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munsuam@hanmail.net
‘가로세로’는 횡설수설(橫說竪說) 종횡무진(縱橫無盡)의
횡수(橫竪가로세로)와 종횡(縱橫세로가로)을 한글로 번역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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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한양 제1경 장의사 절터에는 당간지주만 남았네 [원철 스님, 출처: media Buddha.net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새해가 오면 통과의례라는 것을 치룬다. 그런데 한 해가 바뀌는데도 아무런 통과절차도 없이 새해를 맞이했다. 종로 보신각의 제야 종소리도 울리지 않았고 지역명소에서 열리던 해넘이 해맞이 행사도 없었다. 그냥 시계와 달력만 한 해가 바뀌었노라고 숫자로 표시해 줄 뿐이다. 감염병 창궐로 인하여 송구영신의 통과의례조차 생략해야 하는 시절인 까닭이다. 이동 조차 여의치 않는지라 도반과 함께 동네 안에서 첫 순례답사로 새해 통과의례를 치루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장의사(서울 종로구 신영동) 옛터에 있는 당간지주(보물235호)를 찾은 것이다. 공공건물 앞에 있는 국기 혹은 단체기 게양대처럼 절 입구에 사찰임을 알리는 깃발을 달았던 간단한 구조물이다. 깃대는 없어지고 돌 기둥 두 개가 마주보는 지지대만 남았다. 소품이지만 사찰의 흥망성쇄와 함께 그 자리를 꿋꿋하게 1500년 동안 지켰다. 디자인이 단순할수록 견고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당간지주가 다시금 증명해 준다. 세검정 초등학교 교문은 굳게 잠겨 있다. 담장을 따라 한 바퀴 돌았지만 후문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 시작 할 때부터 닫았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군사시설처럼 단단히 봉쇄해 놓고는 인기척조차 없다. 할 수 없이 담장의 빈 틈새를 이용하여 당간지주를 멀리서 봐야 했다. 맹추위 속에서도 운동장 한 켠에 당당하게 서 있다. 사찰자리가 학교부지로 바뀐 것이 일제강점기 시대 이후라고 하니 벌써 백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간지주는 학교 운동장에서 새해맞이를 100번 반복한 것이다. 조선시대 임진난 병자란 이후에는 군영(軍營)이었다. 한양을 수비하고 북한산성을 관할하는 총융청(摠戎廳)이 설치되었다. 삼각산과 인왕산이 만나는 험준한 지형에 계곡이 좁고 굴곡이 심해 도성방어를 위한 군사요충지로 적격이기 때문이다. 그 역사가 또 삼백여년이다. 당간지주는 군부대 안에서 300번 새해맞이를 거듭했다. 군영을 새로 만들었다는 의미로 동네이름 신영동(新營洞)은 오늘까지 그 흔적을 남겼다. 사실 절을 처음 지을 때도 군사적 목적과 무관하지 않았다. 장의사(藏義寺 莊義寺)는 659년 신라 태종무열왕 때 창건했다. 백제와 신라가 한강지역을 두고 각축전을 벌일 무렵이다.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했지만 답신이 없었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근심하고 있을 때 황산벌에서 전사한 장춘(長春)과 파랑(罷郞)이 꿈에 나타나 당군의 원병이 파견된 사실을 미리 알려 주었다. 감사의 뜻과 함께 이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장의사를 창건했다고《삼국사기》는 기록했다. 출발부터 다분히 군사적이다. 따라서 당간지주는 군영이 낯선 것도 아닐 것이다. 공식적으로 폐사가 된 것은 연산군(재위1494~1506) 때다. 조선초까지 많은 스님네들이 머물 수 있는 규모를 유지했다. 하지만 궁궐과 가깝고 경치가 좋은 곳인지라 임금까지 탐을 냈다. 1504년에 "절을 비우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이궁(離宮 별장 용도의 궁궐)이 설치되고 연회를 베풀면서 결국 왕의 놀이터가 되었다. 탕춘대(蕩春臺 봄을 즐긴다는 의미)는 황금색 건물에 청기와를 올린 화려한 누각이다. 