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타
요시히로 박사 yoog76@gmail.com
요시히로 박사 yoog76@gmail.com
- 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준교수
- 前 주한 일본대사관 전문조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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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타 요시히로의 한일 풍경] 간토대지진 100년 …조선인 학살의 비극은 인권 문제 [오가타 요시히로 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준교수] 지진이 잦은 일본에서는 매년 9월 1일을 ‘방재의 날’로 정하고 있다. 1923년 9월 1일은 간토(関東) 대지진이 일어난 날이고, 올해는 지진 재해가 일어난 지 100년째 되는 해다. 일본 TV, 신문 등 미디어에서는 다양한 각도에서 지진 당시를 다루었고 관련 영화와 서적도 주목받았다. 도쿄 등 수도권을 강타한 간토 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 토요일 낮 11시 58분에 일어났다. 지진 자체로 인한 피해도 컸지만 토요일 점심시간이라 많은 가정에서 불을 사용해 화재로 인한 피해가 심각했다. 지진으로 인한 사망·실종자는 약 1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들 중 약 90%에 해당하는 사람이 화재에 의한 희생자였다. 전파·전소된 가옥이 29만채, 살 곳을 잃은 사람은 200만명에 이르렀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일으켰던 동일본 대지진 당시 사망·실종자가 1만8000명, 전파·전소된 가옥이 12만채였던 것과 비교하면 간토 대지진 당시 피해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일본에서 간토 대지진은 조선인 학살 사건으로도 기억된다. '조선인'이라고 하면 차별적인 용어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당시는 아직 대한민국 성립 이전이었고 한반도라는 의미로 일본어는 '조선반도', 한반도 출신은 '조선인'으로 인식된다. 올해 100주년을 맞으며 조선인 학살 사건을 다룬 일본 언론도 많았다. 지진 재해의 혼란 속에서 많은 조선인이 일본인의 손에 살해되었다. 희생자 중에는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도 있었고 조선인으로 오인된 일본인도 포함됐다. 정확한 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본 정부 중앙방재회의가 발표한 보고서(2009년)에 따르면 지진 피해로 인한 전체 사망자 중 적게는 1%에서 많게는 수십 %까지가 살해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1000~수천 명이 학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피해 규모도 그렇지만 그 실태는 처참했다.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거나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불을 질렀다” 등 유언비어가 돌았고 이를 믿었던 일본 관헌과 자경단 등이 다수 조선인과 중국인을 살해했다. 조선인이 발음하기 어려운 일본어 '15엔(円) 50전(銭)'을 말하게 해서 발음이 일본어 원어민과는 다르거나 말하지 못하면 조선인으로 간주해 살해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투리를 쓰는 지방 출신 일본인이나 청각장애인도 희생되었다. 당시는 식민지 시대로 독립운동 등을 통해 일제에 저항하는 조선인들도 적지 않았기에 일본인들에게는 무슨 일이 생기면 조선인에게 공격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공격의 대상이 되었고, 이러한 자경단의 만행을 경찰이 방관한 사례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 보고에서는 ‘학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살상’이라고 했지만 이는 조선인이나 중국인이라는 특정 민족을 대상으로 한 틀림없는 ‘학살’이자 ‘제노사이드(Genocide)’ 사건이었다. 일본 시민들은 매년 9월 1일 조선인 학살이라는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수도권 곳곳에서 희생자 추모 행사를 열어왔다. 도쿄에서는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가 있는 스미다구(墨田区) 요코아미초(横網町) 공원에서 매년 추모식이 열린다. 추모비에는 “잘못된 책동과 유언비어 때문에 조선인 6000여 명이 고귀한 생명을 빼앗겼다” “이 역사를 영원히 잊지 않고 재일조선인과 굳게 손잡고 일본과 한반도의 친선, 아시아 평화를 세우고자 한다”고 새겨져 있는데 1973년 도쿄 도의회 여야 합의로 세워졌다고 한다. 이 공원은 당시 도쿄 시내에서 가장 피해가 컸던 지역에 위치해 있고 조선인뿐만 아니라 지진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 유해를 모시는 위령당도 있다. 이곳에서 열린 추모식에는 과거 매년 도쿄 도지사가 추도사를 보내왔다. 중국인을 공공연히 ‘삼국인’으로 부르는 등 차별주의자로 유명했던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도 도지사 재임 기간 중 빠짐없이 추모문을 보냈지만 현 도지사인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는 2017년부터 이를 중단하고 있다. 이에 대해 고이케 지사는 “재해와 여러 사정으로 돌아가신 모든 분들께 애도를 표한다”고 하면서도 조선인 학살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시민단체 등은 학살의 역사를 부정하는 일이 될 수 있다며 도지사의 추모문 송부를 도쿄도에 재차 요청하고 있지만 올해도 끝내 추모문을 보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도쿄도는 추모식을 방해하기 위해 같은 곳에서 열리는 역사부정 차별주의 단체의 가짜 ‘위령제’ 개최를 허용했다. 많은 시민의 대항으로 그 가짜 ‘위령제’는 결국 불발됐지만 도쿄도의 대응 또한 아쉬운 점이 많았다. 학살의 역사를 부정하는 목소리를 조장하고 있는 것은 도쿄도뿐만이 아니다. 