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준 논설주간
gjgu7749@ajunews.com
- 아주경제 논설주간
- (전)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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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준의 지피지기] '시진핑 리스크'에 커지는 불확실성 [박승준 논설주간]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 15일 미국 국무부에서 열린 아날레나 베어보크 독일 외무장관과 공동기자회견에서 리상푸(李尙福) 중국 국방부장 거취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블링컨의 대답은 “아는 바 없으며, 우리는 그동안도 그래왔듯이 어느 시점에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누구든지 중국 정부와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이었다. 리상푸 국방부장은 지난달 29일 중국과 아프리카 평화안보 포럼에서 기조연설한 이후 공식 석상에서 보이지 않고, 지난 7일 베트남과 개최할 예정이던 국방협력회의는 리 부장 건강을 이유로 연기됐다. 이에 관한 질문을 받은 미국 국무장관이 “아는 바 없다”고 대답함으로써 중국 국방부장 실종설을 뒷받침한 셈이 된 것이다. 친강(秦剛) 외교부장에 이어 리상푸 국방부장까지 실종? 현직 중국 외교부장 친강의 신변 이상을 처음 확인한 것은 박진 외교부 장관이었다. 박 장관은 지난 7월 14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아세안(ASEAN) 외교장관 회의(ARF)에서 왕이(王毅 중국 공산당 외교담당 정치국원을 만났다. 한·중 외교장관 회담은 7개월 전인 지난해 12월 박진 장관과 왕이 정치국원 겸 외교부장 사이에 화상회담으로, 그보다 4개월 전인 8월 9일에는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 근교에서 대면(對面)으로 이뤄졌다. 화상회담이 아니라 직접 대면한 것은 이번이 근 1년 만이다. 문제는 회담 내용보다 박진 장관의 카운터파트가 친강 현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어야 하는데 친강이 아니라 더 고위급인 왕이 정치국원이 나왔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중국 측이 갑자기 아세안 외교부장 회의를 격상시킬 의사를 가졌다거나 한국을 더욱 존중하는 자세를 보여주기 위해 고위급이 나타난 건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 외교부장 친강의 신상에 이상이 생겼다는 점이 관찰 대상이라는 것이다. 중국 측은 박진 장관에게는 “친강 외교부장 건강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미국과 함께 세계를 좌지우지한다는 중국 외교부장 신상에 이상이 생겼다는 사실은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 ‘외교부장 활동’에도 나타나 있다. 전 세계를 상대해야 하는 중국 외교부장의 ‘활동’ 소식은 지난 6월 25일 베이징(北京)을 방문한 러시아 외교차관 루덴코 안드레이 유레비치를 만난 데서 멈춰 서 있다. 이날 베이징을 방문한 또 다른 손님인 베트남 총리 팜민찐을 만나 회담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후 9월 18일 현재까지 3개월 가까이 행적이 보이지 않고 있다. 마오닝(毛寧)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친강의 부재를 묻는 질문에 “제공할 정보가 없다”고만 답해왔다. 중국이라는 자칭 ‘대국(大國)’의 외교부장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호사(好事)를 만난 대만 유튜버들은 난리가 났다. “홍콩 봉황TV 여성 뉴스 앵커 푸샤오톈(傅曉田·40)도 동시에 사라졌다” “케임브리지 출신에 미모인 푸샤오톈이 미국에서 주미대사를 하던 친강의 아기를 낳았다” “남녀 문제가 아닐 것이다. ··· 외교지휘권을 놓고 정치국원 왕이와 권력투쟁을 벌이다 문제가 생긴 것이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드라이브하는 반부패 캠페인에 걸려든 것이다” ··· 대만 유튜버들은 최고의 화제를 만나 온갖 설(說)을 쏟아냈다.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제공할 정보가 없다”는 말만 했고 심지어는 “신화통신을 보라”는 말을 해 베이징 주재 외국 특파원들의 실소(失笑)를 샀다. 베이징 주재 외국 특파원들은 “외교부 대변인이 아무 말을 못하는 걸 보면 친강 외교부장 실종에 중국 최고지도자 시진핑 국가주석이 관련돼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추측을 중국 외부로 전했다. 중국 장관들의 실종 뉴스가 나오는 가운데 중국 경제에 관한 비관적 뉴스들이 미국의 권위 있는 매체들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국 경제 기적의 종말(The End of China’s Economic Miracle).” 지난달 2일 출판된 포린 어페어즈 9·10월호에는 미국 PIIE(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 소장을 10년째 하고 있는 애덤 포즌(Adam Posen) 기고문이 실렸다. “중국은 시진핑 등 지도부의 억압적인 정책으로 인한 ‘경제적인 장기 코로나’를 겪고 있으며 코로나19 사태 이전부터 시작된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간섭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더욱 심해져 민간 분야의 신뢰가 위축돼 소비가 살아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시진핑 체제가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을 탄압하는 등 공산당 정권을 위협할 시장의 성장을 용납하지 않음으로써 경제 혁신이 억압돼 새로운 경제 동력이 생기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포즌 소장은 “미국이 중국과의 대결에서 중국의 이런 위기를 활용해 우위에 서야 할 기회”라고 주장했다. 