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수 작가
dslee@globalpeace.org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며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글로벌피스재단에서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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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의 절차탁마] 걸으며 하나되고 또 다른 나를 만난다 [이두수 작가] 느림과 멈춤, 산업화시대를 거치면서 이런 말들은 근면이나 성실과는 상치되는 아주 게으른 언어가 되었다. 한류의 세계적 확산과 함께 수출된 우리말이 있다면 아마 ‘빨리빨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빨리빨리’가 문화로 정착하려면 그 저변에 ‘눈치’라고 하는 구성원들의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 상대가 말하지 않아도 눈치껏 알아서 하는, 좋게 말하면 이것이 ‘정 문화’로 승화되지만, 구성원들이 눈치가 없으면 ‘빨리빨리’는 하나의 폭력언어가 된다. 특히 구성원들 간의 정 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빨리빨리를 요구한다면 여러가지 문제점이 발생한다. 디지털 문화에선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는 라떼문화의 추억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회는 아날로그를 넘어 디지털문화환경에서 초고속연결사회가 되면서 더 이상 ‘빨리빨리’ 라는 말이 필요 없게 되었다. 이제는 인간이 하는 것보다 기계가 하는 것이 더 정확해지는 시대가 된 것이다. 머지않아 사람이 운전하는 시대는 종식을 고할 것이다. 택시는 무인자율주행 택시가 될 것이고 사람이 운전하려고 하면 사회시스템이 오히려 더 불안해할지 모른다. 지금 우리는 인간은 무엇인지, 어떤 것이 인간미가 있다는 것인지 그 의미가 모호한 인간과 기계의 경계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인간, 너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되돌아보면 인류는 걸음으로 새로운 문화와 문명을 만들어 왔다. 걸음은 두 다리와 직결되어 있으나 정신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루소의 말을 빌리면 정신이 작동하려면 내 몸 또한 움직이는 상태에 있어야 한다. 루소는 걷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 홀로 걷고 걸었던 그 여행만큼 생각을 많이 한 순간은 없었다. 또 그때만큼 내 실체에 대해 많이 깨닫고 활력이 넘쳤던 적이 없다. 말하자면 걸을 때만큼 내가 나다웠던 적은 없다.’ <걷기 예찬>을 쓴 다비드 르 브르통(David Le Breton)은 현대 사회의 인류가 직면한 위기를 주체의 위기, 즉 정체성의 위기로 예단하고,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사상적 대안을 제시했는데 그가 내놓은 21세기 최고의 화두가 바로 ‘걷기’다. 최근 걷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지만 지금도 걷기를 한다고 하면 “그건 출근하기 전 잠깐 공원을 걷는 것이지” 하거나, “그 시간에 골프를 하는 게 낫지 않냐, 같은 운동인데” 라거나 “바쁜데 자동차로 여행하는 게 더 낫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걷는다는 것은 단지 두 다리의 움직임만이 아니라 사색의 여행이라는 것을 걸어보면 안다. 브르통의 <걷기 예찬>에 따르면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한다는 것이다.” 도보 여행은 인생의 맛을 충만하게 느끼는 경험이 된다. 걷기는 걷는 시간 속에 녹아 있는 모든 인생의 참맛을 느끼고 음미할 수 있는 절대적인 경험이라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 우리는 바쁜 일상 속에서 인생이 주는 맛을 모두 비껴간 채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어떤 욕망에 따라서 시간의 암흑 속을 떠돌고 있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인생이라고 느끼고 있는 모든 일상의 분주함은 우리의 본질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허구인지도 모른다. “도보여행자는 ‘만인에게 주어진 아름다움’을 찾아 떠나는 여행자다. 걷기는 자연이라는 넓은 도서관에 입실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음미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걷기의 미학이다.” 요즘 해남 땅끝마을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걷기를 하고 있다. 9월 1일 시작해 33일간 매일 20킬로미터씩 600여 킬로미터를 걷는 것이다. 오늘 천안까지 왔다. 이 걷기의 이름이 “위대한 여정-코리안드림대행진”이다. 다가올 통일의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국민적인 참여와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걷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내가 걷기를 한다고 하니 사람들은 나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도 있고, 대단하다며 격려해 주는 사람도 있지만 아직까지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지는 않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처럼 계속 걷다 보면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내 뒤로 길게 줄을 서서 걷고 있지 않을까 하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통일된 한반도는 아주 먼 옛날 고조선을 건국할 때 홍익인간,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건국이념을 실현하는 나라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뜻은 우리 역사를 관통하는 역사의 뜻이며 유훈이다. 