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낭기논설고문ngkim@ajunews.com
- 아주경제 논설고문
- 前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본부장
- 前조선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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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낭기의 관점]여당 국회의원의 법무부 장관 겸직, 이대로 좋은가 [사진=연합뉴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나는 장관으로 일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국회의원”이라며 “더불어민주당 당론으로 의견이 모이면 당연히 따를 것”이라고 했다. 지난 2월 24일 대전보호관찰소를 방문한 자리에서였다. 정의와 법치를 수호해야 하는 법무부 수장이 사적인 자리도 아니고 공적인 자리에서 정파성을 강조한 것이다. 박 장관 발언은 ‘정치인 법무부 장관’의 적절성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정치에서는 집권당 소속 국회의원이 장관을 겸직하는 것이 당연한 관행인 듯 굳어졌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의원 겸직 장관이 특히 많아졌다. 문 대통령 임기 4년 동안 이미 17명이나 된다. 임기 5년 내내 노무현 정부 10명, 이명박 정부 11명, 박근혜 정부 10명보다 훨씬 많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지금도 장관 18명 가운데 박범계 법무부 장관 등 6명이 의원 겸직 장관이다. 장관 3명 중 1명꼴이다. 앞으로 몇 명이 더 나올지 모른다. 집권당 소속 국회의원이 장관을 겸직하면 좋은 점도 있을 것이다. 장관들이 대통령과 집권당의 국정 철학을 잘 이해하고 서로 소통도 원활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국정 수행의 효율성이 높아질 수도 있다. 특히 외교, 국방, 경제, 보건, 환경, 교육 등 대통령의 국정 철학에 따라 정책 방향이 달라질 수 있는 분야가 그럴 것이다. 법치 다루는 법무부, 장관 정치적 중립성 필수 그러나 법무부는 다르다. 법무부는 말 그대로 법을 집행하는 곳이다. 법 집행의 생명은 공정과 정의다. 법무부를 영어로 ‘Minister of Justice’라고 한다. ‘정의부(正義部)’라는 말이다. 그만큼 법무부 업무가 정의와 직결돼 있음을 뜻한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법 집행은 대통령의 국정 철학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없고 달라져서도 안 된다. 하물며 집권당 이익을 우선하는 정파성에 따라 법 집행이 달려져서는 더욱 안 될 일이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법 집행을 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정치적 중립성이다. 법무부가 ‘정의부’로서의 역할을 다하려면 무엇보다도 정치적 중립성을 존중하고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법무부 장관부터 정치적 중립성을 지킬 수 있는 인물이 돼야 한다. 집권당 소속 국회의원이 법무부 장관을 겸직하는 것은 처음부터 정치적 중립성과는 담을 쌓는 일이다. 이 정부 들어 임명된 ‘정치인 법부무 장관’들이 일으킨 정치 편향 논란만 봐도 그렇다. 박범계 장관은 취임하자마자 조남관 검찰총장 대행에게 수사 지휘권을 발동했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불법 정치자금 사건 재판과 관련한 검사의 위증 교사 의혹 사건에 대해서다. 감사가 한 전 총리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도록 증인들을 교사했다는 사건이다. 검찰총장 권한 대행인 조남관 대검차장은 이 사건을 재조사한 결과 검사가 위증을 교사했다는 증거가 없다며 지난 2월 무혐의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박 장관이 "처리 과정의 공정성에 의문이 든다”면서 대검 부장회의에서 다시 논의하라고 지휘한 것이다. 대검 부장 7명과 전국 고검장 6명, 조남관 권한대행 등 모두 14명이 밤샘 회의 끝에 10몀의 찬성으로 무혐의가 맞다고 다시 결론냈다. 그러나 박 장관은 대검 결론을 수용하겠다는 명확한 의사는 밝히지 않았다. 대신 법무부와 대검 감찰부가 대검의 무혐의 결론이 절차적 정의에 따른 합리적 결정이었는지 합동으로 감찰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합동 감찰이 흐지부지하게 용두사미로 대충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한 전 총리는 한번에 3억원씩 세 차례에 걸쳐 9억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유죄 판결의 결정적 근거는 한 전 총리가 받았다는 1억원짜리 수표였다. 위증 교사 의혹 사건에 나오는 증인들의 증언은 유죄의 증거로 채택되지도 않았다. 그 증언이 유죄 판결과 관련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검사가 유죄 증거로 채택되지도 않을 증인들에게 허위 증언을 하라고 교사할 이유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어떻든 위증 교사 의혹이 제기됐으니 진위를 조사할 수는 있다. 그러나 대검에서 두 차례나 무혐의 결론을 내렸다면 이를 뒤집을 만한 다른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수용할 만도 하다. 그게 자연스러운 일 처리일 것이다. 그런데도 박 장관은 감찰을 지시하며 사건을 계속 끌고 가고 있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도 한명숙 전 총리 사건 관련, 측근을 비호하기 위한 감찰 방해 및 수사 방해 이유 등으로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직무 정지 명령을 내리고 징계 청구까지 했다. 검찰총장 직무정지 명령은 사상 처음이었다. 한명숙 사건은 채널A기자 사건과 함께 작년 내내 나라를 뒤흔들었다. 정치인 추미애·박범계, '법보다 정치 우선' 논란 검찰의 잘못된 수사 관행은 당연히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정말로 그러려면 일반 형사 사건 수사에서 두루 벌어져온 잘못들을 정밀 조사해서 그 실태를 파악한 뒤 필요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위증 교사가 문제라면 다른 형사 사건에서는 그런 문제가 없었는지, 있었다면 왜 벌어졌는지 조사해야 한다. 그런데 추미애, 박범계 전·현직 장관은 유독 한 전 총리 사건에 대해서만 그렇게 집요하게 문제를 삼는다. 한 전 총리 사건과 관련해서만 그토록 집요하게 나오는 것은 형평성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진정성도 의심받게 한다. 정말로 잘못된 수사 관행을 바로잡으려는 사법 행정적 목적이 아니라 뭔가 정치적 목적이 아닌지 의심하게 한다. 한 전 총리 유죄 판결을 가져온 검찰 수사에 흠집을 내고 그럼으로써 한 전 총리가 억울하게 당했다는 것을 부각시키려는 목적 말이다. 이런 의심은 현 집권세력과 한 전 총리의 정치적 관계를 되새겨 보면 더욱 짙어진다. 한 전 총리는 민주화 운동권인 진보 진영에서 위상이 높다. 정통 운동권이자 시민 단체 그룹 대모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친노 핵심에 민주당 적자다.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재단 이사장 시절인 2011년 어떤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한빠 (한명숙 열렬 지지자)'라고 했다. 2017년 8월 한 전 총리가 2년 형기를 마치고 의정부 교도소에서 나올 때는 이해찬·문희상·우원식·홍영표·유은혜·전해철·김경수 등 현 정부 핵심 실세들이 총출동해 한 전 총리를 맞았다. 여권은 작년 8월에는 일제히 한명숙 9억원 사건 재조사를 촉구하고 나섰다. 그때부터 ‘한명숙 무죄론’이 끊이지 않고 나왔다. 그러더니 마침내 위증 교사 의혹 사건까지 불거졌다. 한 전 총리가 형기 2년을 마치고 출소까지 한 마당에 검사에게 위증 교사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 법무부와 대검에 진상 조사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추미애, 박범계 전·현직 장관은 민주당 국회의원이다. 민주당과 그 주변 세력이 한 전 총리 사건에 대해 갖고 있는 분노와 원한, 한 전 총리 명예를 바로 세워줘야 한다는 정치적 부담감과 책임 의식 등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분위기에 호응하려니 한 전 총리 사건을 그토록 집요하게 문제삼는 것은 아닐까? 이게 사실이라면 그 이유는 이 두 사람이 집권 세력 분위기에 동조하고 나아가 얽매일 수밖에 없는 ‘정치인 법무부 장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법보다 정치를 우선한다'는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런 게 바로 정치인 법무부장관이 갖는 전형적인 폐해일 것이다. 현 집권세력은 조국 전 장관 가족 비리 사건,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사건 수사 등으로 검찰과 번번이 충돌했다. 집권세력은 검찰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집권세력의 이런 분위기 역시 추미애, 박범계 전·현직 장관에게 영향를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이 역시 정치인 법무부 장관이 갖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장관은 몰라도 법무부장관은 비정치인이라야 1987년 민주화 이후 역대 법무부 장관 32명 중 국회의원을 겸직한 장관은 다섯 명뿐이다. 김영삼 정부의 박희태, 김대중 정부의 박상천, 노무현 정부의 천정배, 문재인 정부의 추미애·박범계 장관이다. 이 가운데 박희태 장관은 장관 임명 일주일 만에 가정사 문제로 사임해 장관직을 수행할 기회가 없었다. 박상천 장관은 정치인이지만 법률가 정신에 투철했다. 김대중 대통령에게도 직언을 서슴지 않는 강직한 성품이었다. 그래서 법무부 장관 재직 중 정치적 논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천정배 장관은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검찰총장에게 수사 지휘권을 행사해 논란을 일으켰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는 강정구 동국대 교수를 불구속 하라고 지휘한 것이다. 이번에 추미애, 박범계 장관도 수사 지휘권을 행사했다. 우리 역사에 몇 번 되지 않는 수사 지휘권 행사가 모두 정치인 장관에 의해 이루어졌다. 지휘권을 발동한 사건도 채널A 기자 강요 미수 의혹 사건, 윤석열 전 총장 일가 의혹 사건, 한명숙 관련 위증 교사 의혹 사건 등 모두 정치성이 강한 사건이었다. 보통 사람이 억울하게 피해를 본 사건이라든지, 다수 국민들에게 큰 손해를 끼친 사건 같은 ‘민생 사건’이 아니었다. 법무부 장관의 검찰총장 지휘권 행사는 그 제도의 취지 상 아주 예외적으로 행사돼야 한다. 검찰 조치를 그냥 두면 사회 정의를 치명적으로 침해할 우려가 있을 때이다. 그러지 않고 장관이 툭하면 수사 지휘권을 행사한다면, 그것도 정치적 사건에 대해 그런다면, 정부 조직 상 법무부와 검찰을 분리하고, 검찰을 준사법 기관으로 만들 이유가 없다. 