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의눈]​동농 김가진이 이토 히로부미를 조롱한 생일 축하시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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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19-02-13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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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농 김가진 초상화.]




1908년 동농 김가진이  생일을 맞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썼던 시 한 편은, 결정적인 친일행위로 인식되어 그의 독립유공자 서훈대상 지정과 유해송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왔다. 그러나 이 시의 '친일 혐의'는 동농이 살며 지속적으로 보여온 애국적인 충정의 맥락에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당시 이토에 대한 조선 국민들의 고조된 적개심과도 유리되어 있어 의문시된 바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시는 친일시가 아니라, 이토통감을 조롱하며 그의 양심을 찌르려는 의도를 가진 시다. 이 시가 실린 잡지가 당시 급조된 친일 유림단체의 매체였다는 점과 시의 외견상 이토에 대한 칭송을 담고 있다는 점을, 성급하게 파악하고 피상적으로 이해한 결과, 후세 사람들의 심각한 오독(誤讀)을 빚어낸 것으로 보인다. 

이 시는 17년전 이토 히로부미가 동농 김가진에게 건넸던 시에 대한 답가의 형식으로 쓰인 것이다.(사실 이토의 시에 대한 답시는 1889년 그날 즉석에서 이미 했다. 17년후에 그의 생일을 핑계로 다시 쓴 것은, 그 시를 상기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17년전 조선과 일본의 평화를 시로 읊던 그에게, 그때의 구절들을 꺼낸다. 통감이 되어 조선에 대한 온갖 비행(非行)을 행사한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준렬하게 따지고 있다. 역사적 맥락들과 시 속의 암시와 은유들을 읽어내면서, 그 시가 담은 분노와 진실을 찾아가보자.


 

동농 김가진 [사진=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 동농 김가진은 누구인가

1846년 탄생 1922년 타계. 이 땅 역사상 가장 혼란스런 76년이었을지 모른다. 500년을 지속한 한 왕조가 무너지고 이웃국가의 침탈을 당하는 ‘국치(國恥)’의 소용돌이와 함께 몸부림치는 생을 살았던 동농 김가진은 ‘전환기의 인물’이다. 양반가의 서얼로 태어나 조선 신분제도의 질곡을 뚫고 대신의 반열에 올랐고, 열강의 포화에 우왕좌왕했던 조선황실의 혼돈 속에서 국가를 지키기 위해 실리외교와 자강(自强)의 개혁을 모색했던 사람. 그러나 무너져가는 나라의 조정에서 거센 외풍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고종황제마저 암살되는 지경에 이르자 조선민족 전체의 굳센 독립 열망을 읽어낸 지식인 리더로서, 대신(大臣)의 지위로는 유일하게 중국으로 망명해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로 활동하다 임정의 애도 속에 죽음을 맞는다. 그가 임정에서 독립운동에 기여한 부분은 의심할 나위없는 빛나는 행적이지만, 조선 말기의 관료로서 역사와 민족에 떳떳하지 못한 점이 있지 않느냐는 눈초리 또한 지금껏 엄연히 존재해온 게 사실이다. 그 눈초리는 타당하며 적절한가.
 

[일제통감 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에게 생일 축하시를 썼다고?

1908년 5월 이토 히로부미의 67회 생일에 그는 축시를 썼다. 동농 김가진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온 대목이다.

동농은 당대 손꼽히는 시인이자 서예가였다. 16세 때 경전과 역사, 문장과 시문에서 이미 천재 소리를 들었던 사람이다. 서얼로 벼슬길이 막혔지만 그는 ‘개항의 시대’ 흐름을 읽고 일본어와 중국어, 영어를 익혔다. 그는 외교관으로 관직을 시작한다. 인천항 개항과 통관 실무 관직을 맡으면서 국제적 감각을 익히기 시작했고, 청나라 톈진 주재 외교관과 주일공사관의 실무 외교관과 특명 전권공사를 역임하면서 당시 외교의 핵심으로 일했다.

