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독일기업들에게 배우는 통일경제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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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웅 편집국장
입력 2018-09-19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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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웅 아주경제 대표 겸 총괄편집국장 ]


조 케저 독일 지멘스 회장은 몇년 전 한국을 찾아 “독일은 40년 만에 하나가 됐는데 한국은 또 다른 40년을 기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아주 인상적인 발언을 했다.

그는 독일의 통일과정에서 지멘스가 한 역할에 대해 “통일 이듬해인 1991년 6월 지멘스는 구동독 노동자 2만여명을 고용했다”고 강조하고 “이들을 재교육해 2년 안에 국제적인 기술 수준을 인정받았다”고 설명했다.

지멘스는 통일 이후 동독 기업 11곳을 인수·합병(M&A)하고 12곳에 인력센터를 세워 구동독 노동자를 그대로 고용했다. 특히 반도체공장을 지은 드레스덴에만 27억 마르크(약 1조4000억원)를 투자했다.

그는 “만약 통일 1년이나 6개월 전 '언제 통일이 될 것이냐'고 물으면 당시의 나는 '불가능하다'고 답했을 것"이라며 "통일은 언제 올지 모르는 만큼 준비하고 기다려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때마침 남북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이재용 삼성 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 기업 총수들이 북한을 방문 중이다.

이를 두고 국내에서 여러 논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기업들은 속성상 돈 되는 사업에만 관심을 둘 것이니 꽉 막힌 북한에서 사업거리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고, 특히 대북 제재가 지속되는 한 대기업 총수라고 해서 별다른 수단이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단도 많이 나온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더 많이 알고 신뢰관계를 쌓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는 이재용 부회장의 언급처럼 일단 남북 기업 관계자들이 서로 만났다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일 것이다. 아직까지는 남북 간 대규모 사업거리 운운하는 것 자체가 어색한 일이다.

물론 일부 뻥튀기 기대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올봄 남북관계가 급진전하자 블룸버그는 "김정은 위원장은 북한을 삼성전자의 새 안마당으로 만들 수도 있다"며 "북한을 제2의 베트남과 같이 변화시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우리가 아니라 외부 사람이 대신 해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귀가 솔깃해지는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베트남에 대규모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삼성이 북한에 진출할 수도 있다는 진단은 전혀 어색한 일은 아니다. 한국 기업들이 지리적 이점과 낮은 인건비 등을 고려해 북한으로 생산공장 이전을 추진하는 것은 감상이 아닌 합리적인 결정일 수도 있다.

남북 경협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진영에 따라 기대감도 있고 거부감도 있겠지만 우선은 서로 만나 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최태원 SK 회장은 “2007년에 왔었는데 11년 만에 오니까 많은 발전이 있는 것 같다. 건물도 많이 높아졌지만 나무들도 많이 자라난 것 같고 상당히 보기 좋았다”고 했고, 구광모 LG 회장은 “LG는 전자·화학·통신 등의 사업을 하는 기업이다.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대기업 총수들의 이 같은 발언이 언뜻 덕담으로만 보이지만 이런 식의 대화가 남북한 경제인 사이에 오고가는 것 자체가 큰 발전이다.

우리는 이쯤해서 독일 통일과정에서 서독 기업인들의 역할에 대해 한번쯤 살펴볼 필요도 있다.

지금은 명예회장이 됐지만 카를 한이 이끄는 폭스바겐은 통일 전인 1984년에 동독 측에 매년 28만6000개의 자동차 엔진을 납품한다는 계약을 체결했다. 서독 자동차 업체로서는 분단 이후 동독과 진행한 첫 경협이었다.

동독 출신인 카를 한은 언제나 동독을 경제적으로 부흥시키는 것을 인생의 큰 목표로 삼았다. 그는 통일을 앞두고 폭스바겐의 투자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어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기업들에 동독 재건을 위해 투자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폭스바겐뿐만 아니라 서독 주요 자동차 업체들이 동독으로 향한 뒤 독일 자동차 산업은 번창했다. 여유가 생긴 동독인들이 가장 먼저 눈을 돌린 것은 자동차와 TV였다. 서독 기업들은 순식간에 거대 내수시장을 얻게 된 것이다.

물론 서독 기업인들이 늘어난 소비자 숫자에만 집착한 것은 아니었다.
조 케저 지멘스 회장은 “독일 대기업들은 갑작스러운 독일 통일 과정에서 책임과 리더십을 다했다. 상황은 어려웠고 상당한 비용이 소모됐지만 우리의 목적과 운명을 잊은 적이 없었다”고 당시를 돌이켰다.
서독 기업들이 동독에 대규모 투자를 이어간 것은 시장논리에만 충실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19일 공동성명에서 “남과 북은 상호호혜와 공리공영의 바탕 위에서 교류와 협력을 더욱 증대시키고,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실질적인 대책들을 강구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선포했다.

두 정상 간에 어떤 합의가 이뤄지든 결국 그 실천은 돈의 흐름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우리나라 기업들도 통일 경제 수립에 기여한 독일 기업들이 했던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전제조건은 분명하다. 한반도가 완연한 비핵화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확인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조금씩 그 가능성이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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