뉴욕타임스 8월 26일자에는 “중국 경제의 문제는 ‘Top(시진핑)’에서 시작된다”는 에스워 프라사드(Eswar Prasad) 커넬대 다이슨(Dyson) 연구소 교수의 게스트 칼럼이 커다랗게 실렸다. 프라사드 교수는 “중국은 지금이 위험한 순간(perilous moment)이며 각종 수치들은 중국 경제의 시동이 꺼지고(stalling)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더욱 심각한 것은 중국 소비자들과 기업인들이 중국 정부가 중국 경제에 깊이 자리 잡은 문제를 인지하고 고칠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신뢰 상실의 문제가 퍼져 있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프라사드 교수는 “시진핑 정부가 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이미 나선형으로 추락하기 시작한 중국 경제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프라사드 교수는 최근 중국 여행을 통해 중국 정부와 기업 사이에 발생한 불협화음을 분명하게 느꼈으며 베이징 관리들은 자신들이 “구름 위에서 살고 있다(live above the clouds)”는 사실이 기업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전했다. 그는 특히 시진핑이 2021년에 도입한 ‘common prosperity(공동부유·共同富裕)’라는 정책 목표가 민간기업과 정부 관리들에게 ‘몽둥이질(cudgel)’을 해서 중국 공산당 노선을 따르라는 말로 인식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는 가운데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이 이자율을 낮춰 시중에 자금을 풀어도 미래를 걱정하는 가계와 기업의 소비로는 연결되지 않고 있어 점점 나선형 디플레이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가고 있다고 프라사드 교수는 진단했다. 중국에서 국가지도자급 인물이 돌연 종적을 감추고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11년 전인 2012년 9월 5일에는 베이징을 방문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의 카운터파트였던 시진핑 당시 국가부주석이 나타나지 않아 전 세계에 미스터리를 제공했다. 미국 국무장관이 방문해서 중국 국가부주석, 그것도 그해 가을 제18차 중국 공산당 당대회에서 당 최고지도자인 총서기에 선출될 예정이던 시진핑과 만나 회담하기로 돼 있었는데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시진핑은 열흘이 지난 9월 15일 베이징에 있는 중국농업대학 과학대중화 행사에 나타났다고 신화통신이 보도함으로써 열흘간의 미스터리는 풀렸다. 시진핑 실종 기간 중국 인터넷 검색엔진들은 중국어로 시진핑이라고 치면 ‘검색불가’만을 답으로 내놓아 미스터리를 더욱 증폭시켰다. 실종됐던 시진핑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열흘 만에 공개 행사에 나타났고 그해 가을 중국 공산당 총서기에 선출된 뒤 5년 임기를 두 번 하고 지난해 10월에는 마오쩌둥(毛澤東)이 1976년 죽은 뒤에는 처음으로 3연임 당총서기로 선출돼 미국과 유럽을 포함한 국제사회에서 독재자라는 말을 듣고 있다. 시진핑뿐만 아니라 중국 경제계 거물 마윈 알리바바 회장도 3년 반 전인 2020년 10월 상하이에서 열린 경제금융회의에서 중국 공산당 최고 경제 지휘자 왕치산(王岐山)이 지켜보는 가운데 “중국 금융시스템은 과거 전당포 수준”이라고 할 말 다했다가 실종 상태에 빠졌다. 마윈은 최근 들어서야 알리바바 경영 일선에 복귀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일본의 한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고위 지도자들과 관리들이 갑자기 실종되는 미스터리의 배후에는 중국 공산당 기율검사위원회라는 조직이 있다고 중국 공산당 관계자들은 말한다. 당 안팎에 문제가 생기면 기율검사위가 전화를 걸어 출두 장소를 알려주면 중국에서 아무리 높은 고위 지도자도 출두해서 외부와 연락이 차단된 채 2주일이건 3주일이건 조사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 기율검사위의 무소불위 권력은 이 위원회가 1억명에 가까운 당원들의 당원 자격을 박탈할 권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당원 자격을 박탈당하면 장관이든 부주석이든 현직은 자동적으로 면직당하고, 당원 자격을 박탈당한 중국 공산당원은 어디에서도 급여를 제공받지 못하기 때문에 당장 굶어죽을 지경에 빠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 기율심사위원회가 깨닫지 못하는 점은 자신들은 중국 고위 지도자들을 비밀장소로 호출해서 조사하는 작업이 중국 공산당 최고지도자 시진핑 당총서기의 리스크로 연결된다는 점을 모른다는 점이다.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현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 ▷호서대 초빙교수 2023-09-20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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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의 재조명] 한반도 국가 정통성은 대한민국에 있다 [박승준 논설주간]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황제 즉위식을 하고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고쳤다. 