그는 유능한 외교관이기도 했지만, 국가 공복(公僕)의 정신에 투철한 애국자였다. 위태로운 지경에 있는 대한제국을 지키는데 자신의 역량을 집중했다. 그의 외교는 발빠른 개화(開化)로 국가가 강해지는 것을 목표로 했다. 1885년 외국과 통신을 연결하는 전선 가설, 1895년 우체국 개설, 1886년 마장리와 청파에 외국가축 수입 사육장 설치, 1899년 양잠회사 사장에 취임해 양잠기술자 육성. 동농은 이런 구체적인 개혁 사업으로 고종황제의 깊은 신임을 얻었다. 외교가에서 명성을 얻은 그는, 황제의 부름을 받아 공조참의와 승정원 동부승지를 시작으로 농상공부 대신(1895년)까지 오른다.

# 43세 외교관 동농과 48세 이토 히로부미, 함께 시를 읊다

동농 나이 43세. 주일공사(1887~1891)로 있던 1889년 봄 일본 자작(子爵, 에노모토 타케아키, 1836~1908)의 별장에 초청을 받는다. 그 자리에는 48세의 이토 히로부미가 와 있었다. 이토는 1882년 유럽에 가서 2년간 독일제국을 모델로 헌법을 연구했고 귀국후 헌법 초안을 기초하는 제도취조국 장관을 맡은 바 있다. 1885년 내각제가 창설되면서 첫 총리가 되고 1888년 헌법 초안을 심의할 추밀원이 신설된 뒤 첫 의장을 맡는다. 1889년 2월 메이지 헌법이 공포되자 이토는 공로 훈장을 받는다. 일본의 입헌정치의 기틀을 만들어낸 것이 이토였다.

이 무렵에 그가 대한제국 일본공사 동농 김가진에게 그 별장에서 시를 한 편 써준다. 동농이 뛰어난 시인이며 서예가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解紛不用干弋力(해분불용간과력)
談笑之間又證盟(담소지간우증맹)
一片歸帆風浪靜(일편귀범풍랑정)
載將春色入京城(대장춘색입경성)

갈등을 푸는데 방패와 창의 힘은 필요가 없죠
웃으며 대화하는 사이 또다시 동맹임을 확인했네
한조각 돛배로 돌아가니 풍랑이 고요하다네
경성으로 들어갈 때는 봄빛을 싣고 가겠구려

                                   이토 히로부미의 '해분불용간과력(갈등해결엔 무력이 소용 없다)'

# 무기 대신 대화로 외교갈등을 풀자고 말한, 이토

이토의 시는, 조선 외교관의 귀에 쏙 들어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유럽 물을 먹은 국제감각의 소유자로 입헌군주제의 기반을 다진 일본 권력자가, 조선과 일본이 무력을 쓰지 않고 대화로 갈등을 해결하는 동맹임을 먼저 언급했으니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 싶었던 동농은 이 인물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답시를 봐도 그렇다.

山河共在齒唇勢(산하공재치순세)
玉帛彌敦金石盟(옥백미돈금석맹)
無限亞洲春色好(무한아주춘색호)
倚君一語作長城(의군일어작장성)

                                   동농 김가진의 '의군일어작장성(그대 한 말씀에 의지해 장성을 쌓으리)'

산과 물은 함께 순망치한의 형세에 있으니
옥과 비단(국가간의 예물을 상징)의 국가 우정은 금석같은 맹세로 두텁구나
끝없는 아시아의 봄빛이 좋으니
그대 한 말씀에 의지하여 만리장성을 쌓으리라

# 17년 뒤 반일 대한협회 회장 동농과, 일제통감 이토

17년의 세월이 흘렀다. 1908년 규장각 제학(提學)을 끝으로 60세 동농은 32년 관직의 옷을 모두 벗는다. 제학이란 직책은 학식과 문장이 뛰어난 이에게 주는 명예로운 벼슬이었다. 그 무렵 힘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은, 국민계몽을 확대하기 위한 학교설립 운동(충남관찰사)과 전근대적 형법의 혁파(법부대신), 교과서 편찬운동이었다. 1908년에는 친일파들의 집단인 일진회에 맞선 대한협회의 회장을 맡았다.

