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인문학]28년전 일본인이 내다본 일본 무역보복 '가마우지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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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19-09-16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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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서 발견된 민물가마우지.[사진=연합뉴스]]



# 가마우지 천렵을 즐긴 일본

가마우지는 흑갈색을 띤 큰 새로 유능한 천렵(川獵)꾼이다. 해안이 주서식지이지만 호수나 큰 강 가에도 살고 있다. 뺨이 흰 민물가마우지는 몸길이가 90cm에 이를 정도로 크다. 먹잇감을 발견하면 물갈퀴 달린 발로 미끄러지듯 달려가 번개처럼 입수(入水)해 긴 부리를 쩍 벌려 물고기 머리를 입에 넣고 본다. 이렇게 잡은 물고기를 물 위로 옮겨와서 먹는다.

중국이나 동남아, 일본에선 ‘가마우지 천렵’으로 물고기를 잡는다. 일본의 경우 밤에 휘황한 등불을 켜고 강에다 배를 띄워 가마우지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놀이를 즐겼다. 이 새가 물고기를 잡으면 그것을 삼키지 못하도록 목을 묶어놓는다. 물론 숨은 쉴 수 있을 정도로 느슨하게 묶는다. 가마우지가 물고기를 물면 어부들이 그것을 빼낸다.

좀 잔인하고 얌체같이 보이는가. 하지만 여기엔 새와 인간의 묵계같은 게 있다. 사람들이 가마우지에게 미리 혹은 사후에 충분히 먹을 것을 주기에, 이 새는 자신이 잡은 물고기를 새치기 하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 개의치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 놀이를 즐긴다. 사람들이 가마우지를 묶어놓지 않아도 이 새들은 도망가지 않고, 인간이 주는 물고기를 먹으며 살아간다. 말하자면 사냥개가 가축이 된 것 같이 ‘가금(家禽)’화한 것이다. 교토에선 가마우지 천렵이 큰 관광상품이 됐다.

# 환경 고발 영화 '펠리컨 브리프'

펠리컨은 ‘사다새’라고도 불린다. 유럽과 아시아에 분포하고 있으며, 월동기엔 이집트 쪽으로 날아간다. 한국과 일본, 대만에서도 가끔 보이는 새다. 펠리컨은 몸길이가 180cm나 된다. 날개를 펴면 250cm에 이른다. 날 수 있는 새들 중에선 체중에 가장 무겁다(최대 15kg)고 말할 수 있다. 어두운 흰색 깃털에 다리는 납빛을 띠며 목주머니는 연한 주황색이다. 이 새는 강이나 호수의 습지환경에서 서식하는데, 겨울에 물이 얼면 따뜻한 곳으로 이동한다. 펠리컨은 2012년 기준으로 2만 마리 정도가 남아있으며 멸종위기종이다.

소설가 존 그리샴은 1992년 ‘펠리컨 브리프’를 발표했다. 대박을 낸 이 소설은 이듬해 영화화하는데 앨런 J 파큘라 감독의 작품으로 큰 흥행을 했다. 소설의 착안(着眼)은 펠리컨이라는 멸종위기의 새였다. 어느 기업가가 유전을 발견했는데, 원유를 운반하기 위해서는 펠리컨 서식지인 늪지대를 파괴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를 알게된 환경보호단체에서 소송을 낸다. 이를 취재하던 어느 여대생이 정관계(政官界)와 기업이 얽힌 거대한 음모를 알게 되면서 어마어마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든다. 환경문제가 지금에 비해선 그저 남의 일처럼 여겨지던 시절에 저 영화는 한국에 상당한 충격을 주며 문제의식을 키웠던 것 같다.
 

[영화 '펠리컨 브리프'의 한 장면]


# 어미 목주머니에 든 음식으로 새끼 키워

펠리컨은 소규모 무리를 지어 생활하며 날 때에도 줄을 지어서 난다. 물고기를 잡을 때도 집단이 서로 협업하는 게 인상적이다. 호수나 늪의 깊은 곳에 모여 줄을 서거나 반원으로 둘러서서 날개를 퍼덕여 물고기 몰이를 한다. 물고기를 몰아 얕은 곳에 이르면 넓은 목주머니를 이용해 한 입씩 떠서 잡는다. 작은 크기의 펠리컨들은, 이런 협업을 하지 않고 홀로 천렵을 한다. 미국의 갈색펠리컨은 공중에서 먹이를 발견하면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어 부리 아래의 목주머니를 벌려 물고리를 몰아넣어 잡기도 한다.