독립협회의 ‘칭제건원(稱帝建元)’ 건의를 받아들여 국체를 입헌군주국으로 바꾸었다. 지금의 헌법에 해당하는 ‘대한국(大韓國) 국제(國制)’ 제1조는 ‘대한국은 세계 만국이 공인한 자주독립제국이다’였고, 제2조는 ‘대한국의 정치는 만세 불변의 전제 정치’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대외 관계를 규정한 제9조는 ‘대한국 대황제는 각 조약 체결 국가에 사신을 파견하고, 선전·강화 및 제반 조약을 체결한다’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소멸한 대한제국은 줄여서 ‘대한국’ 또는 ‘한국’으로 호칭됐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일본제국 추밀원 의장이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가 체포된 후 자신을 “대한국인(大韓國人)”이라고 밝힌 것도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고친 후 일이었기 때문이다. 고종이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은 1894년에 발발해서 1895년에 종결된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됐기 때문이었다. 1895년 4월 17일 청일전쟁 승전국이 된 일본의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와 청의 북양통상대신 리훙장(李鴻章)이 서명한 시모노세키(下關) 조약의 제1조는 '청은 조선이 완전무결한 독립국임을 인정하며 그동안 조선이 청에 대해 해오던 전례(조공)는 앞으로 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돼있었다. 대한제국은 국제 제6조에 따라 3명의 공사(지금의 대사)를 청에 파견했다. 박제순(1902~1903), 박태영(1903~1904), 민영철(1904~1905) 세 사람이었다. 청도 대한제국에 쉬서우펑(徐壽朋‧1898~1901), 쉬타이선(許臺身‧1901~1904), 쩡광취안(曾廣銓‧1904~1906) 등 3명의 공사를 파견했다.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서 가능했던 대한제국과 청의 대등했던 외교관계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1905년 을사늑약으로 종결됐다. 일본은 1910년 한일합병을 한 이후에는 대한제국 국호를 다시 조선으로 되돌려 놓았다. 한일합병 9년 후인 1919년에 일어난 3‧1 만세운동은 국외에 모두 8개의 임시정부를 수립·선포하는 독립 열망으로 이어졌다. 독립운동사 연구가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2019년에 펴낸 ‘3‧1혁명과 임시정부’에 따르면 조선민국 임시정부, 신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간정부, 고려공화정부, 간도임시정부 등이 있었다고 하지만 수립 과정이 분명하지 않은 채 전단(傳單)으로만 발표됐다. 실제 조직과 기반을 갖추고 수립된 것은 중국 상하이(上海)와 러시아 연해주, 그리고 한성의 임시정부였다. 1919년 4월 10일과 11일 이틀에 걸쳐 상하이(上海) 프랑스 조계에서 신익희·조소앙 등 각 지방 출신 대표 29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차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의회)가 개최됐다. 의장에는 이동녕, 부의장에 손정도가 선출됐다. 국호는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결정됐다. 국무원 수뇌부를 선출하고, 10개조의 임시헌장을 통과시켰다. 10개조는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한다, 제3조 대한민국 인민은 남녀·빈부 및 계급 없이 일체 평등으로 한다(大韓民國臨時憲章, 한국근현대사사전). 이 임시헌장은 그해 9월 11일 ‘대한민국 임시 헌법(大韓民國臨時憲法)’으로 다시 공표됐다. 이 임시헌법에서 제3조에 ‘대한민국의 영토는 구한국(대한제국)의 판도로 한다’고 명시하고 제7조에서 ‘대한민국은 구 황실을 우대한다’고 밝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한제국을 계승함을 분명히 했다. 임시헌장에 따라 국무총리로 발표됐던 이승만은 임시헌법 체제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1925년 3월 7일 임시 의정원은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하고 4월 7일 임시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했다. 대한제국이 황제가 다스리는 양반상놈의 신분제 국가였다면 상하이 임시정부의 임시헌법은 남녀빈부와 계급이 없이 평등한 민주공화국임을 분명히 했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한 사건에 대해 ‘우남 이승만 평전 : 카리스마의 탄생’(이택선 저)은 “이승만은 국무총리나 집정관 총재 같은 각인되기 어려운 직함보다 대통령이라는 잘 알려진 호칭이 독립운동에 도움이 된다고 고집한 데서 빚어진 일”이라고 진단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 축하 기념 천장절 행사에서 일본군 장군들을 향해 폭탄을 던져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를 현장에서 즉사하게 하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癸)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 사건으로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항저우(杭州), 난징(南京)을 거쳐 쓰촨(四川)성 충칭(重慶)으로 청사를 옮겨 다녀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이 과정에서 중국 국민당뿐만 아니라 중국 공산당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운 것으로 기록돼 있다. 