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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스페셜-영원한 청년 의사 윤봉길③] "식민지 노예교육 거부" 학교 박차고나온 12세 소년

남보라 기자입력 : 2018-08-02 15:26수정 : 2018-08-06 13:38
번지는 3·1운동 불길… 항일 민족의식에 눈뜨다

[일제 식민지 교육 현장 ]


항일 민족의식이 싹트다
매헌이 큰아버지에게 한문공부에 정진하고 있을 무렵, 1918년 주변 열강의 각축 속에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고 14개 평화원칙을 발표했다. 신사조(新思潮)에 따른 신학문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지성인과 의식이 깨어 있는 사람들은 일본을 몰아내자면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한다’라는 생각에 신문과 잡지 등과 신학문을 통해 사고(思考)와 외연(外延)을 넓혀 나갔다. 나라를 빼앗긴 이유가 바로 우리 백성들이 무지했기 때문이라는 인식을 뼈아픈 체험으로 깨달은 탓이다.
그 무렵 일제는 ‘조선교육령’이라는 것을 만들어 우리 민족의 황국신민화를 위해 식민지교육을 강요했다. 조선의 말과 글을 가르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야학과 서당을 말살시키려는 의도였다. 보통학교(초등학교) 취학을 제도화함으로써 우리 민족을 어린 시절부터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의도였다.

보통학교에 들어가다
1918년 봄 열한 살에 접어든 매헌은 마을에서 2km 정도에 있는 덕산공립보통학교(德山公立普通學校)에 입학할 수밖에 없었다. 입학 당시 매헌은 큰 건물에서 새로운 학문을 배울 수 있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들떠 있었다. 특히 한창 뛰어놀 나이이기에 새로운 친구들을 사귈 수 있다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입학을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매헌은 자신이 큰 착각을 했음을 깨달았다. 새 학교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이 날이 갈수록 실망과 반감으로 변해 갔다. 군복과 비슷한 제복을 입고, 허리엔 긴 칼을 착용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본 교사들을 볼 때마다 매헌은 어린 나이임에도 의구심을 가졌다. 또한 일본어를 상용화하고, 어른들로부터 익히 들어온 우리 역사마저 왜곡시킬 땐 매헌의 가슴에 분노와 반항심이 쌓여 갔다.

 

[고종황제의 승하를 애도하는 국민들]

3․1운동의 불길과 보통학교 자퇴
1919년 1월 22일, 느닷없이 고종 황제가 승하하셨다. 일제가 식혜에 독약을 타서 독살했다는 소문에 나라 전체가 큰 슬픔과 분노에 휩싸였다. 마침내 일제의 압박에 고통 받던 백성들의 울분(鬱憤)이 폭발하고 말았다. 고종 황제 장례 이틀 전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현재 탑골공원)을 기점으로 3․1운동의 불길이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매헌이 살고 있는 덕산 마을에도 만세운동의 불길이 번져 왔다. 이웃마을 대치리 출신 최정구가 앞장서 만세운동의 불꽃을 지폈다. 어린 매헌이 보기에도 마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어른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으나 시원하게 대답해 주지 않았다. 어머니 김씨부인만은 예외였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자는 3․1만세운동의 뜻과 그 배경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그해 4월 초순의 어느 날, 학교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수업 중 옆구리에 긴 칼을 찬 와타나베 교장이 교실로 들어오더니 하교를 지시했다. 장터에 사상이 불온한 자들이 숨어 들어와 만세를 부를 기미가 보이니 곧바로 집으로 돌아라가는 것이었다. 매헌은 이미 어머니로부터 우리 상황을 들은 터라 몇몇 아이들과 장터로 향했다. 장터 근처에 이르니 왁자지껄 소란 속에 만세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만세소리는 그치고 일본 헌병들에게 심한 구타 속에 끌려 주재소로 가는 사람들의 모습만 볼 수 있었다.
나이가 어려 만세운동에 직접 가담할 수 없는 매헌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더 이상 학교에 가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매헌은 부모님께 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했다. 김씨부인의 생각도 같았다. 그런 아들의 모습이 기특하고 장하기만 하였다. 결국 매헌은 일제 식민지교육에 반기를 들고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후 매헌은 마을의 최병대(崔秉大) 선생에게 잠시 한학을 배웠다.
 