지난달 말에는 마쓰노 히로카즈(松野博一) 일본 관방장관이 기자회견에서 조선인 학살에 대한 정부 입장을 알려 달라는 질문에 “정부 조사에 한정한다면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답했다. 학살을 보여주는 기록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고 정부가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정부는 최근 몇 년간 기록이 없다는 발언을 반복하며 마치 조선인 학살이 없었던 것처럼 계속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사건 당시 일부에서는 사건 은폐도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어 정확한 희생자 수가 공식적인 기록으로 파악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고 그 실태 또한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것이 학살 사실이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기록이 없다는 것은 오히려 정부의 능력 부족을 보여주는 것이니 부끄러워해야 한다. 공식적인 기록이 충분하지 않아도 학살을 보여주는 기록은 분명 남아 있고 그동안 많은 시민과 전문가들이 조사·연구해왔으며 조선인 학살의 역사는 이미 확인된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정부 중앙방재회의 보고서를 봐도 지진 직후 살상 사건에서 중심을 이룬 것은 조선인 박해였다. 당시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운동 등에 직면해 일본인들이 공포감을 느낀 적이 있고, 몰이해와 민족적 차별 의식이 조선인 박해의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는 내용 등이 기재되어 있다. 보고서가 인용한 1차 자료에는 조선인들이 희생된 살상 사건이 기록되어 있고 국립공문서관이 운영하는 아시아역사자료센터 등에서 보관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 보고서는 어디까지나 지식인의 기술이지 정부의 견해는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회의는 정부가 설치한 것으로 당시 내각 총리대신에게도 조사 결과가 보고된 바 있다. 그러므로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답변은 관방장관의 무지 또는 궤변에 불과하다. 간토 대지진 그리고 조선인 학살 사건 100주년을 맞이하며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가 있다. 지진 재해가 일어난 9월 1일에 맞춰 최근 공개된 영화 <후쿠다무라(福田村) 사건>(모리 다쓰야(森達也) 감독)이다. 지진 당시 혼란 속에서 일본 지방인 가가와현(香川県)에서 약을 팔러 온 보따리상들이 지바현(千葉県) 후쿠다무라(지금의 노다(野田)시)에서 현지 자경단에게 폭행을 당해 아이와 임신부를 포함해 9명이 살해된 사건을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이들이 살해당한 것은 사투리를 써 조선인으로 오인받았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학살 문제는 조선인이나 중국인 같은 외국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인도 그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식민지 지배하에서 조선인에 대한 멸시, 앞서 말한 것과 같은 공포심에서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가 안이하게 믿어졌고, 신문 매체에도 이를 부추길 만한 기사가 실리면서 유언비어가 사실처럼 유포되었다. 사람들의 차별의식을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은 정부 등 공적 기관이자 언론이었다. 요즘 한국에서는 한 국회의원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행사에 참석한 사실이 비판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그 의원이 참석했다는 행사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 수도권 각지에서 개최된 조선인 학살 추모식 중 하나로 도쿄도나 일본 정부가 역사를 직시하지 않는 가운데 일본 시민들이 주최한 것이었다. 일본의 시민운동을 잘 아는 사람에게는 상식 같은 이야기지만 식민지 시기 역사 문제를 다루는 자리나 조직에 총련 관계자가 참여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재일동포의 역사를 알고 있으면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상식이다. 가해 역사를 부정하려는 일본 일부 보수세력에 의한 탄압의 역사는 재일동포들의 저항의 역사이기도 했고 그 중심에는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있었다. 그것과 남북 분단 상황에서 체제 경쟁을 똑같이 생각하는 것은 몰역사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역사는 정치적 입장을 초월한 인권 문제다. 일본 식민주의가 불러온 외국인 또는 민족에 대한 차별, 혐오범죄(hate crime)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기억하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부정적 역사이기도 하다. 사람을 조직이나 속성 등 카테고리로 묶는 발상은 위험하다. 일본인도 간토 대지진 학살을 피해갈 수 없었듯이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고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최근 <재해와 외국인 범죄 유언비어 - 관동대지진부터 동일본대지진까지>를 저술한 곽기환 도호쿠가쿠인(東北学院)대학 교수가 언론 인터뷰에서 매우 중요한 지적을 했다. 지진 재해라는 극한 상태에서 소리를 내지 못하는 수많은 이재민과 그 피해에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감정의 출구’로서 외국인에 대한 공격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평소 이질적인 것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존재하는 가운데 대중에게 스트레스 해소의 분출구가 된 외국인이 위험에 처한다는 것이다. 