상하이 푸단(復旦)대 조선한국연구소 소속 원로 교수 스위안화(石源華)는 2012년 한국에서 출간한 ‘한중문화협회 연구’에서 “항일전쟁 기간에 중국 공산당은 항일민족 통일전선이라는 전략 방침에 따라 한국 독립운동 각 당파들과 광범위한 접촉을 한다는 방침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중국 공산당은 옌안(延安)에서 활동하는 한국독립동맹, 조선의용군, 조선혁명간부학교를 도와주는 한편 국민당 통치 지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다른 조직도 지원했다”고 밝혔다. 그는 “중국 공산당은 1941년 10월 옌안에서 개최된 각 민족 반파시스트 대회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을 명예주석으로 초청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스위안화는 이 책에서 “1941년 10월 11일에 조직된 한중문화협회라는 한·중 공동 항일조직에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명예이사로 참여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은 소련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학습하고 귀국한 저우바오중(周保中)을 1933년 만주 지역으로 보내 항일민족 통일전선 전략에 따라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을 조직하게 했다. 저우바오중에게 마오쩌둥이 맡긴 임무는 국민당 장제스(蔣介石)가 만주 지역에 병력을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 공산당이 주도하는 항일 민족 통일전선 역량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저우바오중은 현지에서 조선인들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김책을 발탁해서 1938년 6월 동북항일연군 제3군 정치부 주임으로 기용했다. 중국 공산당은 1936년 3월 남만주당 제2차 대표대회를 개최해 동북항일연군 제2군을 편성하고 제2군 정치위원으로 김일성을 임명한다. 김일성은 1937년 6월 8일 병력 150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일본 치하 보천보를 공격하는 유격활동을 벌이는 기록을 남겼다. 2년 전 세상을 떠난 재미 정치학자 이정식 교수가 1983년에 펴낸 ‘만주에서의 혁명투쟁 : 1922~1945년 중국 공산주의와 소련의 이익’은 일본 방위청 통계를 인용해서 김일성이 1940~1941년 만주에서 중국 공산당 동북항일연군 일원으로 소규모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한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김일성이 1941년 소련 연해주에 주둔하고 있던 극동군에 편입된 이후 상황은 재미 정치학자 서대숙 교수가 1988년에 출간한 ‘Kim Il Sung : the North Korean Leader'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저우바오중의 ’동북항일유격일기‘에도 이 부분이 기록돼 있다. 1992년 4월 평양에서 출판된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도 김일성이 중국 공산당 소속 항일 빨치산으로 활동한 기록이 나오지만, 기록은 1936년에서 그쳤고 1941년 소련 극동군으로 소속을 바꾼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이유는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가 출판되던 1992년에 이미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된 상황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러시아 학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가 2013년에 미국 뉴욕에서 출판한 ‘The Real North Korea : Life and Politics in the Stalinist Utopia’에는 30대인 김일성이 1945년 9월 소련 군함 푸가체프(Pugachev)호에서 소련 육군 대위 계급장을 달고 내렸으며 김일성 직책은 소련군 제88 독립여단 제1 조선인 대대 지휘관이었다. 이택선 교수가 쓴 ‘우남 이승만 평전’에 따르면 미국에 머물고 있던 70세의 이승만은 10월 4일 미군 인사들의 협조로 귀국 허가를 받았고 하와이와 괌을 경유해서 도쿄(東京) 연합군최고사령부(GHQ)에 들러 맥아더를 만난 다음 1945년 10월 16일 오후 5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은 대한제국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소련은 물론이고 미국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데 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보다 한 달 늦은 19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귀국했으나 하지 중장이 지휘하는 미군정이 인정하지 않아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대통령에는 선거에서 당선된 이승만이 취임했고,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권총으로 암살당한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1987년에 마지막으로 개정된 대한민국 헌법 전문 첫 구절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가 현실에서는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3‧1운동 영향으로 탄생한 대한제국의 계승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남에서도 북에서도 인정받지 못했고 미군은 한국인 최초의 프린스턴대 국제정치학 박사 이승만을 선택하고, 소련군은 러시아어에 능통한 소련 육군 대위 김일성을 통치자로 선택했다. 