펠리컨의 목주머니는 늘었다 줄었다 하는 주머니로 물 속에서 그물처럼 사용한다. 물고기를 잡은 뒤에는 물을 버리고 물고기만을 삼킬 수 있다. 이 주머니는 육아(育兒)용으로도 쓰인다. 부화한 펠리컨 새끼는 어미의 입 속에 머리를 넣고 어미가 토해낸 반쯤 소화된 물고기를 먹으며 성장한다. 무려 10주 동안 이렇게 새끼를 기른다.
 

[고무로 나오키의 '한국의 비극']



# 고무로 나오키의 1991년 저서에 나온 말

최근 시사용어로 떠오른 ‘가마우지 경제’라는 말은 1991년 일본인 저널리스트 고무로 나오키(小室直樹)가 쓴 ‘한국의 비극 – 아무도 쓰지 않았던 진실’이란 책에서 처음 등장한 용어다. 그가 쓴 의미는, 한국의 수출이 늘어도 주요 부품소재는 일본에 의존하기에 대일 수입액이 늘어날 수 밖에 없다는 의미다. 가마우지가 자기가 잡은 물고기를 삼키지 못하듯, 남 좋은 일만 시킨다고 꼬집은 말인데, 한국 경제의 근본적인 취약점인 부품소재 문제를 꿰뚫고 있는 지적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이 중소기업 육성을 제대로 못하고 있기에, 향후 건전한 성장의 큰 걸림돌이 될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고무로의 이런 비판은, 한국을 비웃기 위해서 한 건 아니었다. 이 책에서 그는 1980년대 한국의 고도성장이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인플레 없는 호황’이었음을 지적한다. 이런 호황이 가능했던 곳은 딱 3개 사례 뿐인데, 히틀러 치하의 독일과, 레이건 때의 미국, 그리고 박정희 이후의 한국이다. 물론 여기엔 유전국가나 아주 작은 경제규모의 국가는 제외하고 있다. 고무로는 독일이나 미국보다도 한국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한다. 고도성장에서 인플레는 거의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지병(持病)같은 것인데, 그런 문제를 제어하고 성장을 이뤄낸 한국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낸다.

# 한국의 '인플레 없는 호황'은 기적이라 예찬한 고무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한국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것이 많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에게 익숙한 가마우지 천렵을 떠올리며 ‘가마우지 경제’라는 말을 쓴 것이다. 지난 8월25일 일본의 차기 총리 유력주자인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전 자민당 간사장은 자신의 블로그에 일본 정부의 현 정책을 비판하면서, 고무로의 ‘한국의 비극’을 지금 다시 정독할 필요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지난 8월2일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했을 때,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은 이 새를 불러왔다. “이번 위기를 가마우지 경제 체제의 고리를 끊는 기회로 삼을 것”이라고 밝힌다. 그는 “이미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공업화 정책 선언으로 많은 제조업 분야에서 일본의 절대우위를 극복했고 김대중 대통령의 소재부품 산업 육성 전략으로 부품산업 발전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평가하면서, 직면한 어려움을 소재, 부품, 장비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로 삼겠다고 밝힌 것이다.

# 대기업과 중기의 상생 '펠리컨 경제학'

일본이 한국에 대한 무역제재를 기획하면서, 고무로가 ‘아무도 쓰지 않았던 진실’이라고 언급한 책 속에 숨어있는 아킬레스건을 타격할 전략을 찾아냈을 것이다. 한국 또한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이미 인식하고 김대중 정부 때 이 방면에 방점을 찍었으나 이후 정책이 계승되지 못하고 대기업의 약진에만 눈을 판 결과 더욱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으로 남아있었던 것을 이번 일본의 기습으로 재발견한 셈이다. 고무로의 예언은 뼈 아프게 들어맞았다. '가마우지 천렵'을 즐긴 일본은, 무역에서도 그런 것이 가능하다는 본능적인 계산을 해낸 것일지 모른다.

최근 가마우지 경제와 함께 등장한 ‘펠리컨 경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구도를 표현하기 위해 정부가 찾아낸 절묘한 낱말이라고 할 수 있다. 어미새의 입 속에 있는 반쯤 소화된 물고기를 먹으며 성장하는 ‘아기 펠리컨’은 우리 중소기업의 자생력과 경쟁력을 돋울 대기업의 역할을 힘있게 돋을새긴다. 다만 이런 표현들이 실속 없는 말잔치로 그쳐 ‘위기의 심각성’을 얼버무리거나 정부의 현실적 책임을 완화하는 미사여구로만 회자(膾炙)되는 건 곤란하다.

가마우지든 펠리컨이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본과의 갈등이 빚은 일련의 문제들을 신속하면서도 바르게 해결하는 것 뿐이다. 가마우지가 펠리컨으로 변하는 기간 동안의 고통과 비용을 정확하게 들여다 보고, 가장 합리적으로 그 문제에 접근하는 정책이라야, 용어들이 진짜 생명을 얻지 않을까.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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