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낭기논설고문
ngkim@ajunews.com
- 아주경제 논설고문
- 前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본부장
- 前조선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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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낭기의 관점]이재명 대표, 범죄 혐의 못지않게 큰 문제는 '법치 훼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여러 가지 범죄 혐의를 받고 있다. 제1야당 대표가 잡다한 범죄 혐의로 수사 대상이 된 것은 우리 정당 사상 유례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대표가 받는 범죄 혐의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가 있다. 이 대표와 민주당 관계자들이 보이는 ‘법치 훼손’ 언행이다. 법치의 핵심 가치는 '법 앞에 평등'이다. 그런데 이들은 제1야당 대표는 마치 법 앞에 평등에서 예외라도 되는 듯, 아니 예외가 돼야 한다는 듯 말과 행동을 하고 있다. 이 대표가 검찰 소환 통보에 대응하는 모습부터가 그렇다. 검찰은 지난 16일 대장동 사건 등과 관련해 이 대표에게 오는 27일과 30일 출석할 것을 통보했다. 그런데 이 대표는 “주중에는 일을 해야 하니 27일이 아니라 (토요일인) 28일에 출석하겠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이어 당대표 비서실 명의로 "28일 오전 10시 30분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는 것으로 확정됐다"고 공지했다. 이에 대해 검찰은 “28일 조사라는 것은 수사팀과 협의된 바가 없다”고 말했다. 검찰 관계자는 “조사할 범위와 내용 등이 상당한 점을 고려해 두 차례 조사가 필요하다고 보고, 변호사를 통해 구체적인 출석 일정을 통보했으나 이 대표가 일방적으로 언론을 통해 28일 10시 30분이라고 출석 의사를 표했다”고 지적했다. 검찰 출석 일정 임의로 결정 무슨 일이든 양측이 협의 중일 때 ‘확정’되려면 양측이 합의에 도달해야 한다. 자기 일방적으로 확정할 수는 없다. 이건 상식이다. 그럼에도 이 대표 측은 검찰과 협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출석 일정이 확정됐다’고 공지했다. 출석 횟수도 이 대표 임의로 한 번으로 했다. 출석하는 날을 평일이 아닌 휴일로 정한 것은 더욱 특이하다. 공무원인 검찰 직원들도 토요일엔 쉰다. 이 대표가 28일 출석하면 수사 담당 검찰 직원들은 쉬지 못하고 근무해야 한다. 이 대표에게 평일이 일하는 날이듯 검찰 직원들에게도 평일이 일하는 날이다. 이 대표는 자기는 평일에 일을 한다면서 검찰 직원들에게는 평일이 아닌 휴일에도 나와 일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대통령령인 수사준칙에 관한 규정에 검사가 피의자를 소환할 때 일정 등을 피의자 측과 협의하게 돼 있다. 그러나 이 규정은 검사가 피의자 사정을 고려해서 소환 일정을 잡으라는 취지지 피의자가 일방적으로 일정을 정해도 된다는 게 아니다. 일반 국민이라면 이 대표처럼 출석 횟수와 일정을 자기 편한 대로 잡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일반인들에게는 통할 수 없는 일도 자기에게는 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게 바로 '법 앞에 평등'을 부정하는 일이다. 자기는 법 위에 존재하는 듯 남들과 다른 특별 대우을 요구하거나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대표 측이 법 앞에 평등을 부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건 이번뿐만이 아니다. 이 대표는 작년 12월 21일에 그 달 28일 검찰에 출석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성남FC 의혹 사건과 관련해서였다. 이때 이 대표 측근은 “부장검사가 아니라 성남지청장이 당대표 비서실장에게 연락해 예우를 갖춰 말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라고 했다. 동아일보가 그달 27일 보도한 내용이다. 당시 이 대표는 다른 일정을 이유로 28일 나갈 수 없다며 검찰과 소환 일정을 협의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 이 대표 측근이 ‘부장검사가 아닌 지청장이 연락하는 예우’를 갖추라고 했다는 것이다. 상대가 제1야당 대표이니 검찰 중간 간부가 연락하는 것은 무례이고 기관장인 지청장이 직접 연락해야 예우에 맞는다는 얘기다. . 지청장 아닌 부장검사가 연락하는 게 무례? 일반 국민이라면 기관장은커녕 수사 검사를 지휘하는 부장검사가 통보하는 일도 없다. 수사를 담당한 검사가 통보하지도 않는다. 검찰 일반 직원이 전화로 통보하거나 수사 담당 검사 명의로 된 출석요구서를 보낸다. 수사준칙에 관한 규정에는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이 출석요구서를 보내게 돼 있다. 이 대표에게 수사 담당 검사가 아니고 이 검사를 지휘하는 부장검사가 연락한 것만 해도 일반 국민들에 비해 예우를 갖춘 것이다. 이 대표 측은 이것도 모자라 기관장인 지청장이 직접 연락했어야 했다고 주장한다. 이 대표는 작년 9월 6일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검찰 소환 통보를 받았을 때는 서면 진술서만 보내고 출석은 하지 않았다. 안호영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이 대표의 불출석을 발표한 뒤 기자들에게 “(전날 의원총회에서) 검찰이 정치적 의도를 갖고 한 출석 요구이니 응할 필요가 없다는 취지의 말들이 많았다. 출석 요구는 터무니없는 사안”이라고 했다. 기자들이 안호영 수석대변인에게 ‘일반인들도 고발을 당하면 검찰 소환 조사를 받는데 당대표라는 이유로 서면 조사만 받으면 형평성에 맞지 않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안 수석대변인은 “서면 조사 요구에 응하면 굳이 출석할 필요가 없다”고 답했다. 수사준칙에 관한 규정에 검사는 피의자를 소환하기 전에 서면 조사로 대체할 수 있는지를 고려하도록 돼 있다. 서면 조사를 할지, 소환 조사를 할지는 검사가 판단할 일임이 명시돼 있다. 피의자가 판단하는 게 아님이 명확하다. 검찰은 이 대표에게 소환을 통보했지 서면 진술서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대표는 임의로 서면 진술서만 보내고 출석하지 않았다. 안 수석대변인은 '서면 조사 요구에 응하면 굳이 출석할 필요가 없다'고 해 피의자인 이 대표에게 서면 진술이나 출석 중 선택할 권리가 있는 듯이 주장했다. 이 모두가 이 대표는 법 위에 존재함을 자처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언행이다. 일반 국민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들이다. 이 대표가 제1야당 대표임을 감안해 소환 일정 등에 대해 얼마간 예우를 해 줄 수는 있다. 그러나 적정한 수준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 일반 국민들보다 월등히 특별한 대우를 한다면 곤란하다. 그건 법 앞에 평등이 아니라 불평등이기 때문이다. 이 대표 측이 기관장이 연락해야 한다든지, 소환 조사 대신 서면 조사로 해야 한다는 주장은 월등한 특별 대우를 요구하는 것이다. 법 위 존재인 듯 잇달아 특별 대우 요구 이 대표와 더불어민주당은 윤석열 정부가 정치 보복과 야당 탄압을 하기 때문에 검찰 수사에 협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대선이 끝난 뒤 경쟁 후보였던 사람에 대해 꼬투리를 잡아 느닷없이 수사를 시작했다면 정치 보복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대표 수사는 그런 경우가 아니다. 이 대표가 받는 혐의는 모두 재작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과 그 뒤 대선 기간 중에 터졌다. 대선 이후 갑자기 수사를 시작한 것도 아니고 대선 이전부터 수사하고 있었다. 