65세 이토는 그 17년 동안 정치적인 약진을 거듭했다. 1890년 새 의회제도 하에서 귀족원 의장이 된다. 1885년 총리를 맡은 이래, 1896년, 1898년, 1900년에 거듭 총리직을 맡았다. 국제적인 활동도 했다. 1897년 빅토리아여왕 즉위 60주년 축하사절로 영국을 방문했고 1901년과 1902년 유럽과 미국을 순방했다. 미국 예일대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영국 외상과의 회담 이후 영일동맹이 성립된다.

# 을미사변-을사조약-고종퇴위로 이 땅을 농락한, 이토의 맨얼굴

이렇게 국가세력을 확대하고 정치적 행보를 넓혀간 이토는 당시 조선에 대해 비판받을 일들을 했다. 1895년 2차 이토내각 때 그가 임명한 미우라 고로 주한 일본공사가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1904년 러일전쟁을 치르면서 서울을 방문해 고종에게 일본에 협조할 것을 강요한다. 1905년 11월7일 고종을 위협해 을사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다. 그해 이토는 수원에 관광을 갔다가 열차에서 조선인 청년(원태우)이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중상을 입었다. 1906년 이토는 을사조약에 따라 초대 통감(총독)으로 취임했고 이듬해, 을사오적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구성한다.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은 발칵 뒤집혔다. 고종의 밀사 3명이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요구하면서 ‘1905년 을사조약은 한국 황제의 뜻이 아니므로 무효’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토는 고종황제를 만나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일본의 보호를 거부하려는 것은 일본에 당당하게 선전포고하는 것만 못하다”면서 “일본은 한국에 전쟁선포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이 사건으로 고종은 강제 퇴위 당했다.

# 민족의 지탄인물에게, 동농이 생일 축하?

이듬해인 1908년 5월25일 동농은 대동학회 잡지에 시 한 수를 올렸다. 이 단체는 유림 어용단체였다. 이토가 자금을 대고 이완용이 조직했다. 전해 고종이 퇴위하고, 자신도 막 관직을 내려놓은 그해. 그는 무슨 생각으로 속셈이 뻔한 잡지에 이토의 생일을 축하하는 시를 썼을까.

赫赫勳名盖世英(혁혁훈명개세영)
前身應是富山精(전신응시부사정)
手除覇氣驅雲散(수제패기구운산)
力奮皇威捲海淸(역분황위권해청)
大局籌深東亞勢(대국주심동아세)
隣邦義重赤關盟(연방의중적관맹)
賀公六十七年壽(하공육십칠년수)
老圃黃花月正盈(노포황화월정영)

墨莊紅館昔追遊(묵장홍관석추유)
彈指居然二十秋(탄지거연이십추)
夢裏浮生離復合(몽리부생이부합)
詩中春色唱還酬(시중춘색창환수)

                                  동농 김가진의 '이토에게-시중춘색창환수(시 속에 '봄빛' 읊은 것에 대한 답가)

빛나는 공훈을 세운 이름은 세상을 덮는 뛰어남이요
전생의 육신은 필시 후지산의 정기였으리라
스스로 힘의 질서를 없애 구름처럼 흩어지게 하고
힘껏 황제의 위엄을 떨쳐 온 바다를 맑게 했구나
큰 스케일은 동아시아의 세력을 깊이 읽어내고
이웃나라와의 의리를 중히 여겨 청일조약을 맺었네
선생의 육십칠세 생일을 축하하며
묵은 밭에 국화가 피니 달이 마침 가득 찼구나

