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근의 차이나 무비⑫] 아직도 전설로 살아 있는 ‘이소룡’과 영화 ‘정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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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근 한국외대 교수
입력 2018-08-22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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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 폭압에 고향 떠난 이들의 향수이자 약자 짓밟은 강자에 대한 대리 복수극

쌍절곤과 노란 운동복을 입은 이소룡. [사진=영화 '사망유희' 스틸]


이소룡(李小龍·振藩, 리샤오룽)은 전설이다. ‘불의의 사고’로 우리 곁을 떠난 지 45년이 됐지만, 그는 여전히 전설로 남아 있다. ‘말죽거리 잔혹사’나 ‘킬빌’ 같은 영화만이 그를 기억하는 건 아니다.

그의 무술, 영춘권(詠春拳)과 절권도(截拳道)는 시대와 국경을 넘어 전해오고 있다. 이소룡에 대한 몰입은 ‘남성성’에 그 답이 있다. ‘아뵤~’라는 괴조음과 뒤이어 솟구치는 발차기는 그런 남성성을 극대화하는 장면이다. 전신에 샛노란 운동복까지 걸친 모습은 어떤 상징으로 남았다.

그의 남성성은 성별 대결의 결과가 아니다. 이소룡의 남성성은 강한 자에 저항하고, 그들을 처벌하는 남성성이었다. 그의 남성성은 동양과 서양의 대결 구도 속에서 약자를 지지하는 방식으로 드러났다.

서양 제국주의에 맞선 동양의 남성이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이소룡이 잊히지 않고 많은 이들의 우상으로 남아 있는 건 그가 보여준 표상이 바로 부당한 힘과 권력에 맞서 자신만의 스타일로 싸움을 걸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가 ‘정무문(精武門, 징우먼)’이다.

이소룡은 1940년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홍콩으로 건너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경극배우였던 아버지 덕에 어렸을 때부터 무대에 오를 기회가 적지 않았다. 허약한 몸 때문에 무술을 익히기 시작했고, 엽문(葉問, 예원)에게서 이어진 영춘권을 연마했다.

미국으로 건너 가 배우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이런저런 영화에 출연했다. 대부분 ‘노란 얼굴’의 동양인으로 악역을 맡은 조연에 불과했다. 미국에서의 한계를 절감한 그는 홍콩으로 돌아와 영화에 전념한다. 1971년부터 내리 △당산대형(唐山大兄, 1971) △정무문(1972) △맹룡과강(猛龍過江, 1972) △용쟁호투(龍爭虎鬪, 1973) △사망유희(死亡遊戲, 1973)를 찍었다.

미국에서 활동을 제외하면 이소룡이 우리에게 남겨준, 그가 주인공이었던 영화는 모두 이 다섯 편이다.

정무문은 1930년대 초 상하이(上海)로 우리를 데려간다. 미국, 영국, 프랑스의 조계가 설치돼 있던 상하이에서 정무관(精武館)의 관장이었던 곽원갑(霍元甲, 훠위안자)이 피살되고, 그의 제자들도 일본 사무라이에게 모욕을 당한다.

‘동아병부(東亞病夫)’, 동아시아의 병든 늙은이라고 업신여김을 당한 것이다. 이소룡은 곽원갑의 제자 진진(陳眞, 천전)으로 등장한다. 갑작스레 스승을 잃은 그는 상하이로 달려와 상을 치른다.

스승의 원수를 찾고 보니 일본 공수도 두목 스즈키 칸이었다. 일본인 킬러 둘을 해치운 진진 앞으로 ‘동아병부’가 쓰여진 편액이 배달된다. 진진은 전화 수리공 등으로 변장해 ‘일본놈’들의 본거지를 찾아가 응징한다.

일본의 도발로 정무관은 아수라장이 되고 진진은 정무관과 사형, 사제들을 보호하기 위해 결국 총에 맞는다. 영화의 마지막은 진진이 정무관 앞에서 화려하게 공중 부양으로 총탄에 맞서는, 프리즈 프레임으로 처리된 그 유명한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영화 '정무문' 마지막 장면.[사진=영화 '정무문' 스틸]


2차 대전 이후 홍콩영화는 1930년대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영화인들의 이주로 형성되고 있었다. 홍콩에 있어 상하이는 고향과도 같은 도시였다. 홍콩에 정착한 이들 가운데는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을 피해 상하이에서 건너온 중국인들이 적지 않았다.

정무문과 이소룡 캐릭터는 영화사적으로는 상하이 영화에 대한 회고의 ‘의식’이었고, 관객들에게는 고향을 향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떠나온 고향에 대한 아쉬움을 이소룡의 ‘대리 복수’로 달랬던 것이다.

정무문을 찍으면서 감독의 불성실한 태도를 못마땅해 했던 이소룡은 자신이 감독과 각본, 주연을 맡아 맹룡과강을 만든다. 용쟁호투는 미국과의 합작으로 만든 액션영화였다. 사망유희 역시 미국과의 합작이었다. ‘죽음의 게임’을 뜻하는 영화 제목이 어떤 암시이기라도 했는지, 이소룡은 이 영화 촬영 도중 서른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많지만, 아직도 진실이 밝혀지지는 않았다. 이소룡은 당대 최고의 영화사였던 쇼브라더스에 거절당한 뒤 골든하베스트와 주로 작업했다. 신생 영화사였던 골든하베스트는 이소룡의 영화들로 급성장했다. 당산대형은 당시 홍콩 최고의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다. 용쟁호투 이후에는 미국 진출까지 성공했다.

‘이소룡 신드롬’은 그가 왕성한 활동을 하던 시절부터 생겨났다. 이소룡의 쿵후(功夫, 궁푸) 영화는 세계적으로 140여개 나라에 팔렸고, 대만과 한국 등에서 만들어진 모방과 아류작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른다.

이소룡은 중국의 무술을 아름다운 전통 속에만 가둬 놓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쿵후를 동시대적인 시간과 공간으로 가져 왔고, 나아가 국제적인 플랫폼 위에 올려놓았다. 자신의 임무를 다해 적들을 물리치지만, 결국 장렬하게 산화하고 마는 캐릭터는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줬다.

쌍절곤 하나 들고 힘 있는 자들에 의해 짓밟히고 모욕당하는 세상을 뒤바꿔 놓겠다는 그의 꿈은 통쾌한 복수를 통해 재현됐다. 그러므로 그의 괴조음과 발차기를 통해 표출되는 남성성은 남성과 여성의 대결이라는 층위에서 이뤄진 게 아니다.

그건 더 공정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응징해야 할 제국주의의 폭압을 향한 민족주의적 발로였다. 바로 이 때문에 이소룡은 오늘까지도 우리의 전설로 살아 있다.

 

[임대근 교수의 차이나 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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