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munsuam@hanmail.net
‘가로세로’는 횡설수설(橫說竪說) 종횡무진(縱橫無盡)의
횡수(橫竪가로세로)와 종횡(縱橫세로가로)을 한글로 번역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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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사찰은 서원을 품고 서원은 사찰을 품다 [원철 스님, 출처: media Buddha.net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한강을 건넜다. 이섭대천(利攝大川)이라고 했던가. 큰물을 건넜더니 많은 이익이 있더라는 곳이다. 그래서 땅이름은 이천(利川)이 되었다. 일행과 함께 임금님께 진상했다는 쌀로 지은 밥으로 점심을 먹은 후 지역 특산물로 유명한 도자기 가게에서 차를 마셨다. 설봉공원의 번다함이 끝나는 호젓한 자리에 있는 설봉서원을 찾았다. 양지바른 곳에 사방으로 산이 둘러싸여 있는지라 아늑한 느낌을 더해준다. 거기서부터 영월암 가는 길은 엄청 가파르다. 하늘이 열릴 무렵 걸음을 멈추니 큰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이 눈에 들어온다. 이천시내를 굽어보며 저멀리 남한강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천의 진산은 설봉산이다. 이름 그대로 설산이다. 히말라야 산맥(설산)에서 흰눈이 녹아 흘러내린 계곡물이 모여 갠지스강을 이루면서 북부 인도 땅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그 넉넉함은 다양한 문화를 창출했다. 경기도 이천 설봉에서 흘러내린 물은 여래계곡을 거쳐 설봉호에서 잠시 머물다가 남한강을 향하면서 주변지역을 적셨다. 너른 이천 들판은 ‘임금님표’ 쌀을 비롯한 풍부한 농산물을 생산했다. 하지만 때로는 풍요로움이 지역민에겐 화근이 되기도 한다. 멀리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밀고 밀리는 각축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설봉산성에는 김유신이 통일전략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장소도 있다. 그 무렵 의상대사가 이 지역에 북악사를 창건했다. 설봉산의 옛이름이 북악산이다. 사찰 규모가 만만찮았다고 한다. 1744년 조선중기 영조 때 영월낭규(映月郎奎)대사가 산 중턱에 암자를 중창한 후 영월암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작은 암자가 변란으로 없어진 큰절을 대신하면서 그 역할까지 감당했을 것이다. 설봉산에는 경기 최초서원(1564년)인 설봉서원이 있고 경기 최대 마애불인 영월암이 있다. 어쨌거나 최초와 최대는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 설봉서원에는 우리나라 외교관들의 롤모델이라는 고려의 서희(942~998)선생 외 이천을 대표하는 3인의 선비 위패를 모셨다. 대원군에 의해 훼철된지 136년이 지난 후 2007년 새로 복원하였다. 이후 현대적 서원 설립의 본래 목적인 교육기능을 한껏 살렸다. 지자체와 긴밀한 협조 속에서 문화원 형태로 운영한다. 사서오경과 함께 붓글씨 전통예절 다도 등 다양한 강좌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오후로 빼곡하다. 어린이와 군인의 인성교육까지 위탁받아 진행한다. 서원의 원래 터는 이 자리보다 500m 남짓 떨어져 있는 현재의 현충탑 부지였다고 한다. 유허비만 남겨둔 채 자리를 옮겨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옮긴 터였지만 옛터 못지않게 넓고 양명했다. 하지만 현재 자리에서 또 건물위치 선정 때문에 고심하다가 본래 계획보다 앞쪽으로 약간 내렸다. 왜냐하면 뒤쪽에는 이미 주춧돌을 비롯한 각종 건축 부자재가 노출되어 있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지였기 때문이다. 설봉서원 원장선생께서 실무자를 대동하고 직접 안내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셨다. 설명을 듣다말고 주춧돌을 보다가 불현듯 여기가 영월암의 전신이라는 북악사 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한순간 스쳐간다. 