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기사
-
프로펠러 사고 겪은 골퍼 잭 뉴턴 별세, 향년 72세
프로펠러 사고에도 살아난 골퍼 잭 뉴턴(호주)이 4월 15일(현지시간) 72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다. 1950년 호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한 시대(1970~1980년대)를 풍미한 골퍼였다. 프로 통산 13승을 쌓았다. 주요 우승은 PGA 투어 뷰익-굿렌치, 오스트랄라시아 PGA 투어 던힐 호주 오픈 등이다. 4대 메이저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우승 문턱에서 번번이 미끄러졌다. 1975년 디 오픈에서는 톰 왓슨(미국)에게 18홀 연장 승부 끝에 패배했다. 1타 차였다. 왓슨은 운이 좋았다. 8번 홀 철조망이 공을 살렸다. 14번 홀에서는 칩인 이글을 기록했다. 승부처였다. 반면, 고인은 운이 좋지 않았다. 3라운드부터 괴롭히던 발목 부상이 이날까지 이어졌다. 매일 진통제를 맞았지만, 역부족이었다. 1980년 마스터스에서는 세베 바예스테로스(스페인)에게 그린 재킷(마스터스 부상)을 내줬다. 4타 차 공동 2위로다. 불운은 계속됐다. 1983년 7월 24일. 승승장구하던 그가 폭풍우가 내려앉은 시드니공항에서 회전하는 비행기 프로펠러로 걸어 들어갔다. 오른팔과 눈을 잃었다. 복부에도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33세의 젊은 나이. 의사들도 생존 확률을 50 대 50이라고 봤다. 천만다행으로 의식이 돌아왔다. 긴 시간 재활했지만, 선수 생활은 중단해야 했다. 대신 잭 뉴턴 주니어 골프 파운데이션을 세우고, 라디오 골프 해설자, 신문 기자, 골프 코스 설계자 등으로 활약했다. 한쪽 팔을 잃었지만, 골프를 그만두지 않았다. 오른손 자세에서 왼손으로 스윙하는 법을 익혀서 핸디캡 12~14 사이를 유지했다. 인간 승리다.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2003년이다. 고인의 나이 53세. 수막구균성 뇌막염 진단을 받고 병원 신세를 졌다. 이후 알츠하이머병을 앓았다. 세상과 작별한 것은 72세다. 33세 사고로부터 39년 뒤다. 유가족은 성명을 통해 "합병증이 원인이었다. 고인은 두려움 없는 경쟁자이자, 상징적인 호주인이었다. 골퍼로서 험난한 길을 개척했다. 언제나 역경에 맞서 싸웠다"고 추모했다.
-
-
-
메이저에 올인하는 타이거 우즈
2021년 12월 1일(현지시간). 히어로 월드 챌린지 기자회견장. 차량 전복 사고를 겪은 타이거 우즈(미국)가 들어섰다. 기자들은 일제히 그의 몸에 시선을 고정했다. 얇아진 다리, 우람해진 팔과 몸통, 변하지 않은 미소. 우즈는 담담하게 지난 일들을 털어놨다. 사고 이전, 사고, 사고 이후. 가족의 소중함 등을 말이다. 한 기자가 물었다. '앞으로 선수 생활은 어떻게 할 것인가.' 잠시 생각에 잠긴 우즈는 "갈 길이 멀다"고 했다. 이어서는 벤 호건(미국)을 예로 들었다. "교통사고 후 메이저 대회를 우승한 호건처럼 1년에 몇 개 대회만 나갈 것"이라고 말이다. 우즈가 복귀 무대로 정한 대회는 마스터스였다. 대회 1주일 전부터 전용기를 타고 아들(찰리 우즈), 친구(저스틴 토머스)와 18홀에 파3 9홀을 돌고 집으로 돌아갔다.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장(파72)을 다시 방문한 것은 사흘 뒤인 4월 3일이다. 그때부터 대회 시작 전까지 내리 연습 라운드를 했다. "대회 시작 전 결정하겠다"는 말과 함께다. 모두의 바람대로 우즈는 사흘간의 마스터스를 소화했다. 눈물겨웠다. 퍼터와 드라이버를 지팡이로 사용하고, 다리를 절뚝였다. 동반자들과는 한참을 떨어져서 걸었다. 그린 위에서는 라인을 읽다가 얼굴이 일그러졌다. 매일 밤 차디찬 얼음물에 몸을 담갔다.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1라운드 71타, 2라운드 74타로 컷을 넘고, 3라운드와 4라운드에 78타를 적었다. 최종 순위는 47위. 