사람을 조직이나 속성에 의해서만 식별하고 단정함으로써 생기는 편견과 차별은 혐오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 바로 그것이 차별의 사슬이자 ‘증오의 피라미드(Pyramid of Hate)’다. 우리는 이런 것들이야말로 100년 전 역사에서 배워 나가야 한다. 원래는 정부가 그것을 주도해야 하지만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든 그 뜻을 이어가려는 시민사회의 힘에서 희망을 찾을 수밖에 없다. 여론을 선동하는 언론의 자제가 요구되는 동시에 언론에 휘둘리지 않는 우리 시민들 나름의 식견 또한 요구된다. '간토 대지진 100년' 방재훈련 연설하는 기시다 (도쿄 AP·교도=연합뉴스) 일본 간토(關東) 대지진 발생 100년을 맞은 지난 1일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도쿄에서 방재훈련 관련 연설을 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간토 대지진이 발생한 9월 1일을 '재해의 날'로 지정해 매년 재해 대응 훈련과 행사 등을 개최하고 있다. 오가타 요시히로(緒方義広) 주요 이력 ▷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준교수 ▷연세대 정치학박사 ▷전 홍익대 조교수 ▷전 주한 일본대사관 전문조사원 2023-09-08 15: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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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타 요시히로의 한일 풍경] 6.25 재일조선인 의용병 …잊혀진 그들의 슬픔 [오가타 요시히로 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준교수] 7월 27일은 6·25전쟁 정전 70주년이다. 아직 종전을 맞이하지 못하고 평화협정도 체결되지 않은 이 전쟁으로 한반도는 분단이라는 특수한 환경에 놓여 있다. 30여 년 전 한국 친구와 대화히먄서 “한반도 분단은 일본 탓”이라는 말을 듣고 놀란 적이 있다. 내가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일이다. 역사에 무지했던 나는 한반도 분단이 “미·소 냉전시대의 산물”이라고만 이해했지, 설마 일본이 한반도 분단과 관련이 있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일본에 의한 식민지배와 관련해 현재까지 이르는 연속성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식민지배가 끝난 1945년 이전과 이후를 연관 지어 생각할 일이 별로 없다. 6·25전쟁도 일본 경제 발전에 큰 발판을 제공한 “전쟁 특수”로 인식되는 정도다. 물론 전쟁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일어났고, 그 영향으로 패전국 일본의 국제무대 복귀가 시급해진 경위나 일본이 직간접적으로 전쟁에 얼마나 가담했는지에 대한 지적은 전문가들 사이에 존재한다. 그러나 30여 년 전 내가 그랬던 것처럼 6·25전쟁도 남북 분단도 남의 일에 불과하다는 의식에 머물러 있는 일본인이 대다수인 것이 현실일 것이다. 일본에서는 6·25전쟁을 흔히 ‘조선전쟁’이라고 부른다. ‘Korean War’에서 ‘한국전쟁’이라고도 부르듯이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이라는 뜻인데, 일본에서는 한반도(Korean Peninsula)를 ‘조선반도'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이 호칭을 둘러싼 한·일 간 차이는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 과정(1951~1965년) 혹은 일본에 의한 “한국 병합”(1910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에서는 “Korea=조선”으로 ‘조선’이라는 호칭이 반드시 북한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반도의 민족을 일컫는 말도 ‘조선인’이다. 이 조선인이라는 용어를 차별어로 여기는 한국 사람들이 많은데 원래 그 말에는 차별적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일본 사회에 한반도 사람들을 멸시하는 풍조 속에서 그들을 “조센진(チョーセンジン)”이라고 부르면서 말 자체가 차별 용어인 것처럼 오해받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배하는 과정에서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빼앗아 일본의 외지(外地)로서 ‘조선’이라고 호칭하기로 한 경위를 생각한다면 ‘조선’이라는 용어가 ‘대한제국(한국)’을 부정하는 차별적인 용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다만 당시 한반도 사람들에게도 ‘한국’이라는 호칭보다 ‘조선’이라는 호칭이 더 친숙했던 것도 사실인 듯하다. 1897년 대한제국이라는 국호가 정해진 이후에도 당시 신문 등에는 ‘조선’ ‘조선인’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했다. 일본에 사는 한반도 출신자, 즉 ‘재일조선인’은 식민지 시기를 전후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과 그 후손들인데, 이들 역시 스스로를 일본어로 ‘조선인’이라고 칭하였다. 일본인이 아닌 ‘조선반도’ 출신임을 분명히 한 민족으로서 ‘조선인’이었다. 그러나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일본에 있던 재일조선인에게 ‘한국인’일 것을 요구했다. 북한과 치열한 체제 경쟁을 하는 가운데 정부 '관보'(1950년 1월)를 통해 “북한 괴뢰정권과 확연한 구별을 짓기 위하여” 국호로서 ‘조선’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기로 확인한 바 있는 한국 정부로서는 당연한 요구였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당시 많은 재일조선인들에게 ‘조선’을 부정하고 ‘한국’을 받아들이는 것은 식민지배하에 일본으로 건너가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사이 고착화된 ‘조선/한국’이라는 분단의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의미로 여겨졌다. ‘재일조선인’을 ‘북한 사람’을 뜻하는 말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 그들 중 90% 이상이 제주도나 경상남도, 전라남도 등 남쪽 출신이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재일조선인’을 '불순분자'로 간주했다. 