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 매케인의 ‘큰 정치’가 한국 정치에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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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아주경제 논설고문
입력 2018-09-03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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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아주경제 논설고문 겸 서울시립대 초빙교수


2008년 말 미국 대통령 선거운동 집회에서 공화당 후보 존 매케인을 지지하는 한 여성이 “버락 오바마를 신뢰하지 않는다. 오바마는 아랍인”이라고 주장했다. 매케인은 “아랍인”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고개를 젓고 마이크를 빼앗았다. 매케인은 분명하게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시민입니다”라며 경쟁자를 옹호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의 아버지는 케냐 유학생이었고 하와이에서 미국인 여성을 만나 오바마를 낳았다. 정식 이름인 ‘버락 후세인 오바마’는 전형적인 무슬림 이름이다. 지난 1일 매케인 상원의원의 영결식장에서 오바마는 추도사를 통해 이 동영상에 관해 언급하면서 “나는 매케인이 인종, 종교, 성별을 이유로 사람을 다르게 대우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감사의 말을 했다.

위엄이 있고 유머가 담긴 오바마의 추도사는 감동적이었다. 오바마는 본래 연설로 이름을 알린 정치인이다.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이던 오바마는 2004년 보스턴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의 기조연설을 통해 전국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2005년 미국 상원의원이 된 오바마는 2008년 대통령 선거에서 매케인을 누르고 당선됐다.

예비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을 꺾고 본선에 올라온 오바마의 뛰어난 자질이 승리의 원동력이었지만 당시 미국을 강타한 금융위기가 여당인 공화당 후보였던 매케인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했다. 어떻게 보면 매케인은 시운(時運)이 따르지 않아 미국 건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 후보에게 패배한 것이다.

매케인은 골수 보수주의자이면서도 당을 초월하는 가치를 지지하는 것이 의무라는 신념에 따라 당론에 거스르는 투표를 자주 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집권 후 오바마 케어(흑인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로 건강보험을 확대한 정책)를 폐지하는 법안이 상원에 올라왔을 때 뇌종양 수술을 받은 몸으로 표결에 참여해 반대표를 던졌다. 이 바람에 49대51로 오바마 케어 폐지 법안은 상원에서 부결되었다. 그러나 오바마는 추도사에서 “매케인은 내가 잘못 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는 주저하지 않고 나섰다. 그의 계산에 따르더라도 대체로 하루에 한 건씩이었다”고 말해 추모객들의 웃음을 샀다.

영결식장의 맨 앞줄에는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부부가 자리를 나란히 했다. 2000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W 부시와 매케인은 치열한 경합을 했으나 매케인이 패배했다. 대선에서 매케인의 백악관 입성을 가로막았던 두 전직 대통령이 추모사를 하게 된 상황을 버락 오바마가 유머러스하게 이야기하자, W 부시는 옆자리에 앉은 미셸 오바마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매케인은 올 초 죽음을 예견하고 대선에서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준 두 전직 대통령에게 추도사를 부탁했던 모양이다. 오바마는 “매케인이 살아 있을 때 자신이 죽으면 추도사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은 소중하고 유례없는 영광이었다”면서 바로 그 모습이 그의 본질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개인적인 품성을 떠나 한국에서는 대선에서 자신을 패배시킨 정적에게 추도사를 부탁하는 정치문화는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 이유야 어찌됐든 전직 대통령 2명이 감옥에 가 있고, 다른 한 명은 법정의 출석요구를 받고 치매 초기라서 못 가겠다고 버티는 한국의 정치 현실과 대비된다.

해군조종사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가 5년 넘게 포로 생활을 한 매케인이 지닌 불굴의 용기에 대해 오바마는 거듭 찬사를 보냈다. 베트남이 태평양사령관의 아들인 매케인을 석방하겠다고 했을 때 그는 자신보다 일찍 포로가 된 미군들보다 먼저 나가기를 거부했다. “그는 자기연민을 경멸하는 사람이다. 그는 지옥에 갔다 왔다. 하노이 감옥에서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오고 그리고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오면서 젊은 무쇠는 강철로 단련되었다. 매케인이 봉사나 의무 같은 것을 말할 때 공허하게 들리지 않는 이유다.”

국민이 나라를 위해 나가 싸우라는 부름을 받았을 때, 정치인과 주요 공직자는 모범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정치인 중에는 매케인 같은 롤모델이 몇이나 될지 의심스럽다.

오바마는 허풍과 모욕을 주고받으며, 하찮은 것에 대한 거짓의 분노가 거칠고 용감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매케인은 민주주의의 토론에 필수적인 자유로운 독립언론을 옹호했다”며 트럼프의 과도한 언론 공격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워싱턴에서 매케인을 추모하는 거대한 물결이 이는 가운데, 트럼프는 이날 영결식에 초대받지 못하고 트럼프 내셔널 골프클럽에서 골프를 쳤다.

오바마가 추도사에서 찬양한 매케인의 ‘큰 정치’는 한국정치에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당파적 이념논리에 얽매여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냉엄한 숫자와 현실에도 눈감고, 모욕과 분노의 언어를 쏟아내는 정치인들이 여야를 불문하고 너무 많다. 양 극단에 서 있는 언론들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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