졸지에 천년절집은 아름다운 꽃과 수려한 나무들로 꾸며지면서 흥청망청한 ‘비밀의 정원’으로 바뀌었고 더불어 당간지주는 정원을 장식하는 석조 조경물 노릇을 해야 했다. “오래 살다보니 별꼴을 다 보는구나” 하고 장탄식을 하며 새해맞이를 했던 세월일 것이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종이 만드는 장인들이 사찰에서 동거했다. 삼각산 여러 골짜기의 시냇물이 모이는 자리인지라 항상 수량이 풍부하여 한지 제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초기에 설치했던 조지소(造紙所)는 이내 조지서(造紙署)로 확장되었다. 조정에서 필요로 하는 종이 생산을 전담했다. 조선왕조신록 등 ‘기록문화의 대국’답게 사찰기능보다는 종이 만드는 역할을 더욱 요구했다. 종이장인들 가운데 포함된 스님들의 숫자도 만만찮았다. 한지를 뜨고 먹물로 인쇄하고 노끈으로 책을 묶던 광경은 사찰만 있던 시절에도 늘 하던 일이였다. 그런 익숙함 속에서 당간지주는 새해맞이를 했을 것이다. 사찰과 조지서가 공존해도 문제가 없을 만큼 면적은 드넓었다. 물이 많다는 것은 경치가 뛰어나다는 뜻이다. “성 밖에 놀만한 곳으로 장의사 앞 시내가 가장 아름답다....물이 맑고 돌은 희어 신선세계와 같아 놀려 오는 선비들이 끊어지지 않았다”(성현《용재총화》)고 했다. 조선 9대왕 성종의 형이며 시인으로 중국까지 이름을 떨친 월산대군(1455~1489)의 주변에는 많은 문인들이 몰려 들었다. 어느 날 머리를 맞대고서 한양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열 개를 골랐다. 그리고 10수의 시를 짓고는 ‘한도십영(漢都十詠)’이라는 큰제목을 달았다. 제1경은 ‘장의심승(藏義尋僧 장의사로 스님을 찾아가다)’이다. 해질 무렵 장의사로 돌아오는 스님들의 모습을 제1경으로 꼽았던 것이다. 동시에 선비들이 장의사를 찾는 일도 그 속에 포함시켰다. 전공이 다른 이를 만나야 사물을 보는 관점도 바뀌고 각도를 달리해야 배울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인사치례로 오가는 통과의례가 아니라 학문을 논하고 ‘도(道)’를 묻는 자리였던 것이다. 강희맹(1424~1483)은 글을 읽으려 갔고, 서거정(1420~1488)은 새벽 종소리에 깨달음을 기대했으며, 이승소(李承召1422~1484)는 ‘문수삼삼(文殊三三 《벽암록》35칙 참고)’ 화두를 질문할 만큼 명상 수행자로써 전문가에 버금가는 면모를 과시했다. 이러한 모습 자체가 제일가는 풍광인 것이다. 명산의 명인은 그 자체로 빛나기 마련이다. 사람이 꽃보다 더 아름다운 법이기 때문이다. “내가 예전에 스님을 한번 찾아가서, 밤 깊은 달빛 아래에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네. 새벽 종소리에 깊은 깨달음을 바랬으나...(我昔尋僧一歸去 夜蘭明月共軟語 晩鍾一聲發深省 서거정)” “한가한 틈을 타서 성문을 나와 스님을 찾아가서, 전삼삼 후삼삼 화두를 물어봤네.(乘閑出郭尋僧去 試問前三後三語 이승소)” “흰 머리카락으로 와서 보니 내가 예전에 왔던 곳, 젊어서 글을 읽었던 광산이 여기 아닌가?(白首歸來訪吾會 知是匡山讀書處 강희맹)” 도화살이라고 했던가? 모두가 좋아하는 매력을 가진 사람을 흔히 ‘도화살이 있다’고 말한다. 도화살은 사람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터도 도화살이 있다. 세검정 초등학교에서 만인이 좋아하는 터가 이런 곳일거라는 생각을 했다. 학교 축대에 벽화처럼 붙여놓은 사찰 궁궐별장 군부대 종이공장 학교 등 옛터를 알려주는 여러가지 표식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킨 당간지주는 이제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는 통과의례를 마친 어린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릴 날만 기다리고 있을 터이다. [세검정 당간지주 곁의 어린이 놀이시설-.원철스님 제공] 2021-01-06 22:3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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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누구든지 찾아 오겠다는 생각조차 하지말라 [원철 스님, 출처: media Buddha.net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겨울초입인지라 코끝이 싸아하다. 