 표현으로 요약했다. 그의 강의를 직접 들어보자. "몸성히를 위해서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자꾸 먹고 싶은 욕심을 경계하고 많이 먹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를 점심(點心)이라고 합니다. 석가는 대낮에 한번 먹었다고 해서 일중식(日中食) 혹은 24시간에 한번 먹는다고 해서 점심이라고 합니다. 내가 하루 한끼를 먹어보니 몸성히의 비결이 점심에 있습니다. 하루 한끼만 먹으면 온갖 병이 없어집니다. 모든 병은 입으로 들어갑니다. 감당 못할 음식을 너무 집어 넣기 때문에 병이 납니다." "맘놓이를 가지려면 치정(癡情, 교접의 욕망)을 끊는 것입니다. 정조(貞操)라고 하지만 참으로 정조를 지키는 것은 아주 치정을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석가의 출가는 맘놓이게 하는 가장 곧은 길입니다. 세상에 마음을 가장 잘 움직이는 것은 남녀관계입니다. 남녀관계를 끊으면 마음은 저절로 가라앉습니다. 석가가 앉아 있는 것을 선정(禪定)이라고 합니다. 석가가 언제나 곧이 곧장 앉아 있는 것도 치정을 끊었기 때문입니다." "뜻태우는 지혜의 빛입니다. 광명(光明)이란 직관력을 의미합니다. 만물을 직관하여 볼 수 있는 힘입니다. 정신의 광명으로 만물을 비춰 보는 세계가 지혜의 세계입니다. 마치 등잔불을 계속 태워 만물을 비추듯이 뜻을 태워 지혜의 광명으로 세상만물을 비추게 합니다. 지혜의 빛을 사방에 비추는 것이 설법입니다. 정신의 광명을 흐리게 하는 것이 진에(瞋恚, 분노)입니다. 불만의 성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성현이 머무는 세계는 성령이 충만하고 광명이 넘치는 얼의 세계입니다. 샘물이 차별 없이 만물을 살려 가듯이 성현의 지혜는 일체를 살려 내는 생명의 불입니다. 뜻을 태워(연소) 만인을 살리는데 성을 낸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탐욕(貪慾)을 버리고 치정(癡情)을 버리고 진에(瞋恚)를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 만남의 동행자 1977년 봄 이후 류영모의 말수가 줄었다. 가족들과도 대화를 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해 6월 19일 아들 류자상에게 전병호(全炳浩)를 만나고 싶으니 안내해 달라고 했다. 그는 독립문 근처의 영천동에 살고 있었다. 류영모는 전병호와 마주 앉아 무슨 말을 할 듯 하다가 끝내 입을 열지 않고 한참 머물다 일어섰다. 그리고는 아들에게 남대문 쪽을 가보고 싶다고 했다. 남대문 부근은 류영모가 태어난 곳이고 어린 시절 자랐던 곳이다. 87세의 류영모가 갑자기 만나고 싶어했던 전병호는 누구인가. 그는 류영모의 YMCA강좌에 자주 참석했던 제자다. 류영모는 1967년 광주 무등산 산양목장에 1년간 머문 적이 있다. 이때 그는 아예 구기동 집을 팔고 광주로 내려가 김정호와 이웃해서 살려고 했다. 류영모는 당시 제자 전병호에게 같이 광주에 내려가지 않겠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만큼 그를 각별한 사람으로 여겼던 것 같다. 이때의 이사 계획은, 부인 김효정의 반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전병호는, 류영모와 제자 박영호 사이에서도 메신저로 등장한다. 1970년 4월 전병호가 박영호의 집으로 찾아왔다. 박영호는 그의 얼굴을 기억했다. 류영모 강좌에서 자주 만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찾아왔을 때까지 이름도 알지 못했고 대화도 나눈 적이 없었다. 당시 박영호는, 5년전 류영모가 '단사(斷辭, 가르침을 거둠)'를 선언한 뒤로 결별하여 스승과 연락을 끊고 지내고 있었다. 전병호는 이렇게 말했다. "다석 선생님이 박영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으니 수고스럽지만 찾아서 근황을 알아봐 달라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이 몹시 궁금해 하니 한번 찾아뵙는 게 좋겠습니다." 박영호는, 이 말을 전해듣고 과연 스승 앞에 나아갈 만큼 갖춘 게 있는지 고민을 하다가 그해 추석인 10월 3일에 스승을 찾아간다. 1967년과 1977년 사이, 류영모가 그나마 지속적으로 연락을 하고 지냈던 사람이 전병호였던 것 같다. 광주에 함께 내려가 살자고 할 만큼, 마음을 터놓았던 사람이었지만 사상적으로 서로 교유했던 흔적은 없다. 류영모가 불쑥 그를 찾아간 까닭은 무슨 제안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10년 전 광주에 가자고 했던 때처럼, 스스로의 중대한 여정(旅程)(사실은 죽음을 찾아가는 길)에 대해 털어놓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안주(安住)해온 세속의 속박을 떨치고, 신을 찾아 나서는 길에 그가 동행해줄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을까. 그러나 그는 끝내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고 인사만 하고 돌아나왔다. 