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영원한 청년 의사 윤봉길⑭] “저와 시계를 바꾸시죠, 제가 사용할 시간은 이제 한시간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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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라 기자
입력 2018-08-21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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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사 직전, 맞바꾼 회중시계

“강보에 싸인 두 兵丁에게 - 두 아들 模淳과 淡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아라. /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중략…)” 거사 이틀 전, 두 아들 모순(맏아들 淙의 어릴 적 이름)과 담에게 쓴 유서(유촉시)중 일부다. 자신의 죽음을 이미 예견(豫見)이나 한 듯, 강보에 싸인 아이에게 쓴 유서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단어 하나하나에 격한 감정과 결사 항쟁의 의기(義氣)가 뚝뚝 묻어난다. 죽음으로써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한 청년의사 매헌. 그는 위대한 역사의 현장 속으로, 운명의 순간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홍구공원에서 열린 군인칙유하사 50주년 기념식 연단에 선 시라카와 시게미쓰 우에다 등의 모습(1932. 4. 24 도쿄니찌니찌신문 호외). 윤 의사는 이날 기념식장에 들어가 중앙 연단의 위치와 사라카와 사령관 모습 등을 확인하고 29일 의거날에 대비한 사전탐사를 한 것으로 보인다. ]

거사 하루 전, 마지막 현장 답사
1932년 4월 28일 정오 무렵, 매헌은 중국 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김구 선생과 만나 점심을 먹고, 오후 2시 무렵 매헌은 마지막 현장 답사차 홍구공원을 또 찾았다. 기념식을 하루 앞둔 홍구공원은 일본군인들이 예행연습에 한창이었다.
폭탄을 던질 위치 확인 및 상황 이후 계획에 대해 골몰할 바로 그때, 시라카와 대장이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홍구공원에 나타났다. 내일 있을 기념식을 점검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원흉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과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중장의 사진을 오송로에 있는 일본인사진관에서 거사를 결심한 즉시 일찍이 입수했었기에 그자의 얼굴을 뚜렷이 알고 있던 매헌은 순간 ‘아, 지금 내손에 폭탄만 있다면, 바로 저 놈을 폭살시킬 수 있는데…’ 생각이 스쳤다. 매헌은 끓어오르는 아쉬움을 접고, 내일을 기약하며 발길을 돌렸다.

 

[춘산 이유필]

춘산 이유필 선생과 만남
매헌은 숙소 동방공우에서 7시경 김구를 만나 홍구공원에 갔던 일을 말한 다음 그날 저녁, 곧바로 상해 교민단장인 춘산 이유필 집을 찾아가 함께 식사를 하며 많은 담소를 나눴다. 평소 그는 이유필 선생을 존경하며 따랐고, 이유필 또한 큰 뜻을 품고 상해에 온 청년 매헌을 지지하며 아꼈다.
이날 두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가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다. 그러나 매헌이 의거 직후 체포되어 조사를 받던 중, 거사 동반자로 이유필을 지목했다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당시 매헌은 이유필을 지목하되 이름을 이춘산이라 했고, 그 용모에 대해서도 이유필과는 전혀 다른, 엉터리로 묘사를 했다. 이것으로 보아 그날, 두 사람 간에 모종에 약속 즉, 일제의 심문을 교란시키기 위해 말을 맞춘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서는 매헌의 체포 후 기록 때 상세히 서술코자 한다.
숙소 ‘동방공우’로 돌아온 매헌.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마지막 밤이라 생각하니 상념이 물밀 듯 몰려왔다. 아내와 아이들, 부모형제, 목바리 친구들의 모습이 훤한 달빛에 떠올랐다. ‘달님이시여, 굽어 살피소서. 이 한 몸 바쳐 조국 독립을 앞당길 수 있다면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부디 내가 없는 세상에서는, 이들이 평화로운 땅에서 행복하게 살게 하옵소서…’

 

[윤 의사가 폭탄 사용방법을 익힌 김해산의 집. 의거날인 29일 아침 이곳에서 김구와 아침식사를 나눈 후 폭탄을 건내받았다]

