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보복] 한국사회 성장판 자극한 日 무역전쟁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이범종 기자
입력 2019-08-08 07:44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 韓 자립외교 시험대…소재 국산화 기반 마련

  • 성숙한 시민의식 보여준 민간주도 불매운동

[데일리동방] 가미카제(자폭 특공대) 공격에 놀란 한국사회가 징비록(懲毖錄)을 쓰고 있다.

일본은 7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 절차 간소화 국가)에서 제외하는 내용이 담긴 시행령을 공포했다. 자국 회사의 손해를 감수하며 과거사 전선(戰線)을 넓히고 보호무역주의에 돌입했다는 평가다. 이번 무역전쟁이 정치・외교・사회・문화 전반을 뒤흔드는 기해왜란(己亥倭亂)으로 불리는 이유다. 각계는 대비의 중요성을 절감하며 임진왜란을 기록한 서애 류성룡의 마음으로 이번 사태에 대응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일 임시 국무회의를 열고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진=청와대 누리집 캡처]

◆日 공격에 위기와 기회 안은 文 대통령

한국이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된 2일 문재인 대통령은 임시 국무회의를 열고 일본 정부에 경고했다. 무역 공격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고 가해자인 일본의 적반하장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안으로는 소재·부품의 대체 수입처와 재고 물량 확보, 원천기술 도입, 국산화를 위한 기술개발과 공장 신·증설, 금융지원 등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7일에는 경기 김포시 정밀제어용 감속기 전문기업 SBB테크를 방문해 간담회를 열었다. 문 대통령은 일본의 수출규제가 기술력으로 무장한 강소기업에게 오히려 도약할 기회가 될 수 있으니 일본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일본의 도발은 모욕으로 이어지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측근 에토 세이이치(衛藤晟一) 총리 보좌관은 1일 방일한 더불어민주당 김부겸·김영춘, 자유한국당 김세연, 바른미래당 김관영 의원 등에게 매춘 관광을 이유로 한국을 찾지 않았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강제징용과 ‘위안부’ 역시 문제가 없다는 태도로 한국 측을 도발했다. 일본 총리 측근이 한국을 100년 전 3・1운동 하던 식민지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북한은 동해상에 발사체를 날리고 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6일 단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를 ‘신형전술유도탄 위력시위발사’라고 7일 보도했다. 북한은 지난달 31일과 이달 2일에도 동해상에 발사체를 쏘았다. 일본은 한국이 전략물자를 북한에 유출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객관적인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의 무력 도발은 일본의 무역 규제 명분에 힘을 싣고 있다.

미국의 중재를 기대하지 못하는 상황도 자립외교의 시험대로 작용하고 있다. 미국에게 이번 무역전쟁이 기회가 될 수 있어서다. 황철성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는 7일 양재동에서 열린 ‘일본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부품・장비 수출 규제에 대한 과학기술계 대응방안’ 공동 토론회에서 미국 CPU 제조사 인텔이 D램 없는 프로세서 개발에 힘쓰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지금은 D램 탑재 제품이 훨씬 빠르지만 격차 극복은 시간문제일 수 있다는 우려다. 이번 수출 규제로 가치사슬이 잠시 흔들리겠지만 일본이 기초소재 공급을 미국 마이크론 등으로 돌리면 그만이다.

산적한 과제가 많지만 일본의 공격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소재 국산화 성공과 대기업-중소기업 상생이라는 업적을 남길 기회로 작용할 전망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6일 천안 사업장을 방문해 임직원들과 인사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제공]

◆들불같은 불매운동, 콘텐츠 힘은 여전

냄비처럼 빨리 끓고 식는다던 불매운동은 과거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민간에서 벌어지는 ‘보이콧 재팬’ 운동에 일본 제품 매장과 관광지가 비어가고 있다. 일본 지방자치단체 관계자들은 한국 저비용항공사(LCC)들을 찾아가 노선 유지와 협력을 타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매출이 급락한 일본 관광도시들은 울상이다. ‘명탐정 코난’ 관련 전시로 유명한 돗토리현은 긴급융자를 시행했다. 일부 가게가 한국인 관광객 출입을 막던 대마도 역시 한산해지면서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비아냥도 나온다.

일본산 불매 운동은 한국 내 일본 기업 매장에도 직격탄이 됐다. 서울 수도권의 무인양품과 유니클로 매장은 일본 무역보복이 시작된 지난달 초부터 발길이 끊겼다. 일본 언론도 이번엔 다르다며 한국 내 일제 불매 운동을 조명했다. 한편으로 불매 운동을 강요하는 측과 소비자의 자유를 주장하는 이들 간 설전도 벌어지고 있다.

이번 불매 운동은 성숙한 시민의식을 확인하는 계기도 됐다. 서울 중구는 6일 관광 1번지로 불리는 명동에 보이콧 재팬 깃발을 설치했다가 반대 여론에 밀려 철거했다. 민간 영역에서 펴야 할 불매운동을 정치적 계산으로 바라보고 불필요한 오해를 낳았다는 비판이 몰아쳤다. 이 상황에 명동에 올 정도로 한국을 좋아하는 일본인 관광객을 지자체가 쫓아내는 모양새가 된다는 점에서 상인들의 반발이 컸다. 중구의 움직임이 향후 일본의 여론전에 빌미를 주는 구시대・저차원적 대응이라는 지적도 이어졌다. 무엇보다 시민들은 자신들이 관 주도 불매운동을 따르는 존재로 전락해 시민적 자존심에 상처 입을 가능성이 있었다.