중국 복건(福建푸젠)성에 있는 주희(朱熹1130~1200)의 무이계곡(武夷溪谷)을 영남 땅에 재현했다는 무흘계곡을 찾았다. 경북 김천 증산면 불영산에서 발원하여 성주 가천면 수륜면으로 이어지는 대가천에 아홉군데 명소를 지정하면서 무흘구곡이 되었다. 상류에 자리잡은 무흘정사(武屹精舍 김천시 증산면) 입구에서 계곡 건너 편을 보니 나무에 달린 붉은 감이 초겨울 빈산의 단풍을 대신하며 처연한 모습으로 서 있다. 천천히 발걸음을 계곡 쪽으로 옮기니 다리를 겸한 보(洑)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수량이 많은 날에는 물에 잠겨 건널 수 없을 만큼 낮았다. 구곡의 7번째 명소인 만월담(滿月潭)이 가깝다. 계곡의 지류를 가로질러 만든 비설교(飛雪橋)도 있었던 모양이다. 이름 그대로 달밤(滿月)에 흐날리는 눈발(飛雪)을 감상한다면 참으로 멋지겠다.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했다. 조선중기의 대유학자 한강 정구(寒岡 鄭逑1543~1620)선생의 행장은 물론 당시 함께 했던 스님들의 흔적이 어딘가에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까하고 마른 풀이 가득한 마당과 푸른 대나무를 병풍처럼 두른 집주변을 이리저리 살폈다. 본채와 부엌 그리고 작은 별채 등 3동이 쓰러질 듯한 자세로 아슬아슬하게 겨우 모양새를 유지하고 있다. 집을 짓고 유지 보수하는 일에 승려들의 기여도가 많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지라 주춧돌만 남은 폐사지를 마주한 것보다 더한 안쓰러움이 일어난다. [원철스님 제공] 민가와 동떨어진 외진 곳이라 처음부터 공사가 쉽지 않았다. 집을 짓기 전인지라 건축주가 머물 곳이 없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7~8리 떨어진 곳에 있는 제대로 규모를 갖춘 사찰인 청암사(靑岩寺)에서 왕래하며 공사를 독려했다. 오가는 길에 말에서 떨어져 매우 심하게 다치기도 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신열(信悅)을 비롯한 젊은 승려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덕분에 예상보다 빨리 공사가 끝났다. 62세 때 일이다. 7~8년을 머무르며 많은 저술을 남겼다. 물론 그 저술이 나오기까지 많은 승려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무흘서재에는 문도들이 재사(齋舍)를 짓고는 승려를 모집하여 지키게 했다. 무흘정사 안에는 수많은 서책을 간직해두고 승려 공양주(부엌 책임자) 두 세명과 함께 거처하였다. 초가삼간 서운암에 서적을 보관해두고 인근의 승려를 불러와서 정사와 함께 관리하게 하였다. 1607년 홍수 때 물살에 휩쓸려 무너지고 정사도 허물어질 판국인데 인잠(印岑)과 승려 5~6명이 와서 인부와 함께 정사 서쪽에 예전보다 약간 더 큰집을 지었다. 세월이 흘러도 없어지지 않도록 관리까지 맡겼다. 무흘정사 기문(記文 정종호 지음)에 의하면 구한말까지 유지되었으나 관(官)에서 훼철했다고 한다. 대원군 시절 ‘서원철폐’ 정책에 따른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1922년 정씨문중에서 4칸집과 포사(庖舍부엌)를 지은 것이다. 정우락교수(경북대)의 논문 ‘한강정구의 무흘정사 건립과 저술활동’ 에서 이런 과정을 상세히 밝혔기에 대충 간추렸다. 어쨋거나 집을 만들 때부터 오늘날까지 인근 사찰과 승려들이 음으로 양으로 간여했고 유지보수에도 적지않는 역할이 뒤따랐다. 유형이건 무형이건 8할은 승려들의 공로인 셈이다. [원철스님 제공] 한강 선생은 대가천 물가에서 바라보는 가야산을 좋아했고 또 해인사를 자주 왕래했다. 37세(1579년) 때 기행문인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을 지었다. 숙야재(夙夜齋 성주군 수륜면)에서 가야산을 바라보며 “전경은 볼 수가 없고(未出全身面) 기이한 봉우리만 살짝 드러내네(微呈一角奇) 바야흐로 조화의 뜻을 알겠구나(方知造化意) 하늘의 뜻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을(不欲露天機)“라는 시까지 남겼다. 