미국 바이든 정부의 초대 법무부 장관인 메릭 갈런드 장관은 지난 3월 11일 취임사에서 “(여당인) 민주당원을 위한 규칙과 (야당인) 공화당원을 위한 규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권력을 가진 자든 못 가진 자든, 부자이든 빈자이든 같은 경우는 똑같이 다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법무부가 공평한 정의를 추구하고 법에 의한 지배를 고수한다는 점을 말과 행동으로 미국민에게 보여줄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한국의 법무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법무부가 가야 할 길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똑같다. 그 길로 가기 위한 첫걸음은 다른 장관은 몰라도 최소한 법무부 장관만은 집권당 국회의원이 겸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2021-03-30 18:4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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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낭기의 관점]"군주도 법 아래 있다"는 김진욱 공수처장, 그 말대로만 행동하라 [사진=노경조 기자] 김진욱 공수처장은 지난 1월 처장 후보로 지명된 이후 최근까지 공수처 업무와 관련해 여러 가지 의견을 밝혔다. 사람의 말은 그의 생각을 드러낸다. 생각은 행동을 결정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를 대강은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겉과 속, 말과 행동이 다르기 십상이라 겉으로 하는 말을 그대로 믿을 수만은 없다. 그렇다고 해도 말이 한 사람의 됨됨이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유효한 수단임은 부정할 수 없다. "좌고우면 않고 국민만 바라보겠다" 소신 그렇다면 김진욱 공수처장의 말에서 드러난 그의 생각은 무엇일까. 그의 말은 그가 공수처장 직무를 어떤 자세와 각오로 수행하려 할지 예상해 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살펴볼 만하다. 김 공수처장은 지난 12일 ‘김학의 전 법무부차관 불법 출국금지’ 의혹에 연루된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과 이규원 검사 사건을 수원지검으로 돌려보내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공수처 검사와 수사관이 구성되려면 3~4주 이상 걸린다. 수사팀도 구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공수처가 사건을 갖고 있는 것 자체가 ‘봐 주기’ ‘뭉개기’ 등 공정성 논란을 만들 수 있다. 그런 논란이 나오는 것을 피하고 싶었다.” 이성윤 지검장은 친정권 핵심 검사로 꼽힌다. 그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사퇴하기 전 자신에 대한 수사를 공수처로 넘겨달라고 검찰 수사팀에 요구했다. 자신과 대립 관계에 있는 윤 총장이 지휘하는 검찰에서 수사 받으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기 때문일 것이다. 야당 등에서는 이성윤 지검장 수사가 공수처로 넘어가면 공수처가 수사를 흐지부지하고 말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만큼 이성윤 지검장 수사 문제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다. 공수처가 수사팀이 구성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성윤 지검장 수사를 넘겨받아 갖고 있으면 정말로 ‘봐 주기’ ‘뭉개기’라는 비판이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김 공수처장은 이런 점을 바로보고 검찰로 다시 보낸 것이다. 공수처가 공정성 논란에 휘말리는 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 그걸 막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잘 알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지난 1월 19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공수처는 대한민국의 법과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국가기관이라는 기대가 있지만 정반대로 운영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그런 우려가 현실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공수처가 현 정권 수호대가 될 것이라는 부정적 여론이 있고, 잘못하면 진짜로 그렇게 될 수도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철저히 지키고 성역 없이 수사하겠다. 흔들리지 않고 좌고우면하지 않으며 국민만 바라보겠다”고 했다. 그는 2월 25일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는 “정치적 중립성은 공수처의 생명줄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김 처장의 발언은 하나같이 공수처장으로서 반드시 행동에 옮겨야 할 내용이다. 고위공직자 비리를 전담 수사하는 공수처장이 가슴속 깊이 새겨두고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되씹어 봐야 할 것들이다. "민주공화국에선 군주라도 법 아래 있어" 그러나 김 처장의 발언 중 특히 눈여겨볼 만한 대목은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한 말이다. 그는 여기에서 기조 발언을 했는데 그 주제가 ‘민주공화국과 법의 지배’ 였다. 그는 “군주국이 군주가 법을 통치 수단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법에 의한 지배'를 추구하는 사회라면, 민주공화국은 '법의 지배'가 이뤄지는 사회”라고 했다. 그는 법의 지배가 이루어지는 사회를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고 군주조차도 법 아래에서 법의 적용을 받는 사회, 법과 사법제도의 독자성과 자율성이 보장되는 사회”라고 했다. 그는 “법에 의한 통치에서는 법이 정치에 예속되지만 법의 지배에서는 법이 독립적으로, 정의의 원칙에 따라 운영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수사기관도 법의 지배 원칙에 따라 운용돼야 한다. 공수처는 결국 법의 지배를 실현하는 수단”이라고 했다. 민주공화국의 핵심은 법의 지배이고 공수처는 법의 지배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결국 공수처가 민주공화국을 실현하는 수단이라는 말이 된다. 민주공화국까지 들어가며 공수처의 존재 의의를 강조하는 것이 너무 거창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민주공화국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면 그렇지만도 않다. 민주공화국은 민주주의와 공화국을 합한 말이다. 민주주의는 잘 아는대로 국민에 의한 지배, 즉 인민주권을 말한다. 공화국은 국가 권력이 국민 전체의 이익, 즉 공공의 이익을 위해 행사되는 체제를 말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국가 권력 간의 상호 감시와 견제다. 국가 권력을 구성하는 국회, 대통령, 사법부가 서로 감시하고 견제해 어느 부서도 권력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권력을 남용하면 독재나 횡포, 부정과 부패가 발생하기 쉽고 그것은 결국 국민의 이익을 침해하게 된다. 권력 간의 견제와 감시가 이뤄지면 어느 권력도 법 위에 군림하지 못하게 된다. 모두가 법 아래에 있게 된다. 법의 지배가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다. 그래서 권력 간 감시와 견제를 공화국의 원리라고 한다. 삼권 분립에 의한 견제와 균형은 민주주의의 원리가 아니라 공화국의 원리라는 말이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헌법에 최초로 구현한 나라가 미국이다. 미국 헌법은 제1조에서 7조까지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에 의한 감시와 견제를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해방 이후 헌법을 만들면서 미국의 영향을 받아 대통령제와 함께 삼권분립 체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명목 상의 삼권분립만 돼 있었을 뿐 견제와 감시는 거의 없거나 미흡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 좀 달라지긴 했지만 근본적 문제는 여전했다. 국회는 대통령과 행정부를 견제하고 감시하기보다 집권 여당이 대통령을 받들어 모시는 바람에 ‘통법부’가 되기 일쑤였다. 법과 정의를 바로세워야 할 검찰은 살아 있는 권력에는 손을 댈 엄두도 못 냈고 결국 권력의 시녀로 전락했다. 사법부도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의 경계에서 오락가락하다가 최근에는 ‘코드 사법’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정권과 가까워졌다. 공수처의 미래, 김 처장 언행일치에 달렸다 검찰이 살아 있는 권력자를 수사하지 못하는 바람에 권력자들은 법 위에 있었다. 권력자들을 제대로 감시해 이들이 법 위에 군림하지 못하게 하려고 만든 것이 공수처다. 권력 감시 기능을 제대로 하라고 공수처에는 두 가지 제도적 장치를 뒀다. 하나는 공수처를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 기구로 한 점이다. 또 하나는 국가 권력을 다루는 핵심 인사들만을 공수처 수사 대상으로 한 점이다. 대통령, 국회의장과 국회의원, 대법원장과 대법관, 헌법재판소장과 헌법재판관, 국무총리와 장·차관 및 기타 고위 공직자들이 그들이다. 이처럼 공수처는 대통령과 행정부·입법부·사법부 구성원이 권력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견제하는 기구다. 그래서 공수처는 권력의 감시와 견제라는 공화국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핵심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김 처장이 민주공화국은 법의 지배가 이뤄지는 사회이고 공수처는 법의 지배를 위한 수단이라고 함으로써 공수처를 민주공화국 실현을 위한 장치라는 취지로 한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사안의 핵심을 찌른 말이다. 김 처장이 공수처장으로서 국민이 원하는 생각과 철학을 갖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문제는 실행이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갖고 있더라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면 소용 없다. 앞으로 김 처장이 ‘군주조차도 법 아래에 있다’는 말 그대로 현 정권 비리를 수사하려 할 경우 온갖 정치적 압력에 맞닥뜨릴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김 처장의 생각은 무엇일까. 그는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소신을 밝혔다. 그는 ‘3년 임기를 지키지 못하도록 정치적 외압이 들어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초대 공수처장으로서 임기를 지키지 않으면 제도 안착에 상당한 문제가 생길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임기를 지키겠다.” 