지금도 자신을 ‘재일조선인’으로 규정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물론 그중에는 북한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자기 조국은 분단국가가 아니라 ‘조선반도’라는 신념에 따라 ‘재일조선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래서 한국 국민이면서 재일조선인이라는 것에도 모순이 없는 것이다. 광복 전후에 여러 경위와 사정으로 일본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조선인들이 많았다. 정확한 수를 정식 통계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광복 직후 일본에는 조선인이 약 220만명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 한반도로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된 조선인, 즉 재일조선인은 60만명 정도였다. 그러던 중 1950년 6·25전쟁 발발 소식이 일본에 전해지자 재일조선인 민족단체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현재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 주축이 되어 재일조선인 642명이 의용병으로 전선에 파견되었다. 이들 중에는 대한민국(한국)을 모국으로 여기다가 북한에 의해 다시 모국이 상실될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끼고 의용병으로 참전한 재일조선인도 있었다. 한국 정부 주일대표부도 의용병 파견에 관여하였으나 한·일 간에 아직 국교가 없는 시대였기 때문에 의용병은 당초 국군이 아닌 연합군 일원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특수한 형태로 참전했기 때문에 비극이 일어났다. 6·25전쟁 중에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이 독립하게 되었고 연합군 일원으로 일본을 떠난 의용병 일부는 한국과 국교가 없는 일본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이전에 전선에서 목숨을 잃은 재일조선인 의용병은 135명으로, 전사 사실이 일본에 있는 가족들에게 알려지지 않아 슬퍼할 기회조차 빼앗긴 경우도 있었다. 조선인이라고는 하지만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란 재일조선인 의용병에게 적어도 그 당시 돌아가야 할 곳은 일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가족이 기다리는 일본으로 돌아간 의용병도 있었지만 연고가 없는 한국에 남을 수밖에 없어서 학업이나 취업 기회도 제대로 얻지 못하고 고생한 이들이 242명에 이르렀다. 6·25전쟁에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를 널리 인정받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한국 내에서도 여전히 재일조선인 의용병에 대한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또 이들은 “애국심”의 상징으로 회자될 때가 많지만 그들이 참전 과정에서 얼마나 외면당했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재일조선인은 한·일 관계, 북·일 관계, 그리고 남북 분단의 경계에서 농락당했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인식되지 않거나 오해의 대상이 되어 왔다. 한국 사회에서 북한이라는 존재는 안보상 문제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치적 논쟁에 영향을 미친다. 동시에 일본이라는 존재 또한 정치적 논쟁거리가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일조선인은 직간접적으로 그 영향을 계속 받아 왔다. 북·일 정상회담이 성사된 2002년 북한이 일본인 납치 문제를 인정하고 사과하자 일본에서는 ‘북한 때리기’가 노골화되었고 그 화살이 재일조선인 커뮤니티를 향하게 되었다. 그 이후 일본 사회에 역사수정주의 대두나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일본의 '우경화'가 두드러지면서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 증오범죄(hate crime) 등 ‘혐한(嫌韓) 붐’이라고 할 수 있는 현상에 이르렀고 그 차별의 최전선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재일조선인들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남북 통일을 둘러싸고 젊은 세대와 구세대 사이에 간극이 있다고 한다. 최근 세대 사이에서 남북 통일 문제에 대한 관심이나 북한 주민이 같은 민족이라는 실감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개개인의 삶이 무엇보다 관심사이며 민족이나 평화 같은 큰 이슈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북 분단에 대한 관심은 정작 한반도에 살지 않는 재일조선인들에게 더 크다고 할 수도 있다. 2000년 김대중 정부 아래 이뤄진 남북 정상회담 모습을 보고 눈물짓는 재일조선인들이 있었고 최근에는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손을 잡고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는 모습에 놀랐으며 이후 북·미 정상회담에 큰 기대를 건 것은 남한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결국 하노이 북·미 회담은 결렬되고 말았지만 6・25전쟁 종전과 평화협정 체결을 바라는 마음은 재일조선인 또한 못지않거나 그 이상일지 모른다. 