임진란 때는 많은 책과 원고를 성주지방 유생들의 노력으로 해인사로 옮긴 덕분에 무사히 보존 할 수 있었다.(하지만 아깝게도 72세 때 노곡정사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었다). 김성탁(金聖鐸1684~1747)은 무흘정사 정씨장서(鄭氏藏書)에 대하여 ‘해인사의 불서와 대비할 정도로 그 양이 만만찮다’고 평가했다. 명당에는 반드시 전설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무흘정사 자리는 무흘계곡의 모든 정기가 모인 곳이라는 곡주(曲主 계곡주인)의 예언이 전해온다. 검은 도포에 흰수염이 표표히 나부끼는 도인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선생이 젊은 시절 병환 중일 때 자화(自化 곡주의 심부름을 하는 이)가 가져온 환약(丸藥)을 먹고서 기운을 회복했다. 구곡(아홉골짜기)의 정기를 모았다는 영약이었다. “단명할 상(相)이지만 나의 계곡마다 훌륭한 이름을 붙여준 인연과 구곡마다 시를 한 수 씩 지어준 공덕으로 인하여 장수할 것이다”라는 덕담도 아끼지 않았다. 당시로서 적지않는 나이인 78세까지 살았다. 만월담은 달밤에 산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무흘정사에서 가까운 거리였다. 찾아 온 제자들에게 “이것이(밝은 달빛) 곧 천년을 전해온 군자의 마음이다. 선비는 이를 마음 속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此千載心也 儒者不可不心會也)”고 했다. 무대를 선원으로 바꾼다면 선종(禪宗)‘의 가르침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이래저래 무흘정사는 유불도(儒彿道) 세 집안이 함께 어우러진 공간인 셈이다. 밖으로 이름이 나게되면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번거러워도 그 자리에서 계속 머물고 싶다면 절차를 까다롭게 만들면 된다. 해인사 성철(1912~1993)스님은 수없이 찾아오는 이들에게 삼천배를 시킨 다음 만나주는 방법을 사용했다. 정구선생은 접근이 쉬운 대로변에 있는 회연서원(성주 수륜면)을 떠나 심심산골인 오지(김천 증산면)로 몸을 옮기는 수완을 발휘했다. 그리하여 무흘정사를 지었고 누구든지 찾아오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주변에 신신당부했던 것이다. 산봉우리 지는 달은 시냇물에 일렁이고(頭殘月點寒溪) 나 홀로 앉으니 밤기운이 서늘하구나(獨坐無人夜氣凄) 벗들은 사양하노니 찾아올 생각은 하지마오(爲謝親朋休理) 짙은 구름 쌓인 눈에 오솔길 마저 묻혔나니(亂雪層雲逕全迷) [원철스님 제공] 2020-12-07 23:2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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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파주 교하(交河) 천도론’의 원조를 땅끝에서 만나다 [원철 스님, 출처: media Buddha.net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전남 해남 대흥사에서 열린 서산(西山1520~1604)대사 탄신 오백주년 가을 향례(享禮)에 참석했다. 500이란 숫자 때문인지 만남에 더욱 각별한 의미가 더해진다. 숙소로 돌아와 그날(10월 31일) 오후에 열린 세미나 자료를 찬찬히 살폈다. 당신의 생애는 변화의 계기를 만날 때마다 또다른 전환이 이루어지곤 했다. 12살에 성균관에 입학했고 3년 수학 후 과거낙방이라는 쓴맛의 성적표를 받게 된다. 좌절감을 달래기 위해 시험에 떨어진 동료 몇 명과 지리산을 유람했고 거기에서 불교를 만났다. 유가에서 불가로 전향(?)한 셈이다. 약관(20세) 나이에 정식으로 삭발했다. 하지만 30세 되던 해인 1549년에 부활한 승과고시에 합격한 후 승직(僧職)을 받으면서 벼슬살이 아닌 벼슬살이를 하게 된다. 이후 임진란을 만나면서 반승반유(半僧半儒 승려와 유생을 겸함)의 삶을 살아야 했다. 윤두수(尹斗壽1533~1601)는 “온세상이 다 전쟁터가 되었는데(環海自成戎馬窟) 오직 대사만이 아직도 한가한 사람이구려(惟師猶一閑人)”라는 말로 잔소리를 했다. 