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영원한 청년 의사 윤봉길⑫] “죽기위해 왔습니다”…김구와의 운명적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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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라 기자
입력 2018-08-20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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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해사변 발발… 혁명의 길로 들어서다

[출격명령을 받고 출동하는 상해파견군을 환영하는 상해 일본거류민들 (1932년 2월 18일)]


일제는 만보산사건의 간계로 중국침략을 노골화시킴으로써, 기어이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그해 11월경 만주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했다. 이어 상해에서 일본인 승려가 중국인으로부터 습격당한 것을 구실로 1932년 1월 28일 상해사변을 일으켰다. 이에 세계열강의 이목(耳目)이 상해로 집중되고, 연일 신문을 통해 중국인들의 항일 열기가 보도되었다. 상해에 머물며 독립운동에 헌신할 기회만 찾고 있던 매헌은 크게 고무되었다. 이에 매헌은 혁명의 시기가 도래(到來)했다고 판단, 도미유학 계획을 포기하고 혁명의 길로 나아갈 준비를 했다.

혁명 의지 담은 2통의 편지
마침내 혁명을 결심한 매헌은 2월 중하순경, 두 통의 편지를 고향으로 보냈다. 친동생 남의에게 “상해사변이 확전될 것 같다. 이대로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지 않겠다.”, 사촌형 순의에게 “상해사변에 해군 육전대 아이다(愛田)가 전승했다지만 실패로 성공했고, 이번에는 시라가와라는 놈이 나온다는데 가소롭다. 한낱 개미 같은 그자가 무엇으로 성공할 것인지 두고 보오.” 구체적인 혁명의지를 담아 보냄으로써, 매헌 스스로 혁명의 확고한 의지를 다지는 계기로 삼았다.
남의에게 온 편지를 본 어머니 김원상 여사는 매헌에게 “집은 걱정마라. 너의 길을 가라”는 뜻을 담아 회신했다. 자식의 ‘죽음의 길’을 만류치 않은 김원상 여사.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있듯이, 매헌의 의기와 기개가 누구로부터 물려받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윤의사가 근무했던 중국종품공사가 자리했던 북영길리 표지판. 공장 직공들과 친목회를 조직하고 생산성을 높이는데 기여했으나 공장주는 오히려 임금을 삭감하려 들었다. 윤의사가 중심이 되어 반대운동을 폈으며 이로 인해 해고당했다.]

매헌, 선구적 노동가로 두각 발휘
그 무렵 중국종품공사에 다니던 매헌은 ‘한인공우친목회’ 회장으로서, 공우회비를 걷어 신문․잡지 등을 구독시키는 등 노동자들의 상식 함양과 협동정신 고취에 몰두해왔다. 그런데 공장을 운영하던 교포사업가 박진과 중국인 두 사업주의 의견 충돌로 며칠씩 휴업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일당을 벌어서 먹고 사는 직공들은 큰 타격이었다.
그때마다 그들은 시국 관계로 원료가 들어오지 않아서 휴업할 수밖에 없다는 핑계를 댔다. 매헌이 나서서 조사해보니 그들의 말이 모두 거짓임이 드러났다. 이에 매헌은 공우회장 자격으로 사업주에게 사실을 확인시킨 후, ‘두 주인의 싸움으로 휴업할 경우 하루 평균 임금을 지급할 것, 견습생이 직공으로 숙련될 때까지 적당한 돈을 빌려주어 생활을 보장할 것’이란 두 가지 요구를 관철시켰다.
한편, 매헌이 공우회를 조직한 이후, 근로자 1인당 1일 모자 생산량이 3.5개에서 5개로 대폭 증가했다. 그러나 임금은 오르지 않았다. 이에 항의하자 사업주는 모자 판매가격이 45전에서 35전으로 내렸기 때문에 임금 동결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이 또한 거짓으로, 매헌이 알아보니 평소 가격보다 오히려 비싸게 팔았다.
매헌은 사업주 중의 한 명인 박진에게 이에 대해 시정(是正)을 호소했으나, 一言之下(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매헌은 ‘공임 원상 복구’, ‘작업 환경 개선’ 등을 구호로 내걸고 동료 정안립(鄭安立), 서상석(徐相錫, 일명 서주사)등과 함께 파업을 주도했다.
당시 매헌은 이미 혁명할 결심을 굳혔기에, 퇴사 전 한인 노동자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파업을 결행했던 것이다. 공장 측에서는 노동자들을 선동하였다는 이유로 매헌을 해고했다. 매헌의 큰 뜻을 모르는 노동자들은 크게 분노하며 들고 일어났다.
“우리들을 보살펴온 공우회장 윤봉길을 복직시켜라.” 점점 격렬해지는 파업의 불길은 상해 교민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상해한인반제동맹(上海韓人反帝同盟)’은 중국종품공사 파업 노동자들을 지원한다면서, 1932년 3월 12일 “조선노동자를 착취하는 냉혈동물 박진을 매장하라! 그리고 흡혈귀 박진과 한몸이 되어 파업 노동자들을 박해하는 교민단을 박멸하라!”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상해한인반제동맹’은 교민단과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던 공산주의자들이 만든 단체였다.
매헌은 공산주의자들이 자신과 관련된 파업사태를 이용, 교민단과 사업주 박진을 음해하는 것을 보고 파업을 중지시켰다. 한편, 파업사태를 주시하던 교민단 정무위원장 이유필과 임시정부 노동참판을 역임한 안창호의 중재로 파업은 원만히 해결되었다.
사업주들은 매헌의 해고를 기정사실화하는 조건으로, 매헌이 요구한 ‘공임 원상 환원, 작업 환경 개선 수용’을 약속했다. 이미 혁명을 결심한 매헌에게 있어 복직은 의미가 없었기에 그들의 조건을 수용했다.