오가타 요시히로(緒方義広) 주요 이력 ▷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준교수 ▷연세대 정치학박사 ▷전 홍익대 조교수 ▷전 주한 일본대사관 전문조사원 2023-07-28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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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타 요시히로의 한일 풍경] 난민과 이민자에게 인색하지 않은 사회 한국의 한 정치인이 영주권을 취득한 지 일정 기간이 지난 국내 외국인에게 그동안 부여되어 온 지방참정권 조건을 엄격화함으로써 외국인 주민의 권리를 제한하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물론 이는 중국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이용한 선거 전략의 일환에 불과하겠으나, 반중 감정을 부추겨 지지층을 얻으려는 정치적 획책 자체가 위험하고 부끄러운 전략이다. 그러나 정치인들이 사회의 요구를 민감하게 포착한다는 점에서 보면, 한국 사회에 반중 인식이 적지 않게 퍼져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코로나19 사태가 한창일 무렵 한국 내에서 생활지원금 요구의 목소리가 컸던 반면, 외국인 지원에는 소극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우리 국민조차 힘든데”, “우선 국민부터”라는 이유로 외국인 지원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반영했기 때문일 것이다. 경기도와 서울시는 당초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에서 외국인 주민을 제외했다. 이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는 외국인 주민을 긴급재난지원 정책에서 배제하는 것은 평등권 침해임을 지적했고, 적지 않은 시민들도 외국인 배제 방침을 밝힌 지자체와 행정부를 비판했다. 결국 외국인 주민에 대해서도 동일한 지자체 지원이 이뤄지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외국인 주민을 제외한다는 방침이 당연하듯 제시되지는 않았다. 한 전문가는 재일조선인 권리 투쟁을 겪어온 일본 사회이기에 그러한 차이가 나타난 것이라고 봤다. 일본 사회는 식민지 지배 이후 재일조선인이라는 사회적 소수자를 늘 안고 왔다. 동시에 재일조선인들은 일본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들의 권리를 인정받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했고, 그 덕분에 일본사회는 외국인 주민의 권리보장이라는 관점에서 발전해 온 측면이 분명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곧 일본 사회가 외국인 친화적 사회임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실제로 현재 일본 사회에서 큰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이 난민을 비롯한 외국인 수용의 문제다. 난민 문제에 있어서는 한국 또한 일본과 마찬가지로 국제 사회의 표준에 훨씬 못 미치고, 개선이 요구되고 있다. 다만, 한국은 난민 조약에 따라 2012년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제정한 나라기도 하다. 일본은 난민조약에 가입했으나 여전히 국내법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일본에서는 난민 신청을 하는 외국인을 ‘얼마나 빨리 추방할 것인가’에 관한 입법이 추진되고 있다. 최근 2년간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 출입국관리법(출입국관리 및 난민인정법)의 개정 문제다. 2021년, 논의된 개정안은 후퇴일 뿐이라며 한 번 폐안에 몰렸지만, 지난 6월 9일 야당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회를 통과했다. 이 개정안에는 난민 신청을 2회로 제한하고, 이후 자신의 국적국으로 강제 송환을 가능하게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현재로서는 난민 신청 중인 외국인을 국외 퇴거시킬 수 없다. 그러나 정규 외국인 등록을 할 수 없는 난민 신청자를 일본의 출입국 행정 당국은 마치 범죄자처럼 여기고 있어, 조금이라도 빨리 일본 사회에서 배제하려고 하는 것이다. 흔히 ‘불법체류자’라는 표현으로 불리지만 이들은 법을 어긴 범죄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미등록 외국인’에 불과하다. 세계인권선언에 의거한 난민조약은 난민 인정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개인이 고문 및 비인도적 또는 굴욕적 처우나 형벌의 위험에 노출되는 경우 절대로 강제 송환되어서는 아니된다”고 하여, 난민 신청자를 강제 송환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행위로 보고 금하고 있다. 바로 강제 송환 금지(Non-Refoulement)의 원칙이다. 그럼에도 이번 출입국관리법이 개정됨으로써 가뜩이나 어려운 일본의 난민 인정 신청 기회조차 제한하자는 쪽에 힘을 실어준 꼴이 되었다. 애초 일본의 난민 인정률은 세계적으로 봐도 극히 낮다. 예를 들어, 2020년 통계에 따르면 독일의 난민 인정률은 41.7%(6만3456명), 캐나다는 54.9%(1만9596명) 등인 데 비해 일본의 인정률은 0.5%(47명)에 그친다. 이미 세계적으로도 일본이 난민에게 엄격한 나라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한다. 난민에게 냉랭한 일본의 자세는 의도치 않게 법안 심의 과정에서도 드러났다. 난민 신청이 한 번 기각된 외국인들은 이의 신청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 법률가나 연구자 등 외부 전문가가 난민 심사 결과에 대해 다시 한번 ‘객관적인’ 심의를 하여 법무부 장관에게 인정을 건의할 수 있는 난민심사참여원 제도가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참여원으로 많은 심의에 관여해 온 한 외부 전문가는 “난민 신청자 중에는 진짜 난민은 거의 없다”고 애초부터 난민 신청자를 부정하는 견해를 드러냈는데, 이 전문가의 경우 혼자 연간 1000건 이상(전체 심의 안건의 4분의 1에 해당)의 심의를 담당한 사실이 드러났다. 