압력에 굴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김 처장은 ‘청와대에서 전화가 오면 받을 건지, (청와대와 연결된) 핫라인을 둘 것인지, 수사 과정에서 대통령 측으로부터 비공개로 티타임(차 한잔)을 하자고 하면 응할 것인지’ 묻는 질문에는 “대통령과의 핫라인은 현재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식사나 티타임 요청은 (청와대에서) 없으실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연락도 주고받지 않겠다는 말이다. 김 처장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공수처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잘 알기에 참으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초대 공수처장으로서 공수처가 국민 신뢰를 받고 헌정 질서에 단단히 뿌리 내려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국민 신뢰를 바탕으로 견제와 균형의 헌법 원리가 실현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김 처장이 그동안 해온 말대로만 행동하면 그 다짐이 전부는 아니라도 상당한 정도는 실현될 것이다. 모든 것은 김 처장 본인에게 달려 있다. 김 처장의 말이 교과서를 그대로 옮긴 백면서생의 말에 불과한 것인지, 벼리고 또 벼려 뼛속까지 스며 있는 자신의 결의를 천명한 것인지는 멀지 않아 드러날 것이다. 2021-03-15 00:5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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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낭기의 관점]공수처 이어 이번엔 '수사청' 추진…수사 기관 남발 아닌가 [연합뉴스]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문제로 시끄럽더니 이번엔 ‘수사청(중대범죄수사청)’ 문제로 또 한번 시끄러워질 것 같다. 더불어민주당 의원 20명이 지난 8일 수사청 설치 법안을 국회에 냈다. 황운하 의원이 대표 발의했다. 최강욱 열린민주당 의원도 가세했다. 이들은 수사청 설치를 공수처 설치와 검·경 수사권 조정에 이은 ‘검찰 개혁 완결판’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검찰 개혁’이라는 명분을 내건다고 해도 국가 수사기관을 이렇게 쉽게, 그리고 이렇게 여러 가지로 만들어도 되는 걸까? 민주당 의원들, 중대범죄수사청 법안 발의 수사청 설치 법안의 핵심은 검찰이 직접 수사할 수 있는 6개 범죄에 대한 수사권을 수사청으로 옮긴다는 것이다. 여기에 수사와 공소 업무, 즉 경찰이나 검찰에 종사하는 공무원이 저지른 범죄도 수사청 수사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6개 범죄는 부패, 경제, 공직자, 선거, 방위사업 범죄와 대형 참사 같은 특별 사건이다. 공수처가 설치되면서 장차관, 국회의원, 판검사, 군 장성, 청와대 비서관, 시·도지사와 교육감, 경무관 이상 경찰 간부 등 고위 공직자 범죄 수사권은 공수처로 넘어갔다.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6개 범죄 외에 기타 모든 범죄의 직접 수사권은 경찰로 넘어갔다. 검찰은 6개 범죄에 대해서만 직접 수사권을 갖고 있다. 살인·강도·강간 같은 일반 사건은 수사할 수 없게 돼 있다. 그런데 6개 범죄 수사권마저 수사청으로 옮기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검찰은 직접 수사권이 다 없어진다. 기소와 공소 유지만 전담하는 기관으로 남는다. 검찰을 이런 기관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수사청 설치의 목적이다. 앞서 작년 12월 29일 황운하 의원 등 더불어민주당 의원 4명과 최강욱 열린민주당 의원은 검찰청을 폐지하고 기소권과 공소 유지권만 갖는 ‘공소청’을 신설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수사청 설치는 궁극적으로 검찰청을 폐지하고 공소청을 설치하기 위한 중간 절차인 셈이다. 황운하, 최강욱 의원 등이 수사청 설치를 주장하면서 내건 명분은 ‘수사와 기소의 분리’를 통한 검찰 개혁이다. 검찰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모두 갖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왔다며 이를 바로잡으려면 검찰 수사권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황 의원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검찰은 전세계에 없다”면서 “수사기관을 다원화해 상호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황운하, 최강욱 의원등은 “문재인 정부의 검찰 개혁 양대 과제는 공수처 설치와 검찰 수사권 완전 폐지다. 검찰 수사권 완전 폐지 법안을 올해 상반기 내에 통과시키겠다”는 내용의 ‘서약문’을 공개하기도 했다. 조국 전 장관도 가만 있지 않았다. 그는 지난 12일 페이스북에 “수사청 설치는 검찰 수사권 폐지가 최종 목표”라며 “공수처, 검찰청, 수사청, 경찰청 분립 체제가 되길 기원한다”고 썼다. '수사· 기소 분리로 검찰 수사권 완전 폐지'가 목적 검찰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함께 갖고 있으면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다. 한번 수사에 착수하면 어떻게 해서든 기소해야 체면이 산다고 여길 수 있고 그러다 보면 무리한 수사를 하게 될 수 있다. 황운하 의원은 “별건 수사, 먼지떨이 수사, 짜맞추기 수사, 표적 수사, 과잉 수사’를 그 부작용으로 열거했다. 그러나 이런 부작용의 유일한 또는 가장 큰 원인이 검찰이 기소권과 수사권을 모두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황 의원이 나열한 부작용은 기소권은 없고 수사권만 가진 경찰에서도 나타나는 병폐다. 경찰이 표적 수사, 과잉 수사, 짜맞추기 수사로 억울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 수십년 감옥살이를 하게 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으로 유명한 화성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20년을 복역한 윤성여씨(53)가 대표적 사례다. 윤씨는 진범이 이춘재로 밝혀지면서 재심 끝에 32년 만인 작년 12월 무죄 판결을 받고 누명을 벗었다. ‘낙동강변 강간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21년간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다가 28년 만인 지난 4일 무죄 판결을 받은 피해자 2명도 있다. 경찰 수사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데는 여러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있다. 우선 ‘인권 수사’라는 개념이 거의 없거나 아주 약하던 시대 상황이 그 하나다. 그때는 경찰의 불법 연행, 고문, 가혹행위가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피의자가 변호인의 조력을 제대로 받을 수도 없었다. 변호인 조력권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할 때였다. 게다가 유전자(DNA) 분석이나 폐쇄회로 티브(CCTV) 같은 과학 기술과 장비도 없었다. 피의자 인권 보호 의식이나 과학 수사 수준이 낮으니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정해 놓고 수사하는 표적 수사, 짜맞추기, 과잉 수사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인권 침해 수사는 경찰만의 일도 아니었다. 과거 독재 정권 시절에는 기무사령부나 안기부에서도 밥 먹듯 일어났다. 기무사나 안기부 역시 경찰처럼 기소권은 없고 수사권만 갖고 있었다. 수사와 기소가 분리돼야 부작용이 없어진다면 수사권만 있고 기소권은 없는 경찰, 기무사, 안기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기소권 없이 수사권만 가진 경찰에서도 부작용 속출 결국 중요한 것은 수사와 기소의 분리가 아니다. 인권 침해 수사를 막으려면 수사기관의 인권 의식 향상, 수사기관의 불법 행위에 대한 사회적 감시와 통제, 피의자의 변호인 조력권 실질화를 위한 제도 정비와 강화, 수사기관 내부의 불법 수사 관행에 대한 감시와 통제 등 여러가지 요건이 충족돼야 한다. 그럼에도 마치 수사와 기소가 분리되지 않아서 모든 문제가 생기는 듯 몰아가는 것은 정치적 선동은 될 수 있지만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원인 분석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진 검찰은 전세계에 없다는 주장도 정확한 말은 아니다. 지금 미국 뉴욕 맨해튼 지방검찰청은 트럼프 전 대통령과 그 가족 및 측근들의 비리 의혹을 수사 중이라고 미국 언론들이 연일 보도하고 있다. 트럼프 사업에 거액을 대출해준 은행과 보험사가 수사 대상이다. 트럼프가 자산을 부풀려 사기 대출 받았는지, 은행과 보험사가 짜고 대출해 준 것은 아닌지를 수사하고 있다. 검찰은 트럼프 측이 2016년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와의 성관계를 주장하는 여성 2명에게 입막음용으로 거액을 준 사건을 수사했었다. 그 과정에서 대출 사기 의혹이 드러나자 수사를 확대한 것이다. 우리로 치면 ‘별건 수사’에 해당할 수 있지만, 이게 논란거리가 되지는 않고 있다. 한편 검찰은 트럼프 장녀인 이방카가 자신 소유 컨설팅 회사를 통해 트럼프 그룹으로부터 74만7000달러(8억여원)을 자문료 명목으로 받은 것도 수사 중이다. 증여세를 피하기 위한 위장 증여인지가 수사 대상이다. 우리의 서울중앙지검 검사장 격인 뉴욕남부연방검찰청 검사는 트럼프 측근들을 수사하다가 작년 6월 해임됐다. 이 검사는 연방 법무부가 사임하라고 압박하자 “차라리 해임하라”고 맞서기도 했다. 수사와 기소를 분리할 수도 있다. 제도는 만들기 나름이다. 그러나 수사와 기소를 분리하고 수사기관을 여러 개 만든다고 해서 수사기관끼리의 견제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견제 장치가 있어야 한다. 견제 장치가 없으면 각 수사기관이 자기 권력을 맘껏 행사하게 될 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수사기관 간 견제 장치는 ‘검찰 개혁’을 거치면서 거의 모두 없어졌다.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검찰의 경찰 수사 지휘권이 폐지됐다. 경찰에 수사 종결권도 주어졌다. 이제 경찰은 검찰 통제를 받지 않는다. 공수처는 처음부터 검찰 지휘 통제를 받지 않게 돼 있다. 공수처는 판·검사와 경무관 이상 경찰 간부에 대해선 수사권 외에 기소권까지 갖고 있다. 신설을 추진하는 수사청도 검찰 수사 지휘를 받지 않는다. 이제 경찰, 공수처,수사청은 각자 자기 영역 안에서 다른 기관 통제를 받지 않고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권력이 분립되기는 했지만 권력 간에 견제가 이뤄질 수는 없는 상황이다. 개인적 보복 감정으로 '검찰 해체' 주장하나 검찰 수사권을 없앤다고 해도 굳이 수사청이라는 별도 수사기관을 또 만들 필요가 있을까. 검찰의 직접 수사 대상인 6개 범죄에 대해선 현재 경찰도 수사권을 갖고 있다. 따라서 수사청을 만들 필요 없이 경찰에 맡기면 된다. 아니면 공수처에 맡겨도 안 될 게 없다. ‘고위공직자 범죄 수사처’에서 ‘고위 공직자’를 빼고 그냥 ‘수사처’로 이름만 바꾸면 된다. 이렇게 손 쉬운 길이 있는데 수사청을 꼭 만들어야 할 이유가 뭔가. 수사청 운영에 들어갈 예산은 얼마나 될 것인가. 공수처는 처장과 차장만 있을 뿐 아직 검사와 수사관도 없다. 수사할 준비도 끝나지 않은 것이다. 검·경 수사권 조정도 올해 1월 1일부터 시행되고 있어 과연 별 문제 없이 운영될지 불확실하다. 공수처와 검·경 수사권 조정이 자리잡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수사청이라는 또 하나의 수사기관을 만들겠다고 하니, 국정 운영을 이런 식으로 해도 되는가. 