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허 스님의 놀라운 파격, 봉선사의 한글 편액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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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논설고문
입력 2020-02-25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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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세조와 정희왕후의 원찰 봉선사 · 황호택(서울시립대) 이광표(서원대) 교수 공동집필


남양주 광릉(光陵)에서 멀지 않은 곳, 맑고 탁 트인 운악산 자락에 교종본찰(敎宗本刹) 봉선사(奉先寺)가 있다. 이곳은 일주문(一柱門)부터 남다르고 흥미롭다. 일주문 편액은 한자 가로쓰기가 아니라 한글 세로쓰기다. 두 줄로 쓴 ‘운악산 봉선사’의 한글 서체가 보는 이를 미소 짓게 한다.
봉선사의 지세(地勢)는 시원하게 열려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한쪽으로 드넓은 연지(蓮池)가 사람을 맞이한다. 마치 동네 어귀에 들어선 것 같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 깊숙한 곳에 위치한 대개의 여느 사찰과 달리 봉선사는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민가 마을에 자리 잡은 듯하다. 편안하고 넉넉하며 대중적이고 소탈하다.

봉선사는 대웅전 대신 '큰법당'이라 이름 짓고 편액도 한글로 만들어 걸었다. [사진=이광표]


좀 더 들어가면 수령 500여년 된 느티나무가 멋진 자태를 드러낸다. 그 느티나무를 돌아 들어가니 대웅전(大雄殿)이 나온다. 그런데 대웅전이 아니다. 흔히 보던 대웅전 한자 편액이 아니라 ‘큰법당’이라고 한글로 이름 지어 편액을 걸었다. 일주문에서 시작된 파격이 대웅전 큰법당까지 이어지는 형국이다. 큰법당 기둥에 써붙인 주련(柱聯)도 한자가 아니라 한글이다. ‘온 누리 티끌 세어서 알고/ 큰 바다물을 모두 마시고 / 허공을 재고 바람 얽어도/ 부처님 공덕 다 말 못하고’.
대한불교 조계종 봉선사는 고려 광종 때인 969년에 법인국사(法印國師)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온다. 창건 당시 사찰 이름은 운악사(雲岳寺)였다. 이후 조선 세종 때 이 절을 폐지했으나 예종 때인 1469년 중창했다.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가 광릉을 보호하고 세조를 추모하기 위해 절을 중창하고 봉선사(奉先寺)라 이름 붙인 것이다. 봉선사는 선왕 세조를 잘 받들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수령 500여년의 느티나무도 이 때 심은 것이라고 한다.
봉선사는 전국의 승려 및 신도에 대한 교학진흥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며 교종(敎宗)을 이끄는 사찰로 자리 잡아갔다. 하지만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으로 피해를 많이 입었고 그때마다 여러 차례 중창(重創)과 중수(重修)를 거듭했다. 그러다 6·25 전쟁의 와중인 1951년 봉선사의 모든 건물이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다.

봉선사 주지를 지낸 운허스님의 승탑(부도). 그는 경전의 우리말 번역과 불교 대중화에 앞장섰다. [사진=이광표]

독립운동가 주지 운허스님의 창의성 넘치는 절

그 후 사찰 중건사업이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1959년 범종각을 세웠고 1963년에 운하당(雲霞堂)을 세웠다. 1970년 주지였던 운허(耘虛. 1892~1980) 스님이 사찰의 핵심 공간인 대웅전을 중건했다.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운허 스님은 광복 이후엔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 집중하면서 불교 대중화에 열정을 쏟았다. 그런 운허 스님이었기에 불경 한글화의 취지를 살려 대웅전 대신 큰법당이라 이름 지은 것이다. 우리나라 사찰 법당 가운데 최초의 한글 편액이었다. 놀라운 파격이었다.
큰법당 글씨체는 단정하고 원만하다. 모든 이가 좋아할 만한 글씨다. 큰법당 편액은 서예가 금인석의 글씨이고. 큰법당 주련의 글씨는 석주(昔珠) 스님의 것이다. 큰법당 뒤편 조사전(祖師殿)에도 한글 주련이 붙어있다. ‘이 절을 처음 지어/ 기울면 바로잡고/ 불타서 다시 지은/ 고마우신 그 공덕’이다. 그 내용 또한 소박하고 진솔하다.

대웅전을 '큰법당' 한글표기···콘크리트 건축 역발상

봉선사 큰법당은 한글 이름 이외에 건축사 측면에서도 그 의미가 크다. 사실 봉선사 큰법당은 목조 건축물이 아니라 철근콘크리트 건축물이다. 근대 건축 재료와 구조로 전통 건축의 형태를 재현하고 공간의 의미를 전승하고자 한 것이다. 새로운 시도였다. 훗날 건축가들은 이에 주목했다. 전통 목조양식을 재현한 콘크리트 건물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높고 조형미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이에 힘입어 큰법당은 현재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근대기 문화적 가치가 높은 건축물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봉선사의 큰법당 앞에는 3층 석탑이 서있다. 여기에 1975년 운허 스님이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부처님 사리 1과를 봉안해놓았다.