근무시간 등으로 산출하면 건당 심의에 6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난민 신청자에 대한 심의를 안이하게 처리해 왔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참여원으로는 100명 이상의 전문가가 등록되어 있지만, 출입국 행정 당국의 심사에 대해 비판적인 이들은 몇 차례밖에 담당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증언도 있어, 참여원 제도는 출입국 심사를 정당화하기 위한 허울로만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국처럼 저출산 고령화가 심각한 일본에서는 노동력 부족에 시달려 외국 인재에 의지하지 않으면 일본 경제가 잘 돌아가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이다. 특히, 일본인이 기피하는 장시간 근무, 육체노동 등의 현장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외국인 노동자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다. 도쿄를 여행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현재 일본 편의점에서는 많은 외국인이 일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일본은 여전히 ‘이민국가’가 되는 것을 계속 부정하고 있다. 일본사회는 인구의 2.3%(약 293만명, 2019년 기준)를 차지하는 외국인의 존재를 외면하고 있다. ‘외국인 기능실습생 제도’를 통해 많은 저임금 노동자들이 일본에서 일하고 있지만, 기술연수라는 명목으로 데려온 외국인들은 입지가 약하고, 열악한 근로 조건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아 “현대판 노예제도”라는 야유까지 받고 있다. 1990년대 일본의 이 제도를 본떠 한국에서는 ‘외국인 산업연수제도’를 만들었으나, 10년도 채 안 되어 그 제도를 버렸다. 2010~2019년에 이르는10년 동안 260명의 외국인 실습생이 일본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제도하에서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수의 외국인이 목숨을 잃었지만, 일본 사회는 그 현실에서 눈을 돌려 왔다. 일본의 출입국관리제도는 제국주의 시대, 즉 식민지 시기에 성립된 외국인 관리제도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치안 유지를 위해 이질적인 사람들을 관리 및 배제해 온 것이 일본의 외국인 관리체제였으며, 그것이 그대로 패전 후에도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과거 식민지 지배하에서 조선인들은 동화를 강요받는 동시에 관리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졌듯이, 일본의 출입국관리제도는 지금도 치안 유지를 위해 외국인을 동화와 관리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거기에 맞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는 배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질적인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한 난민수용시설에는 인권 보장이라는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나라에서 시설에 강제 수용하기 위해서는 법원 등의 판단이 개입되어야 하고, 그 수용 기간도 법률로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 난민수용시설의 경우, 법원의 판단 없이 당국의 자체 판단에 따라 무기한으로 강제 수용이 허용되고 있다. 실제로 수년째 수용시설 생활을 해야 하는 난민 신청자도 있다. 2021년 나고야(名古屋)의 수용시설에서 일어난 안타까운 사건은 어쩌면 예고된 일이었다. 스리랑카인 위슈마 산다마리 씨(당시 33세)가 시설 안에서 아사한 것이다. 출입국관리 당국은 몸이 아파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된 그녀에게 적절한 의료 조치를 하지 않았고, 또 여윈 몸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된 그녀를 앞에 두고 담소하며, 사람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 수용시설 행정 직원들의 모습이 CCTV 영상을 통해 세상에 공개되었다. 난민수용시설에서는 최근 14년간(2007~2020년) 17명이 사망했다는 보고도 있다. 일본에서 6월 초, 출입국관리법 개정안이 통과되려는 가운데 4000여 명의 사람들이 국회 앞에 모여 항의 시위를 벌였다. 시위나 집회가 일상적이지 않은 일본에서 4000명 규모의 시위가 벌어지는 것은 이례적이다. 한국에서는 연일 각종 시위가 벌어지고 있지만, 과연 자국민이 아닌 외국인의 권리를 놓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을까? 한국은 외국인이 이미 인구의 4.3%(약 222만명, 2019년 기준)를 차지하는 ‘다문화 사회’가 되었고, 난민법 또한 갖고 있지만, 난민 인정률은 0.7%(52명, 2020년 기준)로 일본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사실 한국의 외국인 지방참정권제도는 선진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도 한때 외국인 참정권제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던 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제도 도입에 대한 논의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재일조선인의 경우,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 일본 사회의 일원으로 오랜 세월 뿌리를 내렸는데도 선거권을 갖지 못한다. 21세기를 앞두고 일본을 방문했던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일본에 뿌리를 내리고 생활하는 동포들에게 일본 선거권이 부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우선 한국 사회가 그 모범을 보여야 하기에 한국에 사는 외국인에게 지방참정권을 부여하는 제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원래대로라면 상호주의에 따라 일본정부 또한 재일조선인을 비롯한 외국인의 지방참정권을 인정하는 조치를 취했어야 했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한반도는 그동안 많은 나라와 지역에 동포들을 배출해 왔다. 