피난 중이던 선조가 대사를 찾았다. “나라에 큰 난리가 발생했는데 산인(山人)이라고 어찌 스스로 편안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라는 말과 함께 도총섭(都摠攝)이란 직책을 받고서 졸지에 전장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7년 전쟁이 끝나자 미련없이 다시 산으로 돌아왔다. 그런 대사에게 어떤 유생은 “처음 벼슬을 맡았을 때는 영화로움이 더할 나위 없었는데 지금 벼슬을 그만두고 나니 빈궁함이 또한 더할 나위가 없게 되었다. 몸이 괴롭고 마음이 울적하지 않은가?”라고 물었다. “벼슬 전에도 벼슬 후에도 일의일발(一衣一鉢 옷 한벌 밥그릇 한 세트)일 뿐이다. 진퇴와 영욕은 몸에 있을 뿐 내 마음은 진퇴에도 영욕이 따르지 않는데 득실(得失)에 무슨 희비(喜悲)가 있겠는가”라는 귀거래변(歸去來辯)을 남겼다. 전쟁공로에 대한 포상(종2품 당상관)도 별로 괘념치 않았다. 200여년이 지난 후 제자들이 발이 부르트도록 쫒아다닌 끝에 1778년 대흥사에 사액(賜額 정조임금이 현판글씨를 내림)과 함께 표충사당이 건립되고 대사의 영정이 봉안되면서 비로소 국가향례가 올려지게 되었다. [원철스님 제공] 본 행사를 마친 후 인근지역을 답사삼아 둘러보는 일은 오래된 개인적 습관이기도 하다. 어디를 간들 얘깃거리가 없으랴만 이 지역도 수많은 스토리텔링이 함께하는 곳이다. 어릴 때 사찰에서 공부했던 이력을 가진 고산 윤선도(1587~1671) 고택인 녹우당(綠雨堂)을 찾았다. 대문 앞에는 우람한 모습의 은행나무가 있다. 자손의 과거합격 기념식수라고 전해오는 몇 백년된 은행나무 잎은 녹우(綠雨 봄비)가 아니라 금방이라도 금우(金雨 가을비)가 되어 땅 위로 쏟아질 것 같다. 풍경만 생각한다면 차라리 금우당이 더 낭만적이겠지만 가문의 미래까지 염두에 둔다면 녹우당이 더 나으리라. 종가집은 가을비보다는 봄비 이미지가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절집이었다면 아마 체로금풍당(體露金風堂 가을바람에 잎을 떨어뜨리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다)이란 당호를 붙였을지도 모르겠다고 혼자 상상해 본다. 대문에는 문패가 있어야 하듯 건물에는 현판이 있어야 한다. 조선 고유의 서체인 동국진체(東國眞體) 효시라는 옥동 이서(玉洞 李漵1662~1723 실학자 성호 이익의 이복 형)가 쓴 ‘녹우당’ 글씨를 만나면서 더욱 때깔나는 집이 되었다. “사월 좋은 날에 누군가 봄비 속에서 찾아 오리라(四月好天氣 人來綠雨中)”고 했다. 귀한 사람이 오면 비가 함께 따라온다고 했던가. 우(雨 비)는 우(友 벗)였다. 비는 수직으로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지만 벗은 수평인 동서남북에서 찾아온다. 집 이름과는 달리 벗을 거부한 채 녹우당 대문은 단단히 닫혀있다. 대흥사 입구에 있는 백년 된 한옥인 유선여관도 ‘수리 중’ 메모를 붙인 채 잠겨 있었다. 하긴 관광지가 된 절집도 어지간한 생활공간은 모조리 ‘출입금지’ 팻말을 붙여 놓았으니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만. 녹우당은 본래 경기도 수원에 있었다.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등극하면서 스승이던 윤선도를 위해 지어준 집이다. 낙향하면서 뜯어 옮긴 건물이 현재 사랑채인데 배로 싣고 왔다고 한다. 임금을 만난 덕분에 집을 하사 받았고 경기지방의 반가(班家양반집)는 해남 땅을 만난 인연으로 오늘까지 잘 보존되었다. 대흥사와 두륜산 일대에는 삼재(三災 물 불 바람의 피해)가 들어오지 않는 땅이라고 한다. 그래서 서산대사는 만년불훼지지(萬年不毁之地 만년토록 훼손이 없는 땅)인 이 자리에 당신의 의발(衣鉢 가사와 발우)과 염주 그리고 교지(敎旨 임명장) 등 각종 유품을 보관토록 한 것이다. 양택도 좋아야 하지만 음택도 좋아야 한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까닭이다. 윤선도의 무덤은 고모부 이의신(李懿信)이 자기 묘터(身後之地)로 잡아 둔 곳이지만 고산 선생이 빼앗듯이 양보받은 명당이다. 그는 당대의 유명한 풍수가였다. 임진란을 치른 후 민심이 흉흉하였다. 그래서 수도 한양의 정기가 쇠했으므로 도성을 교하(交河)로 옮겨야 한다고 광해군에게 진언한 인물로 유명하다. 물론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된다. 