조선을 국호로 선택한 김일성은 조선왕조와는 비교도 안 되는 전제국가를 한반도 북쪽에 건설해 놓았고, 권력을 나누어주는 데 인색했던 카리스마의 지도자 이승만은 헌법 전문에 ‘4‧19 정신이 항거했던 불의’로 기록됐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소멸한 대한제국의 법통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계승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에 한반도 유일합법 정부의 정통성이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현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 ▷호서대 초빙교수 2023-08-21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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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준의 지피지기] 과학 없는 진보 없고, 과학 없는 좌파 없다 [박승준 논설주간] “과학기술이 제1의 생산력입니다.” 1978년 9월 26일 중국공산당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이 한 말이다. 그보다 2년 전인 1976년 9월 마오쩌둥(毛澤東)이 죽은 다음 전국의 과학자들을 모아 개최한 ‘전국과학대회’에 나가서 연설하면서 강조한 말이다. 그의 말은 이어진다. “…과학기술이 제1의 생산력이라는 말은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입니다.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은 과학과 생산의 관계를 더욱 가깝게 만들었습니다. 과학기술이 생산력에 미치는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 덩샤오핑은 1988년 9월 5일 베이징(北京)으로 찾아온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구스타우 후사크를 만났을 때도 이 말을 강조했다. 그해 9월 12일 중국공산당 중앙당 간부들에게도 강조했다. “교육 과정에서도 과학기술이 제1의 생산력이라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 덩샤오핑은 1992년 2월 남쪽의 경제개발특구를 시찰하면서도 “과학기술이 제1의 생산력이며, 과학기술이 발전해야 산업의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세계은행(World Bank)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마오쩌둥이 죽은 1976년 중국의 GDP는 1539억4000만 달러(현재 가치)였고, 1인당 GDP는 153.94달러였다. 그때 우리 GDP는 299억 달러, 1인당 GDP는 834.1달러였다. 당시 중국의 GDP는 우리의 5배 정도, 1인당 GDP는 우리의 5분의 1 수준이었다. 그러던 것이 덩샤오핑이 리드하는 중국의 경제발전이 진행된 첫 10년 이후인 1990년 중국의 GDP는 3608억6000만 달러, 1인당 GDP는 317.9달러였다. 우리 GDP는 2833억7000만 달러, 1인당 GDP는 6610달러였다. 중국 GDP는 우리의 1.3배, 1인당 GDP는 우리의 20분의 1 정도였다. 과학기술을 강조하는 덩샤오핑 방식의 개혁개방과 빠른 경제발전의 두 번째 10년이 흐른 다음인 2000년 중국의 GDP는 1.21조(兆) 달러, 1인당 GDP는 959.4달러로 늘었다. 이때 우리의 GDP는 5761억8000만 달러, 1인당 GDP는 1만2257달러였다. 중국 GDP는 우리의 2배, 1인당 GDP는 13분의 1로 그 간격이 좁혀졌다. 2020년 중국 GDP는 14.69조 달러, 1인당 GDP는 1만408.7달러로, 우리 GDP 1.64조 달러의 9배 정도로 확대됐고, 1인당 GDP는 우리의 3만1721.3달러의 3분의 1 정도로 간격이 줄었다. 물론 덩샤오핑 식의 개혁개방 40여 년간 중국의 빠른 경제발전이 전적으로 덩샤오핑의 과학기술 강조에만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고, 덩샤오핑의 전임자 마오쩌둥도 실천하지는 않았지만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했다. 마오쩌둥은 강철 생산량을 단숨에 영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군중주의에 의존하기 위해 대약진운동을 벌이면서 마을마다 어설픈 용광로를 설치해서 지식인들의 웃음을 샀고, 식량 생산량을 늘리겠다고 밀과 벼를 촘촘히 심는 밀식(密植)을 지시했다가 바람이 안 통해 뿌리가 썩어 대기근을 초래한 뒤 반대하는 류샤오치(劉少奇)를 처형하는 비과학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주었다. 그런 마오도 말로는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1966년에 시작해서 10년간 계속된 문화혁명 기간에도 ‘마오쩌둥 어록’을 통해 “과학기술 없이는 생산력을 높일 방법이 없다(不搞科學技術, 生産力無法提高)”라고 강조했다. 