재일조선인 등 세계 각지에 재외동포가 약 720만명 있다고 한다. 한편으로 한국은 이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많은 외국인들이 동경하며 살고 싶은 곳이 되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 또한 난민이든 이민이든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배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 일원으로 수용함으로써 다양성을 갖추며 풍부한 사회 발전을 이루어 나갈 필요가 있다. 오가타 요시히로(緒方義広) 주요 이력 ▷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준교수 ▷연세대 정치학박사 ▷전 홍익대 조교수 ▷전 주한 일본대사관 전문조사원 2023-06-30 0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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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타 요시히로의 한일 풍경] '마이나 카드' 논란으로 본 日 디지털화 현주소 지금 일본에서는 ‘마이넘버’를 둘러싼 문제들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마이넘버’란 한국의 주민등록번호와 유사한 것으로 일본 거주자에게 부여되는 12자리 고유번호다. 한국 주민등록번호와 다른 것은 번호 부여는 자동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번호를 사용할지와 그 번호에 근거한 ‘마이나 카드(마이넘버 카드)’를 발급 받을지 여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일본에서는 2016년부터 이 제도가 도입됐는데 애초에는 마이나 카드가 그다지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 원래 일본에서는 2002년에 ‘주기넷(주민기본대장 네트워크)’이라는 제도가 도입되어 모든 주민에게 11자리 번호가 부여되었다. 주민에게 부여된 번호에 여러 가지 개인 신상정보를 연결시켜 행정처리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주민 서비스를 효율화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주기넷은 “국민 총 등번호제”라고 불리며 개인정보 보호 차원에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의 이러한 상황이 한국 사람들 입장에서는 낯설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모든 국민(정확하게는 외국인도 포함되기 때문에 ‘주민’)에게 고유번호가 부여되어 행정에 의해 관리된다는 것, 즉 개인 신상정보가 국가의 손에 주어지는 것에 대한 반발심으로 많은 이들이 그것을 거부한 것이다. 신상정보 유출 등 개인의 프라이버시 침해 등이 우려된 것이다. 이를 두고 일본사회의 개인주의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과거에 국가라는 이름 아래 개인이 전쟁에 휘말려 불행했다고 생각하는 일본인의 전쟁관에 따른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어쨌든 2000년대 주기넷 도입 당시는 정부 방침에 반(反)해 시스템 접속을 거부하는 지방자치단체가 나오기도 했고, 그 번호와 시스템을 활용한 행정서비스를 거부한 이들도 꽤 많았다. 번호를 활용한 주기카드 보급도 결국 5%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15년이 지난 2016년, 마이넘버 제도로 이름을 바꾼 거의 비슷한 제도가 시작된 것이다. 마이넘버 제도는 주기넷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무엇보다 주민 개개인에게 고유번호가 부여되어 행정처리와 관련된 정보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똑같다 보니, 많은 이들이 반발했던 “총 등번호제”라는 비판은 동일하게 적용될 듯하다. 그런데 이번 마이넘버 제도의 경우, 정부가 큰 예산을 들여 적극적으로 보급해 지금까지 약 78%의 사람들이 번호에 기반한 마이나 카드를 발급받는 데까지 나아갔다. 일본 정부가 사회보장제도나 세금, 그리고 재난지원 등의 행정절차에 한해서만 번호를 활용하겠다며 시작한 마이넘버 제도지만, 세무서에 제출해야 할 원천징수표나 지방자치단체에 제출해야 할 급여지급보고서 등에는 마이넘버 제공이 필수다. 또 어느새 금융기관 거래에서도 “협력을 부탁한다”는 식으로 고객들에게 마이넘버 제공을 전제조건처럼 제시하고 있다. 마이나 카드 보급을 위해 일본 정부는 지금도 노력하고 있는데, 대대적인 TV광고를 반복하며 ‘마이나 포인트’ 캠페인을 통해 최대 2만 포인트(현금 2만엔에 해당, 한화로는 약 20만원)를 받을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마이나 카드를 신청한 후 QR코드 결제 등 전자결제 시스템에 등록한 다음 충전 및 쇼핑을 이행했을 때 5000포인트(5000엔), 마이나 카드에 부여되는 건강보험증 대체 기능을 신청하면 7500포인트(7500엔), 공금 수령 계좌를 연결시킬 경우 7500포인트(7500엔)를 전자결제 포인트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에는 일본 내 전자결제 서비스의 활성화 목적도 있다고 한다. 여기에 내년 가을쯤에는 지금의 건강보험증이 폐지되고 마이나 카드로 대체될 전망이다. 또 올해 4월부터 이미 기존 건강보험증으로 진료를 받는 경우 마이나 카드(마이나 보험증)보다 보험 적용(30% 부담) 시 초진에서 12엔이 비싸지는 차이가 발생한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국민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보험증을 폐지한다는 것은 바로 마이나 카드를 소지하지 않으면 의료기관에 가지 말라는 소리와 같고, 이는 마이나 카드 취득 의무화와 다름 없다는 비판도 일고 있다. 한편, 현금 2만엔 상당의 포인트를 받을 수 있다고 하면 많은 이들이 카드 발급을 신청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물며 마이넘버의 활용으로 여러 면에서 생활이 편리해진다면 신청을 미룰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필자가 20여 년 전 한국 생활을 시작했을 때 놀란 것 중 하나가 주민등록번호 제도였다. 