미국의 건국정신을 아메리칸 드림이라 부르는 것처럼, 홍익인간의 정신을 실현해 나가는 것을 ‘코리안 드림’이라 불러보자. 이번에 한반도를 종주하면서 우리의 산하를 보며,역사유적지를 가보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체험하게 되는 것은 역시 우리 민족에 관통하는 것, 바로 이 홍익인간의 위대한 정신의 확인이었다. 걷는 데 힘이 되라고 어떤 사람들은 비가 세차게 내리는데 밭에 가서 참외를 따왔다. 어떤 이는 아이스를 박스째 사가지고 오셨다. 함께 하지 못하는 미안함, 하나라도 더 주지 못해서 안달하는 안타까움, 이런 기적 같은 만남이 매일 이어졌다. 이 코리안 드림 운동은 홍익인간 정신이 구현되는 새로운 문화, 문명을 이루어 내는 매우 인문학적인 운동이다. 그래서 걷기를 하는 것이다. 걷기를 통해 역사를 만나고, 또 다른 나를 만나고, 자연을 만나고 신을 만나는 동적이면서도 사색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오늘 공주에서 천안으로 이어지는 구간에 참여한 장남기 선생(기업자문 대표)에게 걷기에 참여하게 된 동기를 물었다. “걷기란 나에게 있어 단절이고 대화다. 아무래도 사업가로서 해야 할 여러가지 일을 놓고 여기에 참여하려면 결단해야 한다. 일이라는 한쪽을 잘라내야 하는 것이고 대신 다른 한쪽과 이어주는 것이 바로 자연과의 대화다. 머리가 복잡하면 단절이 필요하다. 기존의 것과 단절이 필요하다. 거기엔 물론 용기가 필요하다. 자연을 보면 많은 가르침이 있다. 우리 절기 중 처서가 있다. 이 처서는 식물의 성장이 멈추는 시기다. 이 처서를 지나야 곡식과 과일이 익어가는 것이다. 성숙을 위해서는 멈춤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삶에는 멈춤의 미학이 필요하고 느림의 철학이 필요하다.” 옛말에 수노근선고 인노퇴선쇠(樹老根先枯 人老腿先衰)란 말이 있다. 나무는 뿌리가 먼저 늙고 사람은 다리가 먼저 늙는다는 뜻이다. 사람이 늙어가면서 대뇌에서 다리로 내려 보내는 명령이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고 전달 속도도 현저하게 낮아진다. 불로장생의 비결은 산삼이나 웅담, 녹용 같은 값비싼 보약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예로부터 다리가 튼튼해야 장수한다는 말이 있다. 사람은 다리가 튼튼하면 병 없이 오래 살 수 있다. 사람이 늙으면서 가장 걱정해야 하는 것은 머리카락이 희어지는 것도 아니고 피부가 늘어지고 주름살이 느는 것도 아니다. 다리와 무릎이 불편하여 거동이 어려워지는 것을 제일 걱정해야 한다. 장수하는 노인들은 걸음걸이가 바르고 바람처럼 가볍게 걷는 것이 특징이다. 두 다리가 튼튼하면 백 살이 넘어도 건강하다. 사람의 전체 골격과 근육의 절반은 두 다리에 있으며 평생 소모하는 에너지의 70%를 두 다리에서 소모한다. 사람의 몸에서 가장 큰 관절과 뼈는 다리에 모여 있다. 특별히 넓적다리의 근육이 강한 사람은 심장이 튼튼하고 뇌 기능이 명석한 사람이다. 미국 정부의 노년 문제 전문 연구학자 사치(Schach) 박사는 20살이 넘어서 운동을 하지 않으면 10년마다 근육이 5퍼센트씩 사라진다고 하였다. 뼛속의 철근이라고 부르는 칼슘이 차츰 빠져나가고 고관 관절과 무릎관절에 탈이 나기 시작한다고 하였다. 그로 인해 부딪치거나 넘어지면 뼈가 잘 부러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다리를 튼튼하게 할 수 있는가? 다리를 단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걷는 것이다. 다리를 힘들게 하고 피곤하게 하고 열심히 일하게 하는 것이 단련이다. 다리를 강하게 하려면 걸어야 하는 것이다. ‘걸으면서 싸우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걷는 이가 많아지면 사회 곳곳에 건강한 사람의 나무가 서고 높은 언성도 줄어들고 건강한 웃음꽃이 활짝 필 것이다. 아기가 태어나 기어만 다니다가 어느 날 일어서 첫 발자국을 뗄 때 모든 어른들이 박수치며 환호하는 순간이 있다. 내가 일어나 우주를 이고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신이 내린 첫 번째 선물을 받은 것이다. 걸으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인생을 이야기하고, 서로의 비전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지식을 나누고, 경험을 나누다보면 갈라진 우리 마음들이 하나로 모아질 것이다. 혼자만이 아니라 친구와 가족 또는 이웃들과 함께 걸어보자.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를 걸어보고, 내 나라를 걸어보고, 세계를 걸어보는 것이다. 내 한 걸음이 우리의 걸음이 되고, 우리의 걸음이 역사를 바꿀 대행진이 될 것이다. 걸음을 통해 ‘빨리 빨리’에서 느긋함으로, 조급함에서 성숙함으로 우리 문화의 스탠스를 바꿔보자. ‘놀면 놀면’ 혹은 ‘사묵 사묵’하게 걷는 우리네 양반걸음이 지역과 세계를 하나로 잇는 거대한 인문 문화의 발걸음이 될지 모른다. 걸으며 생각하는 것이 가장 인간다운 행위인 것이다. 자연과 신과 혹은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데 걷는 것만큼 품위 있는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걷는 자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해남 땅끝 마을에서 DMZ를 지나 백두산까지 아니 세상 끝까지 걸어가고 싶다. 만나는 사람마다 “당신이 하늘이오”라고 존경을 표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진리를 깨닫고 싶다. 걷는 자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걸음으로 새로운 문화와 문명을 만들 수 있다./그림, 이두수 작가] 필자 소개 -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글로벌피스재단에서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진행하고 있다. 2023-09-25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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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의 절차탁마] 너와 내가 진짜 빛이 되어야 할 '光復' [이두수 작가] 지난 8월 15일 광복절 기념행사로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거행된 통일실천결의대회에 참석했다. 