이 터뿐만 아니라 이천지역의 목조 건축물 역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천 관아를 뜯은 재목 가운데 일부가 이천 향교의 건축재료로 사용되었고 향교가 허물어지면서 일부 부재는 1948년 영월암 대웅전을 보수할 때 사용되었다고 한다. 하기야 관청목재 향교목재 사찰목재가 따로 있겠는가. 원재료는 동일하지만 용도에 따라 그 이름만 달리 불릴 뿐이다. 또 향교 옆에는 오층석탑이 있었다. 이는 향교자리가 원래 절터였음을 시사하는 물증인 셈이다. 하지만 그 탑마저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반출되어 현재 도쿄 시내 오쿠라 호텔 뒤뜰에 있다고 한다. 절집의 탑이 어떤 때는 향교의 조경물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남의 나라 호텔정원 장식물로 바뀌기도 한다. 어쨌거나 문화재는 상황에 따라 주변이 바뀔 수도 있고 아예 옮겨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은 반드시 역사기록으로 남겨야 하고 또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유되어야 한다. 서방에서 온 어떤 종교는 인근 광주 퇴촌면 천진암을 ‘100여년 전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그들만의 성지’처럼 설명하고 있다. 불편한 진실이라고 하여 일부러 기록을 은폐하거나 의도적으로 기존 유물을 폐기하는 일이 있었다면 그것은 또 다른 문화파괴 행위라 하겠다. 영월암과 설봉서원은 계곡의 상류와 하류를 각각 지키고 있다. 어쨌거나 같은 골짜기의 물을 마시고 사는 까닭에 서원과 사찰의 친목도 도타웠다. 한 우물을 먹고 사는 마을주민과 진배없는 까닭이다. 같은 도로를 사용하는지라 겨울에는 눈도 함께 쓸어야 한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자연스럽게 지역사회의 일을 같이 도모할 일도 많았다. 이천 땅에서 서원은 사찰을 품고 사찰은 서원을 품는 흔치않은 광경을 만난 것이다. 덕분에 지나가던 나그네도 융숭한 대접과 함께 서원 역사서와 관계인물에 대한 자료까지 얻을 수 있었다. 일본에서 절은 신사로 인하여 빛나고 신사는 절 때문에 빛나는 모습을 더러 보았다. 나라(奈良)지방의 동대사(東大寺 도다이지)와 인근에 있는 큰 신사인 춘일대사(春日大社가스카타이샤)도 그랬다. 춘일신사 소유의 사슴들은 주로 동대사 입구에서 놀면서 관광객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보챈다. 그야말로 동가식 서가숙인 셈이다.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사슴이 스스로 사찰과 신사 공간을 수시로 오갈 뿐이다. 일정을 마무리한 후 돌아서는 길에 설산영월(雪山映月)을 시제로 삼은 한글주련이 안심당(종무소) 기둥 4개에 4자씩 걸려 있길래 찬찬히 읽었다. “설산에서 수련하니 마음 달이 밝았도다.” [영월암 안심당, 원철스님 제공] [설봉서원 뒤쪽의 옛터 주춧돌, 원철스님 제공] 2021-03-19 1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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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았다 [원철 스님, 출처: media Buddha.net]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조선개국 후 60여년 만에 일어난 정변으로 인하여 단종과 세조의 왕위교체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조정의 신료들은 새로운 왕의 등장에 대한 지지파와 반대파로 갈라졌다. 그리고 반대파는 적극적 반대파인 사육신(死六臣)과 소극적 반대파인 생육신(生六臣)으로 나누어졌다. 이러한 혼란의 현실 앞에서 절망한 어계 조려(漁溪 趙旅1420~1489)선생은 한양을 등 뒤로 한 채 홀연히 낙향하여 은둔함으로써 생육신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선생께서 강원도 영월 청령포의 단종 빈소로 문상을 갔다. 먼거리를 다닐 때는 가끔 승복으로 위장을 했다고 한다. 