수사청 신설과 검찰 수사권 폐지를 주도하는 황운하 의원과 최강욱 의원, 여기에 박수를 치는 조국 전 장관은 공통점이 있다. 검찰에 의해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최 의원은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이들이 수사청 설치와 검찰 수사권 폐지에 앞장서는 것을 검찰에 대한 ‘보복’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개인의 보복 감정으로 국가 수사기관을 이리 쪼개고 저리 쪼개고 한다면 그런 나라를 과연 제대로 된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2021-02-18 21: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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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낭기의 관점]"박원순 언동은 성희롱" 인정한 인권위, '죽어가던 법'을 살렸다 [연합뉴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1월 25일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여비서에게 한 성적 언동은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발표했다. 국가 기관이 박 전 시장의 성폭력을 인정한 것은 처음이다. 인권위 발표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 사건과 관련해 우리 사회에서 ‘죽어가던’ 법을 그나마 살렸기 때문이다. 인권위가 제 역할을 다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원순 성추행 사건 피해자는 작년 7월 박 전 시장을 고소하면서 변호인을 통해 “거대한 권력 앞에서 힘없고 약한 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공정하고 평등한 법의 보호를 받고 싶었습니다”라고 호소했다. 고립무원에 빠진 자신이 그래도 의지할 수 있는 곳은 법뿐이라는 한가닥 기대와 절박함이 담긴 말이었다. 이 말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법은 과연 피해자를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인지에 많은 사람들이 촉각을 곤두세웠다. 인권위, "박원순, 성적 굴욕감·혐오감 느끼게 해" 그러나 피해자가 고소한 이후 서울시는 물론이고 경찰도,여성가족부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여권 인사들과 친문재인 네티즌들은 오히려 피해자를 조롱하고 핍박하며 2차 피해를 가했다. 청와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우리 사회에서 법은 ‘죽어가고 ‘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권위 발표가 나온 것이다. 인권위는 “9년 동안 서울특별시장으로 재임하며 차기 대권 후보로 거론되는 유력한 정치인이었던 박 전 시장이 하위직급 공무원에게 행사한 성희롱”이라고 발표했다. 인권위는 박 전 시장이 늦은 밤 피해자에게 부적절한 메시지와 사진·이모티콘을 보낸 점, 집무실에서 네일아트한 피해자의 손톱과 손을 만진 점 등을 사실로 인정했다. 피해자가 시장의 일정 관리 같은 보좌 업무 외에 샤워 전・후 속옷 관리, 약을 대리 처방 받거나 복용하도록 챙기기, 혈압 재기 및 명절 장보기 등 사적 업무를 수행한 점도 사실이라고 봤다. 인권위는 피해자의 휴대전화 디지털 포렌식 자료, 참고인 51명의 진술, 피해자 진술 등 객관적인 자료를 근거로 “박 전 시장의 행위는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성적 언동으로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했다. 인권위는 “피조사자인 박 전 시장의 진술을 듣기 어렵고 방어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이라 사실 관계를 더 엄격히 따졌으나, 성희롱으로 판단하기 충분하다”고 했다. 인권위는 “박 전 시장은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서울대 교수 조교 성희롱 사건 등 여성 인권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의 공동 변호인단으로 참여했을 뿐 아니라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젠더(gender·성) 정책을 실천하려 했기에 그의 피소 사실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고 했다. 이 사건에 대한 인권위의 평가가 담겨 있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인권위가 ‘성추행’이 아닌 ‘성희롱’이라고 해서 수위를 일부러 낮춘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인권위법에 따른 용어 선택일 뿐이다. 국가인권위원회법은 성추행 대신 성희롱이라는 표현을 쓴다. 제2조에 성희롱을 ‘공공기관 종사자가 그 직위를 이용해 성적 언동으로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정해 놓았다. '언동’은 말과 행동이다. 행동이라는 말 속에 ‘추행(더럽고 지저분한 행동)’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민주당 "피해 호소인" 호칭···2차 가해도 묵인 인권위 발표는 작년 7월 피해자가 인권위에 직권조사를 의뢰한 지 6개월 만에 나왔다. 그 사이 피해자에겐 어떤 일이 벌어졌나? 민주당은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이라고 불렀다. 민주당이 다른 성추행 사건에서 ‘피해 호소인’이라고 한 적은 없다. 유독 박 전 시장 사건에서만 그런 표현을 썼다. 이 사건의 본질을 흐리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민주당은 당 지지자들이 2차 피해를 가해하는 것도 묵인했다. 일부 의원들은 피해자 뒤에 정치적 배경이 있는 듯한 ‘음모론’을 펴기도 했다. 여성가족부는 어땠는가. 피해자 지원단체와 공동변호인단은 2차 가해가 계속되자 작년 10월과 12월 두 차례 여성가족부에 2차 피해 차단과 재발 방지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여성폭력방지기본법 18조 3항은 ‘국가와 지자체는 2차 피해가 발생한 경우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피해자 측은 여성가족부로부터 아무런 회신을 받지 못했다. 이에 대해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성폭력 피해자가 굉장히 많은데 중앙부처가 개별 피해자들을 일일이 지원해야 하는지는 검토가 필요하다”고 했다. 여성가족부는 어떤 성폭력 사건에든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지만, 특히 고위공직자가 부하 직원에게 저지른 공직 사회의 성폭력 사건에는 더욱 엄격히 나서야 한다. 공직 사회의 성폭력 사건부터 바로잡아야 민간 영역에서 발생한 사건에도 엄정히 대처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성가족부는 박원순 성추행 사건을 ‘굉장히 많은 사건 가운데 하나’쯤으로 몰고갔다. 여성가족부는 이 사건이 발생했을 때부터 피해자를 ‘고소인'으로 부르고, 제대로 된 입장도 내놓지 않았다. 여성가족부는 뒷짐, 경찰은 '무혐의' 처리 서울경찰청은 작년 12월 29일 박 전 시장의 강제추행, 시장 주변인들의 추행 방조 혐의를 확인하지 못했다며 수사를 종료했다고 발표했다. 5개월 넘게 수사하고도 빈손으로 끝낸 것이다. 이에 앞서 작년 12월 1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1부(부장판사 조성필)는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사실을 인정하는 판결을 했다. 박 전 시장 성추행 사건 피해자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전직 서울시장 비서실 직원에게 징역 3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면서 내린 판결에서였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의 원인에 대해 판단하는 과정에서 박 전 시장이 피해자에게 성적인 문자와 속옷 사진을 보냈고, ‘냄새를 맡고 싶다’ ‘몸매 좋다’ ‘사진 보내달라’ 는 등 문자를 보낸 사실을 인정했다. 박 전 시장이 피해자가 다른 부서로 옮긴 뒤에도 ‘남자를 알아야 시집을 갈 수 있다’ ‘섹스를 알려주겠다’고 문자를 보낸 것도 사실로 봤다. 그런데 경찰은 경찰관 46명을 투입해 5개월간 수사하고도 재판부만큼도 진실 규명을 못한 것이다. 경찰의 무능력 때문인가 무의지 때문인가. 경찰 발표가 나자 2차 가해가 더욱 기승부렸다. 강제 추행 방조 혐의로 고발된 전 서울시장 비서실장은 “고소인 측 주장이 거짓이나 억지라는 것이 확인됐다. 4년간 성폭력 주장의 진실성이 의심된다”고 했다. 서울시 행정부시장을 지낸 윤준병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경찰 수사 결과가 “사필귀정”이라고 했다. 전 서울시 인사기획 비서관은 피해자가 박 전 시장에게 쓴 편지 세 통을 페이스북에 공개했고, 한 대학 교수는 이 편지를 올리고 “어떻게 읽히시느냐. 4년간 지속적 성추행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한 여성이 쓴 글”이라고 했다. 적폐청산국민참여연대라는 친문(親文) 단체는 피해자를 무고 및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로 고발하겠다고까지 했다. 박원순 성추행 사건 발생 이후 정부 당국과 민주당 및 그 지지자들이 보인 언행은 피해자가 그토록 호소했던 ‘법의 보호’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 사건에서 법의 보호란 무엇인가. 성추행이 사실인지, 서울시 간부들이 묵인 방조했는지, 성추행 고소 사실을 누가 외부에 유출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피해자에게 2차 피해를 가하는 사람들을 단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 관계기관은 인권위 발표가 나오기 전까지 이런 의혹들에 대해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다. 성과라면 서울북부지검이 고소 사실 외부 유출자로 남인순 민주당 의원을 지목한 정도다. 그러나 남 의원은 “나는 피소 사실을 사전에 알지 못했고 유출한 바 없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우리 사회에서 법은 ‘죽어가고’ 있었다. 오죽하면 피해자의 아버지, 어머니, 동생 등 가족까지 입장문을 냈을까. 가족들은 1월 18일 낸 200자 원고지 52매 분량의 입장문에서 “죽지못해 산 6개월”이라며 “책임 회피한 박원순 명예만 소중한가, 우린 죽어가는데…”라고 울부짖었다. 인권위 발표 나오자 분위기 반전···이낙연 "피해자에게 사과" 그런데 인권위 발표 이후 분위기가 싹 달라졌다. 우선 민주당 이낙연 대표가 ‘피해자’라는 말을 쓰며 정식으로 사과했다. 이 대표는 1월 27일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희롱 등에 대한 직권조사 결과를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피해자와 가족들께 깊이 사과드린다. 국민 여러분께도 송구스럽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작년 7월 사건 발생 때는 ‘피해 를 호소하시는 고소인'이라는 낯선 표현을 썼다. 이 대표는 “피해자가 2차 피해 없이 일상을 회복하실 수 있도록 저희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고, 이런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관련법도 고치겠다고 했다. 