행사 마지막 식순으로 광복절 노래를 부르는데 가슴이 뭉클했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 일을 잊을 건가/ 다 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의 보람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힘써 힘써 나가세 이 노래를 부르며 광복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본다. 위키백과에 보면 광복절은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광복의 의미 광복절(光復節·National Liberation Day)은 영예롭게 회복한(光復) 날(節) 이란 뜻으로, 1945년 8월 15일에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한반도가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고, 3년 뒤인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을 경축하는 대한민국의 법정 공휴일이다.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국경일로 지정되었으며 3·1절, 제헌절, 개천절, 한글날과 함께 대한민국의 5대 국경일이다. 문제는 광복절에 대한 설명이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의 의미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독립기념일의 날이 같은 날이며 광복의 의미가 해방과 독립의 의미를 둘 다 함축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해마다 8월이 되면 우리는 8월 15일 광복절에 대한 의미를 놓고 이날이 해방일이냐, 독립일이냐 하는 논란과 함께 광복절이 몇 주년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인다. 그 의미의 연장선상에서 ‘통일’에 대한 의미까지 논쟁에 휘말린다. 광복의 의미를 ‘빼앗긴 주권을 회복한 날’로 본다면 그날은 언제일까?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한반도는 일제에서 해방되었다. 하지만 즉시 38선을 경계로 한반도 남북에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였다. 주권이 일제에서 우리에게 넘어 오지 못하고 미.소군정에 넘어간 것이다. 남한에서는 1948년 5월 10일 선거를 통해 국민의 대표 선출 - 5월 30일 제헌의회 소집 - 동 의회가 7월 17일 헌법 제정 - 7월 24일 그에 따라 초대 대통령이 선출 - 그의 주도로 8월 4일까지 행정부가 수립되어 비로소 8월 15일에 해방의 기쁨도 함께 경축하는 의미에서 이날에 독립을 선포한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선포식을 하게 되자 비로소 미군정이 주권을 이양하고 물러갔다. 이렇게 보면 일제에서 해방되었다고 ‘광복’된 것이 아니라 미군정이 종식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에 비로소 ‘광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원래 광복절을 국경일로 정하게 된 배경을 보면 광복절 제정 이유가 '잃었던 국권을 회복하고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을 경축하며 독립정신의 계승을 통한 국가 발전을 다짐하기 위함이다'. 독립을 위한 노력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보장받은 첫 번째 국제회의는 1943년 11월 27일 발표된 카이로 선언이다. 미국, 영국 그리고 중국이 전후 처리를 위해 모인 이 자리에서 한국을 독립시키자는 논의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중국 대표인 장제스가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주요 의제로 내세웠지만 미국은 그것을 중국의 위임통치 야욕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선언문에는 ‘가능한 한 가장 이른 시기에’를 ‘적절한 시기에’로 바뀌더니 나중에는 ‘적절한 절차로’라는 문구로 바뀌어 국제신탁통치의 여지를 남겼다. 우리 운명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하지 못하고 힘 있는 나라들의 역학관계에 의해 나라의 운명이 좌우되는 그런 처지에 있었지만 우리는 ‘적절한 시기에’ 독립을 시켜준다는 말에 환호했다. 사실 우리나라가 국제법적으로 독립을 처음으로 보장받은 조약은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이다.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청에 대해 조선의 독립을 조약 제1조항에 넣을 것을 요구했다. ‘제1조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독립 자주국임을 확인한다. 따라서 자주독립을 훼손하는 청국에 대한 조선국의 공헌(貢獻)·전례(典禮) 등은 장래에 완전히 폐지한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해는 1884년이다. 조선이 근대적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신분제를 타파하고 청나라에 대한 사대를 철폐하고 입헌군주제를 통한 독립국가로 나아가고자 했으나 청국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했다. 이후 10년 만인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갑신정변 주역들이 사면·복권되면서 청과 사대관계를 정리했다. 그 상징적인 건축물이 독립문이다. 독립문이 서 있던 자리는 조선 초기에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세운 모화관과 영은문이 있던 자리였다. 독립문은 과거 봉건시대를 청산하고 서구식 근대화를 따를 것이라는 의지의 표현으로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만들었다. 