이 때도 아마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해 그렇게 변복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도착 후 동강을 건널 방법이 없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데 느닷없이 호랑이가 나타났다. 호랑이의 도움으로 무사히 강물을 건널 수 있었다. 이런 전설까지 안고 있는 어계 선생의 고택을 찾았다. 생각보다 더 소박했다. 문간 행랑채와 본채 그리고 사당이 전부였다. 마당의 은행나무만 장대하다. 고택에서 멀지않는 곳에 자리잡은 서산서원(西山書院)은 생육신을 모시기 위해 1703년 건립했다. 10년 후 나라의 공식적 인가를 받은 사액서원이 되었다. 하지만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84년 동리 유지들과 조려의 후손들이 힘을 모아 복원하였다. 6인의 중심은 어계선생이었다. 조려의 후손들이 대다수인 지역사회 최대문중인 함안조씨 영향력 때문이다. 서산서원의 서산(西山)이란 명칭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수양산에 머물면서 오직 고사리로써 생명을 부지하며 읊었다는 ‘채미가(菜薇歌)’의 첫구절인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캐네(登彼西山兮 菜其薇矣)”라고 한 것에서 기원한다. 공자와 맹자도 그의 절개를 높이 평가했고 사마천은 그들의 행적을 「사기열전」권1에 수록했다. 뒷날 중국의 ‘청성’(淸聖:역대 은둔자 가운데 최고의 성인)으로 불렸다. 어계선생이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형 인물인지라 후손들은 그 뜻을 받들고자 근처 산이름까지 백이봉 숙제봉으로 바꾸어 불렀다. 다시 내비게이션에 ‘무진정’을 입력했다. 군북면에서 가야면(함안군)으로 행정구역이 바뀌면서 바깥경치도 수시로 달라진다. 얼마 후 이정표가 나타났다. 호수공원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안내문 말미에는 ‘사진작가들에게 사계절 촬영지로 이름이 높고 신혼부부들의 웨딩포토의 무대로 인기가 많다’고 써놓았다. 이 정원의 전체적인 설계자인 조삼(趙蔘1473~1544 )은 어계 선생의 손자다. 은둔형인 할아버지는 검소와 절제를 미덕으로 삼고서 있는 그대로 자연의 품에 당신의 몸을 맡겼다. 하지만 손자는 달랐다. 다섯고을의 군수를 역임한 뒤 정쟁을 피하기 위해 자발적인 은퇴를 선택한 후 은둔자체를 즐겼다. 조삼 산생은 터를 보는 눈이 뛰어났다. 늘 주변경관까지 함께 살피는 안목을 지닌 인물이다. 작은 정자였지만 주변 경관이 더해지면서 훤출한 건물이 되었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길목인데도 번다하지 않은 자리였다. 정자를 높은 언덕 우뚝한 곳에 보란 듯이 세웠다. 예사롭지 않는 주변 풍광에 더하여 벽오동과 노송이 가득한 언덕에 길을 내고 꽃나무를 심고 집터를 가꾸었다. 연못은 3개의 섬을 만들 수 있을 만큼 넓었다. 섬 안에 심은 나무도 세월이 흐르면서 아름드리로 자랐고 뒷날 다리를 놓아 서로 연결되면서 관광의 격을 더욱 높였다. 정자를 포함한 이 호수 일대가 모두 무진정(無盡亭)이 되었다. 1542년 주세붕(1495~1554)이 지은 ‘무진정기(無盡亭記)’에는 “정자의 경치도 무진하고 선생의 즐거움 또한 무진하다”고 찬탄했다. 어쨋거나 그 이름에 걸맞게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을 달리하며 무진의 모습을 여러 가지로 연출했다. 무진은 많다는 뜻이다. 하지만 걱정거리인 번뇌는 많아서 좋을 게 없다. 그래서 항상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이라는 자기다짐을 해야 한다. 수시로 일어나는 번뇌를 그 때 그 때마다 잘 다스리겠다는 각오이기도 하다. 조삼은 조경과 건축의 대가인 동시에 ‘독서삼매’의 책벌레였다. 새벽부터 책 읽기에 여념이 없던 어느 날 심부름하는 이가 아침을 차려왔다. 밥상이 들어온 줄도 모르는 채 글만 읽었다. 한참 후에 할 수 없이 밥상을 내갔다. 점심상도 마찬가지였다. 해가 질 무렵 허기가 밀려오자 그제서야 아침밥상(?)을 차리라고 부엌에 재촉했다. 저녁밥상을 들고 온 이가 자초지종을 말하자 선생은 크게 웃었다. 식사 후 다시 밤이 깊어질 때까지 책을 읽었다. 무진정 주련에는 그 일을 짐작케 하는 시가 걸려 있다. 여섯 종류 경전을 공부하다가 먹는 것도 잊으니(六經咀嚼忘食) 위아래 구름 그림자가 하늘빛이 되었네(上下雲影天光)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보내고 맞이하면서도(送迎淸風明月) 또한 마땅히 백성과 나라를 먼저 걱정하네(亦當民國先憂) 공간이란 자기의 또다른 표현수단이다. 