얼마나 행동으로 옮길지는 두고볼 일이나, ‘피해 호소인’이라고 부르면서 민주당 지지자들의 2차 가해를 묵인하던 과거와는 달라진 태도다. 남인순 의원도 인권위 발표 다음날인 1월 26일 "국가인권위원회 직권조사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인다"고 밝혔다. 남 의원은 입장문을 통해 "피해자에게 `피해 호소인`이라고 지칭해 정치권이 피해자의 피해를 부정하는 듯한 오해와 불신을 낳게 했다"며 "저의 짧은 생각으로 피해자가 더 큰 상처를 입게 됐다. 다시 한번 피해자에게 깊이 사과드린다"고 했다. 이 밖에 2차 피해를 가하는 움직임도 크게 약화됐다. 인권위 발표로 성추행이 사실로 인정되자 더 이상 딴소리를 하기 어렵게 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인권위 발표는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피해자는 이제 최소한의 법의 보호를 받게 됐다. 인권위는 죽어가던 법을 그나마 살렸다. 인권위가 본래 역할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국가인권위법 제3조는 “위원회는 그 권한에 속하는 업무를 독립하여 수행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권력 눈치 보지 말고 소신껏 일하라는 말이다. 인권위가 정권과 정권 지지자들 눈치나 보려 했다면 이번과 같은 결과를 내놓지 못했을 것이다. 인권위, 국가 기관 제 역할 수행의 중요성 보여줘 이번 사례는 국가기관이 헌법과 법에 정해진 본래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특히 인권위처럼 감시하고 견제하는 기관이 제 역할을 다해야 권력과 그 지지자들의 만행을 막고 개인의 인권을 보호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감시하고 견제하는 기관에는 사법부, 감사원, 검찰도 있다. 이들 기관이 제 역할을 다하면 법과 상식과 정의는 저절로 지켜진다. 법과 상식과 정의가 지켜지고 존중되는 사회가 선진민주사회다. 권력이 법 위에 군림하는 걸 당연한 듯 여기는 한국 정치 풍토에서 인권위, 사법부, 감사원, 검찰 같은 국가 기관이 권력 눈치 보지 않고 제 역할을 다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탈원전 정책 결정 과정의 합법성 여부를 감사한 감사원, 정권 비리를 수사한 검찰, 친정권 인물들에게 양심껏 판결한 일부 판사들을 향해 지금 정권 핵심 인물들과 정권 지지자들은 온갖 핍박과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감사원장에게 “주인 행세 하지 말라”고 하고, 탄핵으로 판사들을 협박하고 있다. 검찰총장을 강제로 쫓아내려 했다. 인권위의 박원순 성추행 인정 발표는 이런 풍토에서 나온 것이라 더욱 돋보인다. 국가기관이 제 역할을 다한다는 게 무엇이고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귀중한 사례를 남겼다. 2021-02-02 21:5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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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낭기의 관점] '신천지 무죄 판결', 법리재판이 여론재판에 제동을 걸다 [연합뉴스] 법원이 신천지 이만희 총회장의 ‘코로나 방역 방해’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이 총회장은 작년 코로나 확산 과정에서 신도 명단과 집회 장소를 축소 보고해 역학 조사를 방해한 혐의(감염병예방법 위반 및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와 교회 자금을 횡령한 혐의 그리고 기타 다른 업무 방해 혐의 등 모두 3가지 혐의로 기소됐다. 수원지법 형사11부(부장판사 김미경)는 지난 13일 역학 조사 방해에는 무죄를 선고하고, 횡령과 다른 업무 방해 혐의만 유죄로 인정했다. 신천지 사건의 핵심은 역학 조사 방해 여부다. 나머지 2 개 혐의는 곁가지다. '신천지 허위 자료 제출' 비난 여론에 여권, "검찰 수사" 역학 조사 방해 무죄 판결은 민주사회에서 사법부가 존재하는 의미와 맡은 역할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한다. 민주사회는 다수 또는 여론이 지배하는 사회다. 여야 정당은 다수나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쟁하고, 그 경쟁에서 승리한 다수파가 정치권력을 장악한다. 이 과정에서 선출직 정치인들의 대중 영합이나 선동 같은 부작용도 생긴다. 이게 민주주의의 본질적 흠결이다. 사법부 역할 중 하나는 이런 민주주의의 흠결을 바로잡는 것이다. 이만희 방역 방해 무죄 판결도 그런 사례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신천지 코로나 사건’은 작년 2월 신천지 대구교회의 한 신도가 코로나에 감염되면서 시작됐다. 전국에서 31번째 확진자였던 이 신도는 무증상 상태에서 예배에 참석했다. 이후 코로나 바이러스가 다른 신천지 교인들에게 확산해 확진자 수가 30명대에서 일주일도 되지 않아 800명을 넘었다. 상당수가 신천지 교인들이었다. 신천지는 코로나 대량 확산의 주범으로 몰렸다. 인터넷에는 "신천지가 나라를 말아먹는다"는 비난 글이 쏟아졌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는 '신천지 강제해산 촉구' 및 '신천지 교주 구속수사 촉구' 국민청원이 게시됐다. 신천지 피해자 단체는 이만희 총회장을 감염병예방법 위반 등 혐의로 고발했다. 더욱 논란이 된 것은 신천지가 신도 명단과 교회 시설의 일부를 허위로 제출한 일이었다. 지자체들이 신천지 신도 명단과 교회 시설 자료를 내라고 요구했는데 신천지가 제출한 자료에 일부 누락과 허위가 발견된 것이다. 신천지 비난 여론이 더욱 확산됐다. 그러자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신천지 강제수사'론을 들고 나왔다. 추 장관은 “보건당국의 역학 조사를 의도적, 조직적으로 거부, 방해, 회피하면 압수수색을 비롯한 즉각적 강제수사에 착수하고, 감염병예방법 등에 따라 구속 수사하는 등 엄정 대처하라”고 검찰에 지시했다. 추 장관은 국회에 나와서는 “국민의 86% 이상이 압수수색의 필요성에 찬성한다”고 말했다. 여권 인사들도 검찰을 압박했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검찰은 즉시 강제수사를 통해 신천지 교단의 제대로 된 명단과 시설 위치를 하루빨리 확보해야 한다"고 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윤석열 검찰총장께 요청한다.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바이러스 진원지의 책임자 이만희 총회장을 체포하는 것이 지금 검찰이 해야 할 역할"이라고 했다. 곧이어 서울시는 이 총회장을 살인죄 등으로 고발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도 “신천지는 협조의 외관을 취하면서도 자료 조작, 허위 자료 제출, 허위 진술로 오히려 방역을 방해하고 있다”며 “검찰은 신천지를 신속히 강제 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원, “ 정보 제공 요청 거부는 방역 방해 아니다” 검찰은 처음에는 신천지 압수수색 등 강제 수사에 신중하게 나왔다. 경찰이 신청한 압수수색 영장을 두 번이나 기각했다. 압수수색한 자료를 범죄 수사에 쓰지 않고 행정기관에 제공하는 것은 법률상 문제가 있고, 압수수색을 하면 신도들이 숨어 방역에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여권의 잇따른 압박 탓인지 결국 수사에 나섰다. 그리고 이만희 총회장을 교인 명단 일부 누락, 일부 신도 주민등록번호 제출 거부, 교회 시설 일부 누락 등으로 역학 조사를 방해했다고 기소했다. 그런데 법원이 방역 방해 혐의에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법원은 "중앙방역대책본부가 감염 여부와 관계 없이 모든 신천지 시설과 교인 명단을 요구한 것은 역학 조사의 내용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무죄 선고 이유를 밝혔다. 법원은 판결 근거로 감염병예방법과 이 법 시행령에 규정된 역학 조사의 의미와 내용을 들었다. 감염병예방법은 역학조사의 의미를 ‘감염병환자 등의 발생 규모 파악, 감염원 추적, 예방접종 후 이상 반응에 대한 원인 규명을 위한 활동’으로 정하고 있다. 또 이 법 시행령에는 역학조사의 내용을 ‘감염병 환자 등 인적사항, 발병일, 발병장소, 감염원인, 감염경로, 환자의 진료기록 및 그 외 감염병 원인 규명과 관련된 사항’으로 정하고 있다. 법원은 이런 규정들을 들어 “방역 당국의 정보 제공 요청은 역학 조사가 아니고 그 준비 단계인 자료 수집에 해당한다”며 “따라서 이만희 총회장이 역학 조사를 방해했거나 공무 집행을 방해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결론지었다. 법원은 방역 당국도 신천지에 자료 제출을 요구하며 감염병예방법에 규정된 ‘정보 제공 요청’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했다. 재판과정에서 검찰은 역학조사를 위한 자료 수집도 역학 조사에 포함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역학 조사 과정에서 인적 사항, 방문 장소, 만난 사람 등에 관한 정보가 노출되는 등 사생활에 관한 기본권이 제한되는 데다가 역학 조사를 거부하면 형사 처벌 대상이 되기 때문에 범위를 함부로 확장해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헌법의 기본권 존중과 죄형법정주의 원칙을 강조한 것이다. 표 의식하는 정치인들의 대중 영합과 선동 국민들이 신천지가 코로나 확산의 진원지가 되고 있다고 우려하며 정부에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신천지 역시 방역에 최대한 협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교인 보호를 위해서라지만 신도 명단 등을 일부 누락하거나 허위로 제출한 것은 잘못이다. 문제는 여권 인사들이 신천지를 희생양으로 몰아가며 즉시 체포해 처벌하라고 촉구하고 나온 것이다. 심지어 살인죄로 고발하기까지 하지 않았나. 아무리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해 신도 명단과 교회 시설 자료가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정부가 그런 정보를 행정적으로 확보하는 것과 신천지 관계자의 체포와 구속을 요구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수사와 형사 처벌 여부는 사법 당국이 엄밀한 법적 검토를 거쳐 판단할 일이지, 선출직 정치인들이 대중의 감정에 영합하거나 대중을 선동하는 식으로 몰고 갈 일이 아니다. 이번에 이만희 총회장이 무죄 선고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교인 명단 제출 등 방역 당국의 정보 제공 요청을 거부해도 처벌하는 법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감염병예방법에는 역학조사 준비단계에서 감염병 환자나 감염병 의심자에 관한 정보 제공을 요청할 수 있게 돼 있을 뿐 거부 시 처벌 규정은 없었다. 처벌 규정은 이만희 총회장이 기소되고 난 이후인 작년 9월 29일에야 신설됐다. 그러나 헌법의 형벌 불소급 원칙에 따라 이 처벌 규정이 이만희 총회장에게는 소급 적용될 수 없었다. 작년 9월 29일 이후 정보 제공 요청을 거부한 사람이나 단체는 이제 형사 처벌을 받게 된다. 따라서 제2의 신천지 사태가 터졌을 때 명단 제출을 거부해도 처벌받지 않는 것 아니냐고 흥분할 일은 아니다. 요즘 BTJ열방센터가 방문자 명단을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인터넷에선 “신천지에 무죄를 선고하는 순간 다 무죄가 된다”며 “열방센터도 무죄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처벌 규정이 신설됐기 때문에 '다 무죄가 될 것'이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이번에 법원도 신천지에 무죄 선고를 하면서 “처벌 규정 신설로 향후 처벌 공백이나 협조 거부 사태를 야기할 우려가 더는 없다”고 했다. 