이 독립문을 세우면서 시민교육과 계몽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독립협회다. 이러한 선각자들의 노력도 국가적 비전이나 국민적 합의가 되어 있지 않으면 개혁도 지속할 수가 없다. 실제 고종은 러시아의 힘을 이용해 왕권을 유지하려 했고, 아관파천 이후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나름 독립국임을 내외에 선포했지만 국제적 역학관계를 해결할 힘이 없었다. 국민 지도자라고 하는 지방 유생들은 위정척사를 내세우며 기득권 유지를 위한 신분제 옹호와 이를 포장하기 위해 외세 배척이라는 깃발을 들었다. 이런 혼란을 겪다가 나라는 결국 일본에 합병되고 만 것이다. 해방, 독립, 광복, 그리고 통일 우리 사회가 아직도 해방, 독립, 광복에 대한 개념조차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큰 문제다. 이런 현상이 수습되지 못하고 혼란이 계속되는 그 원인적인 부분을 나는 세상을 보는 관점의 차이라고 본다.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의 시각이다. 세계의 근본은 물질이며 물질로 통일되어 있다는 유물변증법은 자연이나 사물현상을 대립물의 투쟁과 통일로 설명한다. 대립물들이 한 사물현상 안에서 서로 다른 것의 존재의 전제(의존)가 되는 관계를 통일이라고 하며 서로 다른 것의 존재를 부정(배척)하는 작용을 투쟁이라고 한다. 존재의 구성물이 대립물의 투쟁에 의해 존재·발전한다고 보며 역사의 발전 과정이나 오늘날 사회의 변화·발전도 이 시각에서 해석하고 설명한다. 우리 사회의 노사 문제, 교육 문제, 역사 문제, 의료 문제 심지어는 남녀 문제도 다 이런 시각에서 보고 처방을 내리는 것이다. 또 다른 시각은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성상(내적인 성격)과 형상(외적인 형태)으로 존재하고 이 두 요소는 차원은 다르지만 서로 닮았고 관계되어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두 요소는 서로 닮은 면이 있기 때문에 조건에 따라 가깝게 때로는 멀게 관계하며 존재한다. 그러므로 어떤 조건을 갖추느냐에 따라 그 관계성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이 두 존재를 대립물이라 볼 수 없으며 존재는 투쟁으로 발전하기보다는 관계성에 따라 발전과 퇴보를 한다고 보는 시각이다. 이런 시각과 관점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우리 사회의 혼란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광복이라는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통일을 바라보는 시각도 이것을 내부적 민족 문제로 보느냐, 지정학적 이슈로 보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 남북 분단은 우리가 원치 않은 상황이었으며 이걸 해결하는 것은 남북의 당사자들이라는 민족주의적인 부분이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축을 이뤘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한반도 상황이 국제적 상황이나 국내 위상 부분에서 더 이상 민족 문제로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한반도의 미래 비전을 민족 문제와 지정학적 이슈를 같이 엮는 일종의 그랜드 디자인 혹은 대전략에 우리 사회가 합의하는 게 중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는 국가나 민족이라는 거대 담론에서 개인의 독립이라는 측면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개인의 해방은 인권의 문제이며 개인의 독립이란 자존감의 회복이며 열등감의 극복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점은 결국 개인을 어떻게 보고 대하느냐의 문제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주보다 귀한 고유한 개인의 가치 회복은 기독교적 소명의식의 회복이며 유교에서 말하는 천명의 자각이다. 근대 시민운동의 효시라고 할 동학의 사인여천(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이며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슈(초인·넘어선 사람)의 각성이다. 자기의 고유한 개성과 삶의 철학을 겸비하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공헌할 수 있는 기술과 역량을 갖춘 시민이 되는 것이다. 광복절 노랫말처럼 ‘세계와 하늘에 닿을 자신을 빛내는' 것이다. 이 노랫말은 일제하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던 타고르의 시에 화답이라도 하는 듯, 이제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으니 동방의 밝은 빛이 되어 하늘에 닿을 때까지 힘써 나가자는 결의가 느껴진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대에 /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光復, 너와 내가 진짜 빛이 되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림 설명] 인간이 걷는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 처음 걸을 때 그의 삶이 시작되고 힘이 없어 걷지 못하게 될 때 그의 삶은 끝나는 것이다. 인간은 걷는 것에서 문화와 문명을 창조했다. 우리는 자신의 고유한 빛을 가지고 있다. 각자의 빛을 발하는 것이 자주, 독립, 해방, 통일이다 [이두수 작가 제공] 필자 소개 -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글로벌피스재단에서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진행하고 있다. 2023-08-28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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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의 절차탁마] 내면의 빛과 만날 용기 [이두수 작가] 내 안의 법은 무엇인가 며칠째 비가 내린다. 