김두규 교수(우석대학)는 만약 교하지역으로 천도했다면 병자호란의 ‘삼전도 굴욕’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일대는 한강 예성강 임진강이 만나는 지역이다. 한국자생풍수 이론가인 최창조 교수(전 서울대)도 통일한국 수도이전의 최적지로 교하지역을 꼽았다. 그러고 보니 ‘교하 천도론’의 원조인물을 해남 땅에서 만났구나. 한반도 땅끝에서 절집과 종가집이 만났고 시대와 사람이 만났고 터와 인간이 만났고 또 인간과 인간들이 만났다. 그리하여 이야기를 만들었고 그 옛이야기는 지금 사람들의 눈과 귀를 통해 또다시 새로운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각색된다. 남도 답사일번지답게 지금도 많은 이야깃거리들이 어디선가 만들어지고 또 누군가에 의해 보태지면서 켜켜이 쌓여가고 있을 터이다. [원철스님 제공] 2020-11-11 02:4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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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고령 가야금이 충주 신라금으로 바뀌다. [원철 스님, 출처: media Buddha.net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코로나19는 한가위 풍속도까지 바꾸었다. 민족대이동이라고 불리는 혈연·지연의 견고한 문화마저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수천년 동안 추석이라는 이름 아래 미풍양속으로 당연히 감수했던 명절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다는 사회적 합의를 경험한 까닭이다. 신라 때 경주 낭산(狼山)에서 활동했던 가난한 음악가 백결(百結·한 벌 옷을 백번 기워 입었다는 뜻) 선생도 명절이 엄청 괴로웠을 것이다. 끼니를 해결할 쌀조차도 제대로 없는 살림살이인데, 명절이라고 따로 떡을 만든다는 것이 가당키나 했겠는가. 가장은 상심한 부인을 위해 거문고(琴)로 방아 찧는 소리를 연주하며 정성껏 위로했다. 별다른 경제적 출혈 없이 생색을 낼 수 있었다. 부인이 그 소리만으로 만족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방아타령’이라는 명곡은 영원히 남게 된다. 명절 가난이라는 위기가 또 다른 창작의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고향친구들과 모여 왁자지끌하게 회포도 풀 수 없는 역병이 창궐하는 추석에는 혼자 방에서 갖가지 음원을 통해 거문고 연주소리를 들으면서 ‘지음(知音)’으로 우정을 대치하는 방법도 있겠다. 제자백가서 〈열자·列子〉에 나오는 두 친구가 그랬다. 백아(伯牙)가 생각을 높은 산에 두고서 거문고를 연주하면 종자기(鍾子期)는 듣고서 “태산과 같음이여!”라는 추임새를 넣었고, 물을 염두에 두고 거문고를 타면 “황하와 양자강 같을시고!”라고 하며 무릎장단을 보탰다. 이처럼 백아가 생각하는 바를 종자기는 반드시 알아들었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고(絶絃)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지음’과 ‘백아절현’은 우정을 상징하는 문자로 바뀌었다. 만약 지금 둘이 다시 만나 거문고를 연주하고 추임새를 넣고자 한다면 “종자기는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서 친절한 안내문자가 올 것이다. 엄숙한 조선의 선비들도 음악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교양이기도 했다. 경북 예천 남야(南野)종택에는 자명금(自鳴琴·나라와 집안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스스로 울림)이라고 불리는 거문고가 가보로 전해왔다고 한다. 박정시(朴廷蓍·1601~1672)는 벼슬에서 물러날 때 책 한 권과 이 거문고 한 개만 챙겨서 귀향했다. 청렴결백했던 그도 거문고는 포기할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오백년 전의 부분명품족이 누린 유일한 사치였던 것이다. 서재에 거문고를 두고서 독서하다가 쉬는 틈을 이용하여 연주를 하곤 했다. 