다만, 그의 삶이 출발한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의 지점을 둘러본 뒤,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을 향한 마음의 준비를 했던 것 같다. (시작해도 시작하지 않은 하나, 끝이 나도 끝나지 않은 하나라는 일시무시일과 일종무종일은 천부경의 앞뒤에 나오는 말이다.) [관봉에서 본 북한산 비봉[김석환 그림]] 나 어디 좀 간다 전병호를 만난 이튿날인 1977년 6월 20일. 류영모는 혼자서 아침부터 집 근처에 있는 매바위 안골에 들어가 온종일 기도를 한다. 그 다음날인 21일은 하지(夏至)날이었다. 아침 해가 뜰 무렵 그는 한복에 두루마기까지 갖춰 입고 집을 나섰다. "나 어디 좀 간다." 이를 본 가족이 걱정을 했다. "아버님, 혼자 나가시면 길을 잃을지 모릅니다. 어디로 가시는지 말씀해주시면 모시고 가겠습니다." 류영모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며느리(유윤용)가 나서서 손수건에 싼 돈을 쥐여 주었다. 그는 그것을 뿌리치지 않고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그 뒤로 하루 종일 류영모는 돌아오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도 소식이 없었다. 가족은 문간에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밤을 샜다. 이튿날 가족이 흩어져 류영모가 갈 만한 곳을 찾아 다녔으나 헛수고였다. 경찰서에 가출 신고를 했다. 22일과 23일 하루 종일, 아무 소식도 없었다. 밤 10시30분쯤에 성북경찰서 방범대원이 찾아왔다. 경찰서 관할인 북악산에 한 노인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다는 주민신고가 들어왔다고 했다. 방범대원은 인상착의가 가출 신고를 한 분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자정이 지날 무렵, 성북경찰서 순경이 의식을 잃은 류영모를 업고 집으로 들어왔다. 움직이지 않았으나 심장은 뛰고 있었다. 하루 종일 하지의 햇살 아래 탄 듯 새빨갛게 그을린 얼굴은 평화롭게 눈을 감고 있었고, 옷에는 이런저런 때가 묻어 의복이 꾀죄죄해졌다. 주머니 속엔 떠날 때 챙겨주었던 돈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집에 누워 안정을 취한 뒤 사흘이 지나서야 의식이 돌아왔다. 열흘쯤 지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겨우 걸을 만해지자 류영모는 또다시 집을 나갔다. 가족이 멀리서 그 뒤를 따랐다. 구기동 변전소까지 이르렀을 때 체력이 다시 고갈되었는지 주저앉았다. 가족들은 그를 업고 돌아왔다. 그 이후에도 두번을 더, 그는 가출했다. 그는 왜 그토록 필사적으로 집을 떠나려 했으며 대체 어디로 가려한 것일까. [제자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그눠 제게 듬이 이런 일이 있은 직후인 7월에 박영호는 류영모 실종사건을 알게 됐다. 그 일이 있고난 뒤 열흘 쯤 지난 때였다. 박영호가 물었다. "선생님, 이번에 어떤 생각으로 집을 나가셨습니까." 류영모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을 깨며 이렇게 말했다. "나, 전과 같아요." 그때 부인 김효정이 물었다. "무엇이 같아요?" "똑같은 만큼 같지요." 선문답 같은 대화였다. 박영호가 집에서 나올 때 류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자주 올 생각 말아요. 바쁠 터인데 이길 저길 갈릴 때나 오면 되지 그 전에는 안 와봐도 그저그저 짐작이 가는 것 아니오. 잘 가시오." 류영모가 '전과 같아요' '똑같은 만큼 같지요'라고 한 말은, 음미할 만하다. 그가 스스로 죽음을 택하려 나선 길은, 평소의 생각을 실천한 것이며, 특별한 결행이 아니며 지금에 와서 달라진 일도 아니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목숨은 한 번은 끊어져야 다시 이어집니다. 말씀은 깨끗, 그러니까 끝까지 깨는 것입니다. 인생의 의미는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란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란 것을 깨달으면 아무 때나 죽어도 좋습니다. 내 속에 벌써 영원한 생명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죽지 않는 생명이기에 몸은 아무 때나 죽어도 좋은 것입니다." 그 죽음을 스스로 맞이하기 위해, 류영모는 옷을 깨끗이 차려 입고 나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신은 그를 부르지 않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류영모는 다만 '그눠 제게 듬이'를 마음속으로 외고 있었다. "'그눠 제게 듬이' 요즘 내가 생각하는 기도입니다. 그눠는 마르(乾)다는 뜻입니다. 제게는 하늘나라입니다. 듬은 죽어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눠 제게 듬이'. 내가 바라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하늘나라로 들어가게 하소서. 그눠 제게 듬이.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2020-12-21 19:3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