이게 왜 정치 보복인가? 대선 경쟁 후보였으니 그냥 덮어둬야 하나? ‘야당 탄압’이라는 주장도 맞지 않다. 야당 탄압은 과거 독재정권 시절 야당 인사들이 정권을 비판하면 이를 막으려고 수사할 때 쓰던 말이다. 당시 정권은 야당 인사들 뒤를 캐서 불법 정치자금이나 뇌물 혐의, 심지어 간통 혐의를 씌워 수사했다. 지금 검찰은 더불어민주당의 정당 활동과는 전혀 관계 없는 이 대표 개인 비리를 수사하는 것이다. 그게 어떻게 야당 탄압인가? 메릭 갈런드(Merrick Garland)는 바이든 행정부의 초대 법무부 장관이다. 지난 12일 바이든 대통령이 부통령이던 시절에 기밀 문서를 유출한 사건을 수사할 특별검사로 트럼프 행정부 출신 검찰 고위직을 임명해 화제가 된 인물이다. 우리로 치면 윤석열 정부 법무부가 문재인 정부에서 검찰 고위직을 지낸 인사를 윤석열 정부 비리를 수사할 특별 검사에 임명한 격이다. 그만큼 파격적인 일이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12일자 보도에서 "메릭 갈런드 장관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 수사에 트럼프 정부 출신을 특검으로 임명한 의도는 정치적 편향성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법 앞 평등' 무너지면 법치 무너져 갈런드 장관은 2021년 3월 법무부 장관 취임 연설에서 '법 앞에 평등'을 강조했다. "우리가 성공하고 미국민의 신뢰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취급한다’는 법무부의 오랜 규범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정당과 권력, 사회적 지위, 경제적 차이 또는 인종이나 민족에 따라 다른 규칙은 없다”고 했다. 갈런드 장관의 말은 일차적으로 검찰과 경찰 등 법 집행을 담당한 공직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그러나 ‘정당과 권력,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다른 규칙은 없다’고 한 말은 돈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도 새겨들을 만하다. 누구나 법 앞에서는 평등하고, 그래서 누구한테나 똑같은 규칙이 적용돼야 함을 강조한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 헌법 제11조 ①항도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구분을 지어 다르게 대우하는 게 차별이다. 지위와 권세에 관계없이 법 앞에서는 누구나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게 '법 앞에 평등'이다. 특별 대우를 요구한다면 '법 앞에 평등 원칙'을 무시하는 일이다. 법 앞에 평등 원칙이 흔들리면 법치가 흔들리게 된다. 권력이나 돈을 가진 자는 그것으로 법을 피해 가거나 특별 대우를 받으려 할 것이다. 돈도 권력도 없는 일반 국민은 정당한 결과로서 불리한 처분을 받아도 ‘가진 게 없어 부당한 차별 대우를 받는다’며 법을 비웃을 것이다. 이래서는 법치가 바로 설 수 없다. '법 앞에 평등'을 훼손하는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 사람들의 언행이 우려스러운 것은 이 때문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본부장 ▷원주 한라대 특임 교수 2023-01-24 15:3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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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낭기의 관점]국정 개혁 시동 건 윤 대통령, 설득력과 정치력 시험대에 섰다 ‘혁명보다 어려운 게 개혁’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개혁의 길은 험난하다는 뜻이다. 개혁에는 숱한 저항과 반발이 따른다. 개혁에 성공하려면 저항과 반발을 극복할 수 있는 리더십과 정치력이 필요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그 개혁에 시동을 걸었다. 지난 15일 국정 과제 점검 회의에서 노동·연금·교육을 3대 개혁 과제로 선정하고 “개혁은 인기가 없는 일이지만 회피하지 않고 반드시 완수하겠다”고 했다. 국정 개혁을 선언한 윤 대통령은 이제부터 리더십과 정치력 검증의 시험대에 서게 됐다. 윤 대통령은 3대 개혁 중 최우선 과제로 노동 개혁을 꼽았다. ”노동 문제가 정쟁과 정치적 문제로 흘러버리면 정치도 망하고 경제도 망하게 된다. 노동 제도가 바뀌지 않으면 국제시장에서 삼류, 사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 간에도 같은 노동에 대해 같은 보상을 받는 체계를 받아들이는 문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노동 개혁의 방향으로 노사 법치주의 확립, 노동시장 이중 구조 개선, 합리적 임금 체계 확립 등을 제시했다. "노동·연금·교육 개혁, 인기 없지만 꼭 완수" 윤 대통령은 연금 개혁에 대해서도 ”연금 이야기를 꺼내면 표가 떨어진다고 해서 지난 정부 땐 이야기 자체가 나오지 않았다”며 “이번 정부에서는 역사적 책임과 소명을 피하지 않고 가겠다”고 했다. 정부는 국민연금 개혁 방향으로 ‘지금보다 더 많이 내고 더 늦게 받아’ 연금 재정을 안정화시키는 내용을 제시했다. 국민연금 가입자가 월급에서 내는 연금 보험료율을 현행 9%에서 2036년까지 15%로 올리고, 연금을 받기 시작하는 나이는 현행 62세(2033년까지 65세로 상향)에서 2048년 68세로 높이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 교육 개혁의 핵심은 학생 맞춤형 교육, 지방 맞춤형 교육으로 학생들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다. 이주호 교육부 장관은 국정 과제 점검 회의에서 학생 맞춤형 교육을 위해 “학생들이 일률적인 종이 교과서 대신 인공지능이나 디지털 교과서를 활용해 자기 수준에 맞는 내용을 찾아서 공부할 수 있게 개선하겠다”고 했다. 또 “지방 맞춤형 교육을 위해 지방 대학이 지역 발전과 혁신의 중심이 될 수 있도록 교육부 권한을 지방자치단체에 과감하게 넘기고, 대학 규제를 혁파하겠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3대 개혁에 포함시키지는 않았지만 건강보험 개혁도 중점 개혁 과제로 추진하겠다고 했다. 지난 13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지난 5년간 정부가 의료 남용과 건보 무임 승차를 방치하는 포퓰리즘 정책으로 재정을 파탄시켜 대다수 국민에게 그 부담이 전가됐다”며 “건보 개혁이 시급하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건보 개편 방향으로 건보 급여와 자격 기준 강화, 건보 낭비와 누수 방지, 의료 사각지대 지원 강화를 제시했다. 보건복지부는 ‘보험 적용 축소’가 아니라 ‘보험 적용 기준의 합리화’라고 설명했다. 윤 대통령의 노동·연금·교육·건보 개혁 추진은 문재인 정부 정책에서 생긴 부작용을 바로잡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에 ‘2020년 건보 보장률 70%’라는 목표를 내걸고 건보가 적용되지 않는 3800여 개 항목에 단계적으로 건보를 적용하는 정책을 도입했다. 투입된 예산은 30조6000억원에 달한다. 이른바 ‘문재인 케어’다. 이로 인해 건보 재정 수지가 2018년 사상 처음으로 2000억원 적자를 기록하는 등 크게 악화됐다. 2019년과 2020년에도 각각 2조8000억원, 4000억원 적자를 기록했다. 문재인 정부 정책 부작용 바로잡기 일환 문재인 정부는 국민연금 문제는 방치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8년 보건복지부는 국민연금 기금이 2042년 적자로 돌아서고 2057년 바닥날 것이라며 연금 보험료율을 인상하는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고령화와 저출산 심화로 인구 구성이 현행 연금 제도를 유지하기 힘든 구조로 바뀌어 가고 있어 연금 개혁 목소리가 커지던 때였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보험료율 인상이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며 개혁안을 채택하지 않았다. 