여권 인사들은 신천지가 정확한 정보 제공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면서 형사 처벌만을 주장했을 뿐, 정보 제공을 거부할 경우 처벌 규정이 없다는 문제점은 아무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선 관심도 없었다는 증거다. 제대로 된 정부 당국자이고 정치인이라면 법의 허점이나 미비점이 없는지 살펴서 그런 게 있으면 보완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저 시류를 쫓아 검찰 수사나 촉구하고 압박하는 것은 대중 영합이고 직무 유기일 뿐이다. ‘선출된 권력’ 견제가 사법부 역할 현 정권 사람들은 툭하면 사법부를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고 경시한다. 자기들에게 불리한 판결을 하면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선출된 권력’을 무시하고 선출된 권력에 도전한다고 윽박지른다.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탈원전 정책 과정의 적법성 여부를 감사하는 최재형 감사원장에게 “주인 행세를 한다”고 비난했다. 이 역시 선출된 권력인 자기네가 ‘주인’이니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감사원은 주인이 시키는대로나 하라는 발상이다. 권력을 선출됐느냐, 선출되지 않았느냐로 구분하는 것은 선출된 권력만이 민주 권력이고 따라서 선출된 권력 뜻대로 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다. 사법부나 감사원 같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존립 근거는 헌법이다. 헌법이 사법부나 감사원에 권력을 부여한 것이다. 헌법은 국민 의사의 표현이고 민주국가에서 모든 권력의 원천은 국민이다. 우리 헌법 제1조도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헌법이 사법부나 감사원에 권력을 부여한 것은 곧 국민이 부여한 것이고 그래서 당연히 민주적 권력이다. 선출된 권력만 민주적 권력이 아니라는 말이다. 민주주의 발달사에서 선출되지 않은 사법부에 권력을 부여한 목적은 선출된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게 하기 위해서다. 권력 분립을 통한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바로 이것이다. 사법부는 선거와는 무관한 권력이라 대중의 감정과 여론에 휩쓸릴 가능성이 적다. 반면에 선출된 권력은 그 속성상 대중의 여론과 감정에 영합하기 쉽다. ‘전국민 재난 지원금’ 같은 것이 대표적 사례다.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라면 선동도 마다하지 않는다. 큰 사건이 터지면 특정인이나 단체를 희생양으로 몰아가고 수사와 처벌을 주장하고 나오는 것이 그런 예다. 신천지 사건도 그 하나다. 법원이 신천지에 무죄 선고를 한 것은 대중의 감정과 여론에 영합하고 선동까지 하는 ‘선출된 권력’의 행태에 제동을 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방역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도, 아무리 대중이 원하는 일이라도, 법적 근거, 기본권 존중, 죄형법정주의, 형벌불소급원칙 같은 헌법 규정에 따라 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준 것이다. 그럼으로써 대중의 감정과 여론에 휘둘리기 쉬운 민주주의의 내재적 흠결을 보완하는 게 사법부의 존재 의미이고 역할임을 보여준 것이다. 사법부가 이런 역할을 다하려면 권력 눈치 보지 않고 중립성과 독립성을 지키는 게 전제돼야 함은 물론이다. 2021-01-18 19: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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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낭기의 관점] 시민 저항 불러일으킨 정부의 '코로나 방역 독재' ↑ [사진=연합뉴스] 우리 국민들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정부의 코로나 방역에 협조해 왔다.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 거리 두기는 물론이고 공공기관이나 음식점, 커피 매장 등에서 실시하는 전화번호 적기, 발열 체크에도 별다른 불만 없이 응했다. 확진자나 감염 의심자들이 언제, 어디에 갔었는지를 파악하는 정부 조치에도 ‘사생활 침해’라고 반발하는 사람은 없었다. 방역을 위해서는 개인의 인권이나 사생활의 비밀은 침해될 수 있다고 여겼다. 외국 일부 언론들은 한국에서 코로나 방역이 성공한 이유 중 하나로 ‘순응적인 유교 문화’를 꼽을 정도였다. 한국인들이 유교 문화에 익숙해 정부 통제에 잘 따르고 그 덕분에 코로나 확산을 효율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미국과 유럽 일부 국가에서 코로나 방역이라는 전체의 이익을 앞세워 개인 기본권 침해를 당연시하는 '코로나 전체주의', 방역 조치로 피해를 보는 사람들과의 사전 협의나 이들에 대한 설득 과정 없이 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해 밀어붙이는 '코로나 독재'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자영업자들, "언제까지 일방적 희생 강요당하나"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도 최근 정부의 '코로나 전체주의'와 '코로나 독재'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헬스장, 카페,노래방,음식점 업주들이 국회 앞에서 정부 규탄 시위를 벌이는 등 집단행동에 나서고 있다. 실내체육시설 업주들은 지난 5일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사 앞에서 "그동안 자발적인 휴업으로 방역에 기여해왔는데 3차 대유행이 시작되자 정부는 또다시 실내체육시설에 집합금지 행정명령을 내렸다"며 "유독 실내체육시설에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고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연장 조치에 대한 항의로 300여곳의 센터 문을 여는 ‘오픈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카페 업주 온라인 커뮤니티인 ‘전국카페사장연합회’ 회원들도 반발하고 있다. 전국카페사장연합회는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에 일관성·형평성이 없다"며 "카페에서도 홀 영업이 허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코인노래연습장협회는 "코인노래연습장 업주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장기간의 강제 집합금지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협회는 "방역 협조로 남은 것은 감당할 수 없는 빚더미다. 피해 규모에 상응하는 실질적인 손실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협회는 "지난 1년간 ‘방역 협조’ 즉, ‘강제적 희생’을 이유로 행정명령이 내려올 때마다 우리는 어떤 항변도 하지 못하고 가족 생계의 기반이 되었던 영업장의 문을 닫아야 했다"고 호소했다. 광주광역시의 유흥업소 700여곳은 지난 5일 오후부터 간판을 켜고 가게 문을 열었다. 사단법인 한국유흥음식업중앙회 광주시지부는 오는 17일까지 이같은 단체 행동을 이어갈 방침이라고 한다. 자영업자들은 법적 소송에도 나서고 있다. 호프집·PC방 등 자영업자들은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한 영업제한 조치에 손실보상 규정이 없다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 했다. 이들은 "적절한 손실 보상책 없이 제한 사항만 강제하는 등 기본권을 침해받았다"고 했다. 자영업자들은 국가에 손해 배상 청구 소송도 낼 준비를 하고 있다. 자영업자들이 저항하고 반발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그동안 정부 통제 때문에 영업을 못해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다는 것과 정부의 통제 조치에 형평성이 없다는 점이다. 코로나 방역을 위해 생계를 위협받으며 협조했는데도 실질적 손해 보상이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같은 실내 스포츠 업종인데도 태권도장은 영업이 허용되고 헬스장은 금지되는 식으로 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주장한다. 자영업자들의 반발은 코로나 방역을 앞세운 정부의 일방적 강행 조치에 더 이상 순응만 할 수는 없다는 선언이나 같다.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는 선언이다. 이들의 움직임에는 보다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문제 제기가 담겨 있다. 정부가 공동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기본권을 어느 정도까지 침해할 수 있는지, 개인은 이런 정부 조치를 어디까지 수용해야 하는지 하는 것이다. 정부, 너무 손쉽게 개인 기본권 침해 정책에 의존 개인 기본권 제한에 관한 원칙은 헌법 제37조②항에 나와 있다.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ㆍ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이 조항의 의미는 두 가지다. 하나는 공익을 위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제한하는 경우에도 그 ‘본질적인 내용’은 침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부가 코로나 방역을 위해 자영업의 영업 활동을 금지하는 것은 코로나 확산 방지라는 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영업 활동 금지가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는 것이냐이다. 자영업자들 입장에서 보면 영업 금지는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된다. 기본권의 과도한 침해는 그 본질적 내용의 침해로 이어질 소지가 크다. 영업 자체를 금지하는 것은 생존을 위협하는 과도한 침해이고 따라서 영업 활동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런 문제점을 해소하는 방식의 하나는 영업 금지로 인한 손실을 정부가 적절히 보상해 주는 것이다. 정부는 자영업자에게 코로나 지원금을 주고 있다. 그러나 그 액수와 횟수로 볼 때 현재의 코로나 지원금으로 자영업자들의 영업 금지에 따른 손실이 적절히 보상될지는 의문이다. 영업 활동 금지라는 희생을 가능한 한 최대한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지원책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그동안 코로나 방역을 앞세워 너무 손쉽게 국민 기본권을 제한한 측면도 있었다. 작년 가을 코로나 확진자에게 중등 교원 임용 시험 응시를 금지한 게 대표적 사례다. 확진자는 자기가 원해서 감염된 게 아니다. 감염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말이다. 또한 1년에 한번 치르는 시험에 응시를 못하게 하는 것은 당사자들에게는 치명적인 손해다. 정부가 특별 대책을 세워 확진자도 시험을 볼 수 있게 할 수 있었고 그래야 했다. 법무부는 작년 12월 29일 코로나 확진자에게 변호사 시험 응시를 불허한다고 공고했다. 