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시샘]육탁(肉鐸) - 배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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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19-01-23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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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어판장 어선에서 막 쏟아낸 고기들이 파닥파닥 바닥을 치고 있다
육탁(肉鐸)같다
더 이상 칠 것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
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
나도 한때 바닥을 친 뒤 바닥보다 더 깊고 어둔 바닥을 만난 적이 있다
육탁을 치는 힘으로는 살지 못했다는 것을 바닥 치면서 알았다
도다리 광어 우럭들도 바다가 다 제 세상이었던 때 있었을 것이다
내가 무덤 속 같은 검은 비닐봉지의 입을 열자
고기 눈 속으로 어판장 알전구 빛이 심해처럼 캄캄하게 스며들었다
아직도 바다 냄새 싱싱한(······)
나보다 손에 들린 검은 비닐 봉지부터 마중할 새끼들 같은, 새끼들 눈빛 같은

육탁 / 배한봉

 
 

 



■2040 직장인 중에서 46%가 퇴준생(퇴사를 준비하는 사람)이란 통계(2018년 10월)가 있었다. 서 있는 자리의 전망이 보이지 않을 때, 서 있는 자리의 전망을 가린 것들이 너무 커서, 왈칵 절망이 밀려왔을 때, 몸부림치며 헤어나고 싶은 것. 사람답게 살고싶은 표시라던가. 하지만 많은 사표는 쓸쓸하고 뼈아픈 날들의 둔주곡이다.

바람에 팔랑거리는 사표 한 장 위에 생이 통째로 흔들린다. 뿌리 없는 생이 스스로 무게중심을 놓친 채, 아찔한 풍경을 당겼다가 놓는다. 생에서 가장 못할 일은, 지금까지의 생을 부정하는 일이다. 탁탁 바닥을 친다. 도다리, 광어, 우럭처럼, 결코 빠져나가지 못할 지상에서, 자유로운 바다를 꿈꾸며 바닥을 친다. 사표란 그런 것이다.

일이란 꿈에 관한 주석(註釋) 같은 것이다. 환멸은 사표 뒷장 같은 것이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먹먹한 백지. 환상이 사라지고 난 다음의, 어지럼증. 가장 중요한 것이 가장 낮은 바닥에 처박힌 날, 그 현기증의 힘으로 바닥을 치며, 뛰어오르는 생.

시인은 절망의 어느 날 어판장에서 생선을 산다. 바닥을 치는 그것들과 자신이 같은 몸짓을 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비닐봉지에 담기는 그것들의 눈빛 레이저가 비닐봉지를 반길 자식들의 눈빛과도 닮아 있음을 느낀다. 절망을 인정하지 않는 생. 치열한 희망에너지를, 퍼득거리는 봉지를 쥔 손으로 느낀다. 육탁(肉鐸)은 온몸으로 치는 목탁이다. 

                                     이빈섬(시인.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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