[매곡 성주록 선생(왼쪽)과 충남 예산 덕산면 둔리에 위치한 오치서숙 자리. ]


학문적 깊이와 인격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오치서숙
1921년 14세 때 매헌은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 선생이 운영하는 서당 오치서숙에 들어갔다. 성주록 선생은 한문학의 대가(大家)로 학식이 깊고, 꼿꼿하고 의롭기로 그 명성이 자자했다. 더욱이 호방한 성격에 문하생들에게 말 타는 기술까지 가르쳐 문무(文武)의 조화를 갖춘 선생이었다.
매헌은 <대학>을 시작으로 유교 경전의 핵심인 <사서삼경>을 하나하나 독파했다. 실력과 기상을 고루 갖춘 매헌에 대한 매곡 선생의 사랑은 각별했다. 나이가 위인 여러 동접들을 제치고 매헌을 학급의 장인 접장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성주록 선생은 수업 틈틈이 제자들에게 여러 위인들을 소개해 애국심을 고취시키며 올바른 인격형성을 도모했다.
매헌의 민족의식은 보통학교를 자퇴함으로 싹을 틔우고, 그 성장을 위한 영양분은 성주록 선생의 훈도 덕분이었다. 시대 조류에 밝은 선생의 영향으로, 당시 매헌의 지적 욕구는 상상을 불허했다. 국내외 정세와 동향을 신문이나 신간 잡지를 통해 섭렵하는 한편 성경 등 신학문에도 몰두했다.

결혼
매헌은 이웃 삽교면 신리 뒷내마을에 사는 성주 배씨 성선(裵聖先)과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에 장녀로 출생한 배용순(用順)과 1922년 3월 20일 결혼을 했다. 매헌보다 한 살 위인 배씨 부인은 농사를 짓는 평범한 규수였으나, 집안을 화목케 하며 부덕(婦德)을 갖춘 전형적인 아내이며 어머니였다.
매헌은 결혼으로 인해 또 다른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독실한 동학교도이자 실학자였던 장인으로부터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접해 사상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뛰어난 학문과 문재(文才)로 명성 날려
1922년 가을, 중추절을 맞아 수암산 기슭 두엄바위에서 낙운성시(落韻成詩) 시회가 열렸다. 명(明), 청(晴), 성(聲)이라는 운자가 내려지고 시제는 만추(晩秋)와 학행(學行)중 택일로 되어 있었다. 오치서숙의 동접뿐만 아니라 인근의 유생(儒生) 등 실력이 쟁쟁한 사람들이 참가한 시회에서 매헌은 ‘학행’이란 시로 장원을 차지했다. 시제 중 학행을 선택해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칠언절구 시는 실로 웅대한 표현과 기상이 돋보였다. 이후에도 매헌은 재향시절 300여 편의 한시를 남기며, 장원을 휩쓸어 일대에 이름을 떨치었다.
 

[윤봉길 '학행']


학행(學行)
불후성명 사기명(不朽聲名 士氣明) 길이 드리울 그 이름 선비의 기개 맑고
사기명명 만고청(士氣明明 萬古晴) 선비의 기개 맑고 맑아 만고에 빛나리
만고청심 도재학(萬古晴心 都在學) 만고에 빛나는 마음 학문에서 우러나며
도재학행 불후성(都在學行 不朽聲) 그 모두가 학행에 있어 그 이름 스러짐이 없으리.


1923년 16세 때, 매헌은 ‘일어속성독본’을 사다가 1년간 열심히 공부하여, 일본어로 능히 대화를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당시 매헌이 일어를 공부하자 마을 촌로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다. 하지만 어머니 김씨 부인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듯이 일어는 물론 일본 역사까지 공부하라고 매헌에게 적극 권장했다.
이것이 훗날 상해의거가 성공할 수 있는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거사 당일 입장권이 없던 매헌은 홍구공원 정문을 지키는 중국인 앞에서 유창한 일본말로 일본인 행세를 할 수 있었기에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어머니 김씨 부인의 선견지명은 매헌을 대한민국 역사에 한 획을 긋는 큰 인물로 만든 것이다. 

윤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
사진=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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