 

[윤의사가 밀가루와 채소장사를 했던 홍구 북사천로 채소시장. ]

혁명의 길로 나아갈 준비
혁명에 뜻을 굳힌 매헌은 일본군의 동정을 살피는 것에 주력했다. 이를 위해 전차검표원 계춘건(桂春建) 집에서 기거하면서 그와 함께 매일 오후에 공동조계의 홍구시장에 나가 장사를 시작했다. 공동조계 통주로(通州路)에서 신공양행(信恭洋行)을 운영하는 한인 이씨에게서 밀가루와 채소를 도매로 받아, 소매로 판매했다. 홍구는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일본영사관이 있어 일본군 동정과 정보를 파악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그 무렵 매헌은 중국종품공사에 같이 근무했던 최흥식(崔興植)과 친구 유진만(兪進萬)과 자주 만나서 정보도 공유하며 동지애를 쌓았다. 당시 유진만은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처단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 날 매헌은 유진만의 집에서 그로부터 ‘이봉창 의사에게 폭탄을 마련해준 사람이 김구’라는 뜻밖의 말을 들었다. 임정에 대해 크게 실망한 매헌의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였다. 이로 인해 매헌은 김구 선생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다.
유진만은 3월 거사 동반자인 이덕주(李德柱)가 국내로 잠입 도중, 황해도 집에서 체포되는 바람에 4월초 상해에서 체포되어 거사치 못했다. 한편, 3월경 모자공장을 퇴사한 최흥식도 혁명의 길로 나아갔다.
최흥식은 국제연맹 리튼 조사단이 5월 26일 만주 현지를 방문한다는 정보를 얻고 거사를 준비했다. 리튼 조사단을 맞이할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本庄繁), 남만주철도 총재 우치다 고사이(內田康哉), 관동청 장관 야마오카 만노스케(山岡萬之助) 등 만주의 일본 수뇌부를 폭살한다는 계획 아래 3월 28일 대련으로 갔다. 그러나 대련에서 정보 수집 중 거사 이틀 전인 5월 24일 체포되고 말았다.
상해의거가 있던 1932년 4월, 매헌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야채상을 하며 교민단장 이유필과 안공근을 비롯해 많은 지사들을 만나 정보를 얻는 한편, 일본군의 동향에 대해 면밀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프랑스 조계 노상에서 한인애국단 김구 단장을 만났다. 당시 김구는 임정 국무위원(재무장)도 겸하며, 중국종품공사에 가끔 들러 매헌을 비롯해 한인 직공들과 시국문제를 토론하곤 했었다. 이때 김구는 윤봉길의 거동과 강개한 담론을 보고 나서 앞으로 큰일을 할 수 있는 청년이라는 예감을 가지고 주시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매헌은 임정의 무력함에 실망했던 터라 김구와 특별한 교분은 없었다. 그렇지만 매헌은 ‘이봉창 의거’에 김구 선생이 깊이 관여했다는 유진만의 말을 듣곤 크게 고무된 적이 있어 김구 선생이 달리 보였다.

 

[윤 의사가 1931년 5월초 청도를 떠나 5월8일에 상해에 도착했을 당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뜻밖의 낭보, 김구를 찾아가다
그렇게 며칠을 보낸 매헌은 4월 24일 일본 교민신문인 <일일신문(日日新聞)>에 실린 기사를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천황 탄생일인 천장절(天長節)과 상해사변 승리를 축하하는 기념식을 개최’한다는 기사였다.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천장절 축하식을 거행한다. 그날 식장에는 물병 하나와 점심으로 도시락, 일본 국기 하나씩을 가지고 참석하라.”
그 즉시 매헌은 김구를 찾아가서, “조국 독립을 위하여 마음속에 폭탄을 지니고 집을 떠나왔습니다. 저는 이미 결정했습니다. 죽음도 불사(不辭)하겠다”는 거사의 뜻을 밝히고 폭탄을 준비해 줄 것을 부탁했다. 김구는 “쉽지 않은 일이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오”라며 머뭇거렸다. 김구로서는 ‘전도(前途)가 창창한 청년을 사지(死地)로 내몰 수는 없는 일’이란 생각이 앞섰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간절히 요청하는, 청년 매헌의 논리 정연한 설득과 비장함에 타오르는 눈빛을 본 김구는 그의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윤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
사진=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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