예전 묵천별장 홍관에서 옛날 놀던 것을 추억하니
손가락 한번 튕기는 사이 20년이네
뜬구름 인생속에 한바탕 꿈이 헤어졌다 또 만나니
시 속의 봄빛에 이제야 답가를 부르네

# 시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후세의 무지

이 시는 동농의 친일시로 알려져 있다. 대한제국의 신하이며 고종황제에 대한 ‘근왕(勤王, 왕을 지킴)’에 충실했을지언정, 동농은 뼛속 깊이 애국적인 민족주의자였다. 청나라와 일본의 외교관으로 일하면서 ‘조선’과 조선의 미래를 지키는 것 외에 다른 태도를 찾기 어렵다. 그런데 을사조약과 헤이그밀사, 고종 퇴위 등 조선을 참담한 지경으로 몰아넣는 1908년에 무슨 정신으로 온 민족이 침략원흉으로 지탄하는 인물에게 혁혁한 훈명(勳名)과 후지산 정기까지 들먹여 가며 과도한 칭송의 시를 썼을까. 국망의 절망 속에서 시절과 권력에 영합하기 위해서였을까.

이렇게 시를 읽는 것은, 인과관계도 따지지 않고 맥락도 살피지 못한 무식함의 극치다. 역사공간에 대한 몰이해와 한자에 대한 무지와 후세인들의 태만이 빚은 오해다.

# 동농은 그가 끝까지 지키려했던 고종을 퇴위시킨 이토통감을 조롱

동농의 이토 생일 축하시는, 그의 시적 재능이 발휘된 역설적 언어의 향연이다. 그는, 친일 유학자들이 들락이는 이 잡지에 그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고종을 퇴위시킨 이토 통감을 적나라하게 조롱하고 있다.

赫赫勳名盖世英(혁혁훈명개세영)
前身應是富山精(전신응시부사정)
手除覇氣驅雲散(수제패기구운산)
力奮皇威捲海淸(역분황위권해청)

세상을 뒤엎을 만큼 공훈과 명성을 떨치셨구려
전생에 아마도 후지산 정기라도 받았나 보오
손으로 힘 좀 쓰는 놈들 다 없애고 구름처럼 흩어지게 했군요
힘으로 황제의 위엄을 떨쳐 바다 넘어 청나라까지 쥐었군요

大局籌深東亞勢(대국주심동아세)
隣邦義重赤關盟(연방의중적관맹)
賀公六十七年壽(하공육십칠년수)
老圃黃花月正盈(노포황화월정영)

통 크게 동아시아 세력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이웃나라 의리 중하여 청일조약 맺었구료
선생이 67세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묵은 밭에 국화가 피니 달이 꽉 찼습니다

# 그때는 평화를 맹세하더니, 지금은 병탄을 맹세하는가

이 대목에서 설명이 좀 필요할 듯 하다. 제2연의 두 번째 행에 있는 '적관맹'은 청일전쟁의 전후 처리를 위해 1895년 청나라와 일본이 시모노세키에서 체결한 강화조약이다. 적관(赤關)은 시모노세키(下關)와 같은 뜻이다. 이 조약은, 조선을 청나라에서 독립시켰지만 사실상 일본이 조선을 삼키기 위해 일단 자유로운 상태로 만들어놓은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청나라 및 러시아와 각축하는 판세를 읽은 이토가, 일단 조선과 병탄을 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적관맹’을 맺었다. 동농은 이 말을 꺼내면서 17년전의 맹세를 교묘하게 생기시킨다. 그때 이토는 뭐라 말했던가.

解紛不用干弋力(해분불용간과력)
談笑之間又證盟(담소지간우증맹)

갈등을 무력으로 풀지 않으니,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사이 한-일 동맹이 저절로 입증되는 것이라고 이토는 분명히 말했다.