연금 재정 고갈 우려가 커지는데도 방치한 것이다. 과거 김대중 정부가 연금을 받기 시작하는 나이를 기존 60세에서 2033년까지 65세로 늦추고, 노무현 정부가 국민연금의 소득 대체율을 60%에서 2028년까지 40%로 낮추기로 했던 것과 대비된다. 문재인 정부는 노동 문제에서는 문재인 정부 주요 지지 세력인 민노총에 끌려다니다시피 했다. 민노총이 어떤 불법을 저질러도 적극 제지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민노총은 우리 사회에 권력 집단으로 군림하며 각종 불법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좌파 정부에서 우파 정부로 바뀌면 좌파 정부 정책의 부작용을 해소하고, 우파 정부에서 좌파 정부로 바뀌면 우파 정부 정책의 부작용을 바로잡을 기회를 갖게 된다. 이게 민주주의에서 정권 교체가 가져오는 긍정적 효과다. 이런 일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면 좌우파 정책이 균형을 이뤄 나라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윤 대통령의 개혁 추진은 정권 교체의 효과를 살린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이 개혁에 성공하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우선 하나는 개혁 분야별로 정밀한 개혁 청사진을 만드는 일이다. 윤 대통령은 개혁의 당위성과 방향만 제시한 상태다. 이제부터 구체적인 개혁안을 만들어야 한다. 얼마나 현실성 있으면서 문제점을 고칠 수 있는 개혁안을 마련하느냐가 관건이다. 저항 극복할 리더십과 정치력이 관건 더 큰 문제는 개혁에 따르는 저항과 반발을 극복하는 일이다. 노조의 불법 파업에 법을 엄격히 적용하는 노사 법치주의, 보상을 연공서열 중심에서 직무와 성과 중심으로 바꾸는 임금 체계 개선, 노동 수요가 몰리는 특정 시기에 노사 합의로 주당 근무 시간을 늘릴 수 있게 하는 노동 시간 유연화 등에 대해 노조가 반발하고 저항할 것은 뻔하다. 문재인 케어를 사실상 폐기하는 건보 개혁에는 당장 더불어민주당이 반대하고 나올 것이다. 건보 적용 기준을 지금보다 좁히고 까다롭게 하면 일반 국민들도 반발할 가능성이 크다. 국민연금 역시 당장 보험료를 더 내라고 하면 국민들의 저항을 부를 수 있다. 윤 대통령이 개혁에 대한 저항과 반발을 어떻게 잘 극복하느냐는 윤 대통령의 리더십과 정치력에 달렸다. 리더십의 핵심은 설득력이다. 노동·연금·교육·건보 개혁을 왜 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개혁의 당위성을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개혁안을 마련할 때도 왜 그런 개혁안이 필요하고 중요한지 개혁안의 합리성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개혁의 당위성과 개혁안의 합리성에 대한 설득은 특히 현 정부 개혁 방향과 내용에 부정적인 사람이나 단체에 집중해야 한다. 야당과 노조는 물론이고 시민단체, 언론, 지식인이 그들이다. 적극적 반대자는 소극적 반대자나 중립파로 만들고, 중립파는 지지파로 만드는 게 핵심이다. 여기에 필요한 게 정치력이다. ‘정치력’이 무엇인지를 피부에 와닿게 설명한 사람으로 작고한 김상현(1935~2018) 전 국회의원을 들 수 있다. 김 전 의원은 6선 의원으로 여야 정당을 넘어 많은 정치인들과 폭넓은 교류 관계를 맺었다. 정계 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지위나 학력 등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과 가까이 지냈다. 그는 생전에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정치의 요체를 한마디로 하면 내 편을 많이 만드는 것이다. 그러려면 내가 싫어하거나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한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좋아하거나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만 만나는데 그래서는 결코 내 편을 늘릴 수 없다.” 내가 싫어하거나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포용해 내 편으로 만드는 능력이 바로 정치력임을 말하고 있다. 정치력 핵심은 반대자 포용 민주당은 현 정부 정책을 사사건건 반대한다. 민주당 일부 의원들은 틈만 나면 김건희 여사 ‘스토킹’에 나선다. 민노총을 비롯한 좌파 단체들은 연일 ‘윤석열 퇴진' '윤석열 탄핵'을 외치는 시위를 벌이고 여기에 일부 민주당 의원들도 가세하고 있다. 대학과 언론계에도 윤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사람들이 많다. 모두 윤 대통령이 싫어하거나 윤 대통령을 싫어할 만한 사람들이다. 윤 대통령으로서는 이들과 만나 대화하는 것 자체가 껄끄럽고 내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정치를 하려면 적극적으로 만나서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정치력를 발휘해야 한다. 최고 정치 지도자인 대통령에게는 정치력이 더욱더 요구된다. 개혁 추진 과정에서 윤 대통령에게 꼭 필요한 게 정치력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개혁이 어려운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개혁으로 손해를 볼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개혁에 저항하는데 반해 개혁으로 이익을 얻을 사람들은 기껏해야 미온적 지지를 보내기 때문이다.” 당장의 손해는 눈에 보이지만 먼 미래의 이익은 잘 보이지 않아서 그런 일이 생긴다고 했다. 개혁 추진 과정에서 미온적 지지자를 적극적 지지자로 바꾸는 일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말이다. 개혁에 성공하려면 지지 세력을 넓혀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의 충고와 지지 세력을 넓히려면 반대자를 끌어안아야 한다는 김상현 전 의원의 충고를 윤 대통령이 깊이 생각해 봤으면 한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본부장 ▷원주 한라대 특임교수 2022-12-25 13:2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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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낭기의 관점] 국정 질문 빙자한 '청담동 술자리' 의혹 제기…법적으로 따져 보니 더불어민주당 김의겸 의원이 지난 10월 26일 서울 내곡동 국가정보원 청사에서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의 국정원에 대한 국정감사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김의겸 의원이 ‘청담동 술자리’ 의혹을 제기했다가 사실 무근으로 드러나 비판을 받고 있다. 이번 사건은 국회의원이 의혹을 제기할 때 지켜야 할 최소한의 조건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대법원은 여러 번의 판결을 통해 의혹 제기가 정당화되기 위한 조건 등을 제시하고 있다. 대법원 판결을 기준으로 김 의원 의혹 제기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은 건전한 의혹 제기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도 의미가 있다. 김의겸 의원은 지난 10월 24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술자리에 있었다는 여성 첼리스트와 그의 전 남자친구의 대화 녹음 파일을 공개하며 술자리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김 의원은 그 이후에도 해당 술자리가 있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민주당 일각에서 계속 공세를 펴면서 논란이 일파만파로 번졌다. 