보물 397호 봉선사 동종. 1469년에 제작된 것으로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범종으로 꼽힌다. [사진=이광표]


봉선사엔 운허 스님과 춘원 이광수와의 인연도 깃들어 있다. 운허 스님과 춘원은 6촌간이다. 이광수가 친일 변절자의 오명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끼던 광복 직후, 운허 스님은 잠시 봉선사에 묵을 곳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법화경을 통해 이광수를 불교의 세계로 이끌어 주었다. 이광수는 6‧25 전쟁 때 납북되었으나 이런 인연으로 1975년 봉선사에 이광수 기념비가 세워졌다. 
봉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동종(銅鍾)이다. 1469년(예종 1) 봉선사를 세울 때 함께 조성한 것이다. 보물 제397호. 높이 238㎝, 입지름 168㎝로 조선시대 범종으로는 커다란 편이다. 동종의 몸체 한복판에는 모든 죄가 소멸하고 공덕이 생겨난다는 의미를 지닌 ‘옴마니반메훔’ 6자를 양각으로 표현해 놓았다. 또한 종의 조성 내력과 참여자 등에 관한 내용을 표현했다. 이에 따르면 1469년 세조비 정희왕후가 세조의 명복을 빌기 위해 봉선사를 세울 때 함께 주조한 것으로 되어 있다. 왕실의 발원으로 만들어진 동종이라는 말이다. 이 동종은 조선 초기 대형 범종 가운데 가장 형태가 안정적이며 무늬가 정교하게 표현된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봉선사 큰법당 앞에 비로자나삼신괘불도(보물 1792호, 1735년 제작)를 걸어놓고 법회를 여는 모습 [사진=봉선사]


비로자나삼신괘불도(毘盧舍那三身掛圖)도 빠뜨릴 수 없다. 괘불은 사찰에서 특별한 법회나 의식을 거행할 때 괘도처럼 만들어 걸어두는 대형 불화를 말한다. 봉선사 괘불은 비로자나 삼신불과 권속(眷屬)들을 그렸다. 보물 제1792호로 세로 877㎝, 가로 458㎝. 화면을 보면 위쪽 가운데에 비로자나불을, 좌우로 석가모니불, 노사나불을 배치했다. 이 괘불도는 1735년(영조 11) 상궁 이씨가 숙종의 후궁인 영빈 김씨(寧嬪 金氏)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특별히 시주하고 조성한 것이다.
화면 아래 쪽엔 보살과 범천(梵天) 및 제석천(帝釋天), 10대 제자, 주악천인(奏樂天人)과 용왕, 용녀 등을 가득 그려 넣었다. 전체적으로 매우 힘차고 생동감이 넘치며 짜임새가 있다. 화면은 황색과 청색, 녹색 등으로 밝고 화사하게 처리했다. 필선은 시원하고 대담하고 능숙하다. 인물들의 움직임과 옷자락 선이 자연스럽고 사실적이다. 왕실발원 불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종이에 그린 괘불도···현대 조각가가 불상 제작

괘불은 대개 천에 그린다. 그러나 봉선사 괘불도는 이례적으로 종이에 그렸다. 세로 144.4㎝, 가로 95㎝의 종이 30장을 붙여 제작했다. 이 또한 새로운 시도가 아닐 수 없다. 봉선사는 평소 괘불을 궤(2015년 제작)에 넣어 큰법당에서 보관하고 있다.
괘불 법회는 사찰의 큰 행사다. 봉선사에선 큰 법당 바로 앞에 괘불을 걸어 놓고 법회를 거행한다. 큰법당 앞에는 돌기둥 두 쌍이 서있고 여기 커다란 철제기둥의 괘불대를 고정한다. 이 괘불대에 괘불을 걸어 놓는다.

2017년 봉선사 우물가에 조성한 석조관음보살상. 최종태 조각가의 작품이다. [사진=이광표]


봉선사의 파격과 실험은 계속된다. 봉선사 한쪽 우물가에 이르니 독특한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원로조각가 최종태가 2017년 제작한 석조 보살상이다. 최종태 특유의 편안하고 단정한 조각이다. 그런데 최종태는 가톨릭 신자이고 현대조각 전공이다. 전통 불교사찰 봉선사에서 가톨릭신자 조각가의 보살상이라니. 최종태는 법정 스님과 교유하면서 2000년 서울 길상사의 관음상을 제작했다. 길상사에서 느끼는 신선한 충격이 봉선사에서도 그대로 전해온다. 법정 스님은 1960년대 운허 스님과 함께 불경을 번역하며 그 영향을 크게 받았으니, 이 보살상은 그 인연의 절묘한 산물이 아닐 수 없다.
봉선사는 묘한 매력이 있다. 예상치 못한 파격과 실험, 조화와 융합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한자와 한글, 대웅전과 큰법당, 철근콘크리트와 전통 건축, 괘불과 종이, 불교와 가톨릭…. 그건 융합이고 창의다. 일부 계층의 종교가 아니라 모두의 불교를 지향하기 위함이다. 20세기 한국 불교의 대표 선지식(善知識) 운허 스님의 뜻이기도 했다. 낯선 것들이 한데 만나 새로운 길을 열었다. 그렇기에 봉선사는 남양주를 상징한다. 두 물줄기가 만나 한양으로 흐르는 한강물처럼 밀이다. <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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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지원-남양주시시(시장 조광한)
협찬-MDM그룹(회장 문주현)
도움말-남양주시 시립박물관 김형섭 학예사


<참고문헌>
운악산 봉선사, 경인문화사, 김희찬 외
양주 봉선사의 전각구성과 배치의 변화,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석사논문, 박주현
남양주 봉선사 비로자나삼신괘불도,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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