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 김정은의 선택 ‘民生과 체제 유지냐’ ‘슈퍼파워와 대결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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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아주경제 논설고문 겸 서울시립대 초빙교수
입력 2018-09-18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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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아주경제 논설고문 겸 서울시립대 초빙교수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이달 초 한국, 중국의 학자들과 함께 압록강, 두만강을 따라 북·중 접경지역을 둘러보았다. 그의 북한 국경지역 현장 관찰은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근년인 2012, 14, 15, 16년에도 계속돼 시계열(時系列)적으로 분석한 의미가 크다.

량강도 혜산시에 아파트가 들어선 것을 비롯해 북한 국경의 전 지역에서 건설공사가 활발했다. 강변을 따라 목축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과거 북한에는 식량이 부족한 농가들이 산비탈을 개간해 옥수수 등 농작물을 심은 뙈기밭이 많았다. 지금 그 자리에서 잡목이 자라는 모습을 보며 북한이 하루 세끼 문제를 해결했다는 분석이 동행한 중국, 한국 학자들의 입에서 공통으로 나왔다. 트럭, 승용차, 버스의 운행도 전보다 많아졌고 한국의 택배형 탑차도 다녔다. 수해방지를 위해 제방을 쌓는 곳도 있었다.

김정은이 단지 식량난만을 해결하기 위해 비핵화를 내걸고 제재를 풀기 위한 협상에 나서지는 않았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하루 세끼 이상의 경제발전을 김정은이 목표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정은이 싱가포르의 북·미회담 이후 함경북도 어랑천 발전소와 생활필수품 공장, 농장 등을 잇따라 방문해 현장 책임자와 당 관계자들을 독려하는 모습은 아버지 시대의 ‘적폐 청산’에 가깝다. 어랑천 발전소는 17년째 공사를 하고 있지만 공정률이 70% 정도다. 김정은은 싱가포르에서 돌아온 지 한달여 만에 발전소 건설현장을 찾아 “도대체 발전소를 건설하자는 사람들인지 말자는 사람들인지 모르겠다”고 격노하며 10월 10일까지 공사를 마치라고 지시했다.

그는 스위스 유학, 일본 관광 등 해외문물을 둘러볼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죽음을 앞두고 중국을 두 차례 방문한 아버지로부터 중국의 발전 모습을 전해들었다. 폐쇄된 궁정에서 생활한 김정은의 성장기를 알아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료는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이다. 후지모토는 일본으로 탈출했다가 지금은 김정은의 배려로 다시 북한에 들어가 평양에 초밥집을 냈다.

스위스 유학 중 잠시 귀국해 있을 때 김정은은 후지모토에게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공업기술이 한참 뒤떨어졌다. 초대소에서도 자주 정전이 되니 전력 부족이 심각해 보인다”라고 말했다. 그는 “일본에서 상점에 가보면 물품들이 넘쳐 있다”라며 부러움을 털어놓았다. 열일곱 살 때인 2000년 8월에는 원산에서 평양으로 가는 전용열차 안에서 다섯 시간에 걸쳐 중국의 경제발전에 대해 강한 관심을 드러내면서 후지모토에게 북한의 현실과 장래를 걱정했다고 한다(북한의 후계자 왜 김정은인가, 맥스 미디어, 2010년).
일본인 요리사의 관찰기는 흥미 위주의 단편적인 사실의 나열이긴 하지만 지금 벌어지는 김정은 민생행보의 원천을 짐작해볼 수 있는 소중한 1차 자료다. 2017년 신년사에는 ‘우리 인민을 더 높이 떠받들겠다는 것은 언제나 늘 마음뿐이었고 능력이 따라서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자책 속에 지난 한 해를 보냈다’는 반성이 담겨 있었다.

김정은이 비핵화 협상에 나선 것을 두고 김정일 때 같은 시간 벌기용이라고 비판하는 보수적 시각이 여전하지만, 그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것이라면 엄청난 후과(後果)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미국은 다양한 북한 공격수단을 확보해 놓고 있다고 봐야 한다. 미국은 리비아 국가원수 무아마르 카다피가 미국에 각을 세울 때 사막에서 묵는 카다피의 바로 옆 텐트를 폭격해 어린 수양딸을 죽게 했다. 1990년대 초반 미국은 첩보위성으로 카다피의 방공호를 감시하다가 카다피가 방공호로 들어간 직후 토마호크 미사일로 방공호 입구를 정밀 폭격했다. 그러면서도 중동의 세력 균형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카다피를 죽이진 않았다. 결국 공포에 질린 카다피는 미국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지했다.

김정은은 고모부 장성택을 고사포로 처형하고 이복형 김정남의 독살을 지시한 독재자다. 피비린내 나는 왕자들의 권력다툼이 비일비재했던 조선시대와 견주면 왕권의 유지와 계승에 장애가 되는 사람들을 모조리 도살했던 태종이 연상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공포정치만으로 장기적인 권력 유지를 도모할 수는 없고 민생의 부뚜막에도 훈기가 피어오르게 해야 한다. 호불호를 떠나 최근 김정은의 행보는 과거와 달리 북·미 정상회담,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약속한 것을 지키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풍계리 지하핵실험장, 동창리 엔진시험장 폐기는 단순한 모라토리엄(핵무기 생산중단)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이 전 장관은 평가했다.

18일부터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이 무엇을 보여줄지를 국제사회가 주목하고 있다. 김정은이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소중한 기회다. 민생경제의 발전과 권력의 유지냐, 세계의 슈퍼파워 미국과 맞대결이냐, 선택해야 할 시간이 째깍째깍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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