마오는 ‘자연변증법 연구통신’이라는 잡지에 기고한 “혁명정신과 엄격한 과학적 태도”라는 글에서는 이런 말도 했다. “과거 우리가 인민정부, 인민군대라는 상부구조를 건설한 이유는 무엇인가. 상부구조를 건설한 이유는 생산을 위한 것이며, 생산력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이 필수요소이며, 과학기술 없이 생산력을 높이는 방법은 없다.” 중국공산당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원조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도 자신들이 추구하는 사회주의를 이전의 공상적(空想的) 사회주의와 구분해서 과학적 사회주의(Scientific Socialism)임을 강조했다. 이들은 ‘공산당선언’, ‘자본론’, ‘유겐 뒤링의 과학적 혁명론’ 등을 통해 자신들이 추구하는 사회주의가 과학적 이론에 근거한 과학적 사회주의임을 강조했다. 이들은 과학적 사회주의를 “인류 문명이 이뤄놓은 결정체(結晶體)”라고 강조하면서 “과학적 사회주의야말로 사회주의의 본질이며, 특징으로 인류사회가 만들어낸 발전이론의 최신 성과”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그러면서 “종교는 과학이 아니며, 종교에 대한 열광(熱狂)이 사회의 발전을 이룰 수는 없다”고 자본주의의 근본이 종교에서 출발했음을 비판했다. 필자가 베이징(北京) 주재 신문사 특파원으로 일하던 1997년 2월에 세상을 떠난 덩샤오핑의 죽음은 자본주의자인 필자에게 적지 않은 감동을 주었다. 덩샤오핑은 죽기 전 가족들에게 “사고행위가 끝난 사회주의자의 신체는 아무 쓸모가 없으니 태워서 바다에 뿌리고 어떤 기념관도 짓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평생 과학적 사회주의와 유물론(唯物論)을 추구해온 덩샤오핑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는 베이징 서쪽 바바오산(八寶山) 화장터에서 화장돼 비행기에 실려 동중국해에 뿌려졌고, 그의 유언에 따라 중국 어디에도 그의 기념관은 건립되지 않았다. 중국공산당원들이 “위대한 무산계급 혁명가”로 추앙하는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의 부인 덩잉차오 역시 1992년 7월에 세상을 떠나면서 “평생 동지였던 남편 언라이가 그랬듯이 사고행위가 끝난 사회주의자의 신체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므로 태워서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유언은 실행됐다. 물론 이들과는 달리 1976년 9월에 사망한 마오는 그런 유언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베이징 한복판 천안문 광장 중심부에 있는 마오쩌둥 기념관 지하에 파라핀 처리가 되어 보관돼 하루에 한 번씩 땅위로 끌어올려져 인민들에게 구경당하는 형벌 아닌 형벌을 받고 있다.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로 이른바 우리의 진보좌파 진영과 보수우파 진영이 대립 갈등하는 우리 정치를 지켜보면서 솔직히 당혹스러웠다. 이른바 진보좌파 진영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영국 옥스퍼드대 물리학 명예교수(Emeritus Professor) 웨이드 앨리슨(82)을 ‘돌팔이’라고 비난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보고서를 ‘깡통 보고서’라고 비난하는 지점이 당혹스러웠다. 진보좌파 진영이라면 당연히 과학을 무기로 논전을 전개해야 하고, 보수우파 진영은 종교적이고 전통적인 관념을 바탕으로 논전을 전개할 것으로 보았는데 그런 예상이 완전히 뒤집어져 당혹스러웠다. ‘과학’이라는 용어는 영어의 ‘science’를 일본사람들이 18~19세기에 한자로 ‘科學’이라고 번역해서 중국으로 역수출한 용어다. ‘science’라는 영어의 원래 뜻은 ‘물리학적 세계의 구조와 움직임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케임브리지 사전에 정의돼있다. 한자의 형성과정을 연구해서 만들어진 한나라 허신(許愼)이 남긴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과학의 과(科)라는 글자가 “벼 화(禾)와 말 두(斗)가 결합되어 곡식의 양을 측정한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글자라고 나와 있다. 영어 science를 과학(科學)이라고 번역한 일본산 한자용어가 중국으로 수입되기 전 19세기 중국 지식인들은 science를 ‘싸이선생(賽先生)’이라고 음역해서 사용했다. 기술을 가리키는 테크놀로지(technology)는 ‘터선생(特先生)’이라고 음역했다. 1840년 영국과 청나라가 벌인 아편전쟁에서 청왕조가 패배하고 중국이 서양의 반식민지가 되자 중국 지식인들은 그 이유를 “서양에는 싸이선생과 터선생이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없었다”고 진단했다. 변법자강(變法自强)을 주장한 캉유웨이(康有爲)와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식인과 혁명가들은 “산업혁명을 한 영국과 유럽에는 앞선 과학기술이 있었지만 중국에는 과학기술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 시대를 지나면서 과학기술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고 판단한 덩샤오핑은 1980년 개혁개방을 시작하면서 베이징 시내 한복판에 ‘싸이터(賽特‧사이언스 테크놀로지)’백화점을 만들게 했고, 전국에는 ‘싸이터’ 이름이 붙은 빌딩들이 들어섰다. 과학과 기술이 뒤떨어져 서양 제국주의의 반식민지로 전락한 청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과학이야말로 중세 종교의 세기를 넘어서 인류가 만들어낸 최신의 사고 수단과 분석의 틀이라는 것이 중국공산당 개혁개방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상식이다. 