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왁자지껄] 배려가 혐오된 '임산부 배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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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연 기자
입력 2019-05-1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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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10주 차인 직장인 A씨.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이 멀고도 험난하게 느껴진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직장인들이 몰려와 지하철은 그야말로 '지옥철'이 되기 때문이다. 배도 나오지 않아 보건소에서 받은 임산부 뱃지를 가방에 달았지만, 사람들로 꽉 찬 지하철에서 임산부 배려석에 앉는 것조차 쉽지 않다. 가까스로 사람들을 피해 배려석 앞으로 갔지만, 뱃지를 봤음에도 모른 척 휴대폰만 들여다 보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결국 A씨는 임반수 배려석을 포기하고 서서 가는 것을 택했다. 

#임신 중기에 접어든 직장인 B씨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지하철에 탄 뒤 좌석으로 향한다. 이때 임산부 뱃지를 본 중년 부부가 자리를 양보해주며 "임산부에게 양보를 해줘야 한다. 안 그래도 저출산인데"라고 말한다. 좌석에 앉기 힘든 퇴근길 양보를 받은 B씨는 감사 인사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사진=연합뉴스]

인구보건복지협회가 지난해 임산부 40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10명 중 9명이 '임산부 배려석 이용에 불편을 겪었다'고 응답했다. 이중 59%가 '자리를 비켜주지 않아서'라고 답했다. 이렇다 보니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임산부인데 양보를 못 받으니 출퇴근이 너무 힘들다' '임산부 뱃지를 달고 있어도 사람들이 모른 척한다' 등 고충이 담긴 글들이 올라온다.

문제는 임산부 배려석이 점점 남녀 갈등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것이다. 임산부 배려석에 대한 뉴스나 글이 올라오면 여성들은 '임산부석은 임산부를 위해 비워둬야 한다' '임산부가 배려석 쪽으로 오면 양보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남성들은 '배려는 선택이지 의무가 아니다' '배려 강요는 아니지 않나' '임신이 유세냐' 등 댓글을 통해 반박하고 있다. 물론 논란이 성별에 따라 나뉘는 것은 아니다. 양보해야 한다는 남성들이 있는 반면, 선택일 뿐이라는 여성들도 있다.

최근에는 임산부 배려석을 혐오 대상으로 만드는 사건도 있었다. 누군가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군인의 모습을 몰래 찍어 국방부에 민원을 넣었고, 이로 인해 조사를 받게 됐다며 억울함을 드러내는 글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누리꾼들은 "군인인데 그걸 민원 넣냐" "배려석을 양보해주면 고마운 거고, 아니면 그만이지! 이런 걸 민원 넣은 인간도 정상은 아니지 싶다"는 등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그런가 하면 지난해에서는 지하철 4호선 전동차 내 임산부 배려석 표시에 굵은 펜으로 크게 'X' 표시가 그려진 낙서 사진이 SNS를 통해 확산되면서 공분을 사기도 했다. 이는 배려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혐오감을 키우는 대표적인 사건이 됐다.

이렇게 논란이 끊이지 않다 보니 일부는 '배려'라는 단어가 들어가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라며 '임산부 지정석을 만들고 비워두는 것이 좋지 않느냐'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이를 두고도 역시 어떤 이들은 '임산부가 없는 상황에서 꼭 좌석을 비워둘 필요가 있나. 임산부가 오면 비켜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반대 목소리를 냈다. 

임산부 배려석은 임산부가 언제든 자리에 앉아 대중교통을 이용하라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물론 이 좌석에 앉은 사람들이 자리를 꼭 비켜줘야 한다는 법은 없다.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앉은 사람도 말 못 할 자기 나름의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임산부는 하나의 생명이 자신의 몸속에 자리 잡은 순간부터 온갖 신체적 변화를 느낀다. 소중한 생명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심한 입덧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해 기력까지 약해진다. 갈수록 무거워지는 몸은 출퇴근 시간을 더욱 힘들게 느끼도록 만든다. 저출산시대, 한 사람 한 사람이 매우 소중한 시대, 새로 태어나는 작은 생명을 위해 임산부가 왔을 때는 자리를 양보하는 매너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미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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