변호사 시험 수험생들은 헌법재판소에 기본권 침해라며 법무부 공고의 효력을 정지시켜 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4일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확진자도 시험을 보게 하라고 결정했다. 헌법재판소는 “확진이 되더라도 무증상이거나 증상이 경미할 수 있고, 자가격리대상자의 경우에는 단지 감염의 위험이 있을 뿐”이라며 “감염위험이 차단된 격리된 장소에서 시험이 치르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법무부의 공고에 따라 응시 기회를 잃게 될 경우 직업선택의 자유에 대한 과도한 제한이 될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헌법재판소, "과도한 기본권 제한은 안 돼" 헌재 결정의 이유 중 눈여겨 볼 대목은 두 가지다. ‘감염 위험이 차단된 격리된 장소’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다는 것과 ‘과도한 제한’이 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확진자라도 시험을 보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무조건 응시 불가’라는 손쉬운 길을 택한 게 잘못이고, 이처럼 시험을 아예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 사회도 아무리 전체의 이익, 공동의 이익을 위해 하는 일이라도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침해하는 정부 조치를 당연한 듯 여기는 풍토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공익을 위해 기본권을 과도하게 침해당하는 당사자의 입장과 처지도 생각할 때가 됐다. ‘코로나 전체주의’ ‘코로나 독재’를 당연시할 수록 정부는 어떤 정책 시행에 앞서 심각하게 고민하기보다 손쉬운 대책에 안주하게 될 위험이 크다. '중등교원 또는 변호사 시험 응시 금지', '태권도장은 허용-헬스장은 금지' 같은 게 손쉬운 대책의 전형이다. 손쉬운 대책이 남발되면 우리 중 누구든 그로 인한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 2021-01-07 02:3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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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낭기의 관점]공수처와 경찰에 수사권 넘기는 검찰, 기소권으로 정면 승부 해야 [사진=연합뉴스] 2021년 새해는 검찰이 국민에게 진짜로 그 ‘존재 이유’를 보여줘야 할 때다. 현 정권이 도입한 ‘검찰 개혁’ 조치들로 검찰은 새해부터 수사권을 대부분 경찰이나 공수처에 넘기고 기소권만 갖게 된다. 기소권은 검찰만이 갖고 있는 검찰의 독점적 권한이다. 검찰은 이제 수사 기관이 아닌 기소 기관으로 그 본질적 성격이 변했다. 권력형 비리 같은 거악(巨惡)을 수사하는 것은 더 이상 검찰의 본업이 아니다. 그보다는 기소권을 오용하거나 남용하지 않고 국민을 위해 올바르게 행사해 정의를 세우는 것이 검찰의 생명이자 존재 이유가 됐다. 구체적으로는 경찰과 공수처가 수사권을 오·남용하지 못하도록 기소권을 통해 견제해야 하는 새로운 역할과 책임을 맡게 됐다. 검찰, 직접 수사 건수 84% 줄고 경찰 지휘권도 없어져 검찰 기능의 변화는 혁명적이라고 할 정도다. 변화는 두 가지 사실에서 비롯된다. 하나는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이고, 또 하나는 공수처 출범이다.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일반 범죄에 대한 검찰 수사권은 대부분 경찰로 넘어갔다. 검찰이 직접 수사할 수 있는 범죄는 6대 범죄뿐이다. 부패, 경제, 공직자, 선거, 방위사업 범죄와 대형 참사다. 이들 범죄라고 다 수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공직자의 직급과 범죄 액수에 따라 수사 대상이 제한된다. 4급 이상 공직자, 3000만원 이상의 뇌물 사건, 5억원 이상의 사기·횡령·배임, 5000만원 이상의 알선수재·배임수증재·정치자금 범죄만 검찰이 수사할 수 있다. 이에 해당하지 않는 사건은 경찰이 수사한다. 공직자 범죄의 경우 4급 이상이라고 하지만, 국회의원, 장차관, 청와대 비서관, 판사와 검사, 3급 이상 공무원, 경무관 이상 경찰 간부 등 고위 공직자 범죄는 공수처에 우선적인 수사권이 있다. 따라서 검찰이 수사할 수 있는 공직자 범죄는 중앙 부처 과장급인 4급을 빼고는 거의 없는 셈이다. 6대 범죄 외에 일반인들이 일상 생활에서 겪는 소액 사기 사건, 폭행이나 상해, 강도와 절도, 살인, 강간, 부정 식품, 인터넷 음란물, 아동 학대 사건 같은 일반 범죄는 모두 경찰이 전담 수사하게 된다. 법무부는 2019년 기준으로 검사 직접 수사 사건이 총 5만여 건에서 8000여 건으로 약 84% 이상 축소될 것으로 예상했다. 수사권만 경찰에 넘긴 게 아니다. 검찰이 경찰 수사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도 없어졌다. 이제 경찰은 검찰의 지휘·감독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수사하게 됐다. 또한 경찰은 1차적인 수사 종결권도 갖는다. 전에는 모든 사건에 대해 범죄 혐의가 인정되는지 여부를 검찰이 판단했다. 혐의가 인정되면 기소하고 인정되지 않으면 불기소했다. 기소 또는 불기소 결정이 나면 그 사건 수사는 종결된다. 이런 수사 종결권을 검찰이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새해부터는 경찰이 혐의 인정 여부를 1차적으로 판단한 뒤 무혐의라고 판단하는 사건은 자체적으로 수사를 종결할 수 있게 됐다. 이처럼 검찰 수사권은 대폭 축소되고 경찰 수사권은 크게 늘어났다. 그럼 검찰은 무슨 일을 하나? 기소와 그에 따른 공소유지다. 기소란 유죄로 인정되는 사건을 재판에 넘기는 것을 말한다. 공소 유지란 재판에서 피고인이 유죄임을 입증하는 것을 말한다. 이제 검찰은 경찰이 수사해서 보낸 사건을 재검토해 기소할지 아닐지를 결정하고, 기소한 뒤에는 유죄임을 입증하는 일을 주로 하게 된다. 기소와 공소 유지가 검찰 업무의 대부분이자 본질이 된다. 그만큼 검찰이 제 기능을 다하려면 기소와 공소 유지에 과거보다 더욱 더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기소와 공소 유지의 핵심은 죄를 지은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게 하고,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은 억울함을 벗게 해주는 것이다. 죄를 지은 것이 분명한데도 검찰이 판단 잘못으로 기소를 하지 않거나 재판에서 유죄 입증을 하지 못해 법망을 빠져나가게 된다면 정의는 설 수 없다. 반대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데도 검찰이 오판으로 기소를 하면 당사자는 재판을 받는 동안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설사 무죄 판결을 받는다고 해도 이미 겪은 고통을 씻을 수는 없다. 이 또한 정의가 아니다. 검찰이 기소를 잘못한 사례 중 하나가 여덟 살 여아를 납치해 성폭행한 조두순 사건이다. 조두순은 징역 12년을 선고받아 복역하고 2020년 12월12일 출소했다. 조두순은 이보다 더 높은 형을 선고받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12년형만 받게 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지만 검찰이 기소할 때 법 적용을 잘못한 탓도 컸다. 기소권 적정한 행사로 국민 지지 받는 게 살 길 조두순 사건 발생 5개월 전인 2018년 7월 13세 미만 미성년자에게 강간 상해를 저지른 사람을 최대 무기징역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성폭력처벌법이 개정됐다. 그런데 검찰은 조두순을 성폭력처벌법이 아닌 형법상 강간상해 혐의를 적용해 기소했다. 형법상 강간상해의 법정형은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인 반면 성폭력처벌법상 13세 미만 미성년자에 대한 강간상해는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으로 하한선이 더 높다. 조두순 사건 피해자는 사건 당시 12세 8개월이었다. 이에 대해 검찰은 2009년 12월 열린 국회 국정감사에서 “성폭력특별법이 개정되기 전에는 13세 미만 미성년자에 대한 강간상해 법정형에 무기징역이 빠져 있어 오히려 형법을 적용해야 더 무겁게 처벌됐다”며 “이전 관례에 따라 처리하다보니 착오가 있었다”고 해명했다. 성폭력특별법이 개정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관례대로 형법을 적용했다는 것이다. 만약 검찰이 성폭력특별법을 적용해 기소했더라면 조두순의 형량은 더 높아졌을 가능성이 크다. 검찰이 기소를 잘못해 억울하게 고통을 당한 사례도 있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당시 실종자 수색에 나섰던 잠수사 공모씨 사례다. 공씨는 함께 수색에 참여했던 잠수사 이모씨가 사망한 사건에서 민간 잠수사 감독관으로서 안전사고 예방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혐의 (업무상 과실치사)로 2014년 8월 기소됐다. 공씨는 2년 5개월에 걸친 재판 끝에 2017년 1월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검찰은 “이씨의 사망 당시 공씨가 현장 관리 감독 책임자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공씨를 민간 잠수사 감독관으로 인정할 근거 서류가 없고, 법적인 관리·감독 의무는 구호활동을 지휘하는 구조본부의 장에게 있다”고 무죄 선고 이유를 밝혔다. 대검찰청이 2017년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16년 무죄가 확정된 사건 7832건 중 검찰이 ‘수사 미진’ ‘법리 오해’ ‘증거 판단 잘못’ 등 검사 잘못으로 무죄가 선고됐다고 판단한 사건은 1295건이다. 전체의 16.5%다. 2012~2016년까지 5년 동안 검찰 스스로 수사가 부족하거나, 법리를 오해해 잘못 기소했다고 판단한 사건은 매년 1000여 건에 달한다. 무죄를 받은 사람들이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겪었을 고통은 당해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검찰이 기소권을 더욱 철저히 행사해야 할 분야가 또 하나 있다. 공수처 수사다. 공수처는 고위 공직자 범죄를 수사한 뒤 사건을 검찰에 넘긴다. 검찰은 검토를 거쳐 기소 여부를 결정한다. 문제는 공수처가 고위 공직자 범죄 수사에 대해 검찰보다 우선권을 갖는다는 점이다. 공수처는 검찰이 진행 중인 고위 공직자 범죄 수사를 공수처로 넘기라고 요구할 수 있다. 검찰은 공수처 요구에 따라야 한다. 검찰은 고위 공직자 범죄를 알게 된 경우 공수처에 그 사실을 통보해야 한다. 이때 공수처는 검찰에 수사에서 손 떼고 사건을 공수처로 넘기라고 요구할 수 있다. 검찰은 이 요구도 따라야 한다. 더불어민주당은 공수처장 후보 추천 과정에서 야당이 갖고 있던 거부권을 폐지했다. 이에 따라 여당 입맛에 맞는 사람을 공수처장으로 임명할 수 있게 됐다. 공수처 검사나 수사관도 정권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채워질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벌써부터 공수처가 정치적 중립성을 잃고 현 정권 비리를 적당히 덮어버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검찰이 현 정권 실세들의 비리를 수사하게 될 경우 공수처가 넘겨받아 뭉갤 수 있다는 것이다. 탈원전과 관련한 산업자원부 공무원들의 문서 폐기 사건, 울산시장 선거 비리 사건 등이 그런 예다. 공수처 '정권 편향' 막을 장치도 검찰 기소권뿐 공수처가 사건을 뭉개려 할 경우 그걸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장치가 검찰의 기소권이다. 