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전 부르짖은 임정의 어른 눈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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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기자
입력 2019-02-13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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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⑳ 동농, 임시정부葬… 홍진 주석이 개식사, 안창호가 추도사

[임시정부가 치른 동농 김가진의 장례 행렬.]


복벽(復辟)을 둘러싼 오해는 곧 풀렸다. “옹(翁)은 임정의 최고 고문으로 추대되고, 본격적인 항일구국운동의 전열에 참여했다.” 당시 상하이에 망명해 동아일보 통신원으로 활동했던 우승규(禹昇圭)가 쓴 글이다(우승규, <나절로만평>, 한홍구 <김가진평전> 재인용). 몸을 추스른 동농은, 도착한 지 달포가 지난 12월 7일 상하이 민단이 주최한 시국강연회에 첫 번째 연사로 나섰다. 그는 ‘조선왕조 이후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히 여기면서 점차 퇴락하여 마침내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고 지적한 뒤, 이렇게 호소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한동포의 피와 생명으로 얻은 것이니, 첫째 국민이 내외일치하여 임시정부를 사랑하고 받들 것, 둘째 한마음 한 몸으로 독립을 향해 용감히 나아갈 것, 셋째 청년자제를 많이 외국에 보내어 교육시킬 것…….”
(<독립신문> 1919년 12월 27일자, 한홍구 <김가진평전> 재인용)

임시정부 최연장자는 동농이었다. 두 분 국로(國老) 가운데 한 분인 박은식이 1859년생이었으니, 동농은 그보다 13세 연상이었다. 대통령 이승만 1875년생, 국무총리 이동휘 1873년생, 노동총판 안창호 1878년생, 경무국장 김구 1876년생. 임정 요인들은 모두 동농의 아들뻘, 한 세대 뒤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동농은 일제와 싸우러 왔다. 1920년 3월 6일, 대동단 총재 김가진은 ‘본부를 상하이로 옮긴다’고 밝히고, 단원들에게 “혈전(血戰)”을 촉구하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독립전쟁을 꿈꿨건만
갑신정변 이래 ‘온건 개혁파’의 길을 걸어왔던 동농이 서슴없이 “혈전”을 부르짖었다. 평생 외교관과 관료로 일해왔던 그가 ‘외교론’이나 ‘준비론’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조선왕조의 지배층이 고집했던 위로부터의 개화가 사상누각이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임과 동시에, 개화의 실패가 망국으로 이어진 역사적 책임을 묻기 위해서라도 독립운동의 성격이 바뀌어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이는 결국 누가 민국의 주인이 되어야 하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이기도 했다.
동농의 망명 소식은 미국으로 떠난 이승만의 귀에도 들어갔다. 며느리 정정화에 따르면, 동농은 ‘이승만의 유학을 주선했을 뿐 아니라 여비도 주었다’고 한다. 이승만은 상하이에 머물던 자신의 측근 안현경에게 편지를 보내 접촉을 지시했다. 안현경은 동농을 만나 국내의 귀족들과 소통해 자금을 얻어달라고 부탁했으나 가족이 양식을 구하러 나가기도 힘든 형편이라고 답했다는 회신을, 이승만에게 보냈다.
또한, 안현경은 “안씨와 동휘(東輝)씨가 자죠 단이는 고로 그간에 무 의론이 잇지 말기 극란외다”고 보고했다(한홍구, <김가진평전>). 여기에서 안씨란 도산 안창호, 동휘씨란 성재 이동휘를 가리킨다. “혈전”을 촉구하며 만주의 김좌진과 연락하는 동농, <독립신문> 1920년 신년호에 ‘올해는 전쟁의 해’라고 선포한 도산, 일찍부터 무장투쟁 외에는 길이 없다고 주장해온 성재. 이 세 사람이 뭉친다는 건 임시정부가 독립전쟁 사령부로 탈바꿈한다는 뜻이었다.
이승만이 외교론을 고집한 이유는, 성격에서 기인한 바도 있겠으나, 독립 이후를 더 신경 썼기 때문이다. 미국이라는 동아줄만 꽉 잡고 있으면, 건국 승인의 최대공로자인 자신이 대한민국의 주인이 된다. 그러나 독립운동이 전쟁의 성격을 띠게 되면, 독립의 주역은 당연히 병사(兵士) 즉 민중이고,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공화국으로 거듭난다. 이승만이 거둔 독립자금은 모조리 로비에 들어갔고, 독립군에는 한 푼도 쓰이지 않았다.
임시정부 내부는 복잡했다. 서북(西北)과 기호(畿湖)가 갈등했고, ‘외교론’과 ‘무장투쟁론’이 대립했다. 이념대립의 싹도 자라고 있었다. 독립자금 분배를 놓고 치사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동농은 실망했다. 차라리 김좌진이 있는 만주로 가자. 국가보훈처가 발굴한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임시정부의 지시로 1919년 12월 북로군정서로 이름을 바꾸었다) 간부명단에는 동농이 명예고문으로 나와 있다(한홍구, <김가진평전>). 하지만 여비가 없었다. 이때부터 동농은 급속히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부디 임시정부를 살려라