거사를 앞둔 마지막 조찬
1932년 4월 29일 거사 당일, 비가 올 듯 잔뜩 찌푸린 날씨였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아 행사가 취소될 일은 없었다.
양복으로 말끔히 갈아입은 매헌은 프랑스 조계 화룡로(華龍路) 원창리(元昌里) 13호 김해산(金海山)의 집으로 향했다. 이틀 전 매헌이 쓴 <자서이력>을 받아 든 김구는 매헌을 김해산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폭탄 사용법을 가르쳐 주고 거사당일 아침을 이 집에서 먹자고 말했기 때문이다.
백범은 '혹여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매헌에게 정성이 담긴 식사를 대접해야겠다'는 심정에 김해산 부부에게 ‘중요한 일로 매헌이 29일 아침 동북 3성(만주)으로 떠나니, 소고기를 사다가 아침밥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해놓았다.
그날 아침도 매헌은 여느 때와 똑같이 의연(毅然)했다. 그는 마치 밭에 일을 나가려는 농부처럼 태연스럽게 밥을 먹었다. 매헌의 식사 모습을 지켜보는 백범은 목이 메어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당시 57살인 백범에게 만 24살 청년 매헌은 영락없는 아들뻘이었다. ‘이 앞길 창창한 청년을 사지(死地)로 보내야 하다니….’
백범은 <백범일지>에서 매헌과의 마지막 아침식사 장면을 이렇게 회상했다.
“새벽에 윤군과 같이 김해산 집에 가서 최후로 식탁을 같이 하여 아침밥을 먹으면서 기색을 살펴보았다. 태연자약하다… 윤군의 밥을 먹는 모양은 담담하고 태연하다. 김해산군은 윤군의 이러한 태도를 보고 나에게 조용히 이러한 권고를 한다. ‘선생님, 지금 상해에서 우리의 활동이 있어야 민족적 체면을 보전하게 되는 이때에 윤군을 구태여 다른 곳에 파송하려 하십니까?’ 나는 두루뭉수리로 대답할 뿐이었다. ‘모험사업은 실행자에게 전부 맡기는 것 인즉, 윤군 마음대로 어디서나 하겠지요. 어디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들어나 봅시다.’”
 

[윤 의사가 홍구공원으로 떠날 때 김구와 서로 맞바꾼 회중시계. 의거 당일 윤 의사는 6원에 매입한 자기의 시계를 김구의 2원짜리 시계와 바꿀 것을 제안했다. 김구는 평생 이 시계를 소중히 간직했다. ]


맞바꾼 회중시계, 결연한 의지 밝혀
아침 7시를 알리는 시계 종소리가 울렸다. 그때 매헌은 자신의 회중시계를 품에서 꺼내 백범에게 “선생님, 저와 시계를 바꾸시죠.” 내밀었다. 백범이 의아해 하자, “선생님의 시계가 낡아 보이네요. 이제 제게는 한 시간 밖에 소용이 없는 물건입니다.” 백범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매헌의 결연한 의지를 읽은 백범은 자신의 시계를 풀어 그에게 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두 사람의 시계는 맞교환됐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에게 있어 회중시계는 필수품이었다.
전쟁을 하는 데 있어 분, 초 정확한 시간은 생(生)과 사(死)를 가를 수 있는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매헌의 시계는 백범이 건네준 거사자금 중 6원을 주고 산 것으로, 1910년대 스위스 월섬(waltham)사에서 출시된 신제품이었다. 김구 선생은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이 회중시계를 애지중지(愛之重之) 간직했으며, 몇 점 안 되는 유품의 하나로 남겼다.
‘죽음의 길’을 통해 ‘영원히 사는 자유’를 택한 매헌. 그는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도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생각지 않았다. 백범의 시계가 낡았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매헌은 회중시계를 통해 죽음마저 불사(不辭)한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 준 것이다.

역사의 현장, 죽음의 길로 들어서다
백범에게서 거사에 쓰일 폭탄을 건네받자, 매헌은 보자기로 싼 도시락형 폭탄은 손에 들고, 물통형 폭탄은 가슴에 가로질러 허리로 내려오게 어깨에 메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매헌은 김해산의 집을 나왔다. 김구 선생은 배웅을 하기 위해 택시를 타는 곳까지 따라나섰다.
하비로와 여반로가 교차하는 각(사거리 모퉁이)에 있는 법대기차공사에서 택시를 빌렸다. 택시를 타기 직전, 김구 선생의 손에 돈을 쥐어주며 매헌은 “선생님, 차비를 주고도 5, 6원은 남을 것 같습니다. 제겐 필요 없는 돈이니 선생님이 갖고 계십시오.” “무슨 소리? 그래도 돈은 좀 갖고 있어야지.” 김구 선생이 돌려주려 하자 매헌은 사양하고 차에 올랐다.
자동차가 서서히 출발하자, 백범은 “윤 동지!…훗날 지하에서 만납시다!” 목이 메는 소리로 마지막 인사를 건네자, 매헌은 차창 너머로 고개를 숙이며 “선생님,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정중하게 화답했다. 이내 자동차는 홍구공원을 향해 떠났고, 김구는 뜨거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서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한편, 매헌은 자동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도 거사 성공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매헌은 물통과 알루미늄 도시락으로 위장된 폭탄 두 개 모두를 투척하려 했다.
삼엄한 경비로 보자기를 풀 시간적 여유가 없을 거란 판단이 들자, 도시락형 폭탄은 보자기에 싼 채로 던지기로 했다, 매헌은 자동차 안에서 손가락을 이용해 도시락형 폭탄을 싼 보자기에 구멍을 뚫었다. 폭탄의 발화용 끈을 구멍 위치에 놓아 쉽게 당길 수 있게 해놓은 것이었다. 당시 물통형 폭탄은 현장에서 폭발되어 그 구조를 알 수 없으나, 도시락형 폭탄은 미처 던지지 못하고 매헌이 체포되는 바람에 훗날 그 구조가 파악되었다. 아침 7시 50분, 매헌이 탄 차가 홍구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결사(決死) 항전(抗戰)의 의지를 다진 청년 의사 매헌이 차에서 내렸다.

윤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
사진=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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