그래서 어계의 공간과 조삼의 공간은 다를 수 밖에 없다. 할아버지와 손자라는 세대차이는 말할 것도 없지만 개인의 가치관과 성정도 건축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어계고택은 소박미와 절제미의 압축판이며 무진정과 그 일대의 정원은 적극적인 자기표현의 결정판이라 하겠다.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라고 했던가. 어계고택은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무진정 조경은 화려했지만 정자까지 사치스럽지는 않았다. [무진정] [어계선생고택] 2021-02-18 22:5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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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한양 제1경 장의사 절터에는 당간지주만 남았네 [원철 스님, 출처: media Buddha.net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새해가 오면 통과의례라는 것을 치룬다. 그런데 한 해가 바뀌는데도 아무런 통과절차도 없이 새해를 맞이했다. 종로 보신각의 제야 종소리도 울리지 않았고 지역명소에서 열리던 해넘이 해맞이 행사도 없었다. 그냥 시계와 달력만 한 해가 바뀌었노라고 숫자로 표시해 줄 뿐이다. 감염병 창궐로 인하여 송구영신의 통과의례조차 생략해야 하는 시절인 까닭이다. 이동 조차 여의치 않는지라 도반과 함께 동네 안에서 첫 순례답사로 새해 통과의례를 치루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장의사(서울 종로구 신영동) 옛터에 있는 당간지주(보물235호)를 찾은 것이다. 공공건물 앞에 있는 국기 혹은 단체기 게양대처럼 절 입구에 사찰임을 알리는 깃발을 달았던 간단한 구조물이다. 깃대는 없어지고 돌 기둥 두 개가 마주보는 지지대만 남았다. 소품이지만 사찰의 흥망성쇄와 함께 그 자리를 꿋꿋하게 1500년 동안 지켰다. 디자인이 단순할수록 견고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당간지주가 다시금 증명해 준다. 세검정 초등학교 교문은 굳게 잠겨 있다. 담장을 따라 한 바퀴 돌았지만 후문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 시작 할 때부터 닫았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군사시설처럼 단단히 봉쇄해 놓고는 인기척조차 없다. 할 수 없이 담장의 빈 틈새를 이용하여 당간지주를 멀리서 봐야 했다. 맹추위 속에서도 운동장 한 켠에 당당하게 서 있다. 사찰자리가 학교부지로 바뀐 것이 일제강점기 시대 이후라고 하니 벌써 백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간지주는 학교 운동장에서 새해맞이를 100번 반복한 것이다. 조선시대 임진난 병자란 이후에는 군영(軍營)이었다. 한양을 수비하고 북한산성을 관할하는 총융청(摠戎廳)이 설치되었다. 삼각산과 인왕산이 만나는 험준한 지형에 계곡이 좁고 굴곡이 심해 도성방어를 위한 군사요충지로 적격이기 때문이다. 그 역사가 또 삼백여년이다. 당간지주는 군부대 안에서 300번 새해맞이를 거듭했다. 군영을 새로 만들었다는 의미로 동네이름 신영동(新營洞)은 오늘까지 그 흔적을 남겼다. 사실 절을 처음 지을 때도 군사적 목적과 무관하지 않았다. 장의사(藏義寺 莊義寺)는 659년 신라 태종무열왕 때 창건했다. 백제와 신라가 한강지역을 두고 각축전을 벌일 무렵이다.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했지만 답신이 없었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근심하고 있을 때 황산벌에서 전사한 장춘(長春)과 파랑(罷郞)이 꿈에 나타나 당군의 원병이 파견된 사실을 미리 알려 주었다. 감사의 뜻과 함께 이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장의사를 창건했다고《삼국사기》는 기록했다. 출발부터 다분히 군사적이다. 따라서 당간지주는 군영이 낯선 것도 아닐 것이다. 공식적으로 폐사가 된 것은 연산군(재위1494~1506) 때다. 조선초까지 많은 스님네들이 머물 수 있는 규모를 유지했다. 