충남 이남 지역에 막대한 인명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는 뉴스가 전해지고 있다. 재수 없는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비 내리는 창가에 기대어 창밖을 내다보는 것이 참 아름답다고 느끼기 때문에 비 내리는 것이 싫지 않다. 인지부조화의 한 면일 것이다. 어릴 적에도 장마 때면 아버지는 논물 보느라 종일 논에 나가 도랑물이 넘치지 않나, 논두렁이 터지지 않나 살펴보시며 애간장을 태우는데 나는 도랑물에 붕어라도 잡겠다고 족대를 훑고 다녔다. 지금도 휴대폰에는 비 피해가 없도록 산이나 물가에 나가지 않도록 경고하는 메시지가 자주 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빗물이 창문에 빗살무늬를 그려대며 내리는 창밖 풍경을 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다. 나를 움직이는 법은 무엇인가. 나를 나다운 독립된 실체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커피를 마시며 문득 드는 생각은 내가 만일 커피콩이라면, 아니 어떻게 하면 커피 같은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를 떠올리며 나에게 묻는다. 나에게 묻는다. 커피 원두 찌꺼기 함부로 버리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는 커피처럼 자신을 로스팅한 적이 있느냐. 사람들은 글이 안 써질 때 커피를 마신다. 뭔가 심각한 일이 생기면 커피를 찾고, 기쁘거나 즐거울 때도 커피를 찾는다. 커피는 이제 우리 생활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는 음료가 되었다. 커피의 맛이나 향, 색깔을 얻기 위해서는 로스팅이라는 과정을 겪는다. 생콩은 맛도 없거니와 그라인더로도 잘 갈리지 않는다. 한 인간의 삶도 커피와 같은 과정을 겪지 않고는 자기의 맛을 제대로 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것, 나의 맛을 나게 하려면 나의 삶을 태우는 것이다. 무엇인가에 심취하여 자신의 삶을 다 바쳐 뜨겁게 태워 화학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그 삶은 날콩처럼 밋밋한 맛이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변화를 거부하는 고집불통이 되는 것이다. 무엇인가에 자신의 삶을 뜨겁게 불태운 사람은 그 삶에서 광채가 나고 향이 난다. 때깔이 좋고 향이 난다고 해서 거기서 멈춘다면 원두에 지나지 않는다. 그라인더에 들어가 아주 곱게 갈려야 한다. 자신의 존재 형체가 완전히 사라진 가루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완전히 부정된 가루가 되었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가루에 뜨거운 물을 부어 바닥까지 내려가야 한다. 바닥까지 완전히 내려가 영혼까지 완전히 우러났을 때 커피에서 그윽한 향이 난다 하고, 맛은 쓰지만 달기도 하다는 평을 듣는다. 처음엔 맛이 쓰지만 마실수록 깊은 맛이 나야 좋은 커피다. 사람도 그렇다. 사람의 맛 사람에게도 맛이 나고 향이 나는 삶이 있다. 열심히 치열하게 사는 사람에게서 나는 사람 냄새다. 아직도 이런 말을 하냐며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이 아니라면 평범하게 슬슬 놀면서 평안하게 사는 게 좋다고 말하는 친구들도 주변에는 많지만 우리가 삶에 활력을 얻기 위해 커피를 찾듯이 사람도 뭔가 최선을 다해 삶을 불태우는 사람 곁에 있어야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며칠 전 최진석 교수님이 비슷한 경험을 글로 쓰셨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내려놓는 삶에 대해 말했다. "참되게 사는 길은 내려놓고, 비우고, 욕심내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사니 행복하고, 오히려 마음은 충족감으로 가득하다." 그러면서 자신은 고향에 내려가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눕고 싶을 때 눕고 사니 이 이상 행복할 수가 없고 자유로울 수가 없단다. 집에 가는 길에 나는 혼자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인간은 자고 싶을 때 자면서 고유한 특성을 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고 싶어도 안 잘 수 있어서 인간이다. 인간은 먹고 싶을 때 먹으면서 고유한 특성을 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먹고 싶어도 안 먹을 수 있어서 인간이다. 인간은 눕고 싶을 때 누우면서 고유한 특성을 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눕고 싶어도 안 누울 수 있어서 인간이다.” 인간은 사실 편한 상태를 추구하지만 그 편한 상태를 만들기 위해 불편을 감수해왔다. 오늘날의 문화나 문명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적인 여성해방은 세탁기와 전기밥솥이 발명되면서부터다. 이런 가전제품이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의 노력이 더해졌다. 이런 과정을 모르고 결과물만 취한다면 종속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다. 시끄럽고 귀찮게 하면 떡 하나 더 준다는 것으로, 상대가 감정이 상하면 더 떼를 쓰니 잘 달래주어 후환이 없게 한다는 말이다. 요즘 우리 사회의 개인이나 조직, 특히 정치 성향의 단체행동이 딱 이 모양이다. 이성적이지도 않고 과학적이지도 않은 내용을 마치 화학조미료만으로 맛을 낸 요리처럼 감성을 자극하는 노이즈 마케팅을 통해 사회를 분열시키고 혼란스럽게 만들어 여기서 파생되는 이익을 취하려는 모습이다. 