콘텐츠의 힘은 여전하다. 7일 모바일게임 통계 사이트 게볼루션에 따르면 랑그릿사 모바일・일곱개의 대죄・킹 오브 파이터 올스타 등 일본 IP 활용 작품 3개가 구글플레이 매출 상위 10위 안에 머물러있다. 게임은 단순한 물건과 달리 캐릭터를 오랜 시간 공들여 키워야 한다. 매력적인 원작 구현도 흥행에 한몫 했다는 평가다.

다만 상영 시간이 정해진 영화의 경우 상영이 연기되고 있다. 애니메이션 ‘도라에몽: 진구의 달 탐사기’는 당초 14일 개봉이 예정됐다가 무기한 연기됐다. 지난달 개봉한 ‘명탐정 코난: 감청의 권’은 관객 수 21만여명에 그쳤다. 지난해 ‘명탐정 코난: 제로의 집행인’의 41만여명에서 절반으로 떨어졌다. 대중음악계도 일본 가수와의 합작 발표를 연기하고 있다. 방송계에서도 일본 관련 방송 편성을 취소하고 있다. 소셜 미디어에 일본 여행 사진을 게시한 연예인들도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농구·배구·야구 등 프로스포츠계도 일본으로 떠나는 전지훈련 일정을 취소하고 나섰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가 7일 양재동에서 열린 ‘일본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부품・장비 수출 규제에 대한 과학기술계 대응방안’ 공동 토론회애서 '일본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부품·장비 수출 규제에 대한 과학기술계 대응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제공]

◆위기 때만 경각심…국가・대기업 장기간 국산화 나서야

태풍 한가운데 서 있는 재계는 동분서주하고 있다. 반도체 바탕 부품인 웨이퍼가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공장에 투입되고 있지만 3분기 이후가 불투명하다는 관측이 나왔다. 최악의 경우 산업계 전반에 생산 불능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6일 충남 아산 삼성전자 온양캠퍼스와 천안 사업장을 찾아 현장 경영에 나섰다. 고객사를 상대로 안심 메시지를 보내는 모습이다. 전날도 이 부회장은 긴급 대책 회의를 열고 “긴장은 하되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 위기를 극복하자”고 말했다. 회의에선 각 계열사와 1차 협력사의 일본산 소재・부품 재고 확보 이행 상황 등을 보고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연구개발처럼 미래 경쟁력에 영향을 줄 요인을 사전에 점검하자는 논의도 있었다.

학계에서는 기업과 정부가 잠깐의 위기만 넘기면 소재 국산화에 소극적이던 과거와 결별할 수 있는 때가 됐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7일 토론회에서 한국이 동일본 대지진 이후 국산화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자 전 세계 밸류체인(가치 사슬)이 무너졌다. 당시 국내 반도체업체와 정부가 소재 국산화 필요성을 느꼈지만 문제가 해결되자 국산화 추진이 멈췄다. 반면 일본 닛산은 해외 공장을 늘리며 생산 다변화에 나섰다.

인력난 장기화도 예상된다. 2006년 97명이던 서울대 반도체 석・박사 인력은 2016년 23명으로 줄었다. 박 교수는 국내 업체 연구개발(R&D) 인력 중 박사와 10년 이상 경력자가 10명 이상인 곳이 전체의 8%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장비 업체 박사 인력도 10명 이상이라는 곳이 32%에 그쳤다.

한국이 보호무역주의 흐름에 선제 대응하지 못한 점도 위기를 불렀다. 트럼프 정부 들어 미국이 보호무역주의로 급격히 전환하는 과정에서 반도체 국산화에 뛰어든 중국의 ‘제조2025’ 정책과 충돌해 무역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일본 역시 미국을 따라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소재 수출 규제를 시작하며 보호무역주의 동참을 선언했다.

돌파구는 최고 수준 소재 국산화와 공급처(벤더) 다변화다. 한국 대기업은 세계 최고 수준 소재・부품・장비를 사용해왔다. 1등 수준이 아닌 국산화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벤더 역시 일본 내 여러 회사가 아닌 국가별 다양화를 추진해야 한다. 여기에는 장기 지원 대상에 선정된 한국 회사 한 곳도 포함된다. 정부가 ‘국가 핵심 소재・부품・장비’ 목록을 만들고 대기업과 함께 최고수준 국산화를 위한 법제화도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박 교수는 WTO 위배 여부 확인을 전제로 “글로벌 수준으로 육성된 품목은 대기업에서 해당 품목을 일정량 이상 구입한다는 대정부 약속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과제별로 나뉜 연구 환경을 일본 같은 집단 연구로 전환하고 대학 교수의 대기업 파견도 허용해야 한다는 조언도 이어졌다.

일본에 앞선 가격경쟁력도 중요하다. 박영수 솔브레인 부사장은 “일본은 세계시장을 장악해 규모의 경제를 누리기에 저렴한 가격에 소재를 공급할 수 있다”며 “어떻게 하면 세계 최고 수준의 소재와 가격경쟁력을 만들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