그러던 중 이 여성 첼리스트가 지난 11월 23일 경찰 조사에서 “그 내용은 다 거짓말이다. 전 남자친구를 속이려고 거짓말을 했다”고 진술하면서 사실 무근으로 드러났다. 공직자 대상 의혹 제기 가능하나 표현 방식·내용이 문제 대법원은 공직자에 대해선 일반 개인에 대해서보다 폭넓은 의혹 제기가 가능하다고 밝히고 있다. “문제된 표현이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경우에는 표현의 자유보다 명예의 보호라는 인격권이 우선할 수 있으나, 공공적·사회적인 의미를 가진 경우에는 이와 달리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 완화되어야 한다. 특히 정부 또는 국가기관의 정책결정이나 업무수행과 관련된 사항은 항상 국민의 감시와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이러한 감시와 비판은 표현의 자유가 충분히 보장될 때 비로소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했다(대법원 2006. 10. 13. 선고 2005도3112 판결, 대법원 2011. 9. 2. 선고 2010도17237 판결 등). 일반 개인의 경우에는 표현의 자유보다 명예 보호가 우선돼야 하지만, 공직자에게는 명예 보호보다 표현의 자유가 우선해야 한다는 뜻이다. 대통령과 법무부장관은 대표적인 공직자이다. 따라서 김 의원이 그들에 관해 의혹을 제기한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대법원은 아무리 공직자에 대해서라도 의혹 제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했다. 우선 표현 방식의 문제다. 대법원은 “객관적으로 피해자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키는 사실에 관한 발언이 보도, 소문이나 제3자의 말을 인용하는 방법으로 단정적인 표현이 아닌 전문 또는 추측의 형태로 표현되었더라도, 표현 전체의 취지로 보아 사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경우에는 사실을 적시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김 의원은 의혹을 제기할 때 제보 내용을 확인하는 질문 형식을 취했다. 김 의원은 “제가 제보를 받았습니다. 7월 19일 밤인데요. 그날 술자리를 가신 기억이 있으십니까”라고 한 장관에게 물었다. 이어 “청담동에 있는 고급스러운 바였고요. 그 자리에는 그랜드피아노가 있었고 첼로가 연주됐습니다. 기억나십니까”라고 재차 물었다. 김 의원은 “제보 내용에 따르면 그 자리에 김앤장 변호사 30명가량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도 이 자리에, 청담동의 바에 합류를 했습니다. 기억나십니까”라고 물었다. 김 의원은 "국정과 관련한 중대한 제보를 받고, 국정감사에서 이를 확인하는 것은 국회의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며 "다시 그날로 되돌아간다 해도 저는 다시 같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술자리가 있었다’는 단정적 표현을 쓰지 않고 ‘술자리를 기억하느냐’고 질문을 한 것이라 문제 될 게 없다는 투다. 과연 그럴까? '단정적 표현' 쓰지 않았다고 면책될 수 없어 김 의원 발언을 대법원 판결에 근거해 분석해 보자. 그는 술자리의 구체적인 모습까지 들어가며 마치 술자리가 사실인 것처럼 전제하고 그런데도 기억나지 않느냐는 식으로 질문했다. 이쯤 되면 ‘표현 전체의 취지로 보아’ 술자리가 ‘사실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방식으로’ 이뤄졌으며 이는 곧 술자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적시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술자리가 있었다고 단정적인 표현을 쓰지는 않았다고 해도 듣는 사람들에게는 술자리가 있었음이 사실인 것 같은 인상을 줄 수 있었다. 아무리 질문 형식이라도 전체적인 취지로 보아 제기된 의혹이 사실인 것처럼 암시하면 허위 사실 적시에 해당하고 그러면 면책될 수 없다는 게 대법원 판결이다. 대법원은 의혹 제기의 내용상 한계도 제시했다. 대법원은 “국가 기관에 대한 감시·비판을 벗어나 공직자 개인에 대한 악의적이거나 심히 경솔한 공격으로서 현저히 상당성을 잃은 경우”에는 의혹 제기가 허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악의적이거나 심히 경솔한 공격’으로서 ‘현저히 상당성을 잃은' 표현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이에 대해 대법원은 “표현의 내용이나 방식, 의혹 사항의 내용이나 공익성의 정도, 공직자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하는 정도, 사실 확인을 위한 노력의 정도, 그 밖의 주위 여러 사정 등을 종합하여 판단해야 한다(대법원 2013. 6. 28. 선고 2011다40397 판결 등 참조)고 했다. 대통령과 법무부장관의 심야 술자리 여부가 공익에 관한 사안임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의혹이 허위 사실이라면 대통령과 장관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하는 정도는 매우 크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만큼 ‘사실 확인을 위한 노력’도 커야 한다.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김 의원은 의혹을 제기하기 전 과연 사실 확인 노력을 다했다고 볼 수 있을까? 청담동 술자리 의혹에서 가장 궁금하고 의문스러운 내용은 문제의 첼리스트가 실존 인물인지, 그렇다면 이름이 무엇인지, 해당 술집 이름은 무엇인지 하는 것들이다. 김 의원은 최소한 이런 내용들은 확인하고 의혹을 제기했어야 한다. 그러나 김 의원은 이에 대해 아무런 자료도 제시하지 못했다. 첼리스트 전 남친의 제보가 의혹 제기의 유일한 근거였다. ‘사실 확인을 위한 노력’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셈이다. 의혹 제기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의혹을 제기하기 전에 사실 확인 노력을 성실히 했으면 면책될 수 있다는 게 대법원의 일관된 판례이다. 김 의원은 면책될 정도로 사실 확인 노력을 성실히 했다고 보기 어렵다. 면책특권 뒤에 숨은 의혹 제기 남발, 정치 혐오 부추겨 그렇다면 김 의원의 의혹 제기는 ‘악의적이거나 심히 경솔한 공격’으로서 ‘현저히 상당성을 잃은 경우’에 해당할 소지가 크다. 결국 김 의원은 질문 형식을 빌려 의혹을 제기했다고 하지만 술자리가 사실일 것이라는 전제 아래 질문을 했다. 그 때문에 마치 술자리가 실제 있었을 것이라는 암시를 줬다. 그나마 의혹 내용이 사실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확인 노력도 하지 않았다. 이게 대법원 판단 기준에 비춰본 김 의원 문제 제기의 문제점이다. 김 의원은 국회 공식회의에서 의혹을 제기한 것이라 면책특권을 누린다. 거짓으로 드러나도 처벌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일반인이었더라면 명예훼손 처벌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의혹이 제기된다. 건전한 의혹 제기는 공직자의 국정 운영과 업무 수행의 문제점 여부를 따지고 견제하는 데 꼭 필요하다. 그러나 ‘아니면 말고’식의 무분별하고 정치 공세적인 의혹 제기는 부작용만 가져온다. 특히 국회의원이 면책특권 뒤에 숨어서 의혹 제기를 남발하는 것은 문제가 더 크다. 정치를 혐오스럽게 만들고 증오와 갈등을 부추긴다. 의혹을 제기한다면서 최소한의 검증도 거치지 않는 정치인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청담동 술자리 의혹 사건이 의혹 제기의 기본이 뭔지를 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으련만. =================================================== 정치인들의 유감스러운 '유감' 표현 남발 '유감'은 상대방 잘못 지적할 때 쓰는 말 ‘청담동 술자리’ 의혹을 제기한 더불어민주당 김의겸 의원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유감’을 표했다. 