과학을 부정하고 과학자를 비난하는 우리의 진보좌파는 과연 과학을 넘어 어디로 가려고 하는 것일까.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현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 ▷호서대 초빙교수 2023-07-19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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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준의 지피지기] 중국 내정간섭 DNA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anuk). 캄보디아 근대사에서 가장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1922년 10월에 출생해서 90년을 살고 2012년 10월에 사망했다. 그의 일생은 태평양 전쟁으로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를 점령했던 일본의 시각으로 볼 수도 있고, 1887년부터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통치하던 프랑스의 입장에서 볼 수도 있으며, 1970년 론 놀 정권을 세워 시아누크를 실각시켰던 미국의 시각에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1979년 캄보디아를 침공했던 베트남을 비롯한 인도차이나 반도 이웃 나라들의 입장에서 볼 수도 있다. 여기서는 1970년 론 놀 정권 수립으로 소련 수도 모스크바 여행 중에 실각한 그의 망명을 받아들인 중국의 시각에서 보기로 하자. 1970년 3월 18일 미국이 획책한 론 놀 정권의 쿠데타로 국왕 자리에서 폐위된 시아누크는 프랑스 방문을 마치고, 소련 모스크바를 방문하던 중에 프놈펜으로 돌아갈 길이 막혔다. 당초 프랑스, 소련, 중국 3개국 순방을 떠난 길이었으므로 일단 베이징(北京)까지는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 지도자들에게 폐위 소식을 들은 시아누크는 모스크바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갈 곳이 없어진 신세를 생각하며 대성통곡을 했다. 3월 19일 오전 베이징 서우두(首都)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린 시아누크를 기다리고 있던 인물은 놀랍게도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였다. 중국공산당 정치국원 예젠잉(葉劍英)과 리셴녠(李先念)도 나와 기다리고 있었고, 중국 외교부 초청으로 베이징에 주재하는 46개국 대사들도 공항에 나와 있었다. “시아누크 국왕의 방문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국왕께서는 여전히 캄보디아의 국가원수이십니다. 우리는 영원히 국왕이심을 승인합니다.” 저우언라이 총리의 그런 말로 시작된 환영의식을 본 시아누크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우언라이와 두 차례 회담을 한 시아누크는 이렇게 말했다. “국가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민족통일전선과 연합정부를 반드시 구성할 것입니다. 중국이 도와주시기를 희망합니다.” 국가주석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 총리의 배려로, 시아누크와 부인은 9개월간 베이징 국빈관 댜오위타이(釣魚臺)에 장기 투숙할 수 있었다. 1970년 12월 시아누크는 거처를 베이징 시내 한복판 톈안먼 광장 바로 동쪽의 둥자오민샹(東郊民巷) 13호에 독립가옥을 마련해서 이사했다. 시아누크가 입주하는 날에는 저우언라이 총리 부부가 찾아와 축하해 주었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건물 이름을 캄보디아 국가원수부(元首府)로 정했다”는 말도 했다. 시아누크는 이런 답례의 말을 했다. “내가 중국에 장기 체류하게 된 원인은 중국이 미국의 캄보디아 침략에 반대하는 우리를 지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위대한 영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총리를 우리의 좋은 친구로 존중합니다.” 시아누크는 국빈관 댜오위타이와 이 독립가옥에서 1975년 4월까지 5년 넘게 거주했다. 중국 외교부 당국은 저우언라이 총리 지시에 따라 베이징에 머무는 시아누크가 답답해 할 때는 평양을 방문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서우두 공항을 오갈 때는 빨간 카펫을 깔아주는 등 국가원수에게 하는 예우를 다해서 모셨다. 이후 캄보디아에는 베트남의 침공, 크메르루주 정권 수립, 헹 삼린 정권 수립 등 혼란이 이어졌고, 1988년 7월 1일 중국 외교부는 ‘캄보디아 문제 해결을 위한 4개 항의 제의’를 담은 성명을 발표했다. 이 4개 항의 핵심 내용은 “베트남 철군 이후 캄보디아에는 시아누크를 중심으로 하는 4개 정파의 연합정부가 탄생하기를 희망한다”는 부분이었다. 1996년 3월 23일 대만에서는 대만이 일본 식민지에서 벗어난 뒤 50년 만에 처음으로 총통 직접선거가 실시될 예정이었다. 총통 직접선거에는 국민당에서 리덩후이(李登輝) 후보가 출마하고, 대만 독립을 공개 주장하는 민주진보당에서 펑밍민(彭明敏) 후보가 출마했다. 총통 직접선거를 15일 앞둔 3월 8일 중국 인민해방군은 대만 부근 해역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해서 대만은 물론 미국과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미사일은 3월 13일까지 모두 4발 발사됐고 중국군은 관영 중앙TV와 신화통신을 통해 “미리 고지한 4개의 해상 좌표에 명중했다”고 발표했다. 