줏대가 없는 사람은 자기 판단이나 생각이 없으니 떡 하나에 넘어가거나 떡 하나 더 달라는 무리에 휩쓸릴 수밖에 없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보면 가난한 구두공과 천사를 등장시켜 우리로 하여금 ‘사람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천사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모든 사람이 자신에 대한 걱정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돌보고 앞날을 계획했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마음에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몇 해 전 북해도에서 P라는 여성을 만났다. 북해도 아시히카와시에는 아시히야마라는 동물원이 있는데 일본 최북단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최고 인기의 동물원이다. 북극곰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펭귄유치원 같은 시민 친화적인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이다. 아사히야마 동물원의 한국어 해설이 바로 P씨 목소리다. 그녀의 목소리나 글은 이 지역 관공서나 관광지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으며, 한국에서 방송이나 드라마 촬영을 올 때도 대개 P씨를 통할 정도로 이 지역에선 제법 유명 인사다. 한국에 가장 많은 작품이 소개된 작가 미우라 아야코의 고향이 아사히카와인데 P씨의 삶이 미우라 작가와 비슷했다. 그녀는 ‘그림자 없는 삶’을 자신의 삶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고 했다. “제 삶은 북해도 겨울바람처럼 춥고 외로웠어요. 생명줄을 놓고 싶을 때가 많았죠. 그렇지만 북해도에도 봄이 있어요. 산 같은 눈을 녹여 예쁜 꽃을 피우는 고운 햇살이 있더라고요. 이웃들에게 고운 햇살처럼 살려고 무척 노력했어요. 나누면서 살려고 하니 같이 살아지네요.” 마음의 법, 이데올로기 그리고 진영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이나 ‘남을 위해 살아가라’는 말 또는 홍익인간의 ‘남을 이롭게 하라’는 말은 공통점이 있다. 이타적 삶이다. 이런 삶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쩨쩨한 삶이 아니며 궁색하지 않다. 기독교가 신과 개인 간의 약속을 중요시 여기지만 그 중심에는 사랑이 있다. 유교는 삼강오륜이라고 해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중요시 여기지만 그 중심에는 자신을 낮추려는 겸허가 있다. 불교는 모든 현상의 인연을 중시하며 현재의 인터넷망처럼 연결된 인연의 우주적 인드라망(불교에서 끊임없이 서로 연결되어 온 세상으로 퍼지는 법의 세계를 뜻하는 말)에서 자신의 내면의 빛을 강조하고 있다. 역시 그 중심은 타인을 향한 연민과 용서다. 사람이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의 법을 어겼을 때 느끼는 수치심이다. 마음의 법을 양심 혹은 본심이라고 한다. 개인에게 양심이나 본심이 있다 없다는 논쟁으로 성선설과 성악설이 갈리기도 한다. 진영 논리에선 기존의 선도 악의 개념으로 달라진다. 우리 쪽이 이기면 선이고 상대가 이기면 모든 것이 악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내면의 나와 만나는 것이다. 내면의 나와 만날 수 있는 용기다. 사람이 외적인 규율에 움직이면 타율적이고 자신의 규율에 움직이면 자율이다. 무수한 인연의 알고리즘에서 나의 내면의 빛과 만날 수 있는 용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리고 해야 되는 것은 서로가 그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이다. 그것이 내 마음의 법이 아닐까. 커피를 마시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다. 그림설명 정리정돈 청소는 사물이 제 각각의 쓸 자리,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일종의 코디네이팅이다. 즉, 정리정돈(整理整頓)하는 것이다. 理를 정하고 頓을 정한다. 유학의 理気논쟁을 整하고 불교의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논쟁을 整하는 것이 청소가 아닐까. 청소하는 아주머니조차 돈오세계를 깨우치고 이기논쟁을 청소걸레 하나로 잠재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설명- 정리정돈 - 청소는 사물이 제 각각의 쓸 자리,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일종의 코디네이팅이다. 즉, 정리정돈(整理整頓)하는 것이다. 理를 정하고 頓을 정한다. 유학의 理気논쟁을 整하고 불교의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논쟁을 整하는 것이 청소가 아닐까. 청소하는 아주머니조차 돈오세계를 깨우치고 이기논쟁을 청소걸레 하나로 잠재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두수 작가 제공]. nbsp; 필자 소개 -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글로벌피스재단에서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진행하고 있다. 2023-07-18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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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의 절차탁마] 우리들의 영웅 '아버지' 지난 16일 용산아트홀에서 서울그랜드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한국 영화음악 콘서트에 참석했다. 영화음악은 영화의 명장면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는 힘이 있는데, 때로는 영화의 한 장면보다 더 오래 가슴에 남는 그런 힘도 가지고 있다. 영화 '미션'에서 ‘가브리엘의 오보에’(넬라 판타지아)는 언제 들어도 가슴이 저며온다. 영화 '기생충'에서 헨델의 음악이 느껴지는 ‘믿음의 벨트’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빈부격차와 계층 간 갈등을 극적으로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 내 가슴에 남는 것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엔딩 장면에 나오는 이동준 감독의 ‘에필로그’다. 