김 의원은 11월 24일 기자들에게 보낸 공지 문자에서 ‘청담동 술자리’를 봤다고 말한 당사자가 경찰에서 ‘거짓말이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며 “이 진술이 사실이라면 이 의혹을 공개적으로 처음 제기한 사람으로서 윤석열 대통령 등 관련된 분들에게 심심한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유감(遺憾)의 한자어를 뜻풀이하면 ‘남길 유(遺)’에 ‘섭섭할 감(憾)’이다. 국어사전에는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이라고 설명돼 있다. 한자사전에는 더 명확하게 ‘언짢게 여기는 마음’이라고 돼 있다. 이처럼 ‘유감’은 상대방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아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거나 언짢게 여기는 마음이란 뜻이다. 내가 상대방의 잘못된 언행으로 마음이 상했을 때 상대방을 향해 쓰는 말이지, 나의 잘못을 인정해서 죄송스러운 마음을 전할 때 쓰는 말이 아니다. 김 의원의 의혹 제기로 윤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장관은 난데없이 자정을 넘은 한밤중까지 변호사들과 술이나 마시는 사람처럼 그려졌다. 마음이 상해 ‘섭섭하고 불만스럽거나 언짢은 느낌’이 남아 있을 쪽은 윤 대통령과 한 장관 쪽이지 김 의원이 아니다. 유감을 표시한다면 윤 대통령과 한 장관이 김 의원에게 해야지, 김 의원이 윤 대통령 등에게 할 일이 아니다. 김 의원이 할 말은 ‘죄송하다’ 또는 ‘송구하다’이다. 이게 어법에도 맞고 상식에도 맞는 말이다. 정치인들의 ‘유감’ 표현 남용과 남발이야말로 유감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본부장 ▶원주 한라대 특임교수 2022-11-30 12:5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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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낭기 칼럼]이태원 사고에서 드러난 한국 경찰의 수준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서 156명이 인파에 깔려 숨졌다는 소식이 처음 전해졌을 때만 해도 ‘어쩔 수 없었던’ 사고로 여긴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사고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고 이후 드러나는 경찰 대응 모습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경찰이 좀 더 철저히 대응했더라면 사고를 막기까지는 못하더라도 사망자와 부상자를 최대한 줄였을 수는 있었을 것이라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만큼 경찰 대응은 문제투성이였다. 초기 대응은 물론이고 사고 이후 보고 체계도, 지휘관들 처신도 문제였다. 가장 큰 문제점은 경찰이 ‘도움을 요청하는 국민의 절박한 목소리’를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는 점이다. 10월 29일 밤에는 사고 발생 네 시간쯤 전부터 4분 전까지 서울경찰청 112 종합상황실에 사고 위험성을 알리는 신고 전화가 11건이나 들어왔다. 29일 오후 6시 34분 들어온 첫 신고 전화에서부터 긴박함이 절절히 배어 있었다. “해밀톤호텔 골목에 있는 이마트24 있잖아요. 그 골목이 지금 사람들 오르고 내려오고 하는데 너무 불안하거든요.압사당할 거 같아요. 이거 인파가 너무 많은데 통제 좀 해주셔야 될 것 같은데요.” 국민 절박한 목소리 귀담아듣지 않아 이 한 통의 신고에는 이태원 사고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정확한 위치, 몰리는 인파, 압사 위험성, 인파 통제 필요성. 경찰이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가 다 들어 있었다. 오후 8시 9분 두 번째 신고 전화는 더 긴박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넘어지고 다치고 난리다”라고 했다. 비슷한 신고 전화는 사고가 일어난 밤 10시 15분쯤까지 이어졌다. 총 11건 중 9건은 사고가 난 골목 인근에서 들어왔다. 비슷한 장소에서 같은 내용의 신고가 잇달아 들어온 것이다. 더구나 11건 중에는 ‘압사’라는 말을 언급한 것도 6건이나 됐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압사 위험성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은 11건 중 4건에 대해서만 현장 조치를 했다고 기록에 남겼다. 6건에 대해서는 “경찰이 주변에 배치돼 있다”고 안내하는 수준에 그쳤다. 나머지 1건에 대해서는 경비 인력 배치를 요청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찰이 실제로 현장에 출동해 적절한 조치를 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경찰이 이 긴박한 목소리를 첫 신고 때부터 흘려듣지 않고 진지하게 들었다면, 그래서 바로 현장 출동 조치를 내려 인파 통제에 나섰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이미 인파가 너무 많이 몰려 사고를 막는 것은 어려웠을지 모른다. 그러나 인명 피해를 최소화했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 경찰이 국민의 긴박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음을 보여줘 국민에게 다소나마 안도감과 경찰에 대한 신뢰감을 줬을 수도 있다. 경찰이 귀담아듣지 않은 것은 국민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소방당국의 지원 요청에도 늑장 대응을 했다. 서울소방재난본부는 119로 사고 신고가 들어온 지 3분 만인 밤 10시 18분 서울경찰청 상황실에 경찰 공동 대응을 요청했다. 그러나 서울경찰청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서울소방재난본부는 밤 10시 56분쯤 다시 한번 서울경찰청에 다수의 경찰 투입을 요청했다. 소방청도 같은 시각 경찰청 상황실에 ‘경찰 인력, 차량 통제 필요 지원’을 요청했다. 경찰청은 그제야 사태를 파악하고 밤 11시 이후 대응을 시작했다. 사고 발생 45분이 지나 이미 사상자들이 경찰이나 119구급대, 시민들에게 실려나오기 시작할 때다. 보고 체계·지휘관 처신도 문제 소방당국은 밤 10시 59분부터 다음날 0시 17분까지 1시간 18분 동안 12번이나 용산경찰서·서울경찰청·경찰청 상황실에 공동 대응을 요청했다. 총 15번이었다. 경찰이 소방당국의 거듭된 요청에도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자 계속해서 지원 요청을 한 것이다. 경찰이 소방당국의 첫 지원 요청 때부터 적극 나섰더라면 인파와 교통을 통제해 119구급대가 현장에 도착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소방대는 사고 신고 접수 직후 현장에 출동했지만 인파에 가로막혀 사고 현장 진입에 1시간 이상이나 걸렸다. 한시가 급한 순간에 길을 뚫느라 시간을 허비한 것이다. 경찰 보고 체계도 엉망이었다. 서울경찰청장은 사고 발생 1시간 21분 뒤인 밤 11시 36분에야 사고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이러 일이 벌어진 것은 일선 경찰서에서 서울경찰청 같은 지방청이나 본청인 경찰청 등 상부 보고 여부가 경찰서 상황실 근무자의 개인적 판단에 맡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떤 사건을 보고할지 기준이 모호해 근무자 판단에 따라 보고 여부가 좌우되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사고 당일 밤 10시 53분 사고 발생을 처음 보고받았다. 소방청이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에 보고해서였다. 