필자와 같은 외국인 거주자에게는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주민등록번호를 대신할 수 있는 외국인등록번호라는 유사한 번호가 부여되는데, 앞의 6자리가 생년월일, 뒤의 7자리 중 첫 번째 숫자가 성별을 나타내는 것도 주민등록번호와 동일하다. 다만 외국인의 경우 성별을 나타내는 부분이 5~8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어쨌든 당시 한국은 주민등록번호(외국인등록번호)가 없으면 생활할 수 없는 곳이었다. 휴대폰 계약이나 인터넷 연결은 물론이고, 이런저런 본인확인 절차에 13자리 번호가 늘 요구됐다. 2000, 2010년대에 발생한 대기업의 개인정보 대량 유출 사건 등으로 제도가 개선되어 이제는 무작정 번호를 요구할 수 없게 됐지만, 본인확인을 위해 주민등록증(외국인등록증)을 요구하는 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동시에 그 번호만 있으면 한국에서의 생활은 현격히 편리해진다. 연말정산이나 종합소득세 신고 등을 인터넷을 통해 쉽게 할 수 있고, 병원에 굳이 보험증을 가져갈 필요도 없으며, 번호만 있으면 신분증 제시도 불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상생활에서 주민등록번호가 있기 때문에 간편화되고 있는 절차가 수도 없이 많다. 코로나 팬데믹 때 “K방역”이라고 불리던 한국의 철저한 방역체제가 가능했던 것 또한 주민등록번호와 연결된 많은 개인정보가 활용 가능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있다. 필자도 그런 편리한 한국생활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일본으로 돌아와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잡는 데 많은 고생을 겪었다. 일본 국적자지만 일본 사회가 한국처럼 만능 주민등록번호 제도를 갖추지 않다 보니 본인확인 절차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한국에 살면서도 꼬박꼬박 갱신해놓았던 일본 운전면허증과 일본 신용카드가 있었기에 휴대폰을 만들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 다른 본인확인 절차도 진행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운전면허증이나 건강보험증, 혹은 여권 등과 행정에서 발행해주는 종이 호적등본이나 주민표 중 여러 개의 증명서를 대조해 본인확인을 한다. 그러던 일본이 지금 마이넘버 제도를 널리 보급하려 하고 있다. 일단 보급되면 지금 한국에서 주민등록번호가 없는 생활을 상상할 수 없듯이 그 편리함은 일본 사회에 금방 침투될 것이다. 다만, 1962년 도입된 한국의 주민등록번호제도가 과거 불순분자 식별을 위해 널리 보급된 것을 봐도 알 수 있듯, 주민 개개인에게 고유번호를 부여함으로써 개인정보를 일원적으로 국가가 관리하는 것의 효율성과 아울러 위험성이 지적될 수밖에 없다. 과거 한국에서 주민등록증에 각종 개인정보를 탑재할 수 있도록 전자카드화라는 시도가 잠시 추진되었지만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무산된 것도 그런 우려 때문일 것이다. 한편, 일본의 마이나 카드에는 IC칩이 탑재되어 있다. IC칩에는 카드에 기재된 정보(이름, 주소, 생년월일, 성별, 개인번호, 본인 사진 등)와 본인인증을 위한 전자증명서만 들어가 있고, 자신이 설정한 비밀번호를 일정 횟수 이상 틀렸을 경우 카드는 무효화되도록 설계돼 있다고 한다. 또한 마이나 카드의 정보를 스마트폰에 담아 활용하는 서비스도 이미 시작되었다고 한다. 마이나 카드의 보급과 아울러 그것을 활용하는 서비스도 다양하게 확대 중이다. 그런 와중에 일본에서는 지난 5월 26일, 마이넘버 제도와 관련된 정부 부처 장관 3명이 대국민 사과를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마이넘버를 둘러싼 잇따른 실수들 때문인데, 마이나 포인트가 엉뚱한 사람에게 부여된 사례가 최소 113건, 마이나 카드로 편의점에서 각종 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는 서비스의 경우 다른 사람의 주민표나 인감증명서가 발급되는 시스템 사고가 14건 발생했다. 또한 마이나 보험증에 다른 개인의 신상정보가 연결되는 사고가 무려 7312건 있었고, 그 결과 의료정보가 다른 사람에게 열람된 경우가 최소 5건 있었다. 마이넘버에 다른 사람의 은행계좌가 묶여버린 사례도 밝혀진 것만 20건이라고 한다. 정부가 마이넘버 제도의 편리함을 노래하며 급하게 보급시키려는 마이나 카드를 둘러싸고 이미 이렇게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마이나 카드의 담당 부처인 디지털청은 2021년 일본 사회의 디지털화를 추진하기 위해 출범한 새로운 정부 부처다. 하지만 출범 초부터 개인 메일주소의 유출 등, 일본사회의 디지털화 지연을 상징하는 듯한 실수들이 잇따라 불거져 문제가 됐다. 일본 정부가 그렇게 서둘러 마이나 카드를 보급시키려고 하는 데는 뒤떨어진 디지털화를 만회해 캐시리스 사회를 실현함으로써 침체된 경제를 활성화시키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또한, 누락 없이 효율적으로 세금을 징수하려는 정부의 사정도 지적된다. 주민 서비스의 편리함과 효율성보다 행정처리와 주민 관리의 효율성 추구라는 정부 측의 편의만이 우선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린다. “IT 선진국” 한국에서 일본으로 이주해 여러가지 차이를 느끼면서도, 필자가 일본을 떠났던 20년 전에 비해 눈에 띄게 디지털화가 진행된 지금의 일본 사회 변모를 보면서 놀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디지털화의 흐름을 피할 수 없는 시대임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한국이나 일본이나 정도와 질의 차이는 있어도 그런 디지털화에 얼마나 어떤 식으로 적절하게 대응해야 하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시행착오와 논란의 여지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오가타 요시히로(緒方義広) 주요 이력 ▷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준교수 ▷연세대 정치학박사 ▷전 홍익대 조교수 ▷전 주한 일본대사관 전문조사원 2023-05-31 06: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