“본인은 금년 76세입니다 …… 작년 봄 이후 점점 양 무릎에서 발목과 발까지 전부 마비 증세를 느꼈고, 또 부종(浮腫)이 팽창하여 몇 차례나 아래까지 이르렀으나 …… 두 다리 아래가 힘도 기력도 없어서 피와 살이 아니 붙은 듯하여 한쪽 발을 옮기는 데도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 증상에 대하여 신방(神方)을 내어 주셔서 완인(完人)이 되게 하여 주시길 간곡히 기도합니다.”
(동농이 직접 쓴 자신의 병세, 한홍구 <김가진평전> 재인용)

병마와 가난이 낙심한 늙은 육신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며느리 정정화의 봉양 덕분에 잠시 기력을 회복하는 듯했던 동농은 다시 쓰러졌다. 갓 스물 며느리가 목숨을 걸고 국내로 잠입해 돈을 마련해왔다. 시아버지는 그 돈을 당신의 치료비로 쓰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아가야, 나의 시대는 끝났다. 부디 임시정부를 살려라…. 며느리는 오열하며, 다시 압록강을 건넜다. 정정화가 일제의 밀정에게 붙들려 ‘경성’으로 압송되던 그 시각, 동농은 눈을 감았다.
1922년 7월 4일 오후 10시. 동농 김가진, 향년 76세. 아들 성엄 김의한, 임정 요인 이동녕, 조소앙, 이필규, 그리고 아들의 친구 우승규가 임종을 지켰다. 임시정부는 <독립신문> 1922년 7월 8일자 1면에 부고를 싣고, 3면 톱기사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동농선생 김가진씨는 우리 구한(舊韓)시대의 대관(大官)으로 내정개혁과 외교에 힘씀이 컸고, 3·1독립운동 때에는 다수 지사(志士)와 연락해 도왔으며,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광복사업에 남은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해에 도착하니 우리 동포가 성심으로 환영했던 바이라. 씨가 조국독립을 꿈꾸며 망명했다가 온갖 곤란을 겪고 중도에 돌아가시매 우리 동포가 통곡 애도함은 실로 형언하기 어려운 바로다.
(<독립신문>, 1922년 7월 8일자 3면)