윤 대통령은 11시 21분 신속한 구급과 치료를 지시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정작 서울경찰청장과 경찰청장은 사고 발생도 모르고 있었다. 경찰 지휘관의 처신은 어떤가. 이임재 당시 용산경찰서장은 사고 발생 5분 뒤인 밤 10시 20분 현장에 도착해 지휘를 시작했다고 경찰청이 취합한 당시 상황 보고에 나와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밤 11시 5분에 참사 현장에 도착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래서 용산경찰서가 공문서를 허위 작성한 게 아니냐는 의혹까지 일고 있다. 용산경찰서장이 11시 5분 사고 현장에 도착해서 무슨 조치를 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사고 당일 충북 제천의 사적 모임 캠핑에 참가했다가 밤 11시쯤 캠핑장에서 잠이 들었다. 이 바람에 경찰청 상황실이 11시 32분 처음 보낸 사고 발생 문자 메시지도 확인하지 못했고, 11시 52분 보고 전화도 받지 못했다. 다음날 0시 14분 세 번째 보고를 전화로 받고서야 사고 발생을 알았다. 경찰청장에게도 사생활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긴박한 순간에는 어느 때고 즉각 보고가 이뤄지게 하는 체계가 마련돼 있어야 한다. 국민 여론과 정서에 '반응'하는 책임져야 국민의힘은 철저한 원인 조사와 함께 응당한 책임 추궁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일부 의원들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과 윤희근 경찰청장 경질도 주장하고 있다. 이상민 장관은 ‘경찰을 더 배치했다고 해서 사고를 막을 수는 없었다’고 말해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더불어민주당은 윤희근 경찰청장과 이상민 장관 파면은 물론이고 윤 대통령에 대한 직접 책임도 주장한다. 윤 대통령은 지난 4일 이태원 사고 추모 위령 법회에 참석해 “국민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대통령으로서 너무나 비통하고 죄송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공개 석상에서 사실상 직접 사과를 한 것이다. 현재 경찰은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해 사고 원인과 책임 소재를 수사하고 있다. 특별 감찰팀도 만들어 경찰이 적절한 조치를 했는지를 감찰하고 있다. 수사와 감찰은 문제점 개선을 위한 대책 마련으로 이어져야 한다. 대책에는 경찰의 112 신고 대응과 상부 보고 체계, 경찰과 소방당국의 협조 체제에서부터 대규모 인파 관리 대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포함돼야 한다. 이게 앞으로 남은 가장 큰 과제다. 동시에 책임자들에 대한 책임 추궁도 분명히 해야 한다. 국가의 책임은 ‘설명적 책임’과 ‘반응적 책임’으로 나눌 수 있다. 설명적 책임은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를 국민에게 설득력 있게 설명할 책임을 말한다. 주로 사법부에 해당한다. 법원은 어떤 판결을 했을 때 왜 그렇게 판결했는지를 판결 이유로 밝혀 국민에게 설명하고 국민의 이해와 지지를 얻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국민 신뢰를 얻을 수 없다. 반응적 책임이란 국민의 여론과 정서에 적합하게 반응할 책임을 말한다. 국민 뜻에 따른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주로 행정부에 해당한다. 지금 많은 국민들은 이태원 사고에 경찰이 부적절하게 대응했다고 지탄하고 있다. 경찰이 직무를 태만히 했다고 여긴다. 이런 여론과 정서에 반응하는 게 반응적 책임을 지는 일이다. 누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 경찰청장이 가장 먼저 ‘적절하게 반응해야 할’ 당사자일 것이다. 그리고 행안부 장관도 이에 해당하는지 따져봐야 할 것이다. 2022-11-06 15: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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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낭기 칼럼] 인파 관리 중요성 보여준 이태원 참사 29일 밤 서울 이태원에서 발생한 대형 압사 참사는 우리나라에서는 유례가 없는 사고다. 30일 오후 6시 현재 153명이 숨지고 103명이 다친 것으로 집계됐다. 사망자는 더 늘어날 수도 있다. 그동안 수백명이 숨지거나 다치는 사고는 여럿 있었다. 최근 순으로 살펴보면 304명이 숨진 세월호 침몰 사고(2014년 4월 18일), 192명이 숨진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2003년 2월 18일) ,502명이 사망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1995년 6월 29일), 292명이 숨진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1993년 10월 10일)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사고는 구체적인 사고 원인이나 발생 과정은 달랐으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사람의 잘못으로 발생한 인재라는 점이다. 관계자들이 안전 수칙을 지키지 않았거나 안전 관리에 소홀해서 발생했다. 사고 원인이 비교적 명확했고, 사고 책임자를 규명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대규모 압사 사고는 처음 그러나 이태원 사고는 사고 원인이나 발생 과정이 전혀 다르다. 현재까지 추정되는 원인은 대규모 인파에 의한 압사다. 좁은 골목길에 10만명에 가까운 인파가 몰린 상태에서 누군가 쓰러지자 뒤에서 몰려오던 사람들이 이에 걸려서 도미노처럼 그 위로 쓰러졌다. 쓰러진 사람들은 인파에 깔려 심 정지로 숨졌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사고 유발자가 누구라고 할 수가 없다. 일종의 자연 재해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전형적인 인재였던 과거의 대형 사고들과 다르다. 대규모 압사 사고는 외국에서는 여러 번 있었다. 인파가 몰리는 각종 종교 행사에서 발생한 경우가 많았다. 1990년 7월 이슬람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 메카 인근에서 성지 순례객 1426명이 압사한 사고가 대표적이다. 메카로 향하는 보행용 터널에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벌어졌다. 우리는 이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대규모 압사 사고는 좁은 지역에 순례객이 수만명씩 모이는 외국 먼 나라에서나 발생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그런 압사 사고가 우리에게서도 일어난 것이다. 압사 사고가 우리에게도 예외가 아님을 보여줬다. 이번에 이태원에는 핼러윈 축제를 맞아 엄청난 인파가 몰릴 것으로 진작부터 예상됐다. 코로나 사태로 3년 만에 재개된 축제였기 때문이다. 상점들마다 다양한 축제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외국 사례에서 보듯 많은 인파가 몰리면 언제든 압사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압사 사고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많은 인파가 몰린다고 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기야 하겠느냐 하는 게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니 압사 사고에 대비한 안전 지침도, 예방 지침도, 교육도 있을 수가 없었다. 인파에 의한 압사 사고 위험성 새롭게 인식해야 이태원 사고는 대규모 압사 사고 발생 위험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바꿔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수만 명 인파가 좁은 지역에 한꺼번에 몰리면 언제든 대규모 압사 사고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이런 사고를 막으려면 인파 사고에 대한 안전 불감증부터 버려야 한다. 