낮은 순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봤기 때문이다. 우즈는 "대회에 출전할 수 있을지조차 몰랐다. 사흘을 소화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긍정적이다"고 말했다. 긍정 에너지는 우즈를 다른 메이저 대회 출전으로 이끌고 있다. 다음 달(5월) 19일 PGA 챔피언십에 대해서는 "시간이 많지 않아서 확신이 서지 않는다. 노력해볼 것"이라고 했다. 반면, 7월 150주년을 맞이하는 디 오픈 챔피언십에 대해서는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는 굉장히 좋아하는 곳"이라며 "디 오픈에 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디 오픈 출전은 확실시되고 있다. 디 오픈 10일 전 아일랜드에서 열리는 JP 맥마너스 프로암 행사에 참여하기로 돼 있다. 우즈는 2000년 이후 이 행사에 종종 모습을 비췄다. 이어 이날(4월 14일) 우즈는 6월 US 오픈 출전 신청을 마쳤다. 필 미컬슨(미국)의 출전 신청 직후다. 우즈는 메이저 대회 출전을 기틀로 삼았다. PGA 투어 82승 중 메이저 우승은 15승(마스터스 5회, PGA 챔피언십 4회, US 오픈·디 오픈 3회)이다. 메이저 대회에서 3승을 거둔다면 잭 니클라우스(미국·메이저 18승)와 메이저 최다승 동률을 이루게 된다. 4승의 경우 19승으로 니클라우스를 뛰어넘는다. 자연스럽게 어깨를 나란히 하던 샘 스니드(82승)를 제치고 PGA 투어 최다승 1위가 된다. 두 기록을 경신한다면 이 세상에서 우즈가 넘어야 할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
-
-
-
-
-
-
-
-
-
자숙하던 필 미컬슨, US 오픈 출전 신청
"PGA 투어가 탐욕스럽다." 지난 2월 사우디 인터내셔널에 출전한 필 미컬슨(미국)이 9500만 달러(1169억원)를 벌게 해준 미국프로골프(PGA) 투어를 겨냥했다. 사우디 석유 자본을 옹호하면서다. 미컬슨은 PGA 투어를 위협하는 슈퍼 골프 리그(SGL)와 언론인 살해 등 인권 문제로 뒤섞인 폭풍 속에서 이 같은 발언을 해 역풍을 맞았다. 저스틴 토머스(미국), 로리 매킬로이(북아일랜드) 등 동료 선수들이 그런 그를 비난했다. 바람은 점점 강해졌다. 미컬슨의 후원사는 후원을 잠정 중단하거나, 철회했다. 후원사로 빼곡했던 골프복이 허전해졌다. 상황이 악화되자, 미컬슨은 사과문을 올리고 자숙의 시간을 가졌다. 3차례(2004년, 2006년, 2010년) 우승했던 마스터스에도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27연속 출전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매킬로이는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프레드 리들리 오거스타 내셔널 회장은 "미컬슨은 오거스타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마스터스가 종료된 4월 12일(현지시간), 미컬슨이 골프계의 부름에 응답했다. US 오픈 출전 신청을 마친 것이다. US 오픈은 그가 커리어 그랜드 슬램(연도와 상관없이 4대 메이저 우승)을 달성하기 위한 마지막 퍼즐 조각이다. 미컬슨은 마스터스를 비롯해 PGA 챔피언십(2005년, 2021년), 디 오픈 챔피언십(2013년)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US 오픈 우승컵과는 인연이 없었다. 1988년부터 2021년까지 단 한 차례도 우승하지 못했다. 준우승만 6번(1999년, 2002년, 2004년, 2006년, 2009년, 2013년)이다. 미컬슨은 지난 2월 미국 골프다이제스트와의 인터뷰에서 "US 오픈에서 우승하면 은퇴하겠다. 커리어 그랜드슬램 말고는 증명할 것이 없다"고 말했다. 올해 US 오픈은 6월 16일부터 19일까지 나흘간 미국 매사추세츠주 브루클린의 더 컨트리클럽에서 열린다. 이 대회에 모습을 비추게 된다면 지난 1월 파머스 인슈어런스 오픈 이후 75일 만의 PGA 투어 복귀다.