# '맹(盟)' 한 글자 속에 담긴, 이토의 변심

우증맹(又證盟)이라고 할 때의 맹(盟)은 대한과 일본의 국가간 우호를 의미했다. 그런데 17년 뒤에 쓴 맹(盟)은 일본과 청나라의 맹(盟)이다. 이 맹(盟)에서 이토가 이전에 뜻했던 대한에 대한 우호가 변함 없는지 상기시키고 있다. 

그때 동농은 뭐라고 답을 해줬던가.

山河共在齒唇勢(산하공재치순세)
玉帛彌敦金石盟(옥백미돈금석맹)

산과 바다가 함께 있듯이 순망치한의 세력을 이뤄서 상호 외교적 신뢰가 쇠와 돌처럼 굳고 두터운 맹약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우증맹(又證盟)을 금속맹(金石盟)으로 더 강조해놨다. 순망치한은 입술이 없어지면 치아가 시리다는 뜻으로 서로가 적대가 아니라 의존적인 관계임을 뜻한다. 조선을 망하게 하면 일본 또한 불안해질 수 밖에 없음을 못박아놓은 것이다. 그때 동농이 말한 금석맹(金石盟)과, 이토가 벌인 적관맹(赤關盟)은 그간에 바뀐 이토의 마음을 보여주는가?

# 변하지 않는 국화향기 들이대며, 이토의 변심을 묻다

老圃黃花月正盈(노포황화월정영)

이 일곱자에도 뼈가 있다. 노포는 오래된 텃밭인데, 송나라 한기(韓琦)가 지은 ‘구일수각(구일수각(九日水閣)’이란 시에 나온다. 不羞老圃秋容淡, 且看黃花晩節香.(불수노포추용담 차간한화만절향). 묵은 텃밭에 가을빛이 너무 담담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국화꽃이 오래까지 향기를 내는 것을 거듭 바라보라. 즉 끝까지 마음이 변하지 않는 만절(晩節, 꿋꿋한 절개)을 칭송한 시에서 따왔다. 시문의 재능이 특출한 동농이 이런 인용을 아무 생각없이 했겠는가.

묵은 밭에 핀 국화는 바로 17년전에 한 말이 그때그때 시절따라 변하지 않은 사람인지를 묻기 위해 인용한 비유이다. 즉, 이토가 지금 변심했는지를 묻는 것이다. 달이 꽉 찬 것은, 이토의 권력이 정점에 와 있는 상황을 뜻하리라. 이런 시절에 만절(晩節)을 촉구한 시적 장치다.


# 17년전 함께 시 읊던 때를 생각하며 답시로 쓴 것임을 밝힌 동농

墨莊紅館昔追遊(묵장홍관석추유)
彈指居然二十秋(탄지거연이십추)
夢裏浮生離復合(몽리부생이부합)
詩中春色唱還酬(시중춘색창환수)

맨 마지막에 쓴 4개의 행은, 이 시가 바로 17년전 시에서 이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묵장홍관은 1889년 동농 김가진이 초대받았던 에노모토 요센 자작의 묵천(墨川)별장이다. 거기서 놀던 때를 생각하니, 손가락 한번 튕긴 순간처럼 짧은 순간에 이십년이 지나가버렸다는 것이다. 꿈 속에 꿈을 꾸는 듯 그때 헤어졌는데 다시 이토가 조선에 와서 만나게 되니, 그때 시 속에 우리가 읊었던 ‘춘색(春色)’에 다시 답을 보낸다는 의미다.

# 그때 평화를 말하던 춘색(봄빛)은 지금 어디 갔는가

一片歸帆風浪靜(일편귀범풍랑정)
載將春色入京城(재장춘색입경성) - 이토가 쓴 시

無限亞洲春色好(무한아주춘색호)
倚君一語作長城(의군일어작장성) - 동농이 쓴 시


춘색은 무엇이었던가. 외교관 동농이 귀국하면 조선은 풍랑이 없이 잠잠할테니 봄빛이나 싣고 가라고 말한 것이 이토였고, 아시아 전체에 봄빛이 좋다니 그대 말씀을 믿고 만리장성을 쌓겠다고 답한 게 동농 아니었던가. 지금 그 시를 다시 꺼내 ‘춘색’이란 말을 떠올려 본다. 지금 춘색은 어디에 가 있는가.