서울에는 이태원 말고도 홍대 입구나 강남역 사거리처럼 인파가 특히 많이 몰리는 지역이 있다. 지방에도 이런 곳이 있을 것이다. 평소 인파가 몰리거나 특정 행사를 앞두고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될 때는 인파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인파가 짧은 시간에 한 지역에 너무 많이 몰리지 않는지 실시간 모니터링하고 너무 많이 몰릴 때는 인파를 통제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인파 관리 대책이 시급하다. 그러자면 정부는 이태원 사고가 발생한 원인과 과정을 과학적으로 철저히 조사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태원 사고에서 숨지거나 다친 사람은 대부분 20~30대라고 한다. 핼러윈 축제는 나이 많은 세대는 무슨 축제인지도 모르는 낯선 행사다. 그러나 젊은이에게는 그렇지 않다. 젊은이들에게는 큰 축제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외국 문화를 우리 문화처럼 즐기는 일은 갈수록 많아질 것이다. 젊은이들이 그 문화를 즐기려고 한 곳에 몰리는 일이 많아질 것이다. 이런 추세에 발 맞춰 중·고교생들에게 대규모 인파에 의한 압사 사고 위험성과 안전 수칙을 가르칠 필요도 있다. 한순간에 너무 많은 인파가 몰리면 위험할 수 있다는 것부터 가르쳐야 한다. 이런 곳에는 가능한 한 가지 말거나 너무 많은 인파가 몰리면 급히 빠져나와야 한다는 사고 방지 의식도 심어줘야 한다. 이태원 사고가 발생하자 외국 정상들도 우리 국민에게 위로의 뜻을 잇달아 밝히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성명을 내고 "서울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가족들에게 깊은 위로를 보낸다"면서 "우리는 한국인들과 함께 슬퍼하고 부상자들이 조속히 쾌유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미국은 이 비극적인 시기에 한국과 함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이 매우 고통스러운 시간을 마주한 모든 한국인과 현재 참사에 대응하는 이들과 함께한다"고 밝혔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태원에서 일어난 비극에 한국 국민과 서울 주민에게 진심 어린 애도를 보낸다"면서 "프랑스는 여러분 곁에 있겠다"고 했다. 인재 아닌 자연 재해···정략적 악용 안 돼 외국 정상들의 위로 성명은 인도주의에 입각한 인간애의 표현이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는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다. 한국은 세게 10위권 경제 대국이다. 반도체를 비롯한 전자 기술, 자동차 산업은 물론이고 축구, 영화, K-팝(POP) 등 스포츠와 문화 부문에서도 세계적 선도 국가가 된 지 오래다. 이런 나라에서 후진국형 압사 사고가 일어나 수백 명이 죽거나 다쳤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국제적 위신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이태원 사고를 정략적으로 악용하려는 시도도 경계해야 한다. 앞에서 말했듯 이번 사고는 인재라고 하기 어렵다. 자연재해에 가깝다. 따라서 누구의 책임을 묻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정부에 모든 책임을 돌리며 정치 공세의 호재로 삼으려는 시도가 나올 수 있다. 별것 아닌 조그만 실수나 실책이라도 나오면 침소봉대해서 국정 문란이니 정부 무능이니 하며 공격하고, 나아가 거짓과 조작으로 선동하려는 세력이 나올 수 있다. 정쟁으로 눈앞 이익이나 챙기려는 시도와 세력을 거부하고 심판할 수 있는 국민적 양식이 절실할 때이다. 2022-10-30 12:3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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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낭기의 관점]문재인 정권에 '공무원의 영혼'이란 무엇인가 “‘공직자는 국민과 함께 깨어 있는 존재가 되어야지, 그저 정권의 뜻에 맞추는 영혼 없는 공무원이 돼선 안 될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8월 22일 새 정부 첫 정부 부처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한 말이다. 그는 “국정농단 사태를 계기로 국민들은 새로운 공직자상을 요구하고 있다”며 공직자는 정권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감사원이 지난 13일 발표한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감사 결과를 보면 문재인 정권이야말로 공무원을 ‘정권 뜻에 맞추는 영혼 없는’ 존재로 전락시킨 게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해양수산부 소속인 이 공무원은 2020년 9월 서해에서 근무 중 실종됐다가 북한군에 발견돼 총살당하고 시신이 불태워졌다. 당시 국방부는 “자진 월북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고 발표했다. 해경은 세 차례 수사 브리핑을 했는데 브리핑이 거듭될수록 자진 월북이 확정적인 것처럼 말했다. 1차 브리핑 때는 자진 월북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하더니 2차에서는 월북한 것으로 “판단한다”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3차 때는 “정신적 공황 상태에서 현실 도피 목적으로 월북한 것으로 판단한다”고 월북 동기까지 설명했다. 당사자를 조사하지도 않고 어떻게 그 사람 속마음인 동기를 판단할 수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영혼 없는 존재' 되지 말라더니 그런데 국방부와 해경이 왜 그런 발표를 하게 됐는지가 이번 감사원 감사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감사원은 청와대 국가안보실 지시에 따라 국방부와 해경 등이 공무원 실종을 ‘자진 월북’으로 몰아갔다고 발표했다. 발표에 따르면 국방부는 처음에는 합참 측에서 북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조류 방향 등으로 볼 때 월북 가능성이 낮다는 보고를 받았다. 국정원도 월북 또는 표류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하는 등 월북 가능성을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던 중 국방부는 사건 다음 날 이 공무원이 북한군에 월북 의사를 표명했다는 첩보를 보고받았다. 국방부는 공무원이 자진 월북한 것으로 보이며 북한군에 의해 사살되고 시신도 소각된 것으로 보인다고 청와대 안보실에 보고했다. 안보실이 적극 나선 것은 이때부터다. 안보실은 이 보고를 받고는 자진 월북 내용을 기초로 종합분석 결과를 작성해 보고하고 언론에도 발표하도록 국방부에 지시했다. 또한 해경에도 자진 월북에 맞춰 수사 방향을 잡고 언론에 대응하도록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안보실은 해경에서 월북 여부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고 있고 결론이 나지 않았는데도 월북으로 판단된다는 ‘주요 쟁점·대응 요지’를 작성해 국방부 등 관계기관에 4차례 전달하며 자진 월북으로 ‘한목소리로’ 대응하도록 방침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국방부와 해경은 실제 정보 내용이 아닌 안보실 방침에 따라 지진 월북으로 결론을 정한 뒤 이 결론과 맞지 않는 정보는 분석과 검토에서 의도적으로 제외했다. 