혹사당한 눈은 쉬게 하고 대신 놀고 있던 귀를 열고서 손가락을 마디마디 움직이는 이완을 통해 긴장감을 해소하는 나름의 휴식법이라 하겠다. 경북 청도 화양 탁영(濯纓)종택에는 탁영금(보물 제957호)이 전해온다. 김일손(1464~1498)이 1490년 제작한 것으로, 국내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거문고라고 하겠다. 당시의 원재료는 오동나무로 제작된, 이미 100년 넘은 낡은 문짝이었다. 문을 새로 교체하면서 버려지는 것을 얻어와 거문고를 만들었다. 문비금(門扉琴·문짝거문고)이라 이름을 붙이고는 “거문고는 내 마음을 단속하는 것이다. 걸어두고 소중히 여기는 것은 긴 소리 때문만이 아니로다”라는 의미까지 부여한 글을 남겼다. 오동나무 판대기가 문(門)의 역할을 마치니 다시 거문고의 몸체로 바뀐 것이다. 절집에도 거문고는 빠지지 않았다. 충남 예산 수덕사에 전해오는 만공(滿空·1871~1946)선사가 소장했던 거문고는 고종임금의 아들인 의친왕이 준 선물이라고 한다. 바탕에 ‘공민왕 금(琴)’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긴 했으나 지방문화재 지정으로 만족해야 했다. 추정컨대 전문가들로부터 진짜 고려금(高麗琴)으로 인정받진 못한 모양이다. 고려진품이라면 당연히 국보감이다. 하지만 현대소설가의 영감을 자극하면서 장편소설 탄생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최인호(1945~2013) 작가의 ‘길없는 길’은 이 거문고의 비밀에 대한 상상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거문고는 가사를 짓고 소설을 만드는 마르지 않는 문학적 샘물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경자년(2020년)의 추석풍습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 가야금 이름도 바뀌었다. 우륵(于勒)의 고향인 대가야국 도읍지였던 경북 고령에서는 가야금이라고 불렀지만 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이후 그의 주 활동무대가 된 충북 충주 탄금대로 옮겨 가면서 신라금이 된다. ‘신라금’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나라(奈良)에 소재한 동대사(東大寺·도다이지) 정창원(正倉院·쇼쇼인)에 몇 점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현재 가장 오래된 가야금인 셈이다. 지금 가야금과 거문고는 일목요연한 도표를 만들어 서로 차이점을 열거하면서 분명하게 경계를 두고 나누고 있지만 한자사전의 ‘금(琴)’자(字)는 ‘거문고 금’자다. 두 악기 역시 세월이 흐르면서 자기개량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지역과 성별에 따라 악기에 대한 선호도가 달라졌지만, 예전에는 크게 구별하거나 나누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강남에서는 귤, 강북에서는 탱자’라고 한 것처럼 지역과 사람에 따른 자연스런 변화가 뒤따랐을 뿐이다. 어쨌거나 모든 것은 바뀐다는 그 사실 하나만 바뀌지 않을 뿐 모든 것은 변해가기 마련이라는 것도 ‘금(琴)’자가 알려주고 있다. 가능한 한 이동금지를 권고한 추석연휴인지라 지인이 두고 간 국악시평집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덤으로 오가는 길에 탄금대와 가얏고마을을 찾았다. 이게 책 한 권이 주는 힘이다. 가얏고마을 입구의 넓은 공터에 진열된, 어림짐작으로 몇 백개는 될 법한 전시용 오동나무판은 또 다른 볼거리다. 남한강 절벽 위의 탄금대 표지석 앞에서 유장하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소리 없는 소리를 들었다. 아~그렇지(유레카)! 서산(西山)대사로 불리는 청허휴정(淸虛休靜·1520~1604)선사도 거문고를 좋아하여 ‘청허가(淸虛歌)’를 남기셨지. 거문고를 안고 소나무에 기댔더니(君抱琴兮倚長松) 소나무는 변치 않는 마음이로다(長松兮不改心). 노래를 부르며 푸른 물가에 앉으니(我長歌兮坐綠水) 푸른 물은 청허의 빈 마음이구나(綠水兮淸虛心). 2020-10-04 22:3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