하지만 궁궐과 가깝고 경치가 좋은 곳인지라 임금까지 탐을 냈다. 1504년에 "절을 비우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이궁(離宮 별장 용도의 궁궐)이 설치되고 연회를 베풀면서 결국 왕의 놀이터가 되었다. 탕춘대(蕩春臺 봄을 즐긴다는 의미)는 황금색 건물에 청기와를 올린 화려한 누각이다. 졸지에 천년절집은 아름다운 꽃과 수려한 나무들로 꾸며지면서 흥청망청한 ‘비밀의 정원’으로 바뀌었고 더불어 당간지주는 정원을 장식하는 석조 조경물 노릇을 해야 했다. “오래 살다보니 별꼴을 다 보는구나” 하고 장탄식을 하며 새해맞이를 했던 세월일 것이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종이 만드는 장인들이 사찰에서 동거했다. 삼각산 여러 골짜기의 시냇물이 모이는 자리인지라 항상 수량이 풍부하여 한지 제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초기에 설치했던 조지소(造紙所)는 이내 조지서(造紙署)로 확장되었다. 조정에서 필요로 하는 종이 생산을 전담했다. 조선왕조신록 등 ‘기록문화의 대국’답게 사찰기능보다는 종이 만드는 역할을 더욱 요구했다. 종이장인들 가운데 포함된 스님들의 숫자도 만만찮았다. 한지를 뜨고 먹물로 인쇄하고 노끈으로 책을 묶던 광경은 사찰만 있던 시절에도 늘 하던 일이였다. 그런 익숙함 속에서 당간지주는 새해맞이를 했을 것이다. 사찰과 조지서가 공존해도 문제가 없을 만큼 면적은 드넓었다. 물이 많다는 것은 경치가 뛰어나다는 뜻이다. “성 밖에 놀만한 곳으로 장의사 앞 시내가 가장 아름답다....물이 맑고 돌은 희어 신선세계와 같아 놀려 오는 선비들이 끊어지지 않았다”(성현《용재총화》)고 했다. 조선 9대왕 성종의 형이며 시인으로 중국까지 이름을 떨친 월산대군(1455~1489)의 주변에는 많은 문인들이 몰려 들었다. 어느 날 머리를 맞대고서 한양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열 개를 골랐다. 그리고 10수의 시를 짓고는 ‘한도십영(漢都十詠)’이라는 큰제목을 달았다. 제1경은 ‘장의심승(藏義尋僧 장의사로 스님을 찾아가다)’이다. 해질 무렵 장의사로 돌아오는 스님들의 모습을 제1경으로 꼽았던 것이다. 동시에 선비들이 장의사를 찾는 일도 그 속에 포함시켰다. 전공이 다른 이를 만나야 사물을 보는 관점도 바뀌고 각도를 달리해야 배울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인사치례로 오가는 통과의례가 아니라 학문을 논하고 ‘도(道)’를 묻는 자리였던 것이다. 강희맹(1424~1483)은 글을 읽으려 갔고, 서거정(1420~1488)은 새벽 종소리에 깨달음을 기대했으며, 이승소(李承召1422~1484)는 ‘문수삼삼(文殊三三 《벽암록》35칙 참고)’ 화두를 질문할 만큼 명상 수행자로써 전문가에 버금가는 면모를 과시했다. 이러한 모습 자체가 제일가는 풍광인 것이다. 명산의 명인은 그 자체로 빛나기 마련이다. 사람이 꽃보다 더 아름다운 법이기 때문이다. “내가 예전에 스님을 한번 찾아가서, 밤 깊은 달빛 아래에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네. 새벽 종소리에 깊은 깨달음을 바랬으나...(我昔尋僧一歸去 夜蘭明月共軟語 晩鍾一聲發深省 서거정)” “한가한 틈을 타서 성문을 나와 스님을 찾아가서, 전삼삼 후삼삼 화두를 물어봤네.(乘閑出郭尋僧去 試問前三後三語 이승소)” “흰 머리카락으로 와서 보니 내가 예전에 왔던 곳, 젊어서 글을 읽었던 광산이 여기 아닌가?(白首歸來訪吾會 知是匡山讀書處 강희맹)” 도화살이라고 했던가? 모두가 좋아하는 매력을 가진 사람을 흔히 ‘도화살이 있다’고 말한다. 도화살은 사람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터도 도화살이 있다. 세검정 초등학교에서 만인이 좋아하는 터가 이런 곳일거라는 생각을 했다. 학교 축대에 벽화처럼 붙여놓은 사찰 궁궐별장 군부대 종이공장 학교 등 옛터를 알려주는 여러가지 표식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킨 당간지주는 이제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는 통과의례를 마친 어린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릴 날만 기다리고 있을 터이다. [세검정 당간지주 곁의 어린이 놀이시설-.원철스님 제공] 2021-01-06 22:3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