대신 ‘다른 승선원과 달리 혼자 구명조끼 착용’ ‘선박 CCTV 사각지대에서 신발 발견’ 등 안보실이 알려준 내용을 근거로 ‘자진 월북 시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는 종합분석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런 내용들은 당시 국방부나 해경이 확인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해경은 선박 구명조끼 수량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고, 국방부 자료에는 선박 CCTV에 사각지대가 있다는 내용은 없었다. 국방부 장관은 월북으로 몰기 위해 MIMS 등 군 첩보 보고서를 삭제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당시 MIMS를 운영하던 실무자가 퇴근했지만 장관 지시 이후 실무자가 다시 사무실로 나와 오전 3시쯤부터 군 첩보 보고서 60건을 삭제했다. 해경이 세 차례 수사 브리핑을 하면서 자진 월북으로 방향을 몰아간 것도 안보실 지시와 지침에 따른 것이었다. 해경은 이 과정에서 사실 확인이 안 된 내용을 월북 근거나 동기로 삼고 확인된 증거는 은폐했다. 2차 브리핑을 앞두고는 해경 수사팀이 수사가 진행된 내용이 없어 발표를 거부하고, 브리핑을 맡은 간부는 월북으로 판단된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취지의 의견을 해경에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의견은 무시되고 안보실 지시와 지침대로 발표됐다. '정권 뜻 맞추는 존재'로 전락시켜 안보실 지시에 따라 국방부와 해경 등 관계 기관이 조직적으로 ‘월북 몰이’를 해갈 때 자진 월북 결론에 맞춰 관련 자료를 작성하는 작업을 했을 사람은 국방부와 해경 등 실무팀 공무원들이다. 이 공무원들은 상부 지시에 따라 자료를 은폐도 하고 무시도 하고 삭제도 하고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증거로 삼았다. 이 공무원들이 이런 일을 하면서 스스로를 과연 문재인 대통령 말대로 ‘국민과 함께 깨어 있는 존재’라고 자부심을 가졌을까, 아니면 ‘그저 정권 뜻에 맞추는 영혼 없는 존재’라고 자괴감을 느꼈을까? 물어보나 마나다. 문재인 정권이야말로 공무원을 정권 뜻에 맞추는 영혼 없는 존재로 전락시킨 게 아니고 뭔가. 공무원 피살 사건뿐만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2019년 11월 북한 어민 2명을 강제 북송할 당시 “귀순 의사가 전혀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통일부가 지난 6월 공개한 사진을 보면 판문점 군사분계선상에서 북송되는 어민이 북한군에게 두 팔을 잡히자 엉덩이를 뒤로 최대한 빼며 끌려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이 보인다. 이들이 귀순 의사가 없었다면 왜 저리 몸부림치며 끌려가지 않으려고 했을까? 통일부는 진짜 귀순 의사가 없어 북송된 북한 주민들이 북송되는 장면도 공개했다. 이들은 안 끌려가려고 몸부림을 치는 게 아니라 순순히 자발적으로 군사분계선을 넘어갔다. 어떤 주민은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이들 어민 2명은 나포된 직후 합동 조사 과정에서 한국에 귀순하고 싶다는 의사를 자필로 적은 ‘보호 신청서’를 당국에 제출했다. 국정원은 이 문건에 ‘귀순자 확인 자료’란 제목을 붙여 청와대 국가안보실에 보고했다. 그런데 안보실은 문건 제목을 ‘선원 송환 보고서’로 바꿨다. 처음부터 귀순을 받아들이지 않고 북한에 송환하려고 그랬다고 볼 수밖에 없다. 통일부, 안기부 등 관련 공무원들이 귀순 의사가 없다고 허위서류를 작성하고 강제 북송에 가담했다면 정권 압력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영혼 없는 존재’가 돼 버린 셈이 된다. 문재인 정권이 겉으로는 정권보다 국가에 충성하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정권 뜻에 맞출 것을 강압함으로써 영혼 없는 존재로 몰아갔다는 얘기가 된다. 산업부가 2018년 4월 월성 원전 1호기 조기 폐쇄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백운규 전 산업부 장관은 월성 원전 경제성 평가 결과를 조작하도록 한국수력원자력에 지시했고 한국수력원자력은 경제성이 없는 것처럼 평가 결과를 조작했다. 이에 앞서 문 대통령은 '월성 1호기 영구 가동 중단은 언제 결정할 계획인지’라고 한마디했다. 이 한마디가 월성 1호기 즉시 가동 중단으로 이어졌고 이에 맞추려고 경제성까지 조작한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19년 11월 탈원전 과정에 대한 감사원 감사가 진행되자 산업부 공무원은 상부 지시에 따라 일요일 한밤중에 사무실로 나와 관련 자료들을 무더기 삭제했다.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에게서 유래됐다. 그는 <직업으로서의 정치>라는 책에서 관료를 ‘정치 관료’와 ‘전문 관료’로 나눴다. 정치 관료란 국민이 선출한 정치인과 정치적으로 임명된 장관 같은 정무직 공무원을 말하고, 전문 관료는 직업 공무원을 말한다. 베버는 근대 국가는 전문 관료제를 특징으로 한다면서 전문 관료는 ‘정치’를 해서는 안 되고 ‘행정’만 해야 한다고 했다. 진정한 관료는 ‘분노도 편견도 없이’ 자기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했다. 베버가 말한 정치란 ‘투쟁’ ‘당파성’ 등을 뜻한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말했다. “관료는 개인 감정을 갖지 않는다. 이상적인 관료는 영혼이 없다”고 했다. '공무원에겐 영혼 없다' 원래 뜻 되새겨야 베버가 ‘영혼 없는 관료’를 언급한 것은 관료제의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관료제의 특성은 각자에게 주어진 업무를 엄격한 규칙과 절차에 따라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공무원은 법과 규정만 따를 뿐 자기의 신념이나 소신을 내세우면 안 된다. 국민 선출로 구성된 정부가 결정한 정책은 자기 신념과 다르더라도 군말 없이 시행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정부가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 자영업자의 영업을 제한하기로 했을 때 보건복지부 공무원이 자기 신념과 맞지 않는다고 영업 제한 집행을 거부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부동산 투기를 막기 위해 대출을 규제하기로 한 정책을 담당 공무원이 자기 철학과 다르다고 해서 거부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런 사태를 막으려면 관료는 정부 정책이 자기 신념과 다르더라도 그대로 정확히 집행해야 한다. 그래야 국가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다. 베버는 그런 점에서 관료는 영혼이 없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관료는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주어진 일을 기계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대신 정책 잘못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다. 그 책임은 오로지 정치 관료들이 진다. 정치 관료가 선거를 통해 심판받는 게 바로 책임지는 것이다. 여기서 보듯 공무원의 영혼은 당파를 초월한 정치적 중립의 입장에서 ‘정치’가 아닌 ‘행정’에 전념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은 해양수산부 공무원 월북 몰이, 북한 어민 강제 북송,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사건에서 공무원을 행정이 아닌 정치 속으로 몰아넣었다. 정권 뜻에 맞춰 사실을 숨기고 왜곡하고 삭제하도록 했다. 공무원을 영혼 없는 존재가 아니라 '영혼이 가득 찬' 존재로 만들었다. 정권 뜻에 맞춰 행동하는 정치성과 당파성이라는 가짜 영혼으로 말이다. 문재인 정권에 공무원의 영혼이란 이런 것인가? 2022-10-18 17: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