이 음악은 들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며 영화 전체를 감싸 안아주는 느낌이다. 한국 영화음악 콘서트에서 이 음악을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들으며 전쟁과 아버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현충(顯忠), 국가를 위해 충과 의를 떨치며 다한 삶을 기린다는 뜻이다. 우리의 많은 아버지들의 삶이 그랬고 이 분들의 노고에 의해 현재의 우리가 있음을 감사하며 우리의 아버지들의 삶이 어땠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의미 깊은 일이다. 힘없이 구부정한 노인들의 모습이 구질구질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우리의 영웅들인 것이다. 나도 그랬지만 우리 6형제는 아버지에게 모두 각을 세웠고 심지어는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시대에 뒤진 것 같은 아버지의 삶의 태도와 완고함은 자식들에게 반발을 샀다. 지금 생각하면 부모님께 너무 심한 말을 했다고 생각하며 미안하고 죄송하고 부끄럽고 후회스럽지만 그땐 그랬다. 나도 자식을 키우지만 자식은 내 맘처럼 커주질 않는다. 자식이 나의 바람과 기대에 어긋나도 할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내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한두 번 들 때가 아니다. 나도 훌륭한 부모라는 소리까지 듣는 것을 바라지는 않지만 아이들에게 자상한 아버지가 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하지만 아이들과 대화가 잘 안 되고 때로는 한동안 대화조차 없는 때가 있기도 하다. 자식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의 나도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고루하고 고집만 센 그런 아버지로 보일 것이다. 뒤돌아보면 나도 아버지와 자잘한 대화를 나눈 적이 별로 없다. 벌초를 하면서 듣은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 농사 일손을 거들며 듣은 전쟁 때 겪은 얘기 등 대부분 서사적인 이야기들이다. 어쩌다 전화를 걸면 전화비 많이 나온다고 “건강 잘 챙기고 열심히 살아” 한마디 하시고는 전화를 끊으셨다. 나도 그런 아버지를 닮은 것 같다. 아이들에게 해 주는 얘기의 대부분은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인 이야기, 한·일 관계에 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나 세계와 인류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등 교훈적인 이야기뿐이다. 아버지는 자식 앞에서 원칙주의자가 되어야 하고 삶의 원칙 앞에서는 단호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자녀가 독립적으로 크지 못하고 우리 사회의 민주적 일원이 되지 못한다. '애들을 응석받이로 키우니까 사회가 이 모양이다'라는 뭐 이런 꼰대 같은 관념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이상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가는 것이다. 어릴 때는 이상을 좇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것이 현실화하기에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적정한 선에서 이상과 현실이 타협하거나 이상을 포기하고 과도하게 현실에 집착하기도 한다. 성숙해진다고 하는 것은 이 둘의 관계를 적정하게 맞추어 가는 과정일 것이다. 아버지. 1930년 6월생인 아버지는 어릴 때 총명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나 보다. 특히 글씨를 잘 써 큰집 할아버지에게 자식 제대로 교육시켜 보라고 논과 밭을 받았다. 당시 아버지는 일본 사람으로서 기본교육에 해당하는 소학교를 다녔다. 중학교를 갈 형편은 못 되어 농사를 거들었고 훈장이었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한학을 잠시 배우다가 광복을 맞았다. 광복되던 그해 15살에 큰집 할아버지 주선으로 양평에 사는 20살 난 서씨 여인과 결혼했다. 광복과 더불어 그의 국적만 바뀐 것이 아니라 아직 어리지만 한 집안에 가장이 되는 엄청난 변화를 맞은 것이다. 광복 후 나라의 혼란만큼이나 본인도 힘들었을 것이다. 일본에 갔던 삼촌은 돌아오지 못하고 숙모가 두 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본인에겐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동생들이 4명이나 더 있었고 1년 후엔 첫딸을 얻어 책임감이 강한 아버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큰집의 맏이로서 일가와 가족이 굶지 않으려면 열심히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20살이 되던 해에는 전쟁이 났다. 38선 부근이라 바로 북한 인민군에 점령당했지만 한동안은 잠잠하다가 추석 무렵 인민군에게 징집명령을 받았다. 추석을 쇠고 다시 모이라는 명령이 있었다. 그런데 추석날부터 연합군의 공습이 시작되자 인민군들은 서둘러 퇴각했다. 국군이 고향을 수복하고 나서는 군인으로 징집된 것은 아니지만 자경단원으로 차출되어 지역 치안 유지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1·4 후퇴를 하면서 자경단도 군인들과 섞여 대전까지 후퇴했다. 추운 겨울 정식 군인이 아니라서 보급품도 없이 각자도생하는 상황이라 생각없이 인민군 옷을 속에 껴입었다가 적의 첩자로 몰려 사형 직전까지 갔다. 그때 마침 헌병대장이 자경단을 조직했던 사람이라 아버지를 알아보고 보증을 서 주어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오니 첫아들이 태어나 있었다. 가족과 다시 만난 기쁨도 잠시, 이번엔 국군 영장이 나왔다. 제주에서 6개월 훈련을 받고 바로 전선으로 투입되었다. 백마고지가 있는 철원지구 부대로 배속되었다. 휴전을 앞둔 당시는 고지전을 벌이며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려고 쌍방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사상자가 엄청 많이 나던 때였다. 