중국군은 사전에 “4개의 좌표 부근 해역에 선박과 항공기의 통행을 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3월 15일에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18일부터 25일까지 대만해협 중북부 해역에서 육·해·공 합동훈련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신화통신은 “훈련 실시 해역이 북위 25도 50분·동경 119도 50분, 북위 25도 30분·동경 120도 24분, 북위 25도 12분·동경 119도 26분, 북위 24도 54분·동경 119도 56분의 4각형 해역”이라고 타전했다. 중국 관영 중앙TV는 방영한 도면을 통해 핑탄(平潭)도를 적시함으로써 이 훈련이 지난 8∼15일 실시된 미사일 발사훈련과 지난 12∼15일 실시한 해·공군 합동 실탄훈련에 이은 상륙 훈련이 대만 상륙을 가상한 핑탄도 훈련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군의 미사일 발사와 미국 항모 니미츠의 대만해협 출동이라는 분위기에서 치러진 대만 최초의 총통 직접선거 결과는 국민당 리덩후이 후보가 54.00%, 민주진보당 펑밍민 후보가 21.13%를 얻어 국민당 리덩후이 후보의 승리로 집계됐다. 당시 중국군의 미사일 발사와 가상 대만 섬 상륙 훈련의 견제 목표가 리덩후이였는지, 대만 독립을 공개 주장하던 민주진보당 펑밍민 후보였는지 중국공산당은 밝히지 않았다. 되돌아보면 대륙에서 건너온 장제스(蔣介石), 자칭궈(蔣經國) 총통의 시대가 두 사람의 사망으로 막을 내리자 최초의 대만 섬 출신 국민당 후보 리덩후이 후보의 대만독립노선을 사전에 차단하고, 대만 독립을 공개 주장하던 민진당 후보의 당선을 사전 차단하기 위한 두 가지 목표를 모두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882년 조선에서 보수파로 분류할 수 있는 흥선대원군을 대표적인 배경 세력으로 한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청나라는 군대를 파견해서 흥선대원군을 톈진(天津)으로 납치해감으로써 사태를 진압했다. 당시 작전을 주도한 청나라 군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25세의 위안스카이(袁世凱)였다고 우리 근세사는 기록하고 있다. 청은 1876년 일본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조선이 대원군의 며느리 민씨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개화파가 조선 정치를 주도하는 상황을 관찰하고 있다가 임오군란이 나자 군대를 파병한 것이다. 청이 조선에 파병한 군대의 일원이었던 젊은 위안스카이는 대원군을 톈진으로 납치하는 작전을 성공시킴으로써 이후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노골화했다. 위안스카이는 조선에서 출세하기 시작해서 나중에 중화제국 황제에까지 오르는 영광을 누렸다. 지난 6월 8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관저로 초청해서 만난 자리에서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가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한국 일각이 미국의 승리에 베팅한 것은 잘못된 판단이며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상황은 우리 정치가 대단히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을 중국의 인근 국가에 대한 내정간섭 역사에서 알 수 있다. 평소에 한국어 실력을 과시하며 준비된 원고 없이 즉석 연설하는 모습을 보여주던 싱하이밍 대사가 A4용지에 준비한 원고를 또박또박 읽어내려갔다는 것은 그 원고를 싱하이밍 대사 본인이 준비한 것은 아니라는 합리적인 추측이 가능하다. 한국어 발음을 별로 틀리지 않게 하는 싱하이밍 대사는 ‘베팅’이라는 용어는 발음도 제대로 못한 점을 보면 그 원고가 베이징 외교당국이 준비해서 보내준 원고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이날 원고를 낭독한 후 이어진 비공개 대화에서 싱하이밍 대사는 이재명 대표에게 무슨 말을 한 것일까.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여당 측은 싱하이밍 대사의 행동에서 위안스카이 이름을 소환해서 비난했지만 상황은 그보다 더 심각하고 위험해진 게 아닐까. 이번에는 중국 외교부가 싱하이밍 대사의 입과 A4용지 원고를 통해 한·미 동맹으로 기울어지는 한국 정부에 경고했지만 만약에 중국 외교부가 공식 성명을 통해 “우리 중화인민공화국은 한·미 동맹으로 기울어진 윤석열 대통령 정부를 신뢰하지 않으며, 대중국 외교와 조선과의 평화를 중요시하는 이재명 대표를 중심으로 하는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는 날이 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그런 날이 금방 오지는 않겠지만 국외 여행 중에 망명한 시아누크를 5년간 잘 모시다가 캄보디아로 귀국한 뒤 “우리 중국은 시아누크를 수반으로 하는 4개 정파의 연립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낸 1988년 7월 1일을 되새겨보면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겉으로는 다른 나라에 대한 내정간섭에 반대한다는 평화공존 5원칙을 내세우면서도 유사시 필요할 때는 앞뒤 가리지 않고 내정간섭의 속내를 보여주는 중국의 감추어진 DNA를 우리는 미리미리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현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 ▷호서대 초빙교수 2023-06-23 14:3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