공수처가 수사한 사건을 검찰에 넘기면 검찰이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단계에서 공수처의 ‘뭉개기’를 통제할 수 있다. 공수처가 현 정권 비리를 유죄 의혹이 큰데도 적당히 수사해 검찰에 송치할 경우 검찰이 보강 수사해 기소할 수 있는 것이다. 검찰이 이런 통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공수처의 있을지 모를 전횡을 막을 수 없다. 그런 검찰은 있으나마나다. 검찰과 경찰 간의 수사권 조정과 공수처 신설은 현 정권이 ‘검찰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추진했다. 검찰 수사권을 경찰과 공수처에 넘겨 검찰 권력을 분산한 것이 핵심이다. 경찰에 대한 검찰의 수사 지휘권을 없애고 경찰에 1차적 수사 종결권을 준 것에 대해선 비판도 많다. 검찰의 경찰에 대한 사법적 통제를 약화시켜 경찰 권력의 오남용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공수처 신설에 대해서도 ‘정권 옹호 수사 기관’이 될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더 근본적으로 ‘검찰 개혁’이 그 본래의 뜻과 달리 정치 구호와 정쟁거리로 전락한 문제도 있다. 현 정권이 윤석열 총장을 찍어내려 하면서 그 명분으로 검찰 개혁을 앞세운 탓이 크다. 이 때문에 ‘윤석열 지지=검찰 개혁 반대’, ‘윤석열 반대=검찰 개혁 지지’ 라는 식으로 진영 논리에 따라 검찰 개혁을 보는 눈이 양극화됐다. 정치 논리로 검찰 개혁을 밀어붙이다 보니 검경 수사권 조정과 공수처 법에 많은 문제점이 내포되기도 했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검경 수사권 조정과 공수처 설치를 핵심으로 하는 검찰 개혁 법들이 새해 1월 1일부터 시행된다. 경찰과 공수처가 제도 개혁의 취지에 맞게 그 권한을 잘 행사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기소권을 독점한 검찰의 역할과 책임이 크다. 기소권을 적절하고 올바르게 사용해 기소권 독점의 부작용과 폐해를 최대한 막아야 한다. 이를 위해 기소권에 대한 시민적 통제를 강화하는 방법도 찾아야 한다. 나아가 경찰과 공수처를 견제하고 통제해 사법 정의가 바로 서도록 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새로운 개혁 시대 검찰의 존재 이유이고 목적이다. 검찰은 이제 과거와는 전혀 다른 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 2020-12-30 01:5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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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 기획]'윤석열 운명' 잇따라 결정한 판사들…판사란 무엇인가 윤석열 검찰총장이 1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으로 출근하고 있다. 20.12.11 [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행정법원 조미연 판사 이어 홍순욱 판사가 결정 윤석열 검찰총장의 운명이 또 다시 판사 손에 의해 결정됐다. 이번에 윤 총장 운명을 결정한 사람은 서울행정법원 행정12부 재판장 홍순욱 부장판사다. 홍 판사는 24일 밤 윤 총장에 대한 ‘정직 2개월’ 징계 효력을 중단시킨다고 결정했다. 윤 총장은 다음날일 25일 대검찰청에 출근했다. 앞서 지난 2일 서울행정법원 행정4부 재판장 조미연 부장판사가 윤 총장에 대해 추미애 장관이 내린 총장 직무정지 명령의 효력을 중단시키는 결정을 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윤 총장은 곧바로 총장직에 복귀했었다. 조미연 판사에 의해 기사회생했던 윤 총장이 이번에는 홍순욱 판사에 의해 또 다시 기사회생한 것이다. 홍순욱 부장판사는 법무부 징계위원회가 제시한 징계 사유 4가지에 대해 "문제가 없어 보인다”거나 “문제가 있어 보이지만 추가 심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4가지 중 일부는 징계 사유가 될 수 없고, 일부는 징계 사유가 될 수는 있지만 사실 관계를 좀 더 따져 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또 윤 총장측이 낸 징계위원 기피 신청을 위원 과반수인 4명이 아닌 3명이 참여해 의결한 것은 절차 위반이라고 했다. 이같은 징계 사유와 절차 문제를 들어 "앞으로 윤 총장이 정직 2개월 징계 처분 취소를 청구한 본안 소송에서 승소할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즉, 윤 총장이 징계처분 취소 청구 소송에서 승소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직 2개월 효력을 그대로 유지하면 나중에 윤 총장이 승소하더라도 회복할 수 없는 손해를 입게 된다고 했다. 따라서 취소 소송이 끝날 때까지 정직2개월의 효력을 중단시키는 것이 합당하다고 결론 내렸다. 윤 총장 임기는 내년 7월까지다. 징계처분 취소 소송이 그때까지 끝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따라서 윤 총장은 임기만료 때까지 총장 직을 수행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번 결정은 윤 총장에 대한 징계가 부당함을 법원이 사실상 인정한 것이나 같다. 법원이 징계처분의 부당성을 인정함에 따라 윤 총장은 다시 힘을 얻고 검찰을 지휘할 수 있게 됐다. 지난 2일 조미연 부장판사의 결정을 앞두고 ‘조미연 판사는 누구인가’가 세상의 관심을 끌었다. 그의 고향부터 출신학교, 주요 재판 내용까지 언론에 보도됐다. 이번에는 홍순욱 부장판사가 여론의 관심 대상이 됐다. 이번에도 홍 판사의 신상과 재판 이력이 주목받고 있다. 언론 보도 내용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서울 출생. 장충고·고려대 법학과 졸업. 사법연수원 28기. 해군 법무관. 2002년 춘천지법에서 판사 생활 시작. 특정 판사 단체 등에서는 활동하지 않음. 법원행정처 근무 경험 없음.” 홍 판사가 2014년 신문에 쓴 칼럼 내용까지 거론되고 있다. 홍 판사는 이 칼럼에서 “현대 법관은 오로지 국민이 만든 법에 정해진 대로 권한을 행사하므로, (조선시대의) 원님재판을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현대 재판절차에서 당사자 주장의 옳고 그름은 오로지 제출된 증거에 근거하여 판단된다”고 했다. 또 “법적 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법률관계를 해석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내용의 서류 등으로 정리하여 남겨둬야 한다”고 했다. '판사도 사람'···'어떤 사람이냐'가 문제 세상 사람들이 주요 사건 재판을 맡은 재판장이 어떤 사람인지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판사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판사는 헌법과 법률과 양심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고 법에 규정돼 있다. 판사 개인의 가치관이나 정치적 성향에 좌우되지 말고, 여론이나 권력도 의식하지 말고 오로지 법과 상식에 따라 재판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판사가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모습에 불과하다. 현실의 판사는 인간으로서 갖는 한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무의식적 편견, 권력욕, 승진 욕구, 여론의 압력, 권력의 보이지 않는 압박에 영향 받을 수 있다. 자기 개인의 소신을 객관적 양심으로 착각할 수도 있고, 나아가 자기 소신을 보편적 양심인 양 포장할 수도 있다. 세상 사람들이 판사의 개인적 신상이나 성향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처럼 판사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인 이상 판사의 개인적 배경이나 주관적 특성이 재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판사의 개인적 배경 중 특히 관심을 갖는 요소 중 하나가 ‘우리법 연구회’ 출신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우리법 연구회 출신이라고 다 진보 성향인 것은 아닐 것이다 . 그러나 우리법 연구회 출신이면 일단 진보 성향일 가능성이 크고 그런 성향이 재판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기 때문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홍순욱 부장판사에 대해 ‘특정 판사 단체에서 활동하지 않음’이라는 점을 보도하는 것도 이런 관심의 표현이다. ‘판사도 사람’이라면 결국 ‘어떤 사람이냐’가 문제다. 판사가 판단력, 지혜, 품성을 갖춘 사람이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미 20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는 “법관의 품성과 성향이 법의 지배를 좌우하는 핵심적 요소”라고 말했다. 법관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법의 지배’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법관이 아집과 독선에 빠져 있는 등 품성에 결함이 있거나, 특정 정치 성향에 얽매여 있다면 그가 하는 재판이 제대로 된 재판이 되기 어렵다. 그 경우 겉으론 법에 의한 재판이지만 사실은 법관 개인의 주관에 의한 재판이 될 수 있다. 이러면 ‘법의 지배’는 이뤄질 수 없다. ‘법관 개인에 의한 지배’가 되고 만다. 법관 개인에 의한 지배는 ‘책임을 지지 않는 엘리뜨’에 의한 ‘권력의 남용’이 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한 것이다. 장관 명령도, 대통령 재가도 무력화하는 판사 직책의 엄중함 ‘법에는 입이 없다’ 또는 ’법은 사람을 통해서밖에 말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법은 제스스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해석과 적용을 통해서만 작동한다는 뜻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법을 말하는 입’은 판사다. 그만큼 판사의 이성, 통찰력, 판단력이 중요함은 물론이다. 우리는 이번 12월 한 달 동안 윤 총장 운명이 두 번이나 판사들 손에 의해 결정되는 장면을 목격하고 있다. 첫번째는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내린 총장 직무정지 명령의 효력을 정지함으로써 윤 총장을 총장직에 복귀시킨 장면이다. 두번째는 법무부 징계위원회가 의결하고 문재인 대통령이 재가한 정직 2개월 징계처분의 효력을 정지함으써 그렇게 한 장면이다. 장관의 명령도, 대통령의 재가도 무력화하고 한 나라 검찰총장의 운명을 좌우하는 판사를 보면서 사법부를 운영하는 판사 직책의 엄중함을 느끼게 된다. 판사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판사도 사람이되 이성과 통찰력과 판단력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이 무겁게 다가온다. "법관의 성품과 성향이 법치주의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되새기게 된다. 만약 윤 총장 사건을 맡은 판사들이 성품과 성향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보통 사람들의 평균적 상식이나 균형 감각과 동떨어진 판결을 내렸다면 '윤석열의 운명'으로 상징되는 법치주의는 과연 어찌 됐을까? 2020-12-21 23:5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