# 1889년시와 1908년시의 운을 맞췄다

이게 친일시인가? 이게 이토의 생일을 축하한 것일까.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17년전의 시를 환기시키며 식민지의 최고 권력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조롱하고 있는 시다. 겉으로 보면, 축하시처럼 보이지만 과거 이토의 약속을 상기시키며 추궁하는 의도를 지닌 작품이다.

1908년에 쓴 시가, 1889년에 쓴 시의 답가로 썼다는 것을, 생일 축하시에도 밝히고 있지만, 동일한 차운(次韻)을 봐도 알 수 있다. 1889년 시는 맹(盟)과 성(城)을 써서, 양국 우정의 굳건함을 강조했고, 1908년 생일 축하시는 영(英) 정(精) 청(淸) 맹(盟) 영(盈)으로 받았다.

그리고 그 상황을 설명한 ‘묵장홍관’ 7언절구(생일축하시 뒤에 붙은 4행시)는 운(韻)을 바꿔써서 달리 표현했다. 동농은 이완용처럼(시문에 능한 이완용은 대동학회를 만든 자다) 눈밝은 이들의 구설을 피하려 친절하게도 해설을 다시 써 놓았다. 이토 또한 뜨끔할 수 밖에 없는 시가 아닌가.

# 혹시 뜻을 못 알아챌까 다시 써놓은 시 한편

暮年出處慙初志(모년출처참초지)
今日安危仗老謀(금일안위장노모)
爲祝健康兼努力(위축건강겸노력)
太平烟月奠靑邱(태평연월준청구)

늘그막에 벼슬하고 물러나니 처음의 뜻이 부끄럽소이다
지금 안전함과 위태로움은 이토의 뜻에 달렸으니
건강하시고 노력해줄 것을 기원합니다.
태평연월이 조선땅에 함께 하기를.

이 시에선 今日安危仗老謀(금일안위장노모)에 주목하라. 지금의 안위를 노인장의 뜻에 의지한다. 이 말은 17년전 시에서 동농이 '倚君一語作長城(의군일어작장성, 군의 한 마디에 의지하여 만리장성을 쌓으리)'이라고 했던 그 말을 변주하고 있다. 여전히 의지해도 되겠소?라고 묻는 것이다. 여전히 맹세와 춘색을 지킬 수 있소?라고 말하는 것이다.

외교관이었던 동농 김가진은, 이토의 성향에 대해 나름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유럽과 미국에서의 활동을 통해, 서양의 합리적 사고방식을 일본의 입법 체계에 도입했던 그는 스스로 쓴 시에 밝힌 것처럼 평화적 공존관계를 꾸준히 언명해왔다. 1907년 대한의 강제합병 계획이 없다고 밝힌 바도 있었다. 그러나 그해에 일어난 헤이그 밀사사건 이후로 그의 태도가 달라졌다. 1909년 가쓰라 다로 총리가 이토통감에게 강제합병에 대해 묻는 자리에서 그는 어떤 이의도 표하지 않고 합병에 동의했다.

# 이토는 이 이례적인 생일 축하시에 왜 답시를 쓰지 않았을까

이토가 동농 김가진의 생일 축하시를 읽지 않았을 리 없다. 하지만 그는 답시를 남기지 않았다. 동농의 시에 담긴 ‘뼈 있는 말’들을 이미 읽고 있었을까. 그가 국권 침탈을 꾀하는 일련의 상황 속에서 그에게 입에 발린 말이라도 그런 칭송시를 쓰지 않을 인물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동농에게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이런 시적인 조롱으로 일제의 이토 히로부미가 첫마음[初志]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여전히 지녔다는 점이 아닐까. 그는 이미 루비콘강을 건넌 침탈자였는데 말이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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