-
실패한 '한국인 최초' 도전, 이제 다시 시작
"벽을 느꼈습니다." "아쉽습니다." '한국인 최초'에 도전했던 두 선수가 실패 후 뱉은 말이다. 4월 둘째 주 미국 조지아주 오거스타와 플로리다주 잭슨빌에서는 두 선수가 '한국인 최초'에 도전했다. 바로, 정찬성(35)과 임성재(24)다. 정찬성은 9일(현지시간) 잭슨빌의 비스타 베테런스 메모리얼 아레나에서 한국인 최초 UFC 챔피언을 노렸다. UFC에 진출한 첫 한국 선수는 김동현(41)이다. 2008년 5월 웰터급으로 데뷔했다. 이후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날짜로는 5000일이 훌쩍 넘는다. 그사이 김동현의 뒤를 따라 17명이 UFC에 입성했다. 긴 시간 동안 18명이 UFC 챔피언 벨트를 위해 혈투를 벌였으나 허리춤은 항상 비어 있었다. 김동현은 결국 벨트를 차보지 못한 채 2017년 UFC를 떠났다. 이후 다양한 이유로 UFC를 떠나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제 계약 중인 사람은 18명 중 단 7명. '코리안 좀비'라고 불리는 정찬성은 이들 중 벨트에 가장 가까웠고, 오랜 기간 케이지에 오른 베테랑이었다. 9년 전 타이틀 매치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상대는 알렉산더 볼카노프스키(호주). 철옹성 같은 외모에서 단단함이 느껴졌다. 5라운드 5분. 총 25분 안에 챔피언 벨트의 향방이 결정된다. 정찬성은 입장부터 케이지에 오를 때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반면 볼카노프스키는 시종일관 굳은 표정으로 정찬성을 바라봤다. '웃지 말라'는 듯 말이다. 메인 이벤트 답게 베테랑 주심(허브 딘)이 직접 케이지에 올랐다. 경기 시작. 탐색전으로 시작했다. 서로 다가가지 못했다. 그러다 틈이 발견됐다. 볼카노프스키는 놓치지 않고 주먹을 뻗었다. 5분이 지났다. 정찬성의 얼굴은 벌겋고, 볼카노프스키의 얼굴은 하얗다. 타격 성공률이 크게 차이 났다. 정찬성의 얼굴에 폈던 웃음꽃이 지기 시작했다. 2라운드도, 3라운드도 간신히 버텼다. 라운드 종료 공이 울리면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라운드 시작 버저가 울리면 천장을 한 번 바라보고,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뱉었다. '후.' 4라운드, 의사가 괜찮냐고 물어봤다. 어물쩍 넘겼다. 볼카노프스키는 어물쩍 넘기지 않았다. 주먹을 퍼부었다. 허브 딘이 다급하게 볼카노프스키의 몸통을 끌어 안았다. 4라운드 45초. 심판이 경기를 중단시켰다. 정찬성이 서 있는 상황에서다. UFC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다. 정찬성은 TKO 패배를 당한 뒤 케이지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위로하러 뛰어간 동료들도 함께다. 달려온 아내가 그를 일으켜 안아줬다. 아내의 눈에도 눈물이 흘렀다. 볼카노프스키가 의기양양하게 인터뷰를 마치자 정찬성에게 마이크가 넘어갔다.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었다. "벽을 느꼈다. 이종 격투기(MMA)를 계속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음 날(10일)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파72·7510야드)에서는 임성재가 한국인 최초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메이저 마스터스 토너먼트(총상금 1500만 달러·약 185억원) 우승에 도전했다. 나흘간 진행되는 이 대회 첫날 스포트라이트의 주인공은 임성재였다. 5언더파로 순위표 맨 위에 이름을 올리면서다. 마스터스 선두도, 프레스 빌딩 인터뷰도 한국인 최초로 기록됐다. 이제 한국인 최초 마스터스 우승이 남아 있는 상황. 둘째 날과 셋째 날 성적이 좋지 않았다. 퍼트 실수가 이어졌다. 선두에서 2위로 내려오더니 3위까지 밀려났다. 마지막 날. 스콧 셰플러(미국·9언더파 207타)와는 5타 차였다. 좁히기 쉽지 않아 보였다. 임성재가 티잉 그라운드에 올랐다. 그린에서는 공이 홀을 외면했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풀릴 때 나오는 특유의 행동이다. 아니나 다를까. 점수를 잃고 말았다. 임성재의 마지막 성적표는 버디 3개, 보기 6개로 3오버파 72타. 최종 합계 1언더파 287타 공동 8위. 대회 종료 후 임성재는 "마스터스에서 상위 10위도 좋은 성적이지만, 아쉽다. 퍼트 실수가 잦았다. 내년에도 또 나올 수 있게 됐다"고 이야기했다. 임성재는 2020년 가을(11월)에 열린 첫 마스터스에서 준우승을 기록했다. 그린 재킷(마스터스 부상) 주인공은 더스틴 존슨(미국)이다. 임성재는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이어 임성재는 "11월에 이어 4월 마스터스에서도 좋은 성적을 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컨디션이 좋으면 우승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로써 두 남자는 한국인 최초 타이틀 획득에 실패하고 말았다. 한 선수는 벽에 걸렸고, 다른 한 선수는 퍼트에 발목을 잡혔다. 관중과 패트론(마스터스 갤러리)은 두 선수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탄식했다. 그러면서도 박수를 보냈다.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다음에 다시 도전해 달라는 의미에서다. 두 선수가 아니라면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다른 누군가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정복하지 못한 '한국인 최초'가 바로 이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