매일 같이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그런 죽음의 전장에 배속되었지만 그는 글씨를 잘 쓴다는 이유로 행정병으로 뽑혀 다행히 고진전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고지전에 투입된 전우들은 대부분 전사했다고 한다.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폭격 후유증으로 안면근육마비증이 생겨 평생 찡그린 얼굴 모습을 하셨다. 전쟁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지만 해마다 찾아오는 보릿고개를 어찌 어찌해서 겨우 넘기고 있었다. 마른 땅에도 잡초가 나듯이 자녀는 2년에 한 명씩 태어났다. 그런 와중에도 동생들을 다 출가시켰고 자신의 맏아들은 제대로 교육을 시켜야 한다며 고등학교는 서울로 유학을 보냈다. 농사만으로는 집안을 이끌 수 없어 목상(나무 장사)을 시작했다. 때를 잘 만났는지 제법 돈도 벌었고 서울을 들락거리다 마누라보다 훨씬 젊은 여자도 만나 한때 딴살림도 차렸다. 사고가 생겨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사업이 쫄딱 망해서야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 동네의 새마을 지도자가 되었다. 동네 진입로가 소달구지 한 대 겨우 지나갈 돌투성이 길이라 대부분 지게로 짐을 나르던 시절에 마을 길을 넓히고 다리를 놓고 초가지붕을 슬레이트나 함석으로 바꾸었다. 이에 대한 공로로 대통령 하사품인 자전거 한 대를 받았다. 자전거를 받던 날 동네잔치가 벌어졌다. 나는 지금도 그날을 기억한다. 내 키보다 훨씬 큰 삼천리 자전거에는 금빛 메달이 걸려 있었고 동네 사람들은 자신의 일만큼 자랑스러워했다. 돼지를 잡아 동네 잔치를 벌였는데 그때 숯불에 구운 돼지고기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동네가 매일 바뀌기 시작했다. 소로 밭을 갈던 것에서 경운기로 바뀌어 가는 외형적인 변화 이외에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 태도도 바뀌었다. 그동안 겨울 농한기 때에는 매일 같이 술과 노름판이 벌어졌지만 이제는 누가 더 새끼를 잘 꼬고 가마니를 많이 짜는지 내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침에는 식사 전에 퇴비를 한 짐 베고 논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서야 아침밥을 먹었다.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무렵 우리 동네에 전기가 들어왔다. 전깃불이 켜지던 날 어두컴컴했던 부엌이 대낮 같이 밝던 날 우리 가족은, 아니 우리 동네 사람들은 환호성을 울렸다. 눈이 부셔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다. 텔레비전은 그보다 좀 더 일찍 들어왔다. 뒷집 기춘이네 집에는 서울에 간 기현이 형이 사서 보낸 텔레비전이 있어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보는 동네 극장이 되었다. 안테나는 뒷산 꼭대기에 설치해 마을까지 연결했고 전원은 배터리로 해결했다. 가끔 배터리가 나가 연속극을 볼 수 없는 날도 있었지만 연속극에 푹 빠진 동네 어른들이 돈을 갹출해 배터리를 장만하면서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 전원이 나가는 일은 없었다. 우리 집안의 형제들은 서울 간 큰형 이외는 모두 중학교만 졸업하면 모두 생활 전선으로 내보냈다. 막내였던 나는 시대적인 혜택으로 도회지에 가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서울에 가서 대학까지 다녔다. 당시 대학은 공산주의의 해방구나 다름없었다. 누구나 대학생이면 반정부 데모하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했다. 학과 공부보다는 이념 서클 활동이 의식 있는 학생처럼 보였다. 우리 동네에도 이런 이념적 갈등은 비켜가지 못했다. 당시 아버지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나는 너를 믿는다. 네가 선택한 것에 대해 반성은 하되 후회는 하지 마라. 그리고 무엇을 하든 열심을 다해라.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대단한 삶을 사셨다. 식민지 광복과 새로운 나라 건설기에 가장이 되었고, 전쟁과 국가 건설 기간에는 자신의 청춘과 생명을 바쳐 싸웠다. 그리고 농촌 계몽과 근대화의 시기에는 마을 리더로서 주민들의 의식 혁명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힘썼다. 세계 최빈국에서 이제는 살 만한 세상의 토대를 만든 것이다.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말로는 영화 ‘국제시장’에서 덕수가 아버지에게 하는 말이 떠오른다. “아버지 내 약속 잘 지켰지예.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 언젠가 나도 아들의 손을 잡고 아버지의 무덤가에 가서 아버지를 붙들고 나도 열심히 살았다고, 나도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은 정의가 무엇인지, 공정이 어떠한 것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불확실성의 시대가 되었다. 부끄러운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때 최선을 써본다. 한자로 써보면 最善, 즉 최고의 선은 열심을 다하는 것이다. 자기 책임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 가족을 지키고 나라를 지키며 사회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온 우리들의 아버지, 꼭 안아드리고 싶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에필로그를 들으며 6월의 하늘을 본다. 필자 소개 -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글로벌피스재단에서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진행하고 있다. 2023-06-20 06: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