동농의 장례는 사실상 임시정부장으로 치러졌다. 부고는 박은식, 이동녕, 이시영, 홍진, 김인전, 김철 등 임정 요인 7인의 이름으로 나갔고, 호상은 노인동맹단 간부 이발이었다. 노인동맹단은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가 가담했던 조직이다. 7월 8일, 상하이 훙차오로(虹橋路) 만국공묘(萬國公墓)에서 엄수된 장례식. 임정 주석 홍진이 개식사를, 대한협회 시절 비서였던 조완구가 김가진의 생애를 소개하고, 이발과 안창호가 추도사를 올렸다.
독립운동에 뛰어든 양반은 많다. 그러나 대신을 지낸 인사 중에서는 동농이 유일하다. 망명 직후부터 눈을 감을 때까지, 그는 오직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따랐다. 제국의 대신에서 민국의 국민으로. 임시정부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둠으로써, 동농은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을 잇는 역사의 다리를 놓았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정리 = 최석우 <독립정신> 편집위원
사진 = 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 이 연재는 김위현 명지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동농 김가진전>(학민사, 2009)과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김가진 평전>(미출간)을 저본(底本)으로 재구성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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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先過後功 살펴 동농 평가해야
‘고종 충성’ 못 벗었지만… 독립정신, 임정서 발현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한국 근현대사, 특히 기독교사 연구의 독보적 존재로서, 독재정권 때도 양심과 정의에 따라 행동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실천적 지식인으로 존경받아왔다. 저서로, <우리 역사 5천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등이 있다.
- 동농은 헌종 12년(1846)에 태어나 민국 4년(1922)에 눈을 감았습니다. 이 기간은 우리 근대사의 출발점과 거의 일치합니다.
=김가진 선생은 봉건질서가 붕괴되는 시점에서 태어났습니다. 신분제가 붕괴되었다고 하지만, 그 기회를 포착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동농은 부친과 좋은 학자들에게 한학을 배우고, 외국어까지 했다니까, 상당히 준비가 된 분이었습니다. 개혁의 이익을 실제로 누린 분 가운데 한 분입니다.
- 동농은 개화당이면서, ‘일본당’이라고 비판을 받았다고 합니다만.
=‘일본당’이다 아니다는, 개화 당시에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청나라 쪽의 방법이 나은가, 일본 쪽이 나은가. 나중에는 러시아도 나오지요. 동농은 일본에 공사로 가기 전에 청나라 톈진에도 갔지요? 양쪽을 다 봤으니, 누구 모델을 따를 것인가. 이 문제 아닐까 생각합니다.
- 갑오개혁부터 시작해서, 개화는 결국 실패로 끝납니다.
=그 전에 갑신정변 때도 아주 과격한 개혁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위에서부터 내리는 것이었고, 세력 자체도 약했지요. 아래에서 올리는 개혁과 만나지를 못하니까, 설득력이 부족했습니다. 갑오개혁도 그런 측면이 있었을 겁니다. 우선 일본이 궁실을 침범해서. 타의에 의한 개혁이고, 그 개혁을 추진한 주체도 역시 설득력이 떨어졌어요. 동농도 그때는 그리 널리 알려진 분이 아니니까요. 갑오개혁의 내용은 아주 좋은 것이었습니다만.
- 그렇다면, 그 뒤의 광무개혁은 어떻습니까?
=어느 정도 성과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역사를 큰 흐름 속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백성의 힘을 키워서 개혁하는 쪽으로 가야 하는데, 황제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간 겁니다. 이게 정말 잘못된 겁니다. 오히려 독립협회나 당시 일어나던 인민주권을 안아서 의회를 개설했다면, 백성의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일본이 쳐들어오면, 저항이 더 넓고 깊어져요. 하지만, 황제권 강화로 가면, 일본은 황제만 처리하면 돼요. 그래서 나라를 이렇게 만든 원인 가운데 하나로 ‘고종책임론’을 제가 제기했습니다.
- 동농은 갑오개혁의 주역이고, 광무개혁 때도 대신이었습니다.
= 나라가 기울어가는데 황제권 강화가 올바른 방향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졌겠지요. (실제로 동농은 중추원의 위상을 높여달라는 상소를 연달아 올렸다) 그러나 제국에서는 그런 표현은 할 수 없는 거고, 이게 동농의 성품과 관련이 있어요. 이 분이 아주 온화한 분이고, 위에서 명령이 내려왔을 때 그걸 거역하는 그런 품성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수작(受爵) 문제도 이런 각도에서 봐야 할 겁니다.
- 동농이 대동단 총재를 맡은 게 74세입니다. 그 연세에 생각을 바꾼다는 게…
=꼭 생각을 완전히 바꾸었다고 보기보다는. 해외 견문을 한 분이니까, 나라가 어떻게 가야 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견해가 있었겠지요. 황제 밑에서는 그걸 강하게 주장하지 못했을 뿐이고, 3․1운동 속에서 이제껏 억눌렀던 민족적 의식이 나왔던 것이지요. (그럼에도 대동단 총재를) 받아들였다는 건 정말 대단한 겁니다.
- 동농의 독립유공자 서훈 문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수작 문제와 관련, 비판이 잘못되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독립유공자 서훈의 원칙은 선과후공(先過後功)입니다. 대동단 창단, 망명, 그리고 장례를 임시정부가 치렀다는 것, 이건 공이지요. 이런 경우, 의당 유공자로 표창해왔습니다.
이만열 교수는 독립협회와 의병으로 대표된 민중의 에너지를 개화의 동력으로 만들지 못한 게 우리 근대사에서 가장 뼈아픈 대목이라 여기는 듯했다. ‘고종책임론’을 오늘날의 시점에서도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를 일깨워주는 반면교사로 이해해도 되느냐는 질문에, 이만열 교수는 “그렇습니다”라고 힘주어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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